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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17:37 1,388회 0건
기억에 남은 여인들 - 달맞이꽃 20장




헤드헌터와 통화한 지 이틀만에 그 연수원에 가서 면접을 했고, 면접을 본 지 사흘만에 간단히 짐을 싸서 연수원으로 들어갔다.

면접 때 돌아본 연수원 건물은 깨끗하고 깔끔했다. 직원 숙소는 연수원 건물 꼭대기에 있었고, 원장 가족도 같은 건물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출퇴근을 해도 되고, 숙소 생활을 해도 되는 조건이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거기서 계속 생활해도 된다는 걸로 이해했고, 그게 더 맘에 들었다.

속세를 떠나는 셈 치고 짐을 싸서 그곳으로 들어갔다. 짐이래야 옷가지 몇 개와 구두 하나, 운동화 하나, 노트북 컴퓨터 정도만 챙겼다. 원룸이 계약되면 연락을 달라고 하고 집 앞 부동산에 열쇠를 맡겼다.

속세를 떠난다는 건 세상과 인연을 끊는다는 뜻이다. 나는 그런 심정으로 산 속 연수원에 들어갔으면서도, 인연을 끊지 못하고 주말이면 바보같이 수민이에게 편지를 썼다. 핑계를 대자면 편지는 그냥, 내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문제는 수민이가 아니라 나였으니까. 수민이 어머님이 생각나서 집으로는 부치지 못하고, 학교로 부쳤다.

네 사랑은 진심이었다고 믿는다... 나도 진심이었다... 있는 그대로 솔직히 썼다. 그러면서 내 찢어진 마음이 아물기를 바랐다. 부친 편지도 있고, 못 부치고 태워버린 편지도 있었다. 가끔 헛된 기대를 하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수민이의 마지막 말이 내 생각을 잘랐다. 우리가 다시 잘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받아들여야만 했다. 수민이 인생에 나는 더 이상 없었다.

그동안 사랑했던 것이 수민이의 진심이었다는 것을 믿었다. 믿을 수 있었다. 내가 사랑했던 것처럼. 그러나 그 믿음은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다. 수민이의 사랑이 식었다는 것도 인정해야만 했지만, 그건 힘들었다. 내가 아직 식지 않았으니까. 아니, 이미 식었어도 새까맣게 탄 내 속은 고스란히 남았으니까.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건,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연수원에 있는 동안, 함께 일했던 현수 선배가 한번 찾아 왔었다. 새로 들어온 직원이 열심히 일하고, 선배와 호흡이 잘 맞는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미안한 마음을 조금은 덜 수 있었다. 영대와 종협이, 현경이도 그 먼 곳까지 얼굴 한번 보려 찾아와 주었다. 속세와 연을 끊는다고? 그건 그리 쉬운 게 아니었다. 이따금 찾아와 주는 그들이 반가웠다. 눈물나게 반가웠다. 나는 그저 수민이를 잊고 싶었던 거였지, 다른 사람들도 다 잊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연수원에서도 술을 자주 마셨다. 하지만 연수원에 들어가기 전처럼 혼자서 외로이 마신 것도 아니고, 잠들기 힘들어서 취하기 위해 마신 것도 아니었다. 젊은 지도교육관들은 평일에도 종종 마셨고, 주말이면 항상 술자리였다. 그들과 친해지기 위해 마시다가 나중엔 형으로서 선배로서 술을 사주며 같이 마셨다. 그러다가 한번은 급성 위궤양에 걸려 한 달 이상 치료를 받기도 했다.

치료받던 기간 중 어느 날, 병원에 다녀오는데 문자메시지가 왔다. 수민이가 활동하던 미술 동아리 정기 전시회를 안내하는 문자였다. 수민이가 동아리에 남긴 연락처까지 정리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전시기간과 장소를 알려주는 문자메시지를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며칠을 고민했다. 갈까, 말까... 그러나 고민과는 달리 전시회가 시작하는 날이었던 토요일, 나는 그간 했던 고민이 우습게도, 마치 당연한 것처럼 아침부터 정장을 차려 입고 나섰다. 쌀쌀한 날씨에 코트까지 꺼내 입고 전시회장으로 향했다. 그 전날엔 일부러 시내에 나가서 머리를 단정하게 깎기까지 했다.

