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1장. 느닷없는 위기
키즈카페에 온 지 30분쯤 지났을까? 입구에서 한 무리의 여자들과 아이들이 소란스럽게 들어왔다. 자연스레 시선을 옮기니 첫째 딸 수아의 베프인 지영이와 지영엄마 일행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수아 아버님!“
지영엄마는 날 보자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아마 또래의 학부모나 친구들과 같이 온 모양이었다. 지영엄마와는 수아와 지영이가 같은 어린이집을 다닐 때부터 줄곧 봐왔던 사이였다. 더구나 같은 학교, 같은 반이라 아이들끼리는 물론이고, 아내와도 아주 가깝게 지냈다. 그녀의 나이는 36살로 아내보다 4살 어리지만 친구가 별로 없는 아내에게는 동네에서 거의 유일한 절친이었다.
아내의 말로는 지영엄마가 중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엄마와 함께 미국에 있는 외할머니 댁에서 살았다고 한다. 외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건너와 미국의 IT업체에서 재무관리 팀장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내숭이 없고 활달하며 자신감 넘치는 성격이었다. 한편으로는 개방적인 사고방식이라서 두 식구가 함께 식사하거나 대화를 나눌 때 자연스럽게 음담패설을 늘어놓아 당황케하기도 했다.
의상도 대체로 화려하고 몸매가 드러나는 원피스나 헐렁한 니트를 좋아하는 듯 했다. 오늘도 살짝 타이트한 흰색 원피스에 프랑스 명품 패딩을 입었는데, 항상 느끼는 거지만 겉으로 보이는 털털함과는 달리,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기 때문에 자기관리에 철저하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제적인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었다.
조금 나쁘게 말하면 타인보다 자신이 우월하기에 용서하고 너그러울 수 있는 성격의 소유자이고, 좋게 표현하면 "노블리스 오블리제" 높은 사회적지위를 가진 자가 도덕적 의무를 다 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으니까... 어쨋든 이런 성격은 사실 여자로서는 나쁘지 않은 성격이라고 생각한다.
대체로 이러한 성격은 지능이 높고 탁월한 센스가 있으며 쇼맨쉽도 가지고 있어 리더쉽이 있다. 아마도 유복한 환경에서 큰 어려움이 없이 자랐을 확률이 높다. 다만 연애관계에 있어서는 자신이 선택한 남자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성향이 강하지만, 사랑을 확인하고 나면 꽤나 순수하게 맹목적인 여인으로 변한다.
즉, 결혼 상대자로서나 연인으로도 매력적인 대상일 것이다.
한편 남편은 아주 조용한 성격으로 수줍음이 많은 남자였다. 하지만 풍겨지는 외모는 전혀 반대인 경우로, 키가 크고 평균이상의 체형에 선 굵은 턱 위로 덥수룩한 턱수염이 자라는, 마초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상남자 스타일이었다. 직업 역시 대기업 계열 건설회사에서 공사관리 업무를 한다고 했으니 외모만 보면 잘 어울리는 직업이라 할 수 있겠다.
아마도 지영엄마의 선택에 의한 결혼이었겠지만 그 둘은 부부로써 잘 어울리는 한쌍임은 확실하다.
"네... 안녕하셨죠? 지영이는 더 예뻐졌네요!"
나는 수줍은 듯 목 뒤로 손을 얹으며 어정쩡하게 일어서서 고개를 숙였다.
"에이~ 뭘요. 수아 만큼은 아니죠. 미인으로 소문난 은서언니 딸인데 우리 딸이 상대가 되겠어요?"
"아휴~ 아니에요. 지영어머님도 엄청 미인이시죠. 나이도 아직 젊으시고... 아! 신랑 분은 잘 계시죠?"
"네... 요새 지방 현장으로 발령 나서 당분간은 자주 못 와요."
"아~. 그렇구나. 요새 주택건설이 많아서 엄청 바쁘실 거예요."
"그런가 봐요. 그나저나 일전에 스키장 초대해주셔서 너무 좋았어요. 지영이는 그 이후에도 또 가자고 졸라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내년에도 또 같이 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하하. 좋으셨다니 다행이네요. 다음에 또 기회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우리 식구도 지영이네 가족하고 같이 가니 다들 너무 좋아하던데요?"
