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깼다. 알람시계의 도움 없이 그냥 눈이 떠졌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일까. 누나 방에는 시계가 없어서 몇 시인지 알 수 없다. 알람시계와 핸드폰은 내 방에 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충전도 안 해놓고 잤다. 오래가는 배터리로 샀으니까 괜찮겠지. 누나 핸드폰은 이 방에 있긴 한데, 조금 멀다.
혹시나, 지금 늦게 일어난 건 아닐까. 작은 불안을 느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제 예상했던 대로 근육통이 몸을 엄습했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방바닥에 놓여 충전되고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오전 5시 57분. 다행이다. 별로 늦지 않았다. 안심하고 천천히 기지개를 켰다. 고통스러우면서도 시원하다.
평소보다 1시간가량 늦게 일어났지만, 상관없다. 평소에는 아침에 여유가 많은 대신 행동을 여유 있게 했다. 지금은 시간 여유가 없으니 좀더 빠르게 움직이면 된다. 나도 가끔 컨디션이 안 좋을 때가 있고, 1년에 몇 번은 늦잠을 자곤 한다. 늦잠을 자봤자 평소보다 1시간 늦게 일어나는 정도의 수준이다.
“운하야, 지금 몇 시야?”
“6시.”
“좀 늦었네.”
“괜찮아. 오늘은 누나는 쉬는 날이니까, 더 푹 자. 아침 준비는 해놓고 갈게.”
“응. 고마워.”
누나가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하긴, 그게 아니라도 원래 아침의 누나는 이런 식이지.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혼자 식사했다. 토요일은 보통 혼자 아침을 먹는다. 일주일 동안 잠을 별로 못 잔 누나가 잠을 보충하느라 늦게까지 자기 때문이다. 일요일은 나도 늦게 먹어도 되니까 같이 먹을 수 있지만, 토요일은 내가 학교에 등교를 해야 해서 어쩔 수 없다. 식사를 마치고는 깨끗이 씻었다. 어제 땀을 그렇게 흘려서 그런지 몸이 끈적끈적하다.
다 씻고 나서는 교복을 입었다. 학교에 갈 준비가 끝났다. 시간을 보니, 6시 50분이다. 평소에 얼마나 여유를 부리며 움직였는지 깨달았다. 50분이면 모든 준비가 끝나는구나. 이제부터 좀 더 늦게 일어나볼까.
가방을 메고, 신발을 신으러 현관으로 향했다. 신발을 신고 있는데, 누나가 방에서 나왔다.
“누나, 안 졸려?”
“졸려.”
“얼른 들어가서 자.”
“너 가면 다시 잘 거야.”
누나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누나, 어디 아파?”
“지금 몸이 아프고 뻣뻣해. 특히 골반 있는 데가.”
“그럼 오늘 밖에 돌아다닐 수 있겠어?”
“괜찮아. 그 정도는.”
말은 괜찮다고 했지만, 그다지 괜찮을 것 같지 않다. 안 나가는 편이 누나에게 편하겠지만, 그럴 생각은 없어 보이니 최대한 걷지 않는 방향으로 코스를 정해야겠다.
“학교 가 있는 동안 침대시트랑 이불 같은 거 다 빨아 놓을게. 잘 다녀와.”
“응. 다녀올게. 아, 그리고 식사 준비 해놨으니까, 데우기만 하면 돼.”
“알았어.”
누나에게 가볍게 키스해주고 밖으로 나왔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방향은 학교가 아니다. 지은이네 아파트 쪽이다. 이제부터 지은이와 함께 등교하기로 결정했으니까. 6시 55분. 지은이가 집에서 학교로 출발하는 시간이 15분이라고 했으니, 지은이네 집 앞에 도착해서 5분 정도 기다리면 될 것이다.
지금 나는 지은이와 만나는 것이 무섭다. 어떤 얼굴을 하고 만나야 할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어떤 표정을 지을지 정했더라도 그 표정 그대로 지은이를 만날 수 있을 자신이 없다. 나는 지은이가 좋다. 하지만 누나도 사랑한다. 게다가 어제는 되돌릴 수 없는 일까지 해버리고 말았다.
지은이와 헤어지고 싶지 않다. 이기적인 생각이란 것을 알고 있다. 나도 지금 이런 나를 경멸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자기 자신조차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다니, 나로선 죄악을 저지르는 것과 같다.
하지만.
괜찮지 않을까? 아직까지 지은이에게도 누나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나의 더러운 마음은 지금 나밖에 모른다. 그리고 지금의 관계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자신이 있다.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 지은이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다. 누나를 눈물짓게 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이대로 있는 것이야 말로 모두가 행복해지지 않을까. 나만 나쁜 인간인 채로, 몹쓸 인간인 채로 있으면 되지 않을까.
나의 선택은 정당하다. 그렇게 믿기로 했다.
“안녕, 운하야.”
“안녕, 지은아.”
지은이가 아파트 복도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지은이를 보는 순간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처럼 미소를 지었다. 지은이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까 고민하던 것이 바보 같이 느껴질 만큼 자연스러웠다. 내 얼굴 근육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남을 속일 수 있구나.
“어제는 전화 안 했더라.”
지은이가 섭섭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깜빡 잊고 있었다.
“미안해. 핸드폰이 없다가 생기니까 핸드폰 자체를 잊어버리고 있었어. 오늘은 충전도 못했어. 오늘은 꼭 전화할게.”
“응. 알았어.”
잊어버리고 있던 이유는 다르지만, 확실히 핸드폰이 없다가 생기니까 익숙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아직은 핸드폰이 있다는 사실을 계속 잊어버린다.
지은이와 즐겁게 이야기하면서 걸었다. 지은이와 이야기를 하면, 머릿속의 고민이 어느샌가 사라지고, 지금의 즐거움에만 집중하게 된다. 만약에 여기서 모든 사실을 이야기하면 어떻게 될까.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뭉개지는 듯한 아픔이 느껴진다. 말을 한번 잘못하는 것만으로도 부서질 수 있는 그런 상황에 있는 것이다.
“내일이면 데이트네.”
“시간이 별로 안 가는 것 같아.”
내 말에 지은이가 말했다. 그 말에 동의한다. 무척 많은 일을 겪은 것 같은데, 날짜를 세어보면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 갑자기 시간의 밀도가 높아지기라도 한 것 같다. 몇 달은 흐른 것 같은 기분이다.
지은이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학교에 도착했다. 교실에 도착해서, 또 다시 수업이 시작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즐겁다. 성진이 녀석은 커플 티를 너무 낸다면서 딴죽을 걸기도 했다.
오늘은 토요일. 수업도 4교시까지 밖에 하지 않는다. 게다가 다음날이 휴일이기 때문에 학생도 선생도 모두 맥이 빠진 느낌이라 시간이 금방 간다. 오늘 하루도 수업이 끝났다. 토요일 마지막 수업은 우리 반 담임선생님의 수업이다. 때문에 수업이 끝나고 바로 종례도 했다. 이제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는 녀석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집으로 간다. 때문에 다른 때보다 아이들이 훨씬 소란스러웠다. 아마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면 이런 풍경이지 않을까 싶다.
가방에 짐을 모두 넣고는 어깨에 멨다.
“잘 가, 운하야.”
“응. 너도 잘 가.”
은미의 인사에 대답했다. 은미가 나를 좋아한다, 라고 지은이가 했던 말 때문에 조금 신경이 쓰인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잘 모르겠다. 나는 남의 마음을 읽는 재주가 없으니까. 성진이 녀석이라면 알지도 모르겠지만, 굳이 물어보고 싶지는 않다. 조금 궁금하긴 하지만.
지은이가 아직 가방을 챙기고 있다. 그쪽으로 다가갔다. 이제 지은이가 가방을 모두 챙긴 것을 확인했다.
“갈까?”
“응.”
다른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며 교실을 나왔다.
“오늘 누나랑 데이트 한다고 했지.”
“응.”
“너희 누나 한번 만나보고 싶다.”
나는 별로 만나게 하고 싶지 않다. 만약 둘이 만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근데, 뭔가 어색하다. 언니라고 해야 할 텐데, 만난 적이 없으니까 언니라고 하기도 뭔가 어색해.”
“나중에 만날 기회가 생기겠지.”
“그런데, 너 누나한테 여자 친구 얘기 했어?”
“음, 안 했어. 부끄러워서. 너는 했어?”
“나도 부끄러워서 아직 안 했어.”
“동생은 알고 있던 거 같은데.”
“비밀로 하라고 했어.”
한 번. 지은이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그런데 그날 후로는 뭔가 흐지부지 된 느낌이다. 누나도 더 이상 그 얘기를 하지 않고, 나도 꺼내지 않았다. 솔직한 기분으로는 누나가 잊어버리길 바란다. 하지만, 아마 잊어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도 데려다 주려고?”
“당연히 데려다 줘야지.”
“고마워.”
지은이는 내가 바로 집으로 갈 거라고 생각했나보다.
“내가 집에 바로 갈 거라고 생각했어?”
“음……. 응.”
“왜?”
“그냥, 어쩐지.”
지은이가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니까 더 궁금해진다. 본심을 알고 싶다.
“어쩐지 뭐?”
“그냥. 어쩐지, 너는 너무 누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 속으로는 무언가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겉으로 티내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했다. 지은이는 모두 느끼고 있었던 걸까. 일부러 모르는 척을 했던 걸까. 겨우 진정하고 지은이에게 묻는다.
“어떤 면에서?”
“그냥, 같이 얘기하다 보면 누나 얘기 자주 하고, 그런 거 보면 그런 느낌이 들어.”
이토록 내 마음이 간파당하고 있었구나. 조금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지은이가 모든 것을 눈치챌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사실을 들키고 나면, 지은이는 분명 나를 싫어하겠지.
“알았어. 그럼 이제 누나 얘기 안 할게.”
“아니야. 괜찮아. 그냥 조금 질투 나서 그랬어.”
여자는 무척 민감하구나. 나로서는 상상하지 못할 고민을 끌어안고 있다. 아마 지은이도 이 얘기를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제부터 더 주의해서 말과 행동을 해야겠다. 자칫 잘못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에 지은이를 상처 입힐지도 모른다. 누나를 상처 입힐지도 모른다.
