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남은 여인들 - 초보 연애 1부 1장
신입사원 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하는 일이 뭘까?
글쎄다.... 그 당시 생각하면 기억나는 게 술밖에 없다.
회사 회식, 부서 회식, 선임자와 단둘이... 그리고 그런 자리가 없는 날이면 친구나 후배들...
거의 매일 술자리를 피할 수 없었다.
그날도 동기 몇몇과 함께 후배들을 만나 저녁 겸 술을 먹던 자리였는데, 우리 동기들 말고도 졸업생이 있었다.
이혜진. 군대 가기 전에 신입생이었다가 복학해 보니 졸업하고 없던 2년 후배였다
보기에는 여리여리하고 가냘픈 천상 여자인 아이인데, 보기와는 달리 까불까불 명랑한 성격이었다.
별로 친하지는 않았었다. 아니, 동아리 선후배들이 다 친했지만
다른 후배들보다 유달리 가깝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는 말이다.
군대 있을 때 편지를 몇 번 했었던 아이였는데 그애 말고도 동아리 후배들이 편지를 많이 해서
별달리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이 녀석이 자꾸 들이댔다.
- 선배, 오랜만이네요?
- 선배, 회사 재밌어요?
- 선배, 저랑 짠~해요.
다른 후배들은 상관하지 않고 나에게만 앵겨 붙었다.
불편하고 주변에 눈치가 보일 정도였다.
후배들은 먹고 마시느라 별로 상관하지 않는 듯했지만 나는 신경이 쓰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동기들도 오고, 후배들도 배불리 먹고 마셨기에
우리끼리 자리를 옮겨 한잔 더 하려는데 혜진이가 따라왔다.
그때 동기들 둘이 있었고, 나와 혜진이까지 넷이었다.
혜진이는 꽤 취해 있었다.
- 선배애... 내가 이러케 $*&^#*&% 하는데 선배는 **%^& 어때여?
- 얘, 뭐라 그러는 거니?
혜진이는 이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택시에 태워서 집에 보내기로 하고 종협이가 부축해서 택시를 잡았고 영대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 아, 새끼... 담배 좀 끊어라.
- 이 좋은 걸 왜 끊냐? 넌, 혜진이 구박 좀 하지 마라.
- 구박은 무슨... 지 혼다 까불다 지 혼자 취해서 지 혼자 주정하는데...
- 너 있어서 그런 거야, 임마. 너 온다고 해서 쟤도 온 거고.
- 뭔 소리야?
- 쟤가 너 좋아하는 거 모르냐? 왜 너만 모르냐?
- 쟤가 날? 왜?
- 새꺄, 좋아하는데 이유가 있냐? 좋으니까 좋지.
- 저게 왜 나를... 눈은 높아가지구...
실없는 농담으로 얼버무리면서도 나는 기분이 뭔가 찝찝했다. 살갑게 굴기는 했지만, 원래 다정하고 활발한 애라서 그렇겠거니 생각했지, 나에게 호감이 있어서일 거라고는 짐작도 못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영이...
내 첫사랑.
내 스무살, 스물한살의 기억을 다 가져간 여자, 유신영.
신영이도 동아리 후배였다.
영대며 종협이며 동기놈들이 다들 눈독을 들였지만 나와 사귀었던 신영.
그러나 일년만에 나를 떠나 같은 동아리 후배인 남자동기와 사귀고, 졸업하자마자 결혼해 버린 신영이.
그 이후로 다른 여자에게 눈이 가지 않았었다.
미팅도 해보고, 소개받아서 만나기도 했지만 두 번 만난 여자가 없었다.
꽤 예쁘고 맘에 드는 여자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다시 연락하지 않았었다.
그렇게 신영이를 생각하는데 마침 영대놈이 불을 질렀다.
- 너, 신영이 이후로 사귄 여자 없지?
- 이 새끼가 그 얘긴 왜 또 꺼내고 지랄이야, 지랄이...
- 킬킬킬... 아, 진정해, 진정.
- 진정하기는, 이 시발넘이...
- 안 그럴게, 안 그럴게. 하여튼, 혜진이가 너 좋아하는 거 말은 못하고 술만 먹어서 저렇다.
- 하아~, 나, 참...
그래서 그랬었나? 날 좋아하는 건가? 그때, 종협이가 혜진이를 업고 낑낑대며 다가왔다.
- 야, 씨발, 택시가 안 잡혀.
- 왜? 저기 택시 많구만...
- 얘, 택시 바로 앞에서 토했어. 그걸 보더니 기사놈들이 죄다 그냥 지나가는 거야. 수원역 앞에 베이지색 투피스 여자 태우지 말라구 지들끼리 무전기로 다 떠들구... 씨발놈들이...
그땐 승차거부가 비일비재하던 때였다.
우리끼리 씨발씨발 거리며 큰길 쪽으로 걷기 시작했고, 종협이는 헉헉거리며 악을 썼다.
- 야,.. 헥~, 교대로 좀, 헥~ 업자.
- 난 못 업어. 내가 혜진이보다 몸무게 가벼울 거다.
- 지랄... 혜진이가 얼마나 날씬한데, 게다가 너 땜에 살이 좍좍 빠질 거다. 상사병으로.
- 이 새끼가 뭘 잘못 처먹었나, 왜 나 때문이야, 이 새끼야...
- 이 씨발... 헥~, 씨발놈들아, 헥~, 떠들 힘, 헥~, 있으면, 헥~, 얘 좀 업어. 헥~
종협이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영대는 인도와 차도의 경계에서 택시를 잡으려 손을 흔들어 댔지만 택시들은 그냥 쌩쌩 지나갔다.
당시에는 합승도 기사 맘대로 마구 태우던 시절이라, 네 명을 태워주는 택시는 없었다.
아니, 세 명도 안 태웠고, 두 명이 타도 눈치를 줬었다.
나는 진짜로 혜진이를 업을 생각이 없었다.
혜진이가 나를 좋아한다는 생각에 머리도 복잡했고, 이 두 놈도 아는데 지금까지 나만 몰랐다는 것도 짜증났다.
