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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촌리 설화(金村里 說話) - 88부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4 17:40 1,680회 0건
금촌리 설화(金村里 說話) - 88


"영자 언니가 죽었단다!“
그 한마디는 잠시 단란하고 오붓했던 방안의 분위기를 순식간에 바꿔 놓았다.
엄마를 비롯해 모두가 경악의 표정으로 말을 잃고 서로의 표정을 살피기도 했다. 누군가 이 놀랍고도 비통한 소식을 해결해 줄까 하는 기대라도 하듯이.
엄마가 먼저 잠시의 정적을 깨고 고함을 질렀다.
“이 문디 가시나! 와 이리 방정을 떠노?”
이어서 영숙 누나도 화 난 표정으로 영미 누나를 쏘아보았다.

그 심정과 행동을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는 방금 전까지 영자 누나의 안부편지를 함께 듣고 있었다. 엄마나 내가 암호문을 해석하듯이 어렵게 읽던 것과는 달리 영숙 누나가 술술 읽어 내려가자 라디오 연속극에 익숙해 있던 우리는 영자 누나의 육성(肉聲)을 듣는 것 같은 착각에도 쉽게 빠질 수 있었다.
마치 영자 누나가 우리 3명의 가족 앞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은 분위기에서 바로 그 이야기중인 주인공이 죽었다고 하니 당장 받아들이기 어렵고, 그런 말을 전한 영미 누나가 미움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것 봐라! 문영자사경가족급래요! ······ 문영자가 죽었으니 가족은 빨리 와달라는 것 아이가?”
영미 누나는 자신이 미움 받는 것이 억울하다는 듯 다시 한번 전보문을 읽었다. 엄마가 그 종이를 나꿔 챘다. 눈동자가 좌우로 돌아가는 것을 보니 엄마는 서너번, 겨우 글자 10개로 전해 온 전보문을 반복해서 읽는 것이 분명했다.
“아이고, 이게 무슨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고! 내가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 ”
엄마는 방바닥을 치며 통곡했다. 울음소리도 크지만 눈물을 펑펑 쏟고 있었다.

영숙 누나가 다시 전보용지를 집어 들었다.
“흐윽!”
누나는 한눈에 읽고 나서 울음을 터뜨렸다. 고개를 숙인 채 두눈을 가리고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꼈다.
영미 누나는 솔직히 말하자면 좀 가관이었다.
“아이고, 언니 없는 세상을 나 혼자 어찌 살아갈꼬!”
동네의 초상집이나 발인할 때 구경한 것을 흉내 내듯이 무릎을 쳐가며 넋두리를 하는 것이 영자 누나와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면 나는 깔깔 웃거나 놀리기라도 할만큼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졸지에 방안이 울음바다가 되었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아니, 나는 울 수가 없었다.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텅 빈 것처럼 한동안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하면서 나는 우선 누나의 모습을 떠올리려 했다.
그러나 그 마저도 불가능했다.
거의 얼굴 전체를 덮고 있는 얽은 자국, 늘 백태가 끼어있는 눈동자, 하지만 오뚝한 콧날과 도톰한 입술, 그 하나하나는 기억할 수 있는데 그것들이 얼굴이라는 윤곽 속에 함께 자리 잡아 문영자라는 모습으로 형상화되지는 않는 것이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서 그럴까, 누나의 죽음으로 나는 그 모습마저 영원히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나를 더욱 비통과 절망에 빠지게 했다.

“언니가 안 죽었을 수도 있겠다!”
통곡과 넋두리의 울음소리가 뚝 그치고 모두 영숙 누나의 입에 시선이 모아졌다.
“그기 무슨 말이고?”
엄마가 무슨 기적이라도 일어나나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 보니 문 영 자 사 경이라고 돼 있잖나?”
“그기 죽었다는 말 아이가?”
영미 누나는 자신이 잘못 읽었다고 할까보아서인지 반박하듯 말했다.

“아니지. 죽었다는 말은 정확히 사망, ······ 별세나 작고 같은 말하고 함께 쓰이는 표현이지. 그런데 여기는 사경이라고 나와 있단 말이다. 사경은 그 말 뜻대로 풀이하면 죽을 지경, 혹은 죽음에 임박한 경지 같은 뜻이다. 위독이나 중태 같은 말과 같은 뜻이지. 그러니 전보를 보낸 쪽에서도 그런 뜻으로 썼다면 언니가 죽지는 않았다는 말이 되는 기라.”
“아이고, 니 말대로 그렇다면 ······ 그저 살아만 있다면 ······ 아이고 하느님, 신령님, 우리 딸내미 좀 살려주이소. 죽었더라도 다시 살려 주이소. 내가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 ”
엄마는 울음을 그친 채 합장을 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채였던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린다.

