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교 다녀왔습니다 "
민기가 학교에서 돌아왔다.
고등학교 1학년인 민기는 평범한 키에 평범하게 생긴 얼굴을 가진 소심하지만 착한 소년이
었다.
샤워를 하고 냉장고의 콜라를 꺼내어 병째로 꿀꺽 꿀꺽 들이키고 나서 집안을 둘러본 민기
는 학교에서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가 한번에 밀려와 나른한 기분을 느꼈다.
머리를 내저으며 정신을 차린 민기는 주섬주섬 짐을 꾸리고 계신 부모님을 바라보았다.
" 엄마, 지금 출발하나요? "
" 그래.. "
엄마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랬다.
벌써 추석이 다가온 것이다.
민기의 친척일가는 일년에 서너번 함께 모이는데 바로 추석과 설, 할아버지와 할머님의 생
신 날이었다.
워낙 친척들이 따로 흩어져 살기에 1년에 서너번 조차 모이기 힘든 것이다.
서울에 살고있는 민기네 가족에게는 익숙지 않은 시골길을 가야한다는 생각에 아빠는 벌써
피곤한 기색이셨고, 음식이다 뭐다 준비하신 엄마는 벌써 시골집에 도착해서 장만할 부침개
며 반찬 준비 생각에 진이 다 빠지신 듯 했다.
그러나 민기는 마냥 기분이 좋았다.
유일하게 민기네와 가까이 살고 있는 친척인 삼촌네 댁사람들과는 항상 시골길을 함께 가기
때문이다.
민기는 사촌동생인 수현이를 만난다는 것에 마냥 즐거웠다.
" 그러고 보니 작년 설엔 못 봤었지.. 무슨 병 때문에 입원했었다던가.. 1년만 이구나.. "
사실 민기와 수현이는 학년이 같았다.
같은 84년 생이었지만 수현이의 생일이 민기 보다 약간 느렸던 탓에 오빠 동생 사이가 되었
던 것이다.
수현이는 같은 나이인 민기에게 오빠 소리를 어색해 하지 않고 잘 따랐기 때문에 민기는 수
현이와 만나는 친척 모임이 항상 즐거웠다.
민기와 수현이는 집이 가까웠기 때문에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주말을 이용해 자주 만나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지난 추석 이후에 수현이네 가족이 그리 멀지는 않지만 서울근교의 신도시로 이사하
면서 그런 만남은 어느새 끊어지고 이제는 이렇듯 친척들의 정기 모임에서나 만날 수 있게
된것이다.
차창 밖으로 익숙한 풍경이 지나치는 듯 하더니 이내 민기네 집 자동차가 작은 삼촌댁 아
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 형님 오랜만입니다. "
" 그래 잘 지냈나 "
민기네 아버지와 작은삼촌이 말씀을 나누시는 동안 민기는 눈을 굴려가며 수현이를 찾았
다. 그때 아파트 계단 입구 쪽에서 청 반바지에 헐렁한 면티를 입은 귀엽게 생긴 여자애가
뛰어오며 소리쳤다.
" 야, 박민기! "
민기는 순간 움찔 하고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이 여자애가 누구인지 파악하려 애썼다.
작은 엄마가 그 여자 애를 나무라는 듯 말씀 하셨다.
" 수현아! 오빠보고 민기가 뭐니! "
" 에이.. 나이도 같은데 뭘.. 그치 민기야? "
소녀는 생글거리며 웃었고 민기는 그 미소가 눈부시게 빛나 보였다.
민기는 그제야 눈앞의 성숙한 소녀가 1년 전 까지만 해도 자기를 오빠 오빠하며 따라다녔
던
사촌동생 수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1년.. 겨우 1년 사이에 그녀는 너무나도 변모해 있었다.
