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누나가 좋아.”
당연하다. 이 세상에 하나 남은 유일한 혈육. 그리고 그걸 제하더라도 나는 누나가 소중하다. 다른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이해를 바란다면 이런 행동, 하지 않았다.
나에게 안겨있던 누나가 천천히 떨어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요 며칠 자주 바닥에 눕는다. 그것도 여자에 의해서. 몸을 일으킬 때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특히 좀 전에 부딪힌 등이 찌릿하고 아파왔다. 왠지 환자가 된 기분이다. 아니, 이 정도면 충분히 환자라고 해도 될까. 내일 상태를 봐서 통증이 더 심하다 싶으면 병원에 가야겠다.
누나는 일어나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도 따라 들어갔다. 누나가 침대 위로 올라가 누웠다. 내게 등 돌린 자세다.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간다. 나도 침대에 올라가서 누나 옆에 앉았다. 지금 누나는 어떤 기분일까.
“누나, 저녁 안 먹어?”
“……안 먹을래.”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갑자기 누나가 왜 이럴까. 기분이 나빠 보이거나 하지는 않는데.
“누나,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누나가 이불 속으로 더욱 파고들어갔다. 얼굴까지 푹 눌러썼다. 이불을 들춰내려고 했다. 하지만 누나가 완강히 거부한다.
“하지 마.”
누나가 이불 속에서 말했다. 누나의 얼굴을 보고 싶어졌다. 좀 더 힘을 줘 이불을 들춰내려고 시도했다. 누나가 계속 막는다. 하지만, 누나는 나보다 힘이 약하다. 둘 다 운동 따위와는 담을 쌓았으니, 그나마 타고난 근력에 우위가 있는 남자가 더 유리하다. 물론 그래봤자 근소한 차이지만, 그래도 중요한 건 나에게 지금 누나의 이불을 충분히 벗겨낼 힘이 있다는 것이다. 벗긴다는 표현은 조금 야릇한가.
곧 누나는 내 힘을 이기지 못하고 이불을 빼앗겼다. 다시 숨지 못하도록 이불을 아예 뒤로 던져버렸다. 조금 오버하면서 던지느라 왼쪽 등이 아파온다. 이거, 통증이 어깨랑도 연결된 것 같은데.
누나가 이번엔 침대 끝으로 굴러가 벽에 붙었다. 침대 한 쪽은 창문이 달린 벽에 붙어있다. 매트리스보다 침대받침이 넓이가 더 넓어서 벽과 매트리스 사이에 공간이 생기는데, 누나 정도의 체구는 그 틈으로 파고들어갈 수 있다. 거기다 밖으로 나온 팔은 창틀을 잡고 있다. 힘으로만 한다면 꺼내기가 힘들 것이다. 하지만, 누나는 간지럼을 잘 탄다.
“으, 꺄아아아아악!”
“자, 얌전히 나오시지.”
누나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나는 가차없이 간질인다. 누나가 창틀을 잡은 손에 힘이 빠질 때까지 간지럼을 태웠다. 창틀 잡은 손을 놓고 내 손을 잡으려고 하는 것을 보고 얼른 누나의 허리를 잡아 침대와 벽 틈에서 빼냈다. 누나를 안은 채로 한 바퀴 돌았다.
“비겁해.”
“괜히 숨으니까 그렇지.”
누나가 간지럼 때문에 조금 거칠어진 숨을 추스른다. 나는 누나가 혹시나 도망 갈까봐 여전히 뒤에서 안고 있는 채다. 하지만 누나의 뒤에 있다 보니 본래 목적인 얼굴을 보기는 힘들다. 누나의 허리를 안고 있는 팔의 힘을 살짝 풀어보았다. 누나가 더 이상 도망칠 생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팔을 완전히 풀었다. 그리곤 몸을 일으켜 누나를 넘어갔다. 서로 마주보며 누운 자세가 되었다.
누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되어있었다. 누나는 원래 얼굴이 금방 빨개진다. 술을 한 잔만 마셔도 빨개진다. 하지만, 이 정도로 빨개진 것은 처음 본다. 내가 누나의 얼굴을 계속 쳐다보고 있자 누나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누나 얼굴이 새빨개.”
“보지 마, 바보야.”
“괜찮아, 가리지 않아도.”
그렇게 말하면서 누나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처음에는 나에게 저항하려고 했지만, 이내 포기하고 손을 내린다. 그러고 보니, 지금에야 깨달았는데 누나는 지금 커다란 반팔 셔츠에 팬티만 입고 있다. 지금에야 깨달은 것은, 평소에도 자주 이런 복장을 한다는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티셔츠가 말려 올라가 팬티가 보일 듯 말 듯한 모양새가 되었기 때문이다.
