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남은 여인들 - 달맞이꽃 7장
수민이 아버님은 작은 회사를 경영하고 계셨었다. 수민이와 사귀고 나서도 한참 지나서야 들은 얘기였다. 몇 년 동안 업계 상황이 안 좋아서 회사가 어려워졌는데, 힘들게 버티던 그 회사는 수민이가 대학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서 더 힘들어졌다. 공장 건물과 설비를 담보로 추가 대출을 받아서 직원들 월급을 주며 버티다가, 결국엔 그 월급마저도 체불되는 상황이 되었다고 했다.
회사는 망해도 업주는 잘 먹고 잘 산다는 건, 수민이 아버님께는 해당되지 않았다. 집안이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탓에 수민이도 학교를 일년만 다닌 후 휴학하고 취업했는데, 일반휴학 기간인 1년이 지난 후에도 결국 복학하지 못하고 직장에 계속 다니는 거였다.
어쩌다 우연히 나이 얘기가 나와서 다른 회사에 다녔었나 보다 생각하며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 물었을 뿐인데 수민이는 갑자기 표정이 좀 어두워졌지만 숨기지 않고 다 얘기해 주었었다.
- 어... 미안해. 몰랐었어. 괜히 물어봤네?
- 아니예요. 학교 그만둔 게 좀 아쉽긴 하지만... 좋은 회사 들어갔고, 오빠도 만났잖아요.
- 그래? 좋게 생각하면 다행이고... 많이 아쉬운가 보구나?
- 뭐, 다들 대학 다니니까... 오빠도 대학 나왔고...
- 나야 뭐... 내가 학교에서 한 게 있나? 맨날 동아리에만 가 있었지.
- 동아리 활동도 더 많이 해보고 싶었는데...
그러다가도 수민이는 금새 다시 밝은 표정으로 돌아왔지만, 대학에 대한 수민이의 아쉬움은 꽤 자주 드러났다. 두꺼운 책을 안고 다니는 젊은 애들을 멍하니 바라보기도 했고, 나는 그게 신경쓰여서 동기들이나 후배들과 전화 통화를 할 때에도 가급적 학교나 학생 시절에 관한 얘기는 피하려고 했었다.
그러던 중, 반전의 계기가 생겼다. 어렵던 수민이 아버님 회사에서 새로운 분야의 사업을 추진했었는데, 때마침 나와 사귀기 시작했던 즈음인 늦가을부터 갑자기 그 업계에 붐이 일어서 회사에 활기가 돌았고, 새해 들어서는 눈코 뜰 새 없을 정도로 바빠졌다고 했다.
오랜 동안 힘들게 유지하던 회사가 공장 규모를 키우고 인력을 더 채용했다. 신사업에서 매출이 발생한 지 반년만에 회사는 속된 말로 대박을 쳤고 진짜 잘 나가던 때였다. 코스닥 상장을 추진한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래서 집안에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나는 수민이에게 다시 학교 가는 걸 생각해 보라고 권했다.
마침 수민이네 집에서도 그런 얘기가 오가는 중이라고 했었다. 단 하나 있는 무남독녀 딸이 집안사정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고 직장을 구해 출근하는 모습을 보시는 마음이 오죽하셨을까. 부모님이 내색하지는 않아도 가슴아프게 안타까우셨을 거고, 그런 부모를 보는 자식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때가 또 2월이라서, 새 학기가 시작하는 시기에 맞추어 복학하기 딱 좋을 때였다.
- 나, 오빠 안 만났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 응? 무슨 소리야?
- 오빠 만나고 나서는 좋은 일만 생긴 것 같아서...
- 그래? 듣기 좋은 소린데?
- 진짜예요. 아빠 회사 좋아졌지, 나도 학교 다시 가게 됐지. 다 오빠 만나고 생긴 일이잖아요.
- 잘 됐으니까 망정이지, 안 됐으면? 그것도 내 탓이라 그랬겠네?
- 그런가... 하여튼, 난 오빠가 내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 그래, 그럼 그렇게 생각해.
- 헤헷~
- 자, 그럼 오빠 뽀뽀.
- 치이~
- 뭐가 치야? 싫어?
- 아니. 쪽~ 헤헤...
- 후후...
- 오빠, 뽀뽀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예요?
- 수민이 뽀뽀만 좋아해.
- 아유~, 정말...
나는 수민이에게 키스하는 게 좋았고, 키스를 받는 것도 좋았다. 카페에서 수민이 손을 잡고 있으면 가만히 있지 못하고 그 손을 내 입술이나 볼에 부볐고, 수민이가 나에게 기대면 어깨를 감싸 안고 수민이 이마나 볼에 입술을 대고 있었다. 툭하면 뽀뽀해 달라고 졸랐고, 길을 걷다가도 수민이 입술에 볼을 들이대곤 했었다.
나를 만나기 시작한 것과 아버님이 시작하신 새 사업이 번창하기 시작한 시기가 겹쳤던 우연의 일치 때문에 수민이는 마치 내가 행운을 가져다 주는 사람인 것처럼 생각했다. 사랑에 눈이 먼 어린 아가씨의 철없는 생각이었지만 듣기 싫지는 않았다.
게다가, 내가 대학을 가라고 권했다는 것만으로, 수민이는 내가 하는 모든 말을 자신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사실 수민이를 위해서 말한 건 맞지만 내 판단이 항상 옳은 것도 아닌데 수민이는 내 말이라면 자기가 내키지 않아도 거의 무조건적으로 따르려 하곤 했었다.
수민이는 학교에 전화해서 복학에 대해 문의해 보고, 제일 먼저 나와 상의했다.
- 복적부터 해야 된대요 오빠...
- 복적? 학적이 아예 말소됐나 보네...?
- 어? 오빤 복적이 뭔지 아네요?
- 이런... 뭐, 대충 맞춰 보면 되는 거 아냐?
- 난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서 물어봤거든요...
- 복이라는 건 회복한다는 거구, 적이라는 건 말하자면... 음... 그래, 공식적으로 소속되어 있다는 기록?... 그렇게 생각하면 돼. 그러니까... 학교에 수민이 기록이 말소되어서 회복시켜야 한다... 뭐, 그렇게 이해하면 크게 틀리지는 않을 거야.
- 킥~, 오빠는 역시 선생님 체질이라니깐...
- 풋~
- 학교에서도 오빠랑 똑같이 말했어요. 학적이 말소됐다구...
- 복학하기 전에 한 단계 더 거치는 것 뿐이야. 걱정 마. 많이 복잡하지 않아.
- 헤헷, 오빠가 도와 줄 거죠?
- 아이구, 그러믄입쇼, 마님... 쇤네가 해얍지요...
- 깔깔깔... 아우~ 오빠아...
- 예, 마님, 부르셨습니까요?
- 깔깔깔... 그만 해요, 오빠... 깔깔깔...
제적... 휴학하고 복학하지 않았다고 제적을 시키다니, 섭섭했지만 그런 학교도 있는 모양이었다. 알고 보니 일년마다 다시 휴학을 신청해야 하는데 딱 1년 된 시점에 그걸 하지 않아서 미등록 사유로 제적된 것이었다.
학적을 되살리는 건 생각보다 간단했다. 복적 신청을 하고, 승인만 받으면 되었다. 학년별로 정원에 여유가 없으면 복적이 불가능했지만 다행히 휴학생은 매 학기마다 있었고, 덕분에 여석이 있었다. 또 하루 월차를 내고 수민이와 함께 학교에 찾아갔다. 복적을 하고, 복학을 하고, 등록을 하고... 그런 절차를 거치고 나서 수민이는 다시 학생이 될 수 있었다.
- 아까 잘 들었지? 복적은 한 번밖에 안 된다는 거.
- 듣긴 들었는데... 왜 한 번밖에 안 돼요?
- 그건 나도 모르지... 학칙이 그렇다는데, 뭐...
- 그럼 다음에 또 제적되면 어떡하죠?
- 또 휴학할 일이 생기겠어?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 그건 그렇지만...
- 혹시나 또 제적돼도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 그때도 오빠가 도와줄 거죠?
- 후후...
