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을 듣고 연희와 나경의 표정을 훔쳐보았다. 연희의 두 눈에서는 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있었다. 나경이가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동기는 연희 자신에게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연희는 자신으로 인해 인생을 망치는 나경에게 영원히 죄인이 된 심정이고 안타까웠다.
나경은 말하지 않아도 연희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도리어 나경이 연희를 측은하게 바라봤다. 연희와 나경은 소리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침묵 속에 면회시간이 끝나고 있었다. 지키고 앉아 있던 교도관이 나경을 데리고 나갔다. 연희는 유치장 철문 안으로 사라지며 돌아보는 나경의 눈빛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연희와 같이 나경의 면회를 다녀온 연주는 깊은 상념에 빠져 들었다. 항상 비밀을 간직한 분위기를 느끼던 언니의 베일 속이 더욱 궁금해졌다. 연희언니와 나경언니의 관계,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나경, 언니에게 우리 아버지를 사랑했느냐는 나경의 질문, 그리고 묘한 두 사람의 표정과 분위기들을 지울 수 없었다.
어린 시절에 연주는 집안에서 맴돌았고 연희언니는 날이 어두워야 집에 들어왔다. 연희 언니는 나경언니와 어울린 시간이 많았고 나경언니 집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연주도 몇 번 연희언니를 따라 나경언니 집에 갔었다. 정말 연희언니와 죽은 나경아버지는 어떤 관계일까. 연희언니가 나경아버지를 친아버지의 정을 느껴 사랑했다는 말인가. 그런데 어찌해서 나경언니는 자신의 아버지를 저주스러워 살해했다고 했을까. 친딸도 저주스러워하는 아버지에게 부정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연주의 머릿속에는 연희언니의 표정들이 지워지지 않았다. 친부모가 죽은 것보다도 더 슬퍼하는 연희언니의 모습, 나경언니의 질문에 당황하며 연주의 눈치를 살피던 표정들 속에는 분명히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었다. 연주는 같은 여자로서 느끼는 직감이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나경언니가 연희언니에게 우리아버지를 사랑했느냐는 의미는 아버지로서가 아니고 남자를 대상으로 하는 감정이었다.
만약 연희언니와 나경아버지가 남녀의 은밀한 관계였다면 언제부터 일까. 여러 가지 여건상으로 보아 연희언니가 나경언니 집에서 살다시피 했을 시기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연희언니가 중고시절이 아닌가. 추측을 떠올리던 연주는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베일이 걷혀진 언니의 얼굴은 또 다른 가면을 쓰고 있었다. 언니가 어떤 여자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형부가 안타까웠다.
나경에게 면회를 다녀 온 뒤에 연주는 언니를 대하기가 무서웠다. 연희도 또한 나경이의 무심코 던진 질문에 동생이 어떤 낌새를 느끼지나 않았는지 두려웠다. 그러나 보름이 지나도록 연주는 의심스러워하는 말이나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평소나 마찬가지로 은지를 보살펴주며 군소리 없이 살림을 도와주면서 틈틈이 열심히 공부를 하는 동생이 고마웠다.
연희는 나경아버지가 죽은 후 남편과 더욱 거리감을 느꼈다. 비록 유치원을 도와주지는 않지만 남편은 변함없이 그녀를 자상하게 대하고 짜증 한번 내지 않았다. 단지 연희 자신 스스로 자격지심과 열등감이 들었다. 자신의 치부를 건드리는 것 같아서 남편의 손길이 닿기만 해도 흠칫하며 놀랬다. 차츰 남편과의 부부관계도 소원해졌다.
자신의 의도는 아니어도 연희는 집에서 있는 시간보다 유치원에 나와 있는 것이 마음 편했다. 그녀의 대화상대가 되어 주는 사람은 늘 정민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정민은 열정적으로 유치원 운영을 도와주었다. 연희의 요구도 아닌데 홍보물을 만들어 넓은 지역까지 배포하였다.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의 끈끈한 감정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다.
조금씩 늘어가는 원생의 숫자에 연희는 유치원을 운영하는 보람을 느꼈다. 정민은 그녀의 인생에 후원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연희는 열정적인 도움을 주는 정민이 지극히 고마웠다. 한편으로는 나경아버지가 죽고 나서 허전해지는 마음을 메워주는 남자이기도 했다.
직원과 원생들도 돌아간 원장실에서 한 달간의 경리 장부를 마감한 연희는 흐뭇하였다. 지난달보다 백만 원이 넘는 수익이 발생한 것이다. 원생이 늘어서 수입도 좋았지만, 지출은 오히려 감소 된 것이다. 예전 같으면 유치원 자재나 건물 수리를 일일이 전문가를 불렀기에 경비가 많이 들었었다. 그런데 요즘은 정민이 부속을 사다가 직접 수리하였기에 비용이 생각보다 많이 감소된 것이다.
장부를 집어넣고 책상 서랍을 닫는데, 원장실 문이 덜컹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 선 사람은 정민이었다. 정민이 환한 표정으로 양손에 든 쇼핑백을 들어 올려보였다.
“아직 있을 줄 알았지.”
“그건 뭐야?”
“네가 배고플 것 같아서 피자를 사왔지.”
“아직 집에 안간 거야?”
“원장님이 퇴근 안했는데 기사가 갈수 있나?”
정민이 짓궂은 표정을 하면서 책상위에 쇼핑백을 내려놓았다. 요즘은 거의 정민이 봉고차로 연희를 집에까지 바래다주고 있었다. 쇼핑백을 열면서 연희가 하얗게 눈을 흘겼다.
“피 잇~! 웃겨. 그런데 웬 맥주?”
“간단하게 연희하고 한잔하려고.”
정민은 쇼핑백을 열어 피자와 맥주 캔들을 책상위에 끄집어냈다. 그들은 책상 앞에 나란히 섰다. 정민이 연희 앞에 포크를 내려놓고 맥주 캔을 땄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맥주 캔을 연희에게 건네주었다.
“자! 천사유치원을 위하여!”
“고마워! 정민아.”
그들은 마주보고 웃으며 맥주를 마셨다. 배가 고팠던 연희는 연거푸 피자를 먹으면서 맥주를 마셨다. 짓궂은 표정을 한 정민이 연희의 엉덩이를 툭 건드렸다.
“연희는 갈수록 몸매가 미스 같아지니?”
“까불래? 어딜 만져.”
“왜!? 학교 다닐 때 흥륜사 잔디에서 안고 뒹굴던 생각 안나?”
“하기는 네가 나를 많이 쫓아 다녔지. 그러나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시절이잖아.”
“아니 지금도 나는 연희한테 똑같은 감정이야. 네가 아직 결혼 안했다면 너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
“그런 말 하지 마.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지?”
싫지 않은 정민의 말을 확인이라도 하듯이 연희가 물었다. 그러나 연희를 바라보는 정민의 눈에는 진심이 어려 보였다. 정민은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 것 같아 답답해서 맥주를 들이켰다.
“아니, 정말이야. 넌 내 마음 모르니?”
“피 잇! 요즘 미스들도 많은데, 넌 좋겠다.”
연희는 짓궂게도 정민을 비아냥거리는 말투를 흘렸다. 정민은 가정을 갖고 있는 연희가 안타깝지만 마음만이라도 알아 줬으면 하는 간절함이었다.
