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대여?
소라는 우리를 보고 한참동안 멍하게 보고 있다가 진짜 아플 것 같은 자세로 쓰러져 버렸다. 난 놀라서 그녀에게 달려가서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쉬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소라를 보고 있는 하늘이에게 말했다.
“병원엔 가봐야 갰지만 일단 괜찮은 것 같아. 옷 챙겨 입어 난 이모에게 말하고 올게.”
“뭐라고 말 하려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기직전 같은 목소리로 말하는 하늘이.
“뭐 일단 그냥 기절 했다고만 하고 나중에 소라 깨어나면 모른 척 해달라고 하자.”
하지만 내 말을 듣고 아이를 업고 내려온 이모는 베개를 대고 바닥에 누워있는 소라를 바라보다 전말을 알겠다는 투로 전혀 웃음기 없는 진지한 어조로 이야기 하고 있었다.
“걱정 마. 애들이 봐서도 해서도 안 돼는 망상 때문이야. 그냥 순간적인 쇼크라. 금방 일어날 걸.”
그 ‘망상’이란 것 섹스를 의미하는 것일까. 다 알고 있는 건지 어떤 건지 알 수 없는 말이라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모는 이번엔 좀 더 직설에 가까운 단어를 사용했다.
“있잖아. 진아. 콘돔. 착상저항제가 뭐 하는 건지 알지.”
“죄송해요.”
하늘이가 고개를 푹 숙여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이모의 생각을 인정해 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여자 혼자 혼나게 둘 수 없는 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모 저 때문이에요.”
“진아 사실 이런 건. 어른 입장에서도 참 난감하지 않을 수 없어. 미국에서 살았던 나도 애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야 할 때는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거든.”
“네”
“그렇지만 말을 안 할 수가 없네. 부주의하게 문도 안 잠그고 있었다니. 하늘이가 얼마나 창피하겠어. 다 네 녀석 실수다.”
“네.”
“하지만 행위는 인정해. 사실 난 캐리 친부랑 13살에 처음 해 봤거든.”
“에!?!?!?”
“정말요?!??!??”
그 나이는 지금 소라랑 같은 나이다. 내가 작년부터 했고 창세가 14세부터 해봤다니까.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엔 가장 빠른 첫 경험자였다.
“하지만. 나를 봐도 알겠지만 미혼모, 미혼부 너무 힘들어 진이는 몰라도 하늘이는 미혼모가 되었다가는 큰일 날 걸. 보통은 인생 망쳐버려. 특히 우리나라는 그런 쪽으로 보수적이라 부모님이 낙태시키려고 눈에 불을 켤 걸. 나도 아버지. 네 외할아버지가 미치듯이 낙태하라고 했어.”
그 이야기는 나도 알고 있다. 할아버지가 이모 임신 사실과 아이 아버지가 도망갔다는 사실을 알고 낙태시키려고 애 썼고 이모도 처음엔 낙태하려다가 차마 할 수가 없어서 낳으려고 시간을 끌어서 법적인 선을 넘었는데 이번에 할아버지가 3개월이 넘어도 낙태할 수 있는 나라로 가서 시술하라고 스트레스를 줘서 집을 나와 버렸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절대 임신 걱정되는 날에는 콘돔사용하고 없으면 참아! 절대 하지 마. 낙태란 거. 요즘 가볍게 생각하는 경양이 있는데. 어떻게 낙태하는지 알고 있다면 못할 걸.”
이모는 하늘이에게 다가가서 양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늘아. 인공낙태를 어떻게 하냐면 진공청소기 같은 걸 태내에 넣어서 아기를 빨아드리는 거야 아기는 뭉개져서 고기 덩어리가 되어 버린 상태로 의료폐기물로 버려져. 인간이 할 짓이 아냐.”
이모의 말에 놀란 하늘이는 이모가 안고 있는 영우를 한번 바라보고 끔찍한 상상을 했었는지 무척 거북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한번 처다 보고 다시 이모를 바라 본 다음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조심할게요.”
“일단 하늘이는 됐고. 사실 말이야. 임신은 남자가 문제거든. 남자란 존재의 성욕은 여자의 그것과는 상당히 틀려 특히 진이 나이 때는 더 심해.”
이모는 그렇게 말하고 나를 돌아봤다. 난 당황스런 표정으로 눈을 마주치지 못했고 이모는 나의 어깨를 한손으로 잡았다 놓으며 말을 이었다.
“진아 절대다 알았지.”
나도 하늘이와 같은 상상을 한 덕분인지 임신이란 것에 대한 무게감에 짓눌려 있었다.
“조심할게요. 이모.”
이모는 내 말을 듣고 진지한 표정을 거두고 활짝 미소 지어 주었다. 하지만 누워있는 소라를 한번 보더니 이네 걱정스런 표정을 하고 대책이 없는지 고개를 저치며 하면서 말했다.
“그 쪽 이야기는 이것으로 마무리 하고. 소라에게 뭐라고 해야 하지. 걱정이네. 너희들 완전히 하다가 들킨 거니.”
도무지 대답을 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난 말을 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었고 하늘이는 귀까지 빨간 얼굴을 푹 숙이고 말을 잊지 못했다. 이모는 그런 우리들을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잠시 보다가 말했다.
“녀석들 순진 하기는. 내가 알아서 할게. 하늘아 미안 하지만 오늘은 그만 집에 가거라.”
“네.”
하늘이가 여전히 붉은 얼굴을 숙인 상태로 대답 했다.
“진이는 하늘이 데리고 엉뚱한 곳으로 가지 말고 정확하게 집으로 에스코트 해주고 와. 알았지.”
“예.”
하늘이는 가방을 챙겨 들고 이모에게 고개를 푹 숙여서 입을 열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이모님.”
“응 그래. 조심해서 가. 하늘아.”
“예”
“이모 갔다 올게요.”
“응 그래 엉뚱한 곳으로 새지 말고 꼭 집에 데려다 주고 와.”
“예.”
성격은 캐리랑 다를 것이 없지만 확실하게 이모는 어른이었다. 다그칠 건 다그치고 부드럽게 안아줄 건 안아주는 근사한 어머니 상이었다. 하늘이는 그런 이모가 왼지 마음에 들었는지 에스코트 중인 나에게 이모가 자기 엄마였으면 좋겠다는 친모가 들으면 경악해서 뒤로 넘어갈 것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우리 엄마도 진이 이모 같았으면 좋겠다. 울 엄만 귀찮은 아이가 생기면 가차 없이 낙태해 버릴 사람이거든.”
난 그녀의 생각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설마. 원하지 않았어도 생명인데.”
“아니 실제로 그랬어. 아버지 하고 결혼 전 자식은 하나로 정해 놨다고. 동생 생긴다고 좋아하던 날 무시하고 그냥 낙태해 버리던데.”
이런 건 동조하면 안 된다는 내 마음의 속삭임이 이번엔 정지해 버렸다.
“아~ 진짜 너무 하셨네! 하늘이 마음 아팠겠다.”
“응~”
우울한 하늘이의 대답. 그 감정에 동조해 낮게 가라앉는 나의 마음 그리고 포옹.