그런데, 혜진이를 업고 헐떡거리는 종협이의 뒷모습을 무심코 보고는
다가가서 혜진이를 받아 업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거의 빼앗다시피 받아 업었다.
혜진이를 받아 업은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치마가 말려 올라가 팬티스타킹만 입은 것처럼 다 드러난 혜진이의 엉덩이가 눈에 들어왔고,
한 겹 얇은 스타킹을 사이에 두고 허벅지며 엉덩이를 받친 종협의 손을 보는 순간 뭔가가 확 치밀었다.
나를 좋아하는 앤데 왜 저놈이 만져?
- 내가 업을게. 교대하자.
- 헥헥~ 빨리도 교대한다. 헥헥~
- 어쭈? 궁시렁대? 계속 업어, 그럼.
- 아이구, 아닙니다요. 무슨 말씀을요~? 킥킥킥
- 그렇게 좋냐?
- 그러엄~ 날아갈 것 같다.
- 뚱땡이 새끼, 돼지가 어떻게 나냐? 씨발아.
- 물찬 돼지다, 새끼야. 룰루랄랄라... 영대, 저 의리없는 새끼...
돼지가 날건 말건 나는 혜진이를 업었다.
그래도 종협이보다는 내가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뚱땡한 종협이는 힘들지 몰라도 나는...
그러나 만취해서 정신을 잃고 늘어진 사람은 실제 체중보다 무겁게 느껴진다.
축 늘어진 혜진이는 뚱땡이 종협이보다도 무거운 거 아닐까 싶었다.
- 으악, 씨발... 얘, 왜 이리 무거워?
- 큭큭큭... 택시정류장까지 네가 업고 가.
그래, 내가 업는다. 씨발, 가다가 다리가 풀려 주저앉는 한이 있어도, 내가 업는다. 딴놈이 만지게 두지 않는다...
사실 처음에는 좀 무거웠지만 일단 업고 나니 버틸 만했다.
그런 상황에서 두 놈이 뒤에서 나불대기 시작했다.
- 야, 사랑으로 업으니까 힘들어하지도 않는 거 봐봐.
- 아까 그거 반만 다정하게 해 줬으면 업을 일도 없었을 거 아냐.
- 시끄러, 이 새끼들아. 뚱땡이 새끼 불쌍해서 교대해 준 거 뿐이야. 씨발아.
- 불쌍하긴 개뿔... 킥킥킥
- 야, 택시 왔어, 택시. 빨리 와, 빨리 타.
그 와중에 영대는 드디어 택시를 잡았고, 나는 마지막에 타서 뒷좌석 가운데 앉은 혜진이를 감싸안았다.
- 절루 좀 가.
- 뭘 임마. 여기서 어디로 더 가라고?
- 좀 떨어지라구, 임마.
나는 택시기사 뒤에 앉은 영대와 그 옆의 혜진 사이에 손을 집어넣어 영대를 밀어냈고, 영대는 투덜거렸다.
- 야, 아예 이 밖으로 나가랴? 씨발, 나도 애인 만들어야지, 아, 씨발, 진짜...
- 킥킥킥, 아니라면서 졸라 챙기는 거 봐, 저 새끼...
- 아! 아니라니깐...
- 조용히들 좀 해요. 차 안에서 그렇게 떠들면 안돼~
- 아이구, 죄송합니다. 한번만 봐주세요.
- 점잖은 사람들 같아서 태웠구만...
우리는 혜진이네 동네에서 혜진이의 집에 전화를 했고, 혜진이 남동생이 마중을 나왔다.
키가 훤칠한 혜진이의 남동생에게 혜진이를 부축해서 업혀주었다.
그리고는 각자 헤어졌다.
다음 날은 또 정신없이 일과를 보냈다.
신입사원이라는 게 일을 배우기만 하는 게 아니라 배우면서 실무도 처리해야 한다.
OJT 과정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이 OJT-일하면서 훈련하기인 동시에 OTJ-훈련하면서 일하기였다.
며칠 후,그날도 일하며 배우며 시간이 흘러 점심시간이 되었는데,
열두시가 되자마자 띵가띵띵띵 띵가띵... 전화가 울렸다.
- 여보세요?
- 정우 선배. 저, 혜...
- 응, 혜진아.
- 어떻게 알았어요?
- 어떻게 알긴? 넌 내 목소리 몰라?
- 아, 네에...
- 네는 무슨... 그날, 집에서 많이 혼나지는 않았어?
- 킥킥킥... 통금시간 정해졌어요.
- 통금? 몇 시까지?
- 열 시요, 참, 나, 열 시가 뭐야... 열시까지 집에 들어가려면 약속도 못 잡겠네...
- 그래, 그건 그렇고 웬일로?
전화한 용건을 물었는데, 혜진이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 뭐, 그냥... 그날 고생하셨다구요. 미안하구, 고맙구... 또...
- 또?
- 그랬다구요. 고맙고 미안해서...
- 또?
- 또? 또 뭐지? 근데, 선배 목소리 딱딱해지면 무서운 거 알아요?
- 딱딱하고 무서운 사람이 뭐가 좋다구...
- ......
- 좋은 사람 많구만 왜...
혼잣말하듯 말끝을 흐리는데 혜진이가 바로 대답했다.
- 나한텐 선배가 최고예요.
- 최고고 뭐고, 그렇게 술주정이나 하면 네가 날 좋아하는지, 괴롭히는지 내가 아냐?
- 알아주면 좋고, 모르면 그냥 나만 좋아하구... 훗~ 그리구, 주정한 거 아니예요. 마시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
- 으이구... 됐다. 내가 무슨 말을 하겠니...
- ......
- 몰라. 솔직히, 아무 생각이 없다.
- 나 좋아해 달라구 안 할게요.
- 휘유~
- 한숨쉬지 말아요. 부담 안 줄게...
말과는 달리 부담을 주는 애였다.
난 널 좋아하는데 넌 날 좋아하지 않아도 좋다... 심하게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혜진이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인가 또 그날처럼 동기놈들과 선후배들과 약속을 하고 술자리를 갖게 되었는데,
차가 밀려서 좀 늦게 되었다.
