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
앤터키를 때리는 세희의 손이 상쾌했다.
‘이제 준비 끝.’
자리에서 일어난 세희의 얼굴은 기대감에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짧은 반바지 차림의 늘씬한 다리를 사뿐사뿐 움직여 창가로 간 세희는 손에 든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립클로즈 때문인지 빨갛게 번들거리는 앙증맞은 입술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검은 색 커피잔에 살짝 닿고 하얀 목선의 중간 부분의 보이지 않았던 목젖이 오르락 내리락을 두 번 했다.
‘이제 시작인건가? 휴...힘들었어.’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빼곡이 들어선 허름한 집들.
사람 둘이 마주치면 한 사람은 벽에 붙어서야 할 만큼 좁은 길을 굽이굽이 따라 올라가는 사람들.
지쳐보이고 피곤해 보이는 검게 탄 얼굴들이 지루할만큼 길다란 골목길을 올라서야만 갈수 있는 집들...
그중 특히나 허름 해보이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집 하나 앞에 선 한 사람의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해 있었다.
‘끼이이익...’
대문이랄 것도 없는 작은 판자때기를 밀치고 들어서니 어두컴컴해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언듯 비치는 솥뚜껑으로 보아 부엌이라 생각되는 곳에서 한 작은 계집아이가 나왔다.
“아직도냐?”
“네.”
계집아이의 말투는 상냥했다.
“씨발....하여튼 이새끼 잡히기만 해 봐라. 너도 조심해. 왔는데 거짓말이라도 치면 다 죽여버릴거다.”
“아니예요. 정말이예요.”
방금 고개 숙인채 지었던 독살스런 표정은 어디가고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보는 계집아이는 확실히 영악스러웠다.
하지만 미련스럽고 무식하게 생긴 남자는 자신의 협박에 질린 듯한 아이의 표정에 만족한 듯 웃음을 지으면서 발로 아까 밀치고 들어왔던 판자때기를 ‘뻥’ 차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잠시 남자의 등을 노려보던 아이는 천천히 아까 나왔던 어두운 곳으로 돌아갔다.
부엌으로 돌아온 세희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아무리 독한 세희라도 견디기 힘든 두려움과 치욕이었기 때문이었다.
‘기필코.....성공할거야.....꼭..’
열두살짜리 여자아이의 스스로에 대한 강한 다짐이었다.
‘따르르릉’
막 옷을 차려 입고 외출을 하려던 세희의 발걸음이 다시 전화기 쪽으로 돌려졌다.
“네.. 네... 알았어요. 밥 잘 챙겨 먹고요. 네..네...알았어요. 전화 끊어요.”
수화기를 끊은 세희는 다시 몸을 돌려 집을 나섰다.
미용실에 들러 머리를 만진 후 약속된 장소로 나갔다.
한강변에 지어진 삼층 건물의 주차장은 차로 꽉 메어져 있었으나 문을 열고 들어선 레스토랑은 규모가 커서인지 복잡해 보이지는 않았다.
세희는 웨이터의 안내를 받아 창가의 한 자리로 인도되었다.
“어머, 세희야 왔니? 이거 얼마만이니. 정말 반갑다.”
세희를 보고는 반색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경미는 고등학교 시절 친구였다.
한동안 연락을 하지 못했다가 인터넷의 한 사이트에 가입한 세희를 보고는 연락을 해 왔다.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세희가 힐끗 인사를 하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우리 남편이야.”
“아, 안녕하세요. 정세희라고 합니다.”
경수는 아침을 먹는 동안 내내 입을 쉬지 않는 마누라의 수다에 귀를 뜯어내고 싶었다.
명문대를 졸업한 덕에 부자집 딸을 마누라로 삼을 수 있었수 있었고 회사의 후계자 자리에 거론되기까지 하는 것은 좋았지만 이렇게 마누라와 함께 있을 때면 끝없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이따 그 동창을 보기로 했는데 같이 나가야 한다는 거지?”
한쪽 귀로 흘렸어도 워낙 명석한 머리탓에 말의 요지는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
객관적인 판단으로 경미의 말을 분석해 보면 경미가 고등학교 시절 쥐뿔도 없으면서 항상 일등을 놓치지 않았을 정도의 수재였었고 자신을 비롯한 집안이 빵빵한 애들한테도 전혀 기죽지 않고 자신의 일을 성실히 챙기는 멋진 여자가 있었는데 능력 부족으로 한번 이길 수 없었던 상대를 남편을 동원해서 기 한번 죽여보려고 자신과 함께 만나자는 이야기였다.