......
한편, 수민이가 학교에 다시 다니게 된 그 해 봄에, 나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회사를 그만두었다. 퇴사한 결정적인 이유는 과장이 다시 연수원으로 돌아온 거였다. 그것도 몇 달만에 말도 안 되는 승진을 해서 부원장으로. 그룹 회장과 무슨 연줄이 있다나 뭐라나... 그 영향을 받았으니 타의 반, 자진해서 사표를 냈으니 자의 반이었다.
- 부원장이 그렇게 싫어?
- 뭐, 싫다기보다... 괜한 일에 시간 빼앗기고 신경쓰기 싫어요.
- 요즘 취업도 힘든데, 웬만하면 좀 버텨 보지? 정우씨도 곧 다른 부서 갈지도 모르잖아.
- 그냥... 뭔가 변화를 주고 싶어요.
- 이런?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 그런가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너무 익숙해서 좀 지루하기도 해요. 사실, 부원장 오기 전부터 생각했었어요.
- 하긴, 정우씨 성질에...
선배 박대리는 내 걱정을 많이 해 주었다. 그런 선배에게 미안했지만, 이미 마음이 떠난 회사에 다른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이유로 더 붙어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퇴직하고 한 달쯤 빈둥빈둥 놀았다. 하루이틀은 진짜 편했지만 일주일도 안 되어 좀이 쑤시고 지루했다. 빈둥빈둥 노는 게 일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좋은 점도 있기는 있었다. 그 한 달 동안은 매일 저녁 수민이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
낮에는 책도 읽고, 운동도 하고, 컴퓨터 게임도 하다가... 터미널에 가서 하교하는 수민이를 만나 같이 전철을 타고 K시까지 가서 수민이네 동네에서 저녁을 먹고 헤어져 돌아오는 게 그 한 달 동안 내 일과였다.
그러다가 이렇게 저렇게 인맥으로 연결이 닿아 학원에서 강의도 하게 되고, 학교 다닐 때부터 친했던 선배와 팀을 이루어 기업의 외주 프로젝트도 하게 되었다. 그 프로젝트라는 건,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인터넷으로 회사 업무를 처리하고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주는 일이었다. 지금은 웬만한 소기업도 다 전자결재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만, 그때는 보급되기 시작하는 단계였다.
재고와 물류, 근태, 전자문서 결재 등, 대부분의 업무를 온라인으로 할 수 있게 시스템을 구축하고 관리해 주었는데, 시스템 구축하는 용역비는 물론이고, 우리가 구축한 시스템은 우리 서버에서 관리했기 때문에, 매달 들어오는 그 관리수수료도 꽤 쏠쏠했다. 일단 시스템을 공급하기만 하면 거의 고정적으로 매출이 발생하는, 아주 짭짤한 고객들이었다.
사업자 등록은 선배 이름으로 하고, 비용과 세금을 공제한 수익은 똑같이 나누기로 했다. 아무래도 사업 초창기라서 대기업 회사 다닐 때보다 수입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때보다 만족감은 훨씬 컸다. 금전은 부족하지만 않을 정도면 되었고, 시간적 여유가 훨씬 더 사람을 여유롭게 했다.
그때 내가 회사를 그만두자 수민이는 아버님 회사에서 일하면 좋겠다고 은근히 권했지만 나는 최대한 빙 돌려서 부담스러워서 싫다는 의사를 전했고, 똑똑한 수민이는 내 뜻을 이해하고 다시는 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수민이도 학교에 복학하면서 당연히 회사를 그만두었다. 회사에 3년이나 쉴 수 있는 휴직은 없었고, 있다고 하더라도 학교를 다니는 건 휴직사유가 되지 않았다. 수민이도 회사를 그리 아쉬워하지 않았다.
- 뭐, 필요하면 다시 들어가면 되지, 뭐... 흥~
- 큭~ 흥이라고 할 정도야?
- 치사하잖아요, 공부 좀 더 하겠다는데...
- 근데 뭐, 그럴 필요가 있겠어?
- 응? 왜요?
- 수민이는 abc텍 다니면 되잖아. 훗~
- 치, 오빠는 가기 싫다면서 나보고는 거기 가라구요?
- 나랑 수민이랑은 입장이 다르지. 수민이는 사장님 따님...
- 그만 ! 이잇~ 쪽~
- 호오... 수민이가 웬 일이야? 남들 보면 어쩌려고?
- 에? 오빠도 남들 보는 거 신경 써요?
- 아니, 수민이가 갑자기 뽀뽀하니까...
- 그게 오빠 입 막는 제일 좋은 방법이잖아요... 킥~
- 그거 가지고 막히냐...? 혀를 넣어 줘야 막히지....
- 오빠, 누가 들어요... 아우~ 정마알...
- 얼래? 누가 시작했는데? 하핫~
- 큭큭큭~
- 이 아가씨, 키스하고 싶어서 핑계댄 거구만? 이리 와 봐...
- 아잉~ 오빠~... 후움... 흐응...
그런 소리를 하고 내 키스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었다. 수민이도 뿌리치지 않고 내 입술을 받았다. 꽤 어두운 카페였고, 사람도 많지 않았지만 참 대담하고 뻔뻔하게 키스했다. 결국 또 흥분한 우리는 서둘러 내 원룸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때 내가 수민이 아버님 회사에 들어갔었다면 수민이와 나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십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 회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기도 한다.
수민이는 복학하고 아주 즐겁게 학교에 다녔다. 동급생들보다 학번이 빠르니 선배 대접도 받고, 휴학기간도 일년밖에 안 되어서 예전에 친했던 동기들과 선배들도 학교에 꽤 많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덕분에 나는 수민이가 복학한 처음 한달간은 잠시 뒷전으로 밀려나서 서운하기도 했었다.
- 오빠, 과 애들이랑 약속이...
- 저녁에 동아리 모임이...
- 오늘은 동기들이랑...
진짜 무지무지 서운했지만 다행히 평일에만 그랬고, 주말엔 항상 나만을 위해 시간을 내 준 수민이였다. 평일엔 아쉽고 서운했지만, 주말이 되면 바로 풀렸다.
......
수민이네 집이 있던 K시에서 학교에 가려면 전철로 수원에 와서 버스를 갈아타야 했는데, 마침 내가 살던 원룸이 역에서 터미널로 가는 길에서 겨우 한 블록 떨어진 곳이었다. 수민이는 학교 가는 길에 거의 매일 아침, 내 원룸에 들렀다.
수민이에게도 내 원룸 열쇠를 하나 만들어 주었다. 여분 반도체 키도 있었고, 수민이에게 도어락 비밀번호도 알려 주었지만, 수민이는 교통카드를 항상 가지고 다녔기에 따로 열쇠를 들고 다닐 필요 없이 도어락에 수민이의 교통카드를 등록해 주었다. 교통카드 칩은 반도체 키와 똑같은 기능을 했다.
- 자, 여기 가운데 누르면 불이 들어오지? 그때 카드 갖다 대면...
삐리릭~ 지잉~
- 우와, 신기해... 어디, 나도... 여기 누르고...
- ......
- 어? 왜 안 되지...?
- 열려 있으니까 또 안 열리지...
- 아아... 그럼 잠그고...
지잉~ 뾰로롱
- 여기 누르고... 이렇...게...
삐리릭~ 지잉~...
- 우왕... 헤헤헷~
- 에이, 시골뜨기...
- 누가 시골뜨기예요~? 씨잉...
- 이런 거 처음 봐? 별 것도 아닌데 신기해 하니까 시골뜨기지.
- 치, 이거 첨 본다구 시골뜨긴가, 뭐?
- 남자면 촌놈이라고 했을 거야. 여자니까 봐 준거지..
- 안 봐주면요?
- 당연히 촌년이지, 뭘 물어봐...? 크크크...
- 이익, 오빠 정말...
- 칫, 시골뜨기... 킥킥킥...
- 치, 오빠랑 안 놀아... 씨...
- 안놀아씨 아니고 한정우씨거든요?
- 어우우~, 썰렁해...
- 자, 다시 해 봐. 여기 누르고 카드 대고...
