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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16:09 640회 0건
[25부]



{앞으로 73분 남았습니다.}

2m는 넘을 법한 키에 엄청난 덩치를 가지고 있는 백인 사내가 정중한 목소리로 진에게 보고했다. 진은 칵테일을 홀짝이곤 총을 들어 앞에서 덜덜 떨리는 눈으로 카드를 든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중년 사내에게 겨누며 말했다.

"패가 뭐지."
"투..투페어..."

타앙-!!

가슴에 피를 뿜으며 뒤로 날아가는 중년 사내를 보며 진은 입맛을 쩝, 다셨다.

"난 원페어야."

{완전 지 멋대로군. 큭큭큭...}

진의 패를 본 현이 큭큭거리며 웃었다. 진은 피식 웃으며 보고를 했던 백인 사내를 불렀다.

{미키. 왕펑에게서 연락은?}
{40분 후에 약속한 지점에 도착한다고 하셨습니다.}

진은 고개를 까닥하며 지시했다.

{저자들을 미리 갑판으로 옮겨놔라.}

진의 지시에 고개를 끄덕인 미키는 미리 분류되어있던 백만장자들에게 다가가 서툰 한국말 솜씨로 말했다.

"일뤄선다. 뭐두. 다롸와라."

미키의 말에 대략 40명 가량의 남녀가 두려운 눈길로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그 무리에서 어디에나 왠만해서는 잘 겁을 먹지 않는 강심장이 있듯이 누군가의 외침이 파티장 안의 적막을 깨뜨리며 터져나왔다.

"우릴 어디로 데려가는 것이냐!! 이 배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는 거 다 알고 있다!!"

아마도 중국말을 들을 줄 아는 남자인 모양이었다. 5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양미간에 깊은 주름이 패인 강한 인상의 남자였다. 의도적이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그가 한국말로 외친 덕분에 파티장 안에는 일대 혼란이 벌어져버렸다. 웅성웅성거리는 속에서 때때로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터져나오고, 2000명을 헤아리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벌떡 벌떡 일어나 도망을 치려는 움직임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진은 전혀 당황하지 않은 얼굴로 피식 웃으며 일단 총을 들어 백만장자 무리속에서 앞으로 걸어나와있는 그 남자를 쐈다.

타앙-!!

"크윽...!"
"꺄악!! 여보...!!"

정확히 심장이 있는 부분에서 피를 뿜으며 그 남자는 털썩 쓰러졌고 뒤에서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고 있던 그 남자의 부인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남자를 끌어안았다. 아무튼 이 한 발의 총성으로 파티장 안의 소란은 일시에 잠잠해졌다. 진은 천천히 걸아나가 뒷쪽에 서있던 부하들에게 손짓했다. 그러자 스무명을 헤아리는 복면인들이 열을 맞춰 진의 뒤에 착착착 2열 횡대로 서서 파티장 홀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진은 귀찮은 얼굴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흠, 흠. 아, 아. 모두 잘 들어라. 반항하지 않는 자는 죽이지 않는다. 지금 들은 말은 방금 전 남자가 우리의 대화를 엉뚱하게 이해한 것이며 우리의 목적은 지금 뒤쪽에 서있는자들을 상하이로 데려가는 것이다. 그 이후에 여러분은 중국 당국에 의해서 한국으로 안전하게 귀송될 것이다."

그런데 그때 진의 옆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끼어들었다.

"하,하지만 이 카,카드놀이는 뭐,뭐냐!! 다,다,당신은 사..사,사람을 카드게임에서..져..졌다고 죽이지 아,않는가!!"

끼어든 음성의 주인공은 바로 다음 차례의 카드게임 참가자였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해야할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지만 목소리는 듣고 있는 사람이 안쓰럽게 느낄 정도로 떨려나왔다. 진은 천천히 그 남자쪽으로 돌아서서 말했다.

"그건 당신 사정이고. 후후후. 앞으로 차례가 수십, 수백번은 남은 저 사람들이 당신을 동정해줄 것 같나?"

진의 말에 말을 꺼냈던 30대 남자는 다급한 눈길로 파티장의 홀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가 맞이한 것은 자신의 애타는 눈길을 피하는 같은 나라 사람들의 매정한 모습밖에 없었다. 이미 가만히만 있으면 안전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안 이상 죽음을 무릅쓰며 이 남자 편을 들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제,젠장...젠장할!! 빌어먹을...안 돼...! 씨발 난 죽기 싫어...! 이 씨바아아아아알!!!"

고함을 버럭 버럭 지르던 그는 파티장 안에 다시 조용히 앉아있는 사람들을 삿대질하며 마구 외쳤다.

"씨발! 그러고도 같은 나라 사람이야?! 엉?! 씨발 한민족 좋아하네, 씨발!! 개한민국 만세다 이 개새끼들아!! 지금 같은 나라 사람이 죽게 생겼는데,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게 있을 수가 있냐!! 이 씨발!!"

처음엔 다소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지 이 30대 남자의 눈길을 피하던 사람들이 그의 험한 말이 점점 이어짐에 따라 서서히 인상을 찡그리기 시작했다. 직접 소리내어서 말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사람들의 얼굴은 대부분 "자기도 이쪽 입장되면 가만히 있을 거면서."라고 말하고 있었다.

"유언은 다 끝났나."

