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야설] 화랑색기(花郞色記) - 남녀상열지사 시리즈 1(부제 : 역사 펜픽)
고려 말 신흥 사대부에 의해서 유교사상(특히 주자의 성리학)이 도입됐습니다.
조선 성립에 이념적인 배경이 된 성리학은 성에대한 자유로운 표현에 많은 제약을 두고 있습니다.
특히 남녀 차별과 정조 관념을 강화해서 성에 대한 자유로움을 박탈했습니다.
남존여비와 여필종사를 강조하며 남녀간의 성 문제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을 금기시 해왔습니다.
이는 고려 때가지 자유로웠던 성의 개념을 문란하다고 치부하여 조선의 건국을 정당화한 한 가지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역사자료를 보면 우리들의 먼 조상들은 성에 대한 자유로운 표현과 행동에 제약을 두지 않았습니다.
남녀간의 성 문제에 대해서 오히려 개방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고대사회란 특수성도 있었을 수 있지만 남녀간의 성행위에 대한 특유의 풍습이 존재했습니다.
역사적인 사실로는 고구려의 <형사취수제(兄死取嫂制) - 고대시대 전쟁이 많은 나라에서 인구 감소를 막기위해 전투에 나가 죽은 자의 형제가 죽은 자의 부인을 아내로 취하는 제도>, 신라시대 골품제도 가운데 <성골(聖骨) - 왕족과 왕족이 결혼해서 나은 혈족으로 결국 근친혼이 될 수밖에 없다.)>과 남여상열지사로 몰려 많은 자료가 조선시대에 사라져버린 고려가요 가운데 <쌍화점(雙花店)> 등을 들 수 있습니다.
1989년 [삼국사기]에 일부 내용만 전해지던 [화랑세기]의 필사본이 발견되었습니다.
화랑세기 필사본 자체가 아직 사실인지 위작인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실의 기록이라 확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화랑세기]에 나오는 내용들은 현실에서 받아들이기에 충격적인 내용들도 있습니다.
근친혼(近親婚), 동성애(同姓愛), 다부제(多夫制), 마복자(磨腹子) 등 불교나 유교사상과 대치되는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글 <화랑색기>는 [화랑세기]에 나오는 기록을 바탕으로 하고 상상을 더하여 쓰는 글입니다.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 또한 [화랑세기]에 기록된 인물들도 있지만 지어낸 이름도 있을 것입니다.
많은 부분이 상상에 의한 창작이기 때문에, 독자여러분들께서는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지 마시고 단순한 야설로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덧붙여 <화랑색기>에서는 풍월주를 비롯한 화랑과 낭두(郎頭)및 낭도(郎徒)에 관련된 이야기를 열전 형식으로 쓰게 됩니다.
그리고 화랑의 부인이 된 공주(公主)와 궁주(宮主)의 이야기를 다루게 됩니다.
아울러 화랑의 여인이었던 원화(源花)와 화주(花主), 봉화(奉花), 유화(遊花) 및 그들의 사부(私夫)에 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임금과 관련된 이야기는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신라왕들의 성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써볼까 합니다.
아래 나오는 자료는 [화랑세기]에 나온 기록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화랑색기]를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내용입니다. ‘다음’의 백과사전을 검색한 자료들 가운데 고른 내용임을 밝힙니다. - 누룩범 -
* [화랑세기(花郞世紀)]
신라 성덕왕 때의 학자 김대문(金大問)이 저술한 역사서. [삼국사기]에 일부 내용만 전하였으나, 1989년 조선 후기 박창화의 필사본으로 보이는 [화랑세기]가 발견되었다. 총 16장 32면으로 후반부가 일부 탈락되었다.
먼저 화랑의 기원을 밝히고 본문의 서술방식은 가족관계, 행적, 찬(贊)의 순이다. 등장인물은 총 138명이다. 비치 마립간 때부터 신문왕때 까지 화랑의 우두머리인 32세의 풍월주에 대한 열전형식으로 기록되었다. 이 책에 서술된 내용은 가히 충격적으로 근친혼(近親婚), 동성애(同姓愛), 다부제(多夫制) 등 고대사회의 실상이 생생히 그려져 있다.
아직 사실 또는 위작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위작이 아닌 사실이라면 고려시대 이전에 씌여진 역사서로 유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최초의 사서로 평가된다. 89년 번역본이 간행되었다.
* 화랑은 선도(仙徒)이다.
우리나라에서 신궁(神宮)을 받들고 하늘에 대제(大祭)를 행하는 것은 마치 연(燕)의 동산에서, 노(魯)의 태산에서 한 것과 같다. 옛날 연부인(燕夫人)이 선도(仙徒)를 좋아하여 많은 미인을 길렀는데 이름 하기를 국화(國花)라 하였다.
그 풍습이 동쪽으로 흘러들어, 우리나라에서는 여자로써 원화를 삼게 되었다. 지소태후가 이것(원화)을 폐하고 화랑을 설치하여 국인들로 하여금 그들을 받들게 하였다.