삐리릭~ 지잉~...
- 우왕~... 진짜 신기행~...
- 킥... 아이구, 정말... 킥킥킥...
그런 수민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속으로만 말했다. 에이, 초오온년.... 킥킥킥... 지잉~ 뾰로롱~ 지잉~ 삐리릭~ 수민이는 도어락을 계속 여닫으며 우와, 우와 탄성을 질렀다. 그러면서 교통카드가 든 지갑을 신기한 듯 만지작거리는 수민이가 귀엽고 또 귀여웠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또 수민이 입술을 덮쳤다.
- 쪽~ 쪼옵...
- 웁~... 우움...
수민이를 안고 들어와서 침대에 눕혔다. 수민이의 입술을 빨고 티셔츠를 밀어올려 가슴에 입술을 묻었다.
- 하아... 아흑...
- 쭙. 쭙... 헤룹...
- 아... 오빠...
- 사랑해, 수민아...
가슴을 빠는 내 머리를 껴안고 한참 동안 신음하던 수민이가 몸을 뒤집어 나를 올라타고 바지를 벗겼다. 그리고는 잔뜩 발기해 있던 그 녀석을 쓰다듬어 훑으며 말했다.
- 오빠, 오늘은 많이 흥분하면 안 돼요? 알았죠?
- 응. 알았어.
수민이는 잠깐이지만 짜릿하게 빨고 핥아준 다음 귀두 끝을 쪽~ 살짝 빨고 입을 뗐다. 블로우잡을 마무리할 때 수민이는 항상 그렇게 했었다.
- 조금만 더...
- 약속 시간 늦겠어요, 오빠. 오늘은 그만, 응?
- 알았어, 쪽~ 사랑해, 수민아...
- 나도 사랑해요... 쪽~
- 영대 놈, 우리 늦는다고 투덜거리겠다.
- 말로만 듣던 오빠 친구, 오늘 보겠네요?
사정하지 못한 탓에 바지 앞섶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수민이를 곁에 두고 그 상황에서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하니 더욱 더 가라앉히기 힘들었다.
- 한번 폭발했어야 하는 건데...
- 아이잉~... 진짜 안돼요~.
- 알았어. 욕심 안 낼게.
억지로 소변을 보고, 딴생각을 하고... 그러기를 몇 분, 반항하던 그녀석이 어느 정도 누그러진 후, 서둘러 전철역으로 향했다. 영대와 잠실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건 며칠 전이었다.
- 네, 여보세요.
- 나.
- 응, 영대야.
- 이번주 토요일에 뭐 해?
- 토요일...? 음...
- 놀이공원 갈 건데, 같이 갈래?
- 애들도 아니고 놀이공원은...
- 너, 만나는 여자 있지?
- 응... 어떻게 알았냐?
- 다 알지, 임마... 데리고 와. 여자애들은 그런 데 좋아해.
- 둘이 가지, 왜...?
- 자유이용권 다섯 장이나 있어.
- 그래서 내 생각이 났어? 어이구, 기특해라...
- 갈 거야, 말 거야?
- 한번 가 주지, 뭐... 수민이한테 연락해 보구 전화할게.
영대는 내가 혜진이와 사귄 것도, 사귀다 헤어진 것도 몰랐다. 아무도 몰랐다. 혜진이와 내 만남은 그렇게 짧았다. 수민이와 사귀는 걸 영대가 어렴풋이나마 짐작한 것도, 수민이 만나면서부터 동아리 사람들 모이는 술자리에 거의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영대는 여자 후배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 술을 먹었고, 만날 때마다 친구 소개시켜 달라, 미팅시켜 달라 졸라대서 거의 매주 소개팅을 했었다. 그러면서도 맨날 못 생겼네 맘에 안 드네 투덜거렸는데, 드디어 맘에 드는 여자를 만난 모양이었다.
수민이는 당연히 좋아했다. 난 사람 많은 곳에서 정신없이 북적이는 걸 꺼렸는데, 수민이가 너무 좋아해서 도저히 가기 싫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 왔냐?
- 어. 오래 기다렸냐?
- 아니, 우리도 금방 왔어.
- 참, 수민아. 내가 말했었지, 이영대라고...
- 말씀 많이 들었어요. 지수민이예요.
- 네... 저놈이랑 노느라 고생 많으십니다.
- 이 쉬키가... 이 분은...?
- 아... 인정아, 이놈이 그놈이야. 한정우.
- 킥~, 송인정이예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 네, 인정씨. 영대 저놈이 뭐라고 흉보던가요?
- 아니요, 그냥... 여자들 울린다고... 킥~
- 에~? 내가 누굴 울려, 임마?
- 맞잖아, 임마. 한둘이냐?
- 킥~
- 어? 아니야, 수민아... 진짜 아니거든?
- 킥킥~ 오빠 당황하는 게 더 수상해요...
- 아, 나... 하여튼, 동기라는 놈이... 쒸...
여자들이 웃었든 울었든, 나는 전혀 모른다. 나 때문에 운 여자들 중 내가 아는 건 혜진이 뿐이었다. 그러나, 영대놈이 거짓으로 꾸며댄 내 과거와 상관 없이 놀이공원에서는 다들 즐거웠다.
나는 놀이공원이 귀찮고 심드렁했지만 수민이가 좋아하니까 좋았다. 흔들리고 돌고 떨어지고 물 튀고... 그게 뭐가 재밌다고. 나는 그저 피곤하기만 했다. 수민이와, 좋은 친구네 커플과 같이 있다는 것만 좋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놀이공원에서 하루종일 놀다가 나와서 간 곳은 당구장이었다. 내 점수는 30이다. 당구 재미있는 것도 잘 모르겠다. 영대가 하자는 대로 포켓볼을 치기로 했다. 인정씨는 영대 따라 다니면서 포켓볼에 재미를 붙인 모양이었다.
- 저녁 내기야. 커플끼리 팀 대결.
- 헐... 너, 당구 몇 점 쳐?
- 나, 200.
- 난 30점이야, 임마. 30. 공정한 대결이 된다고 생각해?
- 억울하면 실력을 키우든가.
- 하, 나... 점심도 내가 샀구만.
- 언니는 잘 쳐요?
- 응? 나도 못 쳐... 몇 번 쳐 봤어.
- 나도 몇 번밖에 안 쳐 봤는데...
수민이와 인정씨는 벌써 친해져서 언니, 동생 하고 있었다. 인정씨는 간호사였다. 나이는 수민이보다 세 살인가 많았었다. 다소곳하고 얌전한 아가씨였는데, 영대에게만은 까불까불, 잘 맞는 아가씨였다.
포켓볼... 나야 뭐, 당구 기술보다는 그냥 입사각 반사각 생각하며 대충 치는 초보였고, 수민이는 친구들과 몇 번 쳐 봤다고 했고, 인정씨도 그저 그랬다. 영대 혼자만 신이 나서 쳐 댔다. 그러나 세 사람이 죽을 쑤는데 혼자서 잘 될 리가 없었다.
- 야, 거길 막으면 어떡해...? 30 이란 놈이 견제를 이렇게 해?
- 일부러 견제할 재주 있으면 내 공을 치지, 거길 막겠냐?
- 킥... 애들 같애...
- 그러게...
당구는 그냥 그랬고, 같이 어울려 떠드는 게 재미있었다. 나는 내 차례에 공을 대충 치고는 수민이에게 속삭이며 볼에 뽀뽀해 달라고 졸랐다. 수민이는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리고 속삭이며 고개를 저었다.
- 아유, 여기서 어떻게...?
- 뭐 어때? 뽀뽀하는데 장소가 무슨 상관이야?
- 인정 언니 보잖아요.
- 보라지? 부러우면 지들도 하겠지.
- 아유... 정말...
- 야, 뭐 해?. 수민씨 차롄데...
- 킥~
- 어? 인정이 넌 왜 웃어?
- 아니... 킥킥...
- 늬들 뭐 했어?
- 하긴 뭘 해, 임마... 자, 수민이 치자. 큐걸이 줄까?
- ......
