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기다림의 삶 속으로.
캐리와 내가 먹었던 건. 단순한 소화제였다. 수면제도 아니고 소환제. 아무리 믿었던 남자친구에게 차여서 정신이 없다고 해도 그런 가짜를 12만원이나 주고 산다니 정말이지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 게 가짜인 덕분에 우린 무사히 다시 삶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거지만. 황당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눈을 보러 잠시 나갔다 온 캐리와 나의 눈이 마주쳤을 때 처음 실행 한 것이 서로를 손가락 질 하며 배를 잡고 웃는 거였다.
그 웃기는 일 때문일까. 캐리는 죽을 맘이 다 달아났다고 했고 나도 누나의 문자 때문에 이젠 죽고 싶은 생각이 없어져 버린 탓에 다른 문제를 고민해야 했다. 우리가 관계를 가졌다는 것도 숨겨야 할 문제지만 그 문제는 숨길 수 있는 문제이고 더 큰 문제는 무단 외박을 했다는 것이다.
이건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캐리가 논다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남자라곤 덕판인지 케인인지 하는 가수하는 놈 빼고는 없었고 한 번도 외박은 하지 않았었다. 이모가 미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탓에 개방적이라고는 하지만 연락두절에 무단외박을 했으니 화가 단단히 나 있을 것이 뻔했다.
우린 옷을 챙겨 입고 어색하게 모텔을 나와서 눈 덮인 곳을 걸으며 대책을 강구해 보고 있었다.
“아! 몰라. 엄마가 나 죽이려고 하겠지 외박이라니 전대미문인데.”
“어젠 죽으려고 했으면서 뭔 걱정이람.”
“어제는 어제고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고 진이도 생각 좀 해봐”
“시나리오를 짜야한다는 뜻.”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흔해빠지긴 했지만 친구 집에서 어쩌고 자고 왔다. 들먹이기.”
캐리는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엄마가 다 전화 해 봤을 거야. 엄만 내 휴대폰 속에 있는 전화번호 한번 씩 자기 휴대폰에 복사하고 있거든.”
이모는 내 생각보다 외동딸인 캐리를 애지중지 키우고 있었다. 보기엔 방임하는 듯 했는데 나의 관찰력이 모자랐다.
“케인인지 뭔지 그 놈 때려주러 갔다고 할까.”
그녀의 눈동자에 일순간 별빛이 반짝였다.
“그래 그거 나쁘지 않겠네. 너의 세상을 원망하는 분풀이와 나를 차버린 그놈에 대한 분풀이를 합쳐서 지금 순회 콘서트 중인 그놈의 무대에 올라가서 패버렸다. 그런데 그 곳이 지방이고 눈이 너무 와서 돌아오지 못했다.”
“근데 진짜 순회 콘서트 중이야.”
“응. 내일 테마파크에 대형 홀에서도 한다고 하더라.”
“근데 증거가 없잖아.”
“대충 말하면 되. 엄마도 덕판이 놈이 나 차 버린 걸 알거든.”
“뭐라고 하시던. 너 차였다고 하니까. 이모가”
“납치해서 고추를 따고 추남으로 성형 해 버린 다음 쓰레기장에 버리겠다고 소리치던 걸.”
“하하하 설마.”
“진짜로.”
“하하하. 못 믿어.”
그녀는 하늘은 한번 본 후. 웃으며 진실로 답해주었다.
“히히 사실 그냥 잊어버리라고 하더라. 난 아직 어리고 얼마든지 좋은 남자 다시 만난다고.”
난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이모 대신 다시 말했다.
“캐리는 멋진 여자잖아 그런 허접배기 노래도 못하는 가수 보다 좋은 남자 만날 거야.”
“진짜.”
“응”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 팔에 매달렸다. 사실 그녀가 나보다 키가 커서 이런 자세는 너무 부자연스러운 것이었고 그녀도 불편했는지 손만 잡는 걸로 변경했다.
그리고 이모 앞에 섰을 때 손잡고 같이 혼이 났다. 우린 미성년자 임에도 불구하고 술집에서 술을 먹다 잠이 들었고 눈이 너무 와서 차가 없는 관계로 얼어 죽을 까 봐서 그 호프에서 난로를 쬐며 밤을 새고 아침에 왔다고 이야기 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캐리는 오는 길에 맥주를 하나 사서 우리 옷에 뿌리고 먹기 싫다는 나의 입에 조금 털어 넣고 자기도 한 모금 먹었다.
왜 이런 불량스런 핑계를 대었냐면 이모가 다른 생각하지 못하게(우리가 자살하러 갔다가 자 버렸다는 것을. 하지만 이모가 그렇게 연결해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단지 큰일이라 이모가 아는 것이 두려웠기에 이런 거다.)원천 봉쇄하기 위함이었고 그건 성공적이었다.
“자 너희들 앞으로 통근시간은 6시다. 절대 지킬 것. 누구 생일 파티 콘서트 같은 건 절대 핑계로 안 먹어준다.”
“넵”
"yes sir"
이마를 매만지는 캐리. 이모가 손을 들고 있었다.
“장난하지 마. 말썽장이 캐리언.”
“응”
이모가 다시 손을 들다. 캐리는 그 손이 다시 이마로 올까봐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넵!”
우린 이모의 특별 훈계가 끝난 후. 눈 치우기를 시작했다. 무릎까지 쌓인 눈을 동내 사람들과 같이 치우고 있으니 이 추운 날씨에도 땀이 흐르고 숨이 가빠졌다. 역시 2달가량을 은둔자로 지내고 나니 힘이 하나도 없었다.
이모는 나의 상태를 보고 있다가 그만 들어가라고 이야기 했고 난 괜찮다고 이야기 했지만. 병원에서 야근을 하고 돌아 왔는지 조취한 모습의 아저씨가 나를 거의 억지로 집으로 밀어 넣어 어쩔 수 없이 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오 누나에게 연락이 왔구나. 전에도 느낀 거지만 너에겐 역시나 나 같은 돌팔이보단 누나가 백번 낮군.”
아저씨는 미소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내 머리를 쓰다듬고 내 귀를 한번 본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뭐야 너 연예계라도 진출할거야.”
“아뇨. 캐리가 멋대로.”
“녀석도 힘들어 하던데. 어제 다 풀었어.”
“대충 다 털어 버렸어요.”
아저씨는 자기 이마를 손으로 짚고 고개를 흔들며 괴로운 마음 털어 놨다.
“아. 정신과 의사가 있는 집안에 왜 이렇게 많은 신경쇠약 자가 있는지 내가 신경쇠약 걸리겠다. 의사면서 가까운 사람 못 도와준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넌 모를 거다.”
“기운 내세요. 전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아저씨의 상담효과가 누나를 통해서 발현되었는걸요.”
아저씨는 내 말에 미소 지어 주었다.
“음. 쉬어라. 난 눈 좀 치우고 올게.”
눈 치우기는 9시에 겨우 마무리 되었다. 난 이모네 식구들이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차를 끓여서 집안에 들어선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오! 센스 최고. 사랑 받겠는 걸.”
“고맙다.”
“하하 고마워 오빠.”
“성 마담. 최고야.”
다들 한마디 씩 하고 그들은 손을 씻으러 갔다. 줄을 서서 손을 씻고 한명 씩 나와서 식당으로 다시 한명 씩 들어갔다. 나도 그들을 따라갔고 오래감 만에 이모네 식구들과 아침식사를 시작했다. 음식은 이모네에서 자주 나오는 카레였다.
“또 카레야.”
캐리가 어제 죽으려 한 주제에 짜증스런 표정이 되어 반찬 투정 했고 이모가 화난 얼굴로 캐리의 어깨를 잡고 주걱을 들고 입을 열었다.