나는 하느님이나 신이 있다 해도 엄마의 소원이 물론 간절하지만, 저렇게 떼를 쓰듯 하는 것을 들어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영숙 누나가 나름대로 추리한 가설은 솔깃하게 들렸다.
“어떻든 가족이 빨리 와달라고 했으니 어무이하고 나는 이 길로 울진에 가자! 버스가 몇시에 있는지 모르지만 갈아타면서라도 제일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지. 어무이 빨리 떠날 준비해라.”
영숙 누나는 추리뿐 아니라 야전군의 지휘관처럼 사태의 해결을 이끌어나갔다.

“느그들도 언니가 살았나 죽었나가 제일 궁금할 기다. 어무이하고 내가 바쁜 일만 정리되면 바로 시외전화로 알려줄게. 울진까지 서둘러도 4~5시간은 넘게 걸릴 기다. 그러니 5시간 쯤 후 느그는 교대로 이장님 댁에 가서 우리 전화를 기다려라. 시외전화라 시간이 많이 걸리면 안 되니까. ······ 참, 돈도 좀 챙겨가야 될 기다. 어무이 얼마나 있노?”
“며칠 전 영미 밀린 공납금 주고 지금 3만 몇천원쯤 있을 기다.”
“나도 지금 지갑에 2만 몇천원 정도인데 ······ 영미 니는 ······ ?”
“나는 천원짜리 두장뿐이다.”

“영미 저 가시나는 돈이 남아나나. 몇푼만 있어도 군것질 하느라 ······ ”
이런 판국에도 엄마가 영미 누나를 탓하는데 누나는 샐쭉한 표정을 지었지만 반박은 못했다.
“그걸로는 부족하제. 내가 저금해 놓은 것은 있지만 일요일이라 찾을 수도 없고, ······ 어무이, 어디서든 빌릴 수 있는대로 좀 빌려봐라. 갔다 와서 내가 다 갚아줄게.”
“참, 잠깐 나도 좀 있다.”
나는 급히 건넌방의 내 책상서랍에서 봉투를 꺼냈다. 지난번 송금아와 만나 만리장성을 쌓은 것인지, 해프닝인지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 금아 어머니가 봉투를 하나 준 적이 있다.
나는 한사코 안 받겠다고 거절했는데 언니인 송금순이 대신 받아서 며칠 후 나에게 전해준 것이다.

학교의 우리반 남학생들끼리 하는 이야기에서 주워들은 것인데 여인들 중에는 돈만 내면 보지를 대주는 여인들도 있다고 한다.
그런 여인을 창녀, 혹은 갈보라고 한다는데 나도 자지를 박아줬다고 상대방으로부터 돈을 받는다는 것은 나 역시 남자 창녀, 아니 창남이 된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금순이 전해줄 때도 사양을 했는데 억지로 떠맡기듯 해서 받을 수밖에 없었다.
집에 와서 열어보니 무려 10만원이나 들어있었다. 나로서는 난생 처음 쥐어보는 거금이었다. 누구한테 말할 수도 없고 당장 쓸 일도 없어 그냥 서랍에 넣어 두었는데 그 돈을 전국학술경진대회에서 받은 상금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엄마에게 건넸다.

“아무래도 월요일에 출근하기는 어려울 기다. 내일 아침 영도, 니가 우리 사무실의 경자 언니나 그 언니 없으마 박부장님을 찾아서 내가 급한 일로 출근을 못한다고 전화해라. 자, 그럼 어무이 빨리 가자.”
엄마와 영숙 누나가 서두르며 집을 나서자 집안은 다시 적막에 싸였다. 새삼스레 눈물이 나거나 비탄에 빠지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가슴은 타들어간다.
부디 좋은 소식이 와야 할텐데 ······ 무작정 기다려야 한다는 것도 고역이었다.
문득 오늘 오후 2시에 박금순, 금지 자매와 만나기로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 이장댁으로 가서 오늘 오후에 엄마로부터 시외전화가 올테니 우리가 와서 기다리겠다고 알리면서 전화를 빌려 금순에게 “집에 급한일이 생겨 약속을 지킬 수 없다.”고 알렸다.

“느그 엄마가 울진에는 와 갔는데 ······ ?”
“그쨔로 시집간 영자 누나가 아프다 캐서 가신 기라예. 우선 이장님 댁 전화로 소식을 전해주기로 해서 ······ ”
이장 부인이 묻는 말에 나는 간단히 얼버무렸다.
오후 3시부터 내가 이장댁에 가서 꼭 2시간을 대기하는 동안 엄마의 전화는 오지 않았다. 영미 누나가 와서 우리는 교대를 했고 다시 두시간 후에 내가 가기로 했다. 6시가 좀 넘어 영미 누나의 고함이 들렸다.
“영도야!”
나는 곧 방문을 열고 뛰어나갔지만 그 잠깐 사이에 다음 어떤 말이 나올까 가슴이 방망이질을 쳤다.

“언니가 살았단다! 안 죽었단다!”
나는 아무 대꾸도 못하고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처음 누나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처럼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고 텅 빈 것처럼 느껴져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영미 누나가 빠르게 설명을 하는데도 ‘지독한 난산’, ‘빈사지경’, ‘긴급 수혈’ 같은 말이 토막토막 들려오지만 전체적으로는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 이제 누부야가 죽을 위험은 없다는 기가?”
“그래! 어무이하고 이야기도 평소처럼 했고 의사도 잘 회복되고 있다고 했단다. 언니 태몽대로 딸을 낳았는데 갸도 지금 젖 잘 빨고 이상 없다더라. 어무이하고 둘째 언니는 하룻밤 자고 내일 온다 캤다.”

