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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23:29 636회 0건
[15부]


어두운 지하실. 그곳은 마치 지하 벙커라도 되는마냥 길목 중간 중간이 철문으로 막혀 있었고, 그 문을 보초들이 교대로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철통같이 지켜지는 지하실의 가장 핵심부에는 지금 열대여섯명의 사나이가 원탁에 둘러 앉은채 착찹한 얼굴로 뭔가를 의논하고 있었다.

[흐음...역시 협상으로는 해결못하는 것인가...?]
[당연하잖소. 삼합회 녀석들이랑 야쿠자 쪽바리놈들이 작당을 하고 덤벼드는건데 그놈들이 어찌 협상을 받아들이겠소?]

날카로운 인상의 30대 남자의 말에 마치 반발이라도 하듯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말했다. 그러자 그 옆에있던 작은 체구의 날렵한 인상의 사내가 덩치의 말에 동조했다.

[니기미. 그러니깐 형필이 너 이새끼 니가 태현 형님이 정해주신 네놈 구역에 짱박혀 있지않고 다른 놈들 구역을 존나게 쳐삼키니깐 지금 우리가 이렇게 좆도 못쓰는거 아냐?]
[어허. 길수 자네 왜이러나. 오늘 우리가 모인건 서로 싸움을 하려는게 아니라, 모두 함께 힘을 합쳐 삼합회와 야쿠자를 막아보자는 취지에서가 아닌가.]

길수라 불린 날렵한 인상의 사내의 성난 음성에 그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너그러운 인상의 중년인이 조용히 그를 타일렀다. 그러자 길수가 언짢은 표정으로 그 중년인에게 말했다.

[윤수 형님은 화도 안 나쇼? 그래도 형님은 명색이 우리 형님의 의형 아니요?]

길수의 말에 윤수 형님이라 불리운 중년인은 헛기침을 험험 하며 길수를 외면했고 길수는 그런 중년인을 인상을 쓰며 바라보다가 곧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빨리 어서들 의견 좀 내보쇼. 언제까지 이렇게 시간만 죽이고 있을거요?]

하지만 길수의 말에도 사람들은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이 무거운 침묵을 깨며 중년인 옆에 앉아있던 20대 중반정도의 매우 젊어보이는 사내가 입을 열었다.

[저어...괜찮으시다면 제가 한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넌 누구야? 신분부터 밝혀.]

길수의 말에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좌중에 꾸벅 꾸벅 허리를 굽히며 인사하더니 당당한 어조로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서울 라이더 연합 Driver"s High의 장을 맡고있는 윤진태라고 합니다.]
[뭐? 라이더? 그럼 폭주족이란 말 아냐? 아니, 너같은 폭주족 새끼가 여긴 어떻게 들어왔어?]

길수는 기가 차다는 음성으로 말했고, 모여있던 다른 사람들도 역시 술렁거리며 윤진태라 자기소개를 한 사내를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때, 방금전 길수와 신경전을 벌이던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말했다.

[내가 부른겁니다.]

그의 말에 일순간 좌중이 조용해 졌다. 역시 현재 전국 최고의 세력을 자랑하는 조직의 두목답게 그의 말에는 엄청난 힘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길수는 이런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어투로 그에게 말했다.

[왜 폭주족 같은걸 이런데 부르고 지랄이야?]
[그가 참석할 자격이 없다면 너도 이자리에 있지 못할것인데.]
[뭐야 이새끼야?!]

길수가 벌떡 일어나며 성난 표정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길수의 옆에 앉아있던 덩치가 그를 잡아서 도로 앉히며 말했다.

[길수야. 일단 저녀석이 하는 말부터 들어보자.]
[쳇...]

친구의 조용한 타이름 때문일까 아니면 불편한 표정의 다른 사람들 때문일까. 아무튼 길수는 분을 삭히며 시선을 진태에게로 돌렸다. 진태는 좌중이 다시 조용해지며 자신을 바라보자 좀 부담이 되는지 헛기침을 몇번하고는 입을 열었다.