“캐리언 네가 오늘 반찬 투정할 입장이냐.”
“그래도 너무 하잖아 엄마가 카레 좋아 한다고 다들 카레 좋아 하란 법 있어. 물어봐 아저씨도 소라도 너무 많이 나온다고 할 걸.”
하지만 아저씨랑 소라는 이모 편이었다.
“아냐 언니 난 카레 좋은데.”
“난 수희씨가 만들어 주는 건 뭐든지 맛있어.”
왼지 나도 한마디 꺼내야 할 것 같았다.
“읍~!”
하지만 캐리가 네가 한마디 할 거라고 생각한 것인지 내 입을 먼저 막아 버렸다.
“진이 까지 그럴래.”
“봐라 다들 불만 없잖아. 너만 어떻게 하면 되겠네.”
캐리는 심통 난 표정으로 입을 삐죽 내 밀었다.
“알았어. 내가 내일 맛있는 거 만든다. 시간 없다고 매일 카레! 카레! 카레! 도우미 아줌마를 좀 부르던지. 돈 많이 벌어서 어디에 쓰는지. 원.”
“오늘 따라 왼 심통이야. 동생들도 있는데.”
일단 나도 캐리 보다 13개월 늦게 태어났으니 동생에 들어서 ‘들’ 인 것이다.
“몰라.”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숙이는 캐리. 그녀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진짜 어제 오늘 캐리의 또 다른 면을 많이 본다.
“왜 물어. 바보같이.”
이모는 캐리의 고개를 들어 올리고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손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자 캐리가 일어나며 이모에게 꼭 안겨 버렸다.
“다 커 가지고 왜 그래. 엄마보다 큰 주제에. 애 같이.”
이모는 캐리의 등을 토닥거려 주며 따듯하게 안아주었고 캐리는 이모의 품에 절대 안 떨어지겠다는 생각인지 꼭 안고 ‘엄마’라고 작게 속삭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동조한 것인지 한줄기 눈물이 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나에겐 엄마 같기도 했던 누나가 너무 보고 싶었고 나에겐 왜 엄마가 없나하는 서러운 생각도 같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 인생에 있어 3번째의 자살 소동이 있은 후. 난 빠르게 예전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하늘이와 다른 친구들도 만나고 가벼운 운동도 다시 시작했다. 이번엔 헬스장을 다니는데 우연히 내가 다니게 된 헬스장에 창세랑 지석이가 다니고 있어서 운동을 하는 둥 마는 둥 하기 일쑤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캐리는 전처럼 장난도 치고 웃고 떠드는 모습으로 생활한다. 그녀와 섹스를 한 직후엔 그 생각이 자주 나서 곤란 했지만 몇 주 지나자 우리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예전 모습을 찾아버렸다. 캐리도 그저 그 일을 추억으로만 생각하는지 한번 씩 둘만 있을 때 장난으로 그 이야기를 들먹일 뿐 나를 남자로 보지 않는 것 같았다.
또 하나 캐리는 요즘 덕판에게 요상한 복수방법을 찾고 있었다. 뭐 자기도 연예계 진출해서 공개 적으로 창피를 준다나. 노래는 그럭저럭 이고 춤에 대한 센스 게이지가 절대적인 O을 가리키는 그녀의 예능으론 아이돌 가수 되기는 힘들다(확실하지는 않지만.)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견해다. 그래서 난 ‘잘못 했다가는 요즘 최고의 주가를 올리는 ARTAN의 빠순이들에게 봉변을 당할 수 있다’고 요즘 말리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누나는 문자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다른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고 발신번호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그 전화는 받는 사람은 도무지 어느 나라 말인지 알 수 없는 말로 이야기 하는 통에 나 스스로는 당황할 뿐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영어와 불어까지 완벽히 할 줄 안다고 자부 하는 이모에게 전화를 걸어 보게 부탁했다.
전화를 걸어본 이모는.
“독일 뮌헨이네. 이야기 해 보니까. 이 여자가 자기는 간호사 인데 며칠 전에 병원에서 예쁘게 생긴 여자애. 이 여자는 누나가 동양인인지 서양인인지 모르겠다고 하더라. 그 여자애가 아주 잠깐만 휴대폰 쓰자고 해서 빌려줬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가희 휴대폰이 아니네.”
누나가 간 곳이 독일 이란 것을 알았지만 더 이상 정보가 없었다. 난 아버지에게 물어 볼까 하다 캐리에게 한마디를 듣고 그만 두었다.
“언니가 왜 네게서 떠났겠냐. 그만 찾아 7,8년 후쯤 다시 온다며. 그 때 다시 만나. 단 진짜 남매로서 말이지만. 너만 언니를 소중하게 생각한 것 아냐. 언니도 널 소중하게 대했다고 난 생각해 떨어지지 않으려는 널 때어놓는 게 언니에게도 고통 이었을 거라고 생각안하니. 난 무척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 말도 없이 떠나 버렸지. 작별하는 것이 힘들어서. 그러니까. 너도 이제 언니를 생각해서 라도 이제 그만 찾아. 그리고 너만 목매고 기다리는 하늘이의 손 좀 잡아줘라.”
캐리의 일장연설에 난 고개를 끄덕였지만 ‘하늘이의 손 좀 잡아줘라’는 아직 실행하지 않았다. 나의 마음속엔 누나가 있는데 하늘이에게 사귀자고 하는 건 꺼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이 꼭 필요한 게 아니라고 말하는 선생님 쪽은 왼지 부답 없게 느껴지고 있었다.
3월 중학교 졸업식. 누나의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져 슬슬했지만 내 그런 마음을 위로하려는 건지 이모네 식구들이 모두 찾아왔다.
이모는 식구들이 준비한 선물이라며 선물 꾸러미를 내게 건넸고 난 무려 다섯 개나 되는 박스들을 하나씩 풀어보며 놀라고 기뻐하기도 하고 웃음 짓기도 하고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이모는 고급스러운 가죽지갑과 전자사전. 아저씨는 그다지 쓰지도 않을 것 같은 비싸 보이는 만년필. 캐리는 돈이 없다고 허접하게 프린팅 한 ‘뽀뽀 1회권’ 5장. 이제 중학교에 진학해야 하는 소라는 손수 짠 털모자 그리고 누나가 보내왔다는 멋져 보이는 시계가 들어 있었다.
누나가 보내왔다는 시계를 차고 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버렸다. 그러자 캐리가 예의 웃기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뭐야. 또 우냐. 이젠 고등학생이잖아. 털이 수북해지고 걸걸한 목소리에 여자나 미친 듯이 찾아 해매는 하이에나 같은 고등학생이 울어서야 쓰겠냐. 웃어야지.”
“언니 그건 30대 아저씨 아냐.”
소라의 말에 36세의 아저씨가 반응했다.
“절대 아냐.”
“가희 언니를 젤 좋아하는 양반. 다른 것도 좀 착용해 보시지. 사진 찍게.”
“으. 응”
난 캐리의 말에 눈물을 손으로 닦아버리고 모자를 쓰고 지갑과 케이스체로 만년필을 잘 보이게 들었다. 그러자 아저씨가 카메라를 꺼내서 한방 찍어 주었다.
“야. 내건. 왜 내건 빼먹어.”
가치 없는 것에 대한 무의식의 작용일까 나도 모르게 아무 곳에나 놔둬서 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한 장만 남아 있는 ‘뽀뽀 1회권’을 캐리가 씩씩거리며 지갑을 든 손에 끼어 넣었다.
“한 장 더 아저씨.”
“응 그래.”