늦는다고 전화를 하고 버스를 타고 천천히 가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영대였다.
- 오고 있어?
- 버스 탔는데 차 밀려서 늦는다.
- 그래? 혜진이는 못 온다던데.
- 누가 물어 봤냐? 혜진이 오냐고?
- ㅋㅋㅋ? 발끈하기는?
- 야, 늬들이 일부러 엮으려고 하는 거, 아무 도움 안 돼. 방해가 되면 됐지.
- 알았어, 방해 안 할게.
- 안 하긴 뭘 안 해. 씨발... 방해할 것도 없구만...
- 짜증은...? 씨발넘이... 알았으니까 빨리 와.
- 몰라, 씨발아.
기분이 확 상해서 전화를 끊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 타려고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다.
종협에게만 다음에 보자고 문자를 보냈다.
다들 친한 동기고 영대놈이 종협이놈보다 마음도 더 잘 맞지만, 그럴 땐 이런 개새끼가 따로 없었다.
같은 그룹에서 두 사람이 호감을 갖든 말든 두 사람 이외에 다른 이들이 왜 신경을 쓰는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이놈도 혜진이를 좋아해서? 그건 아니다. 예쁘고 착한 애인도 있는 놈이.
혹시 주변에 썸타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제일 좋다.
호기심이 일어서 궁금해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 남들이 관심가지면 될 것도 안 된다.
그때 둘 중 하나가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고민하며 상담해 온다면 그때 도와주면 된다.
그것도 은근히 해야지, 섣불리 했다가는 오히려 안 도와주느니만 못하다.
고백도 능력이고, 접근도 능력이다.
신영이와 헤어진 것도 그렇다.
선후배들이, 오늘도 만났냐, 언제 키스하냐, 어디까지 갔냐... 이따위 걸 대놓고 물어보는 바람에
신영이가 부끄럽다고 해서 동아리방에 오지도 않고,
둘이서 다른 회원들을 피해서 만나다가 결국 깨졌던 거다.
물론, 재왕이와 신영이가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같이 보러 다니다가 친해지고, 사귀게 되고...
과정은 그렇지만, 그보다도 재왕이가 동아리에 들어오기 전부터 다들 너무 과잉 관심을 보여서
신영이가 불편해하고, 나는 짜증날 정도였던 게 더 크다고 생각했었다.
결국 신영이와는 키스 한 번 못해보고 헤어졌다.
어쨌든, 안 가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혜진이도 안 온다는 게 생각났다.
통금시간 때문인가? 내가 온다는 이유만으로 모임에 참석하던 애가 안 온다는 이유가 뭔지
그냥 궁금해져서 전화를 했다.
- 여보세요?
- 혜진아...
- 아, 선배...
- 목소리가 왜 그리 힘이 없어? 어디 아파?
- 네, 좀...
- 내가 다시 전화할게.
그냥 끊었다. 그리고는 택시를 잡아 타고 혜진이의 집으로 향했다.
혜진이의 힘없는 목소리에 그냥 울컥해서 혜진이에게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때도 몰랐었는데,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은 당연히 더 모르지.
데려다줬던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 골목을 찾아갔다. 택시에서 내려 전화를 했다.
- 네, 선배...
- 나, 지금 혜진이네 집 근천데...
- 네? 진짜루요?
- 응. 여기 문구점 있고, 만화방 있고, 아, 커피숍 있다.
- 아, 어딘지 알겠어요 로댕 들어가 계세요. 금방 나갈게.
- 근데 나와도 돼? 아프다며?
- 하루종일 아팠는데 이제 좀 괜찮아졌어요.
- 아냐, 나, 그냥 갈게.
- 일부러 왔는데 선배 얼굴 볼래요.
로댕. 요즘처럼 대형 프랜차이즈는 아니었지만 같은 간판을 단 가맹점들이었다.
당시에는 프랜차이즈라는 말보다 체인점이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했었다.
커피를 안 마시는 나는 생과일주스를 시켜 놓고 혜진이를 기다렸다.
주스가 금새 나오고도 얼마나 기다렸을까?
딸랑거리는 방울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청바지와 티셔츠에 커다란 숄을 두른 혜진이가 들어왔다.
얼굴이 핼쓱한 게, 누가 봐도 환자 모습이었다.
혜진이는 브랜드커피를 주문하고 내 앞에 와 앉았다.
- 많이 아픈 거 아냐?
- 장염이래요. 하루종일 설사하다가 이제 멈췄어요.
- 숙녀 입에서 예쁜 소리도 나온다. 참...
- 요전엔 아줌마라면서요...ㅋㅋㅋ
전화통화할 때만큼 힘없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웃기까지 하는 혜진이를 보고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 약 먹었어?
- 약도 먹고, 주사도 맞고, 죽도 먹고,
- 설사는 멎었어?
- 말도 말아요. 아까는 오분이 멀다 하고 화장실 들락거렸어요. 화장실 가도 물...
혜진이는 장난스런 말투로 말하다가 말을 끊었다.
장염을 앓아 본 나는 뒷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뭘 먹든 설사다. 물을 마시면 물만 나온다. 항문으로 소변을 보는 걸 상상하면 된다.
물줄기? 물살? 처음엔 소변보다 세다.
그리고 나중엔 줄줄 샌다. 나오는 줄 모르게 줄줄 샌다.
장염의 증상이 다 똑같지는 않겠지만 혜진이가 말하려 했던 건 그거였을 거다.
아무리 허물없이 친하다 해도 이성으로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기는 쉽지 않은 게 당연했다.
- 지금은 괜찮아?
혜진이는 눈을 내리깐 채 고개만 끄덕였다.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웃음이 나왔다. 이 녀석이 내 앞에서 부끄러워하다니.
점원이 와서 혜진이가 주문한 커피를 내려놓았다.
혜진이가 두 손으로 커피잔을 감싸 들었다.
봄이었지만 밤에는 추웠다. 카페에 난방을 하는지 안 하는지는 몰랐지만,
앓다가 나온 아이에게는 추울지도 몰랐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2인용 모직 소파가 마주보고 있었다.
나는 카페 바깥쪽을 향해 앉아 있었고, 혜진이는 출입구를 등지고 있었다.
