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남은 여인들 - 달맞이꽃 17장
그때의 일을 상세히 쓸 수가 없다. 상세히 기억하지 못 하기 때문이다. 애써 생각해 내려 하면 머리가 아프고 답답하다.
그날, 어떻게 집까지 돌아왔는지 언제 돌아왔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침대였다. 머리가 아팠다. 누구에게 맞기라도 한 걸까? 초인종이 울렸지만 그냥 누워서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귀찮았다. 누가 오든지 말든지... 그러다가 또 잠이 들고, 또 깨었다가 또 자고...
몇 번을 자다 깼을까... 그래도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일어나서 씻고 옷을 갈아입었지만 마치 몸살이라도 난 듯 머리는 멍하고 손발에는 힘이 없었다. 수민이 어머님의 목소리가 머리에서 계속 울렸다. 우리 수민이, 앞으로 안 만났으면 좋겠어요... 머리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도로 누워 또 잠들었다. 졸린 건 아니었는데, 누우면 그냥 잠이 들었고 자고 자고 또 잤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이번에는 밤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자꾸 수민이 어머님의 말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수민이 어머님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부터 왜 그렇게 왜 그렇게 답답하고 숨이 막혔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낮에는 그래도 버틸 만했지만 저녁이 되면 참기가 힘들었다. 술도 잘 마시지 못하면서 그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술을 마셨다. 그렇게 마시다가 취하면 자고, 잠에서 깨면 그 생각에 아파하다가 저녁이 되면 또 술을 먹었었다. 맨 정신으로는 잠시도 버틸 수가 없었다. 얼마나 그렇게 잤는지... 하룻밤이었는지, 며칠 동안 그랬는지조차 몰랐다.
잠이 들면 꿈을 꾸었다. 즐거운 꿈도 꾸었고, 악몽도 꾸었다. 기억나는 꿈은 하나밖에 없다. 수민이와 몸을 합치고 서로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있는 꿈... 그러나 그 꿈도 악몽으로 끝났다. 누워 있는 내 위에서 한참 신음하며 엉덩이를 돌리던 수민이가 갑자기 수민이 어머님으로 변해서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노려보는 것도 아니고, 말없이 그냥 가만히.
비명을 지르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소리도 나지 않았다. 몸부림을 치고 고개를 저으려 해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수민이 어머님이 내 얼굴에 손을 댔다. 몸서리치며 깨어나 눈을 번쩍 떴다. 눈이 부셨다. 누군가가 눈앞에 있었지만 검은 실루엣만 보였다. 수민이 어머님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또 한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조금씩 정신이 들면서 수민이일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너무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찌푸린 눈꺼풀 틈으로 사물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방 안이 환하게 밝았고, 창문이 커다란 확산판처럼 눈부셨다. 수민이가 내 얼굴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것도 꿈인가 잠시 생각했지만, 분명히 꿈이 아니었다. 수민이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꿈에서 깨면서 신음소리를 냈는지 비명을 질렀는지, 내가 뭔가 소리를 냈었던 모양이다. 지난밤에 얼마나 마셨는지 머리가 아프고 멍했다.
수민이가 왔는데 안아 주질 못했다. 대신 수민이가 몸을 숙여 나를 안았다. 내 머리를 안고 쓰다듬었다. 수민이의 풍만한 가슴이 얼굴에 눌렸지만, 흐뭇하고 좋은 느낌도, 흥분되는 느낌도 전혀 들지 않았다. 수민이를 안아 줘야 하는데... 생각했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눈물이 흘렀다. 양쪽 귓가로 흘러내리는 눈물이 느껴졌다. 나는 또 울고 있었다.
- 꿈... 꿨어요?
- ......
- 울지 말아요.
- ......
수민이 얼굴이 다가왔다. 수민이의 입술과 혀가 내 눈가를 핥아 닦았다. 짤 텐데... 수민이가 퇴원해서 나에게 왔다는 건, 적어도 일주일이 지났다는 얘기였다. 일주일... 그 오랜 시간 동안 뭘 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방안은 난장판이었다. 술병이 여기저기 뒹굴었고, 술을 쏟은 곳도 있었다. 내가 벗어던진 옷가지와 양말, 속옷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의자도 넘어져 뒹굴고 있었고, TV는 뭔지 모를 방송에서 여러 사람이 히히덕거리고 있었다. 담배를 피웠더라면 불이 났을지도 몰랐다.
수민이가 나를 다시 눕히고 방을 치웠다. 평소에도 수민이는 방 좀 정리하라는 소리를 했고, 그때마다 그냥 놔 두라고 해도 수민이는 안 된다며 팔을 걷어붙였고, 깔끔하게 좀 살라며 치우는 내내 잔소리를 했었다.
- 아유, 이게 뭐야아~? 책상 좀 치우지이~
- 어질러 놓은 거 아니야. 다 제자리에 있는 거야.
- 어제는 이거, 여기 안 있었거든?
- 원래 자리가 거기였어.
- 치, 거짓말... 이래 갖구 누가 오빠한테 시집이나 오겠어?
- 뭐... 올 사람 한 명 있는 거 같은데?
- 누구? 나? 내가 뭐, 오빠한테 시집 온대?
- 누가 수민이래? 웬 김칫국?
- 진짜지, 오빠? 나중에 딴 소리 안 할 거지?
- 응? 아니... 그게 아니라... 그...
- 킥~ 치~...
- 헤헤헤...
- 아유, 이건 또 뭐야아~? 책상에서 뭐 먹지 좀 말라니까안~?
- 아, 나... 바가지 긁으려면 시집 와서 긁든가아~...
- 어? 오빠, 잠깐만... 지금 그걸 프러포즈라고 하고 있는 거야, 오빠?
- 응? 내가 방금 뭐라 그랬지?
- 으유~ 증말... 빨리 씻고 나오기나 해.
그랬던 수민이가 그날은 잔소리하지 않고, 아무 말도 없이 엄마가 아이 방 치우듯 치우고 있었다. 나에겐 이불을 덮어 주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고, 어지럽게 널린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세탁기에 넣고, 술병을 모아 치우고 청소기를 돌렸다. 걸레질까지 하고 나서야, 수민이는 활짝 열었던 창문을 닫았다. 얼핏 본 하늘은 푸르고 맑았다. 볕이 좋은 날이었다. 이중창을 다 닫아도 방안이 환했다.
- 오빠...
- ......
- 정우오빠?
내가 누운 침대 옆 모서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수민이가 불렀지만 그냥, 진짜로 그냥, 아무 말이 안 나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수민이가 머리를 몇 번 쓰다듬은 다음에야 입이 열렸다. 자는 동안 입을 벌리고 있었는지 입안이 다 말라 있었고,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 수미... 커컥~...
수민이가 물을 한 컵 떠 와서 나를 안아 일으켰다. 물을 마시는 나를 보며 수민이가 엷게 웃었다.
- 말 못하는 줄 알았네...
내가 건네는 컵을 받아 내려놓고 수민이가 다시 나를 안았다. 침대 위로 올라와 내 허벅지에 앉아 나를 꼬옥 끌어안았다. 나도 수민이의 허리와 등에 팔을 둘렀다. 포근했다. 따뜻했다. 사랑을 나누던 여느 때처럼, 내 품에 안긴 수민이는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랬다. 수민이가 웃고 있는데, 이렇게 서로 껴안고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데...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다. 지금. 현재. 그게 세상의 전부인데... 나는 내가 말하던 것조차 지키지 못하는 바보였다. 수민이 어머님에 대해 생각한 적이 언제 있었다고... 그렇게 생각하자 힘이 번쩍 났다.
그러나 잠시 뿐, 어깨는 금방 다시 처졌다. 뻔한 결과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사실, 수민이가 빗속에서 애타게 섹스를 요구했던 날 이후, 마치 무슨 벽에 둘러싸인 듯 답답하고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기분에 안절부절했었다. 그런 상황에서 수민이가 요구하는 대로 키스하고, 섹스하고... 수민이는 뭔가 터질 것을 안고 있는 사람처럼 굴었었다. 그래서였나? 부모님 때문이었나? 뭔지도 모르고 걱정만 하던 일을 병원에서 실제로 확인했을 뿐이었다.