플래시 터졌다. 난 ‘뽀뽀 1회권’을 지갑에 넣고 그 지갑을 호주머니에 넣고 만년필과 전자사전은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그들에게 뒤늦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전했다.
“다들 고맙습니다. 잘 사용할게요.”
이모는 내 어깨를 끌어안은 후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아저씨는 내 볼을 가볍게 쓰다듬고 소라는 내 손을 잡았다. 하지만 캐리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너. 나한테 ‘뽀뽀 1회권’ 들고 오는 놈 있으면 죽을 줄 알아.”
“왜? 이름이라도 적어 놨어.”
“그래 ‘진 캐리언’이 당신에게 드리는 선물 이라고 적혀 있다. 창피하게.”
“헤헤헤”
“웃음이 나와.”
이번엔 캐리를 제외하고 이모네 식구들이 전원 웃었다. 캐리의 얼굴이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캐리누나도 안녕. 진아.”
지석이랑 창세가 이모에게 안겨 있는 나에게 말을 걸며 다가왔다. 아쉽게도 이 녀석들은 같은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다.
“어. 지석, 창세.”
창세는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난 이모를 한번 처다 봐서 어깨에서 손을 치우게 만들곤 나도 손을 내 밀어 악수를 나누었다. 녀석이랑은 그렇게 까지 친하게 진했다고 할 수 없었지만 남자친구가 없는 나에겐 처음으로 생긴 동성친구란 생각이 강하게 남아있어 무척 아쉽게 느껴졌다.
“아쉽네.”
“그렇지.”
난 미소를 지었다. 창세는 나의 웃음에 이를 보이며 웃고는 맞잡은 손을 잡아당겨 나를 끌어 당겼다. 그리고 내 귀에 속삭였다.
“너에게 하늘이는 양보한다. 너 그 연상녀랑 헤어져서 집에 틀어박혔던 거라며. 이제 잘 해봐. 난 포기다. 일편단심녀는 흔한 게 아니니 꼭 잡아. 그리고 울리지 마라 울렸다간 알지.”
창세는 마지막 말을 하고 내 배를 때렸다. 난 콜록콜록 거렸고 모두들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난 그들에게 손을 들어 괜찮다는 의사를 전달한 다음 대답했다.
“알았어.”
“그래.”
창세는 나에게 손을 흔들고 어른들에겐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지석이 하고 우리 곁을 떠가갔다. 그리고 자리 바꾸기를 하듯이 이번엔 하늘이를 중심으로 한 4명의 여자들이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응~ 그래. 다들 오래만이네.”
이모는 내 병문안 왔던 이 4명을 다 기억하는지 하나씩 돌아가며 졸업을 축하한다며 인사를 나누었다.
창세와 지석이랑 다르게 이 4명은 나와 같이 고등부에 진학하게 되었다. 반이 갈릴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일단 같은 학교니 남자애들 같은 감정은 일어나지 않았고 우리들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이 후 이모와 아저씨는 병원으로 캐리는 친구에게 소라는 나하고 같이 집에 가려고 하다가 캐리에게 잡혀갔다. 별 수 없이 나 혼자 집으로 가기 위해 캐비닛을 정리해서 버릴 것은 버리고 후배에게 물려줄 건 교탁위에 올려놓고 가져갈 건 가방에 집어넣고 정들었던 교실을 등지고 천천히 걸어서 아직도 떠들썩한 운동장을 경유해 교문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버스정류소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길을 가다가 같은 반 아이들의 만나 작별인사를 하기도 하고 서로 연락처를 교환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러다 차를 몰고 가는 소현선생을 보았다.
그녀는 도무지 선생의 월급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은 붉은색 스포츠카를 운전하고 있었는데 선글라스, 어깨 까지 내려온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 반짝이는 귀걸이. 하트모양의 펜던트가 있는 가는 금 목걸이. 하얀색 바탕에 은색 선과 무늬가 있는 정장을 착용한 모습이 차와 어울려 부잣집 아가씨(호텔 갑부)란 그녀의 신분을 잘 나타내고 있었다.
일부 그녀를 알아본 아이들이 웅성웅성 되고 나에게도 몇 명인가 방금 그녀의 모습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오는 아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탈 버스가 때마침 왔고 난 그 모습을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하지만 내가 버스에서 내려 병원 앞에 섰을 때. 그 차가 나에게 다가왔다.
“선생님? 안녕안세요.”
“졸업 축하해.”
“감사합니다.”
그녀는 고개를 약간 숙여 자기를 처다 보는 나를 매력적인 미소로 반기며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선생님 차인가요.”
난 차 안의 화려한 장식들 보고 외관의 미려한 선들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나의 질문이 뭐 잘못되었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마를 한번 짓고 장식처럼 머리 위에 걸어둔 선글라스를 벗으며 입을 열었다.
“내 차이긴 하지만 요즘 남동생이 쓰고 있어. 그 녀석 지금 쯤 이거 없어 졌다고 난리 났을 건데. 걱정이네.”
“연락하면 되잖아요.”
“그게 어제 싸웠거든. 모르겠다. 내 명의로 된 분명한 내 찬데 알게 뭐람.”
난 그 말들을 듣고 소현선생의 가족 관계가 원활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분이랑 사이가 안 좋은가 봐요.”
“최악이지. 원수가 따로 없다니까.”
“하하 설마요.”
“진짜야. 너희 남매랑 완전 딴판이야. 그 기준으로 생각 하지 마.”
난 잠깐 누나랑 있었던 추억들을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그 미소를 보고 소현선생이 좋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바로 그 표정이야. 사진 찍고 싶어죽겠네. ”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선생 중증이다.
“사진 찍고 싶은데 안 될까!”
난 고개를 저었다. 이런 한심한 일에 동조해 주고 싶지 않았다.
“에이 치사하네.”
그렇게 말하며 혀를 삐죽 네미는 소현선생. 나에게 고백을 해버린 전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진이 졸업했으니 이제 선생님은 잊어버리겠지.”
정당한 문장을 찾지 못한 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우리 드라이브나 할까.”
난 어떻게 대답할까 망서려야했다. 그녀의 매력적인 모습을 보며 느꼈던 욕망과 만일 있을지도 모르는 복잡한 문제들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서 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전에도 이야기 했잖아 너에겐 책임지게 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말하며 선생이 문을 열어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한다.
“가자 정 그러면 사제 간의 작별인사라고 생각해.”
역시 난 이런 일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결단력이 없나보다. 선생이 차에서 나와 차로 밀어 넣을 때 까지 난 가만이 있었다.
“이거 아쉬워해야 하는 건지 기뻐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 진이는 그 성격 고치면 완전 바람둥이 될 것 같거든.”
소현선생이 나에게 부담스럽게 접근해서 안전벨트를 채워주며 한 말이다. 그녀는 벨트를 채워준 후. 스포츠카를 능숙한 솜씨로 몰아서 도로 위를 죽 달려 나갔다.
“운전 잘 하네요.”
“너도 해 볼래. 별로 안 어려워.”
“사양할래요. 그냥 저 아는 사람이랑 비교돼서.”
그렇게 말하며 변혁이 아저씨를 생각했다.
“우변혁 이군.”
“변혁이 아저씨를 아세요.”
“그럼. 고등학교 선배야. 그냥 안면 있는 정도의 사이였지만. 워낙 유명했거든.”
“예~”
난 변혁이 아저씨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기에 호기심이 들었다.
“왜 유명했어요.”
“말로 타인에게 스트레스 쌓이게 만드는 제주가 탁월했어. 그러니까 정신과의사도 해 먹는 거겠지. 헤헤 이건 농담이고 사귀는 여자가 일본인 이었는데. 학교까지 찾아온 사건이 있었거든.”