커진 키며 이젠 제법 볼록하게 솟아오른 가슴팍..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와 팡파짐한 엉덩이
가 묘한 대조를 이루며 민기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어.. 수, 수현이.. 니? "
" 그럼 내가 수현이가 아니고 누구란 말야? "
약간 쀼루퉁한 얼굴로 받아치는 그녀의 모습에는 이미 1년 전의 얌전하게 민기를 따랐던 사
촌동생의 모습은 없었다.
민기는 말 잘 듣고 이쁜 사촌동생이 이렇게 약간은 건방지기까지 한 활달한 소녀로 변했다
는 사실에 그리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렇게 귀엽고 매력적인 여자를 곁에다 두고 왜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는지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기까지 했다.
차에 올라타서 뒷좌석에 앉은 민기는 옆에 앉아 차창 밖을 바라보며 바람을 맞고 있는 수현
이에게 말을 건넸다.
1년 전만 하더라도 부담 없이 말을 붙였었지만 여자에 대해서는 숙맥인 민기는 갑자기 이렇
듯 성숙해져버린 사촌동생이 동급생 소녀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약간 흥분되기까지 했다.
" 머리.. 잘랐네. "
" 응.. 귀찮아서 잘라버렸어. 근데 있지 머리 자르고 나니까.. 왠지 모
를 자신감 같은 게 솟는 거 있지. 학교 생활두 재미있어졌구 친구도 많아졌다? "
확실히 그랬다.
수현이는 가끔 민기에게 학교 친구들이 자기를 따돌리는 것 같다며 진지한 표정으로 상의하
곤 했다.
그럴 때마다 민기는 수현이에게 그건 수현이의 성격이 너무 소극적이고 조용해서이고 자신
감을 가지고 생활해 보라고 항상 말했고 수현이는 그런 민기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진지해진 민기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곤 했었다.
문득 민기는 수현이가 머리를 자른 이유가 궁금했다.
" 머리는 근데 왜 자른거야? "
" 어.. 방금 그 말 실례야. 여자가 머리를 자를때는 뭔가
심경에 변화가 있을때라구.. 그 질문은 그 변화의 이유를 묻고 있는거야! 나두 비밀이 있거
든.. "
진지하게 말하는 듯 하면서 입술 한켠에 슬며시 웃음을 띄우는 그녀를 보며 민기는 전에는
전혀 생각치 않았던 사촌동생의 여자로서의 면을 본 듯 했다.
" 내가 사촌동생을 의식하는 건가.. 뭐.. 수현이도 여자니까.. 그런데 어떻게 1년만에 이렇게
변할 수가 있지? "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한 민기를 신기한 듯 바라보던 수현이가 가볍게 민기의 콧등을 퉁겼
다.
" 얏! 방심했지! 하하하.. "
" .. 너..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데.. "
깔깔대며 해맑게 웃는 그녀의 얼굴.
문득 민기는 정말로 수현이가 좋아져 버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차는 달려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수현이는 피곤했는지 민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 이 길이 맞는지 모르겠네.. 참.. 매년 찾아가는 길인데도.. "
아빠는 긴가민가하시는 표정으로 엑셀을 밟으셨고 차는 시골길의 울퉁불퉁한 찻길에 이리저
리 퉁기며 들썩거렸다.
" 아얏.. 앙.. "
수현이가 이리저리 흔들거리는 차 속에서 웬일이냐는 듯이 부스스 깨어났다.
" 아.. 머리야.. "
" 수현아 괜찮아? "
수현이가 흔들리는 차안에서 머리를 부딪혔는지 뒷머리를 감싸쥐고 찡그린 표정을 지었다.
민기는 수현이의 머리숱을 헤치고 부딪힌 자리를 뒤척여 보기 시작했다.
" 야.. 엄살 피지마.. 혹두 없는데 뭘 그래.. "
" 아씽.. 아프단 말야.. "
툴툴거리는 수현이의 푸념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민기는 수현이의 머리 아래로 살짝 드러
난 가슴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봉긋이 솟아오른 가슴이 한 손에 잡힐 듯이 아른거리고 그 아래쪽엔 쭉 뻗은 허벅지가 새하
얀 빛을 내 뿜으며 민기의 눈을 간지럽혔다.
