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 나 왔어.”
“왜 이렇게 늦었어.”
“미안해.”
어쩌다 보니, 당초 도착 예정시간인 9시보다 30분 늦게 집에 도착했다. 그래도 누나는 화내지 않았다. 섭섭해서 살짝 투정부린 것뿐이다. 섭섭함을 풀어주기 위해 누나를 끌어안고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비겁해.”
“뭐가?”
“몰라. 그냥 비겁해.”
누나가 삐친 척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이 귀엽다. 누나를 바로 끌어안았다. 잠시 내 품에서 몸부림을 치는 누나. 계속 잡고 있자 이내 반항을 포기하고 그대로 안겼다. 최근에 알게 됐는데, 나는 누나를 끌어안고 있는 것을 좋아한다. 내 품에 쏙 들어와서 마치 작고 귀여운 동물을 안는 것 같다.
“운하야, 이제 놔줘.”
누나가 얼굴이 붉어진 채 말했다.
“이러고 있는 거 싫어?”
“그런 건 아니지만…….”
뒷말을 흐리는 누나가 귀여워서 더 꼭 안아줬다. 조금 세게 안았는지 누나가 괴로운 듯 내 품에서 빠져나갔다. 더 끌어안고 있고 싶은데 아쉬웠지만, 이대로 끌어안고 있으면 끝없이 서있게 될 것 같아서 포기했다.
“아까 삼촌한테 전화 왔어.”
“그래, 뭐라고 그러셨어?”
“요즘 바빠서 한동안 못 와서 미안하다고 하셨어. 그리고 다음 주에 주말에 운하가 시험 끝나니까 한번 오신다고 하셨어.”
다음 주에 삼촌이 오신다. 삼촌을 뵌 지 한 달도 넘은 것 같다. 그전에는 최소 이주일에 한 번씩은 찾아오셨는데, 얼마나 바쁘신 건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나의 바람은 삼촌이 우리를 너무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셨으면 하는 것이다. 다음 주에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이 직무에 조금이라도 지장이 있는 일이라면, 굳이 오시지 않아도 괜찮다. 지금까지 우리의 생활을 지탱해주신 것만으로도 나는 많은 은혜를 입었다.
“누나. 그러고 보니 학원에 등록했어?”
“응. 오늘 등록하고 수업도 듣고 왔어.”
누나는 방학을 맞아 학원에 등록했다. 공무원 학원이다. 대학교의 방학은 고등학교처럼 학생을 붙잡아두지 않는다. 학교가 학생을 붙잡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대학생은 스스로 자신을 붙잡지 않으면 안 된다. 대학교는 정말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이 공부를 하는 곳이다. 그런데, 어느새 누구나 대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었다. 사회의 추세는 대학교까지 의무교육으로 만들었다. 최근에는 대학원까지 의무교육화를 추진하는 중이다.
대학교, 대학원을 나온 다음 기껏 하는 일이 취직 준비다. 너무 비효율적이다. 그동안 쌓아왔던 지식을 버리는 쓸모없는 일이다. 뭐, 이렇게 말하는 나도 대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직할 생각이지만. 사실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이미 사회의 룰은 그렇게 정해져있다. 룰을 바꾸기보단 그 룰을 이용해서 내 가치를 높이는 편이 훨씬 쉽다.
“몇 시부터 몇 시까지 공부하는 거야?”
“월화수목금토일 다 수업하고, 아침 9시부터 오후 1시까지해.”
“힘들겠다.”
쉬는 날이란 없구나.
“학원비는 얼마야?”
“2개월 완성 프로그램이란 걸로 신청했는데, 32만원이야.”
“비싸다. 열심히 해야겠다.”
“대학교 등록금보다 훨씬 낫지.”
그건 그렇다. 대학교의 등록금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비싸다. 학교 운영이 가장 돈이 잘 되는 장사 중 하나라는 소리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누나가 공부를 잘해서 장학금을 받으니 다행이다.
누나와 얘기하다가, 내가 아직 교복을 입고 있는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의식하고 나니까 불편하다. 집에서는 런닝셔츠에 팬티바람이 아니면 마음이 편치 않다. 그리고 요즘은 너무 덥다.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식탁에 책더미가 올라와 있는 것이 보였다. 두껍고 비싸보이는 책들이다.
“누나 지금까지 공부하고 있었어?”
“응. 이제, 집에서도 공부하지 않으면 좀 힘들겠더라고.”
누나가 웃었다. 그나저나, 책이 깨끗한 것이 이번에 학원을 등록하면서 새로 산 책 같다.
“새로 산 책이야?”
“아, 새로 샀다고 해야 되나. 학원 등록하면서 교재도 준 거야. 무료 지급이라고는 했는데, 학원비에 교재비도 포함되어 있다고 봐야지.”
한자로 행정법이라고 쓰인 책이 보인다. 그 아래 헌법책도 놓여있다. 공무원이 되기 위해선 법도 공부해야 된다. 나도 아직 고등학생이지만, 법을 조금씩 공부하고 있다. 내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공부다.
“공부는 잘 돼?”
“어렵더라. 이제 처음 시작하는 거니까 생소한 개념이 많아.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것 같아.”
“아무리 봐도 2개월 내에 끝낼 수 있는 분량이 아닌데.”
“일단은 연습이라고 생각하려고.”