이에 앞서 법흥대왕이 위화랑을 사랑하여 이름을 화랑이라 불렀다. 화랑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하였다.
옛날에 선도는 단지 신을 받드는 것(奉神)을 위주로 하였는데, 국공(國公)들이 이것(봉신)을 베풀어 행한 후에(또는 국공들이 무리(화랑도)에 들어간 후에) 선도는 도의를 서로 힘썼다. 이에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빼어났고 훌륭한 장군과 용감한 병졸이 이로부터 나왔다. (이에) 화랑의 역사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 [화랑세기] 서문 -
* 마복자(磨腹子)
이미 임신한 귀족의 부인과 왕과의 성관계를 통해 태어난 아이를 말한다.
즉, 마복자는 왕자는 아니지만, 왕의 의자(義子)가 되어 그와 비슷한 지위를 부여받는다.
왕의 아들만이 마복자로 불린 것은 아니었으며, 화랑이나 기타 귀족 집단 사이에서도 마복자 풍습이 존재하였다. 예를 들어, 화랑의 간부층이라고 할 수 있는 낭두들은, 풍월주의 마복자들로 구성된다.
화랑의 제1대 풍월주인 위화랑의 경우 소지 마립간의 마복자였으며, 사다함과 진흥왕 등의 부인이었던 미실궁주의 아들들도 상당수가 마복자이다.
왕이나 귀족들은 마복자를 거느리게 되어 자신들을 지지하는 집단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마복자들은 그들의 후견세력으로 왕이나 귀족을 모실 수 있었던 것이다.
[화랑세기]가 한국인들을 당혹스럽게 만든 가장 큰 사실이 마복자의 존재다.
마복자 제도는 현대의 윤리로 보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분명하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여성의 정절을 강조하는 윤리나 기독교적인 유리로는 용납할 수 없는 제도가 마복자 제도다.
* 마복칠성
[화랑세기] 1세 위화랑 조에 나오는 마복칠성이란 비처왕의 마복자들을 가리킨다.
아시공(阿時公), 수지공(守知公), 이등공(伊登公), 태종공(苔宗公), 비량공(比梁公), 융취공(또는 용취공), 원종공(元宗公 - 법흥왕) 등이 그들이며 혹은 이등공 대신 위화랑을 마복칠성에 넣기도 한다.
[화랑세기]에는 위화랑은 어머니의 신분이 낮아 포함되지 않았다는 구절이 있다. [칠성록(七星錄)] 및 [보혜기]에는 모두 이등공(伊登公)이 없고 위화랑을 기재하고 있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잘 알 수 없다.
법흥대왕은 칠성(七星)의 우두머리이다,
비처왕과 마복자들은 일종의 사회, 정치적 의제(또는 의자) 가족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처왕은 마복자로 구성된 정치적 추종자들은 갖게 되었고, 마복자는 비처왕이라는 정치적 후원자를 갖게 된 것이다.
* 비치 마립간 [비처왕(毗處王) 또는 소지왕(炤知王)]
신라의 21대 임금이다. 재위기간은 479~500년이다. 아버지는 자비왕이고 어머니는 김씨부인이다.
비처왕때에 흥미로운 조직체 중 하나는 마복자 집단들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보이지 않던 마복자라는 존재가 화랑세기에 등장하는데, 비처왕의 마복자는 비처왕의 정치적 후원자임과 동시에 비처로부터 정치적으로 도움을 받는 존재들이다.
비처왕의 마복자는 총 7명이다. 아시공, 법흥(원종공), 수지공, 이등공, 태종공, 비량공, 융취공이다.
하지만 [보혜기]와 [칠성록]에 의하면, 이등공이 아니라 위화랑이라 한다. 마복7자의 우두머리는 법흥이었다.
* 풍월주(風月主)
풍월주는 [화랑세기]에 기록된 화랑도의 수장이다.
후에 화랑도의 파가 갈라지며 국선과 풍월주가 각 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풍월주는 540년 처음 설치되어 681년 폐지되었으며, 32명의 화랑에게 승계되었다.
풍월주의 존재는 화랑세기만이 아니라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등의 사서에도 확인된다.
한편, 삼국유사 탑상 편에 따르면, 진흥왕은 원화 제도를 폐지하고 몇달 후 화랑을 신설하면서 화랑세기에서 7대 풍월주로 되어 있는 설원랑을 초대 국선으로 삼았다하여 화랑세기의 기록과 차이를 보인다.
참고로, [화랑세기]를 기록한 김대문(金大文)은 28대 풍월주인 오기공의 아들이다.