수현이의 머리에서 민기는 기분 좋은 샴푸 향기에 취해 민기는 홀린 듯이 수현이 몸 여기저
기를 뜯어보고 있었다.
" 오빠, 왜 그래? 내 몸이 그렇게 잘빠졌어? 하하.. "
" 뭐, 뭐.. 뭐라구.. 수현아 너 지금
무슨 소릴.. "
민기가 앞좌석의 아버지 눈치를 보는 듯 하더니 말까지 더듬으며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
이밀자 수현이는 못 참겠다는 듯이 허리까지 굽혀대며 깔깔대었다.
" 농담이야 농담.. 하하.. 참 오빠두.. "
" .. 야.. 울 아빠 들으시면 어쩌려구.. 참.. "
수현이는 이내 웃음을 억누르고 민기를 바라보았다.
" 그래두 내 몸 훑어본 건 사실이잖아? 안 그래?"
" 그.. 그건.. 네가 너무 예전이랑 달라
보여서 조금.. "
진지한 수현이의 얼굴에 민기가 말꼬리를 흐리자 수현이는 이때다 싶었는지 눈을 빛내며
물어왔다.
" 조금 어때서? "
" .. 조금.. 이뻐 보여서.. "
민기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수현이에게만 들리도록 말하자 수현이는 예상과 다른
대답에 놀랐는지 아니면 쑥스러웠는지 얼굴을 붉혔다.
민기가 놀란 눈으로 수현이를 바라보자 수현이는 멋쩍은 웃음을 던지며 민기의 등을 팡팡
쳐댔다.
" 하하하.. 아이참 민기 오빠두.. 하하하.. "
" 아야.. 아퍼.. "
아침에 출발한 민기네와 삼촌네 차는 저녁이 다 되어서야 큰삼촌이 계시는 경북 영덕에 도
착했다.
바다 특유의 짠 내가 민기의 코를 상큼하게 자극했다.
" 할아버지 ! 할머니 ! "
" 어이구.. 우리 손녀.. 이제 다 컷네잉.. "
경상도 특유의 끝을 끄는 듯한 발음의 사투리가 구수하게 들려오고 수현이는 벌써 할머니
품에 뛰어 안겨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의 인사들이 끝나고 방으로 들어가자 민기의 또래 사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올해로 중학교 1학년이 되는 사촌 남동생 예익이, 내년이면 대학생이라는 예리 누나, 초등학
교 3학년인 상민이와 중학교 2학년인 상아..
예익이와 예리 누나는 큰 삼촌네 집 식구였고 상민이와 상아는 고종사촌 이었다.
항상 보는 얼굴들이라 그런지 민기는 반갑고 즐거워 저녁 내내 웃음을 지었다.
" 쏴아아.. 철썩.. 쏴아아.. 철썩.. "
민기는 저녁을 먹고 해변에 나와 앉아 있었다.
부드러운 모래 위에 등을 깔고 누워 서울에서는 보이지 않는 별들을 헤아리며 이런저런 생
각을 하는데 누군가가 다가와 옆에 앉았다.
" 수현이니? "
" .. "
대답이 없자 자리를 고쳐 앉은 민기는 옆에 앉은 작은 그림자를 응시했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진 탓인지 민기는 앞에 앉은 게 누구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상아였다.
민기는 약간 실망한 어투로, 하지만 얼굴에 내색하지는 않으며 말했다.
" 상아였구나.. "
" 오빠 뭐하고 있었어? "
상아가 눈을 빛내 오며 물었다.
" 그냥.. 별 구경 하고 있었는데.. 왜? "
" 별 구경.. 나두 같이 할까? "
" 추울텐데.. 감기 걸린다 너.. "
" 에이.. 별루 춥지두 않은데 뭘.. "
민기가 걱정하는 듯 말하긴 했지만 사실 민기도 옆에 있겠다는 상아가 싫지는 않았다.