그때 헉헉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시 사람들에게 욕을 퍼부으려하는 그 남자에게 진이 말했다. 유언이라는 말에 깜짝 놀란 남자는 진을 바라보았고 진은 그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자,자,잠깐!! 나,난 아직 카드도 안 했는데!!"

그러나 진의 총구는 그의 입이 더 이상 목소리를 내뱉는걸 허락하지 않았다.

타앙-!!

바닥을 서서히 피로 물들이는 남자의 시체를 보며 얼굴을 찡그린 채 진이 말했다.

"조잘조잘. 네 입이 네 수명을 단축시켰다. Next!"





1층에서 지하까지는 더 이상 한명의 복면인도 만나지 않았다. 지하1층은 창고로 쓰이고 다시 그 다음부터는 객실이나 유흥시설, 그리고 제일 낮은 층에는 기관실이 위치되어있다. 태현은 유리를 데리고 지하1층으로 갔다. 비상문을 열자마자 바로 하늘을 찌를듯이 높은 천장까지 온갖 가방들이 빼곡히 메우며 창고에 가득 들어차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천장에 노란빛을 비추는 백열등이 달려있었지만 창고가 워낙에 넓어서 주위는 다소 어두웠다. 태현은 서늘하고 습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내뱉으며 유리에게 말했다.

"일단 여기 숨어있자. 조금 있으면 우리 나라에서 특전대가 올 테니까."
"응......"

유리는 얌전하게 대답하며 태현의 허리만 끌어안고 있었다. 태현은 서늘한 공기에 유리가 추울까봐 그녀의 팔을 쓸어주며 커다란 그물로 가려져서 마치 하나의 벽을 만들고 있는 가방더미로 걸어가서 기대어 앉았다. 유리 역시 아빠 옆에 꼭 붙어 앉았다.

"아빠."
"응?"
"나...궁금한 게 있는데......"

태현은 자신의 어깨에 기대고 있는 유리의 머리에 자신의 머리를 기대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응. 물어봐."
"......아빠는..."
"응."
"......"

태현은 무엇을 물으려고 그러는지 망설이는 유리에게 빙긋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아무거나 물어봐."

잠시 뜸을 들이던 유리. 결국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것은 첫머리가 전혀 다른 물음이었다.

"특전대는 정말루 우릴 구하러 올까?"

태현도 유리가 결국 궁금한걸 삼킨 것을 알았지만 모른척하며 대답했다.

"당연히 오겠지. 거의 다와갈껄?"

태현은 유리를 끌어안으며 따스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집에 돌아가면 아빠가 맛있는 거 많이 만들어줄게."

아빠의 말에 유리는 푸훗, 웃으며 말했다.

"차라리 현석 아저씨한테 만들어 달라구 하겠다. 아빠가 만든 건 너무 싱거워~."

유리의 웃음 섞인 말에 태현은 장난스럽게 딸의 머리에 꿀밤을 먹이며 말했다.

"요녀석! 짜게 먹으면 몸에 안 좋아."
"에헤헤~."

배시시 웃는 유리의 얼굴. 태현은 왠지 유리의 웃는 얼굴을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느낌을 받았다. 하긴 불과 몇 시간 사이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일들이 벌어졌던 걸까. 하지만 이제는 괜찮다. 여기에서 시간을 조금만 더 보내고 나면 특전대가 와서 구출해 줄 테니까. 그런데 그렇게 맘 편한 생각을 하며 웃음 짓는 얼굴로 유리의 머리를 어루만지던 태현의 눈에 저쪽 반대편 벽 구석에서 빨간불이 깜빡거리는 게 보였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태현. 뭔가 화재 센서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넘길 수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유리야. 잠시만."

태현은 몸을 일으켜 반대편 벽쪽으로 걸어갔다.

"아빠, 왜?"

유리도 태현의 뒤를 꼭 붙어 따라왔다.
워낙 창고가 넓어 단지 빨간불만 조그맣게 깜빡거리던 게 거리가 가까워짐에 따라 태현의 눈에 점점 더 그가 본 것의 정체가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빨간불 아래서 조그맣게 시간을 표시하는 부분의 초가 정확히 1초씩 줄어드는 것을 본 순간 태현의 두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아빠!"

뭘 봤는지 깜짝 놀라며 달려가는 아빠를 부르며 유리도 급히 뒤따라갔다.

"왜? 뭐야? 이게......"

유리의 눈에 들어온 것은 벽 아래부분에 붙어있는 비디오 테이프만한 크기의 검은색 조그만 상자였는데 위쪽에는 동그란 빨간불이 점멸되고 있었고 그 아래쪽에는 [69:37]이라는 빨간 숫자가 조그맣게 점등되어 있었다. 거기다 37이라는 숫자는 그대로 있는 게 아니라 1씩 줄어들고 있었다.

"아빠......?"

무엇을 생각하는지 초조한 눈빛을 좌우로 움직이는 아빠를 유리가 불렀다. 태현은 유리의 부름에 천천히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유리야......"
"응..."

유리도 답답했다. 아빠가 이렇게 뭔가를 갈등할 때 자신이 현답을 말해줄 수 없는 게 너무나 억울했다. 다음말을 재촉하는 유리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태현은 하지만 다시 시선을 "그것"으로 돌렸다. 태현의 입가에서 짧은 탄식과도 같은 한숨소리가 목소리가 되어 흘러나왔다.

"도대체...그 녀석들 어쩔 작정인거지......"
"아빠...이게..뭐야?"

