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부]
태현은 가만히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테러범들을 상대로 대화를 시도한다는 미적지끈한 발상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태현이 역시 예정대로 강행돌파를 하기로 마음 먹은 순간, 대답이 늦어지자 테러범 두목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협상을 제안한다!"
태현의 입가에 가느다란 웃음이 피어올랐다. 태현은 살짝 고개를 들어 복면인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조금 있으면 저 녀석들에게 지원이 들어올지도 모른다. 태현은 아까 갑판으로 38명의 인질을 데리고 가던 열다섯의 복면인들을 떠올리며 총을 고쳐잡았다. 그때 다시 들려오기 시작하는 테러범 두목의 목소리.
"물론 이쪽에서는 전부 무기를 해체하겠다! 그러니.."
타앙-! 타앙-! 타앙-!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태현이 벌떡 일어서서 그의 바로 옆에 있던 세 명의 복면인 가슴에 바람구멍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다시 몸을 숨긴 태현의 귓가로 당황어린 테러범 두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비겁하다! 이쪽에서 협상을 제안하지 않았나!!"
태현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게 내 협상 방식이거든."
태현은 엄호물이 될만한 소파라든지 도박기기 뒤로 급히 몸을 숨기는 여섯명의 테러분자를 힐끗 보고는 외쳤다.
"당신에게 비겁을 논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된다!"
"원하는 것을 말하라! 돈이라면 얼마든지 배분해줄 용의가 있다!"
태현은 똥줄이 타는지 다급한 목소리로 말해오는 테러범 두목의 말에 피식 웃었다. 테러범 두목의 목소리가 이어져 들려왔다.
"일단 3000만 달러를 이 자리에서 주고 상하이로 도착하고 나면 추가로 3500만 달러를 주겠다! 좋은 조건이지 않는가!"
3000만 달러? 보자...1달러에 대충 1000원이라고 치면 10달러에 1만원 100달러에 10만원 1000달러에...10...아, 100만원..인가?
원래 태생적으로 머리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3000만 달러가 한국돈으로 얼마인지 계산을 잘 못하겠다. 태현은 어쨌든 쓸데없는 계산은 집어 치우고 테러범 두목에게 대답했다.
"지하 창고에 설치된걸 해체시켜라! 이것이 내 요구다!"
"그렇게는 못한다!"
"하...뭐라고?"
당연하다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테러범 두목의 거절에 태현의 입가에 가소롭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아저씨...!"
그런데 그때 태현의 귓가에 누군가가 목소리를 낮춰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태현은 뒤로 돌아보았고, 거기엔 열두어살쯤 되어보이는 남자 아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요...! 6층에서 떨어진 거예요...!"
주르르르르......
그러면서 그 아이가 밀어서 준 것은 아까 6층에서 놓쳤던 권총이었다. 태현은 싱긋 웃으며 그 아이에게 고맙다며 고개를 끄덕해주곤 그 아이가 밀어준 권총을 쉬고 있던 나머지 한 손으로 잡아들었다. 그때 다시 테러범 두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신 당신에게 우리측으로 돌아서는 것을 제안한다!"
태현의 눈동자가 한순간 움직여 다섯명의 복면인과 그들의 두목의 위치를 파악했다. 그리고 적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난 다음의 태현의 움직임엔 조금의 지체도 없었다.
타앙-! 타앙-!
벌떡 일어서서 왼손의 총으론 슬롯머신 옆으로 뛰어나와있는 한 복면인의 팔을, 오른손의 총으론 블랙잭바(bar) 뒤에 숨어있는 테러범 두목을 노려 그의 바로 뒤편에 매달려있는 둥그런 등을 쏘아 맞춘 태현.
"크아악...!!"
타앙-! 타앙-! 타앙-!
다시 태현의 양 총구가 불을 뿜었고, 피가 터져나오는 팔을 움켜쥐며 머리를 앞으로 내밀고만 복면인의 머리에 그대로 바람 구멍이 뚫리고 말았고 태현에게 총을 발포하기 위해서 숨어있던 장소에서 뛰쳐나오던 복면인 두명은 똑같이 가슴을 탄환에 관통 당하며 쓰러졌다.
우와아아아아~~!!! 짝짝짝짝~휘이익~!! 짝짝짝짝-!!
이제 카지노쪽에 남아있는 테러분자는 두목을 포함하여 세 명밖에 없었다. 파티장의 홀에서는 그 동안 자신들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복면인들이 맥을 못추며 쓰러져가는 모습에 승객들의 박수와 환호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고, 결국 테러범 두목은 두 손을 든 채 천천히 일어났다.
"하..항복! 항복이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마치 대한독립만세라도 된 것 같다. 결국 떨리는 음성으로 흘러나온, 마치 악마와 같이 느껴졌던 테러범 두목의 항복 선언에 파티장 안의 모든 승객들은 일시에 환호를 터트렸다. 부둥켜 안고 우는가 하면 폴짝 폴짝 뛰며 기뻐하고 이제야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복면인들을 향해 욕설을 퍼붓기 시작하는 등, 가지각색의 사람들 틈을 헤쳐 태현은 천천히 카지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치직, {..어..우와아아!!!..야?! 어디야?!}>
현은 시끄러운 환호소리를 뚫으며 들려오는 진의 신경질적인 무전에 짜증이 치민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파티장 뒷문 바로 앞이야. 이제 들어간다.}
현의 목소리에는 겨우 한 사람을 처리하지 못해 이런 다급한 목소리가 나오게 되게까지 상황을 악화시킨 동료의 무능력에 대한 질책과 분노가 담겨있었다.
무전기를 타고 다시 진의 신경질 섞인 음성이 들려왔다.
<{제기랄! 빨리 들어와!} ...하..항복! 항복이...>
서서히 멀어지는 진의 한국말.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현은 진의 무전이 끝나기가 무섭게 파티장에서 터져나오는 엄청난 환호소리에 눈썹을 찡그렸다. 그리곤 뒤에 서있던 미키에게 지시를 내렸다.
{넌 옆문으로 진입해라.}
{예, 현 대형!}
미키가 고개를 깊이 숙이며 대답하곤 뒤에 늘어서있던 부하들 반을 잘라 다섯명을 데리고 재빨리 복도 저 앞쪽으로 달려갔다. 현은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자신에게 머리채를 휘어잡혀 흐느적거리며 끌려오던 유리를 파티장 문을 박차고 엶과 동시에 안으로 집어 던져버렸다.
풀썩-!
유리는 힘없이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굉음에 휩싸여 있는 파티장은 새로운 손님의 입장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지 못했고, 그래서 현은 총구를 천장으로 향하고 방아쇠를 마구 당겼다.
타앙-타앙-타앙-타앙-타앙-타아앙!!
현의 총소리가 끝맺기 무섭게 저 앞쪽의 파티장 옆문으로는 미키를 위시한 복면인 다섯명이 들어와 천장을 향해 위협사격을 갈겼다.
타다다다다당-!! 타다다다다다당-!!
해방의 순간이 오기가 무섭게 다시 복면인들이 나타나자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터져나오더니 파티장 안은 언제 그랬냐는듯 곧 일시에 침묵에 잠기게 되었다. 현은 바닥에 죽은 듯이 쓰러져있는 유리를 잡아 일으키며 총구를 저 앞쪽의 사신에게로 겨누며 외쳤다.
