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골이 당기고, 몸이 무거웠다. 열 시... 아침 운동을 빼먹었다는 게 기분이 나빴다. 지금이라도 가야지... 몸을 일으키기가 힘들었다. 술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침대를 벗어나는 게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졌다. 유난히도 큰 소리로 울어대는 핸드폰을 집어 받기조차 힘들었다. 아마 그 벨 소리에 일어난 것 같았다.
[여보세요?]
[나다. 어제 잘 들어갔냐?]
[응. 너는?]
[이제 들어가는 중...]
[그래.]
[오후에 만날래?]
[어... 근데, 몸이 좀 좋질 않다.]
[겨우 그거 마시고? 우헤헤, 망가졌구나. 몸 함부러 굴리는 거 같더니...]
[그건 아니고 그냥 감기인 것 같아.]
[오후에 전화할 게 괜찮으면 놀아주라. 유진이랑 같이 나갈게.]
[응...]
내던지듯 전화를 끊고 다시 이불을 뒤집어 썼다. 덜덜덜 떨려 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약을 집어 먹어야 할 판... 감기에 걸리다니 세상에... 요즘 무리하긴 했나 보다.
“수호, 아직도 자니?”
누나다. 날마다 도서관에 나가더니 오늘은 웬일로 집에 있는 걸까? 유미 누나가 방 문을 열었다.
“아니... 일어났어.”
“그럼 내려와서 밥 먹어. 왜? 어디 아파?”
“그냥 몸이 좀...”
누나가 다가와 손을 이마에 짚었다. 조금 전에 물을 만진 듯, 차가운 그 감촉이 좋았다. 유미 누나가 내게 이렇게 살갑게 한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어머, 불덩이다. 많이 아프지?”
“괜찮아. 좀 누워 있으면 나을 거야.”
누나가 밖으로 나갔다. 그때라도 몸을 일으켜 보려 했지만, 몸 근육이 모조리 뻐근거리는 통에 포기하고 말았다. 뭐하러 나갔나 했더니... 세숫대야에 물을 받아 가지고 다시 들어왔다. 수건을 적셔 이마에 대 주는 누나의 모습에서, 예전에 내게 ‘더러워!’하며 쏘아붙이던 매몰찬 그녀가 그려지지 않았다.
“이렇게 요란 떨지 않아도 되는데...”
“얌전히 있어. 열 오를 땐 이게 제일이야.”
“오늘은 도서관 안 가?”
“집에서 해도 돼. 근데, 병원 가봐야 하지 않을까 모르겠다.”
“안 돼. 엄마한테도 말하지 마. 감기는 그냥 앓으면 낫는 병이래.”
진규 형하고 왜 헤어졌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냥 참았다. 수건을 갈아주는 유미 누나의 모습은 모든 일이 있기 전의 그 때로 돌아가 있었다. 멀거니 쳐다보자, 싱긋 웃어준다.
“왜?”
“그냥...”
“미음 좀 끓여 올게.”
미음이라... 중환자가 된 기분이 들었지만, 거절하지 않았다. 내가 아파서 일시적으로 저러는 건지 모르지만, 잠시라도 누나의 따뜻한 애정을 받는 게 너무도 좋았다. 그런데 이제.. 목까지 따끔거리네. 어휴, 감기라니.. 창피하게. 다시 눈이 감겼다.
뿌연 유미 누나의 윤곽이 망막에 비췄다. 시간이 뒤로 돌아 작년 여름 이전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미국에서 온 편지를 발견하기 이전으로... 마치, 수레바퀴가 한 바퀴 돌아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 때 그 편지만 없었으면... 누나도 나도 행복했을 텐데... 욕심도 안 생기고, 절망도 없었을 텐데...
누나가 나를 부축해 앉히고 내 뒤에 이불 단을 쌓아 기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아.. 해봐.”