우리 나라는 속성을 너무 좋아한다. 전국의 학원들이 광고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속성이 아닐까 싶다. 1주일 완성, 한 달 완성. 누나가 등록한 2개월 완성. 말대로 됐으면 이미 우리 나라는 완성된 사람들의 사회가 되었을 것이다. 5년이면 갖가지 종류의 기술을 모두 완성할 수 있으니까.
“공부 끝났어?”
누나도 나도 공부에 끝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물어본 것은 공부를 이대로 계속할 건지 오늘은 그만할 건지다.
“응, 오늘은 그만하려고. 운하가 너무 늦게 들어와서 그 사이에 많이 했거든.”
“아직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거야?”
“아니, 전혀.”
누나가 말을 마치고 혀를 살짝 내밀어 약을 올렸다. 장난기어린 얼굴 표정이 사랑스러웠다.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나만 소유하고 싶은 사랑스러움이다. 또 누나를 끌어안았다.
“귀엽다귀엽다.”
“어린애 취급하지 마!”
머리를 토닥여주자, 누나가 바로 나에게서 떨어졌다. 가끔은 누나가 동생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아니, 사실은 꽤 자주 그렇다.
언제나처럼 누나와 함께 거실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았다. 조금 다른 점은 오늘 누나가 DVD대여점에서 DVD를 빌려와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의 장르가 로맨스가 아니라 코미디인 것은 연애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 취향을 고려한 것 같다. 꽤 재미있다. 누나와 함께 한바탕 웃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영화 재밌다.”
“그러게. 전에 영화관 가서 볼까 말까 하다가 결국 안 본 건데, 볼 걸 그랬나봐.”
“지금이라도 봤으면 됐지.”
“응.”
누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무릎 위에 앉았다. 누나를 끌어안았다. 누나가 쿠션을 안고 있는 것처럼. 누나가 다이어트를 한다며 일부러 식욕을 참고 있지만, 누나는 그러지 않아도 될 정도로 충분히 날씬하다. 체구도 작아서 그만큼 가볍다. 여기서 다이어트를 했다간 건강에도 좋지 않을 것 같다.
“나 누나가 너무 좋아.”
“뭐야, 갑자기. 바보야.”
누나가 부끄러워하면서 얼굴을 붉힌다. 누나의 이런 반응이 너무 좋다. 그래서 계속 장난을 치고 싶다. 물론 장난으로 좋아한단 말을 한 것이 아니다. 좋아한다는 말은 진심이다. 진심을 말했는데, 누나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장난을, 아니 이게 아니라. 진심을 담은 장난? 이것도 아닌데.
“누나.”
“응?”
“우리 나중에 해외여행 가자.”
“어디로?”
“글쎄. 어디든 상관없어.”
누나와 언젠가 단둘이 여행을 가고 싶다. 어디든 상관없다.
“언제?”
“음, 수능 끝나고 가면 될까나.”
“그럼, 그때 꼭 가자.”
“응.”
누나가 내 무릎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앞으로 걸어나가 DVD를 꺼내 DVD케이스에 넣었다. 케이스는 DVD기 위에 올려놓고 텔레비전을 껐다. 그리고는 기지개를 쭉 편다. 나도 소파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영화를 보면서 같은 자세로만 있었더니 허리가 조금 아프다. 천천히 스트레칭을 했다.
그동안 운동을 기피하며 집에서는 식물에 가까운 저조한 활동량을 자랑하던 과거를 조금은 반성하고 있다. 그래서 최소한 생각날 때마다 스트레칭 정도는 하고 있다. 여름방학이 되면 학교를 안 가니 시간 여유가 많아지니까 그때 천천히 운동을 시작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지은이에게 부탁하면 나에게 알맞은 운동을 알려주겠지.
“아, 졸려. 운하야 이제 자자.”
“그럴까.”
누나가 하품을 하고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시계를 보니 11시가 넘었다. 슬슬 자야겠다.
화장실에 들러서 볼일을 보고 손을 씻었다. 내 방에 들어가니, 누나가 이미 침대에 누워서 날 기다리고 있다. 누나는 넓은 누나 방 침대보다 좁은 내 방 침대를 더 좋아한다. 나도 내 방 침대가 좋다. 좁으니까 그만큼 붙어 잘 수 있다. 이제 7월이 다 돼서 많이 더워졌지만, 더위를 잘 안 타는 우리 남매는 선풍기만으로도 충분하다. 나중에 더 더워져서 선풍기로도 부족해지면…… 에어컨을 사는 것을 고려해봐야겠다.
선풍기를 틀고, 핸드폰을 충전기에 꽂고, 방 불을 껐다. 그리곤 누나 옆에 누웠다. 옆으로 누워서 누나와 마주보는 자세로 누웠다. 하지만, 불을 끈 직후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운하야.”
“응.”
누나가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지은이랑은 계속 만나고 있지.”
“어, 응. 곧 헤어질 거야.”
“아니야. 그러지 마.”
누나가 나를 말렸다. 서서히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면서 누나의 얼굴이 보인다. 살짝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찡그린 것 같기도 한 표정.
“지은이한테 상처를 주지는 마.”
