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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23:29 535회 0건
[4부]

"야. 꼭 나가야 되냐?"
"크아악~! 이 개쉑아! 간신히 힘들게 겨우겨우 이런 자리를 마련해줬더니만 무슨 소리야?! 인간아. 상대는 예화고 프린세스란 말이다~. 응? 너도 사진 봐서 걔가 얼마나 이쁘게 생겼는지 봤을거 아냐?"
"그래도...거참. 난 이런덴 가기 싫은데..."

땡볕이 내려쬐는 오후. 다섯명의 고딩들이 정장을 쫙 빼입고 발맞추어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중에서도 지금 시끄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명이 가장 인물이 좋았는데, 그들은 다름아닌 윤지의 남자친구인 박영민과 남(南)고 짱인 서현우였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몇시간전에 했던 윤지의 말과는 달리 전혀 누군가가 다른 한명을 일방적으로 협박할만한 그런 관계같아 보이진 않았다. 오히려 두 사람 중에선 영민의 말빨이 더 세어보였다.
그리고 사실, 영민은 짱에게는 누구라도 한명쯤은 있는 그런 허물없는 친구였다. 허물이 너무 없어 누가 남고의 짱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로. 이쯤이면 눈치 챘겠지만 아까전의 윤지의 말은 한마디로 뻥이었다. 사실은 평소에 각자의 제일 친한 친구가 애인없이 홀로 쓸쓸히 살아가는데 연민을 느낀 영민과 윤지가 서로 짜고 현우와 유리를 맺어주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다른 세명의 남자애들은 그냥 얼굴 레벨만 대충 맞춘 들러리라 할 수 있었다.

"뭐야 이 자식아~! 형님이 모처럼 다리좀 놔줄려고 그러는데 진짜 계속 징징거릴래?"
"징징거리긴 누가 징징거려?"
"너 말고 누가 있냐?"
"휴우...내가 말을 말지.."

현우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라? 뭐야? 자리가 하나도 없네? 남자 애들은 아직도 안온거야? 으이구...정말..."
"어쩔 수 없지 뭐...딴데가 윤지야."

유리는 투덜거리는 윤지를 타이르며 같이온 애들과 함께 커피숍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이 시간에 자리가 하나도 없다는게 말이나 되니?"
"뭐, 우연히 다른 사람들이랑 시간이 겹친거겠지."
"그건 그렇고 남자애들 왜 이렇게 안오는거...? 어, 왔다!"





"헉! 쟤네들 벌써 와있잖아? 야! 뛰어!"
"바로 코 앞인데 뭘뛰어."
"그래도 이자식아! 이럴땐 예의상으로라도 뛰는거야!"

현우는 영민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뛰었다.

"야아~~. 미안 미안~. 우리가 늦었지?"
"그래-. 남자 애들이 매너없게."
"미안~~. 그대신 오늘 우리가 재미있게 해줄께~."

윤지는 영민의 말에 삐진 얼굴을 풀며 말했다.

"근데 우리들 다른곳으로 가야 될거 같애. 자리가 다찼네."
"뭐? 진짜? 크아~~. 시작부터 이런일이--. 어디로 가지?"

영민의 말에 윤지가 잠시 생각하더니 곧 손가락을 튕기며 유리에게 말했다.

"유리야~. 너희 레스토랑에 가면 안되? 네잎클로버는 커피숍도 겸해서 하잖아."
"응...? 우리 레스토랑...?"

윤지의 물음에 유리는 움찔 놀랐다. 아빠에겐 그냥 친구들이랑 만난다고 했기 때문에 이렇게 미팅을 하는 모습을 보이기가 미안했다. 마치 애인 몰래 미팅에 나온 기분이랄까. 하지만 유리는 한편으론 자신이 이렇게 미팅을 하는 모습을 보면 아빠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혹시라도 질투하진 않을까...?
유리의 입가에 살며시 미소가 어렸다. 갑자기 아빠가 질투하는 모습이 너무나 보고 싶어졌다. 자신이 다른 남자를 만나는걸 보며 아빠가 질투한다면 정말로 기분이 좋을것 같았다.

"응--. 좋아. 우리 레스토랑으로 가."
"유리야 땡큐~~. 자 자. 어서들 가자구~~."