"정말요? 빈 말 아니시죠? 녹음해 놔야 하나? 아! 맞다 그때 수아아버님 엄청 고생하셨죠? 아이들 스키 가르치랴 뒤치닥거리하랴. 덕분에 은서언니랑 저는 수아 아버님이 주신 쿠폰으로 스파에 마사지 잘 받고 편했지만, 한편 많이 죄송하더라구요. 언제 한 번 신세 갚아드려야 하는데..."
"사실 그거 그냥 내 돈 주고 끊어 온 거야. 그걸 샀다고 하면 마누라가 바가지 긁을 게 빤하니 거짓말 한 거지.‘
"하하. 뭘요~. 신세랄 것도 없습니다. 저도 후배한테 그냥 얻은 건데요. 잘 쉬셨다니 제가 감사하죠. 그리고 전 애들하고 노는 거 좋아하잖아요. 그나저나 제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는 거 아닌가요? 친구분들께서 기다리실 거 같은데..."
"아차! 그러네요.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뵈어요."
"네 어서 가세요."
난 일부러 앉은 상태에서 인사를 하고는 다시 아이패드로 눈을 돌렸다. 왠지 지영엄마와 같이 온 일행들이 이쪽을 쳐다보는 것만 같아서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한 30분 정도 흘렀을까? 이제야 슬슬 숙취가 내려가는지 담배도 땡기고 화장실도 가고 싶었다.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에 키즈카페 입구에서 아까 봤던 알바생과 눈이 마주쳤다. 난 당연히 미소를 살짝 머금고 눈인사를 하려 했는데,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수아 아버님... 저..."
"네? 무슨 일이죠?"
"잠시 저랑 얘기 좀...“
알바생은 주눅 든 표정으로 움츠러든 몸짓으로 날 살짝 잡아끌듯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상가 모퉁이에서 멈춰 말을 이었다.
"저기... 후~ 휴..."
그녀의 하얀 손끝이 옅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진정하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며 손등을 매만졌다.
"우리 아이가 뭐 잘못했나요? 괜찮으니 편히 말해 보세요."
난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낮은 톤으로 편안하고 느리게 말을 건넸다.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아까 오신 분들 때문인데요."
"아~ 지영 어머니 말씀이세요? 그 분들이 왜요?"
"그러니까... 이상한 얘기를 듣게 되어서요."
"뭔데요? 편히 얘기해도 되요. 얘기한다고 선생님께 문제 생기지 않을 거예요. 편히 말씀해 주세요."
"네... 실은 그 분들 얘기를 엿들으려는 건 아니었는데, 같이 오신 분 중에 아버님을 아는 분이 계신 것 같아요."
"네? 그래요? 저는 신경 써서 보지 않아 잘 모르겠던데..."
"그 분도 첨에는 어디서 봤는지 잘 기억을 못하다가, 예전에 사귀셨다고... 지영 어머니께서 수아 아버님에 대해 성격 좋은 분이고, 나이며, 직장이 어디고, 학교는 어디 나오고 그런 얘기를 하니까 그제야 기억이 났는지, 아! 맞다 하면서 옛날에 그분이 결혼하기 전에 만났던 남자가 수아 아버님이었대요."
난 그녀의 이야기에 잠시 스쳐지나갔지만 누굴 말하는 것인지, 전혀 떠오르는 얼굴이 없었다.
"아 그래요? 저는 자세히 보지 못해서 기억이 안 나는데 이따가 가서 한번 확인해 볼게요."
"아니... 아니요. 그런데 막 그 분께서 재미있으라고 한 얘기겠지만... 옛날에 사귈 때 어땠다는 둥 잠자는 얘기 같은 걸해서..."
"아~ 하하! 이것 참... 놀라셨겠네요. 하하. 아줌마들 흔히 그렇잖아요. 괜찮아요. 그런 건 그냥 모른 척 할게요. 선생님도 굳이 듣지 마세요. 하하..."
"아뇨!"
알바생은 자신은 심각하게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웃는 모습이 언짢았던지 미간을 찌푸리며 힘주어 말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분들이 수아 아버님께 협박해보자는 얘기까지 해서 제가 말씀드린 거에욧!"
"네? 협박이요?"
