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촌리 설화(金村里 說話) - 83
밤 9시가 넘어 경찰관 한명이 찾아왔다.
밖에서 누가 찾는 소리에 영미 누나가 먼저 나갔다가 경찰인 것을 알려 엄마와 나도 마루에 나왔다. 경찰이 아침에 찾아왔더라도 별로 반가운 일은 없을 터인데 농촌에서는 주민들의 반쯤이 잠자리에 들었을 시각이니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겁에 질린 채 경찰관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과연 경찰관이 전해준 말은 끔찍한 소식이었다. 아버지가 건설공사 현장에서 크게 다쳐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요?”
“우리도 상세한 내용은 모릅니다. 상부에서 문광석씨 가족에게 통보해주라고 지시가 와서 통보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애들 아범이 얼마나 다쳤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 대충은 알아야 ······ ?”
엄마의 목소리는 벌써 떨려 나오고 있었다.
“사고는 4일 전 경부고속도로의 대전 ~ 대구 구간의 추풍령 터널 보수공사를 하던 중 발파사고로 암반이 무너져 일어난 것입니다. 다음날 신문에도 크게 났는데 사망 7명, 중상 12명, 경상자도 수10명이나 되는 대형 사고였죠. 문광석씨도 중상자 명단에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와 이제사 연락을 ······ ?”
“글쎄요? 우리도 자세한 사정은 모릅니다. 조금 전 도경에서 지시가 와서 바로 통보하는 것인데 내 생각으로는 아마 신원확인이 잘 안되어 지연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신원확인이 안되다니 얼마나 심하게 다쳤길래 ······ 엄마나 함께 듣는 나도 불안은 더욱 커졌다.
“부상자는 모두 대구의 국군통합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으니 상세한 사정은 가족이 직접 가셔서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경찰관은 경례를 하고 곧 돌아갔다.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아버지가 4일 전에 크게 다쳐 대구의 국군통합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뿐이다.
사실을 제대로 알 수 없을 때 불안과 공포는 더욱 커진다. 여러 가지 상상도 날개를 달지만 부질없는 짓이다. 직접 가봐야 된다. 하지만 지금은 움치고 뛸 재주가 없다. 내일 첫차를 타고 병원에 가보는 수 밖에는.
엄마는 달비장사로 대구를 자주 드나들기에 교통편은 잘 알았다. 화도읍에는 올해 초부터 대구행 직행버스가 운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버스는 멀리 북쪽에서부터 여기저기 들려오는 것이라 화도에서는 아침 9시 40분에 출발한다고 한다. 엄마와 나는 그 버스에 몸을 실었다.
엄마는 처음 당신 혼자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이집의 유일한 아들이고 저쪽 상황을 전혀 모르니 혹 어디 연락이나 심부름을 하더라고 내가 같이 가는 것이 좋겠다는 주장을 엄마가 받아들였다.
버스는 읍소재지에다 웬만한 면까지 들려 지루했고 식구 많은 집 뒤주처럼 어느 정류장에서는 승객이 가득차고 또 어떤 곳에서는 많이 내려 거의 빈차처럼 가기도 했다.
엄마와 나는 가는 동안 거의 말을 나누지 않았다. 나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괜히 허튼 소리를 하면 부정을 탈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했다.
불쑥 이제 6학년에서 개근상 타기는 틀렸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자 “이런 못된 녀석.” 하며 나는 스스로를 욕했다.
“도대체 우찌 됐는지 몰라도 그저 살아있기만 해도 ······ ”
대구가 가까워 왔을 때 엄마가 처음으로 아버지에 대한 말을 꺼냈다. 그 말은 혼잣말 같기도 하지만 나 역시 버스 안에서 계속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부지가 사망자 명단에는 없잖아예. 중상자라니까 지금도 살아 계실 기고 ······ ”
나는 우선 엄마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내 말은 지금 얼마나 다쳤는지 몰라도 하여튼 목숨은 부지해야 한다는 기다.”
엄마는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어제 그 끔찍한 소식을 듣고 난 후에도 엄마가 울었는지는 모르지만 사고를 알게된 후 처음 보는 엄마의 눈물이었다. 그 후 엄마와 나는 대구에 도착할 때까지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다.
대구역 앞의 시외버스정류장에서 내린 우리는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동촌에 있는 국군통합병원으로 갔다.
군인병원이라 그런지 일반 병원과 달리 입구에서부터 헬멧을 쓴 위병이 지키고 있었고 출입절차도 까다로웠다.
“문광석씨 면회를 왔다.”고 하자 처음에는 “그런 사람이 환자 명단에 없다.”고 했다.
“추풍령 터널 보수공사 현장에서 사고를 당해 이쨔 입원했다고 우리 경찰서에서 연락을 받고 온기라예.”
엄마의 말에도 위병은 서류를 뒤적이며 “그런 사람 없다.”는 말만 되풀이 한다. 마침 그때 장교 계급장을 단 군인이 위병소에 들어와 엄마는 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야, 그 유케이 명단 체크해봐. 내 생각에는 유케이 3호 같은데 ······ ”
“아! 여기 있습니다. 문광석, 경상북도 화도군 금촌리 ······ 237호군요.”
“짜식들, 변동사항이 있으면 바로 이쪽에도 기재를 해야지.”
엄마와 나는 그렇게 복잡한 절차를 거치고 237호로 들어 갔다.
병실은 2인실이고 오른쪽 침대에 아버지가 보였다.
“왔나!”
얼굴이 마주치자 아버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웃으려는 것 같은데 말에 힘이 없듯 그 표정도 어색했다.
아버지는 이마 한쪽에 정사각형의 거즈가 반창고로 붙여있고 한쪽 눈가에는 시퍼렇게 멍든 것이 보였으며 입술도 터져 있었다. 왼손은 붕대로 칭칭 싸 맸고 오른팔에는 링거 주사바늘이 꽂혀 있다.
“어떻습니까?”
엄마가 다가가서 물었다.
“응. 그저 그렇지 뭐. 쬐매 아프기는 하지만, ······ 나도 어제 오후에 겨우 정신이 들었는 기라.”
목소리는 여전히 힘이 없지만 이번에는 진짜로 살짝 웃었다. 나는 일단 안도했다. 엄마와 버스에서 했던 말, 아버지는 분명히 살아 있었고 이렇게 말도 하고 웃기도 하는 것으로 보아 생명에도 이상이 없을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2인 병실의 또하나 환자, 왼쪽 침대로 눈길이 갔다. 그 환자는 언뜻 보기에도 너무나 처참했다.
머리는 칭칭 붕대로 싸 감았고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었다. 상의도 벗겨진 채 붕대가 어깨에서 팔까지 모두 감겨있다. 다리 하나는 기브스를 해서 공중에 매달려 있는데 뒤꿈치에는 쇠줄이 매달려 있고 그 밑에는 저울추 같은 것과 연결되어 있다. 기브스한 다리를 절대로 못 움직이게 하는 장치 같았다. 언뜻 보기에도 그 환자는 의식이 없어 보였다.
아버지처럼 링거를 맞고 있으며 가슴에 댄 것 같은 가는 줄 몇 개가 기계에 연결되어 있고 반짝거리는 것으로 볼 때 지금 환자의 상태를 기계가 계속 감시하는 것 같았다.
잠시후 남녀가 손수레와 스텐으로 된 쟁반 같은 것을 들고 들어왔다. 남녀는 모두 흰옷차림인데 남자는 상병, 여자는 중위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위생병과 간호장교였다.
간호장교는 우선 왼쪽 환자에게로 가서 링거 주사액을 새로 바꾸고 가슴과 줄로 연결된 기계를 살펴보았다. 이어 기브스를 한 채 매달려 있는 다리의 높이를 조정했다. 이불을 들추는데 보니 하반신은 벗겨진 채였다. 어른의 엄지손가락 정도로 쪼그라든 자지의 오줌구멍에는 가는 고무호스가 꼽혀 있었는데 간호장교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손으로 자지를 잡아 고무호스를 빼더니 탈지면으로 소독을 하고 다시 끼웠다. 그렇게 하는 동안 환자는 전혀 의식이 없었다.
간호장교는 이제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이마의 거즈를 떼자 피부가 벗겨져 빨간 속살이 보였다. 그곳에 무슨 약을 바르자 아버지는 약간 얼굴을 찡그렸는데 새 거즈로 갈아 부쳤다. 이어 터진 입술에도 약을 바르자 다시 얼굴을 찡그렸다.
간호장교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이불을 들추었다. 그러자 사과상자를 닮은 플라스틱 구조물이 드러났다. 아마 이불이 몸에 바로 닿지 않도록 그곳에 놓아둔 것 같았다. 그녀는 그 구조물을 들어냈다.
이런 ······ ! 아버지의 오른쪽 다리가 없었다. 무릎 아래로 5~6cm 쯤 되는 곳이 붕대로 감겨 있는데 그 밑은 그냥 허공이었다.
나는 경악했다. 힐긋 엄마 쪽을 보니 엄마 역시 다리가 있어야 할 자리의 빈 공간에 시선이 쏠려 있는데 창백한 얼굴에 입을 약간 벌리고 있지만 말은 없었다.