인정씨는 우리가 실랑이하는 걸 봤는지 입을 가리고 킥킥댔다. 수민이는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 줄을 몰랐고, 나는 무슨 일 있었느냐는 듯 먼 산만 바라보았다. 영대놈만 나를 보다가 인정씨를 보다가... 영문을 몰라 궁금해 했다.
그렇게 당구를 치다가, 수민이는 졸라대는 나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내 볼에 뽀뽀할 수밖에 없었는데, 하필 또 그걸 영대 녀석이 봤다.
- 야, 나가서 방 잡아, 방...
- 넌 뽀뽀도 방 잡고 하냐?
- 우린 방 잡아야 돼. 뽀뽀로 안 끝나.
- 아우, 오빠, 무슨 얘기를...
- 좋겠다. 안 끝나서... 우린 방 필요 없어. 쪽~
- 아이~ 차암...
- 얼씨구? 이젠 대놓고...? 영화를 찍어라, 아주...
- 이걸 누가 본다구...? 뭐, 좀 있다 방에서 찍든가. 크크크...
- 어우~ 오빠아...
- 저게 아주 돌았구만...?
수민이의 앙증맞은 주먹이 내 등을 강타했다. 두 여자와 두 오빠는 그렇게 어린애 같은 말장난을 하면서 당구를 쳤고, 결과는 당연히 영대 커플이 이겼지만 한 게임을 끝내는 데 삼십분이나 걸렸다.
- 한 게임 더?
- 미쳤냐? 으이구, 내 이것들을 데리고 다시 당구를 치나 봐라.
- 우리 데리고 쳤냐? 너 혼자 쳤지... 크크크...
- 언니, 목걸이가 이렇고, 귀걸이가 저렇고...
- 수민아, 무슨 백이 어쩌고, 어디 구두가 저쩌고...
- 쟤들은 지금 뭐래니?
- 몰라... 저거, 어느 나라 말이냐?
툴툴거리면서도 재미있는 하루를 보내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혼자서 먹는 맥주보다는 삼겹살을 구워놓고 친구와 같이 먹는 소주가 맛있었다.
그렇게 웃으며 저녁을 먹고 영대 커플과 헤어져 돌아왔다. 영대 눈치로 보아 두 사람은 바로 귀가하지 않을 듯했지만 잠실에서 가까운 데 사는 서울 시민들은 그러든 말든, 전철을 타고 한참을 돌아와야 했던 우리는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으니까.
K 역에 내려서 수민이네 집까지 천천히 걸었다.
- 에이... 오늘은 뽀뽀밖에 못 했네.
- 아유... 진짜 남들한테 말해주고 싶어. 오빠 어떤 사람인지..
- 어떤 사람인데?
- 피이... 알면서...
- 음... 수민이 사랑하는 사람?
- 붸에... 그거 말고.
- 흐음... 그럼 뭐지? 멋진 사람?
- 헐... 왕자병이예요?
- 그럼 뭐지? 아... 도대체 모르겠는 걸?
- 왜 몰라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요.
- 가슴에? 그래, 어디...
- 어머나 ! 어우, 누가 봐요오~...
난 가슴에 손을 얹으래서 얹었을 뿐이다. 내가 늘 손을 얹던, 저절로 손이 가는 그 예쁜 가슴에... 수민이는 자기가 하래 놓고는 막상 하니까 화들짝 놀라서 눈을 흘겼다. 수민이는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보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주변도 살피지 않고 그런 짓을 할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았었다.
- 수민이가 얹으라며? 크크크...
- 아우~ 정말...
-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하니까 정말 생각이 나네.
- 큭~ 생각났어요?
- 응.
- 뭔데요?
- 수민이 안고 싶다는 거...
- 아유... 진짜 남들은 전혀 모를 거야... 오빠가 얼마나 야한 사람인지...
- 몰라도 돼. 수민이만 알면 돼.
- 치... 응큼쟁이...
- 크크... 뭐, 이제 알았어?
수민이는 팔짱 낀 내 팔을 때렸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야한 게 뭐, 내 잘못인가? 예쁘고 섹시한 여인이, 그것도 나를 사랑하는 애인이 옆에 있는데 그런 생각이 안 나는 게 더 이상한 거지. 그리고, 나는 수민이에게만, 수민이와 있을 때에만 야했다. 그러면 된 거 아닌가?
- 그래도 이렇게 밝은 데서... 치잉~
- 풋, 밝은 것도 내 잘못이야?
- 아이, 누가 오빠 잘못이래요?
하긴, 그날따라 밤길이 무지 밝았다. 가로등도 가로등이었지만,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 보름달이 떠서 말 그대로 휘영청 밝았다.
- 근데, 오늘 밤 유난히 환하네? 달 진짜 밝다, 그지?
- ......
- 수민아, 달 좀 봐봐. 진짜 밝아.
- 아잇, 몰라요. 달 싫어...
- 응? 달이 싫어? 왜?
- 나 고등학교 때 별명이 달이었단 말이예요. 보름달...
- 큭큭~ 보름달?
- 웃지 마요. 놀리구, 씨이...
- 놀리긴...? 난 수민이 별명이 뭔지도 몰랐는데...
- 얼굴 크다구 놀리는 별명이란 말이야.
- 수민이 얼굴이 뭐가 커? 내 손바닥만한데...
- 2학년때 약 먹구 얼굴 잔뜩 부은 적 있었는데, 진짜 동글동글했었어요. 그때 애들이 보름달 같다구...
- 괜찮아. 지금은 반달인데, 뭐...
- 반달?
- 얼굴이 반쪽이잖아.
- 치, 그래도 싫어. 그것도 달이잖아.
- 달이면 어때? 내가 달맞이꽃 하면 되지.
- 달맞이꽃?
- 응. 달맞이꽃 알아?
- 이름만 들어 봤어요.
- 꽃이 피는 거 본 적 있어? 피어 있는 거 말고, 봉오리에서 좍 펼쳐지는, 피는 움직임 말이야.
- 그거, 카메라 막 오래 열어 놓고 찍어서 빨리 돌리는 거 아니예요?
- 보통은 그렇지. 그런데, 달맞이꽃은 밤이 되면 봉오리가 열려. 움직이는 걸 볼 수 있을 정도로. 근데, 해가 뜨면 또 봉오리가 닫힌대. 그래서 이름도 달맞이꽃이야.
- 아~ 그렇구나.
- 낮에는 달을 기다리며 마음을 닫고 눈도 감고 기다리다가, 밤이 되면 사알짝 열고 오시는 달님 맞이하는 꽃... 이쁘지 않아?
- 오빠가 그렇게 말하니까 되게 아름답게 들려요.
- 수민이가 달이면 난 달맞이꽃이야.
- 아... 오빠...
- 후후후... 어때? 달 할래, 안 할래?
- 할래요. 근데, 오빠한테만.
- 당연하지.
- 오빠도죠?
- 그러엄~, 수민이한테만 꽃이지.
- 아...
- 수민이한테만 꽃이고, 수민이한테만 꽂‘히’고... 큭큭...
- 치~, 킥킥... 오빠는 참...
수민이의 집에는 버얼써 도착했지만 얘기를 나누는 동안 그 동네를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얘기가 끝날 때쯤 수민이는 또 꿈꾸는 표정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또 참지 못하고 그 이마에 살짝 입맞추었다. 수민이의 어깨를 당겨 안고 그렇게 한참 동안 입술을 대고 있다가 수민이를 놓아 주었다.
수민이를 들여보내고 돌아와 아주 편하게 단잠을 잤다. 하늘에 보름달이 떴으니, 또 어딘가 물가 풀섶에서는 달맞이꽃이 봉오리를 열고 있었을 거다. 내 마음 속에도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둥실 떴고, 그 보름달은 한달 내내, 일년 내내 기울지 않는 달이었다. 나는 내 모든 걸 열고 그 달을 맞아들였다. 나는 달맞이꽃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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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왜 달맞이꽃인지 이제야 나왔네요.
이번 편의 타이틀 롤은 여주인공이 아니라 한정우였습니다.