“정말이라니까. 난 너 같은 여자 아니면 다시는 결혼 생각 없어.”
“너, 여자 꾀는 수법이 늘었구나. 순한 촌놈이었는데.”
“연희는 그렇게도 내 마음 모르니!?”
정민이 왈칵 연희의 팔을 잡아 당겼다. 그리고 어깨를 끌어안았다. 연희는 이글거리는 정민의 눈빛을 바라봤다. 그녀는 어깨를 잡은 정민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정민의 가슴에 안긴 연희는 숨이 막할 것만 같았다.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쫓아다니던 정민이 진실로 자신을 여자로 여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처럼 훤칠한 인물은 아니지만 정민은 남자다운 얼굴이었다. 정민의 우람한 체격에서 흘러나오는 체취에 연희는 압도당해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정민의 입술이 점점 다가오고 열기를 느낀 연희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긴 속눈썹을 깜박이다가 살며시 눈을 감는 연희의 입술에 정민의 입술이 포개졌다.
입술이 마주하여 열기를 불러 일으켰다. 정민의 양손이 연희의 둔부를 감싸서 들어 올렸다. 정민의 혀가 연희의 입술을 헤집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혀를 강하게 빨아 당겼다. 연희는 오래간만의 진한 키스에 세포가 녹아내리는 아늑함에 젖어들었다. 혀와 혀가 엉키어 타액을 교환하였다. 자신도 모르게 연희는 정민의 목덜미에 팔을 두르고 매달렸다.
연희를 안는다는 것만으로도 두려웠던 정민은 의외로 그녀가 뜨겁게 매달리는 모습에 불같은 욕구가 끓어올랐다. 연희의 블라우스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푸드득하고 단추가 풀어진 그녀의 블라우스가 벌어졌다. 정민은 브래지어를 밀어 올리면서 그녀를 벽으로 밀고 갔다. 정민의 손아귀에 쥔 젖가슴에 돌기를 일으킨 젖꼭지가 들어났다. 정민은 허겁지겁 젖가슴에 머리를 묻고 혀로 젖꼭지를 핥았다. 그리고 젖꼭지를 입속으로 빨아 당겼다.
“하 으~! 저, 정민아.”
“널 사랑해.”
연희는 온 몸이 딸려 들어가는 쾌감에 파르르 떨었다. 그때 어디선가 전화 벨소리가 들렸다. 책상위에 놓인 연희 손가방 안에서 들리는 휴대폰 벨 소리였다. 연희는 휴대폰 벨소리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젖꼭지가 빨리면서 그녀는 허벅지 사이를 더듬는 정민의 손길에 흠칫 놀라며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녀의 손가방 안에서 계속 울리던 휴대폰 벨소리가 멈추었다. 그녀에게 전화를 한 사람은 연주였다. 연주는 은지에게 분유를 먹일 시간이 되었기에 분유통을 열고 보니 밑바닥에 조금 뿐이 없었다. 미리 점검해보지 않은 연주 탓이기도 하지만, 항상 분유를 언니가 준비하기에 방심 한 것이다. 연주는 퇴근하는 길에 분유를 사오라고 언니에게 전화 한 것이다.
유치원도 끝난 시간인데 언니는 오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기에 연주는 답답했다. 어쩔 수없이 은지가 깨어나기 전에 슈퍼라도 가서 구입해 놓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 모르기에 연주는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나와서 계속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나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멘트만 흘러나왔다. 작은 동네라서 그런지 동네슈퍼는 문이 닫혀 있었다.
연주는 할 수없이 다른 슈퍼를 찾아 빠른 걸음을 옮겼다. 도로를 따라 걷다보니 언니가 운영하는 유치원 근처까지 오게 되었다. 유치원 맞은편의 슈퍼는 문이 열려 있었다. 은지가 먹는 상품은 아니지만 우선 진열된 분유를 사들고 나왔다. 다시 집으로 향하려던 연주가 맞은편 건물 이층에 있는 유치원을 올려다보았다.
유치원 한쪽의 창문에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언니가 전화도 받지 않는데 불이 켜져 있어 연주는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다시 되돌려 길을 건너갔다. 천사유치원 간판이 달린 이층으로 올라가는 입구의 문도 열려 있었다. 연주는 언니에게 한마디 하려고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을 올라가 복도에서 불이 켜진 원장실로 가려던 연주는 그 자리에 꼼짝 못하고 얼어붙었다.
연주는 양손을 가슴에 모아 쥐고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불이 켜진 원장실 안이 유리벽 사이로 훤하게 들여다보였다. 벽을 등지고 있는 연희와 등을 지고 있는 운전기사 정민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다리를 벌린 연희가 정민의 허벅지위에 올라가 있었다. 유리벽 안을 들여다보는 연주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바지와 팬티를 발목에 건 정민의 엉덩이가 움직일 때마다 연희는 위로 솟구치며 일그러지는 표정을 지었다. 정민의 허벅지에 걸친 연희의 다리가 방향을 잃고 날갯짓을 하다가 정민의 허리를 옥죄인다. 그들의 거친 숨소리가 유리벽을 통과하고 들렸다.
“하 아~! 저, 정민아. 난 몰라.”
“헉! 연희야. 사랑해......”
정민의 머리를 끌어안았던 연희의 손이 위로 뻗쳐 창살을 움켜쥐었다. 정민이 치받을수록 위로 솟구쳤던 연희가 추락을 하면서 교성을 흘렸다. 헐떡거리는 남자의 거친 숨소리와 기절할 것 같은 여자의 신음소리. 외간 남자와 부둥켜 안은 언니의 모습을 연주는 도저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욱! 하고 구역질이 터져 나왔다. 토할 것만 같아서 연주는 입을 틀어박고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연주는 어떻게 집으로 왔는지 정신이 없었다. 집 앞에 세워져 있는 형부의 승용차를 보고서야 집에 도착한 것을 알았다. 형부가 집에 귀가했다는 것을 느끼고 연지가 걱정이 되었다. 급하게 층계를 올라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더듬거렸다.
“혀, 형부 오셨어요. 은지 분유 사가지고 오느라고.......”
“나한테 전화하지. 내가 사가지고 올걸.”
연주는 거의 강제적인 육체관계를 갖고 형부를 원망하였다. 그런데 서먹서먹하던 형부가 그렇게도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목격한 언니와 운전기사에 대해서 말할 수는 없었다. 언니를 대신해서 연주 자신이 죄를 지은 것만 같았다.
“식사는요?”
“아! 걱정하지 마. 먹고 왔어. 분유가 떨어진 줄 알았으면 내가 사올 건데. 미안해 처제! 이제부터 내가 신경 쓸게.”
머리를 긁적거리는 지훈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연주도 마찬가지로 형부를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형부를 외면하고 안방 문을 열어보았다. 다행으로 연지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기에 부지런히 주방으로 가서 분유부터 탔다. 그리고 다시 안방으로 가서 잠들어 있는 은지를 모포에 싸서 안고 거실로 나왔다. 거실에서는 형부는 낚시가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오늘, 언니가 늦을지 모르니 내가 은지 데리고 잘게요.”
“언니는 왜 여태 안 왔지?”
“늦게까지 월말 결산하는 모양예요.”