붕대를 풀자 절단 부위가 나타났다. 톱으로 썬 듯 반듯하게 잘린 그곳은 피가 엉켜 검붉은 색이지만 우족을 삶기 위해 잘라놓은 것 같은 정강이뼈와 그 주위에 붙은 살덩이들이 비참하게 드러나 있었다.
간호장교는 그 부위에 몇가지 약품을 바르고 다시 붕대로 감싼 뒤 엉덩이에 주사를 놓고 이불을 덮었다.
바로 옆의 의식불명인 환자와 비교가 되어서도 엄마와 나는 말도 하고 억지로 웃으려고도 하는 아버지를 보며 조금전까지 안도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리 하나를 영원히 잃은 것이다.
엄마와 나는 아버지의 수술을 집도했다는 의사, 아니 군의관을 따로 만났다. 그는 중령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오른쪽 정강이 쪽에 워낙 큰 바위가 굴러 떨어져 무릎 밑쪽이 거의 바스러져 절단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패혈증이나 염증의 전이 같은 것은 없어 4주쯤 상처만 아물면 퇴원도 가능합니다.”
“그 다음은 우찌 됩니까? 우찌 살아야 하는데요?”
엄마는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것 같았지만 표정은 차분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더 안쓰럽게 보였다. 아까 간호장교가 병실을 나설 때 엄마는 비켜주려 하면서 휘청거려 내가 얼른 팔을 잡아주기도 했다.
“물론 의족(義足)을 달아야죠. 우리나라는 6.25 전쟁도 겪고 해서 의수족 분야는 꽤 발달한 수준입니다. 환자가 의족에 잘 적응만 하면 뜀박질이야 못하겠지만 몇 달 후에는 지팡이 없이도 보행은 가능할 것입니다.”
엄마는 몇가지 더 질문을 했고 군의관은 비교적 친절하게 대답을 해주면서 환자가 퇴원한 후 가족들이 유의해야 할 점 등도 이야기 해주었다.
중상을 입고 입원했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병원에 올 때 엄마는 아버지가 살아있기만을, 앞으로도 죽을 위험만은 없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곳에 왔다.
이제 아버지의 병세와 앞으로의 전망을 대충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러면 우리는 ‘불행중 다행’ 이라며 콧노래라도 불러야 할까. 하지만 내 기분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커다란 상실감과 공허감이 내 가슴에 큰 구멍을 냈다. 아버지의 없어진 다리처럼 나의 상실감과 공허감도 메꾸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만약 아버지가 간이나 위의 일부 절제수술을 받았다면 나는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쾌유를 빌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다리가 사라진 그곳을 처음 보았고, 톱으로 썰어낸 그 정강이뼈의 절단 부분도 직접 보았다. 그 충격이 아버지에 대한 연민뿐 아니라 나에게도 슬픔과 상처로 자리잡고 있었다.
엄마는 겉으로 보기에 나보다는 침착하게 대처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처음에 충격이 너무 커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버지의 없어진 다리를 보고도 비명이나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군의관을 만나고 난 뒤 병실에 와서도 아버지와 없어진 다리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를 않았다. 엄마는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는 짐작을 할 수 있다. 엄마와 나는 미지의 불안과 공포에서부터 충격의 순간들까지 항상 함께였다. 내가 지금 이토록 슬픔과 상처를 느끼고 있는데 어찌 엄마가 나보다 가볍게 그 일을 받아 들일 수 있을까. 엄마는 단지 그것을 속으로 감추고 안간힘을 쓰며 버틸 뿐이다.
“우리 작업조가 6명인데 이번 사고에서 그중 3명이 죽은 기라. 태풍의 중심이라는 말도 있지만 우리 조가 그 자리에 있었던 기지. 저 옆의 박씨도 같은 우리 조다. 그런데도 나는 정신이 들어가 내 꼴을 알게되면서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만큼 낙담을 했었제. 그런데 마취에서 차츰 깨어나면서 아직 정신은 혼미한데 계속 떠오르는 게 당신하고 자식들 얼굴인 기라. 인명은 재천이라는 말도 있다만 그래도 살아있는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당신도 너무 상심하지 마라. 아이들도 걱정하지 않게 당신이 다독거려 주고 ······ 목숨이 붙어 있으마 어떻게든 살아가지 않겠나?”
엄마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경부고속도로는 박정희 대통령이 강력 추진했던 역점 사업의 하나로 1968년 착공해서 1970년 준공, 고속도로 부문에서는 세계에서 최단기간의 준공이라는 기록을 갖고 있지만 그만큼 부실공사도 많았고 그래서 끊임없이 보수공사도 이어졌다.
특히 대전~대구 구간은 전체 공사 구간중에도 가장 난공사 구역으로 건설 중에도 가장 사상자가 많이 난 구간이었다.
이번에 사고가 난 터널보수공사에서 직접 시공을 맡은 하도급업체는 인력관리 체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암반과 흙더미 속에 매몰된 인부들이 구조되었을 때 그중 한명인 아버지는 소지품이 어디엔가 묻혀버린 모양인데 그러자 회사에서도 신원을 규명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의식을 회복한 후에야 겨우 가족에게 연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얼마 후 병실의 스피커를 통해 안내방송이 흘러 나왔다.
“환자를 면회 온 분이나 방문객들은 10분 이내에 모두 병원 밖으로 나가주시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국군통합병원은 원래 보호자나 간병인들이 병원 안에서 자거나 면회시간을 넘겨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아무리 중환자라도 환자를 돌보는 업무는 군의관과 간호장교, 위생병들이 맡아 하면서 외부 사람이 머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아버지는 한달 쯤 후면 퇴원할테니 다시 올 필요는 없다고 했다. 엄마와 나는 작별인사를 하고 병원을 나섰다.
병원 앞의 시내버스 정류장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면회 왔던 사람들 뿐 아니라 근무시간을 마친 병원 종사자들의 퇴근도 맞물려있기 때문이다.
엄마와 나는 대구역전으로 가는 버스를 2대나 지나보낸 뒤 겨우 만원버스에 올라탈 수 있었다. 시외버스 정류장에 가보니 화도읍으로 가는 막차가 10분쯤 전에 떠나버렸다. 우리는 대구에서 하룻밤을 잘 수밖에 없었다.
그제서야 나는 배가 고프다는 것을 느꼈다. 엄마와 나는 점심도 굶은 채였다.
우리는 우선 저녁부터 먹어야 했다. 달비장사 때문에 대구를 자주 드나들었던 엄마는 대구의 지리를 잘 아는 것 같았다. 엄마가 데려간 식당은 국일옥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국밥이요? 따로요?”
물컵을 가져온 남자 종업원이 물었다.
“따로 둘 주이소.”
종업원이나 엄마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런데 잠시 후 나온 음식을 보니 밥과 국이 따로 나왔다. 국밥을 주문한 옆의 손님을 힐끗 보니 그곳에는 뚝배기 하나만 나와서 나는 따로라는 의미를 알았다.
저녁을 먹었으니 이제 숙소를 잡아야 했다.
엄마가 앞장 서 한 골목으로 접어 들었더니 무슨 여관과 여인숙이라고 쓰인 아크릴 간판이 10개도 넘게 즐비하게 걸려 있었다. 그런데 엄마와 몇걸음 떨어져 걷고 있는 나에게 한 중년여인이 말을 건다.
“학생, 쉬었다 가이소. 긴 밤도 되고 ······ ”
무슨 말인지 몰라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는데 나보다 어려 보이는 남자 애가 또 말을 건다.
“성님, 쉬었다 가이소. 참하고 어린 처자 있심더.”
나는 너무 이상해 걸음을 빨리해 엄마와 나란히 걸었다. 그런데 마주 오는 남자에게도 건너편의 중년 여인이 내가 들었던 말과 비슷한 말을 하는 것이다.
“손님, 쉬었다 가이소. 오늘 들어온 참한 색시 있어요.”
엄마는 여인숙이라는 간판이 있는 한 집에 들어갔다.
“방 하나 주이소.”
입구에 서 있던 중년여인이 나란히 서있는 엄마와 나를 훑어보더니 퉁명스레 물었다.
“같이 잘라고요?”
“예.”
“우리는 그런 방 없어요.”
엄마는 그 옆의 여인숙에 들어갔지만 또 같은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3명의 남자를 여인 둘이서 “예쁜 색시 있다,”느니 “싸게 해준다.”느니 하며 서로 끌고 가는 것을 보고 비로소 깨달은 것 같다.
나는 뒤에 안 것이지만 그 일대는 해방골목으로 불리는 창녀촌이었다.
엄마는 대구 지리를 잘 안다고 하지만 창녀촌을 찾을 일은 없었기에 이곳에 대해서는 어두웠던 모양이다.
“이쨔는 안되겠다.”
우리는 그 골목을 벗어나 한참을 걸었다. 그곳이 요전 대구에 왔을 때 김정호가 말한 중앙통인 것 같은데 밤거리가 밝았고 술집 간판들이 많은 일종의 유흥가였다.
중앙통에서 옆길로 빠져 엄마는 여관 간판이 걸린 한 2층 건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는 거절당하지 않고 방을 얻었다. 그러나 열쇠를 받아 2층 계단을 밟으면서 엄마는 불평했다.