지은이네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갔다. 7층에 올라가 있는 엘리베이터. 지은이가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내려오고 있다.
“지은이 내일 봐.”
“응.”
“내일 기대 된다.”
“나도.”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지은이가 엘리베이터에 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긴다.
“안녕. 누나랑 오늘 데이트 잘 해.”
“응. 안녕. 아, 잠깐 지은아.”
엘리베이터에 타려는 지은이를 잠시 붙잡았다. 내 행동이 의아스러운 듯이 쳐다보는 지은이.
“지은아, 잠시 눈 감아 봐.”
“응, 왜?”
지은이는 의아해하면서도 일단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지은이에게 다가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지은이가 눈을 번쩍 떴다. 놀란 듯한 표정이다. 얼굴도 붉어졌다. 그 표정을 보니 미소가 지어진다.
“그런 표정이 색기가 있다는 거야.”
“그런가?”
“내일 봐.”
“이따가 밤에 전화할게.”
또 들었다 색기가 있다는 소리. 조금 미묘한 기분이지만, 나쁘지는 않다.
이제는 집으로 갈 차례다.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익숙하지 않아서 거슬리긴 하지만, 매번 가방에서 꺼내는 것도 귀찮아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있다. 누나에게 전화를 할 생각이다. 핸드폰을 샀을 때 누나가 단축번호를 저장해주었다. 1번을 누르고 있으면 된다고 했지. 1번 버튼을 꾹 누르고 있으니, 누나에게 전화가 연결 된다.
“여보세요.”
“응. 학교 끝났어?”
“응, 지금 집으로 가고 있어. 10분 정도 후면 도착할 거야.”
“알았어. 얼른 와.”
“응.”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원래 주머니에 뭔가를 넣어 가지고 다니는 일이 별로 없었다 보니, 조금 어색한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는 여름보다 겨울이 좋다. 겨울에는 걸치는 옷이 많은 만큼 주머니도 많아서 이것저것 넣고 다니기 편하다.
조금 걸음을 빨리해서 걸었다. 집에 얼른 도착하기 위해서다. 천천히 걸었으면 15분 정도 걸릴 거리를 10분 만에 걸었다. 도어락을 풀어 대문을 열고, 마당을 지나 현관문 앞에 도착했다. 마찬가지로 도어락을 풀어 현관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왔어?”
집에 들어온 나를 누나가 반갑게 맞아준다. 누나는 벌써 외출복을 결정해놓았는지, 한껏 꾸며 입었다. 얼굴이 평소보다 하얀 것이 화장을 했나보다. 누나는 원래 화장을 지우는 게 번거롭다는 이유 때문에 화장을 잘 안 하는 편이다. 그런데도 오늘은 화장을 한 것을 보니, 무척 기대하고 있었나 보다.
“누나, 오늘 이쁘다.”
“그래?”
누나가 기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내 방문을 열고 방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가방을 침대 위로 던졌다. 교복도 서둘러 풀었다. 얼른 옷을 갈아입고 출발해야지.
“얼른 옷 갈아입고 나올게 기다려.”
“점심은 안 먹어도 돼?”
“응, 학교 매점에서 대충 사먹었어.”
그냥 안 먹고 간다고 말하면 누나가 막을 것 같아서 거짓말을 했다. 어차피 활동량이 적다 보니 음식을 적게 먹어도 상관이 없다. 교복을 벗고 무엇을 입을까 고민했다. 평소에는 옷차림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기 때문에 아무거나 집히는 대로 입었지만, 오늘은 명색이 데이트다. 누나를 위해서라도 조금은 신경을 써야한다. 내일도 옷을 어느 정도 차려입어야 할 텐데 일단 나갔다 와서 고민해둬야겠다.
그나마 내가 가지고 있는 옷 중에 가장 세련되어 보이는 옷을 선택했다. 하얀색에 앞에 추상화스러운 그림이 그려진 반팔 티셔츠다. 그러고 보니 이 옷 누나가 사준 옷이다. 나에게 어울릴 것이라면서 사왔다. 티셔츠는 이걸로 입고, 바지는 청바지로 하면, 나쁘지 않겠지. 어떤 옷에도 어울린다는 게 청바지의 장점이다.
옷을 입고 방에서 나왔다.
“누나, 이제 준비 다 됐어.”
“빠르다.”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아?”
“그건 그래.”
누나가 웃었다. 이제 밖으로 나가면 된다.
“누나, 근데 몸 아프지 않아? 괜찮겠어?”
“괜찮아 이제. 시간이 지나니까 괜찮아졌어.”
별로 괜찮지 않을 것이다. 누나도 나못지않게 몸을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다. 아침에 말했던 대로 골반 쪽이 많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역시 집에서 쉬고 싶어보이지는 않는다. 최대한 걷지 않는 편이 낫겠지.
“일단, 가서 영화 보면 되겠지? 누나가 보고 싶은 영화 시간표 찾아 봤어?”
“응. 1시 40분에 할 거야. 천천히 나가면 돼.”
영화에 대한 것은 누나에게 맡겼다. 영화 제목이 뭐였는지는 까먹었지만, 분명 연애에 관한 이야기였다. 지금 시간이 12시 50분이니까, 영화관에 도착해서도 20분에서 30분은 기다릴 것 같다. 충분한 여유다. 영화가 시작하기까지 20분에서 30분 정도 시간 여유가 있으면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나는 그런 시간이 좋다.
“이제 출발할까?”
“응.”
누나가 그저께 산 힐을 신었다. 실용적인 부분에서는 발도 아프고, 건강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힐을 추천하고 싶지 않지만, 누나가 원하니까 어쩔 수 없다. 다시 방에서 안 쓰는 가방을 가져와서 누나의 운동화를 넣었다. 누나는 필요 없다고 했지만, 혹시 모른다.
문단속을 철저히 하고 집에서 나왔다. 누나가 오른쪽에서 팔짱을 꼈다. 왼쪽 어깨를 생각해서 이번엔 왼쪽에 가방을 걸쳤기 때문이다. 근육통 때문에 오른쪽 팔을 잡혀도 조금 괴롭긴 했지만, 그래도 왼쪽보다는 낫다.
시내로 나가기 위해선 버스를 타야 한다. 버스정류장을 향해서 걸었다. 이곳은 주택가라서 도로가 있는 곳으로 나가야 버스를 탈 수 있다. 그래봤자 5분 정도만 걸으면 도로가 나온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해서 앉았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몇 명 있었지만, 벤치에 앉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벤치에 앉았다.
“근데, 오늘 보고 싶은 영화가 무슨 내용이야?”
“살짝 SF도 섞인 건데, 지금으로 200년이 흐른 뒤의 미래야. 주인공이 200년 전에 불치병에 걸려서 냉동인간이 되었는데, 200년이 지나 치료법이 발견돼서 깨어난 거야.”
내 흥미를 끄는 내용이다. 그런데,
“전에 보고 싶다던 영화랑 다른 내용 같은데?”
“응. 사실은 이 영화랑 다른 영화랑 뭘로 할지 고민했는데, 다른 건 그냥 연애영화라서 이걸로 하기로 했어. 너도 이게 더 괜찮을 것 같아서.”
“고마워.”
영화를 고르면서 나도 고려해준 것에 고마움을 느꼈다. 영화의 줄거리를 대충 들었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에 대해서 어딘가에서 들어본 것도 같다. 학교에서 애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던가, 컴퓨터를 하다가 인터넷에서 스쳐지나가듯 봤을지도 모른다.
잠시 후 버스가 도착했다. 시내를 거치는 버스가 무척 많기 때문에 굳이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은 편하다. 교통카드를 찍었다. 요즘은 교통카드가 있어서 충전을 해서 쓰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나 같은 경우는 교통수단을 별로 이용할 일이 없어서 별로 필요가 없지만, 언젠가 누나가 유용하다면서 하나 만들어줬다. 내년에 대학에 진학하면 자주 쓰게 되겠지.
10분 정도 버스를 타고 가다 보니, 시내에 도착했다. 여름인데다가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꽤 많았다. 시내에 나오는 것도 오랜만이다.
“영화관이 어디더라?”
“자, 따라와.”
시내의 지리를 잘 몰라서 인터넷으로 지도를 검색해서 외워봤는데, 역시 지도는 2차원, 지구는 3차원이다. 감이 잡히질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누나를 따라 걸었다. 그래도 지도를 본 게 완전히 쓸데없는 일은 아닌지 따라가다 보니 조금씩 길을 알겠다. 영화관에서 나오면, 저기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는 것도 괜찮겠다.
백화점에 도착했다. 이 시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백화점. 이곳 맨 위층에 영화관이 있다. 아니, 맨 위층에는 스카이라운지가 있으니, 맨 위층의 아래층이다.
백화점의 1층은 화장품이나 악세서리 등 여성을 위한 상품이 많다. 아무래도 백화점에 들어오자마자 눈이 가는 곳이니 백화점에 가장 많이 오는 여성고객을 노린 듯하다. 누나도 화장품이나 악세서리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이따가 영화보고 내려오면 마음에 드는 거 사.”
“아니야.”
아니라고 말하지만, 뭔가 사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누나를 유혹하는 상품들을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다. 사람이 꽤 많아서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데만도 시간이 꽤 걸렸다.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 타서 층 버튼 위를 보니, 백화점 층마다 간단히 안내를 적어 놓았다. 8층에 매표소가 있구나. 8층 버튼을 눌렀다. 사람들이 많아 엘리베이터가 거의 꽉 찼다.
“토요일에는 이렇게 사람이 많구나.”
“너는 밖을 좀 돌아다닐 필요가 있어.”
누나가 말했다. 확실히 너무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도 문제가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 누나도 나와 만만치 않게 집에 틀어박혀있다.
8층에서 내렸다. 영화관은 8층에서 9층으로 이루어졌다. 8층에는 매표소와 팝콘을 파는 곳이나, 식당 등이 있다. 9층은 상영관이다. 번호표를 뽑아 줄을 섰다. 이곳은 은행처럼 번호표를 뽑고 대기를 하는구나. 사실 이 영화관에는 처음 온다. 이 백화점이 개장한 것 자체가 얼마 안 됐기 때문이다. 그 전에는 규모가 별로 크지 않은 작은 영화관으로 자주 갔었다.