“왜?! 그래.”
“가만 있어봐. 꼭 안아주고 싶어서.”
나는 그녀를 품에 꼭 안아서 등을 토닥여 주었고 어쩔 줄 몰라 하던 하늘이도 자기와 별로 다르지 않는 덩치와 키를 가진 나를 받아드려 편안하게 나에게 기대왔다.
그런 자세로 5분쯤 흘렀을까. 서로에게 전해준 체온의 따듯함에 기분이 좋아진 우린 포옹을 풀고 양손을 마주 잡아서 서로를 웃으며 바라봤다.
“키스하고 싶어.”
“나도.”
우린 마주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로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내밀어 가볍게 입술을 겸쳤다 떨어지고 다시 혀를 내밀어 서로 휘감아 서로의 타액을 빨아 마시고 떨어졌다.
“읍~ 음~음~ 읍~ 하~”
“쩝~ 읍~ 읍~ 하~”
그리고 우린 붉어진 얼굴로 이마를 맞대고 웃음 지었다. 이 순간만은 나도 하늘이도 다른 건 생각나지 않았다. 오직 자신 앞에 있는 상대만 생각날 뿐이었다.
키스 후. 우린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 우리를 사람들이 한번 씩 뒤 돌아보기도 하고 소곤소곤 되기도 했지만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고 수줍음 많은 하늘이도 왼지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100평이라는 하늘이가 사는 아파트 앞에 도착 했을 때. 우리의 즐거운 침묵을 뚫고 어떤 아줌마가 끼어들었다.
“하늘아. 친구니.”
순간 하늘의 표정이 변했다. 이성친구와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들켰다는 사실에 그녀는 보는 사람도 당황할 정도로 동요해서 허겁지겁 손을 놓고 뭐라고 변명도 못하고 얼굴을 숙였다.
“아~. 그게.”
하지만 하늘의 어머니로 보이는 안경을 낀 마른체형의 깐깐해 보이는 캐리어우먼은 부녀지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침착하게 나에게 물어왔고.
“못 보던 친구구나. 같은 반이니.”
하늘이에 비해선 침착했지만 동요하고 있는 난 일단 고개를 숙여 뒤 늦은 인사를 하고 흘러내리려는 안경을 똑바로 쓰며 입을 열었다.
“네 같은 반이고 ‘성 진’이라고 합니다. 어머니.”
내 말을 정확하게는 내 목소리를 듣고 두 눈을 깜빡이는 그녀는 하늘이를 한번 처다 보고 나를 다시 돌아보며 요즘 내가 자주 듣는 질문을 해왔다.
“변성기가 안온 남자아이 목소리 같은데. 어느 쪽이야.”
“남자인데요.”
그렇게 말하고 잠깐 난 후회했다. 손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일 뿐 ‘손잡고 있었다.’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전에 통화했던 애가 너구나.”
“그때는 말만하고 안 찾아봬서 죄송했습니다.”
“아냐. 그건 그렇고 남자애인데 예쁘게 생겼네. 실례인가.”
“아뇨.”
하늘의 어머니는 웃었다. 전잔 빼는 웃음이라고 할까 그런 절제된 감정표현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나에게서 얻어야 하는 정보는 잊어버리지 않았다.
“하늘이랑 교제중이니.”
“예. 얼마 전 부터.”
“부모님은 뭐 하셔.”
나에겐 상당히 부담스러운 질문이며 보통 학부모가 자식의 이성친구에게 절대 물어보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에 난 잠깐 말문이 막혔다가 하늘이가 이 상황에 기분나빠하는 표정을 짓고 모친을 쳐다봐서 그냥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어릴 적에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IT기업 사장이세요.”
어머니는 사실이고 아버지 쪽은 복잡한 사실들 속에서 확실하게 세상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것만 집어내서 말해서 그런지 그녀의 표정은 한결 부드러워 졌다.
“회사 이름이.”
“네 그러니까.”
거짓말의 연속이 부담스러웠다. 성필성 즉 내가 아버지라고 생각하며 알고 있던 사람이 몇 개월 전에 나를 호적에서 파버렸다는 것을 그녀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거짓말이 계속 이어지는 것도 싫어 말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하늘이는 그런 나의 상태를 알고는 짜증이 약간 묻어난 음성으로 말했다.
“엄마 그만 하세요. 진이 집에 가야죠.”
“하늘아 내가 네 남자친구 잡아먹기라도 하니. 왜 짜증을 내고 그래.”
하늘이는 길게 한숨을 쉬며 먼 곳을 바라보았고 그런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S.P.S Soft 인데요.”
“오! 그래. 아버지가 자랑스럽겠구나.”
“네.”
“근데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혹시 어머니가 연예인이시니.”
“진자 수자 진자. 진수진 이라고.”
내가 어머니를 이름을 대는 순간 그녀의 표정이 몹시 어두워졌고 나를 위로 한다는 나오는 목소리도 아까 그것과는 달랐다.
“미안하다. 어머니에 대해서 물어서.”
“어머니를 아세요.”
“어쩐지. 너무 많이 닮았더라. 아~ 미안~”
그녀는 내 모습 속에서 내 어머니를 찾아서 의문을 느끼고 있었고 그 의문이 풀려서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고 잠시 후 자신이 혼잣말 했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손을 들어 약간 웃어 보인 후. 대답을 해 주었다.
“대학 2년 선배였지. 내 어머니가 연예계 일로 바빠서 그다지 친하지 못했지만. 가끔 이야기를 주고받았었는데. 진짜 팔방미인이라 인기 많았는데 너무 일찍 가 버려서 마음 아팠단다.”
하늘이 어머니의 지금 표정은 진심으로 보였다. 난 나의 어머니를 아는 사람을 만난 것을 기뻐하며 고개를 숙이고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아냐. 어서 가 보거라.”
“네. 안녕히 계세요. 하늘아 나 가.”
“응 그래. 조심해서. 가.”
“응”
하늘이와 난 즐거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고 곧 서로 다른 방향을 보며 걸어갔다. 하지만 아쉬운 생각이 들어서 다시 고개를 돌렸고 그녀와 다시 눈이 마주쳐 다시 손을 흔들며 멀어져 갔다.
내가 이모네 현관에 들어섰을 때.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나고 있었고 식기를 나르는 소리 그리고 유독 대화가 많은 이 집 식구들의 재잘거림이 공간을 매우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하늘이 집까지 에스코트 하고 온 거지. 으슥한 곳에서 찐한 거 하고 왔냐!. 히히히히” 예의 그 웃음을 보이며 뚝배기를 나르는 캐리.
“흥!” 기절 했던 녀석인데 멀쩡한 상태로 눈을 흘기고 고개를 돌리는 소라.
“수희씨 진이 입원 했을 때 매일 오던 그 아이가 하늘이 맞죠.”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서 하나 씩 식탁에 올려놓는 이모부.
“네. 맞아요.” 프라이팬으로 김치 부침개를 만들어 넓은 접시에 담는 이모.
“예쁜 아이인데. 진이는 좋겠구나.”
이 말에 여러 반응이 나온다.