<역대 풍월주>
1대 위화랑(魏花郞) - 2대 미진부공(未珍夫公) - 3대 모랑(毛郞) - 4대 이화랑(二花郞) -5대 사다함(斯多含) -
6대 세종(世宗) - 7대 설원공(薛花郞) - 8대 문노(文努) - 9대 비보랑(秘宝郞) - 10대 미생랑(美生郞) -
11대 하종(夏宗) - 12대 보리공(菩利公) - 13대 용춘공(龍春公) - 14대 호림공(虎林公) - 15대 유신공(庾信公) -
16대 보종공(宝宗公) - 17대 염장공(廉長公) - 18대 춘추공(春秋公) - 19대 흠순공(欽純公) - 20대 예원공(禮元公) -
21대 선품공(善品公) - 22대 양도공(良圖公) - 23대 군관공(軍官公) - 24대 천광공(天光公) - 25대 춘장공(春長公) -
26대 진공(眞功) - 27대 흠돌(欽突) - 28대 오기공(吳起公) - 29대 원선공(元宣公) - 30대 천관(天官) -
31대 흠언(欽言) - 32대 신공(信功)
* 화랑(花郞)
신라에는 일정한 시점에 여러명의 화랑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화랑들은 직책이 달리 정해져 있다.
풍월주, 부제가 중심이 되고 좌삼부의 화랑(좌방대화랑, 좌화랑, 소화랑, 묘화랑), 우삼부의 화랑(우방대화랑, 우화랑, 소화랑, 묘화랑)전삼부의 화랑(전방대화랑, 전방화랑, 소화랑, 묘화랑)등이 있었다.
그리고 진골화랑, 귀방화랑, 별방화랑, 별문화랑 등도 있었다.
화랑세기 서문에 의하면 "법흥대왕(法興大王)이 위화랑(魏花郞)을 사랑하였는데, 화랑이라 불렀다. 화랑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하였다. "라는 화랑 이름의 기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 낭두(郎頭)
화랑과 낭도 사이에 위치한 화랑도의 중간 세력 집단이다.
원래 낭두는 상선과 상랑의 마복자들 만이 될 수 있었다.
그들은 일정한 세력집단으로 되어 화랑도의 낭정에 영향을 미치는 등 점차 그 지위를 확대하여 나갔다.
낭두에는 원래 낭두(郎頭)·대낭두(大郎頭)·낭두별장(郎頭別將)·상두(上頭)·대두(大頭)·도두(都頭) 등 7급이 있었다.
낭두의 세력이 확장되고 낭정에 영향을 미치자 22세 풍월주 양도공이 대도두(大都頭)·대노두(大老頭)를 더하여 9급으로 늘렸다.
도두(都頭) 이하는 각기 별장을 두어 그 벼슬길을 넓혔고 그 지위를 높였다고 한다.
*낭도(郎徒)
낭도는 풍월주가 설치되기 이전부터 있었다. 원화들이 낭도를 거느렸던 것이다.
서민의 아들도 준수하면 곧 낭문에 나아가 낭도가 되었다.
13-14살에 동도가 되었고, 18-19살에 평도가 되었으며, 23-24살에 대도가 되었는데, 대도 중 입망자는 망두가 되었다. 낭도는 나이와 계급에 따라 동도, 평도, 망두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낭도 편제를 보면 대부분의 낭도들은 일반 서민들로 구성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낭도는 서민들로만 편제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7세 풍월주 설화랑 조에 골품이 있는 사람은 설도(설화랑의 화랑도)를 많이 따랐고, 초택의 사람들은 문도(문노의 화랑도)를 많이 따랐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서민 낭도들은 화랑도를 출세의 문으로 이용한 것을 볼 수 있다.
용춘공은 조정에 들어간 후 대사 이하에 재능이 있는 낭도를 많이 등용하였다.
골품제 하에서 대사는 4두품이 오를 수 있던 최고의 관위였다. 서민 낭도들도 대사까지 올랐다고 하면 평인·백성 신분을 가졌던 사람들도 화랑도에서 활동하여 대사까지 올랐고 4두품 신분을 갖게 된 것을 뜻할 수 있다.
* 원화(源花)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젊은이들을 떼지어 놀게 해놓고 그 행실을 보아 등용하려고 했는데, 그 단장인 원화에는 어여쁜 여성 2명을 뽑았다.
이때 원화로 뽑힌 사람이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이었는데, 그들은 300명에 달하는 무리를 통솔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뒤 두 여성 사이에 서로 시기하는 일이 생겨 준정이 남모를 강물에 던져 죽인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이 단체는 해산되었다.
* 화주(花主)
화주는 풍월주의 아내였다.
25세 풍월주 춘장공은 24세 풍월주를 지낸 천광공의 누이 천봉낭주를 아내로 맞아 화주로 삼았다고 한다.
26세 풍월주 진공은 흠돌의 누이 흠신을 처로 삼았고, 풍월주가 되자 화주로 삼은 바 있다.
풍월주가 되면 그의 처가 화주가 되었던 것이다.
양도공이 풍월주가 되자 그의 부인이었던 보량은 스스로 아름다움이 쇠하였다고 생각하여 능보를 뽑아 화주로 삼으려 했다고 나온다.
화주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있었다.
하나는 화주는 아름다움이 있어야 하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화주가 되기 위하여 진골정통·대원신통의 통이 있어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풍월주가 되기 위해서는 인통이 있는 여자를 화주로 삼아야 하였던 것도 생각할 수 있다.
