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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15:27 1,000회 0건
월요일 오전. 교양하나를 끝내고 비탈길을 내려가는 중이었다. 공터에서 쓰레기통에 네트를 걸고 족구를 하고 있는 학우들이 눈에 들어온다. 남녀구분 없이 뒤섞여서 공 튀기는 박자에 맞춰 꺅꺅거리는 까마귀울음을 연발하고, 나머지 몇은 앉아서 구경들을 하고 있는데, 거리가 줄어들수록 낯설지 않은 안면들. 같은 과 동기들이었다. 어쩐지 여자가 다수라 했더니.... 신분이 들통 나기 전에 날렵하게 방향부터 선회했다.

복지라는 분야의 특수성은 아동이나 간호 관련 직종에서 자주 느끼듯 여성 특유의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요소가 다분하다. 노인, 아동, 여성, 가족, 장애, 정신보건 등등.... 과에 상대적으로 여자들이 많은, 남자들 입장에선 축복과도 같은 황금비율을 대놓고 좋아하기엔 씁쓸한 그 균형이 모성본능의 연장선일거라 생각해보곤 했다. 다행이라면 선배들처럼 심각한 수준의 여성편중과 그럼에도 정원미달이라는 안타까운 전통이 서서히 누그러져 간다는 다소나마의 희망적 지표가 있다는 점이다. 복지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선진국의 시스템과 비교해 설득력을 얻기 시작한 시기라는 것. 구시대의 성장만능에 열광하던 세대가 물갈이되면서 의식도 나란히 변화되고 있었다.

나를 매료시켰던 복지의 핵심적인 가치는 연대와 정의 그리고 헌신과 같은 인간존중에 있다. 요즘의 직장인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고용 보험법 같은 사회적 안정망이 진통을 겪으며 최초 입법되던 시절. 당시의 복지는 전반적으로 제도적 장치가 미흡한데다 대부분 빈곤층이 주요 대상이었고, 그중에서도 소수만이 쥐꼬리만 한 혜택을 겨우 겨우 누리는 빈궁한 형편이었다. 그것은 필시 우리 현대사가 겪었던 굴곡에서 기인한 측면이 컸다고 볼 수 있겠다. 열악한 예산과 사회의 무관심이라는 악조건에서 종사자들이 남보다 많이 가질 수 있는 거라곤 봉사를 통한 보람. 철학자 헤겔은 사랑의 두 번째 계기를 다른 사람에게서 보람을 얻는 것이라고 정의했지만, 사명감 없이는 그마저도 공허하고 자신을 혹사시키는 빈껍데기에 불과했다. 냉정히 말해 입신양명을 꿈꿨다면 일찌감치 보따리를 싸는 게 후회를 줄이는 현명한 곳이 바로 사회복지였다. 치기어린 열정만으로 덤벼들기엔 녹록치 않은 분야답게 동기들 가운데는 제법 뚜렷한 소신을 품은 이들이 많았고, 다른 학부생들에 비해 포부 또한 남달랐다. 다만,

그들도 꿈과 낭만이 물결 칠거라는 대학생활의 동경심 일부를 1%의 성공률을 자랑하는 영양가 없는 미팅이나 숙취와 구토를 동반하는 음주가무로 채워 가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천편일률적인 문화세습의 노예패턴까지는 온전히 거부해 내지 못하는 파릇파릇한 플래시 맨. 즉 유혹에 약한 새내기의 한계였던 것이다. 게다가 우리 과는 나비보다 꽃이 많다보니 사내 녀석들 간에 여심을 둘러싼 경쟁보다는 양보와 나눔의 미덕이 충만했으니.... 곡간이 차야 예절을 안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 이치일 것이다. 흐흐.

나는 선약도 있고 옹기종기 노는 흐름을 방해하고 싶지 않거니와 미덕의 수혜자가 되고 싶은 욕심도 없었으므로, 동기들의 레이더망을 피해 눈에 띄지 않게 거리를 벌리며 빙글 돌아 내려갔다. 내가 생각해도 순발력이 발군이라는 자아도취. 명석한 두뇌로 현명한 판단을 내렸다고 자신했는데,

“야!!! 너 김우진이지?”

산에서나 들음직한 우렁찬 소리였다. 돌아봤더니 저만치 뒤에서 명석한 나를 삿대질하며 달려오는 한 사람. 얼굴 윤곽을 알아볼 정도로 간격이 좁혀지자 여자가 되고 같은 과 동기의 형상을 갖춘다. 농구화에 도포를 연상시키는 펑퍼짐한 멜빵바지를 펄럭거리며 모자를 푹 눌러 쓴 꼴이 제대로 힙합의 딸이다. 별명 밖에 모르지만 남다른 존재감을 소유한 그녀를 확인하고부터 미지의 불안이 가슴팍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김우진 맞네. 하아~ 숨차다.”
“......”

돌 구르듯 요란하게 뛰어와서는 헐떡이면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한마디만 들어도 호전적인 성품이 고스란히 들어난다. 그거 맞추려고 이 넝마를 퍼덕이며 예까지 뛰어오진 않았을 테고... 다부진 목청을 발판으로 산만하고 소란스럽게 굴기가 일쑤였던 이 전투적인 여자. 술자리를 함께 해봤다는 녀석들의 증언을 빌려 함축하자면 넘치는 에너지에 붙임성이 과하니 순탄한 대학생활을 원한다면 가까이 하지마라였다. 당시 친구들의 증언을 토대로 내가 붙여준 별명이 만덕이었는데, 이유를 들은 동기들도 키득거리며 찬성과 제창을 남발했었다. 만덕은 선덕여왕의 실명을 거꾸로 부른 것이다. 같은 (덕 덕)자에 (흩어질 만)자로 바꾸어 놓았다. 두어 달도 안 되는 적응기간 동안 남자들도 슬금슬금 피해 다니는 요주의 인물로 성장했지만 다행히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할만한 건더기가 없는지 나와는 오며가며 얼굴만 익혔을 뿐 통성명조차 나눈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영원한 열외란 없는 건가?

“휴~ 뭘 그런 눈으로 보냐?”
“......”

“너 나 몰라? 우리 같은 과잖아?”
“알아.” 만덕이....

“싱겁기는.... 꼭 모르는 사람 보듯 한다? 아까도 그러더니.”
“응?”

“내가 다 봤거든? 너 우리 보자마자 도망가는 거? 그랬어? 안 그랬어?”