상아는 활동적이고 장난끼 많은 순수한 시골 소녀였다.
민기는 항상 상아와 작당해서 수현이를 골탕 먹이곤 하였고 수현이는 쪼르르 달려가 예익이
나 예리 누나에게 일러바치곤 하였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번 추석에 만난 상아는 예전과 달리 차분하고 조용해 진 듯 했다.
예전의 왈가닥 같았던 성격은 어디 갔는지.. 즐겨 입던 청바지며 거꾸로 쓰던 모자도, 찰랑
거리던 단발머리도 간데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다가 문득 상아가 치마를 입었음을 눈치 챈 민기가 물었다.
" 갑자기 웬 치마야? "
" .. "
민기는 상아의 흰 치마 섶을 장난스레 들추듯이 매만졌다.
" .. "
" 상아야 왜 그래.. 어디 아퍼? "
대번에 주먹이 날아올줄 알고 몸을 움츠리고 있던 민기는 반응이 없자 상아의 상태가 평소
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다시 느꼈다.
" .. 오빠. "
" 왜? "
상아가 조용히 말을 꺼내자 민기는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하고 대답했다.
" 있잖아.. 오빠 예전에 나한테 한 말 기억나? "
" .. 무슨 말? "
" .. 왜.. 있잖아.. 오빠가 지난 설에 나한테 한 얘기 말야.. "
".. 무슨 말인지 알아야 기억
이 나던지 하지.. "
민기는 상아가 정색을 하고 물어오는 "자신이 예전에 상아에게 한 말" 이라는 것을 기억해
내려 안간힘을 썼다.
" .. 내가 상아에게 무슨 상처 줄 만한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
민기가 뭔가를 생각해 내려는 듯 눈을 내리 감자 상아는 입술에 작지만 쓸쓸한 미소를 띄우
며 말했다.
" 그래.. 오빠가 기억 할 리 없지.. "
" 미안해.. 이 오빠가 머리가 나빠서.. 하하.. "
민기가 미안함을 무마하려는 듯 웃자 상아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 그럼 나 먼저 들어간다.. "
" .. 응. 그래라. 난 조금 더 있다 들어갈게. "
상아의 멀어져 가는 뒷모습이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 무슨 얘기일까.. 도통 기억이 안 나네.. "
민기는 다시 모래 위에 드러누워 생각에 잠겼다.
밤바다의 시원하고 쌉쌀한 내음이 민기의 콧속을 휘돌고 민기는 아직은 그리 춥지 않은 바
닷가에서 규칙적인 파도소리를 자장가 삼아 스르륵 잠이 들었다.
----------------------- ------------------------ ------------------------- --
" 상아야, 너 이제 중학교 2학년이지? "
" 응. 이몸은 벌써 2학년이시라구.. 헤헤.. "
" 야.. 중학교 2학년이나 되었으니 말인데.. 너 좀 여자다워 질 수 없겠니? "
" 뭐라구 오빠? "
" 그러니까.. 뭐랄까.. 그래! 수현이 좀 닮아 봐라.. 수현이 좀 봐.. 얼마나 얌전하구 차분하
니? "
" 치이.. 수현이 누나는 수현이 누나구 나는 나다 뭐.. "
" 그러지 말구.. 아, 그렇지. 너 그렇게 왈가닥 성격으로 밀고 나가다간 남자들도 다 떨어져
나가고 시집도 못 갈지 몰라. 하하.. "
" 헤헤.. 그땐 오빠랑 결혼하지 뭐.. "
" 얘가 무슨 큰일 날 소릴.. 사촌끼리는 결혼 못하는 거 모르는 애처럼 말하네.. 그리구 무
엇보다 나는 왈가닥 여자 애는 안키운다구.. 알아서 기셔.. "
" 뭐라고?! 이게.. "
" 아야.. 오빠가 뭐 틀린 말 했니..
민기가 학교에서 돌아왔다.