"네. 그분을 결혼 후에 만나셨다고 하던데요. 그 분은 전화번호까지 찾아보더니 아직도 연락처가 있다고 카톡을 보여주면서 이거 맞지? 하니까 지영어머니가 놀라면서 맞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모여계신 분들이 그럼 그걸 빌미로 데리고 놀아보자는 둥, 내가 먼저 해본다는 둥, 그런 식으로... 농담처럼 얘기한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구체적이라면..."
"직접 말씀드리기 껄끄러운 내용이라 자세히 말씀 못 드리는데, 아무래도 미리 아셔야 될 것 같아서요. 한 분은 아내분하고도 잘 아신다든데 괜히 가정에 문제 생기고 그럴까봐서요..."
이미 상기된 얼굴이 더 붉게 닳아 올랐고, 무의식적으로 팔과 다리를 꼬았다. 그녀가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그 여자들이 무슨 얘길 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날 노리개 삼아서 갖은 음담패설을 했겠지.’
그녀의 안절부절못하는 모습 때문인지, 그녀들의 수다를 상상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가라앉지 않은 숙취 때문인지... 아주 오랜만에 쿵쾅거리는 심장박동이 귓가를 때렸다.
‘내가 흥분을 하고 있는 건가?’
머리가 혼란스럽고 가슴이 답답했다. 한편으론 나와 사귀었다던 그 여자가 누구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왜 그녀들이 날 협박할 생각을 할까? 지영엄마는 어째서 동조하고 있었나? 수많은 물음들이 물거품처럼 떠올랐다. 그리고 짧은 순간 최악의 시나리오가 순식간에 그려졌다.
그녀들의 협박에 꼼짝 못하고 개처럼 끌려 다니다가, 지영엄마가 아내에게 얘기하고, 아내의 성격 상 분명 일을 크게 만들어서 양가 부모님 귀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사네 못 사네 집안 망신 다 시키다가 결국 수습이 안 되어 이혼하고 양육권도 뺏기고 매달 양육비에 폐인처럼 살다가 시골에 내려가서 은둔해서 사는...
그러다 일순간 정신이 번쩍 들면서, 일단 내 앞에 있는 알바생부터 진정시켰다.
"대충 무슨 얘기인지 알겠어요. 고마워요. 이런 얘기는 들어도 해주기 힘든 건데... 여기서 조금 진정 좀 하고 다시 씩씩하게 들어오셔서 아이들 좀 봐주세요. 제가 먼저 들어갈께요."
내가 돌아서서 방향을 바꾸자 그녀가 다시 말했다.
"저기... 혹시 그런 얘기 들었다고 그 분들께 말하실 건가요?"
난 고개를 돌려 희미하게 웃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저쪽에서 얘기할 때까지 잠자코 기다릴게요. 저쪽도 아이들이 옆에 있는데 지금 당장 제게 뭐라고 하겠어요? 걱정 마세요. 오히려 지금은 어린 선생님한테 부끄러운 꼴을 보인 게 더 창피하네요. 죄송합니다."
자리로 돌아오자 지영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난 생긋 웃으며 눈인사를 했고, 그 순간 일행 3명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보았지만 내가 아는 얼굴은 없었다.
다만, 지영엄마 옆에 앉은 여자가 눈에 들어오긴 했다. 테닝을 한 듯 건강한 갈색 피부에, 짙은 쌍꺼풀 수술을 한 여자였다. 그녀는 앞머리까지 포니테일 스타일로 질끈 묶어서인지 올라간 눈꼬리가 날카롭고 드세게 보였다. 갸름한 턱선에 작아 보이는 얼굴 때문에 어깨도 넓어 보이고 가슴도 큰 편이었다. 지영엄마의 사이즈가 대략 B컵 정도라면, 그녀는 C컵 정도 인 듯 했다. 척 봐도 어딘지 모르게 색기가 흐르는 여자였다. 직감적으로 그녀 일 거란 생각은 들었지만 여전히 떠오르는 얼굴은 아니었다.
나는 일단 카톡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수 천 명의 연락처를 꼼꼼히 살펴보다보니 숙취가 다시 올라오는 듯 어지러웠다.
그러다 번쩍! 한 여자의 이름이 떠올랐다.
