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여성들은 놀라웠다. 어쩜 그렇게들 비위를 잘 맞추고 쥐락펴락 하는지.... 몸으로 달구고 혀로 녹였다. 여색이라는 주지육림 그 달콤한 쾌락에 빠져 나라를 망친 위인들이 어떤 환경에서 무슨 생각으로 그토록 헤어나기 힘들었을지 얼핏 이해마저 되기도 했다. 하나라 걸왕이 매희에게 그랬고 은나라 주왕이 달기에게, 주나라는 포사, 오나라 왕 부차는 서시였던가? 가장 대표적인 게 아마도 당나라의 현종과 양귀비일 것이다. 유랑시인 김삿갓 일화 중에 기생 치마폭에서 살다 기가 쇠약해져 죽은 사내의 비화를 듣고 지었다던 시가 떠올라 속으로 읊조렸더니 실없게도 웃음이 나왔다. 간결하고 재치가 넘쳐 재밌게도 외웠던 시였는데 그도 중독성 강한 그 맛을 제대로 알고 있었는가 보다.
『위위불염갱위위
불위불위갱위위
해도 해도 싫지 않아 다시 하고 또 하고
안 되겠다 하면서도 다시 하고 또 한다.』
나는 자위로 터득했던 그 마성과 같은 쾌락을 김삿갓이 모른다면 이처럼 촌철살인으로 쓸 수 없었겠지. 하나같이 색계로 일국을 무너뜨린 절세미녀들이지만 초패왕 항우와 우미인의 이야기는 순애보로도 전해지니, 비록 대사를 그르치고 말았다는 역사적 평가 뒤에서 과연 사랑하는 남녀의 대사는 무엇일까. 하는 근본적인 물음이 고개를 들기도 했다. 거나하게 취한 동철이는 아까부터 일생의 주옥같았던 사건사고들을 자랑스럽게 떠벌리며 술판을 고조시켜 나갔고, 그 장대한 대하드라마에 나도 이따금씩 조연으로 출연시키며 공자를 엑스트라로 활용해 내 개똥철학을 비웃기도 했다. 얘기를 듣던 혜미씨도 나라는 남자의 성(性)을 무너뜨리고 싶었던 것일까?
틈틈이 혼자 잡념에 빠져 있는 동안 내 빈틈을 틈타 우리 혜미씨는 아까 동철이 파트너가 궁금해 하던 주먹을 보자며 손을 뺏어 가더니 자기 가슴에 쩌~억 하고 붙여버리질 않나, 억지로 손가락을 굽혀서 젖가슴을 주무르게 하려고 헛힘을 써대질 않나, 귓속말을 하는 척 귓불을 핥아대질 않나, 덥다고 가슴을 벌려대며 얼음으로 문지르질 않나.... 옆에 커플의 주물럭대는 광경이 부러웠는지 그냥 직업정신인지 나만 허락한다면 그 자리에서 뭔 일을 내고도 남을 기세였다. 내가 너무 뻣뻣하게 굴어서 더 약이 올라 승부욕이 불탔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녀는 나에게 있어선 시한폭탄이었다.
색기애애한 술자리는 그렇게 여물다 못해 무르익어 갔고, 나는 혜미씨의 저돌적인 공세에 지쳐가고 있었다. 통제를 벗어나 있던 내 분신은 혜미씨 테크닉에 맞춰 독자적으로 놀아나며 수난을 겪어야 했지만 덕분에 정신을 놓지 않을 만큼 조절해서 마실 수 있었던 것은 전화위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만원버스에 시달린 것처럼 체력이 바닥나고 있었고 시간을 살피니 벌써 열한시였다. 내가 시계 보는 걸 눈치 챘는지 아님 진작부터 그럴 계획으로 이 자리를 만든 것인지 동철이가 파트너와 함께 일어섰다.
“마! 너 어디가?”
“너랑 못하는 거 하러가. 새꺄!”
“임마! 그럼 나는?”
동철이가 나랑 못하는 게 뭔지 몰라서도 아니고, 나는 누구랑 하냐고 물어 본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적어도 여기선 내 보호자격인 네가 가버리면 어찌 하냐는.... 딱 요만큼의 미아 된 심정을 담은 말인데 이 자식은 내가 기대하지 않는 소리를 지껄였다.
“넌 혜미씨만 따라서 몸만 가. 혜미씨!”
그러더니 혜미씨를 향해 윙크를 날리고 혜미씨도 눈알이 찌그러져라 윙크로 화답을 하는데, 내가 오기 전부터 암암리에 어떤 공조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건 또 어떻게 회피를 해야 할지. 하아.... 술이 좀 받아서 그런지 마땅히 탈출할 구실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진씨 또 봐요~ 혜미야 수고~”
“응. 언니도~”
“전화해라. 우진아~ 먼저 간다~”
“그래. 가라 가.”
그냥 만사가 귀찮아지기 시작하는데 못 이기는 척 혜미씨라는 주지육림에 미끄러져 버릴까, 싶은 도발적인 충동도 생긴다. 주기적으로 꺼떡대던 내 분신을 봐서라도 처분이 필요하긴 했다. 첫 경험을 누구랑 어떻게 하든 무슨 상관일까? 동정은 기생에게 주고 그 대가로 기술을 익히라는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출처도 불분명한 교훈 나부랭이가 떠오르는 걸 보면 제법 취하긴 취했나 보다.
아무튼 저 자식을 그때 맞아 죽게 내버려뒀어야 했는지도 모른다는 잔인한 후회도 잠시! 기습적으로 혜미씨가 내 허벅지 위에 올라타는 바람에 식겁해서 동철이가 앉았던 자리만큼 달아나야 했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 내렸다. 왜....왜 이러실까?