영화표를 샀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아직 1시 15분밖에 안 됐다. 영화가 시작하기까지 25분이나 남았다.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대기하는 시간을 꽤나 좋아한다. 그동안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시간이 금방 흐른다. 누나도 마찬가지다.
“누나 팝콘 먹을 거야?”
“그러자. 영화관에 왔으니까.”
팝콘 사는 곳에서 줄을 서서 메뉴를 보니, 세트로 싸게 파는 메뉴들도 보인다. 커플 세트라는 녀석도 있다. 커플 세트는 A와 B로 나뉘어서 A는 음료수가 따로 나오고, B는 음료수가 커다란 컵에 빨대가 두 개 나온다.
“커플 세트A로 주세요. 카라멜도 넣어서요.”
영화관은 커플이 자주 오다 보니 커플을 위한 메뉴나 이벤트가 많다. 영화관만이 아니라, 시내에 있는 곳곳마다 그렇다. 돈을 지불하고 음료와 팝콘을 받았다. 컵이 하나면 불편할 것 같아서 일부러 따로 있는 것으로 했다.
누나가 영화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 손이 비도록 누나에게 콜라를 하나 주고, 나는 팝콘과 다른 콜라를 잡았다. 어깨에 걸친 가방이 갑자기 흘러내린다. 불편하지만, 양손에 잡고 있는 게 있어서 그냥 놔두려고 했는데, 누나가 가방을 다시 어깨에 걸쳐주었다.
“고마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상영관으로 올라갔다. 아직 시간이 20분 정도 남았지만, 미리 안으로 들어가서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직원에게 막혔다. 영화가 시작하기 10분 전에 입장이 가능하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상영관 입구에서 대기했다. 다행히 테이블과 의자들이 충분히 놓여 있어서 앉아서 기다릴 수 있었다.
“영화 재미있겠다.”
“응.”
누나와 나는 자리에 앉아서 영화 팸플릿을 읽고 있다. 지금 우리가 볼 영화의 팸플릿도 보고, 다른 영화도 살펴보고 있다. 상영예정작도 몇몇 살펴보았다.
“이 영화 재미있겠다. 개봉하면 또 보러 오자.”
“응.”
보고 싶은 영화의 팸플릿은 일단 접어서 가방 안에 넣었다. 나중에 잊어버리지 않도록.
영화 시작 10분 전이 되었다. 영화관 입구에 서있는 직원에게 영화표를 보여주고 안으로 들어갔다. 5번 상영관이라고 했다. 좌석은 H열에 7번과 8번.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 관객이 많지 않으면 아무데나 앉을 수 있을 것이다.
오랜만에 오는 영화관이라 설렌다. 오랜만의 누나와의 데이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단은 자리에 앉았다. 상영관의 크기가 꽤 크다. 그동안 작은 규모의 영화관에 익숙해져서 거대하게까지 보인다. 일단 천장이 이렇게 높은 영화관은 처음이다. 확실히 나는 좀 더 밖을 돌아다녀볼 필요가 있나 보다.
아직 관객들이 들어오는 시간이라,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틀어져있다. 스크린은 아직 까맣다.
“누나랑 영화관에 정말 오랜만에 왔다.”
“응.”
“이제는 자주 오자.”
“응.”
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클래식 음악이 꺼지고, 영화관의 불이 꺼졌다. 스크린이 밝게 빛난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몇 가지 광고가 나왔다. 상품의 광고도 나오고, 곧 상영할 영화의 예고편도 보여주었다.
영화의 내용은 대충 이렇다. 불치병에 걸려 냉동인간이 되었다가, 200년 후 치료법이 발견되어 겨우 깨어난 주인공. 200년이 지나 주위에 아는 사람들은 모두 죽고, 남은 것은 혼자밖에 없다. 고독감을 느끼면서도 주인공은 200년 뒤의 세계에 점점 익숙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은 산책 겸 길을 걷다가, 자기가 지나가고 있던 곳 옆에 있는 고층건물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나는 것을 목격한다. 그러던 중 폭발한 건물에서 심하게 부상을 입은 생존자를 발견, 그를 치료할 목적으로 집으로 데리고 간다. 200년 후의 세계는 집에도 의료기구가 구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상자는 한동안 주인공의 집에서 함께 생활한다. 그러다, 어느 날 왠 무장세력이 주인공의 집을 습격한다. 주인공이 구해준 부상자를 노린 것이다. 알고 보니, 그 부상자는 어느 회사에서 비밀리에 실험하던 실험체. 주인공과 실험체는 함께 도망을 치고, 어느 회사의 야망을 알게 된다.
뭐, 그런 식으로 액션이 펼쳐지고, 로맨스도 싹 트는 영화다. 웃기는 장면은 웃기고, 진지한 장면은 진지하고, 특수효과는 멋있다. 괜찮은 영화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작품성 같은 것보다 먼저 재미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재미가 있어야 일단 볼 것 아닌가.
영화가 끝났다. 2시간의 상영시간이 짧게 느껴지는 영화였다. 보기를 잘했다.
“흑, 흑흑…….”
감수성이 풍부한 누나가 눈물을 쏟고 있다. 마지막에 주인공이 장렬히 희생하며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도 그 장면에서는 조금 울컥하는 기분을 느꼈다.
“누나, 그만 울어. 화장 지워지겠다.”
“흑흑, 괜찮아, 흑, 워터프루프야.”
워터프루프라는 건, 물에 닿아도 지워지지 않는 화장품의 기능이다. 여름 같은 경우는 땀이 많이 나니까, 이런 기능이 필수다. 특히 누나처럼 잘 우는 사람에게도 많이 필요하겠다.
누나를 진정시키며 상영관에서 나왔다.
“나, 잠시 화장실 좀.”
누나가 화장을 고치려는 듯 화장실에 갔다. 나도 화장실로 들어갔다. 2시간 동안 음료수를 마시며 영화를 봤더니, 소변이 마렵다.
화장실에서 나와서 누나가 나올 때가지 기다렸다. 용무를 보고 손을 씻으면 끝나는 남자와는 달리, 여자는 여러 가지로 시간이 오래 걸리는 모양이다. 잠시 후 누나가 나온다. 이제 울음이 진정이 된 건지, 평상시와 똑같은 모습이다.
“이제 안 울어?”
“안 울어!”
내가 놀리듯이 말하자 누나가 조금 발끈했다. 나는 이렇게 눈물을 잘 흘리는 누나도 좋다. 물론 슬픈 일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싫다.
“이제 어디로 가고 싶어?”
“글쎄, 어디든지 좋아.”
“그럼, 백화점에 있는 카페로 가자.”
“응.”
누나와 함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엘리베이터보다 나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카페는 7층에 있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 층마다 안내를 써놓은 것을 봐두었다. 아까 봐둔 카페나, 인터넷으로 미리 찾아본 카페도 있었지만, 그곳에 가려면 누나가 많이 걸어야 하기 때문에 일부러 백화점 안에 있는 곳으로 골랐다.
카페에 들어갔다. 백화점 안이라 사람이 많아 조금 부산스럽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의외로 아주 조용하다. 구석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안으로 들어오니 더더욱 바깥의 소음이 들리지 않는다. 분위기 있게 틀어놓은 음악소리만 들린다.
직원이 메뉴판을 가지고 온다.
“누나는 뭐 마실 거야?”
“난, 녹차라떼, 아이스로.”
“그럼 나도.”
메뉴를 고르는데 고민하고 싶지 않아서 누나와 통일했다. 이곳에 온 목적이 맛있는 커피를 먹기 위한 것은 아니니까. 직원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메뉴판을 들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생각보다 괜찮다.”
“응. 조용하다.”
“원래는 미리 봐둔 곳이 있었는데, 여기도 나쁘지 않은 것 같으니까 다행이다.”
“미리 봐둔 곳이 있으면 뭐하러 여기로 왔어?”
“누나 지금 발 꽤 아프지? 그리고 골반도.”
누나가 대답하지 못했다. 여자의 힐은 남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다리에 부담을 많이 준다. 딱딱한 구두 때문에 발의 모양도 망가지고, 무릎이나 허리에도 충격을 준다. 지금까지 별로 걷지는 않았지만, 구두를 신고 서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힐이 아니라도, 지금 누나의 몸 상태는 평소보다 안 좋으니까.
“다음엔 구두를 신어도, 좀 더 편한 걸로 신어.”
“응, 알았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지만, 별로 기분이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말을 덧붙이기로 했다.
“그래도, 구두는 정말 잘 어울려.”
“정말?”
“응.”
누나가 굳이 고통을 참으며 힐을 신은 이유는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다. 이쁘다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역시 좀 더 몸을 생각해줬으면 한다.
“누나 요즘 학교에서 어떻게 지내?”
“뭐, 그냥. 수업 듣고 도서관에 있다가 집에 오고. 수업 듣고 도서관에 있다가 집에 오고. 그리고 수업 듣고?”
“친구랑 같이 노는 건?”
“아주 가끔.”
“그래도 괜찮아? 좀 더 친구랑 어울리는 게 낫지 않을까?”
내가 그런 말을 하니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대학도 별로 고등학교 때랑 다를 게 없어. 웬만큼 오지랖 넓은 사람 아니면 친한 사람이랑만 어울리게 돼. 과 안에도 사람이 많으니까. 뭐, 학회생활을 하면 또 모르겠는데, 나는 그런 거랑은 거리가 멀어서.”
“그렇구나.”
“그러는 너는 학교 생활 어때?”
“나도 뭐 똑같지. 학교에 가서 수업 듣고, 수업 끝나면 집에 오고.”
“거짓말 같은데.”
거짓말이다. 여자 친구가 생겨서, 학교에서 여자 친구와 함께 얘기하고, 수업이 끝나면 여자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온다.
“둘 다 학교 생활에 뭔가가 없어.”
“뭐, 어때.”
누나의 말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학교 생활에 특별한 일이 없어도 상관이 없다.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만 곁에 있으면 된다.