“그런가.......!”
낚시 가방을 정리한 지훈은 처제를 마주할 면목이 없어 주춤거리다가 안방으로 들어갔다. 연주는 은지를 안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길게 한숨을 내뱉은 연주는 침대위에 연지를 눕히고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언니에게는 요부의 피가 흐르는 모양이다. 어떻게 은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친구의 아버지가 죽고, 어릴 적 친구였던 남자와 사무실에서 그 짓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연주는 아내를 믿고 있는 형부가 애처로웠다. 형부가 언니의 사생활을 알면서도 방관하는 것은 아니라고 연주는 생각했다. 아무리 아내를 이해하는 남편이라도 아내의 정조 없는 생활을 용서할리는 없다. 항상 너그러운 모습을 보이는 형부는 거울 뒷면에 있는 언니를 바라보면서도 인내하는 것 같다. 만약 베일 속에 감춰진 언니의 모습을 보면 형부의 심정이 어떨지 연주는 감히 상상도 하기 싫었다.
연희의 진면목은 알게 되고 연주는 자신을 범한 형부에 대한 경계의 벽을 허물어트리고 있었다. 연주는 형부가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결코 순간적인 충동이나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평소 형부의 성격이나 자신을 대하던 표정이나 눈빛으로 느낌을 알 수 있었다. 연주는 한 밤중에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형부의 심정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언니를 대신해서 형부를 위로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세상은 정말 불공평한지도 모른다고 연주는 생각했다.
그날 밤 연희는 늦게 들어왔고 결국은 연주가 은지를 데리고 잤다. 아침에 연희는 무안한 표정으로 연주의 방으로 들어와 자고 있는 은지를 끌어안았다. 늦게까지 잠을 못 이루었던 연주가 발딱 일어나 표독스럽게 쏘아붙였다.
“언니! 뭐야? 늦으면 늦는다고 말해야지. 내가 은지 엄마야? 난 언니만 믿고 있어서 은지 분유가 떨어진 것을 몰랐잖아. 그리고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미안하다. 요즘 유치원이 조금 바빠서........”
“언니가 요즘 이상해. 가정주부 같지 않고.”
“가정주부 역할만 하고 어떻게 사니.”
억지로 미소를 띤 연희가 오히려 툭 쏘아붙였다. 연주는 부아가 치밀었으나 자신이 목격한 사실에 대해 추궁할 수가 없었다. 언니는 언니 나름대로 인생이 있는데 자신의 말 한마디로 어떤 불행한 사태가 닥칠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침 일찍 말없이 나간 지훈이 은지의 분유를 한 박스 사들고 들어왔다.
분유를 사들고 들어오는 남편에게 연희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연희는 남편이 은지에게 소홀한 자신을 탓할 줄 알았다. 그런데 짜증은커녕 내색도 하지 않는 남편이 고마웠다. 한편으로는 유치원 운영에 관여치 않으려는 남편이 은지를 보살피는 처사가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히려 은지에 대한 관심을 유치원에 쏟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연주는 연주 나름대로 점점 힘겨운 시간이 흘러갔다. 집중이 되지 않아 공부도 되지 않고 언니를 생각할수록 은지와 형부가 안타까워 보였다. 언니는 형부가 술을 마시고 낚시나 다니는 것처럼 보일는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았다. 연주는 며칠 전에 형부가 친구와 같이 IT회사를 인수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흘렸다. 그 말을 하며 연주를 바라보는 형부는 무척 고뇌하는 눈빛이었다. 연주는 형부가 자신을 범한 자책감에 빠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한 집안에 살고 있지만 연희나 지훈, 그리고 연주는 각자의 생각에 빠진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연주를 당황스럽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초저녁부터 열기가 있던 은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연주는 알고 있는 상식을 짜내서 물수건을 적셔 수시로 은지의 열기를 내리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보리차를 식혀 먹여도 은지의 몸은 뜨거운 열기가 내리지 않고 열꽃이 피는 것 같았다. 오늘도 연희의 귀가시간은 늦어지고 있었다. 아기를 키운 경험이 없는 연주는 은지를 안고 거실과 방을 오가며 안절부절 하였다. 은지를 끌어안고 연주는 서성거리며 갈팡질팡하였다.
“은지야 어쩌니!?”
언니를 가다리다 못해 연주는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의 휴대폰에 걸어도 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았다. 유치원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희가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전화벨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유치원 사무실에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는 떠들썩한 음악소리와 환호성에 묻혀 있었다.
시끄러운 소리가 떠들썩한 유치원생들이 머물다간 큰 홀 안에는 긴 탁자가 가운데 놓여있었다. 촛불이 켜진 케이크가 놓인 탁자 주위에는 직원들과 아르바이트생, 그리고 연희가 박수를 치며 생일 축하 노래를 하고 있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우리 정민씨 생일을 축하합니다.”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노래가 끝나고 폭죽과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미스 정이 정민의 머리에 샴페인을 터트렸다. 하얀 거품을 뒤집어 쓴 정민이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어쩔 줄을 모른다. 정민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늦게까지 남아있던 직원들과 연희는 샴페인을 서로 따라주었다. 샴페인 잔을 들고 마주친 그들은 흥겨운 표정으로 웃음을 흘렸다.
“정민 씨 생일을 위하여!”
“하하하......!”
“축하 합니다.”
“호호호......!”
마냥 즐거운 분위기 속에 오디오에서 흥겨운 팝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연희는 직원들의 눈치를 살피며 마주보고 있는 정민에게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정민은 연희의 시선을 느끼며 행복함에 젖어 샴페인을 들이킨다. 소란 속에서 누군가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에 맞추어 노래를 하기 시작하고 하나 둘씩 따라 부르더니 합창을 했다.
아무리 전화를 해도 응답이 없기에 연주는 발을 동동 굴렀다. 점점 불덩이처럼 열기가 달아오르는 은지는 경련까지 일으키는 것 같았다. 연주의 머릿속에는 운전기사와 한 덩어리가 되어 있던 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연주는 형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자마자 온화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응! 처제.”
“형, 형부! 큰일 났어요. 은지가, 은지가.......”
“은지가 왜!?”
“은지가 열이 불덩이처럼 올라가요.”
“뭐라고!? 언니는?”
“언니는 동창 모임에 다녀온다고 했어요.”
“알았어. 지금 집에 거의 다 왔어.”
연주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언니를 위한 것 보다는 어쩌면 형부가 마음 아파할 것이 두려운지도 모른다. 형부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도 길기만 했다. 승용차 급브레이크 밟는 소리에 이어서 층계를 급히 뛰어오르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이 열리고 헐떡거리며 형부가 들어섰다.
“어떻게 된 거지?”
“모르겠어요. 초저녁부터 열이 오르더니.”
“빨리 병원으로 대리고 가보자고.”
열꽃이 피어난 은지를 들여다 본 지훈은 다급하게 외쳤다. 그리고 은지를 안고 있는 연주의 어깨를 끌어 당겨 현관으로 향했다. 은지와 연주를 시동이 걸려있는 승용차에 태운 지훈은 황급히 운전석에 올라앉았다. 승용차의 사이트를 풀고 급발진을 시켰다. 동네를 벗어나 질주하는 승용차가 유치원 앞을 지나치고 있었다.