“얼굴이 터질 것 같아.”
“귀여워.”
누나가 나에게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다. 누나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기도 하고, 금방 웃을 것 같기도 한, 설명이 힘든 표정이었다. 분명한 건, 누나가 지금 기분이 좋아보인다는 것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네가 날 싫어하게 될 줄 알았어.”
“내가 왜 누나를 싫어해.”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
“나도 좋아하는데.”
“그런 게 아니야.”
“그럼 어떤 건데?”
누나는 손으로 나를 때리려고 했지만, 나에게 잡혀있어서 실패했다.
“이런 건 말이 안 된단 말이야.”
“왜 말이 안 되는데?”
“그건, 당연하잖아.”
“뭐가 당연한데?”
“나 놀리는 거지?”
나는 누나를 놀릴 생각이 없다. 물론 누나를 놀리는 것은 재미있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다. 나는 단지 알고 싶은 거다. 누나의 생각을. 누나의 진심을. 누나가 지금 어떤 마음가짐을 하고 있는지 보고 싶다.
“누나는 내가 누나를 좋아한다고 말해서 싫어?”
“아니, 아니야.”
누나가 강하게 부정했다.
“나도 누나랑 마찬가지야. 조금 전에도 말했잖아. 나도 누나가 좋아.”
“응.”
누나는 여전히 새빨간 얼굴이다. 누나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초승달을 그리는 얇은 눈썹은 그린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진짜다. 지금은 눈물 때문에 조금 부었지만, 본래는 동그랗게 빛나는 눈. 살짝 쳐져서 귀여운 강아지처럼 보이기도 하는 눈이다. 선이 부드러운 작은 코. 통통하고 붉은 입술. 지금은 빨갛지만, 평소에는 새하얀 피부.
나와 누나는 닮았다. 아니, 나는 잘 못 느끼지만, 주위사람들에게 닮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만약에 내가 누나와 어딘가로 떠난다면. 그곳이 어디든 상관없다. 이름은 잘 모르는 나라도 괜찮다. 그래, 좀 더 구체적으로, 유럽으로 떠나 독일이나 스위스, 이탈리아 그런 곳에 있는 이름 모를 마을로 떠났다고 하자. 나와 누나가 그런 곳으로 떠난다면, 그곳 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바라볼까. 남매로? 아니면 연인으로?
“계속 이러고 있을 거야?”
누나가 물었다.
“그럼 다른 걸 원해?”
“바보야.”
장난기가 발동했다. 누나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등의 통증도 온몸의 근육통도 잊었다.
“뭐, 뭐하는 거야?”
“글쎄.”
누나와 서로 숨결이 닿을 위치까지 왔다. 누나의 얼굴에서 열기가 느껴진다. 코와 코가 닿았다. 너무 가까워서 이제는 판별이 잘 안되지만 누나가 눈을 감은 것은 알 수 있었다. 이번엔 입술과 입술이 닿을 차례. 부드러운 느낌이 입술에서 느껴진다.
처음에는 누나가 몸을 뒤로 빼면 장난이었다고 말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누나가 오히려 눈을 감고 가만히 버티고 있자, 그대로 입맞춤을 해버렸다. 만약에 여기서 혀를 내밀면 어떻게 될까?
“꺄악!”
역시 혀는 조금 오버였나 보다.
“너, 혀, 혀, 혀를!”
누나는 아까보다 훨씬 더 새빨간 얼굴을 하고 있다. 양손으론 입술을 가린 채 당황해 마지않았다. 누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 키스신만 나와도 얼굴을 붉히며 당황한다. 순수하다고 해야 할까. 세상에 물들지 않았다. 아니, 스킨쉽에 면역이 없다고 하는 편이 더 낫겠다.
“누나한테는 너무 자극적이었나?”
“나를 바보 취급한 거야?”
“아니.”
“바보 취급한 거구나!”
“아닌데.”
누나가 조금 화가 난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장난을 치고 누나가 화를 내는 일은 일상이다. 삐친 누나를 달래는 것은 내가 학교에 등교하듯이 매일 해왔던 일이다. 오늘따라 누나가 훨씬 더 귀엽게 느껴진다.
오늘 누나와 함께 침대에서 자게 되었다. 내 방 침대에서. 차라리 누나 방 침대가 넓으니 거기서 자자고 했지만, 누나가 내 방이 좋다고 하였다. 이불 안에서 꼭 달라붙어 이야기를 나눴다.
“누나, 사랑해.”
대화를 나누다가 내가 귓가에 이렇게 속삭이면, 누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부끄러워했다. 나는 그 반응이 재미있어서 몇 번이고 그것을 반복했다. 한 번은 누나가 자신을 놀리냐며 화를 내기도 했지만, 그건 화라고 하기 보단 자그만 투정이었다. 애교라고 하는 편이 더 낫겠다.