경수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찾다.
‘얼마나 못났으면....병신...’
물론 경미가 부족한것만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수려한 외모와 최고의 대학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괜찮은 대학을 나올 정도로 머리도 괜찮았다.
하나 단점이라면 쓸데없이 높은 자존심과 고집, 전형적인 부잣집 딸의 속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으로 데릴사위격으로 들어온 자신을 가끔씩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 것은 경수에겐 치명적이었다.
경미의 성화에 나오긴 했지만 누가 나올지에 대해 관심도 없었다.
다만 빨리 저녁을 먹고 집에 가서 쉬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것을 표현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경수는 경미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 받는 자상한 남편이었다.
옆에 앉아 있던 경미가 일어나자 경수도 지겨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경미가 인사를 하는 소위 친구를 보았다.
순간 경수는 자신도 모르게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숨이 막힐 정도의 아름다움, 그것도 똑소리가 떨어져 나올것 같은 지성미와 화려하지는 않지만 살짝 드러나는 몸매의 아름다운 선을 충분히 보여주는 섹시함까지 갖춘 마누라의 소위 그 친구라는 여자를 보고는 경수는 한순간에 혼이 빠지는 듯 했다.
간신히 어찌어찌 인사를 나누고난 후 경수는 한동안 말을 할 수 없었다.
경미와 세희라고 밝힌 그 여자가 하는 이야기를 옆에서 들으면서 한층 더 감탄을 하게 되는 경수였다.
결혼 후 집에서 쉬면서 이리저리 놀기만 했던 자신의 부인과는 달리 여러 가지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세희는 자신과 비교해도 그리 떨어지지 않는, 아니 오히려 자신보다도 더 해박한 경제지식마져 소유한 것 같았다.
이야기가 되지 않는 자신의 부인과의 대화에서 가끔씩 나오는 세희의 말로도 충분히 경수는 그 내용들을 세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가끔씩 무료한 자신을 바라보면서 미소 짓는 세희의 모습에 경수는 마음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아 참, 우리 남편이 지금 회사 기획실장을 맡고 있거든? 너 신랑은 뭐하는 사람이야?”
“응, 그냥 월급쟁이야. 평범한... 그나마 지금은 외국파견 근무 나가 있어.”
경미에 비해 비교될지도 모르는 자신의 생활을 아무 거리낌 없이 이야기 하는 세희는 순진해 보이기도 했다.
“그래? 좀 외롭겠다. 하긴 요즘 회사에 붙어있기도 힘들지...해외파견이면....밀려난거야?”
“여보!”
옆에서 보던 경수가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했다.
평소 하지 않던 행동이었지만 더 이상은 세희란 여인이 놀림받거나 하는 것을 참을수가 없는 경수였다.
의외의 행동에 잠깐 멈짓한 경미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오히려 경수 옆으로 다가가 팔짱을 끼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이는 능력을 인정받아서 좀 있으면 또 승진할 것 같아. 알지? 울아빠... 능력 없으면 자식도 버릴 사람이란거...”
그랬다. 사실 경미의 능력이란 것은 경수와 결혼한 것이 최대의 성과이었다.
사업에 있어서는 철저한 장인어른의 인정을 받고 있는 경수는 누구보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그래보여, 너 남편 너무나 능력 있어 보이네. 부러워.”
정말 부러운 표정으로 경수는 쳐다보는 세희의 표정은 경수의 마음을 한층 더 붕 뜨게 했다.
경수는 그런 세희의 표정과 말에 가슴이 당당하게 펴지는 것을 느꼈다.
왠지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그동안 경미의 치졸한 구박과 장인의 호통을 들으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 참 다행이고 스스로가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럽긴요. 세희씨 남편분도 분명 멋진 분일거라 생각합니다.”
“아니예요. 무슨...”
경미도 역시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의 남편을 칭찬함과 동시에 세희의 남편의 무능함이 비교되었다.
사실 처음에 세희를 보았을 때 고등학교때 느꼈던 그 기분이 다시끔 살아났다.
자신이 보기에도 아름다웠다. 그리고 세련되고 멋져 보였다.
이야기 중에서도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를 잠깐 꺼내다가 이해 못하는 자신을 배려 하는 듯이 살짝 다른 이야기로 바꾸는 말솜씨는 최고였다.
