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식이 자취하는 집은 학교서 10분 거리에 있었다. 날씨도 조금은 쌀쌀해 지는 것 같고 분주하던 마지막 시험인 기말고사를 끝내고 여기저기 원서를 쓰고 기다리고 또 시험장으로 쫓아다니에 바빠 이젠 도서관에 틀어박혀 공부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인지 시간이 많아진 탓인지 계야와의 만남은 하루도 빠지는 날이 없었고, 그 만남은 자연히 자취방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계야도 마다하지 않았다.
언젠가 처음 태식을 따라 자취방에 왔을 때,
“반찬은 뭐 해 먹고 지내요?”
“반찬이랄 게 뭐 있나요? 그냥 미역국이든 된장국이든 아침에 만들어 놓으면 저녁까지 먹는 거죠.”
방이 일렬로 쭉 이어져 있고 방문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한 층의 턱이 있고 그리로 들어가면 방 하나에 뒤쪽 부엌 하나 있는 그런 구조였다. 계야가 부엌을 살펴보니 먹을 것이 없고 또 먹을 것을 만들 재료도 없다. 물론 냉장고도 없고 하니 확인한다 해 봐야 한 번 쭉 둘러보면 그만이었다.
“시장에 가요. 지금!”
평소 태식이 이것 저것 장보던 근처 시장으로 갔다. 계야는 멸치, 미역줄기, 콩, 연뿌리 등등 마른 반찬 만들 재료를 몇 가지를 사서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는 그것으로 반찬을 만들고 밥을 하여 저녁을 같이 먹었다. 태식은 항상 제 손으로 밥을 해 먹다가 여자가 해 주는 밥과 반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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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어먹고 또 옆에서 같이 먹어주니 태식은 꿈 속인 듯 착각에 빠지며 신혼살림의 맛을 보았다. 그 반찬 몇 가지 해주고 같이 조그만 밥상에 앉아 같이 먹는 밥은 이 세상 그 어느 산해진미와 견줄 바가 못 되었다. 태식은 그기에 빠져 계아를 좋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난 계야 씨와 둘이 이렇게 같이 있고 싶어요.”
“지금 이렇게 있잖아요?”
남자 혼자 자취하는 방에 따라와서 조금도 두려워함이 없이 그러나 헤프지 않게 정숙하게 보이는 계야의 행동거지와 사려깊은 말씨들이 태식의 마음 속에 잔잔한 풍파를 일으켰다.
태식은 그렇게 열심이던 4년간의 학교생활- 학교생활이란게 도서관에 처박혀 있는 것이 주로- 을 거의 접고 필요한 공부가 있으면 집에서 하고 또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야 할 시기는 이미 지났다. 계야도 기말 고사가 끝났고 학교 수업도 없었다. 그래도 매일 같이 학교에 나왔다. 학교 나와봐야 별로 갈 곳도 없어 태식을 만나 태식의 자취방으로 왔다. 거의 계야와 태식은 동거 하듯 같이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태식은 공부에 찌들려 변변하게 여자 한 번 사귀어 보지 못하다가 완전 계야에게 푹 빠져 버렸다. 태식 자신은 계야를 그렇게 자기 맘에 끌리도록 꼬셔내지 못했음에도 호박이 덩굴째 굴러온 기분이었다. 그런 생각 속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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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구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여자가 나에게 왜 이렇게 적극적인지?’
‘내가 돈 많은 집의 자식도 아님을 내 사는 꼬라지 보고는 알 것인데?’
‘내가 취직하면 직장이 생길 것이고 미리 결혼 상대로 잡아 놓으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냐. 취직하면 뭐 돈 방석에 앉냐?’
태식은 이런 저런 생각을 저울질을 해 보지만, 아무 것 하나 물어 볼 수 없었고 자신의 생각을 조금만 돌려 다시 생각해 보면 계야가 한 남자를 붙잡고 있는 이유로서 충분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또 얼마간의 날이 흐르면서 그들간에는 육체적 관계도 있었고 태식이 계야의 육체를 요구했을 때 심하게 거절하지도 않았고, 또 내 몸을 가졌으니 책임져라는 말도 없었다. 태식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계야의 맘 속으로 푹 빠져들어가 버렸다.
“계야 씨! 우리 결혼 합시다.”