“예?”
“그 여자 이름이 뭐라더라. 모르겠다. 여자가 학교에 찾아와서 선배에게 다짜고짜 임신 했으니 결혼하자는 것 있지. 그 때 학교가 발칵 뒤집어 졌어. 지금도 멋지게 생겼지만 그 땐 정말 인기절정. 우등생이자 바람둥이였거든. 선생님도 여학생들도 완전히 패닉에 빠져선 캐묻기 바빴지.”
“그래서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 여자 말은 거짓말 이었더라. 임신은 고사하고 성관계도 안한 거 있지. 그 여자 순전히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선배를 좋아해서 억지를 부린 거였어. 근데 웃긴 건 선배가 그 여자에게 마음을 줘버린 거야. 결국 결혼했다고 하던데. 물론 고교졸업 후 지만.”
소현선생이 알고 있는 이야기는 너무 단편적이라 그저 막연하게만 느껴져서 현실감이 없었다.
“그 후 이야기는 나도 잘 몰라. 우린 말 그대로 앞면만 있는 사이니까.”
“그 일본 여자. 눈이 유난히 크지 않던가요.”
“응. 그랬어. 얼굴이 작고 눈이 큰 여자란 기억뿐이거든. 봤어?”
“아뇨. 그 분 딸을 매일 보고 있어서요. 유난히 눈이 예쁘거든요.”
“그랬구나. 딸이 하나 있구나.”
선생님과의 대화는 이것을 정점으로 일단 끝을 냈고 그 다음부터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녀는 고속도로를 타고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쏜살같이 스포츠카를 몰고 나갔으며 난 집에 늦게 가야하는 건 아닌가 걱정스러워 했다.
하지만 그 걱정도 잠시 뿐 난 쏜살같이 지나가는 풍경을 보다 잠이 들었다. 그리고 깨어났을 땐. 정지해 있는 차의 창을 통해 노을에 물들어 버린 구름이 먼저 보이고 태양 다음으로 바다의 수평선이 눈에 들어왔다.
“예쁘지.”
난 그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내 뿜는 자연의 신기함을 넋을 놓고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혼잣말 하듯이 이야기 대답했다.
“예. 혼자보기 아까울 정도로요.”
“응? 나도 있잖아. 아! 보여주고 싶은 사람 말이구나.”
그녀의 목소리엔 서운함이 묻어났지만 난 개의치 않았다. 나의 마음속 나라에 초대하고 싶은 이는 오직 누나뿐이니까.
“진아 배고프지 않아 뭐 먹을까.”
“그럴까요.”
그렇게 말하고 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주변은 바다가 보이는 암벽을 중심으로 한 관광단지로 일반적인 민가는 소수이고 모텔과 식당 테이크아웃 음식점들 그리고 돈 많은 사람들의 별장으로 보이는 멋진 집들이 전부로 추운 날씨인데도 사람과 차들이 제법 많았다.
“좋은 곳이네요.”
“응. 2번째 와보네. 식당가에 가보자 내려”
난 문을 열고 나왔다. 스포츠카 이긴 해도 요란스럽게 위로 열리는 건 아니지만 자세히 보니 운전석과 조수석만 제대로 된 좌석이고 뒷좌석은 좁고 의자도 불편하며 뒷문도 안 달려 있었다.
“얼마나 해요. 이차.”
운전석에서 밍크코트를 걸치고 나온 멋진 캐리어 우먼 그 자체인 그녀가 턱을 꼿꼿이 새우고 나를 한번 쳐다본 다음 말했다.
“음~~ 5억 이던가. 별로 그다지 안 좋은 거야.”
성공한 사업가 집안에서 자랐지만 그 아버지란 사람은 흔하디흔한 외제자동차도 몰지 않는 사치를 모르는 사람인 때문인지 나의 경재의식은 5억이나 주고 산 자동차가 안 좋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안 들 수 없었다.
“5억이 안 좋은 거라니. 좋은 건 얼마란 말인가요.”
“10배, 20배하는 건도 있다더라.”
순간 강하게 느껴지는 의문.
“근데 왜 교편이나 잡고 있어요. 호텔이나 경영하시지.”
“너 같은 애를 만나려고.”
저 말은 분명히 범죄다. 미성년자를 탐한다니 놀랍다.
“하지만 이제 슬슬 접어야 할 거 같다. 집에서 시집보내려고 엄마가 혈안이 되어 있거든. 도망가야지 안 되겠어.”
그녀의 표정이 웃고 있어서 일까 진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독신주의?”
나의 질문에 그녀는 답해주는 대신 손으로 차를 새워놓은 주차장에서 2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건물들을 지목하며 말했다.
“가자 따라와.”
식당들의 구성이 무척 다양했다. 난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없고 가리는 것도 없다고 말하며 선택을 그녀에게로 미뤘는데 소현이 먹자고 하는 건 홍어였다. 예전에 한번 먹어보곤 절대 안 먹을 음식 대열에 올려놓은 거라 난 종전의 입장을 변경해서 홍어는 절대 안 먹는다고 했고 그녀가 다음으로 선택한 음식은 오리고기였다.
식사시간 소현은 자기가 먹는 것 보다 내가 먹는 것에 많이 신경섰다. 그녀는 다 구워진 것을 쌈을 싸서 입에 넣어 주는 일 같은 것은 하지 않았지만 잘 구워진 것을 연신 내 앞에 올려주고 자기는 음식보다는 소주를 더 마셨다.
음식은 맛있었다. 하지만 소주를 자주 들이키는 그녀가 좀 걱정스러웠다. 난 안주도 넉넉하게 먹으라고 했지만 그녀는 다이어트 중이라 안 된단다. 도대체 어디에 뺄 살이 있다는 건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난 그녀가 어느 순간(4번 째 소주를 시켰을 때.)술을 마시는 것을 중단하는 것을 보며 잊었던 것을 떠올렸다. 차는 누가 몰지.“
“하하 대리운전 부르면 만사OK."
혀 구부러진 목소리로 말하며 과장스럽게 웃는 소현. 난 그 모습을 보며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녀가 술 먹은 탓인지 고1 올라가는 제자에게 술을 권하는 뉴스에 나올 것 같은 행동을 하자 그 생각을 일순 접었다.
“안 먹어요.”
“하~아~ 그러지 말고 한잔만 마셔봐. 술 언젠가 배워야 하잖아. 어른 앞에서 배워야지 재대로 배운다.”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어디에 어른이 있다는 걸까. 달나라에 용궁에 어디에 말인가. 알 수가 없었다.
“절대 안 먹어요.”
소현선생은 그 후 2잔을 더 먹고 일어나서 계산하고 2차 가자며 이 차가운 바닷바람이 부는 길을 걸었다. 하지만 너무 추워서 도무지 오랫동안 돌아다닐 수 없는 관계로 우리는 눈에 처음 들어온 전망이 좋은 카페로 들어갔다.
들어가서 난 일단 이모에게 연락해서 친구들이랑 작별인사 겸 해서 친구 집에서 놀고 있다고 연락을 했고 이모는 의외로 자고 올 거냐고 까지 물어봐 주었다. 난 잠시 망설이다 그렇다고 얘기 했고 연락처를 물어보는 이모에게 선생님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고 끊었다.
“뭐라고 하시던.”
“술은 절대 마시지 마. 이러시던데요.”
“하하하하하 나 완전 나쁜 사람이지”
“네 아주 나쁜 선생이죠.”
