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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16:08 536회 0건
[34부]


태현은 시계를 힐끗거리며 컵을 닦고 있었다. 레스토랑 네잎클로버는 런치타임부터 문을 열었다. 지금 그가 이렇게 일부러 가게를 오픈할 준비를 하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좀 있다 올 유리에게 오늘이 여느 날과 마찬가지인 날이라는 생각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다시 한 번 벽시계를 쳐다보는 태현. 그런 그에게 현석이 넌지시 물었다.

"형님. 유리를 기다리고 계십니까?"
"...음. 그래. ...늦잠을 자는 걸까."

시계는 벌써 8시 4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현석이 걱정 말라는 얼굴로 태현에게 말했다.

"조금 있으면 집사람이 올 겁니다. 용우를 봐달라는 핑계를 대면 유리도 전혀 이상한 낌새는 눈치 채지 못할 겁니다."
"...그래. 그렇겠지......"

태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닦던 컵을 놓아두곤 홀의 아무 의자에나 걸어가 걸터앉으며 담배를 한개피 피워문다. 현석은 재떨이를 가져다가 태현 앞의 테이블에 놓아두곤 다시 채소를 ?는 일을 계속했다.

"후우..우......"

태현은 한숨과 함께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이상하게도 가슴이 답답했다. 뭔가가 아주 심하게 꼬인 기분... 물론 길수와 우철을 구하러 달려가는 것에 어떠한 망설임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소중한 아우였고, 자신이 도움 요청을 거절한 것 때문에(물론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었지만 태현은 두 아우가 그렇게 된 것이 자신의 탓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험한 꼴을 당해버렸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자신의 거절을 통보받고 힘없이 돌아가던 두 아우의 축 늘어진 어깨가. 태현은 금강을 소개해주긴 했지만 그들에게 좀 더 확실하고 안전한 방도를 일러주지 못했던 것이 너무나 후회되었다. 그저 마음 속에 자신은 완전히 손을 씻었다, 그 세계와는 더 이상 상관 없는 사람이다..라는 생각만 가득해서 마치 알아서들 하라는 듯 그렇게 무책임하게 두 아우를 그냥 보냈었다니. 자신이 좀 더 고심을 하고 그들의 어려움에 귀를 기울여주었다면 두 아우는 김형필에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태현은 고개를 떨구며 담배를 깊이 깊이 빨아들였다. 하지만 마음이 꽉 막히는 기분이 드는 것은 비단 두 아우 때문만은 아니었다.

"유리..."

자신은 상관 없었다. 어차피 그 세계에 인생의 대부분을 몸담았었고, 죽음 따윈 두려워하지 않게 된지 오래이니까. 하지만 유리는 아니었다. 그 아이만큼은 지켜져야 했다. 이런 더러운 세계와는 완벽하게 단절된 곳에서 행복하게 살아야했다. 그런데, 자신은 또다시 스스로를 그 세계와 연결지으려 오늘 부산으로 떠난다. 바로 그것 때문에 태현은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길수와 우철. 두 아우를 결코 모른 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러자니 유리가 위험에 빠질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서 이미 아내를 잃어본 경험이 있는 태현은 자신이 유리를 지킬 수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없었다. 아니, 그럴 자신이 없었다. 8년 전 아내보다 부하를 택했던 자신. 죽이고 싶을 만큼 저주스러운 그때의 자신이 현재의 시간에 또다시 되살아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삐비비비빅, 삐비비비빅...>

그런데 상념에 잠겨있는 태현의 정신을 일깨우며 그의 바지 속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태현은 움찔, 정신을 차리며 핸드폰을 바지 호주머니에서 깨내었다. 발신자를 보니 유리다. 태현은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전화를 받았다.

"유리니?"
<응, 아빠. 뭐해?>
"아빠야 가게 열 준비하고 있지. 유리는? 언제 올 거니?"
<아..저, 응...그런데 어쩌지? 나 친구들이랑 놀기로 했는데.>

태현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자신의 심정으로는 유리가 한시라도 빨리 안전한 곳으로 피해있었으면 하는데, 그렇지만 또 유리가 오랜만에 친구들이랑 재미있게 놀려는 것을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도 유리가 친구들이랑 만나서 재미있게 놀고 기분 전환도 했으면 좋겠으니까. 태현은 표정과는 달리 밝은 음성으로 말했다.

"아, 그럴래? 하핫. 그래 재미있게 놀다와. 그런데...언제까지 놀 거야?"
<글쎄. 모르겠어, 확실히는.>

태현은 유리의 목소리가 갑자기 뾰루퉁해진 것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그런 건 젖혀두고, 진지한 마음을 감추려 노력하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친구들이랑 재미있게 놀아. 저..그런데 유리야. 아빠가 부탁할 게 있어서 그런데 미안하지만 늦어도 3시 반까지 가게로 와주지 않을래?"
<부탁? 정말? 무슨 부탁인데?>

유리의 음성은 금세 즐거워졌다. 태현은 어쩔까 하다가 전화보다는 직접 얼굴을 맞대고 거짓말을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대답을 회피했다.

"응...그건 있다가 말해줄게."
<치이, 궁금한데. 무슨 부탁이야? 어려운 부탁?>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래...응...알았어. 3시 반까지 거기루 갈게.>
"응~있다봐 유리야."
<앙~사랑해 아빠.>
"응. 아빠두..."

탁...

사랑스런 유리의 목소리를 들으며 휴대폰을 닫은 태현. 딸의 애교에 잠시 즐거운 표정이었던 태현의 얼굴은 하지만 금세 도로 어두워졌다. 이런 저런 걱정이 가득한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저, 저기. 사인 좀 해주세요!"
"네?"

