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드 위에 핀 꽃
1998면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제일 먼저 1997년 년 말을 강타한 IMF가 생각이 나실 것입니다.
1998년 일월 초부터 서울은행과 제일은행을 공개매각이 결정이 되고 2월에 새 대통령이신 김대중 대통령님께서 취임을 하시고 가타 경제적인 어려움이 아주 많아 생각을 하기도 싫은 그런 해가 1997년이고 뒤 청소를 시작하여야 하는 1998년도 솔직히 기억을 하고 싶지 않은 해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뭔가 새로 해야 한다는 희망이 생긴 한 해였습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당시 고작 열 살에 지나지 않는 소녀에게 말입니다.
이름만 나열하려 하여도 가슴이 떨리네요.
그보다 2년 전인 1996년에 프로로 전향을 하였고 이년 후인 1998년도 맥도날드 LPGA 챔피언십과 U.S 여자 오픈에서 우승을 하면서 신인상을 수상하였죠.
박세리 언니가 프로로 전향을 한다는 소식이 저에게 어떤 영향을 주신지 모르죠?
전 당시 주말마다 엄마아빠를 따라 골프장을 찾았답니다.
필드에 나온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골프를 치면서도 그렇지만 치지 않고 클럽 하우스에서 쉬면서도 박세리 언니 이야기가 단연 최고였고 아이를 엄마아빠들은 자기 아이들이 골프에 취미가 있느냐 없느냐에 촉각을 세우고 민감한 반응을 보일 정도였습니다.
IMF라는 것이 왔지만 그 IMF를 피하던 우리 아빠 엄마의 사업 덕에 전 엄마아빠를 따라 주말마다 골프장을 찾았고 그 덕에 저오 골프채라는 것은 만지고 놀았습니다.
물론 제법 많은 골프채를 망가트리고 공도 없앴지만 말입니다.
“장 사장님 따님 선수로 육성 해 보고 싶은 마음 없으세요?”제 기억이 맞는다면 아주 날씨가 흐렸던 날이었고 전날 일기예보로는 강풍을 동반한 폭우가 올 것이라는 주의보가 내린 그런 날이었습니다.
“잘하면 절반은 돌아지겠는데, 여보 가게 준비해 얼른”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아빠가 베란다로 나갔다 오더니 우리에게 말하며 골프 가방을 챙겼습니다.
“여보 오늘은 비도 온다고 했는데 쉽시다.”솔직히 엄마는 골프를 썩 좋아하지는 않았고 애처가임 아빠가 가자고 하면 마지 못 해 가는 그런 형편이었습니다.
“아~이 엄마 아빠 말 대로 가자 응 어서”전 엄마에게 어리광을 피우는 그런 소녀였죠.
엄마는 아빠의 독촉과 나의 아양에 마지 못 해 골프장으로 갔는데 일기예보가 그래서 그런지 골프를 치러 온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는데 아빠가 회원권을 가진 그 골프 클럽 소속으로 프로이며 손님들에게 레슨을 해 주기도 하는 아저씨와 아빠 엄마가 필드로 나갔고 난 엄마아빠를 따라 티샷을 하면 나도 티샷을 하는 흉내만 내며 졸졸 따르는데 그런 말을 프로 선수 아저씨가 하지 뭐예요.
“박 프로 쟤가 되겠어?”아빠가 골프채로 저를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사장님이 웬만한 프로 수준이시라 집 근처 연습장에 데리고 다니면서 기초를 세우고 필드 올리면 그때 저도 도와드리죠.”프로 아저씨가 말하지 뭐예요.
그날부터 전 학교가 파하면 돌아다녀야 하였던 각종 학원 영어 학원 피아노학원 태권도학원 등등의 각종 학원으로부터 독립 한 대신 전 가방을 집에 놓기가 무섭게 아빠 손에 잡혀 골프연습장에서 밤이 이슥하도록 거의 살다시피 하였답니다.
본래 아빠가 사업을 하고 엄마는 아빠 사업 뒷바라지를 하며 집안 살림을 살았었는데 제가 골프를 시작하면서는 사업은 엄마가 전적으로 담당을 하고 문제가 생기면 아빠에게 어드바이스나 받으며 하였고 아빠는 제가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시간 말고는 모든 것을 맡았습니다.
사 학년까지는 오전수업은 물론이고 오후 수업까지도 받았지만 오 학년에 올라가서는 오전 수업이 미치기 무섭게 가방을 가지고 학교 정문으로 나오면 이미 아빠는 승용차에 대기하고 있다가 마치 납치라도 하듯이 저를 차에 태우고는 골프연습장으로 가서는 죄 없는 골프공 한 박스를 티샷 한 후에 점심을 먹였고 저녁 늦게까지 티샷 연습을 시키고는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 제가 사 달라고 하는 음식을 사 주어 저녁 요기를 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우리 집의 전부가 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업도 제 뒤를 대 주기 위한 것이고 그런 사업을 하는 엄마도 제 뒤를 대 주기 위한 사업을 운영하는 것이었고 아버지의 경우 자신의 시간을 모조리 버리고 나라는 딸에게 모든 정열과 힘을 다하여 뒷바라지를 하는 체제 즉 저를 중심으로 온 가족인 엄마아빠가 돌아가며 살아갔던 것입니다.
잘 먹고 운동 열심히 하자 골프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체적 발육이었습니다.
땅콩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고 키가 고작 157에 지나지 않는 김미현 선수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중학교에 막 입학을 하여서는 169에 부끄럽게 젖가슴도 B컵의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골프연습장에서 연습을 하였지만 중학교에 입학을 하고도 아빠는 저에게 머리를 올려주지 않지 뭐예요.
저보다 늦게 시작한 아이들도 제가 알기로 몇 몇이 필드로 나간 것으로 아는데 말입니다.
핑계는 기초가 튼튼하지 못 하면 정상에 올라가더라도 오래 버티질 못 하고 밀려나온다는 것이 아빠의 지론이었습니다.
틀린 말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연습장에서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와 컴퓨터로 그날그날의 경기 전적을 훑어보면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정상에서 놀던 선수들이 이름도 올라오지 않은 것을 보고 전 아빠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속으로 언제 아빠가 나를 필드에 데리고 나가서 머리를 올려 주려나 하는 생각은 하루에도 몇 번씩 하였답니다.
이학년에 올라가서 처음으로 아빠와 함께 필드로 나갔습니다.
정말 떨리데요.
그날은 엄마도 함께 갔습니다.
결과는 아주 참혹하였습니다.
아빠야 나를 연습을 시키면서 자신도 쉬지 않고 연습을 하였기에 그렇다고 치더라도 엄마의 경우 제가 골프를 목적으로 한 후로 아빠의 사업을 이어받아 사업에만 몰두를 하노라고 한 번도 필드에 나가지를 못 하였는데 그런 엄마보다 타수가 더 나왔으니 이게 말이나 된단 말입니까?
이제 연습장에만 박혀 연습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필드로 나가 자연과 함께 연습을 하리라고 다짐하였던 나의 꿈은 말 그대로 물거품이 되고 만 순간이기도 하였습니다.
아니 장래를 골프로 잡은 자체를 변경하여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마음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엄마아빠의 격려가 저에게 힘을 주었습니다.
다시 연습장에서 살아야 하였습니다.
머리를 오리던 날의 이야기를 아빠로부터 들은 연습장의 선생님들도 제 실력이면 충분하게 필드에서 실력을 소화 시킬 수가 있을 것인데 라며 머리를 갸우뚱 거렸지만 현실은 현실이었고 그 현실은 더 피가 나도록 훈련에 집중토록 아빠로부터 채찍질을 당하도록 만드는 결과만 안겨주고 말았습니다.
또 그 결과는 되지 않는 것을 애에게 시켜 고생만 시키고 빛을 발하지도 못 하게 만들뿐더러 골프를 배우지 아니하고 예전처럼 공부에 몰두를 하였더라면 다른 분야에서 기를 펴고 있을지 모른다며 엄마가 아빠에게 잔소리를 하도록 만든 계기도 되어버렸습니다.
전 늘어나지 않는 제 실력과 싸우고 아빠는 제 실력을 올리려고 싸우면서 동시에 엄마의 잔소리와 싸워야 하였고 엄마는 엄마대로 되지도 않는 골프를 시키는 아빠에 대한 불만으로 싸웠고 그럼 전 엄마아빠의 싸움의 시발점이 저 인 것을 알기에 풀이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삼학년부터 이상한 현상이 생겼습니다.
제 몸에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아빠가 골프채를 잡은 제 몸을 잡고 자세를 고쳐주려고 하면 처음엔 저도 모르게 땀이 흐르기 시작하였으나 회가 거듭 할수록 아빠의 손길이 닿은 부위에서 찌릿찌릿함을 느끼기 시작 한 것입니다.
그런 현상은 여름이 되어 짧은 반바지에 민소매 티를 입고서 연습을 하는데 아빠의 제 살에 닿는 손길은 뜨겁다 못 하여 어지어울 정도였으나 전 그 이유를 전혀 몰랐습니다.
연습을 마치고 하우스로 들어가 샤워를 하려고 팬티를 벗자 팬티 가장자리가 축축하게 젖어있어 놀란 나머지 축축한 것을 손가락에 묻히고 비볐더니 소변을 찔끔대었을 경우의 그곳과는 달리 아주 매끄러운 느낌이 들었고 많이 묻혀 천천히 손가락을 벌렸더니 마치 침을 손가락 사이에 놓고 하는 것처럼 길게 늘어났습니다.
한 달에 한 번 거르지 않고 생리를 하는 처지였지만 난 그 것에 대한 정체는 전혀 몰랐습니다.
생각을 해 보세요.