캐리와 내가 먹었던 건. 단순한 소화제였다. 수면제도 아니고 소환제. 아무리 믿었던 남자친구에게 차여서 정신이 없다고 해도 그런 가짜를 12만원이나 주고 산다니 정말이지 어이가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 게 가짜인 덕분에 우린 무사히 다시 삶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거지만. 황당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눈을 보러 잠시 나갔다 온 캐리와 나의 눈이 마주쳤을 때 처음 실행 한 것이 서로를 손가락 질 하며 배를 잡고 웃는 거였다.
그 웃기는 일 때문일까. 캐리는 죽을 맘이 다 달아났다고 했고 나도 누나의 문자 때문에 이젠 죽고 싶은 생각이 없어져 버린 탓에 다른 문제를 고민해야 했다. 우리가 관계를 가졌다는 것도 숨겨야 할 문제지만 그 문제는 숨길 수 있는 문제이고 더 큰 문제는 무단 외박을 했다는 것이다.
이건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캐리가 논다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남자라곤 덕판인지 케인인지 하는 가수하는 놈 빼고는 없었고 한 번도 외박은 하지 않았었다. 이모가 미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탓에 개방적이라고는 하지만 연락두절에 무단외박을 했으니 화가 단단히 나 있을 것이 뻔했다.
우린 옷을 챙겨 입고 어색하게 모텔을 나와서 눈 덮인 곳을 걸으며 대책을 강구해 보고 있었다.
“아! 몰라. 엄마가 나 죽이려고 하겠지 외박이라니 전대미문인데.”
“어젠 죽으려고 했으면서 뭔 걱정이람.”
“어제는 어제고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고 진이도 생각 좀 해봐”
“시나리오를 짜야한다는 뜻.”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흔해빠지긴 했지만 친구 집에서 어쩌고 자고 왔다. 들먹이기.”
캐리는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엄마가 다 전화 해 봤을 거야. 엄만 내 휴대폰 속에 있는 전화번호 한번 씩 자기 휴대폰에 복사하고 있거든.”
이모는 내 생각보다 외동딸인 캐리를 애지중지 키우고 있었다. 보기엔 방임하는 듯 했는데 나의 관찰력이 모자랐다.
“케인인지 뭔지 그 놈 때려주러 갔다고 할까.”
그녀의 눈동자에 일순간 별빛이 반짝였다.
“그래 그거 나쁘지 않겠네. 너의 세상을 원망하는 분풀이와 나를 차버린 그놈에 대한 분풀이를 합쳐서 지금 순회 콘서트 중인 그놈의 무대에 올라가서 패버렸다. 그런데 그 곳이 지방이고 눈이 너무 와서 돌아오지 못했다.”
“근데 진짜 순회 콘서트 중이야.”
“응. 내일 테마파크에 대형 홀에서도 한다고 하더라.”
“근데 증거가 없잖아.”
“대충 말하면 되. 엄마도 덕판이 놈이 나 차 버린 걸 알거든.”
“뭐라고 하시던. 너 차였다고 하니까. 이모가”
“납치해서 고추를 따고 추남으로 성형 해 버린 다음 쓰레기장에 버리겠다고 소리치던 걸.”
“하하하 설마.”
“진짜로.”
“하하하. 못 믿어.”
그녀는 하늘은 한번 본 후. 웃으며 진실로 답해주었다.
“히히 사실 그냥 잊어버리라고 하더라. 난 아직 어리고 얼마든지 좋은 남자 다시 만난다고.”
난 미소 지으며 그녀에게 이모 대신 다시 말했다.
“캐리는 멋진 여자잖아 그런 허접배기 노래도 못하는 가수 보다 좋은 남자 만날 거야.”
“진짜.”
“응”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 팔에 매달렸다. 사실 그녀가 나보다 키가 커서 이런 자세는 너무 부자연스러운 것이었고 그녀도 불편했는지 손만 잡는 걸로 변경했다.
그리고 이모 앞에 섰을 때 손잡고 같이 혼이 났다. 우린 미성년자 임에도 불구하고 술집에서 술을 먹다 잠이 들었고 눈이 너무 와서 차가 없는 관계로 얼어 죽을 까 봐서 그 호프에서 난로를 쬐며 밤을 새고 아침에 왔다고 이야기 했다.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캐리는 오는 길에 맥주를 하나 사서 우리 옷에 뿌리고 먹기 싫다는 나의 입에 조금 털어 넣고 자기도 한 모금 먹었다.
왜 이런 불량스런 핑계를 대었냐면 이모가 다른 생각하지 못하게(우리가 자살하러 갔다가 자 버렸다는 것을. 하지만 이모가 그렇게 연결해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단지 큰일이라 이모가 아는 것이 두려웠기에 이런 거다.)원천 봉쇄하기 위함이었고 그건 성공적이었다.
“자 너희들 앞으로 통근시간은 6시다. 절대 지킬 것. 누구 생일 파티 콘서트 같은 건 절대 핑계로 안 먹어준다.”
“넵”
"yes sir"
이마를 매만지는 캐리. 이모가 손을 들고 있었다.
“장난하지 마. 말썽장이 캐리언.”
“응”
이모가 다시 손을 들다. 캐리는 그 손이 다시 이마로 올까봐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넵!”
우린 이모의 특별 훈계가 끝난 후. 눈 치우기를 시작했다. 무릎까지 쌓인 눈을 동내 사람들과 같이 치우고 있으니 이 추운 날씨에도 땀이 흐르고 숨이 가빠졌다. 역시 2달가량을 은둔자로 지내고 나니 힘이 하나도 없었다.
이모는 나의 상태를 보고 있다가 그만 들어가라고 이야기 했고 난 괜찮다고 이야기 했지만. 병원에서 야근을 하고 돌아 왔는지 조취한 모습의 아저씨가 나를 거의 억지로 집으로 밀어 넣어 어쩔 수 없이 방으로 들어가야 했다.
“오 누나에게 연락이 왔구나. 전에도 느낀 거지만 너에겐 역시나 나 같은 돌팔이보단 누나가 백번 낮군.”
아저씨는 미소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내 머리를 쓰다듬고 내 귀를 한번 본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뭐야 너 연예계라도 진출할거야.”
“아뇨. 캐리가 멋대로.”
“녀석도 힘들어 하던데. 어제 다 풀었어.”
“대충 다 털어 버렸어요.”
아저씨는 자기 이마를 손으로 짚고 고개를 흔들며 괴로운 마음 털어 놨다.
“아. 정신과 의사가 있는 집안에 왜 이렇게 많은 신경쇠약 자가 있는지 내가 신경쇠약 걸리겠다. 의사면서 가까운 사람 못 도와준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넌 모를 거다.”
“기운 내세요. 전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아저씨의 상담효과가 누나를 통해서 발현되었는걸요.”
아저씨는 내 말에 미소 지어 주었다.
“음. 쉬어라. 난 눈 좀 치우고 올게.”
눈 치우기는 9시에 겨우 마무리 되었다. 난 이모네 식구들이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차를 끓여서 집안에 들어선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오! 센스 최고. 사랑 받겠는 걸.”
“고맙다.”
“하하 고마워 오빠.”
“성 마담. 최고야.”
다들 한마디 씩 하고 그들은 손을 씻으러 갔다. 줄을 서서 손을 씻고 한명 씩 나와서 식당으로 다시 한명 씩 들어갔다. 나도 그들을 따라갔고 오래감 만에 이모네 식구들과 아침식사를 시작했다. 음식은 이모네에서 자주 나오는 카레였다.
“또 카레야.”
캐리가 어제 죽으려 한 주제에 짜증스런 표정이 되어 반찬 투정 했고 이모가 화난 얼굴로 캐리의 어깨를 잡고 주걱을 들고 입을 열었다.