화주들의 활동은 다양하였다. 화주는 낭정을 장악할 수도 있었다.
25세 풍월주 춘장공은 천광공은 늘 화주와 함께 낭두의 처와 딸들을 독려하여 정포(征袍)를 만들어 출전한 낭도들에게 보냈다. 그리고 몰래 서울과 시골을 다니며 가난하고 고달픈 사람들을 구휼하였다. 그리하여 인망이 크게 돌아왔다고 한다.
* 봉화(奉花)
봉화는 낭두의 아내 또는 딸들이다. 봉화는 화랑도와 깊은 관련이 있던 여자들이다.
낭두의 딸들이 봉화가 되어 선문에 머물며 일하는 동안 화랑들의 총애를 받지 못하면 시집을 갈 수 없었다는 사실이 새롭다.
풍월주를 비롯한 화랑들은 봉화와 관계를 가진 후, 그가 혼인을 하면 그의 남편의 후원자가 되었다.
낭두는 그 딸과 처를 선문에 들여보내야 하였던 사정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낭두들이 처와 딸들로 인하여 귀하게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낭두는 딸과 처를 상선(上仙 - 풍월주에서 물러난 화랑)이나 상랑(上郞) -또는 상화(上花)라고 함-에게 바쳐 낭두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낭두의 예속성이 드러난다.
* 유화(遊花)
서민의 딸들로 빼어나게 아름다운 자들은 낭문에 속하여 유화가 되었고, 30살이 되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유화는 일찍부터 있었다. 그 수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10세 풍월주 미생랑 조에 나오는 기록을 보면 미생랑이 남도에 갈 때마다 유화로서 목숨을 바치기를 원하는 자가 천백을 헤아렸다고 한다. 유화가 적은 수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의 여자들이 모두 유화가 된 것이 아니었다. 대남보의 딸은 유화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용춘공을 모시고자 하였다.
한편 풍월주 문노는 유화로 인하여 더럽혀진 일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 남도(南挑)
남도(南桃)에 관련해서는 아직 명확히 그 실체를 알 수는 없다.
대략이나마 그와 관련된 내용들을 통하여 그 실체를 추정하여 보면 첫째, 남도에는 왕의 궁전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화랑세기] 6세 풍월주 세종조를 통하여 알 수 있는데, 진흥왕이 미실과 합환한 장소가 남도의 정궁(正宮)이기 때문이다.
화랑세기에서 확인되는 정궁(正宮)이외에도 [삼국사기]의 "직관지"를 보면 남도원궁(南桃園宮)이 확인되고 있다. 곧 이를 통하여 볼 때 남도에는 정궁이나 원궁 등의 여러 궁전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진흥왕이 568년에 기존의 풍월주제를 폐지한 후 미실을 원화로 삼아, 설원랑과 미생 두 화랑으로 하여금 낭도들을 통솔하여 남도(南桃)에서 조알(朝謁)하게 했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곧 공식적인 화랑들의 조회를 궁전이 아닌 곳에서 받았다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남도(南桃)는 유화들과 관련된 곳으로 생각된다.
곧 설성공(설화랑의 아버지)의 어머니가 남도(南桃)에서 유화로 있었다거나 그리고 10세 풍월주 미생랑이 남도(南桃)에 갈 때마다 유화로써 목숨을 바치기 원하는 자가 천백을 헤아렸다와 같은 기사들을 미루어 볼 때 남도(南桃)에는 유화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남도(南桃)에서는 유화와 화랑,낭도들의 상통(相通)이 자유로이 이루어 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568년에 진흥왕이 남도정궁에서 미실과 합환하였을 때, 남도(南桃)에서 낭도와 유화들로 하여금 새벽까지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서로 예를 갖추어 합하게 하였다라고 한데서 알 수 있다.
또 설성공의 어머니가 남도에서 유화로 있었는데, 우연히 좋은 낭도를 만나 상통하여 잉태하였는데 그대로 서로 헤어졌다라고 한데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10세 풍월주 미생랑이 남도(南桃)에 갈 때마다 유화로써 목숨을 바치기 원하는 자가 천백을 헤아렸다는 기사를 통하여서도 이러한 사실을 대략 추론해 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볼 때 12세 풍월주 용춘공 조에서 공이 낭주가 너무 어리다 하여 “남도의 예”를 미루려 하자, 13살밖에 안된 어린 낭주가 “군(君)은 낭도의 아버지인데 첩이 모도(母道)를 이루지 못하면 수치입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에 남도(南桃)의 예를 행하여 서로 사랑을 나누었다는 구절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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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색기>는 빠른 연재를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선돌이>를 연재하면서 생각난 것을 일단 자료조사하고 큰 줄거리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1주일에 한 번 정도 연재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작품들을 연재하는 것은 제 능력에 벗어나기 때문에 <화랑색기>는 조금식 연재하고,
<선돌이>가 끝나는대로 속도를 내보겠습니다.