고등학교 때도 그랬다.
외모도 예뻤고 공부도 잘했다.
예의도 발라 모든 선생님의 아낌을 받았다.
그렇다고 교만하지도 않아 친구들을 챙겨야 할 땐 몸을 가리지 않고 나섰다.
비록 학교 생활이 끝나고 나면 어딘가 가야하는듯 잔뜩 얼굴이 굳어져 사라져 버리긴 했지만 경미가 기억하는 한 세희는 어디 흠 하나 잡을 수 없는 아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결혼....집안.....
이제야 그것들이 빛을 보는 느낌이었다.
초라해 보이는 세희의 모습에 승리자의 느낌이 가슴 가득했다.
집으로 돌아온 세희는 옷을 훌훌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아직 오월이라 찬물은 부담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찬물을 틀어 놓은채 온몸으로 물줄기를 맞았다.
세희의 한 손은 가슴에...그리고 한 손은 아래쪽 다리가 갈라지는 시작점의 무성한 수풀 속으로 숨겨져 있었다.
‘아..미치겠어........’
찬물로 샤워를 한 탓에 어느정도 열기를 식힌 세희는 방으로 와 컴퓨터의 전원을 넣었다.
그렇게 빛에 도망다니던 아버지는 세희가 중학교 이학년 올라가던 겨울에 동사한 채 발견되었다.
그 이후 세희는 소녀가장이 되었지만 다행히 혼자인지라 동사무소의 도움과 학교에서 연결해 준 한 복지가의 도움으로 인해 어렵지만 그럭저럭 생활은 가능하게 되었었다.
다른 학생들처럼 놀 시간도 여유도 없었기에 하루에 세시간이나 네시간정도 자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공부에 투자한 세희는 줄곳 학교에서 일등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던 세희에게는 공부만이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오직 한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었기에 어린 마음에도 사무치도록 싫었던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했었다.
그 결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세희는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이라는 한국대학교의 영문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간신히 입학금은 마련했지만 그 이후의 등록금과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생활비로 인해 세희는 학교를 육년만에야 졸업할 수 있었다.
앤터키를 때리는 세희의 손이 상쾌했다.
‘이제 준비 끝.’
자리에서 일어난 세희의 얼굴은 기대감에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짧은 반바지 차림의 늘씬한 다리를 사뿐사뿐 움직여 창가로 간 세희는 손에 든 커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립클로즈 때문인지 빨갛게 번들거리는 앙증맞은 입술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검은 색 커피잔에 살짝 닿고 하얀 목선의 중간 부분의 보이지 않았던 목젖이 오르락 내리락을 두 번 했다.
‘이제 시작인건가? 휴...힘들었어.’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 빼곡이 들어선 허름한 집들.
사람 둘이 마주치면 한 사람은 벽에 붙어서야 할 만큼 좁은 길을 굽이굽이 따라 올라가는 사람들.
지쳐보이고 피곤해 보이는 검게 탄 얼굴들이 지루할만큼 길다란 골목길을 올라서야만 갈수 있는 집들...
그중 특히나 허름 해보이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집 하나 앞에 선 한 사람의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해 있었다.
‘끼이이익...’
대문이랄 것도 없는 작은 판자때기를 밀치고 들어서니 어두컴컴해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언듯 비치는 솥뚜껑으로 보아 부엌이라 생각되는 곳에서 한 작은 계집아이가 나왔다.
“아직도냐?”
“네.”
계집아이의 말투는 상냥했다.
“씨발....하여튼 이새끼 잡히기만 해 봐라. 너도 조심해. 왔는데 거짓말이라도 치면 다 죽여버릴거다.”
“아니예요. 정말이예요.”
방금 고개 숙인채 지었던 독살스런 표정은 어디가고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보는 계집아이는 확실히 영악스러웠다.
하지만 미련스럽고 무식하게 생긴 남자는 자신의 협박에 질린 듯한 아이의 표정에 만족한 듯 웃음을 지으면서 발로 아까 밀치고 들어왔던 판자때기를 ‘뻥’ 차면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잠시 남자의 등을 노려보던 아이는 천천히 아까 나왔던 어두운 곳으로 돌아갔다.
부엌으로 돌아온 세희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아무리 독한 세희라도 견디기 힘든 두려움과 치욕이었기 때문이었다.
‘기필코.....성공할거야.....꼭..’