“나 좋아해?”
“응.”
한번은 누나가 물었고, 나는 대답했다.
누나가 얼마 안 가서 졸린지 하품을 했다. 누나는 12시 전에 자지 않으면 다음날에 맥을 못 춘다. 그런 모습도 귀여워서 좋지만, 내일은 주말이 아니라 학교에 가야하니 일찍 자게 해줘야지. 누나가 나에게 꼭 달라붙어서 잠들었다. 누나의 자는 얼굴을 한동안 구경하다가 나도 잠이 들었다.
다음날 오전 5시.
알람시계가 울렸다. 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울려 퍼진다. 잠귀가 밝은 편이라 일부러 소리가 작은 알람시계로 산 건데, 조용한 아침에 들으면 꽤나 크다. 알람시계는 책상에 있어서 끄려면 일어나야 한다. 무심코 평소처럼 몸을 일으키려다가 못 일어났다. 누나가 나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자면서도 끌어안고 있었나 보다. 누나의 팔을 천천히 풀고 일어났다. 여전히 근육통이 남아있다. 등의 통증도 여전하다. 특히 근육통은 몸이 굳어있는 아침에 더욱 괴롭게 느껴진다. 알람시계를 껐다.
“으응, 운하야.”
“응.”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니 누나가 눈이 뜨였나보다. 아마 곧 다시 잠이 들겠지만. 역시나, 누나는 다시 잠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새근새근 아기 같은 숨소리가 들린다.
샤워를 마치고, 식사 준비를 마쳤다. 대략적인 준비를 마치니 6시 10분 전이 되었다. 누나를 깨울 때다. 방으로 가서 누나를 흔들어 깨웠다.
“누나, 일어나.”
“응…….”
어제 충분히 자서 그런지 누나가 순순히 일어났다. 누나는 본래 잠에 약한 편은 아니다. 보통 사람과 비슷한 정도일 것이다. 다만, 내가 원체 잠이 없다. 누나가 태어날 때 내가 잘 잠까지 가져간 게 아닌가싶다. 누나는 최근 유행하는 아침형 인간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최근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그런가. 어쨌든 비교적 근래에 들어 아침형 인간이라는 녀석이 등장했는데, 내 생각엔 그냥 타고난 대로 사는 게 좋은 것 같다. 아침형 인간의 목적은 바쁜 현대인들이 바쁜 시간을 아끼려고 수단을 강구한 것인데, 휴식이자 취미로써 잠을 즐기는 나로서는 잠을 줄이는 행위가 그리 이해가 되지 않는다. 차라리, 평소에 쓸데없이 보내는 시간을 줄여보는 게 훨씬 더 경제적이라고 생각한다. 공부도 게임도 지루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보내는 그런 시간이 있지 않은가.
“누나, 밥 먹어.”
“응.”
식탁 앞에 앉아서 졸고 있는 누나를 깨었다. 아직은 잠이 덜 깬 모양이지만, 숟가락을 들고 손과 입을 움직이다보면 잠이 깬다. 늘 그래왔다.
“누나 오늘은 1교시 있지.”
“응. 오늘은 123456교시야.”
“힘들겠네, 밥 먹을 시간도 없겠다.”
“괜찮아, 집에 와서 먹으면 되니까.”
“오늘도 6시에 올 거야?”
“음, 더 일찍 올까?”
“아니야. 그러면 공부할 시간이 사라지잖아.”
누나는 수업이 없는 비는 시간 동안 공부를 한다. 그렇게 하면, 집에 와서 굳이 공부를 하지 않아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고 한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소리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렇듯이 누나도 식사 속도가 느리다. 그래서 누나를 맞춰 식사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여자들은 식사 속도 자체가 남자보다 느린 면이 있지만, 그보다는 식사를 하면서 수다를 떠는 것을 즐긴다. 남자들은 식사에 신경을 집중해 식사를 끝내고 수다를 떨든지 밖에서 뛰어 논다. 이것도 남자와 여자의 선천적인 차이일지도 모른다.
남자들은 두 가지 이상의 일을 동시에 하는, 멀티태스킹 능력이 여자에 비해 떨어진다고 한다. 확실히 그런 것 같다. 식사를 하는 방식도 멀티태스킹 능력의 차이를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여자. 식사를 하면서 대화하는 것보다는 식사를 하고나서 대화, 또는 다른 것을 하는 남자.
