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돌아, 차돌아 [제97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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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엔진소리를 내며 차는 빗길을 잘도 헤쳐 나간다.
차돌이가 뒷좌석에 몸을 기댄 체 눈을 감은 채 제비에게 묻는다.
[제비, 너도 내가 싫어졌겠지.]
조금도 억양이 없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다.
허무감에 젖에 억지로 내 뱉는 말 같았다.
마치 세상의 모든 억겁을 등에 진 것처럼 들린다.
사람의 삶이 어찌 단순할리만 있겠는가...
곳곳에서 시시각각으로 나타나는 무수한 위험과 해악을 눈앞에 두고 끊임없는 투쟁과 갈등, 악착같은 분투가 연출되는 곳이 아닌가.
그러한 고투를 계속하는 인간의 삶이 조금이라도 고통이 없는 상태에 이르면 권태가 침입한다.
그러면 새로운 궁핍이 발생하여 본래의 처지로 환원되곤 한다.
어쩌면 인간의 삶이 조금도 진실하고 순수한 내용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오직 요구와 환상의 미혹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인간의 삶이 조금이라도 움직임이 정지되면 생존이 공허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어느 누구도 일찍이 현재의 나의 삶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술에 취해있거나 미친 사람일 것이다.
[아닙니다,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만.
대장님이기에 남들이 할 수없는 일도 한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전 대장님을 영원히 따르기로 작정한 놈입니다.
설령 그보다 더 흉 축한 일을 해도 전 영원히 대장님의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대장님이 저를 같은 식구로 인정하고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 해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절 믿어도 됩니다. 대장님....]
제비는 자기의 각오를 이야기한다.
사나이로서의 의리가 무엇인지 나름대로 피력하면서 오직 대장을 위해서 죽어도 좋다는 그런 기개를 보여준다.
차돌 이는 진정으로 자기를 이해하고 충성을 보여주는 제비의 말을 들으며 한편으론 흐뭇했다.
[고마워, 그리고 아직 멀었나,]
차돌 이는 짧지만 그런 마음을 보여준 제비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목적지에 도착할 때가 되지 않았나. 묻는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차에 오르고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은 것이다.
맑은 하늘을 보기가 무서웠을까........그는 진정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 했다.
[아닙니다. 곧 도착합니다.
허지만 그곳엔 차가 올라가지 못하는 곳이라 조금 걸어야 되는데....]
제비가 걱정이 되어 말꼬리를 흐린다.
자기가 모시는 사람이 비를 맞게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 것이다.
차돌 이는 빙그레 웃고 만다.
웃고 있지만 지금 차돌이의 심정은 천 갈레 만 갈레로 찢겨지고 흩어져서 어지러운 상태다.
그냥 숨기고 살걸...그런 생각도 해 보았지만 나를 믿고 의지하려는 사람들에게 너무 배신감을 안겨주는 것 같아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고 그러고 보니 속은 후련하기도 했지만 허전한 마음이 심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은 윤지를 어머니와의 사이를 풀어주는 일이었다.
그렇게 될지 안 될지는 하늘이 해결할일이고 자기로서는 최선을 다해볼 심산으로 지금 윤지의 엄마가 있는 산동네 집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많은 빚을 지었지만 무엇보다 가슴이 쓰리게 한 건 윤지가 홀어머니와의 관계가 자기로 인해 어렵게 된 것이 가슴에 못이 박힌 듯 한이 되었고 마지막으로 그 일을 원만히 해결되었으면 하는 생각에 용서를 빌러 윤지 어머니를 찾아가는 것이다.
차는 산허리 조그만 공터에 도착하고 제비가 내린다.
차돌이가 뒷문으로 내리자 제비는 번개같이 차돌이의 머리위에 우산을 받혀주고 조그만 골목길로 인도하며 걷는다.
이윽고 낡은 나무문 앞에 선 제비는 차돌 이를 본다.
이집이라는 뜻의 눈빛을 보낸다.
차돌 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제비에게 지시를 내린다.
[제비, 이제 됐어, 자넨 내가 여기 왔다는 소리 아무에게도 하지 말고, 그리고
기다리지 말고 그냥가게.]
차돌 이는 이제 용무가 끝난 제비를 돌려보낸다.
여긴 제비 네가 있어도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예, 그렇지만.....]
제비는 차돌 이를 혼자 두고 가기가 망설여진다.