내 감정의 변화를 느꼈는지, 수민이가 내 품에서 고개를 들고 두 손으로 내 볼을 감쌌다. 따사롭고 다정한 수민이의 눈빛... 그 속에 빠져들며 잠시 또 흐뭇했다.
- 얼굴이 이게 뭐야...? 한참 더 살쪄도 부족할 사람이...
- ......
- 밥은? 밥 언제 먹었어요?
- ......
- 술만 먹지 말고 밥을 먹어야지... 일어나요. 나가서 뭐 좀 먹어요.
수민이가 잡아끄는 대로 일어나서 시키는 대로 세수를 하고, 아기처럼 수민이가 입혀주는 대로 옷을 입고... 그렇게 함께 나가서 죽집으로 갔지만 죽을 반도 못 먹고 들어와 또 침대에 누웠다. 수민이도 곁에 누워서 서로 안고 쓰다듬고... 그렇게 안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얼마 후, 수민이가 몸을 일으켰다. 내 품에서 벗어난 수민이가 옷을 다 벗고 다시 다가와 내 옷을 벗겼다. 시키는 대로 팔다리를 들고 벗기는 대로 벗고 나체가 되어 수민이의 입술을 받았다. 내 입술에 닿은 수민이의 입술은 여전히 따뜻하고,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수민이의 입술... 내가 아는 키스, 내가 아는 입술이었다. 바로 그 사람의 입술, 그 사람의 키스... 그 당시 내가 기억하는 키스는 수민이의 입술이었고, 지수민이라는 사람 그 자체였다.
내 입술을 빨고 핥던 그 부드러운 입술과 혀가 내 몸을 짜릿하게 스치며 내려가, 지난 몇 개월 동안 수민이의 입안에 숟가락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훨씬 자주 드나들었던 그 녀석을 따뜻하게 핥기 시작했다.
내 성기에 느껴지는 수민이의 입술... 수민이의 말캉하고 부드러운 혀...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다. 항상 섹스하던 곳에서, 항상 하던 두 사람이, 항상 하던 대로 벌거벗고 항상 하던 대로 애무하고 있었다. 수민이의 입과 혀는 여느 때처럼 자극적이었고, 내 성기는 아플 정도로 발기해서 꺼떡거렸다. 그러나 나는 흥분하지 않았다.
- 수민아...
- 우움~... 쭈웁~...
- 수민아, 그만...
수민이가 입에 물었던 내 성기를 뱉고 고개를 들었다.
- 해주고 싶어.
주인의 기분과 상관 없이 꺼떡거리는 시커먼 성기를 수민이가 다시 입에 품었다. 순전히 나에게만 해주는 수민이의 블로우잡, 그리고 내 성기를 애무하면서 늘어난 기교, 웬만한 직업여성 못지 않을 정도로 화려해진 혀놀림... 그러나 나는 그런 수민이의 자극적인 애무에도 전혀 흥분하지 않았다.
- 말했었지? 그건 해주는 게 아니라 수민이가 하고 싶을 때 하는 거야.
그 상황에서도 나는 그따위 바보 같은 소리를 하고 있었다. 멍청한 새끼...
쪽~ 내 성기를 뱉아 내고 입을 뗀 수민이가 내 품을 파고들었다. 수민이를 안고 어깨를 토닥였다. 한참을 그렇게 안겨 있던 수민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입맞춤... 내가 아는 입맞춤, 내가 기억하는 입술, 수민이의 입술... 포근했다. 틈만 나면 뽀뽀해 달라고 졸라대고, 언제 어디서나 수민이의 입술을 원했었던 나... 그리고 그럴 때면 늘 내가 원하는 대로 입맞추어 주었던 수민이...
그렇게 한참 동안 키스하고 나서 수민이는 나를 가만히 안아 주었다. 늘 내 품에 안겼었던 수민이... 그러나 그날은 내가 수민이 품에 포근히 안겨 아늑하게 누워 있었다. 수민이의 풍만한 가슴은 푹신했고, 좋은 향기까지 났다. 나는 그 냄새에 취한 듯 눈을 감았다.
벌거벗은 수민이의 아늑하고 포근한 품에서 나는 어느 새 다시 잠들어 버렸고, 캄캄한 밤중에 다시 잠에서 깨었다. 내가 잠든 새에 수민이는 돌아갔다. 오전에 와서 저녁에 갔는데 내 방에서 벌거벗고 같이 있으면서 섹스를 안 한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수민이를 혼자 가게 둔 것도 처음이었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캄캄한 원룸에 혼자 앉아 있으니 갑자기 쓸쓸하고 외로운 생각이 들어 무지 울적해졌다. 수민이가 간절하게 보고 싶었다. 밤마다 수민이를 생각하며 잠들고 수민이의 꿈을 꾸다 깨었으면서, 막상 수민이가 왔을 때에는 얘기도 별로 못 하고 수민이를 그냥 보냈다. 수민이가 사랑스럽게 애무해 주는 것도 고지식한 말로 제지하고...
그 후, 또 며칠 동안 수민이를 보지 못했다. 전화도 하지 않았다. 그것도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래서? 다시는 수민이 안 볼 거야?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벌떡 일어났다. 그럴 수는 없었다. 예감은 너무 무서웠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무섭고 싫은 예감일수록 잘 맞는 법이다.
수민이에게 전화를 했다.
- 오빠.
- 수민아.
- 오빠, 괜찮아?
- 보고 싶어, 수민아.
- 나도 오빠...
- 걱정 많이 했지? 미안해.
- 오빠... 흑~...
- 어딨어? 뭐 해?
수민이는 학교에 있다고 했다. 당장 보고 싶었다. 차를 몰고 수민이의 학교로 갔다. yy 시로 가는 길은 많이 막혔다. 수민이에게 가야 하는데, 수민이가 보고 싶은데... 마구 밟고 싶었지만 차라리 막히는 게 다행이었다. 온몸에 힘이 없고 머리도 멍해서 운전하기도 힘들었다.
그날... 요약하자면, 평소 한 시간 안 걸리던 길을 두 시간 가까이 운전해서 수민이 학교까지 갔지만 수민이는 다음날까지 제출해야 하는 팀별 과제가 있어서 팀 동료 학생들과 밤새 마무리해야 했다. 시간을 오래 빼앗을 수가 없었고 게다가 시험기간이어서, 아쉬웠지만 얼굴만 보고 나는 돌아왔다.
나는 수민이를 보고 눈물이 날 뻔 했지만 수민이는 아쉽다고 할 뿐, 전화할 때와는 달리 덤덤해 보였다. 그 밤에 내가 거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고 했다. 그래도 다시 보니 좋았다. 우리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온 듯했다.
같이 일하던 선배에게도 걱정을 많이 들었다. 선배 혼자 모든 일을 처리하느라 고생한 것은 물론이고, 며칠 동안 전화도 안 되고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무슨 사고가 있었던 건 아닌지 걱정만 하고 있었다고 했다. 선배는 궁금해 했지만 무슨 일인지 자세히 묻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더 미안했고, 그래서 더욱 더 열심히 일했다. 회사는 점점 바빠졌고, 바빠서 다행이었다. 일에 몰두하면 잡스런 생각을 잊을 수 있었다.
......
수민이 시험이 끝나고, 여름방학이 되었지만 우리는 딱 하루 데이트할 수 있었다. 수민이는 시험이 끝나고 방학이 되자마자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갔다. 애리조나였나, 앨라배마였나... 아니, 애틀랜타였나? 애틀랜타였나 보다. 하여튼 A로 시작해서 a로 끝나는 이름의 미국 어딘가에 방학 내내 머물렀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알래스카는 분명히 아니었다.
두 달... 수민이가 없는 그 두 달은 무지 길게 느껴졌다. 전에 가족여행을 갔을 때에는 열흘도 길다며 투정했던 수민이가, 그때는 별로 투정도 하지 않고 웃으며 인사하고 떠났다. 그것도 전화로만... 연수 간다는 얘기도 전화로, 떠나던 날 인사도 전화로...
수민이가 귀국해서도 귀국한 다음날 잠깐 만나서 얘기만 했을 뿐, 그리고는 또 바로 2학기 개강이었다. 게다가 2학기가 되면서 수민이는 어머님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학교 기숙사로 들어갔고, 내가 회사 다닐 때처럼, 주말에나 겨우 만날 수 있었다.
