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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15:28 961회 0건
당시만 해도 너무나 생소하기만 했던 사회복지학과를 내가 지원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사회적인 입지도 좁고,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만류하셨다. 언제부턴가 동양철학의 근본정신인 ‘조화’에 영향을 받고 있던 나는 거창하진 않더라도 보람 있는 인생을 살고 싶다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기에 가장 적합한 전공이 복지였다.


“엄마~ 내 교복 치마 어디다 뒀어?”

“김유진! 어서 내려 오래두? 교복은 밥 먹고 입어.”

“여보~ 신문 못 봤어? 야! 우진아! 신문 못 봤냐?”

일찍 일어난 새가 모이를 먼저 줍고, 훔친 장작이 더 잘 타며, 슬쩍한 사과가 더 맛있다고 했던가. 아버지가 읽으시는 조간신문을 먼저 주워 들고, 변기 위에 앉아 느긋하게 즐기는 이 배설의 짜릿함. 이것이 조화인가? 하하.

“자~ 아침 먹읍시다.”



어쨌든, 지금 나는 원하는 학과로 입학을 했고, 새내기가 된지 한 달이 조금 지나고 있었다. 정식 동아리는 아니었고, 토요일 마다 진행된다는, 과 선배들의 스터디그룹에 참관했는데, 가입을 권유하기 위한 청탁의 단계로 한 잔을 곁들이는 과정까지 이어졌다. 술이 돌고, 분위기가 좀 무르익자 이야기는 복지환경의 저변이 얼마나 열악한지에 대한 재확인에서부터 사회복지를 대하는 사람들의 무지에 대한 비판과 안타까움, 무늬만 있는 사회보장제도들에 대한 해부에 이어 자연스럽게 결론은 위정자들의 정치무능으로 귀결되고 있었다.

꽤나 의미 있는 대화들로 채워졌던 술자리를 끝으로, 그렇게 일과를 마치고 귀가 하던 늦은 저녁이었다. 몸이 따뜻할 정도로 기분 좋은 취기를 품고서 걷는 봄날의 저녁, 걸음이 동동 뜨는 가벼움이 느껴졌다. 얼마를 걸어 벽과 대문으로 즐비하게 늘어선 주택가 길목에 꺾어 들자, 저만치 앞에서 이리 비틀, 저리 비틀 거리며 춤을 추듯 걷는 여자의 뒷모습이 눈에 뜨였다. 야심한 밤에 술 취한 여자라.... 위태위태하게 전진과 정지를 몇 번 반복하더니, 어느 순간 전봇대를 ‘터억~!’ 하고 붙잡고 선다. 다가갈수록 익숙한 뒷모습.

“.... 누나?”

꿈적도 안한다. 몸을 기울여 용안을 살폈다. 늘어진 머리카락사이로 평온하게 감겨 있는 두 눈. 오늘 아침 같은 식탁에 마주 앉아 함께 식사를 나누셨던 그 분, 거실 액자에 걸린 가족사진에서 내 왼편에 자리하고 계신 그 분이었다.

“김유리씨?”
“.... 네에?”

잠꼬대처럼 대답을 한다.

“눈 좀 떠 보지?”

했더니, 가늘게 실눈을 뜨고 잠시 쳐다보네?

“어? 김우진.... 오랜만이다? 딸꾹!”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하더니, 전봇대를 짚고 있던 팔을 뻗어 내 목을 휘감아 온다. 상큼한 냄새도 함께 코를 휘감고....

“반갑.... 딸꾹!”

그러더니 말을 다 뱉지도 못하고 추~욱 늘어진다. 재빨리 팔을 뻗어 유리 누나의 겨드랑이를 받치고 떨어지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마터면 가슴을 주무를 뻔했다.

“뭘 얼마나 마신거야?”

인사불성. 대답할 기미가 안 보였다. 집에 갈 의지도 안 보인다. 눕혀두고 아침에 오면 그 자리에 있을까? 아래쪽을 내려다 봤다. 폭이 좁은 스커트라, 업고 가긴 걸렀고, 안고 가기엔.... 혹시 있을지 모를 구토에 대한 위험부담이 느껴진다. 그러자고 전봇대를 붙들고 선 것도 같았고.... 하는 수 없이 어깨동무하듯 팔을 두르고 허리를 붙잡아, 질질 끌다시피 이동했다. 송장을 끄는 기분이 이럴까? 와중에 유리 누나는 잘 들리지도 않는 소리로 웅얼웅얼 거린다. 살아는 있단 걸까?

‘어쩌자고 이렇게 마신건지, 원.... 무슨 봉변을 당하려고, 말만한 처자가.... ’

조금만 더 가면 집 대문이 보일 것 같다. 자꾸 땅으로 꺼지는 유리 누나를 힘을 주고 위로 튕겨 올려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런데 그 순간,

“우~웩.. 우..욱~ ”

그 한 번의 진동이 스위치가 되어 유리 누나의 위 속을 헤집었는지, 어떻게 대처할 시간도 없이 오늘 하루 자신이 먹었던 것들을 게워내 확인시켜 준다. 그야말로 인공폭포였다. 낙하해서 여기저기로 튀는 파편들은 깔끔한 궤도를 그리며 우리 두 사람의 하체로 부딪혀왔고, 서있는 자세로 처음 포문을 열었던 유리 누나의 정면은 말 그대로 진수성찬(?)이었다. 망연자실하게 그 광경을 바라보던 나. 그 와중에도 그냥 끌고 오길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은 든다. 으.... 나까지 목구멍 아래에서 신물이 올라오려고 했다. 맙소사, 이럴 땐 어디다 신고를 해야 하는 건가?