{사신!!}
갑작스러운 복면인들의 등장에 전잖이 당황하며 엄호물이 될 만한 것을 찾던 태현은 삽시간에 적막으로 휩싸인 파티장의 그 쥐죽은 듯한 공기를 헤치며 터져나온 어떤이의 외침에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태현의 눈이 흠짓 커졌다. 그의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에 자크가 반쯤 올려진 반바지를 엉덩이에 걸치고 윗도리는 벗겨져서 속옷차림만 하고 있는 유리의 모습이 비춰졌다.
똑......
여기까지 소리가 들리는듯하다. 유리의 입가에서 흘러내린 피가 그녀의 얇은 턱선을 타고 내려가 방울져서 떨어졌다. 머리카락은 온통 헝클어져있고 푹 꺽여진 머리는 유리가 살아있다기 보다는 죽어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여쁜 몸의 곳곳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있다. 방금전 뭐라고 중국말로 외친 남자가 허리를 부여잡고있지 않다면 벌써 넘어져 쓰러졌을 것 같았다. 사랑스러운 저 몸에서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태현의 몸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Drop your weapon!!"
현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태현은 알아듣지 못했다.
태현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축 늘어져있는 딸을 향하는 아빠의 애탄 부름이 흘러나간다.
"유리야...?"
꼼짝도 하지 않는 유리.
현의 외침이 다시 터져나왔다.
"I said, drop your weapon!"
"아가리 닥쳐!!"
자꾸만 이상한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는 중국인 남자에게 고함을 버럭 지른 태현. 하지만 저 중국인 남자에게 터트린 분노가 지속되기엔 태현의 눈동자에 떠올라있는 유리의 존재가 너무 컸다.
"...유리야. ......유리야...?"
한걸음 한걸음 유리에게로 다가가며 태현이 애타는 음성으로 딸을 불렀다. 그의 붉어진 눈시울에서 결국 눈물이 줄기를 만들며 떨어져 내렸다. 어째서 곧바로 지하 창고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어째서 쓰잘데 없는 영웅 심리로...맞다. 이건 영웅 심리였다. 정말 병신 쓰레기 같은 영웅 심리였다.
혹시 저 예쁜 살결에 상처라도 날까 어릴 땐 칼도 함부로 못쥐게 했는데, 그렇게나 아끼면서 애지중지 키워왔는데 도대체 어떤 짓을 당했는지 지금 온몸이 상처 투성이다. 유리를 바라보는 태현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겨져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아..빠...?"
그런데 죽은 듯이 있던 유리에게서 가느다란 음성이 흘러나왔다. 서서히 들리는 유리의 얼굴. 피가 말라붙어 있는 그녀의 예쁜 얼굴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흐으..윽...아빠아...왜...왜에...이제야...나 구하러..온 거야아......"
그동안 두려움을 꾹꾹 눌러 참으며 아빠가 구해주러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끝까지 저항하며 싸우면서 느꼈던 그 서러움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 같았다. 아까 창고에서 도망치고 난 다음 잡혔을 때 이후로 기억이 없었다. 정신없이 달리다가 갑자기 앞이 아득해져오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잠시 잃었던 것 같았다. 어렴풋이 정신이 들고나니 맞기라도 한 듯이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손길에 이끌려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보니 어느 순간 그토록 기다리던 아빠의 음성이 들려온 것이다. 유리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아빠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몸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있었다. 아픈 건 싫지만 그래도 아빠가 저렇게 걱정해주니 왠지 모르게 기쁜 마음이 들었다.
"흐윽...아빠아......"
애처로운 유리의 음성.
이곳이 어디인지. 저 많은 사람들은 다 누구인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은 단지 아빠의 저 품에 꼬옥 안겨 위로받고 싶었다. 무서운 것 꾹 참고 나중에 아빠에게 부끄럽지 않게 끝까지 싸운 것을 하소연해서 "힘들었지.."라고 부드럽게 말해주는 아빠의 따스한 음성을 듣고 싶었다.
딸의 애타는 부름에 유리 이외엔 그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태현은 유리를 끌어안으려 달려갔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몇 발자국 움직이지 않아 멈춰져버렸다.
{멈춰라!!}
현의 총구가 유리의 머리에 닿였다.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선 태현. 또다시 저 차가운 쇳구멍이 유리의 머리에 닿는 것을 보니 몸서리가 처졌다. 그는 천천히 바닥에 총을 떨어뜨리며 물기가 스며들어있는 눈빛으로 현을 응시하며 천천히 자신의 웃옷을 벗었다. 탄탄한 근육질 몸이 허리 부근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런닝셔츠 하나로 가려진 채 모습을 드러내었다. 태현은 자신이 벗은 반팔 셔츠를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이것을...제..딸에게..."
유리의 모습을 보니 자꾸만 눈물이 나려고 해서 말을 이어가는 게 너무 힘들었다. 태현은 이를 꽉 물어 울먹임을 참아내곤 다시 말했다.
"부탁..드립니다...제..딸이 이것으로..몸을 가릴 수 있게..해주십시오..."
현의 입가에 조소가 지어졌다. 사신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대충 무슨 의미인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은 미키에게 고개를 까딱, 했고 미키는 곧바로 태현에게 달려가 그의 옆에 떨어져있던 권총 두 자루를 주워들어 분수대 안으로 던져 넣고는 태현에게서 반팔 셔츠를 받아들어 가지고 왔다. 현은 그걸 유리에게 대충 걸쳐주었고 유리는 아빠의 이런 모습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울먹거렸다.
"...나에게 한 대 맞을 때마다 네 딸의 발가락 하나씩을 자른다."
진이 현의 말을 통역해주었다. 2000여명의 승객들을 홀 뒤쪽으로 빽빽하게 밀어놓아 장소를 마련하고 자신의 앞에 태현을 세운 현. 그가 다시 말했다.
{네가 날 넘어뜨리면 네 딸의 다리 하나를 자르는 것으로 형제들의 죽음에 대한 죄 값을 대신하겠다.}
태현과 현의 사이에 서있던 진이 곧바로 통역을 했다.
"네가 날 넘어뜨리는데 성공하면 네 딸의 다리를 하나 자르는 것으로 봐주겠다."
계속해서 끔찍한 말을 하는 진의 목소리에 승객들의 얼굴이 점점 더 경악으로 물들었다.
{네가 날 이기면, 네 딸의 한쪽 발목을 자르는 것으로 형제들의 죽음에 대한 죄 값을 대신하겠다.}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거라는 뉘앙스로 "이기면"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현의 목소리를 진이 다시 조금 바꾸어 통역을 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네가 날 이기면 네 딸의 발목 하나를 자르는 것으로 봐주겠다."
굳은 얼굴로 현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고 있는 태현. 그의 귓가로 이어진 현의 말이 들려왔다.
{네가 날 죽이면. 네 딸은 더 이상 털끝 하나 다치게 하지 않고 무사히 보내주겠다.}
"네가 날 죽이면 네 딸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는다."
"그러니까......"
태현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한 대도 맞지 않고 널 죽이면 되는 것이군."
진이 태현의 말을 현에게 통역해주었고 현은 시익 웃었다. 현은 그리곤 유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네가 질 경우에 넌 내가 보는 앞에서 네 딸을 배 밑에 깔아야 될 거다.}
현의 말에 진은 큭큭거리며 웃더니 다소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보며 통역을 기다리는 태현에게 재밌겠다는 얼굴로 말해주었다.
"현이 말하길, 당신이 지면 당신은 저 아가씨와 섹스를 해야 된다는군. 큭큭큭, 근친상간 말이야. 큭큭큭큭..."
"......!!"
깜짝 놀란 태현이 서서히 얼굴을 굳히며 이를 사려물었다.
"죽여버리겠다."