아침에 밥을 먹기 무섭게 아빠가 운전하는 차로 학교에 갔다가 오전 수업만 겨우 마치고 교문으로 가면 거기에는 시동을 끄지도 않고 기다리는 아빠 차가 있었고 그럼 전 아빠 차에 가방을 내려놓고 연습장에 가서는 간밤 사이와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사이 손이 굳었을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점심도 먹이지 않고 몇 박스의 골프공을 티샷을 한 후에 제 속이 차는 것이 아니라 지켜보는 아빠의 기분이 흡족하여지면 그때서야 늦은 점심을 먹고는 쉬는 것이 아니라 가벼운 트레이닝으로 몸을 만들어야 한다며 움직이게 하는 통에 변변하게 쉬지도 못 하고는 다시 티샷을 밤이 이슥하도록 치고서야 집으로 와서 저녁을 먹으니 제가 다른 생각을 할 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잖아요.
학교에 등교하면 책상에 엎드려 잠이나 자기 일쑤이고 그러다가 어영부영 시간만 지나면 학교 앞에 기다리고 있던 아빠 차를 타고 연습장에 가서는 아빠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지 않기 위하여 땀을 닦을 여유도 없이 골프채를 휘두르다가 점심이랍시고 간단한 비빔밥 한 그릇에 땡이고 저녁 7시나 되어서 저녁도 아닌 간식이라며 컵라면 하나로 때우고 10시까지 치다가 집으로 가면 열시 반이고 씻고 저녁을 먹으면 12시가 거의 다 되어서이니 여러분이 생각을 하여도 수면 부족에 영양실조이겠으며 얼마나 몸은 피곤하겠습니까.
하지만 스파르타식 교육의 아빠는 일요일도 없었습니다.
몰라 필드에 나가서 친다면 비오는 날이라 소위 공치는 날이 되어 쉬기나 하겠지만 골프연습장이란 곳은 일 년 열두 달 삼백육십오일 내내 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푸념이라도 할라치면 저 때문에 자기도 시간을 내지 못 해 친구들과 만나지 못 한다는 말에는 저도 다시 입을 열지 못 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말이 아닌가요.
고등학교에 올라갔습니다.
진짜 머리를 올리려고 필드에 나갔습니다.
같은 또래의 고등학생과 같이 필드에 섰습니다.
그 애는 중학교 3학년 때 이미 전국 대회에서 여자 중등부 우승의 경력을 가진 애였습니다.
제가 기어이 넘어야 할 산이었던 것입니다.
제 캐디는 당연하게 아빠가 맡았습니다.
아빠와 그리고 저와 함께 골프를 치기로 한 애 엄마 사이에 말이 오고가더니 아빠가 저와 그 애를 불러 세우고 첫 라운딩임만큼 아웃코스인 9홀까지만 하기로 하였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상대애가 앞서 나갔습니다.
아빠는 마음을 급하게 굴지마라고 수시로 귓속말로 주의를 주였습니다.
5홀까지도 상대애가 저보다 3타 앞서갔습니다.
6홀에 올라섰습니다.
제가 먼저 티샷을 하였습니다.
전 멋지게 그린에 그도 홀 아주 가깝게 올렸습니다.
상대애가 떨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바로 나타났습니다.
필드 앞의 벙커로 공이 빨려 들어갔습니다.
앞으로 치고 나갈 기회가 온 것입니다.
열 살 즉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골프연습장에서 티샷 등의 연습만 몰두한 탁에 기본기가 남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저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빠가 친 샷 사인을 보냈습니다.
전 아빠에게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내고 공과 홀의 각도를 살폈다.
저와 경기를 벌이는 애보다 그 애 엄마가 더 긴장을 하며 저의 샷에 눈을 돌리지 못 하였습니다.
제가 친 공이 마치 흡혈귀가 목에 이빨을 대고 피를 빨듯이 홀은 제 공을 그대로 빨아들였습니다.
보기였습니다.
반면 그 애는 벙커에 들어가 벗어나려고 공을 쳤지만 힘이 너무 강하게 주었던지 깃대에서 먼 쪽으로 날라 가는가 싶더니 자기 엄마가 원 그린이라고 외치는 것과는 달리 필드를 다시 벗어났습니다.
그 애 엄마는 화를 내었습니다.
다시 그 애가 쳤으나 핀에 가까이 보내지 못 하였습니다.
그대부터 그 애는 더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웃코스를 마쳤을 때 그 애와 난 역전이 되어있었고 그도 4타나 차이가 났습니다.
여자의 질투는 한 여름에도 서리가 내리게 만든다고 하였든가요.
그 애 엄마가 그 애 머리를 쥐어박는가 싶더니 아빠에게 와서 뭐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빠가 저를 불렀습니다.
그 애 엄마가 자존심이 상한다면서 인코스까지 가자고 하는데 자신이 있느냐고 제 엉덩이를 가볍게 치며 물었습니다.
저도 모르는 짜릿함과 함께 자신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도 모르게 힘이 났습니다.
전 여유 있게 그 애를 더 앞서 나갔습니다.
인코스까지 끝을 냈을 대 전 그 애보다 무려 8타나 앞서고 있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 애 엄마를 달래며 아빠가 우리들(상대 애와 저)뒤에 서서 따라오며 클럽 하우스로 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참을 가다가 뒤를 보았더니 아빠와 그 애 엄마의 모습이 보이질 아니하였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같이 가 던 저와 게임을 하였던 애에게 의아스런 얼굴을 하며 묻자 그 애는 배시시 웃기만 하였습니다.
그 애를 다그쳤습니다.
그 애가 저를 인적이 없는 나무그늘 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충격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자기 엄마는 골프를 시작한 만만한 애들의 부모들을 꼬드겨 내기 게임을 자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진 말도 충격적이었지만 그 애의 다음 말은 저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만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엄마는 자기가 지게 되면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때우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애는 고등학교가지 올라간 애가 그런 것도 모르냐며 핀잔을 주었습니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 아닌가요.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애는 빠구리란 말을 하였고 도 모른다고 하자 우습다는 듯이 저를 동정어린 눈으로 보며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것으로 여자 보지구멍에 좆을 박고 펌프질을 하는 것이라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미국에 골프 연수 받으러 가면서 반년 이상의 시일이 소요하기에 엄마를 대동하고 갔는데 거기서 엄마가 다른 남자들과 붙어먹는 것 같았고 자기도 미국 남자하고 연애를 하였다고 저에게 노골적으로 고백하였습니다.
그 애 이름 밝히지 않고 애라고만 말하는 이유는 그 애는 저와 달리 지금도 프로로 활약 중이기에 차마 이름을 밝히지 못 함을 이해해 주셨으면 하네요.
하여간 그날 저 엄마하고 그 애 엄마가 그 애 말대로 빠구리를 하고 오는 동안 많은 이야기를 하였고 거기에서 성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또한 저의 인생에 대한 하나의 전환점 역할도 해 주었습니다.
몸을 마구 굴려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 애 엄마는 저를 우습게 여기고 자기 딸의 희생물로 만들어 돈을 벌려고 하였으나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골프연습장에서 살다시피 한 저를 몰라보고 우리 아빠에게 내기 게임을 제안하였는데 이기면 진 사람이 오십을 주되 진 사람이 돈이 없을 경우 몸으로 때우기로 하였으며 그 애 엄마는 자기 딸이 지자 자기 몸으로 때웠던 것 같았습니다.
그로부터 전 아빠의 손길이 제 몸에 닿으면 짜릿함을 느꼈던 이유를 알게 되었고 그 이후로 저는 아빠만 보면 제일 먼저 저도 모르게 아빠의 바지 가장자리에 시선을 두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엄마가 있는데도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는 아빠가 천박하게 보였습니다.
대회에 출전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대회 출전이란 것이 한 곳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전국을 돌았습니다.
물론 저의 캐디 노릇을 해 주는 아빠와 함께 말입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애들과 같이 출전을 하였기에 전 애들과 같은 숙소를 썼으나 아빠는 같은 숙소의 다른 방에서 혼자 지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말에 우리 집에 큰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아빠 대신 사업에 전념하던 엄마가 시름시름 앓는가 싶더니 결국 자리를 보전하고 말았습니다.
아빠가 부랴부랴 엄마를 데리고 병원에 입원을 시켰습니다.
하지만 엄마 몸은 이미 암 덩어리들로 수술까지 불가능한 몸이었습니다.
아빠가 고민에 빠졌습니다.
제 뒤를 계속 보살피느냐 아님 엄마가 자신을 대신하여 운영하던 사업을 계속하느냐로 말입니다.
엄마는 아빠에게 말하였습니다.
이왕 골프에 몸을 담은 이상 골프가 아닌 다른 것을 할 수가 없게 된 딸을 위하여서라도 사업을 정리하고 계속 제 뒷바라지를 하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아빠 곁을 떠나지 말라고 당부를 하고요.
그 말은 엄마의 마지막 유언이 되어버렸습니다.
엄마가 죽은 후 아빠는 아주 기다란 베개를 하나 구하였고 술이 취해 잠을 잘 적에 그 베개를 아랫도리 사이에 끼우고는 끌어안고 저도 모르는 이상한 행동을 하면서 엄마 이름을 부르는 것을 종종 보았고 그게 남녀 간의 섹스 동작이란 것을 어렴풋이 짐작을 하였고 아빠는 그 기다란 베개를 엄마라고 생각하고 끌어안고 섹스 동작으로 몸을 푼다고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만 18세가 되던 해에 전 프로로 전향을 하였습니다.
학교는 적만 두고 아빠와 단 둘이서 프로 대회에 출전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성적은 하위권에서 맴돌았습니다.
출전 경비도 나오지 아니하였습니다.