전시회장에서는 동아리 회원들과 그 친구, 친지들, 그리도 동문 졸업생이 대부분인 관람객들 틈에서 이름표를 단 재학생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멋쩍게 혼자 휘적휘적 걸어 들어가 안내 카운터에서 프로그램을 샀다. 안내하는 여드름투성이 남학생이 앳되어 보였다.

- 이천원입니다.
- 아, 그래요? 유료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네?
- 몇 기 선배님이세요? 우편으로 보내 드렸을 텐데...
- 아, 동문은 아닙니다. 여기요.
- 저... 거스름돈이...
- 네? 아, 그냥 다섯 부 산 셈 칠게요.
- 네? 네...

안내하던 학생들의 시선을 뒤로 하고 갤러리로 들어갔다. 수민이의 그림... 어떤 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림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내 눈은 수민이의 모습만 찾고 있었다. 전시된 그림 하나하나를 대충 보며 천천히 지나칠 때마다 그 그림을 그린 작가인 듯한 학생이 다가왔다. 갤러리 안에서는 수민이를 찾지 못했다. 그림 아래의 이름은 눈여겨 보지 않았고, 수민이의 그림이 어떤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대충 관람을 하고, 갤러리 밖으로 나왔다. 홀에서는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이 왁자지껄, 여느 학교의 홈커밍데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거의 그 학교의 학생들과 졸업생이 대부분인 관람객들 틈에서 나 혼자만 뻘쭘하게 홀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수민이를 찾아 볼까, 그냥 갈까 잠깐 고민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 정우 오빠?... 맞죠?
- 네? 어, 윤희야.
- 안녕하세요?
- 응. 윤희도 잘 지냈어?
- 오빠가 올 줄은... 몰랐네요.
- 응? 아, 그냥...
- 픽~ 왜 왔어요, 여길...? 오지 말지...
- 훗~ 알고... 있구나?

윤희는 피식 웃고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 발랄하던 윤희답지 않게 어색해하는 게 더 어색했다. 그때 누군가가 윤희를 부르며 다가왔다. 거기서 윤희를 부를 사람은 당연히 수민이밖에 없었다.

- 윤희야... 윤희야, 윤희야, 윤희야, 나 있지... 어머~!
- 수미...

수민이가 폴짝폴짝 뛰어와서 윤희 손을 잡고 흔들다가 나를 보고 멈칫했다. 나도 순간 굳어서 악수를 청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고민할 여유도 없이 어색하기만 했다.

내가 어색해하고 있었다. 수민이를 앞에 두고, 보고 싶었던 사람을 앞에 두고 어색해하고 있었다. 그 어색함은 진짜 낯설었다. 인사도 하지 못하고, 수민이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도 못하고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수민이에게 인사하는 방법이 악수라니... 안 하길 다행이었을까... 멍한 시선으로 수민이를 바라보며 엉거주춤 서 있었다.

수민이도 당황한 듯했다. 아니, 당황했다기보다는 살짝 놀랐을 뿐이었다. 입을 다물지 못하고 바라보다가... 입을 꼭 다물고 바라보다가... 그러나, 수민이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색해서 어쩔 줄 모르는 나와 달리 수민이는 차분했다. 먼저 말문을 연 것도 수민이였다.

- ......
- 어떻게 알고... 왔어요...?
- 응? 아, 문자메시지가 왔길래...
- 문자요? 아~...
- 응, 문자... 그래, 문자...
- 고마워요. 와 줘서...

젠장, 뭐라고 대답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중얼거렸다. 그러나 금방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고맙다... 고맙다... 나에게 고맙다고 말할 때면 눈물을 글썽거렸던 수민이... 꿈꾸는 듯한 눈으로 사랑을 가득 담아 바라보았던 수민이... 그 수민이가 지금은 의례적으로 말하듯 별 감정이 섞이지 않은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갑자기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창피하고 부끄럽고, 얼굴이 화끈해졌다. 나는 거기 왜 갔던가... 누구를 보러 갔던가...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지 말 걸... 오지 말 걸... 바보 같이... 내가 이를 악물고 아무 것도 못 하고 있는 사이에 수민이는 윤희에게 간단한 인사만 하고 또 총총총 뛰어갔다. 나에게는 눈길도 한번 다시 주지 않은 채...