나는 그대로 마루에 털썩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속에서 무엇이 치밀어 오르는데 소리라도 질러야 견딜 것 같았다.
“엉! 엉! 엉! ······ ”
나는 마음껏 소리를 질렀다. 눈물도 펑펑 쏟아진다. 속이 확 트인 것처럼 시원했다. 더욱 기막힌 것은 누나의 모습이 떠오른 것이다.
얽은 자국과 백태가 낀 눈동자, 거기에 오똑한 콧날과 도톰한 입술의 그 한없이 그리운 얼굴이 똑똑히 보인다. 입술이 약간 벌어지며 가지런한 이가 드러나는데 나를 향해 웃음을 보낸다.

“하, 하, 하! ······ ”
누나의 미소를 보며 나도 껄껄 웃었다. 여전히 속에서 무엇인가 치밀어 올라 나는 한껏 소리라도 질러야 풀릴 것 같았다. 한동안 껄껄 웃음을 계속했다.
“어, 우리 영도가 울다가 웃네! 똥구멍에 빨간 털 나겠다.”
영미 누나가 나를 놀렸다. 그러나 그 웃는 표정을 보면 나를 비아냥거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이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나는 웃어도 좋고 울어도 좋고 놀림을 받아도 좋다. 영자 누나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더 이상 좋을 것도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었다.

엄마와 영숙 누나는 울진에서 이틀 밤을 보내고 화요일 밤늦게 도착했다.
집안에는 다시 웃음과 이야기꽃이 피었다. 엄마와 영숙 누나는 2박3일동안 울진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마치 개선한 군인들이 무용담을 자랑하듯 경쟁적으로 쏟아 낸다.
영미 누나와 나는 그 무용담을 가만히 경청하지 못하고 두서없이 이것저것 물어댄다. 그래서 가족들의 대화는 뒤죽박죽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그래도 내 기분은 마냥 좋았다. 영자 누나가 얼마나 힘들게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엄마와 영숙 누나가 했던 이야기를 되풀이 하더라도 애틋하거나 지겹지 않았다. 결과는 말 그대로 해피 엔드니까.

엄마와 영숙 누나가 들려준 말들을 다시 정리해보면 영자 누나는 우리집에 편지가 도착한 다음날 딸을 낳았는데 대단한 난산이었다.
진통이 시작되고 양수가 터졌지만 무려 10여시간이나 출혈이 계속되면서도 아기는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누나가 사는 집은 매형의 숯막 옆에 있으며 제일 가까운 인가가 500m 이상 떨어진 외딴집이었다.
전처가 자식 남매를 데리고 떠난 뒤 가족은 매형 부부와 70대의 시어머니 뿐인데 시어머니는 재작년 겨울에 낙상을 해서 거의 앉은뱅이로 지내고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누나가 몇시간 째 진통을 겪다 아기의 다리 하나가 빠져 나왔는데 더 이상 진척이 없고 하혈만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남편마저 겁에 질리고 절망감에 싸여 그 옆에 앉아 눈물만 흘리고 아무 대처를 못했다는 것이다.
마침 이 집에 우편물을 전하러 왔던 우체부가 이 광경을 보고 다시 자전거를 돌려 거의 1km 쯤 떨어진 이장에게 사연을 알리고, 이장이 매형을 독려해 다리 하나만 나와 있는 산모를 숯 나르던 삼륜화물차에 싣고 읍내 병원의 응급실로 가서 겨우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산모가 중요합니까? 아기가 중요합니까?”
처음 의사는 매형과 이장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상태가 워낙 긴박해서 산모나 아기 중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산모를 구하려면 아기를 절단해서 꺼내야 하고, 아기를 구하려면 뒤늦게라도 제왕절개를 하는데 산모의 생명은 보장할 수 없다.”고 의사는 설명했다.
그런데 거의 빈사지경에다 앞도 못보는 산모가 벌떡 일어나 앉더라는 것이다.

“의사 선생님! 물론 아기가 더 소중합니다. 우선 아기를 살려 주이소! 하지만 에미가 없으면 아기가 살아가는데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미처 제대로 못 크고 지레 죽을 수도 있겠죠. 그러니 아기를 위해서도 제가 있어야 합니다. 아기가 세상에서 첫 울음소리를 낼 때까지 저도 안 죽고 있을테니 우선 아기를 살려 주이소!”
경력이 10여년밖에 안되는 산부인과 전문의는 자신의 의사생활 중 첫 시도를 해보았다. 아기를 다시 산모의 자궁 속으로 집어넣고 두 발을 함께 모아 1시간이 넘게 살살 잡아당긴 끝에 결국 아기는 세상의 공기를 마시며 첫 울음을 터뜨렸다.
“오, 아가야!”
그때까지 버티던 산모는 울음소리를 듣고 그 한마디만 하고 바로 실신했다고 한다.