연주는 차창 문으로 유치원 이층을 올려다보았다. 전화를 받지 않은 유치원 창문에는 환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실제로 여성의 실상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라는 정욕으로 말미암아 자기 기만을 끊임없이 하고 있을 뿐이다. 연주는 혹시나 형부가 유치원 창문을 바라보지나 않을는지 염려되었다. 지훈은 긴장된 표정으로 오직 은지만을 생각하며 페달을 밟아 속력을 내고 있었다.
시내 중심지에 있는 종합병원에 도착한 지훈과 은지를 안고 있는 연주는 응급실로 뛰어 들어갔다. 간호사들이 은지를 병상에 눕히고 체온계를 물리는 등 바쁘게 움직였다. 잠시 후 야간담당 의사가 다가와 은지를 진찰했다. 혼절하듯이 눈을 감고 있던 은지가 깨어나서 울음을 터트렸다. 바쁘게 움직이던 의사가 혼한 미소를 띠며 연주에게 돌아섰다.
“애기 엄마 되세요?”
“네........!?”
연주는 갑작스런 말에 당황하였다. 그때 옆에 섰던 지훈이 의사 앞으로 다가섰다.
“제가 은지 아빠인데요. 은지가 왜 그래요?”
“아! 걱정 안하셔도 돼요. 가벼운 장염 증상과 감기기운이 있는데, 염려할 정도는 아니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다행히 열기를 내리게 하고 수분섭취를 충분히 해준 엄마의 응급처치 덕분에 고열이나, 탈수증상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입원을 시켜야하나요?”
“이뇨. 이 정도는 약만 잘 복용시키고, 가습기를 틀어 주시고 안정을 취해주면 됩니다. 모유를 먹이지 않고 분유를 먹이는 아기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증상이니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만약 다른 증상이 있으면 데리고 오십시오.”
“감사합니다. 다행이네요.”
의사의 말을 들은 지훈은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주도 마찬가지였다. 의사가 은지의 엄마냐고 물었던 말에 부끄럽기도 하면서도 은지의 엄마가 된 심정이었다. 약을 타서 병원을 나오면서 지훈은 연주의 등을 토닥거렸다.
“처제! 고마워.”
“........!”
연주는 대답대신 미소를 띠어 보였다. 집으로 향하면서 핸들을 잡고 있는 지훈이 은지와 연주를 번갈아 보았다. 연주의 가슴에 안긴 은지는 안정을 찾았는지 쌔근거리는 숨소리를 흘리며 잠이 들어 있었다. 지훈의 시선을 의식한 연주는 언니대신 그의 아내가 되어 있는 느낌이어서 공연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내를 벗어난 승용차는 어느덧 천사 유치원 간판이 멀리 보이는 도로로 들어서고 있었다. 무심코 불이 켜진 유치원 창문을 바라본 지훈이 중얼거렸다.
“연지가 아픈 것을 알면 놀랄 텐데, 유치원에 들렸다 갈까.”
유치원 앞 도로에는 학원 봉고차가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보고 연주는 흠칫하며 놀랬다. 순간적으로 연주의 머릿속에는 정민과 언니가 부둥켜안고 있는 장면을 떠올랐다. 형부가 만약 그 광경을 목격하면 어떻게 하려는지 두려워졌다. 다급한 연주는 유치원을 바라보는 형부의 목에 팔로 감아서 당겼다.
“형부! 그냥가요. 언니가 직원들하고 어린이 프로그램을 작성한다고 했어요.”
“그럼, 보고 있다가 같이 들어가면 돼지.”
아무것도 모르는 형부가 사거리에서 유치원 간판이 보이는 도로로 핸들을 꺾으려 했다. 눈앞이 캄캄해지며 위기를 느낀 연주는 자신도 모르게 형부의 목에 두른 팔을 당기며 입술을 찾았다. 당황스런 지훈이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 다가오는 처제의 입술을 내려다 봤다. 끓어오르는 욕구로 처제를 범하고 나서 고뇌하던 그였다.
아내로부터 받은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 행동이기도 하지만, 아내보다 여성스러운 처제가 사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원망할 줄만 알았던 처제가 스스로 입술을 찾는 것에 지훈의 심장이 덜컹거리며 달아올랐다. 사이드브레이크를 당긴 지훈은 처제의 입술을 마주하였다. 그리고 처제를 끌어안으며 입술을 마주하였다.
위기를 모면하려고 형부의 관심을 들리려던 연주였다. 엉겁결에 자신도 모르게 형부에게 매달렸던 것이다. 막상 입술을 점령당한 연주는 도리어 자신이 위로를 받는 것 같았다. 어깨를 끌어안고 키스를 하던 형부가 입술을 헤집고 혀를 빨아 당겼다. 혀가 빨려 들어가면서 연주는 온 몸이 녹아내리는 짜릿함에 젖었다. 양팔로 형부의 목을 감고 매달렸다.
승용차 뒤편에서 헤드라이트가 비치고 경적소리가 들렸다. 한적한 도로였건만 언제 다가왔는지 뒤편에 화물차가 짐승처럼 버티고 있었다. 연주는 어쨌든 유치원으로 향하려는 형부의 관심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야만 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연주는 사이드브레이크를 푸는 형부에게 떨어지면서 눈웃음을 쳤다.
“아 잉~! 형부! 집에 빨리 가서 공부해야 한단 말예요.”
“그래! 그럼, 그냥 가지.”
승용차가 유치원 앞을 지나쳐 달리기 시작했다. 연주는 슬며시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여전히 유치원 앞에는 학원차가 주차되어 있고 이층에는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유치원이 멀어져 가고 연주는 그때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녀의 형부에게 안겼던 아늑함에 젖었던 연주의 가슴은 설레고 있었다.
지훈의 승용차가 사라지고 유치원 창문의 불빛이 꺼졌다. 그리고 연희와 정민 직원들이 층계를 내려왔다. 누군가 선동을 하고 잇따라 직원들이 계속 외쳤다.
“이차로 노래방, 노래방........!”
“노래방, 노래방.......”
“아휴! 시끄러운데 그만해. 지금 가고 있잖아.”
층계를 내려온 그들은 우르르 학원 차에 올라갔다. 어둠속을 밝히는 헤드라이트가 켜지고 학원 봉고차는 시내를 향하는 도로로 스르르 미끄러져 나갔다. 방향등을 깜박이는 봉고차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조수석에 오른 연희는 정민에게 미소를 띠워 보이며 손가방을 열었다. 휴대폰에 연주로부터 부재중에 걸려왔던 흔적을 발견했다. 하지만 연희는 남편도 집에 들어왔을 것이라고 안심하며 휴대폰을 손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집으로 돌아온 연주는 은지를 눕히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열기로 빨갛게 달아올랐던 얼굴에 화색이 돌아온 은지는 쌔근거리며 잠이 들어 있었다. 은지를 작은 침대에 눕히려는데 잠투정을 하는지 응얼거리며 연주에게서 떨어지려하지 않았다. 가슴에 안겼던 은지가 손을 뻗어 연주의 앞가슴을 더듬었다.--------------[다음]
나경은 말하지 않아도 연희의 심정을 알 것 같았다. 도리어 나경이 연희를 측은하게 바라봤다. 연희와 나경은 소리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침묵 속에 면회시간이 끝나고 있었다. 지키고 앉아 있던 교도관이 나경을 데리고 나갔다. 연희는 유치장 철문 안으로 사라지며 돌아보는 나경의 눈빛을 영원히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연희와 같이 나경의 면회를 다녀온 연주는 깊은 상념에 빠져 들었다. 항상 비밀을 간직한 분위기를 느끼던 언니의 베일 속이 더욱 궁금해졌다. 연희언니와 나경언니의 관계,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나경, 언니에게 우리 아버지를 사랑했느냐는 나경의 질문, 그리고 묘한 두 사람의 표정과 분위기들을 지울 수 없었다.