- 괜히 나 때문에 윤희도 얘기 못 했네?
- 아니예요. 자기네들끼리 바쁜 걸요, 뭐... 오빠도 작년에 봤잖아요.
- 그랬었나...?
- ......
- 참, 점심 먹었어? 같이 먹을까?
- 점심이요?
- 응. 아직 점심 전이잖아. 아니야?
- 음... 아니요. 안 그러는 게 좋겠어요.
- 그래? 훗~... 그래, 그럼...

사실, 밥 같이 먹자는 말도 그냥 던져 본 말이었다. 윤희도 수민이로 이어져 만난 인연, 수민이와 함께인 동안만 인연인 사람이었다. 윤희도 수민이와 함께가 아닌 이상 나와 밥먹는 건 불편할 게 뻔했다.

- 오빠...
- 응?
- 그... 수원으로 가세요?
- 아니, 지금은 좀 멀리 다른 지방에 가 있어.
- 네에...
- ......
- 그...
- 응?
- 아니... 아니예요. 가셔야죠?
- 흐음~ 그래야지. 또 보자고 인사하기는... 좀 애매하네? 그지?
- 그러네요. 피식~
- 훗~... 그래, 인연 있으면 또 보겠지. 잘 지내고...
- 네. 오빠도...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았을까...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빤히 쳐다보는 윤희를 뒤로 하고 코트를 한 손에 걸쳐 들고 휘적휘적 걸어 나왔다. 주차장에서 차에 올라 밖을 볼 때, 내가 그렇게 생각해서인지는 몰라도 윤희는 계속 내 쪽을 보는 듯했다. 심호흡을 하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 후우...

그제야 긴장이 좀 풀렸다. 힘이 들어가 잔뜩 굳어 있던 어깨를 늘어뜨렸다. 마치 무슨 중요한 면접이나 프리젠테이션을 치른 듯한 기분이었다. 수민이를 보러 왔는데 긴장하고 있다니... 인정해야 했다. 우리는 이미 연인이 아니었다.

연수원으로 돌아와서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아무 생각도 없이 그냥 앉아 있었다. 시간이 꽤 흐른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에는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 여덟 시... 자기엔 좀 이른 시각이었지만 저녁도 먹지 않고 맥주만 한 병을 마시고 잤다. 위궤양으로 치료받는 사람이 밥을 거르고 술을 먹는다는 생각에 피식 웃었지만 그날은 맥주가 없으면 소주라도 혼자 마시고 싶었다.

그렇게 전시회에 다녀와서 또 며칠 동안은 그날 본 수민이가 눈에 어른거렸다. 괜히 갔었다는 생각, 가지 말았어야 했다는 쓸데없는 후회를 또 며칠 동안 했다. 그런 생각을 떨쳐낸 것도 며칠이 지나서였다.

......

해발 500미터 정도 고지에 위치한 연수원의 앞 산은 가을이 되면서 매일 아침마다 다른 색깔을 보여 주었다. 노랗게, 빨갛게 점점 채도가 짙어지면서 단풍이 들다가 어느덧 온통 갈색으로 바뀌었고, 첫 서리가 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산 속의 날씨는 갑자기 추워졌다. 연수원에서는 모든 직원들에게 거위털 파카를 지급했다. 12월이 되기도 전에 싸락눈이지만 첫눈이 내렸다.

그렇게 가을이 지나고 이제 완연히 겨울인가 싶던 어느 날, 수민이에게 편지를 보낸 지도 한참 되었을 때, 수민이에게서 갑자기 문자 메시지가 왔다. 이제 편지 그만 해라... 다른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고 이제 한정우씨를 잊으려 한다... 좀 진정이 되어 가나 싶었는데 또 불쑥 배신감이 치솟았다. 수민이에게 새 장난감이 생겼다는 얘기였다.