아빠는 경비 문제로 힘들어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여관방에서 자다가 이침 일찍 아빠가 자고 있는 방으로 가면 아빠 방에서 다른 여자들이 종종 보였으나 경비 문제가 심각하여지자 그런 여자의 모습은커녕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만큼 경비 문제는 심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저에게는 그런 부분에 대하여서는 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아빠 골프 선수생활 그만 두고 아마 코치나 할까?”모 사립 초등학교의 교장선생님이 갤러리로 오셨다가 저에게 한 제안을 기억하고 물었습니다.
“뭐라고 겨우 코치 같은 것이나 시키려고 내가 그 고생을 한 것으로 보이니? 그건 그렇고 넌 언제까지나 나를 아빠라고 부를래?”아빠 입에서 전혀 제가 의도한 말이 아닌 말이 나왔습니다.
“아빠를 아빠라고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불러?”의아스런 눈으로 아빠를 보며 물었습니다.
“임마 아빠란 말은 아주 안 좋은 말이야”아빠가 꾸짖듯이 저를 노려보며 말하였습니다.
“뭐가 안 좋아?”저도 지지 않고 물었습니다.
먼저 나이가 오십이 겨우 넘은 나이지만 제 기억으로 제가 골프를 막 치기 시작하였을 때 아빠를 따라 아빠 친구들과 함께하는 술자리에 가면 아빠 친구들은 같은 또래이면서 왜 저렇게 구식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수 없이 들었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골프를 시키기는 하였지만 골프를 치게 하려고 필드에 내 세우지 못 한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바로 짧은 치마와 짧은 반바지가 그 이유란 것을 저는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아빤 딸아이인 저는 물론이지만 다른 여자 골프 선수들이 입은 짧은 치마나 짧은 반바지차림으로 골프 치는 것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며 또한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롤 몰라 안절부절 못 하는 경우를 자주 봤거든요.
처음에는 짧은 치마나 짧은 반바지차림으로 골프 치는 여자들을 보고 그런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다만 어린 저로서는 소변이 마려워서 그런 줄로만 알았던 것입니다.
“아빠란 말은 옛날 직장도 귀하여 못 먹고 못 입을 때 젊은 여자들이 남의 첩으로 살면서 상대를 영감이라고 부르자니 젊은 자신이 한심하고 그렇다고 요즘처럼 자기란 단어가 있었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부를 단어는 여보 뿐인데 첩 처지에 여보라고 부를 수도 없어서 만들어진 호칭이 아빠야 아빠”아빠가 차의 시동을 켜더니 길게 설명을 하더니 제 머리에 꿀밤을 주었습니다.
“!”순간 전 마음의 결정을 하였습니다.
경비 문제도 일부분 해결하고 아빠의 욕구도 해결시킬 방법을 말입니다.
“알았어, 차차 주의 할게, 이번은 경기도 00컨트리클럽이지?”웃으며 물었습니다.
“그래”아빠가 말하며 지갑을 열었습니다.
몇 십 만 원 정도의 지폐가 전부였습니다.
“아빠 경비 딸리지?”아빠가 차를 운전하였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만 보고 차를 운전하였습니다.
“여관비라도 아낄까?”아빠에게 제안을 하였습니다.
“임마 아무리 딸이라고 하지만 다 큰 애와 어떻게 그도 여관방을 같이 쓰니”백미러로 저를 노려보며 말하였습니다.
“아빠하고 딸인 것 단골 여관은 모르는 주인이 없는데 뭘 그래”저도 지지 않고 말하였습니다.
프로로 전향을 하고 2년가량을 전국 대회에 출전을 하다 보니 단골 여관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 경비 절약 차원에서 방 하나만 얻어 아빠와 같이 사용하면 적어도 여관비가 절반으로 줄어들기에 그나마 경비 절약 효과가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그보다 제가 경기에서 입상을 하여 상금을 받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지만 미국에서 박세리 언니 선수께서 골프를 많이 대중화시켰고 또 일찍 역량 있는 선수들을 발굴하여 일류 코치 지도하에 육성을 시킨 탓에 코치도 없이 아마 수준의 아빠 감독 하에 골프연습장에서 연습만 하였던 저로서는 솔직하게 말하여 아빠의 극성만 아니면 초등학교 코치 정도나 하면 될 정도의 골프 수준으로 프로에 뛰어들었으니 말 그대로 언감생심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방법은 오로지 제 실력이 향상 되어 상위권에 오르게 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골프라는 운동이 그리 호락호락하게 볼 만한 그런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저의 경우 모든 사람들이 기본기는 어디에 내다 두어도 손색이 없는데 왜 상위권에 접어들지 못 하겠다는 것이 대부분의 골프를 조금 친다는 사람들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골프 시합에 나가 골프를 치는 것을 보고 모 사립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자기 학교 코치로 오라고 했던 것이고요.
“넌 경비에 대하여 신경 끄고 실력 올릴 방안이나 연구하고 시합 때 공에 신경이나 써”아빠는 여전히 저를 나무라기만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빠의 말은 전혀 틀리지 않은 말이었습니다.
“그래 그건 알겠는데 우리 같은 방 쓰자 혼자 자자니 무섭기도 하단 말이야”난 핑계를 만들었습니다.
“내일 모래면 시집을 가도 될 처녀가 무섭기는 뭐가 무서워?”아빠가 백미러로 힐끔힐끔 노려보며 말하였습니다.
“아냐 그렇게 무서움에 시달리면 다음 날 시합이 잘 풀리지 않아”지지 않고 대꾸를 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했냐고요?
엄마가 죽고 혼자로 살면서 몸을 풀지 못 하고 제 뒷바라지에만 신경을 쓰는 아빠의 여자가 되기로 결심을 하였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시합이 없을 때 집에서 기거하면서 전 간혹 아빠의 침실인 안방에서 나는 가는 신음소리를 들었었고 몇 번인가는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은 탓에 제가 훔쳐보기도 한 것이 있었답니다.
처음 저에게 성에 대하여 눈을 뜨게 해 주었던 애가 알려준 성인 사이트를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성에 대한 호기심을 일 깨웠던 것인데 모니터의 동영상으로만 보아왔던 남자의 딸딸이 치는 모습은 전 아빠가 직접 하는 것을 훔쳐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의 성욕도 맛을 알게 되면 참지 못 하고 자위로라도 해결하듯이 남자 역시 성욕을 참지 못 하면 딸딸이로 성욕을 푼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물론 저도 자주는 아니지만 자위를 하였죠.
“...........”제 말에 아빠는 여전히 백미러로 힐끔힐끔 저를 보았지만 아무 대꾸를 못 하였습니다.
제가 만든 덧에 아빠가 걸려들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빠 이번에만 그렇게 해 보자 으~응”어리광을 피우며 아빠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휴~모르겠다.”아빠가 한숨을 쉬더니 앞만 보고 운전을 하였습니다.
일 단계 작전은 성공이었습니다.
경기가 있을 골프장 인근의 단골 여관에 예전과 달리 방을 하나만 빌린 것입니다.
단골로 이용하던 여관인지라 부녀간이란 것을 알았었고 왜 따로 쓰지 방 하나를 쓰느냐는 여관 주인아주머니의 질문에는 제가 나서서 경비 절약 방안이라고 말하자 이해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특실을 하나 주었습니다.
다음 날 출전을 위하여 주최 측에 참가를 알리서 시트 배정을 받고 연습을 조금 하다가 다시 여관에 와서 잠을 자고 그 다음 날부터 경기에 출전을 하기 전까지는 한가하다고 해도 상관이 없을 그런 시간이었지만 경기 전날 아빠에게 제 몸을 준다면 예전에 저와 경기를 붙였다가 자기 달이 지자 몸으로 때웠던 애의 엄마가 우리 아빠하고 빠구리를 하러 간 사이에 그 애에게 들었던 성에 대한 상식이 저에게는 전부였는데 그 애 말에 따르면 처음 하면 구 다음 날까지도 통증이 느껴진다고 했었기에 시합을 위하여 도착 한 날 밤에 실행을 하기로 결심을 하였던 것입니다.
전 아빠가 술에 취하면 그 기다란 베개를 엄마라고 생각하고 끌어안고 섹스 동작으로 몸을 푼다고 생각을 하였던 것을 생각하였고 아빠에게 그렇게 하게 만들려면 일단 술을 먹여야 하는데 경기 전날은 술을 안 마셔도 전 전날은 술을 마신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저는 여관 밖으로 나와 족발하고 소주 두 병을 사서 다시 여관으로 들어 왔습니다.
“아빠 선물”아빠에게 족발하고 소주 두 병이 든 비닐 봉투를 건네자
“수미야 이런 선물보다는 상위권에 드는 것이 나에게는 더 큰 선물이다”아빠가 족발하고 소주 두 병이 든 비닐 봉투를 받고는 안을 들여다보며 은근한 압력을 넣었습니다.
“헤헤헤 이번엔 잘 해 볼게”전 웃음으로 때워야 하였습니다.
아빠가 족발은 안주삼아 소주를 마시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빠 나도 한잔 줘”하고 웃으며 말하자
“너 술 배웠니? 누구에게 언제 배웠지?”아빠가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헤헤헤 아빠에게 이제라도 배워 보려고”아빠에게선 잔을 받으며 말하였습니다.
사실 술을 배우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오로지 곧 이어 다가올 아빠와의 첫 빠구리 때의 통증을 술로 완화를 시켜보려는 욕심에서 술을 마시기로 작정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 맞아 술은 어른 앞에서 배워야하지”아빠가 제 의중을 전혀 모르고 잔에 술을 따라주었습니다.