유리는 당혹스런 얼굴로 자신에게 수첩을 펴드는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시간은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 벌써 3시. 유리는 친구들과 정말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었다. 다함께 아이쇼핑도 하고 맛있는 파스타도 사먹고, 베스킨로빈스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한참동안 수다도 떨었다. 게다가 친구들은 일부러 자신에게 인터넷에 나도는 동영상 같은 얘기는 조금도 꺼내지 않으며 자신을 배려해주었다. 굳이 자신이 배에서의 일을 기억해내지 않게 해주려는 친구들의 고마운 마음에 유리는 정말로 기뻤고 친구들이 다시 한 번 너무나 좋아졌다. 하지만, 그렇게 즐거운 와중에도 유리는 한 번씩 곤혹스러움을 느꼈는데, 그건 바로 이런 사람들 때문이었다. 친구들과 쇼핑샵 창밖에서 저 가방 예쁘다 같은 말을 하며 구경을 하고 있으면 어느새 사람들이 몰려 자신들 주위를 빙 둘러쌌고, 식사를 할 때에도 사람들이 자꾸만 자신을 힐끗 거렸다. 게다가 사진촬영 기능이 있는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어찌나 폰카로 찍어대는지. 급기야 이제는 사인 요청까지 나왔다.

"죄송해요. 저 별로 연예인 같은 사람 아니니까..."

유리는 고개를 꾸벅하며 사인 요청을 거절했다. 유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윤지가 유리의 팔을 이끌며 어느새 몰려있는 사람들의 틈새를 뚫고 자리를 옮겼고, 같이 놀던 다른 세 명의 소녀들도 앞장을 서서 길을 터주었다. 아무튼 그렇게 사람들 무리를 빠져나와 친구들과 함께 한적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긴 유리. 그녀는 고개를 포옥 수그리며 친구들에게 사과했다.

"미안해...나 때문에......"
"아냐~아냐~~."

윤지가 급히 손사래를 치며 유리의 사과를 받아주었고, 다른 친구들도 웃는 얼굴로 유리의 기분을 풀어주려 애썼다. 그런데 그때, 유리의 핸드폰 벨이 울렸다.



유리는 혹시나 아빠일까 발신자도 확인하지 않고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빠?"
<아, 안녕하세요. 정유리양 되세요?>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유리는 실망감이 들었지만 웃는 얼굴로 손짓으로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하곤 옆으로 조금 걸어가서 대답했다.

"네. 그런데요?"
<아~~반갑습니다. 저는 TM엔터테인먼트 인사실장 하종구라고 해요. 우리 유리양, 잠시 통화할 시간 되세요?>

유리는 아미를 살짝 찌푸렸다. 왜 "우리" 유리양이 되는지도 모르겠고, 이 회사는 왜 자꾸 전화를 하는지 모르겠다. 어제 분명히 거절을 했었는데. 게다가 휴대폰 번호는 어떻게 알아냈는지 괜한 불쾌감이 들었다. 그래서 유리는 똑부러진 목소리로 하종구란 남자한테 말했다.

"저기, 죄송한데요."
<네~유리양. 말씀하세요.>
"어제도 TM에서 전화가 왔었는데, 제가 분명히 거절을 했었거든요?"
<......예?>

사근사근한 목소리에 의아함이 물든다. 유리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고개를 갸웃했고, 그녀의 귓가에 당황스런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아...저, 유리양. 죄송한데 저희가 유리양께 전화드리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에요.>
"......?"

유리는 의아한 얼굴로 잠시 어제의 통화를 생각하다가 곧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이런 식으로 자꾸 전화를 해서 결국 자기네들쪽으로 끌어들이려는 속셈이겠지. 유리가 다시 한 번 픽업 제의를 거절하려는 말을 하려 할 때, 하종구의 목소리가 먼저 유리에게 들려왔다.

<아~네. 음, 우리 유리양. 사실은 아무튼 그렇게 되세요. 그리고 저희가 오늘 이렇게 유리양께 전화를 드리게 된 것은, 사실. 우리 유리양 지금 아주 유명하신 거 아시죠? 하하. 저희 TM엔터네인먼트도 여러모로 유리양의 끼에 대해 높은 평가를 하고 있어요. 사실 이런 기회가 많지는 않으세요. 아아~나쁜 의미로 받아들이지 마시구요. 그만큼 저희는 유리양의 포텐셜을 주목하고 있어요. 그래서 말인데 저희가 유리양께 재미있는 제안을 하나 하려구 해요. 물론 아버님께도 말씀 드려야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유리양 본인의 의사이니까요. 하하, 이거 말이 길었네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TM엔터네인먼트는 우리 유리양이 연예계로 나가는데 뒷받침이 되고 싶어요. 유리양, 스타가 되고 싶으시죠? TM엔터테인먼트와 함께 하면..>

유리는 몇 번이나 말을 끊으려고 입술을 달싹거리다 이 남자가 도저히 말할 기회를 주지 않자 한숨을 폭 내쉬곤 단번에 똑바른 목소리로 하종구의 말을 끊고 들어갔다.

"저기요. 저는 별로 연예인 같은 거 되고 싶은 생각 없거든요?"
<아...네?>

애써 당황감을 숨기는 목소리. 유리는 다시 한 번 목소리를 강조해서 말했다.