고등학교 1학년인 민기는 평범한 키에 평범하게 생긴 얼굴을 가진 소심하지만 착한 소년이
었다.
샤워를 하고 냉장고의 콜라를 꺼내어 병째로 꿀꺽 꿀꺽 들이키고 나서 집안을 둘러본 민기
는 학교에서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가 한번에 밀려와 나른한 기분을 느꼈다.
머리를 내저으며 정신을 차린 민기는 주섬주섬 짐을 꾸리고 계신 부모님을 바라보았다.
" 엄마, 지금 출발하나요? "
" 그래.. "
엄마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랬다.
벌써 추석이 다가온 것이다.
민기의 친척일가는 일년에 서너번 함께 모이는데 바로 추석과 설, 할아버지와 할머님의 생
신 날이었다.
워낙 친척들이 따로 흩어져 살기에 1년에 서너번 조차 모이기 힘든 것이다.
서울에 살고있는 민기네 가족에게는 익숙지 않은 시골길을 가야한다는 생각에 아빠는 벌써
피곤한 기색이셨고, 음식이다 뭐다 준비하신 엄마는 벌써 시골집에 도착해서 장만할 부침개
며 반찬 준비 생각에 진이 다 빠지신 듯 했다.
그러나 민기는 마냥 기분이 좋았다.
유일하게 민기네와 가까이 살고 있는 친척인 삼촌네 댁사람들과는 항상 시골길을 함께 가기
때문이다.
민기는 사촌동생인 수현이를 만난다는 것에 마냥 즐거웠다.
" 그러고 보니 작년 설엔 못 봤었지.. 무슨 병 때문에 입원했었다던가.. 1년만 이구나.. "
사실 민기와 수현이는 학년이 같았다.
같은 84년 생이었지만 수현이의 생일이 민기 보다 약간 느렸던 탓에 오빠 동생 사이가 되었
던 것이다.
수현이는 같은 나이인 민기에게 오빠 소리를 어색해 하지 않고 잘 따랐기 때문에 민기는 수
현이와 만나는 친척 모임이 항상 즐거웠다.
민기와 수현이는 집이 가까웠기 때문에 1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주말을 이용해 자주 만나는
일이 잦았다.
하지만 지난 추석 이후에 수현이네 가족이 그리 멀지는 않지만 서울근교의 신도시로 이사하
면서 그런 만남은 어느새 끊어지고 이제는 이렇듯 친척들의 정기 모임에서나 만날 수 있게
된것이다.
차창 밖으로 익숙한 풍경이 지나치는 듯 하더니 이내 민기네 집 자동차가 작은 삼촌댁 아
파트 단지로 들어섰다.
" 형님 오랜만입니다. "
" 그래 잘 지냈나 "
민기네 아버지와 작은삼촌이 말씀을 나누시는 동안 민기는 눈을 굴려가며 수현이를 찾았
다. 그때 아파트 계단 입구 쪽에서 청 반바지에 헐렁한 면티를 입은 귀엽게 생긴 여자애가
뛰어오며 소리쳤다.
" 야, 박민기! "
민기는 순간 움찔 하고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이 여자애가 누구인지 파악하려 애썼다.
작은 엄마가 그 여자 애를 나무라는 듯 말씀 하셨다.
" 수현아! 오빠보고 민기가 뭐니! "
" 에이.. 나이도 같은데 뭘.. 그치 민기야? "
소녀는 생글거리며 웃었고 민기는 그 미소가 눈부시게 빛나 보였다.
민기는 그제야 눈앞의 성숙한 소녀가 1년 전 까지만 해도 자기를 오빠 오빠하며 따라다녔
던
사촌동생 수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1년.. 겨우 1년 사이에 그녀는 너무나도 변모해 있었다.
커진 키며 이젠 제법 볼록하게 솟아오른 가슴팍..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와 팡파짐한 엉덩이
가 묘한 대조를 이루며 민기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어.. 수, 수현이.. 니? "
" 그럼 내가 수현이가 아니고 누구란 말야? "
약간 쀼루퉁한 얼굴로 받아치는 그녀의 모습에는 이미 1년 전의 얌전하게 민기를 따랐던 사
촌동생의 모습은 없었다.