- 오늘 만난다더니, 안 갔어요?
- 응? 으응.
- 가지 그랬어...
- 그냥...
남녀관계에 오지랖 넓게 나서는 꼴이 보기 싫어서 안 갔다고 말하면 부담스러워할 게 뻔했다.
내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그런 얘기를 할 필요는 없다.
- 너 아프다길래 와 봤어. 술이야 맨날 먹는 거, 뭐...
- 진짜?
- 그래, 임마. 여기 와 있는데도 안 믿어지냐? 진짜냐고 묻게...
혜진이가 배시시 웃었다. 예뻤다. 창백한 얼굴도 예뻤다. 얘가 이렇게 예뻤었나?
혜진이는 어떻게 보면 전도연, 어떻게 보면 공효진 같은 얼굴이다.
물론, 그 여배우들만큼 예쁘다는 건 아니고,
얼굴에서 풍기는 인상이 그 여배우들을 연상시킨다는 말이다.
나는 혜진이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 아프지 마.
- ......
- 안타까우니까.
- 내가 아파서 선배, 안타까워요?
혜진이가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쳐다봤다.
- 누가 아프다는 말 들으면 다 그럴 거라고 생각해.
- 하긴, 선배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죠.
- ......
혜진이의 어깨를 안았다. 커피잔 속에서 커피가 출렁거렸고, 혜진이가 잔을 내려 놓았다.
- 네가 아파서 더 안타까워.
혜진이를 좀더 당겨 안아, 혜진이의 귀 가까이에 귀밑머리 솜털 부분에 살짝 입술을 댄 채 속삭이며 말했다.
입술이 스치자 혜진이가 살짝 떨며 몸을 빼내려 했지만 왼손에 지그시 힘을 주어,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
택시에서 취한 혜진이의 어깨를 감쌌던 건,
취해서 정신없는 혜진이가 차의 움직임에 이리저리 휘청이지 말라고 감싼 거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 품에 감싸안은 거다.
아픈 게 불쌍해서? 핼쓱한 게 안타까와서?
아니다. 분명 사랑스런 감정이었다. 혜진이가 외면한 채 작게 말했다.
- 동정하지 말아요.
- 동정 아냐.
- 선배 마음 약한 거 알아요. 선배는 누가 아파도 그랬을 거예요.
- 네가 좋아진 거야.
- 내가 좋아하는 게 부담스럽고, 못 받아줘서 미안한 거죠?
- 바보 같은 소리.
뻣뻣하던 혜진이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리고 내 품에 무너지듯 안겨 왔다.
혜진이의 귀는 내 입술에서 턱까지 미끄러져 내려왔고, 내 입술은 혜진이의 눈꺼풀에 닿아 있었다.
아까는 스치듯 했지만 지금은 혜진이의 미열이 느껴졌다. 그리고...
- 그러니까 아프지 마.
말이 끝나기 전에, 내 입술에 물기가 느껴졌다. 혜진이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내가 어디가 좋아요?
- 넌 내가 어디가 좋니?
- 선배는... 그냥 좋은 거죠.
- 좋아하는 건 원래 그래.
-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좋아하게 되는 게 어딨어...?
- 갑자기인지는 모르겠고, 좋은 건 맞아.
혜진이의이 오른팔이 내 옆구리를 돌아 등허리를 감쌌다.
우리는 나란히 앉은 것도 아니고, 마주 앉은 것도 아닌 모습으로
비스듬히 앉아 서로를 감싸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커피는 식어 갔고 주스의 얼음은 녹아 갔다.
그러나 나도 혜진이도 음료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었고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다른 손님도 없었고, 아무 소리도 없었다.
숄의 장식이 손등을 간지럽혔다.
목도리도 아니고 망토도 아니고... 그런 걸 숄이라고 부른다는 것도 그날 혜진이가 가르쳐 주었다.
- 내가 짠 거예요. 따뜻하겠죠?
하긴, 동아리에서 컵받침이며, 테이블보며... 혜진이가 뜨개질을 하는 걸 꽤 봤던 기억이 났다.
- 구멍 뻥뻥 났네. 황소바람 들어가겠다.
- 치, 선배 스웨터 짜 주려고 했는데, 그것도 바람 새니까 안 짜 줄래요.
- 아니야, 짜 줘. 바람 새도 따뜻할 거야.
- 피~
혜진이가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사랑스러웠다. 갑자기 입맞추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어깨를 감쌌던 왼손을 당겨 오른손으로 혜진이의 볼을 쓰다듬었다.
혜진이가 또 눈을 내리깔았다.
혜진이의 턱을 받쳤다. 혜진이의 고개를 들어올리려는 내 손에 힘을 주어 저항하는 느낌이 전해졌다.
힘겨루기를 하는 대신, 다시 뺨을 감쌌다.
그리고 품에 당겨 안았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혜진이가 말했다.
- 선배...
이럴 때 응? 왜? 이런 대답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생각할 틈도 없이 내 입이 먼저 열렸다.
- 혜진아...
혜진이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좀더 다가갔다.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좀더, 좀더...
- 나가자.
혜진이의 얼굴을 감쌌던 손을 내려 가방을 들었다.
혜진이는 의아한 눈빛으로 멀뚱히 쳐다봤지만 내가 눈짓으로 점원을 한번 힐끔거리자
금새 숄 자락을 여미고 일어났다.
그날.....
혜진이의 집 근처에서 우리는 첫 키스를 했다.
두 손으로 혜진이의 얼굴을 감싼 채 입을 맞추고 입술을 빨다가 혀를 빨다가 혀를 빨리다가...
한참을 키스하다가 혜진이를 가만히 안아준 다음 혜진이를 집에 들여보냈다.
집에 어떻게 왔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저녁도 안 먹었는데 배도 고프지 않았고, 졸립지도 않았다.
어떻게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누군가가 맘에 들어오는 건 한순간이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예뻐 보이고, 어느 순간 사랑스러워진다.
그날 저녁, 혜진이가 그렇게 내 맘에 들어왔다.
신입사원 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하는 일이 뭘까?