비는 오고 있고 뭔가 심각한 일을 처리하는 것 같은데 대장의 주위를 떠난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난 괜찮으니 그렇게 하게, 내가 나중에 연락하지...]
차돌이의 지시에 제비는 허리를 깊이 숙이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차돌 이는 제비가 주고가려는 우산마저 가지게 가게하고는 제비가 골목을 벗어나자 나무문을 밀고 집으로 들어간다.
[실례합니다.]
마당가운데 서서 집안을 향해 조용한 목소리로 사람을 부른다..
[누구세요]
아눌 하고 기운 없는 소리가 들리며 중년의 초라한 여인이 방문을 열고 나온다.
파리한 안색을 가친 여인은 야위고 창백해 있었다.
뼈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하게 말라빠진 여인의 얼굴에는 세상의 모든 한을 덮어쓴 듯 어둡기만 하였다.
초라한 여인은 비를 맞고 들어온 낯선 말쑥한 청년을 보고 의외인 듯 놀라고 있었다.
[저. 실례입니다만 혹시 서윤지라는 아가씨의 모친이 아니신지요.]
차돌 이는 여인을 보자 대뜸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창백하고 야위어있어도 얼굴 윤곽만은 윤지를 닮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 하여 확인할 겸 물어본 것이다.
[그렇습니다만.]
여인은 본인임을 알리고 차돌 이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여인은 이렇게 비가 오는데 웬 말쑥한 젊은이가 와서 딸아이의 이름을 부르고는 자기를 찾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야윈 얼굴에 궁금한 표정을 잔뜩 그리고 있었다.
차돌 이는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질퍽거리는 마당가운데 그대로 무릎을 꿇는다.
[용서하십시오, 제가 석이의 아버지 됩니다.]
차돌 이는 땅이 빗물에 흠씬 젖어있는 것도 상관없이 그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자기의 신분을 밝힌다.
그리고 딸을 그렇게 만든 것에 사죄를 드린다.
[뭣이.........]
여인은 입을 크게 벌리고 놀라버린다.
그리고는 차츰 얼굴 근육이 떨리고 눈에 쌍심지가 켜지고 인상이 사나워지더니 벼락같은 호통소리가 사자후처럼 터져 나온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너 같은 놈이 올 수 있는 집이 아니야.
개 같은 놈, 우리가 이렇게 산다고 무시해도 좋아.
그렇지만 네놈이 함부로 가지고 놀 정도로 뿌리 없는 집안은 아냐.
썩 꺼져라 이놈. 꼴도 보기 싫다.]
여인은 대노하였다.
자기 딸을 망친 장본인이 눈앞에 나타났으니 어찌 울분이 쏟아지지 않겠는가.
여인은 무서우리만큼 차가웠다.
얼마나 자기나 자기집안을 무시했으면 이렇게까지 뻔뻔스럽게 찾아올 정도로 가벼이 봤나 그렇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날마다 석이를 만든 애비 놈을 저주하고 원망하며 찢어죽이리라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막상 눈앞에 나타나니 그렇게는 못하고 쾌심하고 가슴을 치미는 울분에 욕설을 섞어가며 호통을 치는 것으로 대신한다.
[어머님, 절 용서 못 할 줄은 이미 각오했습니다.
전 맞아 죽어도 좋습니다만 허지만 윤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제발 윤지를 살펴주십시오.]
차돌 이는 그 자리를 벗어나지 않고 계속 용서를 빈다.
자기는 어떠한 처벌도 감수하겠으니 제발 모녀의 정만은 끊어지질 않길 바란다는 말이다.
[이놈이 어디서....누구보고 어머니라고 그래.
난 그런 딸년을 둔적도 없으니 네놈이 삶아먹든 구워먹든 마음대로 해라.
아니...이미 네 마음대로 했으니 속이 시원하겠다. 이놈아.
어서 썩 내 집에서 나가거라.......에 잇.... ?.........]
윤지엄마는 분노를 있는 데로 터뜨린다.
화가 치밀다 못해 눈에 눈물마저 글썽이며 있는 말도 다하지 못하는듯하다
그리고는 더러운 똥을 보고 속이 울렁거리듯이 가래침을 마당에 뿌리며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리고 이어 통곡소리가 터져 나온다.
[아이고. 아이고.........어떻게 키운 년인데........]
평소 입에 담아보지도 못할 욕설이 터져 나오고 숨이 넘어갈듯 요란하게 통곡을 한다.