식사를 마치고, 교복을 입었다. 시간은 6시 40분. 평소처럼 등교하는 시간이다. 아침 식사를 할 때는 늘 잠잘 때 입은 옷을 입고 식사를 한다. 괜히 교복을 입고 식사를 했다가 음식이 묻기라도 하면 갈아입어야 하니까. 특히 요즘 같이 더운 계절에는 음식이 묻은 교복이 새로 빤 교복일 가능성이 크다. 어제 미리 교과서와 숙제를 넣어놓은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가방도 빤지 오래됐는데, 주말에 빨아야겠다.
“이제 학교 가는 거야?”
“응.”
현관에서 신발을 신었다. 누나가 현관 앞까지 다가왔다. 누나는 어제와 같이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커다란 반팔 티셔츠에 팬티만 입고 있다. 자기보다 더 큰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매우 귀여워 보였다. 가까이 다가온 누나에게 나도 모르게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뭐, 뭐야!”
“모닝키스.”
“바보.”
누나가 나를 경계하며 멀찍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누나 다녀올게.”
“응. 다녀와.”
나는 혼자 있을 때 생각이 많아진다. 당연한 건가.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기보다는, 의식하면 어느새 생각에 빠져있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대체로 쓸데없는 생각에 빠지지만, 가끔은 쓸데가 있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쓸데없는 생각과 쓸데있는 생각은 생각한 당시에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흐르고 결과가 나오면 내가 전에 했던 생각의 가치가 정해진다. 당연하다. 만약에 생각할 때부터 내 생각의 가치를 알고 있다면, 굳이 쓸데없는 생각을 할 리가 없으니까.
예를 들면, A라는 사람이 연인과 헤어지려고 생각한다고 치자. 아직 사귄지 얼마 안 된 풋풋한 사이지만,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헤어지는 것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어쩔 수가 없다는데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여러 가지 고민 끝에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 방법으로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하기로 한다. 하지만, 연인과 만나 얘기를 꺼내려는 때에 갑자기 상대방이 이별을 통보했다. 이 순간 A가 생각한 이상적인 이별통보에 관한 생각은 쓸데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나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나는 지은이가 좋다. 계속 사귀어 나간다면, 지금보다 지은이를 더 좋아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나는 누나를 선택했다. 지은이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우선순위의 문제다. 지은이를 좋아하지만, 누나를 더 좋아한다. 누나는 내가 없으면 살 수 없다. 나도 누나가 없으면 살 수 없다. 없으면 살 수 없을 만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없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은이에게 바로 그런 얘기를 할 자신이 없다. 사귀자마자 다음날에 헤어지자고 하다니, 그건 누구라도 못할 것이다.
고민에 고민을 하다 보니, 의식하지 못한 새에 교실에 도착해있었다. 이른 아침의 교실이라 역시 비어있지는 않고 누군가 있었다. 지은이다. 지은이가 교실에 들어오는 나를 보고는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안녕.”
“응, 안녕!”
밝은 말투의 지은이다.
“학교에 일찍 왔네?”
“응. 아침에 눈이 일찍 떠졌어. 가볍게 조깅을 하고 왔는데도 학교에 오니까 이런 시간이네.”
“대단하다.”
“그런가?”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을 했는데 저런 팔팔함이라니. 청소만 해도 기진맥진해지는 나와는 차원이 다르다. 아직도 그때의 근육통이 완전히 낫지 않았다.
“사실은, 일부러 너 보려고 일찍 왔어.”
“그래? 기쁘다.”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예의상하는 말이 아니라 기쁘다. 누군가가 나를 내가 오기를 기다려준다는 것이 이렇게 기분 좋은 것이구나. 나는 감정이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편이다. 아니, 표현할 줄 모른다. 그게 화나 슬픔 같은 감정만이라면 괜찮지만, 기쁨이나 즐거움과 같은 감정도 잘 표현할 줄 모른다. 이럴 때는 내가 조금 더 감정을 밖으로 표출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내가 겉으로 보기에 별로 안 기뻐보일지도 모르지만, 충분히 기뻐하고 있어.”
“알아.”
“어떻게?”
“난 알 수 있으니까.”
그렇게 지은이는 사랑스러운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지은이와 함께 얘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보니, 어느새 애들이 하나둘 등교하고, 어느새 수업이 시작했다. 쉬는 시간마다 이야기를 나눴다. 점심시간에도 이야기를 나눴다. 물어보고 싶은 것을 마음껏 물어보았다. 지은이는 모두 대답해주었다. 지은이가 묻는 것도 모두 대답해주었다.
지은이와 있으면 편하다. 지은이와 헤어지려 했던 생각이 사라져갔다. 누나도 지은이도 모른다면 더 이대로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비열한 생각을 해버렸다.
당연하다. 이 세상에 하나 남은 유일한 혈육. 그리고 그걸 제하더라도 나는 누나가 소중하다. 다른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다.