일단 산모도 아기도 목숨은 구했지만 그 후의 일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장의 지시로 산모의 친정에도 급히 사정을 알리도록 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경악과 비탄에 빠지게 했던 전보였다. 그 혼란은 어쩌면 전보라는 통신수단의 특성 때문일 수도 있다.
당시 서민의 보편적인 통신수단은 편지였다. 우표를 붙여 우체통에만 넣으면 수신자에게 배달되지만 보통 며칠은 걸려야 했다.
빠른 통신수단으로는 전화와 전보가 있었다. 요금이 편지보다 상대적으로 비쌌지만 전화는 서로 대화까지 할 수 있어 정말 편리한 문명의 이기였다. 하지만 전화는 쌍방에 전화기가 있고 전화선이 연결되어 있어야 했다.

전화기가 없는 서민들은 급한 전갈에 전보를 이용했다. 전보는 받는 즉시 우체부가 자전거나 오토바이로 수취인에게 전해주기에 전화 다음으로 빠른 통신수단이지만 요금이 비싸고 글자가 제한된 독특한 요금체계를 갖고 있었다. 기본요금으로 10자까지를 보낼 수 있었고 그 이상 글자가 추가되면 글자 한자마다 요금을 더 받는 식이다.
이를테면 기본요금이 100원일 때 글자를 10자보다 더 할 경우 1자에 20원씩을 더 받는다. 그래서 전보문이 20자가 될 경우 글자 수는 2배지만 요금은 3배를 내야 한다. 그렇기에 가능한 한 10자 이내에 필요한 말을 요약해 적는 것이 전보이용의 요령이기도 했다.

<문영자사경가족급래요>라는 전보문은 한문으로 표기한다면 <文英子死境家族急來要>가 된다.
이중 ‘사경’이라는 말이 원래 ‘중태’나 ‘위독’이라는 말과 뜻이 비슷하기에 잘못 썼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죽을 사(死)’ 자가 들어갔다는 것 때문에 받아본 쪽에서 혼란을 일으킬 소지가 있었던 것이다.
가령 “문영자씨가 많이 아프니 가족이 와주기 바랍니다.” 같은 식으로 일상 쓰는 말로 전했으면 알아듣기 쉬웠을텐데 글자 10개로 압축해 할 말을 전달하려고 머리를 짜다보니 이렇게 생경한 말까지 쓰게 된 것이다.어떻든 그 혼란은 이제 진정되었다.
엄마와 영숙 누나가 울진의 병원에 도착했을 때 영자 누나는 빠른 회복세를 보이며 이미 의식을 되찾았고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더라는 것이다.
“아직 눈도 못뜨지만 코와 입은 지 에미 어릴 때와 판박이더라. 그런데 귀하고 양볼이나 턱은 즈그 외할아버지를 많이 닮은 것 같더라.”
아기의 외할아버지란 나의 아버지다. 나도 언젠가 그 아기를 꼭 보고 싶었다.

다음날 나는 학교 수업이 끝나자 박금순네 집으로 가서 그녀를 만났다.
영자 누나의 사건이 없었다면 전보를 받던 그날, 금순 금지 자매와 빠구리를 하기로 약속까지 했었는데 무산되어 버렸다. 오늘 그녀를 찾는 것은 빠구리가 아니라 영자 누나의 점자 편지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영자 누나가 난산으로 위험한 고비도 있었지만 딸을 낳았고 산모나 아기도 이제는 건강하다고, 엄마와 영숙 누나가 직접 보고 들은 상황을 간략히 전해주고 편지를 건넸다. 점자 편지는 장수로만 20페이지쯤 되는 분량이었다.
금순은 거실의 탁자에 그 편지를 펴놓고 오른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이 편지를 읽는 것과 마찬가지의 행동인 것이다.

“하 하, 그랬군!”
“역시 영자다워!”
“정말 그럴까?”
오른 손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이며 금순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빙그레 웃고 또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도 했다.
“누부야! 우리 누나 편지가 그리 재미있어요? 나도 좀 알게 소리 내서 읽어주면 안될까요?.”
“그러지 뭐. 단, 지금 읽는 것부터야.”

점자 편지는 이미 절반쯤은 읽은 상태였다.
“······ 한달 전에 이미 3번 째 읽었습니다. 또 처음부터 다시 읽고싶은 생각도 들지만 점자가 닳아버릴까 걱정이 되어 가장 보고 싶을 때 다시 꺼낼 생각입니다. ······ ”
그녀는 손가락의 움직임을 잠시 멈추고 부연 설명을 했다.
“마라게트 미첼이 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관련된 이야기야. 영자가 울진으로 갈 때 그 책을 선물했거든. 꽤 장편인데 3번이나 읽었다니 영자의 총기로 보면 달달 외울 것 같아.”
다시 그녀의 손가락이 움직이며 내용이 입을 통해 나에게 전해졌다.