허긴 얼마나 속이 쓰리겠는가..........
결혼도 하지 못한 처녀가 아이까지 낳았으니 그뿐이랴 남자의 호적에 버젓이 이름을 올려도 분이 풀릴까말까 한데 그마저도 못한다는 딸을 보고 어찌 수십 년을 홀로 남의 집 뒷바라지해가며 키운 보람이 나겠는가,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놈이 이젠 집에까지 와서 용서를 빌고 있다.
딸을 버린 장본인을 보고 분통을 참으며 돌아가라 하고 호통치고 들어왔지만 이제껏 살아온 유일한 희망인 딸자식을 빼앗아 가버린 못된 망아지 같은 놈을 보니 서러운 감정이 폭발했던 것이다.
이미 늦어버린 일이 되었지만 내 삶의 모두를 앗아간 놈에게 그리고 유일한 낙인 딸자식에게까지 보장된 내일을 약속해주지도 못한다는 천하의 못된 놈이라 생각하니 저런 놈에게 몸과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겨 죽고 못 사는 딸년이 더욱 쾌심해진다.
아무리 울어도 속에 들어있는 한이 사 그러 들지를 않는다.
한참을 그렇게 통곡하고 울었다.
여인은 차츰 이성을 찾는다.
목이 마른지 물을 찾아도 없다.
밖의 냉장고에 가서 물을 먹으려고 일어나서 귀를 기울여본다.
밖은 빗소리 외엔 아무른 소리도 없다.
[쾌심한 놈........감히.....]
차돌 이를 욕하며 나온 여인은 그만 걸음을 멈추고 놀라고 만다.
차돌이가 아까 무릎을 꿇은 그 자세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억수같은 비를 맞으며 앉아 있었다.
고개를 땅바닥으로 향하고 있었기에 표정은 볼 수가 없었다.
여인은 그런 차돌 이를 애써 외면하고 물병을 냉장고에서 꺼내 손에 들고 방으로 들어가려다가 혹시 저러다가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슬며시 든다.
아무리 부정해도 윤지는 딸년이고 딸년이 목숨처럼 사랑한다는 못된 놈이 저놈이니 이런 비를 장시간 맞고 병이라도 생긴다면 한 가닥 걱정도 인다.
그러나 그런 걱정보다 앙금이 깊다.
걸음을 멈추고 차돌 이를 보며 다시 호통 친다.
[아무리 그렇게 빌어도 그년은 나와 끝난 인연이다.
썩 꺼져라 이놈아. 개 같은 놈.......그런다고 내가 네놈을 받아줄 것 같아...죽일 놈..]
여인의 분노는 여전했다.
그만큼 쉽게 풀어버릴 수 없는 마음의 앙금이 컸음이다.
[어머니, 제발 윤지를 거두어 주십시오.
날마다 윤지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우는 모습을 차마 더는 볼 수가 없습니다.
제가 무슨 죄 값을 치러라 해도 그렇게 하겠으니 윤지를 거두어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차돌 이는 그런 윤지의 어머니를 이해했다.
누군들 자기가 애지중지하며 온갖 수고와 고초를 다해 20년을 넘게 키웠는데 난데없는 놈이 채가는 것도 모자라 아기까지 낳게 했으니 얼마나 기가 차겠는가.
차돌 이는 자기가 그런 일을 당했어도 지금 윤지어머니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하며 그런 윤지의 어머니 마음을 이해했고 그러나 어차피 지난일이라 모든 벌은 감수하겠으니 윤지만은 용서하시고 거둬달라고 애원하는 것이다.
[허허...그래 죄 값을 치른다고..........
네놈 말 잘했다. 그래 내가 죽어라 면 죽겠느냐. 이런 개 같은 놈아.]
윤지 어머니는 차돌이가 계속 비를 맞으며 애원하자 진정 죽을 수 있냐며 욕설을 섞어가며 따져 묻는다.
[윤지를 거두어 주시겠다면 바로 이 자리에서 목숨을 끊어버리겠습니다.
그러려고 찾아왔으니 윤지를 용서하시고 무슨 명이든 내려주십시오.]
차돌 이는 결심을 밝힌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러겠다고 맹세한다.
그는 진정 윤지의 어머니가 죽음을 바란다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할 심산이었다.
모든 것이 허탈하고 갑갑하며 답답한 마음을 죽어 풀고도 싶었다.