“무슨 여관비가 이리 비싸노.”
나로서는 세 번 째 와보는 여관방이었다.
오늘 자게 될 이 방은 학술경진대회 때문에 대구나 서울에서 묵었던 방보다 좁았지만 온돌이 아니라 침대가 놓여 있었다. 둘이 마주보고 앉을 수 있는 의자도 있고 TV도 있었다. 침대에 올라가기도 뭣해 나는 우선 의자에 앉았다.
엄마는 겉옷을 벗어걸고 TV를 켰다. 서울 여관방의 TV는 리모콘이라고 손에 잡고 버튼만 누르면 채널 선택이 되는데 이 방은 손으로 직접 돌려야 했다.
TV에서는 무슨 쇼프로가 나오는데 엄마는 침대에 등을 기대고 잠시 보다가 말했다.
“이제 눈 좀 붙여야겠다. 어젯밤 한숨도 못자고 꼬박 새웠더니 이제 눈알도 아프다. 우선 좀 씻고 ······ ”
역시 그랬구나. 나도 잠을 좀 설치기는 했지만 엄마는 한숨도 못 잤다고 한다. 그리고 보니 엄마의 얼굴이 하루 사이에 무척 초췌해 있었다.
엄마가 욕실로 들어간 뒤에 나도 윗옷과 바지를 벗어 걸고 의자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데 잠시후 욕실에엄마가 나를 불렀다.
“등 좀 밀어도고.”
엄마는 완전히 발가벗은 채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뜨신 물도 나온다. 니도 같이 할래? 내가 등 밀어줄게.”
“아이라예. 어무이 먼저 하이소. 나는 나중에 따로 씻을 게요.”
엄마는 못 보았겠지만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엄마 때문이 아니라 얼마 전 이원주 선생과 함께 목욕했던 일이 떠올랐다. 이원주 선생과 엄마는 다르겠지만 엄마와 알몸으로 함께 목욕을 한다면 그 앞에서 자지가 벌떡거릴 수도 있으니 안될 일이다. 자지는 가끔 주인인 내 뜻과 상관없이 혼자 놀기도 하니까.
엄마의 등을 밀어주고 잠시 후 엄마는 속옷차림으로 욕실에서 나왔다.
바로 교대해서 나도 샤워를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보니 엄마는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침대에 기대어 TV를 보고 있었다.
“어무이, 어젯밤 한숨도 못 주무셨다면서요? 이제 좀 주무이소.”
“응, 자야겠다. 슬슬 눈꺼플이 무거워 지네. 니도 일로 올라온나.”
“아이라예. 저는 이쪽 아래에서 잘게요.”
“그라마 이불 하나 더 달라 칼까? 여관비도 비싸게 받았는데 ······ ”
엄마는 탁자 위의 전화기를 들었다. 여관 사람과 바로 연결이 된 모양이고 잠시 후 엄마의 요청대로 이불 한 채가 더 들어왔다.
나는 침대 옆에 요이불을 폈고 누웠다. 그래도 TV화면은 보였다.
“텔레비 때문에 잠이 안오는 갑다. 니 뭐 보고 싶은 기 있나?”
“아니요.”
“그럼 꺼뿌라. 아주 방의 불도 ······ ”
나는 엄마의 말에 따랐다. 엄마와 나의 여행과 첫 외박이 여기까지는 그저 평온하고 좋았다.
“아이 으빠, 조금만 기다려.”
여인의 꽤나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옆방에서 나는 소리다.
방의 불을 끄고 나는 잠을 청했지만 병원에서 겪은 일들이 되살아나며 이런 저런 생각들도 이어져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조용한 어둠이라 그런지 옆방의 소리는 비교적 선명하게 들렸다.
“으빠, 그래도 불은 끄고 ······ ”
‘으빠’는 오빠를 말하는 것 같은데 어느 지방 사투리인지는 모르겠다. 분명 남자가 같이 있을 터인데 남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에 여인의 소리도 섞여 나왔다.
"아이 으빠, 좀 천천히 ······ 아프단 말야.“
이어서 삐걱거리는 소리는 더 커졌다. 도대체 이놈의 여관은, ······ 엄마가 두 번이나 숙박비가 비싸다고 투덜댔는데 어떻게 지었길래 옆방의 소리가 이렇게 잘 들리고 침대는 얼마나 낡았길래 저렇게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까.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옆방의 소음은 나도 그 장면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흥미롭기 보다는 그냥 짜증만 났다.
“아아 으빠! 좀 더 빨리 ······ ! 으응, 좀 더 삘리 ······ 으으 ······ !”
뭔가 남자의 목소리도 났는데 웅얼거리기만 해서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침대의 삐걱거림은 좀 더 커졌다.
옆방의 빠구리는 별로 오래 시간을 끌지는 않았다.
다시 사위가 조용해졌을 때 나는 팬티로 손을 넣어 자지를 한번 만져 보았다. 평소의 줄어든 상태로 변화가 없었다. 나는 다른 잡념 없이 그저 자지에 대한 밤인사였다. 그리고 다시 잠을 청했다.
“영도야, 자나?”
엄마가 물었다. 잠들어 있다면 깨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런 목소리였다.
“아니요.”
나는 즉각 대답했다.
“나가서 소주 한병 사올래?”
나는 방의 불을 켜고 옷을 챙겨 입었다. 엄마는 침대 밑에 놓아둔 핸드백에서 만원짜리 한 장을 내주며 말했다.
“우째 영 잠이 안 온다. 어젯밤 한숨도 못잤는데도 ······ ”
“안주는요?”
“내는 별로 필요없다만 니도 같이 먹으려면 뭐 오징어나 땅콩, 니 출출하면 빵 같은 것도 사 온나.”
여관 밖은 이 시간에도 네온사인이나 아크릴 간판이 켜 있고 나다니는 사람들도 많은 불야성이었다.
나는 출출하지 않아 소주 한병에 오징어 한 마리, 땅콩 한봉지를 봉지에 담아 돌아왔다.
엄마는 TV를 켜놓고 있었다. 침대에 기대앉은 채 엄마는 소주병을 땄다. 엄마의 권유로 나는 오징어를 조금 찢어 의자에 앉아서 먹으며 TV를 봤다. 서양 사람들이 나와 가끔 총질도 하는데 내용을 모르니 별로 흥미가 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공이 악당들을 죽이고 상대 여인과 키스하는 것으로 끝나고 이어 광고가 나왔다. 나는 채널을 돌리고 엄마 쪽을 돌아봤다.
엄마는 종이컵의 소주를 마시고 있다. 술병을 보니 3분의 1정도가 남아있다. 엄마의 주량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혼자서 홀짝홀짝 꽤 마신 것이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엄마는 멋쩍은 듯 웃어보였다.
“니한테 미안하다. 잠을 못자게 해서 ······ ”
“저는 괘않아예. 어무이나 빨리 주무이소.”
“그래, 요것만 다 마시고 ······ ”
엄마는 다시 종이컵에다 술병을 완전히 비웠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이고, 내 팔자야!”
깨어 있는 사람은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그 생각이 무엇을 골돌히 파고들든, 허황한 잡념이든, 무의식의 진행이든 간에 하여튼 생각은 이어지는 것이다.
엄마는 혼자 술을 마시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동안 나는 TV를 보며 별로 흥미는 없었지만 그 장면에 빠져 있었다.
엄마는 아까 불을 끈 어둠 속에서 내가 병원의 아버지와 연관된 일들을 생각했듯 낮의 일들과 관련된 생각에 잠겨 있었는지 모른다. 거기에다 지난 세월의 기억들이 이어졌을 수도 있다. 신세한탄의 말이 나온 것을 보면.
“이제 참말로 잠 좀 자야겠다. 불 좀 꺼도.”
방은 다시 적막에 잠겼고 나도 이불 속에 들어왔다. 그래도 쉽게 잠이 들지는 않는다.
물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으빠’를 찾던 반대편의 옆방이다. 물소리로 보아 샤워기를 틀은 것이 아니라 대야로 퍼붇는 것 같다. 정말 이놈의 여관은 어떻게 지었길래 이렇게 방음이 형편없는 것일까.
“이눔의 가시나야, 화대를 받았으마 ······ ”
“누가 그것까지 해준다 캐 ······ ”
잠시 후 말소리가 들렸다. 구체적인 말은 알아듣기 어렵지만 남녀가 다투는 소리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으빠’를 찾던 방은 조용한데 반대편의 옆방에서는 남녀의 웅얼거리는 소리가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들려왔다. 이어서 미미하지만 분명이 침대가 움직이는 소리도 겻들였다. 그 방의 침대는 반대편 옆방보다 덜 낡은 모양이다.
그 옆방의 소리도 완전히 멎고 나는 슬슬 잠에 빠져 들고 있는데 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영도야.”
아주 낮은 소리였으나 똑똑히 들렸는데 나는 못들은 척 했다.
“영도야, 좀 일나 볼래?”
소리가 꽤 커졌는데 나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방의 불을 켰다. 그제서야 나는 아는 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도야, 자는데 미안하다만 가서 소주 한병만 더 사 온나.”