거의 매일 만나다가 주말에만 만나는 건 처음엔 답답하고 힘들었지만, 나중엔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내가 주말에 다른 일이 있어서 못 만나기도 하고, 수민이가 어머님과 어딜 가야 한대서 못 보기도 했다. 개강하고 나서는 한 달이 되도록 단 두 번밖에 수민이를 보지 못했다.
석 달 동안 수민이를 만난 게 겨우 두 번이라니... 나는 수민이를 보지 못한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애가 타고 걱정이 되었다. 한번은 주말에 수민이에게 전화를 했는데...
- 여보세요?
- 어... 저...
수민이가 아니었다. 수민이 전화를 받을 사람이라면, 그것도 중년 여인의 목소리라면 짐작가는 사람은 한 분 뿐이었다. 또 온몸에 힘이 쭈욱 빠졌다. 그러나 주먹을 꼭 쥐고 침을 꿀꺽 삼켰다.
- 수민이 잠깐 어디 나갔는데, 누구라고 할까요?
- 저... 한정우...입니다.
- 누구라구요?
- 한정우입니다. 지난번에 병원에서 한 번 뵈었던...
- ......
- 수민이 없으면 나중에 다시 걸겠습니다.
- 아니, 잠깐만요.
- 네?
- 지금도 우리 수민이 만나나요?
- ......
또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수민이 어머님은 뭐라고 얘기를 했지만 들리지도 않고 그저 멍했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어떻게 끊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또 수민이 어머님과 예상치 못한 통화를 하고 난 후에는 수민이에게 전화를 하는 것조차 주저하고 망설이게 되었다. 수민이의 전화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답답하고 궁금했지만 혹시나 또 어머님이 받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다 보니 수민이가 기숙사에 있는 평일에도 쉽게 전화를 걸지 못할 정도였다.
진짜 너무너무 답답하고 수민이가 보고 싶었지만, 나는 나대로 또 바쁘기도 했다. 수민이를 못 만났던 방학 때부터 진짜 일복이 터진 것처럼 일이 많아졌었다. 수민이가 어학연수를 가서 못 보는 동안 일이나 하라는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진짜 미친 듯이 일했다. 그러나 방학이 끝나고 수민이가 돌아오면 만날 거라는 기대로 견뎠지만, 방학이 끝난 후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거의 밤새워 작업하고 아침에 잠깐 자고 일어나서 일하다가 점심 먹고 낮잠 잠깐 자고 또 일하고... 바쁘게 일한 만큼 회사 매출은 눈에 띄게 늘어났다. 프로그래머를 더 써야 하나 둘이서 한참을 고민했지만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여름 휴가는커녕 9월이 다 지날 즈음에야 한숨을 좀 돌렸고, 덕분에 나와 선배의 은행 잔고는 아주 두둑해졌다. 우리의 수입 금액은 회사 다닐 때와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문의 전화에 응대하고, 미팅과 PT 스케줄을 관리했던 여직원에게 특별 보너스까지 줄 수 있었다. 여직원은 생각도 못 했던 보너스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는 이자도 안 붙는 보통예금 통장에 그냥 넣어 두었고, 선배는 최신 모델 수입 세단으로 차를 바꿨다. 선배 차를 보니까 나도 멋진 새 차를 사고 싶은 충동이 생겼지만, 그럴 바에는 아버지께 새 차를 사드리는 게 도리에 맞았다. 아버지 차를 거의 내가 몰고 다녔으니까.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도 집을 먼저 사고 싶었다. 대출을 끼고 작은 평수를 사더라도 아파트로 옮기고 싶었다. 수민이와 결혼할 계획도 세워야 했고, 결혼한다면 집은 남자 쪽에서 마련하는 거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리고, 내 집이라도 있으면 수민이 어머님께 그나마 내세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다.
......
시월로 들어서면서 밤에는 서늘한 계절이 되었다. 그렇게도 덥더니... 덥다가도 서늘해지는 것처럼 모든 건 바뀌어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민이는 여전히 보기 힘들었다. 시간을 맞추어 약속을 잡기가 어려웠다. 일이 생겨서였는지, 핑계였는지... 그런 의심이 생길 정도로 매번 시간이 어긋났다. 내 스케줄 때문에 못 본 날도 있었지만 참 만나기 힘들었었다.
그렇게 바쁜 시간을 보내고 시간여유가 좀 생겼는데도 수민이를 볼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자, 나는 병원에서 수민이 어머님과 짧은 대화를 하고 난 직후처럼 머리가 텅 비어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급기야는 평일에 수민이의 학교에 가서 수업시간에 강의실로 들어가 수민이를 부르는 상상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민이가 전화를 해서 만나기로 했다. 한 달도 훨씬 넘게 못 보다가, 아니, 잠깐 얼굴 본 걸 빼고는 거의 석 달만에 만나는 거라서 콧노래를 부르며 룰루랄라 신이 나서 나갔다. 수민이가 정한 장소는 늘 만나던 그 카페가 아니라 그날 처음 가 보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름과 장소가 틀림없는 그 카페에 수민이는 없었다. 한참을 두리번거렸지만 수민이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수민이가 좀 늦을 수도 있는 건데 그런 생각은 하지 못하고, 수민이가 없다는 생각에 이상한 느낌을 받고 조바심을 냈다.
그러나, 수민이는 거기 있었다. 카페에 먼저 와 있었다. 내가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내가 두리번거리자 한쪽 귀퉁이에서 누군가가 손을 들었고, 잠시 후에는 일어나서 손을 흔들었다. 그제서야 나는 손을 흔드는 낯선 여자에게 다가갔고, 가까이 가서야 수민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수민이는 펄이 잔뜩 들어간 스모키 화장을 하고 있었다. 화장 뿐만이 아니었다. 항상 똑같았던 목걸이와 귀걸이도 달라져 있었다. 몸매를 드러내는 스키니진에 굽 높은 힐을 신었다. 나를 위해 립스틱도 바르지 않던 수민이는 이미 없었다. 독자 여러분은 상상할 수 있는가? 애인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하는 화장이라는 게 어떤 건지?
수민이의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무슨 말을 듣게 될지 예감했다. 아니, 수민이가 잘 연락하지 않을 때 이미 짐작을 하고 있었다. 그 전에 전혀 몰랐다면 거짓말이었다. 내가 인정하지 못했을 뿐... 인정하기 싫었을 뿐...
갑자기 목에 걸린 체인이 무겁게 느껴졌다. 내 셔츠로 가려져 수민이에게는 보이지도 않는 목걸이가 신경쓰였고, 그 작은 펜던트의 무게에 목 밑 부분이 답답하기까지 했다.
- 주문하시겠어요?
- 오빠, 뭐 드실래요?
- 음... 나는...
- 주스 뭐 있어요?.
- 생과일 주스 있습니다. 바나나, 키위, 딸기 있는데, 뭘로 드릴까요?
- 딸기주스 주시구요, 전 아이스커피요.
수민이가 주스와 커피를 주문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수민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기도 커피 대신 주스나 차를 마시던 수민이였는데... 불안한 예감은 절망스런 확신으로 변했다. 힘이 쭈욱 빠지는 듯했지만 멍하지는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고, 내가 고개를 끄덕인다는 것에 내가 놀랐다.
음료를 주문하고, 얼마 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답답했다. 견디기 힘들어서 상투적인 말을 꺼냈다.
- 잘 지냈어? 진짜 오랜만이네... 그지?
- 네, 오빠는요?
- 나야 뭐... 화장이 달라졌네? 빤짝빤짝...
반짝이는 매니큐어를 칠한 수민이의 손을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수민이는 커피 컵을 들며 자연스럽게 내 손을 피했다. 수민이는 빨대로 커피를 마시며 손에 든 컵만 바라보았고, 내 눈과 마주치지 않았다. 나는 멍하게 입도 다물지 못하고 뭘 해야 할지 몰랐다. 내 손을 쳐내지 않고 그냥 피해 준 게 차라리 고맙게 여겨질 정도로 수민이는 무표정했다.
- 요즘도 술만 먹어요? 얼굴이 아직도 홀쭉해...
- 많이 안 먹어.