불쾌한 표정으로 입 모양만 ‘그 여자 변태’라고 하는 소라.
“진이에겐 아까워. 내가 빼앗아 버리고 싶어진다니까.” 즐겁게 수저를 놓는 캐리.
“앞으로 조카며느리가 될지는 모르지만. 사이좋게 오랫동안 잘 지냈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말이다.” 아무래도 몇 시간 전에 이모가 했던 말을 다시 하려는 것 같은 이모부.
“그만해요. 우리 진이 그런 분별은 있으니까.” 식사준비가 다 끝나서 앞치마를 풀어놓고 자리에 앉는 이모.
“그럼. 잘 먹겠습니다.”
이모부가 먼저 말하고. 나를 포함한 나머지 4명이 즐거운 표정으로 재창했다.
“잘 먹겠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이모부랑 내가 설거지. 그리고 나머지 여자 셋은 영우 목욕 시킨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근데 결혼식에 할머니 오신데요.”
이모부가 수세미로 닦은 그릇을 넘겨받아서 물로 행구며 물었다.
“장모님! 오신다고 하시던데. 왜?”
“그냥. 오시면 뭐라고 해야 하나 싶어서요. 보고 싶기는 한데. 기억이 안 나거든요. 전혀~”
“허~ 진이 너무했다. 생일 때 마다 선물 보낸 주신다며. 편지라도 하지 그랬냐.”
“그게. 헤헤. 부끄럽네요.”
“진아.”
“네”
“오늘 편지 써라.”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날은 피곤했는지 금방 잠이 들어 버렸다.
다음 날 아침. 여전히 기분이 나빠 보이는 소라와 언제나 즐거운 것 같은 캐리 그리고 소라의 표정을 신경 쓰느라 연신 고개를 돌려 대는 내가 등교를 하고 있었다.
“근데 소라이거 어제부터 왜 그런데.”
소라에게 물어봐도 대답이 없자. 캐리는 나에게 그 당황스런 질문을 해온다.
“그게. 아~ 몰라.”
“앵! 뭐야. 사람 궁금하게 하네. 뭘 숨기는 거야. 우리사이에. 아~! 나 궁금증으로 죽겠다.”
나도 소라도 그녀가 궁금증으로 죽어도 말하기 싫었다.
“알았다. 어제 하늘이 왔다고 하던데. 소라가 질투해서 시누이 행세 했구나. 너무 그러지 마. 거의 10달이나 기다려서 겨우 사귀는 건데. 너 같으면 그렇게 기다리겠냐. 외모도 괜찮은데.”
“쳇! 추녀더라 뭐.”
버릇없다고 뭐라고 해야 했지만. 지은 죄가 있기 때문에 말이 나오지 않았고 대신 캐리가 입을 열었다.
“히히히히 너 질투하는 거 맡네.”
“아냐! 왜 내가 그런 변태 같은 여자에게.”
이번 소라의 말은 내 죄책감 따위를 날려 버려서 난 큰 소리로 호통을 쳐 버렸다.
“소라야! 그만 좀 해!”
내 목소리에 놀란 꼬마 아가씨는 그 큰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다가 조금 씩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쏘다냈다.
“오빠는 그 여자가 그렇게 좋아.”
눈물을 보이는 이 꼬맹이가 너무 안쓰러웠지만 지금은 완고한 모습을 보여야지 않나 싶었다.
“그래.”
소라가 갑자기 나에게 다가와 아프지도 않은 주먹질을 해대며 악을 써왔다.
“오빠도 미워. 미워! 미워! 미워! 미워!”
그렇게 한참을 맞아주니 소라도 지쳤는지 내 몸에 지탱해 왔다. 난 이 꼬맹이를 안아 주었고 우려와는 다르게 녀석은 거부하지 않아 백주대낮에 질질 짜는 꼬마를 한참 동안 끌어안고 있어야 했다. 그것도 학교 앞에서.
“재들 뭐냐!”
“왜 저런데.”
“키키키.”
“하하하.”
시간이 가고 등교하는 학생들이 늘어날 시간이 되자 우리를 보며 웃어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난 소라를 때어내려고 다독였지만 녀석은 힘을 주고 떨어지지 않으려 하고 있었고 캐리는 웃긴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는 것처럼 조금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겨우겨우 소라를 달래서 마침 등교하는 소라와 같은 반 아이들에게 달아 보네고 허겁지겁 등교를 해서 가방을 풀고 나니 피곤이 몰려왔다.
“아~~ 피곤 해.”
그 우는 소리에 오늘도 깔끔하고 예쁜 하늘이가 내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수줍게 말해왔다.
“진이도 못 잤어.”
“아니. 아침부터 소라가 때를 써서. 달래주느라고 힘드네.”
“소라가 뭐라고 해?”
“음~~ 변태. 라고.”
“아~~ 나 몰라. 창피해.”
어제 상황이 생각났던지 얼굴을 붉히며 그 작은 얼굴을 양손바닥으로 가리는 하늘이. 당시 난 가만히 있는 데다 옷도 다 입고 있었던 반면 하늘이는 상의를 벗고 있는데다 바지 위지만 남자 고간을 주물러 대고 있는 상황이니. 당연히 소라가 보기엔 음란한 짓을 해 가며 날 유혹하고 있는 거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미안. 생각해 보니 내 잘못이내.”
“다시 그 짓 해달라고 해봐.”
“할 건데.”
“뭐. 이 변태.”
하늘이가 내 팔을 꼬집는다.
“아~ 아파. 자국 생기겠다.”
그날 하늘이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친구들이랑 이야기 하며 웃고 수업시간에 일어나서 교과서를 읽고 우등생답게 내가 모르겠다고 하는 거 천천히 잘 가르쳐 주고. 밥 먹고 나서 조금 졸고. 수업이 다 끝나서 나랑 같이 교실 청소를 하고 나랑 같이 쓰레기를 버리러 소각장에 가고. 그야 말로 일상적인 학교생활을 즐겼다.
“어. 저기 소라 아냐.”
청소를 끝내고 하교 길에 나서기 위해 교문 근처 까지 왔을 때 교문 앞에 서 있는 소라를 발견한 하늘이가 놀란 목소리로 대화에 시동 걸었다.
“응. 소라네.”
“어떻게 해.”
“그냥 가자. 인사해.”
“아냐 돌아가자.”
“하늘아 소라하고 나 같은 집에 사는데 언제까지 피해 다니려고. 그래.”
“그냥 오늘만.”
하늘이가 내 옷깃을 잡아 당겼다. 역시나 힘없는 난 그녀에게 당겨져 소라가 고개를 돌려도 보지 못하는 곳으로 이동해 버렸다.
“하늘아. 내가 잘 중재 해 줄게. 그러니까 일단 가자. 녀석 기다리잖아.”
“오늘만.”
난 끌고 갈 생각도 없었는데 도살장에 끌려가지 않으려는 돼지처럼. 그녀는 창틀에 매달렸다.
“에히~ 어쩌란 건지.”
잠시 후. 벨소리가 울렸다. 난 수신자가 소라임을 확인했다.
“소라인데.”
“먼저 갔다고 해.”