고려 말 신흥 사대부에 의해서 유교사상(특히 주자의 성리학)이 도입됐습니다.
조선 성립에 이념적인 배경이 된 성리학은 성에대한 자유로운 표현에 많은 제약을 두고 있습니다.
특히 남녀 차별과 정조 관념을 강화해서 성에 대한 자유로움을 박탈했습니다.
남존여비와 여필종사를 강조하며 남녀간의 성 문제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을 금기시 해왔습니다.
이는 고려 때가지 자유로웠던 성의 개념을 문란하다고 치부하여 조선의 건국을 정당화한 한 가지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역사자료를 보면 우리들의 먼 조상들은 성에 대한 자유로운 표현과 행동에 제약을 두지 않았습니다.
남녀간의 성 문제에 대해서 오히려 개방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고대사회란 특수성도 있었을 수 있지만 남녀간의 성행위에 대한 특유의 풍습이 존재했습니다.
역사적인 사실로는 고구려의 <형사취수제(兄死取嫂制) - 고대시대 전쟁이 많은 나라에서 인구 감소를 막기위해 전투에 나가 죽은 자의 형제가 죽은 자의 부인을 아내로 취하는 제도>, 신라시대 골품제도 가운데 <성골(聖骨) - 왕족과 왕족이 결혼해서 나은 혈족으로 결국 근친혼이 될 수밖에 없다.)>과 남여상열지사로 몰려 많은 자료가 조선시대에 사라져버린 고려가요 가운데 <쌍화점(雙花店)> 등을 들 수 있습니다.
1989년 [삼국사기]에 일부 내용만 전해지던 [화랑세기]의 필사본이 발견되었습니다.
화랑세기 필사본 자체가 아직 사실인지 위작인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실의 기록이라 확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화랑세기]에 나오는 내용들은 현실에서 받아들이기에 충격적인 내용들도 있습니다.
근친혼(近親婚), 동성애(同姓愛), 다부제(多夫制), 마복자(磨腹子) 등 불교나 유교사상과 대치되는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글 <화랑색기>는 [화랑세기]에 나오는 기록을 바탕으로 하고 상상을 더하여 쓰는 글입니다.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 또한 [화랑세기]에 기록된 인물들도 있지만 지어낸 이름도 있을 것입니다.
많은 부분이 상상에 의한 창작이기 때문에, 독자여러분들께서는 역사적인 사실로 받아들이지 마시고 단순한 야설로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덧붙여 <화랑색기>에서는 풍월주를 비롯한 화랑과 낭두(郎頭)및 낭도(郎徒)에 관련된 이야기를 열전 형식으로 쓰게 됩니다.
그리고 화랑의 부인이 된 공주(公主)와 궁주(宮主)의 이야기를 다루게 됩니다.
아울러 화랑의 여인이었던 원화(源花)와 화주(花主), 봉화(奉花), 유화(遊花) 및 그들의 사부(私夫)에 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임금과 관련된 이야기는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신라왕들의 성생활에 대한 이야기도 써볼까 합니다.
아래 나오는 자료는 [화랑세기]에 나온 기록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화랑색기]를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내용입니다. ‘다음’의 백과사전을 검색한 자료들 가운데 고른 내용임을 밝힙니다. - 누룩범 -
* [화랑세기(花郞世紀)]
신라 성덕왕 때의 학자 김대문(金大問)이 저술한 역사서. [삼국사기]에 일부 내용만 전하였으나, 1989년 조선 후기 박창화의 필사본으로 보이는 [화랑세기]가 발견되었다. 총 16장 32면으로 후반부가 일부 탈락되었다.
먼저 화랑의 기원을 밝히고 본문의 서술방식은 가족관계, 행적, 찬(贊)의 순이다. 등장인물은 총 138명이다. 비치 마립간 때부터 신문왕때 까지 화랑의 우두머리인 32세의 풍월주에 대한 열전형식으로 기록되었다. 이 책에 서술된 내용은 가히 충격적으로 근친혼(近親婚), 동성애(同姓愛), 다부제(多夫制) 등 고대사회의 실상이 생생히 그려져 있다.
아직 사실 또는 위작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위작이 아닌 사실이라면 고려시대 이전에 씌여진 역사서로 유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최초의 사서로 평가된다. 89년 번역본이 간행되었다.
* 화랑은 선도(仙徒)이다.
우리나라에서 신궁(神宮)을 받들고 하늘에 대제(大祭)를 행하는 것은 마치 연(燕)의 동산에서, 노(魯)의 태산에서 한 것과 같다. 옛날 연부인(燕夫人)이 선도(仙徒)를 좋아하여 많은 미인을 길렀는데 이름 하기를 국화(國花)라 하였다.
그 풍습이 동쪽으로 흘러들어, 우리나라에서는 여자로써 원화를 삼게 되었다. 지소태후가 이것(원화)을 폐하고 화랑을 설치하여 국인들로 하여금 그들을 받들게 하였다.