“선생님, 이곳은 타라농장 같은 광활한 평원은 없습니다. 약간의 텃밭을 빼면 집 주변을 거닐어도 비탈을 오르내려야 하는 산골이죠. 하지만 제 마음 속에는 이곳에서도 새로운 타라농장이 펄쳐 집니다.
저의 타라농장 한 구석에는 지금 옥수수와 감자가 자라고 있습니다만 끝없이 펄쳐진 제 마음 속의 타라농장에는 온갖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들과 저의 꿈들이 함께 무르익어 갑니다.
특히 며칠 후면 세상 구경을 하게 될 저의 딸은 이 농장에서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희망이 가득한 새 생명이죠. 아기가 커갈수록 농장은 더욱 풍요해지고 꿈도 부풀어 가겠죠. ······ "
금순은 손놀림을 잠시 멈추고 안경 속의 투명한 맑은 눈을 깜박거리며 말했다.
"엄마가 된다는 것이 이렇게 대단한 것인가? 나에 대한 안부인사는 앞의 몇 줄이고 온통 딸에 관한 이야기야. 아직 낳지도 않았으면서 ······ 어떻든 영자는 좋은 엄마가 되겠지."

그녀는 다시 손가락을 움직이며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께 점자를 배운 그 아름답고 값진 추억과 함께 선생님의 피아노 연주가 그립습니다. 영혼을 달래 주는 것 같은 그 음정들이 지금도 고향을 생각하다 보면 저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습니다.
그 천상의 울림 같은 소리를 못 듣는 것은 아쉽지만 저는 요즘 직접 연주를 하고 있답니다. 그 악기는 집을 떠나면서 가져온 하모니카입니다. 이제 꽤 익숙해져 혀로 박자까지 넣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들려주셨던 피아노 연주 중에도 슈만의 <트로이 메아리>나 드볼작의 <유모레스코>는 원래 피아노곡으로 작곡되었다지만 특히 하모니카와 잘 어울리는 곡 같습니다. 언제 선생님을 다시 뵙게 된다면 저의 하모니카 연주도 한번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그 하모니카는 내가 선물한 것이다. 그때 2개를 사서 나도 가끔 불어보지만 겨우 한 두곡을 틀리지 않게 불 정도다. 그런데 누나는 이미 꽤 잘 부는 것 같다. 나도 누나의 연주를 듣고 싶다.
“하모니카는 태교에도 많이 활용되고 있습니다. 태교라는 것이 태어나는 아기에게 필요하다지만 저는 그 구체적 방범을 모릅니다. 그래도 저는 틈만 나면 아기와 이야기를 합니다.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옆사람과 이야기 하듯 소리를 내죠.
‘아가야, 잠이 깼구나. 이렇게 엄마를 발로 차는 것을 보면 ······ 잘 잤니? 네가 잠든 사이 엄마도 잠깐 잠을 자며 꿈도 꾸었단다. 너는 벌써 태어나 아장아장 걷기도 했지. 엄마와 손을 잡고 온갖 꽃이 만발한 우리의 농장을 함께 걸었단다.’ “

누나의 태교는 금순이 읽어주는 편지에서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깨어보니 너는 여전히 엄마 뱃속에 있었어. 그래, 세상 일은 다 순서가 있고 시간이 필요하지.
지금은 엄마의 아늑한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면서 조금만 더 기다리면 너도 세상을 구경할 때가 올거야. 엄마도 너를 맞으려고 젖이 벌써 부풀고 몽오리가 져 있단다.
오늘은 새 자장가를 들려줄게. <포기와 베스>라는 뮤지컬에 나오는 <섬머 타임>이라는 자장가야. 엄마는 아직 영어를 못 배워서 노래로는 못하지만 하모니카로 들려 줄게. 무척 감미로운 멜로디란다.“
금순은 잠시 손가락의 움직임을 멈추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참, 엄마라는 것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 아기를 가졌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행복해질 수 있다니 ······ ”
편지는 이어졌다.
“선생님, 제가 오늘 너무 말이 많은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모처럼 일방적이긴 하지만 긴 말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행복했습니다.
이곳 생활이 그리 적적한 것은 아니지만 남편은 자기 어머니를 닮아서인지 무뚝뚝하기만 해 별도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답니다. 대답 없는 아기한테만 이야기를 나누다 선생님께 묵었던 사연들을 털어 놓았더니 한결 몸도 마음도 가뿐한 듯 합니다.
그럼 선생님, 오늘은 이만 줄이겠습니다. 선생님의 행복과 건강을 기원합니다. 울진의 타라에서 영자 올림.“
편지가 끝 났다보다. 나는 무심코 금순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탁자를 보았더니 종이는 아직 몇장이 더 남아 있었다.