[에..제가 한가지 말씀드리고자 하는건 다름이 아니라. 은퇴하신 정태현 형님께 도움을 청하면 어떻는가 하는것입니다. 듣기로는 태현 형님께서 은퇴하신 후에 그분께 충성을 바치던 거물급 주먹들 태반이 이 세계에서 손을 씻었다고 들었거든요. 만약 태현 형님이 발벗고 나서 주신다면 그때 떠나갔던 사람들의 도움까지 이끌어 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진태의 말에 일순간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길수와 그의 친구 덩치, 우철도 상당히 놀란 얼굴로 진태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것은 진태를 여기로 불러온 형필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누군가가 말도 안된다는듯한 어조로 말했다.

[정태현은 이미 40을 바라보고 있을 나인데, 그럼 한창때 실력도 이미 다 사라져버렸을것 아닌가? 그런 사람을 데려와서 n에 쓰려구? 그런자가 돌아온다고 해봐야 예전같은 충성을 이끌어 낼 수 있을것 같은가?]
[하하. 아닙니다.]

진태는 자신에게 말한 남자를 빙긋 웃는 얼굴로 바라보며 대꾸했다.

[얼마전에 우리 애들이 잘못을 해서 태현 형님께 꾸짖음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그때 서른 한명이 태현 형님 한분을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허허. 말을 해도 좀 신빙성 있게 말을 해야지. 사람 하나가 어찌 서른 한명을 당해낸단 말인가?]

진태의 말에 먼저 말을 꺼냈던 남자는 어이없다는듯이 대꾸했고, 몇몇 사람이 그에 맞장구치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런자들은 거의 모두가 지방에서 올라온 건달들 뿐이었다.

[아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야.]

그런데 그때 이런 그들의 웃음을 끊으며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그는 웃고있던 자들의 얼굴을 돌아보며 계속 말했다.

[자네들은 지방에서 올라와서 모를지도 모르겠지만. 정태현 그자는 단신으로 흑살파를 몰살시킨 사람이야.]
[뭐라구? 정태현이 군림하던 시절에도 유일하게 그의 세력에 맞섰던 흑살파인데. 그걸 그 혼자서 박살냈단 말이야? 허허. 자네는 저 젊은 친구보다 뻥이 더 심하군.]

쾅-!

그때, 갑자기 우철이 원탁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벌떡 일어났다. 모두는 그가 내려친 자리의 나무에 금이 쩍 가있는것을 보며 놀란 눈으로 우철을 바라보았고, 우철은 방금전에 어이없다는듯이 말한 남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더이상 우리 형님을 깍아내리는 말을 하지마라. 내 인내심에도 한계라는 것이 있다.]

살기가 묻어있는 우철의 말에 남자는 헛기침을 하며 눈을 내려깔았다.

[흐,흠. 미..미안허네.]

남자의 사과에 우철은 다시 의자에 앉았고, 길수가 그런 우철에게 잘했다는듯이 그의 목을 잡고 몇번 주물러 주었다. 아무튼 그들이 그러는동안, 소외된채로 뻘쭘하게 서있던 진태가 좌중이 조용해지자 다시 입을 열었다.

[에...그러니까. 흠. 흠. 아무튼 제말은 그런겁니다. 태현 형님께 도움을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진태는 다시 자리에 앉았고 주위가 다시 조용해지자 형필이 입을 열었다.

[전국에서 올라오신 건달 여러분. 일단 새로운 의견이 하나 나왔습니다. 제 생각에도 태현 형님이 도와주신다면, 단지 태현 형님의 이름 석자만 듣고도 전국의 유명 싸움꾼부터 새파란 양아치들까지 발벗고 나서서 조국을 지키는데 힘을 보탤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난 찬성이요.]
[나도 찬성이요.]
[우리 광주도 찬성인지라.]
[태현 형님만 나서 준다면 우리 목포야 당연하고롬 찬성이고 말고야.]

형필의 말에 금세 원탁에 둘러앉은 모든이가 찬성이라고 맞장구 쳤고, 형필은 만족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우철과 길수를 돌아보았다.

[모두가 찬성해주어서 다행이군. 어떤가. 내생각엔 자네들이 태현 형님께 도움을 요청하러 가는것이 제일 좋을듯 한데.]
[...난 반대요.]

형필의 얼굴이 굳어졌다. 우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형필에게 말했다.

[형님은 이쪽 세상과 연을 끊으신지 벌써 8년이 다되어 가오. 듣기로는 현재 굉장히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사시고 계신다고 했소. 그런 형님인데 동생된 내가 어찌 그분을 이런 피비린내 나는 곳으로 다시 끌어들일 수 있겠소?]