“으융~ 우진씨. 볼수록 귀여워. 나 카운터에 전화 쪼옴~”
그러더니 사색이 돼 얼어붙은 날 무시하고 내 허벅지를 넘어 수화기 쪽으로 기어가는데.... 보란 듯 느릿하게 잘록한 허리 능선이 선두에서 통과하고 뒤따라 팽창한 둔부에 밀려 팽팽해진 스커트 끝자락이 나타난다. 곧이어 탄생의 신비를 담은 그곳의 일부가 검은 팬티를 커튼삼아 우측하단 45도 시야에서 정지했다. 갔으면 앉던지, 서던지 할 것이지 그 자세에서 수화기를 잡고 어깨만 내린다. 당연히 치 들린 엉덩이에 있던 아슬아슬한....
‘어~ 어~ 스커트 올라간다!!!’
무대의 막이 오르듯 스커트가 당겨져 올라가고 좁은 갓길 같았던 팬티면적이 늘어날 줄 알았는데 반대로 급격히 좁아졌다. T팬티!!!! 융기 사이에 갈라진 계곡이 협소해지고 배설의 신비가 담긴 그 갈색 부위가 고양이 수염 같은 주름 중앙에 띠 하나로 가려져 나타났다. 아래쪽으로 삐져나온 검은 터럭과 음부 바깥살의 일부까지 목격하자 너무 아찔해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고, 언제 고였는지 입에 고인 침을 한번 삼켜야했다. 통화내용은 들리지도 않는 청각기능의 마비.
보라고 올린 게 분명한데 훔쳐본 심정이 돼서 가슴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 회심의 일격으로 내 분신은 폭발할 듯 꿈틀거리고, 겨우 몸은 돌아섰는데 따라오지 못한 욕구가 하소연하며 내 몸을 통제하려고 들었다. 배꼽아래에서 이글거리기 시작하는 감정들을 씻어내려고 손에 잡히는 생수병 하나를 입에 물고 숨도 안 쉬고 거덜 냈지만, 그냥 배만 부르고 숨만 가빴다.
‘정말이지 서비스 정신이 투철한 진정한 프로시구나. 이건 진짜 위험하다.’
통화를 마쳤는지 혜미씨가 뽀드득거리며 소파에서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고, 돌아보니 스커트를 당겨 매무새를 정리하고 있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본능이 그녀의 하체에 시선을 데려가려고 기를 쓰는 게 느껴졌고, 이번엔 테이블 위에 있던 통에서 얼음 두 개를 꺼내 요란하게 씹어댔다. 어떻게라도 타오르는 욕구를 진화하지 않으면 버텨 낼 재간이 없을 것 같았다. 또 한 번 거침없이 살을 비비거나 노출을 시도해 온다면 결과를 자신하기 어려운, 그로기상태였다. 잠시 후 코너에 몰린 내 속사정을 모르는 그녀 덕택에 안도와 아쉬움의 애환이 교차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뭘 봤을지 알고 있을 그녀가 얄궂게 웃으면서 재촉한다.
“우진씨, 우리도 나가요. 밖에 차 와있을 거야.”
“무슨 차요?”
“알면서 그러는 거지? 이유~ 그러니까 더 미치겠어!”
이대로 줄행랑을 치면 더 이상 아무런 갈등을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이 아가씨가 난처해지거나 나 때문에 약속된 화대를 못 받거나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내 까짓게 뭐라고 줄기차게 거부 하는데도 마지막까지 열성을 다해 본분에 충실하려는 그녀를 우습게 만들 수 있을까. 뭐하나 내세울 것도 없는 내 주제가 미안해지기도 했다. 진짜 내가 뭐라고.... 그녀에게 이만큼 과분한 친절봉사를 받고서도 나만 편하자고 무안하게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지 머리가 복잡했다.
그녀가 입구 쪽으로 나가더니 옷걸이에 벗어 뒀던 점퍼를 집어 들고서 나오라는 손짓을 한다. 또 한 번 침을 삼키고 점퍼를 들고 유인하는 그녀 곁으로 가자 내 뒤로 돌아가서 옷을 입혀준다. 그러더니 간을 보는지 엉덩이 고랑을 손바닥으로 쓰다듬고 달아나는 혜미씨의 은혜로운 손길. 매를 맞은 놈처럼 허리를 휘어야 했다. 어찌되던, 맨 정신으로도 감당하기 벅찬 이 신천지부터 벗어나야 한다.
“나가죠. 혜미씨!”
“네~”
결심이 선 듯 한 내 말투에 싱글벙글 웃으며 그녀가 먼저 문을 열며 나갔고, 뒤따라가니 카운터에선 혜미씨의 것으로 보이는 가방과 코트를 건네주고 있었다. ‘손발이 척척 맞는구나.’ 코트를 입고 앞섶을 여민 혜미씨가 내 손을 잡으며 출구 쪽으로 끌었고 나는 어정쩡하게 카운터에 있는 마담을 보며 인사를 했다. 그녀는 무일푼으로 놀다가는 놈에게 돈 걱정 말고 자주 놀러오라며 내 주머니 사정까지 고려해 과분한 환송을 해준다.
출구가 열리자 차가운 바깥바람이 떠내려 와 몸의 열기를 식혀준다. 그리운 세상으로 다시 돌아온 기분. 유흥가 길목의 소음마저도 반가웠다. 지상으로 올라가자 정면에 하얀색 승용차가 비상등을 껌뻑이며 주차되어 있었고, 혜미씨가 저 차라며 손짓으로 가리켰다. 한 발 먼저 나가서 그녀를 오른쪽 뒷좌석 문을 열고 태운 뒤, 나는 반대편 뒷좌석으로 돌아서 탑승했다. 그리고 혜미씨가 목적지를 정하기 전에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녀의 적극성을 믿고 던지는 도박수를....
“혜미씨 집으로 가죠. 괜찮죠. 혜미씨?”