"저는, 연예인이든 스타든, 그런 거 될 생각 조금도 없다구요."
<...아아...네. 아, 우리 유리양께서 물론 두려운 마음을 가지시는 것도 당연한 일이세요. 하지만......>

유리는 도무지 말을 끝낼 생각을 하지 않는 하종구란 남자 때문에 아미를 찌푸리며 입술을 꼭 씹어물었다.

"우리 유리양, 우리 유리양. 내가 왜 당신한테 "우리" 유리라고 불려야 돼? 아저씨, 나랑 친해?"

...그렇게 말은 하고 싶은 유리이지만, 금세 깨끗하게 포기했던 어제 그 사람과는 달리 이번 TM사람은 정말로 끈질겼다. 그때 가만히 유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윤지가 결국 대뜸 유리에게서 휴대폰을 뺏어들곤 짧막하고 짜증섞인 목소리로 휴대폰 너머를 향해 말했다.

"저기요. 됐거든요? 끊어요."

탁.

간단히 해결될 문제였었다.

"자. 요것아."

유리는 카리스마 넘치는 얼굴로 휴대폰을 내미는 윤지에게 헤헤거리며 웃었다.

"고마워."
"고맙긴 뭘."
"유리야. 너 근데 방금 TM에서 전화왔던 거였어?"

그때 유리의 친구 중 선영이란 이름의 똘망똘망한 눈동자가 무척이나 귀여운 소녀가 유리에게 물었다.

"응."

유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선영은 부러운 얼굴로 유리를 쳐다보았다.

"하아~좋겠다. 나는 매번 오디션에서 떨어졌는데."

유리는 장래의 꿈이 가수인 친구의 볼을 장난스레 잡으며 말했다.

"으휴~뭘 부러워 해? 선영이 네가 얼마나 예쁘고 노래 잘 부르는데. 다음 번에는 꼭 붙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히잉~정말 그럴까?"
"그러엄. 포기만 하지 않으면 못 이룰 꿈은 없어."

유리의 말에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도 포기를 하지 않고 계속 노력해서 결국엔 아빠의 연인이 되었으니까. 한편 그 아버지에 그 딸이랄까, 유리의 말에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선영은 잠시 감동을 받은 눈빛으로 유리를 바라보다 곧 냉큼 유리에게 와락 안겼다.

"역쉬이~우리 유리 공주님밖에 없어."
"더워어~~."

유리는 잠시만이지만 그렇게 친구랑 같이 장난을 쳤다. 그때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흐뭇한 얼굴로 두 친구를 바라보고 있던 윤지가 문득 생각이 났는지 유리에게 물었다.

"참, 근데 너 3시 반까지 가야한다고 하지 않았어?"

유리는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응. 미안해..."

친구들과 헤어져야 된다는 생각에 금세 풀이 죽는 유리.

"아휴 또 사과한다. 우린 괜찮다니까."

윤지는 그러며 다른 친구들에게 눈치를 주면서 말했다.

"우리가 너네 레스토랑까지 데려다 줄게."
"정말?"

아직 친구들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유리가 생긋 웃으며 윤지에게 되물었고, 윤지도 다른 친구들도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헤헤~고마워."

배시시 웃으며 윤지에게 팔짱을 끼는 유리. 아무튼 유리는 그렇게 친구들과 함께 네잎클로버로 향했다.
한편 같은 시간. 태현은 유리와 비슷한 일을 겪고 있었다.

"저..저어...악수 한 번만..."

태현은 예쁘장한 젊은 처녀가 부끄러운 얼굴로 손을 내밀어오자 이건 뭐 손님이라 거절을 할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이 빙긋 웃는 얼굴로 젊은 처녀에게 악수를 해주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기저기서 찰칵, 위잉...하는 사진을 찍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최근 유행하기 시작한 디카라는 소형 카메라를 손님들 중 상당수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꺄악~~."

처녀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친구들 쪽으로 뛰어가버린다. 태현은 난감한 얼굴로 현석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단순한 현석이놈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거리면서 자신에게 좋겠다는 놀림 비슷한 웃음을 날리며 주문받은 음식을 테이블로 가져갔다. 태현은 한숨을 푸욱 내쉬며 홀에 가득한. 아니, 가게 바깥까지 바글바글한 손님들을 보며 앞이 막막해오는 것을 느꼈다. 사건의 시작은 미약했다. 런치타임 첫손님으로 유리 또래의 여학생들이 점심을 먹으러 왔었다. 소녀들은 재잘재잘 수다를 떨며 주문을 했는데, 그러다 누군가 한 사람이 자신을 알아보았다. 그러며 그 유명한 사신 아저씨가 아니냐며 악수를 청했었다.

"휴우~~..."

그때 자신이 왜 그런 경솔한 행동을 해버렸는지. 괜히 유리 생각도 나고 해서 소녀와 악수를 나눠줘버렸던 것이다. 소녀들은 그때부터 급히 여기저기로 문자나 전화를 날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이 어, 어, 하는 사이 소문은 퍼지고 퍼져 결국에는 이렇듯 발을 뺄 수도 없을 정도로 걷잡을 수 없이 일이 커져버린 것이다. 그나마 가희가 와주어서 일은 그럭저럭 돌아가긴 했지만, 그래도 태현은 쉴새 없이 자신에게 말을 걸거나 악수를 청해오거나 심지어는 같이 사진을 찍어 달라는 부탁을 해오는 손님들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사신 아찌. 나 업어줘."

"이 일을 어찌해야 좋나."

태현은 속이 꺼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 그래. 그래."

태현은 좋게 좋게 웃는 얼굴로 남자 꼬마애를 업어주었다.

"어머~얘두 참. 죄송해요, 호호홋."