이해를 바란다면 이런 행동, 하지 않았다.
나에게 안겨있던 누나가 천천히 떨어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요 며칠 자주 바닥에 눕는다. 그것도 여자에 의해서. 몸을 일으킬 때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특히 좀 전에 부딪힌 등이 찌릿하고 아파왔다. 왠지 환자가 된 기분이다. 아니, 이 정도면 충분히 환자라고 해도 될까. 내일 상태를 봐서 통증이 더 심하다 싶으면 병원에 가야겠다.
누나는 일어나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도 따라 들어갔다. 누나가 침대 위로 올라가 누웠다. 내게 등 돌린 자세다.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간다. 나도 침대에 올라가서 누나 옆에 앉았다. 지금 누나는 어떤 기분일까.
“누나, 저녁 안 먹어?”
“……안 먹을래.”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갑자기 누나가 왜 이럴까. 기분이 나빠 보이거나 하지는 않는데.
“누나,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누나가 이불 속으로 더욱 파고들어갔다. 얼굴까지 푹 눌러썼다. 이불을 들춰내려고 했다. 하지만 누나가 완강히 거부한다.
“하지 마.”
누나가 이불 속에서 말했다. 누나의 얼굴을 보고 싶어졌다. 좀 더 힘을 줘 이불을 들춰내려고 시도했다. 누나가 계속 막는다. 하지만, 누나는 나보다 힘이 약하다. 둘 다 운동 따위와는 담을 쌓았으니, 그나마 타고난 근력에 우위가 있는 남자가 더 유리하다. 물론 그래봤자 근소한 차이지만, 그래도 중요한 건 나에게 지금 누나의 이불을 충분히 벗겨낼 힘이 있다는 것이다. 벗긴다는 표현은 조금 야릇한가.
곧 누나는 내 힘을 이기지 못하고 이불을 빼앗겼다. 다시 숨지 못하도록 이불을 아예 뒤로 던져버렸다. 조금 오버하면서 던지느라 왼쪽 등이 아파온다. 이거, 통증이 어깨랑도 연결된 것 같은데.
누나가 이번엔 침대 끝으로 굴러가 벽에 붙었다. 침대 한 쪽은 창문이 달린 벽에 붙어있다. 매트리스보다 침대받침이 넓이가 더 넓어서 벽과 매트리스 사이에 공간이 생기는데, 누나 정도의 체구는 그 틈으로 파고들어갈 수 있다. 거기다 밖으로 나온 팔은 창틀을 잡고 있다. 힘으로만 한다면 꺼내기가 힘들 것이다. 하지만, 누나는 간지럼을 잘 탄다.
“으, 꺄아아아아악!”
“자, 얌전히 나오시지.”
누나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나는 가차없이 간질인다. 누나가 창틀을 잡은 손에 힘이 빠질 때까지 간지럼을 태웠다. 창틀 잡은 손을 놓고 내 손을 잡으려고 하는 것을 보고 얼른 누나의 허리를 잡아 침대와 벽 틈에서 빼냈다. 누나를 안은 채로 한 바퀴 돌았다.
“비겁해.”
“괜히 숨으니까 그렇지.”
누나가 간지럼 때문에 조금 거칠어진 숨을 추스른다. 나는 누나가 혹시나 도망 갈까봐 여전히 뒤에서 안고 있는 채다. 하지만 누나의 뒤에 있다 보니 본래 목적인 얼굴을 보기는 힘들다. 누나의 허리를 안고 있는 팔의 힘을 살짝 풀어보았다. 누나가 더 이상 도망칠 생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팔을 완전히 풀었다. 그리곤 몸을 일으켜 누나를 넘어갔다. 서로 마주보며 누운 자세가 되었다.
누나의 얼굴이 새빨갛게 되어있었다. 누나는 원래 얼굴이 금방 빨개진다. 술을 한 잔만 마셔도 빨개진다. 하지만, 이 정도로 빨개진 것은 처음 본다. 내가 누나의 얼굴을 계속 쳐다보고 있자 누나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누나 얼굴이 새빨개.”
“보지 마, 바보야.”
“괜찮아, 가리지 않아도.”
그렇게 말하면서 누나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처음에는 나에게 저항하려고 했지만, 이내 포기하고 손을 내린다. 그러고 보니, 지금에야 깨달았는데 누나는 지금 커다란 반팔 셔츠에 팬티만 입고 있다. 지금에야 깨달은 것은, 평소에도 자주 이런 복장을 한다는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티셔츠가 말려 올라가 팬티가 보일 듯 말 듯한 모양새가 되었기 때문이다.
“얼굴이 터질 것 같아.”
“귀여워.”