윤지가 바람을 잡으며 애들을 모두 유리네 레스토랑으로 이끌기 시작했다.
한편, 현우는 상황이 돌아가는 소리가 하나도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첫눈에 반한다는게 이런 느낌일까...? 생전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두근거림이 귓가로 울려왔고, 눈동자에는 오직 그녀 한사람만이 들어왔다. 이름이 정유리...라고 했던가...?
오늘 아침에 벌써 그녀의 사진을 한번 봤고 속으로 정말 예쁘게 생겼다라곤 생각하긴 했지만 실물로 보니 정말 사진속으로 봤던 모습, 그 이상이었다.
현우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인간이 어떻게 저렇게 아름답게 생길 수 있는것일까...? 167cm정도 되어보이는 키에...찰랑거리는 긴 생머리. 그 아름다운 머릿결은 어깨를 내려덮어 등까지 흘러내려 있고 조그만 얼굴에 황금 비율을 이루고 있는 이마 밑으론 가늘고 짙은 눈썹이 시원하게 뻗어있다. 그리고 그 밑으론 커다랗고 그윽한 눈망울이 자리 잡고 있고... 오똑한 코와 붉은 입술은 마치 그림속에서나 보아왔던 미인도의 그것을 빼닮았다.

"야."

현우는 넋을 잃은채 유리의 모습을 훔쳐보고 있었다.

"야."

가슴이 미칠듯이 두근거린다.

"야. 서현우-! 이자식 이거 완전히 맛이 가버렸군. 야!"
"...으,응? 응? 왜?"
"뭘그리 멍하게 있냐? 정신차려 임마. 오늘 내가 다리 확실하게 놔줄테니까 정신 바짝 차리라고. 미인이 거저 날 잡수셔요~. 하고 오는줄 아냐?"

영민의 핀찬에 현우는 시익 웃음지었다.

"영민아."
"...?! 어, 이,이자식이 뭘 잘못먹었나? 갑자기 왜이래?"

현우는 천천히 다가가는 자신을 흠짓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영민을 힘껏 끌어안았다.

"고맙다! 고맙다 이자식아!"
"뭐...뭘? 그리고 좀 놔이거! 징그러워-!"

영민이는 현우를 떼어내며 말했고 현우는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다리 진짜 확실하게 놔 줄꺼지?"

현우의 말에 영민이는 피식 웃었다.

"실물을 보더니 이게 드디어 정신을 차렸군. 알았어 임마~. 넌 그냥 떠먹여주는거 잘 받아먹기나 해~~."
"오케바리~~."

현우와 영민은 주먹을 한번 살짝 부딪히곤 먼저 저만치 걸어가 있는 일행을 뒤쫓아갔다.





한가한 오후. 평소라면 그 평화로운 한때를 즐기며 담배라도 한개피 피워물고 있을 태현이었지만 오늘은 그의 얼굴에 그늘이 잔뜩져 있었다.

"그래서."
"...형필파 녀석들이 강북만으론 만족 못하겠는지...이젠 서서히 밑으로 내려 오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답니다. 길수나 우철이가 아직까진 잘 막고 있지만...점점 상황이 힘들어질것 같답니다."
"부산쪽 애들은...?"
"부산쪽 상황은 더 심각합니다. 형필파와 손잡은 대식파가 부산은 거의 완전히 잡았다고 합니다. 그나마 형님이 예전에 의형제를 맺으신 윤수 형님쪽만 겨우 겨우 해운대만 지키고 있다고 합니다."
"목포는."
"거긴...아직 상황을 잘 전해듣지 못했습니다..."

태현은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한개피 피워물었다.

"현석아."
"예. 형님."
"...솔직히 너 아직도 그쪽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지?"

태현의 물음에 현석이 빙긋이 웃음지으며 말했다.

"전 그냥 형님을 이렇게 가까이서 모시는것 만으로 만족합니다."

현석의 충심어린 말에 태현의 입가에 웃음이 살며시 번졌다.

"어차피...내가 있을때도 그 세계는 혼란스럽기 마찬가지였다. 자고 일어나면 누군가가 죽어있고...누군가가 어디를 차지했고. 애초부터 그 세계를 평정하겠다는 생각을 한것 자체가 무리였어..."
"......"

현석은 아무말없이 태현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 형필파 녀석들도 그걸 곧 깨닫겠지. 어차피..."

딸랑-. 딸랑-.

"...영원한 제국은 없으니까..."
"아빠~~!"