진은 통역하지 않았다. 그는 카지노로 돌아가 마련된 자리에 앉았고 태현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현에게서 시선을 돌려 복면인들에게 잡혀서 자신을 애타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유리를 바라보았다. 유리를 담자마자 태현의 눈동자는 그 냉랭한 빛깔을 지워버리며 애틋한 물기를 떠올렸다. 다행히도 묶여있던 손은 풀렸고 셔츠의 단추도 채워졌다. 태현은 자신의 눈빛을 놓치기 싫어 어여쁜 눈망울에 더욱 눈물을 글썽이는 유리에게서 애써 시선을 떼어내 눈앞의 사내를 응시했다.
{시작할까?}
천천히 자세를 잡는 현을 보며 그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안 태현은 자신도 서서히 주먹을 끌어쥐었다. 두 남자의 떨어진 거리는 약 3m. 태현의 눈동자가 서서히 물기를 지워내며 차갑게 굳어갔다.
꿀꺽......
기룡은 연신 마른침을 삼키며 마주보고 서있는 두 남자의 모습을 캠코더로 담았다. 정말이지 이 영상을 세상에 퍼트리고 나면 자신은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아, 물론 이 영상이 자신의 촬영물이라는 것도 함께 세상에 알려져야겠지만. 어쨌든 기룡은 서서히 자세를 잡는 중국인 남자에 맞서 천천히 주먹을 끌어쥐는 영웅의 모습을 영상에 담았다.
"......?"
고개를 살짝 갸웃하는 기룡. 왜인지 모르게 몸에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누가 문을 열어놨나?"
당연히 그런 건 아니었다.
기룡의 줌인(zoom-in)된 캠코더 액정에 테러범 두목에게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자꾸 사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영웅의 눈동자가 잡혔다.
"......!"
기룡이 몸을 흠칫 떨었다.
......꿀..꺽...
가슴이 미칠 듯이 쿵쾅거린다.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 기룡.
인간의 눈동자가 아니었다.
"사..신......"
테러범 두목의 목소리를 떠올리는 기룡. 어째서 그가 저 남자를 "사신"이라고 부른 것인지 어렴풋한 짐작이 갔다. 주변의 공기가 온통 얼어붙어있었다.
{타앗!!}
어깨를 한 번 털어 긴장감을 떨쳐낸 중국인 남자가 먼저 기합을 지르며 사신에게 주먹을 날려갔다.
스스스......
태현의 눈동자가 인영을 그리며, 뻗어오는 현의 팔을 옆으로 돌아나갔다. 그와 동시에 태현의 손바닥이 현의 팔꿈치를 올려쳤다.
파악!
{크으윽!}
팔을 움켜쥐며 현이 재빨리 거리를 떨어뜨렸다. 몇 번 팔을 굽혔다 폈다 하던 현은 시익 웃으며 말했다.
{진짜야. 큭큭큭...진짜였어.}
일순간 태현의 입가에 차가운 웃음이 스쳤다. 그는 지금 웃고 있다.
"웃지 못하게 만들어주지."
태현이 서있던 자리에 차가운 공기만 남게 되었다.
쉬잇-!
발이 날아가는 소리가 아니다. 현은 눈동자로 움직임을 쫓기조차 버거운 스피드의 사신의 킥을 팔을 교차시켜 막아내는 것으로 간신히 가드를 하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팔이 부서지는 것만 같다. 하지만 사신의 공격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퍼억-!
현의 허리께로 태현의 공격이 이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현은 태현의 그 공격 역시 다리를 들어 막아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태현을 힘껏 밀어차는 현. 하지만 태현은 몸을 비틀어 현의 공격을 피해내며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현의 다리를 무릎으로 찍어버렸다.
{크하하하!!}
다리를 찍힌 현이 다시 거리를 떨어뜨리며 광소를 터트렸다. 즐거웠다. 정말로 즐거웠다. 이런 상대는 처음 만나본다. 현은 어릴 때부터 이름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바로 그 사신의 실력이 거짓이 아니었음과, 지금 자신이 바로 그 사신과 주먹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낄 정도로 즐거워했다.
태현은 건들거리며 자세를 잡는 현에게 다시 지체 없이 공격을 들어갔다. 방어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저 사내의 공격을 다 피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일까. 현은 짓쳐들어오는 태현의 주먹을 고개를 틀어 스치듯이 피하며 태현의 복부에 펀치를 날렸다. 하지만 몸을 기형적으로 비틀며 태현은 현의 주먹을 피해내었고 그와 동시에 그는 현의 종아리 부근을 차버렸다.
차악!!
착 달라붙는 소리와 함께 현의 몸이 한 순간 기우뚱했다. 하지만 금세 현은 균형을 잡으며 훌쩍 뛰어 순식간에 태현으로부터 거리를 2m이상 떨어뜨렸다. 이제 현의 얼굴에 웃음기 따위는 떠올라있지 않았다. 그는 어느 순간 바로 앞으로 다가와있는 사신에게 똑같은 로우킥을 날렸다.
태현은 힘껏 점프를 하여 현의 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두 다리를 모아 현의 얼굴을 뒤차기로 날려버렸다.
퍼억!
현의 고개가 직각으로 꺽여나가며 그의 얼굴 사방으로 피가 흩뿌려졌다.
타악!
바닥에 착지 하기가 무섭게 그대로 몸을 회전시키며 아직 쓰러지지 않고 서있는 현의 머리에 돌려차기를 날리는 태현. 하지만 현은 엄청난 광경을 연출하며 얻어맞은 것과는 달리 충격이 그리 크지는 않은지 허리를 숙여 태현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내었다.
기룡은 주위에서 연신 터져나오는 탄성 소리를 들으며 급히 정신을 차렸다. 자신도 모르게 저들의 싸움에 넋을 잃고 있었나 보다. 그렇다고는 해도 정말 엄청난 수준의 공방이다. 한 번 뜨니까 바닥에 떨어질 생각을 안 하며 공격을 하는 사신이나, 또 저런, 보통 사람이 맞으면 죽어버릴 것 같은 파워가 실린 공격을 맞고도 연쇄된 공격은 피해내고마는 중국인 남자나.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며 기룡은 다시 저들의 싸움을 녹화하는데 열중하기 시작했다.
서로의 공격을 막거나 피하며 간혹가다 태현의 공격만 적중하던 양상의 두 남자의 싸움은 태현의 스트레이트를 현이 피하며 날린 카운터 펀치가 적중하면서 무너졌다.
퍼어억-!
태현의 얼굴이 뒤로 돌아가며 피가 주위로 흩뿌려졌다. 현은 태현이 한 발자국을 헛디디며 균형 감각을 회복하는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으며 그대로 태현의 허리에 온힘을 실은 주먹을 꼿아 넣었다.
푸욱-!
마치 칼이 쑤셔 넣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커헉!"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터트리며 태현은 급히 몸을 뒤로 물렸다. 하지만 현은 쉬지 않고 태현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팔을 들어올려 가드를 해야겠지만 태현은 허리가 끊어지는 것만 같은 고통에 급히 고개를 공격 방향으로 트는 것으로 충격을 최소화 시켰다. 헛바람이 스치는 느낌에 공격이 실패한 것임을 안 현은 곧바로 디딤발 없이 태현의 턱을 무릎으로 올려찼다.
퍼억-!
고개가 위로 세차게 젖혀지는 태현. 아래로 떨어지는 그의 얼굴은 입가로 피를 한웅큼 주르르 흘려내고 있었다. 현은 서서히 손에 잡혀오는 것 같은 승리의 느낌에 주저하지 않고 풀스윙으로 태현의 얼굴에 피니쉬 펀치를 먹였다.