누나가 나에게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다. 누나의 표정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기도 하고, 금방 웃을 것 같기도 한, 설명이 힘든 표정이었다. 분명한 건, 누나가 지금 기분이 좋아보인다는 것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네가 날 싫어하게 될 줄 알았어.”
“내가 왜 누나를 싫어해.”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
“나도 좋아하는데.”
“그런 게 아니야.”
“그럼 어떤 건데?”
누나는 손으로 나를 때리려고 했지만, 나에게 잡혀있어서 실패했다.
“이런 건 말이 안 된단 말이야.”
“왜 말이 안 되는데?”
“그건, 당연하잖아.”
“뭐가 당연한데?”
“나 놀리는 거지?”
나는 누나를 놀릴 생각이 없다. 물론 누나를 놀리는 것은 재미있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다. 나는 단지 알고 싶은 거다. 누나의 생각을. 누나의 진심을. 누나가 지금 어떤 마음가짐을 하고 있는지 보고 싶다.
“누나는 내가 누나를 좋아한다고 말해서 싫어?”
“아니, 아니야.”
누나가 강하게 부정했다.
“나도 누나랑 마찬가지야. 조금 전에도 말했잖아. 나도 누나가 좋아.”
“응.”
누나는 여전히 새빨간 얼굴이다. 누나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초승달을 그리는 얇은 눈썹은 그린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진짜다. 지금은 눈물 때문에 조금 부었지만, 본래는 동그랗게 빛나는 눈. 살짝 쳐져서 귀여운 강아지처럼 보이기도 하는 눈이다. 선이 부드러운 작은 코. 통통하고 붉은 입술. 지금은 빨갛지만, 평소에는 새하얀 피부.
나와 누나는 닮았다. 아니, 나는 잘 못 느끼지만, 주위사람들에게 닮았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만약에 내가 누나와 어딘가로 떠난다면. 그곳이 어디든 상관없다. 이름은 잘 모르는 나라도 괜찮다. 그래, 좀 더 구체적으로, 유럽으로 떠나 독일이나 스위스, 이탈리아 그런 곳에 있는 이름 모를 마을로 떠났다고 하자. 나와 누나가 그런 곳으로 떠난다면, 그곳 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바라볼까. 남매로? 아니면 연인으로?
“계속 이러고 있을 거야?”
누나가 물었다.
“그럼 다른 걸 원해?”
“바보야.”
장난기가 발동했다. 누나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등의 통증도 온몸의 근육통도 잊었다.
“뭐, 뭐하는 거야?”
“글쎄.”
누나와 서로 숨결이 닿을 위치까지 왔다. 누나의 얼굴에서 열기가 느껴진다. 코와 코가 닿았다. 너무 가까워서 이제는 판별이 잘 안되지만 누나가 눈을 감은 것은 알 수 있었다. 이번엔 입술과 입술이 닿을 차례. 부드러운 느낌이 입술에서 느껴진다.
처음에는 누나가 몸을 뒤로 빼면 장난이었다고 말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누나가 오히려 눈을 감고 가만히 버티고 있자, 그대로 입맞춤을 해버렸다. 만약에 여기서 혀를 내밀면 어떻게 될까?
“꺄악!”
역시 혀는 조금 오버였나 보다.
“너, 혀, 혀, 혀를!”
누나는 아까보다 훨씬 더 새빨간 얼굴을 하고 있다. 양손으론 입술을 가린 채 당황해 마지않았다. 누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 키스신만 나와도 얼굴을 붉히며 당황한다. 순수하다고 해야 할까. 세상에 물들지 않았다. 아니, 스킨쉽에 면역이 없다고 하는 편이 더 낫겠다.
“누나한테는 너무 자극적이었나?”
“나를 바보 취급한 거야?”
“아니.”
“바보 취급한 거구나!”
“아닌데.”
누나가 조금 화가 난 것 같았다. 하지만, 내가 장난을 치고 누나가 화를 내는 일은 일상이다. 삐친 누나를 달래는 것은 내가 학교에 등교하듯이 매일 해왔던 일이다. 오늘따라 누나가 훨씬 더 귀엽게 느껴진다.
오늘 누나와 함께 침대에서 자게 되었다. 내 방 침대에서. 차라리 누나 방 침대가 넓으니 거기서 자자고 했지만, 누나가 내 방이 좋다고 하였다. 이불 안에서 꼭 달라붙어 이야기를 나눴다.
“누나, 사랑해.”
대화를 나누다가 내가 귓가에 이렇게 속삭이면, 누나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부끄러워했다. 나는 그 반응이 재미있어서 몇 번이고 그것을 반복했다. 한 번은 누나가 자신을 놀리냐며 화를 내기도 했지만, 그건 화라고 하기 보단 자그만 투정이었다. 애교라고 하는 편이 더 낫겠다.