- .....
- 수민이는...
- 오빠.
수민이가 말을 끊었다.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알지도 못하면서 가슴에서 또 뭔가 떨어졌다. 쿵 소리가 커다랗게 머리까지 울렸다. 아니 무슨 얘기가 나올지 짐작했었다. 아니, 몰랐나? 알았던가? 몰랐던가? 그게 왜 중요하지? 내가 왜 그걸 생각하고 있지?....
수민이는 아이스커피를 한 모금 쭈욱 빨아먹고 컵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수민이는 나를 보지 않고 커피잔에 든 빨대를 빙빙 돌리며 그것만 바라보았다.
- 오빠, 우리...
- ......
- 잠시... 떨어져 있어요.
- ......
- 오빠랑 같이 있으면 좋고...
- ......
- 항상 같이... 있고 싶었어요.
- ......
- 근데 지금은...
- ......
-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 ......
- 전처럼... 좋기만 한 건 아니예요.
- ......
그거였나? 수민이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기도 전에 내 마음으로는, 가슴으로는 이미 느낌을 받았던 거였나... 나는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수민이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수민이에게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왜 안 좋으냐고 묻지 않았다.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이유가 있나...? 그냥 좋은 거지... 좋은데 이유가 없듯, 좋지 않은 것도 딱히 꼬집어 말할 이유는 없는 거였다. 나는 수민이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수민이가 만지작거리는 컵과 빨대만 보고 있었다.
그 한 달 동안 수민이와 했던 전화 통화가 생각났다. 틈만 나면 전화를 하고 문자메시지를 보내던 수민이였는데 그때는 항상 내가 먼저 전화를 걸어야 통화할 수 있었고 문자메시지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바쁘긴 했지만, 그렇게 안절부절 애태우면서도 수민이 마음이 변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었다.
다정한 속삭임도 없고, 보고 싶다는 상투적인 인사도 없고, 내가 말하면 간단히 대답할 뿐, 수민이가 뭔가를 먼저 얘기하는 경우가 드물었던 전화통화... 통화할 때는 몰랐었는데, 수민이의 일방적인 통보를 듣고 나서야 수민이가 왜 그랬었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은 했어도 수민이에게 아무 얘기도 못 하고 뭘 물어보지도 못했다.
告? 왜 내가 싫어진 걸까?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석 달 동안 수민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진짜 사랑이 식은 걸까, 아니면, 어머님의 반대에 지쳐 포기하는 걸까... 생각은 많았지만 수민이에게 물어볼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물어봐야 명확하게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렇게 서로 말없이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불편한 시간이 지루하게 흘렀다. 나는 소파에 묻히듯 멍하니 앉아 있었지만 수민이는 좀이 쑤시는 듯 자꾸 꼼지락거렸다. 수민이는 빨대를 쪽쪽거리며 아이스커피를 다 마셨다. 나는 주스에 입도 대지 않았다.
- 안 마셔요?
- 응? 응...
- 그럼... 이제 갈까요?
- ......
수민이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먼저 일어나 계산서를 집어들었다. 지폐에 동전까지 꺼내서 딱 맞게 지불한 후, 수민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휘적휘적 걸어나갔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수민이 뒤를 따랐다.
커피숍 앞에 잠시 섰던 수민이는 내가 나오자 빤히 쳐다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수민이 옆에 따라붙어 수민이의 손을 당겨 잡았다. 수민이는 손을 빼지는 않았지만 마주 잡아 오지 않았다. 그냥 나에게 손을 잡힌 채 걸었다. 손을 마주 잡아 주면 좋았을 텐데... 생각했지만 생각 뿐, 그냥 앞만 보고 걸었다. 수민이도 나도 말이 없었다. 수민이의 집까지 꽤 되는 거리였지만 나와 수민이는 아무 말 없이 그렇게 그냥 걸었다.
수민이네 집은 생각보다 가까웠다. 어느새 집 앞에 도착했고, 나는 수민이를 바래다 줄 때 늘상 그랬던 것처럼 무심코 수민이를 안았다. 아니, 안으려고 팔을 벌리고 다가섰지만 수민이가 몸을 피해 물러났다. 포옹을 거부하는데 예전처럼 작별 키스를 시도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오는 동안 내 손을 뿌리치지 않은 게 수민이의 마지막 배려였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 그럼, 조심해서...
- ......
수민이는 너무도 간단히 인사를 하고, 그것도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는 들어가 버렸다. 수민이 모습은 금새 계단 기둥 뒤로 사라졌다. 수민이는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았고, 나는 그런 수민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수민이가 올라가는 층마다 차례로 불이 켜지고, 4층 계단참에 불이 켜졌다가 꺼지고도 한참 후에야, 나는 비로소 힘없이 돌아섰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길을 잃었다. 거기가 어딘지도,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진짜 처음 와 보는 곳처럼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디로든 가야 한다는 생각에 무작정 앞으로 걸었고, 그렇게 무작정 걷다가 처음 나오는 좁은 골목으로 꺾어 들어갔다. 그리고,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말끔한 차림의 멀쩡한 남자가 골목에 주저앉아 있었다. 일어날 생각도, 일어날 힘도 없었다. 아무 생각도 없었다, 울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눈물은 자기 혼자 마구 흘렀다. 나는 진짜 울지 않았는데 눈물은 끝없이 솟았다. 가로등이 비추었고, 거리는 사물을 뚜렷이 분간할 만큼 밝았는데, 내 눈앞과 내 머릿속만 캄캄했다.
거기 얼마나 앉아 있었는지, 길을 어떻게 찾았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집에 어떻게 돌아왔는지, 언제 돌아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차를 타고 왔는지, 걸어왔는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술에 취하면 집에는 찾아오는데 기억을 못하는 것처럼,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다. 잠을 자기는 잤었던 모양이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술은 마시지 않은 게 확실했다.
사실은 수민이나 나나 이미 알고 있었다. 방학 전 몇 주 동안 우리는 즐겁다고 생각했지만 즐겁다고 우기는 거였고, 즐거워야만 한다는 생각에 부담스러웠다는 것을. 수민이의 수술 이후, 수민이의 어머님에게 차가운 말을 들은 이후부터였다. 주말에 데이트하면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했지만 내 생각이었을 뿐, 시간을 과거로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예상하고 있었으면서도 막상 그 상황이 오자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한 달... 5주쯤 되는 기간이었다. 만나지 못한 지 겨우 한 달. 여름방학을 포함해도 석 달. 그 석 달 동안 수민이가 변한 거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라면, 그게 사람의 감정이었다면, 그렇게 갑자기 변할 수는 없는 거였다. 감정과 상관 없이 사회적인 이유로 일부러 유지해야 하는 거래 관계라면 몰라도,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뚝 자르듯 쉽게 식을 수 있다는 건 믿을 수 없었다.
잠시 떨어져 있는 시간을 갖자고 했던 수민이는 잠시라는 말로 나를 안심시키려 했었던 모양이다. 그 잠시가 영원이라는 것을, 다시는 가까워질 수 없는 떨어짐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수민이도 알고 하늘도 알고 땅도 알았다. 그러나 수민이는 잠시라고 했다. 어쩌면 내가 아파할까 봐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전혀 내 아픔을 덜어주지 못했다.
18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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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gditiger, 태견, aprntm325, 머지롱, kofoo 님, 정우 위로하시는 거죠? ^^;
atlas 님 / 가미했다...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성적인 묘사는 사실, 소.라.넷.에 올리기 위해서 일부러 집어넣은 게 맞습니다. 근데, 표현하다 보니 흥분도 되고 재미도 있네요. ^^;
미래완료형 님 / 졸지에 형님 되셨네요? ㅋㅋ / 공감... 그게 제가 원하는 것이기도 하고, 독자분들도 원하시는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딥블루 님 / 글쎄요... 어머님 태도 때문인지 본인의 심경 변화인지는 수민이만 알겠지요. 결혼은 두 집안 사이의 문제 맞습니다. 가족들을 저버리지 않는 한, 단 둘만의 문제는 아니죠.
..
그때의 일을 상세히 쓸 수가 없다. 상세히 기억하지 못 하기 때문이다. 애써 생각해 내려 하면 머리가 아프고 답답하다.