파라락-!!
그러나 그의 펀치는 허공을 스쳤고,
"어,어떻게!! 균형 감각을 완전히 빼앗는 충격이었을 텐데!"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급히 팔을 회수해 가드를 하는 현의 아래로, 자세를 확 낮춰 그의 펀치를 피했던 태현이 현의 비어있는 옆구리에 힘껏 주먹을 찔러 넣었다.
"크허억...!"
허리를 뒤틀며 고통스러워하는 현.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 이어진 태현의 피니쉬 콤보가 작렬했다.
퍼어억-!!
얼굴이 옆으로 힘껏 돌아가며 발을 계속 헛디디던 현은 몇 미터나 밀려가 결국 다운되고 말았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승객들의 함성이 터져나왔다.
진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그는 뒤에 서있던 아호에게 손짓했고, 아호는 즉시 총을 들어 사신의 다리에 발사했다.
타다당-!!
세 발의 총알 중 한발이 사신의 왼쪽 종아리에 명중되었다. 진은 고통에 찬 신음소릴 터트리며 왼쪽 다리를 감싸잡는 사신의 모습에 그제야 만족한 듯, 경악으로 휩싸인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수천의 눈동자를 향해 시익 웃어주었다.
"개새끼들...개에새끼들......"
이곳 파티장 홀에 앉아 싸움을 지켜보던 그 어떤 사람과도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환호성을 내질렀던 기룡은 죽일 듯한 시선으로 테러범 두목을 노려보았다. 악당도 저 정도면 정말 악마다. 기룡은 저 중년 남자의 사악한 미소에 치를 떨며 다짐했다.
"반드시 네 악행을 만천하에 알리고 말겠다. 반드시...내 목숨과 바꿔서라도......"
"아빠...아빠아......"
말라붙은 핏자국을 지워내며 유리의 얼굴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복면인들에게 꼼짝도 할 수 없이 잡혀서 애타게 아빠만 부르는 유리. 그런데 자꾸만 눈물을 만들어내어 주인의 시야를 끊임없이 흐릿하게 만들던 유리의 눈망울이 아빠의 눈동자를 담아내었다.
"아빠...! 흐으..으윽...아빠아......!"
적막으로 휩싸인 파티장으로 애절한 유리의 목소리가 퍼져나가고, 딸을 한 번 본 태현은 이를 악물며 런닝셔츠를 벗어 상처부위를 꽉 싸메었다. 그런 그의 앞으로 간신히 정신을 차린 현이 천천히 다가온다.
이제껏 이 세상에 자신보다 강한 남자는 없다고 자부하며 살아왔던 자신을 깨끗하게 다운시켜버린 이 남자가 동료의 비겁한 술수에 상처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본 현이 무슨말을 할까.
{이제......}
그는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더 재미있게 되었군.}
현은 이를 사려물며 천천히 일어나고 있는 태현에게 달려들어 그의 왼쪽 다리를 걷어찼다.
"크아..아악......"
갑작스런 현의 공격에 그대로 상처 부위를 걷어차인 태현은 고통스런 얼굴로 주춤 주춤 몸을 뒤로 물렸고, 현은 그런 태현을 씨익 웃는 얼굴로 바라보며 다시 달려들어 또 한 번 태현의 왼쪽 다리를 차버렸다.
퍼억!!
"크아..흐..윽......"
정말로 혼절할 정도로 아프다. 그 고통을 참아내느라 태현은 잇몸이 헐 정도로 이를 꽉 물며 다시금 주먹을 끌어쥐었다. 태현의 필사적인 모습에 현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그에게 곧바로 사정없는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태현이 우위를 점한 채 그래도 어느 정도 호각을 이루었던 두 사람의 공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것은 그때부터였다. 대결이나 싸움이 아니다. 일방적인 구타였다. 집요하게 태현의 왼쪽 다리를 공격하는 현은 얼마지나지 않아 태현을 만신창이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헉...허억...헉...헉..."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벌써 몇 번이나 쓰러졌는지 태현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온통 피칠을 하고 있는 태현. 그는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다시 바닥에서 일어났다. 뒤에서 유리의 애달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일어나지마...흐윽, 제발...일어나지마..으흐흐흑..."
유리의 흐느낌을 들으며 태현이 다시 주먹을 끌어쥐었다. 저 자식만 죽이면 된다. 그러면 유리는 건드리지 않는다고 그랬다. 당연히 지키지 않을 약속이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렇게 일어서서 다시 저 녀석에게 주먹을 내뻗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한편 현의 무자비한 구타와 사신의 끈질긴 저항도 슬슬 지겨워지려던 진에게 무전을 받은 미키가 말해왔다.
{지금 왕 대형이 도착하셨다 합니다.}
미키의 말을 들은 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박수를 두 번 짝짝 쳤다.
{이봐! 현! 왕펑이 왔다! 슬슬 끝내고 갈 준비해!}
진의 말에 현은 인상을 찡그리며 미키에게 물었다.
{시간 얼마 남았나!}
{앞으로 37분 남았습니다.}
미키의 대답에 잠깐 머리를 굴린 현. 그는 고개를 까딱하며 말했다.
{이 녀석과 이 녀석 딸을 데리고 와라.}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태현을 내버려둔 채 카지노쪽으로 걸어가며 현이 말했다. 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결국에는 그짓을 해야겠나.}
이를 드러내며 웃는 현.
{당연하지. 저런 독종 새끼는 쳐맞는 것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거든. 20분이면 되니까 먼저 가있어라.}
맘대로 하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는 진.
{그러지.}
현이 먼저 파티장을 나가고, 그 뒤를 복면인 네 명이 태현과 유리를 붙잡은 채 따라갔다. 그들이 모두 나가는 것을 본 진은 아호에게 눈짓했고 아호는 재빠른 손동작으로 부하들 몇 명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흠, 흠! 이제 슬슬 여러분들에게 사실을 말해주겠다."
파티장에서 밖으로 연결되는 모든 문을 잠그러 가는 부하들에게서 시선을 뗀 진은 분노 혹은 슬픔, 불안, 걱정과 같은 각양각색의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목소리 톤을 살짝 올려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 배에는 총 스물여섯개의 시한폭탄이 설치되어 있으며..."
갑자기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승객들을 보며 진은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들고 있던 총으로 승객 무리 한 가운데를 향해 쐈다.
타앙-!!
누군가가 머리에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그 주위로는 비명이 터져나왔고, 곧 파티장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진은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흠, 흠. 에...그런 거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우리의 흔적을 남기지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 배와 함께 바다속으로 가라앉아 주셔야겠다. 참고로 앞으로 남아있는 시간은 대략 35분 정도이며 나는 여러분들이 바다로 뛰어들어 홀로 상어밥이 되는 등의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길 바라기에, 여러분들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파티장의 문은 모두 밖에서 잠그기로 결정했다. 그러면, 남은 35분 가량의 시간을 소중히 쓰기 바란다."
충격에 빠져 있는 파티장의 적막을 가로지르며 진은 복면인들을 이끌고 유유히 파티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가 파티장을 빠져나가고 몇 초가 지나지 않아, 닫겨진 문 밖으로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고함소리, 울음소리들이 시끄럽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진은 아비규환의 그 장면을 직접 보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운듯 시익 웃으며 시가를 피워 물었다.
태현은 가만히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테러범들을 상대로 대화를 시도한다는 미적지끈한 발상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태현이 역시 예정대로 강행돌파를 하기로 마음 먹은 순간, 대답이 늦어지자 테러범 두목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협상을 제안한다!"