이에 앞서 법흥대왕이 위화랑을 사랑하여 이름을 화랑이라 불렀다. 화랑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하였다.
옛날에 선도는 단지 신을 받드는 것(奉神)을 위주로 하였는데, 국공(國公)들이 이것(봉신)을 베풀어 행한 후에(또는 국공들이 무리(화랑도)에 들어간 후에) 선도는 도의를 서로 힘썼다. 이에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빼어났고 훌륭한 장군과 용감한 병졸이 이로부터 나왔다. (이에) 화랑의 역사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 [화랑세기] 서문 -
* 마복자(磨腹子)
이미 임신한 귀족의 부인과 왕과의 성관계를 통해 태어난 아이를 말한다.
즉, 마복자는 왕자는 아니지만, 왕의 의자(義子)가 되어 그와 비슷한 지위를 부여받는다.
왕의 아들만이 마복자로 불린 것은 아니었으며, 화랑이나 기타 귀족 집단 사이에서도 마복자 풍습이 존재하였다. 예를 들어, 화랑의 간부층이라고 할 수 있는 낭두들은, 풍월주의 마복자들로 구성된다.
화랑의 제1대 풍월주인 위화랑의 경우 소지 마립간의 마복자였으며, 사다함과 진흥왕 등의 부인이었던 미실궁주의 아들들도 상당수가 마복자이다.
왕이나 귀족들은 마복자를 거느리게 되어 자신들을 지지하는 집단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마복자들은 그들의 후견세력으로 왕이나 귀족을 모실 수 있었던 것이다.
[화랑세기]가 한국인들을 당혹스럽게 만든 가장 큰 사실이 마복자의 존재다.
마복자 제도는 현대의 윤리로 보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분명하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여성의 정절을 강조하는 윤리나 기독교적인 유리로는 용납할 수 없는 제도가 마복자 제도다.
* 마복칠성
[화랑세기] 1세 위화랑 조에 나오는 마복칠성이란 비처왕의 마복자들을 가리킨다.
아시공(阿時公), 수지공(守知公), 이등공(伊登公), 태종공(苔宗公), 비량공(比梁公), 융취공(또는 용취공), 원종공(元宗公 - 법흥왕) 등이 그들이며 혹은 이등공 대신 위화랑을 마복칠성에 넣기도 한다.
[화랑세기]에는 위화랑은 어머니의 신분이 낮아 포함되지 않았다는 구절이 있다. [칠성록(七星錄)] 및 [보혜기]에는 모두 이등공(伊登公)이 없고 위화랑을 기재하고 있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잘 알 수 없다.
법흥대왕은 칠성(七星)의 우두머리이다,
비처왕과 마복자들은 일종의 사회, 정치적 의제(또는 의자) 가족관계를 맺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처왕은 마복자로 구성된 정치적 추종자들은 갖게 되었고, 마복자는 비처왕이라는 정치적 후원자를 갖게 된 것이다.
* 비치 마립간 [비처왕(毗處王) 또는 소지왕(炤知王)]
신라의 21대 임금이다. 재위기간은 479~500년이다. 아버지는 자비왕이고 어머니는 김씨부인이다.
비처왕때에 흥미로운 조직체 중 하나는 마복자 집단들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보이지 않던 마복자라는 존재가 화랑세기에 등장하는데, 비처왕의 마복자는 비처왕의 정치적 후원자임과 동시에 비처로부터 정치적으로 도움을 받는 존재들이다.
비처왕의 마복자는 총 7명이다. 아시공, 법흥(원종공), 수지공, 이등공, 태종공, 비량공, 융취공이다.
하지만 [보혜기]와 [칠성록]에 의하면, 이등공이 아니라 위화랑이라 한다. 마복7자의 우두머리는 법흥이었다.
* 풍월주(風月主)
풍월주는 [화랑세기]에 기록된 화랑도의 수장이다.
후에 화랑도의 파가 갈라지며 국선과 풍월주가 각 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풍월주는 540년 처음 설치되어 681년 폐지되었으며, 32명의 화랑에게 승계되었다.
풍월주의 존재는 화랑세기만이 아니라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등의 사서에도 확인된다.
한편, 삼국유사 탑상 편에 따르면, 진흥왕은 원화 제도를 폐지하고 몇달 후 화랑을 신설하면서 화랑세기에서 7대 풍월주로 되어 있는 설원랑을 초대 국선으로 삼았다하여 화랑세기의 기록과 차이를 보인다.
참고로, [화랑세기]를 기록한 김대문(金大文)은 28대 풍월주인 오기공의 아들이다.