수민이 아버님은 작은 회사를 경영하고 계셨었다. 수민이와 사귀고 나서도 한참 지나서야 들은 얘기였다. 몇 년 동안 업계 상황이 안 좋아서 회사가 어려워졌는데, 힘들게 버티던 그 회사는 수민이가 대학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서 더 힘들어졌다. 공장 건물과 설비를 담보로 추가 대출을 받아서 직원들 월급을 주며 버티다가, 결국엔 그 월급마저도 체불되는 상황이 되었다고 했다.
회사는 망해도 업주는 잘 먹고 잘 산다는 건, 수민이 아버님께는 해당되지 않았다. 집안이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탓에 수민이도 학교를 일년만 다닌 후 휴학하고 취업했는데, 일반휴학 기간인 1년이 지난 후에도 결국 복학하지 못하고 직장에 계속 다니는 거였다.
어쩌다 우연히 나이 얘기가 나와서 다른 회사에 다녔었나 보다 생각하며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 물었을 뿐인데 수민이는 갑자기 표정이 좀 어두워졌지만 숨기지 않고 다 얘기해 주었었다.
- 어... 미안해. 몰랐었어. 괜히 물어봤네?
- 아니예요. 학교 그만둔 게 좀 아쉽긴 하지만... 좋은 회사 들어갔고, 오빠도 만났잖아요.
- 그래? 좋게 생각하면 다행이고... 많이 아쉬운가 보구나?
- 뭐, 다들 대학 다니니까... 오빠도 대학 나왔고...
- 나야 뭐... 내가 학교에서 한 게 있나? 맨날 동아리에만 가 있었지.
- 동아리 활동도 더 많이 해보고 싶었는데...
그러다가도 수민이는 금새 다시 밝은 표정으로 돌아왔지만, 대학에 대한 수민이의 아쉬움은 꽤 자주 드러났다. 두꺼운 책을 안고 다니는 젊은 애들을 멍하니 바라보기도 했고, 나는 그게 신경쓰여서 동기들이나 후배들과 전화 통화를 할 때에도 가급적 학교나 학생 시절에 관한 얘기는 피하려고 했었다.
그러던 중, 반전의 계기가 생겼다. 어렵던 수민이 아버님 회사에서 새로운 분야의 사업을 추진했었는데, 때마침 나와 사귀기 시작했던 즈음인 늦가을부터 갑자기 그 업계에 붐이 일어서 회사에 활기가 돌았고, 새해 들어서는 눈코 뜰 새 없을 정도로 바빠졌다고 했다.
오랜 동안 힘들게 유지하던 회사가 공장 규모를 키우고 인력을 더 채용했다. 신사업에서 매출이 발생한 지 반년만에 회사는 속된 말로 대박을 쳤고 진짜 잘 나가던 때였다. 코스닥 상장을 추진한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래서 집안에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생겼다는 말을 듣고, 나는 수민이에게 다시 학교 가는 걸 생각해 보라고 권했다.
마침 수민이네 집에서도 그런 얘기가 오가는 중이라고 했었다. 단 하나 있는 무남독녀 딸이 집안사정 때문에 학교를 그만두고 직장을 구해 출근하는 모습을 보시는 마음이 오죽하셨을까. 부모님이 내색하지는 않아도 가슴아프게 안타까우셨을 거고, 그런 부모를 보는 자식 마음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때가 또 2월이라서, 새 학기가 시작하는 시기에 맞추어 복학하기 딱 좋을 때였다.
- 나, 오빠 안 만났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 응? 무슨 소리야?
- 오빠 만나고 나서는 좋은 일만 생긴 것 같아서...
- 그래? 듣기 좋은 소린데?
- 진짜예요. 아빠 회사 좋아졌지, 나도 학교 다시 가게 됐지. 다 오빠 만나고 생긴 일이잖아요.
- 잘 됐으니까 망정이지, 안 됐으면? 그것도 내 탓이라 그랬겠네?
- 그런가... 하여튼, 난 오빠가 내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 그래, 그럼 그렇게 생각해.
- 헤헷~
- 자, 그럼 오빠 뽀뽀.
- 치이~
- 뭐가 치야? 싫어?
- 아니. 쪽~ 헤헤...
- 후후...
- 오빠, 뽀뽀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예요?
- 수민이 뽀뽀만 좋아해.
- 아유~, 정말...
나는 수민이에게 키스하는 게 좋았고, 키스를 받는 것도 좋았다. 카페에서 수민이 손을 잡고 있으면 가만히 있지 못하고 그 손을 내 입술이나 볼에 부볐고, 수민이가 나에게 기대면 어깨를 감싸 안고 수민이 이마나 볼에 입술을 대고 있었다. 툭하면 뽀뽀해 달라고 졸랐고, 길을 걷다가도 수민이 입술에 볼을 들이대곤 했었다.
나를 만나기 시작한 것과 아버님이 시작하신 새 사업이 번창하기 시작한 시기가 겹쳤던 우연의 일치 때문에 수민이는 마치 내가 행운을 가져다 주는 사람인 것처럼 생각했다. 사랑에 눈이 먼 어린 아가씨의 철없는 생각이었지만 듣기 싫지는 않았다.
게다가, 내가 대학을 가라고 권했다는 것만으로, 수민이는 내가 하는 모든 말을 자신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사실 수민이를 위해서 말한 건 맞지만 내 판단이 항상 옳은 것도 아닌데 수민이는 내 말이라면 자기가 내키지 않아도 거의 무조건적으로 따르려 하곤 했었다.
수민이는 학교에 전화해서 복학에 대해 문의해 보고, 제일 먼저 나와 상의했다.
- 복적부터 해야 된대요 오빠...
- 복적? 학적이 아예 말소됐나 보네...?
- 어? 오빤 복적이 뭔지 아네요?
- 이런... 뭐, 대충 맞춰 보면 되는 거 아냐?
- 난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서 물어봤거든요...
- 복이라는 건 회복한다는 거구, 적이라는 건 말하자면... 음... 그래, 공식적으로 소속되어 있다는 기록?... 그렇게 생각하면 돼. 그러니까... 학교에 수민이 기록이 말소되어서 회복시켜야 한다... 뭐, 그렇게 이해하면 크게 틀리지는 않을 거야.
- 킥~, 오빠는 역시 선생님 체질이라니깐...
- 풋~
- 학교에서도 오빠랑 똑같이 말했어요. 학적이 말소됐다구...
- 복학하기 전에 한 단계 더 거치는 것 뿐이야. 걱정 마. 많이 복잡하지 않아.
- 헤헷, 오빠가 도와 줄 거죠?
- 아이구, 그러믄입쇼, 마님... 쇤네가 해얍지요...
- 깔깔깔... 아우~ 오빠아...
- 예, 마님, 부르셨습니까요?
- 깔깔깔... 그만 해요, 오빠... 깔깔깔...
제적... 휴학하고 복학하지 않았다고 제적을 시키다니, 섭섭했지만 그런 학교도 있는 모양이었다. 알고 보니 일년마다 다시 휴학을 신청해야 하는데 딱 1년 된 시점에 그걸 하지 않아서 미등록 사유로 제적된 것이었다.
학적을 되살리는 건 생각보다 간단했다. 복적 신청을 하고, 승인만 받으면 되었다. 학년별로 정원에 여유가 없으면 복적이 불가능했지만 다행히 휴학생은 매 학기마다 있었고, 덕분에 여석이 있었다. 또 하루 월차를 내고 수민이와 함께 학교에 찾아갔다. 복적을 하고, 복학을 하고, 등록을 하고... 그런 절차를 거치고 나서 수민이는 다시 학생이 될 수 있었다.
- 아까 잘 들었지? 복적은 한 번밖에 안 된다는 거.
- 듣긴 들었는데... 왜 한 번밖에 안 돼요?
- 그건 나도 모르지... 학칙이 그렇다는데, 뭐...
- 그럼 다음에 또 제적되면 어떡하죠?
- 또 휴학할 일이 생기겠어?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 그건 그렇지만...
- 혹시나 또 제적돼도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 그때도 오빠가 도와줄 거죠?
- 후후...
......