글쎄다.... 그 당시 생각하면 기억나는 게 술밖에 없다.
회사 회식, 부서 회식, 선임자와 단둘이... 그리고 그런 자리가 없는 날이면 친구나 후배들...
거의 매일 술자리를 피할 수 없었다.
그날도 동기 몇몇과 함께 후배들을 만나 저녁 겸 술을 먹던 자리였는데, 우리 동기들 말고도 졸업생이 있었다.
이혜진. 군대 가기 전에 신입생이었다가 복학해 보니 졸업하고 없던 2년 후배였다
보기에는 여리여리하고 가냘픈 천상 여자인 아이인데, 보기와는 달리 까불까불 명랑한 성격이었다.
별로 친하지는 않았었다. 아니, 동아리 선후배들이 다 친했지만
다른 후배들보다 유달리 가깝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는 말이다.
군대 있을 때 편지를 몇 번 했었던 아이였는데 그애 말고도 동아리 후배들이 편지를 많이 해서
별달리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이 녀석이 자꾸 들이댔다.
- 선배, 오랜만이네요?
- 선배, 회사 재밌어요?
- 선배, 저랑 짠~해요.
다른 후배들은 상관하지 않고 나에게만 앵겨 붙었다.
불편하고 주변에 눈치가 보일 정도였다.
후배들은 먹고 마시느라 별로 상관하지 않는 듯했지만 나는 신경이 쓰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동기들도 오고, 후배들도 배불리 먹고 마셨기에
우리끼리 자리를 옮겨 한잔 더 하려는데 혜진이가 따라왔다.
그때 동기들 둘이 있었고, 나와 혜진이까지 넷이었다.
혜진이는 꽤 취해 있었다.
- 선배애... 내가 이러케 $*&^#*&% 하는데 선배는 **%^& 어때여?
- 얘, 뭐라 그러는 거니?
혜진이는 이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택시에 태워서 집에 보내기로 하고 종협이가 부축해서 택시를 잡았고 영대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 아, 새끼... 담배 좀 끊어라.
- 이 좋은 걸 왜 끊냐? 넌, 혜진이 구박 좀 하지 마라.
- 구박은 무슨... 지 혼다 까불다 지 혼자 취해서 지 혼자 주정하는데...
- 너 있어서 그런 거야, 임마. 너 온다고 해서 쟤도 온 거고.
- 뭔 소리야?
- 쟤가 너 좋아하는 거 모르냐? 왜 너만 모르냐?
- 쟤가 날? 왜?
- 새꺄, 좋아하는데 이유가 있냐? 좋으니까 좋지.
- 저게 왜 나를... 눈은 높아가지구...
실없는 농담으로 얼버무리면서도 나는 기분이 뭔가 찝찝했다. 살갑게 굴기는 했지만, 원래 다정하고 활발한 애라서 그렇겠거니 생각했지, 나에게 호감이 있어서일 거라고는 짐작도 못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영이...
내 첫사랑.
내 스무살, 스물한살의 기억을 다 가져간 여자, 유신영.
신영이도 동아리 후배였다.
영대며 종협이며 동기놈들이 다들 눈독을 들였지만 나와 사귀었던 신영.
그러나 일년만에 나를 떠나 같은 동아리 후배인 남자동기와 사귀고, 졸업하자마자 결혼해 버린 신영이.
그 이후로 다른 여자에게 눈이 가지 않았었다.
미팅도 해보고, 소개받아서 만나기도 했지만 두 번 만난 여자가 없었다.
꽤 예쁘고 맘에 드는 여자도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다시 연락하지 않았었다.
그렇게 신영이를 생각하는데 마침 영대놈이 불을 질렀다.
- 너, 신영이 이후로 사귄 여자 없지?
- 이 새끼가 그 얘긴 왜 또 꺼내고 지랄이야, 지랄이...
- 킬킬킬... 아, 진정해, 진정.
- 진정하기는, 이 시발넘이...
- 안 그럴게, 안 그럴게. 하여튼, 혜진이가 너 좋아하는 거 말은 못하고 술만 먹어서 저렇다.
- 하아~, 나, 참...
그래서 그랬었나? 날 좋아하는 건가? 그때, 종협이가 혜진이를 업고 낑낑대며 다가왔다.
- 야, 씨발, 택시가 안 잡혀.
- 왜? 저기 택시 많구만...
- 얘, 택시 바로 앞에서 토했어. 그걸 보더니 기사놈들이 죄다 그냥 지나가는 거야. 수원역 앞에 베이지색 투피스 여자 태우지 말라구 지들끼리 무전기로 다 떠들구... 씨발놈들이...
그땐 승차거부가 비일비재하던 때였다.
우리끼리 씨발씨발 거리며 큰길 쪽으로 걷기 시작했고, 종협이는 헉헉거리며 악을 썼다.
- 야,.. 헥~, 교대로 좀, 헥~ 업자.
- 난 못 업어. 내가 혜진이보다 몸무게 가벼울 거다.
- 지랄... 혜진이가 얼마나 날씬한데, 게다가 너 땜에 살이 좍좍 빠질 거다. 상사병으로.
- 이 새끼가 뭘 잘못 처먹었나, 왜 나 때문이야, 이 새끼야...
- 이 씨발... 헥~, 씨발놈들아, 헥~, 떠들 힘, 헥~, 있으면, 헥~, 얘 좀 업어. 헥~
종협이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영대는 인도와 차도의 경계에서 택시를 잡으려 손을 흔들어 댔지만 택시들은 그냥 쌩쌩 지나갔다.
당시에는 합승도 기사 맘대로 마구 태우던 시절이라, 네 명을 태워주는 택시는 없었다.
아니, 세 명도 안 태웠고, 두 명이 타도 눈치를 줬었다.
나는 진짜로 혜진이를 업을 생각이 없었다.
혜진이가 나를 좋아한다는 생각에 머리도 복잡했고, 이 두 놈도 아는데 지금까지 나만 몰랐다는 것도 짜증났다.
그런데, 혜진이를 업고 헐떡거리는 종협이의 뒷모습을 무심코 보고는
다가가서 혜진이를 받아 업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거의 빼앗다시피 받아 업었다.