어정쩡한 자세로, 조금 지나자 충분히 게워내고 속이 편한지 다시 얌전해지는 유리 누나.... 양팔로 누나를 안아 들고 와서 대문 옆 기둥 앞에 내려 등을 기대게 했다. 점퍼 안에 입고 있던 셔츠를 벗었다. 이대로 들어가 침대에 눕히면 일이 커진다. 군데군데 묻은 덩어리들을 폭탄제거 하는 심정으로 정리하고, 가장 피해가 큰 유리 누나의 재킷과 크로스백처럼 두르고 있던 핸드백을 벗겨 냈다. 뭘 드셨기에 이렇게 다양한 악취를 풍기는 걸까? 볼일도 안 보게 생긴 주제에 이딴 걸 되새김질하다니.... 한밤중에 웃통을 깐 사내가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오물 범벅인 여자 옷을 벗기고 있는 광경을 동네 사람들에게 보이기라도 한다면, 두고두고 회자될 게 뻔하다. 신고가 먼저 들어갈지도 모르고.... 마음이 급해진다. 부모님께도 이 꼴을 보일 순 없는 노릇이었다. 특히, 아버지가 모르게 처리해야 한다.

‘정말 어드벤처하구나.’

시계를 보니 자정이 목전이었다. 바쁘게 손을 놀려 벗어낸 옷들을 둘둘 말고 누나 구두까지 챙겨 들고는, 조심스럽게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마당을 넘어 현관문을 여는데, ‘끼이익~’ 하는 칠판 긁는 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내가 잘못 한 것도 없는데 안방 쪽 눈치를 살펴야 했다. 휴우.... 늦는다는 전화를 해 두지 않았다면 지금 안방 문이 열렸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역시 예절바른 인생을 살면 손해는 안 본다. 도둑이 된 심정으로 도어 스토퍼를 내려 현관문이 닫히지 않게 고정시켰다. 후~! 2층에 있는 누나 방문까지 열어 두고 내려와야 한다. 고개를 돌려 담 너머의 상황을 살폈지만, 인기척은 없다. 유리 누나는 안전할 것이다. 서둘러야 한다.






마셨던 술기운이 몽땅 깨고 없었다. 웃통을 벗고 있는데도 몸에서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소리 죽이며 극도로 긴장한 상태에서 힘을 써서 그런가? 어깨까지 뭉쳐 묵직한 느낌이라니.... 대문과 현관문을 닫고 올라오니 유리 누나는 침대 위에 뻗어 세상모르고 곯아떨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는 나는 아직 갈 길이 멀어 보인다. 블라우스부터 시작해 스커트며 스타킹까지.... 위 속을 헤엄치고 나와 누나 몸 위에 토핑 되었던 것들의 흔적으로 엉망이었고, 역한 냄새가 스멀스멀 방안을 메우고 있었다. 저대로 두면 아침에 깨어나 한강의 어느 다리로 갈까? 가면 버스를 타고 갈까? 택시를 탈까? 따위의 엉뚱한 생각을 해 봤지만 이대로 뒀다간 살이 먼저 썩지 싶었다.

환기를 위해 창문을 조금 열어 두고, 내 방으로 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유진이 방은 유리 누나의 방 맞은편.... 방문에 노크를 했으나.... 역시, 잠들어 있나? 몇 번 더 두드렸지만 감감무소식이다. 문고리를 슬며시 돌려 열리는 틈사이로 얼굴을 빠끔히 들이밀었다.

‘!!!!!!’

노팬티? 가랑이 사이에 있는 이불. 벽 쪽으로 모로 누운 몸. 잠옷 아랫단은 어디 가시고 희멀건 다리 한 짝이 유혹하듯 뻗어 있다. 허벅지를 넘어 골반에 이르기까지 내추럴하게.... 그리고 한쪽 둔부엔 응당 보여야 할 천 쪼가리가 보이지 않았다. 쪼그만 게 제법 탱글탱글한.... 덮어주고 깨울까? 했지만, 잘못했다간 온 집안을 깨울 것 같았다. 뭘 어쩌겠다는 건 아닌데 문을 닫으면서 느껴지는 아쉬움은 감기 따위를 걱정한 오라비의 심정이었겠지?

‘쟤는 원래 저러고 자나?’

그러고 잘려면 문이라도 잠글 것이지. 놀란 가슴이 두 근반 세 근반 뛰고 있었다. 달리 도리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어디부터 벗겨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다. 이런 환경에서도 잠을 잘 수 있는 건 인간뿐이리라. 우선, 같은 층에 있는 내 방 맞은편의 욕실로 가서 수건 몇 장에 물을 적셔 돌아왔고, 방문을 잠갔다. 유진이에게 뒤처리를 맡기려고 했던 계획은 일단 수포로 돌아갔다. 누나를 몇 번이나 더 깨웠지만.... 묵묵부답. 묵시적인 동의로 간주하자. 블라우스부터 간다!

‘자업자득이다.’

블라우스의 단추를 풀 때마다 당겨지는 젖가슴들과 아슬아슬하게 드러나는 속살.... 서툰 손길로 두서없이 풀다 보니 나머지 단이 스커트 속에 있는 걸 깨달았다. 옷감이 만든 명암에 알파벳 Y가 보이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슬림한 스커트는 옆구리 근처에 지퍼 같은 게 있을 텐데, 하고 더듬어 봤으나, 양쪽 모두 그런 결이 없었다. 이런, 뒤쪽에 있나? 하고 침대 옆에 꿇어앉았다. 유리 누나의 오른쪽 어깨와 말랑한 엉덩이 한쪽을 잡고 모로 세워 살폈다. 하지만 거기도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입은 걸까?’

두드리면 열린다던데 두드려 볼까? 그냥 당기면 분명히 골반에 걸릴 것 같았다. 쉬운 것부터 하기로 하고, 수월하게 블라우스를 빼고자 손가락 마디 몇 개를 배위에 밀착되어 있는 스커트의 벨트라인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손가락을 위로 들어 올리면서 블라우스 천을 유리 누나의 가슴 쪽으로 당겼는데,

‘얼씨구?’

블라우스 아랫자락이 배꼽을 개봉하며 그냥 쑥 빠진다. 손가락에 걸린 벨트라인은 쭉 늘어나고.... 밴드 소재로 되어 있는 스커트.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옛말 틀린 게 없구나. 이렇게 되면 스커트를 먼저 벗겨야 한다.

스커트 위쪽의 양 끝을 잡고 늘려서 천천히 내렸다. 골반을 조금 지나자 방금까지 블라우스 아래 섶이 가리고 있었을, 누나의 살결보다 진한 하얀색 팬티가 아랫배 위에 살짝 떠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저 내리려고 하자.... 예상했던 대로 엉덩이 쪽에서 저항을 받는다. 계속 당기면 뒤쪽 팬티가 딸려 내려올지도 모르는데....