냄새는 좋은 미음이 입에 들어가니 진흙처럼 아무 맛이 없었다. 그래도 맛있는 척, 어렵게 꿀꺽 삼켰다. 누나의 얼굴에 예쁜 미소가 서렸다. 초승달처럼 변하는 두 눈... 상아처럼 하얀 가지런한 이. 곱다... 저러니 내가 욕심을 냈지. 속에서는 넣지 말라고 거부하는 미음을 계속해서 받아 삼켰다. 죽을 맛이지만, 누나와 함께 하는 그 오랜만의 행복을 유지하고 싶었다.
“잘 먹네.”
한 그릇을 싹 비우자 누나가 약봉지를 열어 숟가락 위에 올렸다. 그걸 또 받아 먹었다. 저절로 구겨지는 얼굴... 누나가 귀엽다는 듯 킥킥거리며, 물 컵을 내밀었다.
그런데 정말 왜 이럴까? 누나도 모든 걸 잊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은 걸까?
“누워서 좀 더 자.”
모르겠다. 생각하기 귀찮다. 지나보면 알겠지... 눈이 스르르 감겼다.
얼마나 잤을까? 몸은 좀 가뿐해진 듯 한데, 이번에는 목이 아파 침을 삼키기도 힘들었다. 창 밖이 벌써 어둑어둑한 걸 보니, 하루 종일 침대에서 버틴 것이다.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유미 누나가 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공부를 하고 있는 듯... 잔머리털이 보송보송한 하얀 목이 예뻤다. 일어날 수는 있었지만, 그녀를 훔쳐보는 게 좋아 그대로 누워 있었다.
방을 누나가 치운 듯, 내 방이 그렇게 청결한 것도 참 오랜 만이었다. 역시 유미 누나가 있는 곳은 항상 이렇게 깨끗해지고, 정갈해진다.
“깼어?”
나랑 눈이 마주치자 또 웃어준다.
“응.”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말을 하니 목도 아프고...
“이제 좀 괜찮아?”
“훨씬 나아.”
“아까 전화 와서 내가 받았어. 유진이 오빠라드라... 너 아파서 전화 못 받는다 그랬어.”
성수가 전화했구나.
“엄마는?”
“아빠 회사에서 부부 동반 송년회한다고 나가셨어.”
“오늘... 유진이 오는 날이지?”
“오늘은 오빠랑 있겠대.”
“응...”
“배고프지? 미음 끓여가지고 올게.”
내가 아픈 게 뭐가 저리 신나는 걸까?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세상이 빙빙 돈다.
‘어 무리네!’
다시 몸을 털썩 눕혔다. 누나 돌아오기 전에 터지려는 오줌보를 해결해야 하는데... 조금 후에 다시 상체만 일으켜 버텨 보았다. 조금 괜찮은 듯... 침대 밖으로 기어 나가려 하자 또 다시 뱅뱅 돌고 매스꺼웠다. 감기가 아닌가? 나중에 의학을 배운 다음에야 그 병이 소위 ‘체위성 현훈(BPPV, benign paroxysmal positional vertigo, 평형을 담당하는 내이의 바이러스 감염에 의한 자발 회복성 질환, 저자 주)’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 때는 그런 병이 있는 지 알 턱이 있나.
병신이 다 됐구나, 김 수호. 그래도 어떻게든 화장실에 가야하니 엉금엉금 기어 나갔다.
“어머! 수호야. 왜 그래?”
누나의 놀란 비명소리가 들렸다. 저렇게 호들갑떨지 않아도 되는데...
“누나... 나 화장실 좀...”
누나가 황급히 달려와 나를 부축했다. 손바닥에 닫는 물컹한 느낌... 뭔지 모를 향기. 그런데 화장실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침대에 눕히는 것이다. 언제 이렇게 힘이 세졌지, 누나가? 목이 아픈 걸 억지로 참고 한마디 내뱉었다.
“나... 급하다고...”
“그냥 누워 있어. 걷다 넘어지면 어떡해. 기다려 봐.”
또 쪼르르 사라지더니, 금새 돌아왔다. 누나 손에 들린 걸 보니 기가 막혔다. 투명한 유리 물병...
“거기에?”
“응. 입구가 넓으니 새지는 않을 거야.”
“아... 돌겠다...”
“얼른 받아.”