“크~이렇게 쓴 것을 왜 마신데?”단번에 소주를 들이 키고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자
“하하하 그렇게 해서야 술을 어떻게 배우겠니?”아빠가 잔을 빼앗으며 말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전 한 잔을 더 얻어 마셨습니다.
알 딸딸 하대요.
한 벙 반이 주량인 아빠는 다 버려도 술은 버리지 못 한다며 주량이 조금 넘게 마셨습니다.
일차 제 작전은 성공을 한 것입니다.
아빠가 방바닥에서 다리를 뻗고 저보다 먼저 잠이 들었습니다.(몸을 더운 열로 지져야 한다면 항상 아빠는 저에게 온돌방에서 자게 고집하였기에 그 방도 온돌방이었습니다.
전 바로 알몸이 되어 슬며시 아빠 옆에 나란히 누웠습니다.
정말 떨리데요.
하지만 아빠는 아무 것도 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있었습니다.
슬며시 아빠 품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아~ 여보”아빠가 저를 죽은 엄마인줄 알고 끌어안았습니다.
“...........”숨 소리마저 죽이고 아빠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습니다.
“여보 사랑해”아빠가 저의 가슴을 움켜잡으며 말하였습니다.
그러더니 제가 기다리던 행동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술이 취한 체 트레이닝바지를 힘들여 벗기 시작한 것입니다.
집에서도 몇 번이나 보았던 기다란 베개를 상대로 해 온 그 동작이었습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을 하였지만 술에 취하여 잠들어서는 꿈에서의 행동인지는 모르지만 기다란 베개만 끌어안게 되면 바로 트레이닝바지를 벗고 팬티도 벗은 다음 아랫도리 사이에 그 베개를 끼우고 엉덩이를 들썩였거든요.
아빠의 트레이닝바지와 팬티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더군요.
그리고 저를 가랑이 사이로 끼우고 끌어안더니 저 위로 올라오더니 좆을 보지둔덕에 대고 마주 비비는가 싶은 순간
“악! 아빠 잠시만”아빠의 등을 끌어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외치자
“아니 이게 뭐니? 내가 미친 것 아냐!”그때서야 아빠가 눈을 뜨더니 방바닥을 짚으며 상체를 들더니 자신의 좆이 박힌 베 보지와 제 얼굴을 번갈아보더니 놀라며 말하였습니다.
“아빠 내가 원해서 내 스스로 아빠에게 준 거야 계속 해”하고 말하자
“넌 딸이야 어디 애비가 딸년을 상대로 이 짓을 한단 말이니”하며 빼려들자
“싫어 이미 내 처녀는 아빠 목이 되어버렸어”하고 말하며 양다리로 아빠의 엉덩이를 감았고 그도 부족하여 아빠의 몸을 두 팔로 끌어당겨버렸습니다.
아빠는 남자였지만 발과 팔로 하는 골프를 치는 저에게서 벗어난다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휴~ 술이 원수고 내가 죽일 놈이지”하고 말하며 아빠는 본능을 이기지 못 하겠던지 아주 천천히 펌프질을 하였습니다.
제 생각대로 아빠의 여자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아빠 좋아? 베개보다 좋아?”아팠지만 일부러 환하게 웃으며 묻자
“너 봤니?”놀라며 물었습니다.
“헤헤헤 봤으니까 아빠의 습관을 알고이랬지 뭐”헤헤거리며 말하자
“그.............그랬구나.”하고 말하며 펌프질에 가속을 붙였습니다.
아빠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저를 달이 아닌 여자로 인정하고 본격적인 빠구리를 시작한 것입니다.
“헤헤헤 다시 묻겠는데 베개보다 좋아?”하고 묻자
“그걸 말이라고 하니”아빠가 펌프질을 하며 말하였습니다.
“헤헤헤 그렇다면 내가 아빠 아들 하나 낳아줄까?”계속 헤헤거리며 말하였습니다.
“뭐? 뭐라고?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죽어서 너희엄마 얼굴 볼 낮이 없는데 딸인 너에게 임신까지? 말도 안 되는 소리다”하면서도 아빠는 펌프질만은 멈추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렇게 전 경기 전 전날 제 의지에 따른 저의 과감한 행동이었지만 어찌 됐던 간에 아버지의 좆에 의하여 26년간 고이 간직하였던 처녀막을 뚫렸고 그 다음 날 이미 참가 예비 엔트리에 들어있던 저를 아빠는 부상으로 안하여 출전을 하지 못 하게 되었다고 통고를 하고 그길로 우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바로 저를 스카우트를 할 의향을 가졌던 사립 초등학교를 제 스스로 찾아가서 코치직을 맡아보기로 하겠다고 하자 교장선생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코치로 임명을 하였고 그 다음 주 월요일부터 학교로 출근을 하여 초등학생들을 상대로 기본기를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프로 출신의 코치가 학교 코치로 왔다는 소문은 아이들 입과 귀로 전파가 되었고 그 소문은 학부모들에게까지 나자 학부모님들이 학교 당국에게 토요일 오후와(물론 노는 토요일은 종일)일요일에 학부모들 상대로 지도를 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구하자 돈의 위력 앞에 학교당국도 거절을 하지 못 하고 학교의 골프 연습 시설은 저에게 사용토록 승낙을 하였고 저는 일주일 전에 예약을 받고 일정액의 시간당 교습 비를 받으며 학부모와 선생님들에게까지 지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변한 것이 있다면 아빠도 아파트를 팔고 방 두 개짜리 다세대주택을 구입하여 이사를 하고는 남은 돈으로 예전에 하던 사업을 다시 시작하였답니다.
예전의 성실함을 아는 거래처들이 하나 둘 아빠에게 다시 돌아옴으로서 사업 초반에는 적자를 면치 못 하였으나 지금은 완전히 흑자로 돌아선 상태입니다.
거기다가 또 변한 것이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낮이나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예전처럼 아빠와 딸 사이로 돌아가지만 단 둘이 있게 되면 전 아빠를 자기라고 부르고 아빠는 저를 여보라고 부르는데 빠구리 하는 도종에는 더더욱 그 호칭을 즐겨 쓴답니다.
그렇게 낮에는 평범한 부녀로 지내다가 밤이면 밤마다 아빠의 아내 아닌 아내로 변신을 하는 저는 아빠와 26살부터 관계를 가진 후 올해로 만 5년에 접어드는데 5년 동안 저는 아빠의 아기를 두 번 임신하였고 저는 낳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아빠의 통사정에 굴복을 하고 결국 두 번의 중절 수술을 받았는데 그 두 번의 중절수술은 저에게 아주 큰 의미를 두 가지 주었답니다.
그중 하나는 좆 맛을 그 전에는 몰랐고 그저 아빠가 즐거워하기에 저도 마냥 좋았지만 두 번의 중절수술 후에 전 좆의 참맛을 알게 된 것이고 또 하나는 중정수술을 하게 되면 뱃속의 아기를 빼어내고 난 후에 그 동안 아빠의 좆에 의하여 늘어난 보지구멍을 기워서 줄여주었기에 아빠가 중절수술을 하고 그리고 아물고 나서 저의 보지구멍에 좆을 박으면서 빡빡해 졌다고 좋아하는 것이 도 하나의 의미를 저에게 부여한 것입니다.
참 또 변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여자 프로 골프 선수이면서 전국 각지의 대회에 출전을 하지 않고 제가 사는 곳의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프로 대회 한 곳에만 출전을 하는데 2년 전에는 상위권에 오름으로서 학교에서 저의 위치는 더 확고해 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고민이 하나 생겼습니다.
우리학교에 금년에 입학을 한 한 여학생의 아빠가 저에게 대시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상상도 못 할 이상한 방법까지 동원을 한다는 것입니다.
금년에 사십 살이 된 그 남자는 자기 딸더러 자기 엄마가 되어달라고 간청을 하라고 시킨다는 것입니다.
겨우 초등학교 일학년 아이에게 말입니다.
아홉 살이란 나이 차이도 문제이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거든요.
얼마 전 그 남자의 꼬드김에 넘어가 토요일 밤 인근 바닷가로 가서 화를 먹으면서 그 남자가 술을 먹었고 그리고 음주 운전 하지 못 한다며 술에 깰 때까지 쉬었다가 가자면서 인근 모텔에 들어갔고 싫다고 하였지만 모텔까지 따라 들어와 놓고 하지 않으면 어쩌겠냐는 말에 그만 그 남자와 빠구리를 하게 되었는데 아빠하고 할 때와 달리 감흥이 나질 아니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남자가 열심히 펌프질을 한다고 하였지만 제 눈에는 아빠하고 하는 장면이 어른거리는 통에 하마터면 아빠라고 부를 뻔도 하였거든요.
그리고 다음날 오후 퇴근을 하여서는 아빠가 집으로 오자 이혼 전력을 가진 남자 하나가 결혼을 하자고 애원한다고 말하였더니 아빠는 바로 하라고 했지만 난 하지 못 하겠다고 실랑이를 하였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 한 그런 상태입니다.
여러분들께 부탁을 드립니다.
사랑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그 남자의 아내가 되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아님 계속 아빠의 참사랑을 받으며 독신으로 살아야 할까요?
여러분들의 진정어린 조언을 부탁드립니다.(제보자께서 필히 마지막에 이 글을 넣어 달라고 했음: 필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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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눈이 맛이 가서 안경을 맞추어 섰으니 아직 적응이 안 되었는지 모니터 화면이 잘 안 보입니다.
그래서 오타가 많이 있을지 모르니 이해하여 주시길 바라는 바입니다.
1998면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제일 먼저 1997년 년 말을 강타한 IMF가 생각이 나실 것입니다.