한편, 수민이가 학교에 다시 다니게 된 그 해 봄에, 나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회사를 그만두었다. 퇴사한 결정적인 이유는 과장이 다시 연수원으로 돌아온 거였다. 그것도 몇 달만에 말도 안 되는 승진을 해서 부원장으로. 그룹 회장과 무슨 연줄이 있다나 뭐라나... 그 영향을 받았으니 타의 반, 자진해서 사표를 냈으니 자의 반이었다.
- 부원장이 그렇게 싫어?
- 뭐, 싫다기보다... 괜한 일에 시간 빼앗기고 신경쓰기 싫어요.
- 요즘 취업도 힘든데, 웬만하면 좀 버텨 보지? 정우씨도 곧 다른 부서 갈지도 모르잖아.
- 그냥... 뭔가 변화를 주고 싶어요.
- 이런? 배부른 소리 하고 있네.
- 그런가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너무 익숙해서 좀 지루하기도 해요. 사실, 부원장 오기 전부터 생각했었어요.
- 하긴, 정우씨 성질에...
선배 박대리는 내 걱정을 많이 해 주었다. 그런 선배에게 미안했지만, 이미 마음이 떠난 회사에 다른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이유로 더 붙어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퇴직하고 한 달쯤 빈둥빈둥 놀았다. 하루이틀은 진짜 편했지만 일주일도 안 되어 좀이 쑤시고 지루했다. 빈둥빈둥 노는 게 일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좋은 점도 있기는 있었다. 그 한 달 동안은 매일 저녁 수민이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
낮에는 책도 읽고, 운동도 하고, 컴퓨터 게임도 하다가... 터미널에 가서 하교하는 수민이를 만나 같이 전철을 타고 K시까지 가서 수민이네 동네에서 저녁을 먹고 헤어져 돌아오는 게 그 한 달 동안 내 일과였다.
그러다가 이렇게 저렇게 인맥으로 연결이 닿아 학원에서 강의도 하게 되고, 학교 다닐 때부터 친했던 선배와 팀을 이루어 기업의 외주 프로젝트도 하게 되었다. 그 프로젝트라는 건,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인터넷으로 회사 업무를 처리하고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주는 일이었다. 지금은 웬만한 소기업도 다 전자결재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만, 그때는 보급되기 시작하는 단계였다.
재고와 물류, 근태, 전자문서 결재 등, 대부분의 업무를 온라인으로 할 수 있게 시스템을 구축하고 관리해 주었는데, 시스템 구축하는 용역비는 물론이고, 우리가 구축한 시스템은 우리 서버에서 관리했기 때문에, 매달 들어오는 그 관리수수료도 꽤 쏠쏠했다. 일단 시스템을 공급하기만 하면 거의 고정적으로 매출이 발생하는, 아주 짭짤한 고객들이었다.
사업자 등록은 선배 이름으로 하고, 비용과 세금을 공제한 수익은 똑같이 나누기로 했다. 아무래도 사업 초창기라서 대기업 회사 다닐 때보다 수입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때보다 만족감은 훨씬 컸다. 금전은 부족하지만 않을 정도면 되었고, 시간적 여유가 훨씬 더 사람을 여유롭게 했다.
그때 내가 회사를 그만두자 수민이는 아버님 회사에서 일하면 좋겠다고 은근히 권했지만 나는 최대한 빙 돌려서 부담스러워서 싫다는 의사를 전했고, 똑똑한 수민이는 내 뜻을 이해하고 다시는 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수민이도 학교에 복학하면서 당연히 회사를 그만두었다. 회사에 3년이나 쉴 수 있는 휴직은 없었고, 있다고 하더라도 학교를 다니는 건 휴직사유가 되지 않았다. 수민이도 회사를 그리 아쉬워하지 않았다.
- 뭐, 필요하면 다시 들어가면 되지, 뭐... 흥~
- 큭~ 흥이라고 할 정도야?
- 치사하잖아요, 공부 좀 더 하겠다는데...
- 근데 뭐, 그럴 필요가 있겠어?
- 응? 왜요?
- 수민이는 abc텍 다니면 되잖아. 훗~
- 치, 오빠는 가기 싫다면서 나보고는 거기 가라구요?
- 나랑 수민이랑은 입장이 다르지. 수민이는 사장님 따님...
- 그만 ! 이잇~ 쪽~
- 호오... 수민이가 웬 일이야? 남들 보면 어쩌려고?
- 에? 오빠도 남들 보는 거 신경 써요?
- 아니, 수민이가 갑자기 뽀뽀하니까...
- 그게 오빠 입 막는 제일 좋은 방법이잖아요... 킥~
- 그거 가지고 막히냐...? 혀를 넣어 줘야 막히지....
- 오빠, 누가 들어요... 아우~ 정마알...
- 얼래? 누가 시작했는데? 하핫~
- 큭큭큭~
- 이 아가씨, 키스하고 싶어서 핑계댄 거구만? 이리 와 봐...
- 아잉~ 오빠~... 후움... 흐응...
그런 소리를 하고 내 키스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었다. 수민이도 뿌리치지 않고 내 입술을 받았다. 꽤 어두운 카페였고, 사람도 많지 않았지만 참 대담하고 뻔뻔하게 키스했다. 결국 또 흥분한 우리는 서둘러 내 원룸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때 내가 수민이 아버님 회사에 들어갔었다면 수민이와 나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십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 회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기도 한다.
수민이는 복학하고 아주 즐겁게 학교에 다녔다. 동급생들보다 학번이 빠르니 선배 대접도 받고, 휴학기간도 일년밖에 안 되어서 예전에 친했던 동기들과 선배들도 학교에 꽤 많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덕분에 나는 수민이가 복학한 처음 한달간은 잠시 뒷전으로 밀려나서 서운하기도 했었다.
- 오빠, 과 애들이랑 약속이...
- 저녁에 동아리 모임이...
- 오늘은 동기들이랑...
진짜 무지무지 서운했지만 다행히 평일에만 그랬고, 주말엔 항상 나만을 위해 시간을 내 준 수민이였다. 평일엔 아쉽고 서운했지만, 주말이 되면 바로 풀렸다.
......
수민이네 집이 있던 K시에서 학교에 가려면 전철로 수원에 와서 버스를 갈아타야 했는데, 마침 내가 살던 원룸이 역에서 터미널로 가는 길에서 겨우 한 블록 떨어진 곳이었다. 수민이는 학교 가는 길에 거의 매일 아침, 내 원룸에 들렀다.
수민이에게도 내 원룸 열쇠를 하나 만들어 주었다. 여분 반도체 키도 있었고, 수민이에게 도어락 비밀번호도 알려 주었지만, 수민이는 교통카드를 항상 가지고 다녔기에 따로 열쇠를 들고 다닐 필요 없이 도어락에 수민이의 교통카드를 등록해 주었다. 교통카드 칩은 반도체 키와 똑같은 기능을 했다.
- 자, 여기 가운데 누르면 불이 들어오지? 그때 카드 갖다 대면...
삐리릭~ 지잉~
- 우와, 신기해... 어디, 나도... 여기 누르고...
- ......
- 어? 왜 안 되지...?
- 열려 있으니까 또 안 열리지...
- 아아... 그럼 잠그고...
지잉~ 뾰로롱
- 여기 누르고... 이렇...게...
삐리릭~ 지잉~...
- 우왕... 헤헤헷~
- 에이, 시골뜨기...
- 누가 시골뜨기예요~? 씨잉...
- 이런 거 처음 봐? 별 것도 아닌데 신기해 하니까 시골뜨기지.
- 치, 이거 첨 본다구 시골뜨긴가, 뭐?
- 남자면 촌놈이라고 했을 거야. 여자니까 봐 준거지..
- 안 봐주면요?
- 당연히 촌년이지, 뭘 물어봐...? 크크크...
- 이익, 오빠 정말...
- 칫, 시골뜨기... 킥킥킥...
- 치, 오빠랑 안 놀아... 씨...
- 안놀아씨 아니고 한정우씨거든요?
- 어우우~, 썰렁해...
- 자, 다시 해 봐. 여기 누르고 카드 대고...
삐리릭~ 지잉~...
