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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16:01 991회 0건
줄 간격을 좀 넓히면 좋겠다는 의견 감사합니다만, 한글에서 작업해 옮기고 나서 또 일일히 줄을 손보는 게 만만치가 않아 그냥 포기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 스크롤바 잡아당기는 수고는 좀 던다는 장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눈이 아픈 건 쪼금 참아주시면 합니다...^^

=====================================================================================================


결국 유미 누나와 데이트도, 고백도 하지 못했다. 학교에서 돌아온 유미 누나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나에게 어색한 미소를 잠깐 보여주고는 자신의 방안에 틀어 박혔다. 나는 아직도 파랗게 질려 있는 그녀의 입술을 보고, 학교에서 무슨 일이든 있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무엇인지도...

누나가 누군가의 입에서 진규 형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녀가 받았을 충격을 상상하니 나도 모르게 몸서리가 쳐졌다. 뭔가 위로를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녀의 방 앞까지 갔다가, 문 밖으로 새어나오는 누나의 흐느낌을 듣고 다시 발걸음을 돌렸다. 내가 진규 형의 죽음을 알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 때의 누나에겐 누구도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말해 주었어야 했는데...

전날 밤의 기회를 놓친 게 너무나 안타까웠다. 어차피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었지만, 그래도 누나와 진규 형의 관계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준비를 할 시간은 있어야만 했다.

저녁이 되어도 누나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간단히 먹을거리를 챙겨서 누나의 방문을 열었다. 누나는 어두운 침대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불 켜지 마!”

책상 위에 쟁반을 내려 놓았다.

“뭘 좀 먹어, 누나. 여기 둘테니까...”
“수호야.”

돌아서는 나를 누나가 불러 세웠다.

“응?”
“너... 알고 있었어?”

“...... 응.......”
“왜 말하지 않았어?”

“말 하려고 했었어... 오늘...”
“어떻게... 나만 모르고 있을 수가 있어...”

“......”
“흐흐흑...”

“누나 잘못이 아니잖아......”
“나 때문이잖아......”

그건 진규 형의 선택일 뿐이라고, 누나가 거기까지 책임질 수는 없는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줘도 소용없다는 걸, 내 자신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누나는 나보다 훨씬 조건이 좋지 않았다. 남은 학교생활 일 년이 지옥 같을 것이 분명했다. 최소한, 누나와 같은 과에 다니는 사람들은 진규 형이 죽음을 선택한 직접적인 이유가 뭔지 알고 있을 테니까. 진규 형! 누나한테도 편지 한 장 남겼어야지... 괜찮다고. 밤엔 누나 방의 기척에 무척 신경이 쓰였다. 그럴 리는 없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혹시라도 누나가 엉뚱한 행동을 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에...




“꼭 니가 군대 복귀하는 사람 같다?”
“왜?”

“얼굴이 그렇잖아. 세상 쓴 맛 다 본 것처럼...”
“좋지 않은 일이 있어서 그래. 일은 잘 돼가?”

“귀대할 수 있을 만큼은...”
“어머니는 어디 계셔?”

“아직 거기... 괜찮아 보여.”
“너네 아빠랑은 얘기해 봤어?”

“무슨 얘기? 엄마는 내가 숨겨놓고 있으니까 절대 손 댈 생각하지 말라는 얘기? 하하하!”

여태까지 성수의 아버지는 설마 유진과 내가 쳐들어가 그녀를 빼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테니... 성수가 섣불리 담판을 지을 수는 없었다. 성수가 가진 무기도 변변찮을뿐더러, 잘못되면 그 피해가 골고루 미칠게 분명했다.

“그럼 어떻게 하려고?”
“믿을 만한 변호사를 구했어.”

“변호사라니?”
“이혼 소송을 하려고...”

“이혼? 이혼할 수 있어?”
“아마 못할 거야. 그래도 그렇게 해놔야만 함부로 못해. 건드렸다가는 시선을 받을 테니까...”

“무슨 뜻인지 대충은 알겠다.”
“많이 생각해 봤는데, 달리 뾰족한 수가 없더라.”

