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가벼운 두통을 느끼며 내 방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갑자기 일어났더니 머리가 조금 더 아파졌다. 잠시 얼굴을 찡그리고 있으려니 다시 고통이 약해졌다. 머리를 흔들어보자, 뇌가 흔들리는 듯한 고통이 일었다. 어제 난생처음 술을 마셔본다고 나도 모르게 들떴던 모양이다. 이게 숙취인가. 잠시 어지러움이 가라앉길 기다리고 있으려니, 내 옆에 누워 자고 있던 누나가 뒤척인다.
시계를 보니 정오가 20분 정도 초과됐다. 어제 몇 시에 잤는지 어떻게 내 방 침대까지 와서 누웠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그나마 기억나는 게, 마지막 술잔을 기울이다가 눈이 부셔 밖을 보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보니 식탁이 깨끗이 정리되어 있다. 거기에 설거지도 되어 있었다. 내가 한 기억은 없다. 삼촌이 정리한 건가?
그러다 문득, 삼촌이 어디 있는지 찾아봤더니 삼촌은 바닥에 엎어져 있다. 어렴풋한 기억에 삼촌은 분명 누나 방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지금 바닥에 엎어진 걸 보면 내 기억이 잘못됐거나, 상상도 안 가지만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어 삼촌이 저기로 가 잠을 청했을지도 모른다. 가까이 가서 삼촌의 상태를 확인해보니 잠든 것 같긴 한데 끙끙 거리며 자고 있다. 어제 과음하긴 했나보다.
누나와 삼촌이 여전히 자고 있는 걸 확인하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시원한 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자, 갈증과 두통이 어느 정도 가셨다. 두통의 원인 중에 갈증도 있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핸드폰이 생각났다. 내 방으로 가보니 책상 위에 충전기와 연결되어 있다. 충전기에 초록불이 들어와 충전이 다 되었다고 외치고 있었다. 지은이와 사귄 후로, 시계용도 이외에는 겨의 사용하지 않던 핸드폰을 자주 살피게 되었다. 핸드폰을 열어보니, 문자가 몇 통 와있다. 모두 지은이에게 온 것이다.
『그래, 알았어.』
이건 내가 삼촌이 와서 문자를 하지 못 할 수도 있다는 문자에 대답한 것이다.
『지금 뭐 해?』
이건 새벽 1시 정도에 온 문자다. 한창 술에 취해서 헤롱헤롱 거릴 때 온 문자다. 조금 뒤늦긴 했지만 답장을 보내기로 했다.
『새벽에 답장 못 해서 미안. 지금 일어났어. 술을 좀 많이 마셨나봐.』
문자를 보내고,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아 세수라도 하러 욕실에 가려는데,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지은이의 답장문자였다. 지은이는 문자 보내는 속도가 빠르다. 나도 최근에 문자를 하는 일이 많아져서 비교적 속도가 빨라졌지만, 지은이에겐 상대도 안 된다. 그런데 또 지은이 말로 자기는 문자를 별로 안 하는 편이라 느리단다. 느린 게 그 정도면 대체 빠른 건 어느 정도라는 걸까.
『괜찮아? 머리 아프진 않고?』
『조금 아프긴 한데, 심하진 않아. 금방 괜찮아 질 거야.』
지은이의 걱정스러운 문자를 잘 받아주고는, 외출 준비를 했다. 어제 과음을 한 삼촌과 나를 위해 해장국을 만들 재료를 사러 간다. 외출 준비랄 것도 없었다. 어차피 요 앞 편의점에 갈 생각이기 때문에, 그냥 입고 있던 옷에 모자만 썼다. 모자를 쓰는 게 몇 달 만인지 모르겠다. 모자를 쓰면 머리가 답답해서 웬만하면 쓰지 않는 편이다.
맨발에 슬리퍼를 신었다. 슬리퍼도 오랜만에 신는다. 지은이와 사귄 후로는 주말에 데이트를 하거나, 외출하는 일이 잦아져서 슬리퍼를 신는 일이 드물어졌다. 동네 산책하는 것도 아니고 여자랑 만나는데 슬리퍼 신고 가기는 좀 그렇다.
밖으로 나오자, 여름의 뜨거운 공기가 폐를 파고들었다. 한 시간만 있으면 피부암에 걸리고 말 듯한 강렬한 햇빛이 나를 공격했다. 그냥 떡진 머리를 감출 생각으로 쓴 모자인데, 쓰길 잘했다. 이제 완연한 여름이다. 올해는 정말 더운 여름이 될 거라는 기상캐스터의 지적인 목소리가 떠올랐다.
맴, 맴, 맴.
매미가 시끄럽게 울었다. 10년 가까이 땅속에 있다가 나와서 하는 일이란 시끄럽게 울어대는 것뿐이다. 땅 속에서 생각할 시간도 많았을 텐데, 좀 더 조용하고 생산적인 일을 생각해서 밖으로 나와줬으면 좋겠다.
편의점를 향해 걸으며, 지은이에게 전화를 했다. 난 문자보다 전화가 좋다. 덕분에 이번 달 전화비가 기대되긴 하지만.
『여보세요.』
“여보세요.”
『어제 술 많이 마셨어?』
“많이 마신 것 같긴 해. 어제 기억이 조금 끊긴 것 같아.”
그게 술 때문에 그런 건지, 그냥 졸려서 그런 건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필름도 끊긴 거야?』
“근데 오늘 별로 머리가 아프거나 힘든 것도 없어. 그냥 졸려서 기억이 안 나는 것 같애.”
『그러면 다행이고.』
“어제 내가 문자에 답장 못 해줘서 미안해. 조금 정신이 없었어.”
『괜찮아.』
지은이가 내 사과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주었다.
“정말 미안해.”
『괜찮다니까.』
여자는 남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섬세하다. 그리고 남자는 짐작하지도 못할 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걱정한다. 어릴 적에 엄마가 해준 말이다. 그때는 이해하지도 못하고 곧바로 잊어버렸던 그 말이 갑자기 생각이 났다. 아마도 내가 답장이 없는 것에 지은이가 걱정을 많이 했을 것이다.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더욱 불행하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은 말이다. 언젠가 학교 선생님에게 들었던 말일 거다. 그러나, 가장 불행한 사람은 사랑을 받으면서도 사랑받는 줄 모르는 사람이다.
최근 들어,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누나도, 삼촌도, 지은이도 감사하다. 그리고 성진이 녀석도 고맙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사랑받으며 살았다. 특히 누나와 지은이는 정말 과분할 정도로 나를 사랑해준다.
『지금 밖이야?』
“응. 편의점이야 삼촌한테 해장국 해드리려고. 콩나물 사러 왔어. 근데 밖인지 어떻게 알았어?”
『그냥 자동차 소리가 들린 것 같았어.』
방금 전에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클락션을 울리며 지나간 차가 있었는데 그 소리가 들린 모양이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편의점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시원한 공기가 몸을 감싼다. 온도가 낮아진 것보다 뜨거운 햇빛에서 벗어난 것이 좋다.
해장에는 콩나물국이 좋다. 조미료는 최대한 배제하고, 콩나물과 파 등을 우려 국을 끓이면 진정한 의미의 해장국이 만들어진다. 가게에서 파는 해장국은 맛은 있지만, 해장은커녕 오히려 속을 버릴 것 같다. 안 그래도 술로 속이 안 좋은 상태에서 뜨겁고 짠 음식을 먹는데 그건 오히려 위를 괴롭히는 일이다.
지은이와 전화통화를 하며 편의점을. 깔끔히 포장된 콩나물을 찾아 집어 들었다. 원래 편의점은 거리는 가까워도 할인마트에 비해 가격이 많이 비싼 편이다. 게다가 누나와 함께 주말에 마트에서 장을 보는 건 매우 즐거운 일중 하나이다. 오늘 같이 갑자기 필요한 것이 생길 때가 아니면 거의 오지 않는다.
콩나물 말고 혹시 또 필요한 게 있을까 싶어 편의점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딱히 눈에 띄는 것이 없다. 지은이와의 전화에 집중하고 있느라 그런지도 모른다. 그냥 콩나물만 계산해서 편의점을 나왔다.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어?”
『응!』
기말고사는 끝났지만, 수능을 보기 위해선 공부를 멈추면 안 된다.
“오늘 만나서 확인해볼까?”
『진짜? 언제?』
농담 삼아 한 말인데 지은이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와서 농담이었다고 하기도 그렇다.