그날, 어떻게 집까지 돌아왔는지 언제 돌아왔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잠에서 깨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침대였다. 머리가 아팠다. 누구에게 맞기라도 한 걸까? 초인종이 울렸지만 그냥 누워서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귀찮았다. 누가 오든지 말든지... 그러다가 또 잠이 들고, 또 깨었다가 또 자고...
몇 번을 자다 깼을까... 그래도 일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일어나서 씻고 옷을 갈아입었지만 마치 몸살이라도 난 듯 머리는 멍하고 손발에는 힘이 없었다. 수민이 어머님의 목소리가 머리에서 계속 울렸다. 우리 수민이, 앞으로 안 만났으면 좋겠어요... 머리가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멍하니 앉아 있다가 도로 누워 또 잠들었다. 졸린 건 아니었는데, 누우면 그냥 잠이 들었고 자고 자고 또 잤다.
그러기를 얼마나 했을까... 이번에는 밤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자꾸 수민이 어머님의 말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수민이 어머님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부터 왜 그렇게 왜 그렇게 답답하고 숨이 막혔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낮에는 그래도 버틸 만했지만 저녁이 되면 참기가 힘들었다. 술도 잘 마시지 못하면서 그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술을 마셨다. 그렇게 마시다가 취하면 자고, 잠에서 깨면 그 생각에 아파하다가 저녁이 되면 또 술을 먹었었다. 맨 정신으로는 잠시도 버틸 수가 없었다. 얼마나 그렇게 잤는지... 하룻밤이었는지, 며칠 동안 그랬는지조차 몰랐다.
잠이 들면 꿈을 꾸었다. 즐거운 꿈도 꾸었고, 악몽도 꾸었다. 기억나는 꿈은 하나밖에 없다. 수민이와 몸을 합치고 서로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있는 꿈... 그러나 그 꿈도 악몽으로 끝났다. 누워 있는 내 위에서 한참 신음하며 엉덩이를 돌리던 수민이가 갑자기 수민이 어머님으로 변해서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노려보는 것도 아니고, 말없이 그냥 가만히.
비명을 지르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소리도 나지 않았다. 몸부림을 치고 고개를 저으려 해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수민이 어머님이 내 얼굴에 손을 댔다. 몸서리치며 깨어나 눈을 번쩍 떴다. 눈이 부셨다. 누군가가 눈앞에 있었지만 검은 실루엣만 보였다. 수민이 어머님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또 한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조금씩 정신이 들면서 수민이일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너무 눈이 부셔서 볼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찌푸린 눈꺼풀 틈으로 사물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방 안이 환하게 밝았고, 창문이 커다란 확산판처럼 눈부셨다. 수민이가 내 얼굴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것도 꿈인가 잠시 생각했지만, 분명히 꿈이 아니었다. 수민이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꿈에서 깨면서 신음소리를 냈는지 비명을 질렀는지, 내가 뭔가 소리를 냈었던 모양이다. 지난밤에 얼마나 마셨는지 머리가 아프고 멍했다.
수민이가 왔는데 안아 주질 못했다. 대신 수민이가 몸을 숙여 나를 안았다. 내 머리를 안고 쓰다듬었다. 수민이의 풍만한 가슴이 얼굴에 눌렸지만, 흐뭇하고 좋은 느낌도, 흥분되는 느낌도 전혀 들지 않았다. 수민이를 안아 줘야 하는데... 생각했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눈물이 흘렀다. 양쪽 귓가로 흘러내리는 눈물이 느껴졌다. 나는 또 울고 있었다.
- 꿈... 꿨어요?
- ......
- 울지 말아요.
- ......
수민이 얼굴이 다가왔다. 수민이의 입술과 혀가 내 눈가를 핥아 닦았다. 짤 텐데... 수민이가 퇴원해서 나에게 왔다는 건, 적어도 일주일이 지났다는 얘기였다. 일주일... 그 오랜 시간 동안 뭘 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방안은 난장판이었다. 술병이 여기저기 뒹굴었고, 술을 쏟은 곳도 있었다. 내가 벗어던진 옷가지와 양말, 속옷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의자도 넘어져 뒹굴고 있었고, TV는 뭔지 모를 방송에서 여러 사람이 히히덕거리고 있었다. 담배를 피웠더라면 불이 났을지도 몰랐다.
수민이가 나를 다시 눕히고 방을 치웠다. 평소에도 수민이는 방 좀 정리하라는 소리를 했고, 그때마다 그냥 놔 두라고 해도 수민이는 안 된다며 팔을 걷어붙였고, 깔끔하게 좀 살라며 치우는 내내 잔소리를 했었다.
- 아유, 이게 뭐야아~? 책상 좀 치우지이~
- 어질러 놓은 거 아니야. 다 제자리에 있는 거야.
- 어제는 이거, 여기 안 있었거든?
- 원래 자리가 거기였어.
- 치, 거짓말... 이래 갖구 누가 오빠한테 시집이나 오겠어?
- 뭐... 올 사람 한 명 있는 거 같은데?
- 누구? 나? 내가 뭐, 오빠한테 시집 온대?
- 누가 수민이래? 웬 김칫국?
- 진짜지, 오빠? 나중에 딴 소리 안 할 거지?
- 응? 아니... 그게 아니라... 그...
- 킥~ 치~...
- 헤헤헤...
- 아유, 이건 또 뭐야아~? 책상에서 뭐 먹지 좀 말라니까안~?
- 아, 나... 바가지 긁으려면 시집 와서 긁든가아~...
- 어? 오빠, 잠깐만... 지금 그걸 프러포즈라고 하고 있는 거야, 오빠?
- 응? 내가 방금 뭐라 그랬지?
- 으유~ 증말... 빨리 씻고 나오기나 해.
그랬던 수민이가 그날은 잔소리하지 않고, 아무 말도 없이 엄마가 아이 방 치우듯 치우고 있었다. 나에겐 이불을 덮어 주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하고, 어지럽게 널린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 세탁기에 넣고, 술병을 모아 치우고 청소기를 돌렸다. 걸레질까지 하고 나서야, 수민이는 활짝 열었던 창문을 닫았다. 얼핏 본 하늘은 푸르고 맑았다. 볕이 좋은 날이었다. 이중창을 다 닫아도 방안이 환했다.
- 오빠...
- ......
- 정우오빠?
내가 누운 침대 옆 모서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은 수민이가 불렀지만 그냥, 진짜로 그냥, 아무 말이 안 나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수민이가 머리를 몇 번 쓰다듬은 다음에야 입이 열렸다. 자는 동안 입을 벌리고 있었는지 입안이 다 말라 있었고,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 수미... 커컥~...
수민이가 물을 한 컵 떠 와서 나를 안아 일으켰다. 물을 마시는 나를 보며 수민이가 엷게 웃었다.
- 말 못하는 줄 알았네...
내가 건네는 컵을 받아 내려놓고 수민이가 다시 나를 안았다. 침대 위로 올라와 내 허벅지에 앉아 나를 꼬옥 끌어안았다. 나도 수민이의 허리와 등에 팔을 둘렀다. 포근했다. 따뜻했다. 사랑을 나누던 여느 때처럼, 내 품에 안긴 수민이는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랬다. 수민이가 웃고 있는데, 이렇게 서로 껴안고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데...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다. 지금. 현재. 그게 세상의 전부인데... 나는 내가 말하던 것조차 지키지 못하는 바보였다. 수민이 어머님에 대해 생각한 적이 언제 있었다고... 그렇게 생각하자 힘이 번쩍 났다.
그러나 잠시 뿐, 어깨는 금방 다시 처졌다. 뻔한 결과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사실, 수민이가 빗속에서 애타게 섹스를 요구했던 날 이후, 마치 무슨 벽에 둘러싸인 듯 답답하고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기분에 안절부절했었다. 그런 상황에서 수민이가 요구하는 대로 키스하고, 섹스하고... 수민이는 뭔가 터질 것을 안고 있는 사람처럼 굴었었다. 그래서였나? 부모님 때문이었나? 뭔지도 모르고 걱정만 하던 일을 병원에서 실제로 확인했을 뿐이었다.