“잘 했어.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네가 나보다 백배는 똑똑해.”
“나 다시 휴가 나오려면 육 개월쯤 있어야 하는데, 그 때쯤 시작하게 하려고... 쉽진 않을 거야.”

“그 때까진 숨어 있어야겠네?”
“그래야지.”

“내가 가끔 찾아가 뵐게.”
“그래... 그거 부탁하려고 했는데... 역시 너도 똑똑해. 무식하게 싸움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푸후후.”

똑똑하지 않다, 사실. 학교 성적만 괜찮았던 거지... 왜 학교에서는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서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성수와 헤어져 집에 돌아와 보니, 유미 누나가 싱크대 앞에 붙어 뭔가를 하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녀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 내겐 너무나 고마웠다. 확실히 누나가 나보다 심리적으로는 훨씬 강한 것 같았다. 마치 일이 필요해서 하는 게 아니라, 뭐라도 하기 위해 일을 하는 것 같았다. 일부러 큰 목소리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누나, 뭐 해? 맛있는 거 만들어?”

누나가 대답 대신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누나의 얼굴은 무기력해 보이고, 표정마저 없었다. 미소가 없는 누나의 얼굴을 마주보기가 무척이나 멋쩍었다.

“나 잠깐만 내버려 둘래? 너무 힘들어서 그래...”

그래도 최소한 집을 뛰쳐나가지는 않았으니까... 그리고 최소한 나에 대한 원망은 없는 것 같으니까... 건드리지 말아 달라는 그녀의 요구가 그리 실망스럽지 않았다. 누나에겐 시간이 필요했고, 그건 내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 진실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숙모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어떻게 저런 누나에게 ‘그 동안 내가 누나를 속였어!’ 하겠는가?

며칠 동안 누나의 얼굴에 단 한 번의 미소도 떠오르지 않았다. 엄마의 심부름 외에는 외출도 하지 않고... 나를 포함해 누구하고도 이야기를 나누지 않은 채, 자신만의 세계에 고립되어 있었다. 그러니 때마침 설이 다가온다는 것이 내겐 너무나 다행스러웠다. 여느 명절 때처럼 누나가 활기에 넘쳐 일을 하는 대신, 무기력한 얼굴로 ‘그저 뭔가 하기 위해’ 엄마의 일을 도울 뿐이었지만, 그나마 누나가 세상과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나는 누나가 다시 예전의 김 유미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나는 나처럼 격정에 휘말린 채 죽기 직전까지 가는 어이없는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기다리는 내게는 너무나 가혹할 만큼 오랫동안 그 아픔을 곱씹고 있었다. 설날 아침에 부모님께 세배를 드릴 때까지도 누나의 표정은 처음 진규 형의 소식을 접한 날 보여주었던 그 표정이었다.

설날 오후에는 누나도 외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먼저 삼촌 집에 들러 삼촌과 숙모에게 세배를 드렸다. 고모네 집으로 향하기 위해 나오는 우리를 배웅하면서, 유미 누나가 잠깐 멀어진 사이를 틈타 숙모가 내게 말을 건넸다.

“누나한테 이야기했어요, 도련님?”
“아직 하지 못했어요.”

“근데 누나 표정이 왜 저래요? 난 그 이야기 듣고 저러는 줄 알았더니...”
“진규 형 소식을 들었어요.”

“어머, 그랬구나. 얼마나 괴로울까...”
“그래서 말을 못하겠어요. 시간이 좀 지나서 누나가 괜찮아지면...”

“언제 들어도 힘들 거예요. 하지만, 늦으면 늦을수록 더 힘들겠죠.”
“그래도 어떻게 지금 얘기할 수 있겠어요? 저렇게 고통스러워하는데...”

“도련님도 참 어렵겠다. 어떡하죠? 돕지도 못하고...”
“항상 시기를 놓치는 느낌이예요. 제가 생각해도 제 자신이 참 한심해요.”

“그렇지 않아요, 도련님. 누가 해도 잘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니까... 힘내요.”
“더 늦기 전에 얘기하긴 해야 하는데...”

“그러세요. 그냥 수수방관하고 있으면 나중엔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게 될 거야.”