아무도 듣지 않고 바라볼 수도 없는 그런 세상에서 누나를 마음껏 소유하고 싶었다.
다만 유일하게 자신의 혈육을 낳은 윤지가 마음에 걸렸다.
그녀 또한 외동딸이며 그녀의 어머니가 모진고생으로 키운 딸이란 걸 안다.
윤지는 그런 엄마를 배신하고 말았다.
부모의 가슴에 철천지한을 심어놓고 자기에게 온 윤지를 위해 마지막으로 엄마와의 재회를 도와주고 싶었다.
무슨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무조건 빌어서라도 윤지의 얼굴을 웃게 해주고 싶었다.
그것이 유일한 자기자식인 석이를 위한길이기도 했고..........
[시끄럽다, 이놈아.
네놈이 허울 좋은 말로 윤지를 유혹하고도 모자라 나까지 세치 혓바닥으로 우롱하려
하느냐.
보기 싫다. 썩 꺼져라 이놈아....
네놈이 그런다고 내 마음이 바뀌지 않을 테니........호로 잡놈 같으니.......]
여인도 쉽게 분노를 거두지 않는다.
오히려 거짓으로 변명하는 것 같은 차돌이가 더 미워진 것 같았다.
[어머니, 전 이 자리에서 죽으면 죽었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제가 죽겠습니다.
그러니 윤지를 용서해 주십시오.]
차돌 이도 물러나지 않았다.
윤지를 용서하기 전엔 절대 이 자리를 움직이지 않겠다는 모진 결심을 밝힌다.
[네 마음대로 하 거라, 이놈아.
그런다고 내 마음이 돌아서길 바란다면 큰 오산이다
이놈아. 이런 개망나니 같은 놈.........]
다시 여인은 방문을 박차고 들어가 버린다.
차돌 이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목석으로 변한 듯 앉아있다.
다시 오랜 시간이 침묵 속에서 흘러간다.
빗줄기는 줄기를 더해간 듯했고 날은 이제 저물 때인데도 이미 캄캄해져 있었다.
방안의 불빛을 빼고 나면 적막한 분위기였다.
간혹 번개가 세상을 밝혀주곤 했지만 그건 일순간이었고 차돌 이는 그 자리에 돌이 된 듯 움직임이 없었다.
사실 조금 전에 차돌 이는 그만 일어나 돌아가 버릴 까도 했다.
내가 윤지를 잡아둔 것도 아닌데 그런 자기위주의 생각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까했다.
그러나 그는 재빨리 마음을 다잡았다.
안 된다 안 돼..........하고
차돌 이는 본래의 양심으로 돌아온 것이다.
윤지의 엄마의 심정은 나보다도 더욱 쓰라리고 아플 텐데 나는 그녀의 마음을 과연 헤아리기도 해 보았던가.
이정도의 고통과 성의 없이 어찌 한 아이의 아버지라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제지당해 마땅한 것이다.
이미 더럽혀진 평판, 수치. 지독한 비참, 그리고 그 외의 모든 불행을 짊어지려 하지 않았는가.
이까짓 수모로 그 어찌 나의 모든 것을 누를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여기서 죽자.
그럼 석이에게만은 당당한 아버지가 될 수 있으리라.
차돌 이는 그 자리에서 부르르 떨며 다시 못 박힌 듯 움직임을 멈추어버렸다.
윤지엄마는 몇 번인가 창틈으로 차돌 이를 훔쳐보았다.
그리고 진정 대단한 젊은이라는 생각을 가졌다.
이건 분노와의 별개의 생각이지만 저렇게 한자세로 앉아있기에는 수도를 하는 고승도 어려운 일이며 더군다나 이렇게 억수같은 비를 맞고 저러고 있으니 젊은 놈의 인내와 끈기에 감탄하고 있었다.
저런 놈이기에 우리윤지를 앗아 갈 수 있지...
조금은 괜찮은 놈이다 라 는 생각이 싹트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정도에서 물러나고 싶지도 않았고 더욱이 자손심이 허락지 않아 곧 저러다 돌아가겠지 이미 한계에 와 있을 테니 그렇게 생각하고 방을 불을 끄고 이불속으로 들어가 누워버린다.
밖은 여전히 세차게 몰아치는 빗소리뿐이다.
여인은 누워서 시계를 본다.
잠이 들었나보다 어언 12시가 가까워있었다.
