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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은 여인들 - 4부11장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4 17:37 1,343회 0건
기억에 남은 여인들 - 달맞이꽃 11장



어느 주말, 수민이가 어머님과 함께 어디 가야 해서 오전에만 잠깐 만났던 주말이었다. 아침 일찍 만나서 영화도 보고 차도 마시고... 그 시간이 지나가 버리는 걸 아쉬워하며 수민이를 바래다준 후, 집 앞에서 키스만 하고 돌아왔다. 응큼한 욕심을 부리지 않았고,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 아쉽다... 그지?
- 치, 오빠 또 그 생각 하지? 난 오늘 재미있고 좋았는데...
-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혹시... 수민이가 더 하고 싶은 거 아니야?
- 킥킥킥... 아니거든요? 응큼쟁이 오빠.
- 에~? 오늘은 응큼한 짓 안 했는데?
- 응큼한 짓 하루쯤 안 해도 오빤 응큼쟁이 대마왕이야. 킥~
- 쩝~... 할 말이 없네.
- 가요, 빨리... 더 있으면 위험해, 진짜.
- 수민이가 응큼한 짓 하고 싶어질까 봐 그런 거지? ㅋㅋㅋ
- 아이, 뭐예요오~?. 또 야한 생각 하고... 치~
- 응큼쟁이니까 응큼한 생각 하지.
- 아유, 증말...
- 후후후... 갈게. 전화해~?
- 네. 헤헤...

그 다음날 일요일에도 실컷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밀린 빨래를 하고, 청소도 하고... 방을 깨끗이 정리하고 나서 맥주 한 캔 들고 기대 앉아 야구중계를 보고 있었다. 수민이를 만나지 않는 주말은 진짜 지루하고 심심했다. 야구도 재미없어서 TV 리모콘을 든 채 슬슬 졸고 있을 무렵, 전화가 울렸다. 수민이겠지 생각하며 무심코 받았는데, 수민이 번호가 아닌, 낯선 전화번호였다.

- 네...
- 한정우 선배님 휴대폰인가요?
- 어? 신영...이?
- 우와~ 어떻게 알았어요? 역시 선배는...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꿈에서도 잊을 수 없는 목소리... 신영이의 목소리였다. 어떻게 들으면 아기 같고, 어떻게 들으면 유혹하는 목소리 같은, 나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하던 날과 전혀 다름 없는 목소리였다. 어쩌면... 어쩌면 다시 내 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게 하는 말투였다. 그 짧은 시간에 그런 생각까지 하다가 대답을 했다.

- 훗~ 네 목소리를 내가 왜 몰라...?
- 히히, 잘 지냈어요?
- 응. 어떻게 지내?
- 나도 잘 지내죠.
- 그래, 요즘은 뭐 해?
- 나는 뭐... 놀아요. 헤헤...
- 그래? 놀 땐 놀아도 괜찮아. 잘 될 거야...

우리가 졸업할 때보다도 취업이 더 힘들어지던 시기였다. 그래서 놀고 있다는 후배들에게 잘 될 거라는 격려를 해 주곤 했었고, 신영이가 놀고 있다는 말에 나는 별 생각 없이 후배들에게 하던 대로 말했었다.

- 그게 아니라... 나, 결혼해요.
- .....
- 모월 모일 토요일이예요...
- 그래? 축하해야겠네?
- 선배, 올 거죠?
- 근데, 신랑은 누구...
- 아이, 알잖아요?
- 재왕이?
- 뭐, 모르는 것처럼 말해요? 히히히...

잠깐 멍했었다. 진짜 어이가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라면 몰라도 어떻게 나에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을까... 신영이가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하면서 웃을 수가 있다는 게 좀 어이가 없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청첩장 보내라고 주소를 알려 주고 끊었다.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신영이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까? 나와 속삭였던 사랑을 다 잊었는지, 아니면 알면서도 이렇게 뻔뻔할 수 있는 건지... 마치 점심 사달라고 조르던 일학년 때와 비슷한 목소리로 자기 결혼식에 오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라면, 내가 신영이 입장이라면 내가 차버린 사람에게 저렇게 말하는 게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영이에게 나는 추억 속의 첫사랑이 아니라, 하객이 되어 자신의 결혼식을 축하해 줄 동문 선배 중의 한 명이었다. 어쩌면 몇 푼 축의금으로 생각하는지도 모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람에 불과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화가 났다. 하객이 되어 달라면 하객이 되어 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도 아주 특별한 하객이 되어 주겠다고. 수민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실, 특별한 하객이 되려는 계획에 수민이도 있어야 했지만, 그보다는 그 순간 수민이가 보고 싶어서였다. 진짜 간절하게 수민이가 보고 싶었다.