내 감정의 변화를 느꼈는지, 수민이가 내 품에서 고개를 들고 두 손으로 내 볼을 감쌌다. 따사롭고 다정한 수민이의 눈빛... 그 속에 빠져들며 잠시 또 흐뭇했다.
- 얼굴이 이게 뭐야...? 한참 더 살쪄도 부족할 사람이...
- ......
- 밥은? 밥 언제 먹었어요?
- ......
- 술만 먹지 말고 밥을 먹어야지... 일어나요. 나가서 뭐 좀 먹어요.
수민이가 잡아끄는 대로 일어나서 시키는 대로 세수를 하고, 아기처럼 수민이가 입혀주는 대로 옷을 입고... 그렇게 함께 나가서 죽집으로 갔지만 죽을 반도 못 먹고 들어와 또 침대에 누웠다. 수민이도 곁에 누워서 서로 안고 쓰다듬고... 그렇게 안고 가만히 누워 있었다.
얼마 후, 수민이가 몸을 일으켰다. 내 품에서 벗어난 수민이가 옷을 다 벗고 다시 다가와 내 옷을 벗겼다. 시키는 대로 팔다리를 들고 벗기는 대로 벗고 나체가 되어 수민이의 입술을 받았다. 내 입술에 닿은 수민이의 입술은 여전히 따뜻하고,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수민이의 입술... 내가 아는 키스, 내가 아는 입술이었다. 바로 그 사람의 입술, 그 사람의 키스... 그 당시 내가 기억하는 키스는 수민이의 입술이었고, 지수민이라는 사람 그 자체였다.
내 입술을 빨고 핥던 그 부드러운 입술과 혀가 내 몸을 짜릿하게 스치며 내려가, 지난 몇 개월 동안 수민이의 입안에 숟가락보다도, 그 무엇보다도 훨씬 자주 드나들었던 그 녀석을 따뜻하게 핥기 시작했다.
내 성기에 느껴지는 수민이의 입술... 수민이의 말캉하고 부드러운 혀...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다. 항상 섹스하던 곳에서, 항상 하던 두 사람이, 항상 하던 대로 벌거벗고 항상 하던 대로 애무하고 있었다. 수민이의 입과 혀는 여느 때처럼 자극적이었고, 내 성기는 아플 정도로 발기해서 꺼떡거렸다. 그러나 나는 흥분하지 않았다.
- 수민아...
- 우움~... 쭈웁~...
- 수민아, 그만...
수민이가 입에 물었던 내 성기를 뱉고 고개를 들었다.
- 해주고 싶어.
주인의 기분과 상관 없이 꺼떡거리는 시커먼 성기를 수민이가 다시 입에 품었다. 순전히 나에게만 해주는 수민이의 블로우잡, 그리고 내 성기를 애무하면서 늘어난 기교, 웬만한 직업여성 못지 않을 정도로 화려해진 혀놀림... 그러나 나는 그런 수민이의 자극적인 애무에도 전혀 흥분하지 않았다.
- 말했었지? 그건 해주는 게 아니라 수민이가 하고 싶을 때 하는 거야.
그 상황에서도 나는 그따위 바보 같은 소리를 하고 있었다. 멍청한 새끼...
쪽~ 내 성기를 뱉아 내고 입을 뗀 수민이가 내 품을 파고들었다. 수민이를 안고 어깨를 토닥였다. 한참을 그렇게 안겨 있던 수민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입맞춤... 내가 아는 입맞춤, 내가 기억하는 입술, 수민이의 입술... 포근했다. 틈만 나면 뽀뽀해 달라고 졸라대고, 언제 어디서나 수민이의 입술을 원했었던 나... 그리고 그럴 때면 늘 내가 원하는 대로 입맞추어 주었던 수민이...
그렇게 한참 동안 키스하고 나서 수민이는 나를 가만히 안아 주었다. 늘 내 품에 안겼었던 수민이... 그러나 그날은 내가 수민이 품에 포근히 안겨 아늑하게 누워 있었다. 수민이의 풍만한 가슴은 푹신했고, 좋은 향기까지 났다. 나는 그 냄새에 취한 듯 눈을 감았다.
벌거벗은 수민이의 아늑하고 포근한 품에서 나는 어느 새 다시 잠들어 버렸고, 캄캄한 밤중에 다시 잠에서 깨었다. 내가 잠든 새에 수민이는 돌아갔다. 오전에 와서 저녁에 갔는데 내 방에서 벌거벗고 같이 있으면서 섹스를 안 한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수민이를 혼자 가게 둔 것도 처음이었다. 바보 같은 짓이었다.
캄캄한 원룸에 혼자 앉아 있으니 갑자기 쓸쓸하고 외로운 생각이 들어 무지 울적해졌다. 수민이가 간절하게 보고 싶었다. 밤마다 수민이를 생각하며 잠들고 수민이의 꿈을 꾸다 깨었으면서, 막상 수민이가 왔을 때에는 얘기도 별로 못 하고 수민이를 그냥 보냈다. 수민이가 사랑스럽게 애무해 주는 것도 고지식한 말로 제지하고...
그 후, 또 며칠 동안 수민이를 보지 못했다. 전화도 하지 않았다. 그것도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래서? 다시는 수민이 안 볼 거야?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벌떡 일어났다. 그럴 수는 없었다. 예감은 너무 무서웠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무섭고 싫은 예감일수록 잘 맞는 법이다.
수민이에게 전화를 했다.
- 오빠.
- 수민아.
- 오빠, 괜찮아?
- 보고 싶어, 수민아.
- 나도 오빠...
- 걱정 많이 했지? 미안해.
- 오빠... 흑~...
- 어딨어? 뭐 해?
수민이는 학교에 있다고 했다. 당장 보고 싶었다. 차를 몰고 수민이의 학교로 갔다. yy 시로 가는 길은 많이 막혔다. 수민이에게 가야 하는데, 수민이가 보고 싶은데... 마구 밟고 싶었지만 차라리 막히는 게 다행이었다. 온몸에 힘이 없고 머리도 멍해서 운전하기도 힘들었다.
그날... 요약하자면, 평소 한 시간 안 걸리던 길을 두 시간 가까이 운전해서 수민이 학교까지 갔지만 수민이는 다음날까지 제출해야 하는 팀별 과제가 있어서 팀 동료 학생들과 밤새 마무리해야 했다. 시간을 오래 빼앗을 수가 없었고 게다가 시험기간이어서, 아쉬웠지만 얼굴만 보고 나는 돌아왔다.
나는 수민이를 보고 눈물이 날 뻔 했지만 수민이는 아쉽다고 할 뿐, 전화할 때와는 달리 덤덤해 보였다. 그 밤에 내가 거기까지 올 줄은 몰랐다고 했다. 그래도 다시 보니 좋았다. 우리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온 듯했다.
같이 일하던 선배에게도 걱정을 많이 들었다. 선배 혼자 모든 일을 처리하느라 고생한 것은 물론이고, 며칠 동안 전화도 안 되고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무슨 사고가 있었던 건 아닌지 걱정만 하고 있었다고 했다. 선배는 궁금해 했지만 무슨 일인지 자세히 묻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더 미안했고, 그래서 더욱 더 열심히 일했다. 회사는 점점 바빠졌고, 바빠서 다행이었다. 일에 몰두하면 잡스런 생각을 잊을 수 있었다.
......
수민이 시험이 끝나고, 여름방학이 되었지만 우리는 딱 하루 데이트할 수 있었다. 수민이는 시험이 끝나고 방학이 되자마자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갔다. 애리조나였나, 앨라배마였나... 아니, 애틀랜타였나? 애틀랜타였나 보다. 하여튼 A로 시작해서 a로 끝나는 이름의 미국 어딘가에 방학 내내 머물렀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알래스카는 분명히 아니었다.
두 달... 수민이가 없는 그 두 달은 무지 길게 느껴졌다. 전에 가족여행을 갔을 때에는 열흘도 길다며 투정했던 수민이가, 그때는 별로 투정도 하지 않고 웃으며 인사하고 떠났다. 그것도 전화로만... 연수 간다는 얘기도 전화로, 떠나던 날 인사도 전화로...
수민이가 귀국해서도 귀국한 다음날 잠깐 만나서 얘기만 했을 뿐, 그리고는 또 바로 2학기 개강이었다. 게다가 2학기가 되면서 수민이는 어머님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학교 기숙사로 들어갔고, 내가 회사 다닐 때처럼, 주말에나 겨우 만날 수 있었다.