지금 생각해 보면, 숙모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도 나는 이미 기회를 잃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가 그런 고백을 쉽게 할 수 있었겠는가?

고모네 집에 도착하고 보니, 고모부가 아직 집에 돌아오시지 않아 저녁을 먹고 나서 기다려야만 했다. 나를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학생으로 알고 계시는 고모는 나만 보면 늘 그러시듯, 아직 중학교에 다니는 그녀의 아들, 내 사촌동생 병주의 성적에 대해 푸념을 늘어 놓았다. 병주는 방학 동안 단기 영어 연수를 위해 캐나다에 가 있었다.

“그냥 갈래? 어차피 내일 우리가 너네 집에 갈 텐데... 이 양반이 전화도 안 받고...”
“조금만 더 기다려 볼게요.”

고모부가 집에 전화를 한 건, 밤 열 시쯤이었다.

“수호야. 가서 고모부 좀 모시고 와라. 이 양반이 글쎄 택시를 탔는데, 계산할 돈이 없댄다.”

고모부는 세배를 받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고모부를 부축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자, 그래도 처조카들의 세배는 받겠다며, 거실에 자리를 잡고 앉으셨다.

운명은 소리 없는 음모를 한 치도 어김없이 마련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나와 유미 누나는 ‘새해에도 건강하세요.’하며 나란히 세배를 올렸고, 만취한 고모부는 눈앞에 있는 처조카들의 얼굴과 이름도 꿰맞추지 못하셨다.

“그래... 수호 너도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교 꼭 가고...”
“어유, 병주 아빠. 수호가 의대 들어간 지가 언젠데...”

“어... 그랬나? 그래 그래... 그리고 너는... 누구냐... 선미지?”
“눈 좀 제대로 뜨고 봐요. 조카들 보기 창피해 죽겠네, 정말. 유미잖아요! 둘째, 유미!”

“아!... 그... 아주머니 언니가 낳은 딸?”
“병주 아빠!”

“......”
“......”
“......”
“......”

거실은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순식간에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고, 내 심장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유미 누나의 표정을 살피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실수를 눈치 챈 고모부는 딴청을 피우고 계셨지만, 고모는 얼굴이 사색이 된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유미 누나의 정수리를 보고 계셨다.

“유미야, 그게...”
“저도 알고 있어요, 고모.”

“아... 그... 그래...”
“저... 고모, 내일 오실 거죠? 오늘은 그만 돌아가 볼게요.”

더 이상 그 화제가 계속되는 것만은 무슨 짓을 해서든 막고 싶어 서둘러 일어섰다. 말은 할 수 있는데, 뭔가가 입을 막은 것처럼 숨은 잘 쉬어지지 않았다. 고모의 입이 열리기 전의 불과 몇 초가 몇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다행히 고모도 그 어색한 순간을 벗어나고 싶었나 보다.

“그래라. 아이구, 미안하다. 고모부가 이래서 세배도 제대로 못 받고...”

누나가 말없이 일어서서 고모와 고모부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리고 난 다음, 먼저 몸을 돌려 출입문을 향했다. 됐다..!

“수호야. 고모부 좀 부축해 줄래?”

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안달이 난 내 심정을 고모가 알 리 없었다. 침실로 고모부를 부축해 옮기는 동안 누나는 신발을 신고 나를 기다렸고, 고모가 그녀의 앞에 있었다. 침실에서 나오자 고모의 어깨 너머로 무표정한 유미 누나의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나도 신발을 신고 인사를 꾸벅 하고 나가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항상 입으로 자기 자신 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표현해야만 하는 고모의 적극성은 그 짧은 순간의 정적을 참지 못했다. 나는 걸어가고 있었고, 고모는 나를 등진 채 누나에게 말을 하기 시작했다.

“다 잊고 지내라, 유미야. 응? 좋게 생각하고... 그래도 어머니, 아버지가 다 핏줄이 아닌 것 보다는 낫잖니?”

며칠 만에 처음으로 유미 누나의 눈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당연히 달려가 고모의 입이라도 막아야 할 나는 그냥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고모는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최대한 좋은 충고를 제멋대로 이어나갔다.