아이 엄마가 입을 가리며 웃음을 터트린다. 왠지 저 여자가 자기 아들한테 시킨 것 같다. 태현은 아이 엄마가 왜 그리 얄밉게 보이는지 몰랐다. 여하튼 그렇게 시간은 쉬지도 않고 흘러갔고, 네잎클로버는 개점이래 최대의 호황을 누리며 날개 돗힌 듯 음식을 팔아제꼈다.

"현석아."

당연한 일이지만 손님들이 레스토랑으로 찾아온 것은 음식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그 유명한 사신을 실제로 한 번 보기 위함이었고, 결국 손님들을 상대하다 지쳐버린 태현은 피곤한 얼굴로 현석에게 백기를 들었다.
사실 태현은 자신의 이름이 이렇게까지나 팔려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다. 아날로그 시대를 살았던 태현은 인터넷의 파급력을 조금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태현과 유리만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지금 현재 태현의 이미지는 대한민국에서 영웅, 그 자체였다. 뜨거웠던 지난 6월 이후, 소위 월드컵 후유증을 앓고 있던 사람들의 뭔가에 열광하길 원하는 욕구를 충족시켜주기에 태현은 완벽한 대상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틀 전 방영된 퀸 엘리자베스 호 특집방송은 그런 사람들의 마음에 더욱 불을 붙였었다.
어쨌든 태현은 품에서 담배갑을 꺼내어 현석에게 들어보였고, 현석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느긋하게 피고 오십시오."
"그래. 금세 오마. 제수씨, 미안합니다."
"어머, 아니에요. 후훗, 천천히 다녀오세요."

태현은 남편의 옆에서 열심히 요리를 만들고 있는 가희에게 피곤한 웃음을 지어주곤 레스토랑 뒷문으로 향했다. 그러나 일이 꼬이려고 해도 아주 제대로 꼬이려는지 그런 태현의 발걸음을 홀에서 들려온 소란스런 소음이 붙잡았다.

"정태현씨! 정태현씨 되시죠??"

태현은 주방까지 밀고 들어오는 일단의 사람들 무리에 곤혹스런 표정으로 일단 그들을 주방에서 밀고 나갔다. 새롭게 추가된 손님은 다름 아닌 각종 매스컴 기자들이었다. 무슨 일이 터지면 보험회사가 제일 빠르고 그 다음이 매스컴이라더니 언제 소문을 들었는지 이제는 매스컴까지 찾아와버린 것이었다.

"정태현씨! 이곳은 정태현씨의 레스토랑입니까?"
"퀸 엘리자베스 호에서 무사귀국 후 달라지신 점이 있다면요?"
"오후 1시경 방송된 청와대 대변인의 퀸 엘리자베스 호 관련 브리핑 보셨습니까?"
"대통령 표창자에 선정된 소감을 말씀해주십시오!"

태현은 정신 없이 밀어 닥치는 질문 세례와 끊임 없이 터지는 카메라 플래쉬,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방송 카메라의 모습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사람들은 새롭게 나타난 구경거리에 자신 주위를 빽빽하게 둘러쌌고, 태현은 결국 미어 터지는 인파에 밀려 점점 뒤로 물러나다가 주방 안으로까지 도로 들어서버렸다. 일이 이렇게까지 되자 태현은 일단 다른 건 다 접어두고 혹시나 모를 사고를 대비해 현석을 보며 재빨리 가스레인지로 눈짓을 주었다. 그러자 태현의 마음을 알아 챈 현석이 하던 요리를 중지하며 가스레인지를 모두 끄고 혼잡한 와중에 위험물이 될 수 있는 것은 전부 치워놓기 시작했다. 한편 같은 시간. 이곳의 그 누구도 (태현을 보느라)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레스토랑 밖 골목으로는 경차부터 외제 스포츠카, 고급 세단에 이르기까지 수십 대의 각양 각색의 차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여하튼 앞으로 더 이상 번질 수 없을 만큼 일이 커졌다고 행복한(?) 상상을 하고 있는 태현은 한치 앞을 일을 예상하지 못하며 좋게 좋게 기자들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영업 중입니다. 나중에, 나중에 답변을 드릴 테니 일단 지금은 가게에서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정태현씨! 테러범들에게 사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셨는데요! 그 연유를 말씀해주십시오!"
"아, 그러니까 지금은.."
"따님이신 정유리양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정태현씨!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영상에서 보여준 사격 실력은 어디에서.."
"국민들이 정태현씨에 대해서 알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기자들은 도무지 태현의 말을 들을 생각을 안 한다. 오히려 태현은 점점 밀고 들어오는 인파 때문에 뒤로 한발자국씩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때,

"이건 뭐하는 새끼들이야!!!!"

청천벽력 같은 고함소리가 터져나오며 좌중을 일거에 입다물게 만들었다.

"비켜! 뭐야 이것들은!!"

이건 또 대낮부터 어떤 녀석이 행패를 부리는 건지. 태현은 뒷골이 땡기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갑자기 싸해진 분위기를 뚫고 태현의 앞으로 서서히 길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태현은 점점 옆으로 물러나며 길을 만드는 사람들의 얼굴에 어째서 놀람이나 두려움이 어리는 것인지 의아한 얼굴로, 마지막으로 방송 카메라를 반대편으로 돌리며 옆으로 물러서는 카메라맨에게서 시선을 돌려 자신 앞으로 만들어진 길의 끝에 서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

흠칫 떨리는 태현의 눈동자. 그의 눈동자에 떠오른 남자는 170cm가량의 키에 평범한 체구를 가지고 있었는데, 반백 머리를 올빽 스타일로 쓸어넘기고 꽃무늬 실크 셔츠에 하얀 바지, 하얀 구두를 신고 있었다. 나이는 대략 40대 초반 가량 될까, 번뜩이는 눈동자가 무서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이마에 다혈질이라고 써붙인 듯한 용모의 남자였다.