카페에서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깃거리는 평소에 집에서 대화하는 것과 똑같았다. 학교 이야기. 친구들 이야기. 다음에 다시 데이트를 하자는 이야기. 평소와 다른 것은 없다. 그저 장소가 다를 뿐이다. 장소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그러나, 장소가 달라지면, 더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어느덧 시간이 5시가 넘었다. 영화가 끝난 게 4시였으니까, 한 시간 조금 넘게 여기 있었다는 소리다. 시간이 흐르는 것을 별로 느끼지 못했다. 그저 어느 정도 흘렀겠거니, 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1시간이나 넘었구나.
“누나, 이제 저녁 먹으러 갈까?”
“그럴까.”
“뭐 먹고 싶어?”
“나, 피자 먹고 싶어.”
“그럼 피자집으로 가자.”
백화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피자집이 있다. 괜히 먼 곳에 있으면 누나가 걷는데 힘들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악세서리와 화장품이 가득한 1층에 도착했다.
“누나, 사고 싶은 거 사.”
“별로, 괜찮은데.”
“거짓말, 사고 싶은 거 아까 봐뒀잖아.”
“아니야. 그냥 지나가면서 언뜻 본 거야.”
그게 그거지.
“돈 아껴야지.”
“원래 평소에 돈을 안 쓰니까 가끔은 써도 괜찮아.”
우리는 생활비의 모두를 삼촌에게 받는다. 과하다고 느낄 만큼 많이 주신다. 가끔은 부담스러워 액수를 줄여달라고도 해봤지만, 삼촌은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시며 매달 변함없는 액수를 빠짐없이 보내주신다. 삼촌이 안 계셨다면, 지금의 우리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언젠가 꼭 삼촌에게 은혜를 갚을 것이다.
누나가 나에게 굴복하고, 결국 사고 싶은 것을 사기로 했다. 안 사겠다더니, 이미 사고 싶은 것을 골라놨다는 듯이 망설임 없이 길을 걷는다. 누나가 가서 고른 것은, 목걸이다. 은색의 로켓목걸이. 체인으로 된 얇은 줄에 하트 모양의 은색 로켓이 달려 있다.
“운하야, 나 이거 사고 싶어.”
“목걸이네.”
“여기다 이렇게 우리 사진을 넣는 거야.”
점원이 이 목걸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준다. 재질은 은이고, 목걸이 줄은 무슨 공법으로 만들어서 잘 안 끊어진다고 한다.
“이거 계산해주세요.”
결국 목걸이를 샀다.
“이거만 사면 돼?”
“응. 그리고, 우리 여기 넣을 사진 찍으러 가자.”
누나가 나를 데리고 활기차게 걸어간다. 발이 아플 텐데도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누나를 따라 걷다 보니 사진관에 도착했다. 집 근처에 사진관이 있기 때문에 이곳의 사진관에는 처음이다. 집 근처의 사진관과는 달리 크고, 깔끔하게 꾸며져 있다. 들어가니, 사진관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준다.
“어서오세요.”
“저, 여기에 넣을 사진 좀 찍고 싶어서 그런데요.”
누나가 목걸이를 보여주며 설명했다.
“아, 그럼 여기 크기에 맞춰서 사진 뽑아 드리면 되겠죠.”
“네.”
사진을 찍게 되었다.
“자, 웃으세요.”
“네.”
누나가 나에게 찰싹 달라붙어 자연스럽게 웃는다. 나도 자연스럽게 웃으려고 노력했다. 사진기 앞에만 서면 내가 생각해도 어색한 미소밖에 나오지 않는다.
“남자 분 웃으세요.”
사진을 찍어주시는 아저씨도 내 표정을 지적했다.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려고 노력하지만, 역시 쉽지 않다. 최대한 내가 미소를 짓는 때를 상상해보기로 했다. 누나에게 장난을 칠 때. 누나와 함께 있는 때.
“사진은 언제 찾으러 오시겠어요?”
“혹시 오늘 안에 찾을 수 있나요?”
“지금 다른 사진도 밀려 있어서 1시간 정도 기다리셔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네. 그럼 1시간 뒤에 사진 찾으러 올게요.”
겨우 사진을 다 찍었다.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려고 노력했는데, 결과는 사진을 봐야 알겠지. 사진관에서 나왔다. 이제는 누나가 바라던 피자집에 갈 차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다.
누나의 표정이 밝다. 확실히 함께 밖으로 나온 것은 잘 한 일이다. 이제 자주 밖으로 나와야지.
피자집 앞에 도착했다. 텔레비전에도 선전이 자주 나오는 유명한 이름의 피자집이다. 유명한 만큼 손님도 많다. 피자집 안도 매우 복잡해 보였다.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직원이 우리를 웃으며 맞아준다.
“두 분이세요?”
“네.”
직원(아마도 아르바이트생이겠지)이 우리를 자리로 안내했다. 직원이 안내해준 자리에 앉았다.
“누나, 뭐 먹고 싶어?”
“나, 이거랑 이거.”
누나가 이름도 어려운 메뉴를 가리킨다. 고르는데 시간이 별로 안 걸린 것을 보니, 전부터 먹고 싶었던 것인가 보다. 누나가 원하는 메뉴를 시켰다. 직원이 메뉴를 가지고 돌아간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미리 말하지. 그럼 진작에 왔을 텐데.”
“그냥 생각날 때마다 찾아본 거야. 여기 오면 이거 먹어야지. 저기 가면 이거 먹어야지.”
“그럼 다음 주에 또 가자. 다른 데에 또 먹고 싶은 거 있지. 뭐든지 말해.”
“그래! 다음 주 언제?”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가자.”
누나가 기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그동안 왜 내가 누나와 같이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까. 조금 후회가 된다. 이제부터라도 자주 나가야지.
피자가 올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누나, 기분 엄청 좋아 보여.”
“응. 지금 너무 좋아.”
“다음 주에는 어디로 가고 싶어?”
“다음 주에 정해서 말해줄게.”
누나와의 이야기는 즐겁다. 누나와 함께 계속하고 싶다. 그런데, 계속 걸리는 일이 있다. 도무지 누나에게만 집중할 수 없다. 꼭 한 가지만 선택해야 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사진관에서 사진을 찾아 왔다. 집에 도착하니 시간은 8시. 벌써 해가 져서 어둡다. 오늘 하루가 무척 즐거웠다.
“누나, 재밌었어?”
“응.”
집 안으로 들어와 신발을 벗었다.
“아으…….”
누나가 표정을 찡그리며 신음했다.
“그러니까 내가 구두 신지 말라고 했지. 몸에 안 좋다니까.”
“아니야. 안 아파. 지금 건 그냥 낸 소리야.”
내 말에 누나가 아프지 않은 척 말한다. 그런 식으로 말해봤자 누가 속겠냐마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내가 말려도 누나는 계속 힐이 달린 구두를 신을 것이다. 차라리 내가 밖으로 나갈 때 최대한 걷지 않도록 배려하는 편이 낫다.
“아, 이제 씻어야겠다.”
“나도.”
누나도 나도 씻어야할 필요을 느꼈다. 더운 날씨에 밖을 돌아다녀서 땀도 꽤 흘렸고, 먼지도 뒤집어썼다. 나는 방 옆에 있는 욕실로, 누난 자기 방 안에 있는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벗고 욕조에 물을 받았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열었다. 지은이의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물론 지은이의 핸드폰 번호는 이미 저장되어 있지만, 일부러 외울 겸해서 번호로 누르는 것이다.
“여보세요. 오늘은 잊지 않고 전화 했어.”
“잘했어.”
“뭐야, 어린애한테 하는 것처럼.”
언제나처럼 나를 향해 호의를 담은 지은이의 목소리.
“내일 데이트네.”
“응. 내일 내가 집 앞으로 찾아갈게.”
“안 그래도 되는데.”
“그러고 싶어.”
지은이와 내일 데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지났다. 1시간도 넘게 통화했다.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통화를 더 많이 한다. 이번 달에 통화비는 장난이 아닐 것 같다. 다음 달에는 지은이와의 커플요금을 고려해 봐야 하겠다.
“이제 끊을게. 내일 봐.”
“응. 내일 봐.”
전화를 끊고 이미 미지근해진 욕조 물에서 빠져나왔다. 오늘도 몸에서 많은 수분이 빠져나갔는지 어지럽다.
목욕을 마치고, 몸을 닦고 밖으로 나와서 옷을 입었다. 언제나처럼 런닝셔츠에 사각팬티다. 누나가 거실 소파에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보이지 않는다. 아직 샤워를 하나 싶어서 누나 방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문을 열어 보니, 누나가 나에게 등을 보인 채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 보인다.
“누나, 뭐해? 벌써 자?”
대답이 없었다. 벌써 자고 있나 싶어서 누나에게 다가갔다. 침대 위로 조심히 올라가 누나 옆에 누웠다. 혹시나 잠을 자나 싶어서 슬쩍 몸을 일으켜 누나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누나가 눈을 뜨고 있다.
“누나, 안 자는데 왜 대답을 안 했어?”
누나가 여전히 대답이 없다.
“누나?”
“전화.”
“응?”
“조금 전에 전화 한 거 여자 친구한테지?”
대답하지 못했다.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욕실이 가까이 붙어 있어서 다 들리더라.”
사고가 멈췄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내가 조금 들떠있었나 봐.”
“누나.”
“아무리 좋아해도 나는 네 누나일 뿐인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겠다. 제발, 뭔가 누나에게 할 만한 그럴 듯한 말이 생각나길 원했다.
“그래, 우리는 남매잖아.”
누나가 쓸쓸히 웃었다. 등을 보고 있어서 보이지 않지만,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였다.
“나, 네가 여자 친구가 있어도 상관없어. 그냥 지금처럼 지낼 수 있기만 하면 돼.”
“누나…….”
“괜찮아, 난 지금도 충분히 좋으니까. 이대로도 좋아.”
누나가 말했다. 어느 때보다도 슬퍼보이는 표정으로.
“오늘은 따로 자자. 침대시트랑 이불 새 걸로 깔아 놨어.”