봤나? 거참 용하다. 그 짧은 순간에 나를 포착하다니. 동기들 확인하자마자 몽타주를 숨겼는데.... 그거 따지러 온 걸까? 성격이 괄괄하다는 건 익히 알았지만 아니나 다를까, 별 친분도 없는 사이에 깜빡이도 안 켜고 당차게도 들이댄다. 뭐가 그녀를 이처럼 당당하게 만드는지 궁금하지도 않다. 그녀는 만덕이었고 세상이 넓은 만큼 인간도 다양하니까.

“약속이 있어서.”
“야! 인사도 못하고 가냐? 치사하게?”

“방해될까봐 그랬는데 섭섭했다면 미안하다.”
“허! 무슨 남자 애가 사과를 이렇게 쉽게 해? 너 그거 두 쪽 달린 거 맞아?”

“두 쪽... 달린 거라니?
“그거~”

사과를 해도 문제였다. 실실 웃으며 턱으로 툭툭 치듯 가리키는데 표적을 따라가 보니 내 배꼽 아래에 있는 그거 두 쪽.... 나 참, 기가 막혀서.... 시대가 아무리 변했기로서니 말만한 여자가 몰상식하게 남자 불알을 가지고 농을 치다니.... 이 퇴폐적인 당돌함에 어이가 바닥나는데 떨어지는 감도 받아먹을 자세로 머리를 젖히고 웃어재낀다. 악명 높은 만덕이의 실체는 과장된 게 아니었고 오늘도 한 건 하셨다. 원, 저렇게 재밌을까. 하나 떼서 저 입에 넣어주고 싶을 만큼 목젖이 아주 춤을 춘다. 왈가닥 수준이 아니라 이건 뭐 완전히 선머슴이 따로 없었다.

‘그래, 귀엽다 귀여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며 얼마간 웃더니 눈물까지 짰는지 손으로 눈가를 훔치며 입을 뗐다.

“아~ 간만에 시원하게 웃었네.”
“다 웃었으면 용건 좀 들어볼까?”

“어? 용건?”
“그래.”

“아~ 그게 그러니까....”
“......”

“아씨~ 생각이 안 나네? 아오~ 씨...”

짜증이 나는지 자책하듯 모자 위를 퍽퍽 치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왔다. 통통한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기도 하고.... 어디다 흘리고 왔는지 모를 만덕이의 지능이 제자리로 올 때까지 잠자코 기다려 줄 여유가 없었다.

“그래? 그럼 생각나면 편지해라. 먼저 간다?”

“.... 야! 잠깐, 잠깐!”

몸을 돌리려는데 내 점퍼 깃을 잡아당겼다. 그 바람에 살짝 중심을 잃으며 부실한 놈처럼 휘청거려야했다. 악만 쓰는 줄 알았더니 힘도 좀 쓰는구나. 이럴 때 보면 여자란 참 편리한 족속이다. 남성우월에 찌든 사회의 속성이 더 그렇게 만들었겠지만 성차별의 뚜렷한 개념이 없어 보일 때가 가끔 있다. 이건 연약함을 가장한 일종의 역차별적 횡포인 것이다. 암!

“어. 말해.”
“이따가 객주에서 한잔 할 건데 너도 와라.”

“그게 네 용건이야?”
“어!”

“몇 신데?”
“시간은.... 족구 끝나봐야 알아. 술값내기거든. 키킥.... 아! 오후에 전공필수 끝나면 바로 가겠다. 참.”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도 별루지만 여자들까지 합류해서 수선스러워지면 성별에 맞춰 정신이 두 동강 나도록 흐름이 갈린다. 왁자지껄 정신없는 술판이 될 게 뻔했기에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알았다. 시간 봐서 가던지 할게.”
“야! 뭘 시간 봐서 와? 오면 오는 거지.”

“사정이 어떻ㄱ”
“그냥 와! 너 동아리도 없잖아.”

사전 조사하느라 열외였나? 자기 손바닥에 있는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별걸 다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별걸 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너! 애인도 없잖아. 넘치는 게 시간이겠구만.”

“애인?”
“그래. 너 솔로잖아. 맞지? 키킥~”

“그런 얘긴 어디서 들었니?”
“야! 과 애들 다 아는데 낸들 모를 리가 있냐?”

“과 애들이 다 안다고?”
“그래. 몰랐어? 네가 떠들고 다닌 거 아냐?”

이건 무슨 소릴까? 내가 외기러기라는 사실 따위를 과전체가 알아야 될 만큼 난 유명인도 아니고 그걸 떠벌리며 다닐 정도로 푼수가 아니었다. 특별히 내성적인 건 아니지만 학기 초인데다 튀지 않고 고만고만하게 얌전히 지내왔다. 고등학교 때야 동철이와 연루되거나 개인적인 사건 땜에 달갑지 않은 유명세를 좀 치르긴 했지만.... 벌써부터 뒷담화의 소재로 내 사적인 얘기가 오고간다니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처음 말 섞는 만덕이를 통해서 들으니 찝찝하기도 하고.... 그딴 정보를 최초 유포한 놈이 궁금하긴 했지만 이 말괄량이삐삐도 떠도는 소문이나 주워들었을 테니 물어봐도 원하는 대답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야. 김우진? 무슨 생각 해?”
“어? 아냐. 용건 끝났지? 나 약속시간 다 됐거든?”

“그러니까 올 거야? 말거야?”
“되도록 갈게. 됐지? 간다?”

다른 대꾸가 없는지 입을 다물고 있어서 가던 길로 다시 걸음을 놀렸다. 사내놈들끼리 모인 술자리에서 그런 얘기가 오고갔던 적이 있기는 했다. 또래 남자들 대화가 대게 그렇듯 주요 관심사는 주색잡기라는 틀을 잘 벗어나지 못한다. 여자경험담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알만한 여자 중에 반반한 몇을 안주삼아 음탕한 분석을 내놓으며 지들 끼리 좋아 죽는.... 그걸 우정의 교류랍시고 친분을 쌓자며 서로의 신상도 나눠가지고 공감대를 형성해 서먹함을 덜어낸다. 그렇게 원초적으로 친해지는 것이다. 나도 술기운에 흥이 나서 시를 몇 수 읊어도 대고, 묻는 말에 빼지 않고 대답도 해주고 그랬었다. 아마 거기서 나온 말이 한입 두입 건너다 과에 퍼졌겠지. 말이 말을 만든다고 남의 얘기는 쉽게들 꺼내 가십거리로 삼고들 하지 않던가. 비단 내 얘기만 그랬으랴. 나 역시 만덕이 얘기를 본인 모르게 들었던 것처럼 사람 모인 곳에 사람 소문 나도는 거라고 생각하니 대수로울 것도 없었다. 그래도 과 전체가 안다는 건 부풀려진 측면이 있어 보였다.