“캐리언 네가 오늘 반찬 투정할 입장이냐.”
“그래도 너무 하잖아 엄마가 카레 좋아 한다고 다들 카레 좋아 하란 법 있어. 물어봐 아저씨도 소라도 너무 많이 나온다고 할 걸.”
하지만 아저씨랑 소라는 이모 편이었다.
“아냐 언니 난 카레 좋은데.”
“난 수희씨가 만들어 주는 건 뭐든지 맛있어.”
왼지 나도 한마디 꺼내야 할 것 같았다.
“읍~!”
하지만 캐리가 네가 한마디 할 거라고 생각한 것인지 내 입을 먼저 막아 버렸다.
“진이 까지 그럴래.”
“봐라 다들 불만 없잖아. 너만 어떻게 하면 되겠네.”
캐리는 심통 난 표정으로 입을 삐죽 내 밀었다.
“알았어. 내가 내일 맛있는 거 만든다. 시간 없다고 매일 카레! 카레! 카레! 도우미 아줌마를 좀 부르던지. 돈 많이 벌어서 어디에 쓰는지. 원.”
“오늘 따라 왼 심통이야. 동생들도 있는데.”
일단 나도 캐리 보다 13개월 늦게 태어났으니 동생에 들어서 ‘들’ 인 것이다.
“몰라.”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숙이는 캐리. 그녀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진짜 어제 오늘 캐리의 또 다른 면을 많이 본다.
“왜 물어. 바보같이.”
이모는 캐리의 고개를 들어 올리고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손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자 캐리가 일어나며 이모에게 꼭 안겨 버렸다.
“다 커 가지고 왜 그래. 엄마보다 큰 주제에. 애 같이.”
이모는 캐리의 등을 토닥거려 주며 따듯하게 안아주었고 캐리는 이모의 품에 절대 안 떨어지겠다는 생각인지 꼭 안고 ‘엄마’라고 작게 속삭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동조한 것인지 한줄기 눈물이 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나에겐 엄마 같기도 했던 누나가 너무 보고 싶었고 나에겐 왜 엄마가 없나하는 서러운 생각도 같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 인생에 있어 3번째의 자살 소동이 있은 후. 난 빠르게 예전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하늘이와 다른 친구들도 만나고 가벼운 운동도 다시 시작했다. 이번엔 헬스장을 다니는데 우연히 내가 다니게 된 헬스장에 창세랑 지석이가 다니고 있어서 운동을 하는 둥 마는 둥 하기 일쑤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캐리는 전처럼 장난도 치고 웃고 떠드는 모습으로 생활한다. 그녀와 섹스를 한 직후엔 그 생각이 자주 나서 곤란 했지만 몇 주 지나자 우리 사이에 그런 일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예전 모습을 찾아버렸다. 캐리도 그저 그 일을 추억으로만 생각하는지 한번 씩 둘만 있을 때 장난으로 그 이야기를 들먹일 뿐 나를 남자로 보지 않는 것 같았다.
또 하나 캐리는 요즘 덕판에게 요상한 복수방법을 찾고 있었다. 뭐 자기도 연예계 진출해서 공개 적으로 창피를 준다나. 노래는 그럭저럭 이고 춤에 대한 센스 게이지가 절대적인 O을 가리키는 그녀의 예능으론 아이돌 가수 되기는 힘들다(확실하지는 않지만.)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견해다. 그래서 난 ‘잘못 했다가는 요즘 최고의 주가를 올리는 ARTAN의 빠순이들에게 봉변을 당할 수 있다’고 요즘 말리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누나는 문자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다른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고 발신번호로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그 전화는 받는 사람은 도무지 어느 나라 말인지 알 수 없는 말로 이야기 하는 통에 나 스스로는 당황할 뿐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영어와 불어까지 완벽히 할 줄 안다고 자부 하는 이모에게 전화를 걸어 보게 부탁했다.
전화를 걸어본 이모는.
“독일 뮌헨이네. 이야기 해 보니까. 이 여자가 자기는 간호사 인데 며칠 전에 병원에서 예쁘게 생긴 여자애. 이 여자는 누나가 동양인인지 서양인인지 모르겠다고 하더라. 그 여자애가 아주 잠깐만 휴대폰 쓰자고 해서 빌려줬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가희 휴대폰이 아니네.”
누나가 간 곳이 독일 이란 것을 알았지만 더 이상 정보가 없었다. 난 아버지에게 물어 볼까 하다 캐리에게 한마디를 듣고 그만 두었다.
“언니가 왜 네게서 떠났겠냐. 그만 찾아 7,8년 후쯤 다시 온다며. 그 때 다시 만나. 단 진짜 남매로서 말이지만. 너만 언니를 소중하게 생각한 것 아냐. 언니도 널 소중하게 대했다고 난 생각해 떨어지지 않으려는 널 때어놓는 게 언니에게도 고통 이었을 거라고 생각안하니. 난 무척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 말도 없이 떠나 버렸지. 작별하는 것이 힘들어서. 그러니까. 너도 이제 언니를 생각해서 라도 이제 그만 찾아. 그리고 너만 목매고 기다리는 하늘이의 손 좀 잡아줘라.”
캐리의 일장연설에 난 고개를 끄덕였지만 ‘하늘이의 손 좀 잡아줘라’는 아직 실행하지 않았다. 나의 마음속엔 누나가 있는데 하늘이에게 사귀자고 하는 건 꺼려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이 꼭 필요한 게 아니라고 말하는 선생님 쪽은 왼지 부답 없게 느껴지고 있었다.
3월 중학교 졸업식. 누나의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져 슬슬했지만 내 그런 마음을 위로하려는 건지 이모네 식구들이 모두 찾아왔다.
이모는 식구들이 준비한 선물이라며 선물 꾸러미를 내게 건넸고 난 무려 다섯 개나 되는 박스들을 하나씩 풀어보며 놀라고 기뻐하기도 하고 웃음 짓기도 하고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이모는 고급스러운 가죽지갑과 전자사전. 아저씨는 그다지 쓰지도 않을 것 같은 비싸 보이는 만년필. 캐리는 돈이 없다고 허접하게 프린팅 한 ‘뽀뽀 1회권’ 5장. 이제 중학교에 진학해야 하는 소라는 손수 짠 털모자 그리고 누나가 보내왔다는 멋져 보이는 시계가 들어 있었다.
누나가 보내왔다는 시계를 차고 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버렸다. 그러자 캐리가 예의 웃기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뭐야. 또 우냐. 이젠 고등학생이잖아. 털이 수북해지고 걸걸한 목소리에 여자나 미친 듯이 찾아 해매는 하이에나 같은 고등학생이 울어서야 쓰겠냐. 웃어야지.”
“언니 그건 30대 아저씨 아냐.”
소라의 말에 36세의 아저씨가 반응했다.
“절대 아냐.”
“가희 언니를 젤 좋아하는 양반. 다른 것도 좀 착용해 보시지. 사진 찍게.”
“으. 응”
난 캐리의 말에 눈물을 손으로 닦아버리고 모자를 쓰고 지갑과 케이스체로 만년필을 잘 보이게 들었다. 그러자 아저씨가 카메라를 꺼내서 한방 찍어 주었다.
“야. 내건. 왜 내건 빼먹어.”
가치 없는 것에 대한 무의식의 작용일까 나도 모르게 아무 곳에나 놔둬서 바람에 날아가 버리고 한 장만 남아 있는 ‘뽀뽀 1회권’을 캐리가 씩씩거리며 지갑을 든 손에 끼어 넣었다.
“한 장 더 아저씨.”
“응 그래.”