어린 시절에 연주는 집안에서 맴돌았고 연희언니는 날이 어두워야 집에 들어왔다. 연희 언니는 나경언니와 어울린 시간이 많았고 나경언니 집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연주도 몇 번 연희언니를 따라 나경언니 집에 갔었다. 정말 연희언니와 죽은 나경아버지는 어떤 관계일까. 연희언니가 나경아버지를 친아버지의 정을 느껴 사랑했다는 말인가. 그런데 어찌해서 나경언니는 자신의 아버지를 저주스러워 살해했다고 했을까. 친딸도 저주스러워하는 아버지에게 부정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았다.
연주의 머릿속에는 연희언니의 표정들이 지워지지 않았다. 친부모가 죽은 것보다도 더 슬퍼하는 연희언니의 모습, 나경언니의 질문에 당황하며 연주의 눈치를 살피던 표정들 속에는 분명히 깊은 의미가 숨겨져 있었다. 연주는 같은 여자로서 느끼는 직감이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나경언니가 연희언니에게 우리아버지를 사랑했느냐는 의미는 아버지로서가 아니고 남자를 대상으로 하는 감정이었다.
만약 연희언니와 나경아버지가 남녀의 은밀한 관계였다면 언제부터 일까. 여러 가지 여건상으로 보아 연희언니가 나경언니 집에서 살다시피 했을 시기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연희언니가 중고시절이 아닌가. 추측을 떠올리던 연주는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베일이 걷혀진 언니의 얼굴은 또 다른 가면을 쓰고 있었다. 언니가 어떤 여자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형부가 안타까웠다.
나경에게 면회를 다녀 온 뒤에 연주는 언니를 대하기가 무서웠다. 연희도 또한 나경이의 무심코 던진 질문에 동생이 어떤 낌새를 느끼지나 않았는지 두려웠다. 그러나 보름이 지나도록 연주는 의심스러워하는 말이나 표정을 보이지 않았다. 평소나 마찬가지로 은지를 보살펴주며 군소리 없이 살림을 도와주면서 틈틈이 열심히 공부를 하는 동생이 고마웠다.
연희는 나경아버지가 죽은 후 남편과 더욱 거리감을 느꼈다. 비록 유치원을 도와주지는 않지만 남편은 변함없이 그녀를 자상하게 대하고 짜증 한번 내지 않았다. 단지 연희 자신 스스로 자격지심과 열등감이 들었다. 자신의 치부를 건드리는 것 같아서 남편의 손길이 닿기만 해도 흠칫하며 놀랬다. 차츰 남편과의 부부관계도 소원해졌다.
자신의 의도는 아니어도 연희는 집에서 있는 시간보다 유치원에 나와 있는 것이 마음 편했다. 그녀의 대화상대가 되어 주는 사람은 늘 정민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정민은 열정적으로 유치원 운영을 도와주었다. 연희의 요구도 아닌데 홍보물을 만들어 넓은 지역까지 배포하였다.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의 끈끈한 감정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다.
조금씩 늘어가는 원생의 숫자에 연희는 유치원을 운영하는 보람을 느꼈다. 정민은 그녀의 인생에 후원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연희는 열정적인 도움을 주는 정민이 지극히 고마웠다. 한편으로는 나경아버지가 죽고 나서 허전해지는 마음을 메워주는 남자이기도 했다.
직원과 원생들도 돌아간 원장실에서 한 달간의 경리 장부를 마감한 연희는 흐뭇하였다. 지난달보다 백만 원이 넘는 수익이 발생한 것이다. 원생이 늘어서 수입도 좋았지만, 지출은 오히려 감소 된 것이다. 예전 같으면 유치원 자재나 건물 수리를 일일이 전문가를 불렀기에 경비가 많이 들었었다. 그런데 요즘은 정민이 부속을 사다가 직접 수리하였기에 비용이 생각보다 많이 감소된 것이다.
장부를 집어넣고 책상 서랍을 닫는데, 원장실 문이 덜컹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 선 사람은 정민이었다. 정민이 환한 표정으로 양손에 든 쇼핑백을 들어 올려보였다.
“아직 있을 줄 알았지.”
“그건 뭐야?”
“네가 배고플 것 같아서 피자를 사왔지.”
“아직 집에 안간 거야?”
“원장님이 퇴근 안했는데 기사가 갈수 있나?”
정민이 짓궂은 표정을 하면서 책상위에 쇼핑백을 내려놓았다. 요즘은 거의 정민이 봉고차로 연희를 집에까지 바래다주고 있었다. 쇼핑백을 열면서 연희가 하얗게 눈을 흘겼다.
“피 잇~! 웃겨. 그런데 웬 맥주?”
“간단하게 연희하고 한잔하려고.”
정민은 쇼핑백을 열어 피자와 맥주 캔들을 책상위에 끄집어냈다. 그들은 책상 앞에 나란히 섰다. 정민이 연희 앞에 포크를 내려놓고 맥주 캔을 땄다. 하얀 포말을 일으키는 맥주 캔을 연희에게 건네주었다.
“자! 천사유치원을 위하여!”
“고마워! 정민아.”
그들은 마주보고 웃으며 맥주를 마셨다. 배가 고팠던 연희는 연거푸 피자를 먹으면서 맥주를 마셨다. 짓궂은 표정을 한 정민이 연희의 엉덩이를 툭 건드렸다.
“연희는 갈수록 몸매가 미스 같아지니?”
“까불래? 어딜 만져.”
“왜!? 학교 다닐 때 흥륜사 잔디에서 안고 뒹굴던 생각 안나?”
“하기는 네가 나를 많이 쫓아 다녔지. 그러나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시절이잖아.”
“아니 지금도 나는 연희한테 똑같은 감정이야. 네가 아직 결혼 안했다면 너를 아내로 맞이하고 싶어.”
“그런 말 하지 마.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지?”
싫지 않은 정민의 말을 확인이라도 하듯이 연희가 물었다. 그러나 연희를 바라보는 정민의 눈에는 진심이 어려 보였다. 정민은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 것 같아 답답해서 맥주를 들이켰다.
“아니, 정말이야. 넌 내 마음 모르니?”
“피 잇! 요즘 미스들도 많은데, 넌 좋겠다.”
연희는 짓궂게도 정민을 비아냥거리는 말투를 흘렸다. 정민은 가정을 갖고 있는 연희가 안타깝지만 마음만이라도 알아 줬으면 하는 간절함이었다.
“정말이라니까. 난 너 같은 여자 아니면 다시는 결혼 생각 없어.”
“너, 여자 꾀는 수법이 늘었구나. 순한 촌놈이었는데.”