누나에게 있어 지은이는 싫어해도 이상하지 않은 존재다. 그런데 누나는 지은이를 미워하지 않는다. 누나는 너무 남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좀 더 자신을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처음엔 지은이가 싫었어. 갑자기 네 여자 친구라면서 나타나더니 아무렇지 않게 친한 척하고. 물론 지은이는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그때는 화가 났어.”
조용히 말을 이어가는 누나.
“근데, 그 이후에도 계속 지은이랑 대화를 하니까, 지은이가 얼마나 너를 좋아하는지 알겠더라.”
“누나.”
“더 이상 화를 못 내겠더라고.”
누나가 후후 하고, 소리를 내며 웃었다.
“지은이가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누나는 너무 순수하다. 사람을 미워할 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짐작도 하지 못할 만큼 속이 깊다. 누나의 말에 죄책감이 몰려왔다. 나는 사실 지은이와 헤어지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든 모두 속이려고 고민하고 있는데. 내가 해온 모든 일이 모두 바보짓처럼 느껴졌다.
뜨거운 누나의 입술을 향해 다가간다. 달빛에 젖은 두 뺨이 붉게 빛난다.
“누나 사랑해.”
“나도 사랑해.”
나의 고백에, 이번엔 누나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대답했다.
키스 이후로 더 나아가지는 않았다. 키스를 해도, 야한 기분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좀 더 지금의 애틋한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럼 내가 지은이랑 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모르겠어.”
누나가 또 웃었다.
지금 이대로가 계속되면 좋겠다. 지은이와도 누나와도 사랑하며 지내는 생활이 계속되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조금 더 생각 없이, 고민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내 바람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나의 행복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경우는 아마 없겠지. 현재, 나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조금은 비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이런 식의 생활이 오랫동안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뭔가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에 안주해서 이 상황을 극복할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다음 날이 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아침을 만들고, 누나를 깨워 식사를 했다. 그리고 지은이네 집 앞에서 지은이를 기다렸다가 지은이와 함께 학교에 등교했다. 지은이가 공부를 하다가 모르는 부분을 가르쳐주며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을 보냈다.
학교의 정규수업을 마치고, 나는 또 지은이의 공부를 도와주러 지은이네 집에 왔다. 오늘은 지은이의 어머니와 동생이 집에 있었다. 지은이의 방에서 상을 펴고 함께 공부했다. 지은이의 각오가 대단하다. 나와 같은 대학에 가고 싶다는 지은이의 목표. 이런 식으로라면 정말로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수학을 잘하려면, 같은 유형의 문제를 반복해서 풀어야 돼. 계속 풀다 보면 문제를 보면 어떤 식으로 할지 방법이 보이거든. 그리고 자잘한 공식들을 외워서 머릿속 박아두면, 시험을 볼 때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 일단 내가 이번 시험에 필요한 공식이랑 문제를 정리해놨으니까, 그거 위주로 보자.”
“응.”
“수학공부는 아무래도 문제집을 푸는 게 좋은데, 문제집을 몇 권씩 풀려고 할 필요는 없어. 오히려 문제집 한 권을 완벽하게 끝내는 게 좋아. 어차피 문제가 비슷한 유형에 숫자만 바뀐 게 많거든.”
오늘은 수학을 가르쳐주고 있다. 오늘 안에 시험범위까지 정리해줄 생각이다. 시험범위를 하루에 끝내는 것은 확실히 무리가 있다. 하지만, 지은이는 노력으로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은이는 머리가 좋다. 내개 설명하면 거의 막히는 부분 없이 이해를 한다. 그래서 시간이 많이 절약 된다.
오늘 누나에게 지은이네 집에서 공부하다가 늦는다고 이야기해두었다. 최근에 집에 들어가는 시간이 늦다. 지은이네 집에서 시간을 보내다 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나에게는 절반은 진실을, 절반은 거짓을 얘기하고 있다. 집에 늦게 들어가는 이유를 반은 지은이네 집에서 있다가 늦는다고 말했지만, 나머지 반은 친구들과 놀다가 늦는다고 속였다.
거의 2시간은 sfl 공부를 했기 때문에 쉬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지은이가 티내지는 않았지만, 힘들었는지 숨음 깊게 들이마쉰다. 한자리에서 집중력을 유지하는 일은 생각보다 피곤하다. 그런데 지은이는 힘이 들어도 내색을 잘 하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에는 쉬지 않고 몇 시간을 지은이를 가르쳤다. 지은이가 잘 따라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중에야 지은이가 힘들어하는 것을 알고 쉬는 시간을 가지면서 공부를 했다.
“지은아, 많이 힘들어?”
“괜찮아.”
별로 괜찮아 보이지는 않는다. 지은이의 눈 밑이 검다. 지은이에게 공부를 가르쳐주면, 지은이는 다음 날 내가 가르쳐준 것을 대부분 소화해낸다. 그 정도로 공부를 하려면,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수면시간이 많이 부족할 것이다.
“좀 더 쉬면서 해. 괜히 무리해서 하면 오히려 집중도 안 되고 머리에도 안 들어와.”
“별로 무리하는 거 아니야.”
지은이가 내말을 부인했다. 웃음이 터졌다. 눈 밑에 다크서클을 달고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해봤자 소용없다. 지은이가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른 손은 지은이의 눈 밑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만졌다. 지은이가 내 손을 뿌리쳤다.
“뭐하는 거야.”
“다크서클 만졌어.”