“어머~~ 우진씨 갑자기 너무 적극적이야. 어뜩해~”
“어뜩하긴요. 기사님께 집 어딘지 알려 주셔야죠.”
“오빠! OO아파트 2단지!
서슴없이 오빠라고 하는 걸로 봐선 아마 혜미씨 가게에서 자주 이용하는 렌터카인 것 같았다. 아니면 그냥 웬만하면 다 오빠로 통칭하는 지도 모를 노릇이고 여하튼 그런데.... 차가 출발하는 움직임에 맞춰 혜미씨는 코트 앞섶을 풀어헤치고 내 쪽으로 다리를 꼬고 앉는다. 내가 창 쪽에 바짝 기대어 붙자 다리를 풀고 완만한 각도로 머리를 기대는 혜미씨. 불편한 건 아는지 좌석 중간의 불룩 솟은 자리로는 옮겨오지 않고 있었다.
“아잉~ 이리 좀 와요. 나 허리 아퍼~”
“편하게 앉으시면....”
“피곤해서 그래요~ 우진씨이~”
“그러니까 편하게 앉으시라는....”
“아이~ 쫌만 기댈게~”
“안전벨트는 하셨는지....”
“뒷자리에서 무슨 안전벨트에요~ 아이~”
“......”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기사님은 운전에만 집중하고 계셨고 오히려 내가 자꾸 운전석을 의식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허벅지를 타고 올라간 스커트자락 끝에서 거뭇한 음영의 일부를 드러내는 구면의 팬티와 젖가슴 살 때문에 창밖을 보며 궁색하게 변명을 했다.
“다음에 찾아오려면 길을 좀 익혀둬야 해서요.”
“주소 적어 주면 되지~ 그러지 말구 이리 좀 와요~”
아옹다옹 좁은 공간에서 펼쳐지는 유치한 실랑이가 지속되는 사이 10여분을 달리자 어느덧 아파트가 즐비한 단지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주머니 안에서 집 열쇠와 식권을 제외한 모든 재화를 뒤적거리고 있었고, 혜미씨는 동 수를 불러 주고 있었다. 차가 몇 번 구불거리며 그녀가 사는 동 입구에 도착하자 혜미씨가 먼저 문을 열고 내린다. 나는 수중에 있던 지폐를 만지작거리며 기사님께 여쭸다.
“기사님, 얼마 드리면 됩니까?”
“아닙니다. 선생님. 가게에서 별도로 계산해 주실 겁니다.”
천만다행이었다. 택시 기본요금 두 배를 초과했다면 집에 갈 차비도 없을 뻔 했다. 이렇게 된 이상 엘리베이터까지 갈 필요도 없다. 혜미씨는 계단 앞에 서 있었고, 나는 전광석화처럼 열려 있던 문을 닫아 잠금장치를 누르고 윈도우를 조금 내려 그녀에게 깍듯하게 그리고 재빠르게 말을 던졌다.
“오늘 덕분에 즐거웠습니다. 동철이한텐 자고 갔다고 얘기할게요. 쉬세요. 혜미씨!”
“어머머머, 우진씨! 우진씨!!! 잠깐만요~”
말을 뱉어내고 기사님께 어서 출발해 달라고 부탁했다. 차로 달려온 그녀가 황당해하며 내 이름을 부르며 창문을 두드리다 손잡이를 잡고서 덜컹거려댄다. 아까완 다르게 난처해하시던 기사님도 결국 내가 다급하게 재촉하자 마지못해 액셀을 밟아 주셨고, 고요한 아파트 단지 내 심야의 탈출극은 그렇게 조촐하게 일단락되었다. 휴우.... 그녀에게는 인간적으로 느끼는 가책이 있었지만 거기까지가 내가 해줄 수 있는 배려의 전부였다. 화대를 약속받았다면 그녀가 내 말뜻을 이해하고 둘러대기를 바라야 한다. 돌아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 앞만 살폈다.
“기사님, 가까운 지하철역에 좀 세워주십시오.”
“댁이 어디십니까?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지하철로 가는 편이 빠릅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안 그러셔도 되는데 말입니다....”
나는 근처 지하철역에 내렸다. 몇 번 더 나를 설득하려는 기사님께는 죄송했지만, 더는 우유부단하게 행동할 수 없었다. 순결에 대한 강박도 아니고 상대가 접대부라서 동정을 버리기 아까워 거부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내 의사와 무관하게 받아야 하는 물질적인 대접들이 내가 보답할 수 있는 수준을 한참 넘어선 것들이라 더 이상은 정말 곤란하다고 여겼다. 팁도 주지 못하고 달아난 것만 해도 너무 미안했다. 다음에 혹시 혜미라는 아가씨를 태우게 되면 내가 거듭 미안해했다고, 대신 사과를 부탁드린 게 내 마지막 남은 염치불구였다. 그 기사님의 살펴 가시라는 인사가 꽤나 정감 있게 들린 건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집 부근의 지하철역을 나왔을 땐 자정을 넘어서고 있었다. 오늘은 늦는다는 전화도 한통 못 했다는 사실이 왜 이제야 떠오르는 건지. 망할.... 녹초가 다 된 몸을 이끌고 터덜터덜 주택가 길목을 향해 걸어갔다. 얼큰한 취기에 보태 내 분신을 웃고 울리던 혜미씨와의 지난 몇 시간이 실제였는지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는데, 나는 오늘 흔들리다 못해 송두리째 뽑혀 버릴 뻔 했다는 점이 한심하기도 했다. 거기다 그녀를 다시 마주치면 무슨 면목으로 얼굴을 볼까, 싶으니 한 숨만 늘어나고 어서 가서 드러눕고 싶은데 손빨래라는 과제까지 남아있으니 시름도 늘어났다.