태식은 이불을 덮어 쓰고 계야의 도톰한 젖 살을 만지며 안달난 듯 보챘지만 순순히 몸을 허락하면서도 태식의 결혼하자는 말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계야는 반듯하게 누워 있던 몸을 태식에게로 돌려 가슴으로 파고 들며
“결혼하자는 말은 하지 말아요. 난 지금 태식씨 품에 안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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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이 순간이 젤 행복하고 안전하니까요. 난 이것으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요.”
"안전?.. 안전이라니..."
태식은 계야의 "안전"이란 말이 이상했다. 한 남자가 단순히 한 여자와 쾌락을 위한 한갓 지나가는 섹스였다면 이 보다 부담 없는 여자가 어디 있겠으랴마는 태식이 맘을 뺏기고 나니 비록 나신의 한 여자를 안고 있어도 조금도 즐겁지 못했다. 서로가 섹스의 기교도 없이 즐기기 위한 전위행위도 없이 애들 호기심에 장난하듯 그런 볼품없는 섹스를 위해 둘은 몸이 엉켜 하나가 되었고 즐거운 나락으로 빠지는 환호의 신음도 서로가 없었다. 그런 건조한 행위가 있고 난 후에도 계야의 얼굴엔 한 가닥 우수에 젖는 듯 하다가는 이내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만면에 웃음을 보이며
“태식 씨! 좋았어요.”
태식은 계야의 몸을 취하고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어 계야의 마음을 잡지 못했다. 둘은 이불을 걷어내고 서로 벗어 놓은 옷들을 서로 제 손으로 자기 것을 입고, 계야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며
“태식 씨! 우리 밖으로 나가요.”
“그렇게 하죠.”
둘은 자취방을 나와 방문을 잠그고 서로 손을 잡고 거리를 나섰다. 늦가을이라 제법 바람이 차가웠다. 그 둘이 갈 곳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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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없었다. 학교로 향했다. 태식은 계야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계야의 강의실이 있는 근처 어느 곳으로 가 잠겨있지 않는 출입문을 열었다. 일렬로 길게 늘어서 있는 피아노실이었다. 방학이라 그런지 피아노실에 그 많은 피아노 앞에 연습중인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밖의 날씨는 좀 쌀쌀했지만 닫힌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실내는 따뜻했다. 한 피아노 앞에 긴 의자에 앉고 계야는 피아노 뚜껑을 들어 올리고 태식은 그 옆에 앉았다. 계야는 태식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차마 못하는 것 같았고 열 개의 손가락이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어떤 재즈곡을 치기 시작했고 태식은 말없이 듣고만 있다가 조용히 방해되지 않게 계야의 무릎에 머리를 올려 누웠다. 계야는 태식을 내려다 보며 한 번 미소 지어 보이고는 계속 피아노를 쳤다. 그 선율이 어딘지 모르게 좀 슬프게 들리는 것 같았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언제나 말이 없던 그 사람
사랑의 괴로움을 몰래 감추고
떠난 사람 못 잊어서 울던 그 사람
그 어느 날 차 안에서 내게 물었지
세상에서 제일 슬픈 게 뭐냐고
사랑 보다 더 슬픈 건 정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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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떨구던 그때 그 사람
외로운 병실에서 기타를 쳐주고
위로하며 다정했던 사랑한 사람
안녕이란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지금은 어디에서 행복할까
어쩌다 한번쯤은 생각해 줄까
지금도 보고 싶은 그때 그 사람
늘 듣던 심수봉의 노래 가사였지만 그 마디마디가 그 때는 왜 더 애절했었는지. 계야는 말 못할 사연을 가슴에 안고 어느샌가 좋아하게 된 태식과 이루어질 마지막 인연의 끈이 닿지 않았음을 알았던가?
“계야씨! 오늘 따라 이 노래가 왜 더 가사의 의미를 곱씹게 되는지요?”
“그러세요?”
계야의 두 손이 멈추자 피아노실엔 정적만이 흐르고 태식은 무릎에서 일어나 서로가 말없이 포옹하며 입술을 주고 받았다. 이미 밖은 어두워지고 둘은 태식의 자취방으로 돌아와 저녁을 해 먹고 이불을 펴 서로 나란히 앉아 무릎을 덮었다. 태식의 결혼하자는 말에 말 없이 웃음만 보내며 태식과 계야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너절히 벗어 놓은 옷들이 나뒹구는 옆에서 살결이 부딪히며 간간히 약한 신음만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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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아흐흑..."