“야! 그냥 가는 법이 어디 있어?”

법이라니? 언제 쫓아왔는지 경호원처럼 달라붙어 따라 걷기 시작했다. 미지의 불안이 서서히 구체화되는 기분이었다.

“뭐가?”
“확실하게 온다고 약속을 하고 가야지?”

“되도록 간ㄷ”
“너 시간 괜찮잖아? 바쁘지도 않으면서.”

“그래서 내가 되ㄷ”
“야! 전공이 7교신데 다른 수업도 없을 거 아냐?”

“그러니ㄲ”
“너 진짜 의리 없이 이럴래?”

말 다 잘라먹고 기껏 한다는 소리가 의리다. 조폭도 아닌데 그 놈의 의리타령. 정원도 적은데 미달까지 되다보니 선배들은 자체적인 단합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풍토가 있었다. 그네들이야 뭐, 원체 인원이 부족하다보니 불가결한 측면이 컸겠지만, 우리 학번은 그 정도까지는 아님에도 이제는 그마저도 전통인양 강한 결속을 주입시키려고 했다. 또, 거기에 동조하고 감화된 인간들이 앞장서서 분위기를 잡아 나가는 경우도 생겼다. 보아하니 이 친구도 그런 동조자가운데 한사람일 거라는 짐작이 들었다. 자기 논리 가지고 명령조로 말하는데 걷는 폼을 봐서나 성격으로 봐서나 쉽게 물러날 조짐이 안보였다. 바득바득 이기려고 들면 저주는 게 또 우리네 인심 아니겠는가. 술자리는 적당히 분위기 봐서 눈치껏 빠져나올 요량으로 승낙했다.

“그래. 알았다. 객주라고 했지? 나중에 거기서 보자.”

“.... 야! 무슨 약속인데 그렇게 바쁜 척 해?”
“시간이 다 돼서 그래.”

“여자소개 받으러 가는구나? 그치? 그래서 그런 거구나?”

이거 어째 좀 으스스하다. 양보해주면 승리의 전리품을 안고 돌아 설 줄 알았더니, 넘겨짚으며 더 많은 걸 챙기려고 든다. 호기심을 가득 담고 반짝거리는 그녀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익히 들었던 과도한 붙임성으로 더 간섭해오기 전에 싹을 잘랐다.

“그냥 친구 만나러 가는 거야. 너 안 바쁘니? 가서 족구 해야지?”

“그냥 친구? 남자야? 여자야?”
“남자야. 됐지?”

“확실해? 속는 기분인데?”
“확실해.”

“네 말만 듣고 어떻게 알아?”
“근데 너 어디까지 따라 올 거니?”

“쳇! 내발로 어딜 가든?”

입을 씰룩거리며 별 꼴이란 표정이 적반하장이다. 내 가방끈은 대체 언제부터 잡고 있었는지 도주로까지 막힌 기분이었다. 무슨 자신감으로 이러는지 어처구니도 없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굴어도 그간 별다른 불상사가 없어서 만성이 된 모양이었다. 어디까지 엉겨 붙어서 밀착마크를 하려는 건지 짐작도 안 되고, 만에 하나라도 나한테 개인적인 사심이 있어 이러나 싶어 으슬으슬 소름이 돋는다.

더 큰 걱정은 이 길로 계속해서 따라오면 동철이랑 맞닥뜨릴 텐데.... 천방지축으로 구는 이 말괄량이삐삐를 보고 그 자식이 어떻게 반응해올지 예측 또한 불허였다. 워낙에 다혈질이고 거친 녀석이니 수틀리면 마음에 안 든다고 뒤집어 엎어버릴 수도 있고, 간사한 속셈으로 나를 농락하기 위해 ‘재수씨~’ 하며 망발을 일삼을 수도 있다. 어쩐지 후자에 무게가 실리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시간도 코앞이고 정문도 코앞이었다.

“가방 좀 놔줄래?”
“왜? 좀 잡고 가면 안 되냐?”

“네가 무슨 심 봉사니?”
“너 이거 놓으면 도망가려고 그러지? 그치? 키킥~”

“아니, 네 발로 어딜 가든 내 가방은 놓고 가야지?”
“너 가는데 까지만 좀 의지해도 되잖아. 그래? 안 그래?”

“내가 어디 가는 줄 알고? 방향이 다르면 어떡할래?”
“가보면 알겠지. 길은 다 하나로 통하는 거 모르냐?”

얄미울 정도로 장난스럽게 웃는데 스릴 서스펜스가 따로 없다. 좀 오버해서 공포영화 미저리의 여자주인공까지 오버랩 된다. 이유야 어떻든 그녀의 목적은 대강 들어났다. 억지를 부리며 쫓아와서 얻으려고 하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자기식대로 주도하려는 이 힙합소녀를 동기라는 이유만으로 더 방관해주기 어려웠다. 좋게 타이르는 상투적인 방법으론 요 딱따구리 같은 입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며 약발이 통하지 않는 체질이라는 걸 입증도 했다.

서경에 일러 소인을 희롱하면 자기 덕도 상실한다고 했으나 희롱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어쩌랴. 그녀와 같은 수준으로 티격태격 거리며 말다툼을 할 수도 없고, 하물며 얘도 여잔데 힘을 쓸 수도 없고, 심청이 아버지 모시듯 데리고 다니며 서울구경을 시켜줄 수는 더욱이 없었다. 다른 처방이 필요하므로.... 일단 정지.

“야? 왜 그래? 안가?”
“배웅 고마웠다. 그만 올라가 보지 그러니?”

“말했잖아. 내가 내발로 어딜 가든 그건 내 문제지. 그래? 안 그래?”

눈을 치켜뜨고 말하는데 굽힐 뜻이 없어 보였다. 그동안 나도 별난 놈이란 소릴 곧잘 듣고 살아왔지만 이처럼 유별난 여자는 금시초문이었다. 뭐, 잠시 후면 그녀도 마찬가지가 될게다. 졸졸 따라오는 시냇물의 수로를 끊는데 얼마나 걸릴까?

“이보게 동기.”
“어?”

“의리에 대해서 좀 아는 것 같던데?”
“알지. 내가 이래 뵈도 의리로 먹고 사는 여자다?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봐?”

“그래? 그럼 혹시 이런 말도 들어 봤니?”
“뭐? 무슨 말?”

“군불견관포빈시교 차도금인기여토”
“뭐래는 거야? 외국어냐?”