문자메시지... 편지는커녕 전화도 아니고 문자메시지였다. 진짜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휴대폰 화면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고 있었다. 한정우씨... 한정우씨에서 수민이의 사랑하는 오빠가 된 지 일년여만에 나는 다시 오빠에서 사랑하지 않는 한정우씨로 돌아왔다. 나는 그대로였는데, 달라진 게 없는데, 주변 상황은 내 생각과는 상관없이 너무나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수민이를 도저히 지수민씨라고 부를 수 없었다. 내가 사랑하는 수민이는 내 기억 속에서 언제까지나 나를 사랑하는 수민이였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지수민씨...? 그렇게 호칭할 수도 없었고, 그럴 일도 없었다. 그런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여자가 남자보다 감정적이라지만, 감정적인 면에서 강한 건 남자보다 여자였다. 나는 마지막까지 수민이를 이길 수 없었다.

수민이에게 답장을 보냈다. 나까지 문자메시지로 답할 수는 없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행복하게 살라는 편지를 간단하게 써 보냈다. 생각해 보면 참 바보 같은 짓이었다. 수민이는 내가 축복해주는 것보다 내가 잊어 주는 걸 더 바랄 게 당연했다. 그러나 실연당한 남자는 찌질하고, 그 순간 자기가 찌질한 걸 모르기 때문에 더 찌질하다. 그걸 마지막으로 더 이상 편지를 쓰지 않았다.

그 해 겨울은 무지 추웠다. 산 속이라서 더 그랬는지도 몰랐다. 눈도 많이 왔다. 해가 바뀌고, 한 살을 더 먹었지만 별 느낌이 없었다. 그 메마른 겨울도 어느덧 지나고. 차갑던 날씨도 슬슬 풀려 봄이 온다는 느낌을 받을 때쯤, 수원의 부동산 중개소에서 연락이 왔다. 내가 내놓은 원룸이 계약되었다고. 그 주말에 수원에 들러 보증금을 돌려받았다.

옷가지와 기타 필요한 것들은 몇 번 오가면서 다 산 속 연수원으로 가져갔고, 나머지는 대부분 서울 집으로 벌써 옮겨서, 남은 짐은 두 상자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두 상자는 모두 수민이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편지며, 악세사리며, 수민이가 쓰던 것들이며... 수민이가 사주었거나, 같이 샀거나... 뭔가 수민이의 추억이 어린 것들, 볼 때마다 수민이가 생각나는 것들을 버리지는 못하고 상자에 넣어 둔 것들이었다.

버릴 수도 없고 계속 두고 볼 수도 없는 것들... 그 두 상자를 놓고 원룸 한가운데에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수민이와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스티커 사진 같은 것에도 욕심을 내지 않았고, 사진 찍을 시간이 있으면 키스를 한번 더 했던 우리였다. 이미 우리라고 하기엔 어색한, 우리라고 할 수 없는, 우리라고 해서는 안 될 사이가 됐지만...

좋은 추억만 가득할 것 같았던 그 방에서 나는 악쓰며 울부짖다가 혼자 쓰러져 잠들었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눈을 둘 곳이 없어서 떠나고 싶었던 그 방은 이제 텅 빈 방이 되어 있었다. 장승처럼 멍하니 서 있던 나를 깨운 건 부동산 중개사였다.

- 총각이 이 집에 추억이 많은가 보네? 발길을 못 떼는 걸 보니...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푸근한 인상의 부동산 중개사가 먼저 나가며 중얼거렸다.

추억... 추억? 추억일까? 수민이와 나누었던 사랑의 흔적이 가득한 방이었다. 아침이면 수민이가 조용히 들어와 황홀하게 나를 깨우던 방이었다. 거기서 잠들면 아침에 수민이를 볼 것만 같았지만, 그게 꿈이라는 걸 알고 있었고 더 이상 그런 꿈에 빠져 있을 수는 없었다.

방이 아니라 그 짐 두 상자가 문제였는데, 모르는 사람이 모르고 한 소리에 나는 붙잡혀 있었다. 그렇게 계속 우두커니 서 있다가 한참만에야 겨우 거기서 나왔다. 그 상자 두 개를 고스란히 안고 연수원으로 돌아와서 자동차 트렁크에 처박아 둔 채 또 한 달이 지났다. 그 상자 안의 물건들은 말 그대로 짐이었다. 과거의 짐, 마음의 짐, 그리고... 내 죽은 사랑의 짐...

어떻게든 내려놓아야 했다. 그냥 버리는 건 말이 안 되었다. 그건 부담스러운 짐이긴 했지만 쓰레기는 아니었으니까. 며칠간의 고민 끝에 모두 불태우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걸 연수원 캠프파이어 모닥불 터에서 태울 수는 없었다.