1998년 일월 초부터 서울은행과 제일은행을 공개매각이 결정이 되고 2월에 새 대통령이신 김대중 대통령님께서 취임을 하시고 가타 경제적인 어려움이 아주 많아 생각을 하기도 싫은 그런 해가 1997년이고 뒤 청소를 시작하여야 하는 1998년도 솔직히 기억을 하고 싶지 않은 해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뭔가 새로 해야 한다는 희망이 생긴 한 해였습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당시 고작 열 살에 지나지 않는 소녀에게 말입니다.
이름만 나열하려 하여도 가슴이 떨리네요.
그보다 2년 전인 1996년에 프로로 전향을 하였고 이년 후인 1998년도 맥도날드 LPGA 챔피언십과 U.S 여자 오픈에서 우승을 하면서 신인상을 수상하였죠.
박세리 언니가 프로로 전향을 한다는 소식이 저에게 어떤 영향을 주신지 모르죠?
전 당시 주말마다 엄마아빠를 따라 골프장을 찾았답니다.
필드에 나온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이 골프를 치면서도 그렇지만 치지 않고 클럽 하우스에서 쉬면서도 박세리 언니 이야기가 단연 최고였고 아이를 엄마아빠들은 자기 아이들이 골프에 취미가 있느냐 없느냐에 촉각을 세우고 민감한 반응을 보일 정도였습니다.
IMF라는 것이 왔지만 그 IMF를 피하던 우리 아빠 엄마의 사업 덕에 전 엄마아빠를 따라 주말마다 골프장을 찾았고 그 덕에 저오 골프채라는 것은 만지고 놀았습니다.
물론 제법 많은 골프채를 망가트리고 공도 없앴지만 말입니다.
“장 사장님 따님 선수로 육성 해 보고 싶은 마음 없으세요?”제 기억이 맞는다면 아주 날씨가 흐렸던 날이었고 전날 일기예보로는 강풍을 동반한 폭우가 올 것이라는 주의보가 내린 그런 날이었습니다.
“잘하면 절반은 돌아지겠는데, 여보 가게 준비해 얼른”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아빠가 베란다로 나갔다 오더니 우리에게 말하며 골프 가방을 챙겼습니다.
“여보 오늘은 비도 온다고 했는데 쉽시다.”솔직히 엄마는 골프를 썩 좋아하지는 않았고 애처가임 아빠가 가자고 하면 마지 못 해 가는 그런 형편이었습니다.
“아~이 엄마 아빠 말 대로 가자 응 어서”전 엄마에게 어리광을 피우는 그런 소녀였죠.
엄마는 아빠의 독촉과 나의 아양에 마지 못 해 골프장으로 갔는데 일기예보가 그래서 그런지 골프를 치러 온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는데 아빠가 회원권을 가진 그 골프 클럽 소속으로 프로이며 손님들에게 레슨을 해 주기도 하는 아저씨와 아빠 엄마가 필드로 나갔고 난 엄마아빠를 따라 티샷을 하면 나도 티샷을 하는 흉내만 내며 졸졸 따르는데 그런 말을 프로 선수 아저씨가 하지 뭐예요.
“박 프로 쟤가 되겠어?”아빠가 골프채로 저를 가리키며 물었습니다.
“사장님이 웬만한 프로 수준이시라 집 근처 연습장에 데리고 다니면서 기초를 세우고 필드 올리면 그때 저도 도와드리죠.”프로 아저씨가 말하지 뭐예요.
그날부터 전 학교가 파하면 돌아다녀야 하였던 각종 학원 영어 학원 피아노학원 태권도학원 등등의 각종 학원으로부터 독립 한 대신 전 가방을 집에 놓기가 무섭게 아빠 손에 잡혀 골프연습장에서 밤이 이슥하도록 거의 살다시피 하였답니다.
본래 아빠가 사업을 하고 엄마는 아빠 사업 뒷바라지를 하며 집안 살림을 살았었는데 제가 골프를 시작하면서는 사업은 엄마가 전적으로 담당을 하고 문제가 생기면 아빠에게 어드바이스나 받으며 하였고 아빠는 제가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시간 말고는 모든 것을 맡았습니다.
사 학년까지는 오전수업은 물론이고 오후 수업까지도 받았지만 오 학년에 올라가서는 오전 수업이 미치기 무섭게 가방을 가지고 학교 정문으로 나오면 이미 아빠는 승용차에 대기하고 있다가 마치 납치라도 하듯이 저를 차에 태우고는 골프연습장으로 가서는 죄 없는 골프공 한 박스를 티샷 한 후에 점심을 먹였고 저녁 늦게까지 티샷 연습을 시키고는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 제가 사 달라고 하는 음식을 사 주어 저녁 요기를 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우리 집의 전부가 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업도 제 뒤를 대 주기 위한 것이고 그런 사업을 하는 엄마도 제 뒤를 대 주기 위한 사업을 운영하는 것이었고 아버지의 경우 자신의 시간을 모조리 버리고 나라는 딸에게 모든 정열과 힘을 다하여 뒷바라지를 하는 체제 즉 저를 중심으로 온 가족인 엄마아빠가 돌아가며 살아갔던 것입니다.
잘 먹고 운동 열심히 하자 골프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신체적 발육이었습니다.
땅콩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고 키가 고작 157에 지나지 않는 김미현 선수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중학교에 막 입학을 하여서는 169에 부끄럽게 젖가슴도 B컵의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골프연습장에서 연습을 하였지만 중학교에 입학을 하고도 아빠는 저에게 머리를 올려주지 않지 뭐예요.
저보다 늦게 시작한 아이들도 제가 알기로 몇 몇이 필드로 나간 것으로 아는데 말입니다.
핑계는 기초가 튼튼하지 못 하면 정상에 올라가더라도 오래 버티질 못 하고 밀려나온다는 것이 아빠의 지론이었습니다.
틀린 말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연습장에서 연습을 마치고 집으로 와 컴퓨터로 그날그날의 경기 전적을 훑어보면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정상에서 놀던 선수들이 이름도 올라오지 않은 것을 보고 전 아빠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속으로 언제 아빠가 나를 필드에 데리고 나가서 머리를 올려 주려나 하는 생각은 하루에도 몇 번씩 하였답니다.
이학년에 올라가서 처음으로 아빠와 함께 필드로 나갔습니다.
정말 떨리데요.
그날은 엄마도 함께 갔습니다.
결과는 아주 참혹하였습니다.
아빠야 나를 연습을 시키면서 자신도 쉬지 않고 연습을 하였기에 그렇다고 치더라도 엄마의 경우 제가 골프를 목적으로 한 후로 아빠의 사업을 이어받아 사업에만 몰두를 하노라고 한 번도 필드에 나가지를 못 하였는데 그런 엄마보다 타수가 더 나왔으니 이게 말이나 된단 말입니까?
이제 연습장에만 박혀 연습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필드로 나가 자연과 함께 연습을 하리라고 다짐하였던 나의 꿈은 말 그대로 물거품이 되고 만 순간이기도 하였습니다.
아니 장래를 골프로 잡은 자체를 변경하여야 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마음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엄마아빠의 격려가 저에게 힘을 주었습니다.
다시 연습장에서 살아야 하였습니다.
머리를 오리던 날의 이야기를 아빠로부터 들은 연습장의 선생님들도 제 실력이면 충분하게 필드에서 실력을 소화 시킬 수가 있을 것인데 라며 머리를 갸우뚱 거렸지만 현실은 현실이었고 그 현실은 더 피가 나도록 훈련에 집중토록 아빠로부터 채찍질을 당하도록 만드는 결과만 안겨주고 말았습니다.
또 그 결과는 되지 않는 것을 애에게 시켜 고생만 시키고 빛을 발하지도 못 하게 만들뿐더러 골프를 배우지 아니하고 예전처럼 공부에 몰두를 하였더라면 다른 분야에서 기를 펴고 있을지 모른다며 엄마가 아빠에게 잔소리를 하도록 만든 계기도 되어버렸습니다.
전 늘어나지 않는 제 실력과 싸우고 아빠는 제 실력을 올리려고 싸우면서 동시에 엄마의 잔소리와 싸워야 하였고 엄마는 엄마대로 되지도 않는 골프를 시키는 아빠에 대한 불만으로 싸웠고 그럼 전 엄마아빠의 싸움의 시발점이 저 인 것을 알기에 풀이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삼학년부터 이상한 현상이 생겼습니다.
제 몸에 변화가 생긴 것입니다.
아빠가 골프채를 잡은 제 몸을 잡고 자세를 고쳐주려고 하면 처음엔 저도 모르게 땀이 흐르기 시작하였으나 회가 거듭 할수록 아빠의 손길이 닿은 부위에서 찌릿찌릿함을 느끼기 시작 한 것입니다.
그런 현상은 여름이 되어 짧은 반바지에 민소매 티를 입고서 연습을 하는데 아빠의 제 살에 닿는 손길은 뜨겁다 못 하여 어지어울 정도였으나 전 그 이유를 전혀 몰랐습니다.
연습을 마치고 하우스로 들어가 샤워를 하려고 팬티를 벗자 팬티 가장자리가 축축하게 젖어있어 놀란 나머지 축축한 것을 손가락에 묻히고 비볐더니 소변을 찔끔대었을 경우의 그곳과는 달리 아주 매끄러운 느낌이 들었고 많이 묻혀 천천히 손가락을 벌렸더니 마치 침을 손가락 사이에 놓고 하는 것처럼 길게 늘어났습니다.
한 달에 한 번 거르지 않고 생리를 하는 처지였지만 난 그 것에 대한 정체는 전혀 몰랐습니다.
생각을 해 보세요.