“연희는 그렇게도 내 마음 모르니!?”
정민이 왈칵 연희의 팔을 잡아 당겼다. 그리고 어깨를 끌어안았다. 연희는 이글거리는 정민의 눈빛을 바라봤다. 그녀는 어깨를 잡은 정민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정민의 가슴에 안긴 연희는 숨이 막할 것만 같았다.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쫓아다니던 정민이 진실로 자신을 여자로 여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처럼 훤칠한 인물은 아니지만 정민은 남자다운 얼굴이었다. 정민의 우람한 체격에서 흘러나오는 체취에 연희는 압도당해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정민의 입술이 점점 다가오고 열기를 느낀 연희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긴 속눈썹을 깜박이다가 살며시 눈을 감는 연희의 입술에 정민의 입술이 포개졌다.
입술이 마주하여 열기를 불러 일으켰다. 정민의 양손이 연희의 둔부를 감싸서 들어 올렸다. 정민의 혀가 연희의 입술을 헤집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의 혀를 강하게 빨아 당겼다. 연희는 오래간만의 진한 키스에 세포가 녹아내리는 아늑함에 젖어들었다. 혀와 혀가 엉키어 타액을 교환하였다. 자신도 모르게 연희는 정민의 목덜미에 팔을 두르고 매달렸다.
연희를 안는다는 것만으로도 두려웠던 정민은 의외로 그녀가 뜨겁게 매달리는 모습에 불같은 욕구가 끓어올랐다. 연희의 블라우스 속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푸드득하고 단추가 풀어진 그녀의 블라우스가 벌어졌다. 정민은 브래지어를 밀어 올리면서 그녀를 벽으로 밀고 갔다. 정민의 손아귀에 쥔 젖가슴에 돌기를 일으킨 젖꼭지가 들어났다. 정민은 허겁지겁 젖가슴에 머리를 묻고 혀로 젖꼭지를 핥았다. 그리고 젖꼭지를 입속으로 빨아 당겼다.
“하 으~! 저, 정민아.”
“널 사랑해.”
연희는 온 몸이 딸려 들어가는 쾌감에 파르르 떨었다. 그때 어디선가 전화 벨소리가 들렸다. 책상위에 놓인 연희 손가방 안에서 들리는 휴대폰 벨 소리였다. 연희는 휴대폰 벨소리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젖꼭지가 빨리면서 그녀는 허벅지 사이를 더듬는 정민의 손길에 흠칫 놀라며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녀의 손가방 안에서 계속 울리던 휴대폰 벨소리가 멈추었다. 그녀에게 전화를 한 사람은 연주였다. 연주는 은지에게 분유를 먹일 시간이 되었기에 분유통을 열고 보니 밑바닥에 조금 뿐이 없었다. 미리 점검해보지 않은 연주 탓이기도 하지만, 항상 분유를 언니가 준비하기에 방심 한 것이다. 연주는 퇴근하는 길에 분유를 사오라고 언니에게 전화 한 것이다.
유치원도 끝난 시간인데 언니는 오지 않고 전화도 받지 않기에 연주는 답답했다. 어쩔 수없이 은지가 깨어나기 전에 슈퍼라도 가서 구입해 놓을 수밖에 없었다. 혹시 모르기에 연주는 휴대폰을 들고 밖으로 나와서 계속 언니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나 여전히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멘트만 흘러나왔다. 작은 동네라서 그런지 동네슈퍼는 문이 닫혀 있었다.
연주는 할 수없이 다른 슈퍼를 찾아 빠른 걸음을 옮겼다. 도로를 따라 걷다보니 언니가 운영하는 유치원 근처까지 오게 되었다. 유치원 맞은편의 슈퍼는 문이 열려 있었다. 은지가 먹는 상품은 아니지만 우선 진열된 분유를 사들고 나왔다. 다시 집으로 향하려던 연주가 맞은편 건물 이층에 있는 유치원을 올려다보았다.
유치원 한쪽의 창문에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언니가 전화도 받지 않는데 불이 켜져 있어 연주는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다시 되돌려 길을 건너갔다. 천사유치원 간판이 달린 이층으로 올라가는 입구의 문도 열려 있었다. 연주는 언니에게 한마디 하려고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을 올라가 복도에서 불이 켜진 원장실로 가려던 연주는 그 자리에 꼼짝 못하고 얼어붙었다.
연주는 양손을 가슴에 모아 쥐고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불이 켜진 원장실 안이 유리벽 사이로 훤하게 들여다보였다. 벽을 등지고 있는 연희와 등을 지고 있는 운전기사 정민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다리를 벌린 연희가 정민의 허벅지위에 올라가 있었다. 유리벽 안을 들여다보는 연주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바지와 팬티를 발목에 건 정민의 엉덩이가 움직일 때마다 연희는 위로 솟구치며 일그러지는 표정을 지었다. 정민의 허벅지에 걸친 연희의 다리가 방향을 잃고 날갯짓을 하다가 정민의 허리를 옥죄인다. 그들의 거친 숨소리가 유리벽을 통과하고 들렸다.
“하 아~! 저, 정민아. 난 몰라.”
“헉! 연희야. 사랑해......”
정민의 머리를 끌어안았던 연희의 손이 위로 뻗쳐 창살을 움켜쥐었다. 정민이 치받을수록 위로 솟구쳤던 연희가 추락을 하면서 교성을 흘렸다. 헐떡거리는 남자의 거친 숨소리와 기절할 것 같은 여자의 신음소리. 외간 남자와 부둥켜 안은 언니의 모습을 연주는 도저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욱! 하고 구역질이 터져 나왔다. 토할 것만 같아서 연주는 입을 틀어박고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연주는 어떻게 집으로 왔는지 정신이 없었다. 집 앞에 세워져 있는 형부의 승용차를 보고서야 집에 도착한 것을 알았다. 형부가 집에 귀가했다는 것을 느끼고 연지가 걱정이 되었다. 급하게 층계를 올라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더듬거렸다.
“혀, 형부 오셨어요. 은지 분유 사가지고 오느라고.......”
“나한테 전화하지. 내가 사가지고 올걸.”
연주는 거의 강제적인 육체관계를 갖고 형부를 원망하였다. 그런데 서먹서먹하던 형부가 그렇게도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목격한 언니와 운전기사에 대해서 말할 수는 없었다. 언니를 대신해서 연주 자신이 죄를 지은 것만 같았다.
“식사는요?”
“아! 걱정하지 마. 먹고 왔어. 분유가 떨어진 줄 알았으면 내가 사올 건데. 미안해 처제! 이제부터 내가 신경 쓸게.”
머리를 긁적거리는 지훈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연주도 마찬가지로 형부를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형부를 외면하고 안방 문을 열어보았다. 다행으로 연지는 아직 깨어나지 않았기에 부지런히 주방으로 가서 분유부터 탔다. 그리고 다시 안방으로 가서 잠들어 있는 은지를 모포에 싸서 안고 거실로 나왔다. 거실에서는 형부는 낚시가방을 정리하고 있었다.
“오늘, 언니가 늦을지 모르니 내가 은지 데리고 잘게요.”
“언니는 왜 여태 안 왔지?”
“늦게까지 월말 결산하는 모양예요.”
“그런가.......!”