태현의 입가에 가느다란 웃음이 피어올랐다. 태현은 살짝 고개를 들어 복면인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조금 있으면 저 녀석들에게 지원이 들어올지도 모른다. 태현은 아까 갑판으로 38명의 인질을 데리고 가던 열다섯의 복면인들을 떠올리며 총을 고쳐잡았다. 그때 다시 들려오기 시작하는 테러범 두목의 목소리.
"물론 이쪽에서는 전부 무기를 해체하겠다! 그러니.."
타앙-! 타앙-! 타앙-!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태현이 벌떡 일어서서 그의 바로 옆에 있던 세 명의 복면인 가슴에 바람구멍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다시 몸을 숨긴 태현의 귓가로 당황어린 테러범 두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비겁하다! 이쪽에서 협상을 제안하지 않았나!!"
태현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게 내 협상 방식이거든."
태현은 엄호물이 될만한 소파라든지 도박기기 뒤로 급히 몸을 숨기는 여섯명의 테러분자를 힐끗 보고는 외쳤다.
"당신에게 비겁을 논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된다!"
"원하는 것을 말하라! 돈이라면 얼마든지 배분해줄 용의가 있다!"
태현은 똥줄이 타는지 다급한 목소리로 말해오는 테러범 두목의 말에 피식 웃었다. 테러범 두목의 목소리가 이어져 들려왔다.
"일단 3000만 달러를 이 자리에서 주고 상하이로 도착하고 나면 추가로 3500만 달러를 주겠다! 좋은 조건이지 않는가!"
3000만 달러? 보자...1달러에 대충 1000원이라고 치면 10달러에 1만원 100달러에 10만원 1000달러에...10...아, 100만원..인가?
원래 태생적으로 머리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3000만 달러가 한국돈으로 얼마인지 계산을 잘 못하겠다. 태현은 어쨌든 쓸데없는 계산은 집어 치우고 테러범 두목에게 대답했다.
"지하 창고에 설치된걸 해체시켜라! 이것이 내 요구다!"
"그렇게는 못한다!"
"하...뭐라고?"
당연하다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테러범 두목의 거절에 태현의 입가에 가소롭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아저씨...!"
그런데 그때 태현의 귓가에 누군가가 목소리를 낮춰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태현은 뒤로 돌아보았고, 거기엔 열두어살쯤 되어보이는 남자 아이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거요...! 6층에서 떨어진 거예요...!"
주르르르르......
그러면서 그 아이가 밀어서 준 것은 아까 6층에서 놓쳤던 권총이었다. 태현은 싱긋 웃으며 그 아이에게 고맙다며 고개를 끄덕해주곤 그 아이가 밀어준 권총을 쉬고 있던 나머지 한 손으로 잡아들었다. 그때 다시 테러범 두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신 당신에게 우리측으로 돌아서는 것을 제안한다!"
태현의 눈동자가 한순간 움직여 다섯명의 복면인과 그들의 두목의 위치를 파악했다. 그리고 적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난 다음의 태현의 움직임엔 조금의 지체도 없었다.
타앙-! 타앙-!
벌떡 일어서서 왼손의 총으론 슬롯머신 옆으로 뛰어나와있는 한 복면인의 팔을, 오른손의 총으론 블랙잭바(bar) 뒤에 숨어있는 테러범 두목을 노려 그의 바로 뒤편에 매달려있는 둥그런 등을 쏘아 맞춘 태현.
"크아악...!!"
타앙-! 타앙-! 타앙-!
다시 태현의 양 총구가 불을 뿜었고, 피가 터져나오는 팔을 움켜쥐며 머리를 앞으로 내밀고만 복면인의 머리에 그대로 바람 구멍이 뚫리고 말았고 태현에게 총을 발포하기 위해서 숨어있던 장소에서 뛰쳐나오던 복면인 두명은 똑같이 가슴을 탄환에 관통 당하며 쓰러졌다.
우와아아아아~~!!! 짝짝짝짝~휘이익~!! 짝짝짝짝-!!
이제 카지노쪽에 남아있는 테러분자는 두목을 포함하여 세 명밖에 없었다. 파티장의 홀에서는 그 동안 자신들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복면인들이 맥을 못추며 쓰러져가는 모습에 승객들의 박수와 환호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고, 결국 테러범 두목은 두 손을 든 채 천천히 일어났다.
"하..항복! 항복이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마치 대한독립만세라도 된 것 같다. 결국 떨리는 음성으로 흘러나온, 마치 악마와 같이 느껴졌던 테러범 두목의 항복 선언에 파티장 안의 모든 승객들은 일시에 환호를 터트렸다. 부둥켜 안고 우는가 하면 폴짝 폴짝 뛰며 기뻐하고 이제야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복면인들을 향해 욕설을 퍼붓기 시작하는 등, 가지각색의 사람들 틈을 헤쳐 태현은 천천히 카지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치직, {..어..우와아아!!!..야?! 어디야?!}>
현은 시끄러운 환호소리를 뚫으며 들려오는 진의 신경질적인 무전에 짜증이 치민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파티장 뒷문 바로 앞이야. 이제 들어간다.}
현의 목소리에는 겨우 한 사람을 처리하지 못해 이런 다급한 목소리가 나오게 되게까지 상황을 악화시킨 동료의 무능력에 대한 질책과 분노가 담겨있었다.
무전기를 타고 다시 진의 신경질 섞인 음성이 들려왔다.
<{제기랄! 빨리 들어와!} ...하..항복! 항복이...>
서서히 멀어지는 진의 한국말.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
현은 진의 무전이 끝나기가 무섭게 파티장에서 터져나오는 엄청난 환호소리에 눈썹을 찡그렸다. 그리곤 뒤에 서있던 미키에게 지시를 내렸다.
{넌 옆문으로 진입해라.}
{예, 현 대형!}
미키가 고개를 깊이 숙이며 대답하곤 뒤에 늘어서있던 부하들 반을 잘라 다섯명을 데리고 재빨리 복도 저 앞쪽으로 달려갔다. 현은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자신에게 머리채를 휘어잡혀 흐느적거리며 끌려오던 유리를 파티장 문을 박차고 엶과 동시에 안으로 집어 던져버렸다.
풀썩-!
유리는 힘없이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굉음에 휩싸여 있는 파티장은 새로운 손님의 입장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지 못했고, 그래서 현은 총구를 천장으로 향하고 방아쇠를 마구 당겼다.
타앙-타앙-타앙-타앙-타앙-타아앙!!
현의 총소리가 끝맺기 무섭게 저 앞쪽의 파티장 옆문으로는 미키를 위시한 복면인 다섯명이 들어와 천장을 향해 위협사격을 갈겼다.
타다다다다당-!! 타다다다다다당-!!
해방의 순간이 오기가 무섭게 다시 복면인들이 나타나자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터져나오더니 파티장 안은 언제 그랬냐는듯 곧 일시에 침묵에 잠기게 되었다. 현은 바닥에 죽은 듯이 쓰러져있는 유리를 잡아 일으키며 총구를 저 앞쪽의 사신에게로 겨누며 외쳤다.
{사신!!}
갑작스러운 복면인들의 등장에 전잖이 당황하며 엄호물이 될 만한 것을 찾던 태현은 삽시간에 적막으로 휩싸인 파티장의 그 쥐죽은 듯한 공기를 헤치며 터져나온 어떤이의 외침에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태현의 눈이 흠짓 커졌다. 그의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에 자크가 반쯤 올려진 반바지를 엉덩이에 걸치고 윗도리는 벗겨져서 속옷차림만 하고 있는 유리의 모습이 비춰졌다.