열두살짜리 여자아이의 스스로에 대한 강한 다짐이었다.
‘따르르릉’
막 옷을 차려 입고 외출을 하려던 세희의 발걸음이 다시 전화기 쪽으로 돌려졌다.
“네.. 네... 알았어요. 밥 잘 챙겨 먹고요. 네..네...알았어요. 전화 끊어요.”
수화기를 끊은 세희는 다시 몸을 돌려 집을 나섰다.
미용실에 들러 머리를 만진 후 약속된 장소로 나갔다.
한강변에 지어진 삼층 건물의 주차장은 차로 꽉 메어져 있었으나 문을 열고 들어선 레스토랑은 규모가 커서인지 복잡해 보이지는 않았다.
세희는 웨이터의 안내를 받아 창가의 한 자리로 인도되었다.
“어머, 세희야 왔니? 이거 얼마만이니. 정말 반갑다.”
세희를 보고는 반색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경미는 고등학교 시절 친구였다.
한동안 연락을 하지 못했다가 인터넷의 한 사이트에 가입한 세희를 보고는 연락을 해 왔다.
“안녕하세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세희가 힐끗 인사를 하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우리 남편이야.”
“아, 안녕하세요. 정세희라고 합니다.”
경수는 아침을 먹는 동안 내내 입을 쉬지 않는 마누라의 수다에 귀를 뜯어내고 싶었다.
명문대를 졸업한 덕에 부자집 딸을 마누라로 삼을 수 있었수 있었고 회사의 후계자 자리에 거론되기까지 하는 것은 좋았지만 이렇게 마누라와 함께 있을 때면 끝없는 인내심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이따 그 동창을 보기로 했는데 같이 나가야 한다는 거지?”
한쪽 귀로 흘렸어도 워낙 명석한 머리탓에 말의 요지는 어느정도 알고 있었다.
객관적인 판단으로 경미의 말을 분석해 보면 경미가 고등학교 시절 쥐뿔도 없으면서 항상 일등을 놓치지 않았을 정도의 수재였었고 자신을 비롯한 집안이 빵빵한 애들한테도 전혀 기죽지 않고 자신의 일을 성실히 챙기는 멋진 여자가 있었는데 능력 부족으로 한번 이길 수 없었던 상대를 남편을 동원해서 기 한번 죽여보려고 자신과 함께 만나자는 이야기였다.
경수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찾다.
‘얼마나 못났으면....병신...’
물론 경미가 부족한것만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수려한 외모와 최고의 대학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괜찮은 대학을 나올 정도로 머리도 괜찮았다.
하나 단점이라면 쓸데없이 높은 자존심과 고집, 전형적인 부잣집 딸의 속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으로 데릴사위격으로 들어온 자신을 가끔씩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하는 것은 경수에겐 치명적이었다.
경미의 성화에 나오긴 했지만 누가 나올지에 대해 관심도 없었다.
다만 빨리 저녁을 먹고 집에 가서 쉬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것을 표현할 수는 없었다. 적어도 경수는 경미에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 받는 자상한 남편이었다.
옆에 앉아 있던 경미가 일어나자 경수도 지겨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경미가 인사를 하는 소위 친구를 보았다.
순간 경수는 자신도 모르게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소리를 느낄 수 있었다.
숨이 막힐 정도의 아름다움, 그것도 똑소리가 떨어져 나올것 같은 지성미와 화려하지는 않지만 살짝 드러나는 몸매의 아름다운 선을 충분히 보여주는 섹시함까지 갖춘 마누라의 소위 그 친구라는 여자를 보고는 경수는 한순간에 혼이 빠지는 듯 했다.
간신히 어찌어찌 인사를 나누고난 후 경수는 한동안 말을 할 수 없었다.
경미와 세희라고 밝힌 그 여자가 하는 이야기를 옆에서 들으면서 한층 더 감탄을 하게 되는 경수였다.
결혼 후 집에서 쉬면서 이리저리 놀기만 했던 자신의 부인과는 달리 여러 가지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세희는 자신과 비교해도 그리 떨어지지 않는, 아니 오히려 자신보다도 더 해박한 경제지식마져 소유한 것 같았다.
이야기가 되지 않는 자신의 부인과의 대화에서 가끔씩 나오는 세희의 말로도 충분히 경수는 그 내용들을 세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가끔씩 무료한 자신을 바라보면서 미소 짓는 세희의 모습에 경수는 마음을 진정시켜야만 했다.