방랑과 사랑에 지쳐 산마루에 올라 괴나리봇짐을 베개 삼아 잠을 청했던 김삿갓의 심신도 나만큼 고되었을까? 술에 지치고 여색에 지친 내가 비교할 언덕은 아닌가? 삿갓형님은 베고 누울 봇짐이나 있었지, 하고 주책의 한계를 초월한 궁상에 젖어서 땅바닥을 긁으며 어기적어기적 골목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무심결인지 낮에 이사를 왔던 그 집 앞을 지나다 문득,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데,
“흐어어억!!!!”
심장이 쪼그라들고 모골이 송연해져서 꼴사나운 비명까지 지르고 말았다. 맥박이 잠깐 멈췄다가 급격하게 퍼덕이기 시작했고 다리도 후들거려댔다. 뒤로 안자빠진 것만 해도 천지신명이 굽어 살피신 게.... 까딱했으면 향년 20세를 끝으로 골로 갈 뻔 했다. 소름에 밀려 피부가 벗겨지는 기분이라니....
‘뭐...뭐야 저 여자??’
시뻘건 가운을 걸치고는 손으로 턱을 괸 자세로 담배를 쥐고 있는 월하의 여인네가 검은 생머리를 늘어뜨리고 큰 대문 뒤에서 정확히 나를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놈의 머리카락이 저렇게 긴지.... 하아~ 정말 귀신 본 줄 알았다. 귀곡산장도 아니고 저 집 마당엔 왜 저딴 위치에 파란색 조경을 설치해 두었는지. 술기운도 놀라 졸도할 지경에 내가 헛것을 보는가 싶고, 몸까지 가늘게 떨며 몇 초간 그러고 있는데 사람소리를 낸다.
“안녕하세요?”
“..누구.... 세요?”
“누구라 그러면 알아요?”
모르지 알 턱이 있나.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어서 물었던 방어기제였을 뿐이다. 동네에 귀신 떠돈다는 얘긴 못 들어 봤다는 기억까지 들춰야 될 정도로 기겁했던 여파가 남아있었으니까. 하고많은 시간 중에 저 여자는 왜 하필 이 시간에 저러고 있는지, 다짜고짜 화부터 낼 뻔 했다. 누구 명줄을 당기려고....
“왜 그렇게 봐요?”
“아뇨.... 예, 안녕하세요?”
“훗~”
겨우 놀란 가슴이 진정되면서 느끼는 건 오늘따라 비웃음을 자주 당한다는 것이고 착각이 아니라는 것이다. 역시 동철이 자식을 만나면 수명이 1년씩....
“오늘은 혼자에요?”
“네?”
“오늘은 왜 혼자냐구요?”
“저기 실례지만 무슨 말씀ㅇ”
“저번에 여자 끌고 갔잖아요!”
“네?”
“토요일이요!”
“토요일?”
“네!”
앞뒤 없이 받은 질문을 조합해보니 지난 주 토요일 사건을 말하고 있었다. 어떻게 그걸 알고 있을까하고 잠시 되짚어봤더니 그때 누나를 끌고 왔던 게 저 뒤에 전봇대였고, 지금이랑 비슷한 시각이었으니 오늘처럼 나와 있었다면 봤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누나 몸에 묻었던 오물을 닦아 주기 전엔 세세하게 주위를 살피며 이동하지 못했었다. 이 여잔 놀랍게도 그때 한번 보고 오늘 대번에 나를 알아본다는 점에서 눈썰미가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잔잔한 소름을 안기며 떠오르는 한 가지 무서운 점은 이집이 오늘 이사 왔다는 것이다. 허허.
취하고 기운도 없는 상황에서 음산한 분위기 때문에 놀랐을 뿐이지 귀신일 리는 없었다. 그런 걸 믿지도 않고. 앞서 떨었던 오두방정은 새로 온 이웃의 유별난 인사치레 때문이다. 본래의 나로 돌아가 담배를 새로 꺼내 무는 그녀에게 확인 차 질문을 했다.
“오늘 이사 오신 분 맞죠?”
“......”
“제가 낮에 봤거든요. 짐 들어가는 거?”
“짐만 들어 온 거예요.”
“짐만 들어왔다뇨?”
“짐만 들어 왔으니까요.”
낭랑한 목소리로 짧게 끊어서 대답을 해왔다. 원래 이 집은 전에 살던 대가족이 이사를 가고 한동안 비어있었는데, 요 근래에 사람만 먼저 들어와서 살고 있었나 보다.
“실례지만, 그럼 여기 언제부터 사셨어요?”
“그건 왜요?”
말투는 끊어지고 딱딱했지만 목소리가 맑아서 그런지 따져 묻는 적의가 느껴지진 않았다. 오히려 내 호기심을 자극하려는 인상을 받아서, 담배 연기를 후~ 하고 내뿜는 이 정체모를 여인을 좀 뒤집어 보기로 했다. 그 날 어디까지 본 건지, 봤으면 소문은 내지 않았는지, 안냈으면 함구해 줄 것을 부탁할 필요도 있었다. 남은 술기운을 빌려 입을 뗐다.
“저는, 저기 옆집에 살거든요.”
“그래요?”
“그리고 이 동네에 산지 8년 됐습니다.”
“네에~”
“이사 오신지 얼마나 되세요?
“왜 그것만 물어요?”
호락호락하게 넘어올 생각이 없나 보다. 그럴 거면 먼저 말이나 걸지 말던가... 놀리는 건지 정말 몰라서 저러는 건지 맑은소리에 어울리지 않게 대화방향이 탁하게 흐를 조짐이 보인다. 심사를 파악하기가 어려운 하늘거리는 붉은색 가운에 담배 문 이 여자.... 그렇게 나온다면 좀 다른 방법으로 우회해서 유도해보자는 잔머리가 움텄다. 이때까지만 해도 목적은 어디까지나 유리 누나를 구제했던 지난주의 애프터서비스 차원이었다.