“나 좋아해?”
“응.”
한번은 누나가 물었고, 나는 대답했다.
누나가 얼마 안 가서 졸린지 하품을 했다. 누나는 12시 전에 자지 않으면 다음날에 맥을 못 춘다. 그런 모습도 귀여워서 좋지만, 내일은 주말이 아니라 학교에 가야하니 일찍 자게 해줘야지. 누나가 나에게 꼭 달라붙어서 잠들었다. 누나의 자는 얼굴을 한동안 구경하다가 나도 잠이 들었다.
다음날 오전 5시.
알람시계가 울렸다. 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울려 퍼진다. 잠귀가 밝은 편이라 일부러 소리가 작은 알람시계로 산 건데, 조용한 아침에 들으면 꽤나 크다. 알람시계는 책상에 있어서 끄려면 일어나야 한다. 무심코 평소처럼 몸을 일으키려다가 못 일어났다. 누나가 나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자면서도 끌어안고 있었나 보다. 누나의 팔을 천천히 풀고 일어났다. 여전히 근육통이 남아있다. 등의 통증도 여전하다. 특히 근육통은 몸이 굳어있는 아침에 더욱 괴롭게 느껴진다. 알람시계를 껐다.
“으응, 운하야.”
“응.”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니 누나가 눈이 뜨였나보다. 아마 곧 다시 잠이 들겠지만. 역시나, 누나는 다시 잠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새근새근 아기 같은 숨소리가 들린다.
샤워를 마치고, 식사 준비를 마쳤다. 대략적인 준비를 마치니 6시 10분 전이 되었다. 누나를 깨울 때다. 방으로 가서 누나를 흔들어 깨웠다.
“누나, 일어나.”
“응…….”
어제 충분히 자서 그런지 누나가 순순히 일어났다. 누나는 본래 잠에 약한 편은 아니다. 보통 사람과 비슷한 정도일 것이다. 다만, 내가 원체 잠이 없다. 누나가 태어날 때 내가 잘 잠까지 가져간 게 아닌가싶다. 누나는 최근 유행하는 아침형 인간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최근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그런가. 어쨌든 비교적 근래에 들어 아침형 인간이라는 녀석이 등장했는데, 내 생각엔 그냥 타고난 대로 사는 게 좋은 것 같다. 아침형 인간의 목적은 바쁜 현대인들이 바쁜 시간을 아끼려고 수단을 강구한 것인데, 휴식이자 취미로써 잠을 즐기는 나로서는 잠을 줄이는 행위가 그리 이해가 되지 않는다. 차라리, 평소에 쓸데없이 보내는 시간을 줄여보는 게 훨씬 더 경제적이라고 생각한다. 공부도 게임도 지루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보내는 그런 시간이 있지 않은가.
“누나, 밥 먹어.”
“응.”
식탁 앞에 앉아서 졸고 있는 누나를 깨었다. 아직은 잠이 덜 깬 모양이지만, 숟가락을 들고 손과 입을 움직이다보면 잠이 깬다. 늘 그래왔다.
“누나 오늘은 1교시 있지.”
“응. 오늘은 123456교시야.”
“힘들겠네, 밥 먹을 시간도 없겠다.”
“괜찮아, 집에 와서 먹으면 되니까.”
“오늘도 6시에 올 거야?”
“음, 더 일찍 올까?”
“아니야. 그러면 공부할 시간이 사라지잖아.”
누나는 수업이 없는 비는 시간 동안 공부를 한다. 그렇게 하면, 집에 와서 굳이 공부를 하지 않아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다고 한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소리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그렇듯이 누나도 식사 속도가 느리다. 그래서 누나를 맞춰 식사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여자들은 식사 속도 자체가 남자보다 느린 면이 있지만, 그보다는 식사를 하면서 수다를 떠는 것을 즐긴다. 남자들은 식사에 신경을 집중해 식사를 끝내고 수다를 떨든지 밖에서 뛰어 논다. 이것도 남자와 여자의 선천적인 차이일지도 모른다.
남자들은 두 가지 이상의 일을 동시에 하는, 멀티태스킹 능력이 여자에 비해 떨어진다고 한다. 확실히 그런 것 같다. 식사를 하는 방식도 멀티태스킹 능력의 차이를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여자. 식사를 하면서 대화하는 것보다는 식사를 하고나서 대화, 또는 다른 것을 하는 남자.