플래시 터졌다. 난 ‘뽀뽀 1회권’을 지갑에 넣고 그 지갑을 호주머니에 넣고 만년필과 전자사전은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그들에게 뒤늦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전했다.
“다들 고맙습니다. 잘 사용할게요.”
이모는 내 어깨를 끌어안은 후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아저씨는 내 볼을 가볍게 쓰다듬고 소라는 내 손을 잡았다. 하지만 캐리는 푸념을 늘어놓았다.
“너. 나한테 ‘뽀뽀 1회권’ 들고 오는 놈 있으면 죽을 줄 알아.”
“왜? 이름이라도 적어 놨어.”
“그래 ‘진 캐리언’이 당신에게 드리는 선물 이라고 적혀 있다. 창피하게.”
“헤헤헤”
“웃음이 나와.”
이번엔 캐리를 제외하고 이모네 식구들이 전원 웃었다. 캐리의 얼굴이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캐리누나도 안녕. 진아.”
지석이랑 창세가 이모에게 안겨 있는 나에게 말을 걸며 다가왔다. 아쉽게도 이 녀석들은 같은 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다.
“어. 지석, 창세.”
창세는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난 이모를 한번 처다 봐서 어깨에서 손을 치우게 만들곤 나도 손을 내 밀어 악수를 나누었다. 녀석이랑은 그렇게 까지 친하게 진했다고 할 수 없었지만 남자친구가 없는 나에겐 처음으로 생긴 동성친구란 생각이 강하게 남아있어 무척 아쉽게 느껴졌다.
“아쉽네.”
“그렇지.”
난 미소를 지었다. 창세는 나의 웃음에 이를 보이며 웃고는 맞잡은 손을 잡아당겨 나를 끌어 당겼다. 그리고 내 귀에 속삭였다.
“너에게 하늘이는 양보한다. 너 그 연상녀랑 헤어져서 집에 틀어박혔던 거라며. 이제 잘 해봐. 난 포기다. 일편단심녀는 흔한 게 아니니 꼭 잡아. 그리고 울리지 마라 울렸다간 알지.”
창세는 마지막 말을 하고 내 배를 때렸다. 난 콜록콜록 거렸고 모두들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난 그들에게 손을 들어 괜찮다는 의사를 전달한 다음 대답했다.
“알았어.”
“그래.”
창세는 나에게 손을 흔들고 어른들에겐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지석이 하고 우리 곁을 떠가갔다. 그리고 자리 바꾸기를 하듯이 이번엔 하늘이를 중심으로 한 4명의 여자들이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응~ 그래. 다들 오래만이네.”
이모는 내 병문안 왔던 이 4명을 다 기억하는지 하나씩 돌아가며 졸업을 축하한다며 인사를 나누었다.
창세와 지석이랑 다르게 이 4명은 나와 같이 고등부에 진학하게 되었다. 반이 갈릴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일단 같은 학교니 남자애들 같은 감정은 일어나지 않았고 우리들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이 후 이모와 아저씨는 병원으로 캐리는 친구에게 소라는 나하고 같이 집에 가려고 하다가 캐리에게 잡혀갔다. 별 수 없이 나 혼자 집으로 가기 위해 캐비닛을 정리해서 버릴 것은 버리고 후배에게 물려줄 건 교탁위에 올려놓고 가져갈 건 가방에 집어넣고 정들었던 교실을 등지고 천천히 걸어서 아직도 떠들썩한 운동장을 경유해 교문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버스정류소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길을 가다가 같은 반 아이들의 만나 작별인사를 하기도 하고 서로 연락처를 교환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러다 차를 몰고 가는 소현선생을 보았다.
그녀는 도무지 선생의 월급으로는 어림도 없을 것 같은 붉은색 스포츠카를 운전하고 있었는데 선글라스, 어깨 까지 내려온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 반짝이는 귀걸이. 하트모양의 펜던트가 있는 가는 금 목걸이. 하얀색 바탕에 은색 선과 무늬가 있는 정장을 착용한 모습이 차와 어울려 부잣집 아가씨(호텔 갑부)란 그녀의 신분을 잘 나타내고 있었다.
일부 그녀를 알아본 아이들이 웅성웅성 되고 나에게도 몇 명인가 방금 그녀의 모습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오는 아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탈 버스가 때마침 왔고 난 그 모습을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하지만 내가 버스에서 내려 병원 앞에 섰을 때. 그 차가 나에게 다가왔다.
“선생님? 안녕안세요.”
“졸업 축하해.”
“감사합니다.”
그녀는 고개를 약간 숙여 자기를 처다 보는 나를 매력적인 미소로 반기며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선생님 차인가요.”
난 차 안의 화려한 장식들 보고 외관의 미려한 선들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나의 질문이 뭐 잘못되었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마를 한번 짓고 장식처럼 머리 위에 걸어둔 선글라스를 벗으며 입을 열었다.
“내 차이긴 하지만 요즘 남동생이 쓰고 있어. 그 녀석 지금 쯤 이거 없어 졌다고 난리 났을 건데. 걱정이네.”
“연락하면 되잖아요.”
“그게 어제 싸웠거든. 모르겠다. 내 명의로 된 분명한 내 찬데 알게 뭐람.”
난 그 말들을 듣고 소현선생의 가족 관계가 원활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분이랑 사이가 안 좋은가 봐요.”
“최악이지. 원수가 따로 없다니까.”
“하하 설마요.”
“진짜야. 너희 남매랑 완전 딴판이야. 그 기준으로 생각 하지 마.”
난 잠깐 누나랑 있었던 추억들을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그 미소를 보고 소현선생이 좋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바로 그 표정이야. 사진 찍고 싶어죽겠네. ”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선생 중증이다.
“사진 찍고 싶은데 안 될까!”
난 고개를 저었다. 이런 한심한 일에 동조해 주고 싶지 않았다.
“에이 치사하네.”
그렇게 말하며 혀를 삐죽 네미는 소현선생. 나에게 고백을 해버린 전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진이 졸업했으니 이제 선생님은 잊어버리겠지.”
정당한 문장을 찾지 못한 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우리 드라이브나 할까.”
난 어떻게 대답할까 망서려야했다. 그녀의 매력적인 모습을 보며 느꼈던 욕망과 만일 있을지도 모르는 복잡한 문제들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서 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전에도 이야기 했잖아 너에겐 책임지게 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말하며 선생이 문을 열어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한다.
“가자 정 그러면 사제 간의 작별인사라고 생각해.”
역시 난 이런 일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결단력이 없나보다. 선생이 차에서 나와 차로 밀어 넣을 때 까지 난 가만이 있었다.
“이거 아쉬워해야 하는 건지 기뻐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 진이는 그 성격 고치면 완전 바람둥이 될 것 같거든.”
소현선생이 나에게 부담스럽게 접근해서 안전벨트를 채워주며 한 말이다. 그녀는 벨트를 채워준 후. 스포츠카를 능숙한 솜씨로 몰아서 도로 위를 죽 달려 나갔다.
“운전 잘 하네요.”
“너도 해 볼래. 별로 안 어려워.”
“사양할래요. 그냥 저 아는 사람이랑 비교돼서.”
그렇게 말하며 변혁이 아저씨를 생각했다.
“우변혁 이군.”
“변혁이 아저씨를 아세요.”
“그럼. 고등학교 선배야. 그냥 안면 있는 정도의 사이였지만. 워낙 유명했거든.”
“예~”
난 변혁이 아저씨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기에 호기심이 들었다.
“왜 유명했어요.”
“말로 타인에게 스트레스 쌓이게 만드는 제주가 탁월했어. 그러니까 정신과의사도 해 먹는 거겠지. 헤헤 이건 농담이고 사귀는 여자가 일본인 이었는데. 학교까지 찾아온 사건이 있었거든.”