“동기, 그대는 관중과 포숙아의 가난할 때 사귐을 보지 못하였는가?
이 도를 요즘 사람들은 티끌같이 여긴다네.”
“무슨 도? 네가 무슨 신흥종교 교주냐? 크큭”

“그럼 관포지교라는 말은 들어 봤겠지?”
“지교...? 우정 같은 거 말하는 거니? 그게 여기ㅅ”

“어허!!”
“.... 왜?”

“우정 같은 거라니?”
“아니야?”

“동기, 의리를 안다면서 관포지교도 몰라?”
“......”

“관중과 포숙아의 그 뜨거운 우정도 모르면서 의리를 안다?”
“야, 그게 뭔데? 지금 이거ㄹ”

“내가 지금 관포지교의 그 도를 다하러 가는 거야.
그 정도는 알아야 이 막역지우가 되서 대화가 통하든 같이 가든 할 거 아냐?
“......”

“역경이라고 아나? 유학의 삼대 경전중 하나지.
거기에 보면 금란지교라는 말이 있어.
뜻이 다르면 어울릴 수가 없다는 말이야.
관포지교도 모르는 걸 보면 우린 뜻이 너무 다른 것 같은데.”

“야..”
“어허~ 마저 들어. 지란지교라는 말은 어떻고.
지초와 난초 같은 향기로운 사귐을 말하는 거야.
이런 식으로 우격다짐 한다고 우정이 생기진 않는단 말이지.
비슷한 말은 많아. 목이 잘려도 우정이 변치 않는다는 문경지교.
또 그런 우정을 가볍게 얻기 힘들다는 유수고산.
절친한 벗 종자기의 죽음에 거문고 줄을 끊었다는 백아절현. 크으~”

“그..그래서? 뭐 어쩌라구?”
“우탕카탕이라는 분이 말씀하셨어. 친구 앞길 막는 자 그대가 진정한 악인이다.
그래도 계속 쫓아올래? 그러고 싶어?”

“야, 나는 그냥 우ㄹ”
“알아! 알아! 동기 자네가 지기지우를 얻고 싶어서 그랬다는 거. 나도 이해해.
그러나! 그러려면 우선 상대에 대한 배려부터 전제돼야 가능한 거야.
동기라는 건 그럴 기회를 얻은 거지, 우정까지 얻은 게 아니란 말이지.
탈무드에서도 이렇게 말하잖아. 벗을 사귐에는 과하여 넘치지 말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단다. 많은 벗을 가진 사람은 한 사람의 진실한 벗을 가질 수 없다.”

“.... 뭐 꼭 그런 걸 알아야 우정이냐?”
“물론 네 말도 일리가 있어. 니체가 말했지. 친구 된 자는 멀리보고 침묵할 줄 알아야 한다고. 지금이 바로 침묵할 때라고 본다. 나는. 시간이 없으니까 나머지는 이따 객주에서 제대로 토론을 한번 해보자고. 멀리 보자는 말이야. 어때?”

“......”
“동의하는 걸로 알고, 그럼 이따 보자?”

논지를 흐려놓는 동안 벙해있는 그녀의 얼굴을 한번 살핀 뒤 가방끈을 잡고 있던 손을 가볍게 툭 밀었다. 말라붙은 나뭇잎처럼 손이 떨어져 내려가고, 그 길로 돌아서서 학교 밖을 향해 걸어갔다. 뒤따라오지 않았지만 정문을 나서자마자 나는 곧바로 뛰기 시작했다. 사람을 조롱하는 취미도 없고 열등감을 자극하려는 의도도 아니었다. 물론 치졸한 방법이긴 했지만.... 상대를 봐가며 덤벼들지 못한 그녀의 실책도 있는 것이다. 난 그녀에게 아무런 유감이 없었고 호감은 더욱이 없었다. 그저 박동철이라는 불구덩이를 향해 뛰어드는 어리석은 나방의 신변을 보호하고자 했을 뿐이다. 이런 걸 물활론에 입각한 인류애라고 명명하고 싶다. 허허허.









하여간에 이 자식은 술 먹는 자리 말고는 약속을 제때 지키는 날이 없다. 얻어먹은 술도 있고 해서 저렴하게나마 점심이라도 한 끼 대접하려고 했던 내 자신이 서글퍼진다. 소중한 동기에게 무안을 주면서까지 제 시간에 도착했건만.... 약속은 지가 잡아 놓고 오전 열한시 반에 만나기로 한 나의 관포지교는 정오가 될 때 까지 꼭꼭 숨어서 머리카락도 안보였다.

며칠 전 아침에 들렀던 나를 주인아줌마는 기억하고 계셨다. 그 손가락약속을 미끼로 여자를 후리던 작업현장이 인상 깊었는지 그냥 ‘어서 오세요.’ 라고 해도 될 것을 두 번째 방문에 ‘또 오셨네요.’ 라며 반겨주셨다. 찻값을 계산할 때 요상한 웃음을 지어 보이기도 했는데, 이 카페에서 같은 방법으로 작업했다간 저 아줌마의 박장대소를 듣게 될 것 같았다. 뭐, 카페는 널렸으니 무관하고.... 공중전화가 없는 관계로 주방 겸 계산대로 가서 휴대전화 한 통만 쓰겠다고, 필요하면 찻값에 같이 계산해 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그냥 짧게 통화해 달라는 당부를 통해 무료로 쓰라는 의미를 전달해 주신다. 신호음이 울린 지 한참 만에 전화를 받는 박동철군.

[여보세요?]
[왜 안와?]

[우진이냐? 아~ 미안. 나 지금 일어났어. 크큭]
[중요한 일은 아니었구만?]

[중요해. 새꺄! 수업 끝나면 가게에 좀 들려. 와서 전화를 하던가]

가게라는 말에 번개같이 떠오른 건 그 이름 모를 아가씨보다 혜미씨였다. 다음엔 꼭 하기로 했던 진짜 러브 샷의 이미지가 뇌에서 출력된다. 내 팔뚝을 집요하게 파고들던 풍만한 젖가슴과 뱀처럼 핥아대던 혀, 말캉거리던 허벅지와 거기에 반응해서 일어서던 내 분신. 그리고 최후의 결정타. 하지만 난 아직 첫 키스도 못했는데.... 그 여우 굴에 가고 싶지 않았다.

[싫어. 임마! 아쉬운 놈이 오든가, 아님 말든가]
[아쉬운 거 없어. 새꺄! 윤이씨가 부탁한 것 땜에 그렇지]

[윤이씨는 또 누군데?]
[윤이씨 몰라? 네 가방 갔다 준 여자 이름도 몰라?]