지은이의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여자의 다크서클은 있어도 없는 것처럼 대하는 거야.”
“그런 거야?”
“그래.”
그런 말을 듣고 나니, 시선이 더 간다. 계속 지은이의 눈 밑에 시선이 머물자, 지은이가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보지 마. 부끄럽단 말이야.”
“난 귀여운데.”
“그래도 보지 마.”
지은이가 아예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로 몸을 감췄다. 그 모습에 웃으며 나도 침대 위로 올라갔다. 이불의 틈을 살짝 열자, 지은이의 얼굴이 보인다. 이불 틈 사이로 지은이에게 말을 걸었다.
“지은아,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돼. 아직 시험 날까지 꽤 남았고, 거의 대부분 과목 공부 끝났잖아. 이제 수학이랑 물리만 공부하면 되니까. 오늘은 충분히 자도 돼.”
“그래도.”
지은이가 걱정스러운 듯이 말한다.
“이 정도로 운하랑 같은 대학에 어떻게 가.”
이불을 잡은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이불의 틈이 더 벌어지자, 지은이가 막는다. 하지만 결국 이불을 벗겼다. 지은이의 얼굴이 드러났다. 겁을 먹은 듯, 불안함을 안고 있는 표정을 하고 있다.
“충분히 갈 수 있어. 내가 장담할게.”
“정말?”
“만약에 안 되면, 내가 지은이가 가려는 학교에 맞출게.”
“그건 안 되는데…….”
“괜찮아.”
왜냐하면 지은이는 꼭 나랑 같은 학교에 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본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장담하지 않는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하지만, 가끔은 장담을 할 때가 있다. 뭐랄까, 나에겐 직감 같은 것이 있다. 보통 때는 아무 느낌이 없지만, 가끔 어쩐지 정말로 내가 원하는 일이 일어날 것 같은 확신이 들 때가 있다. 그런 일은 정말 드물지만, 한번 직감을 하면, 정말로 직감대로 일이 흘러갔다.
나는 직감한다. 지은이는 분명 나와 같은 대학에 갈 수 있다.
“운하는 가끔 속세를 초월한 것 같은 느낌이 있어. 스님 같은 느낌?”
“내가?”
“응. 지금도 뭔가 하늘의 계시를 받고 말하는 것 같았어.”
“그건 신부님 아닐까?”
“아니, 그보단 무당?”
나쁜 뜻으로 말하는 건 아닌데, 좋은 뜻으로 말하는 것 같지도 않다. 헷갈린다.
“근데, 그거 칭찬이야 욕이야?”
“당연히 칭찬이지.”
당연한 건가?
“자, 그럼 쉴 만큼 쉬었으니, 공부를 시작하자.”
“지금은 몸속에 귀신이 들어간 것 같아.”
지금 이 말은 칭찬이 아니란 걸 딱 알겠다. 지은이에게 가볍게 꿀밤을 먹여주었다.
공부가 끝나자, 벌써 8시가 되었다. 지은이의 방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다. 가방을 챙겼다. 어제 늦게 들어갔기 때문에, 오늘은 집에 일찍 들어가기로 누나와 약속했다.
“오늘은 이제 갈게. 그리고 오늘부터는 일찍 자.”
“저녁은 안 먹고 가려고?”
“응. 어제 너무 늦게 들어가서, 오늘은 일찍 들어가기로 약속했거든.”
“알았어.”
가방을 메고 지은이 방에서 나왔다. 거실 소파에 지은이 어머니와 유은이가 앉아 있다. 지은이 어머니와 유은이에게 인사했다.
“안녕히 계세요.”
“어머, 가려고? 저녁 먹고 가지.”
“맞아, 오빠. 먹고 가.”
“오늘은 일찍 들어가야 돼서요. 안녕히 계세요.”
“그래. 잘 가렴.”
“오빠. 잘 가.”
지은이 어머니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유은이에게는 손을 흔들어주고 현관으로 가 신발을 신었다. 지은이가 배웅을 나왔다. 지은이와 복도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알았지? 오늘은 공부 너무 많이 하지 말고 일찍 자.”
“알았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 1층 버튼을 눌렀다. 곧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아래로 도착한다.
“이따 밤에 전화할게.”
“응.”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1층입니다’하고 안내음이 흘러나왔다. 지은이와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복도를 걸어 건물 입구로 나왔다. 바깥 공기가 복도와는 달리 조금 후끈하다. 몸을 돌려 지은이와 마주보았다.
“우리, 시험 끝나는 날에 데이트 하자.”
“그래!”
내 말에 지은이가 기쁘게 대답했다.
“다음 주는 평일이니까 시내로 나가는 게 낫겠지?”
“응.”
“방학 때는 좀 더 멀리 가자. 가고 싶은 곳 있어?”
“응. 많아.”
“방학하면 말해줘.”
“알았어.”
지은이에게 작별의 키스를 하고, 집으로 향했다. 이제 여름방학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올해 여름방학은 다른 때보다 훨씬 바쁠 것이다.
집에 도착해서는 또 평소처럼 누나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학교가 끝나면 지은이네 집에서 놀거나 공부를 하고, 집에서는 누나와 텔레비전을 본다. 이런 생활이 시작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예전부터 그래왔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지금이 너무나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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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미안해.”