- 오빠?
- 응, 수민아, 뭐 해?
- 음... 오빠 생각. 헤~ 오빠는요?
- 그냥... 수민이 보고 싶어해.
- 헤에~ 진짜?
- 응... 참, 잘 갔다 왔어? 어디 갔었어?
- 그냥... 외삼촌 댁에 갔다 온 거예요.
- 그랬구나... 저기 수민아, 모월 모일 혹시 무슨 약속 있어? 토요일인데...
- 모월 모일이요? 왜요?
- 응? 어디 좀 같이 가게.
- 잠깐만요. 좀 보고요. 어디... 아, 어떡하죠? 나, 누구 만나기로 했는데...
- 한달도 더 남았는데, 벌써 선약이 있어?
- 이거, 무지 중요한 약속인데...
-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 한번 물어 볼까요? 바꿀 수 있는지.
- 그래도 돼?
- 알아 보구요. 오빠는 그날 뭐 할 건데요?
- 말했잖아. 수민이랑 만나서 어디 좀 가려고 한다고.
- 그래요? 그렇구나아... 그럼 안 되겠네? 킥킥킥...
- 응? 왜 웃어?
- 오빠, 바보...
- 응?... 아~, 하하하... 아, 이런...

내가 신영이 생각에 너무 몰입해 있었는지, 수민이가 말하는 걸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순간, 수민이에게 너무 미안했다. 하지만 수민이는 나를 잠깐 놀려먹었다고 생각했는지 그 상황을 재미있어했다.

- 나, 주말엔 항상 오빠 만나러 가잖아요.
- 그래, 맞아. 후후후...
- 근데, 어디 가려구요?
- 가 보면 알아.
- 아이, 궁금하잖아요.
- 그래야 재미있지.

수민이와 전화를 끊고, 나는 제법 큰 미용실에 신부화장을 예약했다. 결혼식에 수민이와 가서 함께 축하해 줄 생각이었다. 수민이를 가능한 한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치장해서 함께 가고 싶었다.

보여 주고 싶었다, 나와 신영이의 스토리를 아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신영이와 재왕이를 축복해줄 수 있다고... 그러면 아주 우쭐할 것 같았다. 왜 그런 생각이 났는지도 모르겠고, 돌이켜 보면 아주 치졸하고 쪼잔한 생각이었지만, 그때는 진짜 그렇게 하고 싶었다.

신영이와 나를 아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 모습을 신영이에게, 모두에게 확인시켜주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변했기를 바랐다. 그 반짝이던 신영이가 빛이 바랬기를. 또, 내 바람과 달리 여전히 반짝인다 해도 내 손에 있는 보물이 더 빛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 반나절 내내 그런 치졸한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그 주 내내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일주일동안 뭘 했는지도 모르게 주말만 기다렸고, 토요일 아침부터 수민이를 데리고 백화점에 갔다.

- 오빠. 여긴 왜요...?
- 그냥... 정장 한 벌 해 주고 싶어서.
- 갑자기 정장은 왜... 입을 일도 없는데...
- 왜 없어? 학교에서 공식적인 자리 있으면 입어야지.
- 아이, 참... 운동화 신고 왔는데...
- 구두도 사면 되지.
- 양말 신고 힐을 어떻게 사요?
- 그럼 스타킹도 사.
- 큭~ 그러다 오빠, 여기 있는 거 다 사겠네?
- 뭐, 그러든지...
- 킥~ 뭐예요오~?