"아..."

태현의 놀랐던 얼굴이 서서히 밝아진다. 그리고 방금 전 단 두 번의 고함으로 태현도 어찌하지 못하던 사람들을 단숨에 잠재워버린 남자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차오른다. 금세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얼굴로 입꼬리를 주욱 내리는 남자. 그의 뒤로는 대부분이 30후반에서 40초반인 남자들 십수여 명이 다혈질 남자와 마찬가지의 표정을 지으며 태현을 바라보고 있었고, 레스토랑 밖으로는 검은 정장 일색의 젊은 남자들 수십 명이 열과 행을 맞춰 주르르 부동자세를 취하고 서 있었다.
완전한 적막에 감싸인 네잎클로버. 그렇게 아주 잠시간의 시간이 흐르고, 다혈질 남자의 눈물 섞인 음성이 터져나오며 침묵을 깨트렸다.

"크흑, 형님...!!"

털썩...!!

무릎을 땅에 찧으며 고개를 깊숙히 숙이는 남자.

"형님...!!!"

남자의 목소리가 마치 신호라도 된 듯이 그의 뒤에 서 있던 십수 명의 남자들도 마찬가지로 무릎을 털썩 꿇으며 태현에게 깊숙히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레스토랑 밖의 70여 명을 헤아리는 검은 정장 사내들은 양팔을 아래로 쭉 내리며 허리를 직각으로 굽혔다. 다시 한 번 터져나오는 형님 콜.

"형님......!!!"

레스토랑은 다시 침묵으로 휩싸였다. 천천히 한걸음, 한걸음, 떨리는 발걸음으로 다혈질 사내에게로 다가가는 태현. 그런데 너무나 오랜만의 재회에 빠져 있는 그런 태현의 정신을 어떤 기자의 외침이 깨트렸다.

"야! 찍어! 빨리 카메라 돌려!!"

태현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섰다. 카메라맨들은 황급히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며 최적의 위치에서 영상을 필름으로 담아내기 시작했고, 태현은 그제야 자신이 현재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깨달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최악이다......"

한편 그때, 주방 뒤쪽에 남편과 함께 서 있던 가희가 태현의 바로 전 표정과 마찬가지로 감개무량한 얼굴을 하고 있는 현석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그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였다.

"아...!!"

가희의 속삭임에 번뜩 정신을 차린 현석은 부랴부랴 태현의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아, 이거 번짓수가 틀리셨나본데요. 누구십니까?"
"......?"

현석의 말에 다혈질 남자는 서서히 얼굴을 들며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눈물을 쓱쓱 닦곤 현석을 쳐다보았다.

"현석.."
"저는 선생님 처. 음. 뵙습니다만. 생판 모르는 남의 가게에 와서 이러시면 안 되지요."

현석은 빠릿빠릿 눈에 힘을 주며 그렇게 말했고, 그제야 현석의 눈치를 알아들은 다혈질 남자는 당황한 얼굴로 급히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아, 어..."

당황스런 눈동자로 주위를 둘러보는 다혈질 남자.

"여, 여기가 아닌게벼."





"형님...!!!"

파르르 떨리는 유리의 눈동자. 몇 명인지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정장 차림 남자들이 레스토랑을 향해 조폭물 영화에서나 봤던 자세로 인사를 한다. 유리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버렸다.

"유, 유리야. 저 사람들...누구야?"

윤지가 당황한 음성으로 물어온다. 그러나 유리에게는 윤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정말...정말이었던 거야......?"

눈망울에 이슬을 한껏 떠올리며 입술을 꼬옥 깨무는 유리. 충격을 받은 듯 커다랗게 뜨인 그녀의 눈동자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멍하니 정장 남자들을 향하고 있었다.

"하아..흑..."

가는 한숨을 내쉬다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지 고개를 폭 숙이며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는 유리. 이런 유리의 모습에 다른 친구들은 어쩔 줄 몰라하며 유리를 안아주고 등을 토닥여주며 일단은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리는 그런 친구들의 상냥한 손길조차 느낄 수 없었다.
사실이 아니길 바랬었다. 사실일 거라 예상했지만, 그리고 비록 그게 정말로 사실일지라 하더라도 자신은 여전히 아빠를 사랑하지만. 그래도 유리는 마음 한구석에서는 자신이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한 것이길 기대했었다. 하지만, ...정말로 사실이었다니. 정말로 아빠가...

"으흐..으윽..."

...조직 폭력배였었다니. 왜 하필 자신은 다른 때도 아니고 바로 이 시간, 지금...이곳에 온 것일까.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겠다. 아니, 적어도 확신할 수 없는 그 상태로 있었으면 조금은 나았겠지. 도대체 어째서 자신은 부정조차 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해버린 것일까. 흐느껴 울기 시작하는 유리를 친구들은 당황한 얼굴로 달래기 바빴고, 유리는 윤지의 좁다란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소리죽여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그렇게 얼마동안 울었을까, 길을 막고 서 있는 유리들에게 클락션 소리가 울려왔다.

빵빵!!