- 우왕~... 진짜 신기행~...
- 킥... 아이구, 정말... 킥킥킥...
그런 수민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속으로만 말했다. 에이, 초오온년.... 킥킥킥... 지잉~ 뾰로롱~ 지잉~ 삐리릭~ 수민이는 도어락을 계속 여닫으며 우와, 우와 탄성을 질렀다. 그러면서 교통카드가 든 지갑을 신기한 듯 만지작거리는 수민이가 귀엽고 또 귀여웠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또 수민이 입술을 덮쳤다.
- 쪽~ 쪼옵...
- 웁~... 우움...
수민이를 안고 들어와서 침대에 눕혔다. 수민이의 입술을 빨고 티셔츠를 밀어올려 가슴에 입술을 묻었다.
- 하아... 아흑...
- 쭙. 쭙... 헤룹...
- 아... 오빠...
- 사랑해, 수민아...
가슴을 빠는 내 머리를 껴안고 한참 동안 신음하던 수민이가 몸을 뒤집어 나를 올라타고 바지를 벗겼다. 그리고는 잔뜩 발기해 있던 그 녀석을 쓰다듬어 훑으며 말했다.
- 오빠, 오늘은 많이 흥분하면 안 돼요? 알았죠?
- 응. 알았어.
수민이는 잠깐이지만 짜릿하게 빨고 핥아준 다음 귀두 끝을 쪽~ 살짝 빨고 입을 뗐다. 블로우잡을 마무리할 때 수민이는 항상 그렇게 했었다.
- 조금만 더...
- 약속 시간 늦겠어요, 오빠. 오늘은 그만, 응?
- 알았어, 쪽~ 사랑해, 수민아...
- 나도 사랑해요... 쪽~
- 영대 놈, 우리 늦는다고 투덜거리겠다.
- 말로만 듣던 오빠 친구, 오늘 보겠네요?
사정하지 못한 탓에 바지 앞섶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수민이를 곁에 두고 그 상황에서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하니 더욱 더 가라앉히기 힘들었다.
- 한번 폭발했어야 하는 건데...
- 아이잉~... 진짜 안돼요~.
- 알았어. 욕심 안 낼게.
억지로 소변을 보고, 딴생각을 하고... 그러기를 몇 분, 반항하던 그녀석이 어느 정도 누그러진 후, 서둘러 전철역으로 향했다. 영대와 잠실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건 며칠 전이었다.
- 네, 여보세요.
- 나.
- 응, 영대야.
- 이번주 토요일에 뭐 해?
- 토요일...? 음...
- 놀이공원 갈 건데, 같이 갈래?
- 애들도 아니고 놀이공원은...
- 너, 만나는 여자 있지?
- 응... 어떻게 알았냐?
- 다 알지, 임마... 데리고 와. 여자애들은 그런 데 좋아해.
- 둘이 가지, 왜...?
- 자유이용권 다섯 장이나 있어.
- 그래서 내 생각이 났어? 어이구, 기특해라...
- 갈 거야, 말 거야?
- 한번 가 주지, 뭐... 수민이한테 연락해 보구 전화할게.
영대는 내가 혜진이와 사귄 것도, 사귀다 헤어진 것도 몰랐다. 아무도 몰랐다. 혜진이와 내 만남은 그렇게 짧았다. 수민이와 사귀는 걸 영대가 어렴풋이나마 짐작한 것도, 수민이 만나면서부터 동아리 사람들 모이는 술자리에 거의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영대는 여자 후배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 술을 먹었고, 만날 때마다 친구 소개시켜 달라, 미팅시켜 달라 졸라대서 거의 매주 소개팅을 했었다. 그러면서도 맨날 못 생겼네 맘에 안 드네 투덜거렸는데, 드디어 맘에 드는 여자를 만난 모양이었다.
수민이는 당연히 좋아했다. 난 사람 많은 곳에서 정신없이 북적이는 걸 꺼렸는데, 수민이가 너무 좋아해서 도저히 가기 싫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 왔냐?
- 어. 오래 기다렸냐?
- 아니, 우리도 금방 왔어.
- 참, 수민아. 내가 말했었지, 이영대라고...
- 말씀 많이 들었어요. 지수민이예요.
- 네... 저놈이랑 노느라 고생 많으십니다.
- 이 쉬키가... 이 분은...?
- 아... 인정아, 이놈이 그놈이야. 한정우.
- 킥~, 송인정이예요. 말씀 많이 들었어요.
- 네, 인정씨. 영대 저놈이 뭐라고 흉보던가요?
- 아니요, 그냥... 여자들 울린다고... 킥~
- 에~? 내가 누굴 울려, 임마?
- 맞잖아, 임마. 한둘이냐?
- 킥~
- 어? 아니야, 수민아... 진짜 아니거든?
- 킥킥~ 오빠 당황하는 게 더 수상해요...
- 아, 나... 하여튼, 동기라는 놈이... 쒸...
여자들이 웃었든 울었든, 나는 전혀 모른다. 나 때문에 운 여자들 중 내가 아는 건 혜진이 뿐이었다. 그러나, 영대놈이 거짓으로 꾸며댄 내 과거와 상관 없이 놀이공원에서는 다들 즐거웠다.
나는 놀이공원이 귀찮고 심드렁했지만 수민이가 좋아하니까 좋았다. 흔들리고 돌고 떨어지고 물 튀고... 그게 뭐가 재밌다고. 나는 그저 피곤하기만 했다. 수민이와, 좋은 친구네 커플과 같이 있다는 것만 좋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놀이공원에서 하루종일 놀다가 나와서 간 곳은 당구장이었다. 내 점수는 30이다. 당구 재미있는 것도 잘 모르겠다. 영대가 하자는 대로 포켓볼을 치기로 했다. 인정씨는 영대 따라 다니면서 포켓볼에 재미를 붙인 모양이었다.
- 저녁 내기야. 커플끼리 팀 대결.
- 헐... 너, 당구 몇 점 쳐?
- 나, 200.
- 난 30점이야, 임마. 30. 공정한 대결이 된다고 생각해?
- 억울하면 실력을 키우든가.
- 하, 나... 점심도 내가 샀구만.
- 언니는 잘 쳐요?
- 응? 나도 못 쳐... 몇 번 쳐 봤어.
- 나도 몇 번밖에 안 쳐 봤는데...
수민이와 인정씨는 벌써 친해져서 언니, 동생 하고 있었다. 인정씨는 간호사였다. 나이는 수민이보다 세 살인가 많았었다. 다소곳하고 얌전한 아가씨였는데, 영대에게만은 까불까불, 잘 맞는 아가씨였다.
포켓볼... 나야 뭐, 당구 기술보다는 그냥 입사각 반사각 생각하며 대충 치는 초보였고, 수민이는 친구들과 몇 번 쳐 봤다고 했고, 인정씨도 그저 그랬다. 영대 혼자만 신이 나서 쳐 댔다. 그러나 세 사람이 죽을 쑤는데 혼자서 잘 될 리가 없었다.
- 야, 거길 막으면 어떡해...? 30 이란 놈이 견제를 이렇게 해?
- 일부러 견제할 재주 있으면 내 공을 치지, 거길 막겠냐?
- 킥... 애들 같애...
- 그러게...
당구는 그냥 그랬고, 같이 어울려 떠드는 게 재미있었다. 나는 내 차례에 공을 대충 치고는 수민이에게 속삭이며 볼에 뽀뽀해 달라고 졸랐다. 수민이는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리고 속삭이며 고개를 저었다.
- 아유, 여기서 어떻게...?
- 뭐 어때? 뽀뽀하는데 장소가 무슨 상관이야?
- 인정 언니 보잖아요.
- 보라지? 부러우면 지들도 하겠지.
- 아유... 정말...
- 야, 뭐 해?. 수민씨 차롄데...
- 킥~
- 어? 인정이 넌 왜 웃어?
- 아니... 킥킥...
- 늬들 뭐 했어?
- 하긴 뭘 해, 임마... 자, 수민이 치자. 큐걸이 줄까?
- ......
