당장이라도 무슨 일이라도 칠 것 같던, 김진수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김진수에게 상당한 주의를 기울였던 것도 잠시, 난 평소처럼 공부에 빠져들었다. 휴학을 하면서, 다가오는 사시 일차에 무조건 붙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서너달 남은 시험에 마음이 급했다. 차근차근 계획을 짜고 접근해야 하지만, 마음이 급해서, 되는대로 시간이 허락하는 한은 쭉 공부에 열중했다. 집밖을 거의 나가지 않아서, 가끔 승현이나 화영이가 집근처로 찾아와서 식사를 하는 것을 제외하면 그냥 방안에 틀어박혀서 계속해서 문제집을 풀고, 개념서를 읽었다.
언제 시간이 지나는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매일매일이 충실했고, 배가 고프면 먹고, 잠이 오면 자고, 그 이외의 시간에는 계속해서 공부를 하는 일상이 계속되었다. 탄력이 붙어서, 어지간한 시끄러운 소리 같은 것을 듣지 못할 정도였다. 미진이 때문에 휴학을 했지만, 휴학을 한 것이 전혀 후회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틀에 한 번 정도 내가 하거나, 엄마가 하거나 집과 연락을 했는데, 엄마는 일이 많아져서 힘드시다면서, 이진명을 당장이라도 뽑고 싶다는 말을 하셨고, 이진명 역시 그냥 집에서 쉬는 것보다는 일을 하는 것을 원해서, 난 내가 내려가지는 않고, 일단 이진명을 보내서 이진명은 이미 김천 집에 내려가서 일을 배우고 있었다.
방을 거의 벗어나지 않고, 끼니 역시 승환이가 보내준 빵으로 대신하면서 살고 있었다. 가끔씩 오던 전화도 내 쪽에서 움직이질 않으니, 차츰 뜸해져서, 이젠 하루에 두어번도 울리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고, 평소때처럼 새벽에 일어나서 배를 긁으면서 책을 읽고 있었다. 아침이 된 것은 알고 있었는데,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서 그냥 책을 읽고 있는데, 아침부터 누가 인터폰을 해서, 누군가 싶어서 전화를 받았더니, 승환이였다.
"형, 나야. 문 좀."
"어. 잠깐만."
인터폰으로 문을 열어주고, 잠시 기다리니까,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고, 들어오라 하자, 문을 열고 승환이가 포장된 라면박스 정도 크기의 상자를 들고 들어오더니, 내 꼴을 보고는 한심해했다.
"형, 이게 뭐야. 좀 치우고 살아."
"요즘 거의 나가질 않아서, 하루종일 공부만 하거든. 넌 출근은?"
"잊어버린 거야? 형, 오늘 김천집에 가기로 했잖아."
"벌써 그렇게 됐나. 가자. 뭐 어려울 게 있어. 잠깐만 씻고."
난 몸의 털이 잘 나지 않는 스타일이다. 수염도 거의 깎지 않는 편인데, 일주일을 넘게 전혀 깎지 않았더니, 제법 길게 자라있었다. 일회용 면도기를 찾았는데, 오래 되어서 그런지 날에 녹이 슬어 있었다. 이걸로 깎았다가는 파상풍에 걸릴 것 같아, 난 화장실 문을 열고, 승환이에게 면도기를 하나 사다달라 부탁을 하고는 샤워를 시작했다.
다리가 불편한 승환이였지만, 승환이는 자신의 장애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종종 심부름을 시키는 나를 좋아한다. 편의점은 멀지 않았고, 승환이가 좋아하는 것을 알아서 심부름을 시키고는 샤워를 하면서, 거울에 내 몸을 비췄다. 먹은 게 별로 없어서 배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조금은 살이 붙은 것 같았다. 승환이가 사온 일회용 면도기로 면도를 마치고, 수건으로 몸을 닦으면서 나왔더니, 승환이가 내가 읽고 있던 책을 읽고 있었다.
"형, 이거 다 알고 읽고 있는 거지?"
"대강은."
"대단하다. 난 한자가 너무 많아서 읽지도 못하겠다."
"법률용어가 한자가 많아도, 늘 쓰는 것만 써서 한 두어달만 공부를 해도 읽는 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진짜?"
"그래. 공부는 하다보면 누구나 하는 거야. 빵만드는 거야. 손맛이라는 게 있어서 똑같이 만들 수가 없는 거지만."