아침에 밥을 먹기 무섭게 아빠가 운전하는 차로 학교에 갔다가 오전 수업만 겨우 마치고 교문으로 가면 거기에는 시동을 끄지도 않고 기다리는 아빠 차가 있었고 그럼 전 아빠 차에 가방을 내려놓고 연습장에 가서는 간밤 사이와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사이 손이 굳었을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점심도 먹이지 않고 몇 박스의 골프공을 티샷을 한 후에 제 속이 차는 것이 아니라 지켜보는 아빠의 기분이 흡족하여지면 그때서야 늦은 점심을 먹고는 쉬는 것이 아니라 가벼운 트레이닝으로 몸을 만들어야 한다며 움직이게 하는 통에 변변하게 쉬지도 못 하고는 다시 티샷을 밤이 이슥하도록 치고서야 집으로 와서 저녁을 먹으니 제가 다른 생각을 할 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잖아요.
학교에 등교하면 책상에 엎드려 잠이나 자기 일쑤이고 그러다가 어영부영 시간만 지나면 학교 앞에 기다리고 있던 아빠 차를 타고 연습장에 가서는 아빠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지 않기 위하여 땀을 닦을 여유도 없이 골프채를 휘두르다가 점심이랍시고 간단한 비빔밥 한 그릇에 땡이고 저녁 7시나 되어서 저녁도 아닌 간식이라며 컵라면 하나로 때우고 10시까지 치다가 집으로 가면 열시 반이고 씻고 저녁을 먹으면 12시가 거의 다 되어서이니 여러분이 생각을 하여도 수면 부족에 영양실조이겠으며 얼마나 몸은 피곤하겠습니까.
하지만 스파르타식 교육의 아빠는 일요일도 없었습니다.
몰라 필드에 나가서 친다면 비오는 날이라 소위 공치는 날이 되어 쉬기나 하겠지만 골프연습장이란 곳은 일 년 열두 달 삼백육십오일 내내 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푸념이라도 할라치면 저 때문에 자기도 시간을 내지 못 해 친구들과 만나지 못 한다는 말에는 저도 다시 입을 열지 못 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말이 아닌가요.
고등학교에 올라갔습니다.
진짜 머리를 올리려고 필드에 나갔습니다.
같은 또래의 고등학생과 같이 필드에 섰습니다.
그 애는 중학교 3학년 때 이미 전국 대회에서 여자 중등부 우승의 경력을 가진 애였습니다.
제가 기어이 넘어야 할 산이었던 것입니다.
제 캐디는 당연하게 아빠가 맡았습니다.
아빠와 그리고 저와 함께 골프를 치기로 한 애 엄마 사이에 말이 오고가더니 아빠가 저와 그 애를 불러 세우고 첫 라운딩임만큼 아웃코스인 9홀까지만 하기로 하였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상대애가 앞서 나갔습니다.
아빠는 마음을 급하게 굴지마라고 수시로 귓속말로 주의를 주였습니다.
5홀까지도 상대애가 저보다 3타 앞서갔습니다.
6홀에 올라섰습니다.
제가 먼저 티샷을 하였습니다.
전 멋지게 그린에 그도 홀 아주 가깝게 올렸습니다.
상대애가 떨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바로 나타났습니다.
필드 앞의 벙커로 공이 빨려 들어갔습니다.
앞으로 치고 나갈 기회가 온 것입니다.
열 살 즉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골프연습장에서 티샷 등의 연습만 몰두한 탁에 기본기가 남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저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빠가 친 샷 사인을 보냈습니다.
전 아빠에게 손가락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내고 공과 홀의 각도를 살폈다.
저와 경기를 벌이는 애보다 그 애 엄마가 더 긴장을 하며 저의 샷에 눈을 돌리지 못 하였습니다.
제가 친 공이 마치 흡혈귀가 목에 이빨을 대고 피를 빨듯이 홀은 제 공을 그대로 빨아들였습니다.
보기였습니다.
반면 그 애는 벙커에 들어가 벗어나려고 공을 쳤지만 힘이 너무 강하게 주었던지 깃대에서 먼 쪽으로 날라 가는가 싶더니 자기 엄마가 원 그린이라고 외치는 것과는 달리 필드를 다시 벗어났습니다.
그 애 엄마는 화를 내었습니다.
다시 그 애가 쳤으나 핀에 가까이 보내지 못 하였습니다.
그대부터 그 애는 더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아웃코스를 마쳤을 때 그 애와 난 역전이 되어있었고 그도 4타나 차이가 났습니다.
여자의 질투는 한 여름에도 서리가 내리게 만든다고 하였든가요.
그 애 엄마가 그 애 머리를 쥐어박는가 싶더니 아빠에게 와서 뭐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빠가 저를 불렀습니다.
그 애 엄마가 자존심이 상한다면서 인코스까지 가자고 하는데 자신이 있느냐고 제 엉덩이를 가볍게 치며 물었습니다.
저도 모르는 짜릿함과 함께 자신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저도 모르게 힘이 났습니다.
전 여유 있게 그 애를 더 앞서 나갔습니다.
인코스까지 끝을 냈을 대 전 그 애보다 무려 8타나 앞서고 있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그 애 엄마를 달래며 아빠가 우리들(상대 애와 저)뒤에 서서 따라오며 클럽 하우스로 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참을 가다가 뒤를 보았더니 아빠와 그 애 엄마의 모습이 보이질 아니하였습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같이 가 던 저와 게임을 하였던 애에게 의아스런 얼굴을 하며 묻자 그 애는 배시시 웃기만 하였습니다.
그 애를 다그쳤습니다.
그 애가 저를 인적이 없는 나무그늘 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충격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자기 엄마는 골프를 시작한 만만한 애들의 부모들을 꼬드겨 내기 게임을 자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진 말도 충격적이었지만 그 애의 다음 말은 저를 소스라치게 놀라게 만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 엄마는 자기가 지게 되면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때우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애는 고등학교가지 올라간 애가 그런 것도 모르냐며 핀잔을 주었습니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 아닌가요.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애는 빠구리란 말을 하였고 도 모른다고 하자 우습다는 듯이 저를 동정어린 눈으로 보며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것으로 여자 보지구멍에 좆을 박고 펌프질을 하는 것이라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미국에 골프 연수 받으러 가면서 반년 이상의 시일이 소요하기에 엄마를 대동하고 갔는데 거기서 엄마가 다른 남자들과 붙어먹는 것 같았고 자기도 미국 남자하고 연애를 하였다고 저에게 노골적으로 고백하였습니다.
그 애 이름 밝히지 않고 애라고만 말하는 이유는 그 애는 저와 달리 지금도 프로로 활약 중이기에 차마 이름을 밝히지 못 함을 이해해 주셨으면 하네요.
하여간 그날 저 엄마하고 그 애 엄마가 그 애 말대로 빠구리를 하고 오는 동안 많은 이야기를 하였고 거기에서 성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또한 저의 인생에 대한 하나의 전환점 역할도 해 주었습니다.
몸을 마구 굴려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말입니다.
그 애 엄마는 저를 우습게 여기고 자기 딸의 희생물로 만들어 돈을 벌려고 하였으나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골프연습장에서 살다시피 한 저를 몰라보고 우리 아빠에게 내기 게임을 제안하였는데 이기면 진 사람이 오십을 주되 진 사람이 돈이 없을 경우 몸으로 때우기로 하였으며 그 애 엄마는 자기 딸이 지자 자기 몸으로 때웠던 것 같았습니다.
그로부터 전 아빠의 손길이 제 몸에 닿으면 짜릿함을 느꼈던 이유를 알게 되었고 그 이후로 저는 아빠만 보면 제일 먼저 저도 모르게 아빠의 바지 가장자리에 시선을 두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엄마가 있는데도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는 아빠가 천박하게 보였습니다.
대회에 출전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대회 출전이란 것이 한 곳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전국을 돌았습니다.
물론 저의 캐디 노릇을 해 주는 아빠와 함께 말입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애들과 같이 출전을 하였기에 전 애들과 같은 숙소를 썼으나 아빠는 같은 숙소의 다른 방에서 혼자 지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말에 우리 집에 큰 문제가 생기고 말았습니다.
아빠 대신 사업에 전념하던 엄마가 시름시름 앓는가 싶더니 결국 자리를 보전하고 말았습니다.
아빠가 부랴부랴 엄마를 데리고 병원에 입원을 시켰습니다.
하지만 엄마 몸은 이미 암 덩어리들로 수술까지 불가능한 몸이었습니다.
아빠가 고민에 빠졌습니다.
제 뒤를 계속 보살피느냐 아님 엄마가 자신을 대신하여 운영하던 사업을 계속하느냐로 말입니다.
엄마는 아빠에게 말하였습니다.
이왕 골프에 몸을 담은 이상 골프가 아닌 다른 것을 할 수가 없게 된 딸을 위하여서라도 사업을 정리하고 계속 제 뒷바라지를 하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아빠 곁을 떠나지 말라고 당부를 하고요.
그 말은 엄마의 마지막 유언이 되어버렸습니다.
엄마가 죽은 후 아빠는 아주 기다란 베개를 하나 구하였고 술이 취해 잠을 잘 적에 그 베개를 아랫도리 사이에 끼우고는 끌어안고 저도 모르는 이상한 행동을 하면서 엄마 이름을 부르는 것을 종종 보았고 그게 남녀 간의 섹스 동작이란 것을 어렴풋이 짐작을 하였고 아빠는 그 기다란 베개를 엄마라고 생각하고 끌어안고 섹스 동작으로 몸을 푼다고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만 18세가 되던 해에 전 프로로 전향을 하였습니다.
학교는 적만 두고 아빠와 단 둘이서 프로 대회에 출전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성적은 하위권에서 맴돌았습니다.
출전 경비도 나오지 아니하였습니다.