“추신, ······ 어, 영자가 이런 용어도 아네! ······ 선생님, 죄송하지만 다음의 내용은 이 편지를 선생님께 전한 배달부에게 들려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아아! 이건 영도씨한테 온 것 같아. ······ 저 혼자만 이 사연을 간직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지만 아무래도 그에게는 알려야 된다는 생각에서 이렇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용기를 냈습니다. 부디 선생님께서도 이해하시고 전해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금순이 종이 한 장을 넘겼을 때 나는 별로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누나의 편지는 영숙 누나가 읽어준 우리 가족에게 보낸 것이나, 자기 점자 선생에게 보낸 것이나 모두 누나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눌 때면 사투리 억양에다 투박하고 유치한 말들도 나오는데 머리로 한번 다듬어 나오는 글은 표준말에다 존칭을 쓰면서 마치 라디오에서 들리는 아나운서나 연속극의 대사처럼 더욱 뜻이 선명하고 감미롭게 들리는 것이다.
“사랑하는 영도야. 너도 잘 지내고 있겠지. 이제 키도 더 자랐을 테고 더욱 남자다워졌을 네 모습을 보고, 아니 나로서는 만지고 안아보고 싶구나.
사랑하는 영도야. 부모님께 올린 편지에서도 밝혔지만 나는 이제 곧 엄마가 된단다. 이 감격을, 이 유다르고 특별한 감격을 꼭 너와는 따로 나누어야 하겠기에 이 글을 쓴단다.
네가 나에게 전한 ······ “

금순은 잠시 손놀림을 멈추고 보이지 않는 눈을 크게 떴다.
“너, 영자하고도 섹스했어?”
나는 가슴이 덜컹했다. 편지에 뭐라고 썼는지 모르겠지만 비밀이 발각되는 것은 역시 창피하고 두렵다.
“응? 너 영자하고 섹스했느냐고 ······ ?”
“누나가 먼저 하자 캤어요.”
다시 던지는 질문에 나는 엉겁결에 대답했다. 그리고 곧 부끄러움에 휩싸였다. 물론 누나가 먼저 빠구리를 하자고 했다. 하지만 자지를 꼽은 것은 나다. 그런데도 마치 책임을 회피하듯 나온 말이 남자로소 너무 비겁하게 느껴졌다.

“너한테 따지거나 탓하려는 게 아니야. 나로서는 좀 이해하기 어려워서 ······ ”
그녀는 계속 나를 ‘너’라고 부른다. 그녀와 처음 빠구리를 했을 때부터 그녀는 항상 나를 ‘영도씨’라고 호칭했는데 ‘너’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화가 나 있거나 나를 못된 놈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주눅이 들었다.
“네가 나에게 전한 ······ ”
그녀는 읽다가 만 부분을 다시 처음부터 되풀이했다.
“그 사랑의 씨앗이 내 몸속에서 한 생명으로 탄생해서 이제 곧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 나에게는 얼마나 벅차고 행복한 감격인지 모른단다.”

가슴이 덜컹하기보다 이번에는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다.
그랬구나! 누나가 낳은 아기가 나의 자식이었어. 누나와 내가 빠구리를 한 결과였어. ······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금순은 계속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남들처럼 앞을 볼 수만 있었다면 나는 대청에 걸린 액자의 사진이나 우리 마당의 꽃나무 하나라도 가져왔을텐데 ······ 가족의 품과 고향을 떠나는 나에게 더욱 큰 슬픔을 얹어주는 현실이었지.
그런데 나는 너의 분신을 품속에 간직하고 그곳을 떠날 수 있었단다.
사랑하는 영도야. 너는 여전히 나와 함께 있는 거야.“
우욱!
갑자기 감정이 치밀어 오르며 나는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것 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엉엉 소리를 내며 울음을 계속하자 금순은 편지 읽기를 잠시 멈추었다.

“영도야, 내가 니한테 간절한 부탁이 있다.”
결혼이 열흘 쯤 남은 날, 누나는 나를 앉혀놓고 말했다.
“니가 나를 여자로 만들어 도!”
왠지 그 말이 이상한 느낌으로 다가 왔지만 바로 알아듣지는 못했다.
“니가 내 첫 남자가 되어달라는 말이다.”
그제서야 알아들었지만 나는 반발했다. 여자에게는 순결이라는 것이 있다. 어떻게 며칠 후면 신부가 될 누나의 몸을 망친단 말인가.

하지만 누나의 요청은 끈질기고 간절했으며 나는 결국 굴복했다.
그때도 나는 그저 단순히 성숙한 여인이 빠구리에 대한 호기심이나 욕구를 가졌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고 참 열심히 함께 빠구리를 했었다.
그런데 누나는 처음부터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서방님, 절 받으이소.”
우리의 첫날밤, 한복을 새로 차려 입고 큰 절을 할 때 나는 누나가 장난을 친다고 생각하면서도 급히 맞절을 했고, 누나는 화촉동방이라는 것을 알아서인지 양초도 한자루 준비했다.

되돌아보니 누나는 유난히 정액에 관심이 많았고 집착하는 듯 했다. 그것이 바로 누나의 계획이며 목적이었다.
자지를 주무르다 겉물이 나오는데 “이게 정액이냐?”고 묻기도 했고 사정 후에 정액을 손가락에 묻혀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고 맛을 보기도 했다. 어떨 때는 사정 후에도 정액이 흘러나오지 못하게 하려는 듯 두다리를 높이 들고 있기도 했다.
또 틈만 나면 나에게 빠구리를 하자고 졸랐다. 나도 곧 헤어지게 되는 것이 안타까워 거의 언제나 응해 주었지만 그때도 나는 누나도 꽤 빠구리를 좋아하는구나 정도로 생각했었다.