“글쎄. 일단 삼촌이 아직 계시니까, 언제쯤 가시는지 봐야 돼. 혹시 늦게 가시면 못 볼 수도 있고.”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도. 일단, 삼촌 가시고 나면 전화할게.”
『응!』
전화를 마치고 나니, 이미 집에 도착했다. 삼촌은 아직 거실 바닥에 엎어져 계신다. 누나는 방에 가보니 아직 자고 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다시 누워 자고 싶어졌다. 어차피 다들 늦게 일어날 텐데 조금만 잘까. 좋아, 조금만 더 자자. 그래도 식사준비는 해둬야지. 일어나면 바로 물만 끓이면 식사를 만들 수 있도록. 어차피 술 마시고 난 다음이라 만들기 번거롭고 자극적인 음식은 만들지 않을 생각이다.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보통 담백하고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은 만드는 절차가 간단하다.
준비를 끝내놓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누나가 내 기척을 느끼고는 반쯤 눈을 떴다. 손을 내민다. 그 손을 잡았다. 누나 옆에 누웠다.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이 정말 평온해 보인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것을 좋아한다. 물론, 나는 내가 그런 습관이 있는지 몰랐다.
어느 날인가 누나가 넌 참 사람을 지그시 쳐다본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몰랐다. 말을 들었던 당시에도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었다. 그런데 가끔씩 누나의 말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도, 나는 누나를 바라본다.
“왜 자꾸 쳐다봐.”
“그냥.”
자고 있는 줄 알았던 누나가 눈을 뜨더니 말했다. 아직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다. 그 귀여운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나왔다. 이마에 키스하고 싶다.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그냥 머리를 쓰다듬었다. 갑자기 잠이 몰려왔다. 이렇게 몸이 피곤해하는데 아까는 어떻게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점점 의식이 멀어지는 기분이 느껴진다. 가끔 이렇게 잠 속으로 천천히 빠져들어가는 것이 느껴질 때가 있다. 물론 매우 드물다. 보통은 내가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도 못하니까. 때로는 잠드는 걸 의식하는 순간 잠에서 깨버리기도 한다. 그러니까, 날이면 날마다 느낄 수 있는 기분이 아니라는 거다. 이런 때면 나는 나를 좀 더 멀리서 바라볼 수 있다. 내가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이 눈으로 보이는 듯 그려진다. 내가 어떤 자세로 자는지, 어떤 표정으로 자는지 보이지 않는데도 보이는 것 같다.
그때 가벼운 고통이 느껴지며 잠에 빠져 들어가던 의식이 다시 밖으로 빠져나왔다. 살며시 눈을 뜨고 보니 누나가 내 눈 앞에 조금 뚱한 표정을 하고 있다. 이마에 약간 고통이 남아있는 걸 봐선 누나가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후려친 듯하다.
“왜 그래?”
“그냥.”
영문을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누나의 비위를 거슬리게 할 짓을 했나보다. 그러나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되돌아볼 새 없이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내 의식이 멀리 어딘가로 떨어져 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마에 부드럽고 촉촉한 것이 닿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번엔 깨지 않았다.
다시 잠이 깼을 땐, 오후 3시였다. 내가 일어나서 편의점에 가서 콩나물을 사오고 식사 준비를 마쳐놨을 때가 1시 15분 정도였으니 2시간 정도 잤다. 몸이 개운하다. 아직 머리가 띵하긴 하지만 아까보다 훨씬 괜찮아졌다.
누나는 역시 아직 자고 있다. 이번주는 삼촌 때문에 학원도 안 가기로 했으니 아무런 방해 없이 잘 수 있을 것이다. 방에서 나오니 삼촌이 소파에 앉아 자고 있다. 거실 바닥에 엎어져 자고 있더니, 도중에 한 번 깼었나보다. 소파 손잡이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받치고 잔다.
밥이나 만들어야겠다. 이제 시간이 꽤 지났으니 다들 곧 일어날 것이다. 아무리 잠이 많은 누나라도 오후 3시면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일어난다.
내가 부엌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는 소리에 누나가 졸린 눈을 비비며 방에서 나왔다.
“밥 해?”
“응.”
“지금 몇 시야?”
“한 3시 정도 됐어.”
누나가 식탁에 앉았다. 그리곤 다시 졸기 시작했다. 이번엔 삼촌이 소파에서 일어나 식탁에 앉았다. 그리곤 졸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이!
뭐, 눈을 뜨고 있어도 요리는 내가 다 할 테니 상관은 없지만.
식사는 일단 자극적인 음식을 뺐다. 자극적인 음식이 없다고 맛없는 식단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조금 밋밋하긴 하다. 그래도 술 때문에 좋지 않은 속에 자극적인 음식이 들어가면 십중팔구 문제가 생긴다. 화장실에.
얼마 안 가 식사준비가 끝났다. 그때쯤 되자 삼촌도 누나도 눈을 뜨고 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애들 둘을 키우는 엄마가 된 것 같다. 어차피 평소엔 애 하나 키우는 엄마 노릇을 하고 있긴 하지만.
“맛있게 드세요.”
“잘 먹을게.”
“나도.”
식사가 시작되었다.
“고기 먹고 싶어.”
누나가 말했다. 삼촌도 입은 열지 않았지만 동의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일부러 신경 써서 해줘도 소용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냉장고에 넣어놨던 고기를 꺼냈다.
“와아!”
“와아!”
결국 술을 마시고 난 다음 속을 생각한 담백한 식단에 고기가 추가되었다. 뭐, 술 마신지 시간도 꽤 지났으니 괜찮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나도 고기를 한 점 베어 물었다.
다들 먹으면서 잠이 깬 건지, 오가는 말이 많아졌다. 특히 누나는 어제 일찍 잠이 들어서 아쉬운 모양이다.
“운하는 술 잘 먹는구나, 누나 닮았나봐.”
“엄마 술 잘 마셨어요?”
“취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지.”
누나의 물음에 삼촌이 옛날을 추억하며 대답했다.
“솔직히 어제 안 그런 척 했지만 힘들었다. 운하가 아무리 마셔도 멀쩡해 보이는 거야.”
“저도 어제 삼촌 따라가느라 힘들었어요.”
진짜 힘들었다. 술은 원래 그렇게 마시는 건데, 내가 약해서 힘든 줄 알고 참았다. 괜히 쓸데없는 승부욕을 발휘했다.
“주량 자랑 좀 하려고 했는데, 완전히 졌다.”
“나도 술 잘 마시고 싶다.”
누나가 부럽다는 눈으로 날 쳐다본다. 누나는 웬만하면 밖에서 술은 마시지 않아줬으면 좋겠다. 남자가 있을 때는 특히. 그동안은 기회가 없어서 몰랐지만, 어제 확인한 결과 누나는 알콜이 몸에 맞지 않는 사람이다. 이제부터 누나가 술을 마신다고 하면, 꼭 마중을 나갈 거다.
“운하도 이제 진짜 성인이 되는구나.”
“네.”
삼촌은 어른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도 머지않아 법적으로 술도 담배도 할 수 있는 나이가 된다. 술과 담배가 성인의 상징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성년과 미성년자를 구분 짓는 가장 보편적인 잣대가 되곤 한다. 오늘의 삼촌은 어쩐지 즐거워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제는 어쩐지 우울했던 것 같다. 물론 그냥 기분 탓이겠지만.
식사가 끝났다. 그릇을 싱크대에 넣어 두고, 설거지는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삼촌이 가기 전까지 좀 더 대화를 나눌 생각이었다. 그런데 삼촌이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시게요?”
“내일까지 준비해야 할 게 있거든. 미리 해두려고.”
돌아갈 준비랄 것도 없었다. 우리에게 줄 선물 말고는 가져온 것도 없어서 그냥 구두를 신는 것만으로
“삼촌 혹시 차 타고 오셨어요?”
“아니, 술 갖고 와서 버스 타고 왔어.”
“잘 하셨어요.”
해가 뜰 때까지 마셨으니 술을 마신지 12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만약에 차를 타고 돌아갈 생각이었으면 극구 반대할 생각이었다. 더 이상 차 사고로 누군가를 잃고 싶지 않다. 삼촌도 우리의 마음을 아는 듯 씨익 웃었다.
“걱정하지 마.”
“안 해요.”
삼촌은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하고, 우리에게 삼촌은 너무 소중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삼촌을 믿는다. 삼촌도 우리를 믿는다.
“다음에는 언제쯤 오실 거예요?”