태현은 활짝 웃으며 달려오는 유리를 보며 급히 담배를 재털이에 비벼 끄고는 달려온 그녀를 끌어안아줬다.

"오늘 친구들이랑 논다고 좀 늦는다며~?"

태현이 예기치 못한 손님에게 환한 얼굴로 물었고 유리는 생글거리며 말했다.

"응~. 그냥 오늘 여기서 만나기로 했거든~. 여기라면 음료수 값은 아낄테니까~. 에헤헤~~."

태현은 환한 웃음을 지으며 귀엽게 웃는 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건 그렇고."
"응?"

태현은 갑자기 정색을 하는 유리를 보며 순간 뜨끔했다.

"또 담배폈어?"
"아...그...오늘 방금 딱 그거 하나만 폈어."

태현은 주춤거리며 유리의 질책에 대꾸했고 뒷편에서 현석이 빙긋 웃으며 한마디를 던지곤 주방으로 들어갔다.

"방금 그게 오늘 아침에 뜯은 담배 한갑에 마지막으로 들어있던 거란다~."

태현은 현석의 목소리에 흠짓 놀랐고.

"뭐어? 한갑-?!"

유리는 도끼눈을 하곤 태현을 노려봤다.

"아불싸. 이걸 어쩌나."

태현은 어찌할바를 모르며 유리의 눈빛을 피하기 바빳고, 그때. 다행히도 태현을 그 험악한 분위기에서 탈출 시켜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으,응~~. 윤지구나~. 어서오렴--."

태현은 재빨리 유리를 비켜세우며 윤지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와! 이분이 진짜 유리 아버님이야?"
"그럼~~. 멋지지? 나이도 이제 겨우 서른여덟이시래~~."
"이야...반가워요 유리 아버님~~. 전 윤지 남자친구 박. 영민입니다-."

태현은 씩씩하게 인사해오는 영민에게 악수를 해주곤 곧이어 한꺼번에 들려오는 다른애들의 인사를 웃음지으며 받아주었다.

"그런데...이렇게 다들 우리 레스토랑에 몰려와서 뭘 하려고?"
"헤헤~~. 오늘 우리들 여기서 미팅 할려구요~. 괜찮죠?"

태현의 물음에 윤지가 넉살좋게 대답했고 유리는 순간 태현의 얼굴 표정에 주목했다. 하지만 태현은 전혀 별다른 표정 변화없이 웃음짓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럼~. 괜찮고 말고. 재미있는 시간되렴-."
"예~~. 얘들아~~. 가자--."

윤지가 애들을 데리고 좋은 자리로 이끌고 갔고 태현은 유리의 엉덩이를 토닥여주며 말했다.

"유리야--. 이번 기회에 좋은 녀석으로 골라~~."
"으...응. 걱정마."

태현의 말에 유리가 왠지 어두워진 얼굴로 대답하곤 아이들을 뒤따라 갔다.

"뭐야. 전혀 기분 안나쁜거야?"

유리는 아빠가 미팅을 한다는 소리에 전혀 표정 변화가 없었다는것과 오히려 좋은 녀석으로 고르라는 말을 한것에 기분이 나빠졌다. 그리고 유리의 언짢은 기분은 미팅이 한창 무르익어 갈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아빠는 전혀 이쪽에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자신이 일부러 다른 남자애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해도 아빠의 얼굴엔 여유로운 웃음만이 띄워져 있을뿐이었다.
유리는 정말 자존심이 상했다. 자신은 아빠가 단지 다른 여자와 같이 있는것-그것이 점장과 손님의 대화중인 상황일지라도-만으로도 무척이나 기분이 나빠지는데 아빠는 전혀 그렇지 않은것 같았다.

"어. 콜라 다떨어졌다."

그때 윤지의 음성이 유리의 귓가에 들려왔고 유리는 재빨리 윤지에게 말했다.

"내가 가지고 올께."
"그래줄래~? 고마워~~. 그리구 유리씨 올때 내꺼 에스프레소 한잔 더~~."
"응--."

레스토랑에선 커피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가지 음료들도 팔고 있었다. 물론 이들에겐 공짜였지만. 유리는 커다란 콜라컵을 들곤 태현이 있는 바(bar)로 걸어갔다.

"미팅 재미있니?"

태현이 빙긋 웃으며 유리에게 물었고 유리는 일부러 환하게 웃음 지으며 대답했다.