“네 엄마도 너 키우면서 오죽 힘들었겠니? 남편이 덜렁 모르는 자식을 만들어 왔는데... 그래도 지금까지 널 친자식인 양, 아무데도 빠진 데 없이 잘 키웠잖아. 그러니, 너도 항상 친엄마라 여기고 모셔야지.”

그때 내 심정을 어떻게 표현할까? 다시 표정이 없어진 유미 누나의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 슬픔도, 증오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쾡한 눈... 창백하게 질린 뺨... 세상의 어느 시체보다 싸늘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검은 눈동자 뒤에 숨어있는 아득한 절망이 내 심장을 천근만근의 무게로 짓눌렀다.

누나가 다시 고모에게 고개를 꾸벅 숙인 다음 먼저 나가고, 나도 방바닥에 붙은 듯한 다리를 겨우 움직여 어렵게 그녀를 따라 나갔다. 누나는 나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녀를 태운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내려가는 사이, 닥치는 대로 계단을 건너뛰며 나도 일 층을 향했다. 건물 입구에 도착하자, 이제 막 승객이 내리고 있는 택시를 향해 뛰어가는 누나의 뒷모습이 보였다. 언제부터 저렇게 잘 뛰었던가?

“누나!”

누나는 이미 택시의 문을 열고 있었다.

“멈춰! 유미야! 멈춰! 제발! 내 말 좀 들어 봐!”

하지만, 그녀를 태운 택시가 멀어지는 것을 멀거니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아... 결국!
고모의 입이 아니라, 내 입을 통해 들었더라도 유미 누나가 받았을 충격은 변함없었을 것이다... 라고 자위해 보았지만, 그래도 역시, 누나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키고, 내 입으로 고백하는 게 너 나았다. 찬 물에 풍덩 담가버리는 것보다는 다리부터 서서히 적시는 게 더 쉬운 것처럼...

부모님의 얼굴에는 내가 누나 없이 혼자 터덜터덜 귀가하는 이유를 안다고 쓰여 있었다. 그 사이에 고모가 전화를 해,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다 얘기하신 것이다. 엄마는 소파에 앉아, 컴컴해서 보이는 게 아무 것도 없는 마당을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고 계셨고, 아빠는 안방으로 나를 불러들이셨다.

“수호 네가 아버지로서의 나한테 실망할 지도 모르겠다만...”

나는 최소한 반년 전부터 알고 있었던, 유미 누나의 출생에 관한 사실을 아빠로부터 들어야 했다. 아들의 충격을 염려해서 가장 조심스럽게 말씀하시는 아빠의 이야기에 몰두하지 못한 건, 다 알고 있는 이야기라서가 아니라 밤거리를 헤매고 있을 유미 누나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다. 전 국민이 가족과 함께 하는 설 날 밤에 유미 누나를 재워줄 만한 친구가 있을까?

“그렇게 돼서 너희들한테는 지금까지 비밀로 한 거다. 유미 시집갈 때쯤 너희들에게 얘기해 주려고 했다만, 어차피 이렇게 된 게 차라리 잘 된 것도 같다. 나는 너희들도 이제 그 정도는 감당할 나이가 됐다고 믿어.”

아빠는 벌겋게 부은 내 눈과 갑작스러운 유미누나의 일탈의 이유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출생의 비밀을 갑자기 접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계셨다.

“누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이 정도는 유미가 충분히 받아들일 게다.”

그 정도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건 알아요. 누나 강하니까... 하지만, 출생의 비밀 따위의 문제가 아니예요, 아빠. 근친상간의 문제예요. 누나가 말했던 그 ‘끔찍한 짓’을 누나 스스로 하고 있었거든요... 저한테 속아서...

연락을 받은 선미 누나도 허겁지겁 대문을 열었다. 문제를 단순하게 생각하시는 부모님과는 달리, 그간 내게서, 그리고, 유미 누나에게서 진실의 단편 만을 들었던 선미 누나는 아빠에게서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 명석하고 논리적인 두뇌로 사건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유추해 냈다. 그리고 내 방에 올라와 마치 짐승처럼 좁은 방구석에서 서성이는 나를 쏘아 보았다.