낚시 가방을 정리한 지훈은 처제를 마주할 면목이 없어 주춤거리다가 안방으로 들어갔다. 연주는 은지를 안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길게 한숨을 내뱉은 연주는 침대위에 연지를 눕히고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언니에게는 요부의 피가 흐르는 모양이다. 어떻게 은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친구의 아버지가 죽고, 어릴 적 친구였던 남자와 사무실에서 그 짓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연주는 아내를 믿고 있는 형부가 애처로웠다. 형부가 언니의 사생활을 알면서도 방관하는 것은 아니라고 연주는 생각했다. 아무리 아내를 이해하는 남편이라도 아내의 정조 없는 생활을 용서할리는 없다. 항상 너그러운 모습을 보이는 형부는 거울 뒷면에 있는 언니를 바라보면서도 인내하는 것 같다. 만약 베일 속에 감춰진 언니의 모습을 보면 형부의 심정이 어떨지 연주는 감히 상상도 하기 싫었다.
연희의 진면목은 알게 되고 연주는 자신을 범한 형부에 대한 경계의 벽을 허물어트리고 있었다. 연주는 형부가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결코 순간적인 충동이나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평소 형부의 성격이나 자신을 대하던 표정이나 눈빛으로 느낌을 알 수 있었다. 연주는 한 밤중에 자신의 방으로 들어온 형부의 심정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언니를 대신해서 형부를 위로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세상은 정말 불공평한지도 모른다고 연주는 생각했다.
그날 밤 연희는 늦게 들어왔고 결국은 연주가 은지를 데리고 잤다. 아침에 연희는 무안한 표정으로 연주의 방으로 들어와 자고 있는 은지를 끌어안았다. 늦게까지 잠을 못 이루었던 연주가 발딱 일어나 표독스럽게 쏘아붙였다.
“언니! 뭐야? 늦으면 늦는다고 말해야지. 내가 은지 엄마야? 난 언니만 믿고 있어서 은지 분유가 떨어진 것을 몰랐잖아. 그리고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미안하다. 요즘 유치원이 조금 바빠서........”
“언니가 요즘 이상해. 가정주부 같지 않고.”
“가정주부 역할만 하고 어떻게 사니.”
억지로 미소를 띤 연희가 오히려 툭 쏘아붙였다. 연주는 부아가 치밀었으나 자신이 목격한 사실에 대해 추궁할 수가 없었다. 언니는 언니 나름대로 인생이 있는데 자신의 말 한마디로 어떤 불행한 사태가 닥칠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침 일찍 말없이 나간 지훈이 은지의 분유를 한 박스 사들고 들어왔다.
분유를 사들고 들어오는 남편에게 연희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연희는 남편이 은지에게 소홀한 자신을 탓할 줄 알았다. 그런데 짜증은커녕 내색도 하지 않는 남편이 고마웠다. 한편으로는 유치원 운영에 관여치 않으려는 남편이 은지를 보살피는 처사가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오히려 은지에 대한 관심을 유치원에 쏟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연주는 연주 나름대로 점점 힘겨운 시간이 흘러갔다. 집중이 되지 않아 공부도 되지 않고 언니를 생각할수록 은지와 형부가 안타까워 보였다. 언니는 형부가 술을 마시고 낚시나 다니는 것처럼 보일는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았다. 연주는 며칠 전에 형부가 친구와 같이 IT회사를 인수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흘렸다. 그 말을 하며 연주를 바라보는 형부는 무척 고뇌하는 눈빛이었다. 연주는 형부가 자신을 범한 자책감에 빠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한 집안에 살고 있지만 연희나 지훈, 그리고 연주는 각자의 생각에 빠진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연주를 당황스럽게 하는 일이 벌어졌다. 초저녁부터 열기가 있던 은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연주는 알고 있는 상식을 짜내서 물수건을 적셔 수시로 은지의 열기를 내리려 노력하였다.
그러나 보리차를 식혀 먹여도 은지의 몸은 뜨거운 열기가 내리지 않고 열꽃이 피는 것 같았다. 오늘도 연희의 귀가시간은 늦어지고 있었다. 아기를 키운 경험이 없는 연주는 은지를 안고 거실과 방을 오가며 안절부절 하였다. 은지를 끌어안고 연주는 서성거리며 갈팡질팡하였다.
“은지야 어쩌니!?”
언니를 가다리다 못해 연주는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의 휴대폰에 걸어도 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았다. 유치원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연희가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전화벨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유치원 사무실에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는 떠들썩한 음악소리와 환호성에 묻혀 있었다.
시끄러운 소리가 떠들썩한 유치원생들이 머물다간 큰 홀 안에는 긴 탁자가 가운데 놓여있었다. 촛불이 켜진 케이크가 놓인 탁자 주위에는 직원들과 아르바이트생, 그리고 연희가 박수를 치며 생일 축하 노래를 하고 있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우리 정민씨 생일을 축하합니다.”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노래가 끝나고 폭죽과 팡파르가 울려 퍼졌다. 미스 정이 정민의 머리에 샴페인을 터트렸다. 하얀 거품을 뒤집어 쓴 정민이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어쩔 줄을 모른다. 정민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늦게까지 남아있던 직원들과 연희는 샴페인을 서로 따라주었다. 샴페인 잔을 들고 마주친 그들은 흥겨운 표정으로 웃음을 흘렸다.
“정민 씨 생일을 위하여!”
“하하하......!”
“축하 합니다.”
“호호호......!”
마냥 즐거운 분위기 속에 오디오에서 흥겨운 팝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연희는 직원들의 눈치를 살피며 마주보고 있는 정민에게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정민은 연희의 시선을 느끼며 행복함에 젖어 샴페인을 들이킨다. 소란 속에서 누군가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에 맞추어 노래를 하기 시작하고 하나 둘씩 따라 부르더니 합창을 했다.
아무리 전화를 해도 응답이 없기에 연주는 발을 동동 굴렀다. 점점 불덩이처럼 열기가 달아오르는 은지는 경련까지 일으키는 것 같았다. 연주의 머릿속에는 운전기사와 한 덩어리가 되어 있던 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연주는 형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자마자 온화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응! 처제.”
“형, 형부! 큰일 났어요. 은지가, 은지가.......”
“은지가 왜!?”
“은지가 열이 불덩이처럼 올라가요.”
“뭐라고!? 언니는?”
“언니는 동창 모임에 다녀온다고 했어요.”
“알았어. 지금 집에 거의 다 왔어.”
연주는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언니를 위한 것 보다는 어쩌면 형부가 마음 아파할 것이 두려운지도 모른다. 형부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도 길기만 했다. 승용차 급브레이크 밟는 소리에 이어서 층계를 급히 뛰어오르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현관문이 열리고 헐떡거리며 형부가 들어섰다.
“어떻게 된 거지?”
“모르겠어요. 초저녁부터 열이 오르더니.”
“빨리 병원으로 대리고 가보자고.”
열꽃이 피어난 은지를 들여다 본 지훈은 다급하게 외쳤다. 그리고 은지를 안고 있는 연주의 어깨를 끌어 당겨 현관으로 향했다. 은지와 연주를 시동이 걸려있는 승용차에 태운 지훈은 황급히 운전석에 올라앉았다. 승용차의 사이트를 풀고 급발진을 시켰다. 동네를 벗어나 질주하는 승용차가 유치원 앞을 지나치고 있었다.