"하긴, 그래. 체온이 높은 사람이 빵 반죽을 하는 게 숙성도 그렇고, 맛도 더 좋거든. 그래서 제빵사들은 단 걸 많이 먹어서 살찌는 사람도 많지만, 일부러 살을 찌우기도 해."
"그래? 그건 처음 듣는 소리네. 너도 그래서 덩치를 키우는 거냐?"
"아니. 난 단 게 좋아서 그렇고. 형, 뭐라도 좀 입어라.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 덜렁거리는 거 보고 싶겠냐?"
"원래 씻는 것보다 말리는 게 중요한 거야. 습진 같은 게 다 습기 때문에 생기는 거거든. 저건 뭐냐?"
"아아. 내가 이것저것 좀 만들었어. 오래 두고 드시라고."
"내 핸드폰으로 철도 예매 좀 해라. 거기 코레일톡이라고 깔려 있어."
"아니, 화영이 누나 오기로 했는데. 같이 내려간다고. 승현이 누나랑."
"그래? 언제 오기로 했는데?"
"오고 있을 걸. 아까 통화했거든."
아니나다를까 인터폰이 울렸고, 난 옷을 입고, 승환이가 인터폰으로 문을 열어줬다.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는데, 깔끔한 정장을 입은, 승현이와 화영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승현이는 오자마자 이런저런 책이 널려있는 내 책상을 살폈고, 알람 시계를 보다가 시계가 꺼져 있는 것을 의아해 했다.
"시계가 왜 먹통이에요?"
"아, 그제쯤 건전지가 떨어졌는데, 사러가기 귀찮아서. 넌 왜 정장이냐. 어디 선보러 가는 것도 아니고."
승현이가 약간 당황했고, 화영이가 다가와서 반팔티만 입고 있는 내 등짝을 사정없이 때렸다.
"선배. 왜 그러는 거에요. 당연하잖아. 선배 부모님 처음 뵙는 거잖아. 신경을 당연히 쓰는 거지."
"아침들은 먹었냐?"
"이런 옷 입으면 먹기가 되게 불편하거든."
"됐어. 가다가 뭐 좀 먹고 가자. 나도 어제부터 승환이가 준 빵만 먹어서 배 되게 고프거든. 나가자."
"이러고 가겠다는 거에요? 추리닝 바람에?"
"우리집 가는 건데 뭐. 가자."
금강휴게소에 들러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차에 올라서 다시 고속도로를 타는 동안, 난 혹시나 김진수가 무슨 짓을 벌이지는 않았냐는 것을 물었다. 승현이도, 화영이도 별다른 것을 느끼지는 못하는 듯했다. 화영이는 승환이가 병원을 잘 다니는 지를 궁금해했고, 승환이는 잘 다니고 있다면서도 무언가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난 그 초조함의 정체를 곧바로 알았고, 그동안 미뤄뒀던 질문을 기어코 꺼내고야 말았다.
"강화영, 너 우리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 거냐?"
"네?"
"지금 우리가 이렇게 내려가는 거, 반절 정도는 그 사람 때문이잖아."
"형. 지금 그 이야기는 왜?"
"아니, 이야기를 해야지. 몰랐다면 모를까. 이제는 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 지 아는데, 일단 화영이 마음을 알아야지. 화영아, 저기 좀 세워 봐."
고속도로의 졸음쉼터를 발견한 난 그 쪽으로 유도했고, 화영이는 차를 그 쪽으로 몰아놓고는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누구보다 냉정하지만 명확한 승현이가 조수석에 앉아 있다가 벨트를 풀고는 운전석의 화영이를 끌어안았다.
"이것 저것, 생각을 좀 해봤는데, 방법이 많지가 않아."
"네?"
"복수라는 거 말이야. 일단 네가 안전해야 하잖아. 그 사람 어떤 사람인지 아는데, 지금 네가 이렇게 잘 되어 있는 걸 알면, 어떻게서든 괴롭힐거야. 그러니까 네가 노출이 되면 안 돼. 법적이거나 사회적인 방법을 쓸 수 없다는 이야기지."
"그래서, 그 사람을 그냥 놔두자구요?"
"화영이 생각을 알아야지. 오늘은 가서 멀리서 보고 오자. 그냥 모른 척 사는 게 나을지, 아니면, 복수를 할지."
"그게 뭐에요. 선배."
"누구를 위해서 복수를 하는 건데. 큰 상처는 쉽게 건드리는 게 아니야. 확실히 나을 것 같으면, 수술이라도 해야겠지만, 세상엔 낫지 못하는 병들이 있어. 그런 병은 그냥 달래가며 사는 거야."