“흠, 다음주에 올 수 있으면 오고, 못 와도 제사 때는 꼭 올게.”
다다음주면 부모님의 기일이다.
“괜히 무리하지 마시고, 그냥 다다음주에 오세요.”
누나가 말했다. 누나가 하지 않았으면 내가 했을 말이다. 삼촌은 우리에게 미소로 답했다. 아마도 삼촌은 우리가 상상조차 못 할 만큼 소중한 시간을 우리에게 할애하고 계실 거다. 어쩌면 우리보다 중요한 다른 것을 포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늘 삼촌에게 감사하다.
삼촌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도 손을 내밀어 그 손을 잡았다. 굳건한 손아귀 힘이 느껴졌다. 삼촌과 악수를 하는 건 처음이다.
“어제 참 즐거웠다.”
“저도요.”
“고맙다.”
삼촌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갔다. 무엇이 고맙다는 말인지는 모르겠다.
삼촌이 가시고 나서, 난 방에 들어가 지은이와 전화를 했다. 누나에게 통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지금 시간은 4시 반. 지은이와 만나기엔 조금 늦고, 그렇다고 안 보기엔 이른 그런 애매한 시간이다.
『삼촌 이제 가셨어?』
“어, 가긴 했는데. 조금 늦었네.”
『그럼 못 봐?』
“시간이 조금 애매하잖아.”
『난 상관없어.』
지은이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조금 늦어서 지은이의 의사를 물어본 건데, 별로 상관이 없다면 나도 괜찮다.
“그럼, 지난번에 풀었던 수학문제집이랑, 영어문제집 가지고 그 카페에서 봐.”
『문제집 가지고?』
“얼마나 공부했는지 보자고 했잖아.”
『에이…….』
“지금이 4시 35분이니까, 5시 정도에 보자.”
『그래…….』
매우 아쉬워하는 소리를 하는 지은이의 목소리에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곧바로 욕실에 들어가 씻었다. 원래 여유있게 씻는 편인 나지만, 최대한 빠른 속도로 머리를 감고, 몸을 닦고, 양치를 하고, 세수를 했다.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낸 후 옷을 갈아입었다. 지은이와 사귄 후로 난 입고 나갈 옷을 미리 골라놓는 습관이 생겼다. 여자 친구를 만나는데 평소처럼 아무거나 보이는 대로 입는 건 실례니까. 모든 준비를 마치는데 10분 정도 걸린 것 같다. 이제 남은 시간은 15분. 15분이면 약속장소에 충분히 도착하고도 남는다.
준비를 모두 마치고, 가방을 챙겼다. 공부를 하기로 하고 만나는 거니까. 아마 안 할 것 같지만. 현관에서 신발을 신었다.
“누나, 나갔다 올게.”
“응. 늦게 와?”
“저녁 먹고 올 거니까, 기다리지 마.”
“알았어.”
지은이를 만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누나가 선뜻 고개를 끄덕인 것에는 놀랐다. 별로 내키지 않는 얼굴로 마지못해 대답할 거라고 생각했다.
누나에겐 미안하게도, 약속장소로 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런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즐거워만 하고 있으면 안 되는데.
지은이와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는, 번화가의 거의 끄트머리에 있는 한적한 라이브 카페였다. 지은이와 데이트를 할 때 몇 번 왔던 곳이다. 대체로 손님이 많지는 않은 편이라 한적하고, 라이브를 사람들이 보통 잔잔한 음악을 주로 연주하는 사람들이라서 음악감상을 하기도 좋고, 데이트를 할 때 괜찮은 분위기를 만들기도 좋은 곳이다.
카페가 지은이네 집과 우리 집의 중간 정도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최근에는 약속장소로 자주 선정하는 곳이다. 멀리에 카페의 간판이 어렴풋이 보이다가, 이제는 간판의 글씨를 읽을 수 있을 만한 거리까지 도착했다.‘음악이 쉬었다 가는 곳’이라 쓰여 있는 간판이 보인다. 그리고, 카페 앞 쪽에 지은이가 보였다. 나를 발견한 지은이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나도 같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왠지 되게 오랜만에 본 거 같애.”
“나도.”
지은이의 말에 동의했다. 이상하게 몇 개월 못 본 것 같은 느낌이 났다. 금요일까지 보고, 겨우 하루를 못 본 건데.
지은이는 청바지에 반팔티를 입고 있다.
“오늘은 치마 안 입었네.”
“오늘 옷이 하나도 없어서…….”
지은이는 조금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상관없다. 원래 복장에는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고, 화려하지 않은 복장이라도 지은이는 충분히 이쁘니까. 지은이가 입으니 청바지 광고 모델이 옷을 입은 것 같다.
“청바지 진짜 잘 어울려.”
“진짜?”
“진심이야.”
지은이는 내 말을 완전히 믿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지은이는 그래도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내 말이 진심인 걸 알면 더 기뻐할 텐데.
“일단 들어갈까.”
“응.”
지은이와 함께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는 한산했다. 보통 이곳은 6시인가 7시부터 라이브를 시작한다고 들었다. 그때가 되면 사람이 꽤 모인다. 카페에 들어서니, 주인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아준다. 나와 지은이도 함께 두 주인 부부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너무 넓지도 좁지도 않은, 두 사람이 앉기에 딱 좋은 자리에 앉았다.
“아직 라이브할 시간이 안 돼서 그런지 사람이 없네.”
“그러게. 자, 일단 책을 펴볼까.”
“진짜 공부하게?”
내가 가방에서 책을 꺼내려고 하자, 지은이가 애원하듯 쳐다본다. 솔직히 나도 공부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장난이 치고 싶었다. 혹시나 해서 가져온 가방도 무겁지 않게 문제집 하나 밖에 안 넣었다. 지은이는 아예 빈손으로 왔다. 손가방도 없다. 지갑도 그냥 주머니에 넣어왔나 보다.
“이제 시험도 얼마 안 남았는데,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응. 진짜 이렇게 열심히 한 적은 처음인 것 같아.”
“그럼, 오늘 하루쯤은 안 해도 상관없겠네.”
“응!”
내 말에 지은이가 밝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여기를 알게 된 거야?”
이 카페는 지은이 덕분에 알게 됐다. 지은이가 괜찮은 곳이 있다면서 데리고 왔던 것이다.
“동생이 가르쳐줬어. 내 동생 후배네 부모님이 하는 곳이래.”
“그렇구나.”
이런 카페를 열고, 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것은 꽤 멋질 것 같다.
“그나저나, 저녁 뭐 먹을 거야?”
테이블에 비치된 메뉴판을 지은이에게 건네주면서 물었다. 지은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메뉴를 골랐다. 나는 고민하지 않고 원래 먹으려고 했던 메뉴를 골랐다. 얼마 안 있어 메뉴가 도착하고, 저녁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를 하면서 지은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지은이는 자신이 토요일에 무엇을 했으며, 동생은 무엇을 했고, 무엇을 먹었으며, 어제 정말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다거나, 부모님은 무엇을 했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나도 어제 삼촌이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지은이는 서로의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정말로 별것 없는 이야기인데도 지은이가 하면, 재미있었다. 반면 난 재미있는 이야기도 교과서에 나오는 문장처럼 지루하게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동안, 카페 주인아저씨가 무대 위에서 연주를 했다. 아저씨가 연주하는 것은 처음본다. 생김새와는 다른 맑은 목소리로 부드러운 발라드를 불렀다. 피아노 연주도 섬세했다. 나와 지은이는 잠시 수다를 멈추고 아저씨의 노래를 감상했다. 그러다 문득,
“그러고 보니, 오늘 재미있는 연주가 있을 거랬어.”
“재미있는 연주? 동생이 그랬어?”
“응.”
“어떤 건데?”
“나도 재미있는 연주라고 들은 게 다야.”
“흐음.”
재미있는 연주라. 말 그대로 웃긴 연주라는 걸까, 아니면 다른 의미일까. 웃긴 연주는 아닐 것 같긴 한데, 이렇다 할 게 떠오르지 않는다. 상상력이 메말랐나보다.
“연주가 7시 정도에 시작했던가?”
“원래는 그랬는데, 어, 지금 하려나보다.”
지은이의 말에 무대 쪽을 보니, 어느새 아저씨는 연주를 마치고 카운터로 돌아가 있고, 키 큰 청년이 무대 위로 올라가고 있다. 남자가 피아노 앞에 앉는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면 안 되지만, 어쩐지 멍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나이는 20대 초반에서 많아봤자 중반으로 보였다. 분명 꽤 잘생긴 얼굴인데 이상하게 의욕이 없어 보이는 것은 반쯤 감겨 졸려 이는 눈 때문일까.