“수고양이는 고추에 가시가 돋아있어 짝짓기를 하면 암코양이는 되게 아프다는데 그래도 발정난 암코양이는 하루에 20번도 그 짓을 한다 카더라.”
한번은 빠구리가 끝나고 누나가 이런 말을 했다.
“보지가 아픈데 와 그리 자꾸 하노?”
“잉태를 확인하기 위해서 ······ ”
“잉태 ······ ? 그기 뭔데 ······ ?”
“새끼를 배는 것 말이다.”
“아, 임신 ······ !”
나는 단어 하나를 새로 알았지만 그때도 아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집을 떠나기 전날 나는 누나에게 하모니카를 선물했다.
“고맙다. 하지만 나는 니한테 이미 더 귀한 선물을 받았는 기라.”
“그기 뭔데 ······ ?”
“꿈에서 니가 나를 복숭아 밭에 데려갔는데 나는 거기서 탐스럽게 익은 복숭아 3개를 주워담은 기라.”
“먹지도 못했는데 뭐가 그리 대단한 선물이고?”
“니가 나를 그곳에 데려갔잖나? 그리고 그 복숭아는 내 품 속에 있는 기라.”
그것은 누나가 꾸었다는 태몽 중의 하나였다.
정말 나는 그런 일들을 전혀 누나의 목적과 연관시키지 못했고 그저 짐승처럼 빠구리만 해댔다. 새삼 누나에게 미안했고 아둔했던 나 자신이 미웠다.

불쑥 누나가 낳은 딸, 누나의 말대로 우리들의 아기가 떠올랐다.
엄마는 그 아기가 “코와 입술은 지 에미 판박인데 양볼과 턱은 즈그 외할아버지를 닮았더라.”라고 했는데 아버지가 아닌 나를 닮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몰랐을 때는 누나의 딸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갑자기 미움이 북받쳤다.
네가 네 엄마를, 나의 누나를 죽일 뻔 했어. 못된 녀석, 그렇게 오랜 시간 고통을 주고 하마터면 죽을 수도 있었잖아. ······ 아기를 속으로 탓하다 보니 그 원인은 바로 나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내가 누나를 죽일 뻔 했어. ······ 새삼 그 죄책감이 머리를 들면서 울음소리와 눈물이 더 커졌다.

“자, 자. 영도씨 조금 진정해. 그렇게 소리를 내면 편지를 더 읽을 수 없잖아.”
울음소리는 뚝 끊었지만 눈물은 계속 흘러 내렸다.
“내 몸속에서 싹튼 그 생명이 점점 무르익어 가더니 이제 바깥으로 나가겠다고 엄마를 재촉하고 있어. 나 역시 손꼽아 그날을 기억하고 있단다.
그날이 오면 이제 나는 ······ 흐윽! ······ “
금순이 낮은 신음을 내며 점자를 더듬던 손으로 입을 가렸다. 잠시 후 안경을 벗고 눈물을 훔쳤다.
보통 일반사람들이 소리 내어 글을 읽는 것과 달리 그녀는 점자를 손으로 읽고 입으로 말하는데 몇초간이라도 간격이 있는 것 같다.

“그날이 오면 이제 나는 너의 분신을 직접 안고 쓰다듬어 볼 수도 있겠지. 눈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은 아쉽지만 그래도 너의 체취와 숨결을 나는 충분히 느낄 거야. 너뿐 아니라 나는 헤어진 가족과 고향을 다시 내 품에 안게 된 거야.
사랑하는 영도야. 우리가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기약할 수 없지만 그래도 너와 우리 가족들, 또 고향이 내 아기와 더불어 항상 나와 함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행복한 기분으로 살아갈 거야.
너도 부디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아가기를 빌게. 내 아기의 아빠이기에 더욱 너를 사랑하는 누나가.“

편지는 끝났다. 낭독을 마친 금순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나를 향해 미소를 보냈다.
“문영자, 이 앙큼한 계집애! 옆에 있다면 한번 꼬집기라도 하고 싶어. 선생님한테 편지를 읽는 수고를 끼치다 못해 울리기까지 하다니 ······ ”
어느새 나는 눈물이 멈추었지만 슬픔인지 감격인지 모를 충격에서는 벗어나지 못해 그저 멍한 기분이었다.
“그랬구나! 그래서 그랬어! ······ 참 영자다워! 그렇게 깊은 생각을 하다니 ······ 나도 감동했지만 왠지 그래도 너무 슬퍼.”
금순은 또 눈물이 주르르 흘러 안경을 벗어야 했다.