<역대 풍월주>
1대 위화랑(魏花郞) - 2대 미진부공(未珍夫公) - 3대 모랑(毛郞) - 4대 이화랑(二花郞) -5대 사다함(斯多含) -
6대 세종(世宗) - 7대 설원공(薛花郞) - 8대 문노(文努) - 9대 비보랑(秘宝郞) - 10대 미생랑(美生郞) -
11대 하종(夏宗) - 12대 보리공(菩利公) - 13대 용춘공(龍春公) - 14대 호림공(虎林公) - 15대 유신공(庾信公) -
16대 보종공(宝宗公) - 17대 염장공(廉長公) - 18대 춘추공(春秋公) - 19대 흠순공(欽純公) - 20대 예원공(禮元公) -
21대 선품공(善品公) - 22대 양도공(良圖公) - 23대 군관공(軍官公) - 24대 천광공(天光公) - 25대 춘장공(春長公) -
26대 진공(眞功) - 27대 흠돌(欽突) - 28대 오기공(吳起公) - 29대 원선공(元宣公) - 30대 천관(天官) -
31대 흠언(欽言) - 32대 신공(信功)
* 화랑(花郞)
신라에는 일정한 시점에 여러명의 화랑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 화랑들은 직책이 달리 정해져 있다.
풍월주, 부제가 중심이 되고 좌삼부의 화랑(좌방대화랑, 좌화랑, 소화랑, 묘화랑), 우삼부의 화랑(우방대화랑, 우화랑, 소화랑, 묘화랑)전삼부의 화랑(전방대화랑, 전방화랑, 소화랑, 묘화랑)등이 있었다.
그리고 진골화랑, 귀방화랑, 별방화랑, 별문화랑 등도 있었다.
화랑세기 서문에 의하면 "법흥대왕(法興大王)이 위화랑(魏花郞)을 사랑하였는데, 화랑이라 불렀다. 화랑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하였다. "라는 화랑 이름의 기원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 낭두(郎頭)
화랑과 낭도 사이에 위치한 화랑도의 중간 세력 집단이다.
원래 낭두는 상선과 상랑의 마복자들 만이 될 수 있었다.
그들은 일정한 세력집단으로 되어 화랑도의 낭정에 영향을 미치는 등 점차 그 지위를 확대하여 나갔다.
낭두에는 원래 낭두(郎頭)·대낭두(大郎頭)·낭두별장(郎頭別將)·상두(上頭)·대두(大頭)·도두(都頭) 등 7급이 있었다.
낭두의 세력이 확장되고 낭정에 영향을 미치자 22세 풍월주 양도공이 대도두(大都頭)·대노두(大老頭)를 더하여 9급으로 늘렸다.
도두(都頭) 이하는 각기 별장을 두어 그 벼슬길을 넓혔고 그 지위를 높였다고 한다.
*낭도(郎徒)
낭도는 풍월주가 설치되기 이전부터 있었다. 원화들이 낭도를 거느렸던 것이다.
서민의 아들도 준수하면 곧 낭문에 나아가 낭도가 되었다.
13-14살에 동도가 되었고, 18-19살에 평도가 되었으며, 23-24살에 대도가 되었는데, 대도 중 입망자는 망두가 되었다. 낭도는 나이와 계급에 따라 동도, 평도, 망두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낭도 편제를 보면 대부분의 낭도들은 일반 서민들로 구성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낭도는 서민들로만 편제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7세 풍월주 설화랑 조에 골품이 있는 사람은 설도(설화랑의 화랑도)를 많이 따랐고, 초택의 사람들은 문도(문노의 화랑도)를 많이 따랐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서민 낭도들은 화랑도를 출세의 문으로 이용한 것을 볼 수 있다.
용춘공은 조정에 들어간 후 대사 이하에 재능이 있는 낭도를 많이 등용하였다.
골품제 하에서 대사는 4두품이 오를 수 있던 최고의 관위였다. 서민 낭도들도 대사까지 올랐다고 하면 평인·백성 신분을 가졌던 사람들도 화랑도에서 활동하여 대사까지 올랐고 4두품 신분을 갖게 된 것을 뜻할 수 있다.
* 원화(源花)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젊은이들을 떼지어 놀게 해놓고 그 행실을 보아 등용하려고 했는데, 그 단장인 원화에는 어여쁜 여성 2명을 뽑았다.
이때 원화로 뽑힌 사람이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이었는데, 그들은 300명에 달하는 무리를 통솔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뒤 두 여성 사이에 서로 시기하는 일이 생겨 준정이 남모를 강물에 던져 죽인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이 단체는 해산되었다.
* 화주(花主)
화주는 풍월주의 아내였다.
25세 풍월주 춘장공은 24세 풍월주를 지낸 천광공의 누이 천봉낭주를 아내로 맞아 화주로 삼았다고 한다.
26세 풍월주 진공은 흠돌의 누이 흠신을 처로 삼았고, 풍월주가 되자 화주로 삼은 바 있다.
풍월주가 되면 그의 처가 화주가 되었던 것이다.
양도공이 풍월주가 되자 그의 부인이었던 보량은 스스로 아름다움이 쇠하였다고 생각하여 능보를 뽑아 화주로 삼으려 했다고 나온다.
화주가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있었다.
하나는 화주는 아름다움이 있어야 하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화주가 되기 위하여 진골정통·대원신통의 통이 있어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풍월주가 되기 위해서는 인통이 있는 여자를 화주로 삼아야 하였던 것도 생각할 수 있다.