“예?”
“그 여자 이름이 뭐라더라. 모르겠다. 여자가 학교에 찾아와서 선배에게 다짜고짜 임신 했으니 결혼하자는 것 있지. 그 때 학교가 발칵 뒤집어 졌어. 지금도 멋지게 생겼지만 그 땐 정말 인기절정. 우등생이자 바람둥이였거든. 선생님도 여학생들도 완전히 패닉에 빠져선 캐묻기 바빴지.”
“그래서요.”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 여자 말은 거짓말 이었더라. 임신은 고사하고 성관계도 안한 거 있지. 그 여자 순전히 인터넷 채팅으로 만난 선배를 좋아해서 억지를 부린 거였어. 근데 웃긴 건 선배가 그 여자에게 마음을 줘버린 거야. 결국 결혼했다고 하던데. 물론 고교졸업 후 지만.”
소현선생이 알고 있는 이야기는 너무 단편적이라 그저 막연하게만 느껴져서 현실감이 없었다.
“그 후 이야기는 나도 잘 몰라. 우린 말 그대로 앞면만 있는 사이니까.”
“그 일본 여자. 눈이 유난히 크지 않던가요.”
“응. 그랬어. 얼굴이 작고 눈이 큰 여자란 기억뿐이거든. 봤어?”
“아뇨. 그 분 딸을 매일 보고 있어서요. 유난히 눈이 예쁘거든요.”
“그랬구나. 딸이 하나 있구나.”
선생님과의 대화는 이것을 정점으로 일단 끝을 냈고 그 다음부터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녀는 고속도로를 타고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쏜살같이 스포츠카를 몰고 나갔으며 난 집에 늦게 가야하는 건 아닌가 걱정스러워 했다.
하지만 그 걱정도 잠시 뿐 난 쏜살같이 지나가는 풍경을 보다 잠이 들었다. 그리고 깨어났을 땐. 정지해 있는 차의 창을 통해 노을에 물들어 버린 구름이 먼저 보이고 태양 다음으로 바다의 수평선이 눈에 들어왔다.
“예쁘지.”
난 그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내 뿜는 자연의 신기함을 넋을 놓고 바라보며 차분한 목소리로 혼잣말 하듯이 이야기 대답했다.
“예. 혼자보기 아까울 정도로요.”
“응? 나도 있잖아. 아! 보여주고 싶은 사람 말이구나.”
그녀의 목소리엔 서운함이 묻어났지만 난 개의치 않았다. 나의 마음속 나라에 초대하고 싶은 이는 오직 누나뿐이니까.
“진아 배고프지 않아 뭐 먹을까.”
“그럴까요.”
그렇게 말하고 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주변은 바다가 보이는 암벽을 중심으로 한 관광단지로 일반적인 민가는 소수이고 모텔과 식당 테이크아웃 음식점들 그리고 돈 많은 사람들의 별장으로 보이는 멋진 집들이 전부로 추운 날씨인데도 사람과 차들이 제법 많았다.
“좋은 곳이네요.”
“응. 2번째 와보네. 식당가에 가보자 내려”
난 문을 열고 나왔다. 스포츠카 이긴 해도 요란스럽게 위로 열리는 건 아니지만 자세히 보니 운전석과 조수석만 제대로 된 좌석이고 뒷좌석은 좁고 의자도 불편하며 뒷문도 안 달려 있었다.
“얼마나 해요. 이차.”
운전석에서 밍크코트를 걸치고 나온 멋진 캐리어 우먼 그 자체인 그녀가 턱을 꼿꼿이 새우고 나를 한번 쳐다본 다음 말했다.
“음~~ 5억 이던가. 별로 그다지 안 좋은 거야.”
성공한 사업가 집안에서 자랐지만 그 아버지란 사람은 흔하디흔한 외제자동차도 몰지 않는 사치를 모르는 사람인 때문인지 나의 경재의식은 5억이나 주고 산 자동차가 안 좋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안 들 수 없었다.
“5억이 안 좋은 거라니. 좋은 건 얼마란 말인가요.”
“10배, 20배하는 건도 있다더라.”
순간 강하게 느껴지는 의문.
“근데 왜 교편이나 잡고 있어요. 호텔이나 경영하시지.”
“너 같은 애를 만나려고.”
저 말은 분명히 범죄다. 미성년자를 탐한다니 놀랍다.
“하지만 이제 슬슬 접어야 할 거 같다. 집에서 시집보내려고 엄마가 혈안이 되어 있거든. 도망가야지 안 되겠어.”
그녀의 표정이 웃고 있어서 일까 진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독신주의?”
나의 질문에 그녀는 답해주는 대신 손으로 차를 새워놓은 주차장에서 2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건물들을 지목하며 말했다.
“가자 따라와.”
식당들의 구성이 무척 다양했다. 난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없고 가리는 것도 없다고 말하며 선택을 그녀에게로 미뤘는데 소현이 먹자고 하는 건 홍어였다. 예전에 한번 먹어보곤 절대 안 먹을 음식 대열에 올려놓은 거라 난 종전의 입장을 변경해서 홍어는 절대 안 먹는다고 했고 그녀가 다음으로 선택한 음식은 오리고기였다.
식사시간 소현은 자기가 먹는 것 보다 내가 먹는 것에 많이 신경섰다. 그녀는 다 구워진 것을 쌈을 싸서 입에 넣어 주는 일 같은 것은 하지 않았지만 잘 구워진 것을 연신 내 앞에 올려주고 자기는 음식보다는 소주를 더 마셨다.
음식은 맛있었다. 하지만 소주를 자주 들이키는 그녀가 좀 걱정스러웠다. 난 안주도 넉넉하게 먹으라고 했지만 그녀는 다이어트 중이라 안 된단다. 도대체 어디에 뺄 살이 있다는 건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난 그녀가 어느 순간(4번 째 소주를 시켰을 때.)술을 마시는 것을 중단하는 것을 보며 잊었던 것을 떠올렸다. 차는 누가 몰지.“
“하하 대리운전 부르면 만사OK."
혀 구부러진 목소리로 말하며 과장스럽게 웃는 소현. 난 그 모습을 보며 귀엽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녀가 술 먹은 탓인지 고1 올라가는 제자에게 술을 권하는 뉴스에 나올 것 같은 행동을 하자 그 생각을 일순 접었다.
“안 먹어요.”
“하~아~ 그러지 말고 한잔만 마셔봐. 술 언젠가 배워야 하잖아. 어른 앞에서 배워야지 재대로 배운다.”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어디에 어른이 있다는 걸까. 달나라에 용궁에 어디에 말인가. 알 수가 없었다.
“절대 안 먹어요.”
소현선생은 그 후 2잔을 더 먹고 일어나서 계산하고 2차 가자며 이 차가운 바닷바람이 부는 길을 걸었다. 하지만 너무 추워서 도무지 오랫동안 돌아다닐 수 없는 관계로 우리는 눈에 처음 들어온 전망이 좋은 카페로 들어갔다.
들어가서 난 일단 이모에게 연락해서 친구들이랑 작별인사 겸 해서 친구 집에서 놀고 있다고 연락을 했고 이모는 의외로 자고 올 거냐고 까지 물어봐 주었다. 난 잠시 망설이다 그렇다고 얘기 했고 연락처를 물어보는 이모에게 선생님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고 끊었다.
“뭐라고 하시던.”
“술은 절대 마시지 마. 이러시던데요.”
“하하하하하 나 완전 나쁜 사람이지”
“네 아주 나쁜 선생이죠.”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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