나는 내쫓기듯이 누나 방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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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주인공은 쓰레기 로드를 밟아 갑니다
혹시나, 지금 늦게 일어난 건 아닐까. 작은 불안을 느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제 예상했던 대로 근육통이 몸을 엄습했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방바닥에 놓여 충전되고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오전 5시 57분. 다행이다. 별로 늦지 않았다. 안심하고 천천히 기지개를 켰다. 고통스러우면서도 시원하다.
평소보다 1시간가량 늦게 일어났지만, 상관없다. 평소에는 아침에 여유가 많은 대신 행동을 여유 있게 했다. 지금은 시간 여유가 없으니 좀더 빠르게 움직이면 된다. 나도 가끔 컨디션이 안 좋을 때가 있고, 1년에 몇 번은 늦잠을 자곤 한다. 늦잠을 자봤자 평소보다 1시간 늦게 일어나는 정도의 수준이다.
“운하야, 지금 몇 시야?”
“6시.”
“좀 늦었네.”
“괜찮아. 오늘은 누나는 쉬는 날이니까, 더 푹 자. 아침 준비는 해놓고 갈게.”
“응. 고마워.”
누나가 피곤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 하긴, 그게 아니라도 원래 아침의 누나는 이런 식이지.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혼자 식사했다. 토요일은 보통 혼자 아침을 먹는다. 일주일 동안 잠을 별로 못 잔 누나가 잠을 보충하느라 늦게까지 자기 때문이다. 일요일은 나도 늦게 먹어도 되니까 같이 먹을 수 있지만, 토요일은 내가 학교에 등교를 해야 해서 어쩔 수 없다. 식사를 마치고는 깨끗이 씻었다. 어제 땀을 그렇게 흘려서 그런지 몸이 끈적끈적하다.
다 씻고 나서는 교복을 입었다. 학교에 갈 준비가 끝났다. 시간을 보니, 6시 50분이다. 평소에 얼마나 여유를 부리며 움직였는지 깨달았다. 50분이면 모든 준비가 끝나는구나. 이제부터 좀 더 늦게 일어나볼까.
가방을 메고, 신발을 신으러 현관으로 향했다. 신발을 신고 있는데, 누나가 방에서 나왔다.
“누나, 안 졸려?”
“졸려.”
“얼른 들어가서 자.”
“너 가면 다시 잘 거야.”
누나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누나, 어디 아파?”
“지금 몸이 아프고 뻣뻣해. 특히 골반 있는 데가.”
“그럼 오늘 밖에 돌아다닐 수 있겠어?”
“괜찮아. 그 정도는.”
말은 괜찮다고 했지만, 그다지 괜찮을 것 같지 않다. 안 나가는 편이 누나에게 편하겠지만, 그럴 생각은 없어 보이니 최대한 걷지 않는 방향으로 코스를 정해야겠다.
“학교 가 있는 동안 침대시트랑 이불 같은 거 다 빨아 놓을게. 잘 다녀와.”
“응. 다녀올게. 아, 그리고 식사 준비 해놨으니까, 데우기만 하면 돼.”
“알았어.”
누나에게 가볍게 키스해주고 밖으로 나왔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방향은 학교가 아니다. 지은이네 아파트 쪽이다. 이제부터 지은이와 함께 등교하기로 결정했으니까. 6시 55분. 지은이가 집에서 학교로 출발하는 시간이 15분이라고 했으니, 지은이네 집 앞에 도착해서 5분 정도 기다리면 될 것이다.
지금 나는 지은이와 만나는 것이 무섭다. 어떤 얼굴을 하고 만나야 할지 모르겠기 때문이다. 어떤 표정을 지을지 정했더라도 그 표정 그대로 지은이를 만날 수 있을 자신이 없다. 나는 지은이가 좋다. 하지만 누나도 사랑한다. 게다가 어제는 되돌릴 수 없는 일까지 해버리고 말았다.
지은이와 헤어지고 싶지 않다. 이기적인 생각이란 것을 알고 있다. 나도 지금 이런 나를 경멸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자기 자신조차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다니, 나로선 죄악을 저지르는 것과 같다.
하지만.
괜찮지 않을까? 아직까지 지은이에게도 누나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나의 더러운 마음은 지금 나밖에 모른다. 그리고 지금의 관계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자신이 있다.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 지은이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다. 누나를 눈물짓게 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이대로 있는 것이야 말로 모두가 행복해지지 않을까. 나만 나쁜 인간인 채로, 몹쓸 인간인 채로 있으면 되지 않을까.
나의 선택은 정당하다. 그렇게 믿기로 했다.
“안녕, 운하야.”
“안녕, 지은아.”
지은이가 아파트 복도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지은이를 보는 순간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처럼 미소를 지었다. 지은이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까 고민하던 것이 바보 같이 느껴질 만큼 자연스러웠다. 내 얼굴 근육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남을 속일 수 있구나.
“어제는 전화 안 했더라.”
지은이가 섭섭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깜빡 잊고 있었다.
“미안해. 핸드폰이 없다가 생기니까 핸드폰 자체를 잊어버리고 있었어. 오늘은 충전도 못했어. 오늘은 꼭 전화할게.”
“응. 알았어.”
잊어버리고 있던 이유는 다르지만, 확실히 핸드폰이 없다가 생기니까 익숙지 않은 것만은 사실이다. 아직은 핸드폰이 있다는 사실을 계속 잊어버린다.
지은이와 즐겁게 이야기하면서 걸었다. 지은이와 이야기를 하면, 머릿속의 고민이 어느샌가 사라지고, 지금의 즐거움에만 집중하게 된다. 만약에 여기서 모든 사실을 이야기하면 어떻게 될까.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뭉개지는 듯한 아픔이 느껴진다. 말을 한번 잘못하는 것만으로도 부서질 수 있는 그런 상황에 있는 것이다.
“내일이면 데이트네.”
“시간이 별로 안 가는 것 같아.”
내 말에 지은이가 말했다. 그 말에 동의한다. 무척 많은 일을 겪은 것 같은데, 날짜를 세어보면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다. 갑자기 시간의 밀도가 높아지기라도 한 것 같다. 몇 달은 흐른 것 같은 기분이다.
지은이와 즐겁게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학교에 도착했다. 교실에 도착해서, 또 다시 수업이 시작할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즐겁다. 성진이 녀석은 커플 티를 너무 낸다면서 딴죽을 걸기도 했다.
오늘은 토요일. 수업도 4교시까지 밖에 하지 않는다. 게다가 다음날이 휴일이기 때문에 학생도 선생도 모두 맥이 빠진 느낌이라 시간이 금방 간다. 오늘 하루도 수업이 끝났다. 토요일 마지막 수업은 우리 반 담임선생님의 수업이다. 때문에 수업이 끝나고 바로 종례도 했다. 이제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는 녀석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집으로 간다. 때문에 다른 때보다 아이들이 훨씬 소란스러웠다. 아마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면 이런 풍경이지 않을까 싶다.
가방에 짐을 모두 넣고는 어깨에 멨다.
“잘 가, 운하야.”
“응. 너도 잘 가.”
은미의 인사에 대답했다. 은미가 나를 좋아한다, 라고 지은이가 했던 말 때문에 조금 신경이 쓰인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잘 모르겠다. 나는 남의 마음을 읽는 재주가 없으니까. 성진이 녀석이라면 알지도 모르겠지만, 굳이 물어보고 싶지는 않다. 조금 궁금하긴 하지만.
지은이가 아직 가방을 챙기고 있다. 그쪽으로 다가갔다. 이제 지은이가 가방을 모두 챙긴 것을 확인했다.
“갈까?”
“응.”
다른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며 교실을 나왔다.
“오늘 누나랑 데이트 한다고 했지.”
“응.”
“너희 누나 한번 만나보고 싶다.”
나는 별로 만나게 하고 싶지 않다. 만약 둘이 만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근데, 뭔가 어색하다. 언니라고 해야 할 텐데, 만난 적이 없으니까 언니라고 하기도 뭔가 어색해.”
“나중에 만날 기회가 생기겠지.”
“그런데, 너 누나한테 여자 친구 얘기 했어?”
“음, 안 했어. 부끄러워서. 너는 했어?”
“나도 부끄러워서 아직 안 했어.”
“동생은 알고 있던 거 같은데.”
“비밀로 하라고 했어.”
한 번. 지은이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다. 그런데 그날 후로는 뭔가 흐지부지 된 느낌이다. 누나도 더 이상 그 얘기를 하지 않고, 나도 꺼내지 않았다. 솔직한 기분으로는 누나가 잊어버리길 바란다. 하지만, 아마 잊어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도 데려다 주려고?”
“당연히 데려다 줘야지.”
“고마워.”
지은이는 내가 바로 집으로 갈 거라고 생각했나보다.
“내가 집에 바로 갈 거라고 생각했어?”
“음……. 응.”
“왜?”
“그냥, 어쩐지.”
지은이가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니까 더 궁금해진다. 본심을 알고 싶다.
“어쩐지 뭐?”
“그냥. 어쩐지, 너는 너무 누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 속으로는 무언가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겉으로 티내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했다. 지은이는 모두 느끼고 있었던 걸까. 일부러 모르는 척을 했던 걸까. 겨우 진정하고 지은이에게 묻는다.
“어떤 면에서?”
“그냥, 같이 얘기하다 보면 누나 얘기 자주 하고, 그런 거 보면 그런 느낌이 들어.”
이토록 내 마음이 간파당하고 있었구나. 조금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지은이가 모든 것을 눈치챌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사실을 들키고 나면, 지은이는 분명 나를 싫어하겠지.
“알았어. 그럼 이제 누나 얘기 안 할게.”
“아니야. 괜찮아. 그냥 조금 질투 나서 그랬어.”
여자는 무척 민감하구나. 나로서는 상상하지 못할 고민을 끌어안고 있다. 아마 지은이도 이 얘기를 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제부터 더 주의해서 말과 행동을 해야겠다. 자칫 잘못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에 지은이를 상처 입힐지도 모른다. 누나를 상처 입힐지도 모른다.
지은이네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갔다. 7층에 올라가 있는 엘리베이터. 지은이가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내려오고 있다.
“지은이 내일 봐.”
“응.”
“내일 기대 된다.”
“나도.”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지은이가 엘리베이터에 타기 위해 발걸음을 옮긴다.