키즈카페에 온 지 30분쯤 지났을까? 입구에서 한 무리의 여자들과 아이들이 소란스럽게 들어왔다. 자연스레 시선을 옮기니 첫째 딸 수아의 베프인 지영이와 지영엄마 일행이었다.
"아! 안녕하세요? 수아 아버님!“
지영엄마는 날 보자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아마 또래의 학부모나 친구들과 같이 온 모양이었다. 지영엄마와는 수아와 지영이가 같은 어린이집을 다닐 때부터 줄곧 봐왔던 사이였다. 더구나 같은 학교, 같은 반이라 아이들끼리는 물론이고, 아내와도 아주 가깝게 지냈다. 그녀의 나이는 36살로 아내보다 4살 어리지만 친구가 별로 없는 아내에게는 동네에서 거의 유일한 절친이었다.
아내의 말로는 지영엄마가 중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엄마와 함께 미국에 있는 외할머니 댁에서 살았다고 한다. 외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건너와 미국의 IT업체에서 재무관리 팀장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내숭이 없고 활달하며 자신감 넘치는 성격이었다. 한편으로는 개방적인 사고방식이라서 두 식구가 함께 식사하거나 대화를 나눌 때 자연스럽게 음담패설을 늘어놓아 당황케하기도 했다.
의상도 대체로 화려하고 몸매가 드러나는 원피스나 헐렁한 니트를 좋아하는 듯 했다. 오늘도 살짝 타이트한 흰색 원피스에 프랑스 명품 패딩을 입었는데, 항상 느끼는 거지만 겉으로 보이는 털털함과는 달리,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기 때문에 자기관리에 철저하고,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제적인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었다.
조금 나쁘게 말하면 타인보다 자신이 우월하기에 용서하고 너그러울 수 있는 성격의 소유자이고, 좋게 표현하면 "노블리스 오블리제" 높은 사회적지위를 가진 자가 도덕적 의무를 다 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으니까... 어쨋든 이런 성격은 사실 여자로서는 나쁘지 않은 성격이라고 생각한다.
대체로 이러한 성격은 지능이 높고 탁월한 센스가 있으며 쇼맨쉽도 가지고 있어 리더쉽이 있다. 아마도 유복한 환경에서 큰 어려움이 없이 자랐을 확률이 높다. 다만 연애관계에 있어서는 자신이 선택한 남자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성향이 강하지만, 사랑을 확인하고 나면 꽤나 순수하게 맹목적인 여인으로 변한다.
즉, 결혼 상대자로서나 연인으로도 매력적인 대상일 것이다.
한편 남편은 아주 조용한 성격으로 수줍음이 많은 남자였다. 하지만 풍겨지는 외모는 전혀 반대인 경우로, 키가 크고 평균이상의 체형에 선 굵은 턱 위로 덥수룩한 턱수염이 자라는, 마초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상남자 스타일이었다. 직업 역시 대기업 계열 건설회사에서 공사관리 업무를 한다고 했으니 외모만 보면 잘 어울리는 직업이라 할 수 있겠다.
아마도 지영엄마의 선택에 의한 결혼이었겠지만 그 둘은 부부로써 잘 어울리는 한쌍임은 확실하다.
"네... 안녕하셨죠? 지영이는 더 예뻐졌네요!"
나는 수줍은 듯 목 뒤로 손을 얹으며 어정쩡하게 일어서서 고개를 숙였다.
"에이~ 뭘요. 수아 만큼은 아니죠. 미인으로 소문난 은서언니 딸인데 우리 딸이 상대가 되겠어요?"
"아휴~ 아니에요. 지영어머님도 엄청 미인이시죠. 나이도 아직 젊으시고... 아! 신랑 분은 잘 계시죠?"
"네... 요새 지방 현장으로 발령 나서 당분간은 자주 못 와요."
"아~. 그렇구나. 요새 주택건설이 많아서 엄청 바쁘실 거예요."
"그런가 봐요. 그나저나 일전에 스키장 초대해주셔서 너무 좋았어요. 지영이는 그 이후에도 또 가자고 졸라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내년에도 또 같이 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하하. 좋으셨다니 다행이네요. 다음에 또 기회를 마련해 보겠습니다. 우리 식구도 지영이네 가족하고 같이 가니 다들 너무 좋아하던데요?"