난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처다 보는 하늘이의 시선을 몇 번 맞추고는 전화를 들었다.
“응 소라야.”
“수업 안 끝났어.”
“끝났지.”
“왜 안 나와.”
“집에 가고 있는데.”
“엉. 어디로 갔데. 1시간 전부터 기다렸는데.”
“오늘 특별활동 시간인데. 나 특별활동 안하거든. 그냥 집에 왔어.”
“응 그래. 집에서 보자.”
“응.”
소라의 목소리가 밝아서 내 기분도 좋아졌다. 하지만 하늘이는 아닌지 여전히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만 살짝 내밀어서 꼬맹이의 이동 여부를 확인 하고 있었다.
“소라 가.”
“응. 조금만 있어봐.”
그녀는 한참 동안을 소라의 이동 방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1분 쯤 흐른 후 은신처를 나오며 말했다.
“가자.”
하지만 교문을 나서서 그녀가 사는 아파트를 쪽으로 이어진 길로 방향을 틀었을 때. 다른 방해꾼이 나타났다.
스포츠카가 우리가 가던 길가에 서며 창이 열렸고 그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hello cute couple."
우린 이 익숙한 차량과 목소리에 반가움과 당황 그리고 거부감과 안도감을 느끼며 미처 대답하지 못했고 운전자는 우리가 반응이 없자 고개를 내밀며 다시 말했다.
“너무 그러지 마. 무시 하기야.”
소현은 애교 넘치는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고 난 하늘이가 신경 쓰여서 계속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침묵이 지속되자 참기 힘들었던지 하늘이가 투덜거렸다.
“선생님. 왜 오셨어요.”
걱정은 했지만 역시 연적이란 생각을 하는지 하늘이의 목소리엔 긴장됨과 약간의 불쾌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소현의 목소리엔 즐거운 웃음소리가 끼어 있는 편안함이 묻어났다.
“헤헤 걱정 마. 그냥 인사차야. 인사차.”
하늘이는 한숨을 쉰다. 아마 감정을 조절하려는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헤헤. 죄송은. 내가 미안하지. 늙은 여자가 끼어들어서. 하늘이 사랑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았잖아.”
“아녜요.”
하늘이는 이네 평소 모습으로 얼굴을 붉혔고 그 모습이 재미있다고 보려고 소현이 창을 더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그래서 변화된 그녀의 헤어스타일이 내 눈에 들어왔다. 턱에 딱 걸리게 자른 단발머리 예전 탐스럽던 긴 머리를 자르고 머리를 퍼서 깔끔함이 돋보이는 활동적인 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여자의 헤어스타일 변화는 그 쪽을 연상시킨다. 실연과 좌절, 상처를 하늘이와 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님 머리!”
“소현누나!”
“헤헤 이상해.”
그녀는 머리카락을 쓰러 만지며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말했지만 우린 그렇지 않았다. 특히 하늘이가 그 변화에 동요하고 있었다.
“선생님 역시 진이를 좋아하신 건가요.”
“아냐. 우린 그저 그림자 ?기를 하거야. 그 이하도 이상도 아냐. 그치 진아.”
나도 의문이 든다. 그 때 그. 반응은 그림자 ?기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하늘이가 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물어볼 수는 없었다.
“응. 맞아.”
그 말을 끝으로 우리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그리고 눈으로 이야기 하듯이 3명은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하늘이가 먼저 말했다.
“언제 가세요.”
“음~ 다음 주 월요일에. 시원해.”
“아니요.”
“진아.”
소현이 나를 부른다. 난 하늘이 눈치를 살폈고 그녀는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으로 상관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으로 알고 입을 열었다.
“왜?”
“후후. 하늘이에게 잘해줘. 나 때처럼. 바람피우지 말고.”
이 여자 생사람 잡는다.
“내가 언제 바람 피웠어!”
“농담이야. 너처럼 연약하고 착한 아이니까 너무 힘들게 하지 마.”
“응”
“건강하고. 하늘이도 건강하고 사이좋게 잘 지내. 진아 떠나 버린 사람보단 앞에 있는 사람을 봐. 그게 마음의 구멍이 생기지 않는 방법이고 그런 사람을 지켜보는 상대는 몹시 힘들다는 것도 잊지 마. 그럼 이 장애물은 사라질게.”
소현의 목소리는 점점 울먹이는 것으로 바꿨고 마지막엔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다. 때문에 하늘이와 난 그녀의 감정에 동요했고 우리의 대답 따위 듣지 않겠다는 기세로 차를 몰고 가 버리는 스포츠카를 오랫동안 멍하게 바라보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고나서 며칠이 지나서 일요일이 찾아왔다. 하루만 지나면 소현이 제주도로 가버리는 날인 것이다. 그런 날에 하늘이는 데이트를 하자고 했고 소현의 일 때문에 찜찜한 기분 이었지만 이런 날 일수록 놀러나가라는 수애의 강압적인 권유 덕분에 아침부터 공원 입구에 서서 하늘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은 9:50 약속시간은 10:00 음료수라도 마시고 싶었지만 하늘이의 시간관념이 어떻게 되는지 몰라서 자리를 뜨기 힘들어서 난 그냥 참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지만 10:20 되어도 하늘이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늦잠이라도 잦나. 전화라도 하지 안 할 아이가 아닌데.’그런 생각을 하며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서 전화를 걸어 보았다.
“전원이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연결 됩니다.”
“아아?”
차분하고 조심성 많은 하늘이가 할 행동이 아니었다. 물론 세상사 100%란 것은 없지만. ‘좀 더 기다려 보자. 그러다가 집 전화로 걸어 봐야지.’라고 생각하고 기다렸지만 10:40 이 지나도 ‘미안 미안해’ 하며 나타나거나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난 슬슬 짜증이 났고 휴대폰을 들었다. 하지만 일반전화는 당연히 신호는 가지만 아무도 없는지 전화를 받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하늘이가 이럴 리 없는데.”
순간 하늘이가 오는 길에 사고라도 당한 것이 아닐까 하는 불쾌한 상상이 내 머릿속에서 이루어져 내 기분을 추락하게 만들었다.
“빨리 와라.”
난 택시를 타고 하늘이 집에 가 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혹시나 휴대폰 배터리를 놓고 와서 없는 나를 찾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바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자 걱정과 짜증 때문에 미칠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고 있었다.
“진아~!”
난 하늘이가 부른다고 생각하고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곳엔 스포츠카에 기대고 선. 무릎이 보이는 하얀 원피스와 챙이 넓은 리본달린 모자의 여자는 하늘이가 아니었다.
“소현누나?”
“미안 네 피앙세가 아니라.”
어리둥절한 난 말을 약간 더듭었다.
“어. 어떻게 하늘이는.”
“미안 내가 대신 왔어.”
“왜?”
“하늘이랑 합의 봤거든.”
“합의?”
“오늘을 끝으로 진이를 절대 안 만나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말 것.”
소라는 우리를 보고 한참동안 멍하게 보고 있다가 진짜 아플 것 같은 자세로 쓰러져 버렸다. 난 놀라서 그녀에게 달려가서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쉬고 걱정스런 표정으로 소라를 보고 있는 하늘이에게 말했다.