“이웃사촌이라고 들어 보셨습니까?”
“당연하죠.”
“가족 다음으로 가까운 게 이웃입니다.”
“......”
“조상님들께선 이웃 간에 돕고 살라고 하셨습니다.”
“했는데요?”
“먼 곳의 친척은 가까운 이웃보다 못하다. 는 말이 있거든요.”
“있는데요?”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완전한 사람이다. 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말도 있더군요.”
“지금 수작 부리는 거죠?”
“이웃을 사랑할 의무만 있을 뿐, 판단할 권한은 없다. 라는 말이 생각나네요.”
“담배 하나 줄까요?”
“질문에 답을 하나 주시면 담배를 받은 걸로 하겠습니다.”
“뭔데요, 그게?
“언제부터 여기 사셨습니까?”
“아핫~”
경계심인지 장난인지에 걸린 빗장은 풀었다고 생각했다. 담배 들고 웃는 그녀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는데 내가 다가서자 안전거리를 확보하려는지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어디 가실까? 내가 담이라도 뛰어 넘을 거라고 생각했나? 하면서 또 뛰어넘을 수 있겠다고 불필요한 계산을 끝낸 내 자신이 더 우습다. 저러다 집안으로 들어가 버리지 싶어 자리에 섰다.
“저는 이웃을 해치지 않습니다. 그만 가시죠?”
“흥, 그 여자처럼 끌고 갈지 어떻게 알아요?”
“그 사람은 제 친누납니다.”
“그래도요.”
“술이.... 아니 몸이 안 좋아서 그랬던 겁니다.”
“.... 부부가 아니었구나.”
“부부요?”
“네.”
“언제는 끌고 갔다면서요?”
“끌고 갔잖아요,”
“아니 그게 아니라....”
“뭐가요?”
납치범으로 몰았다가 신랑으로 둔갑시키고도 끌고 갔다니.... 현란한 정신세계를 소유한 이 여자. 내가 지금 머리에 꽃 꽂아야하는 여자랑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가, 한심한 후회가 들기 시작한다. 혹시 몰라서 유리 누나 얼굴에 먹칠하지 않도록 깔끔하게 매듭지으려고 했던 건데, 오늘따라 여자들의 노리개가 되서 뒹구는 가련한 내 청춘을 더는 방치하고 싶지 않아졌다. 지친다. 지쳐.
“대화 즐거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인사를 하고 가던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 놀래 키더니 말도 안통하고, 좀 모자란 건지 수가 읽히지 않는 저 여인네와 계속 말을 섞었다가는 내 정신세계도 현란해질 판이다. 골치도 아파오고 괜히 주저리 떠들어 기운만 낭비했다.
“저기요?”
“......”
“이봐요?”
“왜요?”
“어디가요?”
“집에 갑니다.”
“일주일 됐어요! 나 여기 온지 일주일 됐다구요!!”
이젠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인데 내가 가는 게 섭섭한 투로 목소리를 높인다. 신혼부부일 텐데, 저 여자는 왜 가는 나를 붙잡고 싶은 것처럼 행동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슨 속셈으로 이러는 걸까? 그게 갑자기 궁금해졌다. 잠시 갈등하다, 이번에도 뒤로 빼거나 엉뚱한 소리하면 그땐 무조건 집으로 간다는 결심으로 몸을 돌려 큰 대문 쪽으로 다시 걸어갔다. 가운 입은 그녀는 대문 창살 앞까지 와있었다.
“안 도망가십니까?”
“흥! 해치지 않는 다면서요?”
“끌고 갈지도 모르는데요?”
“누나였다면서요?”
“그럼 가까이 좀 가도 되겠습니까?”
“그래요. 뭐.”
큰 대문아래 계단을 밟고 올라가니 이번엔 뒤로 물러나지 않았고,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비벼 껐는지 몸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한걸음 거리에 마주보고 섰다. 대문 창살은 팔 하나가 너끈히 드나들 수 있는 너비여서 얼굴 생김새를 식별하기가 용이한 구조였다.
자세히 보니 이 여자 대단히 미인이었다. 역시 신혼집 새댁인지 많아야 20대 중반으로 젊었고, 유리 누나에 버금갈 정도로 평균보다 큰 키에 진한 눈썹도 눈에 띄었다. 아깐 흐릿해서 몰랐는데 반듯하게 섰는지 불빛을 받고 반짝 거리는 콧날과 붉은 립스틱이 발라져 있는 도톰한 입술. 전체적으로 청순해 보이는 이미지에 그 청순미를 더하는 눈매가 두드러진다. 붉은 립스틱 특유의 외설적인 분위기를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한 느낌은 너무 긴 머리칼만 빼면 귀신으로 착각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괜히 을씨년스럽게 만드는 얼어 죽을 파란색 조경은 마음에 안 들었지만.... 잠시 얼굴을 살핀 후 입을 열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약관 20세, 이웃, 김우진입니다. 식사하셨습니까?”
“푸훗~”
“저 그만 갈까요?”
“잠깐만요!”
“소개하시죠?”
“난 약관 스물셋. 나도 이웃이고, 근데 이름도 말해야 되요?”
약관인데 왜 스물세 살이라는 걸까? 재밌자고 그런 건지.... 뭐 그런 건 모르는 사람 태반이니 넘어가고, 이 세 살 많은 청순한 미모의 여자. 말할 땐 전혀 웃지를 않는데 어딘가 좀 귀여운 측면이 있었다. 팔짱을 끼고 차갑게 말하려고 애쓰는 것 같은데 도무지 쌀쌀맞게 들리지 않았다. 도리어 은근하게 풍기는 허술함이 동문서답으로 느낀 짜증을 잊게 만드는 묘한 분위기.