“어무이, 지금 열두시가 넘었심더. 통행금지 시간이라예.”
“그건 나도 안다. 하지만 어디라도 가서 좀 사 온나. 술이라도 좀 마셔야지, 이렇게 눈이 초롱초롱해가지고는 정말 미치고 환장하겠다.”
여관 입구의 프론트에는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나는 어디서 술을 살 수 있는가 물었다.
“지금 점방들은 다 문을 닫았제. 저 오른쪽 골목으로 나가 보마 혹 불이 안 꺼진 술집이 있을 기다. 문은 잠겨 있을 테니 두드려가 술 한병 달라고 사정해봐라. 그 골목은 가끔 통행금지위반 순찰도 도니 조심하고 ······ ”
즐비한 술집 간판들이 모두 꺼져 있는데 그중 불빛이 새어나오는 집도 있었다.
그 여인의 가르침에 따라 문을 두드렸지만 응답이 없는 집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한 집에서 아까 구멍가게에서보다 3배나 더 값을 치루고 소주 한병을 들고 돌아왔다.
“그래도 용케 사왔네.”
엄마는 빼앗듯이 소주병을 받아 뚜껑을 열었다. 종이컵에 술을 따르며 엄마는 미안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영도, 니도 한잔 할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텔레비라도 좀 보고 있거라. 나도 빨리 끝낼게.”
TV를 켰더니 방송이 끝났다는 무늬 영상만 나와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화면이 나오는데 AFKN이라는 자막이 밑에 나오고 대사는 영어길래 잠시 보다 꺼버렸다.
“아까 니 술 사러 나갔을 때 저 창문을 열어봤다. 2층이라 뛰어 내려도 잘 죽지는 않겠지만 그나마 철책으로 막혀 있는 기라.”
엄마가 빙긋 웃으며 지나가는 말처럼 하는데 나는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엄마가 지금 창문으로라도 뛰어 내리고 싶단 말인가. 그리고 보니 눈빛도 달라져 보였다.
지난 여름 읍내 극장에서 본 <드라큐라> 영화가 떠 올랐다. 남자나 여자나 그저 평시에는 미남 미녀들인데 어느 순간 흡혈귀로 변하면 눈은 빨갛게 변하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징그럽게 드러나는 것이다.
엄마의 송곳니가 커지지는 않았지만 눈빛과 표정은 변하고 있다.
“아, 내 신세가 ······ !”
한숨을 푹 내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이럴 때 내가 엄마의 대화상대가 되어야 하는지 그냥 모른 척하고 있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저 나는 엄마를 바라보며 말은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느그 아범 잘려나간 다리를 보니 하 참, 내 신세가 ······ ”
엄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 아닙니까? 어무이는 아부지가 살아있기만 해도, 이 사고로 죽게 되지만 않아도 하고 바랬는데 그건 확실해졌다 아입니까?”
“그래! 그건 니 말이 맞다! 하지만 내한테는 그 없어진 다리에 피할 수 없는 내 팔자도 같이 엮여있는 기라.”
엄마는 또 술을 한모금 들이키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어무이, 좀 천천히 마시이소.”
“지금 이 술도 없으마 나는 버틸 힘도 ······ 아아, 내 팔자가 ······ 내 몸으로 낳은 자식 둘이나 잃고, 영자도 그리 됐고 외동아들까지 그렇게 ······ 그런데 서방이라고 그렇게 날 괴롭히더니 자기도 ······ ”
나는 엄마의 표정을 주목했다. 이런 식으로 넋두리를 늘어놓는다면 눈물도 겼들일 수 있다. 그러나 엄마에게는 그런 기미가 없었다. 영화에서 흡혈귀가 변신할 때처럼 눈이 조금씩 붉어지는 것 같았다.
“아아, 정말 속에서 열불이 난다! 저눔의 철책만 없어도 뛰어 내릴 것을 ······ 지금 내 몸은 갈기갈기 찢어져야 ······ ”
가슴을 주먹으로 탕탕 치더니 런닝셔츠를 그대로 찢으려다 잘 안되니 훌렁 벗어버린다. 젖통이 출렁하며 늘어졌다.
“이대로 그냥 밖에 나가 자동차에라도 깔렸으마 좋겠다. 아아, 참말로 미치고 환장하겠네!”
윗몸을 드러낸 채 엄마의 안절부절은 급격히 더 악화되고 있었다.
나는 3학년 때 학교 운동장에서 본 한 광경이 떠올랐다.
6학년 남학생이 변소에서 나와 교실 쪽으로 가다 비실비실 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냥 땅바닥에 쓸어졌다. 가까이 있던 학생 몇 명이 주위를 둘러쌌고 나도 다가갔다.
“또 발작했네.”
누군가 그런 말을 하는데 쓰러진 그 6학년생은 손발은 물론 몸까지 떨면서 입에서는 거품이 흘러 나왔다.
연락을 받았는지 양호교사도 맡고있는 이미영 선생이 뛰어와 나무막대를 입안에 넣었다. 그 6학년생은 이미 학교 안에서 꽤 알려진 간질환자였다. 몇분 쯤 지나자 그 학생의 발작은 멈추었다. 이미영 선생이 일으키자 손을 잡고 좀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아아, 내가 내 몸을 주체 못하겠다!”
엄마는 침대에서 내려오더니 속치마도 벗어 버렸다. 이제 달랑 팬티 하나만 남았다.
“밖에 나가 땅바닥에라도 뒹글어야겠다! 차에 깔리마 더 좋고 ······ ”
“어무이 좀 진정하이소!”
나는 엄마를 침대로 끌고 가 눕혔다. 누웠던 엄마는 금방 일어났다.
“아아, 복장이 터질라 칸다! 참말로 못참겠다.”
엄마는 지금 완전히 발작상태다. 언제부터 그런 징후가 있었는지 나는 거의 눈치를 못챘지만 지금의 증세는 분명하다.“어무이 좀 진정하고 정신 차리이소!”
엄마를 눕히고 몸을 흔들다 엄마를 결박하듯 그 위에 내 몸을 얹었다.
“하아! 니라도 날 우째 해 도!”
"무얼 우째 해드릴까요?"
“아무렇게나 ······ 그냥 내 몸을 찢어 발기 도!”
잠시 망설이다 나는 엄마의 젖꼭지를 물었다. 꽤 오랜만이지만 포도알만한 젖꼭지는 내 입에 익숙하다. 나는 그것을 이빨로 살짝 물며 세차게 빨아댔다.
“아아! 니가? `````` 내 아들이가?”
엄마가 내 머리를 감싸 안는다. 이대로 좀 진정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옆의 젖꼭지로 옮겨 더 세차게 빨았다.
“이제 그만, 그만!”
잠시 후 엄마가 내 머리를 밀어내며 말했다.
“아무래도 밖에 나가야겠다. 너무 답답하다. 이대로는 복장이 터지겠다.”
나는 일어나려는 엄마를 내리 누른 채 황급히 말했다.
“어무이 잠간만 참으이소. 내가 ······ 내가 ······ ”
무릎으로 엄마를 짓누른 채 나는 급히 옷을 벗었다. 그리고 엄마의 마지막 남은 껍질, 팬티를 내리자 엄마는 엉덩이를 들어주었다.
자지를 꼽으려니 그곳은 메말라 있었다. 엄마의 목 아래로 손을 넣어 몸을 안은 뒤 젖꼭지를 빨면서 한손은 보지에 머물렀다.
자지가 들어갔을 때 엄마는 엉덩이를 좀 들어준 것 같았다. 나는 바로 엉덩이를 빠르게 움직였다. 빨리 이 일을 끝내고 싶었다. 빨리 엄마의 발작을 멈추게 하고 싶었다.
엄마도 감각이 오는지 나를 끌어안았다. 그 팔에 힘이 들어가며 숨도 조금씩 가빠졌다.
“아아, 영자 아배! ······ 흐윽, 영자 아배!”
나는 더욱 방아질의 속도를 높였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시간을 오래 끄는지 ······· 그런 생각까지 하며 결국 사정에 이르렀는데 엄마가 비명을 질렀다.
“아아, 영도야! ······ 흐윽, 영도야!”
자지를 빼면서 비로서 엄마의 보지를 보았다. 수북했던 털은 좀 빠진듯 성글어 보였고 검게 변한 대음순은 좀 삐져나와 있다. 저곳에서 나를 비롯한 6남매가 생겨났고 또 태어났다. 그런데 지금은 내 정액이 찔끔찔끔 흘러 나오고 있다. 타올로 그곳을 닦을 때 엄마는 몸을 한번 꿈틀했다.
“하아, 내 아들이 ! ······ 그래도 내 아들이 ······ !”
눈을 감은 채 중얼거리던 엄마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조용해 졌다. 숨소리도 고른 것을 보니 이제야 진짜 잠이 든 것 같았다. 잠든 얼굴을 내려다 보는데 나도 모르게 한줄기 눈물이 흘려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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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원을 보내주시는 분들께는 고마움을 전하면서 그래도 댓글은 점차 줄어드는 것 같군요. 고래는 아직 잠수보다는 춤을 더 추고 싶습니다.
밤 9시가 넘어 경찰관 한명이 찾아왔다.