“아 참, 우리 남편이 지금 회사 기획실장을 맡고 있거든? 너 신랑은 뭐하는 사람이야?”
“응, 그냥 월급쟁이야. 평범한... 그나마 지금은 외국파견 근무 나가 있어.”
경미에 비해 비교될지도 모르는 자신의 생활을 아무 거리낌 없이 이야기 하는 세희는 순진해 보이기도 했다.
“그래? 좀 외롭겠다. 하긴 요즘 회사에 붙어있기도 힘들지...해외파견이면....밀려난거야?”
“여보!”
옆에서 보던 경수가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했다.
평소 하지 않던 행동이었지만 더 이상은 세희란 여인이 놀림받거나 하는 것을 참을수가 없는 경수였다.
의외의 행동에 잠깐 멈짓한 경미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오히려 경수 옆으로 다가가 팔짱을 끼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이는 능력을 인정받아서 좀 있으면 또 승진할 것 같아. 알지? 울아빠... 능력 없으면 자식도 버릴 사람이란거...”
그랬다. 사실 경미의 능력이란 것은 경수와 결혼한 것이 최대의 성과이었다.
사업에 있어서는 철저한 장인어른의 인정을 받고 있는 경수는 누구보다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그래보여, 너 남편 너무나 능력 있어 보이네. 부러워.”
정말 부러운 표정으로 경수는 쳐다보는 세희의 표정은 경수의 마음을 한층 더 붕 뜨게 했다.
경수는 그런 세희의 표정과 말에 가슴이 당당하게 펴지는 것을 느꼈다.
왠지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그동안 경미의 치졸한 구박과 장인의 호통을 들으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 참 다행이고 스스로가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럽긴요. 세희씨 남편분도 분명 멋진 분일거라 생각합니다.”
“아니예요. 무슨...”
경미도 역시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의 남편을 칭찬함과 동시에 세희의 남편의 무능함이 비교되었다.
사실 처음에 세희를 보았을 때 고등학교때 느꼈던 그 기분이 다시끔 살아났다.
자신이 보기에도 아름다웠다. 그리고 세련되고 멋져 보였다.
이야기 중에서도 자신이 모르는 이야기를 잠깐 꺼내다가 이해 못하는 자신을 배려 하는 듯이 살짝 다른 이야기로 바꾸는 말솜씨는 최고였다.
고등학교 때도 그랬다.
외모도 예뻤고 공부도 잘했다.
예의도 발라 모든 선생님의 아낌을 받았다.
그렇다고 교만하지도 않아 친구들을 챙겨야 할 땐 몸을 가리지 않고 나섰다.
비록 학교 생활이 끝나고 나면 어딘가 가야하는듯 잔뜩 얼굴이 굳어져 사라져 버리긴 했지만 경미가 기억하는 한 세희는 어디 흠 하나 잡을 수 없는 아이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결혼....집안.....
이제야 그것들이 빛을 보는 느낌이었다.
초라해 보이는 세희의 모습에 승리자의 느낌이 가슴 가득했다.
집으로 돌아온 세희는 옷을 훌훌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아직 오월이라 찬물은 부담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찬물을 틀어 놓은채 온몸으로 물줄기를 맞았다.
세희의 한 손은 가슴에...그리고 한 손은 아래쪽 다리가 갈라지는 시작점의 무성한 수풀 속으로 숨겨져 있었다.
‘아..미치겠어........’
찬물로 샤워를 한 탓에 어느정도 열기를 식힌 세희는 방으로 와 컴퓨터의 전원을 넣었다.
그렇게 빛에 도망다니던 아버지는 세희가 중학교 이학년 올라가던 겨울에 동사한 채 발견되었다.
그 이후 세희는 소녀가장이 되었지만 다행히 혼자인지라 동사무소의 도움과 학교에서 연결해 준 한 복지가의 도움으로 인해 어렵지만 그럭저럭 생활은 가능하게 되었었다.
다른 학생들처럼 놀 시간도 여유도 없었기에 하루에 세시간이나 네시간정도 자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공부에 투자한 세희는 줄곳 학교에서 일등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던 세희에게는 공부만이 자신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오직 한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었기에 어린 마음에도 사무치도록 싫었던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했었다.
그 결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세희는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이라는 한국대학교의 영문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간신히 입학금은 마련했지만 그 이후의 등록금과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생활비로 인해 세희는 학교를 육년만에야 졸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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