우철의 말에 형필은 시선을 돌려 길수에게 너는 어떻냐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고 길수는 바닥에 침을 탁 뱉으며 말했다.

[제엔장. 따지고 보면 형필이 니놈 새끼가 다 자초한일 아냐? 태현 형님이 정해준 구역에서 먹고 살다가 유사시에는 형님 말씀대로 구역 단위별로 연합해서 대비하면 되는건데 니놈 새끼가 여기 저기를 마구 쳐먹어 데니까 세력 균형도 안 맞아지고 빨리 빨리 대처도 못하게 되니까 이 지경이 된거잖아. 그런데. 니놈 새끼가 이 지경을 만들어 놓고는 이제와서 형님에게 도움을 청하자고? 제기랄 놈의 새끼. 염치가 있어라 새끼야.]

길수는 금방이라도 싸울 태세로 눈에서 살기를 뿜어내며 형필을 노려보았고, 우철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이들은 이들의 갈등에 눈치를 보며 숨죽이고 있었다. 그때, 차분한 눈빛으로 길수의 살기어린 눈을 마주보고 있던 형필이 천천히 일어나더니 좌중을 둘러보며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강남 연합의 유길수 말에 동감하며, 제 책임을 통감합니다. 이 모든 일이 제 책임이라는걸 인정하겠습니다.]

형필은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말했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전국 최대 조직의 보스인 형필의 사과에 모두는 불편한 얼굴로 서로의 눈치를 보며 어찌할 바를 몰라했고, 형필의 허리가 펴지지 않는만큼 모두의 불편한 얼굴은 더욱더 무거워졌다. 그때 윤수가 입을 열었다.

[흐흠. 흠. 허허헛. 이보게 형필 아우님. 그것이 어찌 다 자네 탓이라 하겠는가. 여기에 모인 모두의 탓이지. 허허헛. 그러니 그렇게 있지말고 어서 자리에 앉게.]

윤수의 말에 다른 이들은 기다렸다는듯이 윤수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형필은 그제서야 허리를 펴며 자리에 앉았고, 그는 길수를 보며 말했다.

[이럴때 일수록 서로 싸우기 보다는 힘을 합쳐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자네도 더이상 노여워 하지 말게.]

길수는 설마 그 콧대높던 형필이 허리를 숙일줄은 몰랐기에 어쩔 수 없이 다만 언짢은 표정으로 담배를 피워 물고는 형필을 외면해버렸다.

[그리고 우철이. 형님을 존경하는 자네의 마음은 내 잘 알지만. 그래도 시국이 시국 아닌가. 그러니 자네가 힘좀 써주게.]

형필은 곱게 타이르는 어조로 우철에게 말했고 우철은 난감한 얼굴이 되어 담배를 두개나 입에 피워 물었다. 형필은 우철이 담배를 뻑뻑 피워대는 모습을 참을성 있게 지켜보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꽁초가 되어버린 담배를 재털이에 구겨 넣은 우철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말했다.

[어쩔 수 없군.]

우철의 말에 모두는 마치 벌써 모든게 해결된마냥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아직 당사자는 이 사실을 알고 있지도 않는데 말이다.




유리는 기지개를 쭈욱 펴며 상쾌한 토요일 아침을 맞이했다.

[하우...웅~~. 하아~.]

개운하게 기지개를 펴고난 유리의 입가엔 행복한 미소가 가득 어려있었다. 오늘이 그녀의 생일이어서 그런걸까. 하지만 그녀가 이렇게 행복해 하는건 비단 오늘이 그녀의 생일이어서 인것만은 아니었다. 유리는 아빠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아빠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곤히 잠들어 있는 아빠는 자신이 키스를 하는것도 모른채 숨을 색색 내쉬고 있었고 그것은 유리에게는 참을 수 없을정도로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녀는 천천히 아빠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며 애정이 담뿍 담긴 눈길로 아빠를 하염없이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빠는...단지 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유리의 조용한 음성이 울렸다. 하지만 곤히 잠들어 있는 태현이 유리의 물음에 대답을 할리가 없다. 유리의 말이 이어졌다.