남자가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다. 잠시 눈의 착각인지, 남자의 눈이 갑자기 반짝반짝 빛나는 듯 보였다. 아까 주인아저씨가 연주했던 그 피아노인 게 분명한데, 느낌이 달랐다. 젊은 나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는 연주를 보여준다.
“연주 잘한다.”
“그러게.”
신이 나는 연주였다. 피아노만으로 이렇게 흥겨운 연주를 할 수 있는지 몰랐다. 몇 분간 신나는 연주를 하다가, 이번엔 잔잔한 연주로 바뀌었다. 이렇게 다른 색의 음악이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오는 게 놀랍다.
“나도 피아노 배워 보고 싶다.”
“나도.”
내 말에 지은이가 동의했다. 가끔 피아노든 뭐든 악기를 다루는 법을 배워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때마다 악기를 연습하는 시간과 내가 공부하는 시간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계산해보고는 포기했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꼭 어떤 것이든 악기 연주를 배워보고 싶다.
남자의 연주가 끝났다. 몇 안 되는 관객들이 박수를 쳤다. 나도 지은이도 박수를 쳤다. 남자는 관객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는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곤 카운터 앞에 가서 주인 부부와 이야기를 나눈다. 꽤 친분이 있는 것 같다. 하긴, 아르바이트생이 가게 주인과 친분이 없을 리가 없다.
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다. 친분도 쌓아보고 싶다. 과연 저런 연주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하다. 뭔가 보통 사람과는 다를까.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을까. 하지만 나에겐 다른 사람에게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걸
“운하는 가고 싶은 대학 있어?”
“글쎄.”
나는 후보로 생각해둔 몇 군데를 지은이게 말해주었다.
“다 높은 곳이네.”
“음, 좀 높지.”
지금 지은이의 성적으로 솔직히 무리인 곳이다. 하지만 지은이는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있고, 원래 공부를 안 하던 애도 아니니까, 효율성만 갖춰진다면 가능성이 있다. 지은이는 이해력도 응용력도 좋으니, 요령만 있다면 금방 성적을 올릴 수 있다.
“지금처럼만 하면 충분히 할 수 있어.”
“그럴까?”
“그래.”
갑자기 지은이가 소리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왜?”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니 영문을 모르겠다.
“그냥. 운하가 말하면 왠지 정말로 그렇게 될 것 같아.”
“그런가?”
“응.”
아마 내가 평소엔 단정 짓는 말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난 어떤 것이든 잘 확신하지 못하는 편이다. 우유부단하다거나, 소심하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실제로 겁이 많은 성격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직 닥치지 않은 일을 멋대로 확신하는 것은 그것대로 무책임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자신에 대한 확신은 자신감이 될 수도 있지만, 남과 관련된 일에선 섣불리 확신하거나 단정 지으면 안 된다. 실례다.
그런 점에서 지은이가 나와 같은 대학교에 갈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은 무책임한 발언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대로 말해버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은이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시간이 금새 흘렀다. 어느새 7시가 되었다.
“아. 아. 안녕하세요.”
스피커를 통해 울리는 목소리에 저절로 시선이 무대 위로 향했다. 아까 전에 피아노 연주를 했던 남자가 다시 무대 위에 올라가 있다.
“이제 7시가 되어서 연주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아까는 원래 연주하던 시간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긴, 연주가 좀 짧았다.
뭔가 풍경이 달라진 것 같은 위화감이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손님들이 테이블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분명히 좀 전까지 한산했는데. 카페 주인 부부는 여유로워 보이던 아까와는 달리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갑자기 못 보전 종업원도 하나 추가되어 뛰어다니고 있다.
“첫 곡은 조금 즐거운 곡인데, 한 번 들어주세요.”
그렇게 말하고 남자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뱉었다.
남자가 건반에 올린 손을 움직이는 순간, 공기의 냄새가 달라졌다. 과장이 아니다. 정말로 그런 착각이 들었다. 발랄하고 속도감 있는 연주가 무대에서 흘러나오자, 카페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우울했던 사람도 저 노래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어떤 연주를 이렇게까지 몰입해서 들은 적이 없다.
아까의 연주는 분명 수준급이었지만, 뭔가 달랐다. 그래, 그저 지금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연습을 해본 거다. 확실하다.
사람이 어떤 음악에 감동하는 것은 과연 연주자의 기술 때문일까, 아니면 마음 때문일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그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의 손에 많은 것이 달려있다는 것이다.
신나는 연주가 끝이 나고, 잔잔한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정말 다른 사람이 연주하는 것 같았다. 분명 연주자가 바뀐 것이 아닌데, 무심결에 아름다운 여성 연주자를 떠올렸다. 정말.
정말, 아름다웠다.
표현이 빈약하다고 말해도 어쩔 수 없다. 난 이런 연주를 어떻게 말로 표현해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건 초능력이다. 만약에 저걸 말로 표현해낸다면 난 이미 유명 작가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을 것이다.
나와 지은이는 이야기 나누는 것도 잊고 음악 감상에 열중했다. 정말로, 다른 모든 것을 잊고 음악에 빠져들었다. 즐거운 노래를 연주할 때는 즐거워했고, 슬픈 곡을 연주할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남자가 연주를 끝내고 건반에서 완전히 손을 뗐을 때야, 우리는 정신을 차렸다.
“제 연주 끝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와아아!”
“브라보!”
“앵콜!”
관객들이 앵콜 요청을 했지만, 이미 앵콜곡을 두 번이나 연주한 후다. 나도 이제 공연이 끝났다는 것이 아쉬웠다. 다음에 다시 와서 들어야겠다.
시계를 보니 벌써 8시 10분이다. 1시간이 넘도록 의식하지도 못했다.
“대단해.”
“응.”
지은이의 말에 동의했다.
“이제 일어나볼까.”
“응.”
이제 시간이 많이 늦었다. 나도 지은이도 걱정하는 사람이 있으니 집에 돌아가야 한다. 카페의 주인부부에게 인사를 하고는 카페를 나왔다. 하늘은 노을이 져 붉었다. 여름의 해는 길어서 8시가 넘었어도 아직 그 빛을 발하고 있다. 얼마 안 가 사라지겠지만.
이제 기말고사가 끝나면 여름방학을 하고, 또 정신없이 시간이 흐르면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고, 또 여름이 올 것이다. 내년 오늘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때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많이 변했을까, 그대로일까. 그리고 그때의 나는 어떤 선택을 하고 그곳에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지은이를 바래다주었다. 아까 공연의 여운인지 지은이네 아파트 단지까지 가는 동안 오간 말이 몇 마디 없었다. 얼마 안 가 지은이네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내일 봐.”
“응.”
내가 손을 흔들자, 지은이도 손을 마주 흔들었다.
“내일 운동 할 거지?”
“응.”
지은이의 말에 대답했다.
최근 지은이와 격일로 아침에 가볍게 운동을 한다. 종목은 가벼운 조깅과 배드민턴을 한다. 덕분에 요즘 체력이 꽤 붙었다. 내 몸에선 찾기 힘들었던 근육이라는 것도 조금씩 생기고 있다. 나는 지은이에게 공부를, 지은이는 나에게 운동을 가르쳐준다. 지은이가 자기네 격투기 체육관을 권했지만, 조용하고 완고하게 사양했다.
격투기는 말 그대로 격투를 배운다. 맞고 때리는 걸 배운다. 내가 격투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으면 좋겠지만, 난 격투기는커녕 그냥 달리는 운동도 벅찬 사람이다. 아마 많이 맞을 거다. 상대가 봐줘서 별로 맞지 않더라도, 결과는 똑같을 거다. 호신이나 건강을 위해 격투기를 배워보고 싶긴 하지만, 지은이 앞에서 꼴 사나온 모습을 보이면서 배우고 싶진 않다. 혼자서 약하고, 혼자서 꼴사나운 건 괜찮지만,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절대 안 된다.
“이제 갈게.”
작별의 인사로 지은이의 볼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집에 돌아오니 누나가 나를 맞아주었다. 누나와 소파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시간을 보내다 일찍 방에 들어가 잤다. 처음 해보는 음주 때문에 몸이 많이 피곤했는지 눈을 감자마자 잠이 들었다.