아빠는 경비 문제로 힘들어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여관방에서 자다가 이침 일찍 아빠가 자고 있는 방으로 가면 아빠 방에서 다른 여자들이 종종 보였으나 경비 문제가 심각하여지자 그런 여자의 모습은커녕 머리카락 한 올도 보이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만큼 경비 문제는 심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저에게는 그런 부분에 대하여서는 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아빠 골프 선수생활 그만 두고 아마 코치나 할까?”모 사립 초등학교의 교장선생님이 갤러리로 오셨다가 저에게 한 제안을 기억하고 물었습니다.
“뭐라고 겨우 코치 같은 것이나 시키려고 내가 그 고생을 한 것으로 보이니? 그건 그렇고 넌 언제까지나 나를 아빠라고 부를래?”아빠 입에서 전혀 제가 의도한 말이 아닌 말이 나왔습니다.
“아빠를 아빠라고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불러?”의아스런 눈으로 아빠를 보며 물었습니다.
“임마 아빠란 말은 아주 안 좋은 말이야”아빠가 꾸짖듯이 저를 노려보며 말하였습니다.
“뭐가 안 좋아?”저도 지지 않고 물었습니다.
먼저 나이가 오십이 겨우 넘은 나이지만 제 기억으로 제가 골프를 막 치기 시작하였을 때 아빠를 따라 아빠 친구들과 함께하는 술자리에 가면 아빠 친구들은 같은 또래이면서 왜 저렇게 구식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수 없이 들었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골프를 시키기는 하였지만 골프를 치게 하려고 필드에 내 세우지 못 한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바로 짧은 치마와 짧은 반바지가 그 이유란 것을 저는 최근에야 알았습니다.
아빤 딸아이인 저는 물론이지만 다른 여자 골프 선수들이 입은 짧은 치마나 짧은 반바지차림으로 골프 치는 것을 못 마땅하게 생각하며 또한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 지롤 몰라 안절부절 못 하는 경우를 자주 봤거든요.
처음에는 짧은 치마나 짧은 반바지차림으로 골프 치는 여자들을 보고 그런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다만 어린 저로서는 소변이 마려워서 그런 줄로만 알았던 것입니다.
“아빠란 말은 옛날 직장도 귀하여 못 먹고 못 입을 때 젊은 여자들이 남의 첩으로 살면서 상대를 영감이라고 부르자니 젊은 자신이 한심하고 그렇다고 요즘처럼 자기란 단어가 있었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부를 단어는 여보 뿐인데 첩 처지에 여보라고 부를 수도 없어서 만들어진 호칭이 아빠야 아빠”아빠가 차의 시동을 켜더니 길게 설명을 하더니 제 머리에 꿀밤을 주었습니다.
“!”순간 전 마음의 결정을 하였습니다.
경비 문제도 일부분 해결하고 아빠의 욕구도 해결시킬 방법을 말입니다.
“알았어, 차차 주의 할게, 이번은 경기도 00컨트리클럽이지?”웃으며 물었습니다.
“그래”아빠가 말하며 지갑을 열었습니다.
몇 십 만 원 정도의 지폐가 전부였습니다.
“아빠 경비 딸리지?”아빠가 차를 운전하였습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앞만 보고 차를 운전하였습니다.
“여관비라도 아낄까?”아빠에게 제안을 하였습니다.
“임마 아무리 딸이라고 하지만 다 큰 애와 어떻게 그도 여관방을 같이 쓰니”백미러로 저를 노려보며 말하였습니다.
“아빠하고 딸인 것 단골 여관은 모르는 주인이 없는데 뭘 그래”저도 지지 않고 말하였습니다.
프로로 전향을 하고 2년가량을 전국 대회에 출전을 하다 보니 단골 여관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 경비 절약 차원에서 방 하나만 얻어 아빠와 같이 사용하면 적어도 여관비가 절반으로 줄어들기에 그나마 경비 절약 효과가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그보다 제가 경기에서 입상을 하여 상금을 받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지만 미국에서 박세리 언니 선수께서 골프를 많이 대중화시켰고 또 일찍 역량 있는 선수들을 발굴하여 일류 코치 지도하에 육성을 시킨 탓에 코치도 없이 아마 수준의 아빠 감독 하에 골프연습장에서 연습만 하였던 저로서는 솔직하게 말하여 아빠의 극성만 아니면 초등학교 코치 정도나 하면 될 정도의 골프 수준으로 프로에 뛰어들었으니 말 그대로 언감생심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입니다.
방법은 오로지 제 실력이 향상 되어 상위권에 오르게 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골프라는 운동이 그리 호락호락하게 볼 만한 그런 운동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저의 경우 모든 사람들이 기본기는 어디에 내다 두어도 손색이 없는데 왜 상위권에 접어들지 못 하겠다는 것이 대부분의 골프를 조금 친다는 사람들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골프 시합에 나가 골프를 치는 것을 보고 모 사립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자기 학교 코치로 오라고 했던 것이고요.
“넌 경비에 대하여 신경 끄고 실력 올릴 방안이나 연구하고 시합 때 공에 신경이나 써”아빠는 여전히 저를 나무라기만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빠의 말은 전혀 틀리지 않은 말이었습니다.
“그래 그건 알겠는데 우리 같은 방 쓰자 혼자 자자니 무섭기도 하단 말이야”난 핑계를 만들었습니다.
“내일 모래면 시집을 가도 될 처녀가 무섭기는 뭐가 무서워?”아빠가 백미러로 힐끔힐끔 노려보며 말하였습니다.
“아냐 그렇게 무서움에 시달리면 다음 날 시합이 잘 풀리지 않아”지지 않고 대꾸를 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했냐고요?
엄마가 죽고 혼자로 살면서 몸을 풀지 못 하고 제 뒷바라지에만 신경을 쓰는 아빠의 여자가 되기로 결심을 하였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시합이 없을 때 집에서 기거하면서 전 간혹 아빠의 침실인 안방에서 나는 가는 신음소리를 들었었고 몇 번인가는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은 탓에 제가 훔쳐보기도 한 것이 있었답니다.
처음 저에게 성에 대하여 눈을 뜨게 해 주었던 애가 알려준 성인 사이트를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성에 대한 호기심을 일 깨웠던 것인데 모니터의 동영상으로만 보아왔던 남자의 딸딸이 치는 모습은 전 아빠가 직접 하는 것을 훔쳐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의 성욕도 맛을 알게 되면 참지 못 하고 자위로라도 해결하듯이 남자 역시 성욕을 참지 못 하면 딸딸이로 성욕을 푼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물론 저도 자주는 아니지만 자위를 하였죠.
“...........”제 말에 아빠는 여전히 백미러로 힐끔힐끔 저를 보았지만 아무 대꾸를 못 하였습니다.
제가 만든 덧에 아빠가 걸려들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빠 이번에만 그렇게 해 보자 으~응”어리광을 피우며 아빠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휴~모르겠다.”아빠가 한숨을 쉬더니 앞만 보고 운전을 하였습니다.
일 단계 작전은 성공이었습니다.
경기가 있을 골프장 인근의 단골 여관에 예전과 달리 방을 하나만 빌린 것입니다.
단골로 이용하던 여관인지라 부녀간이란 것을 알았었고 왜 따로 쓰지 방 하나를 쓰느냐는 여관 주인아주머니의 질문에는 제가 나서서 경비 절약 방안이라고 말하자 이해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특실을 하나 주었습니다.
다음 날 출전을 위하여 주최 측에 참가를 알리서 시트 배정을 받고 연습을 조금 하다가 다시 여관에 와서 잠을 자고 그 다음 날부터 경기에 출전을 하기 전까지는 한가하다고 해도 상관이 없을 그런 시간이었지만 경기 전날 아빠에게 제 몸을 준다면 예전에 저와 경기를 붙였다가 자기 달이 지자 몸으로 때웠던 애의 엄마가 우리 아빠하고 빠구리를 하러 간 사이에 그 애에게 들었던 성에 대한 상식이 저에게는 전부였는데 그 애 말에 따르면 처음 하면 구 다음 날까지도 통증이 느껴진다고 했었기에 시합을 위하여 도착 한 날 밤에 실행을 하기로 결심을 하였던 것입니다.
전 아빠가 술에 취하면 그 기다란 베개를 엄마라고 생각하고 끌어안고 섹스 동작으로 몸을 푼다고 생각을 하였던 것을 생각하였고 아빠에게 그렇게 하게 만들려면 일단 술을 먹여야 하는데 경기 전날은 술을 안 마셔도 전 전날은 술을 마신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저는 여관 밖으로 나와 족발하고 소주 두 병을 사서 다시 여관으로 들어 왔습니다.
“아빠 선물”아빠에게 족발하고 소주 두 병이 든 비닐 봉투를 건네자
“수미야 이런 선물보다는 상위권에 드는 것이 나에게는 더 큰 선물이다”아빠가 족발하고 소주 두 병이 든 비닐 봉투를 받고는 안을 들여다보며 은근한 압력을 넣었습니다.
“헤헤헤 이번엔 잘 해 볼게”전 웃음으로 때워야 하였습니다.
아빠가 족발은 안주삼아 소주를 마시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빠 나도 한잔 줘”하고 웃으며 말하자
“너 술 배웠니? 누구에게 언제 배웠지?”아빠가 꼬치꼬치 캐물었습니다.
“헤헤헤 아빠에게 이제라도 배워 보려고”아빠에게선 잔을 받으며 말하였습니다.
사실 술을 배우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오로지 곧 이어 다가올 아빠와의 첫 빠구리 때의 통증을 술로 완화를 시켜보려는 욕심에서 술을 마시기로 작정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 맞아 술은 어른 앞에서 배워야하지”아빠가 제 의중을 전혀 모르고 잔에 술을 따라주었습니다.