그렇게 나만 들떠서 수민이를 잡아끌듯이 백화점에 데리고 갔는데, 스키복 살 때보다 고르기가 더 어려웠다. 나는 여자 옷을 사 본 적이 없으니 골라줄 만한 안목도 없었고, 수민이는 내키지 않는지 뭘 걸쳐도 시큰둥하기만 했다. 결국 하나도 사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렀고 배가 고파서 밥부터 먹고 또 둘러보기로 했다.

백화점 꼭대기층 식당에서 주문을 하고 수프를 떠먹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예약했던 미용실이었다.

- 네...
- xx 헤어아트예요. 한정우님 되시죠?
- 네, 맞습니다.
- 결혼식이 모월 모일 맞으시죠?
- 네.
- 신부화장 예약하셨고요. 시각은 열한 시입니다. 늦지 않게 부탁드릴게요.
- 네, 열한 시라고 하셨죠? 알겠습니다.
- 신부님 오실 때는 다른 옷 입고 오시고, 예복은 따로 준비해서 오시고요.
- 네, 그렇게 할게요.
- 뭐, 어쩌고 저쩌고, 이렇고 저렇고...
- 네, 그날 뵙죠.

전화를 끊는데 수민이 표정이 좋지 않았다. 걱정스런 얼굴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 주문하신 스테이크 나왔습니다. 미디움 웰던이 어느 분...
- 아, 여자분께 부탁해요...

조끼를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빨간 나비넥타이를 맨 아가씨가 잠시 분주하게 움직였고,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 테이블 가득 차려졌다. 나는 미디움 레어... 겉에만 살짝 익은 고기를 큼직하게 썰어서 입 안 가득 넣었다. 고기는 역시 큰 조각을 한 입 가득 넣고 우걱우걱 씹는 맛이지. 볼을 가득 채우고 우물거리며 수민이를 보는데, 수민이는 칼이나 포크에 손도 안 대고 가만히 나를 보고 있었다.

- 오빠...
- 음? 우물우물... 고기 맛있네. 냠냠... 왜 안 먹어?
- 무슨 일 있죠?
- ......
- 방금 온 전화, 모월모일 어디 가는 거랑 관련 있죠?
- 웁, 쩝쩝... 꿀꺽~... 우와, 눈치가 백단이네?
- 혹시, 내 정장도 그것 때문에...?
- ......

고기를 다 씹어 삼키고 샐러드를 또 잔뜩 퍼서 입안 가득 넣었다. 잔뜩 골이 난 표정으로 눈을 흘기는 수민이의 눈치를 보는 그 와중에도 샐러드는 진짜 맛있었다. 신선한 양상추가 아삭아삭 씹혔고, 드레싱도 과하지 않아서 채소 자체의 맛을 잘 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수민이는 그 맛을 음미하게 놔두지 않았다.

- 무슨 일인지 말해 줘요.
- 일은 무슨... 그냥, 선후배들 모이는 자리야.
- 오빠네 동아리?
- 응. 수민아, 이거 먹어 봐. 샐러드 진짜 맛있다...
- 그럼 영대오빠도 와요?
- 응... 아, 영대밖에 모르나?
- 이름 아는 사람은 영대오빠밖에...
- 그런가? 음... 하여튼 뭐, 선후배들 오는 자리야.
- 학교에서 만나요?
- 아니... 그냥...
- 그냥, 뭐? 누구 결혼식 같은 거예요?
- 읍, 컥, 컥...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키다가 사래가 들렸다. 급하게 물을 찾아 마시는데, 수민이는 눈치가 빨랐다. 5월의 주말에 선후배들이 모이는 행사라면 결혼식을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 오빠...
- 쿨럭, 커험... 음...
- ......
- 왜 안 먹어? 우선 먹자. 식기 전에...
- 나, 안 가면 안 돼요?
- 응? 난 같이 갔으면 좋겠는데?
- 아까 전화는 무슨 얘기예요?
- 음... 그것도 그날 가 보면 알아.
- 혹시... 미용실?
- 허억~! 미아리 가서 돗자리 깔아야겠다, 수민이. 우와...
- 오빠, 도대체 왜...? 이유가 뭐예요?
- 뭐가?
- 아니, 누구 결혼식인데, 나 정장하고 머리까지 하고 가야 되냐구요.
- 이쁘게 하고 가면 좋지, 뭘.
- ......
- 그냥... 오빠가 수민이 자랑하고 싶어서 그래.
- ......
- 우선 먹어. 먹고, 응?
- 오빠...