“안녕. 누나랑 오늘 데이트 잘 해.”
“응. 안녕. 아, 잠깐 지은아.”
엘리베이터에 타려는 지은이를 잠시 붙잡았다. 내 행동이 의아스러운 듯이 쳐다보는 지은이.
“지은아, 잠시 눈 감아 봐.”
“응, 왜?”
지은이는 의아해하면서도 일단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지은이에게 다가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지은이가 눈을 번쩍 떴다. 놀란 듯한 표정이다. 얼굴도 붉어졌다. 그 표정을 보니 미소가 지어진다.
“그런 표정이 색기가 있다는 거야.”
“그런가?”
“내일 봐.”
“이따가 밤에 전화할게.”
또 들었다 색기가 있다는 소리. 조금 미묘한 기분이지만, 나쁘지는 않다.
이제는 집으로 갈 차례다.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익숙하지 않아서 거슬리긴 하지만, 매번 가방에서 꺼내는 것도 귀찮아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있다. 누나에게 전화를 할 생각이다. 핸드폰을 샀을 때 누나가 단축번호를 저장해주었다. 1번을 누르고 있으면 된다고 했지. 1번 버튼을 꾹 누르고 있으니, 누나에게 전화가 연결 된다.
“여보세요.”
“응. 학교 끝났어?”
“응, 지금 집으로 가고 있어. 10분 정도 후면 도착할 거야.”
“알았어. 얼른 와.”
“응.”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원래 주머니에 뭔가를 넣어 가지고 다니는 일이 별로 없었다 보니, 조금 어색한 느낌이다. 그런 점에서는 여름보다 겨울이 좋다. 겨울에는 걸치는 옷이 많은 만큼 주머니도 많아서 이것저것 넣고 다니기 편하다.
조금 걸음을 빨리해서 걸었다. 집에 얼른 도착하기 위해서다. 천천히 걸었으면 15분 정도 걸릴 거리를 10분 만에 걸었다. 도어락을 풀어 대문을 열고, 마당을 지나 현관문 앞에 도착했다. 마찬가지로 도어락을 풀어 현관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왔어?”
집에 들어온 나를 누나가 반갑게 맞아준다. 누나는 벌써 외출복을 결정해놓았는지, 한껏 꾸며 입었다. 얼굴이 평소보다 하얀 것이 화장을 했나보다. 누나는 원래 화장을 지우는 게 번거롭다는 이유 때문에 화장을 잘 안 하는 편이다. 그런데도 오늘은 화장을 한 것을 보니, 무척 기대하고 있었나 보다.
“누나, 오늘 이쁘다.”
“그래?”
누나가 기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내 방문을 열고 방에 발을 들이기도 전에 가방을 침대 위로 던졌다. 교복도 서둘러 풀었다. 얼른 옷을 갈아입고 출발해야지.
“얼른 옷 갈아입고 나올게 기다려.”
“점심은 안 먹어도 돼?”
“응, 학교 매점에서 대충 사먹었어.”
그냥 안 먹고 간다고 말하면 누나가 막을 것 같아서 거짓말을 했다. 어차피 활동량이 적다 보니 음식을 적게 먹어도 상관이 없다. 교복을 벗고 무엇을 입을까 고민했다. 평소에는 옷차림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기 때문에 아무거나 집히는 대로 입었지만, 오늘은 명색이 데이트다. 누나를 위해서라도 조금은 신경을 써야한다. 내일도 옷을 어느 정도 차려입어야 할 텐데 일단 나갔다 와서 고민해둬야겠다.
그나마 내가 가지고 있는 옷 중에 가장 세련되어 보이는 옷을 선택했다. 하얀색에 앞에 추상화스러운 그림이 그려진 반팔 티셔츠다. 그러고 보니 이 옷 누나가 사준 옷이다. 나에게 어울릴 것이라면서 사왔다. 티셔츠는 이걸로 입고, 바지는 청바지로 하면, 나쁘지 않겠지. 어떤 옷에도 어울린다는 게 청바지의 장점이다.
옷을 입고 방에서 나왔다.
“누나, 이제 준비 다 됐어.”
“빠르다.”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아?”
“그건 그래.”
누나가 웃었다. 이제 밖으로 나가면 된다.
“누나, 근데 몸 아프지 않아? 괜찮겠어?”
“괜찮아 이제. 시간이 지나니까 괜찮아졌어.”
별로 괜찮지 않을 것이다. 누나도 나못지않게 몸을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다. 아침에 말했던 대로 골반 쪽이 많이 아플 것이다. 하지만, 역시 집에서 쉬고 싶어보이지는 않는다. 최대한 걷지 않는 편이 낫겠지.
“일단, 가서 영화 보면 되겠지? 누나가 보고 싶은 영화 시간표 찾아 봤어?”
“응. 1시 40분에 할 거야. 천천히 나가면 돼.”
영화에 대한 것은 누나에게 맡겼다. 영화 제목이 뭐였는지는 까먹었지만, 분명 연애에 관한 이야기였다. 지금 시간이 12시 50분이니까, 영화관에 도착해서도 20분에서 30분은 기다릴 것 같다. 충분한 여유다. 영화가 시작하기까지 20분에서 30분 정도 시간 여유가 있으면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나는 그런 시간이 좋다.
“이제 출발할까?”
“응.”
누나가 그저께 산 힐을 신었다. 실용적인 부분에서는 발도 아프고, 건강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힐을 추천하고 싶지 않지만, 누나가 원하니까 어쩔 수 없다. 다시 방에서 안 쓰는 가방을 가져와서 누나의 운동화를 넣었다. 누나는 필요 없다고 했지만, 혹시 모른다.
문단속을 철저히 하고 집에서 나왔다. 누나가 오른쪽에서 팔짱을 꼈다. 왼쪽 어깨를 생각해서 이번엔 왼쪽에 가방을 걸쳤기 때문이다. 근육통 때문에 오른쪽 팔을 잡혀도 조금 괴롭긴 했지만, 그래도 왼쪽보다는 낫다.
시내로 나가기 위해선 버스를 타야 한다. 버스정류장을 향해서 걸었다. 이곳은 주택가라서 도로가 있는 곳으로 나가야 버스를 탈 수 있다. 그래봤자 5분 정도만 걸으면 도로가 나온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해서 앉았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몇 명 있었지만, 벤치에 앉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벤치에 앉았다.
“근데, 오늘 보고 싶은 영화가 무슨 내용이야?”
“살짝 SF도 섞인 건데, 지금으로 200년이 흐른 뒤의 미래야. 주인공이 200년 전에 불치병에 걸려서 냉동인간이 되었는데, 200년이 지나 치료법이 발견돼서 깨어난 거야.”
내 흥미를 끄는 내용이다. 그런데,
“전에 보고 싶다던 영화랑 다른 내용 같은데?”
“응. 사실은 이 영화랑 다른 영화랑 뭘로 할지 고민했는데, 다른 건 그냥 연애영화라서 이걸로 하기로 했어. 너도 이게 더 괜찮을 것 같아서.”
“고마워.”
영화를 고르면서 나도 고려해준 것에 고마움을 느꼈다. 영화의 줄거리를 대충 들었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에 대해서 어딘가에서 들어본 것도 같다. 학교에서 애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던가, 컴퓨터를 하다가 인터넷에서 스쳐지나가듯 봤을지도 모른다.
잠시 후 버스가 도착했다. 시내를 거치는 버스가 무척 많기 때문에 굳이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은 편하다. 교통카드를 찍었다. 요즘은 교통카드가 있어서 충전을 해서 쓰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나 같은 경우는 교통수단을 별로 이용할 일이 없어서 별로 필요가 없지만, 언젠가 누나가 유용하다면서 하나 만들어줬다. 내년에 대학에 진학하면 자주 쓰게 되겠지.
10분 정도 버스를 타고 가다 보니, 시내에 도착했다. 여름인데다가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꽤 많았다. 시내에 나오는 것도 오랜만이다.
“영화관이 어디더라?”
“자, 따라와.”
시내의 지리를 잘 몰라서 인터넷으로 지도를 검색해서 외워봤는데, 역시 지도는 2차원, 지구는 3차원이다. 감이 잡히질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누나를 따라 걸었다. 그래도 지도를 본 게 완전히 쓸데없는 일은 아닌지 따라가다 보니 조금씩 길을 알겠다. 영화관에서 나오면, 저기 보이는 카페에 들어가는 것도 괜찮겠다.
백화점에 도착했다. 이 시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백화점. 이곳 맨 위층에 영화관이 있다. 아니, 맨 위층에는 스카이라운지가 있으니, 맨 위층의 아래층이다.
백화점의 1층은 화장품이나 악세서리 등 여성을 위한 상품이 많다. 아무래도 백화점에 들어오자마자 눈이 가는 곳이니 백화점에 가장 많이 오는 여성고객을 노린 듯하다. 누나도 화장품이나 악세서리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이따가 영화보고 내려오면 마음에 드는 거 사.”
“아니야.”
아니라고 말하지만, 뭔가 사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누나를 유혹하는 상품들을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다. 사람이 꽤 많아서 엘리베이터가 내려오는 데만도 시간이 꽤 걸렸다.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엘리베이터에 타서 층 버튼 위를 보니, 백화점 층마다 간단히 안내를 적어 놓았다. 8층에 매표소가 있구나. 8층 버튼을 눌렀다. 사람들이 많아 엘리베이터가 거의 꽉 찼다.
“토요일에는 이렇게 사람이 많구나.”
“너는 밖을 좀 돌아다닐 필요가 있어.”
누나가 말했다. 확실히 너무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도 문제가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 누나도 나와 만만치 않게 집에 틀어박혀있다.
8층에서 내렸다. 영화관은 8층에서 9층으로 이루어졌다. 8층에는 매표소와 팝콘을 파는 곳이나, 식당 등이 있다. 9층은 상영관이다. 번호표를 뽑아 줄을 섰다. 이곳은 은행처럼 번호표를 뽑고 대기를 하는구나. 사실 이 영화관에는 처음 온다. 이 백화점이 개장한 것 자체가 얼마 안 됐기 때문이다. 그 전에는 규모가 별로 크지 않은 작은 영화관으로 자주 갔었다.