“병원엔 가봐야 갰지만 일단 괜찮은 것 같아. 옷 챙겨 입어 난 이모에게 말하고 올게.”
“뭐라고 말 하려고.”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기직전 같은 목소리로 말하는 하늘이.
“뭐 일단 그냥 기절 했다고만 하고 나중에 소라 깨어나면 모른 척 해달라고 하자.”
하지만 내 말을 듣고 아이를 업고 내려온 이모는 베개를 대고 바닥에 누워있는 소라를 바라보다 전말을 알겠다는 투로 전혀 웃음기 없는 진지한 어조로 이야기 하고 있었다.
“걱정 마. 애들이 봐서도 해서도 안 돼는 망상 때문이야. 그냥 순간적인 쇼크라. 금방 일어날 걸.”
그 ‘망상’이란 것 섹스를 의미하는 것일까. 다 알고 있는 건지 어떤 건지 알 수 없는 말이라 차마 물어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모는 이번엔 좀 더 직설에 가까운 단어를 사용했다.
“있잖아. 진아. 콘돔. 착상저항제가 뭐 하는 건지 알지.”
“죄송해요.”
하늘이가 고개를 푹 숙여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이모의 생각을 인정해 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여자 혼자 혼나게 둘 수 없는 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모 저 때문이에요.”
“진아 사실 이런 건. 어른 입장에서도 참 난감하지 않을 수 없어. 미국에서 살았던 나도 애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야 할 때는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거든.”
“네”
“그렇지만 말을 안 할 수가 없네. 부주의하게 문도 안 잠그고 있었다니. 하늘이가 얼마나 창피하겠어. 다 네 녀석 실수다.”
“네.”
“하지만 행위는 인정해. 사실 난 캐리 친부랑 13살에 처음 해 봤거든.”
“에!?!?!?”
“정말요?!??!??”
그 나이는 지금 소라랑 같은 나이다. 내가 작년부터 했고 창세가 14세부터 해봤다니까.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엔 가장 빠른 첫 경험자였다.
“하지만. 나를 봐도 알겠지만 미혼모, 미혼부 너무 힘들어 진이는 몰라도 하늘이는 미혼모가 되었다가는 큰일 날 걸. 보통은 인생 망쳐버려. 특히 우리나라는 그런 쪽으로 보수적이라 부모님이 낙태시키려고 눈에 불을 켤 걸. 나도 아버지. 네 외할아버지가 미치듯이 낙태하라고 했어.”
그 이야기는 나도 알고 있다. 할아버지가 이모 임신 사실과 아이 아버지가 도망갔다는 사실을 알고 낙태시키려고 애 썼고 이모도 처음엔 낙태하려다가 차마 할 수가 없어서 낳으려고 시간을 끌어서 법적인 선을 넘었는데 이번에 할아버지가 3개월이 넘어도 낙태할 수 있는 나라로 가서 시술하라고 스트레스를 줘서 집을 나와 버렸다는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절대 임신 걱정되는 날에는 콘돔사용하고 없으면 참아! 절대 하지 마. 낙태란 거. 요즘 가볍게 생각하는 경양이 있는데. 어떻게 낙태하는지 알고 있다면 못할 걸.”
이모는 하늘이에게 다가가서 양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늘아. 인공낙태를 어떻게 하냐면 진공청소기 같은 걸 태내에 넣어서 아기를 빨아드리는 거야 아기는 뭉개져서 고기 덩어리가 되어 버린 상태로 의료폐기물로 버려져. 인간이 할 짓이 아냐.”
이모의 말에 놀란 하늘이는 이모가 안고 있는 영우를 한번 바라보고 끔찍한 상상을 했었는지 무척 거북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한번 처다 보고 다시 이모를 바라 본 다음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 조심할게요.”
“일단 하늘이는 됐고. 사실 말이야. 임신은 남자가 문제거든. 남자란 존재의 성욕은 여자의 그것과는 상당히 틀려 특히 진이 나이 때는 더 심해.”
이모는 그렇게 말하고 나를 돌아봤다. 난 당황스런 표정으로 눈을 마주치지 못했고 이모는 나의 어깨를 한손으로 잡았다 놓으며 말을 이었다.
“진아 절대다 알았지.”
나도 하늘이와 같은 상상을 한 덕분인지 임신이란 것에 대한 무게감에 짓눌려 있었다.
“조심할게요. 이모.”
이모는 내 말을 듣고 진지한 표정을 거두고 활짝 미소 지어 주었다. 하지만 누워있는 소라를 한번 보더니 이네 걱정스런 표정을 하고 대책이 없는지 고개를 저치며 하면서 말했다.
“그 쪽 이야기는 이것으로 마무리 하고. 소라에게 뭐라고 해야 하지. 걱정이네. 너희들 완전히 하다가 들킨 거니.”
도무지 대답을 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난 말을 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었고 하늘이는 귀까지 빨간 얼굴을 푹 숙이고 말을 잊지 못했다. 이모는 그런 우리들을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잠시 보다가 말했다.
“녀석들 순진 하기는. 내가 알아서 할게. 하늘아 미안 하지만 오늘은 그만 집에 가거라.”
“네.”
하늘이가 여전히 붉은 얼굴을 숙인 상태로 대답 했다.
“진이는 하늘이 데리고 엉뚱한 곳으로 가지 말고 정확하게 집으로 에스코트 해주고 와. 알았지.”
“예.”
하늘이는 가방을 챙겨 들고 이모에게 고개를 푹 숙여서 입을 열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이모님.”
“응 그래. 조심해서 가. 하늘아.”
“예”
“이모 갔다 올게요.”
“응 그래 엉뚱한 곳으로 새지 말고 꼭 집에 데려다 주고 와.”
“예.”
성격은 캐리랑 다를 것이 없지만 확실하게 이모는 어른이었다. 다그칠 건 다그치고 부드럽게 안아줄 건 안아주는 근사한 어머니 상이었다. 하늘이는 그런 이모가 왼지 마음에 들었는지 에스코트 중인 나에게 이모가 자기 엄마였으면 좋겠다는 친모가 들으면 경악해서 뒤로 넘어갈 것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우리 엄마도 진이 이모 같았으면 좋겠다. 울 엄만 귀찮은 아이가 생기면 가차 없이 낙태해 버릴 사람이거든.”
난 그녀의 생각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설마. 원하지 않았어도 생명인데.”
“아니 실제로 그랬어. 아버지 하고 결혼 전 자식은 하나로 정해 놨다고. 동생 생긴다고 좋아하던 날 무시하고 그냥 낙태해 버리던데.”
이런 건 동조하면 안 된다는 내 마음의 속삭임이 이번엔 정지해 버렸다.
“아~ 진짜 너무 하셨네! 하늘이 마음 아팠겠다.”
“응~”
우울한 하늘이의 대답. 그 감정에 동조해 낮게 가라앉는 나의 마음 그리고 포옹.
“왜?! 그래.”
“가만 있어봐. 꼭 안아주고 싶어서.”