나를 빤히 바라보는 수민이 눈에 섭섭한 빛과 함께 냉기가 풀풀 풍겼다.

- 말해주지 않으면 거기 같이 안 갈 거예요. 아니, 나 지금 집에 갈래요.
- 응?
- 나 지금 가요?
- 수민아...

수민이는 진짜 일어설 것처럼 의자를 뒤로 밀었다. 종업원이 잽싸게도 달려 왔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 필요한 거 있으십니까?
- 아뇨. 아닙니다.
- 예, 그럼...
- 오빠 !
- 알았어. 말해줄게, 일단 앉아.
- ......
- 앉아. 천장 안 무너져. 수민이 다 먹으면 말해 줄게.
- 배 안 고파요. 지금 말해요.
- 지금 안 고파도 먹어. 얘기 길어질지도 모르니까...
- ......

부드럽게 씹히던 스테이크가 갑자기 질기게 느껴졌다. 맛도 식감도 느끼지 못하고 계속 씹으며 수민이에게 어떻게 얘기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수민이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가 비로소 칼과 포크를 들었다. 그리고는 고기를 잘라서 내 접시에 옮겨 놓았다.

- 오빠, 이것 좀 더...
- 애걔... 수민이, 겨우 고거 먹게?
- 나, 이것도 다 못 먹어요. 자, 응...?
- ......

수민이는 손바닥보다도 작은 그 고기를 절반도 넘게 내 접시에 덜어 놓고서야 고기를 썰어 먹기 시작했다. 나는 그 비싼 스테이크를 맛도 느끼지 못하고 그냥 배에 우겨넣었다. 스테이크를 다 먹고, 이어서 나온 디저트 아이스크림을 앞에 놓고 수민이는 또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 어우~... 수민이 눈에서 레이저 나오겠네.
- 광선이라도 나왔으면 좋겠어.
- 히익~ 나한테 쏘게?
- 오빠 투시해 보게.
- 어이구, 무서워라.
- 자, 다 먹었으니까 이제 얘기해 봐요.
- 뭐, 별 거 없어. 후배 결혼식에 가는데 수민이랑 같이 가고 싶었어. 끝.
- 오빠... 다른 사람 결혼식에 여자가 특별히 치장하고 가는 건 흔한 일이 아니예요.
- 뭐, 남들 안 한다고 나도 하지 말라는 법 있어?
- 근데, 난 신부 친구도 아니고, 오빠 선밴지 후밴지 결혼식에 왜 내가...
- 뭐 어때? 나랑 가는 건데...
- 오빠, 나 머리 아프려고 그래요.
- 그러니까 그냥 옷 사고 머리 해. 왜 머리 아프게 고민을 해? 고민하길...
- 오빠 !
- 깜짝이야... 왜애~?

수민이가 목소리를 높였고, 주변 사람들이 힐끗거렸다.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민망했다.

- 나, 그런 거 싫어요.
- 후우.....
- 난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나, 오빠가 왜 그러는지...
- ......

왜 그러냐고...? 왜지? 신영이가 뻔뻔하게 자기 결혼식에 나를 초대했고, 나는 그 뻔뻔함을 뽐내고 자랑하는 걸로 갚아 주고 싶었다. 내가 자랑하고 싶은 건 예쁜 애인이었다. 예식에서 신랑신부보다 더 주목받는 하객 커플이 되면... 주목받으면? 주목받아서 뭐 하게? 신영이가 괘씸해서 복수하게? 그렇게 복수하면 기분이 좋겠어? 좋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 순간,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계획했던 일들이 생각났고, 그런 생각을 했던 게 부끄러웠다. 진짜 치졸하고 쪼잔한 생각이었다. 수민이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숨을 크게 한번 깊이 들이마셨다. 일주일 내내 사로잡혀 있었던 소인배 같은 생각에서 수민이가 나를 꺼내 주었다. 깨달음은 진짜 한순간이었다.

- 오빠...
- ......
- 오빠?
- 응? 응...
- 무슨... 생각 해요?
- 알았어, 안 할게.
- 네?
- 안 한다고. 수민이가 싫어하면...
- 진짜?
- 응. 진짜.
- 아까 진작 그러지.
- ......