[...난 아빠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

유리는 다시 아무말 없이 아빠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참 이상했다. 아빠와 처음으로 프렌치 키스를 하고난 다음날부터 아빠의 자신에 대한 태도가 너무나 달라졌기 때문이다. 보통때라면 절대로 키스도 먼저 해주지 않고 자신에 대한 제일 진한 애정 표현이라고 해봐야 겨우 안아주는 것뿐이었는데, 그날 이후로는 하루에 한두번 정도는 아빠가 먼저 키스해주기도 하고 또 어떨때는 아빠가 스스로 자신의 입안으로 혀를 밀어오기도 했던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다 자신이 아빠와의 키스에 빠져서 간절한 눈빛으로 아빠를 바라보면 어떨땐 가슴까지 만져주기도 했다. 이렇게 유리는 갑자기 아빠의 태도가 적극적으로 변한것에 처음엔 무슨일인가 싶어 의아했지만, 그녀는 금세 그 궁금증을 접어버리며 아빠가 자신을 여자로서 대해주는걸 행복해 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간에 행복하면 그만이니까.

[으음...]

그때 태현이 천천히 눈을 떴다. 유리는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아빠에게 인사했다.

[아빠~~. 잘잤어?]
[응...유리도 잘잤니~?]

태현은 아직 잠에서 덜깬듯이 초점흐린 눈으로 유리를 바라보며 빙긋 웃음지었다. 그러자 유리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이불을 확 젓히며 아빠의 몸에 올라타서는 아빠를 마구 흔들었다.

[에이~. 아직 잠 덜깬거야~~? 얼른 일어나아~~.]
[하하. 하하하~. 알았어~~. 아빠 일어날께~. 잠 다깼어~.]

태현은 유리의 장난에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고 유리는 그제야 아빠를 흔들던걸 멈추곤 생글거리며 아빠를 바라봤다. 한편 태현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이렇게 유리의 예쁜 미소를 볼 수 있어 너무 즐거웠다. 짧은 트레이닝 복 반바지에 헐렁한 낫시티 차림. 창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유리의 뽀얀 우윳빛 살결이 빛나고, 그 햇살 때문에 유리의 솜털마저도 남김없이 보인다. 태현은 왠지 보드라울것 같은 그 솜털을 손으로 느껴보고 싶어서 유리의 팔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하지만 손에서는 보드라운 감촉이 아니라 부드럽고 매끈한 감촉만 전해져 왔다. 왠지 안타까운 느낌이 든 태현은 다리는 어떨까 싶어 유리의 늘씬한 다리를 쓸어보았다. 그러나 역시 그녀의 매끈한 다리는 태현이 원하는 그런 감촉을 전해주진 않았다.

[아빠 왜에~?]
[응?]
[왜 아무말도 없이 그러고만 있어?]

태현은 유리의 물음에 싱긋 웃으며 말했다.

[왜--. 아빠가 만지니까 싫어?]
[응? 아,아냐~. 싫긴...]

유리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고 태현은 그런 유리가 너무 사랑스러워 그녀를 끌어당겨 키스를 해주었다. 아빠의 입술을 느끼자 유리는 금세 그 달콤함에 빠져들었고, 태현은 유리에게 잠시동안 그렇게 모닝 키스를 해주었다.




[뭐? 나도?]
[응~. 괜찮지?]
[괘,괜찮을리가 없잖아. 내가 어떻게 네 친구들도 모이는 그런 자리에 가?]
[에이~. 뭐 어때~. 아빠는 내 애인이잖아.]

유리의 말에 태현은 기가 막혔지만 곧바로 정색을 하며 말했다.

[유리야. 너랑 나랑 그런사이가 되기로 하긴했지만, 그 이전에 나는 네 아빠야. 그런데 어떻게 너희들 노는곳에 내가 갈 수 있겠어? 친구들도 아빠가 가면 불편해 할꺼야.]
[뭐...? 그런사이?]
[으,응? 그..그러니까. 연인. 연인사이.]

눈꼬리를 살며시 올리며 노려보는 유리의 말에 태현은 급히 자신의 말을 정정했고, 유리는 그런 아빠를 잠시동안 노려보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아빠 맘대로 해.]