나는 그녀를 품에 꼭 안아서 등을 토닥여 주었고 어쩔 줄 몰라 하던 하늘이도 자기와 별로 다르지 않는 덩치와 키를 가진 나를 받아드려 편안하게 나에게 기대왔다.
그런 자세로 5분쯤 흘렀을까. 서로에게 전해준 체온의 따듯함에 기분이 좋아진 우린 포옹을 풀고 양손을 마주 잡아서 서로를 웃으며 바라봤다.
“키스하고 싶어.”
“나도.”
우린 마주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로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내밀어 가볍게 입술을 겸쳤다 떨어지고 다시 혀를 내밀어 서로 휘감아 서로의 타액을 빨아 마시고 떨어졌다.
“읍~ 음~음~ 읍~ 하~”
“쩝~ 읍~ 읍~ 하~”
그리고 우린 붉어진 얼굴로 이마를 맞대고 웃음 지었다. 이 순간만은 나도 하늘이도 다른 건 생각나지 않았다. 오직 자신 앞에 있는 상대만 생각날 뿐이었다.
키스 후. 우린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 우리를 사람들이 한번 씩 뒤 돌아보기도 하고 소곤소곤 되기도 했지만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고 수줍음 많은 하늘이도 왼지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100평이라는 하늘이가 사는 아파트 앞에 도착 했을 때. 우리의 즐거운 침묵을 뚫고 어떤 아줌마가 끼어들었다.
“하늘아. 친구니.”
순간 하늘의 표정이 변했다. 이성친구와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들켰다는 사실에 그녀는 보는 사람도 당황할 정도로 동요해서 허겁지겁 손을 놓고 뭐라고 변명도 못하고 얼굴을 숙였다.
“아~. 그게.”
하지만 하늘의 어머니로 보이는 안경을 낀 마른체형의 깐깐해 보이는 캐리어우먼은 부녀지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침착하게 나에게 물어왔고.
“못 보던 친구구나. 같은 반이니.”
하늘이에 비해선 침착했지만 동요하고 있는 난 일단 고개를 숙여 뒤 늦은 인사를 하고 흘러내리려는 안경을 똑바로 쓰며 입을 열었다.
“네 같은 반이고 ‘성 진’이라고 합니다. 어머니.”
내 말을 정확하게는 내 목소리를 듣고 두 눈을 깜빡이는 그녀는 하늘이를 한번 처다 보고 나를 다시 돌아보며 요즘 내가 자주 듣는 질문을 해왔다.
“변성기가 안온 남자아이 목소리 같은데. 어느 쪽이야.”
“남자인데요.”
그렇게 말하고 잠깐 난 후회했다. 손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일 뿐 ‘손잡고 있었다.’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전에 통화했던 애가 너구나.”
“그때는 말만하고 안 찾아봬서 죄송했습니다.”
“아냐. 그건 그렇고 남자애인데 예쁘게 생겼네. 실례인가.”
“아뇨.”
하늘의 어머니는 웃었다. 전잔 빼는 웃음이라고 할까 그런 절제된 감정표현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나에게서 얻어야 하는 정보는 잊어버리지 않았다.
“하늘이랑 교제중이니.”
“예. 얼마 전 부터.”
“부모님은 뭐 하셔.”
나에겐 상당히 부담스러운 질문이며 보통 학부모가 자식의 이성친구에게 절대 물어보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에 난 잠깐 말문이 막혔다가 하늘이가 이 상황에 기분나빠하는 표정을 짓고 모친을 쳐다봐서 그냥 입을 열었다.
“어머니는 어릴 적에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IT기업 사장이세요.”
어머니는 사실이고 아버지 쪽은 복잡한 사실들 속에서 확실하게 세상 사람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것만 집어내서 말해서 그런지 그녀의 표정은 한결 부드러워 졌다.
“회사 이름이.”
“네 그러니까.”
거짓말의 연속이 부담스러웠다. 성필성 즉 내가 아버지라고 생각하며 알고 있던 사람이 몇 개월 전에 나를 호적에서 파버렸다는 것을 그녀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거짓말이 계속 이어지는 것도 싫어 말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하늘이는 그런 나의 상태를 알고는 짜증이 약간 묻어난 음성으로 말했다.
“엄마 그만 하세요. 진이 집에 가야죠.”
“하늘아 내가 네 남자친구 잡아먹기라도 하니. 왜 짜증을 내고 그래.”
하늘이는 길게 한숨을 쉬며 먼 곳을 바라보았고 그런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S.P.S Soft 인데요.”
“오! 그래. 아버지가 자랑스럽겠구나.”
“네.”
“근데 아까부터 신경 쓰였는데. 혹시 어머니가 연예인이시니.”
“진자 수자 진자. 진수진 이라고.”
내가 어머니를 이름을 대는 순간 그녀의 표정이 몹시 어두워졌고 나를 위로 한다는 나오는 목소리도 아까 그것과는 달랐다.
“미안하다. 어머니에 대해서 물어서.”
“어머니를 아세요.”
“어쩐지. 너무 많이 닮았더라. 아~ 미안~”
그녀는 내 모습 속에서 내 어머니를 찾아서 의문을 느끼고 있었고 그 의문이 풀려서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고 잠시 후 자신이 혼잣말 했다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손을 들어 약간 웃어 보인 후. 대답을 해 주었다.
“대학 2년 선배였지. 내 어머니가 연예계 일로 바빠서 그다지 친하지 못했지만. 가끔 이야기를 주고받았었는데. 진짜 팔방미인이라 인기 많았는데 너무 일찍 가 버려서 마음 아팠단다.”
하늘이 어머니의 지금 표정은 진심으로 보였다. 난 나의 어머니를 아는 사람을 만난 것을 기뻐하며 고개를 숙이고 감사를 표했다.
“고맙습니다.”
“아냐. 어서 가 보거라.”
“네. 안녕히 계세요. 하늘아 나 가.”
“응 그래. 조심해서. 가.”
“응”
하늘이와 난 즐거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었고 곧 서로 다른 방향을 보며 걸어갔다. 하지만 아쉬운 생각이 들어서 다시 고개를 돌렸고 그녀와 다시 눈이 마주쳐 다시 손을 흔들며 멀어져 갔다.
내가 이모네 현관에 들어섰을 때.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나고 있었고 식기를 나르는 소리 그리고 유독 대화가 많은 이 집 식구들의 재잘거림이 공간을 매우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하늘이 집까지 에스코트 하고 온 거지. 으슥한 곳에서 찐한 거 하고 왔냐!. 히히히히” 예의 그 웃음을 보이며 뚝배기를 나르는 캐리.
“흥!” 기절 했던 녀석인데 멀쩡한 상태로 눈을 흘기고 고개를 돌리는 소라.
“수희씨 진이 입원 했을 때 매일 오던 그 아이가 하늘이 맞죠.”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서 하나 씩 식탁에 올려놓는 이모부.
“네. 맞아요.” 프라이팬으로 김치 부침개를 만들어 넓은 접시에 담는 이모.
“예쁜 아이인데. 진이는 좋겠구나.”
이 말에 여러 반응이 나온다.