“계야 씨! 사랑해! 헉! 헉!"
“태식 씨! 저도요. 아흥.... 사랑해!”
태식은 계야로 부터 모든 승낙을 받았어도 결혼하자는 말에 ‘예!’라는 단 한마디의 승낙은 받지 못한 채, 시간이 마지막 버스가 떨어질 즈음이 가까워 오면 버스 정류소까지 바래다 주곤 했다. 어떨 땐 아예 자고 아침 일찍 가기도 했다. 그렇게 애타는 시간이 또 흐르며 해를 넘기니 만난 지 세 달, 네 달이 지났다. 태식은 계야를 이대로 놔 두다간 내 사람으로 만들지 못하겠다 생각하고는 더욱 집요하게 결혼 약속을 받아내려 했다. 섹스를 수없이 해도 그 것이 내 여자로 묶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함을 알아채기 시작했다. 태식은 궁금한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몸을 주고도 결혼하자라고 요구하지도 않고 더구나 태식 자신이 결혼하자 요구해도 대꾸가 없는거나 섹스를 그렇게 했는데도 임신되지 않음도 이상했다. 인연이 되지 않으려니 공교롭게 그리 되었나 보았다.
하루는 태식의 성화에 도저히 이기지 못했는지 계야는 중대 결심을 하게 됐다. 결혼의 승낙 없이 더 버틸 수 없었고, 그리고 이젠 말해도 태식이 떨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아니면 아닌 인연이라고 생각했음에도 계속 태식을 만난다는 것이 죄가 되는지 그것이 죄라면 여기서 끝을 내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태식의 자취방에서 둘은 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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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게 지세우고 아침에 일어나 아침밥을 해 먹고는 계야는 보채는 태식의 두 손을 잡고 말없이 쳐다보더니
“태식 씨! 지금 우리 집에 가요.”
“집에는 왜요?”
“가 보면 알아요.”
태식은 이제야 승낙하기 위해 부모님께 인사시키려는 모양이구나 생각하며 신이나 따라 갔다. 시내버스를 타고 30~40분 정도 달리니 내리는 곳이 동촌 방촌동이었다. 태식은 오늘 계야의 집엔 첨 왔다. 태식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한 없이 고마운 계야의 뒤를 따라 대문으로 들어섰다. 주택 밀집 지역에 있는 그냥 평범한 한옥이었다. 이상하게도 거실로 들어서니 계실 줄 알았던 계야네 부모님은 보이지 않았고 빈집 같았다. 거실로 들어서니 작은방에서 훤칠한 키의 남자 아이 하나가 잠 자다 말고 인기척에 일어나,
“왔어?”
“응. 너 좀 나가!”
그 남자 아인 자다 말고 일어나 두 말 않고 계야가 나가라니 대충 옷을 주워 입고는 대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계야 씨! 누군데?”
“아~ 동생요. 야간에 방위 근무하고 낮엔 집에서 자요.”
“집엔 아무도 없는가 봐요.”
“예! 엄마 아버진 집안 친척네 집에 일이 있어 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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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고 오늘 늦게 들어 올 거에요.”
태식의 예상이 빗나갔다. 부모님께 소개시켜 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태식 씨! 좀 씻고요.”
하며 계야는 대충 겉옷을 벗고 속옷 바람으로 세면장으로 들어가려다 말고는 비치는 가슴을 한 손으로 가리고 다시 나오더니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앨범 하나를 가져오더니
“씻는 동안 심심할테니 내 앨범이어요. 보고 잠시만 기다려요.”
태식은 앨범을 받고 계야는 세면장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시원스럽게 들렸다. 태식은 거실 소파에 기대앉아 아무 생각없이 계야가 준 앨범 첫 장을 폈다. 태식의 눈을 일순 황소 눈 보다 더 커지며
“악! 이럴 수가?”
그기에 있는 한 장의 사진!
하얀 웨딩드레스에 면사포를 쓰고 신부 대기실에 앉아 있는 계야의 모습이 그기에 있었다. 태식은 순간 놀랐다. 자기가 그렇게 진실로 사랑했는지는 몰라도 진실로 청혼했던 여자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다니? 순간 가슴이 뛰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실망과 허탈과 배신감이 엄습해 왔다.