‘자승자박이다.’

음부를 가린 앞쪽이 밴드의 장력에 말려 내려오지 않게만, 최대한 신경을 쓰면서 팬티의 하얀색이 점점 좁아지는 삼각지대 끝까지 내렸다. 팬티가 살짝 젖어 있는데, 땀은 아니겠지? 내심 뭔가를 기대했는지 어쨌는지 엉덩이에 깔려있던 블라우스의 부드러운 마찰에 힘입어 스커트 뒤쪽도 함께 딸려 내려와 나름(?) 고마웠다.

스커트를 벗기고 보니, 발가락부터 허벅지 대부분을 가린 검은색 스타킹이 직관적으로 들어왔다. 벌어진 블라우스 사이로 하얀색 브라자와 가슴의 볼륨 일부, 세트인 게 분명할 하얀색 팬티는 딱 필요한 부분만 가리고 팽팽하게 둘러져 있었다. 얼마나 날씬해야 골반이 저렇게 튀어 나오는 걸까? 아랫배는 푹 꺼져있고....

잠들어 있는 유리 누나의 발 옆에 한쪽 무릎을 올리고 팔을 뻗어 스타킹들을 벗겨냈다. 우유빛깔을 뽐내며 매끈하게 뻗은 두 다리, 그 위쪽의 삼각지엔 옷감 너머로 거뭇하게 보이는 음모 때문인지 도톰하게 올라온 부위가 눈에 들어 왔다. 보고 있자니 같이 도톰해지려는 내 삼각지.... 나는 머리를 살짝 도리질 쳤다. 물수건으로 입과 목 언저리, 그리고 양쪽 다리를 닦아 주고, 블라우스 앞쪽에 뭍은 여분의 찌꺼기를 닦아 냈다. 어차피 수건의 두께가 있기 때문에 어떤 직접적인 감촉도, 접촉도 없었다. 보이는 건 인건비로 치자.

이제 블라우스를 벗겨야 하는데, 이거 어째 살을 맞대려고 하니 기분이 좀 싱숭생숭했다. 허락도 없이 자꾸 팬티 탄력을 시험하고 있는 아랫도리 때문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누나를 보고 흥분하다니, 꼴사나운 생식기 같으니라고.’

생각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누나의 반나체를 대하는 정신과 몸이 따로 반응한다. 안 그래도 내 자신이 거북해지려는데, 벗겨져 있던 유진이의 탱글탱글한 엉덩이까지 떠올려 대는 기억은 괜한 죄책감까지 얹어 준다. 목적에 충실해야 한다. 이건 어디까지나 자연스러운 생리현상일 뿐이다. 나는 내 양심에 어긋날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잖아? 이게 다 누나를 위해서다. 이대로 두면.... 살이 썩는다. 그래! 인도적인 차원의 구호활동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블라우스의 남은 단추를 풀었다.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유리 누나의 겨드랑이를 잡고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머리가 90도를 넘어 내 왼쪽 어깨에 기대어 지고, 양쪽 팔은 맥없이 늘어져 있다. 끌어안듯 블라우스 안쪽으로 누나 등을 받쳤다. 부드러운 맨살의 감촉. 배꼽까지 파고드는 샴푸냄새. 가볍게 기댄 무게감들이 미묘한 느낌을 만들고 있었다. 한번 쓰다듬어나 볼까하고 갈등했지만 실행하진 않았다. 한쪽 손을 놀려 블라우스를 등 뒤쪽으로 해서 허리께까지 내렸다.

누나가 숨을 내 쉴 때마다 목에 전해지는 야릇한 기운에 왜 오금이 저릴까? 여전히 잠들어 있는 유리 누나. 그런 누나의 가슴골에 시선을 주지 않으려고 의식하면서, 이번엔 브라자 후크를 끌렀다. 이대로 후크를 놓아 버리면.... 브라자가 흘러내리겠지? 양쪽 후크를 잡은 그 자세, 그대로 다시 침대에 눕히고 팔을 뺐다.

말려 내려간 블라우스는 허리춤에 있고, 양쪽 팔목에 걸려있는 천 쪼가리의 모습은 무슨 그물침대의 매듭 같은 형국을 하고 있었다. 소매 단추를 끌러 그 매듭을 해체하고, 블라우스도 완전히 제거했다. 탄력 있게 가슴을 쥐고 있어야할 브라자는 아래쪽 젖가슴 가리는 일을 포기하고 퍼져있었다. 근무태만인 것이다. 기가 막히는 몸매, 다리는 왜 이렇게 긴 걸까? 여기에 올라타고 싶어 껄떡댄 사내놈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성공한 사례도 있겠지?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일까? 하지만....

절경은 절경이구나. 사진이나 영상으로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원효대사를 소요산에 숨어들 게 만들었던 요석공주의 아름다움이 이와 같았을까? 그래서 그랬던가, 소요산에 들어온 것이 삶인지, 정진인지 스스로 물음이.... 거기서 삶은 도피인가? 욕망으로부터 파괴되지 않기 위한? 휴우.... 더 보며 생각에 잠겼다간 내 팬티가 파괴될 것 같구나. 마저 구호나 하자.

브라자는 맨 마지막이다. 물수건을 집어 들고 양쪽 팔과 배를 문질렀다. 쌕쌕거리며 고른 숨을 쉬고 있는 유리 누나와 달리 내 입에선 더운 바람이 뿜어져 나왔다. ‘업어 와도 모르더니 다시 업어 가도 모르겠구나.’ 우유를 끼얹은 것일까? 아님 우유에 담갔다 뺀 건가? 어쩜 이리도 하얀지.... 혀를 대면 우유 맛이 날까? 미친 상상이 이성의 매듭을 풀려고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마침 열어둔 창문 틈으로 차가운 바람 한 덩어리가 얼굴을 쓸고 가는데, 멀어지는 이성의 따귀를 때리는 것 같다. 누나는 술기운인지, 전라의 상태로 헐벗고 있었지만 그다지 추워 보이진 않는다. 몸을 닦을 때마다 위태로워 보이던 브라자를 틈틈이 추슬러 주다보니 가슴의 대부분이 한 번씩은 형광등에 노출되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뭐라고.... 이미 다 벗겨진 몸뚱이에서 젖꼭지만큼은 지켜주려고 애를 썼는지.... 나는 진정한 로맨티스트였다.