어쩌다 보니, 당초 도착 예정시간인 9시보다 30분 늦게 집에 도착했다. 그래도 누나는 화내지 않았다. 섭섭해서 살짝 투정부린 것뿐이다. 섭섭함을 풀어주기 위해 누나를 끌어안고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비겁해.”
“뭐가?”
“몰라. 그냥 비겁해.”
누나가 삐친 척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이 귀엽다. 누나를 바로 끌어안았다. 잠시 내 품에서 몸부림을 치는 누나. 계속 잡고 있자 이내 반항을 포기하고 그대로 안겼다. 최근에 알게 됐는데, 나는 누나를 끌어안고 있는 것을 좋아한다. 내 품에 쏙 들어와서 마치 작고 귀여운 동물을 안는 것 같다.
“운하야, 이제 놔줘.”
누나가 얼굴이 붉어진 채 말했다.
“이러고 있는 거 싫어?”
“그런 건 아니지만…….”
뒷말을 흐리는 누나가 귀여워서 더 꼭 안아줬다. 조금 세게 안았는지 누나가 괴로운 듯 내 품에서 빠져나갔다. 더 끌어안고 있고 싶은데 아쉬웠지만, 이대로 끌어안고 있으면 끝없이 서있게 될 것 같아서 포기했다.
“아까 삼촌한테 전화 왔어.”
“그래, 뭐라고 그러셨어?”
“요즘 바빠서 한동안 못 와서 미안하다고 하셨어. 그리고 다음 주에 주말에 운하가 시험 끝나니까 한번 오신다고 하셨어.”
다음 주에 삼촌이 오신다. 삼촌을 뵌 지 한 달도 넘은 것 같다. 그전에는 최소 이주일에 한 번씩은 찾아오셨는데, 얼마나 바쁘신 건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나의 바람은 삼촌이 우리를 너무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셨으면 하는 것이다. 다음 주에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이 직무에 조금이라도 지장이 있는 일이라면, 굳이 오시지 않아도 괜찮다. 지금까지 우리의 생활을 지탱해주신 것만으로도 나는 많은 은혜를 입었다.
“누나. 그러고 보니 학원에 등록했어?”
“응. 오늘 등록하고 수업도 듣고 왔어.”
누나는 방학을 맞아 학원에 등록했다. 공무원 학원이다. 대학교의 방학은 고등학교처럼 학생을 붙잡아두지 않는다. 학교가 학생을 붙잡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대학생은 스스로 자신을 붙잡지 않으면 안 된다. 대학교는 정말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이 공부를 하는 곳이다. 그런데, 어느새 누구나 대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되었다. 사회의 추세는 대학교까지 의무교육으로 만들었다. 최근에는 대학원까지 의무교육화를 추진하는 중이다.
대학교, 대학원을 나온 다음 기껏 하는 일이 취직 준비다. 너무 비효율적이다. 그동안 쌓아왔던 지식을 버리는 쓸모없는 일이다. 뭐, 이렇게 말하는 나도 대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취직할 생각이지만. 사실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 이미 사회의 룰은 그렇게 정해져있다. 룰을 바꾸기보단 그 룰을 이용해서 내 가치를 높이는 편이 훨씬 쉽다.
“몇 시부터 몇 시까지 공부하는 거야?”
“월화수목금토일 다 수업하고, 아침 9시부터 오후 1시까지해.”
“힘들겠다.”
쉬는 날이란 없구나.
“학원비는 얼마야?”
“2개월 완성 프로그램이란 걸로 신청했는데, 32만원이야.”
“비싸다. 열심히 해야겠다.”
“대학교 등록금보다 훨씬 낫지.”
그건 그렇다. 대학교의 등록금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비싸다. 학교 운영이 가장 돈이 잘 되는 장사 중 하나라는 소리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누나가 공부를 잘해서 장학금을 받으니 다행이다.
누나와 얘기하다가, 내가 아직 교복을 입고 있는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의식하고 나니까 불편하다. 집에서는 런닝셔츠에 팬티바람이 아니면 마음이 편치 않다. 그리고 요즘은 너무 덥다.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식탁에 책더미가 올라와 있는 것이 보였다. 두껍고 비싸보이는 책들이다.
“누나 지금까지 공부하고 있었어?”
“응. 이제, 집에서도 공부하지 않으면 좀 힘들겠더라고.”
누나가 웃었다. 그나저나, 책이 깨끗한 것이 이번에 학원을 등록하면서 새로 산 책 같다.
“새로 산 책이야?”
“아, 새로 샀다고 해야 되나. 학원 등록하면서 교재도 준 거야. 무료 지급이라고는 했는데, 학원비에 교재비도 포함되어 있다고 봐야지.”
한자로 행정법이라고 쓰인 책이 보인다. 그 아래 헌법책도 놓여있다. 공무원이 되기 위해선 법도 공부해야 된다. 나도 아직 고등학생이지만, 법을 조금씩 공부하고 있다. 내 목표를 이루기 위한 공부다.
“공부는 잘 돼?”
“어렵더라. 이제 처음 시작하는 거니까 생소한 개념이 많아.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것 같아.”
“아무리 봐도 2개월 내에 끝낼 수 있는 분량이 아닌데.”
“일단은 연습이라고 생각하려고.”