영화표를 샀다. 시간을 확인해보니, 아직 1시 15분밖에 안 됐다. 영화가 시작하기까지 25분이나 남았다.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대기하는 시간을 꽤나 좋아한다. 그동안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다 보면 시간이 금방 흐른다. 누나도 마찬가지다.
“누나 팝콘 먹을 거야?”
“그러자. 영화관에 왔으니까.”
팝콘 사는 곳에서 줄을 서서 메뉴를 보니, 세트로 싸게 파는 메뉴들도 보인다. 커플 세트라는 녀석도 있다. 커플 세트는 A와 B로 나뉘어서 A는 음료수가 따로 나오고, B는 음료수가 커다란 컵에 빨대가 두 개 나온다.
“커플 세트A로 주세요. 카라멜도 넣어서요.”
영화관은 커플이 자주 오다 보니 커플을 위한 메뉴나 이벤트가 많다. 영화관만이 아니라, 시내에 있는 곳곳마다 그렇다. 돈을 지불하고 음료와 팝콘을 받았다. 컵이 하나면 불편할 것 같아서 일부러 따로 있는 것으로 했다.
누나가 영화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 손이 비도록 누나에게 콜라를 하나 주고, 나는 팝콘과 다른 콜라를 잡았다. 어깨에 걸친 가방이 갑자기 흘러내린다. 불편하지만, 양손에 잡고 있는 게 있어서 그냥 놔두려고 했는데, 누나가 가방을 다시 어깨에 걸쳐주었다.
“고마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상영관으로 올라갔다. 아직 시간이 20분 정도 남았지만, 미리 안으로 들어가서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직원에게 막혔다. 영화가 시작하기 10분 전에 입장이 가능하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상영관 입구에서 대기했다. 다행히 테이블과 의자들이 충분히 놓여 있어서 앉아서 기다릴 수 있었다.
“영화 재미있겠다.”
“응.”
누나와 나는 자리에 앉아서 영화 팸플릿을 읽고 있다. 지금 우리가 볼 영화의 팸플릿도 보고, 다른 영화도 살펴보고 있다. 상영예정작도 몇몇 살펴보았다.
“이 영화 재미있겠다. 개봉하면 또 보러 오자.”
“응.”
보고 싶은 영화의 팸플릿은 일단 접어서 가방 안에 넣었다. 나중에 잊어버리지 않도록.
영화 시작 10분 전이 되었다. 영화관 입구에 서있는 직원에게 영화표를 보여주고 안으로 들어갔다. 5번 상영관이라고 했다. 좌석은 H열에 7번과 8번.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 관객이 많지 않으면 아무데나 앉을 수 있을 것이다.
오랜만에 오는 영화관이라 설렌다. 오랜만의 누나와의 데이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단은 자리에 앉았다. 상영관의 크기가 꽤 크다. 그동안 작은 규모의 영화관에 익숙해져서 거대하게까지 보인다. 일단 천장이 이렇게 높은 영화관은 처음이다. 확실히 나는 좀 더 밖을 돌아다녀볼 필요가 있나 보다.
아직 관객들이 들어오는 시간이라, 조용한 클래식 음악이 틀어져있다. 스크린은 아직 까맣다.
“누나랑 영화관에 정말 오랜만에 왔다.”
“응.”
“이제는 자주 오자.”
“응.”
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클래식 음악이 꺼지고, 영화관의 불이 꺼졌다. 스크린이 밝게 빛난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몇 가지 광고가 나왔다. 상품의 광고도 나오고, 곧 상영할 영화의 예고편도 보여주었다.
영화의 내용은 대충 이렇다. 불치병에 걸려 냉동인간이 되었다가, 200년 후 치료법이 발견되어 겨우 깨어난 주인공. 200년이 지나 주위에 아는 사람들은 모두 죽고, 남은 것은 혼자밖에 없다. 고독감을 느끼면서도 주인공은 200년 뒤의 세계에 점점 익숙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은 산책 겸 길을 걷다가, 자기가 지나가고 있던 곳 옆에 있는 고층건물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나는 것을 목격한다. 그러던 중 폭발한 건물에서 심하게 부상을 입은 생존자를 발견, 그를 치료할 목적으로 집으로 데리고 간다. 200년 후의 세계는 집에도 의료기구가 구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상자는 한동안 주인공의 집에서 함께 생활한다. 그러다, 어느 날 왠 무장세력이 주인공의 집을 습격한다. 주인공이 구해준 부상자를 노린 것이다. 알고 보니, 그 부상자는 어느 회사에서 비밀리에 실험하던 실험체. 주인공과 실험체는 함께 도망을 치고, 어느 회사의 야망을 알게 된다.
뭐, 그런 식으로 액션이 펼쳐지고, 로맨스도 싹 트는 영화다. 웃기는 장면은 웃기고, 진지한 장면은 진지하고, 특수효과는 멋있다. 괜찮은 영화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작품성 같은 것보다 먼저 재미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재미가 있어야 일단 볼 것 아닌가.
영화가 끝났다. 2시간의 상영시간이 짧게 느껴지는 영화였다. 보기를 잘했다.
“흑, 흑흑…….”
감수성이 풍부한 누나가 눈물을 쏟고 있다. 마지막에 주인공이 장렬히 희생하며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나도 그 장면에서는 조금 울컥하는 기분을 느꼈다.
“누나, 그만 울어. 화장 지워지겠다.”
“흑흑, 괜찮아, 흑, 워터프루프야.”
워터프루프라는 건, 물에 닿아도 지워지지 않는 화장품의 기능이다. 여름 같은 경우는 땀이 많이 나니까, 이런 기능이 필수다. 특히 누나처럼 잘 우는 사람에게도 많이 필요하겠다.
누나를 진정시키며 상영관에서 나왔다.
“나, 잠시 화장실 좀.”
누나가 화장을 고치려는 듯 화장실에 갔다. 나도 화장실로 들어갔다. 2시간 동안 음료수를 마시며 영화를 봤더니, 소변이 마렵다.
화장실에서 나와서 누나가 나올 때가지 기다렸다. 용무를 보고 손을 씻으면 끝나는 남자와는 달리, 여자는 여러 가지로 시간이 오래 걸리는 모양이다. 잠시 후 누나가 나온다. 이제 울음이 진정이 된 건지, 평상시와 똑같은 모습이다.
“이제 안 울어?”
“안 울어!”
내가 놀리듯이 말하자 누나가 조금 발끈했다. 나는 이렇게 눈물을 잘 흘리는 누나도 좋다. 물론 슬픈 일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싫다.
“이제 어디로 가고 싶어?”
“글쎄, 어디든지 좋아.”
“그럼, 백화점에 있는 카페로 가자.”
“응.”
누나와 함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너무 많아서 엘리베이터보다 나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카페는 7층에 있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 층마다 안내를 써놓은 것을 봐두었다. 아까 봐둔 카페나, 인터넷으로 미리 찾아본 카페도 있었지만, 그곳에 가려면 누나가 많이 걸어야 하기 때문에 일부러 백화점 안에 있는 곳으로 골랐다.
카페에 들어갔다. 백화점 안이라 사람이 많아 조금 부산스럽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의외로 아주 조용하다. 구석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안으로 들어오니 더더욱 바깥의 소음이 들리지 않는다. 분위기 있게 틀어놓은 음악소리만 들린다.
직원이 메뉴판을 가지고 온다.
“누나는 뭐 마실 거야?”
“난, 녹차라떼, 아이스로.”
“그럼 나도.”
메뉴를 고르는데 고민하고 싶지 않아서 누나와 통일했다. 이곳에 온 목적이 맛있는 커피를 먹기 위한 것은 아니니까. 직원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메뉴판을 들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생각보다 괜찮다.”
“응. 조용하다.”
“원래는 미리 봐둔 곳이 있었는데, 여기도 나쁘지 않은 것 같으니까 다행이다.”
“미리 봐둔 곳이 있으면 뭐하러 여기로 왔어?”
“누나 지금 발 꽤 아프지? 그리고 골반도.”
누나가 대답하지 못했다. 여자의 힐은 남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다리에 부담을 많이 준다. 딱딱한 구두 때문에 발의 모양도 망가지고, 무릎이나 허리에도 충격을 준다. 지금까지 별로 걷지는 않았지만, 구두를 신고 서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힐이 아니라도, 지금 누나의 몸 상태는 평소보다 안 좋으니까.
“다음엔 구두를 신어도, 좀 더 편한 걸로 신어.”
“응, 알았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지만, 별로 기분이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그래서 말을 덧붙이기로 했다.
“그래도, 구두는 정말 잘 어울려.”
“정말?”
“응.”
누나가 굳이 고통을 참으며 힐을 신은 이유는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다. 이쁘다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역시 좀 더 몸을 생각해줬으면 한다.
“누나 요즘 학교에서 어떻게 지내?”
“뭐, 그냥. 수업 듣고 도서관에 있다가 집에 오고. 수업 듣고 도서관에 있다가 집에 오고. 그리고 수업 듣고?”
“친구랑 같이 노는 건?”
“아주 가끔.”
“그래도 괜찮아? 좀 더 친구랑 어울리는 게 낫지 않을까?”
내가 그런 말을 하니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대학도 별로 고등학교 때랑 다를 게 없어. 웬만큼 오지랖 넓은 사람 아니면 친한 사람이랑만 어울리게 돼. 과 안에도 사람이 많으니까. 뭐, 학회생활을 하면 또 모르겠는데, 나는 그런 거랑은 거리가 멀어서.”
“그렇구나.”
“그러는 너는 학교 생활 어때?”
“나도 뭐 똑같지. 학교에 가서 수업 듣고, 수업 끝나면 집에 오고.”
“거짓말 같은데.”
거짓말이다. 여자 친구가 생겨서, 학교에서 여자 친구와 함께 얘기하고, 수업이 끝나면 여자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온다.
“둘 다 학교 생활에 뭔가가 없어.”
“뭐, 어때.”
누나의 말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학교 생활에 특별한 일이 없어도 상관이 없다.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만 곁에 있으면 된다.