[무슨 부탁인데?]
[몰라. 네가 와서 들어]

[가서 전화할게]

카페전화라 길게 통화하기도 눈치가 보였고, 그 아가씨 부탁이라니 우선은 가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이름이 ‘윤이’ 였구나. 그런데 대게 업소 아가씨들은 가명을 쓰지 않던가? 혜미씨도 아마 가명일거라고 혼자서 짐작해보긴 했는데.... 그런 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니까. 계산대로 온 김에 찻값을 지불하고 전화 잘 썼다는 인사를 건넸다. 이 주인아줌마 자세히 뵈니 서글서글하니 인상이 매우 좋으시다. 카페도 한적해서 딱 내 취향이라 단골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응. 어서와.”

자리로 돌아와 가방을 메려는데 카페 문이 열리고 여자 한명이 들어오며 주인과 인사를 주고받는다. 주인이 있던 계산대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더니 핸드백을 벗고, 재킷을 벗고, 앞치마를 두른다. 그러더니 주인과 나지막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는 여자. 문을 열고 들어온 그녀를 본 순간부터 주변 사물이 안개에 덮인 듯 뿌옇게 흐려지더니 오로지 그녀만이 선명한 색과 선을 가지고 내 시선을 몰고 다닌다. 달싹거리는 입술. 눈을 지그시 감으며 입을 가리고 웃는 절제된 미소. 가지런한 동작들. 내 귀에서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나고 묵직한 박동으로 심장이 가파르게 뛰었다. 의자에 있던 가방 끈만 잡고는 꿈을 꾸는 것처럼 시간이 정지한 느낌으로 주변 감각이 둔해지고 뇌의 시신경만 겨우 활동하는 기능의 마비.

그러다 얼굴을 돌린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꽂혀 있는 시선을 뽑지 않으니 먼저 회피하는 여자. 목 뒤로 넓게 소름이 번지더니 최면에서 깬 것처럼 그때서야 정상속도로 재생되는 시간개념과 논리회로. 채신머리없이 주책을 떨고 있다는 걸 깨우쳤다. 가방을 아무렇게나 들고 황급히 카페를 빠져 나왔다. 인도위에 서서 카페를 돌아다보며 몇 걸음 걷지도 않았는데 호흡이 가빠왔다.

좀 전 까지는 관심도 없었던 간판을 보며 돌에 새기듯 이름을 외웠고, 메모지를 꺼내 전화번호를 적으면서 어느새 실성한 놈처럼 희죽 거리고 있었다. 그것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화룡월태, 경국지색, 일고경성, 만고절색? 아니다. 아니야. 그런 찬미어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하고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퇴색되는 기분이다. 표현하지 않는 게 표현하는 길이었다고 할까? 그랬다. 그 순간에 대해 표현을 포기하면 표현이 될 것 같은 감정의 극치였다. 그러면서 이 카페를 발견하게끔 일조해준 모두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여기서 동철이와 약속을 잡았던 내 동물적인 선견지명에 나 자신이 사랑스러운 감개무량.

학교로 돌아온 내내 자꾸 심장이 벌렁거리고 흥분으로 몸이 더웠다. 점심을 건너뛰었지만 허기를 느낄 수가 없었고, 강의를 듣는 동안에도 한걸음에 뛰어가서 그녀를 다시 보고 싶다는 충동을 실시간으로 틀어막아야 했다. 짧고 강렬한 그녀와의 만남은 벌써 내 의식의 한 가운데에 주류가 되 버렸다. 교수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칠판에 적힌 것들은 무의미한 낙서처럼 보였고, 굼벵이처럼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당장 기억나는 구절만 노트에 적어놓고 보고 또 보고 있었다.

『청강에 노는 학이 설월에 비침 같고 별도 같고 옥도 같다.』

『고운 태도 어린 안개 석양에 비치는 듯.... 은하수물결 같다.』

『선녀 벗 하나 잃었구나. 네 얼굴 네 태도는 세상 인물 아니로다.』

크~~ 표현이 좋아 외웠지, 그동안은 공감하지 못한 평범한 활자였고 단어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춘향이를 첫 대면했던 몽룡이 형님의 심정을 완전하게 체화하며 십분 이해한 상태였다. 선녀가 이제 벗 둘을 잃은 셈이었다. 그렇다면 은하수 물결 같은 그녀는 나의 춘향이인가? 하하하.

어떻게 강의가 끝난 지도 모를 지경으로 희열에 잠겨 있었다. 곧 시험이고 제출해야할 리포트도 남았지만 당장 내일부터라도 착공에 돌입하겠다는 의욕 앞에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그런 건 마음먹고 집중해서 며칠 날밤만 새도 끄떡없었다. 정원이 미달이지 실력이 미달이라 지원한 게 아니었다. 그 카페 주인아줌마, 아니 사장님은 나에게 있어서 부부의 연을 맺어준다는 월하노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고풍스러운 카페를 오픈하시고 그녀를 직원으로 채용하시다니. 그야말로 인격과 품격이 남다르신 분이 아닐 수 없었다. 가서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동철이 가게가 있는 유흥가로 향하는 동안에도 카페의 그녀 생각에 푹 빠져서 홍수에 떠내려 오듯 한 것 같다. 내일이라도 다시 볼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어떻게 접근해서 결실을 거둘지 그게 일단 중요했다. 여자 때문에 이렇게 행복하게 안절부절 해보긴 머리털 나고 처음이었다. 횡재수를 거머쥐고 구름 위를 걷는 게 이런 심정일까. 마음을 카페에 두고 몸만 움직여 도착한 ‘비너스’ 근처에서 동철이 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나야. 튀어나와]
[야~ 씨발 미안해서 어떡하냐? 나 지금 외근 중인데]

[뭔 외근이야. 이 자식아]
[어디야? 가게 근처야? 일단 가게로 들어 가봐]

[싫어. 임마! 집에 갈 거야]

내장에 짜증이 쌓여 안면 근육을 꿈틀거려왔다. 헛걸음할 줄 알았으면 그 카페에나 가볼 걸 그랬다는 후회가 막심했다. 오늘 같은 기념비적인 날에 혜미씨와의 재회는 재앙이다. 용건 없으면 돌아가겠다고 했으나, 윤이씨가 올 거라며 타이르더니 알려주는 카페에서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에 일단 그러마, 했을 뿐.... 그때가 오후 다섯 시였다.