밖에서 누가 찾는 소리에 영미 누나가 먼저 나갔다가 경찰인 것을 알려 엄마와 나도 마루에 나왔다. 경찰이 아침에 찾아왔더라도 별로 반가운 일은 없을 터인데 농촌에서는 주민들의 반쯤이 잠자리에 들었을 시각이니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겁에 질린 채 경찰관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과연 경찰관이 전해준 말은 끔찍한 소식이었다. 아버지가 건설공사 현장에서 크게 다쳐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요?”
“우리도 상세한 내용은 모릅니다. 상부에서 문광석씨 가족에게 통보해주라고 지시가 와서 통보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애들 아범이 얼마나 다쳤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 대충은 알아야 ······ ?”
엄마의 목소리는 벌써 떨려 나오고 있었다.
“사고는 4일 전 경부고속도로의 대전 ~ 대구 구간의 추풍령 터널 보수공사를 하던 중 발파사고로 암반이 무너져 일어난 것입니다. 다음날 신문에도 크게 났는데 사망 7명, 중상 12명, 경상자도 수10명이나 되는 대형 사고였죠. 문광석씨도 중상자 명단에 들어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와 이제사 연락을 ······ ?”
“글쎄요? 우리도 자세한 사정은 모릅니다. 조금 전 도경에서 지시가 와서 바로 통보하는 것인데 내 생각으로는 아마 신원확인이 잘 안되어 지연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신원확인이 안되다니 얼마나 심하게 다쳤길래 ······ 엄마나 함께 듣는 나도 불안은 더욱 커졌다.
“부상자는 모두 대구의 국군통합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으니 상세한 사정은 가족이 직접 가셔서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경찰관은 경례를 하고 곧 돌아갔다.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아버지가 4일 전에 크게 다쳐 대구의 국군통합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뿐이다.
사실을 제대로 알 수 없을 때 불안과 공포는 더욱 커진다. 여러 가지 상상도 날개를 달지만 부질없는 짓이다. 직접 가봐야 된다. 하지만 지금은 움치고 뛸 재주가 없다. 내일 첫차를 타고 병원에 가보는 수 밖에는.
엄마는 달비장사로 대구를 자주 드나들기에 교통편은 잘 알았다. 화도읍에는 올해 초부터 대구행 직행버스가 운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버스는 멀리 북쪽에서부터 여기저기 들려오는 것이라 화도에서는 아침 9시 40분에 출발한다고 한다. 엄마와 나는 그 버스에 몸을 실었다.
엄마는 처음 당신 혼자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이집의 유일한 아들이고 저쪽 상황을 전혀 모르니 혹 어디 연락이나 심부름을 하더라고 내가 같이 가는 것이 좋겠다는 주장을 엄마가 받아들였다.
버스는 읍소재지에다 웬만한 면까지 들려 지루했고 식구 많은 집 뒤주처럼 어느 정류장에서는 승객이 가득차고 또 어떤 곳에서는 많이 내려 거의 빈차처럼 가기도 했다.
엄마와 나는 가는 동안 거의 말을 나누지 않았다. 나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괜히 허튼 소리를 하면 부정을 탈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했다.
불쑥 이제 6학년에서 개근상 타기는 틀렸구나 하는 생각이 떠오르자 “이런 못된 녀석.” 하며 나는 스스로를 욕했다.
“도대체 우찌 됐는지 몰라도 그저 살아있기만 해도 ······ ”
대구가 가까워 왔을 때 엄마가 처음으로 아버지에 대한 말을 꺼냈다. 그 말은 혼잣말 같기도 하지만 나 역시 버스 안에서 계속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부지가 사망자 명단에는 없잖아예. 중상자라니까 지금도 살아 계실 기고 ······ ”
나는 우선 엄마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내 말은 지금 얼마나 다쳤는지 몰라도 하여튼 목숨은 부지해야 한다는 기다.”
엄마는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어제 그 끔찍한 소식을 듣고 난 후에도 엄마가 울었는지는 모르지만 사고를 알게된 후 처음 보는 엄마의 눈물이었다. 그 후 엄마와 나는 대구에 도착할 때까지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다.
대구역 앞의 시외버스정류장에서 내린 우리는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동촌에 있는 국군통합병원으로 갔다.
군인병원이라 그런지 일반 병원과 달리 입구에서부터 헬멧을 쓴 위병이 지키고 있었고 출입절차도 까다로웠다.
“문광석씨 면회를 왔다.”고 하자 처음에는 “그런 사람이 환자 명단에 없다.”고 했다.
“추풍령 터널 보수공사 현장에서 사고를 당해 이쨔 입원했다고 우리 경찰서에서 연락을 받고 온기라예.”
엄마의 말에도 위병은 서류를 뒤적이며 “그런 사람 없다.”는 말만 되풀이 한다. 마침 그때 장교 계급장을 단 군인이 위병소에 들어와 엄마는 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야, 그 유케이 명단 체크해봐. 내 생각에는 유케이 3호 같은데 ······ ”
“아! 여기 있습니다. 문광석, 경상북도 화도군 금촌리 ······ 237호군요.”
“짜식들, 변동사항이 있으면 바로 이쪽에도 기재를 해야지.”
엄마와 나는 그렇게 복잡한 절차를 거치고 237호로 들어 갔다.
병실은 2인실이고 오른쪽 침대에 아버지가 보였다.
“왔나!”
얼굴이 마주치자 아버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웃으려는 것 같은데 말에 힘이 없듯 그 표정도 어색했다.
아버지는 이마 한쪽에 정사각형의 거즈가 반창고로 붙여있고 한쪽 눈가에는 시퍼렇게 멍든 것이 보였으며 입술도 터져 있었다. 왼손은 붕대로 칭칭 싸 맸고 오른팔에는 링거 주사바늘이 꽂혀 있다.
“어떻습니까?”
엄마가 다가가서 물었다.
“응. 그저 그렇지 뭐. 쬐매 아프기는 하지만, ······ 나도 어제 오후에 겨우 정신이 들었는 기라.”
목소리는 여전히 힘이 없지만 이번에는 진짜로 살짝 웃었다. 나는 일단 안도했다. 엄마와 버스에서 했던 말, 아버지는 분명히 살아 있었고 이렇게 말도 하고 웃기도 하는 것으로 보아 생명에도 이상이 없을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2인 병실의 또하나 환자, 왼쪽 침대로 눈길이 갔다. 그 환자는 언뜻 보기에도 너무나 처참했다.
머리는 칭칭 붕대로 싸 감았고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었다. 상의도 벗겨진 채 붕대가 어깨에서 팔까지 모두 감겨있다. 다리 하나는 기브스를 해서 공중에 매달려 있는데 뒤꿈치에는 쇠줄이 매달려 있고 그 밑에는 저울추 같은 것과 연결되어 있다. 기브스한 다리를 절대로 못 움직이게 하는 장치 같았다. 언뜻 보기에도 그 환자는 의식이 없어 보였다.
아버지처럼 링거를 맞고 있으며 가슴에 댄 것 같은 가는 줄 몇 개가 기계에 연결되어 있고 반짝거리는 것으로 볼 때 지금 환자의 상태를 기계가 계속 감시하는 것 같았다.
잠시후 남녀가 손수레와 스텐으로 된 쟁반 같은 것을 들고 들어왔다. 남녀는 모두 흰옷차림인데 남자는 상병, 여자는 중위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위생병과 간호장교였다.
간호장교는 우선 왼쪽 환자에게로 가서 링거 주사액을 새로 바꾸고 가슴과 줄로 연결된 기계를 살펴보았다. 이어 기브스를 한 채 매달려 있는 다리의 높이를 조정했다. 이불을 들추는데 보니 하반신은 벗겨진 채였다. 어른의 엄지손가락 정도로 쪼그라든 자지의 오줌구멍에는 가는 고무호스가 꼽혀 있었는데 간호장교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손으로 자지를 잡아 고무호스를 빼더니 탈지면으로 소독을 하고 다시 끼웠다. 그렇게 하는 동안 환자는 전혀 의식이 없었다.
간호장교는 이제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이마의 거즈를 떼자 피부가 벗겨져 빨간 속살이 보였다. 그곳에 무슨 약을 바르자 아버지는 약간 얼굴을 찡그렸는데 새 거즈로 갈아 부쳤다. 이어 터진 입술에도 약을 바르자 다시 얼굴을 찡그렸다.
간호장교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이불을 들추었다. 그러자 사과상자를 닮은 플라스틱 구조물이 드러났다. 아마 이불이 몸에 바로 닿지 않도록 그곳에 놓아둔 것 같았다. 그녀는 그 구조물을 들어냈다.
이런 ······ ! 아버지의 오른쪽 다리가 없었다. 무릎 아래로 5~6cm 쯤 되는 곳이 붕대로 감겨 있는데 그 밑은 그냥 허공이었다.
나는 경악했다. 힐긋 엄마 쪽을 보니 엄마 역시 다리가 있어야 할 자리의 빈 공간에 시선이 쏠려 있는데 창백한 얼굴에 입을 약간 벌리고 있지만 말은 없었다.