유리는 그러곤 침대에서 내려가 방을 나가버렸다. 그녀는 자신이 화났다는걸 보여주기라도 하듯 문을 쾅 닫고 나갔고, 태현은 애꿎은 꼴이 되어버린 자신의 신세에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아니. 도대체가 친구들이랑 같이 노는 생일 파티에 아빠보고 같이 가자니 그런 억지가 어디 있는가? 거기다가 레스토랑 일은 어쩌구? 태현은 그대로 털썩 드러누워 한숨만 푹푹 내쉬다가 담배생각이 나서 침대밑에 숨겨놓았던 담배갑을 꺼내었다.

[라이터는 또 어디간거야? 에고.. 되는 일이 없네.]

태현은 담배갑 위에 올려놓았던 라이터가 없자 푸념을 늘어놓으며 책상 서랍을 뒤져 라이터를 찾아 가지고 왔다. 유리도 화나서 나갔기에 다시 들어올 일은 없고, 태현은 느긋한 마음으로 창문을 열어놓곤 담배 한개피를 꺼내었다. 아니, 꺼내려 했다. 그런데 담배갑 안에는 담배는 하나도 없고 종이 쪽지 하나만 덩그러니 넣어져 있는게 아닌가. 태현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그 종이 쪽지를 펴들었다.

<이런데 숨겨 놓으면 내가 모를줄 알고? 담배랑 라이터는 압수야. 메롱~♡>

태현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유리가 써놓은 글 밑에 뭔가를 더 적어놓곤 쪽지가 접혀있던데로 다시 똑바로 접어선 담배갑에 넣어서 있던자리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나서 방을 나서는 태현의 얼굴에는 왠지모를 웃음기가 어려있었다.

태현이 대충 얼굴과 머리만 씻고 나오자 부엌에서 통통거리는 칼소리가 들려왔다. 태현이 부엌으로 가보니 거기엔 유리가 도마에 뭔가를 썰고 있었고 부엌엔 온통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로 가득했다. 태현은 언제 샤워를 했는지 물기에 젖은 머리를 하고있는 유리에게 다가가 그녀를 뒤에서 꼬옥 끌어안았다.

[유리야~. 삐졌어?]
[......]

하지만 유리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하던일만 계속하고 있었고, 태현은 빙그레 웃으며 유리의 날씬한 배를 어루만졌다. 그러자 유리가 아빠의 손을 탁 치며 풀더니 썰어놓았던 감자를 된장찌개에 넣었다. 머쓱해진 태현은 멀뚱히 서서 유리가 이제 두부를 써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제밤에 자신이 카레를 만들어 준다고 설치다가 버려버렸기 때문에 유리는 에이프런도 없이 요리를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그 모습은 또 그 모습대로 너무나 어여쁜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남자라면 누구나 뒤로 다가가서 확 끌어안아버리지 않고는 못참을 정도로...
태현도 역시 남자였기에 그런 충동을 이기지 못했고, 그는 천천히 다가가 유리를 다시 뒤에서 끌어안았다. 유리는 역시 삐졌는지 이번에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으며 자신을 무시했고, 태현은 그녀의 이런 모습조차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유리를 꼬옥 끌어안으며 그녀의 어깨에 입을 맞춰주었다.

통..통..통....통.......통...........통.......................

서서히 칼소리가 멈춘다. 태현은 빙그레 웃으며 유리의 목에 입을 맞추며 그녀의 몸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자 그대로 가만히 서있던 유리가 잠시동안 아빠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더니, 곧 입을 열었다.

[비겁한짓 하지마.]
[...응? 비겁한..짓이라니?]

유리의 말에 태현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고 유리는 몸을 홱돌려 아빠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가 우습게 보여?]
[응? 그..그게 무슨 소리야...?]

놀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빠에게 유리는 보골보골 끓고 있는 된장찌개의 불을 끄고는 화난 음색이 다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가 나 만져주면. 내가 금방 헤헤거리면서 화풀줄 알았어?]
[유,유리야. 무슨 말이야. 아빤 그저...]
[맞잖아 내말. 평소에도 아빠가 나 만져주면 난 금세 정신을 못차리고 황홀경에 빠져버리니까. 아빤 방금 그거 이용해서 내 화를 풀려고 한거잖아.]

전혀 뜻밖의 유리의 말에 태현은 적잖이 당황했다. 자신은 전혀 그런 생각이 아니었다. 단지 자신은 요리를 하고있는 유리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랬던것 뿐인데... 태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사실을 말해주려 유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유리야. 사실 아빠는...]
[나한테 손대지마!]