필요한 곳은 다 닦았다. 어차피 곧 보게 될 터이지만, 굳이 드러내 놓고 닦고 싶지는 않았다. 무의식의 경고가 분주하게 본능을 밀어 내는 것 같았다. 마치 화약고를 건드리게 될 것 같은 불안감이 좋은 작용을 하기도 했고....

유리 누나의 옷장 서랍을 뒤져 목 부위가 최대한 넓고 기장이 긴 셔츠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누나의 머리를 들어 끼운 뒤 잠시 멈췄다. 되도록 가슴의 노출 시간을 줄이고 브라자를 벗겨 셔츠를 입힐 수 있는 동작, 그 최적화된 과정을 그려 보았다. 두 번 다시 마주치지 못할 살결들과의 이별이다. 간다!

양쪽 팔을 옆구리에 붙였다. 팔뚝에 둘러져 있던 어깨끈을 잡아 내리자 가슴을 가리던 패드 부위가 무기력하게 이끌려 내려왔다. 젖꼭지만은 안보겠다는 일념으로 빠르게 몸을 옮겨 유리 누나의 팔들을 구부려서 셔츠의 소매 구멍에 집어넣고, 위쪽 젖무덤에 걸쳐 있던 셔츠 자락을 얼른 잡아 내리고는 이불을 덮어 주는 것으로 마무리 했다. 이별은 짧게 해야 하는 것이다.

시선의 가장자리에서 팔을 들 때마다 약하게 출렁이며 존재를 과시하던 그것의 움직임과 얼핏 봐도 연한 분홍빛을 띤 또 다른 그것을 전혀 못 본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러는 과정에서 노골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쳐다보지 않았던 내 자신이 뿌듯했다. 누나를 볼 때마다 알몸을 투시하게 되는 비극은 막아야 하지 않겠나. 지금도 위험수위였다. 물러설 줄 아는 게 군자라고도 했고....

“휴.... ”

큰 산은 넘었지만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다. 마지막으로 핸드백과 구두를 닦고, 오물이 뭍은 옷들을 욕실에 던져두고, 마당에서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챙겨 들고 대문 밖으로 나갔다. 길 바닥위에 어지럽게 흩어진 것들을 대강 쓸어 담고, 욕실에 있는 옷들을 비누로 가볍게 빨아 세탁실에 던져 놓고, 기진맥진한 몸으로 샤워를 마치고서야.... 비로소 내 긴 하루를 마감하는 단 잠에 빠져 들 수 있었다.




‘쿵! 쿵! 쿵! .... 쿵! 쿵! 쿵!’

‘왜 이렇게 가슴이 뛰지?’ 몽롱한 정신에서 팔을 움직여 심장이 있을 만한 곳에 손바닥을 대 보았다. 박동을 느끼지도 못 할 정도로 심장은 고요하기만 했다. 꿈을 꿨나 싶었다. 그러고 다시 정신을 놓고 몽롱한 기운에 몸을 맡기려는데,

“쿵! 쿵! 쿵!”

눈을 떴다. 방안이 훤했다. 고개를 들어 문이 있는 곳을 쳐다봤다.

“쿵! 쿵! 쿵! 오빠!” 유진이 목소리였다.
“왜?”

“깼어? 아침 먹으라고!”
“그래.”

사지를 비틀어 기지개를 펴 하품을 하다, 결려오는 통증에 ‘엇’ 하고 신음소리가 튀어나오고 ‘으으~’ 하고 후렴구까지 새어 나왔다. 몸을 세우고 앉아 깊게 한 숨을 내 쉬었다. 간밤의 전쟁 같았던 일들이 순서를 무시하고 엉켜서 떠오른다. 엎어지니 코앞이라고, 엎어지니 아침이구나. 싶은 느낌. 욕실에서 대충 세수를 하고 주방으로 내려갔다.

“기체 후 일양만강 하옵신지요?”

부모님이 앉아 계신 식탁을 향해 목례를 하자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시며 들고 계시던 젓가락으로 어서와 앉으라는 시늉을 하시고, 엄마는 쳐다보지도 않고 내가 오기 전에 하던 얘기인지를 마저 하고 계셨다. 유리 누나는 식탁에 없었다.

“누이도 간밤 별고 없었고?”

밥을 먹고 있던 유진이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유진이가 작게 속삭인다.

“응. 난 별고 없는데, 언니는 별고 있나봐.”
“어인 까닭인고?”

모른 척, 같이 속삭였다.

“몰라. 으유~”

그러더니 아버지 눈치를 살피곤, 내 귀에 입을 가리고 와서는 얘기한다.

“술 냄새가 진동을 하는 거 있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먹던 밥을 마저 먹기 시작하는 유진이. 앞에 앉은 두 분은 대화에 여념이 없으셨는지 우리 쪽엔 무심한 모습이었다. 유리 누나는 속이 쓰려서 별 생각이 없겠거니 하고, 나도 본격적으로 밥을 먹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올라와 다시 침대에 누웠다. 온 몸이 노곤한대다 복부에는 포만감으로 충만해지니 다시 졸음이 느껴졌고, 그렇게 누워 눈을 감으니 또 금세 수면상태로 빠져 들어갔다. 그리고는 얼마를 잤을까? 내 의지와 상관없는 어떤 이질감에 눈을 떴고, 유리 누나가 침대 옆에 서서 내 팔을 쿡! 쿡! 찌르고 있었다. 흔들어 깨울 것이지.... 어젯밤 고생했던 일이 떠올라 건조하게 물었다.

“왜?”
“일어나봐.”

“그냥 얘기해.”
“일어나 보라니까?”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고, 말투는 신경질적이었다. 짐작은 가는데 자초지종도 묻지 않고 얼굴부터 구기니 내가 더 어이가 없어 한숨이 세어 나온다. 지금쯤 한강다리를 물색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누나에게 차라리 먼저 설명을 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

“짜~악!”