"응~~. 무지 엄청 재미있어~~. 게임도 하구~~."
"하하. 봤어~~. 그런데 내가 보니까 윤지하고 영민인가...? 아무튼 윤지 남자친구가 너랑 저기 창가에 앉은 애랑 연결시켜 주려고 무진 애를 쓰던데~?"

태현의 말에 유리는 고개를 갸우뚱 했다. 하긴 오늘 나온것도 윤지 남자친구 영민이가 그 남고 짱에게 맞을지도 모른다고 해서 나온것이니. 하지만 유리는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윤지가 그렇게 말한것은 다 자신이 미팅에 나오게 하려는 그녀의 잔꾀라는것을. 남고 짱과 영민이의 관계를 봐도 그렇게 누가 누구를 일방적으로 때리고 그러는 관계가 아닌것 같았고. 아무튼 윤지와 영민이는 오늘 자신과 남고 짱을 연결시켜주려고 노력할것이지만 유리는 오늘 전혀 그런 느낌은 받질 못했다. 아마도 아빠쪽에 신경을 쓰다보니 그런것 같았다.
아무튼간에 그건 어찌됐든 상관없고. 유리는 음료수 리필장치에서 콜라를 받으며 아빠에게 넌지시 말했다.

"아빤 질투안나~? 딸이 다른 남자랑 그렇게 즐겁게 얘길 나누는데~~."
"하하~~."

유리을 말에 태현은 웃음을 터트렸다. 유리는 의아한 얼굴로 태현을 바라보았고 태현은 빙글거리며 말했다.

"내가 왜 질투를 해~~. 우리딸이 어쩌면 좀있다 멋진 남자하나 데려와서 사귀게 해달라고 말할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아빠도 마음 든든하고 얼마나 좋겠냐~?"

뚝-.

리필장치에서 흘러나오던 콜라 줄기가 갑자기 멈췄다. 하지만 아직 콜라컵엔 콜라가 채 반도 채워져있지 않았다.

"좋겠...다구...?"
"...응?"

태현은 갑자기 돌변한 유리의 얼굴 표정에 당황했고 유리는 그런 태현을 한번 노려봐주고는 아이들이 있는곳으로 가버렸다.

"내가 뭘 잘못말했나...?"

태현은 당황한 얼굴 그대로 자신이 뭘 잘못 말했는지 되새겨 보았다. 하지만 유리가 기분 나빠할만한 말은 분명히 하지 않은것 같았다.
한편, 유리의 얼굴엔 못마땅한 표정이 잔뜩 어려있었다.

"...좋겠다구? 내가 다른 남자 데려와 사귀게 해달라는데도 좋겠다구? 뭐야. 그딴말... 내가 다른 남자랑 사귀게 되어도 좋다는거야? 나는 아빠가 다른 여자랑 말 한마디만 나눠도 싫은데. 아빤 내가 다른 남자랑 사겨도 상관없다는거야?"

"유...리야?"

윤지가 다시 자리로 돌아온 유리를 보며 그녀의 바뀐 표정에 걱정어린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있는 유리에겐 윤지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난...상관없지 않단 말이야...아빠가 다른 여자랑 말하는거...다른 여자랑 웃는거...다른 여자랑 즐거워 하는거...상관없지 않단 말이야...상관없지 않단 말이야...!!"

유리는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기분나빴다.





그날 밤. 태현은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침대에 싸늘한 눈초리를 한채 앉아 있는 유리를 볼 수 있었다.

"노래방 간다더니. 재미있었어?"

태현은 옷을 갈아입으며 애써 웃는 얼굴로 유리에게 물었다. 하지만 유리는 아무런 대꾸없이 가만히 태현을 노려보고만 있었다. 태현은 유리 옆으로 다가가 그녀 옆에 앉으며 유리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유리야. 아빠가 뭐 잘못한거..."
"나 만지지마."

움찔.
태현은 처음들어보는 유리의 차가운 목소리에 흠짓 놀라며 그녀에게서 팔을 뗏다.

"유리야...?"

태현이 당혹스런 얼굴로 유리를 불렀고 유리는 아무런 대답없이 가만히 태현을 노려보기만 했다. 태현은 가슴이 답답했다. 유리가 왜이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이 딸에게 뭔가 잘못한건 아무것도 없었다.

"유리야. 아빠가 뭐 유리에게 잘못한거라도 있어? 아빤 정말 기억이 안나서그래.
뭔지 말해줄래? 아빠가 사과할께..."