“이해하려고 노력은 해 보겠다만... 그래도 네가 내 동생이니까.”
“......”

“하지만, 지금은 정말 네가 무섭다. 너 욕심 차리려고... 어떻게 유미한테...”

내 욕심 뿐만은 아냐!! 아니... 맞다... 내 욕심 뿐이었네.

“누나가 날 어떻게 생각해도 좋아! 다 인정해! 그러니까... 엄마하고 아빠한테는 비밀로 해 줘.”
“흥, 그래도 그 정도의 양심은 남았나 보지?”

‘쾅!’하고 닫히는 문...

제기랄!

나는 천하의 잡놈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거는 아무래도 좋았다. 유미 누나만 집에 돌아와 준다면... 예전처럼 가슴을 들뜨게 하는 미소를 지어주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가족의 테두리 내에 있어만 준다면...

모두 잠들지 못하고 거실에 모여 있었다. 새벽 네 시쯤 되었을까?

‘따르릉....’

[여보세요?]
[......]

[맞습니다만...]
[......]

[맞다니까요!]
[......]

[제가 걔 아비되는 사람입니다만.]
[......]

[예? 응급실요?]
[......]

[뭐요!! 음독이라고요?]


아..............!









병상에 누워 잠들어 있는 유미 누나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마치 아기처럼... 아무 근심도 없어 보였다. 나 뿐 아니라 다른 가족들 모두 죽지는 않을 거라는 의사의 말에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 있었다. 수면제를 과다하게 먹긴 했지만, 죽었다면 수면제 때문이 아니라 저체온증 때문이었을 거라고 했다. 경찰이 신고 받고 출동 했을 때 누나는 작은 공원의 벤치에 누워 있었고, 만약 조금만 늦게 발견되었더라면 어찌 되었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덜덜 떨리는 아랫입술을 윗입술로 억누르며 누나의 병상 옆에 혼자 앉아 있었다., 아빠는 입원 수속을 하러 가시고, 선미 누나는 엄마를 진정시키기 위해 어디론가 모시고 갔다. 지금 당장 유미 누나가 눈을 뜨고 ‘널 용서해..’하면 좋겠지만, 나는 유미 누나가 죽지만 않는다면 좀 더 오래 잠이 들어 있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다. 눈을 뜨면 지옥일 테니까... 진규 형의 죽음, 남동생과의 패륜...

잠들어 있는 동안 모든 마음의 짐을 다 정리하고, 아.. 개운해.. 하면서 눈을 뜨면 얼마나 좋을까?

아빠가 입원 수속을 마치고 오셨고, 엄마와 선미 누나도 돌아왔다.

“수호야. 엄마 좀 집에 모시고 가렴.”

아빠도 당황하신 듯 했다. 아빠가 아시는 사실 만으로는 유미 누나의 돌발적인 행동이 잘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식 누구에게도 그것을 내비치지 않으려 애쓰고 계셨다. 그리고 그런 아빠에게 나는... 죄송스러운 마음뿐이었다.

“저 여기 있을래요.”
“집에 가서 좀 쉬어, 엄마. 유미 입원하면 오래 걸릴 텐데, 돌아가면서 간호해야지.”

“그래, 수호 엄마. 여기는 선미랑 내가 우선 알아서 할 테니까, 한 숨 푹 자고 다시 나와.”
“누나 대신 제가 있으면 안 돼요?”

선미 누나가 나를 쏘아 보았다. 마치 사고의 피해자 가족이 가해자를 노려보는 눈빛으로...

“수호 너, 잠깐 나 좀 볼래?”

그녀가 나를 응급실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얌전히 집에 박혀 있어라, 응? 유미 눈 뜨고 너 보고 싶다고 하면 내가 전화할 테니까... 유미가 지금 널 보고 싶을 거 같아?”
“......”