유리는 앙칼지게 소리치며 자신을 감싸 안아오는 아빠를 뿌리치려했다. 그런데 그때 유리의 손길이 너무 거셋던 탓일까. 아빠를 밀치려던 손이 그만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져 있던 된장찌개 냄비를 쳐버리고 말았다.

[꺄악!]

뜨거운 국물이 담겨있던 냄비는 가스레인지에서 떨어져 버렸고, 방금전까지 끓고 있던 뜨거운 국물이 유리의 살갗에 닿을려는 찰나. 태현이 급히 유리를 감싸안으며 몸을 날렸다.

탱~!

부엌 가득히 냄비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아빠에게 감싸여 바닥에 쓰러진 유리는 너무나 놀라서 급히 몸을 일으키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괜찮아?!]

다행히도 냄비가 저쪽 방향을 향해 떨어졌기에 뜨거운 국물이 태현에게로는 몇방울 튀지 않았다. 태현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유리에게 말했다.

[유리야. 괜찮아? 다친데 없어?]
[나야 어찌되든 무슨 상관이야! 아빤 괜찮아? 안 데였어? 나 때문에..어떻해..]

유리는 금세라도 울듯한 표정으로 아빠가 화상을 안 입었나 살펴보았고 태현은 그런 유리의 머리를 콩 쥐어 박으며 말했다.

[이 녀석아. 아빠 앞에서 나야 어찌되든 무슨 상관이야라니.]
[미안...근데 아빤 정말 괜찮아?]

태현은 바닥에 쏟아진채 김을 피워올리고 있는 된장찌개를 힐끗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다행히 아빠쪽으론 안 튀었어. 유리도 괜찮지?]

태현의 물음에 유리는 울먹 울먹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야..아빠가..훌쩍...지켜줬..으니까...끅..흐윽...아빠..미안해...훌쩍..]
[아니야. 미안해 할필요 없어..그래도 네가 괜찮다니까 정말 다행이다..]

태현은 유리를 가슴에 끌어안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아빠의 목소리에 유리는 아빠를 와락 끌어안으며 울음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흑..나 걱정돼서..죽는줄 알았어..흐윽...]

태현은 빙긋 웃으며 그런 유리를 달래주었고, 자신의 등을 어루만져주며 달래주는 아빠 덕분에 유리는 곧 진정을 할 수 있었다. 아빠품에 안겨있던 유리는 고개를 들어 아직도 여전히 눈물이 고여있는 눈으로 아빠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빠 미안해..나 때문에...]
[너 때문이 아니야. 유리 네가 일부러 그런것도 아니고..]

태현은 유리의 얼굴에서 눈물자욱을 지워주며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 얼른 바닥 치우자. 얼룩 묻겠다. 알았지?]
[응...]

유리는 고개를 주억였고, 태현은 유리와 함께 바닥에 쏟아진 된장찌개를 닦아내었다.

[에고...우리딸이 끓인거. 먹어보지도 못하고...아까워서 어쩌나-.]

태현의 푸념에 행주를 씻고있던 유리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에이~. 내가 또 끓여주면 되잖아~.]
[정말이지~? 오늘 끓였던 거랑 똑같은거?]

태현은 바닥을 마저 다 닦고는 닦는데 쓴 행주를 싱크대 안에 던져 놓으며 말했다. 유리는 손을 씻고는 생글거리며 아빠의 목을 끌어안았다.

[응. 똑~같은거.]

유리는 그러며 아빠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유..읍..리야. 아빠 아직 손도...읍.. 안 씻었는데..]
[치이. 그럼 빨리 씻어.]

유리는 입을 삐죽거리며 아빠를 놓아주었고 태현은 빙긋 웃으며 손을 씻기 시작했다.

[아빠..]
[응?]

유리가 태현을 뒤에서 살며시 끌어안는다.

[아까 나 만지지 말라고 한거..미안해.]
[하하. 그게 뭐 미안할 일이야.]
[아니야. 정말. 정말루 미안해. 난 아빠껀데...]

태현은 옆에 놓여있던 수건으로 손을 훔치며 뒤돌아섰다. 유리는 아빠가 뒤돌아 서자 어쩔 수 없이 포옹을 풀었고, 태현은 유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유리야. 사랑은 소유가 아니야.]
[무슨..말이야?]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는 사이라고해서 그 사람의 소유가 되는건 아니란거야.]
[...그럼 그 사람도 자신의 소유인건 아니란 거네?]