거의 매일 만나다가 주말에만 만나는 건 처음엔 답답하고 힘들었지만, 나중엔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내가 주말에 다른 일이 있어서 못 만나기도 하고, 수민이가 어머님과 어딜 가야 한대서 못 보기도 했다. 개강하고 나서는 한 달이 되도록 단 두 번밖에 수민이를 보지 못했다.
석 달 동안 수민이를 만난 게 겨우 두 번이라니... 나는 수민이를 보지 못한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애가 타고 걱정이 되었다. 한번은 주말에 수민이에게 전화를 했는데...
- 여보세요?
- 어... 저...
수민이가 아니었다. 수민이 전화를 받을 사람이라면, 그것도 중년 여인의 목소리라면 짐작가는 사람은 한 분 뿐이었다. 또 온몸에 힘이 쭈욱 빠졌다. 그러나 주먹을 꼭 쥐고 침을 꿀꺽 삼켰다.
- 수민이 잠깐 어디 나갔는데, 누구라고 할까요?
- 저... 한정우...입니다.
- 누구라구요?
- 한정우입니다. 지난번에 병원에서 한 번 뵈었던...
- ......
- 수민이 없으면 나중에 다시 걸겠습니다.
- 아니, 잠깐만요.
- 네?
- 지금도 우리 수민이 만나나요?
- ......
또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수민이 어머님은 뭐라고 얘기를 했지만 들리지도 않고 그저 멍했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어떻게 끊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또 수민이 어머님과 예상치 못한 통화를 하고 난 후에는 수민이에게 전화를 하는 것조차 주저하고 망설이게 되었다. 수민이의 전화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답답하고 궁금했지만 혹시나 또 어머님이 받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다 보니 수민이가 기숙사에 있는 평일에도 쉽게 전화를 걸지 못할 정도였다.
진짜 너무너무 답답하고 수민이가 보고 싶었지만, 나는 나대로 또 바쁘기도 했다. 수민이를 못 만났던 방학 때부터 진짜 일복이 터진 것처럼 일이 많아졌었다. 수민이가 어학연수를 가서 못 보는 동안 일이나 하라는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진짜 미친 듯이 일했다. 그러나 방학이 끝나고 수민이가 돌아오면 만날 거라는 기대로 견뎠지만, 방학이 끝난 후에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거의 밤새워 작업하고 아침에 잠깐 자고 일어나서 일하다가 점심 먹고 낮잠 잠깐 자고 또 일하고... 바쁘게 일한 만큼 회사 매출은 눈에 띄게 늘어났다. 프로그래머를 더 써야 하나 둘이서 한참을 고민했지만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여름 휴가는커녕 9월이 다 지날 즈음에야 한숨을 좀 돌렸고, 덕분에 나와 선배의 은행 잔고는 아주 두둑해졌다. 우리의 수입 금액은 회사 다닐 때와 비교가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문의 전화에 응대하고, 미팅과 PT 스케줄을 관리했던 여직원에게 특별 보너스까지 줄 수 있었다. 여직원은 생각도 못 했던 보너스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는 이자도 안 붙는 보통예금 통장에 그냥 넣어 두었고, 선배는 최신 모델 수입 세단으로 차를 바꿨다. 선배 차를 보니까 나도 멋진 새 차를 사고 싶은 충동이 생겼지만, 그럴 바에는 아버지께 새 차를 사드리는 게 도리에 맞았다. 아버지 차를 거의 내가 몰고 다녔으니까.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도 집을 먼저 사고 싶었다. 대출을 끼고 작은 평수를 사더라도 아파트로 옮기고 싶었다. 수민이와 결혼할 계획도 세워야 했고, 결혼한다면 집은 남자 쪽에서 마련하는 거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리고, 내 집이라도 있으면 수민이 어머님께 그나마 내세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다.
......
시월로 들어서면서 밤에는 서늘한 계절이 되었다. 그렇게도 덥더니... 덥다가도 서늘해지는 것처럼 모든 건 바뀌어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민이는 여전히 보기 힘들었다. 시간을 맞추어 약속을 잡기가 어려웠다. 일이 생겨서였는지, 핑계였는지... 그런 의심이 생길 정도로 매번 시간이 어긋났다. 내 스케줄 때문에 못 본 날도 있었지만 참 만나기 힘들었었다.
그렇게 바쁜 시간을 보내고 시간여유가 좀 생겼는데도 수민이를 볼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자, 나는 병원에서 수민이 어머님과 짧은 대화를 하고 난 직후처럼 머리가 텅 비어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급기야는 평일에 수민이의 학교에 가서 수업시간에 강의실로 들어가 수민이를 부르는 상상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민이가 전화를 해서 만나기로 했다. 한 달도 훨씬 넘게 못 보다가, 아니, 잠깐 얼굴 본 걸 빼고는 거의 석 달만에 만나는 거라서 콧노래를 부르며 룰루랄라 신이 나서 나갔다. 수민이가 정한 장소는 늘 만나던 그 카페가 아니라 그날 처음 가 보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름과 장소가 틀림없는 그 카페에 수민이는 없었다. 한참을 두리번거렸지만 수민이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수민이가 좀 늦을 수도 있는 건데 그런 생각은 하지 못하고, 수민이가 없다는 생각에 이상한 느낌을 받고 조바심을 냈다.
그러나, 수민이는 거기 있었다. 카페에 먼저 와 있었다. 내가 알아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내가 두리번거리자 한쪽 귀퉁이에서 누군가가 손을 들었고, 잠시 후에는 일어나서 손을 흔들었다. 그제서야 나는 손을 흔드는 낯선 여자에게 다가갔고, 가까이 가서야 수민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수민이는 펄이 잔뜩 들어간 스모키 화장을 하고 있었다. 화장 뿐만이 아니었다. 항상 똑같았던 목걸이와 귀걸이도 달라져 있었다. 몸매를 드러내는 스키니진에 굽 높은 힐을 신었다. 나를 위해 립스틱도 바르지 않던 수민이는 이미 없었다. 독자 여러분은 상상할 수 있는가? 애인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하는 화장이라는 게 어떤 건지?
수민이의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무슨 말을 듣게 될지 예감했다. 아니, 수민이가 잘 연락하지 않을 때 이미 짐작을 하고 있었다. 그 전에 전혀 몰랐다면 거짓말이었다. 내가 인정하지 못했을 뿐... 인정하기 싫었을 뿐...
갑자기 목에 걸린 체인이 무겁게 느껴졌다. 내 셔츠로 가려져 수민이에게는 보이지도 않는 목걸이가 신경쓰였고, 그 작은 펜던트의 무게에 목 밑 부분이 답답하기까지 했다.
- 주문하시겠어요?
- 오빠, 뭐 드실래요?
- 음... 나는...
- 주스 뭐 있어요?.
- 생과일 주스 있습니다. 바나나, 키위, 딸기 있는데, 뭘로 드릴까요?
- 딸기주스 주시구요, 전 아이스커피요.
수민이가 주스와 커피를 주문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수민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기도 커피 대신 주스나 차를 마시던 수민이였는데... 불안한 예감은 절망스런 확신으로 변했다. 힘이 쭈욱 빠지는 듯했지만 멍하지는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고, 내가 고개를 끄덕인다는 것에 내가 놀랐다.
음료를 주문하고, 얼마 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답답했다. 견디기 힘들어서 상투적인 말을 꺼냈다.
- 잘 지냈어? 진짜 오랜만이네... 그지?
- 네, 오빠는요?
- 나야 뭐... 화장이 달라졌네? 빤짝빤짝...
반짝이는 매니큐어를 칠한 수민이의 손을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수민이는 커피 컵을 들며 자연스럽게 내 손을 피했다. 수민이는 빨대로 커피를 마시며 손에 든 컵만 바라보았고, 내 눈과 마주치지 않았다. 나는 멍하게 입도 다물지 못하고 뭘 해야 할지 몰랐다. 내 손을 쳐내지 않고 그냥 피해 준 게 차라리 고맙게 여겨질 정도로 수민이는 무표정했다.
- 요즘도 술만 먹어요? 얼굴이 아직도 홀쭉해...