살그머니 창가에 눈을 대고 밖을 본다.
또다시 두 눈은 화등잔 만하게 커져버린다.
이젠 한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이 밖에 있었다.
차돌이의 옆에 윤지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며 그 뒤로는 두 사람과 안방을 보며 애타하며 눈물을 흘리는 여러 여자들이 있었다.
누구도 차돌이 곁에 가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여자들이 여기오게된 것은 제비의 전화 때문이었다.
제비는 차돌이가 내려오기를 기다리기로 작정하고 차에서 기다렸지만 저녁이 되어도 오지를 않기에 혹시나 하고 슬며시 집으로 와서 살펴보니 대장이 무릎을 꿇고 꼼짝을 하지 않지 않는가.
들어가 말릴 생각도 했지만 차돌이의 철저한 고집과 성격을 아는 터라 그러지 못하고 안달하다가 혹시나 하고 집으로 연락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 닥친 여자들이었고 윤지는 차돌이 옆에 나란히 무릎을 꿇고 앉았고 그녀도 이미 지쳐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차돌 이는 눈을 감은 체 요동이 없다.
여인은 순간 감동했다.
한순간에 차돌 이를 인정하고 만 것이다.
저렇게 끈기 있고 고집 있는 놈이라면 어찌했던 윤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놈이라고.
그리고 딸년에게도 진정 감사했다.
저렇게 비를 맞고 자기남자와 같이 빌고 있는 모습이 차라리 자기에게 와서 떼를 쓰는 것보다 몇 천배 감동을 준 것이다.
여인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불을 키고 방문을 열고 나가서 한차례 주위를 쓸어보고는 윤지에게 눈길을 멈춘다.
그리고 모든 것을 버린 힘없고 처연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래, 너희들이 이 정도였니....
엄마가 인정하겠으니. 어서 방으로 들어오너라........]
여인의 말이 떨어지자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두 사람에게 몰려든다.
윤지는 비틀거리며 미주와 현영이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나고 일화는 무랑 이와 재빨리 차돌이 에게 가서 몸을 흔든다.
힘없이 넘어지는 차돌이다.
이미 오래전에 정신을 잃고 있었다.
차돌이가 누구인가 중국에서 기를 연마한 사람이 아닌가, 기를 운용하면 이 정도는 쉽게 견딜 수 있었지만 그건 용서를 비는 자세가 아니라 여기고 모든 기를 폐쇄하고 순수한 체력으로 버텼으니 어찌 견딜 수가 있으랴...
갑자기 집안은 복 새 통이 되고 제비는 차돌 이를 업고 한달음에 차로 달리고 그 뒤를 이어 다른 여인들이 따라나선다.
집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일화와 아기를 안은 선영 이와 윤지였다.
흠뻑 젖어 벌벌 떨고 있는 윤지는 엄마에게 죄스러운 마음보다 눈엔 차돌이의 신상에 관한 염려로 가득 차 있었다.
윤지엄마는 그런 딸이 섭섭하기도 하지만 이젠 그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가지자 안도도 된다.
선영 이는 말없이 석이를 여인에게 준다.
여인은 아기를 안아들고 여자들을 보고는 눈길을 윤지에게 준다.
[이분들은.......]
윤지 어머니는 같이 들어온 여인들이 궁금해서 딸에게 물어본다.
[응..엄마. 언니들이에요.......]
윤지는 엄마에게 선영 이와 일화를 소개한다.
한 치의 숨김도 없이 같이 그 남자를 모시는 여자들이라고 밝힌다.
[무엇이..그럼 밖에 있는 여자들도........]
윤지 어머니는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지금 방에 들어온 여자들만 해도 모습이나 자태를 보면 무척 고귀하고 멋지고 세련되어 보이는데 이 여자들만 해도 딸의 앞일이 눈에 선하고 불쌍해 보이는데 이 여자 말고 석이의 애비라는 젊은이를 따라 나간 처자들 역시 모두가 그의 여자라니 요즘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법한 일이냐며 눈이 휘둥그레지고 기절할 듯 놀라고 만다.
[그래요.......엄마. 이해하시고 용서해주세요.]
윤지의 말에 여인은 아기를 보지 않고 천장을 보며 크게 한숨을 쉬며 멍해진다.
어떤 자식이기에 한 여자도 모자라 이렇게 많은 여인들을 거느리고 살 수 있단 말인가.