유리도 서서히 직감하고 있었다. 시간이 줄어드는 조그만 상자. 태현은 대답을 망설였고 유리는 말을 이어갔다.

"폭탄..이야? 시한폭탄?"

태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옷깃을 꼬옥 부여잡는 유리의 손길을 느끼며 태현은 정말 애가 타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기껏 그 죽을 고비를 넘겨서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안전하다 싶게 되었다고 생각했더니만 이번엔 폭탄이다. 거기다 분명히 여기 하나만 설치되어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며 시선을 폭탄의 옆으로 옮겨가던 태현의 눈에 하얀가루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다가가 하얀가루를 손가락 끝으로 찍어 맛을 본 태현.

"......여러가지 하는군."

마약이다.
태현은 눈을 감으며 잠시 동안 가만히 생각을 했다. 그리곤 천천히 돌아서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할지 몰라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유리에게 말했다.

"유리야. 아빠...잠시만 어디 좀 갔다 올게. 그러니까 여기에서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알겠지?"
"어쩔...려구 그래?"





{이봐. 진. 왕펑 녀석 선물은 잘 챙겨놨어?}

진은 패가 영 시원치 않은지 눈썹을 긁적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어...지하 창고에 잘 모셔놨으니까 걱정마.}
{이제 슬슬 꺼내놔야할 시간 아니야?}
{글쎄...천천히 해도 상관없지 않나...?}

그런데 건성으로 그렇게 대답하던 진은 갑자기 왜 현이 그런 말을 꺼내었는지 알겠다는듯이 시익 웃으며 말했다.

{이제 사신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는 거야?}

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미키 녀석이 대원들 데리고 갔으니까 별 수 있나. 아호라도 여길 지키게 해야지. 아무튼 왕펑 녀석 선물은 내가 챙겨놓을 테니까 넌 카드나 열심히 하라고.}

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무 많이 하진마. 어디까지나 선물로 가져온 거니까.}
{그러지.}





"......없다."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 구명보트의 수급 여부를 확인하러 다녔던 태현의 눈에 절망감이 감돌았다. 태현은 마지막으로 확인했던 배의 후미에 위치한 구명보트 탑승 장소에 털썩 주저앉았다. 단 하나의 구명보트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런 초호화 유람선에 구명보트가 없다는 건 당연히 말이 안 되고, 아마도 국제 강도들이 무슨 속셈인지 구명보트를 모두 없애버린 것 같았다.

"후우......"

담배가 피고 싶다.
만약 구명보트가 단 하나라도 있었다면 자신이 어떤 선택을 했을까. 구명보트를 찾아본 명분은 승객들이 탈출할 만큼 충분한 구명보트가 확보되어있나를 확인하는 것이었지만 있어야 할 장소에 구명보트가 없는 것을 보며 점점 들었던 그 생각은 차라리 자신이 구명보트를 찾기 시작한 진짜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망감? 아니다. 지금 이 기분은 그런 게 아니다.
......자책감.
유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라도 희생하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그래도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의 목숨을 나 몰라라하고 유리와 자신만 살려고 잠시나마 그렇게 생각했던 게 부끄러웠다. 애써 자신이 이 상황에서 승객들을 어떻게 구해낼 수 있겠나라고 생각해보는 자위 따윈 할 가치도 없는 것이었다. 시도조차 해보지 않은 것을 과거의 변명 거리로 삼는 비겁한 짓거리 따윈 할 마음 없다.
태현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곳엔 서울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반짝이는 별들이 마치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것 같이 밤하늘을 하얗게 수놓고 있다.

"유리한테..보여주면 좋아할 텐데......"

태현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 결단을 내려야한다. 이대로 하염없이 특전대를 기다릴지, 아니면 미친척하고 국제 강도들과 싸워서 폭탄을 해체하게 만들지.
담배를 더도 말고 딱 한대만 피워봤으면...그러면 정말로 머리가 잘 돌아갈 것 같다.





유리는 아빠가 숨어있어라고 했던 곳에서 나와 아빠와 같이 앉아있던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무릎을 끌어안고 거기에 얼굴을 묻고 죽은 듯이 앉아있었다. 아빠는 자신과 탈출할 구명보트를 알아보고 오겠다고 그랬다. 하지만 특전대가 금세 올 테니 구명보트를 탈 일 같은 건 없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면 뭐하러 구명보트 찾아보러 간 거야?"

유리는 길게 늘어뜨려져 있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휘감으며 생각했다.

"혹시 특전대가 저 폭탄이 터지기 전에 안 도착하면 어쩌지...? 그러면 아빠랑 나 둘이서만 도망쳐야 되는 건가? 하지만 그러면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자꾸만 꼬리에 꼬리를 물며 떠오르는 불안한 생각에 유리는 고개를 도리질하며 그런 잡념들을 떨쳐버렸다. 아빠가 분명히 말했다. 특전대가 금세 올 것이라고.

"아빠......"

유리의 곁으로 외로운 음성이 흘러나갔다. 특전대 같은 건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 지금은 특전대보다도 아빠가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
그런데 그때 유리의 귓가에 창고의 비상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리는 활짝 웃었다가 금세 일부러 삐진 얼굴을 하며 아빠에게 왜 이렇게 늦게 왔냐고 말할 생각으로 창고로 들어온 인물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왠걸, 들어온 사람은 아빠가 아니라 이상한 처음보는 남자였다. 깜짝 놀란 유리는 급히 바로 뒤편의 가방더미 뒤로 숨었다.