눈에서 불똥이 튀고, 세상이 암흑에 빠졌다가 밝아진 곳에 유리 누나는 없었다. 좀 더 정신을 차려 보니 얼굴이 돌아가 있다. 차라리 보따리를 내 놓으라고 할 것이지.... 어처구니없는 상황. 얼굴을 가눌 생각도 못하고 내 몸이 굳어 있었다. 통증도, 분노도 없는 그 순간의 내 감정은 황당무계함 뿐이었다.

“나 쁜 새 끼!”

한자 한자 잘근잘근 씹어서 내 뱉어 왔다. 문을 열어 둔 채로 나가더니 자기 방문을 거칠게 닫으며 남은 화풀이를 하는지, 힘이 남았다는 걸 과시하는지.... 고맙다는 말까진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건 너무 뜻밖이었다. 가서 화를 내? 해명을 해? 부질없게 느껴졌다. 코미디 단막 같은 상황에서 내가 드는 생각이라곤,

‘어제는 술을 깨워주더니, 오늘은 잠을 깨워주는구나.’였다.

허허허 거리며 쉰 소리로 내가 웃고 있었다. 돌이켜보니 생전 처음 누나에게 맞았다.


건전한 이기주의라고 할까? 아니면, 합리적인 개인주의라고 할까? 혹은, 얄미운 자기중심주의라고 할까? 유리 누나가 그랬다. 어지간해서는 주변 사람에게 신세를 지는 일이 없었고, 또 어지간해서는 먼저 나서서 주변을 돕지도 않았다. 가족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그랬다. 그렇다고 또 표독스럽게 자기만 아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몫을 잘 챙겼지만, 다른 사람의 몫에 욕심 내지 않았다. 각자의 인생에 구체적으로 개입되는 것을 꺼려하는.... 폐쇄와 단절?

뭣 모르던 시절 그런 유리 누나가 참 냉정하게 느껴졌었다. 주위에서도 반반한 얼굴 믿고 도도하게 군다는 얘기를 듣는 건 일상이었고, 나도 그런 시선에 동의하는 입장이었다. 정작 당사자는 개의치 않아 했지만 말이다. 묵묵히 자기 하고 싶은 것만 하고, 또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알아서 했다. 그런 유리 누나의 모습이 고독하게 비친 건 내 머리가 좀 더 크면서였다.

자기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법이 없던 그 유리 누나가 방금 전, 내 뺨을 올려붙이고 나간 것이다. 얼음 같았고 목석같았던 여자가! 유령처럼 함께 살던 그 여자가! 그런 생각을 하고 보니, 어젯밤 몸을 가누지도 못할 만큼 전에 없이 만취해서 자신을 놓고 있었다는 게 새삼 의아하게 여겨졌다.

‘쯧, 누나 입장에서 보면 그럴 만도 한 건가?’

어떻게든 유진이를 깨웠어야 했다는 뒤늦은 자책이 밀려왔다. 대강 닦아 주고 끝까지 흔들어 깨웠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자다 깨서 스스로 해결했을 지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호기심이 내가 그렇게 하도록 합리화 했던 건가? 아, 모르겠다. 단편으로 끝난 줄 알았던 지난밤의 악몽이 어느새 시리즈가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싶어 가슴이 답답했다.

시계를 보니 오후 한 시 무렵이었다. 창졸지간에 일어난 사건 덕에 잠은 깼는데 입맛이 달아나 버렸다. 아침을 먹고 별로 움직인 게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여하튼, 허기가 지진 않았다. 점심 의사가 없다는 걸 전할 겸, 냉수로 속도 식힐 겸 1층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왜 이렇게 고요할까? 단체 외출인가? 이 시간까지 식사준비를 하는 엄마나, 그걸 거드는 유진이가 없는 걸로 봐선 그런 모양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종종 있는 외식과 영화 관람이 왜 하필 오늘인지.... 나도 좀 깨워서 갈 것이지....

‘살기등등한 유리 누나와 오붓(?)하게 단 둘이 있게 됐구나.’

냉수 한 잔을 마시고, 또 한 잔을 더 떠서 내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유진이 방문을 열어 부재중인 것을 확인했다. 쥐방울 유진이가 그립긴 또 처음이다. 책상에 앉아 정리를 좀 해 봤다. 유리 누나와의 일에 대한 생각을 가다듬다보니 조선시대 가사 문학의 대가였던, 정철의 시가 떠올라 책장을 뒤적여 한 권의 책을 빼냈다.

‘여기쯤 있을 텐데........ 여기 있구나!’


『수미산을 서너 바퀴 감돌아 올라가
오뉴월 가장 더운 철 한낮쯤에
살얼음 잡힌 위에 된서리 섞어 치고
자취눈이 내린다는 전설이 있거니와
그대는 그것을 참으로 눈이라 보는가
님아 님아 별사람이 별의별 소리를 다 해도
곧이 듣지 말고 짐작하여 들으소서.』


송강가사에 나오는 구절로.... 요약하자면, 어떤 경우에 대한 판단을 신중히 해달라는 당부의 의미를 담고 있는 시였다. 판단하는 것은 하나의 의식작용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위험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 수 있는 법인데, 지금 내가 그 함정에 빠진 것이다. 내 마음의 소리라도 다시 한 번 의심하고, 가볍게 곧이듣지 말았어야 했다. 원하지 않는 호의는 어쩌면 폭력인 셈이다. 선의로 시작한 구호가 악의로 받아드려 진 것인가....

떡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다른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겠다 싶어, 그렇게 한동안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두어 시간 다른 일을 잊고 활자에 중독되어 가던 즈음에....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올 것이 왔구나.’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의자에서 몸을 돌리고 대답했다.

“네.”

방문이 열리고, 유령처럼 살던 유리 누나가 유령처럼 들어온다. 아직 화가 많이 안 풀린 건지, 상종하기도 싫은 건지, 말없이 시선을 바닥에 내리 깔고 침대 아랫부분에 가서 앉는다. 어디쯤 가서 얘기를 할까? 하고 잠깐 물색을 했지만 지금 자리보다 명당은 없어 보인다. 안보는 게 속편하다. 앞을 보고 바로 앉아 입을 열었다.