시계를 보니 정오가 20분 정도 초과됐다. 어제 몇 시에 잤는지 어떻게 내 방 침대까지 와서 누웠는지 기억이 안 난다. 그나마 기억나는 게, 마지막 술잔을 기울이다가 눈이 부셔 밖을 보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보니 식탁이 깨끗이 정리되어 있다. 거기에 설거지도 되어 있었다. 내가 한 기억은 없다. 삼촌이 정리한 건가?
그러다 문득, 삼촌이 어디 있는지 찾아봤더니 삼촌은 바닥에 엎어져 있다. 어렴풋한 기억에 삼촌은 분명 누나 방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지금 바닥에 엎어진 걸 보면 내 기억이 잘못됐거나, 상상도 안 가지만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어 삼촌이 저기로 가 잠을 청했을지도 모른다. 가까이 가서 삼촌의 상태를 확인해보니 잠든 것 같긴 한데 끙끙 거리며 자고 있다. 어제 과음하긴 했나보다.
누나와 삼촌이 여전히 자고 있는 걸 확인하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셨다. 시원한 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자, 갈증과 두통이 어느 정도 가셨다. 두통의 원인 중에 갈증도 있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핸드폰이 생각났다. 내 방으로 가보니 책상 위에 충전기와 연결되어 있다. 충전기에 초록불이 들어와 충전이 다 되었다고 외치고 있었다. 지은이와 사귄 후로, 시계용도 이외에는 겨의 사용하지 않던 핸드폰을 자주 살피게 되었다. 핸드폰을 열어보니, 문자가 몇 통 와있다. 모두 지은이에게 온 것이다.
『그래, 알았어.』
이건 내가 삼촌이 와서 문자를 하지 못 할 수도 있다는 문자에 대답한 것이다.
『지금 뭐 해?』
이건 새벽 1시 정도에 온 문자다. 한창 술에 취해서 헤롱헤롱 거릴 때 온 문자다. 조금 뒤늦긴 했지만 답장을 보내기로 했다.
『새벽에 답장 못 해서 미안. 지금 일어났어. 술을 좀 많이 마셨나봐.』
문자를 보내고, 아직 졸음이 가시지 않아 세수라도 하러 욕실에 가려는데,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지은이의 답장문자였다. 지은이는 문자 보내는 속도가 빠르다. 나도 최근에 문자를 하는 일이 많아져서 비교적 속도가 빨라졌지만, 지은이에겐 상대도 안 된다. 그런데 또 지은이 말로 자기는 문자를 별로 안 하는 편이라 느리단다. 느린 게 그 정도면 대체 빠른 건 어느 정도라는 걸까.
『괜찮아? 머리 아프진 않고?』
『조금 아프긴 한데, 심하진 않아. 금방 괜찮아 질 거야.』
지은이의 걱정스러운 문자를 잘 받아주고는, 외출 준비를 했다. 어제 과음을 한 삼촌과 나를 위해 해장국을 만들 재료를 사러 간다. 외출 준비랄 것도 없었다. 어차피 요 앞 편의점에 갈 생각이기 때문에, 그냥 입고 있던 옷에 모자만 썼다. 모자를 쓰는 게 몇 달 만인지 모르겠다. 모자를 쓰면 머리가 답답해서 웬만하면 쓰지 않는 편이다.
맨발에 슬리퍼를 신었다. 슬리퍼도 오랜만에 신는다. 지은이와 사귄 후로는 주말에 데이트를 하거나, 외출하는 일이 잦아져서 슬리퍼를 신는 일이 드물어졌다. 동네 산책하는 것도 아니고 여자랑 만나는데 슬리퍼 신고 가기는 좀 그렇다.
밖으로 나오자, 여름의 뜨거운 공기가 폐를 파고들었다. 한 시간만 있으면 피부암에 걸리고 말 듯한 강렬한 햇빛이 나를 공격했다. 그냥 떡진 머리를 감출 생각으로 쓴 모자인데, 쓰길 잘했다. 이제 완연한 여름이다. 올해는 정말 더운 여름이 될 거라는 기상캐스터의 지적인 목소리가 떠올랐다.
맴, 맴, 맴.
매미가 시끄럽게 울었다. 10년 가까이 땅속에 있다가 나와서 하는 일이란 시끄럽게 울어대는 것뿐이다. 땅 속에서 생각할 시간도 많았을 텐데, 좀 더 조용하고 생산적인 일을 생각해서 밖으로 나와줬으면 좋겠다.
편의점를 향해 걸으며, 지은이에게 전화를 했다. 난 문자보다 전화가 좋다. 덕분에 이번 달 전화비가 기대되긴 하지만.
『여보세요.』
“여보세요.”
『어제 술 많이 마셨어?』
“많이 마신 것 같긴 해. 어제 기억이 조금 끊긴 것 같아.”
그게 술 때문에 그런 건지, 그냥 졸려서 그런 건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필름도 끊긴 거야?』
“근데 오늘 별로 머리가 아프거나 힘든 것도 없어. 그냥 졸려서 기억이 안 나는 것 같애.”
『그러면 다행이고.』
“어제 내가 문자에 답장 못 해줘서 미안해. 조금 정신이 없었어.”
『괜찮아.』
지은이가 내 사과를 아무렇지 않게 받아주었다.
“정말 미안해.”
『괜찮다니까.』
여자는 남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섬세하다. 그리고 남자는 짐작하지도 못할 만큼 사랑하는 사람을 걱정한다. 어릴 적에 엄마가 해준 말이다. 그때는 이해하지도 못하고 곧바로 잊어버렸던 그 말이 갑자기 생각이 났다. 아마도 내가 답장이 없는 것에 지은이가 걱정을 많이 했을 것이다.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더욱 불행하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괜찮은 말이다. 언젠가 학교 선생님에게 들었던 말일 거다. 그러나, 가장 불행한 사람은 사랑을 받으면서도 사랑받는 줄 모르는 사람이다.
최근 들어,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누나도, 삼촌도, 지은이도 감사하다. 그리고 성진이 녀석도 고맙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사랑받으며 살았다. 특히 누나와 지은이는 정말 과분할 정도로 나를 사랑해준다.
『지금 밖이야?』
“응. 편의점이야 삼촌한테 해장국 해드리려고. 콩나물 사러 왔어. 근데 밖인지 어떻게 알았어?”
『그냥 자동차 소리가 들린 것 같았어.』
방금 전에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클락션을 울리며 지나간 차가 있었는데 그 소리가 들린 모양이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편의점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시원한 공기가 몸을 감싼다. 온도가 낮아진 것보다 뜨거운 햇빛에서 벗어난 것이 좋다.
해장에는 콩나물국이 좋다. 조미료는 최대한 배제하고, 콩나물과 파 등을 우려 국을 끓이면 진정한 의미의 해장국이 만들어진다. 가게에서 파는 해장국은 맛은 있지만, 해장은커녕 오히려 속을 버릴 것 같다. 안 그래도 술로 속이 안 좋은 상태에서 뜨겁고 짠 음식을 먹는데 그건 오히려 위를 괴롭히는 일이다.
지은이와 전화통화를 하며 편의점을. 깔끔히 포장된 콩나물을 찾아 집어 들었다. 원래 편의점은 거리는 가까워도 할인마트에 비해 가격이 많이 비싼 편이다. 게다가 누나와 함께 주말에 마트에서 장을 보는 건 매우 즐거운 일중 하나이다. 오늘 같이 갑자기 필요한 것이 생길 때가 아니면 거의 오지 않는다.
콩나물 말고 혹시 또 필요한 게 있을까 싶어 편의점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딱히 눈에 띄는 것이 없다. 지은이와의 전화에 집중하고 있느라 그런지도 모른다. 그냥 콩나물만 계산해서 편의점을 나왔다.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어?”
『응!』
기말고사는 끝났지만, 수능을 보기 위해선 공부를 멈추면 안 된다.
“오늘 만나서 확인해볼까?”
『진짜? 언제?』
농담 삼아 한 말인데 지은이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와서 농담이었다고 하기도 그렇다.
“글쎄. 일단 삼촌이 아직 계시니까, 언제쯤 가시는지 봐야 돼. 혹시 늦게 가시면 못 볼 수도 있고.”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나도. 일단, 삼촌 가시고 나면 전화할게.”