{제기랄. 어디에 놔뒀는지 묻는걸 깜박했군.}

20대 중반 정도의 남자였는데 중국말 비슷한 낯설은 말로 말했다. 유리는 콩딱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그 남자가 무엇을 하는지 가방 틈새 사이로 가만히 지켜보았다.

{빌어먹을. 사신 녀석이 빨리 안 나타나니까 이렇게 지겨워진 거잖아. 제길. 그 녀석과 붙어볼 절호의 기회인데......}

뭔가를 찾는지 가방더미들을 퍽퍽 차서 무너뜨리며 자꾸만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리는 그 남자를 보며 유리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혹시나 이쪽으로 오면 어쩌지..하는 생각이 들어 너무나 긴장이 된다. 그런데 유리가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갑자기 그 남자가 유리쪽으로 시선을 홱 돌렸다. 유리는 깜짝 놀라며 얼어붙은 채 그를 바라만 보았고, 그 남자는 잠시 이쪽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생각이 난 듯이 손가락을 탁 튕기며 폭탄이 설치되어 있는 곳 옆으로 갔다.

{미키 녀석이 왕펑 선물 옆쪽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고 그랬지.}

반대편쪽으로 걸어가는 남자를 보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유리. 그 남자는 폭탄의 옆쪽에 쌓여있던 가방더미들을 헤치더니 서류가방같이 생긴 가방을 꺼내어 열었다.

{큭큭큭. 미키 녀석, 눈이 쾡하다 했더니 벌써 한 번 빨았구만.}

가슴은 두근거리는데 이렇게 보고 있으니 궁금해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유리는 그 남자가 가방 안에서 샤프만한 크기의 투명한 통을 꺼내어 손바닥에 탁탁탁탁 뭔가를 털어 놓는걸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그 남자는 그러더니 손바닥에 늘어놓은 뭔가를 코로 스치듯이 훑어서 한 번에 다 빨아들였다. 고개를 젖힌 채 몸을 부르르 떠는 남자를 보며 유리는 방금 저 남자가 뭘 마셨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안전한 곳에 있으니 두려움보다는 신기함이 앞섰다.

"우와...마약은 저렇게 먹는 거구나...입으로 먹는 게 아니었어......"

그 남자는 한 번 더 같은 행동을 반복하더니 가방을 가지고 비상문쪽으로 걸어갔다. 유리는 잔뜩 긴장한 채로 점점 시야에서 사라지는 그 남자의 모습을 보고 있다가 문이 철컹, 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긴장을 풀며 안도의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으휴...아빠는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야?"

유리는 푸념을 늘어놓으며 비좁은 가방더미들 사이에서 나왔다.

{큭큭큭. Bingo~.}

"......!!"

문쪽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 그쪽을 바라본 유리. 그곳에는 나간줄로만 알았던 방금 전 그 남자가 시익 웃으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태현은 확실히 하기로 했다. 카나코의 방으로 가서 또하나의 44구경 매그넘을 챙겨서 두개의 리볼버에 탄환을 다 채워 넣은 후 보조 탄환들도 확실하게 챙겨온 태현. 그는 아무도 없이 자동항법장치의 명령에 따라 혼자서 움직이고 있는 조타장치를 보며 선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저 앞으로 카나코와 윤현준이 쓰러져 죽어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태현은 예상치 못했던 현준의 죽음이 놀랍고 안타까웠지만 그들의 죽음을 슬퍼해줄 만큼 지금 마음이 여유롭지 않았다. 태현은 한국 특전대에 구원 도착 예정이 언제인지 확인하기 위해 통신장치로 걸어갔다. 그런데 통신장치는 파란불을 깜빡거리며 통신요청이 오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태현은 이어셋을 끼며 통신요청을 수락했다.

"......예!"

<치직...여기,는 치직,한,국 특전공수대다! 신..치직,을 밝혀라!>

시끄러운 무전 잡음 소리와 함께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현은 급히 소리를 죽여 재빠른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아직 인질로 잡히지 않은 승객입니다. 특전대의 구원은 언제 도착 예정입니까?"

<치직,칙...구원..치직,지연될..치직,같다! 지금..치직,칙,..국 영해..안으로,치직,...해서 중국 당국에,치직,..조를 요청 중! 치직,칙...>

"지연?! 이봐! 들리나? 지금 이 배엔 폭탄이 설치되어있다! 지연이 되면 승객 전원이 위험.."

<...시간 후,치직,..착 예정! 반복한다! 치직..세시간 후, 치직, 도착 예정! 치직, 치지지......>

"뭐? 세시..이봐! 앞으로 한 시간 뒤면 이 배는 폭발한다! 그때까지 빨리 폭탄처리반을 보내지 않으면...!"

뚜..뚜..뚜..뚜..뚜..뚜......

다급한 태현의 음성은 매정하게 울려오는 신호음에 끊어졌다.

"제길......"

태현은 이어셋을 벗으며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44구경 매그넘을 보았다. 일단 유리가 지하에 안전하게 숨어있으니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 이 상황만으로도 충분히 최악은 최악이다.

"후우우......"

한숨을 내쉬는 태현. 가만히 눈을 감고 잠시 동안 마음의 결정을 내리던 그가 곧 서서히 눈을 떳다. 입가에 씁쓸한 웃음을 희미하게 떠올리며 태현의 음성이 조용히 흘러나왔다.