“누나, 그러니까 그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
“미안하다.”

응? 미안하다고? 예상 못한 전개에 다시 몸을 돌려 누나 쪽을 살폈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입이 열린다.

“일단.. 때린 건.. 미안해.”

오해해서 미안한 게 아니라 때린 것만 미안하다는 건가? 표정이 있어야 뭘 읽어나 보지. 말을 좀 길게 하던가 말이다. 다시 입을 닫고 있는 누나를 보다가 좀 전까지 의식하지 못했던 궁금증이 생겼다. 내가 입을 열었다.

“저기, 근데.. ”
“......”

“내가 그런 줄 어떻게 안거야?”

그랬다. 내가 한 일이 맞지만, 내가 그렇게 했지만, 내가 그런 줄 유리 누나는 어떻게 알았을까? 유진이나 엄마일수도 있지 않은가? 어떻게 알고 와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따귀 먼저 때릴 생각을 했을까? 아침에 유진이는 영문까진 모르는 눈치였는데.... 혹시, 깨어 있었나? 아니야! 분명히 잠들어 있었다. 시체처럼 늘어지던 수족을 떠올려보자. 그랬으면 진즉에 말렸겠지. 아니지! 도중에 깬 걸까? 그래서 수치스러워 잠든 척 한 건가? 어서 말을 해. 김유리!

“유진이한테 물어봤으니까.”
“엄마한테도?”

“엄마가 그런 거면, 야단이든 걱정이든 얘기가 있었겠지. 그리고....”
“......”

“어제 너.... 만난 거 기억나.”

그랬구나. 유진이 떠 봐도 모르는 눈치였을 테고, 엄마가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으니까.... 용의선상에 나만 남은 거구나. 가만! 그러면 왜 그랬는지 이유를 알 것 아냐?

“왜 그랬니?”

어? 왜 그랬냐니? 몰라서 물어?

“기억난다면서?”
“그래. 너 만난 것 까지 기억나.... 화 안 낼께. 얘기해봐.”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나 만난 건 기억나는데, 그 뒤로는 필름이 끊기셨다? 그랬나? 내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원인들, 너무 깨끗하게 흔적을 지웠구나 싶어진다. 갑자기 후회 아닌 후회가 일었다. 결정적인 증거물들은 욕실에서 비누로 빨아 버리지 않았던가. 스타킹은 빨지 말걸.... 꼼꼼해도 문제구만.

“누나 어제, 토한 거 기억 안 나지?”

저! 저! 내 그럴 줄 알았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뻔뻔하게 쳐다보는 거 봐. 다시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비위가 상해 입 꼬리가 내려간다. 하지만 이걸 빼면 설명이 안 된다. 칼을 쥐고 자신만만하게 그 참혹했던 사고에 대해 설명해 주려는데,

“그럼 유진이라도 깨웠어야지.”

아! 그건.... 엉덩이, 노팬티, 온 집안이 깰지도.... 잠시 지난 일련의 과정을 시간 순으로 나열하고 되짚어 보았다. 이건 어디 한 토막만 가지고는 간편하게 오해가 풀릴 것 같은 상황이 아니었다. 의자를 들고 누나 앞으로 갔다. 정면에 마주보고 앉아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내 얘기 잘 들어.”

전봇대를 붙들고 있던 유리 누나를 시작으로 구토와 그로 인한 피해, 그래서 대문 앞에서의 탈의, 방으로 이송, 유진이의 노팬티로 인해 불가피해진 상황과 나는 오로지 목적에 필요한 일만 충실히 했으며, 그 외의 어떤 불순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 것과, 골목을 청소하고, 옷들을 세탁했던 모든 전말에 대해 정말 있는 그대로 낱낱이, 열과 성의를 다해 고해 받쳤다.

유리 누나의 표정은 처음엔 짐짓 못 믿는 눈치에서, 그래도 그럴 수 있냐는 눈치로 바뀌더니, 유진이 얘기에서는 살짝 웃는 표정이다가, 다음 대목에서는 얼굴을 붉히고 눈도 마주치지 못했고, 장엄했던 서사의 결말을 듣고는 방을 나가 세탁실의 옷들을 확인하고, 그것도 모자라 대문 밖에 남아 있을 그 잔재들까지 목도하고 돌아와서야 표정을 풀고 제대로 된 사과를 했다.


“괜찮아. 나도 생각이 짧았어. 뭐라고 메모라도 한 장 써둘걸 그랬나 보다. 아침에 많이 놀랐겠네?”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유리 누나. 근데 표정이 좀.... 저건 마치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코에서 ‘킁’ 하는 소리까지 들린다. 이 여자가 점점? 뭐가 웃긴 거야? 생각이 짧았던 내가 웃긴 거야, 메모가 웃긴 거야?

“또, 왜?”
“풋... 풉.. 푸후?!”

“......”

손가락으로 내 얼굴을 가리키며 웃더니 침대 위로 자지러진다.
‘어쭈? 얼굴까지 묻고 웃어? 이불에 침 흐르겠네.’

“좋은 거면 같이 좀 웃지?”

숨이 넘어갔나? 웃음이 그치고 잠시 정적이 흐른다. 엎어지면서 드러난, 어제 봤던 옆구리 살이 아는 체 하는 것 같다. 엎드린 자세 그대로 몸을 일으키더니 나를 보지 않고, 침대 등받이를 보며 얘기하는 유리 누나.

“.... 니 뺨”

내 뺨이 왜? 하며 이쪽저쪽 만져보는데....
아~ 씨! 쓰라렸다. 왼쪽 뺨이, 그것도 많이 쓰라렸다. 일어서서 거울 앞으로 갔다. 손바닥에 붉은 물감을 묻혀서 찍어 누른 것처럼 잔영이 남아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맞을 땐 어안이 벙벙해서 아픈 줄도 몰랐는데, 누나의 손속에 담겨 있던 분노가 뺨 위에 고스란히 머물러 있었다. 정말 측은한 몰골이었다. 이게 무슨 꼴이람.... 그런데, 저 여자 보게? 또 웃고 있네? 나, 참!