“그냥 좀.. 부축...”
“안 돼! 그냥 해.”
왜 저렇게 집요하게 굴까? 어차피 그녀가 부축해 주지 않으면 갈 수 없으니, 할 수 없이 몸을 반대쪽으로 돌리고 바지춤을 내렸다. 으... 쪽 팔려.
쪼르르... 하는 천둥 같은 소리와 함께 노란 액체가 유리병을 채웠다. 예상보다 유리병이 더 뜨뜻해져 당황스러웠다.
“다 했어? 이리 줘.”
“아이... 씨...”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누나가 그걸 들고 화장실에 가더니, 또 새숫대야에 물을 받아가지고 나왔다.
“이제 열 없어.”
“알아. 씻어주려구.”
씻기다니...! 뭘? 누나가 잠옷 바지를 끌어내리기 시작하자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 다급하게 허리춤을 쥐어 그녀를 말렸다.
“괘... 괜찮어...”
“괜찮기는. 깨끗하게 해야지.”
“돼..됐어.. 아.. 누나.. 아이.. 참..”
풀이 죽어 있는 자지가 누나 눈에 노출되고 말았다. 무릎까지 잠옷을 내려놓고 누나가 수건을 물에 적시기 시작했다. 진짜 왜 저래? 나를 무슨 아기인 양 돌보고 있는 것이다. 내 기분 따위는 아랑곳없다는 듯 유미 누나가 차가운 수건을 허벅지 안쪽에 대왔다.
“읏, 차가워.”
“쪼금 참아. 더운 물도 있지만 열이 조금 남아있는지 몰라 그냥 찬물로 했어.”
세심하게 구석구석 닦아내는 데 열중하고 있는 유미 누나의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누군가 아파 자신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면, 그가 누구든 저런 열성을 보일 여자인 건 분명했다. 하지만 그간 그녀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되새겨보면, 정말이지 자연스럽지 않았다.
누나의 수건이 기둥을 조이며 올라오더니 결국 조금 전에 소변을 흘려낸 구멍까지 도달하고 말았다. 다른 상황이라면 이미 힘 있게 부풀어 올라 위풍당당하게 고개를 쳐들고 있을 그것이, 그 때는 그저 뼈 없는 부드러운 살덩어리에 불과했다.
“쪼그말 때는 진짜 귀엽다, 그치? 맨 날 바짝 긴장해 있더니...”
귀두 끝을 엄지와 검지로 쥐고, 누나는 늘어진 기둥을 고무줄처럼 당겨 빈약한 기둥을 수건으로 훑었다. 그렇게 스스럼없이 만지며 닦는 것도 기가 찰 지경인데, 마지막엔 그 끝에 쪽! 하고 키스까지 퍼붓더니, 기겁하는 내 반응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유미 누나는 바지를 완전히 벗기더니, 두 다리를 번갈아 들어 올리면서 뒤쪽까지 빠지지 않도록 닦으면서 발가락 끝까지 작업을 끝냈다. 그 때까지, 나는 그저 멍한 표정으로 그런 누나의 행동을 지켜볼 수 밖에...
“깨끗해지니까, 기분 괜찮지?”
누나가 대야의 물을 버리려고 화장실에 간 동안, 빙글빙글 도는 걸 꾹 참고 어렵게 바지를 입었다. 물어봐야 했다. 누나가 설명을 해주지 않으니... 나를 대하는 그녀의 행동이 왜 갑작스럽게 변했는지...
“그만...”
힘겹게 말을 내뱉자 유미 누나가 빙그레 웃었다. 입맛도 입맛이지만 삼킬 때마다 목구멍에 불이 나는 것 같아 더 이상 미음을 삼킬 수가 없었다.
“많이 먹었네, 이 정도면...”
어지러움증이 점점 심해져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방 안이 빙글빙글 도는 통에, 물을 받아 마시기 위해 목을 가누는 것도 쉽지 않았다. 집에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분명 그 정도쯤에 구급차라도 불러 응급실로 나를 데리고 갔을 것이었다. 그리고, 유미 누나와 단 둘이라 뭔가 물어볼 기회까지 생긴 것이다.