"너무 오랜만이라 제대로 맞출 수나 있을지 모르겠군......"





송기룡. 그는 올해로 딱 서른이 된 프로 사진사였다. 모든 것은 정지되어 있을 때 진정으로 살아있다는 이상한 궤변을 일상의 신조로 삼고 살아가는 그였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특별히 캠코더를 준비해서 일생에 다시 없을 경험과 풍경들을 영상으로 담고 있었다.

윙......

그래서 지금 그의 가슴은 미칠듯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테러범들의 실제 모습을 영상으로 담을 수 있다니. 미친척하고 서른살 여름휴가 기념으로 이 비싼 배에 타길 정말로 잘했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손에 꼭 맞게 들려 소매 안으로 감추어진 채 파티장 안의 영상을 몰래 녹화하고 있던 기룡의 소형 캠코더에 몇 분 전부터 새로운 게임을 즐기고 있는 테러범 두목의 모습이 잡혔다.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두 명의 젊은 남자 중 바닥에 쓰러져있는 남자에게 총구를 돌리고 있었다.





타앙-!!

또 한명의 젊은 생명이 사라졌다. 진은 가쁜숨을 몰아쉬면서도 승리에 도취된듯 입가에 가는 웃음을 떠올리고 있는 남자를 보며 말했다.

"큭큭큭. 정말로 아름다운 장면이야."

게임의 룰은 지극히 간단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맨손으로 싸움을 한다. 죽거나 정신을 잃거나 바닥에 쓰러져서 5초 동안 일어나지 못하는 자는 죽임 당한다. 진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급조된 이 게임의 이름을 약육강식이라고 불렀다.

"강한자는 살아남고 약한자는 죽는다. 가장 원초적인 법칙이 실현되는 이 모습. 큭큭큭...정말로 아름다워. Next!"

진의 명령에 따라 벌써 두 번의 게임에서 살아남은 이 젊은 남자 앞으로 덜덜 떨며 걸어 나온 사람은 70은 넘어보이는 흰머리가 지긋한 노파였다. 진은 시익 웃으며 노파의 앞에 손바닥만한 칼을 던져주었다.

"그래도 암수의 구별은 해야겠지."

아까 분명히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맨손으로 싸운다고 룰을 말했으면서 진이 갑자기 노파의 앞에 칼을 던져주자 젊은이는 당황한 음성으로 진에게 말했다.

"아,아까 분명히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맨손으로 싸운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진은 시익 웃었다.

"이 지구를 만든 신에게 한곳에는 석유가 나게하고 다른 한곳에는 모래만 가득하게 할 권한조차 없겠나. 불평하지마라. 모든 섭리는 창조자 마음대로니까."

젊은이는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푸욱-!!

그런데 그때 젊은이의 얼굴로 빨간 피가 튀어올랐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천천히 내려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의 배에 칼을 찔러 넣은 노파를 바라보았고, 서서히 쓰러졌다.

"크하하하하하하핫!! 재미있어!! 크하하하하하하핫!! 아무리 늙어도 삶에 대한 욕구는 줄어들지 않는가보군! 크하하하하핫!!"

파티장 안으로 진의 광소가 가득 울려 퍼졌다.





짜악-!!

다시 유리의 얼굴에 빠알간 손자국이 나며 그녀의 입가로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고개를 홱 돌려 현을 노려본 유리. 유리도 지지 않고 그의 얼굴에 뺨을 날렸다.

짜악-!!

이미 유리의 바지는 벗겨져 있었고 민소매 티도 너덜너덜해서 하안색 브래지어에 감싸인 유리의 탐스러운 젖가슴이 환하게 드러나 있었다. 현은 시익 웃으며 매서운 그녀의 손길에 터진 입술을 혀로 살짝 핥았다. 이년은 지금까지의 여자와는 달랐다. 처음엔 두려워하면서 연신 제 아빠를 부르며 도망치다가 자신이 덮치려고 하자 갑자기 표정이 돌변해서는 자신을 마구 때리며 반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은 화를 낼수록 아름다워 보이는 이 한국여자에게 다시 손길을 내뻗어갔다.

"더러운 새끼!! 이 손 안 치워?!!"

유리는 다시 자신의 티셔츠를 잡아 당기며 벗기려 하는 현의 손길에 반항하며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사정없이 때렸다. 하지만 현은 그 모기에 물리는 것만도 못한 주먹질에 물러서지 않으며 결국 유리의 티셔츠를 찢어 벗기는데 성공하고 말았다. 그리곤 한걸음 물러서서, 다리를 꼭 모은 채 가슴을 가리며 자신을 깜찍하게도 죽일 듯한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는 이 사신의 딸의 몸매를 천천히 감상하기 시작했다.