똑......
여기까지 소리가 들리는듯하다. 유리의 입가에서 흘러내린 피가 그녀의 얇은 턱선을 타고 내려가 방울져서 떨어졌다. 머리카락은 온통 헝클어져있고 푹 꺽여진 머리는 유리가 살아있다기 보다는 죽어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여쁜 몸의 곳곳에는 시퍼런 멍이 들어있다. 방금전 뭐라고 중국말로 외친 남자가 허리를 부여잡고있지 않다면 벌써 넘어져 쓰러졌을 것 같았다. 사랑스러운 저 몸에서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태현의 몸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Drop your weapon!!"
현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태현은 알아듣지 못했다.
태현의 눈가에 눈물이 차올랐다. 축 늘어져있는 딸을 향하는 아빠의 애탄 부름이 흘러나간다.
"유리야...?"
꼼짝도 하지 않는 유리.
현의 외침이 다시 터져나왔다.
"I said, drop your weapon!"
"아가리 닥쳐!!"
자꾸만 이상한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는 중국인 남자에게 고함을 버럭 지른 태현. 하지만 저 중국인 남자에게 터트린 분노가 지속되기엔 태현의 눈동자에 떠올라있는 유리의 존재가 너무 컸다.
"...유리야. ......유리야...?"
한걸음 한걸음 유리에게로 다가가며 태현이 애타는 음성으로 딸을 불렀다. 그의 붉어진 눈시울에서 결국 눈물이 줄기를 만들며 떨어져 내렸다. 어째서 곧바로 지하 창고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어째서 쓰잘데 없는 영웅 심리로...맞다. 이건 영웅 심리였다. 정말 병신 쓰레기 같은 영웅 심리였다.
혹시 저 예쁜 살결에 상처라도 날까 어릴 땐 칼도 함부로 못쥐게 했는데, 그렇게나 아끼면서 애지중지 키워왔는데 도대체 어떤 짓을 당했는지 지금 온몸이 상처 투성이다. 유리를 바라보는 태현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겨져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아..빠...?"
그런데 죽은 듯이 있던 유리에게서 가느다란 음성이 흘러나왔다. 서서히 들리는 유리의 얼굴. 피가 말라붙어 있는 그녀의 예쁜 얼굴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흐으..윽...아빠아...왜...왜에...이제야...나 구하러..온 거야아......"
그동안 두려움을 꾹꾹 눌러 참으며 아빠가 구해주러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끝까지 저항하며 싸우면서 느꼈던 그 서러움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 같았다. 아까 창고에서 도망치고 난 다음 잡혔을 때 이후로 기억이 없었다. 정신없이 달리다가 갑자기 앞이 아득해져오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잠시 잃었던 것 같았다. 어렴풋이 정신이 들고나니 맞기라도 한 듯이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손길에 이끌려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보니 어느 순간 그토록 기다리던 아빠의 음성이 들려온 것이다. 유리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아빠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몸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있었다. 아픈 건 싫지만 그래도 아빠가 저렇게 걱정해주니 왠지 모르게 기쁜 마음이 들었다.
"흐윽...아빠아......"
애처로운 유리의 음성.
이곳이 어디인지. 저 많은 사람들은 다 누구인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은 단지 아빠의 저 품에 꼬옥 안겨 위로받고 싶었다. 무서운 것 꾹 참고 나중에 아빠에게 부끄럽지 않게 끝까지 싸운 것을 하소연해서 "힘들었지.."라고 부드럽게 말해주는 아빠의 따스한 음성을 듣고 싶었다.
딸의 애타는 부름에 유리 이외엔 그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태현은 유리를 끌어안으려 달려갔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은 몇 발자국 움직이지 않아 멈춰져버렸다.
{멈춰라!!}
현의 총구가 유리의 머리에 닿였다.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선 태현. 또다시 저 차가운 쇳구멍이 유리의 머리에 닿는 것을 보니 몸서리가 처졌다. 그는 천천히 바닥에 총을 떨어뜨리며 물기가 스며들어있는 눈빛으로 현을 응시하며 천천히 자신의 웃옷을 벗었다. 탄탄한 근육질 몸이 허리 부근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런닝셔츠 하나로 가려진 채 모습을 드러내었다. 태현은 자신이 벗은 반팔 셔츠를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이것을...제..딸에게..."
유리의 모습을 보니 자꾸만 눈물이 나려고 해서 말을 이어가는 게 너무 힘들었다. 태현은 이를 꽉 물어 울먹임을 참아내곤 다시 말했다.
"부탁..드립니다...제..딸이 이것으로..몸을 가릴 수 있게..해주십시오..."
현의 입가에 조소가 지어졌다. 사신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대충 무슨 의미인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은 미키에게 고개를 까딱, 했고 미키는 곧바로 태현에게 달려가 그의 옆에 떨어져있던 권총 두 자루를 주워들어 분수대 안으로 던져 넣고는 태현에게서 반팔 셔츠를 받아들어 가지고 왔다. 현은 그걸 유리에게 대충 걸쳐주었고 유리는 아빠의 이런 모습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얼굴로 울먹거렸다.
"...나에게 한 대 맞을 때마다 네 딸의 발가락 하나씩을 자른다."
진이 현의 말을 통역해주었다. 2000여명의 승객들을 홀 뒤쪽으로 빽빽하게 밀어놓아 장소를 마련하고 자신의 앞에 태현을 세운 현. 그가 다시 말했다.
{네가 날 넘어뜨리면 네 딸의 다리 하나를 자르는 것으로 형제들의 죽음에 대한 죄 값을 대신하겠다.}
태현과 현의 사이에 서있던 진이 곧바로 통역을 했다.
"네가 날 넘어뜨리는데 성공하면 네 딸의 다리를 하나 자르는 것으로 봐주겠다."
계속해서 끔찍한 말을 하는 진의 목소리에 승객들의 얼굴이 점점 더 경악으로 물들었다.
{네가 날 이기면, 네 딸의 한쪽 발목을 자르는 것으로 형제들의 죽음에 대한 죄 값을 대신하겠다.}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거라는 뉘앙스로 "이기면"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현의 목소리를 진이 다시 조금 바꾸어 통역을 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네가 날 이기면 네 딸의 발목 하나를 자르는 것으로 봐주겠다."
굳은 얼굴로 현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고 있는 태현. 그의 귓가로 이어진 현의 말이 들려왔다.
{네가 날 죽이면. 네 딸은 더 이상 털끝 하나 다치게 하지 않고 무사히 보내주겠다.}
"네가 날 죽이면 네 딸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는다."
"그러니까......"
태현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한 대도 맞지 않고 널 죽이면 되는 것이군."
진이 태현의 말을 현에게 통역해주었고 현은 시익 웃었다. 현은 그리곤 유리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네가 질 경우에 넌 내가 보는 앞에서 네 딸을 배 밑에 깔아야 될 거다.}
현의 말에 진은 큭큭거리며 웃더니 다소 의아한 얼굴로 자신을 보며 통역을 기다리는 태현에게 재밌겠다는 얼굴로 말해주었다.
"현이 말하길, 당신이 지면 당신은 저 아가씨와 섹스를 해야 된다는군. 큭큭큭, 근친상간 말이야. 큭큭큭큭..."
"......!!"
깜짝 놀란 태현이 서서히 얼굴을 굳히며 이를 사려물었다.
"죽여버리겠다."