“누나...”
“응?”
“왜... 왜 이래?”
“왜라니? 네가 아프잖아.”
“나랑... 그 동안...”
“목 아프니까 더 이상 묻지 마.”
“......”
“나 지금 행복해. 너한테 뭔가 해줄 수 있어서... 내가 너한테 필요하니까...”
누나가 내 눈을 그윽한 표정으로 쳐다 보았다. 예전 유진이 패거리한테 칼침 맞고 응급실에 누워 있었을 때, 병상 옆에서 나를 지켜보던 그 표정... 내가 누나에게 동생보다는 남자로서 존재했던 그 때의 표정이었다. 그 간의 일을 영화 필름 자르듯 자른 건 아니었구나....
“진규 형...”
“그만 얘기하자. 다음에... 너 건강해지면 그 때 얘기 해. 지금은 좀 쉬고...”
진규 군하고 왜 헤어졌는지, 왜 내게 대한 감정이 되살아났는지... 유미 누나에게 묻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녀의 ‘대화 종료’ 선언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눈을 감으니, 어지러움이 덜 했다. 그리고 다시 슬며시 잠에 빠졌다.
누나의 간호 덕분인지 그 다음날 새벽에 눈을 떴을 때는 거의 정상에 가깝게 몸이 회복되어 있었다. 목이 약간 거북한 것 말고는 침대에서 일어서도 전 날 밤과 같은 어지러움은 없었다.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냉장고를 열어 우유를 한 잔 마시고, 아직도 컴컴한 새벽 거리로 나섰다. 만 하루 이상을 침대에서만 지내서 그런지, 운동복 올 사이로 스며드는 차가운 공기가 새삼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끼게 해 주었다.
체육관까지의 로드런닝, 트레이닝과 스파링, 다시 집까지 런닝... 이것이 중학교 3학년 때부터 거의 빠지지 않았던 아침의 일과였다. 처음 킥복싱을 배우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가 기억나자 나도 모르게 큭 하고 웃음이 나왔다. 선미 누나의 ‘독한’ 폭력에 시달리는 이유가 물리력의 차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즉, 무술을 배워 김 선미라는 악당으로부터 김 유미와 나를 보호하겠다는 발상 때문에 시작한 것이다. 내가 핵폭탄을 가지고 있더라도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건 모르고...
많은 무술 중 킥복싱을 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교실에서 치고받는 친구들 중에서 킥복싱을 배운 친구가 가장 셌기 때문이었다. 다른 무술과는 달리 복싱과 킥복싱은 상대방이 쓰러지거나, 긴 경기 시간이 다할 때까지 어떻게든 두들겨 패야하는 무술이라, 싸움 기술을 습득하는 면에서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사양길 근처에서 허덕거리는 무술이었다. 킥복싱이 좋아 다 때려치우고 운동에만 매달린 많은 형들이 대부분 운동으로 성공할 길을 찾지 못해, 다른 길... 특히, 밤의 세계로 빠져나가는 걸, 수도 없이 봐왔었다. 그 중에는 관장님이 아까워 발을 동동 굴렀던 형들도 몇 명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중석이 형?”
“수호 왔냐? 여전하네. 자식.”
“진짜 오랜만이네, 형.”
“그래, 너 본지 꼬박 2년 다 됐네. 대학교 들어갔지?”
“네, 1년 다 됐어요. 근데 어쩐 일이세요?”
“오랜만에 운동 한 번 할까 하고... 같이 함 뛰어 볼래?”
“저야 머... 저 몸 좀 풀고요.”
최 중석이라고 내게 기초를 닦아 준 사람이었다. 나보다 네 살이 많아 내가 입관할 때쯤엔 여기저기 대회를 알아보고 있었지만, 결국 2년 전쯤 관장님께 작별을 고했다. 중석이 형이 나가던 때, 관장님이 그 많은 관원들 대 팽개치고 소주병만으로 며칠 살았을 만큼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2년이 지난 지금 다시 나타난 이유가 뭘까?