『응!』
전화를 마치고 나니, 이미 집에 도착했다. 삼촌은 아직 거실 바닥에 엎어져 계신다. 누나는 방에 가보니 아직 자고 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다시 누워 자고 싶어졌다. 어차피 다들 늦게 일어날 텐데 조금만 잘까. 좋아, 조금만 더 자자. 그래도 식사준비는 해둬야지. 일어나면 바로 물만 끓이면 식사를 만들 수 있도록. 어차피 술 마시고 난 다음이라 만들기 번거롭고 자극적인 음식은 만들지 않을 생각이다.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보통 담백하고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은 만드는 절차가 간단하다.
준비를 끝내놓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누나가 내 기척을 느끼고는 반쯤 눈을 떴다. 손을 내민다. 그 손을 잡았다. 누나 옆에 누웠다.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이 정말 평온해 보인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것을 좋아한다. 물론, 나는 내가 그런 습관이 있는지 몰랐다.
어느 날인가 누나가 넌 참 사람을 지그시 쳐다본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지는 몰랐다. 말을 들었던 당시에도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었다. 그런데 가끔씩 누나의 말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도, 나는 누나를 바라본다.
“왜 자꾸 쳐다봐.”
“그냥.”
자고 있는 줄 알았던 누나가 눈을 뜨더니 말했다. 아직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다. 그 귀여운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나왔다. 이마에 키스하고 싶다.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그냥 머리를 쓰다듬었다. 갑자기 잠이 몰려왔다. 이렇게 몸이 피곤해하는데 아까는 어떻게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모르겠다.
점점 의식이 멀어지는 기분이 느껴진다. 가끔 이렇게 잠 속으로 천천히 빠져들어가는 것이 느껴질 때가 있다. 물론 매우 드물다. 보통은 내가 언제 잠들었는지 기억도 못하니까. 때로는 잠드는 걸 의식하는 순간 잠에서 깨버리기도 한다. 그러니까, 날이면 날마다 느낄 수 있는 기분이 아니라는 거다. 이런 때면 나는 나를 좀 더 멀리서 바라볼 수 있다. 내가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이 눈으로 보이는 듯 그려진다. 내가 어떤 자세로 자는지, 어떤 표정으로 자는지 보이지 않는데도 보이는 것 같다.
그때 가벼운 고통이 느껴지며 잠에 빠져 들어가던 의식이 다시 밖으로 빠져나왔다. 살며시 눈을 뜨고 보니 누나가 내 눈 앞에 조금 뚱한 표정을 하고 있다. 이마에 약간 고통이 남아있는 걸 봐선 누나가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후려친 듯하다.
“왜 그래?”
“그냥.”
영문을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누나의 비위를 거슬리게 할 짓을 했나보다. 그러나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되돌아볼 새 없이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내 의식이 멀리 어딘가로 떨어져 내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마에 부드럽고 촉촉한 것이 닿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번엔 깨지 않았다.
다시 잠이 깼을 땐, 오후 3시였다. 내가 일어나서 편의점에 가서 콩나물을 사오고 식사 준비를 마쳐놨을 때가 1시 15분 정도였으니 2시간 정도 잤다. 몸이 개운하다. 아직 머리가 띵하긴 하지만 아까보다 훨씬 괜찮아졌다.
누나는 역시 아직 자고 있다. 이번주는 삼촌 때문에 학원도 안 가기로 했으니 아무런 방해 없이 잘 수 있을 것이다. 방에서 나오니 삼촌이 소파에 앉아 자고 있다. 거실 바닥에 엎어져 자고 있더니, 도중에 한 번 깼었나보다. 소파 손잡이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받치고 잔다.
밥이나 만들어야겠다. 이제 시간이 꽤 지났으니 다들 곧 일어날 것이다. 아무리 잠이 많은 누나라도 오후 3시면 시간이 아까워서라도 일어난다.
내가 부엌에서 부산하게 움직이는 소리에 누나가 졸린 눈을 비비며 방에서 나왔다.
“밥 해?”
“응.”
“지금 몇 시야?”
“한 3시 정도 됐어.”
누나가 식탁에 앉았다. 그리곤 다시 졸기 시작했다. 이번엔 삼촌이 소파에서 일어나 식탁에 앉았다. 그리곤 졸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이!
뭐, 눈을 뜨고 있어도 요리는 내가 다 할 테니 상관은 없지만.
식사는 일단 자극적인 음식을 뺐다. 자극적인 음식이 없다고 맛없는 식단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조금 밋밋하긴 하다. 그래도 술 때문에 좋지 않은 속에 자극적인 음식이 들어가면 십중팔구 문제가 생긴다. 화장실에.
얼마 안 가 식사준비가 끝났다. 그때쯤 되자 삼촌도 누나도 눈을 뜨고 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애들 둘을 키우는 엄마가 된 것 같다. 어차피 평소엔 애 하나 키우는 엄마 노릇을 하고 있긴 하지만.
“맛있게 드세요.”
“잘 먹을게.”
“나도.”
식사가 시작되었다.
“고기 먹고 싶어.”
누나가 말했다. 삼촌도 입은 열지 않았지만 동의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일부러 신경 써서 해줘도 소용이 없다. 어쩔 수 없이 냉장고에 넣어놨던 고기를 꺼냈다.
“와아!”
“와아!”
결국 술을 마시고 난 다음 속을 생각한 담백한 식단에 고기가 추가되었다. 뭐, 술 마신지 시간도 꽤 지났으니 괜찮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나도 고기를 한 점 베어 물었다.
다들 먹으면서 잠이 깬 건지, 오가는 말이 많아졌다. 특히 누나는 어제 일찍 잠이 들어서 아쉬운 모양이다.
“운하는 술 잘 먹는구나, 누나 닮았나봐.”
“엄마 술 잘 마셨어요?”
“취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지.”
누나의 물음에 삼촌이 옛날을 추억하며 대답했다.
“솔직히 어제 안 그런 척 했지만 힘들었다. 운하가 아무리 마셔도 멀쩡해 보이는 거야.”
“저도 어제 삼촌 따라가느라 힘들었어요.”
진짜 힘들었다. 술은 원래 그렇게 마시는 건데, 내가 약해서 힘든 줄 알고 참았다. 괜히 쓸데없는 승부욕을 발휘했다.
“주량 자랑 좀 하려고 했는데, 완전히 졌다.”
“나도 술 잘 마시고 싶다.”
누나가 부럽다는 눈으로 날 쳐다본다. 누나는 웬만하면 밖에서 술은 마시지 않아줬으면 좋겠다. 남자가 있을 때는 특히. 그동안은 기회가 없어서 몰랐지만, 어제 확인한 결과 누나는 알콜이 몸에 맞지 않는 사람이다. 이제부터 누나가 술을 마신다고 하면, 꼭 마중을 나갈 거다.
“운하도 이제 진짜 성인이 되는구나.”
“네.”
삼촌은 어른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도 머지않아 법적으로 술도 담배도 할 수 있는 나이가 된다. 술과 담배가 성인의 상징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성년과 미성년자를 구분 짓는 가장 보편적인 잣대가 되곤 한다. 오늘의 삼촌은 어쩐지 즐거워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제는 어쩐지 우울했던 것 같다. 물론 그냥 기분 탓이겠지만.
식사가 끝났다. 그릇을 싱크대에 넣어 두고, 설거지는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삼촌이 가기 전까지 좀 더 대화를 나눌 생각이었다. 그런데 삼촌이 금방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시게요?”
“내일까지 준비해야 할 게 있거든. 미리 해두려고.”
돌아갈 준비랄 것도 없었다. 우리에게 줄 선물 말고는 가져온 것도 없어서 그냥 구두를 신는 것만으로
“삼촌 혹시 차 타고 오셨어요?”
“아니, 술 갖고 와서 버스 타고 왔어.”
“잘 하셨어요.”
해가 뜰 때까지 마셨으니 술을 마신지 12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만약에 차를 타고 돌아갈 생각이었으면 극구 반대할 생각이었다. 더 이상 차 사고로 누군가를 잃고 싶지 않다. 삼촌도 우리의 마음을 아는 듯 씨익 웃었다.
“걱정하지 마.”
“안 해요.”
삼촌은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하고, 우리에게 삼촌은 너무 소중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삼촌을 믿는다. 삼촌도 우리를 믿는다.
“다음에는 언제쯤 오실 거예요?”
“흠, 다음주에 올 수 있으면 오고, 못 와도 제사 때는 꼭 올게.”
다다음주면 부모님의 기일이다.
“괜히 무리하지 마시고, 그냥 다다음주에 오세요.”