이름을 알 때까지 카페녀라고 부르기로 결정한 그녀. 임자 있는 몸이면 뒤도 안돌아 보고 물러서겠지만 확인 전까지 일단은 배제하고 가기로 했다. 여전히 마음은 콩밭에 두고 와서 헤벌쭉거리며 상상의 날개를 퍼덕여댔다. 첫눈에 반하는 구조를 부정적으로 보는 나였지만 일찍이 그런 분위기의 여자를 만난 전례가 없었고, 직감은 그녀를 붙잡아야 한다고 당위성을 설명해 주는 듯 했다. 누가 뭐래도 지금의 나는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속물이기를 자초하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30분이 지났지만 윤이씨는 나타나지 않았다. 가게에 있는 게 아니거나 벌써 이른 손님을 받아 곧장 나오지 못한다는 계산이 설득력을 얻어갈 즈음이었다. 커피가 담겼던 찻잔은 바닥을 보이며 말라붙어 있었고, 센스 없는 점원은 알아서 빈 물 잔도 채워주지 않았다. 손을 들어서 점원을 부르려는데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카페 문이 열렸고, 수수한 차림의 윤이씨가 어정쩡하게 손을 들고 있는 나를 발견하며 멀찍이서 목례부터 건넨다. 타이밍이 참 예술이었다.

한 손엔 롱코트를 감아들고 내가 앉은 테이블로 걸어왔고 자리에서 일어나 재차 인사를 주고받았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앉으세요.”

그녀를 보니 호사스런 생각으로 빼곡하던 머리에 빈자리가 생긴다. 무슨 부탁 때문이라고 했었다. 가게를 벗어나서인지 차분하고 조신한 자세는 그 날과 동일했다.

“죄송해요. 많이 기다리셨죠?”
“아뇨. 괜찮아요. 두 대만 맞죠. 뭐. 하하”

“......”

과한 농담이었나? 썰렁했는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나는 정색을 하며 멋쩍게 뒤통수를 긁었다.

“저기.... 농담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알아요. 괜찮아요.”

“이제 출근하시나 봐요?”
“네. 동철씨 전화 받고 준비하느라 늦었어요. 우진씨, 그 날은 고마웠어요.”

“아니에요. 제가 해드린 게 뭐가 있다고....”
“아뇨. 정말 고마웠어요.”

“그러지 마세요.”
“.... 바쁘신데 오시게 해서 죄송해요.”

“미인이 불러주시면 죽다가도 미루고 달려와야죠. 하하~”
“......”

“.... 저한테 따로 부탁하실 일이라도?”
“아니에요. 그럴 리가요.”

학교에서 보여주었던 미소는 유통기한이 지났는지 더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대신 그 날 아침 우물쭈물 거리며 긴장돼 보이던 그녀로 돌아가 나를 대하고 있었다. 그때와 같이 재방송처럼 잠시 적막이 흘렀고 곧 그녀의 입을 통해 깨졌다.

“그 날 너무 감사해서....”

말끝을 얼버무리면서 코트주머니를 뒤적여 뭔가를 꺼낸다. 파란색 포장지에 손바닥크기의 상자였다. 손을 뻗어 내 찻잔 옆에 살며시 놓아 주고 가서는 축 처진 어깨만큼 고개를 떨어뜨렸다. 상자 안에 든 게 무엇이든 내가 그녀에게 답례를 받을 만큼 호의를 베푼 일이 없다는 사실만 분명하게 떠올랐다.

아.... 동철이 이 새끼.... 끝까지 본론을 숨겼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내 성격상 윤이씨가 직접 건네면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계산을 해놓고 내 발로 여기까지 찾아오도록 유인한 것이다. 미리 말했다면 약속에 응하기는커녕 손에 쥐어줘도 고분고분 받아들고 갈 리가 없다는 걸 모르지 않았을 그 자식이 그 단순한 머리를 굴려서 복안을 짜낸 게 이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겨우 그만한 친절에도 신세를 느끼며 상대적 박탈감을 안고 살아왔을 그녀의 선물은 단순한 성의가 아니었다. 그래서 부담스러운 것이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그녀의 심정을 이해하려 드는 내 본심도 두려웠고 머리에선 저걸 받으면 안 된다는 경고가 메아리를 쳤다. 본인이 어떻게 느꼈든 불편했고, 달갑지 않았으며, 거부하고 싶었다. 근데 죄인처럼 앉아 처분만 기다리는 얼굴에 대고 물러 달라는 말을 꺼낼 용기도 나지 않았다. 처지가 뒤바뀌어서 내 인정에 기댄 일종의 협박처럼 보이는데, 그게 더 처량해 보이니.... 몇 분을 그렇게 상자와 고개 숙이고 있는 윤이씨를 번갈아 보며 다음 액션을 취하지 못했다. 우선은 어떻게든 화제를 바꿔보려고 말을 돌렸는데 그게 또 자충수다.

“참, 차 드셔야죠. 뭘 로 하실래요?”
“전 괜찮아요. 바로 들어가 봐야 해서요.”

“아...예.”
“그것보다....”

“......”
“별 것 아니지만 ㄱ”

주는 사람이 비굴해하고 있었고 그건 막아야 했다.

“감사합니다. 뭐든 잘 받겠습니다. 그리고 잘 쓸게요.”
“아, 네. 고마워요. 정말 별 거 아니라서.... 저 그럼 먼저 일어나 봐야 될 ㄱ”

“같이 가시죠. 가게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안 그러셔도....”

사양하는 윤이씨보다 먼저 일어나 계산서와 상자를 들고 카운터로 갔다. 계산을 하는 사이 윤이씨는 내 뒤에 와 서 있었다. 날은 점점 어두운 그늘을 덮어 쓰고 있었다. 카페를 나온 우리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가게 앞까지 침묵만 나누며 걸어갔다.

“시간 내 주셔서 감사했어요. 조심해서 가시구요.”
“......”

“그럼 가 볼게요.”
“네. 또 봬요. 윤이씨.”

수고하라는 인사말을 차마 꺼낼 수가 없어서 마음에도 없는 기약을 인사랍시고 해버렸다. 돌아선 그녀가 자하계단으로 몸을 감추고 있었다. 그 날은 먹구름 아래서 걷더니 오늘은 먹구름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보고 있자니 가슴이 먹먹해져서 짧은 한숨이 연이어 세어 나왔다. 여자의 수치심 일절을 허락하지 않는 곳. 인격의 밑바닥까지 긁어내고 상품이 되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는 곳으로 제 발로 걸어들어 가버렸다. 모르고 살면 속편했을 인연이었다는 생각이 들어도 이미 늦었다. 내가 왜 이럴까. 굳이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아무도 부여하지 않은 책임감을 느끼기라도 하는 걸까.... 치약이다. 짜내면 짜낼수록 야위어지는 치약 같은 인생. 누군가의 욕구를 씻어주고 뱉어지는 그녀는 치약이었고 그런 그녀에게 선물을 받아버렸다.