기가차고 말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눈앞에 상황은 모두 현실을 보여주고 있으니 여인은 다시 두 여인을 보고는 깊은 한숨을 내쉰다.
자기가 쳐다본 두 여인은 나이가 젊은이보다 한참 많고 다른 여인도 연상이다.
밖에 있던 여자들도 언뜻 모았지만 하나같이 미인 이였고 기품이 있어보였다.
지금 방안에 남은 두 여인을 보면 감히 근접키 어려운 풍모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엄청난 세도가의 사람이란 걸 느끼게 한다.
하나도 딸년과 비교해 지지 않는 미모와 풍도를 지닌 여자들이 젊은이하나에 목을 걸고 있다니 세상이 우습고 이런 현상이 어찌 일어났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을 용서하고 받아들이기로 하지 않았는가.
여인은 선영 이와 일화에게 머리를 숙이며 부탁한다.
[아직 철없는 아이입니다.
언니라니... 잘 가르치고 보살펴주세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지쳐버린 그리고 10년은 더 늙어 버린 것 같은 무기력한 목소리였다.
[아니, 어머님, 무슨 말씀을......말씀을 낮추어도 됩니다.
동생의 어머니면 저에게도 어머니가 되십니다.]
일화가 나서서 윤지어머니의 말을 상냥하게 받는다.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그리고 자기에게 최대한 공손하게 대하려는 태도나 자세가 부담이 되도록 자연스럽다.
여인은 더욱 당황스러워 한다.
[어찌 그럴 수가, 댁은 나이가 나랑 크게 차이가 없을 것 같은데.]
윤지어머니는 그럴 수 없다는 이유를 밝힌다.
일화를 보면 나이차이가 별로 날 것 같지 않아 하는 말이다.
그런데 어찌 어머니로서 대접을 받을 수가 있단 말인가.
한눈에 보기에도 이정도 여자면 분명 남편과 자식도 있을 것이고 지금 석이 애비와는 불륜의 냄새가 풍기고 있지만 말은 할 수가 없고 그런 식으로 그럴 수가 없다는 뜻을 밝힌다.
[맞아요, 난 가정도 있어요,
그러나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은 동생에게도 지고 싶지 않아요.
절 욕하셔도 좋아요.
헌데도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나오고 싶어도 나오지 못하는 신세라 윤지가 부러워요.
하여튼 윤지를 용서해 주셔서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일화는 윤지의 어머니 얼굴에서 그런 느낌을 읽었다.
그러나 조금도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모든 의혹을 풀어주려는 듯 소상히 자기신세내력도 밝혀준다.
윤지 어머니는 또다시 멍해진다.
여자가 그렇게 순순히 자기신세를 고백하고 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자기가 아는 상식이라면 이런 일은 숨기는 게 마땅한데 여인은 오히려 당당하기만 하니....
그것도 엄청나게 멋지고 세련된 여자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으니 기가 차지도 않는다.
그러나 재빨리 표정을 바꾸어 윤지에게 아기를 주며 이른다.
[자, 오늘은 늦었고 어서 그 사람에게 가보도록 해라.
네 눈빛을 보니 내가 더 안타깝구나.
일어들 나세요, 그리고 그 사람에게 어서 가보세요.
우린 다른 날 만나지 않겠어요,]
여인은 윤지와 모두에게 지금 걱정하고 있는 사람에게 가라고 축객 령을 내린다.
아마 이렇게 좌불안석으로 앉아있는 모습이 안타까워 보내려하는 배려였다.
[그래요. 어머니..다시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래서 윤지의 소원대로 어머니와 떨어지지 않고 살도록 만들어놓고 모시러
오겠습니다.
그땐 저희들의 뜻에 따라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앉아있을 수 없어 송구스럽지만 일어나겠습니다.
어머님 말씀대로 그분이 걱정되어 죽을 지경이니 깐 요........]
선영이가 다시 윤지에게 아기를 앗아 안고 일어난다.
그러자 모두는 자리에서 일어나고 그리고 작별인사를 나누고서야 부리나케 차로 향해 달린다.
차돌이가 걱정되어 바늘방석이었던 자리에서 해방되어 차돌이가 있는 집으로 달려가고픈 마음뿐이었기 때문이다.
여인도 딸년과 여인들을 보내놓고 멍하니 한숨만 내쉬더니 방으로 들어간다.
그 밤 여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밤새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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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접속일 | 2024-11-03 | ||
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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