"정말요? 빈 말 아니시죠? 녹음해 놔야 하나? 아! 맞다 그때 수아아버님 엄청 고생하셨죠? 아이들 스키 가르치랴 뒤치닥거리하랴. 덕분에 은서언니랑 저는 수아 아버님이 주신 쿠폰으로 스파에 마사지 잘 받고 편했지만, 한편 많이 죄송하더라구요. 언제 한 번 신세 갚아드려야 하는데..."
"사실 그거 그냥 내 돈 주고 끊어 온 거야. 그걸 샀다고 하면 마누라가 바가지 긁을 게 빤하니 거짓말 한 거지.‘
"하하. 뭘요~. 신세랄 것도 없습니다. 저도 후배한테 그냥 얻은 건데요. 잘 쉬셨다니 제가 감사하죠. 그리고 전 애들하고 노는 거 좋아하잖아요. 그나저나 제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는 거 아닌가요? 친구분들께서 기다리실 거 같은데..."
"아차! 그러네요.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뵈어요."
"네 어서 가세요."
난 일부러 앉은 상태에서 인사를 하고는 다시 아이패드로 눈을 돌렸다. 왠지 지영엄마와 같이 온 일행들이 이쪽을 쳐다보는 것만 같아서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한 30분 정도 흘렀을까? 이제야 슬슬 숙취가 내려가는지 담배도 땡기고 화장실도 가고 싶었다.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에 키즈카페 입구에서 아까 봤던 알바생과 눈이 마주쳤다. 난 당연히 미소를 살짝 머금고 눈인사를 하려 했는데, 그녀가 말을 걸어왔다.
"수아 아버님... 저..."
"네? 무슨 일이죠?"
"잠시 저랑 얘기 좀...“
알바생은 주눅 든 표정으로 움츠러든 몸짓으로 날 살짝 잡아끌듯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상가 모퉁이에서 멈춰 말을 이었다.
"저기... 후~ 휴..."
그녀의 하얀 손끝이 옅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스스로 진정하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며 손등을 매만졌다.
"우리 아이가 뭐 잘못했나요? 괜찮으니 편히 말해 보세요."
난 그녀를 진정시키기 위해 낮은 톤으로 편안하고 느리게 말을 건넸다.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아까 오신 분들 때문인데요."
"아~ 지영 어머니 말씀이세요? 그 분들이 왜요?"
"그러니까... 이상한 얘기를 듣게 되어서요."
"뭔데요? 편히 얘기해도 되요. 얘기한다고 선생님께 문제 생기지 않을 거예요. 편히 말씀해 주세요."
"네... 실은 그 분들 얘기를 엿들으려는 건 아니었는데, 같이 오신 분 중에 아버님을 아는 분이 계신 것 같아요."
"네? 그래요? 저는 신경 써서 보지 않아 잘 모르겠던데..."
"그 분도 첨에는 어디서 봤는지 잘 기억을 못하다가, 예전에 사귀셨다고... 지영 어머니께서 수아 아버님에 대해 성격 좋은 분이고, 나이며, 직장이 어디고, 학교는 어디 나오고 그런 얘기를 하니까 그제야 기억이 났는지, 아! 맞다 하면서 옛날에 그분이 결혼하기 전에 만났던 남자가 수아 아버님이었대요."
난 그녀의 이야기에 잠시 스쳐지나갔지만 누굴 말하는 것인지, 전혀 떠오르는 얼굴이 없었다.
"아 그래요? 저는 자세히 보지 못해서 기억이 안 나는데 이따가 가서 한번 확인해 볼게요."
"아니... 아니요. 그런데 막 그 분께서 재미있으라고 한 얘기겠지만... 옛날에 사귈 때 어땠다는 둥 잠자는 얘기 같은 걸해서..."
"아~ 하하! 이것 참... 놀라셨겠네요. 하하. 아줌마들 흔히 그렇잖아요. 괜찮아요. 그런 건 그냥 모른 척 할게요. 선생님도 굳이 듣지 마세요. 하하..."
"아뇨!"
알바생은 자신은 심각하게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웃는 모습이 언짢았던지 미간을 찌푸리며 힘주어 말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분들이 수아 아버님께 협박해보자는 얘기까지 해서 제가 말씀드린 거에욧!"
"네? 협박이요?"