수민이는 삐죽이며 눈을 흘겼다. 그러나 눈매는 아까보다 부드러워져 있었다. 그리고는 입을 꼭 다물고 또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계속 눈치를 살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민이는 그 신부가 나와 관계가 있다는 걸 짐작한 모양이었다.

- 오빠...
- 응?
- 화... 났어요?
- 아니, 왜?
- 오빠 표정이...
- 아니야. 왜 화가 나? 후후후...

내가 딱딱하게 말할 때면 표정이 굳어 버린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리고 그럴 때면 화난 사람 같다는 말도... 나는 수민이에게 한번 웃어 보이고 전화기를 들어 번호를 눌렀다.

- xx 헤어아트죠?.... 네, 방금 통화했던 사람인데요.... 한정우... 네, 맞습니다.... 그러니까... 에... 예약....을 취소했으면 해서요... 아뇨, 좀 연기해야 할 것 같아서요... 예, 좀 미뤄지게 됐어요. 그럼요, 거기서 해야죠... 그건 아직 모르겠고요. 정해지면 다시 예약할게요... 네... 네, 고맙습니다.

전화로 신부화장 예약을 취소했다. 상대방은 처음엔 놀라는 척하더니 나중엔 시큰둥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예약을 확인한 당일에 취소하는 건 아마도 처음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통화하는 소리를 들은 수민이가 큭큭대며 웃었다.

- 취소했어. 됐어?
- 큭큭...
- 치~, 좋아?
- 에~? 내가 좋을 게 뭐가 있어요?
- 원하는 대로 해 줬잖아.
- 그게 내가 원하는 대론가? 괜히 쓸데없는 거 했던 거지.
- 가자, 쇼핑이나 마저 하게...
- 쇼핑은 무슨... 그냥 가요.
- 백화점까지 왔는데, 그냥 가자고? 뭐라도 사야지.
- 치, 살 거 없는데 오니까 그렇죠. 살 거 있을 때 와서 사요.
- 수민이 옷이랑 구두 사야지.
- 아까 안 한대 놓고는...?

수민이 목소리가 또 뾰족해졌다. 또 삐지게 만들면 나만 손해다. 깨갱~... 꼬리를 내리고 굴복해야 했다.

- 아니, 나는 뭐... 샀으면 좋겠다는 거지.
- 하여튼, 오늘은 아무 것도 안 살 거예요.
- ?~ 에이, 참... 알았어, 그럼...
- 나, 집에 데려다 줘요.
- 에잉? 지금?
- 응, 지금.
- 나 뽀뽀 안 해주고?
- 치~, 어디가 이쁘다구...
- ......

또 할 말이 없었다. 겨우 두 시밖에 안 되었는데 수민이와 헤어져야 하다니...

식당이 있던 꼭대기층에서 주차장까지 내려오는 길은 멀기도 했다. 지하 3층이었나, 4층이었나... 올라갈 때 탔던 엘리베이터와 내려올 때 탄 엘리베이터가 달라서 한참을 헤맸다. 꽤 오래 헤매고서도 차를 세운 곳을 찾지 못해 짜증도 냈다.

- 에이, 씨... 쯧~
- 오빠아~
- 어딘지 생각이 안 나서 그래. 아까 그 일 때문에 짜증난 거 아니야.
- 알아요. 그래도 안 그랬으면 좋겠어... 응?

수민이 옆에서 짜증이나 내고 있다는 게 더 짜증났다. 수민이 보기 부끄럽고... 수민이는 계속 내 손을 잡고 걸었고, 이따금씩 힘을 주어 꼭 쥐었다. 그리고 내가 돌아보면 마주보며 웃어 주었다.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결국 주차요원의 도움을 받아 차를 찾을 수 있었다. 수민이는 차에 타자마자 볼에 입맞추어 주었다. 주차요원이 보든 말든 신경쓰지 않았다.