식사를 마치고, 교복을 입었다. 시간은 6시 40분. 평소처럼 등교하는 시간이다. 아침 식사를 할 때는 늘 잠잘 때 입은 옷을 입고 식사를 한다. 괜히 교복을 입고 식사를 했다가 음식이 묻기라도 하면 갈아입어야 하니까. 특히 요즘 같이 더운 계절에는 음식이 묻은 교복이 새로 빤 교복일 가능성이 크다. 어제 미리 교과서와 숙제를 넣어놓은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가방도 빤지 오래됐는데, 주말에 빨아야겠다.
“이제 학교 가는 거야?”
“응.”
현관에서 신발을 신었다. 누나가 현관 앞까지 다가왔다. 누나는 어제와 같이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커다란 반팔 티셔츠에 팬티만 입고 있다. 자기보다 더 큰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매우 귀여워 보였다. 가까이 다가온 누나에게 나도 모르게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뭐, 뭐야!”
“모닝키스.”
“바보.”
누나가 나를 경계하며 멀찍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누나 다녀올게.”
“응. 다녀와.”
나는 혼자 있을 때 생각이 많아진다. 당연한 건가.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기보다는, 의식하면 어느새 생각에 빠져있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대체로 쓸데없는 생각에 빠지지만, 가끔은 쓸데가 있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쓸데없는 생각과 쓸데있는 생각은 생각한 당시에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흐르고 결과가 나오면 내가 전에 했던 생각의 가치가 정해진다. 당연하다. 만약에 생각할 때부터 내 생각의 가치를 알고 있다면, 굳이 쓸데없는 생각을 할 리가 없으니까.
예를 들면, A라는 사람이 연인과 헤어지려고 생각한다고 치자. 아직 사귄지 얼마 안 된 풋풋한 사이지만,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헤어지는 것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어쩔 수가 없다는데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래서 여러 가지 고민 끝에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 방법으로 연인에게 이별을 통보하기로 한다. 하지만, 연인과 만나 얘기를 꺼내려는 때에 갑자기 상대방이 이별을 통보했다. 이 순간 A가 생각한 이상적인 이별통보에 관한 생각은 쓸데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나의 경우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나는 지은이가 좋다. 계속 사귀어 나간다면, 지금보다 지은이를 더 좋아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나는 누나를 선택했다. 지은이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우선순위의 문제다. 지은이를 좋아하지만, 누나를 더 좋아한다. 누나는 내가 없으면 살 수 없다. 나도 누나가 없으면 살 수 없다. 없으면 살 수 없을 만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없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은이에게 바로 그런 얘기를 할 자신이 없다. 사귀자마자 다음날에 헤어지자고 하다니, 그건 누구라도 못할 것이다.
고민에 고민을 하다 보니, 의식하지 못한 새에 교실에 도착해있었다. 이른 아침의 교실이라 역시 비어있지는 않고 누군가 있었다. 지은이다. 지은이가 교실에 들어오는 나를 보고는 내 쪽으로 다가왔다.
“안녕.”
“응, 안녕!”
밝은 말투의 지은이다.
“학교에 일찍 왔네?”
“응. 아침에 눈이 일찍 떠졌어. 가볍게 조깅을 하고 왔는데도 학교에 오니까 이런 시간이네.”
“대단하다.”
“그런가?”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을 했는데 저런 팔팔함이라니. 청소만 해도 기진맥진해지는 나와는 차원이 다르다. 아직도 그때의 근육통이 완전히 낫지 않았다.
“사실은, 일부러 너 보려고 일찍 왔어.”
“그래? 기쁘다.”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예의상하는 말이 아니라 기쁘다. 누군가가 나를 내가 오기를 기다려준다는 것이 이렇게 기분 좋은 것이구나. 나는 감정이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편이다. 아니, 표현할 줄 모른다. 그게 화나 슬픔 같은 감정만이라면 괜찮지만, 기쁨이나 즐거움과 같은 감정도 잘 표현할 줄 모른다. 이럴 때는 내가 조금 더 감정을 밖으로 표출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내가 겉으로 보기에 별로 안 기뻐보일지도 모르지만, 충분히 기뻐하고 있어.”
“알아.”
“어떻게?”
“난 알 수 있으니까.”
그렇게 지은이는 사랑스러운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지은이와 함께 얘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보니, 어느새 애들이 하나둘 등교하고, 어느새 수업이 시작했다. 쉬는 시간마다 이야기를 나눴다. 점심시간에도 이야기를 나눴다. 물어보고 싶은 것을 마음껏 물어보았다. 지은이는 모두 대답해주었다. 지은이가 묻는 것도 모두 대답해주었다.
지은이와 있으면 편하다. 지은이와 헤어지려 했던 생각이 사라져갔다. 누나도 지은이도 모른다면 더 이대로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비열한 생각을 해버렸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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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접속일 | 2024-11-23 | ||
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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