그가 관장님 방에 들어간 동안 적당히 땀이 날만큼만 샌드백을 두들겼다. 몸 상태가 회복은 되었어도, 스파링 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관장님 방에서 나온 중석이 형 뒤로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한 명 따라 나왔다. 운동하던 관원들의 시선이 전부 그녀에게 꽂혔다. 호리호리한 키에 갸름한 얼굴... 진을 입은 긴 하체는 육감적이라는 말 말고는 딱히 표현할 단어가 없을 만큼 눈길을 끌었다.
“준비 됐냐?”
“저는 됐어요. 형은 그냥 할려구?”
“너 오기 전에 풀어뒀다.”
“그럼 시작해요.”
글러브를 끼우고, 마우스피스를 물면 몸에 투지가 넘쳐났다. 링 위에서는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나와 상대만 생각하면 되는 것이 매력이었다. 중석이 형을 따라온 여자가 링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를 보는 건지, 중석이 형을 보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여자가 보고 있으면 묘하게 투지가 더 생기는 게 남자...
“룰은 전과 동.”
“저야 좋지만... 형이 되겠어요? 오래 쉬었잖아.”
“짜식이 이제 스승님을 무시하네? 많이 컸다, 김 수호.”
라운드 사이의 인터벌은 휴식을 취하는 외 여러 가지 목적이 있지만, 상대에 대한 과도한 적개심을 누그러뜨리는 것도 효과 중의 하나였다. 그 인터벌이 있어야 스포츠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최 중석 식의 룰에는 인터벌이 없었다. 그냥 한 명이 쓰러질 때까지 계속하는 것이다. 한 번 기세를 잃으면 다시 회복할 기회가 없었다. 물어뜯는 수 밖에...
어깨 너머로 흘려 맞긴 했어도 ‘띵’하는 파동이 머리 전체로 퍼졌다. 그래도 전 날 내내 앓고 있었던 걸 감안하면, 그의 펀치가 약해진 것이 틀림없었다. 예전과는 달리 근육으로 풍선처럼 부풀어 있는 중석이 형의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근육은 격투기에는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괜히 산소만 소모할 뿐... 그건 그의 살아가는 방식이 변했다는 걸 보여 주고 있었다.
‘옆구리’
가드를 아래로 내리고 있는 자세나, 몸을 기울여 선 것은 옆구리를 겁내기 때문인 게 틀림없지만, 애써 무시하고 안면에 집중했다. 빨리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의 땀 냄새와 세찬 호흡음을 느끼는 게 좋았다. 그의 주먹이 맨살에 와 닿는 감촉도 짜릿하고...
내 발이 회초리처럼 허공을 갈라 그의 뺨 아래쪽에 명중했다. 고개가 반대쪽으로 돌아갔다가 금새 회복... 그의 얼굴에 미소가 넘쳤다.
“좋구나!”
이 순간이 계속되었으면... 숨이 턱까지 차 올랐지만 조금 지나면 금새 평안해질 것이었다. 그러면 진짜 상대 말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가드를 올리고 계속 맞아 주었다. 툭, 툭하고 닿는 주먹의 압력... 저런...! 지구력도 많이 약해졌네. 벌써 그렇게 헐떡거리고... 몸이 가뿐해지기 시작했다. 날 것 같은 기분... 이제 각오해, 형.
“됐다, 그만 하자.”
“잉?”
“애고 삭신이야.”
“계속하자, 형. 오랜만이잖아.”
“너도 늙어봐라.”
“아, 왜 그래, 형. 예전같이 톡 쏘는 맛이 없어.”
“말 한 번 싸가지 없이 하네. 내가 준 게 아니라, 네가 많이 늘었다.”
‘짝짝짝...’ 하고 박수소리가 들렸다. 선글라스의 여자가 입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중석이 형 옆으로 다가가 헤드기어를 벗었다.
“형 애인?”
“말조심해라.”
아무래도 그녀 앞에서 내 실력을 테스트해 본 거라는 찜찜한 느낌이 늘었다. 아니나다를까...
“일주일에 세 번, 어때?”
“안한다니까, 형.”