태식의 뒤죽박죽 되었을 감정을 담담히 상상하며 계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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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처음 태식을 따라 자취방에 왔을 때,
“반찬은 뭐 해 먹고 지내요?”
“반찬이랄 게 뭐 있나요? 그냥 미역국이든 된장국이든 아침에 만들어 놓으면 저녁까지 먹는 거죠.”
방이 일렬로 쭉 이어져 있고 방문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한 층의 턱이 있고 그리로 들어가면 방 하나에 뒤쪽 부엌 하나 있는 그런 구조였다. 계야가 부엌을 살펴보니 먹을 것이 없고 또 먹을 것을 만들 재료도 없다. 물론 냉장고도 없고 하니 확인한다 해 봐야 한 번 쭉 둘러보면 그만이었다.
“시장에 가요. 지금!”
평소 태식이 이것 저것 장보던 근처 시장으로 갔다. 계야는 멸치, 미역줄기, 콩, 연뿌리 등등 마른 반찬 만들 재료를 몇 가지를 사서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는 그것으로 반찬을 만들고 밥을 하여 저녁을 같이 먹었다. 태식은 항상 제 손으로 밥을 해 먹다가 여자가 해 주는 밥과 반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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얻어먹고 또 옆에서 같이 먹어주니 태식은 꿈 속인 듯 착각에 빠지며 신혼살림의 맛을 보았다. 그 반찬 몇 가지 해주고 같이 조그만 밥상에 앉아 같이 먹는 밥은 이 세상 그 어느 산해진미와 견줄 바가 못 되었다. 태식은 그기에 빠져 계아를 좋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난 계야 씨와 둘이 이렇게 같이 있고 싶어요.”
“지금 이렇게 있잖아요?”
남자 혼자 자취하는 방에 따라와서 조금도 두려워함이 없이 그러나 헤프지 않게 정숙하게 보이는 계야의 행동거지와 사려깊은 말씨들이 태식의 마음 속에 잔잔한 풍파를 일으켰다.
태식은 그렇게 열심이던 4년간의 학교생활- 학교생활이란게 도서관에 처박혀 있는 것이 주로- 을 거의 접고 필요한 공부가 있으면 집에서 하고 또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야 할 시기는 이미 지났다. 계야도 기말 고사가 끝났고 학교 수업도 없었다. 그래도 매일 같이 학교에 나왔다. 학교 나와봐야 별로 갈 곳도 없어 태식을 만나 태식의 자취방으로 왔다. 거의 계야와 태식은 동거 하듯 같이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태식은 공부에 찌들려 변변하게 여자 한 번 사귀어 보지 못하다가 완전 계야에게 푹 빠져 버렸다. 태식 자신은 계야를 그렇게 자기 맘에 끌리도록 꼬셔내지 못했음에도 호박이 덩굴째 굴러온 기분이었다. 그런 생각 속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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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구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여자가 나에게 왜 이렇게 적극적인지?’
‘내가 돈 많은 집의 자식도 아님을 내 사는 꼬라지 보고는 알 것인데?’
‘내가 취직하면 직장이 생길 것이고 미리 결혼 상대로 잡아 놓으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아냐. 취직하면 뭐 돈 방석에 앉냐?’
태식은 이런 저런 생각을 저울질을 해 보지만, 아무 것 하나 물어 볼 수 없었고 자신의 생각을 조금만 돌려 다시 생각해 보면 계야가 한 남자를 붙잡고 있는 이유로서 충분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또 얼마간의 날이 흐르면서 그들간에는 육체적 관계도 있었고 태식이 계야의 육체를 요구했을 때 심하게 거절하지도 않았고, 또 내 몸을 가졌으니 책임져라는 말도 없었다. 태식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계야의 맘 속으로 푹 빠져들어가 버렸다.
“계야 씨! 우리 결혼 합시다.”
태식은 이불을 덮어 쓰고 계야의 도톰한 젖 살을 만지며 안달난 듯 보챘지만 순순히 몸을 허락하면서도 태식의 결혼하자는 말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계야는 반듯하게 누워 있던 몸을 태식에게로 돌려 가슴으로 파고 들며
“결혼하자는 말은 하지 말아요. 난 지금 태식씨 품에 안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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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이 순간이 젤 행복하고 안전하니까요. 난 이것으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어요.”