‘재밌는 누나네.’
“왜 그러시는지 이해합니다.”
“뭐가요?”
“이름말입니다.”
“이름이 왜요?”
“이름이 촌스러워서 그러시는 것 같은데, 전 다 이해합니다.”
“아니에요! 안 촌스러워요. 윤현주란 말이야. 뭐가 촌스러워?”
저건 콘셉트인지 갈수록 흥미진진한 캐릭터였다. 이 세 살 많은 현주 누님. 청순한 미모로 떡밥을 던지기 무섭게 발끈해서 물어 대시는 백치미에 귀여운 목소리가 쌓여 난생 처음 봤는데 사랑스럽고 친근하기까지 했다. 미인 앞에 장사 없는 건가 싶기도 하고,
“이런~ 제가 큰 실수를 저질렀네요.”
“흥~”
“근데 그 얘기가 맞았군요.”
“무슨 얘기요?”
“현주라는 이름말입니다.”
“내 이름이 왜요?”
“현주라는 이름이 통계적으로 볼 때 미인이 가장 많다는 건 알고 계십니까?”
“어? 그래요? 몰랐는데....”
내가 알기로도 그런 통계 같은 건 없었다. 있으면 다행이지만 있을 리가 있나. 그걸 또 믿는 건 순진한 건지 내 말이 그럴싸하게 들리는 건지.... 일단 이륙시켰으니 좀 더 태워서 날려야겠지.
“저도 사실 안 믿었는데 누님 미모를 보니 틀린 말이 아니네요.”
“칫~”
“현주는 구슬처럼 아름답게 빛난다는 뜻도 있습니다.”
“진짜요?”
“깊은 진리라는 뜻도 있죠. 누님 미모도 깊으시네요?”
“어떻게 그걸 다 알아요?”
“그러게 말입니다.”
“똑똑하다~”
“근데 누님은 왜 안 주무시고 이렇게 나와 계세요?”
“거기... 담배 피러 나왔어요.”
“그 참, 백해무익한 것인데 이렇게 유익한 일을 만들 수도 있네요. 기특하게.”
“무슨 말이에요?”
“담배 때문에 우리가 만났잖아요. 담배에도 한 가지 유익한 것을 오늘 발견했네요.”
“아저씨만 오늘 본거지. 나는 그ㄸ”
“아저씨라뇨? 김우진입니다. 총각이구요. 약관 2”
“알아요!! 내가 그것도 기억 못할 줄 알고?”
그때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좀 컸던 탓인지 아니면 벌써부터 거슬렸는지 근처 어느 집에서 조용히 좀 하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계를 보니 새벽 한 시. 내가 이 독특한 누님과 말장난 같은 대화삼매경에 빠져 주변을 고려하지 못하고 떠들고 있었나 보다. 더 고갈시킬 체력도 없고 시간도 늦어 이젠 정말 가긴 가야 했다. 아쉽지만 낮은 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이웃 윤현주 누님, 저 이만 가보겠습니다. 누님도 쉬세요.”
“네. 잘 가요. 이웃 김우진 아저씨, 또 놀러오세요.”
같이 속삭이는 모습까지 귀여웠다. 근데 김우진 아저씨는 뭐고 또 놀러오라는 건 뭔 소린지. 오늘따라 또 놀러오라는 사람이 왜 이렇게 자주 등장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이색적인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제대로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대문을 열고 들어와서야 애초에 물어보려고 했던 건 하나도 묻지 못하고 온 멍청함을 깨달았다. 뭐에 홀린 건지, 씐 건지....
집에 들어와 2층으로 올라가려던 나는 애석하게도 때마침 방을 나오시던 엄마와 마주쳐서 왜 전화도 없었냐고 쥐어 박히고, 바지는 그게 무슨 꼴이냐며 또 쥐어 박히고, 근데 가방은 어쨌느냐며 묻는 말에서는 나도 놀라 당황해 다시 한 번 쥐어 박히고서야 과사무실에 두고 왔다는 거짓말로 둘러댔고, 젊은 놈이 벌써부터 치매증상이냐며 핀잔을 뿌리고 방으로 들어가시는 엄마를 지켜봐야 했다. 삿갓형님 괴나리봇짐 떠올리면서도 동철이 차 뒷좌석에 두고 내렸던 가방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색계의 위력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후에 동철이에게 전화하면서 명함을 뒷주머니에 넣어둔 건 우연치고는 필연에 가까운 행운이었다. 덕분에 녀석과 통화를 할 수 있었는데 아침 일찍 찾아가겠다는 내 제의를 거절하고 약속한 시간까지 늦지 않고 학교 정문으로 가져와 주겠다고 했다. 얘기를 들은 뒤, 또 미친놈처럼 자동차 경적을 울렸다가는 죽여 버리겠는 협박을 끝으로 통화도, 하루도 정리되고 있었다. 손빨래와 함께....
우려했던 대로 동철이는 약속시간까지 정문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대신 놈의 심부름을 받고 내 가방을 들고 나온 건 뜻밖에도 어제 동철이의 파트너 아가씨였다. 적어도 동갑에 연상일 가능성이 높은 그녀가 왜 이런 잔심부름까지 하는지, 또 동철이는 찾아 가겠다는 나를 거절하고 한다는 짓이 고작 아가씨를 대신 보내는 처사라는 게 나를 갸우뚱거리게 만들었다.
고맙다는 인사만 하고 돌려보내긴 많이 미안했던지라 차를 대접하겠다고 했고 그녀가 승낙했다. 오전 아홉시도 안 되는 시간이어서 문을 연 가게가 있을지 미지수이긴 했지만 말이다. 얼마를 걸어서 살폈더니 다행히 좀 외진 곳에 영업을 개시한 카페가 하나 있었다. 테이블이 열 개도 안 되는 아담한 카페였고 시간이 시간인지라 가게는 텅 비어 있었다. 주방 겸 계산대가 카페 중앙에 오픈되어 있는 특이한 구조였고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여자가 우리를 보며 인사를 해왔는데, 아마도 첫 손님일 게 분명했다.