관장실에 앉아 십여분 째 중석이 형과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날더러 두 달 동안 옆에 있는 여자를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다. 다른 사범도 많은데, 그는 꼭 나여야만 한다고 집요하게 설득하고 있었다.
“섭섭찮게 줄게.”
“그 조건이면 하겠다는 사람이 줄 설 텐데 왜 나한테 그래, 형? 나도 방학 때는 좀 놀고 싶어. 틀림없이 펑크낼 거야.”
“제가 원하는 사람이라서 그래요.”
그 때까지 두 사람의 협상을 옆에서 듣고만 있던 선글라스의 여자가 입을 열었다. 그녀가 선글라스를 벗자, 칙칙한 사무실이 갑자기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수정같이 투명한 눈... 미인이다. 단지, 미인이 아니라 품위가 묻어나는 듯한 느낌... 어디선가 본 듯한데... 내가 아는 여자 중에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었나?
“제 얼굴 뚫어지겠어요.”
“혹시 저 모르세요? 저는 낯이 익은데...”
“아이구, 나 원... 너는 임마, TV도 안보고 사냐?”
“호호호... 저 정 수진이라고 해요.”
“아, 맞다!”
화면에서만 보다, 실물을 보니 잘 맞춰지지 않았다. 움직이는 1인 기업이라는 그 여자... 몇 편 찍지도 않았지만 드라마든, 영화든 출연만 했다하면 대박을 터뜨린다는 그 여자였다. 본의 아닌 실례를 만회할 겸 부랴부랴 옆에 있는 아무 노트나 잡고 열었다.
“뭐예요?”
“히히, 사인 좀...!”
“참, 재밌는 분이네. 같이 일하면 수 천 장이라도 해드릴게요.”
“사실 제가 정 수진 씨 같은 분하고 왜 일하고 싶지 않겠어요? 근데, 제가 너무 게을러서 자신이 없어 그래요.”
“며칠 시간을 드릴게요.”
“왜 하필 저죠?”
“활력이 넘쳐 보여서 그래요. 미남이기도 하고... 호호호.”
새벽에 체육관에 나오는 대신 그녀가 소속한 회사로 일주일에 세 번 나가기만 하는 되는 것일 뿐이었다. 만만찮은 액수에 보너스 약속까지... 하지만, 귀찮은 것 뿐 아니라, 무엇보다 중석이 형이 정 수진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 나를 머뭇거리게 했다. 그가 상식적인 일을 하며 살지는 않을 테니, 그 쪽과 연루되는 건 피하고 싶었다.
다 같이 하는 아침식사 자리...
“유미 요즘 좋은 일 있냐?”
“아니예요, 좋은 일은 무슨...”
둔감한 편에 속하는 아빠도 눈치 채실 만큼, 유미 누나의 표현형은 변해 있었다.
“우리 식구도 망년회 해야지. 그 친구도 오라 그래라.”
“......”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가 다시 펴졌다. 그러더니 전혀 김 유미답지 않게 냉정하게 못을 박았다.
“진규 오빠는 이제 더 이상 만나지 않기로 했어요.”
“왜, 싸웠니?”
“그건 아니구요.”
“네가 알아서 할 일이다만... 애비 눈으로 볼 때는 그만한 친구 없다, 요즘 세상에... 그러니 어지간하면 그냥 정 붙여 봐.”
왜 내가 죄를 지은 것 같을까? 전 날 유미 누나의 행동으로 봤을 때, 진규 군과 유미 누나가 헤어진 직접적인 이유는 나 때문인 게 분명해 보였다. 누나가 나를 보았던 시선은 그저 사랑스러운 동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 유진이 말했던 대로 나를 이성으로 보는 있는 느낌이었으니... 물론, 그 이유는 모르지만...
[오늘 우리 집에 와서 저녁 먹어라.]
[너네 집에?]
[어, 유진이하고 새엄마하고 같이 먹자.]
[에이 그냥 나와서 놀자.]
[내일 일찍 복귀해야 돼.]
[아버지는?]
[당연히 없지.]
[갈게.]