"안전?.. 안전이라니..."
태식은 계야의 "안전"이란 말이 이상했다. 한 남자가 단순히 한 여자와 쾌락을 위한 한갓 지나가는 섹스였다면 이 보다 부담 없는 여자가 어디 있겠으랴마는 태식이 맘을 뺏기고 나니 비록 나신의 한 여자를 안고 있어도 조금도 즐겁지 못했다. 서로가 섹스의 기교도 없이 즐기기 위한 전위행위도 없이 애들 호기심에 장난하듯 그런 볼품없는 섹스를 위해 둘은 몸이 엉켜 하나가 되었고 즐거운 나락으로 빠지는 환호의 신음도 서로가 없었다. 그런 건조한 행위가 있고 난 후에도 계야의 얼굴엔 한 가닥 우수에 젖는 듯 하다가는 이내 표정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만면에 웃음을 보이며
“태식 씨! 좋았어요.”
태식은 계야의 몸을 취하고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어 계야의 마음을 잡지 못했다. 둘은 이불을 걷어내고 서로 벗어 놓은 옷들을 서로 제 손으로 자기 것을 입고, 계야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며
“태식 씨! 우리 밖으로 나가요.”
“그렇게 하죠.”
둘은 자취방을 나와 방문을 잠그고 서로 손을 잡고 거리를 나섰다. 늦가을이라 제법 바람이 차가웠다. 그 둘이 갈 곳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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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없었다. 학교로 향했다. 태식은 계야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계야의 강의실이 있는 근처 어느 곳으로 가 잠겨있지 않는 출입문을 열었다. 일렬로 길게 늘어서 있는 피아노실이었다. 방학이라 그런지 피아노실에 그 많은 피아노 앞에 연습중인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밖의 날씨는 좀 쌀쌀했지만 닫힌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실내는 따뜻했다. 한 피아노 앞에 긴 의자에 앉고 계야는 피아노 뚜껑을 들어 올리고 태식은 그 옆에 앉았다. 계야는 태식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차마 못하는 것 같았고 열 개의 손가락이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어떤 재즈곡을 치기 시작했고 태식은 말없이 듣고만 있다가 조용히 방해되지 않게 계야의 무릎에 머리를 올려 누웠다. 계야는 태식을 내려다 보며 한 번 미소 지어 보이고는 계속 피아노를 쳤다. 그 선율이 어딘지 모르게 좀 슬프게 들리는 것 같았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언제나 말이 없던 그 사람
사랑의 괴로움을 몰래 감추고
떠난 사람 못 잊어서 울던 그 사람
그 어느 날 차 안에서 내게 물었지
세상에서 제일 슬픈 게 뭐냐고
사랑 보다 더 슬픈 건 정이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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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떨구던 그때 그 사람
외로운 병실에서 기타를 쳐주고
위로하며 다정했던 사랑한 사람
안녕이란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지금은 어디에서 행복할까
어쩌다 한번쯤은 생각해 줄까
지금도 보고 싶은 그때 그 사람
늘 듣던 심수봉의 노래 가사였지만 그 마디마디가 그 때는 왜 더 애절했었는지. 계야는 말 못할 사연을 가슴에 안고 어느샌가 좋아하게 된 태식과 이루어질 마지막 인연의 끈이 닿지 않았음을 알았던가?
“계야씨! 오늘 따라 이 노래가 왜 더 가사의 의미를 곱씹게 되는지요?”
“그러세요?”
계야의 두 손이 멈추자 피아노실엔 정적만이 흐르고 태식은 무릎에서 일어나 서로가 말없이 포옹하며 입술을 주고 받았다. 이미 밖은 어두워지고 둘은 태식의 자취방으로 돌아와 저녁을 해 먹고 이불을 펴 서로 나란히 앉아 무릎을 덮었다. 태식의 결혼하자는 말에 말 없이 웃음만 보내며 태식과 계야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너절히 벗어 놓은 옷들이 나뒹구는 옆에서 살결이 부딪히며 간간히 약한 신음만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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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아흐흑..."
“계야 씨! 사랑해! 헉! 헉!"