“크~이렇게 쓴 것을 왜 마신데?”단번에 소주를 들이 키고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자
“하하하 그렇게 해서야 술을 어떻게 배우겠니?”아빠가 잔을 빼앗으며 말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전 한 잔을 더 얻어 마셨습니다.
알 딸딸 하대요.
한 벙 반이 주량인 아빠는 다 버려도 술은 버리지 못 한다며 주량이 조금 넘게 마셨습니다.
일차 제 작전은 성공을 한 것입니다.
아빠가 방바닥에서 다리를 뻗고 저보다 먼저 잠이 들었습니다.(몸을 더운 열로 지져야 한다면 항상 아빠는 저에게 온돌방에서 자게 고집하였기에 그 방도 온돌방이었습니다.
전 바로 알몸이 되어 슬며시 아빠 옆에 나란히 누웠습니다.
정말 떨리데요.
하지만 아빠는 아무 것도 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있었습니다.
슬며시 아빠 품으로 파고들었습니다.
“아~ 여보”아빠가 저를 죽은 엄마인줄 알고 끌어안았습니다.
“...........”숨 소리마저 죽이고 아빠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습니다.
“여보 사랑해”아빠가 저의 가슴을 움켜잡으며 말하였습니다.
그러더니 제가 기다리던 행동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술이 취한 체 트레이닝바지를 힘들여 벗기 시작한 것입니다.
집에서도 몇 번이나 보았던 기다란 베개를 상대로 해 온 그 동작이었습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을 하였지만 술에 취하여 잠들어서는 꿈에서의 행동인지는 모르지만 기다란 베개만 끌어안게 되면 바로 트레이닝바지를 벗고 팬티도 벗은 다음 아랫도리 사이에 그 베개를 끼우고 엉덩이를 들썩였거든요.
아빠의 트레이닝바지와 팬티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더군요.
그리고 저를 가랑이 사이로 끼우고 끌어안더니 저 위로 올라오더니 좆을 보지둔덕에 대고 마주 비비는가 싶은 순간
“악! 아빠 잠시만”아빠의 등을 끌어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외치자
“아니 이게 뭐니? 내가 미친 것 아냐!”그때서야 아빠가 눈을 뜨더니 방바닥을 짚으며 상체를 들더니 자신의 좆이 박힌 베 보지와 제 얼굴을 번갈아보더니 놀라며 말하였습니다.
“아빠 내가 원해서 내 스스로 아빠에게 준 거야 계속 해”하고 말하자
“넌 딸이야 어디 애비가 딸년을 상대로 이 짓을 한단 말이니”하며 빼려들자
“싫어 이미 내 처녀는 아빠 목이 되어버렸어”하고 말하며 양다리로 아빠의 엉덩이를 감았고 그도 부족하여 아빠의 몸을 두 팔로 끌어당겨버렸습니다.
아빠는 남자였지만 발과 팔로 하는 골프를 치는 저에게서 벗어난다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휴~ 술이 원수고 내가 죽일 놈이지”하고 말하며 아빠는 본능을 이기지 못 하겠던지 아주 천천히 펌프질을 하였습니다.
제 생각대로 아빠의 여자가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아빠 좋아? 베개보다 좋아?”아팠지만 일부러 환하게 웃으며 묻자
“너 봤니?”놀라며 물었습니다.
“헤헤헤 봤으니까 아빠의 습관을 알고이랬지 뭐”헤헤거리며 말하자
“그.............그랬구나.”하고 말하며 펌프질에 가속을 붙였습니다.
아빠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저를 달이 아닌 여자로 인정하고 본격적인 빠구리를 시작한 것입니다.
“헤헤헤 다시 묻겠는데 베개보다 좋아?”하고 묻자
“그걸 말이라고 하니”아빠가 펌프질을 하며 말하였습니다.
“헤헤헤 그렇다면 내가 아빠 아들 하나 낳아줄까?”계속 헤헤거리며 말하였습니다.
“뭐? 뭐라고?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죽어서 너희엄마 얼굴 볼 낮이 없는데 딸인 너에게 임신까지? 말도 안 되는 소리다”하면서도 아빠는 펌프질만은 멈추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렇게 전 경기 전 전날 제 의지에 따른 저의 과감한 행동이었지만 어찌 됐던 간에 아버지의 좆에 의하여 26년간 고이 간직하였던 처녀막을 뚫렸고 그 다음 날 이미 참가 예비 엔트리에 들어있던 저를 아빠는 부상으로 안하여 출전을 하지 못 하게 되었다고 통고를 하고 그길로 우리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바로 저를 스카우트를 할 의향을 가졌던 사립 초등학교를 제 스스로 찾아가서 코치직을 맡아보기로 하겠다고 하자 교장선생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코치로 임명을 하였고 그 다음 주 월요일부터 학교로 출근을 하여 초등학생들을 상대로 기본기를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프로 출신의 코치가 학교 코치로 왔다는 소문은 아이들 입과 귀로 전파가 되었고 그 소문은 학부모들에게까지 나자 학부모님들이 학교 당국에게 토요일 오후와(물론 노는 토요일은 종일)일요일에 학부모들 상대로 지도를 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요구하자 돈의 위력 앞에 학교당국도 거절을 하지 못 하고 학교의 골프 연습 시설은 저에게 사용토록 승낙을 하였고 저는 일주일 전에 예약을 받고 일정액의 시간당 교습 비를 받으며 학부모와 선생님들에게까지 지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변한 것이 있다면 아빠도 아파트를 팔고 방 두 개짜리 다세대주택을 구입하여 이사를 하고는 남은 돈으로 예전에 하던 사업을 다시 시작하였답니다.
예전의 성실함을 아는 거래처들이 하나 둘 아빠에게 다시 돌아옴으로서 사업 초반에는 적자를 면치 못 하였으나 지금은 완전히 흑자로 돌아선 상태입니다.
거기다가 또 변한 것이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낮이나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예전처럼 아빠와 딸 사이로 돌아가지만 단 둘이 있게 되면 전 아빠를 자기라고 부르고 아빠는 저를 여보라고 부르는데 빠구리 하는 도종에는 더더욱 그 호칭을 즐겨 쓴답니다.
그렇게 낮에는 평범한 부녀로 지내다가 밤이면 밤마다 아빠의 아내 아닌 아내로 변신을 하는 저는 아빠와 26살부터 관계를 가진 후 올해로 만 5년에 접어드는데 5년 동안 저는 아빠의 아기를 두 번 임신하였고 저는 낳겠다고 고집을 부렸지만 아빠의 통사정에 굴복을 하고 결국 두 번의 중절 수술을 받았는데 그 두 번의 중절수술은 저에게 아주 큰 의미를 두 가지 주었답니다.
그중 하나는 좆 맛을 그 전에는 몰랐고 그저 아빠가 즐거워하기에 저도 마냥 좋았지만 두 번의 중절수술 후에 전 좆의 참맛을 알게 된 것이고 또 하나는 중정수술을 하게 되면 뱃속의 아기를 빼어내고 난 후에 그 동안 아빠의 좆에 의하여 늘어난 보지구멍을 기워서 줄여주었기에 아빠가 중절수술을 하고 그리고 아물고 나서 저의 보지구멍에 좆을 박으면서 빡빡해 졌다고 좋아하는 것이 도 하나의 의미를 저에게 부여한 것입니다.
참 또 변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여자 프로 골프 선수이면서 전국 각지의 대회에 출전을 하지 않고 제가 사는 곳의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프로 대회 한 곳에만 출전을 하는데 2년 전에는 상위권에 오름으로서 학교에서 저의 위치는 더 확고해 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고민이 하나 생겼습니다.
우리학교에 금년에 입학을 한 한 여학생의 아빠가 저에게 대시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건 상상도 못 할 이상한 방법까지 동원을 한다는 것입니다.
금년에 사십 살이 된 그 남자는 자기 딸더러 자기 엄마가 되어달라고 간청을 하라고 시킨다는 것입니다.
겨우 초등학교 일학년 아이에게 말입니다.
아홉 살이란 나이 차이도 문제이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거든요.
얼마 전 그 남자의 꼬드김에 넘어가 토요일 밤 인근 바닷가로 가서 화를 먹으면서 그 남자가 술을 먹었고 그리고 음주 운전 하지 못 한다며 술에 깰 때까지 쉬었다가 가자면서 인근 모텔에 들어갔고 싫다고 하였지만 모텔까지 따라 들어와 놓고 하지 않으면 어쩌겠냐는 말에 그만 그 남자와 빠구리를 하게 되었는데 아빠하고 할 때와 달리 감흥이 나질 아니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그 남자가 열심히 펌프질을 한다고 하였지만 제 눈에는 아빠하고 하는 장면이 어른거리는 통에 하마터면 아빠라고 부를 뻔도 하였거든요.
그리고 다음날 오후 퇴근을 하여서는 아빠가 집으로 오자 이혼 전력을 가진 남자 하나가 결혼을 하자고 애원한다고 말하였더니 아빠는 바로 하라고 했지만 난 하지 못 하겠다고 실랑이를 하였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 한 그런 상태입니다.
여러분들께 부탁을 드립니다.
사랑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그 남자의 아내가 되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아님 계속 아빠의 참사랑을 받으며 독신으로 살아야 할까요?
여러분들의 진정어린 조언을 부탁드립니다.(제보자께서 필히 마지막에 이 글을 넣어 달라고 했음: 필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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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눈이 맛이 가서 안경을 맞추어 섰으니 아직 적응이 안 되었는지 모니터 화면이 잘 안 보입니다.
그래서 오타가 많이 있을지 모르니 이해하여 주시길 바라는 바입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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