내키지 않았다. 성수와 그의 새엄마, 그리고 내가 함께 있는 자리가 잘 그려지지 않는 건, 아무래도 성수도 나도 그녀와 육체관계를 가졌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성수에게는 전혀 그런 거리낌이 없는 것이다. 그에게는 남녀 관계는 그저 단순히 그 두 사람의 문제일 뿐인 것이다.
오랜만에 보는 성수 새엄마는 평소와는 달리 수수한 주부의 옷차림이었다. 옷차림 뿐 아니라 얼굴도 굳어 있는 것이 아마 그런 자리가 그녀에게도 편하지 않은 자리임에 분명했다. 그리고 나보다 조금 후에 도착한 유진도 ‘수호 오빠 왔어?’하고는 이내 딱딱한 표정... 아마도 저녁 자리는 성수의 강요로 만들어진 듯 했다.
“우리 엄마 요리 잘 하시지?”
쨍그랑 소리와 함께 유진의 젓가락이 식탁 아래로 떨어졌다. 그의 급습에 나도 당황했다.
“응? 어... 응. 진짜 맛있어요.... 어머니...”
나는 무의식적으로 성수 새엄마의 표정을 살폈고, 그녀의 얼굴색은 붉게 변하는 걸 관찰할 수 있었다. 성수의 입에서 나온 ‘엄마’라는 호칭이 낯선 건 나 뿐 만이 아니었다. 특히 젓가락을 줍기 위해 숙여졌다가 다시 올라온 유진의 얼굴은 샐쭉하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성수는 작정한 듯 했다.
“진작 집에서 밥 좀 먹고 다닐 걸 그랬네. 우리 엄마 음식 솜씨가 이 정돈 줄 알았으면...”
이 자식이 이런 부자연스러운 자리에 왜 나를 오라고 했을까? 가족 사이의 문제는 가족끼리 풀 일이지... 아웃사이더인 내가 괜한 책임감에 어색한 웃음을 띄고 있었다.
“성수가 군대 가더니 철들었나 봐요, 어머니.”
유진이 젓가락을 놓는 걸 곁눈질로 지켜 보았다. 계집애의 표정이 처음 만난 그 날처럼 독살스럽게 변해 있었다. 새엄마는 무표정하게 그저 밥그릇만 뚫어지게 내려 보고 있었지만, 그녀도 얼굴색이 파리하게 변해 있었다.
“엄마, 나 미역국 한 그릇 더...”
유진의 흥분한 숨소리가 내 귀까지 들리는 듯 했다. 자리를 모면할 핑계가 생겼다는 듯, 재빠르게 식탁을 벗어나는 새엄마... 하지만 조금 후에는 국그릇을 든 채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진짜 맛있다. 아.. 복귀하면 엄마 음식 맛 보고 싶어서 어떡할까?”
거듭되는 엄마 소리는 자신에 대한 강요라고 유진은 판단했던 듯 했다. 또, 항상 자신의 편에서 새엄마를 공동의 적으로 간주하고 있던 오빠의 ‘변절’에 대한 반감도 컸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걸 감안하더라도 유진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지나친 게 분명했다. 게다가 손님인 나까지 있는 자리에서...
“흥, 엄마 보지 맛이겠지!!”
새엄마와 성수가 거의 동시에 의자에서 일어섰다. 새엄마는 후다닥 방으로 뛰어 들어가고, 성수는 유진에게 다가왔다. 성수의 표정을 살핀 나는 그를 말리기 위해 일어섰다. 하지만, 이미 ‘철썩’ 소리와 함께 유진의 가냘픈 몸이 주방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뺨을 손으로 가리고 일어서는 유진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거렸지만, 표독스러운 표정만은 여전했다.
“그런다고 내가 저년한테 엄마, 엄마 할 것 같아?”
“너 이년!”
자신의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유진을 쫓아가는 성수를 어렵게 붙잡았다. ‘쾅’ 소리와 함께 유진의 방 문이 닫히자, 그제서야 성수가 다시 식탁으로 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나도...
“미안하다, 이런 꼴 보이려고 한 거 아닌데..”