아직도 유리는 윤지의 품에 안겨 눈물만 흘리고 있었고, 윤지들은 유리를 이끌고 담벼락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들 옆으로 수십 대의 차들이 줄맞춰 서서히 골목길을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태현 형님은 조금도 나이를 먹지 않으셨......>

차창을 타고 흘러나오는 음성. 어째서일까, 하필이면 목소리의 주인공은 유리의 곁을 스쳐지나갈 때 그런 말을 해버렸다.

"......!"

그리고 그것이 결정타였다. 온 몸에서 힘이 빠져버리는지 무너질 듯 비틀거리는 유리. 그런 그녀를 윤지가 깜짝 놀라며 황급히 끌어안는다. 유리는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윤지의 품에 얼굴을 꼬옥 묻었다. 한편 유리와 그녀의 친구들에게 클락션을 빵빵거린 차 안. 다혈질 남자는 꼬나물고 있던 담배를 잠시 입에서 떨어뜨리며 조수석에 타고 있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

"그건 그렇고, 저기 왔던 기자 애들 전부 개인신상 조사하고. 수첩, 카메라 테이프, 필름. 다 압수해라."
"예. 형님."

다혈질 남자는 다시 담배를 입술로 씹어물며 몸을 돌려 서서히 멀어지는 레스토랑을 시선에 두었다. 그의 눈시울이 금세 또다시 붉어진다. 한편 다시 유리의 시점.

"유리야아...괜찮아...?"

자신들 때문에 크게 울지 않으려고 울음을 꾹꾹 눌러참으면서도 그 흐느낌에서 너무나 서글픔이 느껴져 오는 유리에게, 윤지도 어느새 울먹이는 얼굴이 되어 그렇게 애타게 물었다.

"끅, 흐윽, 흐으..으윽..."

하지만 유리는 그저 윤지의 품을 눈물로 적시고 있을 뿐이었다.

"아파...가슴이 너무 아파와......"

아빠의 정체를 정말로 알게 되어서가 아니었다. ...기대. 스스로의 마음을 위로하려 했던, 기대. 아니...믿음. 아빠가 지금은 그런 세계와 완전히 떨어져 있을 거라는 믿음. 유리는 아빠에 대한 그런 믿음이 철저히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배신감 같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이 견딜 수 없이 아파온다. 아빠가 너무나 걱정되니까. 아직도 저런 위험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는 아빠가 너무나, 견딜 수 없이 걱정이 되니까.
유리는 자신이 방금 전 그런 장면을 목격한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빠를 저런 나쁜 사람들 무리 속에서 건져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전신을 에워싸는 불안감. 유리는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뭔가 무서운 예감이 엄습하는 것에 몸을 가늘게 떨었다.





"정태현씨! 방금 전의 사람들은 누구였습니까?!"
"정말로 정태현씨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었나요?"
"혹 언론에는 밝힐 수 없는 어떠한 비밀을 가지고 계신 것 아닙니까??"

다혈질 남자 패거리가 물러나자마자 기자들은 곧바로 카메라를 들이밀며 태현에게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

가만히 취재진을 쳐다보는 태현. 그의 눈빛은 피로감에 젖어있었다.

...칙!...치익...!......

천천히 담배를 한대 피워무는 태현.

"후우~우......"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들에게 길게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태현의 모습에 질문세례를 마구 퍼붓던 기자들의 목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러나 기자들의 얼굴은 어떤 대답을 기대하고 있는 그런 얼굴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태현이 뿜어내는, 뭔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오오라에 위축된 것이었다. 태현은 눈썹을 긁적이곤 현석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현석아. 기자님들 나가신단다."
"예."
"소란 때문에 식사가 방해되었으니, 손님들께는 돈받지 말아라."
"알겠습니다."

태현은 그 말을 끝으로 주방을 통해 뒷문으로 빠져나가버렸고, 현석은 손님을 대할 때의 그 싹싹함은 어디로 갔는지 과거 태현파 넘버2의 포스를 내뿜으며 양팔로 기자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영업에 지장이 되니, 그만 물러나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목소리는 정중했지만 거기에 서려있는 위압감은 아무리 간은 집에 놔두고 출근하는 기자들이라고 해도 꼼짝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것이었다. 현석의 무지막지한 힘에 떠밀려, 그리고 그의 살 떨리는 위압감에 떠밀려 기자들은 주춤주춤 물러서다 뭉텅이로 레스토랑에서 추방당했다. 한편 뒷문으로 빠져나온 태현은 벽에 등을 천천히 기대며 담배 연기를 폐속 깊숙히 빨아들였다 한참을 길게 뿜어내었다. 기분이 왠지 엉망이었다. 태현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일찍 온 그 녀석들. 말했던 시간보다 늦게 오는 유리... 톡, 톡, 담뱃재를 털곤 다시 한 번 담배를 빨아들이는 태현. 어느새 오랜만의 얼굴들을 만난 것에 대한 기쁨은 사라져 있었고, 그는 오직 유리만 생각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유리가 조금 전의 광경을 보지 못했으니. 태현은 그것을 위안으로 삼으며 유리가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이라도 해볼겸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런데 그때, 태현의 귓가로 가게 안에서 시끄러운 환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꺄악~~이뻐~!!>

태현은 눈썹을 찌푸리며 담배를 튕겨버리곤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안으로 들어갔을 때, 레스토랑 안은 시끌벅적하고 있었다. 태현의 눈에는 금세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유리의 모습이 잡혔다. 순간 가슴이 덜컹하는 태현. 혹시 유리가 녀석들의 모습을 본 건 아닐까?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유리의 얼굴은 밝았다. 이리저리 시선을 움직이던 유리는 아빠의 모습을 발견하곤 생긋 웃으며 다가온다.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는 소리가 터져나오고, 유리는 아빠에게 다가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아빠, 근데 이 사람들 다 누구야?"