불쾌한 표정으로 입 모양만 ‘그 여자 변태’라고 하는 소라.
“진이에겐 아까워. 내가 빼앗아 버리고 싶어진다니까.” 즐겁게 수저를 놓는 캐리.
“앞으로 조카며느리가 될지는 모르지만. 사이좋게 오랫동안 잘 지냈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말이다.” 아무래도 몇 시간 전에 이모가 했던 말을 다시 하려는 것 같은 이모부.
“그만해요. 우리 진이 그런 분별은 있으니까.” 식사준비가 다 끝나서 앞치마를 풀어놓고 자리에 앉는 이모.
“그럼. 잘 먹겠습니다.”
이모부가 먼저 말하고. 나를 포함한 나머지 4명이 즐거운 표정으로 재창했다.
“잘 먹겠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이모부랑 내가 설거지. 그리고 나머지 여자 셋은 영우 목욕 시킨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근데 결혼식에 할머니 오신데요.”
이모부가 수세미로 닦은 그릇을 넘겨받아서 물로 행구며 물었다.
“장모님! 오신다고 하시던데. 왜?”
“그냥. 오시면 뭐라고 해야 하나 싶어서요. 보고 싶기는 한데. 기억이 안 나거든요. 전혀~”
“허~ 진이 너무했다. 생일 때 마다 선물 보낸 주신다며. 편지라도 하지 그랬냐.”
“그게. 헤헤. 부끄럽네요.”
“진아.”
“네”
“오늘 편지 써라.”
“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날은 피곤했는지 금방 잠이 들어 버렸다.
다음 날 아침. 여전히 기분이 나빠 보이는 소라와 언제나 즐거운 것 같은 캐리 그리고 소라의 표정을 신경 쓰느라 연신 고개를 돌려 대는 내가 등교를 하고 있었다.
“근데 소라이거 어제부터 왜 그런데.”
소라에게 물어봐도 대답이 없자. 캐리는 나에게 그 당황스런 질문을 해온다.
“그게. 아~ 몰라.”
“앵! 뭐야. 사람 궁금하게 하네. 뭘 숨기는 거야. 우리사이에. 아~! 나 궁금증으로 죽겠다.”
나도 소라도 그녀가 궁금증으로 죽어도 말하기 싫었다.
“알았다. 어제 하늘이 왔다고 하던데. 소라가 질투해서 시누이 행세 했구나. 너무 그러지 마. 거의 10달이나 기다려서 겨우 사귀는 건데. 너 같으면 그렇게 기다리겠냐. 외모도 괜찮은데.”
“쳇! 추녀더라 뭐.”
버릇없다고 뭐라고 해야 했지만. 지은 죄가 있기 때문에 말이 나오지 않았고 대신 캐리가 입을 열었다.
“히히히히 너 질투하는 거 맡네.”
“아냐! 왜 내가 그런 변태 같은 여자에게.”
이번 소라의 말은 내 죄책감 따위를 날려 버려서 난 큰 소리로 호통을 쳐 버렸다.
“소라야! 그만 좀 해!”
내 목소리에 놀란 꼬마 아가씨는 그 큰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보다가 조금 씩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쏘다냈다.
“오빠는 그 여자가 그렇게 좋아.”
눈물을 보이는 이 꼬맹이가 너무 안쓰러웠지만 지금은 완고한 모습을 보여야지 않나 싶었다.
“그래.”
소라가 갑자기 나에게 다가와 아프지도 않은 주먹질을 해대며 악을 써왔다.
“오빠도 미워. 미워! 미워! 미워! 미워!”
그렇게 한참을 맞아주니 소라도 지쳤는지 내 몸에 지탱해 왔다. 난 이 꼬맹이를 안아 주었고 우려와는 다르게 녀석은 거부하지 않아 백주대낮에 질질 짜는 꼬마를 한참 동안 끌어안고 있어야 했다. 그것도 학교 앞에서.
“재들 뭐냐!”
“왜 저런데.”
“키키키.”
“하하하.”
시간이 가고 등교하는 학생들이 늘어날 시간이 되자 우리를 보며 웃어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난 소라를 때어내려고 다독였지만 녀석은 힘을 주고 떨어지지 않으려 하고 있었고 캐리는 웃긴 코미디 프로그램을 보는 것처럼 조금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겨우겨우 소라를 달래서 마침 등교하는 소라와 같은 반 아이들에게 달아 보네고 허겁지겁 등교를 해서 가방을 풀고 나니 피곤이 몰려왔다.
“아~~ 피곤 해.”
그 우는 소리에 오늘도 깔끔하고 예쁜 하늘이가 내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수줍게 말해왔다.
“진이도 못 잤어.”
“아니. 아침부터 소라가 때를 써서. 달래주느라고 힘드네.”
“소라가 뭐라고 해?”
“음~~ 변태. 라고.”
“아~~ 나 몰라. 창피해.”
어제 상황이 생각났던지 얼굴을 붉히며 그 작은 얼굴을 양손바닥으로 가리는 하늘이. 당시 난 가만히 있는 데다 옷도 다 입고 있었던 반면 하늘이는 상의를 벗고 있는데다 바지 위지만 남자 고간을 주물러 대고 있는 상황이니. 당연히 소라가 보기엔 음란한 짓을 해 가며 날 유혹하고 있는 거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미안. 생각해 보니 내 잘못이내.”
“다시 그 짓 해달라고 해봐.”
“할 건데.”
“뭐. 이 변태.”
하늘이가 내 팔을 꼬집는다.
“아~ 아파. 자국 생기겠다.”
그날 하늘이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친구들이랑 이야기 하며 웃고 수업시간에 일어나서 교과서를 읽고 우등생답게 내가 모르겠다고 하는 거 천천히 잘 가르쳐 주고. 밥 먹고 나서 조금 졸고. 수업이 다 끝나서 나랑 같이 교실 청소를 하고 나랑 같이 쓰레기를 버리러 소각장에 가고. 그야 말로 일상적인 학교생활을 즐겼다.
“어. 저기 소라 아냐.”
청소를 끝내고 하교 길에 나서기 위해 교문 근처 까지 왔을 때 교문 앞에 서 있는 소라를 발견한 하늘이가 놀란 목소리로 대화에 시동 걸었다.
“응. 소라네.”
“어떻게 해.”
“그냥 가자. 인사해.”
“아냐 돌아가자.”
“하늘아 소라하고 나 같은 집에 사는데 언제까지 피해 다니려고. 그래.”
“그냥 오늘만.”
하늘이가 내 옷깃을 잡아 당겼다. 역시나 힘없는 난 그녀에게 당겨져 소라가 고개를 돌려도 보지 못하는 곳으로 이동해 버렸다.
“하늘아. 내가 잘 중재 해 줄게. 그러니까 일단 가자. 녀석 기다리잖아.”
“오늘만.”
난 끌고 갈 생각도 없었는데 도살장에 끌려가지 않으려는 돼지처럼. 그녀는 창틀에 매달렸다.
“에히~ 어쩌란 건지.”
잠시 후. 벨소리가 울렸다. 난 수신자가 소라임을 확인했다.