주문한 차가 나오는 동안 그녀는 말이 없었고 어색한 침묵만 감돌았다. 어제 그 가게 룸에서 자유분방하게 놀며 내 팔까지 더듬거렸던 그 사람이 맞는가 싶을 만큼 전혀 딴사람 흉내를 내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건 비단 행동뿐만이 아니었다. 머리를 풀고 파격적으로 노출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오늘은 발목까지 내려오는 면바지와 캠퍼스화에 남방위로 수수해 보이는 재킷을 걸치고 화장기 없는 담백한 얼굴로 머리는 뒤로 모아 묶고서 나타났다. 가방하나 둘러메고 학교 안으로 들어가면 누가 봐도 평범한, 미모가 돋보이는 여대생의 복장이었다. 내 가방을 들고 와서 먼저 아는 체 하지 않았다면 나도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였다.
“저 때문에 번거롭게 해드렸네요.”
“아니에요. 제가 원해서 온 거에요.”
“아무튼 정말 고맙습니다.”
“아니에요.”
어제보다 말수도 적고 아까부터 묻는 말에만 대답을 하고 있었지만, 목소리의 톤은 차분했고 말투와 단어들이 정갈해졌다는 변화를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주문한 차가 나오고 그녀 앞에 찻잔을 놓아주는 중년의 여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내 잔이 내려지고 내가 찻잔을 잡을 때 까지 기다렸다가 잘 마시겠다는 인사를 하고 자기 찻잔을 입에 가져가던 과정은 신선한 충격 그 자체였다. 그런 행동은 가정교육을 엄격하게 받았거나 평소에 습관처럼 몸에 배어있지 않으면 저렇게 자연스럽게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원해서 오셨다는 게... 근처에 다른 볼일이 있으셨나 봐요?”
대답은 하지 않고 찻잔만 만지작거린다. 내가 불편해서 그런 줄 알았고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녀의 치부(?)를 알고 있고 간밤에는 같은 공간에서 직접 체험까지 하지 않았던가.
“자리가 불편하시면 그만 일어날까요?”
“아뇨. 그런 건....”
어젠 그렇게 나긋나긋하게 굴면서 말도 잘하고 술도 잘 마시더니 오늘은 왜 이렇게 요조숙녀가 되서 대답도 저렇게 오리무중으로 하는지 파악이 안됐다. 곧 수업도 들어가 봐야 하는데....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할 때요.”
“......”
“왜 엄지로 도장 찍는지 모르시죠?”
“......”
언제까지 이렇게 뻘쭘하게 앉았다가 일어나기도 뭐했다. 입에 자물쇠를 채우셨는지 호응은 영 시원찮았고, 대답도 없지만 궁금해 하는 눈빛이 엿보였다. 이건 다음에 맘에 드는 사람 있으면 작업할 때 써먹으려고 궁리해둔 것이었는데, 조금 아깝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예행연습삼아 시전해보이기로 한 것이다.
“궁금하시면 오른손 좀 빌려주세요.”
그러면서 손을 좀 달라는 제스처로 왼손 주먹을 쥐고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머뭇거리며 손가락을 내밀어 온다. 얼른 그 손가락을 마중 나가서 걸고는 이제 도장을 찍자는 의미로 엄지를 세웠고, 우리는 텅 빈 카페에서 주인아줌마까지 궁금해 하며 훔쳐보는 가운데 새끼손가락 걸고 도장을 찍고 있었다.
“팔에 힘을 빼시고 제가 돌리는 대로 따라오세요.”
그렇게 말하고, 위쪽을 보고 붙어 있던 엄지가 테이블이 있는 아래쪽으로 향하도록 천천히 비틀어 내렸다. ‘qp’ 이렇게 되도록....
“이리 와서 정면에서 봐 봐요.”
테이블 가운데로 와서 손등을 정면에서 보라며 얘기를 했다. 눈을 말똥말똥 거리며 주춤주춤 몸을 당겨 내가 시키는 대로 손등을 정면에서 보고 있는 그녀에게 말했다.
“하트 모양이죠!”
“.... 아!”
그녀가 입을 반쯤 벌리며 감탄사를 뱉어 낸다. 새끼손가락을 걸고 엄지로 도장 찍은 양손의 전체적인 모양을 뒤집어서 보면 ‘♡’ 이런 하트 모양을 하고 있다. 그대로 잡은 손을 테이블에 올려놓으면서 기원전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부터 전해졌다는 내가 알고 있는 하트의 기원을 엑기스만 뽑아 농축해서 설명해주었고, 그녀는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집중해서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설명이 거의 끝나갈 무렵 잡고 있던 손을 슬며시 풀어 주었다.
“외국에선 새끼손가락으로 영혼이 서로 통한다고도 하고,
우린 월하노인이 묶어주는 운명의 빨간 실 때문이라고도 해요.”
“네에~”
“거기에 엄지를 넣어서 이 약속엔 사랑이 담보가 된다는 의미도 생긴 거죠.”
“아아~”
“아침부터 미인 손을 잡았더니 기운이 뻗치는 게 덕분에 공부가 잘 될 것 같네요.”
“후훗~”
이제 좀 불편이 가셨는지 아니면 아첨까지 떠는 내가 갸륵했는지 입을 가리며 그녀가 웃어 주었고, 나는 어색한 시간도 때우고 말대로 미인 손도 잡아보고 다시 써먹어도 효과가 있겠다는 자신감도 얻었으니 일석삼조였다. 이젠 내 갈 길 가야해서 양해를 구했다.