- 쪽~ 이제 짜증내지 마요. 응?
- 응. 알았어.
- 아니, 나가는 차 많아서 출구 많이 막힐 텐데, 오빠 그럴 때도 짜증내잖아. 오빠 짜증내면 나, 싫어.
- 짜증나는 걸 어떡해...?
- 좀 밀리면 어때요...? 오빠랑 나랑 같이 있는데...
- 답답하니까 그렇지...
- 치~ 빨리 가서 나랑 빨리 헤어지고 싶구나?
- 이런...? 치~...
- 짜증내면 오빠만 손해잖아. 그죠?
- ......

그러는 수민이가 예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는 생각까지 예뻤다.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사랑스러운 수민이를 옆에 태우고 가는데도, 운전하면서 계속 한숨을 내쉬었다. 수민이네 집 앞에 차를 세우고도 한숨만 푹푹 쉬었다. 수민이는 왜 그러는지 물을 필요도 없이 이미 알고 있었고, 그러는 나를 보며 킥킥댔다.

- 후우...
- 오빠...?
- 휘유..,
- 뭐예요~? 치~... 누가 보면 하늘이라도 무너진 줄 알겠네.
- 하늘 무너지는 게 낫지.
- 에~? 에이, 무슨...
- 진짜야. 주말에 수민이랑 사랑 나눌 거라는 기대로 일주일을 버티는 사람이 그 유일한 행복을 빼앗겼는데, 그게 하늘 무너지는 것보다 덜 비참해?
- 치~ 말은 정말...
- 몰라... 에휴~...
- 오빠 하는 거 봐서... 내일 뽀뽀해 줄게요.
- 진짜? 진짜지?
- 뭐야아~? 오빠, 애기 같애. 킥킥킥~
- 애기면 어때? 난 수민이 보는 낙으로 사는데...
- 치, 그런 사람이 내일은 안 보려고 했어요?
- 봐야지 왜 안 봐...? 헤헷~
- 칫~ 아유, 정말... 어떡해야 돼? 이 응큼쟁이 오빠, 이 바부팅이 오빠아아아... 으이유...
- 헤헤헤...

수민이는 내 볼을 잡고 흔들었고, 나는 진짜 바보처럼, 진짜 아기처럼 웃었다. 헤헤거리며... 결혼식 얘기로 기분이 상했던 수민이는 이제 풀린 듯했다. 다음날 뽀뽀해 준다는 약속보다 그게 더 좋았다.

어쨌든, 신영이 결혼식에 수민이와 함께 가려는 계획은 무산되었다. 수민이를 신부보다 더 예쁘고 더 화려하게 꾸며서 신영이 커플을 비롯한 동아리 선후배들에게 보란 듯이 자랑하고 싶었던 철없는 생각은 수민이와 대화하면서 사라지고, 나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일요일이었던 그 다음날, 수민이는 평일처럼 아침 일찍 찾아와 나를 깨웠고, 우리 둘은 폭풍이 몰아치듯 사랑을 나누었다. 수민이는 평소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를 애무했고, 사랑을 나누고 나서 내 품에 안겨 속삭이는 수민이는 전과 다름없이 예쁘고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전날 보였던 쌀쌀한 모습은 간 데 없이 사라졌다.

- 어제, 많이 불쾌했어?
- 음...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 미안해.
- ......
- 아직도 화 안 풀렸어?
- 아니, 오빠가 왜 그랬는지 궁금해서...
- 다 말해 줄게.
- 오빠가 말해줄 수 있는 거면, 몰라도 되는 걸 거야.
- 숨기는 거면?
- 그건 뭔가 찔리는 게 있다는 거겠죠?
- 훗, 반박할 말이 없네.
- 오빠.
- 응?
- 나 사랑하는 거 맞죠?
- 바보. 아직도 확신이 안 서?
- 믿어요.