우리 나라는 속성을 너무 좋아한다. 전국의 학원들이 광고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속성이 아닐까 싶다. 1주일 완성, 한 달 완성. 누나가 등록한 2개월 완성. 말대로 됐으면 이미 우리 나라는 완성된 사람들의 사회가 되었을 것이다. 5년이면 갖가지 종류의 기술을 모두 완성할 수 있으니까.
“공부 끝났어?”
누나도 나도 공부에 끝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물어본 것은 공부를 이대로 계속할 건지 오늘은 그만할 건지다.
“응, 오늘은 그만하려고. 운하가 너무 늦게 들어와서 그 사이에 많이 했거든.”
“아직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거야?”
“아니, 전혀.”
누나가 말을 마치고 혀를 살짝 내밀어 약을 올렸다. 장난기어린 얼굴 표정이 사랑스러웠다.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은, 나만 소유하고 싶은 사랑스러움이다. 또 누나를 끌어안았다.
“귀엽다귀엽다.”
“어린애 취급하지 마!”
머리를 토닥여주자, 누나가 바로 나에게서 떨어졌다. 가끔은 누나가 동생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아니, 사실은 꽤 자주 그렇다.
언제나처럼 누나와 함께 거실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았다. 조금 다른 점은 오늘 누나가 DVD대여점에서 DVD를 빌려와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의 장르가 로맨스가 아니라 코미디인 것은 연애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 취향을 고려한 것 같다. 꽤 재미있다. 누나와 함께 한바탕 웃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영화 재밌다.”
“그러게. 전에 영화관 가서 볼까 말까 하다가 결국 안 본 건데, 볼 걸 그랬나봐.”
“지금이라도 봤으면 됐지.”
“응.”
누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 무릎 위에 앉았다. 누나를 끌어안았다. 누나가 쿠션을 안고 있는 것처럼. 누나가 다이어트를 한다며 일부러 식욕을 참고 있지만, 누나는 그러지 않아도 될 정도로 충분히 날씬하다. 체구도 작아서 그만큼 가볍다. 여기서 다이어트를 했다간 건강에도 좋지 않을 것 같다.
“나 누나가 너무 좋아.”
“뭐야, 갑자기. 바보야.”
누나가 부끄러워하면서 얼굴을 붉힌다. 누나의 이런 반응이 너무 좋다. 그래서 계속 장난을 치고 싶다. 물론 장난으로 좋아한단 말을 한 것이 아니다. 좋아한다는 말은 진심이다. 진심을 말했는데, 누나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장난을, 아니 이게 아니라. 진심을 담은 장난? 이것도 아닌데.
“누나.”
“응?”
“우리 나중에 해외여행 가자.”
“어디로?”
“글쎄. 어디든 상관없어.”
누나와 언젠가 단둘이 여행을 가고 싶다. 어디든 상관없다.
“언제?”
“음, 수능 끝나고 가면 될까나.”
“그럼, 그때 꼭 가자.”
“응.”
누나가 내 무릎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앞으로 걸어나가 DVD를 꺼내 DVD케이스에 넣었다. 케이스는 DVD기 위에 올려놓고 텔레비전을 껐다. 그리고는 기지개를 쭉 편다. 나도 소파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영화를 보면서 같은 자세로만 있었더니 허리가 조금 아프다. 천천히 스트레칭을 했다.
그동안 운동을 기피하며 집에서는 식물에 가까운 저조한 활동량을 자랑하던 과거를 조금은 반성하고 있다. 그래서 최소한 생각날 때마다 스트레칭 정도는 하고 있다. 여름방학이 되면 학교를 안 가니 시간 여유가 많아지니까 그때 천천히 운동을 시작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지은이에게 부탁하면 나에게 알맞은 운동을 알려주겠지.
“아, 졸려. 운하야 이제 자자.”
“그럴까.”
누나가 하품을 하고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시계를 보니 11시가 넘었다. 슬슬 자야겠다.
화장실에 들러서 볼일을 보고 손을 씻었다. 내 방에 들어가니, 누나가 이미 침대에 누워서 날 기다리고 있다. 누나는 넓은 누나 방 침대보다 좁은 내 방 침대를 더 좋아한다. 나도 내 방 침대가 좋다. 좁으니까 그만큼 붙어 잘 수 있다. 이제 7월이 다 돼서 많이 더워졌지만, 더위를 잘 안 타는 우리 남매는 선풍기만으로도 충분하다. 나중에 더 더워져서 선풍기로도 부족해지면…… 에어컨을 사는 것을 고려해봐야겠다.
선풍기를 틀고, 핸드폰을 충전기에 꽂고, 방 불을 껐다. 그리곤 누나 옆에 누웠다. 옆으로 누워서 누나와 마주보는 자세로 누웠다. 하지만, 불을 끈 직후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운하야.”
“응.”
누나가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지은이랑은 계속 만나고 있지.”
“어, 응. 곧 헤어질 거야.”
“아니야. 그러지 마.”
누나가 나를 말렸다. 서서히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면서 누나의 얼굴이 보인다. 살짝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찡그린 것 같기도 한 표정.
“지은이한테 상처를 주지는 마.”
누나에게 있어 지은이는 싫어해도 이상하지 않은 존재다. 그런데 누나는 지은이를 미워하지 않는다. 누나는 너무 남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좀 더 자신을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처음엔 지은이가 싫었어. 갑자기 네 여자 친구라면서 나타나더니 아무렇지 않게 친한 척하고. 물론 지은이는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그때는 화가 났어.”