“소라인데.”
“먼저 갔다고 해.”
난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처다 보는 하늘이의 시선을 몇 번 맞추고는 전화를 들었다.
“응 소라야.”
“수업 안 끝났어.”
“끝났지.”
“왜 안 나와.”
“집에 가고 있는데.”
“엉. 어디로 갔데. 1시간 전부터 기다렸는데.”
“오늘 특별활동 시간인데. 나 특별활동 안하거든. 그냥 집에 왔어.”
“응 그래. 집에서 보자.”
“응.”
소라의 목소리가 밝아서 내 기분도 좋아졌다. 하지만 하늘이는 아닌지 여전히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만 살짝 내밀어서 꼬맹이의 이동 여부를 확인 하고 있었다.
“소라 가.”
“응. 조금만 있어봐.”
그녀는 한참 동안을 소라의 이동 방향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1분 쯤 흐른 후 은신처를 나오며 말했다.
“가자.”
하지만 교문을 나서서 그녀가 사는 아파트를 쪽으로 이어진 길로 방향을 틀었을 때. 다른 방해꾼이 나타났다.
스포츠카가 우리가 가던 길가에 서며 창이 열렸고 그 곳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hello cute couple."
우린 이 익숙한 차량과 목소리에 반가움과 당황 그리고 거부감과 안도감을 느끼며 미처 대답하지 못했고 운전자는 우리가 반응이 없자 고개를 내밀며 다시 말했다.
“너무 그러지 마. 무시 하기야.”
소현은 애교 넘치는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말했고 난 하늘이가 신경 쓰여서 계속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침묵이 지속되자 참기 힘들었던지 하늘이가 투덜거렸다.
“선생님. 왜 오셨어요.”
걱정은 했지만 역시 연적이란 생각을 하는지 하늘이의 목소리엔 긴장됨과 약간의 불쾌감이 묻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소현의 목소리엔 즐거운 웃음소리가 끼어 있는 편안함이 묻어났다.
“헤헤 걱정 마. 그냥 인사차야. 인사차.”
하늘이는 한숨을 쉰다. 아마 감정을 조절하려는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헤헤. 죄송은. 내가 미안하지. 늙은 여자가 끼어들어서. 하늘이 사랑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았잖아.”
“아녜요.”
하늘이는 이네 평소 모습으로 얼굴을 붉혔고 그 모습이 재미있다고 보려고 소현이 창을 더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그래서 변화된 그녀의 헤어스타일이 내 눈에 들어왔다. 턱에 딱 걸리게 자른 단발머리 예전 탐스럽던 긴 머리를 자르고 머리를 퍼서 깔끔함이 돋보이는 활동적인 스타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여자의 헤어스타일 변화는 그 쪽을 연상시킨다. 실연과 좌절, 상처를 하늘이와 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님 머리!”
“소현누나!”
“헤헤 이상해.”
그녀는 머리카락을 쓰러 만지며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말했지만 우린 그렇지 않았다. 특히 하늘이가 그 변화에 동요하고 있었다.
“선생님 역시 진이를 좋아하신 건가요.”
“아냐. 우린 그저 그림자 ?기를 하거야. 그 이하도 이상도 아냐. 그치 진아.”
나도 의문이 든다. 그 때 그. 반응은 그림자 ?기로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하늘이가 있는 상황에서 그것을 물어볼 수는 없었다.
“응. 맞아.”
그 말을 끝으로 우리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그리고 눈으로 이야기 하듯이 3명은 서로의 눈치를 보다가 하늘이가 먼저 말했다.
“언제 가세요.”
“음~ 다음 주 월요일에. 시원해.”
“아니요.”
“진아.”
소현이 나를 부른다. 난 하늘이 눈치를 살폈고 그녀는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으로 상관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으로 알고 입을 열었다.
“왜?”
“후후. 하늘이에게 잘해줘. 나 때처럼. 바람피우지 말고.”
이 여자 생사람 잡는다.
“내가 언제 바람 피웠어!”
“농담이야. 너처럼 연약하고 착한 아이니까 너무 힘들게 하지 마.”
“응”
“건강하고. 하늘이도 건강하고 사이좋게 잘 지내. 진아 떠나 버린 사람보단 앞에 있는 사람을 봐. 그게 마음의 구멍이 생기지 않는 방법이고 그런 사람을 지켜보는 상대는 몹시 힘들다는 것도 잊지 마. 그럼 이 장애물은 사라질게.”
소현의 목소리는 점점 울먹이는 것으로 바꿨고 마지막엔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다. 때문에 하늘이와 난 그녀의 감정에 동요했고 우리의 대답 따위 듣지 않겠다는 기세로 차를 몰고 가 버리는 스포츠카를 오랫동안 멍하게 바라보도록 만들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고나서 며칠이 지나서 일요일이 찾아왔다. 하루만 지나면 소현이 제주도로 가버리는 날인 것이다. 그런 날에 하늘이는 데이트를 하자고 했고 소현의 일 때문에 찜찜한 기분 이었지만 이런 날 일수록 놀러나가라는 수애의 강압적인 권유 덕분에 아침부터 공원 입구에 서서 하늘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은 9:50 약속시간은 10:00 음료수라도 마시고 싶었지만 하늘이의 시간관념이 어떻게 되는지 몰라서 자리를 뜨기 힘들어서 난 그냥 참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지만 10:20 되어도 하늘이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늦잠이라도 잦나. 전화라도 하지 안 할 아이가 아닌데.’그런 생각을 하며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서 전화를 걸어 보았다.
“전원이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연결 됩니다.”
“아아?”
차분하고 조심성 많은 하늘이가 할 행동이 아니었다. 물론 세상사 100%란 것은 없지만. ‘좀 더 기다려 보자. 그러다가 집 전화로 걸어 봐야지.’라고 생각하고 기다렸지만 10:40 이 지나도 ‘미안 미안해’ 하며 나타나거나 전화를 걸어오지 않았다.
난 슬슬 짜증이 났고 휴대폰을 들었다. 하지만 일반전화는 당연히 신호는 가지만 아무도 없는지 전화를 받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하늘이가 이럴 리 없는데.”
순간 하늘이가 오는 길에 사고라도 당한 것이 아닐까 하는 불쾌한 상상이 내 머릿속에서 이루어져 내 기분을 추락하게 만들었다.
“빨리 와라.”
난 택시를 타고 하늘이 집에 가 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혹시나 휴대폰 배터리를 놓고 와서 없는 나를 찾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바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자 걱정과 짜증 때문에 미칠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고 있었다.
“진아~!”
난 하늘이가 부른다고 생각하고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곳엔 스포츠카에 기대고 선. 무릎이 보이는 하얀 원피스와 챙이 넓은 리본달린 모자의 여자는 하늘이가 아니었다.
“소현누나?”
“미안 네 피앙세가 아니라.”
어리둥절한 난 말을 약간 더듭었다.
“어. 어떻게 하늘이는.”
“미안 내가 대신 왔어.”
“왜?”
“하늘이랑 합의 봤거든.”
“합의?”
“오늘을 끝으로 진이를 절대 안 만나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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