선미 누나는 예전 김 선미의 모습을 다시 회복해 가고 있었다. 그 표독스러움과 냉철함... 그리고 정연한 논리... 내 심장을 쿡쿡 쑤시는 말투까지... 의기소침한 나는 지시대로 엄마를 모시고 집에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오후 늦게, 유미 누나가 눈을 떴다는 연락을 받고 감격해 하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부모님들에게는 왜 하나 뿐인 동생인 내가 단 한 번도 누나의 문병을 가지 않는 지, 의문을 가질 여유가 없으셨다. 그분들의 생각에는 가해자가 내가 아닌 자신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신들과 유미 누나 사이의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부모님의 최대의 과제였기 때문에, 자식 셋 중 하나가 누나에게 무관심하건, 적극적이건... 관심을 가질 수가 없으셨다.

나는 유미 누나의 소식을 ‘주워 들으며’, 선미 누나의 전화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참지 못한 내가 선미 누나에게 전화를 하면, 누나는 그저 ‘아직’이라는 말로 유미 누나를 보고 싶어 하는 내 열망에 찬물을 끼얹어 버렸다. 유미 누나가 병실에서 회복되어 가는 동안, 나는 집에서 고목처럼 말라가고 있었다.


308호

그 다음 날 퇴원하는 걸 기다리지 못하고, 유미 누나의 병실 앞에 선 이유는 퇴원을 집으로 하는 게 아니라, 선미 누나의 집으로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병원보다 더 다가가기 어려워질 게 뻔했으니까... 새벽 2시에 병실 앞에 서성이는 나를 누군가 본다면 절도범 쯤으로 의심했겠지만, 다행이 작은 그 병원에는 새벽에 돌아다닐 만큼 병동에 간호사가 많이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

슬며시 병실 문을 열었다. 복도의 조명이 어두운 병실 바닥에 긴 직사각형을 만들고, 그 직사각형의 끝에 병상의 다리께가 걸쳐졌다. 누나 머리의 실루엣을 보자 반가운 마음이 왈칵 치솟았지만, 우선 간이침대에 누워 계신 엄마의 동정부터 살폈다.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흉곽을 확인하고 병실 문을 닫자 병실은 다시 어둠 속에 빠져들었다. 창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불빛만 의지한 채 발자욱 소리를 죽여 누나의 옆으로 다가가, 간이 의자에 슬며시 걸터앉았다.

누나... 수호 왔어...

어둠이 눈에 익자 점점 누나의 윤곽이 선명해졌다. 누나의 고개는 내 쪽을 향하고 있었다. 밋밋하다 급격하게 꺾어지는 턱 선... 갸름한 콧날... 갑자기 눈 앞에 뿌옇게 변해 윤곽이 흐려지고, 코가 시큰해졌다. 코를 훌쩍이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더니, 코에서도 물이 흘러나왔다. 소매로 눈물을 대충 닦아내고 다시 누나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눈썹 아래 껌껌한 그늘 속에 있는 누나의 눈꺼풀은 열려져 있었고, 그 아래에 음영보다 더 진한 눈동자 두 개가 나를 향해 있었다. 누나는 자고 있지 않았다. 내가 이를 드러내고 웃어 주었지만, 그녀는 눈마저 깜박이지 않았다. 나를 향해 눈만 뜨고 있는 건지, 나를 보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도 그냥 말없이 누나의 눈을 마주 보아 주었다.

사랑해, 누나...
앞으로는 서로 연인일 수 없겠지만...
항상 곁에 있을게...
누나가 원하면...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누나의 눈동자가 희미한 불빛을 반사하며 반짝였다. 눈꺼풀이 한 번 내려왔다 다시 올라가자 얼굴의 사면을 타고 물줄기가 흘러 내렸다. 가슴이 아려왔다. 그 물줄기를 내 손으로 닦아주고 싶었지만, 누나의 얼굴은 물론, 손가락 끝마저도 다시 손 댈 수는 없었다.

이제 그만... 하듯 누나가 몸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나는 조용히 의자에서 일어나 병실 문을 향해 걸었다. 문을 열고 복도의 조명을 등지고 서서, 누나의 얼굴이 있을만한 방향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누나는 물론... 내가 알아챌 수 있는 어떤 제스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작은 목소리로 "수호야, 잘가."만 해줘도 정말 행복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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