"승현이 누나. 형 말이 맞아. 진짜야. 내가 누구보다 잘 알아. 나도 무서웠거든."
"너도?"
"지금이야 물론 내가 이기겠지만, 이겨서 뭐 하게. 그냥 보지 않고 살 수 있으면, 그렇게 살고 싶어. 난."
화영이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곤 3-4분 정도 있다가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모두가 말을 하지 못한 채로 그대로 차에 앉아있었다. 신승훈의 cd가 돌아가고 있었다. 오랜 이별 뒤에를 흥얼거리고 있는데, 화영이가 cd를 멈추더니, 지나가는 것처럼 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선배. 선배 말이 맞는 것 같긴 한데요. 역시 난 안 되겠어요. 난 길게 살 생각이 없거든요. 나는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모르겠어요. 아니, 왜 살아왔는지도 잘 몰라요. 그냥 살았어요. 밤마다 꿈을 꾸거든요. 그 인간이 내 위에서 헉헉대는 꿈이요. 그 때는 그게 무슨 일인지 잘 몰라서. 부끄럽거나 싫거나 하지도 않았어요. 그냥 아프다 그만하지 그 생각만 했죠. 크면서 알게 됐죠. 그게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그 때부터 내내 난 이유도 없이 내 인생이 죄스러웠어요. 그러면서도 지금 엄마 아빠 때문에 살아왔어요.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어요. 그러니까, 내 앞날을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강화영. 그게 무슨 소리야."
"알았다. 네 말이 맞아. 누구도 네가 될 수는 없으니까. 네 마음을 너보다 잘 아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냐."
"선배!"
"남승현. 잠시만. 생각할 게 많아. 잠깐만."
그런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미래를 꿈꿔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세상엔 과거를 곱씹으면서, 끔찍한 기억을 털어내지 못한 채, 그냥저냥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전체적으로 무거운 분위기였다. 화영이의 그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기억을 털어내지 못한다면, 완벽한 계획으로 한 인간을 무너뜨리고 싶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것 같은 끔찍한 기억을 주고 싶었다. 그 때,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네. 이경민씹니까?"
"네. 그렇습니다. 누구시죠?"
"대전 유성경찰서 최무혁 경정입니다. 정미진씨를 아십니까?"
"네."
"정미진씨가 어제 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참고인 조사를 부탁드리고 싶은데, 어디신지요?"
"지금 고향집을 내려가고 있습니다."
"갑자기요?"
경찰의 목소리는 의혹으로 가득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일이 있는 것 같았고, 난 순간적으로 김진수의 얼굴을 떠올렸다.
언제 시간이 지나는 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매일매일이 충실했고, 배가 고프면 먹고, 잠이 오면 자고, 그 이외의 시간에는 계속해서 공부를 하는 일상이 계속되었다. 탄력이 붙어서, 어지간한 시끄러운 소리 같은 것을 듣지 못할 정도였다. 미진이 때문에 휴학을 했지만, 휴학을 한 것이 전혀 후회되지 않을 정도였다. 이틀에 한 번 정도 내가 하거나, 엄마가 하거나 집과 연락을 했는데, 엄마는 일이 많아져서 힘드시다면서, 이진명을 당장이라도 뽑고 싶다는 말을 하셨고, 이진명 역시 그냥 집에서 쉬는 것보다는 일을 하는 것을 원해서, 난 내가 내려가지는 않고, 일단 이진명을 보내서 이진명은 이미 김천 집에 내려가서 일을 배우고 있었다.
방을 거의 벗어나지 않고, 끼니 역시 승환이가 보내준 빵으로 대신하면서 살고 있었다. 가끔씩 오던 전화도 내 쪽에서 움직이질 않으니, 차츰 뜸해져서, 이젠 하루에 두어번도 울리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고, 평소때처럼 새벽에 일어나서 배를 긁으면서 책을 읽고 있었다. 아침이 된 것은 알고 있었는데,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서 그냥 책을 읽고 있는데, 아침부터 누가 인터폰을 해서, 누군가 싶어서 전화를 받았더니, 승환이였다.
"형, 나야. 문 좀."
"어. 잠깐만."
인터폰으로 문을 열어주고, 잠시 기다리니까,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고, 들어오라 하자, 문을 열고 승환이가 포장된 라면박스 정도 크기의 상자를 들고 들어오더니, 내 꼴을 보고는 한심해했다.
"형, 이게 뭐야. 좀 치우고 살아."
"요즘 거의 나가질 않아서, 하루종일 공부만 하거든. 넌 출근은?"