진은 통역하지 않았다. 그는 카지노로 돌아가 마련된 자리에 앉았고 태현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현에게서 시선을 돌려 복면인들에게 잡혀서 자신을 애타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유리를 바라보았다. 유리를 담자마자 태현의 눈동자는 그 냉랭한 빛깔을 지워버리며 애틋한 물기를 떠올렸다. 다행히도 묶여있던 손은 풀렸고 셔츠의 단추도 채워졌다. 태현은 자신의 눈빛을 놓치기 싫어 어여쁜 눈망울에 더욱 눈물을 글썽이는 유리에게서 애써 시선을 떼어내 눈앞의 사내를 응시했다.
{시작할까?}
천천히 자세를 잡는 현을 보며 그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안 태현은 자신도 서서히 주먹을 끌어쥐었다. 두 남자의 떨어진 거리는 약 3m. 태현의 눈동자가 서서히 물기를 지워내며 차갑게 굳어갔다.
꿀꺽......
기룡은 연신 마른침을 삼키며 마주보고 서있는 두 남자의 모습을 캠코더로 담았다. 정말이지 이 영상을 세상에 퍼트리고 나면 자신은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아, 물론 이 영상이 자신의 촬영물이라는 것도 함께 세상에 알려져야겠지만. 어쨌든 기룡은 서서히 자세를 잡는 중국인 남자에 맞서 천천히 주먹을 끌어쥐는 영웅의 모습을 영상에 담았다.
"......?"
고개를 살짝 갸웃하는 기룡. 왜인지 모르게 몸에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누가 문을 열어놨나?"
당연히 그런 건 아니었다.
기룡의 줌인(zoom-in)된 캠코더 액정에 테러범 두목에게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자꾸 사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영웅의 눈동자가 잡혔다.
"......!"
기룡이 몸을 흠칫 떨었다.
......꿀..꺽...
가슴이 미칠 듯이 쿵쾅거린다.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 기룡.
인간의 눈동자가 아니었다.
"사..신......"
테러범 두목의 목소리를 떠올리는 기룡. 어째서 그가 저 남자를 "사신"이라고 부른 것인지 어렴풋한 짐작이 갔다. 주변의 공기가 온통 얼어붙어있었다.
{타앗!!}
어깨를 한 번 털어 긴장감을 떨쳐낸 중국인 남자가 먼저 기합을 지르며 사신에게 주먹을 날려갔다.
스스스......
태현의 눈동자가 인영을 그리며, 뻗어오는 현의 팔을 옆으로 돌아나갔다. 그와 동시에 태현의 손바닥이 현의 팔꿈치를 올려쳤다.
파악!
{크으윽!}
팔을 움켜쥐며 현이 재빨리 거리를 떨어뜨렸다. 몇 번 팔을 굽혔다 폈다 하던 현은 시익 웃으며 말했다.
{진짜야. 큭큭큭...진짜였어.}
일순간 태현의 입가에 차가운 웃음이 스쳤다. 그는 지금 웃고 있다.
"웃지 못하게 만들어주지."
태현이 서있던 자리에 차가운 공기만 남게 되었다.
쉬잇-!
발이 날아가는 소리가 아니다. 현은 눈동자로 움직임을 쫓기조차 버거운 스피드의 사신의 킥을 팔을 교차시켜 막아내는 것으로 간신히 가드를 하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팔이 부서지는 것만 같다. 하지만 사신의 공격은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퍼억-!
현의 허리께로 태현의 공격이 이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현은 태현의 그 공격 역시 다리를 들어 막아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태현을 힘껏 밀어차는 현. 하지만 태현은 몸을 비틀어 현의 공격을 피해내며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현의 다리를 무릎으로 찍어버렸다.
{크하하하!!}
다리를 찍힌 현이 다시 거리를 떨어뜨리며 광소를 터트렸다. 즐거웠다. 정말로 즐거웠다. 이런 상대는 처음 만나본다. 현은 어릴 때부터 이름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바로 그 사신의 실력이 거짓이 아니었음과, 지금 자신이 바로 그 사신과 주먹을 나누고 있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낄 정도로 즐거워했다.
태현은 건들거리며 자세를 잡는 현에게 다시 지체 없이 공격을 들어갔다. 방어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저 사내의 공격을 다 피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일까. 현은 짓쳐들어오는 태현의 주먹을 고개를 틀어 스치듯이 피하며 태현의 복부에 펀치를 날렸다. 하지만 몸을 기형적으로 비틀며 태현은 현의 주먹을 피해내었고 그와 동시에 그는 현의 종아리 부근을 차버렸다.
차악!!
착 달라붙는 소리와 함께 현의 몸이 한 순간 기우뚱했다. 하지만 금세 현은 균형을 잡으며 훌쩍 뛰어 순식간에 태현으로부터 거리를 2m이상 떨어뜨렸다. 이제 현의 얼굴에 웃음기 따위는 떠올라있지 않았다. 그는 어느 순간 바로 앞으로 다가와있는 사신에게 똑같은 로우킥을 날렸다.
태현은 힘껏 점프를 하여 현의 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두 다리를 모아 현의 얼굴을 뒤차기로 날려버렸다.
퍼억!
현의 고개가 직각으로 꺽여나가며 그의 얼굴 사방으로 피가 흩뿌려졌다.
타악!
바닥에 착지 하기가 무섭게 그대로 몸을 회전시키며 아직 쓰러지지 않고 서있는 현의 머리에 돌려차기를 날리는 태현. 하지만 현은 엄청난 광경을 연출하며 얻어맞은 것과는 달리 충격이 그리 크지는 않은지 허리를 숙여 태현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내었다.
기룡은 주위에서 연신 터져나오는 탄성 소리를 들으며 급히 정신을 차렸다. 자신도 모르게 저들의 싸움에 넋을 잃고 있었나 보다. 그렇다고는 해도 정말 엄청난 수준의 공방이다. 한 번 뜨니까 바닥에 떨어질 생각을 안 하며 공격을 하는 사신이나, 또 저런, 보통 사람이 맞으면 죽어버릴 것 같은 파워가 실린 공격을 맞고도 연쇄된 공격은 피해내고마는 중국인 남자나.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며 기룡은 다시 저들의 싸움을 녹화하는데 열중하기 시작했다.
서로의 공격을 막거나 피하며 간혹가다 태현의 공격만 적중하던 양상의 두 남자의 싸움은 태현의 스트레이트를 현이 피하며 날린 카운터 펀치가 적중하면서 무너졌다.
퍼어억-!
태현의 얼굴이 뒤로 돌아가며 피가 주위로 흩뿌려졌다. 현은 태현이 한 발자국을 헛디디며 균형 감각을 회복하는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으며 그대로 태현의 허리에 온힘을 실은 주먹을 꼿아 넣었다.
푸욱-!
마치 칼이 쑤셔 넣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커헉!"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터트리며 태현은 급히 몸을 뒤로 물렸다. 하지만 현은 쉬지 않고 태현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팔을 들어올려 가드를 해야겠지만 태현은 허리가 끊어지는 것만 같은 고통에 급히 고개를 공격 방향으로 트는 것으로 충격을 최소화 시켰다. 헛바람이 스치는 느낌에 공격이 실패한 것임을 안 현은 곧바로 디딤발 없이 태현의 턱을 무릎으로 올려찼다.
퍼억-!
고개가 위로 세차게 젖혀지는 태현. 아래로 떨어지는 그의 얼굴은 입가로 피를 한웅큼 주르르 흘려내고 있었다. 현은 서서히 손에 잡혀오는 것 같은 승리의 느낌에 주저하지 않고 풀스윙으로 태현의 얼굴에 피니쉬 펀치를 먹였다.