민기는 말 잘 듣고 이쁜 사촌동생이 이렇게 약간은 건방지기까지 한 활달한 소녀로 변했다
는 사실에 그리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렇게 귀엽고 매력적인 여자를 곁에다 두고 왜 지금까지 눈치채지 못했는지에
대해 자신을 비난하기까지 했다.
차에 올라타서 뒷좌석에 앉은 민기는 옆에 앉아 차창 밖을 바라보며 바람을 맞고 있는 수현
이에게 말을 건넸다.
1년 전만 하더라도 부담 없이 말을 붙였었지만 여자에 대해서는 숙맥인 민기는 갑자기 이렇
듯 성숙해져버린 사촌동생이 동급생 소녀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약간 흥분되기까지 했다.
" 머리.. 잘랐네. "
" 응.. 귀찮아서 잘라버렸어. 근데 있지 머리 자르고 나니까.. 왠지 모
를 자신감 같은 게 솟는 거 있지. 학교 생활두 재미있어졌구 친구도 많아졌다? "
확실히 그랬다.
수현이는 가끔 민기에게 학교 친구들이 자기를 따돌리는 것 같다며 진지한 표정으로 상의하
곤 했다.
그럴 때마다 민기는 수현이에게 그건 수현이의 성격이 너무 소극적이고 조용해서이고 자신
감을 가지고 생활해 보라고 항상 말했고 수현이는 그런 민기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진지해진 민기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곤 했었다.
문득 민기는 수현이가 머리를 자른 이유가 궁금했다.
" 머리는 근데 왜 자른거야? "
" 어.. 방금 그 말 실례야. 여자가 머리를 자를때는 뭔가
심경에 변화가 있을때라구.. 그 질문은 그 변화의 이유를 묻고 있는거야! 나두 비밀이 있거
든.. "
진지하게 말하는 듯 하면서 입술 한켠에 슬며시 웃음을 띄우는 그녀를 보며 민기는 전에는
전혀 생각치 않았던 사촌동생의 여자로서의 면을 본 듯 했다.
" 내가 사촌동생을 의식하는 건가.. 뭐.. 수현이도 여자니까.. 그런데 어떻게 1년만에 이렇게
변할 수가 있지? "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한 민기를 신기한 듯 바라보던 수현이가 가볍게 민기의 콧등을 퉁겼
다.
" 얏! 방심했지! 하하하.. "
" .. 너..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데.. "
깔깔대며 해맑게 웃는 그녀의 얼굴.
문득 민기는 정말로 수현이가 좋아져 버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차는 달려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수현이는 피곤했는지 민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 이 길이 맞는지 모르겠네.. 참.. 매년 찾아가는 길인데도.. "
아빠는 긴가민가하시는 표정으로 엑셀을 밟으셨고 차는 시골길의 울퉁불퉁한 찻길에 이리저
리 퉁기며 들썩거렸다.
" 아얏.. 앙.. "
수현이가 이리저리 흔들거리는 차 속에서 웬일이냐는 듯이 부스스 깨어났다.
" 아.. 머리야.. "
" 수현아 괜찮아? "
수현이가 흔들리는 차안에서 머리를 부딪혔는지 뒷머리를 감싸쥐고 찡그린 표정을 지었다.
민기는 수현이의 머리숱을 헤치고 부딪힌 자리를 뒤척여 보기 시작했다.
" 야.. 엄살 피지마.. 혹두 없는데 뭘 그래.. "
" 아씽.. 아프단 말야.. "
툴툴거리는 수현이의 푸념을 한 귀로 듣고 흘리며 민기는 수현이의 머리 아래로 살짝 드러
난 가슴 계곡을 내려다보았다.