"잊어버린 거야? 형, 오늘 김천집에 가기로 했잖아."
"벌써 그렇게 됐나. 가자. 뭐 어려울 게 있어. 잠깐만 씻고."
난 몸의 털이 잘 나지 않는 스타일이다. 수염도 거의 깎지 않는 편인데, 일주일을 넘게 전혀 깎지 않았더니, 제법 길게 자라있었다. 일회용 면도기를 찾았는데, 오래 되어서 그런지 날에 녹이 슬어 있었다. 이걸로 깎았다가는 파상풍에 걸릴 것 같아, 난 화장실 문을 열고, 승환이에게 면도기를 하나 사다달라 부탁을 하고는 샤워를 시작했다.
다리가 불편한 승환이였지만, 승환이는 자신의 장애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종종 심부름을 시키는 나를 좋아한다. 편의점은 멀지 않았고, 승환이가 좋아하는 것을 알아서 심부름을 시키고는 샤워를 하면서, 거울에 내 몸을 비췄다. 먹은 게 별로 없어서 배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조금은 살이 붙은 것 같았다. 승환이가 사온 일회용 면도기로 면도를 마치고, 수건으로 몸을 닦으면서 나왔더니, 승환이가 내가 읽고 있던 책을 읽고 있었다.
"형, 이거 다 알고 읽고 있는 거지?"
"대강은."
"대단하다. 난 한자가 너무 많아서 읽지도 못하겠다."
"법률용어가 한자가 많아도, 늘 쓰는 것만 써서 한 두어달만 공부를 해도 읽는 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진짜?"
"그래. 공부는 하다보면 누구나 하는 거야. 빵만드는 거야. 손맛이라는 게 있어서 똑같이 만들 수가 없는 거지만."
"하긴, 그래. 체온이 높은 사람이 빵 반죽을 하는 게 숙성도 그렇고, 맛도 더 좋거든. 그래서 제빵사들은 단 걸 많이 먹어서 살찌는 사람도 많지만, 일부러 살을 찌우기도 해."
"그래? 그건 처음 듣는 소리네. 너도 그래서 덩치를 키우는 거냐?"
"아니. 난 단 게 좋아서 그렇고. 형, 뭐라도 좀 입어라. 아무리 나라도 그렇게 덜렁거리는 거 보고 싶겠냐?"
"원래 씻는 것보다 말리는 게 중요한 거야. 습진 같은 게 다 습기 때문에 생기는 거거든. 저건 뭐냐?"
"아아. 내가 이것저것 좀 만들었어. 오래 두고 드시라고."
"내 핸드폰으로 철도 예매 좀 해라. 거기 코레일톡이라고 깔려 있어."
"아니, 화영이 누나 오기로 했는데. 같이 내려간다고. 승현이 누나랑."
"그래? 언제 오기로 했는데?"
"오고 있을 걸. 아까 통화했거든."
아니나다를까 인터폰이 울렸고, 난 옷을 입고, 승환이가 인터폰으로 문을 열어줬다.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는데, 깔끔한 정장을 입은, 승현이와 화영이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승현이는 오자마자 이런저런 책이 널려있는 내 책상을 살폈고, 알람 시계를 보다가 시계가 꺼져 있는 것을 의아해 했다.
"시계가 왜 먹통이에요?"
"아, 그제쯤 건전지가 떨어졌는데, 사러가기 귀찮아서. 넌 왜 정장이냐. 어디 선보러 가는 것도 아니고."
승현이가 약간 당황했고, 화영이가 다가와서 반팔티만 입고 있는 내 등짝을 사정없이 때렸다.
"선배. 왜 그러는 거에요. 당연하잖아. 선배 부모님 처음 뵙는 거잖아. 신경을 당연히 쓰는 거지."
"아침들은 먹었냐?"
"이런 옷 입으면 먹기가 되게 불편하거든."
"됐어. 가다가 뭐 좀 먹고 가자. 나도 어제부터 승환이가 준 빵만 먹어서 배 되게 고프거든. 나가자."
"이러고 가겠다는 거에요? 추리닝 바람에?"
"우리집 가는 건데 뭐. 가자."
금강휴게소에 들러서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차에 올라서 다시 고속도로를 타는 동안, 난 혹시나 김진수가 무슨 짓을 벌이지는 않았냐는 것을 물었다. 승현이도, 화영이도 별다른 것을 느끼지는 못하는 듯했다. 화영이는 승환이가 병원을 잘 다니는 지를 궁금해했고, 승환이는 잘 다니고 있다면서도 무언가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난 그 초조함의 정체를 곧바로 알았고, 그동안 미뤄뒀던 질문을 기어코 꺼내고야 말았다.