파라락-!!
그러나 그의 펀치는 허공을 스쳤고,
"어,어떻게!! 균형 감각을 완전히 빼앗는 충격이었을 텐데!"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급히 팔을 회수해 가드를 하는 현의 아래로, 자세를 확 낮춰 그의 펀치를 피했던 태현이 현의 비어있는 옆구리에 힘껏 주먹을 찔러 넣었다.
"크허억...!"
허리를 뒤틀며 고통스러워하는 현.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 이어진 태현의 피니쉬 콤보가 작렬했다.
퍼어억-!!
얼굴이 옆으로 힘껏 돌아가며 발을 계속 헛디디던 현은 몇 미터나 밀려가 결국 다운되고 말았다.
우와아아아아아아!!!!
승객들의 함성이 터져나왔다.
진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그는 뒤에 서있던 아호에게 손짓했고, 아호는 즉시 총을 들어 사신의 다리에 발사했다.
타다당-!!
세 발의 총알 중 한발이 사신의 왼쪽 종아리에 명중되었다. 진은 고통에 찬 신음소릴 터트리며 왼쪽 다리를 감싸잡는 사신의 모습에 그제야 만족한 듯, 경악으로 휩싸인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수천의 눈동자를 향해 시익 웃어주었다.
"개새끼들...개에새끼들......"
이곳 파티장 홀에 앉아 싸움을 지켜보던 그 어떤 사람과도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환호성을 내질렀던 기룡은 죽일 듯한 시선으로 테러범 두목을 노려보았다. 악당도 저 정도면 정말 악마다. 기룡은 저 중년 남자의 사악한 미소에 치를 떨며 다짐했다.
"반드시 네 악행을 만천하에 알리고 말겠다. 반드시...내 목숨과 바꿔서라도......"
"아빠...아빠아......"
말라붙은 핏자국을 지워내며 유리의 얼굴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복면인들에게 꼼짝도 할 수 없이 잡혀서 애타게 아빠만 부르는 유리. 그런데 자꾸만 눈물을 만들어내어 주인의 시야를 끊임없이 흐릿하게 만들던 유리의 눈망울이 아빠의 눈동자를 담아내었다.
"아빠...! 흐으..으윽...아빠아......!"
적막으로 휩싸인 파티장으로 애절한 유리의 목소리가 퍼져나가고, 딸을 한 번 본 태현은 이를 악물며 런닝셔츠를 벗어 상처부위를 꽉 싸메었다. 그런 그의 앞으로 간신히 정신을 차린 현이 천천히 다가온다.
이제껏 이 세상에 자신보다 강한 남자는 없다고 자부하며 살아왔던 자신을 깨끗하게 다운시켜버린 이 남자가 동료의 비겁한 술수에 상처를 입고 있는 모습을 본 현이 무슨말을 할까.
{이제......}
그는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더 재미있게 되었군.}
현은 이를 사려물며 천천히 일어나고 있는 태현에게 달려들어 그의 왼쪽 다리를 걷어찼다.
"크아..아악......"
갑작스런 현의 공격에 그대로 상처 부위를 걷어차인 태현은 고통스런 얼굴로 주춤 주춤 몸을 뒤로 물렸고, 현은 그런 태현을 씨익 웃는 얼굴로 바라보며 다시 달려들어 또 한 번 태현의 왼쪽 다리를 차버렸다.
퍼억!!
"크아..흐..윽......"
정말로 혼절할 정도로 아프다. 그 고통을 참아내느라 태현은 잇몸이 헐 정도로 이를 꽉 물며 다시금 주먹을 끌어쥐었다. 태현의 필사적인 모습에 현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그에게 곧바로 사정없는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태현이 우위를 점한 채 그래도 어느 정도 호각을 이루었던 두 사람의 공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것은 그때부터였다. 대결이나 싸움이 아니다. 일방적인 구타였다. 집요하게 태현의 왼쪽 다리를 공격하는 현은 얼마지나지 않아 태현을 만신창이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헉...허억...헉...헉..."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벌써 몇 번이나 쓰러졌는지 태현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머리부터 발 끝까지 온통 피칠을 하고 있는 태현. 그는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다시 바닥에서 일어났다. 뒤에서 유리의 애달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일어나지마...흐윽, 제발...일어나지마..으흐흐흑..."
유리의 흐느낌을 들으며 태현이 다시 주먹을 끌어쥐었다. 저 자식만 죽이면 된다. 그러면 유리는 건드리지 않는다고 그랬다. 당연히 지키지 않을 약속이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렇게 일어서서 다시 저 녀석에게 주먹을 내뻗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한편 현의 무자비한 구타와 사신의 끈질긴 저항도 슬슬 지겨워지려던 진에게 무전을 받은 미키가 말해왔다.
{지금 왕 대형이 도착하셨다 합니다.}
미키의 말을 들은 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박수를 두 번 짝짝 쳤다.
{이봐! 현! 왕펑이 왔다! 슬슬 끝내고 갈 준비해!}
진의 말에 현은 인상을 찡그리며 미키에게 물었다.
{시간 얼마 남았나!}
{앞으로 37분 남았습니다.}
미키의 대답에 잠깐 머리를 굴린 현. 그는 고개를 까딱하며 말했다.
{이 녀석과 이 녀석 딸을 데리고 와라.}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태현을 내버려둔 채 카지노쪽으로 걸어가며 현이 말했다. 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결국에는 그짓을 해야겠나.}
이를 드러내며 웃는 현.
{당연하지. 저런 독종 새끼는 쳐맞는 것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거든. 20분이면 되니까 먼저 가있어라.}
맘대로 하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하는 진.
{그러지.}
현이 먼저 파티장을 나가고, 그 뒤를 복면인 네 명이 태현과 유리를 붙잡은 채 따라갔다. 그들이 모두 나가는 것을 본 진은 아호에게 눈짓했고 아호는 재빠른 손동작으로 부하들 몇 명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흠, 흠! 이제 슬슬 여러분들에게 사실을 말해주겠다."
파티장에서 밖으로 연결되는 모든 문을 잠그러 가는 부하들에게서 시선을 뗀 진은 분노 혹은 슬픔, 불안, 걱정과 같은 각양각색의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목소리 톤을 살짝 올려 말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 배에는 총 스물여섯개의 시한폭탄이 설치되어 있으며..."
갑자기 웅성거리기 시작하는 승객들을 보며 진은 살짝 얼굴을 찡그리며 들고 있던 총으로 승객 무리 한 가운데를 향해 쐈다.
타앙-!!
누군가가 머리에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그 주위로는 비명이 터져나왔고, 곧 파티장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진은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흠, 흠. 에...그런 거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우리의 흔적을 남기지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은 이 배와 함께 바다속으로 가라앉아 주셔야겠다. 참고로 앞으로 남아있는 시간은 대략 35분 정도이며 나는 여러분들이 바다로 뛰어들어 홀로 상어밥이 되는 등의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길 바라기에, 여러분들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파티장의 문은 모두 밖에서 잠그기로 결정했다. 그러면, 남은 35분 가량의 시간을 소중히 쓰기 바란다."
충격에 빠져 있는 파티장의 적막을 가로지르며 진은 복면인들을 이끌고 유유히 파티장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가 파티장을 빠져나가고 몇 초가 지나지 않아, 닫겨진 문 밖으로 사람들의 비명소리와 고함소리, 울음소리들이 시끄럽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진은 아비규환의 그 장면을 직접 보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운듯 시익 웃으며 시가를 피워 물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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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접속일 | 2024-11-03 | ||
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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