"네. 그분을 결혼 후에 만나셨다고 하던데요. 그 분은 전화번호까지 찾아보더니 아직도 연락처가 있다고 카톡을 보여주면서 이거 맞지? 하니까 지영어머니가 놀라면서 맞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모여계신 분들이 그럼 그걸 빌미로 데리고 놀아보자는 둥, 내가 먼저 해본다는 둥, 그런 식으로... 농담처럼 얘기한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구체적이라면..."
"직접 말씀드리기 껄끄러운 내용이라 자세히 말씀 못 드리는데, 아무래도 미리 아셔야 될 것 같아서요. 한 분은 아내분하고도 잘 아신다든데 괜히 가정에 문제 생기고 그럴까봐서요..."
이미 상기된 얼굴이 더 붉게 닳아 올랐고, 무의식적으로 팔과 다리를 꼬았다. 그녀가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그 여자들이 무슨 얘길 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날 노리개 삼아서 갖은 음담패설을 했겠지.’
그녀의 안절부절못하는 모습 때문인지, 그녀들의 수다를 상상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가라앉지 않은 숙취 때문인지... 아주 오랜만에 쿵쾅거리는 심장박동이 귓가를 때렸다.
‘내가 흥분을 하고 있는 건가?’
머리가 혼란스럽고 가슴이 답답했다. 한편으론 나와 사귀었다던 그 여자가 누구인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왜 그녀들이 날 협박할 생각을 할까? 지영엄마는 어째서 동조하고 있었나? 수많은 물음들이 물거품처럼 떠올랐다. 그리고 짧은 순간 최악의 시나리오가 순식간에 그려졌다.
그녀들의 협박에 꼼짝 못하고 개처럼 끌려 다니다가, 지영엄마가 아내에게 얘기하고, 아내의 성격 상 분명 일을 크게 만들어서 양가 부모님 귀에 들어가게 될 것이고, 사네 못 사네 집안 망신 다 시키다가 결국 수습이 안 되어 이혼하고 양육권도 뺏기고 매달 양육비에 폐인처럼 살다가 시골에 내려가서 은둔해서 사는...
그러다 일순간 정신이 번쩍 들면서, 일단 내 앞에 있는 알바생부터 진정시켰다.
"대충 무슨 얘기인지 알겠어요. 고마워요. 이런 얘기는 들어도 해주기 힘든 건데... 여기서 조금 진정 좀 하고 다시 씩씩하게 들어오셔서 아이들 좀 봐주세요. 제가 먼저 들어갈께요."
내가 돌아서서 방향을 바꾸자 그녀가 다시 말했다.
"저기... 혹시 그런 얘기 들었다고 그 분들께 말하실 건가요?"
난 고개를 돌려 희미하게 웃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저쪽에서 얘기할 때까지 잠자코 기다릴게요. 저쪽도 아이들이 옆에 있는데 지금 당장 제게 뭐라고 하겠어요? 걱정 마세요. 오히려 지금은 어린 선생님한테 부끄러운 꼴을 보인 게 더 창피하네요. 죄송합니다."
자리로 돌아오자 지영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난 생긋 웃으며 눈인사를 했고, 그 순간 일행 3명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보았지만 내가 아는 얼굴은 없었다.
다만, 지영엄마 옆에 앉은 여자가 눈에 들어오긴 했다. 테닝을 한 듯 건강한 갈색 피부에, 짙은 쌍꺼풀 수술을 한 여자였다. 그녀는 앞머리까지 포니테일 스타일로 질끈 묶어서인지 올라간 눈꼬리가 날카롭고 드세게 보였다. 갸름한 턱선에 작아 보이는 얼굴 때문에 어깨도 넓어 보이고 가슴도 큰 편이었다. 지영엄마의 사이즈가 대략 B컵 정도라면, 그녀는 C컵 정도 인 듯 했다. 척 봐도 어딘지 모르게 색기가 흐르는 여자였다. 직감적으로 그녀 일 거란 생각은 들었지만 여전히 떠오르는 얼굴은 아니었다.
나는 일단 카톡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수 천 명의 연락처를 꼼꼼히 살펴보다보니 숙취가 다시 올라오는 듯 어지러웠다.
그러다 번쩍! 한 여자의 이름이 떠올랐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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