붕대를 풀자 절단 부위가 나타났다. 톱으로 썬 듯 반듯하게 잘린 그곳은 피가 엉켜 검붉은 색이지만 우족을 삶기 위해 잘라놓은 것 같은 정강이뼈와 그 주위에 붙은 살덩이들이 비참하게 드러나 있었다.
간호장교는 그 부위에 몇가지 약품을 바르고 다시 붕대로 감싼 뒤 엉덩이에 주사를 놓고 이불을 덮었다.
바로 옆의 의식불명인 환자와 비교가 되어서도 엄마와 나는 말도 하고 억지로 웃으려고도 하는 아버지를 보며 조금전까지 안도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리 하나를 영원히 잃은 것이다.
엄마와 나는 아버지의 수술을 집도했다는 의사, 아니 군의관을 따로 만났다. 그는 중령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오른쪽 정강이 쪽에 워낙 큰 바위가 굴러 떨어져 무릎 밑쪽이 거의 바스러져 절단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패혈증이나 염증의 전이 같은 것은 없어 4주쯤 상처만 아물면 퇴원도 가능합니다.”
“그 다음은 우찌 됩니까? 우찌 살아야 하는데요?”
엄마는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것 같았지만 표정은 차분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더 안쓰럽게 보였다. 아까 간호장교가 병실을 나설 때 엄마는 비켜주려 하면서 휘청거려 내가 얼른 팔을 잡아주기도 했다.
“물론 의족(義足)을 달아야죠. 우리나라는 6.25 전쟁도 겪고 해서 의수족 분야는 꽤 발달한 수준입니다. 환자가 의족에 잘 적응만 하면 뜀박질이야 못하겠지만 몇 달 후에는 지팡이 없이도 보행은 가능할 것입니다.”
엄마는 몇가지 더 질문을 했고 군의관은 비교적 친절하게 대답을 해주면서 환자가 퇴원한 후 가족들이 유의해야 할 점 등도 이야기 해주었다.
중상을 입고 입원했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병원에 올 때 엄마는 아버지가 살아있기만을, 앞으로도 죽을 위험만은 없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곳에 왔다.
이제 아버지의 병세와 앞으로의 전망을 대충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러면 우리는 ‘불행중 다행’ 이라며 콧노래라도 불러야 할까. 하지만 내 기분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커다란 상실감과 공허감이 내 가슴에 큰 구멍을 냈다. 아버지의 없어진 다리처럼 나의 상실감과 공허감도 메꾸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만약 아버지가 간이나 위의 일부 절제수술을 받았다면 나는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쾌유를 빌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다리가 사라진 그곳을 처음 보았고, 톱으로 썰어낸 그 정강이뼈의 절단 부분도 직접 보았다. 그 충격이 아버지에 대한 연민뿐 아니라 나에게도 슬픔과 상처로 자리잡고 있었다.
엄마는 겉으로 보기에 나보다는 침착하게 대처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처음에 충격이 너무 커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버지의 없어진 다리를 보고도 비명이나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군의관을 만나고 난 뒤 병실에 와서도 아버지와 없어진 다리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를 않았다. 엄마는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는 짐작을 할 수 있다. 엄마와 나는 미지의 불안과 공포에서부터 충격의 순간들까지 항상 함께였다. 내가 지금 이토록 슬픔과 상처를 느끼고 있는데 어찌 엄마가 나보다 가볍게 그 일을 받아 들일 수 있을까. 엄마는 단지 그것을 속으로 감추고 안간힘을 쓰며 버틸 뿐이다.
“우리 작업조가 6명인데 이번 사고에서 그중 3명이 죽은 기라. 태풍의 중심이라는 말도 있지만 우리 조가 그 자리에 있었던 기지. 저 옆의 박씨도 같은 우리 조다. 그런데도 나는 정신이 들어가 내 꼴을 알게되면서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만큼 낙담을 했었제. 그런데 마취에서 차츰 깨어나면서 아직 정신은 혼미한데 계속 떠오르는 게 당신하고 자식들 얼굴인 기라. 인명은 재천이라는 말도 있다만 그래도 살아있는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당신도 너무 상심하지 마라. 아이들도 걱정하지 않게 당신이 다독거려 주고 ······ 목숨이 붙어 있으마 어떻게든 살아가지 않겠나?”
엄마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경부고속도로는 박정희 대통령이 강력 추진했던 역점 사업의 하나로 1968년 착공해서 1970년 준공, 고속도로 부문에서는 세계에서 최단기간의 준공이라는 기록을 갖고 있지만 그만큼 부실공사도 많았고 그래서 끊임없이 보수공사도 이어졌다.
특히 대전~대구 구간은 전체 공사 구간중에도 가장 난공사 구역으로 건설 중에도 가장 사상자가 많이 난 구간이었다.
이번에 사고가 난 터널보수공사에서 직접 시공을 맡은 하도급업체는 인력관리 체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암반과 흙더미 속에 매몰된 인부들이 구조되었을 때 그중 한명인 아버지는 소지품이 어디엔가 묻혀버린 모양인데 그러자 회사에서도 신원을 규명하지 못하고 아버지가 의식을 회복한 후에야 겨우 가족에게 연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얼마 후 병실의 스피커를 통해 안내방송이 흘러 나왔다.
“환자를 면회 온 분이나 방문객들은 10분 이내에 모두 병원 밖으로 나가주시기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국군통합병원은 원래 보호자나 간병인들이 병원 안에서 자거나 면회시간을 넘겨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아무리 중환자라도 환자를 돌보는 업무는 군의관과 간호장교, 위생병들이 맡아 하면서 외부 사람이 머무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아버지는 한달 쯤 후면 퇴원할테니 다시 올 필요는 없다고 했다. 엄마와 나는 작별인사를 하고 병원을 나섰다.
병원 앞의 시내버스 정류장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면회 왔던 사람들 뿐 아니라 근무시간을 마친 병원 종사자들의 퇴근도 맞물려있기 때문이다.
엄마와 나는 대구역전으로 가는 버스를 2대나 지나보낸 뒤 겨우 만원버스에 올라탈 수 있었다. 시외버스 정류장에 가보니 화도읍으로 가는 막차가 10분쯤 전에 떠나버렸다. 우리는 대구에서 하룻밤을 잘 수밖에 없었다.
그제서야 나는 배가 고프다는 것을 느꼈다. 엄마와 나는 점심도 굶은 채였다.
우리는 우선 저녁부터 먹어야 했다. 달비장사 때문에 대구를 자주 드나들었던 엄마는 대구의 지리를 잘 아는 것 같았다. 엄마가 데려간 식당은 국일옥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국밥이요? 따로요?”
물컵을 가져온 남자 종업원이 물었다.
“따로 둘 주이소.”
종업원이나 엄마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나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런데 잠시 후 나온 음식을 보니 밥과 국이 따로 나왔다. 국밥을 주문한 옆의 손님을 힐끗 보니 그곳에는 뚝배기 하나만 나와서 나는 따로라는 의미를 알았다.
저녁을 먹었으니 이제 숙소를 잡아야 했다.
엄마가 앞장 서 한 골목으로 접어 들었더니 무슨 여관과 여인숙이라고 쓰인 아크릴 간판이 10개도 넘게 즐비하게 걸려 있었다. 그런데 엄마와 몇걸음 떨어져 걷고 있는 나에게 한 중년여인이 말을 건다.
“학생, 쉬었다 가이소. 긴 밤도 되고 ······ ”
무슨 말인지 몰라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는데 나보다 어려 보이는 남자 애가 또 말을 건다.
“성님, 쉬었다 가이소. 참하고 어린 처자 있심더.”
나는 너무 이상해 걸음을 빨리해 엄마와 나란히 걸었다. 그런데 마주 오는 남자에게도 건너편의 중년 여인이 내가 들었던 말과 비슷한 말을 하는 것이다.
“손님, 쉬었다 가이소. 오늘 들어온 참한 색시 있어요.”
엄마는 여인숙이라는 간판이 있는 한 집에 들어갔다.
“방 하나 주이소.”
입구에 서 있던 중년여인이 나란히 서있는 엄마와 나를 훑어보더니 퉁명스레 물었다.
“같이 잘라고요?”
“예.”
“우리는 그런 방 없어요.”
엄마는 그 옆의 여인숙에 들어갔지만 또 같은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3명의 남자를 여인 둘이서 “예쁜 색시 있다,”느니 “싸게 해준다.”느니 하며 서로 끌고 가는 것을 보고 비로소 깨달은 것 같다.
나는 뒤에 안 것이지만 그 일대는 해방골목으로 불리는 창녀촌이었다.
엄마는 대구 지리를 잘 안다고 하지만 창녀촌을 찾을 일은 없었기에 이곳에 대해서는 어두웠던 모양이다.
“이쨔는 안되겠다.”
우리는 그 골목을 벗어나 한참을 걸었다. 그곳이 요전 대구에 왔을 때 김정호가 말한 중앙통인 것 같은데 밤거리가 밝았고 술집 간판들이 많은 일종의 유흥가였다.
중앙통에서 옆길로 빠져 엄마는 여관 간판이 걸린 한 2층 건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는 거절당하지 않고 방을 얻었다. 그러나 열쇠를 받아 2층 계단을 밟으면서 엄마는 불평했다.