수민이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눈은 참 많은 걸 말하고 있었다. 눈치 빠른 수민이는 그 결혼식의 신부가 나와 관계가 있다는 것쯤은 아마 짐작하고도 남았을 거고, 그래서 백화점에서 그냥 돌아갔을 거다. 그 기분으로 나와 사랑을 나누고 싶지는 않았을 테니까. 또 자석에 이끌리는 쇠붙이처럼 끌려가 입맞추었다. 수민이는 한참 키스하다가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 미안해요.
- 뭐가?
- 어제... 오빤 거기 특별하게 하고 가고 싶었던 것 같은데...
- 아니야, 내가 너무 오버한 거지. 근데, 같이 가긴 갈 거야?
- 음... 진짜 나 데려가고 싶어요? 불편하지 않겠어요?
- 그럼, 좀더 생각해 봐.
- 참, 나도 다음주에 선배 결혼식 있는데...
- 그래? 아, 그래서 금방 넘겨짚었구나?
- 응. 헤헤~ 혹시 오빠, 같이 갈래요?
- 다음주 결혼식에?
- 응...
- ......

애매했다. 졸업한 내가 여자친구를 데리고 가는 것과, 아직 학생인 수민이가 남자친구를 데리고 가는 것은 내가 볼 때 큰 차이가 있었다. 그래도 될까 고민하는데 수민이가 먼저 말했다.

- 불편하겠죠?
- 아니, 뭐... 불편하다기보다...
- 괜찮아요. 같이 안 가도.
-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후배 결혼식에 수민이 데리고 가는 거랑, 수민이가 나랑 같이 선배 결혼식에 가는 건 좀... 다르다고 생각해.
- 왜요?
- 나는 나이도 있고, 결혼할 사람 데리고 가도 사람들이 그런가 보다 하겠지.
- 그렇네요... 나는 아직... 그죠?
- 수민인 아직 학생이고... 재학생 후배 중에서 남자친구 데리고 오는 사람 있을까?
- 음... 그렇겠네요, 그런 생각은 못 했어요.
-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어.
-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사실은 나도 부담스러워요.
- 미안해.
- 아니예요. 어제 오빠가 같이 가자고 그래서 나도 오빠한테 그래 봤던 건데...
- ....
- 생각해 보니까 오빠 말이 맞아요.
- 불쾌한 거 아니지?
- 그럼요, 진짜 아니야... 쪽~ 됐죠?
- 후후... 또 해 줘.

수민이는 웃는 얼굴로 뽀뽀 한 번 했다가 한참동안 내 입술에 키스해야 했다. 수민이는 내 생각을 금방 이해해 주었다.

......

결국 신영이 결혼식에는 참석도 하지 않았다. 영대에게 축의금만 좀 전달해 달라고 부탁했을 뿐이다. 그리고 화창했던 그 당일날, 나는 수민이와 함께 용인에 있는 놀이동산에서 하루종일 놀았다.

- 넌 놀러 가구, 난 남의 결혼식 가냐?
- 그럼 너두 놀러 가든가... 같이 갈래?
- 나쁜 눔.. 얼굴이나 볼까 했는데... 개쉬키.
- 야, 내가 거기 가면 신영이나 재왕이가 편하겠냐? 저 새끼가 여기 왜 왔나 할 텐데...
- 설마 그러겠냐?
- 하여튼, 마음 넓으신 이 형님의 하해와 같은 배려야, 임마.
- 배려는 개뿔... 근데 그날 뭐 하고 놀 건데?
- 수민이랑 놀이동산 간다니까?
- 웬 놀이동산? 어린애냐?
- 지난번에 인정씨랑 간 건 어딘데? 넌 몇 달 전에는 어린애였냐?
- 킥킥킥...
- 크크크... 결혼식 끝나고 너도 오든지...
- 됐다 그래라.

애들이나 타는 것이라 생각했던 놀이동산의 유치한 놀이기구도 그저 신나고 재미있기만 했다. 수민이도 그날이 그날이라는 걸 알고 있었을 텐데도 전혀 내색하지 않고 신나게 놀았다. 즐거우면 언제든 아이처럼 뛰놀던 수민이였지만 그날은 더욱 더 천진하게 굴며 밝게 웃어 주었다.

신영이가 결혼을 하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람? 내 곁엔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수민이가 있는데...



------------------


댓글 남겨 주시는 독자분들, 추천해 주시는 독자분들.... 진짜진짜 감사합니다.
10 부의 추천 수가 조회수의 1%를 넘었어요. 와우~
신경쓰지 않으려 했었는데, 댓글이 많거나 추천이 많으면 저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더라구요. 후훗~
독자 여러분들께도 기분좋은 일이 많이 생기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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