연주는 차창 문으로 유치원 이층을 올려다보았다. 전화를 받지 않은 유치원 창문에는 환한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실제로 여성의 실상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라는 정욕으로 말미암아 자기 기만을 끊임없이 하고 있을 뿐이다. 연주는 혹시나 형부가 유치원 창문을 바라보지나 않을는지 염려되었다. 지훈은 긴장된 표정으로 오직 은지만을 생각하며 페달을 밟아 속력을 내고 있었다.
시내 중심지에 있는 종합병원에 도착한 지훈과 은지를 안고 있는 연주는 응급실로 뛰어 들어갔다. 간호사들이 은지를 병상에 눕히고 체온계를 물리는 등 바쁘게 움직였다. 잠시 후 야간담당 의사가 다가와 은지를 진찰했다. 혼절하듯이 눈을 감고 있던 은지가 깨어나서 울음을 터트렸다. 바쁘게 움직이던 의사가 혼한 미소를 띠며 연주에게 돌아섰다.
“애기 엄마 되세요?”
“네........!?”
연주는 갑작스런 말에 당황하였다. 그때 옆에 섰던 지훈이 의사 앞으로 다가섰다.
“제가 은지 아빠인데요. 은지가 왜 그래요?”
“아! 걱정 안하셔도 돼요. 가벼운 장염 증상과 감기기운이 있는데, 염려할 정도는 아니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다행히 열기를 내리게 하고 수분섭취를 충분히 해준 엄마의 응급처치 덕분에 고열이나, 탈수증상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입원을 시켜야하나요?”
“이뇨. 이 정도는 약만 잘 복용시키고, 가습기를 틀어 주시고 안정을 취해주면 됩니다. 모유를 먹이지 않고 분유를 먹이는 아기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증상이니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만약 다른 증상이 있으면 데리고 오십시오.”
“감사합니다. 다행이네요.”
의사의 말을 들은 지훈은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주도 마찬가지였다. 의사가 은지의 엄마냐고 물었던 말에 부끄럽기도 하면서도 은지의 엄마가 된 심정이었다. 약을 타서 병원을 나오면서 지훈은 연주의 등을 토닥거렸다.
“처제! 고마워.”
“........!”
연주는 대답대신 미소를 띠어 보였다. 집으로 향하면서 핸들을 잡고 있는 지훈이 은지와 연주를 번갈아 보았다. 연주의 가슴에 안긴 은지는 안정을 찾았는지 쌔근거리는 숨소리를 흘리며 잠이 들어 있었다. 지훈의 시선을 의식한 연주는 언니대신 그의 아내가 되어 있는 느낌이어서 공연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내를 벗어난 승용차는 어느덧 천사 유치원 간판이 멀리 보이는 도로로 들어서고 있었다. 무심코 불이 켜진 유치원 창문을 바라본 지훈이 중얼거렸다.
“연지가 아픈 것을 알면 놀랄 텐데, 유치원에 들렸다 갈까.”
유치원 앞 도로에는 학원 봉고차가 주차되어 있는 것을 보고 연주는 흠칫하며 놀랬다. 순간적으로 연주의 머릿속에는 정민과 언니가 부둥켜안고 있는 장면을 떠올랐다. 형부가 만약 그 광경을 목격하면 어떻게 하려는지 두려워졌다. 다급한 연주는 유치원을 바라보는 형부의 목에 팔로 감아서 당겼다.
“형부! 그냥가요. 언니가 직원들하고 어린이 프로그램을 작성한다고 했어요.”
“그럼, 보고 있다가 같이 들어가면 돼지.”
아무것도 모르는 형부가 사거리에서 유치원 간판이 보이는 도로로 핸들을 꺾으려 했다. 눈앞이 캄캄해지며 위기를 느낀 연주는 자신도 모르게 형부의 목에 두른 팔을 당기며 입술을 찾았다. 당황스런 지훈이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리고 눈을 감고 다가오는 처제의 입술을 내려다 봤다. 끓어오르는 욕구로 처제를 범하고 나서 고뇌하던 그였다.
아내로부터 받은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 행동이기도 하지만, 아내보다 여성스러운 처제가 사랑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원망할 줄만 알았던 처제가 스스로 입술을 찾는 것에 지훈의 심장이 덜컹거리며 달아올랐다. 사이드브레이크를 당긴 지훈은 처제의 입술을 마주하였다. 그리고 처제를 끌어안으며 입술을 마주하였다.
위기를 모면하려고 형부의 관심을 들리려던 연주였다. 엉겁결에 자신도 모르게 형부에게 매달렸던 것이다. 막상 입술을 점령당한 연주는 도리어 자신이 위로를 받는 것 같았다. 어깨를 끌어안고 키스를 하던 형부가 입술을 헤집고 혀를 빨아 당겼다. 혀가 빨려 들어가면서 연주는 온 몸이 녹아내리는 짜릿함에 젖었다. 양팔로 형부의 목을 감고 매달렸다.
승용차 뒤편에서 헤드라이트가 비치고 경적소리가 들렸다. 한적한 도로였건만 언제 다가왔는지 뒤편에 화물차가 짐승처럼 버티고 있었다. 연주는 어쨌든 유치원으로 향하려는 형부의 관심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야만 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연주는 사이드브레이크를 푸는 형부에게 떨어지면서 눈웃음을 쳤다.
“아 잉~! 형부! 집에 빨리 가서 공부해야 한단 말예요.”
“그래! 그럼, 그냥 가지.”
승용차가 유치원 앞을 지나쳐 달리기 시작했다. 연주는 슬며시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여전히 유치원 앞에는 학원차가 주차되어 있고 이층에는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유치원이 멀어져 가고 연주는 그때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녀의 형부에게 안겼던 아늑함에 젖었던 연주의 가슴은 설레고 있었다.
지훈의 승용차가 사라지고 유치원 창문의 불빛이 꺼졌다. 그리고 연희와 정민 직원들이 층계를 내려왔다. 누군가 선동을 하고 잇따라 직원들이 계속 외쳤다.
“이차로 노래방, 노래방........!”
“노래방, 노래방.......”
“아휴! 시끄러운데 그만해. 지금 가고 있잖아.”
층계를 내려온 그들은 우르르 학원 차에 올라갔다. 어둠속을 밝히는 헤드라이트가 켜지고 학원 봉고차는 시내를 향하는 도로로 스르르 미끄러져 나갔다. 방향등을 깜박이는 봉고차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조수석에 오른 연희는 정민에게 미소를 띠워 보이며 손가방을 열었다. 휴대폰에 연주로부터 부재중에 걸려왔던 흔적을 발견했다. 하지만 연희는 남편도 집에 들어왔을 것이라고 안심하며 휴대폰을 손가방 속에 집어넣었다.
집으로 돌아온 연주는 은지를 눕히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열기로 빨갛게 달아올랐던 얼굴에 화색이 돌아온 은지는 쌔근거리며 잠이 들어 있었다. 은지를 작은 침대에 눕히려는데 잠투정을 하는지 응얼거리며 연주에게서 떨어지려하지 않았다. 가슴에 안겼던 은지가 손을 뻗어 연주의 앞가슴을 더듬었다.--------------[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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