봉긋이 솟아오른 가슴이 한 손에 잡힐 듯이 아른거리고 그 아래쪽엔 쭉 뻗은 허벅지가 새하
얀 빛을 내 뿜으며 민기의 눈을 간지럽혔다.
수현이의 머리에서 민기는 기분 좋은 샴푸 향기에 취해 민기는 홀린 듯이 수현이 몸 여기저
기를 뜯어보고 있었다.
" 오빠, 왜 그래? 내 몸이 그렇게 잘빠졌어? 하하.. "
" 뭐, 뭐.. 뭐라구.. 수현아 너 지금
무슨 소릴.. "
민기가 앞좌석의 아버지 눈치를 보는 듯 하더니 말까지 더듬으며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
이밀자 수현이는 못 참겠다는 듯이 허리까지 굽혀대며 깔깔대었다.
" 농담이야 농담.. 하하.. 참 오빠두.. "
" .. 야.. 울 아빠 들으시면 어쩌려구.. 참.. "
수현이는 이내 웃음을 억누르고 민기를 바라보았다.
" 그래두 내 몸 훑어본 건 사실이잖아? 안 그래?"
" 그.. 그건.. 네가 너무 예전이랑 달라
보여서 조금.. "
진지한 수현이의 얼굴에 민기가 말꼬리를 흐리자 수현이는 이때다 싶었는지 눈을 빛내며
물어왔다.
" 조금 어때서? "
" .. 조금.. 이뻐 보여서.. "
민기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수현이에게만 들리도록 말하자 수현이는 예상과 다른
대답에 놀랐는지 아니면 쑥스러웠는지 얼굴을 붉혔다.
민기가 놀란 눈으로 수현이를 바라보자 수현이는 멋쩍은 웃음을 던지며 민기의 등을 팡팡
쳐댔다.
" 하하하.. 아이참 민기 오빠두.. 하하하.. "
" 아야.. 아퍼.. "
아침에 출발한 민기네와 삼촌네 차는 저녁이 다 되어서야 큰삼촌이 계시는 경북 영덕에 도
착했다.
바다 특유의 짠 내가 민기의 코를 상큼하게 자극했다.
" 할아버지 ! 할머니 ! "
" 어이구.. 우리 손녀.. 이제 다 컷네잉.. "
경상도 특유의 끝을 끄는 듯한 발음의 사투리가 구수하게 들려오고 수현이는 벌써 할머니
품에 뛰어 안겨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의 인사들이 끝나고 방으로 들어가자 민기의 또래 사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올해로 중학교 1학년이 되는 사촌 남동생 예익이, 내년이면 대학생이라는 예리 누나, 초등학
교 3학년인 상민이와 중학교 2학년인 상아..
예익이와 예리 누나는 큰 삼촌네 집 식구였고 상민이와 상아는 고종사촌 이었다.
항상 보는 얼굴들이라 그런지 민기는 반갑고 즐거워 저녁 내내 웃음을 지었다.
" 쏴아아.. 철썩.. 쏴아아.. 철썩.. "
민기는 저녁을 먹고 해변에 나와 앉아 있었다.
부드러운 모래 위에 등을 깔고 누워 서울에서는 보이지 않는 별들을 헤아리며 이런저런 생
각을 하는데 누군가가 다가와 옆에 앉았다.
" 수현이니? "
" .. "
대답이 없자 자리를 고쳐 앉은 민기는 옆에 앉은 작은 그림자를 응시했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진 탓인지 민기는 앞에 앉은 게 누구인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상아였다.
민기는 약간 실망한 어투로, 하지만 얼굴에 내색하지는 않으며 말했다.
" 상아였구나.. "
" 오빠 뭐하고 있었어? "
상아가 눈을 빛내 오며 물었다.
" 그냥.. 별 구경 하고 있었는데.. 왜? "
" 별 구경.. 나두 같이 할까? "
" 추울텐데.. 감기 걸린다 너.. "
" 에이.. 별루 춥지두 않은데 뭘.. "
민기가 걱정하는 듯 말하긴 했지만 사실 민기도 옆에 있겠다는 상아가 싫지는 않았다.