누나가 말했다. 누나가 하지 않았으면 내가 했을 말이다. 삼촌은 우리에게 미소로 답했다. 아마도 삼촌은 우리가 상상조차 못 할 만큼 소중한 시간을 우리에게 할애하고 계실 거다. 어쩌면 우리보다 중요한 다른 것을 포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늘 삼촌에게 감사하다.
삼촌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도 손을 내밀어 그 손을 잡았다. 굳건한 손아귀 힘이 느껴졌다. 삼촌과 악수를 하는 건 처음이다.
“어제 참 즐거웠다.”
“저도요.”
“고맙다.”
삼촌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갔다. 무엇이 고맙다는 말인지는 모르겠다.
삼촌이 가시고 나서, 난 방에 들어가 지은이와 전화를 했다. 누나에게 통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지금 시간은 4시 반. 지은이와 만나기엔 조금 늦고, 그렇다고 안 보기엔 이른 그런 애매한 시간이다.
『삼촌 이제 가셨어?』
“어, 가긴 했는데. 조금 늦었네.”
『그럼 못 봐?』
“시간이 조금 애매하잖아.”
『난 상관없어.』
지은이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조금 늦어서 지은이의 의사를 물어본 건데, 별로 상관이 없다면 나도 괜찮다.
“그럼, 지난번에 풀었던 수학문제집이랑, 영어문제집 가지고 그 카페에서 봐.”
『문제집 가지고?』
“얼마나 공부했는지 보자고 했잖아.”
『에이…….』
“지금이 4시 35분이니까, 5시 정도에 보자.”
『그래…….』
매우 아쉬워하는 소리를 하는 지은이의 목소리에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곧바로 욕실에 들어가 씻었다. 원래 여유있게 씻는 편인 나지만, 최대한 빠른 속도로 머리를 감고, 몸을 닦고, 양치를 하고, 세수를 했다. 샤워를 마치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낸 후 옷을 갈아입었다. 지은이와 사귄 후로 난 입고 나갈 옷을 미리 골라놓는 습관이 생겼다. 여자 친구를 만나는데 평소처럼 아무거나 보이는 대로 입는 건 실례니까. 모든 준비를 마치는데 10분 정도 걸린 것 같다. 이제 남은 시간은 15분. 15분이면 약속장소에 충분히 도착하고도 남는다.
준비를 모두 마치고, 가방을 챙겼다. 공부를 하기로 하고 만나는 거니까. 아마 안 할 것 같지만. 현관에서 신발을 신었다.
“누나, 나갔다 올게.”
“응. 늦게 와?”
“저녁 먹고 올 거니까, 기다리지 마.”
“알았어.”
지은이를 만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누나가 선뜻 고개를 끄덕인 것에는 놀랐다. 별로 내키지 않는 얼굴로 마지못해 대답할 거라고 생각했다.
누나에겐 미안하게도, 약속장소로 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런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즐거워만 하고 있으면 안 되는데.
지은이와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는, 번화가의 거의 끄트머리에 있는 한적한 라이브 카페였다. 지은이와 데이트를 할 때 몇 번 왔던 곳이다. 대체로 손님이 많지는 않은 편이라 한적하고, 라이브를 사람들이 보통 잔잔한 음악을 주로 연주하는 사람들이라서 음악감상을 하기도 좋고, 데이트를 할 때 괜찮은 분위기를 만들기도 좋은 곳이다.
카페가 지은이네 집과 우리 집의 중간 정도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최근에는 약속장소로 자주 선정하는 곳이다. 멀리에 카페의 간판이 어렴풋이 보이다가, 이제는 간판의 글씨를 읽을 수 있을 만한 거리까지 도착했다.‘음악이 쉬었다 가는 곳’이라 쓰여 있는 간판이 보인다. 그리고, 카페 앞 쪽에 지은이가 보였다. 나를 발견한 지은이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나도 같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왠지 되게 오랜만에 본 거 같애.”
“나도.”
지은이의 말에 동의했다. 이상하게 몇 개월 못 본 것 같은 느낌이 났다. 금요일까지 보고, 겨우 하루를 못 본 건데.
지은이는 청바지에 반팔티를 입고 있다.
“오늘은 치마 안 입었네.”
“오늘 옷이 하나도 없어서…….”
지은이는 조금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상관없다. 원래 복장에는 신경 쓰지 않는 성격이기도 하고, 화려하지 않은 복장이라도 지은이는 충분히 이쁘니까. 지은이가 입으니 청바지 광고 모델이 옷을 입은 것 같다.
“청바지 진짜 잘 어울려.”
“진짜?”
“진심이야.”
지은이는 내 말을 완전히 믿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지은이는 그래도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내 말이 진심인 걸 알면 더 기뻐할 텐데.
“일단 들어갈까.”
“응.”
지은이와 함께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는 한산했다. 보통 이곳은 6시인가 7시부터 라이브를 시작한다고 들었다. 그때가 되면 사람이 꽤 모인다. 카페에 들어서니, 주인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반갑게 맞아준다. 나와 지은이도 함께 두 주인 부부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너무 넓지도 좁지도 않은, 두 사람이 앉기에 딱 좋은 자리에 앉았다.
“아직 라이브할 시간이 안 돼서 그런지 사람이 없네.”
“그러게. 자, 일단 책을 펴볼까.”
“진짜 공부하게?”
내가 가방에서 책을 꺼내려고 하자, 지은이가 애원하듯 쳐다본다. 솔직히 나도 공부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장난이 치고 싶었다. 혹시나 해서 가져온 가방도 무겁지 않게 문제집 하나 밖에 안 넣었다. 지은이는 아예 빈손으로 왔다. 손가방도 없다. 지갑도 그냥 주머니에 넣어왔나 보다.
“이제 시험도 얼마 안 남았는데,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
“응. 진짜 이렇게 열심히 한 적은 처음인 것 같아.”
“그럼, 오늘 하루쯤은 안 해도 상관없겠네.”
“응!”
내 말에 지은이가 밝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여기를 알게 된 거야?”
이 카페는 지은이 덕분에 알게 됐다. 지은이가 괜찮은 곳이 있다면서 데리고 왔던 것이다.
“동생이 가르쳐줬어. 내 동생 후배네 부모님이 하는 곳이래.”
“그렇구나.”
이런 카페를 열고, 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것은 꽤 멋질 것 같다.
“그나저나, 저녁 뭐 먹을 거야?”
테이블에 비치된 메뉴판을 지은이에게 건네주면서 물었다. 지은이는 잠시 고민하더니, 메뉴를 골랐다. 나는 고민하지 않고 원래 먹으려고 했던 메뉴를 골랐다. 얼마 안 있어 메뉴가 도착하고, 저녁식사를 시작했다.
식사를 하면서 지은이와 함께 이야기를 나눴다. 지은이는 자신이 토요일에 무엇을 했으며, 동생은 무엇을 했고, 무엇을 먹었으며, 어제 정말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다거나, 부모님은 무엇을 했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 나도 어제 삼촌이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지은이는 서로의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정말로 별것 없는 이야기인데도 지은이가 하면, 재미있었다. 반면 난 재미있는 이야기도 교과서에 나오는 문장처럼 지루하게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동안, 카페 주인아저씨가 무대 위에서 연주를 했다. 아저씨가 연주하는 것은 처음본다. 생김새와는 다른 맑은 목소리로 부드러운 발라드를 불렀다. 피아노 연주도 섬세했다. 나와 지은이는 잠시 수다를 멈추고 아저씨의 노래를 감상했다. 그러다 문득,
“그러고 보니, 오늘 재미있는 연주가 있을 거랬어.”
“재미있는 연주? 동생이 그랬어?”
“응.”
“어떤 건데?”
“나도 재미있는 연주라고 들은 게 다야.”
“흐음.”
재미있는 연주라. 말 그대로 웃긴 연주라는 걸까, 아니면 다른 의미일까. 웃긴 연주는 아닐 것 같긴 한데, 이렇다 할 게 떠오르지 않는다. 상상력이 메말랐나보다.
“연주가 7시 정도에 시작했던가?”
“원래는 그랬는데, 어, 지금 하려나보다.”
지은이의 말에 무대 쪽을 보니, 어느새 아저씨는 연주를 마치고 카운터로 돌아가 있고, 키 큰 청년이 무대 위로 올라가고 있다. 남자가 피아노 앞에 앉는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면 안 되지만, 어쩐지 멍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나이는 20대 초반에서 많아봤자 중반으로 보였다. 분명 꽤 잘생긴 얼굴인데 이상하게 의욕이 없어 보이는 것은 반쯤 감겨 졸려 이는 눈 때문일까.