태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며 천천히 유리의 꼭 모아쥔 두손을 감싸쥐었다.

"나 만지지 말랬지."

하지만 유리는 태현의 물음을 무시하며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
태현은 정말로 어찌해야할바를 몰랐다. 유리가 이런적은 처음이다. 이제껏 손찌검 한번 한적없이 곱게만 키워온 딸이라 이렇게 나오니 어떻게 해야할질 모르겠다. 태현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유리에게 조용히 타이르는 음성으로 말했다.

"유리야. 아빠가 뭘 잘못했는지 말해줘야 아빠가 사과를 하고, 또 그런것들을 고쳐나가지...아빠한테 말해줘. 아빠가 우리 유리한테 뭘 잘못했는지..."
"...정말 몰라?"

유리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태현은 이제서야 유리가 말문을 트는것에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정말 모르겠어..."

태현의 말에 유리는 가만히 태현을 노려보며 입술을 다시 열었다.

"아빤 오늘 나에게 있어서 가장, 그리고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되는 부분을 뭉개뜨렸어. 오늘처럼 내 자존심이 무시당하는건 처음이야."
"...뭐...? 저...정말? 하지만 유리야 난 정말 너한테 그런적은..."

유리의 말에 태현은 깜짝 놀라며 말했고 유리는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빤 모르겠지. 절대로 모를거야 내 이런 속마음을...내가 오늘 얼마나...비참했는지 알아...?"
"유...리야. 아빤...정말...모르겠어...미안해...고의가 아니었어..."
"뭐가 미안해...? 뭐가 고의가 아니었어...?"

고개를 수그리며 힘없이 말하는 태현의 목소리에 유리는 여전한 음성으로 물었고 태현은 천천히 유리의 손을 감싸쥐며 말했다.

"유리 자존심 상하게 한거..."
"자존심을 어떻게 상하게 했는데."
"...미안...모르겠어...하지만 유리야."

태현은 유리의 얼굴을 감싸 끌어안으며 말했다.

"유리가 말해주지 않으면 정말 아빤 모르겠어..."

"...아빤 날 여자로서 사랑하지 않아. 그게...아빠 잘못인거야...난 아빨 남자로서 사랑하는데...너무나 사랑하는데 아빠는 그렇지 않다는거...그게 아빠 잘못인거야..."

유리는 아무말없이 천천히 태현의 탄탄한 각진 근육질 등을 쓰다듬었다.

"...가지고 싶어."

따르릉--. 따르릉--.

그때 전화 벨소리가 울렸고 태현은 유리를 놓아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잠깐만--. 전화받고..."

태현은 거실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홀로 방안에 남겨진 유리는 천천히 방문으로 다가가 거실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 장모님 안녕하세요--."
"예~~. 하하.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예--. 유리도 잘 있구요. ...예. ...예? 하하. 장모님. 전..."
"하하. 괜찮아요~~. ...아뇨. 하하--. 괜찮습니다. 전."

"뭐가 괜찮단거지...?"

유리는 전화 내용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하하. 이 나이에 맞선이라뇨. ...장모님. 전...아니요...장모님. 전 재혼하지 않을겁니다. 앞으로도 그럴꺼구요. 저에겐 유리가 있잖습니까. ...예. 예. 하하. 전 유리 하나만 있으면 됩니다.
...예. 하하...예. 항상 신경써주시는데... 죄송합니다. ...예. 예. 그럼..."

찰칵.

수화기가 놓이는 소리가 들리고, 유리는 급히 침대로 돌아가 앉았다. 한편 그녀의 표정은 언제 어두웠냐는듯 밝아져있었다. 아빠의 재혼하지 않을거란말. 앞으로도 그럴꺼란 말. 그리고 유리만 있으면 된다는말이 계속해서 유리의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그때 천천히 문이 열리며 태현이 걸어들어왔다.

"아~~빠~~."
"...? 응...?"

태현은 갑자기 변해버린 유리의 얼굴 표정에 의아해하며 그녀를 바라봤고 유리는 그런 아빠의 표정에 개의치 않으며 자신의 옆을 톡톡 두드렸다.

"일루와~~."
"으...응."

태현은 주춤거리는 발걸음으로 다가와 유리 옆에 앉았고 유리는 태현을 꼬옥 끌어안았다.