화주들의 활동은 다양하였다. 화주는 낭정을 장악할 수도 있었다.
25세 풍월주 춘장공은 천광공은 늘 화주와 함께 낭두의 처와 딸들을 독려하여 정포(征袍)를 만들어 출전한 낭도들에게 보냈다. 그리고 몰래 서울과 시골을 다니며 가난하고 고달픈 사람들을 구휼하였다. 그리하여 인망이 크게 돌아왔다고 한다.
* 봉화(奉花)
봉화는 낭두의 아내 또는 딸들이다. 봉화는 화랑도와 깊은 관련이 있던 여자들이다.
낭두의 딸들이 봉화가 되어 선문에 머물며 일하는 동안 화랑들의 총애를 받지 못하면 시집을 갈 수 없었다는 사실이 새롭다.
풍월주를 비롯한 화랑들은 봉화와 관계를 가진 후, 그가 혼인을 하면 그의 남편의 후원자가 되었다.
낭두는 그 딸과 처를 선문에 들여보내야 하였던 사정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낭두들이 처와 딸들로 인하여 귀하게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낭두는 딸과 처를 상선(上仙 - 풍월주에서 물러난 화랑)이나 상랑(上郞) -또는 상화(上花)라고 함-에게 바쳐 낭두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낭두의 예속성이 드러난다.
* 유화(遊花)
서민의 딸들로 빼어나게 아름다운 자들은 낭문에 속하여 유화가 되었고, 30살이 되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유화는 일찍부터 있었다. 그 수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10세 풍월주 미생랑 조에 나오는 기록을 보면 미생랑이 남도에 갈 때마다 유화로서 목숨을 바치기를 원하는 자가 천백을 헤아렸다고 한다. 유화가 적은 수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의 여자들이 모두 유화가 된 것이 아니었다. 대남보의 딸은 유화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용춘공을 모시고자 하였다.
한편 풍월주 문노는 유화로 인하여 더럽혀진 일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 남도(南挑)
남도(南桃)에 관련해서는 아직 명확히 그 실체를 알 수는 없다.
대략이나마 그와 관련된 내용들을 통하여 그 실체를 추정하여 보면 첫째, 남도에는 왕의 궁전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화랑세기] 6세 풍월주 세종조를 통하여 알 수 있는데, 진흥왕이 미실과 합환한 장소가 남도의 정궁(正宮)이기 때문이다.
화랑세기에서 확인되는 정궁(正宮)이외에도 [삼국사기]의 "직관지"를 보면 남도원궁(南桃園宮)이 확인되고 있다. 곧 이를 통하여 볼 때 남도에는 정궁이나 원궁 등의 여러 궁전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진흥왕이 568년에 기존의 풍월주제를 폐지한 후 미실을 원화로 삼아, 설원랑과 미생 두 화랑으로 하여금 낭도들을 통솔하여 남도(南桃)에서 조알(朝謁)하게 했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곧 공식적인 화랑들의 조회를 궁전이 아닌 곳에서 받았다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남도(南桃)는 유화들과 관련된 곳으로 생각된다.
곧 설성공(설화랑의 아버지)의 어머니가 남도(南桃)에서 유화로 있었다거나 그리고 10세 풍월주 미생랑이 남도(南桃)에 갈 때마다 유화로써 목숨을 바치기 원하는 자가 천백을 헤아렸다와 같은 기사들을 미루어 볼 때 남도(南桃)에는 유화들이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남도(南桃)에서는 유화와 화랑,낭도들의 상통(相通)이 자유로이 이루어 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568년에 진흥왕이 남도정궁에서 미실과 합환하였을 때, 남도(南桃)에서 낭도와 유화들로 하여금 새벽까지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서로 예를 갖추어 합하게 하였다라고 한데서 알 수 있다.
또 설성공의 어머니가 남도에서 유화로 있었는데, 우연히 좋은 낭도를 만나 상통하여 잉태하였는데 그대로 서로 헤어졌다라고 한데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10세 풍월주 미생랑이 남도(南桃)에 갈 때마다 유화로써 목숨을 바치기 원하는 자가 천백을 헤아렸다는 기사를 통하여서도 이러한 사실을 대략 추론해 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볼 때 12세 풍월주 용춘공 조에서 공이 낭주가 너무 어리다 하여 “남도의 예”를 미루려 하자, 13살밖에 안된 어린 낭주가 “군(君)은 낭도의 아버지인데 첩이 모도(母道)를 이루지 못하면 수치입니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에 남도(南桃)의 예를 행하여 서로 사랑을 나누었다는 구절은 이러한 사실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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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색기>는 빠른 연재를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선돌이>를 연재하면서 생각난 것을 일단 자료조사하고 큰 줄거리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1주일에 한 번 정도 연재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작품들을 연재하는 것은 제 능력에 벗어나기 때문에 <화랑색기>는 조금식 연재하고,
<선돌이>가 끝나는대로 속도를 내보겠습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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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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