{후후후. 멋지군. 보기 드문 몸매야.}

일단 온통 새하얗다. 그런데 그 새하얀 게 단순히 하얗기만 한 게 아니라 마치 우유를 부어놓은듯이 뽀얀 맛이 있어서 정말 만지고 있으면 손이 녹아버릴 것만 같은 그런 피부다. 거기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정말로 보기 드문 아름다움을 느낄 수는 있지만 그래도 아직 앳된 느낌이 가시지 않은 얼굴과는 달리 몸매는 완전히 무르익어있었다. 탐스러운 모양새를 한 풍만한 가슴도 그렇지만 군살 하나 없이 쏙 들어간 잘록한 허리하며 그 아래로 이어지는 미려한 힙라인과 적당하게 살이 올라 있으면서도 늘씬하게 빠져있는 다리의 각선미는 군침을 삼키지 않고는 멀쩡하게 볼 수가 없을 정도다.
현은 마치 맛있는 음식을 눈 앞에 둔 사람처럼 입술을 혀로 핥았다. 한편 유리는 완전히 구석으로 몰려 도망칠 길이 보이지 않자 침착하려 노력하며 빠져나갈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Where"s your father?"

그런데 그때 중국인 남자에게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영어가 튀어나왔다. 유리는 드디어 말이 통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내심 기뻐하며 재빨리 말했다.

"My father? Why? Do you know who he is?"

현의 입가에 흥미로운 웃음이 떠올랐다. 마치 말을 할 줄 아는 장미꽃과 대화를 하는 기분이다. 자신이 중국말을 하자 아예 아무런 대화도 시도조차하지 않던 그녀가 자신이 혹시나 해서 걸어보았던 영어에 저렇게 급히 대답을 하는 모습을 보니 오늘 처음으로 재미있다는 기분까지 느끼게 되었다.

"Course. I"m your father"s friend."

현의 말에 유리가 아미를 찌푸리며 말했다.

"You"ve got to be kidding me."
"Yeh, lie, of course."

현은 자신의 말에 얼굴을 화악 찌푸리는 유리를 보며 키득거리며 웃었다. 유리는 불쾌한 얼굴로 현을 노려보았고 현은 혀를 낼름거리며 두 손을 들어 양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이제 슬슬 먹어도 되는 거지? Huh?}

유리는 또 못 알아들을 말을 하는 중국인 남자를 보며 이를 사려물었다. 아까 아빠를 부르며 도망치다가 갑자기 깨닫게 되었다. 자신은 왜 항상 아빠에게 의지만 하려 하는 걸까. 아빠는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나 노력하는데 자신은 왜 그런 아빠의 짐을 덜어주지는 못할망정 어째서 오히려 점점 더 많은 것을 아빠에게 의지하려고 하는 걸까. 그래서 자신을 덮쳐오는 이 중국인 남자에게 격렬하게 반항했었다. 오늘 그런 일을 겪으며 어쩌면 좀 더 내면적으로 강해진 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유리는 자신에게 손을 뻗쳐오기만 하면 이 남자의 면상에 날려버리려고 주먹을 꼬옥 움켜쥐었다.





"6층에 일곱, 5층 홀에 여섯, 카지노에 아홉."

태현은 6층 파티장으로 통하는 비상문을 살며시 열고 단 두 번 파티장을 보는 것으로 국제 강도들의 총 인원을 파악했다.

"검은 양복을 입고 있는 녀석이 두목인가보군."

아마도 시한폭탄의 시간을 정지시키는 방법은 저자가 알고 있을 것이다. 두목을 빼고 나면 한명당 최소한 한발씩 해도 탄창에 총알을 한번은 갈아 넣어야 한다.

"한발당 두명 잡아야겠군."

태현은 천천히 마음을 가다듬으며 양손에 권총을 하나씩 잡아들었다.

"할 수 있다 정태현. 기껏 해봐야 10년만이잖아. 충분히 맞출 거다. 빌어먹을 재수가 좋아서 1발3탕 될지 누가 아나. ...제기랄 이럴줄 알았으면 기관총 같은걸 가지고 올 걸 그랬나? ......아니야. 그래도 그나마 손에 익어있는 이 녀석이 좋다. 하지만...제기랄! 망설이지 말자. ......젠장할 10년이 "기껏"은 아니잖아?"

태현은 가슴이 미칠 듯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크게 쉼호흡했다.

"왜 이러냐 정태현. 이보다 더한 일도 수도 없이 헤쳐왔잖나.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정신일도 하사불성. 정신일도 하사불성. 정신일도 하사불성. 정신일도 하사불성......"

이렇게 마인드 컨트롤을 하니 그나마 마음이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태현은 숨을 깊게 한 번 내쉬었다 들이 마시곤 비상문을 확 열어젖히며 파티장 6층으로 뛰어들어가려했다.

탁-!

그런데 하필이면 한 계절에 한 번 일어날까말까 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허억!"

마음의 긴장을 풀렸지만 다리의 긴장은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태현은 그만 문턱에 발끝이 걸려 앞으로 볼품 없이 넘어져버리고 만 것이다.

타닥, 탁, 탁, 주르르르...

덤으로 권총 하나도 놓쳤다. 호화 유람선이라 바닥이 하필이면 반들반들하게 잘 닦여진 대리석이라 태현이 놓친 권총은 미끌려가 5층으로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제..젠장할!"

{누구냐!!}

당연히 6층에 있던 복면인들이 태현을 발견하고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태현의 어리벙한 쇼는 거기까지였다. 넘어진 참에 아예 바닥에 납짝 엎드려 복면인들의 사격 각도를 최대한 없애버린 태현은 두 손으로 리볼버를 잡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복면인들을 정확히 조준해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했다.

타앙-! 타앙-! 타앙-! 타앙-!

앞서 달려오던 네 명의 복면인이 정확히 왼쪽 가슴에 바람 구멍이 난 채 쓰러졌다. 그러자 그제서야 태현이 총을 들고 있음을 안 복면인들이 태현에게로 총질을 하기 시작했다.