인터넷에서 유품소각장을 검색했고, 연수원에서 꽤 멀지만 그나마 제일 가까운 곳에 전화를 했다. 소각하려면 며칠 전에 예약을 해야 했다. 고온의 소각로를 자주 켜거나 끌 수 없어서 여러 사람의 유품이 어느 정도 모이면 날을 잡아 태운다고 했다. 그렇게 예약을 하고, 휴일에 차를 몰고 소각장을 찾아갔다.

종이로 된 작은 공예품부터 옷이나 쿠션, 이불커버 따위 섬유에, 금속인 은목걸이까지... 소각로는 재질에 상관 없이 모든 걸 집어삼켰고, 온갖 재질의 잡동사니 두 상자를 태우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은도 녹을까 잠시 궁금했지만 녹든 말든 상관 없었다. 태운다는 것에 의미를 두었을 뿐이지, 실제로 타든 말든 내 눈에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다는 것이, 내 마음에서 타 없어진다는 것이 중요했다.

소각로 연기를 보면서 삶과 죽음을 생각했고, 사랑에도 생명이 있을까 잠깐 생각했다. 생명은 몰라도 수명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말하자면 유효기간이랄까... 내 사랑은 유효기간이 다 지났고, 유효기간이 지난 내 사랑의 유품은 소각했다. 흩어져 사라지는 연기를 보면서 수민이와 나누었던 사랑도 기억에서도 사라지기를 바랐다.

마지막으로 일기장을 들고 한참을 망설였다. 수민이가 사준 거였지만 몇 달간의 내 기록이 들어 있는 일기장... 그 검은 표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이것도 꼭 태워야만 하는 걸까... 수민이가 사준 거라는 아픈 기억이 더 큰지, 내 기록이 들어 있다는 소중함이 더 큰지 판단하기 힘들었다.

일기를 없앤다는 것은 내 삶의 일부를 잘라내는 것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저히 태울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도리어 그 생각이 든 순간 나는 일기를 소각로 입구에 던져넣을 수밖에 없었다.

내 삶의 일부였던 수민이는 이미 싹둑 잘라낸 것처럼 내 곁에 없었고, 수민이가 차지했던 자리도 날카롭게 도려낸 것처럼 텅 비어 있었다. 일기장을 태워 없애지 않아도 이미 그 자취는 흉터만 남아 있었고, 나에게 그림자처럼 남아 있는 수민이의 흔적을 그렇게라도 털어 버려야 했다. 아니, 그렇게라도 털어낼 수 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 얼마 동안 일기를 쓰지 못했다. 그 다음해 연초까지도 새 일기장을 마련하지 못했고, 봄이 되어서야 다른 일기장에 새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십년 동안 일기를 썼지만 내 책장에 늘어선 일기장은 열 아홉 권 뿐이다.

그러나... 유족들이 돌아가신 분을 그리워하듯, 그 후로도 나는 이따금 수민이를 생각했다. 수민이를 생각하면서 눈물도 꽤 많이 흘렸었다. 추억은 눈물을 먹고 점점 더 커졌다. 지우고 싶은 흔적이었지만 눈물로는 그 흔적을 조금도 닦아낼 수 없었다. 눈물을 먹고 흔적이 더 깊이 뿌리내리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아픈 추억을 지우려면 먼저 울지 말아야 하는데 눈물이 맘대로 되는 건 아니라서 그게 가장 힘들었다. 아파서 우는 거지, 울어서 아픈 건 아니었다.

눈물로는 기억을 지울 수 없었지만 다행히 다른 지우개가 있었다. 흐르는 세월은 과거를 밀어냈다. 지나간 것은 잊혀지게 되어 있었고, 영원한 것은 없었다. 세월은 기억을 희미하게 하고, 상처도 씻어냈다. 차츰차츰 수민이를 생각하는 빈도도 줄어들고, 눈물도 줄어들었다. 흉터는 깊고 진하게 남았지만 더 이상 아프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진짜 한참 후의 일이고, 그때는 그냥 아파하고 그냥 힘겨워 했었다. 쓸데없는 미련이 오래 갔다. 수민이네 학교, 학부 또는 동아리와 수민이의 이름을 같이 검색해 보곤 했다. 그러다가 수민이네 동아리 단체사진에서 수민이의 얼굴을 발견하기도 했다. 반갑기도 했지만 마음이 아파 와서 또 술을 마셔야만 했다. 바보 같은 짓인 줄 알지만 딱 잘라 그만두지 못했다.