별 해괴한 비유가 다 떠오른다.

그녀가 사라지고도 텅 빈 입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뒷모습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는데 또 보게 된 곳이 하필이면 이 가게 앞이라니, 이 무슨 웃지 못 할 해프닝인지.... 이목을 끌기위해 번쩍거리고 있는 간판을 올려다봤다. 당신의 욕구를 만족시켜 줄 수 있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깜빡이는 네온 빛이 빈속의 역겨움을 건드려 댄다. 들떴던 마음은 어디 갔는지 찹찹하게 식어 버리고, 이유를 분명히 할 수 없는 울분이 그 식은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손에 쥐어진 상자의 감촉에 어금니를 깨물며 내가 사는 세상으로 어렵게 발길을 돌려야 했다.

집으로 오는 버스에 앉아서도 그 상자만 쳐다보고 있었다. 내용물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캠퍼스 구경이 그녀에게 대체 어떤 의미이기에 그걸 보답까지 해야 마음의 빚이 남지 않는단 말인가? 그 곳이 무슨 대단한 성역이라고, 그 까짓게 뭐라고.... 불특정한 주체를 향해 입에서 욕이 세어 나오려고 했다. 아주 납득할 수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걸 받아들이기가 도무지 힘들었다. 차라리 밥을 사주지, 커피를 한 잔 대접해주지. 묵묵히 먹고 소화시켜 버리면 그만인 것으로 해주지. 사람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잔인한 짓인지 나는 익히 안다. 그녀가 더 초라해지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고, 내키지 않았지만 그건 상자를 받아야 그나마 멈출 수 있는 것이었다. 이 포장 하나에 그녀가 흘린 웃음이 있었고, 몸을 허락하며 맡겼던 손길이 지갑을 열고 구입할 잔금을 치러 주었다는 역학관계. 쓴웃음도 나지 않는 그 잔인한 구조에 과연 내가 포장이나 뜯을 수 있을지 자신이 서지 않았다.

이걸 뜯게 되면 다시 그녀를 보게 될 것 같았다. 그럼 또 그 뒷모습을 봐야 할 텐데, 그걸 지켜보다가는 가슴이 내려 앉을까봐 그냥은 돌려보내지 못할 것 같았다.








“누구세요?”
“나야. 우진아.”

“들어와. 누나.”

저녁을 먹는 동안에도 처치 곤란한 그 상자에 신경이 쏠려 있었다. 뜨거운 감자를 안고 있는 것 같았다. 목에 가시가 걸린 듯 속이 거칠어 밥도 삼키기 힘들었다. 경행록에 보면 예사롭지 않은 즐거움을 얻으면 모름지기 예측할 수 없는 근심을 방비하라고 했는데 오늘 내 하루가 딱 그렇게 흘렀다.

방안을 서성거리며 그 판도라의 상자를 내려다보는데 피천득의 ‘은전 한 닢’ 이라는 수필이 끊임없이 머리를 쥐고 흔들어 댔다. 늙은 거지가 은전 한 닢이 갖고 싶어서 여섯 달을 구걸로 알뜰살뜰 모았다던 그 더럽게 청승맞고 가련한 사연. 윤이씨의 학교구경이 여섯 달을 굶어 모은 은전 한 닢처럼 비교가 되서 속이 울렁거려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왜 그렇게 서 있어?”
“아무것도 아냐. 앉아 누나.”

의자를 빼고 앉으며 누나에게 침대 쪽에 앉을 것을 권했다. 어딘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던 누나가 앉으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니? 밥 먹을 때도 되게 기운 없어 보이던데?”
“무슨 일은.... 뭐 할 얘기 있는 거야?”

“그런 것도 있고, 너 좀 안 좋아 보여서....”
“뭔데? 누나 얘기부터 들어보자.”

“난 중요한 거 아냐. 너 진짜 아무 일도 없는 거야?”
“그럼. 일이 있을 게 뭐가 있어. 괜찮으니까 누나 용건 말해도 돼.”

“김우진!”
“응?”

“혼자 견디는 게 훌륭한 건 아니라며?”
“누가 한 얘기야?”

“흐음.... 네가 이렇게 우울하니까 엄마, 아빠, 유진이 다 네 눈치만 보잖아.”
“누가 내 눈치를 본다고 그래?”

“넌 모르겠지. 아까 식탁에서 다 너만 쳐다보는데도 몰랐으니....”

기운 없이 굴긴 했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기도 했고.... 어울리지 않는 건 곧잘 표시가 나버리는 가 보다. 수심이 가득했을 나를 읽고 걱정을 나눠가지려는 마음 좋은 누나가 방문해 주었구나. 시침을 떼면 계속 추궁하려고 기운을 낭비할 텐데, 그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나였어도 그대로 돌아가 잠자리에 들면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불편했을 것이다.

뭐라고 얘기를 해야 할지 정리도 안 되는 생각을 붙들고 고민을 했다. 그러다 뜻밖의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그녀만의 청승맞도록 가련한 사연이 뭐가 됐든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 편리한 사고가 이루어지자 맑은 눈에 근심을 담아 쳐다보고 있는 누나를 보면서 나는 꽤나 비겁하고 초라한 방법을 선택하기로 결정했다. 상자를 책상 모서리에 가져다 놓으며 얘기했다.

“사실 이 안에 좀 비싸고 귀한 게 들어있거든?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기가 겁이 좀 나거든? 내가 좀 덜렁대야지.”
“그래서?”

“내 대신 누나가 보관 좀 해주면 안 될까?”
“이걸? 그렇게 비싸고 중요한 걸.... 내가 실수해서 망가지면 어떡해?”

“아냐! 절대 그럴 일 없을 거야. 만약 그래도 책임 질 필요도 없어.”
“어떻게 책임을 안 져.”

“옷장 구석 같은데 넣어두면 되잖아. 그러면 될 거야. 응?”
“귀한 거라면서? 어떻게 그래.... 뭐든 보관이 얼마나 중요한 건데.”

“아.. 생각해보니까 나한테만 비싸고 중요한 거야. 그러니까.... 내가 가지고 있으면 안 되는 거라서 그래. 누나. 응?”
“너 이거 때문에 얼굴이 그랬던 거야? 그래?”