“제가 곧 수업이 있어서요. 그만 일ㅇ”
“저기....”
“네, 말씀하세요.”
“저.... 구경 좀 시켜주시면....”
“어디요? 학교요?”
“....네”
“혹시.... 그것 때문에 직접 오신 거예요?”
그랬더니 시선을 피하며 고개만 끄덕인다. 시계를 보니 강의시간까지 20여분. 강의실까지 가는데 필요한 시간뿐이었다. 학교구경이 하고 싶어서 내 가방까지 손수 들고 이른 아침에 왔다니.... 쉽게 거절하기가 어려워 보였다. 그렇다고 수업을 빠질 수는 더더욱 없는 노릇이었다. 혼자 둘러보라고 할까, 했지만 그럴 거면 뭐 하러 부탁을 해왔겠는가. 그래도 가이드를 해주기엔 상황이 여간 마땅치 않은데....
그녀가 수락할지 정말 몰랐다. 자칫하면 거절하려고 꼼수를 피운다고 오해를 살수도 있었다. 그 점을 감수하고 던진 나름의 무리수였는데.... 내가 제안하자 그녀는 흔쾌히 동의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나란히 교양수업을 받으러 가는 중이다. 그 교양수업은 청강이 가능했고, 요즘은 어떤지 모르지만 당시엔 자리만 있다면 도강도 다반사였다. 나 역시 관심 있던 철학 강의를 벌써 도강한 전력이 있었고....
강의실 맨 뒷자리에 붙어 앉았다. 그녀에겐 맥락도 없는 한 시간 반의 지루했을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 간헐적으로 옆에 앉은 그녀의 동태를 살피곤 했는데, 내가 힐끔거리는 걸 모를 정도로 수업에 빠진 열강모드였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거나 교수님 농담엔 다른 학생들처럼 그렇게 소리 내 웃는데.... 갑자기 그 얼굴에서 유리 누나 모습이 비춰졌다. 내 방에서 어깨를 맞대고 웃던 그 미소와 너무 닮아 보였던 것이다. 어제 동철이 옆에 앉아 장단을 맞추며 보였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기도 했다. 왜 이 여자 얼굴에서 난데없이 유리 누나가 겹쳐져서 떠올랐던 걸까.
그리고 유리 누나 주변을 맴돌던 쓸쓸한 기운이 그녀에게서도 느껴졌다. 내가 동철이 친구이긴 해도 낯설고 어려워 초면에 가까운 불편한 상대이자 입장일 텐데, 그걸 무릅쓰고 한 참을 주저하며 학교구경을 부탁해야 했던.... 그 심정을 짐작하자니 측은해서 생긴 연민이었나 보다. 이까짓 캠퍼스 그냥 들어가서 휘휘 둘러보고 다녀도 누구하나 뭐라고 할 사람이 없는데 눈치까지 보며 부탁하던 상황이 자꾸 연상돼 가슴 언저리에 알싸한 통증까지 일으켰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한테 다른 관심이 있는 건가, 하는 착각을 조금 하고 있기도 했지만 그 다음 그녀의 행보는 그게 정말 착각이라는 걸 반증해 주었다.
수업을 마치고 나와 교내 이곳저곳을 둘러 다녔다. 이방인처럼 머쓱하게 걷는 게 마음이 안 좋아서 팔을 내밀어 주었고 조심스러웠던 아까와 다르게 쉽게도 팔짱을 걸어왔다. 특별히 어떤 대화를 나누진 못했다. 아니, 내가 말을 걸 수가 없더라. 잊지 않기 위해 눈에 담아두기라도 하겠다는 듯 걸음마다 사물에 시선을 빼앗긴 그녀의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남다른 걸 맡는지 냄새에 취할 듯 숨을 들이쉬기도 했고, 잔디를 보며 들어가서 앉아도 되냐고 물어 왔을 땐 뭔가가 울컥거리며 코끝을 저려왔다. 그래도 된다고 하자 아이처럼 맑아진 얼굴로 조심스럽게 잔디 위에 엉덩이만 걸치고 앉는 모습에선 더 이상 그녀를 보지 못하고 시선을 거둬야 했다.
식당에선 뭐 대단한 메뉴가 있다고, 뒤에 서서 소풍 온 아이처럼 들뜬 눈빛이더니, 식당아주머니께는 어쩌면 그렇게 인사를 살갑게 하는지.... 아주머니가 애인 잘 뒀다 하시며 나까지 더 퍼주셨다. 식탁에 앉아서는 말로만 듣던 뭔가를 처음 본 사람처럼 감격해하며 반찬 하나하나를 음미했고, 게걸스럽진 않았지만 수북이 받아 왔던 음식이 버거워 보였는데도 결국 다 먹어치우던 그녀. 남겨도 된다는 내 말을 들은 건지 어쩐 건지....
벤치에 않아 커피를 마시면서 다음 수업 때문에 더 이상 동행이 어렵다고, 원하면 혼자 둘러봐도 괜찮다고 했을 때 잠깐 사이 깔렸던 그 어두운 그늘.... 전공만 아니면 곧 시험만 없으면 그냥 확 재껴버리고 오늘 하루 그녀를 위해 원 없이 캠퍼스를 휘젓고, 모자라면 다른 학교 캠퍼스까지 휘저어 버리고 싶은 동정심이 치밀었지만 차마 그럴 순 없었다. 정문에서 작별하며 돌아서 걷는 그녀의 발걸음이 어찌나 무겁게 보이던지. 저 발걸음의 오늘 저녁 행선지를 알고 있어서 그랬을 게다. 자기 세상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는 그녀에게 말하기 어려운 남다른 사연이, 들으면 많이 아플 사연이 있을 것 같아 보내고도 자리에 서서 시린 가슴을 좀 달래야 했다.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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