조용히 말을 이어가는 누나.
“근데, 그 이후에도 계속 지은이랑 대화를 하니까, 지은이가 얼마나 너를 좋아하는지 알겠더라.”
“누나.”
“더 이상 화를 못 내겠더라고.”
누나가 후후 하고, 소리를 내며 웃었다.
“지은이가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누나는 너무 순수하다. 사람을 미워할 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짐작도 하지 못할 만큼 속이 깊다. 누나의 말에 죄책감이 몰려왔다. 나는 사실 지은이와 헤어지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든 모두 속이려고 고민하고 있는데. 내가 해온 모든 일이 모두 바보짓처럼 느껴졌다.
뜨거운 누나의 입술을 향해 다가간다. 달빛에 젖은 두 뺨이 붉게 빛난다.
“누나 사랑해.”
“나도 사랑해.”
나의 고백에, 이번엔 누나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대답했다.
키스 이후로 더 나아가지는 않았다. 키스를 해도, 야한 기분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좀 더 지금의 애틋한 기분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럼 내가 지은이랑 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모르겠어.”
누나가 또 웃었다.
지금 이대로가 계속되면 좋겠다. 지은이와도 누나와도 사랑하며 지내는 생활이 계속되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조금 더 생각 없이, 고민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내 바람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나의 행복이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경우는 아마 없겠지. 현재, 나는 보통 사람과는 다른 조금은 비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이런 식의 생활이 오랫동안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뭔가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에 안주해서 이 상황을 극복할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다음 날이 되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아침을 만들고, 누나를 깨워 식사를 했다. 그리고 지은이네 집 앞에서 지은이를 기다렸다가 지은이와 함께 학교에 등교했다. 지은이가 공부를 하다가 모르는 부분을 가르쳐주며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을 보냈다.
학교의 정규수업을 마치고, 나는 또 지은이의 공부를 도와주러 지은이네 집에 왔다. 오늘은 지은이의 어머니와 동생이 집에 있었다. 지은이의 방에서 상을 펴고 함께 공부했다. 지은이의 각오가 대단하다. 나와 같은 대학에 가고 싶다는 지은이의 목표. 이런 식으로라면 정말로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수학을 잘하려면, 같은 유형의 문제를 반복해서 풀어야 돼. 계속 풀다 보면 문제를 보면 어떤 식으로 할지 방법이 보이거든. 그리고 자잘한 공식들을 외워서 머릿속 박아두면, 시험을 볼 때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 일단 내가 이번 시험에 필요한 공식이랑 문제를 정리해놨으니까, 그거 위주로 보자.”
“응.”
“수학공부는 아무래도 문제집을 푸는 게 좋은데, 문제집을 몇 권씩 풀려고 할 필요는 없어. 오히려 문제집 한 권을 완벽하게 끝내는 게 좋아. 어차피 문제가 비슷한 유형에 숫자만 바뀐 게 많거든.”
오늘은 수학을 가르쳐주고 있다. 오늘 안에 시험범위까지 정리해줄 생각이다. 시험범위를 하루에 끝내는 것은 확실히 무리가 있다. 하지만, 지은이는 노력으로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은이는 머리가 좋다. 내개 설명하면 거의 막히는 부분 없이 이해를 한다. 그래서 시간이 많이 절약 된다.
오늘 누나에게 지은이네 집에서 공부하다가 늦는다고 이야기해두었다. 최근에 집에 들어가는 시간이 늦다. 지은이네 집에서 시간을 보내다 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나에게는 절반은 진실을, 절반은 거짓을 얘기하고 있다. 집에 늦게 들어가는 이유를 반은 지은이네 집에서 있다가 늦는다고 말했지만, 나머지 반은 친구들과 놀다가 늦는다고 속였다.
거의 2시간은 sfl 공부를 했기 때문에 쉬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지은이가 티내지는 않았지만, 힘들었는지 숨음 깊게 들이마쉰다. 한자리에서 집중력을 유지하는 일은 생각보다 피곤하다. 그런데 지은이는 힘이 들어도 내색을 잘 하지 않는다. 그래서 처음에는 쉬지 않고 몇 시간을 지은이를 가르쳤다. 지은이가 잘 따라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중에야 지은이가 힘들어하는 것을 알고 쉬는 시간을 가지면서 공부를 했다.
“지은아, 많이 힘들어?”
“괜찮아.”
별로 괜찮아 보이지는 않는다. 지은이의 눈 밑이 검다. 지은이에게 공부를 가르쳐주면, 지은이는 다음 날 내가 가르쳐준 것을 대부분 소화해낸다. 그 정도로 공부를 하려면,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수면시간이 많이 부족할 것이다.
“좀 더 쉬면서 해. 괜히 무리해서 하면 오히려 집중도 안 되고 머리에도 안 들어와.”
“별로 무리하는 거 아니야.”
지은이가 내말을 부인했다. 웃음이 터졌다. 눈 밑에 다크서클을 달고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해봤자 소용없다. 지은이가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른 손은 지은이의 눈 밑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만졌다. 지은이가 내 손을 뿌리쳤다.
“뭐하는 거야.”
“다크서클 만졌어.”