“뭐.... 어느 정도는....”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로 부탁했던 탓인지 누나가 상자를 노려보며 갈등에 들어갔다. 그냥 보관만 해달라고 부탁할 것을 쓸데없이 비싸다느니 하며 윤이씨 입장에서 느꼈던 속마음까지 수식으로 사용해 버렸다. 왜 그렇게 생각이 짧고 멍청했는지.... 내 손이 닿는 곳에 둘 수가 없어서.... 언제고 예고 없이 그 여자가 떠오르면 참지 못하고 포장을 뜯어버릴 것만 같았다. 내가 아는 나는 어떤 식으로든 또 답례를 하려들 게 분명했고, 그녀의 뒤틀린 인생을 바로잡아줄 능력도 없으면서 그걸 또 외면은 못하는 값싼 동정심으로 우왕좌왕하다가 마음에 상처만 더해주고 말 것이다. 더는 칭얼거리기가 뭣해서 누나 표정만 살피고 있었다.

“너도 그럼.... 내 부탁 하나 들어줄래?”

“괜찮겠어? 말만해. 아니 적어! A4용지 두 장만 초과하지 말고 다~ 적어. 문제없어!”
“딴 말 하기 없기다?”

“응! 안 해! 절대! 네버! 에버!”
“훗.... 그럼 수요일 오후에 시간 좀 비워둬. 괜찮지?”

“이번 주 수요일? 시간이야 괜찮은데....”
“그럼 너 네 학교 정문에서 네 시에 만나자.”

“이게 누나 부탁이야?”
“응.”

“알았어. 근데, 내가 누나 학교 앞으로 가도 되는데?”
“아냐. 그 날 일찍 끝나서 내가 먼저 도착할 수 있어. 너 그날 오후 수업 하나 있지?”

“어떻게 알았어? 응. 있어.”
“그건 몰라도 돼. 그 날 의상에 신경 좀 쓰고 나와 주면 좋겠어.”

“뭐야? 설마.... 소개팅?”
“풉~ 아무튼 이틀 뒤니깐 잊지 말고? 흐음~ 이 상자는 내가 잘 보관해 볼게. 자신은 없지만....”

“그건, 부담 갖지 말고 그냥 가지고만 있어 주면 돼.”
“알았어. 그래, 이제 좀 편하니?”

“진짜 고마워. 누나. 포옹해줄까?”
“으이그~ 징그럽거든?”

자의든 타의든 윤이씨가 불행해 보여서 안타까운 건 인지상정이지만 내가 개입할 문제가 아니었다. 이름도 아득해질 쯤 이면 상자를 열어봐도 무관해져 있을 것이다. 한동안만 내 눈에 띄지 않고 접근하지 못하면 윤이씨 성의와 일시적으로 부풀어 오른 내 얄팍한 감수성 모두 다치지 않는다고 자위했다. 누나한테 오해를 톡톡히 샀을 때도 비슷한 후회를 하지 않았던가. 정철의 당부를 잊지 말아야 한다.

아홉시. 함부로 갈 수 없는 벽하나 너머로 건너갔건만 아직도 마음이 뒤숭숭했다. 방구석에서 누워도 보고 책상에 앉아도 봤지만 도통 잠도 안 오고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운동을 가기엔 조금 이른 시각이었지만 가서 진탕 땀이라도 흘려야 피곤에 겨워 잠이라도 편히 잘 것 같았다. 운동복을 가방에 챙겨 넣고 방문을 여는데 유진이가 올라오고 있었다. 배에 붙이고 있는 저건 전화기 같은데,

“오빠, 기분 좀 괜찮아졌어?”
“너까지 왜 그래? 난 밝고 명랑해.”

“그래? 그럼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어? 동쪽에서 떴어?”
“몰라. 오늘 해 뜨는 거 못 봤어.”

“어유~ 그게 그 말이야? 이거 오빠 대학 들어가고 처음으로 오는 여자 전화란 말야.”
“내 전화야? 이리 줘.”

“아이 잠깐만! 목소리가.... 너~무 예뻐!”
“그니까 나도 좀 들어보게 이리 주라고~오”

“에잇! 기다려 보라고~오”
“지쳐서 끊을 때까지?”

“하여간 쯧쯧.... 사실 아까 오빠 오기 전에도 전화 왔던 여자야. 이름이 인선이래. 인선”
“걸 왜 인제 말해? 이리 내.”

“깜빡했지! 오~~ 기무지~~인~~ 왠 일ㅇ... 아야!! 왜 때려?”
“숙제야. 왜 맞았는지 내일까지 알아와.”

“이힛!! 씨이~”

전화기를 낚아챘다. 유진이는 툴툴거리더니 날 노려보며 자기 방으로 들어갔고, 나도 인상을 구기며 기 싸움을 했다.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야아~~~~~~~~~~~~~~~!!!!!!]

이런 젠장!!
귀청 떨어질 뻔 했네. 놀라서 전화기를 뗀다고 뗐는데 귓구멍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찌릿찌릿 거리는 음파가 떠 댕겼다. 짜증에 밀려 머리 뚜껑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뭐야 이건? 여자야? 남자야? 전화기를 들고 내려다보는데 라디오 잡음처럼 꽥꽥거리는 소리가 연속해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무슨 목소리가 예쁘다는 거야? 인선이라고 했던가? 어느 병원에서 탈출한 환자인지 모르겠지만 가물거리긴 한데 퍼뜩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들고만 있는데 어느 순간 두서없는 고성은 사라지고 내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한다. 아까처럼 귀에 붙이지 않고 거리를 두고 송화기만 입 부근에 가져왔다.

[여보세요?]
[야이, 아니꼽고 치사하고 비겁한 멍게 같은 자식아!]

카랑카랑한 목소린데 여자였고, 여전히 누군지는 알 수가 없었다.

[너 뭐야?]
[나? 나 인선이다! 인선! 이제 알겠냐? 이 호랑말코 같은 자식아!]

[모르겠는데?]
[와아~ 너 이 자식 내 이름도 모르는 거야? 이 해삼 말미잘 번데기 같은 놈아!]

[헛소리 그만 하고 끊기 전에 제대로 소개해라? 응?]
[뭐~? 끊어? 끊기만 해봐! 가만 안 둬! 너 정말 끊ㄱ]

‘삑’

끊었다. 광녀도 아니고 뭘 섭취했는지 성량을 있는 데로 끌어올려서 사자후를 토하는데 역시나 누군지 알 길이 없었고, 나도 인내심의 과부하 상태라 알고 말고를 따지고 싶지도 않았다. 가뜩이나 바이오리듬이 최악인데 유아틱한 욕설로 성질을 긁어대다니, 거실로 내려와서 전화기를 올려두려는데 벨이 울린다. 그 광녀일 것 같아서 귀에 대지 않고 그냥 통화버튼만 눌렀는데.... 응? 잠잠하다. 다른 사람인가.

[여보세요?]
[.....]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후~우.... 너 왜 객주에 안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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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2016-08-11
접속일 2024-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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