타다다다다다다다당-!!

"제기랄! 6층 일곱은 들어가자마자 해결해야 했는데!"

태현은 속으로 욕지꺼리를 내뱉으며 재빨리 몸을 굴려 6층 복도에 놓여있는 커다란 관상용 관목 화분들 뒤로 숨음과 동시에 다시 한 발의 총알을 발사했다.

타앙-!

다시 한 명의 복면인이 머리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이제 둘."

타다다다다다다다당-!! 파바박, 콰창! 채쟁! 깽그랑!!

복면인들의 총질에 태현의 앞에 놓여있던 화분들이 박살이 났고, 태현은 지체없이 바로 옆의 전자오락실로 뛰어들어갔다. 오락실 유리는 코팅이 되어있었고 태현은 자신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당황하며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오는 복면인 두 명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타앙-!

산뜻하게 유리창을 뚫으며 날아간 44구경 매그넘탄은 곧바로 두 명의 복면인의 가슴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태현은 복면인 두 명이 쓰러지는 것을 확인하며 동시에 재빨리 탄환 여덟발을 다시 탄창에 채워 넣었다.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린다.

"정태현 아직 죽지 않았어."

너무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일종의 쾌감이다. 승리는 곧 삶을, 패배는 곧 죽음을 의미하는 싸움에서 살아남는 것. 생존, 그 이상의 쾌감이 있을까. 생각해보면 그 세계에 뛰어들고 나서의 앞 4년간의 시간을 제외하면 은퇴하기 1,2년 전까지는 매일 같이 이런 생활이었다. 제2차 세키가하라(야쿠자들끼리의 세력 싸움을 일컬어 당사자들 스스로 붙인 이름)를 제패한 야마구치구미와의 지겨운 전쟁. 사실 첫 4년 간을 제외하곤 주먹보단 총을 더 많이 썼었다.
살과 살을 맞대는 주먹 싸움에는 인정이 실린다. 상대방과 손속을 섞는 가운데 상대방에 대한 존경도 생기고 배려라는 것이 생겨난다. 그래서 영역을 넘겨받기 위한 죽기 직전까지의 일대일 싸움 이후엔 항상 그 사람과 우애가 돈독해졌다. 그런식으로 주먹을 나누며 사귄 절우만 해도 얼마나 많던가. 하지만 총은 다르다. 쌍방향이 아닌 일방향이기에 죽고 나면 끝이다. 그래서 싸움에 총이 끼어들면 오로지 죽음과 복수, 원수밖에 생겨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에. 삶, 아니면 죽음. 두 가지 선택 사항밖에 없는 단순한 흑백 싸움이기에 어떠한 쾌감이라는 것이 생겨난다. 죽고 죽이는 처절한 전쟁에서 오늘도 살아남았다는 자아도취감. 지금 태현의 눈에는 살기라는 악귀가 떠올라있었다.
태현은 장전을 하자마자 곧바로 오락실에서 뛰어나갔다. 그의 좌우로 재빠르게 움직인 눈동자가 5층의 상황을 주인에게 인지시켜주었고, 태현은 일단 6층으로 뛰어올라오고 있는 복면인 여섯명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하지만 그들도 바보는 아닌지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곧바로 멈춰서서 총구를 이쪽으로 돌리기 시작했다. 태현은 지체 없이 6층 난간에서 2m가량 떨어진 곳을 지나가는, 벽으로 이어지는 천장에서부터 비스듬하게 5층 홀의 분수대까지 연결되어있는 기다랗고 넓은 휘장으로 몸을 날렸다. 아까 미인대회를 위해 걸어졌던 것인데 이런 일이 일어나서 미처 철거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한편 미쳤다고 하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는 태현의 행동에 홀에 있던 사람들은 놀람의 목소리를 터트렸지만 태현은 한 수 더 떠버렸다.

타앙-! 타앙-! 타앙-! 타앙-!

휘장을 타고 내려오는 그 짧은 순간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내려가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5-6층 연결 계단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복면인들 중 네 명을 쓰러뜨려버렸던 것이다.

우와아아아아아...!!

사람이란 단순해서 절망의 순간에는 닥쳐진 절망의 문제를 체계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기보단 손 닿지 않는 곳에 있는 다른 절대적 힘을 가진 누군가의 도움을 바라기 마련이다. 지금 태현은 국제 강도들의 죽음의 위협에 떨고 있던 2000여명의 사람들의 그런 욕망을 충분히 충족시켜주고 있었다. 영웅의 등장에 여기저기서 환호소리가 터져나오는 가운데 태현은 분수대의 물을 충격흡수대 삼아 5층으로 내려섰다.

첨벙-!

태현은 분수대 안으로 내려서자마자 재빨리 몸을 날려 분수대 뒤쪽으로 몸을 숨겼다.

타다다다다다다다다당-!! 티딩, 탕, 포봉, 퐁! 퐁! 핑! 파방! 팡!

간발의 차이로 태현이 벗어나자마자 분수대에는 총알 세례가 퍼부어졌다.





지금 기룡은 정말 돌아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도대체 자신이 무슨 그런 복 받을 짓을 해놨길래 이런 영상을 캠코더로 담을 수 있게 되었단 말인가! 어쨌든 기룡은 정신 없이 영웅의 모습을 따라 캠코더를 움직여가기 시작했다.