남자가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다. 잠시 눈의 착각인지, 남자의 눈이 갑자기 반짝반짝 빛나는 듯 보였다. 아까 주인아저씨가 연주했던 그 피아노인 게 분명한데, 느낌이 달랐다. 젊은 나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는 연주를 보여준다.
“연주 잘한다.”
“그러게.”
신이 나는 연주였다. 피아노만으로 이렇게 흥겨운 연주를 할 수 있는지 몰랐다. 몇 분간 신나는 연주를 하다가, 이번엔 잔잔한 연주로 바뀌었다. 이렇게 다른 색의 음악이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오는 게 놀랍다.
“나도 피아노 배워 보고 싶다.”
“나도.”
내 말에 지은이가 동의했다. 가끔 피아노든 뭐든 악기를 다루는 법을 배워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때마다 악기를 연습하는 시간과 내가 공부하는 시간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계산해보고는 포기했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꼭 어떤 것이든 악기 연주를 배워보고 싶다.
남자의 연주가 끝났다. 몇 안 되는 관객들이 박수를 쳤다. 나도 지은이도 박수를 쳤다. 남자는 관객들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는 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곤 카운터 앞에 가서 주인 부부와 이야기를 나눈다. 꽤 친분이 있는 것 같다. 하긴, 아르바이트생이 가게 주인과 친분이 없을 리가 없다.
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다. 친분도 쌓아보고 싶다. 과연 저런 연주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하다. 뭔가 보통 사람과는 다를까.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을까. 하지만 나에겐 다른 사람에게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걸
“운하는 가고 싶은 대학 있어?”
“글쎄.”
나는 후보로 생각해둔 몇 군데를 지은이게 말해주었다.
“다 높은 곳이네.”
“음, 좀 높지.”
지금 지은이의 성적으로 솔직히 무리인 곳이다. 하지만 지은이는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있고, 원래 공부를 안 하던 애도 아니니까, 효율성만 갖춰진다면 가능성이 있다. 지은이는 이해력도 응용력도 좋으니, 요령만 있다면 금방 성적을 올릴 수 있다.
“지금처럼만 하면 충분히 할 수 있어.”
“그럴까?”
“그래.”
갑자기 지은이가 소리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왜?”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니 영문을 모르겠다.
“그냥. 운하가 말하면 왠지 정말로 그렇게 될 것 같아.”
“그런가?”
“응.”
아마 내가 평소엔 단정 짓는 말을 거의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난 어떤 것이든 잘 확신하지 못하는 편이다. 우유부단하다거나, 소심하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실제로 겁이 많은 성격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직 닥치지 않은 일을 멋대로 확신하는 것은 그것대로 무책임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자신에 대한 확신은 자신감이 될 수도 있지만, 남과 관련된 일에선 섣불리 확신하거나 단정 지으면 안 된다. 실례다.
그런 점에서 지은이가 나와 같은 대학교에 갈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은 무책임한 발언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대로 말해버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은이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시간이 금새 흘렀다. 어느새 7시가 되었다.
“아. 아. 안녕하세요.”
스피커를 통해 울리는 목소리에 저절로 시선이 무대 위로 향했다. 아까 전에 피아노 연주를 했던 남자가 다시 무대 위에 올라가 있다.
“이제 7시가 되어서 연주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아까는 원래 연주하던 시간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긴, 연주가 좀 짧았다.
뭔가 풍경이 달라진 것 같은 위화감이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손님들이 테이블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분명히 좀 전까지 한산했는데. 카페 주인 부부는 여유로워 보이던 아까와는 달리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갑자기 못 보전 종업원도 하나 추가되어 뛰어다니고 있다.
“첫 곡은 조금 즐거운 곡인데, 한 번 들어주세요.”
그렇게 말하고 남자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뱉었다.
남자가 건반에 올린 손을 움직이는 순간, 공기의 냄새가 달라졌다. 과장이 아니다. 정말로 그런 착각이 들었다. 발랄하고 속도감 있는 연주가 무대에서 흘러나오자, 카페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우울했던 사람도 저 노래를 들으면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어떤 연주를 이렇게까지 몰입해서 들은 적이 없다.
아까의 연주는 분명 수준급이었지만, 뭔가 달랐다. 그래, 그저 지금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연습을 해본 거다. 확실하다.
사람이 어떤 음악에 감동하는 것은 과연 연주자의 기술 때문일까, 아니면 마음 때문일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그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의 손에 많은 것이 달려있다는 것이다.
신나는 연주가 끝이 나고, 잔잔한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정말 다른 사람이 연주하는 것 같았다. 분명 연주자가 바뀐 것이 아닌데, 무심결에 아름다운 여성 연주자를 떠올렸다. 정말.
정말, 아름다웠다.
표현이 빈약하다고 말해도 어쩔 수 없다. 난 이런 연주를 어떻게 말로 표현해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건 초능력이다. 만약에 저걸 말로 표현해낸다면 난 이미 유명 작가로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을 것이다.
나와 지은이는 이야기 나누는 것도 잊고 음악 감상에 열중했다. 정말로, 다른 모든 것을 잊고 음악에 빠져들었다. 즐거운 노래를 연주할 때는 즐거워했고, 슬픈 곡을 연주할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남자가 연주를 끝내고 건반에서 완전히 손을 뗐을 때야, 우리는 정신을 차렸다.
“제 연주 끝까지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와아아!”
“브라보!”
“앵콜!”
관객들이 앵콜 요청을 했지만, 이미 앵콜곡을 두 번이나 연주한 후다. 나도 이제 공연이 끝났다는 것이 아쉬웠다. 다음에 다시 와서 들어야겠다.
시계를 보니 벌써 8시 10분이다. 1시간이 넘도록 의식하지도 못했다.
“대단해.”
“응.”
지은이의 말에 동의했다.
“이제 일어나볼까.”
“응.”
이제 시간이 많이 늦었다. 나도 지은이도 걱정하는 사람이 있으니 집에 돌아가야 한다. 카페의 주인부부에게 인사를 하고는 카페를 나왔다. 하늘은 노을이 져 붉었다. 여름의 해는 길어서 8시가 넘었어도 아직 그 빛을 발하고 있다. 얼마 안 가 사라지겠지만.
이제 기말고사가 끝나면 여름방학을 하고, 또 정신없이 시간이 흐르면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고, 또 여름이 올 것이다. 내년 오늘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때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많이 변했을까, 그대로일까. 그리고 그때의 나는 어떤 선택을 하고 그곳에 있을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면서 지은이를 바래다주었다. 아까 공연의 여운인지 지은이네 아파트 단지까지 가는 동안 오간 말이 몇 마디 없었다. 얼마 안 가 지은이네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내일 봐.”
“응.”
내가 손을 흔들자, 지은이도 손을 마주 흔들었다.
“내일 운동 할 거지?”
“응.”
지은이의 말에 대답했다.
최근 지은이와 격일로 아침에 가볍게 운동을 한다. 종목은 가벼운 조깅과 배드민턴을 한다. 덕분에 요즘 체력이 꽤 붙었다. 내 몸에선 찾기 힘들었던 근육이라는 것도 조금씩 생기고 있다. 나는 지은이에게 공부를, 지은이는 나에게 운동을 가르쳐준다. 지은이가 자기네 격투기 체육관을 권했지만, 조용하고 완고하게 사양했다.
격투기는 말 그대로 격투를 배운다. 맞고 때리는 걸 배운다. 내가 격투기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으면 좋겠지만, 난 격투기는커녕 그냥 달리는 운동도 벅찬 사람이다. 아마 많이 맞을 거다. 상대가 봐줘서 별로 맞지 않더라도, 결과는 똑같을 거다. 호신이나 건강을 위해 격투기를 배워보고 싶긴 하지만, 지은이 앞에서 꼴 사나온 모습을 보이면서 배우고 싶진 않다. 혼자서 약하고, 혼자서 꼴사나운 건 괜찮지만,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절대 안 된다.
“이제 갈게.”
작별의 인사로 지은이의 볼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집에 돌아오니 누나가 나를 맞아주었다. 누나와 소파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시간을 보내다 일찍 방에 들어가 잤다. 처음 해보는 음주 때문에 몸이 많이 피곤했는지 눈을 감자마자 잠이 들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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