유리의 귀여운 미소와 사랑스런 인사에 "어, 다녀왔니?"하며 부드럽게 대답해준 태현은 그녀의 이어진 물음에 민망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하하. 그러게......"
"흐응, 그래? 아빠도 모르는구나."

유리는 고개를 까닥이며 생긋 웃었다. 그러곤 다른 사람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으며 아빠에게 팔짱을 끼며 애교스런 목소리로 묻는다.

"근데 부탁할 거 있다는 게 뭐야?"
"아, 부탁?"

유리의 물음에 태현은 급히 현석에게로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현석과 가희가 두 부녀에게로 다가온다. 유리는 어여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아저씨, 아줌마. 안녕."
"아..응. 그래."
"유리야 안녕~."

태현은 유리의 표정에서 왠지 모르게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뭐랄까, 뭔가 필요 이상으로 미소를 짓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그런 태현의 직감은 정확히 맞았다. 유리는 지금 억지로 쌩긋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들을 보내고 혼자 가게로 들어왔던 유리. 처음엔 바글바글한 사람들 때문에 깜짝 놀랐지만, 곧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아 이 사람들이 전부 아빠를 보러 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 오늘 자신도 비슷한 일을 겪었으니까. 아무튼 저런 사람들이야 어찌되던 상관없다. 유리가 지금 미소를 억지로 지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얄미운 현석 아저씨와 가희 아줌마, 그리고 더 얄미운 아빠 때문이었다. 이들은 전부다 한통속이 되어서 자신에게 진실을 숨겨왔었다. 유리는 그게 너무 싫었다. 자신 같은 건 아빠의 과거를 알 자격도 없다는 것일까, 자신에겐 아빠를 이해해줄 이해심 같은 게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일까. 현석 아저씨는 자신의 기억에도 없는 오래 전부터 아빠의 동료였고, 가희 아줌마도 대략 기억을 더듬어보면 이 두 사람에 대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쁜 사람들."

유리는 입술을 꼭 씹어물었다. 아빠가 자신이 진실을 모르길 바란다면 철저히 모르는 척을 해주겠다. 하지만 유리는 그 대신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아빠가 모른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하루라도 빨리 아빠를 그런 세계에서 빼내오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조금도 즐겁지 않지만 도로 어여쁜 미소를 입가에 떠올리는 유리.

"아, 저...부탁이 뭐냐하면 말이야."

현석이 입을 열었다. 유리는 고개를 까닥이며 궁금하단 표정을 지어주었고, 현석은 유리의 맑은 눈동자를 보니 왠지 가슴이 찔려서 슬그머니 태현을 바라보았다. 태현은 하지만 조그맣게 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자신을 외면해버린다. 그때 현명한 가희가 현석의 어려움을 눈치 채곤 짐짓 밝은 음성으로 유리에게 말했다.

"유리야. 미안한데...오늘 아줌마가 어디 외출할 일이 있어서 말이야. 그래서 그런데, 우리 용우 좀 봐주면 안 될까?"

유리는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부탁한다는 게 그거야?"

유리는 가희에게 그렇게 되묻곤 태현을 쳐다보았다. 유리의 시선을 받은 태현은 자신을 향하고 있는 까맣고 깊은 눈동자에 순간 움찔, 했다가 급히 웃는 얼굴을 만들며 말했다.

"어, 응. 미안해. 괜찮겠어?"

"수상해."

유리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티를 내지 않으며 방긋 웃었다.

"응. 알았어. 아줌마, 용우 걱정은 하지 말고 맘놓구 외출 갔다 오세요."
"어머~정말이니? 고마워라..."
"아..하하, 하하핫! 잘 됐군!"

기쁜 얼굴로 현석 아저씨를 쳐다보는 가희 아줌마. 아줌마에게 빙긋 웃어주곤 다행스런 얼굴로 아빠를 쳐다보는 현석 아저씨. 어색한 티를 내지 않으려는 게 빤히 보이는 웃음으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오는 아빠.

"고마워 유리야."

정말로 수상했다. 겨우 용우 하나를 봐주는 것일 뿐인데 왜 세 사람이 몰려서 한마음으로 부탁을 해오는 걸까. 게다가 아까 봤던 검은 정장 사람들. 유리는 살며시 아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고개를 가만히 가로젓는다.

"으으응~...아냐. 근데 아빠는?"
"어, 아빠? 아빠야 가게에서 계속 일해야지."
"그래? 흐응...그럼 아빠 오늘은 계속 가게에서 일하는 거야?"

태현은 눈짓만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며 물어오는 유리의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모습에 차마 딸에게 눈을 맞춰줄 수 없는지 괜히 눈썹을 긁적이며 유리의 시선을 피했다.

"아..응. 뭐, 그렇겠지."
"으응...그렇구나. 알겠어. 헤헤, 다행이야."
"으..응?"

태현은 의아한 얼굴로 유리를 쳐다보았고, 유리는 방긋이 눈웃음을 지으며 귀여운 음성으로 말했다.

"아아니...응...그냥 왠지 아빠가 딴데 안 가고 가게에 있는다니까 안심이 되어서. 헤헤, 이상하지? 여기가 배도 아니구, ...우린 벌써 집으로 돌아왔는데 말이야......"
"......!"