타앙-! 타앙-!

20대 후반 정도 되었을까. 영웅이어서 잘생긴 것인지 잘생겨서 영웅다워 보이는 건지는 몰라도 어쨌든 잘생긴 그 남자는 분수대 뒤로 몸을 숨기자마자 이어서 계단쪽을 향해 두 발을 쐈다. 기룡은 재빨리 계단을 비추었고 그의 캠코더에는 어김없이 정확히 복면인 두 명이 쓰러지는 영상이 담겼다. 이제 계단에는 한 명의 복면인도 서있지 못하게 되었다.

"올해 퓰리처상은 내꺼다."

기룡의 목은 연신 마른침을 꿀꺽 꿀꺽 삼켰다.
한편 테러범 두목의 외침이 터져나온 것은 그때였다.





"멈춰라!! {아호! 사격중지해!} 누군지 정체를 밝히시오!!"

태현은 이제 홀에는 복면인이 한명도 남아있지 않음을 확인하며 중국말을 섞어서 말하는 중년 남자를 응시했다. 역시 저자가 두목이다. 태현은 두 발밖에 남아있지 않는 탄창에 총알을 채워넣으며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너에게 알려줄 만큼 싸구려 이름은 아니다! 살고 싶다면 총을 버려라!!"
"무엇을 원하나!!"

당연히 두목 남자는 태현의 말에 따라 순순히 총을 내려놓는 따위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태현은 여기서 이대로 시한폭탄의 시간을 정지시키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그 요구가 받아들여질지는 둘째치고 폭탄이 설치되어있다는 말에 사람들이 혼란에 빠지는 것이 걱정되어 대답을 망설였다.





"헉...헉...헉...헉......"

현은 정말로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숨이 찰 때까지 싸운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그의 숨이 차오를 때까지 버틴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말이 정확하겠지만) 지금 여자 하나를 상대로 자신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현은 머리카락도 온통 헝클어져 있고 입가에서는 끊임없이 피를 흘리는데다 몸 곳곳에 멍이 들어있음에도 전혀 눈빛이 죽지 않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사신의 딸을 어떤 의미로는 감탄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물론 자신은 주먹질은 커녕 뺨도 별로 날리지 않았지만, 그건 곧 먹을 음식에 침을 뱉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의미의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정말로 끈질기다. 사실 몇 번이나 아예 쓰러뜨려서 죽지 않을 만큼만 두들겨 패준 다음에 따먹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왠지 이 여자에게 그런 방법을 쓰는 건 재미가 없을 것 같다. 이러는 것도 은근히 오기가 생기기도 하고. 어쨌든 한 마디로 지금 현은, 재미있었다.
현은 숨가쁘게 오르내리는 유리의 가슴의 울렁임을 보더니 다시 입주위를 핥으며 유리를 와락 끌어안으려 몸을 날려갔다.

퍼억-!

그러나 이번에도 유리의 펀치가 현의 얼굴에 작렬했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지 자꾸 맞다보니 정말로 아프게 되어버려 현이 얼굴을 옆으로 비틀었고, 유리는 벗길 속셈인지 자신의 브래지어를 잡고 있는 현의 손을 힘껏 깨물었다.

"크악!!"

깨물리는 건 처음이라 현은 비명을 지르며 강아지를 떨쳐내듯이 손을 마구 흔들어 유리를 떼어내었다. 다시 몇 걸음 물러나는 현을 노려보며 유리는 씩씩거렸고 현은 이를 드러내며 시익 웃었다. 정말로 재미있다. 현은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뜻하지 않은 보물을 건졌다는 생각에 얼굴에 기쁨을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을 띄웠다. 앞으로 몇 달간은 심심하지 않겠다.

{큭큭큭큭......}

이런년일수록 길들여놓으면 가지고 노는 맛이 있다. 현은 사신의 딸을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한편 유리는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면서 자신을 쳐다보는 이 중국인의 모습에서 역겨움을 느꼈다. 무슨 정신병자 같다. 여자에 환장한 미친놈 같았다. 유리는 안 와도 정말 심하게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 아빠에게 정말로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는 혹시나 아빠가 무슨 일을 당했을까 걱정이 되었다. 정말이지,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치직, {현! 지금 파티장에 사신이 나타났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중국인의 바지 호주머니에서 무전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재빨리 호주머니에서 조그만 무전기를 꺼내어 뭐라고 중국말로 얘기했다.

{그래?! 지금 바로 갈게! 선물도 있다고. 후후후.}

<{상황이 안 좋아! 갑판으로 가서 최소한의 인원만 남겨놓고 5층 파티장 뒷문으로 조용히 지원 들어와! 알겠나?!}>

유리는 무슨 무전인지 정신을 온통 무전기에 팔고 있는 남자에게서 살금살금 뒤로 물러나 급히 바닥에 떨어져 있는 바지를 들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현은 유리가 도망치기 시작하자 인상을 찡그리며 그녀를 뒤따라 달려가면서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뭐야! 무슨 일인데 그래?!}

<치직, {지금 대원들이...젠장! 아무튼 빨리와!} ...멈춰라!! {아호! 사격중지...} >

현은 점점 소리가 멀어지다가 무전이 끊겨버리자 인상을 확 구기며 저만치 달아나고 있는 유리의 뒤를 냉랭하게 변한 얼굴로 뒤따라 달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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