인정씨는 우리가 실랑이하는 걸 봤는지 입을 가리고 킥킥댔다. 수민이는 얼굴이 빨개져서 어쩔 줄을 몰랐고, 나는 무슨 일 있었느냐는 듯 먼 산만 바라보았다. 영대놈만 나를 보다가 인정씨를 보다가... 영문을 몰라 궁금해 했다.
그렇게 당구를 치다가, 수민이는 졸라대는 나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내 볼에 뽀뽀할 수밖에 없었는데, 하필 또 그걸 영대 녀석이 봤다.
- 야, 나가서 방 잡아, 방...
- 넌 뽀뽀도 방 잡고 하냐?
- 우린 방 잡아야 돼. 뽀뽀로 안 끝나.
- 아우, 오빠, 무슨 얘기를...
- 좋겠다. 안 끝나서... 우린 방 필요 없어. 쪽~
- 아이~ 차암...
- 얼씨구? 이젠 대놓고...? 영화를 찍어라, 아주...
- 이걸 누가 본다구...? 뭐, 좀 있다 방에서 찍든가. 크크크...
- 어우~ 오빠아...
- 저게 아주 돌았구만...?
수민이의 앙증맞은 주먹이 내 등을 강타했다. 두 여자와 두 오빠는 그렇게 어린애 같은 말장난을 하면서 당구를 쳤고, 결과는 당연히 영대 커플이 이겼지만 한 게임을 끝내는 데 삼십분이나 걸렸다.
- 한 게임 더?
- 미쳤냐? 으이구, 내 이것들을 데리고 다시 당구를 치나 봐라.
- 우리 데리고 쳤냐? 너 혼자 쳤지... 크크크...
- 언니, 목걸이가 이렇고, 귀걸이가 저렇고...
- 수민아, 무슨 백이 어쩌고, 어디 구두가 저쩌고...
- 쟤들은 지금 뭐래니?
- 몰라... 저거, 어느 나라 말이냐?
툴툴거리면서도 재미있는 하루를 보내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혼자서 먹는 맥주보다는 삼겹살을 구워놓고 친구와 같이 먹는 소주가 맛있었다.
그렇게 웃으며 저녁을 먹고 영대 커플과 헤어져 돌아왔다. 영대 눈치로 보아 두 사람은 바로 귀가하지 않을 듯했지만 잠실에서 가까운 데 사는 서울 시민들은 그러든 말든, 전철을 타고 한참을 돌아와야 했던 우리는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으니까.
K 역에 내려서 수민이네 집까지 천천히 걸었다.
- 에이... 오늘은 뽀뽀밖에 못 했네.
- 아유... 진짜 남들한테 말해주고 싶어. 오빠 어떤 사람인지..
- 어떤 사람인데?
- 피이... 알면서...
- 음... 수민이 사랑하는 사람?
- 붸에... 그거 말고.
- 흐음... 그럼 뭐지? 멋진 사람?
- 헐... 왕자병이예요?
- 그럼 뭐지? 아... 도대체 모르겠는 걸?
- 왜 몰라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요.
- 가슴에? 그래, 어디...
- 어머나 ! 어우, 누가 봐요오~...
난 가슴에 손을 얹으래서 얹었을 뿐이다. 내가 늘 손을 얹던, 저절로 손이 가는 그 예쁜 가슴에... 수민이는 자기가 하래 놓고는 막상 하니까 화들짝 놀라서 눈을 흘겼다. 수민이는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보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주변도 살피지 않고 그런 짓을 할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았었다.
- 수민이가 얹으라며? 크크크...
- 아우~ 정말...
-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하니까 정말 생각이 나네.
- 큭~ 생각났어요?
- 응.
- 뭔데요?
- 수민이 안고 싶다는 거...
- 아유... 진짜 남들은 전혀 모를 거야... 오빠가 얼마나 야한 사람인지...
- 몰라도 돼. 수민이만 알면 돼.
- 치... 응큼쟁이...
- 크크... 뭐, 이제 알았어?
수민이는 팔짱 낀 내 팔을 때렸지만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야한 게 뭐, 내 잘못인가? 예쁘고 섹시한 여인이, 그것도 나를 사랑하는 애인이 옆에 있는데 그런 생각이 안 나는 게 더 이상한 거지. 그리고, 나는 수민이에게만, 수민이와 있을 때에만 야했다. 그러면 된 거 아닌가?
- 그래도 이렇게 밝은 데서... 치잉~
- 풋, 밝은 것도 내 잘못이야?
- 아이, 누가 오빠 잘못이래요?
하긴, 그날따라 밤길이 무지 밝았다. 가로등도 가로등이었지만,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 보름달이 떠서 말 그대로 휘영청 밝았다.
- 근데, 오늘 밤 유난히 환하네? 달 진짜 밝다, 그지?
- ......
- 수민아, 달 좀 봐봐. 진짜 밝아.
- 아잇, 몰라요. 달 싫어...
- 응? 달이 싫어? 왜?
- 나 고등학교 때 별명이 달이었단 말이예요. 보름달...
- 큭큭~ 보름달?
- 웃지 마요. 놀리구, 씨이...
- 놀리긴...? 난 수민이 별명이 뭔지도 몰랐는데...
- 얼굴 크다구 놀리는 별명이란 말이야.
- 수민이 얼굴이 뭐가 커? 내 손바닥만한데...
- 2학년때 약 먹구 얼굴 잔뜩 부은 적 있었는데, 진짜 동글동글했었어요. 그때 애들이 보름달 같다구...
- 괜찮아. 지금은 반달인데, 뭐...
- 반달?
- 얼굴이 반쪽이잖아.
- 치, 그래도 싫어. 그것도 달이잖아.
- 달이면 어때? 내가 달맞이꽃 하면 되지.
- 달맞이꽃?
- 응. 달맞이꽃 알아?
- 이름만 들어 봤어요.
- 꽃이 피는 거 본 적 있어? 피어 있는 거 말고, 봉오리에서 좍 펼쳐지는, 피는 움직임 말이야.
- 그거, 카메라 막 오래 열어 놓고 찍어서 빨리 돌리는 거 아니예요?
- 보통은 그렇지. 그런데, 달맞이꽃은 밤이 되면 봉오리가 열려. 움직이는 걸 볼 수 있을 정도로. 근데, 해가 뜨면 또 봉오리가 닫힌대. 그래서 이름도 달맞이꽃이야.
- 아~ 그렇구나.
- 낮에는 달을 기다리며 마음을 닫고 눈도 감고 기다리다가, 밤이 되면 사알짝 열고 오시는 달님 맞이하는 꽃... 이쁘지 않아?
- 오빠가 그렇게 말하니까 되게 아름답게 들려요.
- 수민이가 달이면 난 달맞이꽃이야.
- 아... 오빠...
- 후후후... 어때? 달 할래, 안 할래?
- 할래요. 근데, 오빠한테만.
- 당연하지.
- 오빠도죠?
- 그러엄~, 수민이한테만 꽃이지.
- 아...
- 수민이한테만 꽃이고, 수민이한테만 꽂‘히’고... 큭큭...
- 치~, 킥킥... 오빠는 참...
수민이의 집에는 버얼써 도착했지만 얘기를 나누는 동안 그 동네를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얘기가 끝날 때쯤 수민이는 또 꿈꾸는 표정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또 참지 못하고 그 이마에 살짝 입맞추었다. 수민이의 어깨를 당겨 안고 그렇게 한참 동안 입술을 대고 있다가 수민이를 놓아 주었다.
수민이를 들여보내고 돌아와 아주 편하게 단잠을 잤다. 하늘에 보름달이 떴으니, 또 어딘가 물가 풀섶에서는 달맞이꽃이 봉오리를 열고 있었을 거다. 내 마음 속에도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둥실 떴고, 그 보름달은 한달 내내, 일년 내내 기울지 않는 달이었다. 나는 내 모든 걸 열고 그 달을 맞아들였다. 나는 달맞이꽃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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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왜 달맞이꽃인지 이제야 나왔네요.
이번 편의 타이틀 롤은 여주인공이 아니라 한정우였습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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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접속일 | 2024-11-03 | ||
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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