"강화영, 너 우리가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 거냐?"
"네?"
"지금 우리가 이렇게 내려가는 거, 반절 정도는 그 사람 때문이잖아."
"형. 지금 그 이야기는 왜?"
"아니, 이야기를 해야지. 몰랐다면 모를까. 이제는 그 사람이 어떻게 살고 있는 지 아는데, 일단 화영이 마음을 알아야지. 화영아, 저기 좀 세워 봐."
고속도로의 졸음쉼터를 발견한 난 그 쪽으로 유도했고, 화영이는 차를 그 쪽으로 몰아놓고는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누구보다 냉정하지만 명확한 승현이가 조수석에 앉아 있다가 벨트를 풀고는 운전석의 화영이를 끌어안았다.
"이것 저것, 생각을 좀 해봤는데, 방법이 많지가 않아."
"네?"
"복수라는 거 말이야. 일단 네가 안전해야 하잖아. 그 사람 어떤 사람인지 아는데, 지금 네가 이렇게 잘 되어 있는 걸 알면, 어떻게서든 괴롭힐거야. 그러니까 네가 노출이 되면 안 돼. 법적이거나 사회적인 방법을 쓸 수 없다는 이야기지."
"그래서, 그 사람을 그냥 놔두자구요?"
"화영이 생각을 알아야지. 오늘은 가서 멀리서 보고 오자. 그냥 모른 척 사는 게 나을지, 아니면, 복수를 할지."
"그게 뭐에요. 선배."
"누구를 위해서 복수를 하는 건데. 큰 상처는 쉽게 건드리는 게 아니야. 확실히 나을 것 같으면, 수술이라도 해야겠지만, 세상엔 낫지 못하는 병들이 있어. 그런 병은 그냥 달래가며 사는 거야."
"승현이 누나. 형 말이 맞아. 진짜야. 내가 누구보다 잘 알아. 나도 무서웠거든."
"너도?"
"지금이야 물론 내가 이기겠지만, 이겨서 뭐 하게. 그냥 보지 않고 살 수 있으면, 그렇게 살고 싶어. 난."
화영이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곤 3-4분 정도 있다가 다시 차를 출발시켰다. 모두가 말을 하지 못한 채로 그대로 차에 앉아있었다. 신승훈의 cd가 돌아가고 있었다. 오랜 이별 뒤에를 흥얼거리고 있는데, 화영이가 cd를 멈추더니, 지나가는 것처럼 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선배. 선배 말이 맞는 것 같긴 한데요. 역시 난 안 되겠어요. 난 길게 살 생각이 없거든요. 나는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잘 모르겠어요. 아니, 왜 살아왔는지도 잘 몰라요. 그냥 살았어요. 밤마다 꿈을 꾸거든요. 그 인간이 내 위에서 헉헉대는 꿈이요. 그 때는 그게 무슨 일인지 잘 몰라서. 부끄럽거나 싫거나 하지도 않았어요. 그냥 아프다 그만하지 그 생각만 했죠. 크면서 알게 됐죠. 그게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그 때부터 내내 난 이유도 없이 내 인생이 죄스러웠어요. 그러면서도 지금 엄마 아빠 때문에 살아왔어요.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어요. 그러니까, 내 앞날을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강화영. 그게 무슨 소리야."
"알았다. 네 말이 맞아. 누구도 네가 될 수는 없으니까. 네 마음을 너보다 잘 아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냐."
"선배!"
"남승현. 잠시만. 생각할 게 많아. 잠깐만."
그런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미래를 꿈꿔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세상엔 과거를 곱씹으면서, 끔찍한 기억을 털어내지 못한 채, 그냥저냥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전체적으로 무거운 분위기였다. 화영이의 그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기억을 털어내지 못한다면, 완벽한 계획으로 한 인간을 무너뜨리고 싶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것 같은 끔찍한 기억을 주고 싶었다. 그 때,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네. 이경민씹니까?"
"네. 그렇습니다. 누구시죠?"
"대전 유성경찰서 최무혁 경정입니다. 정미진씨를 아십니까?"
"네."
"정미진씨가 어제 밤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참고인 조사를 부탁드리고 싶은데, 어디신지요?"
"지금 고향집을 내려가고 있습니다."
"갑자기요?"
경찰의 목소리는 의혹으로 가득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일이 있는 것 같았고, 난 순간적으로 김진수의 얼굴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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