혜진이를 받아 업은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치마가 말려 올라가 팬티스타킹만 입은 것처럼 다 드러난 혜진이의 엉덩이가 눈에 들어왔고,
한 겹 얇은 스타킹을 사이에 두고 허벅지며 엉덩이를 받친 종협의 손을 보는 순간 뭔가가 확 치밀었다.
나를 좋아하는 앤데 왜 저놈이 만져?
- 내가 업을게. 교대하자.
- 헥헥~ 빨리도 교대한다. 헥헥~
- 어쭈? 궁시렁대? 계속 업어, 그럼.
- 아이구, 아닙니다요. 무슨 말씀을요~? 킥킥킥
- 그렇게 좋냐?
- 그러엄~ 날아갈 것 같다.
- 뚱땡이 새끼, 돼지가 어떻게 나냐? 씨발아.
- 물찬 돼지다, 새끼야. 룰루랄랄라... 영대, 저 의리없는 새끼...
돼지가 날건 말건 나는 혜진이를 업었다.
그래도 종협이보다는 내가 나을 거라고 생각했다. 뚱땡한 종협이는 힘들지 몰라도 나는...
그러나 만취해서 정신을 잃고 늘어진 사람은 실제 체중보다 무겁게 느껴진다.
축 늘어진 혜진이는 뚱땡이 종협이보다도 무거운 거 아닐까 싶었다.
- 으악, 씨발... 얘, 왜 이리 무거워?
- 큭큭큭... 택시정류장까지 네가 업고 가.
그래, 내가 업는다. 씨발, 가다가 다리가 풀려 주저앉는 한이 있어도, 내가 업는다. 딴놈이 만지게 두지 않는다...
사실 처음에는 좀 무거웠지만 일단 업고 나니 버틸 만했다.
그런 상황에서 두 놈이 뒤에서 나불대기 시작했다.
- 야, 사랑으로 업으니까 힘들어하지도 않는 거 봐봐.
- 아까 그거 반만 다정하게 해 줬으면 업을 일도 없었을 거 아냐.
- 시끄러, 이 새끼들아. 뚱땡이 새끼 불쌍해서 교대해 준 거 뿐이야. 씨발아.
- 불쌍하긴 개뿔... 킥킥킥
- 야, 택시 왔어, 택시. 빨리 와, 빨리 타.
그 와중에 영대는 드디어 택시를 잡았고, 나는 마지막에 타서 뒷좌석 가운데 앉은 혜진이를 감싸안았다.
- 절루 좀 가.
- 뭘 임마. 여기서 어디로 더 가라고?
- 좀 떨어지라구, 임마.
나는 택시기사 뒤에 앉은 영대와 그 옆의 혜진 사이에 손을 집어넣어 영대를 밀어냈고, 영대는 투덜거렸다.
- 야, 아예 이 밖으로 나가랴? 씨발, 나도 애인 만들어야지, 아, 씨발, 진짜...
- 킥킥킥, 아니라면서 졸라 챙기는 거 봐, 저 새끼...
- 아! 아니라니깐...
- 조용히들 좀 해요. 차 안에서 그렇게 떠들면 안돼~
- 아이구, 죄송합니다. 한번만 봐주세요.
- 점잖은 사람들 같아서 태웠구만...
우리는 혜진이네 동네에서 혜진이의 집에 전화를 했고, 혜진이 남동생이 마중을 나왔다.
키가 훤칠한 혜진이의 남동생에게 혜진이를 부축해서 업혀주었다.
그리고는 각자 헤어졌다.
다음 날은 또 정신없이 일과를 보냈다.
신입사원이라는 게 일을 배우기만 하는 게 아니라 배우면서 실무도 처리해야 한다.
OJT 과정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모든 것이 OJT-일하면서 훈련하기인 동시에 OTJ-훈련하면서 일하기였다.
며칠 후,그날도 일하며 배우며 시간이 흘러 점심시간이 되었는데,
열두시가 되자마자 띵가띵띵띵 띵가띵... 전화가 울렸다.
- 여보세요?
- 정우 선배. 저, 혜...
- 응, 혜진아.
- 어떻게 알았어요?
- 어떻게 알긴? 넌 내 목소리 몰라?
- 아, 네에...
- 네는 무슨... 그날, 집에서 많이 혼나지는 않았어?
- 킥킥킥... 통금시간 정해졌어요.
- 통금? 몇 시까지?
- 열 시요, 참, 나, 열 시가 뭐야... 열시까지 집에 들어가려면 약속도 못 잡겠네...
- 그래, 그건 그렇고 웬일로?
전화한 용건을 물었는데, 혜진이는 엉뚱한 대답을 했다.
- 뭐, 그냥... 그날 고생하셨다구요. 미안하구, 고맙구... 또...
- 또?
- 그랬다구요. 고맙고 미안해서...
- 또?
- 또? 또 뭐지? 근데, 선배 목소리 딱딱해지면 무서운 거 알아요?
- 딱딱하고 무서운 사람이 뭐가 좋다구...
- ......
- 좋은 사람 많구만 왜...
혼잣말하듯 말끝을 흐리는데 혜진이가 바로 대답했다.
- 나한텐 선배가 최고예요.
- 최고고 뭐고, 그렇게 술주정이나 하면 네가 날 좋아하는지, 괴롭히는지 내가 아냐?
- 알아주면 좋고, 모르면 그냥 나만 좋아하구... 훗~ 그리구, 주정한 거 아니예요. 마시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
- 으이구... 됐다. 내가 무슨 말을 하겠니...
- ......
- 몰라. 솔직히, 아무 생각이 없다.
- 나 좋아해 달라구 안 할게요.
- 휘유~
- 한숨쉬지 말아요. 부담 안 줄게...
말과는 달리 부담을 주는 애였다.
난 널 좋아하는데 넌 날 좋아하지 않아도 좋다... 심하게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혜진이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인가 또 그날처럼 동기놈들과 선후배들과 약속을 하고 술자리를 갖게 되었는데,
차가 밀려서 좀 늦게 되었다.
늦는다고 전화를 하고 버스를 타고 천천히 가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영대였다.