“무슨 여관비가 이리 비싸노.”
나로서는 세 번 째 와보는 여관방이었다.
오늘 자게 될 이 방은 학술경진대회 때문에 대구나 서울에서 묵었던 방보다 좁았지만 온돌이 아니라 침대가 놓여 있었다. 둘이 마주보고 앉을 수 있는 의자도 있고 TV도 있었다. 침대에 올라가기도 뭣해 나는 우선 의자에 앉았다.
엄마는 겉옷을 벗어걸고 TV를 켰다. 서울 여관방의 TV는 리모콘이라고 손에 잡고 버튼만 누르면 채널 선택이 되는데 이 방은 손으로 직접 돌려야 했다.
TV에서는 무슨 쇼프로가 나오는데 엄마는 침대에 등을 기대고 잠시 보다가 말했다.
“이제 눈 좀 붙여야겠다. 어젯밤 한숨도 못자고 꼬박 새웠더니 이제 눈알도 아프다. 우선 좀 씻고 ······ ”
역시 그랬구나. 나도 잠을 좀 설치기는 했지만 엄마는 한숨도 못 잤다고 한다. 그리고 보니 엄마의 얼굴이 하루 사이에 무척 초췌해 있었다.
엄마가 욕실로 들어간 뒤에 나도 윗옷과 바지를 벗어 걸고 의자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데 잠시후 욕실에엄마가 나를 불렀다.
“등 좀 밀어도고.”
엄마는 완전히 발가벗은 채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뜨신 물도 나온다. 니도 같이 할래? 내가 등 밀어줄게.”
“아이라예. 어무이 먼저 하이소. 나는 나중에 따로 씻을 게요.”
엄마는 못 보았겠지만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엄마 때문이 아니라 얼마 전 이원주 선생과 함께 목욕했던 일이 떠올랐다. 이원주 선생과 엄마는 다르겠지만 엄마와 알몸으로 함께 목욕을 한다면 그 앞에서 자지가 벌떡거릴 수도 있으니 안될 일이다. 자지는 가끔 주인인 내 뜻과 상관없이 혼자 놀기도 하니까.
엄마의 등을 밀어주고 잠시 후 엄마는 속옷차림으로 욕실에서 나왔다.
바로 교대해서 나도 샤워를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보니 엄마는 머리에 수건을 두른 채 침대에 기대어 TV를 보고 있었다.
“어무이, 어젯밤 한숨도 못 주무셨다면서요? 이제 좀 주무이소.”
“응, 자야겠다. 슬슬 눈꺼플이 무거워 지네. 니도 일로 올라온나.”
“아이라예. 저는 이쪽 아래에서 잘게요.”
“그라마 이불 하나 더 달라 칼까? 여관비도 비싸게 받았는데 ······ ”
엄마는 탁자 위의 전화기를 들었다. 여관 사람과 바로 연결이 된 모양이고 잠시 후 엄마의 요청대로 이불 한 채가 더 들어왔다.
나는 침대 옆에 요이불을 폈고 누웠다. 그래도 TV화면은 보였다.
“텔레비 때문에 잠이 안오는 갑다. 니 뭐 보고 싶은 기 있나?”
“아니요.”
“그럼 꺼뿌라. 아주 방의 불도 ······ ”
나는 엄마의 말에 따랐다. 엄마와 나의 여행과 첫 외박이 여기까지는 그저 평온하고 좋았다.
“아이 으빠, 조금만 기다려.”
여인의 꽤나 간드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옆방에서 나는 소리다.
방의 불을 끄고 나는 잠을 청했지만 병원에서 겪은 일들이 되살아나며 이런 저런 생각들도 이어져 쉽게 잠이 들지 못했다.
조용한 어둠이라 그런지 옆방의 소리는 비교적 선명하게 들렸다.
“으빠, 그래도 불은 끄고 ······ ”
‘으빠’는 오빠를 말하는 것 같은데 어느 지방 사투리인지는 모르겠다. 분명 남자가 같이 있을 터인데 남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에 여인의 소리도 섞여 나왔다.
"아이 으빠, 좀 천천히 ······ 아프단 말야.“
이어서 삐걱거리는 소리는 더 커졌다. 도대체 이놈의 여관은, ······ 엄마가 두 번이나 숙박비가 비싸다고 투덜댔는데 어떻게 지었길래 옆방의 소리가 이렇게 잘 들리고 침대는 얼마나 낡았길래 저렇게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까.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옆방의 소음은 나도 그 장면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흥미롭기 보다는 그냥 짜증만 났다.
“아아 으빠! 좀 더 빨리 ······ ! 으응, 좀 더 삘리 ······ 으으 ······ !”
뭔가 남자의 목소리도 났는데 웅얼거리기만 해서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침대의 삐걱거림은 좀 더 커졌다.
옆방의 빠구리는 별로 오래 시간을 끌지는 않았다.
다시 사위가 조용해졌을 때 나는 팬티로 손을 넣어 자지를 한번 만져 보았다. 평소의 줄어든 상태로 변화가 없었다. 나는 다른 잡념 없이 그저 자지에 대한 밤인사였다. 그리고 다시 잠을 청했다.
“영도야, 자나?”
엄마가 물었다. 잠들어 있다면 깨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런 목소리였다.
“아니요.”
나는 즉각 대답했다.
“나가서 소주 한병 사올래?”
나는 방의 불을 켜고 옷을 챙겨 입었다. 엄마는 침대 밑에 놓아둔 핸드백에서 만원짜리 한 장을 내주며 말했다.
“우째 영 잠이 안 온다. 어젯밤 한숨도 못잤는데도 ······ ”
“안주는요?”
“내는 별로 필요없다만 니도 같이 먹으려면 뭐 오징어나 땅콩, 니 출출하면 빵 같은 것도 사 온나.”
여관 밖은 이 시간에도 네온사인이나 아크릴 간판이 켜 있고 나다니는 사람들도 많은 불야성이었다.
나는 출출하지 않아 소주 한병에 오징어 한 마리, 땅콩 한봉지를 봉지에 담아 돌아왔다.
엄마는 TV를 켜놓고 있었다. 침대에 기대앉은 채 엄마는 소주병을 땄다. 엄마의 권유로 나는 오징어를 조금 찢어 의자에 앉아서 먹으며 TV를 봤다. 서양 사람들이 나와 가끔 총질도 하는데 내용을 모르니 별로 흥미가 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공이 악당들을 죽이고 상대 여인과 키스하는 것으로 끝나고 이어 광고가 나왔다. 나는 채널을 돌리고 엄마 쪽을 돌아봤다.
엄마는 종이컵의 소주를 마시고 있다. 술병을 보니 3분의 1정도가 남아있다. 엄마의 주량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혼자서 홀짝홀짝 꽤 마신 것이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엄마는 멋쩍은 듯 웃어보였다.
“니한테 미안하다. 잠을 못자게 해서 ······ ”
“저는 괘않아예. 어무이나 빨리 주무이소.”
“그래, 요것만 다 마시고 ······ ”
엄마는 다시 종이컵에다 술병을 완전히 비웠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이고, 내 팔자야!”
깨어 있는 사람은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그 생각이 무엇을 골돌히 파고들든, 허황한 잡념이든, 무의식의 진행이든 간에 하여튼 생각은 이어지는 것이다.
엄마는 혼자 술을 마시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동안 나는 TV를 보며 별로 흥미는 없었지만 그 장면에 빠져 있었다.
엄마는 아까 불을 끈 어둠 속에서 내가 병원의 아버지와 연관된 일들을 생각했듯 낮의 일들과 관련된 생각에 잠겨 있었는지 모른다. 거기에다 지난 세월의 기억들이 이어졌을 수도 있다. 신세한탄의 말이 나온 것을 보면.
“이제 참말로 잠 좀 자야겠다. 불 좀 꺼도.”
방은 다시 적막에 잠겼고 나도 이불 속에 들어왔다. 그래도 쉽게 잠이 들지는 않는다.
물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으빠’를 찾던 반대편의 옆방이다. 물소리로 보아 샤워기를 틀은 것이 아니라 대야로 퍼붇는 것 같다. 정말 이놈의 여관은 어떻게 지었길래 이렇게 방음이 형편없는 것일까.
“이눔의 가시나야, 화대를 받았으마 ······ ”
“누가 그것까지 해준다 캐 ······ ”
잠시 후 말소리가 들렸다. 구체적인 말은 알아듣기 어렵지만 남녀가 다투는 소리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으빠’를 찾던 방은 조용한데 반대편의 옆방에서는 남녀의 웅얼거리는 소리가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들려왔다. 이어서 미미하지만 분명이 침대가 움직이는 소리도 겻들였다. 그 방의 침대는 반대편 옆방보다 덜 낡은 모양이다.
그 옆방의 소리도 완전히 멎고 나는 슬슬 잠에 빠져 들고 있는데 또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영도야.”
아주 낮은 소리였으나 똑똑히 들렸는데 나는 못들은 척 했다.
“영도야, 좀 일나 볼래?”
소리가 꽤 커졌는데 나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방의 불을 켰다. 그제서야 나는 아는 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도야, 자는데 미안하다만 가서 소주 한병만 더 사 온나.”