상아는 활동적이고 장난끼 많은 순수한 시골 소녀였다.
민기는 항상 상아와 작당해서 수현이를 골탕 먹이곤 하였고 수현이는 쪼르르 달려가 예익이
나 예리 누나에게 일러바치곤 하였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번 추석에 만난 상아는 예전과 달리 차분하고 조용해 진 듯 했다.
예전의 왈가닥 같았던 성격은 어디 갔는지.. 즐겨 입던 청바지며 거꾸로 쓰던 모자도, 찰랑
거리던 단발머리도 간데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다가 문득 상아가 치마를 입었음을 눈치 챈 민기가 물었다.
" 갑자기 웬 치마야? "
" .. "
민기는 상아의 흰 치마 섶을 장난스레 들추듯이 매만졌다.
" .. "
" 상아야 왜 그래.. 어디 아퍼? "
대번에 주먹이 날아올줄 알고 몸을 움츠리고 있던 민기는 반응이 없자 상아의 상태가 평소
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다시 느꼈다.
" .. 오빠. "
" 왜? "
상아가 조용히 말을 꺼내자 민기는 침을 꿀꺽 삼키며 긴장하고 대답했다.
" 있잖아.. 오빠 예전에 나한테 한 말 기억나? "
" .. 무슨 말? "
" .. 왜.. 있잖아.. 오빠가 지난 설에 나한테 한 얘기 말야.. "
".. 무슨 말인지 알아야 기억
이 나던지 하지.. "
민기는 상아가 정색을 하고 물어오는 "자신이 예전에 상아에게 한 말" 이라는 것을 기억해
내려 안간힘을 썼다.
" .. 내가 상아에게 무슨 상처 줄 만한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
민기가 뭔가를 생각해 내려는 듯 눈을 내리 감자 상아는 입술에 작지만 쓸쓸한 미소를 띄우
며 말했다.
" 그래.. 오빠가 기억 할 리 없지.. "
" 미안해.. 이 오빠가 머리가 나빠서.. 하하.. "
민기가 미안함을 무마하려는 듯 웃자 상아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말했다.
" 그럼 나 먼저 들어간다.. "
" .. 응. 그래라. 난 조금 더 있다 들어갈게. "
상아의 멀어져 가는 뒷모습이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 무슨 얘기일까.. 도통 기억이 안 나네.. "
민기는 다시 모래 위에 드러누워 생각에 잠겼다.
밤바다의 시원하고 쌉쌀한 내음이 민기의 콧속을 휘돌고 민기는 아직은 그리 춥지 않은 바
닷가에서 규칙적인 파도소리를 자장가 삼아 스르륵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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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아야, 너 이제 중학교 2학년이지? "
" 응. 이몸은 벌써 2학년이시라구.. 헤헤.. "
" 야.. 중학교 2학년이나 되었으니 말인데.. 너 좀 여자다워 질 수 없겠니? "
" 뭐라구 오빠? "
" 그러니까.. 뭐랄까.. 그래! 수현이 좀 닮아 봐라.. 수현이 좀 봐.. 얼마나 얌전하구 차분하
니? "
" 치이.. 수현이 누나는 수현이 누나구 나는 나다 뭐.. "
" 그러지 말구.. 아, 그렇지. 너 그렇게 왈가닥 성격으로 밀고 나가다간 남자들도 다 떨어져
나가고 시집도 못 갈지 몰라. 하하.. "
" 헤헤.. 그땐 오빠랑 결혼하지 뭐.. "
" 얘가 무슨 큰일 날 소릴.. 사촌끼리는 결혼 못하는 거 모르는 애처럼 말하네.. 그리구 무
엇보다 나는 왈가닥 여자 애는 안키운다구.. 알아서 기셔.. "
" 뭐라고?! 이게.. "
" 아야.. 오빠가 뭐 틀린 말 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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