- 오고 있어?
- 버스 탔는데 차 밀려서 늦는다.
- 그래? 혜진이는 못 온다던데.
- 누가 물어 봤냐? 혜진이 오냐고?
- ㅋㅋㅋ? 발끈하기는?
- 야, 늬들이 일부러 엮으려고 하는 거, 아무 도움 안 돼. 방해가 되면 됐지.
- 알았어, 방해 안 할게.
- 안 하긴 뭘 안 해. 씨발... 방해할 것도 없구만...
- 짜증은...? 씨발넘이... 알았으니까 빨리 와.
- 몰라, 씨발아.
기분이 확 상해서 전화를 끊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 타려고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다.
종협에게만 다음에 보자고 문자를 보냈다.
다들 친한 동기고 영대놈이 종협이놈보다 마음도 더 잘 맞지만, 그럴 땐 이런 개새끼가 따로 없었다.
같은 그룹에서 두 사람이 호감을 갖든 말든 두 사람 이외에 다른 이들이 왜 신경을 쓰는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이놈도 혜진이를 좋아해서? 그건 아니다. 예쁘고 착한 애인도 있는 놈이.
혹시 주변에 썸타는 사람이 있으면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제일 좋다.
호기심이 일어서 궁금해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 남들이 관심가지면 될 것도 안 된다.
그때 둘 중 하나가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고민하며 상담해 온다면 그때 도와주면 된다.
그것도 은근히 해야지, 섣불리 했다가는 오히려 안 도와주느니만 못하다.
고백도 능력이고, 접근도 능력이다.
신영이와 헤어진 것도 그렇다.
선후배들이, 오늘도 만났냐, 언제 키스하냐, 어디까지 갔냐... 이따위 걸 대놓고 물어보는 바람에
신영이가 부끄럽다고 해서 동아리방에 오지도 않고,
둘이서 다른 회원들을 피해서 만나다가 결국 깨졌던 거다.
물론, 재왕이와 신영이가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같이 보러 다니다가 친해지고, 사귀게 되고...
과정은 그렇지만, 그보다도 재왕이가 동아리에 들어오기 전부터 다들 너무 과잉 관심을 보여서
신영이가 불편해하고, 나는 짜증날 정도였던 게 더 크다고 생각했었다.
결국 신영이와는 키스 한 번 못해보고 헤어졌다.
어쨌든, 안 가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고 버스를 기다리는데 혜진이도 안 온다는 게 생각났다.
통금시간 때문인가? 내가 온다는 이유만으로 모임에 참석하던 애가 안 온다는 이유가 뭔지
그냥 궁금해져서 전화를 했다.
- 여보세요?
- 혜진아...
- 아, 선배...
- 목소리가 왜 그리 힘이 없어? 어디 아파?
- 네, 좀...
- 내가 다시 전화할게.
그냥 끊었다. 그리고는 택시를 잡아 타고 혜진이의 집으로 향했다.
혜진이의 힘없는 목소리에 그냥 울컥해서 혜진이에게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때도 몰랐었는데,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은 당연히 더 모르지.
데려다줬던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 골목을 찾아갔다. 택시에서 내려 전화를 했다.
- 네, 선배...
- 나, 지금 혜진이네 집 근천데...
- 네? 진짜루요?
- 응. 여기 문구점 있고, 만화방 있고, 아, 커피숍 있다.
- 아, 어딘지 알겠어요 로댕 들어가 계세요. 금방 나갈게.
- 근데 나와도 돼? 아프다며?
- 하루종일 아팠는데 이제 좀 괜찮아졌어요.
- 아냐, 나, 그냥 갈게.
- 일부러 왔는데 선배 얼굴 볼래요.
로댕. 요즘처럼 대형 프랜차이즈는 아니었지만 같은 간판을 단 가맹점들이었다.
당시에는 프랜차이즈라는 말보다 체인점이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했었다.
커피를 안 마시는 나는 생과일주스를 시켜 놓고 혜진이를 기다렸다.
주스가 금새 나오고도 얼마나 기다렸을까?
딸랑거리는 방울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청바지와 티셔츠에 커다란 숄을 두른 혜진이가 들어왔다.
얼굴이 핼쓱한 게, 누가 봐도 환자 모습이었다.
혜진이는 브랜드커피를 주문하고 내 앞에 와 앉았다.
- 많이 아픈 거 아냐?
- 장염이래요. 하루종일 설사하다가 이제 멈췄어요.
- 숙녀 입에서 예쁜 소리도 나온다. 참...
- 요전엔 아줌마라면서요...ㅋㅋㅋ
전화통화할 때만큼 힘없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게다가 웃기까지 하는 혜진이를 보고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 약 먹었어?
- 약도 먹고, 주사도 맞고, 죽도 먹고,
- 설사는 멎었어?
- 말도 말아요. 아까는 오분이 멀다 하고 화장실 들락거렸어요. 화장실 가도 물...
혜진이는 장난스런 말투로 말하다가 말을 끊었다.
장염을 앓아 본 나는 뒷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뭘 먹든 설사다. 물을 마시면 물만 나온다. 항문으로 소변을 보는 걸 상상하면 된다.
물줄기? 물살? 처음엔 소변보다 세다.
그리고 나중엔 줄줄 샌다. 나오는 줄 모르게 줄줄 샌다.
장염의 증상이 다 똑같지는 않겠지만 혜진이가 말하려 했던 건 그거였을 거다.
아무리 허물없이 친하다 해도 이성으로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기는 쉽지 않은 게 당연했다.
- 지금은 괜찮아?
혜진이는 눈을 내리깐 채 고개만 끄덕였다.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웃음이 나왔다. 이 녀석이 내 앞에서 부끄러워하다니.
점원이 와서 혜진이가 주문한 커피를 내려놓았다.
혜진이가 두 손으로 커피잔을 감싸 들었다.
봄이었지만 밤에는 추웠다. 카페에 난방을 하는지 안 하는지는 몰랐지만,
앓다가 나온 아이에게는 추울지도 몰랐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2인용 모직 소파가 마주보고 있었다.