“어무이, 지금 열두시가 넘었심더. 통행금지 시간이라예.”
“그건 나도 안다. 하지만 어디라도 가서 좀 사 온나. 술이라도 좀 마셔야지, 이렇게 눈이 초롱초롱해가지고는 정말 미치고 환장하겠다.”
여관 입구의 프론트에는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나는 어디서 술을 살 수 있는가 물었다.
“지금 점방들은 다 문을 닫았제. 저 오른쪽 골목으로 나가 보마 혹 불이 안 꺼진 술집이 있을 기다. 문은 잠겨 있을 테니 두드려가 술 한병 달라고 사정해봐라. 그 골목은 가끔 통행금지위반 순찰도 도니 조심하고 ······ ”
즐비한 술집 간판들이 모두 꺼져 있는데 그중 불빛이 새어나오는 집도 있었다.
그 여인의 가르침에 따라 문을 두드렸지만 응답이 없는 집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한 집에서 아까 구멍가게에서보다 3배나 더 값을 치루고 소주 한병을 들고 돌아왔다.
“그래도 용케 사왔네.”
엄마는 빼앗듯이 소주병을 받아 뚜껑을 열었다. 종이컵에 술을 따르며 엄마는 미안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영도, 니도 한잔 할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텔레비라도 좀 보고 있거라. 나도 빨리 끝낼게.”
TV를 켰더니 방송이 끝났다는 무늬 영상만 나와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봤다. 화면이 나오는데 AFKN이라는 자막이 밑에 나오고 대사는 영어길래 잠시 보다 꺼버렸다.
“아까 니 술 사러 나갔을 때 저 창문을 열어봤다. 2층이라 뛰어 내려도 잘 죽지는 않겠지만 그나마 철책으로 막혀 있는 기라.”
엄마가 빙긋 웃으며 지나가는 말처럼 하는데 나는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엄마가 지금 창문으로라도 뛰어 내리고 싶단 말인가. 그리고 보니 눈빛도 달라져 보였다.
지난 여름 읍내 극장에서 본 <드라큐라> 영화가 떠 올랐다. 남자나 여자나 그저 평시에는 미남 미녀들인데 어느 순간 흡혈귀로 변하면 눈은 빨갛게 변하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징그럽게 드러나는 것이다.
엄마의 송곳니가 커지지는 않았지만 눈빛과 표정은 변하고 있다.
“아, 내 신세가 ······ !”
한숨을 푹 내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이럴 때 내가 엄마의 대화상대가 되어야 하는지 그냥 모른 척하고 있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그저 나는 엄마를 바라보며 말은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느그 아범 잘려나간 다리를 보니 하 참, 내 신세가 ······ ”
엄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 아닙니까? 어무이는 아부지가 살아있기만 해도, 이 사고로 죽게 되지만 않아도 하고 바랬는데 그건 확실해졌다 아입니까?”
“그래! 그건 니 말이 맞다! 하지만 내한테는 그 없어진 다리에 피할 수 없는 내 팔자도 같이 엮여있는 기라.”
엄마는 또 술을 한모금 들이키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어무이, 좀 천천히 마시이소.”
“지금 이 술도 없으마 나는 버틸 힘도 ······ 아아, 내 팔자가 ······ 내 몸으로 낳은 자식 둘이나 잃고, 영자도 그리 됐고 외동아들까지 그렇게 ······ 그런데 서방이라고 그렇게 날 괴롭히더니 자기도 ······ ”
나는 엄마의 표정을 주목했다. 이런 식으로 넋두리를 늘어놓는다면 눈물도 겼들일 수 있다. 그러나 엄마에게는 그런 기미가 없었다. 영화에서 흡혈귀가 변신할 때처럼 눈이 조금씩 붉어지는 것 같았다.
“아아, 정말 속에서 열불이 난다! 저눔의 철책만 없어도 뛰어 내릴 것을 ······ 지금 내 몸은 갈기갈기 찢어져야 ······ ”
가슴을 주먹으로 탕탕 치더니 런닝셔츠를 그대로 찢으려다 잘 안되니 훌렁 벗어버린다. 젖통이 출렁하며 늘어졌다.
“이대로 그냥 밖에 나가 자동차에라도 깔렸으마 좋겠다. 아아, 참말로 미치고 환장하겠네!”
윗몸을 드러낸 채 엄마의 안절부절은 급격히 더 악화되고 있었다.
나는 3학년 때 학교 운동장에서 본 한 광경이 떠올랐다.
6학년 남학생이 변소에서 나와 교실 쪽으로 가다 비실비실 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냥 땅바닥에 쓸어졌다. 가까이 있던 학생 몇 명이 주위를 둘러쌌고 나도 다가갔다.
“또 발작했네.”
누군가 그런 말을 하는데 쓰러진 그 6학년생은 손발은 물론 몸까지 떨면서 입에서는 거품이 흘러 나왔다.
연락을 받았는지 양호교사도 맡고있는 이미영 선생이 뛰어와 나무막대를 입안에 넣었다. 그 6학년생은 이미 학교 안에서 꽤 알려진 간질환자였다. 몇분 쯤 지나자 그 학생의 발작은 멈추었다. 이미영 선생이 일으키자 손을 잡고 좀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아아, 내가 내 몸을 주체 못하겠다!”
엄마는 침대에서 내려오더니 속치마도 벗어 버렸다. 이제 달랑 팬티 하나만 남았다.
“밖에 나가 땅바닥에라도 뒹글어야겠다! 차에 깔리마 더 좋고 ······ ”
“어무이 좀 진정하이소!”
나는 엄마를 침대로 끌고 가 눕혔다. 누웠던 엄마는 금방 일어났다.
“아아, 복장이 터질라 칸다! 참말로 못참겠다.”
엄마는 지금 완전히 발작상태다. 언제부터 그런 징후가 있었는지 나는 거의 눈치를 못챘지만 지금의 증세는 분명하다.“어무이 좀 진정하고 정신 차리이소!”
엄마를 눕히고 몸을 흔들다 엄마를 결박하듯 그 위에 내 몸을 얹었다.
“하아! 니라도 날 우째 해 도!”
"무얼 우째 해드릴까요?"
“아무렇게나 ······ 그냥 내 몸을 찢어 발기 도!”
잠시 망설이다 나는 엄마의 젖꼭지를 물었다. 꽤 오랜만이지만 포도알만한 젖꼭지는 내 입에 익숙하다. 나는 그것을 이빨로 살짝 물며 세차게 빨아댔다.
“아아! 니가? `````` 내 아들이가?”
엄마가 내 머리를 감싸 안는다. 이대로 좀 진정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옆의 젖꼭지로 옮겨 더 세차게 빨았다.
“이제 그만, 그만!”
잠시 후 엄마가 내 머리를 밀어내며 말했다.
“아무래도 밖에 나가야겠다. 너무 답답하다. 이대로는 복장이 터지겠다.”
나는 일어나려는 엄마를 내리 누른 채 황급히 말했다.
“어무이 잠간만 참으이소. 내가 ······ 내가 ······ ”
무릎으로 엄마를 짓누른 채 나는 급히 옷을 벗었다. 그리고 엄마의 마지막 남은 껍질, 팬티를 내리자 엄마는 엉덩이를 들어주었다.
자지를 꼽으려니 그곳은 메말라 있었다. 엄마의 목 아래로 손을 넣어 몸을 안은 뒤 젖꼭지를 빨면서 한손은 보지에 머물렀다.
자지가 들어갔을 때 엄마는 엉덩이를 좀 들어준 것 같았다. 나는 바로 엉덩이를 빠르게 움직였다. 빨리 이 일을 끝내고 싶었다. 빨리 엄마의 발작을 멈추게 하고 싶었다.
엄마도 감각이 오는지 나를 끌어안았다. 그 팔에 힘이 들어가며 숨도 조금씩 가빠졌다.
“아아, 영자 아배! ······ 흐윽, 영자 아배!”
나는 더욱 방아질의 속도를 높였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시간을 오래 끄는지 ······· 그런 생각까지 하며 결국 사정에 이르렀는데 엄마가 비명을 질렀다.
“아아, 영도야! ······ 흐윽, 영도야!”
자지를 빼면서 비로서 엄마의 보지를 보았다. 수북했던 털은 좀 빠진듯 성글어 보였고 검게 변한 대음순은 좀 삐져나와 있다. 저곳에서 나를 비롯한 6남매가 생겨났고 또 태어났다. 그런데 지금은 내 정액이 찔끔찔끔 흘러 나오고 있다. 타올로 그곳을 닦을 때 엄마는 몸을 한번 꿈틀했다.
“하아, 내 아들이 ! ······ 그래도 내 아들이 ······ !”
눈을 감은 채 중얼거리던 엄마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조용해 졌다. 숨소리도 고른 것을 보니 이제야 진짜 잠이 든 것 같았다. 잠든 얼굴을 내려다 보는데 나도 모르게 한줄기 눈물이 흘려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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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원을 보내주시는 분들께는 고마움을 전하면서 그래도 댓글은 점차 줄어드는 것 같군요. 고래는 아직 잠수보다는 춤을 더 추고 싶습니다.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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