지은이의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여자의 다크서클은 있어도 없는 것처럼 대하는 거야.”
“그런 거야?”
“그래.”
그런 말을 듣고 나니, 시선이 더 간다. 계속 지은이의 눈 밑에 시선이 머물자, 지은이가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보지 마. 부끄럽단 말이야.”
“난 귀여운데.”
“그래도 보지 마.”
지은이가 아예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로 몸을 감췄다. 그 모습에 웃으며 나도 침대 위로 올라갔다. 이불의 틈을 살짝 열자, 지은이의 얼굴이 보인다. 이불 틈 사이로 지은이에게 말을 걸었다.
“지은아,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돼. 아직 시험 날까지 꽤 남았고, 거의 대부분 과목 공부 끝났잖아. 이제 수학이랑 물리만 공부하면 되니까. 오늘은 충분히 자도 돼.”
“그래도.”
지은이가 걱정스러운 듯이 말한다.
“이 정도로 운하랑 같은 대학에 어떻게 가.”
이불을 잡은 손에 힘을 더 주었다. 이불의 틈이 더 벌어지자, 지은이가 막는다. 하지만 결국 이불을 벗겼다. 지은이의 얼굴이 드러났다. 겁을 먹은 듯, 불안함을 안고 있는 표정을 하고 있다.
“충분히 갈 수 있어. 내가 장담할게.”
“정말?”
“만약에 안 되면, 내가 지은이가 가려는 학교에 맞출게.”
“그건 안 되는데…….”
“괜찮아.”
왜냐하면 지은이는 꼭 나랑 같은 학교에 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본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장담하지 않는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하지만, 가끔은 장담을 할 때가 있다. 뭐랄까, 나에겐 직감 같은 것이 있다. 보통 때는 아무 느낌이 없지만, 가끔 어쩐지 정말로 내가 원하는 일이 일어날 것 같은 확신이 들 때가 있다. 그런 일은 정말 드물지만, 한번 직감을 하면, 정말로 직감대로 일이 흘러갔다.
나는 직감한다. 지은이는 분명 나와 같은 대학에 갈 수 있다.
“운하는 가끔 속세를 초월한 것 같은 느낌이 있어. 스님 같은 느낌?”
“내가?”
“응. 지금도 뭔가 하늘의 계시를 받고 말하는 것 같았어.”
“그건 신부님 아닐까?”
“아니, 그보단 무당?”
나쁜 뜻으로 말하는 건 아닌데, 좋은 뜻으로 말하는 것 같지도 않다. 헷갈린다.
“근데, 그거 칭찬이야 욕이야?”
“당연히 칭찬이지.”
당연한 건가?
“자, 그럼 쉴 만큼 쉬었으니, 공부를 시작하자.”
“지금은 몸속에 귀신이 들어간 것 같아.”
지금 이 말은 칭찬이 아니란 걸 딱 알겠다. 지은이에게 가볍게 꿀밤을 먹여주었다.
공부가 끝나자, 벌써 8시가 되었다. 지은이의 방 창문으로 보이는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다. 가방을 챙겼다. 어제 늦게 들어갔기 때문에, 오늘은 집에 일찍 들어가기로 누나와 약속했다.
“오늘은 이제 갈게. 그리고 오늘부터는 일찍 자.”
“저녁은 안 먹고 가려고?”
“응. 어제 너무 늦게 들어가서, 오늘은 일찍 들어가기로 약속했거든.”
“알았어.”
가방을 메고 지은이 방에서 나왔다. 거실 소파에 지은이 어머니와 유은이가 앉아 있다. 지은이 어머니와 유은이에게 인사했다.
“안녕히 계세요.”
“어머, 가려고? 저녁 먹고 가지.”
“맞아, 오빠. 먹고 가.”
“오늘은 일찍 들어가야 돼서요. 안녕히 계세요.”
“그래. 잘 가렴.”
“오빠. 잘 가.”
지은이 어머니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유은이에게는 손을 흔들어주고 현관으로 가 신발을 신었다. 지은이가 배웅을 나왔다. 지은이와 복도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알았지? 오늘은 공부 너무 많이 하지 말고 일찍 자.”
“알았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 1층 버튼을 눌렀다. 곧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아래로 도착한다.
“이따 밤에 전화할게.”
“응.”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다. ‘1층입니다’하고 안내음이 흘러나왔다. 지은이와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복도를 걸어 건물 입구로 나왔다. 바깥 공기가 복도와는 달리 조금 후끈하다. 몸을 돌려 지은이와 마주보았다.
“우리, 시험 끝나는 날에 데이트 하자.”
“그래!”
내 말에 지은이가 기쁘게 대답했다.
“다음 주는 평일이니까 시내로 나가는 게 낫겠지?”
“응.”
“방학 때는 좀 더 멀리 가자. 가고 싶은 곳 있어?”
“응. 많아.”
“방학하면 말해줘.”
“알았어.”
지은이에게 작별의 키스를 하고, 집으로 향했다. 이제 여름방학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올해 여름방학은 다른 때보다 훨씬 바쁠 것이다.
집에 도착해서는 또 평소처럼 누나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학교가 끝나면 지은이네 집에서 놀거나 공부를 하고, 집에서는 누나와 텔레비전을 본다. 이런 생활이 시작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예전부터 그래왔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지금이 너무나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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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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