욕실로 갔다. 찬물을 틀고 손을 적셔 볼에 문질렀다. 가만히 있는 동안에는 몰랐는데 손을 대면 아팠다. 유리 누나에게 맞은 것도 처음이었지만 여자에게 뺨을 맞은 것 역시 난생 처음이라는 깨달음. 이 상태로 좀 된 것 같은데, 왜 이제 와서 웃는 걸까? 에잇! 그건 또 알아서 뭐하냐? 쯧! 흉 지진 않겠지? 주걱으로 맞은 흥부의 뺨도 이랬을까? 이런다고 붓기가 가라앉을 것 같진 않았고, 그저 시간이 약일뿐이었다. 체념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충분히 웃으셨는지 평정을 찾은 유리 누나.

에휴.... 아무렴 어떠냐. 이미 맞아버린 뺨을 무를 수도 없고, 훈장은 아로새겨 졌는데.... 걱정했던 것 보다 쉽게 오해를 풀고, 유리 누나 얼굴도 풀렸으니 그걸로 다행스러운 거라고, 값싼 대가를 치른 셈 치자고 달랬다. 그러고 보니.... 누나가 그렇게 무방비로 웃는 것도 본 기억이 없다. 내가 가족인 유리 누나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미안해지는 건 무슨 감정일까?

“점심 먹었니?”
“아니, 생각이 없어서.”

“나 때문에 안 먹었니?”

대답을 요구하는 말은 아닌 듯 했다. 듣고 보니 한동안 못 느끼던 시장기가 감돌기는 했다. 게다가 조금 있으면 나머지 가족들이 돌아올 텐데, 요 모양 요 꼴을 하고 식탁에 마주 앉아서, 사실대로 고하면 유리 누나가 난처해지니 어렵고, 그 몇 시간 사이 어디 나가서 줘 터지고 왔다고 할 수도 없고, 자해를 했다고 할까? 하하하. 나가서 사 먹는 건 더 쪽팔린다.

“누나도 안 먹었으면, 같이 먹을래?”
“그래. 조금 있다가 내려와.”

말을 마치고서 총총 걸음으로 방을 나서는 유리 누나. 그냥 바로 뒤따라 내려가는 나. 국을 꺼내 데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공기를 꺼내 밥을 퍼 담아 식탁에 올렸고, 누나는 반찬들을 꺼내어 놓는다. 홀가분해지니 확실히 입맛이 돌아오는 것 같긴 했다. 열기를 재는지 냄비 뚜껑 손잡이에 손바닥을 올려놓고, 우두커니 서 있는 유리 누나. 짧은 시간 희로애락이 머물다 간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설명하기 힘든 어색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서먹하구만.’

거실로 가서 TV를 틀어 놓고 식탁에 돌아와 앉았다. 한결 나았다. 소란스러운 걸 좋아하지 않지만, 이런 상황에선 그런 소란이 도리어 그리워 질 수도 있는 것이다. 데워진 국이 나오고, 우린 말없이 각자 맡은 밥을 축내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친 빈 그릇을 들고 싱크대로 간 나에게, 머뭇거리며 ‘커피 한 잔 줄까?’ 하고 유리 누나가 물어 왔을 때, 나는 경악한 표정이었다. 등 뒤에 앉은 누나가 내 표정을 보지 못한 게 다행스러울 정도로.

그런 다정한 멘트를 날리다니.... 정말 마음은 고마웠지만, 등골이 다 쭈뼛거렸다. 누나의 친절이 익숙하지 않은 나머지 최대한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누나 기분이 상하지 않을 어조로 사양하고 내 방으로 올라왔다.

‘천지개벽’

‘밥 먹어!’ 라고 말은 해도 ‘밥 먹을래?’ 라고 묻지 않는 게 우리의 ‘김유리양’이었다. 그건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사실이다.




“똑! 똑!”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리 누나의 갑작스런 행동변화에 대한 원인이 궁금했다. 뭘까? 내가 누나의 나체를 본 것 때문에? 그게 뭐? 그래서 갑자기 친절해 진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뺨을 때린 게 미안해서? 흠.... 그거라면 그럴 수도 있겠는 걸? 따위의 돈도 안 되는 추리에 빠져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린 것이다.

“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유리 누나. 손에 든 건 뭐지? 누워 있던 내 머리맡에 와서 엉덩이를 걸치고 앉는다. 왜 가슴이 뛰는 건가? 두려움이었을까? 오늘만 해도 세 번이나 내방에 들어오다니. 누나가 오늘 이전에 내 방에 들어왔던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저 쪽으로 돌아 누워봐.”
“......”

뭐 하자는 거야? 라는 눈빛으로 누나를 올려다보는데, 설명도 없이 손에 들고 온 것을 내 뺨에 가져다 댔다.

“엇, 차거!”
“가만있어. 좀 돌아눕고..”

찜질주머니에 얼음을 채워 온 것이었다. 군소리 않고 몸을 돌려 벽 쪽을 향했다. 그냥 주겠다던 커피를 마셔주고 은원관계를 정리했어야 했다. 얼음의 한기 때문인지, 말도 안 되게 어색한 상황 때문인지, 이유를 분간하기 어려운 닭살이 돋아 왔다. 모슨 오해를 하고 있기에 이럴까? 커피를 거절한 게 어떤 오해를 키웠던 걸까?

“고마워. 그냥 내가 할게.”
“......”

손을 뻗어 찜질주머니를 잡으려고 했지만, 유리 누나는 놓을 생각도, 나한테 넘겨줄 의사도 없다는 듯, 대꾸 없이 그저 문지르고 있었다. 그러다가 처음, 주머니를 들어 손바닥으로 내 부은 뺨을 만져 왔을 때, 나는 ‘움찔’했고 누나는 다시 손을 떼고 마사지를 했다. 잠시 후에도, 또 잠시 후에도, 같은 동작을 반복해 왔을 때야 비로소, 냉찜질에 내 뺨이 얼얼하지 않은지 온도를 가늠하는 동작이었음을 눈치 차렸다. 이런 세심함도 있었던가?