태현의 눈동자에 일순간 눈물이 스쳐지나갔다. 가슴이 아려온다. 이렇게 사랑스런 딸에게...이렇게나 자신을 걱정해주는 딸에게 거짓말을 해야 한다니 태현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 도저히, 절대로 길수와 우철을 내버려둘 수 없었다. 아니, 그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자신이 가야만 했다. 그것이 두 아우를 물리친 자신의 실수를 조금이나마 만회할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앞으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그 무엇도 예상할 수 없었지만, 일단은 길수와 우철을 구해내어야만 했다. 지금은 그것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태현은 유리의 머리를 꼬옥 감싸 안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평정심을 가장한 목소리로...하지만 딸을 향한 주체할 수 없는 사랑에 애타는 마음으로......

"아무런 걱정하지 않아도 돼...아무런 걱정도......"

따스한 아빠의 음성. 그래서 아빠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유리는 아빠가 걱정이 되어 견딜 수 없었다.





길수가 운영하는 강남의 한 대형 나이트클럽. 수일째 영업이 중단되어 있는 그곳의 입구는 수십 명의 검은 정장 차림 남자들이 홀에 이르기까지 부동자세로 늘어선 채 모시는 형님들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고, S석에서는 태현을 중심으로 십수 명의 남자들이 정중한 자세로 서서 태현을 주목하고 있었다.

"......이상이 현재까지 내가 알고 있는 정황이다."

8년만의 감격적인 해후는 빠르게 끝내고 태현은 지금 자신이 알고 있는 여러 정황들을 아우들에게 말해주고 있는 중이었다.

"...언젠가는 형필이 녀석이 야심을 드러낼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다혈질 남자가 이를 바드득 갈며 말했다. 태현은 어두운 얼굴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 현석이 재빨리 라이터를 꺼내들었지만 다혈질 남자가 손을 들어 그런 현석을 제지하며 자신이 직접 태현의 입에 물린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칙..!...

"쓰-읍...후우..우......"

희뿌연 연기를 길게 뿜어내며 다혈질 남자를 조용히 부르는 태현.

"...명일아."
"예, 형님."

형님의 부름에 다혈질 남자는 허리를 깊숙히 숙였다. 태현은 담배를 재떨이에 천천히 올려놓곤 그의 손을 꽈악 잡아주며 말했다.

"그때 그렇게 무책임하게 떠나서 미안하다."
"......"

태현의 따뜻한 목소리에 명일의 얼굴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태현은 입을 꾸욱 다물며 단지 뜨거운 시선만으로 명일을 바라본다. 결국 명일의 고개가 푸욱 꺾였다. 그의 어깨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말씀하지 마십시오..형님. 저희도 다..이해합니다. 단지...단지......"

털썩...!!

명일은 끝내 울음이 복받쳐 오르는지 입꼬리를 주욱 내린 채 무릎을 털썩 꿇으며 다리에 손을 올려 겨우 상체를 지탱하며 참을 수 없는 흐느낌을 터트렸다.

"으흐흑...기다렸습니다...! 형님이...형님이 불러주시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이런 명일의 모습에 다른 건달들도 하나 같이 눈시울을 붉혔다. 태현은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나 아무 말 없이 명일의 어깨를 힘껏 잡아주었다. 명일의 얼굴이 천천히 들렸다. 그의 사납던 얼굴은 애처롭게 바뀐 채 눈물 범벅이 되어있었다.

"죄송합니다 형님. 애들을 저 정도밖에 데리고 오지 못해서...죄송합니다 형님. 애들을 될 수 있는한 끌어모으려고 했지만...연락을 끊고 지낸 녀석들이 너무 많아서......"

태현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다. 너도 손 씻은지 오래되었는데 그래도 날 위해서 저렇게나 많이 데리고 와주다니 고마울 뿐이다."

태현의 다정한 목소리에 명일은 울지 않으려 입술을 꽉 닫으며 몇 번이나 광대뼈를 움찔거리다 결국 고개를 푹 수그려버렸다. 태현은 명일의 등을 턱턱 두드려주곤 다른 건달들을 돌아보며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영식이 철상이 상백이 성수."

태현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자신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를 때마다 이름이 불린 남자들은 울음을 겨우겨우 참는 얼굴로 허리를 깊숙히 숙인다.

"...재준이 도식이 달영이......"

하나하나 허리를 꺾어내리는 한시대를 풍미했던 주먹들. 태현은 모두 열여섯 명의 이름을 하나도 남김없이 불렀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아우의 이름도 빼놓지 않았다.

"......그리고 현석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허리를 푹 숙이는 현석. 태현은 따뜻한 음성으로 모두를 둘러보며 말했다.

"...고맙다. 정말로 고맙다. 내가 너희들에게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
"형님...!!!"

한목소리로 뜨겁게 외치는 건달들. 태현은 명일의 어깨를 토닥여 일으키며 말했다. 어느새 태현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져 있었다.

"앞으로 2시간 40분 남았다. 가자."
"예, 형님!"

발걸음을 옮기는 태현. 그의 뒤로 18명의 주먹들이 뒤따른다. 몽글몽글 하얀 연기를 피워올리며, 태현이 내버려둔 재떨이 속 담배는 서서히 사그라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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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즐거운 주말이 다시 찾아왔네요:) 질문 드릴 게 있어요. 제가 지금 독자님들의 기대에 부합하는 글을 쓰고 있는 게 맞나요? 기다려주시고 기억해주신 것에 보답하고 싶습니다. 좋은 글로 보답하고 싶은데 32 33 넘어갈수록 관심이 줄어드는 것 같아 저의 자신감도 줄어들어버려요... 34부는 어떠셨나요ㅠ 낼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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