카페에서 계속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깃거리는 평소에 집에서 대화하는 것과 똑같았다. 학교 이야기. 친구들 이야기. 다음에 다시 데이트를 하자는 이야기. 평소와 다른 것은 없다. 그저 장소가 다를 뿐이다. 장소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그러나, 장소가 달라지면, 더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어느덧 시간이 5시가 넘었다. 영화가 끝난 게 4시였으니까, 한 시간 조금 넘게 여기 있었다는 소리다. 시간이 흐르는 것을 별로 느끼지 못했다. 그저 어느 정도 흘렀겠거니, 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1시간이나 넘었구나.
“누나, 이제 저녁 먹으러 갈까?”
“그럴까.”
“뭐 먹고 싶어?”
“나, 피자 먹고 싶어.”
“그럼 피자집으로 가자.”
백화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피자집이 있다. 괜히 먼 곳에 있으면 누나가 걷는데 힘들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악세서리와 화장품이 가득한 1층에 도착했다.
“누나, 사고 싶은 거 사.”
“별로, 괜찮은데.”
“거짓말, 사고 싶은 거 아까 봐뒀잖아.”
“아니야. 그냥 지나가면서 언뜻 본 거야.”
그게 그거지.
“돈 아껴야지.”
“원래 평소에 돈을 안 쓰니까 가끔은 써도 괜찮아.”
우리는 생활비의 모두를 삼촌에게 받는다. 과하다고 느낄 만큼 많이 주신다. 가끔은 부담스러워 액수를 줄여달라고도 해봤지만, 삼촌은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시며 매달 변함없는 액수를 빠짐없이 보내주신다. 삼촌이 안 계셨다면, 지금의 우리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언젠가 꼭 삼촌에게 은혜를 갚을 것이다.
누나가 나에게 굴복하고, 결국 사고 싶은 것을 사기로 했다. 안 사겠다더니, 이미 사고 싶은 것을 골라놨다는 듯이 망설임 없이 길을 걷는다. 누나가 가서 고른 것은, 목걸이다. 은색의 로켓목걸이. 체인으로 된 얇은 줄에 하트 모양의 은색 로켓이 달려 있다.
“운하야, 나 이거 사고 싶어.”
“목걸이네.”
“여기다 이렇게 우리 사진을 넣는 거야.”
점원이 이 목걸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준다. 재질은 은이고, 목걸이 줄은 무슨 공법으로 만들어서 잘 안 끊어진다고 한다.
“이거 계산해주세요.”
결국 목걸이를 샀다.
“이거만 사면 돼?”
“응. 그리고, 우리 여기 넣을 사진 찍으러 가자.”
누나가 나를 데리고 활기차게 걸어간다. 발이 아플 텐데도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는다. 누나를 따라 걷다 보니 사진관에 도착했다. 집 근처에 사진관이 있기 때문에 이곳의 사진관에는 처음이다. 집 근처의 사진관과는 달리 크고, 깔끔하게 꾸며져 있다. 들어가니, 사진관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준다.
“어서오세요.”
“저, 여기에 넣을 사진 좀 찍고 싶어서 그런데요.”
누나가 목걸이를 보여주며 설명했다.
“아, 그럼 여기 크기에 맞춰서 사진 뽑아 드리면 되겠죠.”
“네.”
사진을 찍게 되었다.
“자, 웃으세요.”
“네.”
누나가 나에게 찰싹 달라붙어 자연스럽게 웃는다. 나도 자연스럽게 웃으려고 노력했다. 사진기 앞에만 서면 내가 생각해도 어색한 미소밖에 나오지 않는다.
“남자 분 웃으세요.”
사진을 찍어주시는 아저씨도 내 표정을 지적했다.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려고 노력하지만, 역시 쉽지 않다. 최대한 내가 미소를 짓는 때를 상상해보기로 했다. 누나에게 장난을 칠 때. 누나와 함께 있는 때.
“사진은 언제 찾으러 오시겠어요?”
“혹시 오늘 안에 찾을 수 있나요?”
“지금 다른 사진도 밀려 있어서 1시간 정도 기다리셔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네. 그럼 1시간 뒤에 사진 찾으러 올게요.”
겨우 사진을 다 찍었다.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려고 노력했는데, 결과는 사진을 봐야 알겠지. 사진관에서 나왔다. 이제는 누나가 바라던 피자집에 갈 차례.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다.
누나의 표정이 밝다. 확실히 함께 밖으로 나온 것은 잘 한 일이다. 이제 자주 밖으로 나와야지.
피자집 앞에 도착했다. 텔레비전에도 선전이 자주 나오는 유명한 이름의 피자집이다. 유명한 만큼 손님도 많다. 피자집 안도 매우 복잡해 보였다. 함께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직원이 우리를 웃으며 맞아준다.
“두 분이세요?”
“네.”
직원(아마도 아르바이트생이겠지)이 우리를 자리로 안내했다. 직원이 안내해준 자리에 앉았다.
“누나, 뭐 먹고 싶어?”
“나, 이거랑 이거.”
누나가 이름도 어려운 메뉴를 가리킨다. 고르는데 시간이 별로 안 걸린 것을 보니, 전부터 먹고 싶었던 것인가 보다. 누나가 원하는 메뉴를 시켰다. 직원이 메뉴를 가지고 돌아간다.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미리 말하지. 그럼 진작에 왔을 텐데.”
“그냥 생각날 때마다 찾아본 거야. 여기 오면 이거 먹어야지. 저기 가면 이거 먹어야지.”
“그럼 다음 주에 또 가자. 다른 데에 또 먹고 싶은 거 있지. 뭐든지 말해.”
“그래! 다음 주 언제?”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가자.”
누나가 기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말했다. 그동안 왜 내가 누나와 같이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까. 조금 후회가 된다. 이제부터라도 자주 나가야지.
피자가 올 때까지 이야기를 나눴다.
“누나, 기분 엄청 좋아 보여.”
“응. 지금 너무 좋아.”
“다음 주에는 어디로 가고 싶어?”
“다음 주에 정해서 말해줄게.”
누나와의 이야기는 즐겁다. 누나와 함께 계속하고 싶다. 그런데, 계속 걸리는 일이 있다. 도무지 누나에게만 집중할 수 없다. 꼭 한 가지만 선택해야 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고 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사진관에서 사진을 찾아 왔다. 집에 도착하니 시간은 8시. 벌써 해가 져서 어둡다. 오늘 하루가 무척 즐거웠다.
“누나, 재밌었어?”
“응.”
집 안으로 들어와 신발을 벗었다.
“아으…….”
누나가 표정을 찡그리며 신음했다.
“그러니까 내가 구두 신지 말라고 했지. 몸에 안 좋다니까.”
“아니야. 안 아파. 지금 건 그냥 낸 소리야.”
내 말에 누나가 아프지 않은 척 말한다. 그런 식으로 말해봤자 누가 속겠냐마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내가 말려도 누나는 계속 힐이 달린 구두를 신을 것이다. 차라리 내가 밖으로 나갈 때 최대한 걷지 않도록 배려하는 편이 낫다.
“아, 이제 씻어야겠다.”
“나도.”
누나도 나도 씻어야할 필요을 느꼈다. 더운 날씨에 밖을 돌아다녀서 땀도 꽤 흘렸고, 먼지도 뒤집어썼다. 나는 방 옆에 있는 욕실로, 누난 자기 방 안에 있는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벗고 욕조에 물을 받았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열었다. 지은이의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물론 지은이의 핸드폰 번호는 이미 저장되어 있지만, 일부러 외울 겸해서 번호로 누르는 것이다.
“여보세요. 오늘은 잊지 않고 전화 했어.”
“잘했어.”
“뭐야, 어린애한테 하는 것처럼.”
언제나처럼 나를 향해 호의를 담은 지은이의 목소리.
“내일 데이트네.”
“응. 내일 내가 집 앞으로 찾아갈게.”
“안 그래도 되는데.”
“그러고 싶어.”
지은이와 내일 데이트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지났다. 1시간도 넘게 통화했다.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통화를 더 많이 한다. 이번 달에 통화비는 장난이 아닐 것 같다. 다음 달에는 지은이와의 커플요금을 고려해 봐야 하겠다.
“이제 끊을게. 내일 봐.”
“응. 내일 봐.”
전화를 끊고 이미 미지근해진 욕조 물에서 빠져나왔다. 오늘도 몸에서 많은 수분이 빠져나갔는지 어지럽다.
목욕을 마치고, 몸을 닦고 밖으로 나와서 옷을 입었다. 언제나처럼 런닝셔츠에 사각팬티다. 누나가 거실 소파에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보이지 않는다. 아직 샤워를 하나 싶어서 누나 방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문을 열어 보니, 누나가 나에게 등을 보인 채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이 보인다.
“누나, 뭐해? 벌써 자?”
대답이 없었다. 벌써 자고 있나 싶어서 누나에게 다가갔다. 침대 위로 조심히 올라가 누나 옆에 누웠다. 혹시나 잠을 자나 싶어서 슬쩍 몸을 일으켜 누나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누나가 눈을 뜨고 있다.
“누나, 안 자는데 왜 대답을 안 했어?”
누나가 여전히 대답이 없다.
“누나?”
“전화.”
“응?”
“조금 전에 전화 한 거 여자 친구한테지?”
대답하지 못했다.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욕실이 가까이 붙어 있어서 다 들리더라.”
사고가 멈췄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내가 조금 들떠있었나 봐.”
“누나.”
“아무리 좋아해도 나는 네 누나일 뿐인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겠다. 제발, 뭔가 누나에게 할 만한 그럴 듯한 말이 생각나길 원했다.
“그래, 우리는 남매잖아.”
누나가 쓸쓸히 웃었다. 등을 보고 있어서 보이지 않지만,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였다.
“나, 네가 여자 친구가 있어도 상관없어. 그냥 지금처럼 지낼 수 있기만 하면 돼.”
“누나…….”
“괜찮아, 난 지금도 충분히 좋으니까. 이대로도 좋아.”
누나가 말했다. 어느 때보다도 슬퍼보이는 표정으로.
“오늘은 따로 자자. 침대시트랑 이불 새 걸로 깔아 놨어.”
나는 내쫓기듯이 누나 방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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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주인공은 쓰레기 로드를 밟아 갑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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