태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유리는 그런 아빠를 노려보며 말했다.

[동의할 수 없어.]
[......??]
[사랑은 소유하는거야.]

유리의 너무나도 단호한 말에 태현은 약간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유리는 아빠를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는거. 그게 사랑이야.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만 바라보게 하고, 자신만 생각하게 하고, 자신만 보고 웃게 하고싶은거. 그게 사랑인거야.]
[유리야..그건...]

태현은 유리의 말에 사랑은 그런게 아니라고. 사랑은 그렇게 이기적인것이 아니라고 그녀에게 말해주려 했지만 유리의 화난 표정이 마치 씻은듯이 갑자기 사라지며 대신 그자리에 화사한 미소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곤 할 말을 잃어버렸다. 표정이 바뀌어도 어찌 저렇게 순식간에 바뀔수가 있나?

[아빠.]
[으,응?]
[나 배고파아~. 그러니까 우리 얼른 밥먹자~. 웅~?]

태현은 귀여운 유리의 목소리와 그녀의 애교에 순간 당황해버렸다. 그녀가 분위기가 방금전과는 달라도 너무 달라서 였을까. 하지만 유리는 이렇게 당황해하는 아빠의 표정에도 개의치 않으며 활기찬 웃음으로 아빠를 이끌어 식탁에 앉히고는 냉장고에서 통에 담긴 카레를 꺼내어 전자레인지에 뎁혀 왔다.

[짜잔~~. 사실 어젯밤에 아빠가 목욕하러 들어간 사이에 내가 새로 만들어 놨지롱~~.]

태현은 너무나도 환한 유리의 음성에 결국 유리의 말에 놀란 마음을 자신도 모르게 접어버리며 빙긋 웃었다. 하긴 보고만 있어도 사랑스러운 딸이 저렇게 애교를 떠는데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 아빠가 어디있겠는가.

[하하. 정말이야? 어디, 어제 내가 만든것보다 더 맛있나 먹어볼까~?]
[헤헤~. 비교할껄 비교하시라구요~. 어제 아빠가 만든건 카레가 아니라 완전 짜장이었잖아~~.]
[뭐어~? 요녀석~. 하하핫.]

두 부녀의 분위기는 금방 화기애애 해졌다. 태현과 유리는 그렇게 즐거운 아침식사를 했고, 디저트로 커피를 마실때 유리는 아빠에게서 오늘 같이 가주겠다는 말을 듣고 너무 기뻐 그만 커피를 쏟을 뻔했다. 유리가 친구들과 만나기로한 시간은 오후 2시. 태현은 오전에는 유리와 함께 레스토랑 일을 하고는 현석에게 양해를 구해서 유리와 함께 유리가 친구들과 만나기로한 약속장소로 향했다.

[하하. 그렇게 좋아?]
[응~~. 너~무 좋아~. 고마워 아빠~~.]
[네가 좋다니 아빠도 기쁘네. 하하.]

태현은 기분 좋아 죽겠다는 얼굴로 레스토랑으로 출발하기전에 자신에게서 받은 생일 선물을 연신 어루만지며 헤헤거리는 유리를 바라보며 빙긋 웃음지었다. 유리의 생일선물로 뭘 줄까 정말 고민을 많이 했는데, 역시 유리 또래의 여자애라면 팔찌를 주면 좋아할것 같아서 투명한 보석(물론 인조다.)이 반짝이는 예쁜 팔찌를 선물로 주었다. 다행히 유리는 그 팔찌를 너무나 마음에 들어했고, 어찌나 그걸 마음에 들어했는지 아직까지도 올라간 그녀의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 하지만 선물은 받는것보다 주는게 더 기분 좋다는 말처럼. 태현은 지금 선물 준자의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솔직히 유리가 이렇게나 기뻐할 줄은 몰랐었다.

[어? 쟤네들 벌써 와있네?]

그렇게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약속장소에 다달았나보다. 태현은 저만치서 이쪽으로 손을 흔드는 대여섯명의 아이들을 보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딸의 친구들과 같이 어울려 다닌다니, 태현은 벌써부터 밀려오는 걱정에 앞이 막막해오는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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