나는 카페 바깥쪽을 향해 앉아 있었고, 혜진이는 출입구를 등지고 있었다.
- 오늘 만난다더니, 안 갔어요?
- 응? 으응.
- 가지 그랬어...
- 그냥...
남녀관계에 오지랖 넓게 나서는 꼴이 보기 싫어서 안 갔다고 말하면 부담스러워할 게 뻔했다.
내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그런 얘기를 할 필요는 없다.
- 너 아프다길래 와 봤어. 술이야 맨날 먹는 거, 뭐...
- 진짜?
- 그래, 임마. 여기 와 있는데도 안 믿어지냐? 진짜냐고 묻게...
혜진이가 배시시 웃었다. 예뻤다. 창백한 얼굴도 예뻤다. 얘가 이렇게 예뻤었나?
혜진이는 어떻게 보면 전도연, 어떻게 보면 공효진 같은 얼굴이다.
물론, 그 여배우들만큼 예쁘다는 건 아니고,
얼굴에서 풍기는 인상이 그 여배우들을 연상시킨다는 말이다.
나는 혜진이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 아프지 마.
- ......
- 안타까우니까.
- 내가 아파서 선배, 안타까워요?
혜진이가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쳐다봤다.
- 누가 아프다는 말 들으면 다 그럴 거라고 생각해.
- 하긴, 선배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죠.
- ......
혜진이의 어깨를 안았다. 커피잔 속에서 커피가 출렁거렸고, 혜진이가 잔을 내려 놓았다.
- 네가 아파서 더 안타까워.
혜진이를 좀더 당겨 안아, 혜진이의 귀 가까이에 귀밑머리 솜털 부분에 살짝 입술을 댄 채 속삭이며 말했다.
입술이 스치자 혜진이가 살짝 떨며 몸을 빼내려 했지만 왼손에 지그시 힘을 주어,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
택시에서 취한 혜진이의 어깨를 감쌌던 건,
취해서 정신없는 혜진이가 차의 움직임에 이리저리 휘청이지 말라고 감싼 거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 품에 감싸안은 거다.
아픈 게 불쌍해서? 핼쓱한 게 안타까와서?
아니다. 분명 사랑스런 감정이었다. 혜진이가 외면한 채 작게 말했다.
- 동정하지 말아요.
- 동정 아냐.
- 선배 마음 약한 거 알아요. 선배는 누가 아파도 그랬을 거예요.
- 네가 좋아진 거야.
- 내가 좋아하는 게 부담스럽고, 못 받아줘서 미안한 거죠?
- 바보 같은 소리.
뻣뻣하던 혜진이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리고 내 품에 무너지듯 안겨 왔다.
혜진이의 귀는 내 입술에서 턱까지 미끄러져 내려왔고, 내 입술은 혜진이의 눈꺼풀에 닿아 있었다.
아까는 스치듯 했지만 지금은 혜진이의 미열이 느껴졌다. 그리고...
- 그러니까 아프지 마.
말이 끝나기 전에, 내 입술에 물기가 느껴졌다. 혜진이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 내가 어디가 좋아요?
- 넌 내가 어디가 좋니?
- 선배는... 그냥 좋은 거죠.
- 좋아하는 건 원래 그래.
-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좋아하게 되는 게 어딨어...?
- 갑자기인지는 모르겠고, 좋은 건 맞아.
혜진이의이 오른팔이 내 옆구리를 돌아 등허리를 감쌌다.
우리는 나란히 앉은 것도 아니고, 마주 앉은 것도 아닌 모습으로
비스듬히 앉아 서로를 감싸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커피는 식어 갔고 주스의 얼음은 녹아 갔다.
그러나 나도 혜진이도 음료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아무 말도 없었고 아무 움직임도 없었다.
다른 손님도 없었고, 아무 소리도 없었다.
숄의 장식이 손등을 간지럽혔다.
목도리도 아니고 망토도 아니고... 그런 걸 숄이라고 부른다는 것도 그날 혜진이가 가르쳐 주었다.
- 내가 짠 거예요. 따뜻하겠죠?
하긴, 동아리에서 컵받침이며, 테이블보며... 혜진이가 뜨개질을 하는 걸 꽤 봤던 기억이 났다.
- 구멍 뻥뻥 났네. 황소바람 들어가겠다.
- 치, 선배 스웨터 짜 주려고 했는데, 그것도 바람 새니까 안 짜 줄래요.
- 아니야, 짜 줘. 바람 새도 따뜻할 거야.
- 피~
혜진이가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사랑스러웠다. 갑자기 입맞추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어깨를 감쌌던 왼손을 당겨 오른손으로 혜진이의 볼을 쓰다듬었다.
혜진이가 또 눈을 내리깔았다.
혜진이의 턱을 받쳤다. 혜진이의 고개를 들어올리려는 내 손에 힘을 주어 저항하는 느낌이 전해졌다.
힘겨루기를 하는 대신, 다시 뺨을 감쌌다.
그리고 품에 당겨 안았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혜진이가 말했다.
- 선배...
이럴 때 응? 왜? 이런 대답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생각할 틈도 없이 내 입이 먼저 열렸다.
- 혜진아...
혜진이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좀더 다가갔다.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좀더, 좀더...
- 나가자.
혜진이의 얼굴을 감쌌던 손을 내려 가방을 들었다.
혜진이는 의아한 눈빛으로 멀뚱히 쳐다봤지만 내가 눈짓으로 점원을 한번 힐끔거리자
금새 숄 자락을 여미고 일어났다.
그날.....
혜진이의 집 근처에서 우리는 첫 키스를 했다.
두 손으로 혜진이의 얼굴을 감싼 채 입을 맞추고 입술을 빨다가 혀를 빨다가 혀를 빨리다가...
한참을 키스하다가 혜진이를 가만히 안아준 다음 혜진이를 집에 들여보냈다.
집에 어떻게 왔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저녁도 안 먹었는데 배도 고프지 않았고, 졸립지도 않았다.
어떻게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누군가가 맘에 들어오는 건 한순간이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예뻐 보이고, 어느 순간 사랑스러워진다.
그날 저녁, 혜진이가 그렇게 내 맘에 들어왔다.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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