“태식 씨! 저도요. 아흥.... 사랑해!”
태식은 계야로 부터 모든 승낙을 받았어도 결혼하자는 말에 ‘예!’라는 단 한마디의 승낙은 받지 못한 채, 시간이 마지막 버스가 떨어질 즈음이 가까워 오면 버스 정류소까지 바래다 주곤 했다. 어떨 땐 아예 자고 아침 일찍 가기도 했다. 그렇게 애타는 시간이 또 흐르며 해를 넘기니 만난 지 세 달, 네 달이 지났다. 태식은 계야를 이대로 놔 두다간 내 사람으로 만들지 못하겠다 생각하고는 더욱 집요하게 결혼 약속을 받아내려 했다. 섹스를 수없이 해도 그 것이 내 여자로 묶는데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함을 알아채기 시작했다. 태식은 궁금한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렇게 몸을 주고도 결혼하자라고 요구하지도 않고 더구나 태식 자신이 결혼하자 요구해도 대꾸가 없는거나 섹스를 그렇게 했는데도 임신되지 않음도 이상했다. 인연이 되지 않으려니 공교롭게 그리 되었나 보았다.
하루는 태식의 성화에 도저히 이기지 못했는지 계야는 중대 결심을 하게 됐다. 결혼의 승낙 없이 더 버틸 수 없었고, 그리고 이젠 말해도 태식이 떨어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지, 아니면 아닌 인연이라고 생각했음에도 계속 태식을 만난다는 것이 죄가 되는지 그것이 죄라면 여기서 끝을 내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태식의 자취방에서 둘은 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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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게 지세우고 아침에 일어나 아침밥을 해 먹고는 계야는 보채는 태식의 두 손을 잡고 말없이 쳐다보더니
“태식 씨! 지금 우리 집에 가요.”
“집에는 왜요?”
“가 보면 알아요.”
태식은 이제야 승낙하기 위해 부모님께 인사시키려는 모양이구나 생각하며 신이나 따라 갔다. 시내버스를 타고 30~40분 정도 달리니 내리는 곳이 동촌 방촌동이었다. 태식은 오늘 계야의 집엔 첨 왔다. 태식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한 없이 고마운 계야의 뒤를 따라 대문으로 들어섰다. 주택 밀집 지역에 있는 그냥 평범한 한옥이었다. 이상하게도 거실로 들어서니 계실 줄 알았던 계야네 부모님은 보이지 않았고 빈집 같았다. 거실로 들어서니 작은방에서 훤칠한 키의 남자 아이 하나가 잠 자다 말고 인기척에 일어나,
“왔어?”
“응. 너 좀 나가!”
그 남자 아인 자다 말고 일어나 두 말 않고 계야가 나가라니 대충 옷을 주워 입고는 대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계야 씨! 누군데?”
“아~ 동생요. 야간에 방위 근무하고 낮엔 집에서 자요.”
“집엔 아무도 없는가 봐요.”
“예! 엄마 아버진 집안 친척네 집에 일이 있어 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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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고 오늘 늦게 들어 올 거에요.”
태식의 예상이 빗나갔다. 부모님께 소개시켜 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태식 씨! 좀 씻고요.”
하며 계야는 대충 겉옷을 벗고 속옷 바람으로 세면장으로 들어가려다 말고는 비치는 가슴을 한 손으로 가리고 다시 나오더니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앨범 하나를 가져오더니
“씻는 동안 심심할테니 내 앨범이어요. 보고 잠시만 기다려요.”
태식은 앨범을 받고 계야는 세면장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물 떨어지는 소리가 시원스럽게 들렸다. 태식은 거실 소파에 기대앉아 아무 생각없이 계야가 준 앨범 첫 장을 폈다. 태식의 눈을 일순 황소 눈 보다 더 커지며
“악! 이럴 수가?”
그기에 있는 한 장의 사진!
하얀 웨딩드레스에 면사포를 쓰고 신부 대기실에 앉아 있는 계야의 모습이 그기에 있었다. 태식은 순간 놀랐다. 자기가 그렇게 진실로 사랑했는지는 몰라도 진실로 청혼했던 여자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다니? 순간 가슴이 뛰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실망과 허탈과 배신감이 엄습해 왔다.
태식의 뒤죽박죽 되었을 감정을 담담히 상상하며 계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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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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