“있잖아.... 저녁에..”
“......”

“여기 좀 있을래?”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금세 행간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걸 부탁하려고 얼음주머니까지 들고 들어 온 거군.’ 나도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던 데다, 전에 없이 자존심을 굽이고 내키지 않을 친절까지 베푸는 누나를, 시간을 끌어 초라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나는 군자니까....

“그러께!”

마사지하던 동작이 멈췄다. 드디어 나갈 건가? 그런데 유리 누나가 되물어 온다.

“뭘 그런다는 거야?”
“아침까지 방에 있으라는 얘기 아니었어?”

“마.. 맞아. 맞는데.... ”

말을 잇지 않고 있었다. 내가 너무 일찍 대답해 버렸나? 얘기를 다 듣고 설득당하는 척 했어야 한 건가? 내 딴엔 쿨하게 대답 한다고 그런 건데, 이런 정적이 싫다 정말. 잠시 후 입을 떼는 누나.

“너 혹시.... 그래서 밥 먹자고 한 거였니? 아빠, 엄마한테 네 얼굴 보일까봐?”

꼭 그것만은 아니었지만, 그게 가장 큰 이유라면 이유인 건 맞았다. 그렇다고 거기서 덥석, ‘그래!’ 할 수는 없었다. 그렇잖아도 미안해서 내 비위 맞추는 사람한테.... 내일 아침이면 붓기는 가라앉을 테고, 아무리 미모가 뛰어난 유리 누나라지만, 마사지를 더 이상 받고 있다가는 오글거리다 못해 몸이 배배 꼬여버릴 것 같았다. 속으로 어떤 궁리를 해 봤다. 그리고 간만에 한 번이자, 누나에겐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읊어’ 보기로 작심했다.

“조불려석한 자, 해어화는 과분하고, 내 속 천의무봉하니 심려를 거두시오.”
“......”

유리 누나는 말이 없고, 내 몸은 벽을 보고 있어 확인할 수 없었지만, 뭔 개 풀 뜯어 먹는 소린가 하고, 궁금해 하고 있는 분위기. 입맛을 다시는 소리를 내고, 시조를 읊듯 억양을 살려 부언에 들어갔다.

“한 때 걱정할 뿐, 다음 것 볼 겨를 없는 부족한 놈은, 꽃처럼 아름다운 미인 과분하기만 하고, 내 마음 꾸밈없이 자연스러워 아이처럼 순수하니, 이내 걱정이랑 하들 마시오.”

그리고 슬쩍 몸을 돌려 유리 누나를 살폈다.

‘그래. 못 알아듣는 게 정상이야. 누나.’

굳이 이렇게 설명이 길어지도록 말을 꾸민 이유는 우선, 넘쳐흐르는 어색함으로 경직된 분위기를 풀고, 가능하면 유리 누나를 한 번 더 웃게 만들어 부담을 덜어준 뒤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설명이 더 필요하다는 눈빛의 유리 누나. 계속해서 억양을 살려가며 느릿하게 덧붙였다.

“내가 밥을 먹은 건 그저 배가 고팠지, 주제에 그렇게 멀리 내다 본 건 아니었고, 그런 미천한 놈에게 꽃처럼 아름다운 누나가 위로를 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으며, 나는 지난 일 털끝만큼도 나쁜 감정 없으니 걱정은 그만하시고, 돌아가 편히 쉬십시오.”

잠시 눈을 돌려 생각에 잠겼던 누나가 갑자기 입을 가리며 웃기 시작했다.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아들었다는 표정, 그늘을 밀어내며 웃는 그 얼굴은 참.... 뭐랄까.... 화사했다. 그래, 정말 화사해 보였다. 저 얼굴은 저렇게 웃는구나. 누나가 내 어깨를 밀며 안으로 들어가라는 표현을 해왔고, 나는 꿈틀거리며 벽 쪽에 붙었다. 침대 등받이에 기대앉는 유리 누나. 한동안 뜸을 들이더니.

“난 그랬거든.”
“......”

“근데 넌....”

“속이 좀.... 깊다. 김우진.”



#사랑예찬 - 1부 끝#

===============================================================================

안녕하세요. 꾸벅! 작가신청을 허락해 주신 소라의 너그러움에 감사드립니다.

제 취향의 기준에서 너무나도 뛰어난 소설들을 읽고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자극과 충동을 받았습니다. 한동안 막연히 써보고 싶다는 생각만 하던 차에 주옥같은 대사로 이루어졌던 어떤 종영드라마에서 영감을 얻어 급기야 이렇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글을 올리는 만행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어느 작가님의 고백처럼 글을 써보니 장편 글을 쓰시는 모든 분들이 존경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작가님의 글을 읽고 자극을 받았으니 그 분은 겸양이나 저는 현실입니다. 제 스스로의 무능함을 절절이 깨닫기도 했고요. 쓰면서 다시는 글을 쓰려는 시도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까지 하게 되더군요. 이렇게 글을 시작하면서 변명 같은 말씀을 좀 드리고 싶어 사족을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제 글에 관한 어떠한 평가나 반응에도 저는 그저 읽어 주신 자체만으로 감사드릴 겁니다. 써 놓고 제가 읽어 보아도 참으로 재미가 없는데, 또 버리기는 아까운 게 간사한 제 심리였던지라 좋은 글로 이루어져야 할 이 곳에 누추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심을 부린 응당한 대가라고 마음에 준비를 하고 있답니다. 아까운 시간을 즐겁게 해드리지 못해 미리 사과 말씀 드립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 종영드라마의 주옥같은 대사를 각색하거나 존경의 의미로 이야기에 넣는 부분들이 있을 겁니다. 읽으시게 된다면 이해해 주시고 감안해 주십사 말씀드립니다.

끝으로 가장 죄송스러운 점 두 가지를 더 말씀드리자면, 얼마간의 분량이 있고 결말에 대한 구상도 있지만, 저의 재주가 바닥이라 도중에 포기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것과 이야기와 인물의 특성상 야설이라는 장르에 어울릴 상황이 10부를 전후해야 나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보잘것없는 글 장난을 하면서 제가 너무 궁상을 떨고 있네요. 아무튼 그냥 죄송합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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