- 많이 안 먹어.
- .....
- 수민이는...
- 오빠.
수민이가 말을 끊었다.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알지도 못하면서 가슴에서 또 뭔가 떨어졌다. 쿵 소리가 커다랗게 머리까지 울렸다. 아니 무슨 얘기가 나올지 짐작했었다. 아니, 몰랐나? 알았던가? 몰랐던가? 그게 왜 중요하지? 내가 왜 그걸 생각하고 있지?....
수민이는 아이스커피를 한 모금 쭈욱 빨아먹고 컵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수민이는 나를 보지 않고 커피잔에 든 빨대를 빙빙 돌리며 그것만 바라보았다.
- 오빠, 우리...
- ......
- 잠시... 떨어져 있어요.
- ......
- 오빠랑 같이 있으면 좋고...
- ......
- 항상 같이... 있고 싶었어요.
- ......
- 근데 지금은...
- ......
-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 ......
- 전처럼... 좋기만 한 건 아니예요.
- ......
그거였나? 수민이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기도 전에 내 마음으로는, 가슴으로는 이미 느낌을 받았던 거였나... 나는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수민이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수민이에게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왜 안 좋으냐고 묻지 않았다. 누군가를 사랑하는데 이유가 있나...? 그냥 좋은 거지... 좋은데 이유가 없듯, 좋지 않은 것도 딱히 꼬집어 말할 이유는 없는 거였다. 나는 수민이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수민이가 만지작거리는 컵과 빨대만 보고 있었다.
그 한 달 동안 수민이와 했던 전화 통화가 생각났다. 틈만 나면 전화를 하고 문자메시지를 보내던 수민이였는데 그때는 항상 내가 먼저 전화를 걸어야 통화할 수 있었고 문자메시지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바쁘긴 했지만, 그렇게 안절부절 애태우면서도 수민이 마음이 변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었다.
다정한 속삭임도 없고, 보고 싶다는 상투적인 인사도 없고, 내가 말하면 간단히 대답할 뿐, 수민이가 뭔가를 먼저 얘기하는 경우가 드물었던 전화통화... 통화할 때는 몰랐었는데, 수민이의 일방적인 통보를 듣고 나서야 수민이가 왜 그랬었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은 했어도 수민이에게 아무 얘기도 못 하고 뭘 물어보지도 못했다.
告? 왜 내가 싫어진 걸까?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석 달 동안 수민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진짜 사랑이 식은 걸까, 아니면, 어머님의 반대에 지쳐 포기하는 걸까... 생각은 많았지만 수민이에게 물어볼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물어봐야 명확하게 대답을 들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렇게 서로 말없이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불편한 시간이 지루하게 흘렀다. 나는 소파에 묻히듯 멍하니 앉아 있었지만 수민이는 좀이 쑤시는 듯 자꾸 꼼지락거렸다. 수민이는 빨대를 쪽쪽거리며 아이스커피를 다 마셨다. 나는 주스에 입도 대지 않았다.
- 안 마셔요?
- 응? 응...
- 그럼... 이제 갈까요?
- ......
수민이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먼저 일어나 계산서를 집어들었다. 지폐에 동전까지 꺼내서 딱 맞게 지불한 후, 수민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휘적휘적 걸어나갔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수민이 뒤를 따랐다.
커피숍 앞에 잠시 섰던 수민이는 내가 나오자 빤히 쳐다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수민이 옆에 따라붙어 수민이의 손을 당겨 잡았다. 수민이는 손을 빼지는 않았지만 마주 잡아 오지 않았다. 그냥 나에게 손을 잡힌 채 걸었다. 손을 마주 잡아 주면 좋았을 텐데... 생각했지만 생각 뿐, 그냥 앞만 보고 걸었다. 수민이도 나도 말이 없었다. 수민이의 집까지 꽤 되는 거리였지만 나와 수민이는 아무 말 없이 그렇게 그냥 걸었다.
수민이네 집은 생각보다 가까웠다. 어느새 집 앞에 도착했고, 나는 수민이를 바래다 줄 때 늘상 그랬던 것처럼 무심코 수민이를 안았다. 아니, 안으려고 팔을 벌리고 다가섰지만 수민이가 몸을 피해 물러났다. 포옹을 거부하는데 예전처럼 작별 키스를 시도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오는 동안 내 손을 뿌리치지 않은 게 수민이의 마지막 배려였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 그럼, 조심해서...
- ......
수민이는 너무도 간단히 인사를 하고, 그것도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는 들어가 버렸다. 수민이 모습은 금새 계단 기둥 뒤로 사라졌다. 수민이는 한번도 뒤돌아보지 않았고, 나는 그런 수민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수민이가 올라가는 층마다 차례로 불이 켜지고, 4층 계단참에 불이 켜졌다가 꺼지고도 한참 후에야, 나는 비로소 힘없이 돌아섰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길을 잃었다. 거기가 어딘지도,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진짜 처음 와 보는 곳처럼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디로든 가야 한다는 생각에 무작정 앞으로 걸었고, 그렇게 무작정 걷다가 처음 나오는 좁은 골목으로 꺾어 들어갔다. 그리고,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말끔한 차림의 멀쩡한 남자가 골목에 주저앉아 있었다. 일어날 생각도, 일어날 힘도 없었다. 아무 생각도 없었다, 울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눈물은 자기 혼자 마구 흘렀다. 나는 진짜 울지 않았는데 눈물은 끝없이 솟았다. 가로등이 비추었고, 거리는 사물을 뚜렷이 분간할 만큼 밝았는데, 내 눈앞과 내 머릿속만 캄캄했다.
거기 얼마나 앉아 있었는지, 길을 어떻게 찾았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집에 어떻게 돌아왔는지, 언제 돌아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차를 타고 왔는지, 걸어왔는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술에 취하면 집에는 찾아오는데 기억을 못하는 것처럼,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다. 잠을 자기는 잤었던 모양이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술은 마시지 않은 게 확실했다.
사실은 수민이나 나나 이미 알고 있었다. 방학 전 몇 주 동안 우리는 즐겁다고 생각했지만 즐겁다고 우기는 거였고, 즐거워야만 한다는 생각에 부담스러웠다는 것을. 수민이의 수술 이후, 수민이의 어머님에게 차가운 말을 들은 이후부터였다. 주말에 데이트하면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다고 생각했지만 내 생각이었을 뿐, 시간을 과거로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우리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예상하고 있었으면서도 막상 그 상황이 오자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한 달... 5주쯤 되는 기간이었다. 만나지 못한 지 겨우 한 달. 여름방학을 포함해도 석 달. 그 석 달 동안 수민이가 변한 거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라면, 그게 사람의 감정이었다면, 그렇게 갑자기 변할 수는 없는 거였다. 감정과 상관 없이 사회적인 이유로 일부러 유지해야 하는 거래 관계라면 몰라도,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그렇게 뚝 자르듯 쉽게 식을 수 있다는 건 믿을 수 없었다.
잠시 떨어져 있는 시간을 갖자고 했던 수민이는 잠시라는 말로 나를 안심시키려 했었던 모양이다. 그 잠시가 영원이라는 것을, 다시는 가까워질 수 없는 떨어짐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수민이도 알고 하늘도 알고 땅도 알았다. 그러나 수민이는 잠시라고 했다. 어쩌면 내가 아파할까 봐 그런 건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전혀 내 아픔을 덜어주지 못했다.
18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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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gditiger, 태견, aprntm325, 머지롱, kofoo 님, 정우 위로하시는 거죠? ^^;
atlas 님 / 가미했다...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성적인 묘사는 사실, 소.라.넷.에 올리기 위해서 일부러 집어넣은 게 맞습니다. 근데, 표현하다 보니 흥분도 되고 재미도 있네요. ^^;
미래완료형 님 / 졸지에 형님 되셨네요? ㅋㅋ / 공감... 그게 제가 원하는 것이기도 하고, 독자분들도 원하시는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딥블루 님 / 글쎄요... 어머님 태도 때문인지 본인의 심경 변화인지는 수민이만 알겠지요. 결혼은 두 집안 사이의 문제 맞습니다. 가족들을 저버리지 않는 한, 단 둘만의 문제는 아니죠.
..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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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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