"아빠~~."
"응...? 이제...화...풀렸니?"

태현의 약간 떨리는 목소리. 유리는 귀여운 표정으로 태현을 살며시 흘기며 말했다.

"아빤~~? 내가 언제 화냈다구 그래~~?"

유리는 그러며 천천히 태현을 눕혔고 태현은 갑자기 변해버린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며 일단 유리가 움직이는데로 누워주었다. 유리는 생글거리며 태현의 입술에 뽀뽀를 쪽. 하며 말했다.

"오늘 아빠랑 같이 자구싶어. 그래도 되지?"
"으...응. 그러렴."
"야호~~!"

태현은 얼떨결에 허락을 하고 말았고, 유리는 환호를 했다.
잠시후. 노란색 조명등이 힘겹게 방안의 어둠을 몰아내고 있는 안방의 침대위엔 두부녀가 한이불속에 나란히 누워있었다.

"아빠."
"응?"
"행복해."
"하하...새삼스럽게 뭐가...?"

태현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에 유리가 고개를 들어 태현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빠랑 이렇게 같이 한침대에서 잘 수 있단거..."
"하하. 하지만 오늘만이다~?"

태현의 말에 유리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오늘만...오늘만...!"
"......?!"

태현은 유리가 다시 화를 내는가 싶어 흠짓 놀랐지만 유리는 다시 금세 부드러운 표정으로 돌아갔다. 태현은 유리의 방금전 음성에서 그녀가 화가 났다고 느꼇지만 다시 돌아온 유리의 표정에선 그녀가 화가 났다는걸 전혀 읽을 수 없었다. 태현은 속으로 한숨지었다. 가끔 이럴때가 있었다. 유리의 속마음을 전혀 읽을 수없을때가. 불같이 화를 내다가도 어느새 더할수없이 천사같은 미소로 웃음짓는가하면 금방이라도 울듯한 표정이다가도 언제그랬냐는듯 원래의 활기찬 모습으로 돌아가 있는다. 아무리 자신의 딸이지만...태현은 가끔 유리의 진짜 본모습이 어떤것일까 혼란스러웠다. 마치 자신은 가면으로 감춰진 유리의 모습을 보고 있는건 아닐까...

"아빠--."
"...응?"
"아빠랑 키스 하고싶어."
"...하하. 키스라면 매일 몇번씩 하잖아~~. 아침에 일어날때도~. 학교 갈때도~."
"그건 뽀뽀구. 키스말야. 키스--. 남자랑 여자가 하는거."

유리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 뒤에 숨겨진 진지함을 읽은것일까. 태현은 부드럽게 타이르는 음성으로 유리에게 말했다.

"유리야. 아빠랑은 키스하는거 아냐--. 키스는 나중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사람이랑 해~. 알겠지? 키스는 아무하고나 하는거 아냐."
"난 아빨 제일 사랑하는데."

유리의 달콤한 목소리에 태현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나도 우리 유리를 제일 사랑해~. 하지만 아빠 말은..."
"네네~~."

풀썩.
유리는 태현의 말을 끊으며 침대위로 쓰러지며 옆으로 돌아누웠다. 이러면 자신의 지금 얼굴 표정을 아빠가 보지 못하겠지.

"아빠 잘자."
"...응. 유리도 잘자--."

유리는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방금전 조금만 더 아빠를 바라보고 있었다면 못참을뻔했다. 그렇게나 아빠의 숨결이 가까이 느껴지는 느낌이란...

"난 아마 제정신이 아니거나 정신이 제대로 박혀있질 않은걸거야."

유리는 속으로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거나 정신이 제대로 박혀있지 않거나(같은말이지만). 자신이 아빠를 사랑하는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이미 그 마음을 돌이키기엔 너무나 늦어버렸다는 사실.

"어쩔 수 없어. 정말 어쩔 수 없어. 아빤...내 남자가 되어야해. 안그러면...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유리의 눈동자는 아빠를 향한 갈망으로 짙게 물들어있었다.

"...천천히...천천히...시간이 얼마가 걸리더라도 좋아...기필코..."

유리는 자신에게 팔베개를 해주고 있는 아빠의 팔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내걸로 만들고 말겠어."

"아빠..."
"...응?"
"...사랑해."

아빠는 아마도 지금 빙긋 웃었을것이다.

"나두 우리 유리 사랑해--."

유리의 눈망울에 눈물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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