나도 눈물 진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고 우리의 감정은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건만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영도씨, 나도 한 여자로서 사랑을 경험했고, ······ 맹아학교에 근무하던 시절이었어. ······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지만 당시는 사랑이라고 생각했지. ······ 또 영도씨하고 섹스도 경험하고 오르가슴까지 느끼게 되면서 그래도 내 처지에 참 괜찮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고 자위하곤 했지. 그런데 영자를 보니 너무나 감동적이야. 나로서는 생각도 용기도 낼 수 없는 순애보를 영자는 해낸 거야. 새삼 나 자신이 부끄럽고 영자가 부럽기도 해. 나도 아기를 가져볼까? ······ 아니야. 나는 못해! 나는 절실한 사랑의 대상도 없고 그런 용기도 없어. 흐윽 ······ !”

금순은 아예 안경을 벗어버리고 두손으로 눈을 가리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나는 무안하고 그녀에게 미안했다.
발단은 나와 영자 누나가 빠구리를 했고 그래서 우리들의 아기가 태어났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그 사연을 누나가 나에게 제대로 전해주기 위해서는 번역사처럼 박금순이 꼭 필요했다.
그녀는 왜 누나가 나의 아기를 갖고 싶어 했는가를 이해하고 감격했다면서도 그 때문에 자학과 슬픔에 젖어있다. 그녀를 조금이라도 위로해주고 싶었다.

“누부야, 미안합니다. 괜히 우리 일로 누부야를 울려서 ······ ”
나는 그녀를 살폿이 안아 주었다. 그녀도 두팔을 내 등어리에 둘렀다.
나는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입술이 맞닿았지만 그녀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을 보니 눈을 감고 있지만 긴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가라앉은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 나는 지금 그녀와 빠구리를 해도 좋았다. 누나는 죽지 않았고 지금 모녀는 건강하다고 한다. 나는 그녀의 가슴에 한손을 댔다.
“영도씨, 오늘은 그냥 가줬으면 해. 그저 마음이 착잡한데 이건 아무래도 혼자 풀어야 할 것 같아.”

저녁을 먹고 나서 책상 위에 앉았건만 제대로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누나의 반가운 편지에 이어 날라 온 전보에 우리 가족은 기겁을 했지만 그 문제는 이제 잘 풀렸다.
하지만 오늘 나는 또 한번 충격에 휩싸여야 했다.
누나의 몸속에 들어간 나의 정자가 싹을 틔워 한 생명으로 자랐고 딸로 태어났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일을 누구한테 또 털어놓을 수 있을까. 제3자로는 박금순만이 알고 있지만 그녀가 비밀을 함부로 남에게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누나나 나도 이 비밀을 무덤까지 갖고 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들과 관련 없이 불쑥 한 얼굴이 떠올랐다.
정선화! 주막의 주인이다.
왜 그녀를 잊고 있었는지 ``````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영자 누나를 살려준 것이 애초에 그녀였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자 미안한 기분까지 들었다.
누나를 죽음에서 구한 데에는 난산의 현장을 발견한 우체부나 병원으로 급히 옮기게 한 그 마을 이장이나의사도 작용을 했겠지만 근본적으로 누나의 죽음을 막아준 것은 정선화 주모였다.

임판돌에게 이끌려 주막에서 막걸리를 몇잔 마셨고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그 주막에서 잠이 든 그날, 한밤중 잠이 깼을 때 그녀는 내 몸 위에서 보지에 자지를 집어넣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했다.
“네 이 물건은 살기(殺氣)가 있어. 내 말을 명심해라! 만약 네가 진정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몸을 섞게 될 경우 그 전에 꼭 나를 찾아 오거라. 안 그러면 그 여자를 죽일 수 있어.”
나는 코웃음을 쳤다. 자지를 꼽으면 많은 여인들이 신음을 내고 울부짖기도 했으며 입에 넣고는 “생각했던 것보다 부드럽고 맛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 자지가 상대 여인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영자 누나와 첫날밤을 보내려 알몸을 포개고 막 자지를 집어넣으려 할 때 누나가 말했다.
“영도야, 니를 참말로 사랑한다!”
그 말에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급히 옷을 챙겨입고 주모를 찾았다.
“안 그래도 너를 기다리고 있었단다.”
주모는 빙긋 웃으며 나를 목욕재계 시키고 알몸으로 3배를 올리도록 했다. 그리고 나를 눕게 한 후 자지를 자신의 보지에 꼽고 알아듣기 힘든 주문 같은 것을 읊었다.

엉덩이를 흔들거나 방아질을 하지도 않았는데 자지가 뜨거운 물속에 잠긴 듯 열이 전해 오더니 갑자기 나는 사정을 했다.
그것도 다른 때는 여인의 보지 속에서 한창 방아질을 하며 찍, 찍! 하고 물총을 쏘듯 했던 것과는 달리 마치 누가 자지에 빨대를 꼽고 빨아대듯이 그렇게 정액이 빨려 나간 것이었다.
꽤 늦은 시각이었지만 나는 집을 나섰고 내 발길은 주막으로 향했다.
그녀를 만나 아직도 마음에 맺혀 있는 수수께끼를 풀든지 고마움이라도 전해야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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