한번쯤은 왜냐고 묻고 싶었다. 진짜 궁금했고, 왜 나를 떠나야 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 이유를 안다면 좀 덜 아플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이유를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수민이가 나를 떠난 이유가 뭐든, 수민이 말대로 한번 식은 사랑이 다시 잘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답을 얻은 건 아니었지만 그런 생각마저도 차츰 희미해져 갔다.

그리고는 바쁘게 살면서 점점 잊어 갔지만, 몇 년 후 sns 열풍이 일어났을 때, 또 수민이를 생각했다. 이따금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 수민이의 아이디를 검색하기도 했다. 한물 간 싸이월드를 찾아보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엔 트위터에서 수민이의 아이디를 살짝 바꾼 계정을 찾았다.

야위었다고 할 정도로 살이 많이 빠진 얼굴이었지만 프로필 사진은 분명 수민이 모습이었다. 10년이 지나서 sns 로 겨우 본 수민이는 누군가의 아내로, 누군가의 엄마로 살아가고 있었고, 마지막 트윗은 내가 찾아본 시점보다 거의 2년 전에 올라온 것으로, 이미 오래된 휴면 계정이었다.

모니터 화면에 그 창을 띄워 놓고 한참을 아무 생각 없이 모니터의 한 지점만 뚫어지게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나 수민이의 얼굴을 보고도 별 느낌이 들지 않았다. 마음이 아프지도 않고, 울적해지지도 않았다. 가끔 다시 들어가 봐도 새 트윗은 없었다. 그리고, 수민이의 흔적을 그렇게 한번 본 이후로는 다시 다른 흔적을 검색하거나 찾아보지 않았다. 트위터도 안 찾아본 지 이미 오래다.

내가 이상형이라던 수민이... 내가 첫 남자였던 수민이... 첫 남자가 나라서 다행이라던 수민이... 내 첫 여자가 아닌 걸 아쉬워하며 마지막 여자가 되겠다고 약속했던 수민이... 나에게도 그래야 한다고 다짐을 받았던 수민이... 사랑은 변하는 게 아니라던 수민이... 논리적으로 부정하지 못했던 나... aa000000aa 님의 댓글처럼, 사랑은 변하지 않지만 사람은 변한다. 사랑이 변한 게 아니라 수민이와 내가 변했을 뿐이었다. 결국 수민이 말이 맞았다.

헤어진 건 분명 안타깝고 슬픈 일이었지만, 내가 수민이를 사랑하고 수민이도 나를 사랑했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고, 수민이를 만나 사랑했던 그 시간은 분명히 내 젊은 날의 일부였다.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수민이는 날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나와 함께 했던 그 시간은 수민이에게도 삶의 일부를 차지하는 기억이라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평생 내 곁에 있겠다던 수민이는 곁에 없지만, 나는 아직도 수민이를 잊지 못한다. 어쩌면 수민이가 자기를 잊지 못하게 나에게 암시나 최면을 걸어 놓았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아직도 안타까워하거나 그리워하는 건 아니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기분이 가라앉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다. 다행히, 이 글을 쓰면서 많이 정리가 되었다. 무언가 시원하게 털어놓을 대나무숲은 언제 어디서든 필요한 법이다.

하루하루 날은 저물고 밤은 또 찾아왔지만 달맞이꽃은 다시 피지 않았다. 밤이 오든 말든, 달이 뜨는 말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다시 필 수 있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웠고, 다시 꽃봉오리를 맺는 것조차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달맞이꽃... 내 사랑의 꽃은 그렇게 피었다가 그렇게 갑자기 시들고, 그렇게 졌다.

사랑? ...... 훗~ 사랑 같은 소리 하고 있네...


* * * * * *


20편...
마지막 편 마지막 문장을 다 쓰고, 숨을 길게 뱉었다. 후~~~
대여섯 편이면 되겠지 생각했던 글이 좀 길게 이어졌다.
시원한 맥주 한 잔이 필요하다.



달맞이꽃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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