“나가서 한 잔 할래?”
어떻게든 가족의 형태를 되찾아 보려는 성수의 노력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본인이 집에 있지 않으니, 좀 더 순리적인 방법을 선택할 수 없는 것도 성수의 어려움일 터였다. 하지만, 유진은 그렇다 치고, 엄마 노릇을 거부하는 새엄마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 한 불가능한 방법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아파트 근처에 있는 주점에 자리를 잡은 후, 잠자코 몇 잔을 마셨다.
“내가 이런 말 하는 거 주제넘지만... 썩 좋은 방법 같지는 않다.”
“그래도... 이 상태로 계속 살 수는 없어.”
“유진이도, 새엄마도 맡기 싫은 역할이야. 너도 알잖아?”
“그러니 어떡할까? 그냥 저 꼴로 죽을 때까지 살까? 일 년만 지나면 유진이 대학 가는데, 그럼 이제 우리는 다 헤어진다. 가족도 없이...”
자신의 눈에 물이 고이는 걸 내게 보이기 부끄러웠는지 이리저리 시선을 굴렸다. 별다른 해법이 없는 것이다. 성수가 전역하기 전에 가족이 깨질 거라는 건 나도 예측할 수 있었다. 아니... 깨질 가족이 있기나 하나?
“수호야.”
“응?”
나한테 죽기 직전까지 얻어터질 때까지도 자존심만은 지켜냈던 성수에게서는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주점에 두세 팀의 손님이 있었지만, 성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의자에서 일어나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손님들의 시선이 일제히 우리에게 쏠렸다.
“야, 뭐해? 일어서!”
“너한테는 진짜 면목이 없다.”
“알았어, 알아. 그니까 일어 서.”
“믿을 사람이 너 밖에 없어 이런다.”
“알았다고!! 제대로 앉아서 이야기하자고!!”
“네가 좀 도와주라.”
“......”
“너 평생 은인으로 잊지 않을게.”
“일어서서 얘기하자고!!”
“도와준다고 약속하면 일어설게.”
“약속한다! 약속해! 제발 좀 일어서 주라.”
씨발놈이... 어색하게...! 성수를 어렵게 다시 의자에 앉혀 놓았다.
“내가 뭘 도울 수 있을까?”
“나 제대할 때까지 깨지지 않게만 해 주면... 그 다음엔 내가 어떻게든 해 볼게.”
“너 심정은 이해하지만, 나는 그냥 과외 선생일 뿐이야. 오빠 친구고...”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아.”
“무슨 뜻이냐?”
“유진이가 널 좋아하니까. 오빠 친구 이상으로...”
‘풋!’하고 웃음을 터뜨릴 뻔 했다. 성수가 보는 눈이 맞겠지. 그래도 그 만큼은 아니다. 내가 ‘집에 붙어 있어!’한다고 얌전히 붙어 있을 얘는 절대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건 그렇다 쳐도, 새엄마는?”
“거기도 그래. 네가 유일한 통로야.”
“통로라니?”
“낯선 세상으로 열린 통로 말야. 너만은 거부하지 않아. 그러니 네가 좀 꺼내 주라. 아니 닫지만 마라. 그 통로...”
“뜬구름 잡는 소리 하지 마라.”
“너도 알고 있잖아?”
나도 알고 있었다. 성수 새엄마가 그리는 삶의 테두리에서 내가 거의 유일한 이방인이라는 것을... 그녀에게는 내가 ‘통제되지 않은 유일한 것’ 임이 분명했다. 약속을 한다는 건 어떻게든 그녀에게서 내 비중을 높여야 한다는 걸 의미했다. 그녀가 나를 통해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보편적인 사람들이 사는 세상...
“해 보자... 솔직히 자신 없지만...”
“알아. 그래도 기댈 사람이 진짜 너 밖에 없다.”
“그 말 할라구 나 오라 그랬지. 씨발 놈아!”
“히힛. 미안하다.”
“유진이한테는 한 마디 해주고 가라. 그게 오빠가 할 짓이었냐?”
“다음에... 지금쯤 아마 집에 있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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