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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15:22 445회 0건
베란다 창문 커튼 사이로 들어온 따스한 햇살이 거실 바닥에 반사되어 반짝거리고 있다. 거실로 나온 찬규는 민지를 안고 있는 소희의 등 뒤로 다가섰다. 민지는 동물과 꽃들이 있는 그림책을 보고 있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책장을 넘기던 민지가 소희에게 물었다.

“짜그 어마! 이건 뭐야?”
“민지야! 짜그 어마가 아니고, 작은 엄마!”

소희를 호칭하는 민지의 서툰 발음을 찬규가 고쳐서 말해주었다. 소희가 등 뒤의 찬규를 힐끔 돌아보고 미소를 지었다. 뒤를 돌아다 본 민지가 밝은 웃음을 흘리며 또박또박 발음을 끊어 다시 소희에게 물었다.

“헤헤~! 작, 은, 엄, 마! 이건 뭐야?”
“그건 국화꽃!”
“아! 국화꽃. 그럼 이건?”
“그건 아네모네란다.”
“아, 네, 모, 네.”

민지가 소희의 말을 받아 한 글자씩 발음했다. 민지에게 꽃 이름을 가르쳐 주는 소희는 등 뒤의 아주버니에게서 전해오는 체취를 느꼈다. 며칠 전에 돌발적인 그의 키스를 받아드렸던 그녀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가 그의 키스를 받아드린 것은 단지 술에 취했거나 순간적인 감정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마치 자신이 민지의 엄마가 되어 남편의 시선을 받는 환상에 젖었다. 손가락에 침을 묻힌 민지가 책장을 넘기며 다시 소희에게 물었다.

“이 꽃은 뭐야?”
“그건 민지처럼 예쁜 장미.”

“장미!? 내가 장미처럼 예뻐......!?”
“그럼, 민지가 장미보다 더 예쁘지. 장미가 어떤 꽃인지 재미있는 얘기 해줄까?”

“응! 해줘! 짜그 엄마.”
“민지야! 작 은 엄 마. 라니까!”

뒤에서 듣고 있던 찬규가 다시 하나하나 끊어서 민지에게 말해주었다. 소희의 눈가에 눈웃음이 깃들었다. 입을 벌리고 웃음을 흘리는 민지가 찬규를 돌아보며 다시 고쳐 말했다.

“작 은 엄 마!”
“우리 민지, 다른 말은 잘하면서........”
“아빠! 그냥 엄마라고 부르면 안 돼!?”
“..........?”

귀찮다는 표정을 하는 민지가 투정을 하듯이 물었다. 대답하기 난처한 찬규가 주춤거렸다. 뒤돌아서 본 소희와 찬규의 시선이 마주쳤다. 민지는 엄마얼굴도 모르고 자랐다. 찬규는 천진난만한 질문을 하는 딸을 어떻게 이해 시켜야할지 몰라 웃음을 터트렸다. 난처해진 소희도 궁색한 답변대신 웃음을 흘렸다.

“하하하........”
“호호호.......! 민지야, 재미있는 얘기 해줄게.”

“응!”
“옛날에 아름다운 여신이 잘생긴 소년을 좋아했단다. 그런데 그 여신의 남편이 질투를 해서 멧돼지로 변해 소년을 물어 죽였어,.......”

소희의 가슴에 안겨 듣고 있던 민지가 돌아앉았다. 소희와 마주보고 앉은 민지는 무엇인가 궁금한 표정이었다. 다음 얘기를 하지 못하게 소희의 입을 막은 민지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질투가 뭐야?”
“질투!? 음.......질투는 그러니까, 나보다 잘난 사람을 싫어하는 거란다.”

“아! 그렇구나. 작은 엄마! 소년이 불쌍해”
“작은 엄마도 소년이 불쌍해. 그런데 소년이 죽으면서 흘린 피에서 아네모네 꽃이 피었고, 아름다운 여신이 흘린 눈물에서 장미꽃이 피어났단다.”

“피하고 눈물에서 어떻게 꽃이 피어나지?”
“그건.........서로 사랑하니까.”

“사람이 죽으면 꽃이 되나?”
“그럼! 마음이 예쁘면 아름다운 꽃이 되고. 나쁜 짓을 하면 미운 꽃이 된단다.”

민지는 얘기를 하는 소희의 입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평소에도 소희와 민지의 다정한 모습에 특별한 감정을 느꼈던 찬규는 흐뭇한 미소를 흘렸다. 찬규를 말똥말똥 올려다보는 민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동자를 반짝였다. 그리고 민지가 소희에게 불쑥 물었다.

“아빠는 죽으면 무슨 꽃이 되지?”
“음.......남자니까 아네모네가 되겠지.”

“그럼 작은엄마는 여자니까, 장미꽃이 되겠네.”
“호호~! 아마 그럴 거야.”
“그럼, 아빠하고 작은엄마하고 사랑하나?”
“..........!?”

민지의 당돌한 질문에 찬규와 소희의 시선이 마주쳤다. 얼굴을 붉히는 소희를 바라본 찬규는 어색한 미소를 흘렸다. 잠시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망설이던 소희가 민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우리 민지 정말 깜찍하게 예쁘네. 아빠나 작은엄마는 민지도 사랑하고 착한 사람은 모두 사랑한단다.”
“그럼 누가 질투하면 어떡하지!?”
“하하하........”
“호호호........”

민지의 말에 찬규와 소희는 웃음을 터트렸다. 소희는 공연히 등 뒤에 느끼는 아주버니의 시선이 강렬하게 느꼈다. 웃음을 터트린 찬규는 민망해져서 멋쩍은 표정으로 작업실로 들어갔다. 작업실의 피아노 건반 앞에 앉은 그는 유리창 너머의 소희를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친 소희의 눈동자에는 자잘한 눈웃음이 깃들어 있었다.

찬규는 작곡중인 악보를 수정하려고 컴퓨터 모니터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가 피아노 건반에 손을 올려놓는데 책상위의 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전화 벨 소리를 무시한 그는 건반을 두드려서 나타난 음계에 맞추어 모니터 오선지의 음표를 수정했다. 한번, 두 번 전화벨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그는 한손으로 모니터에 나타난 오선지의 음표를 마우스로 찍으며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네. 천호동입니다.”
“찬규! 나, 용우야.”

전화의 상대방 목소리를 듣고 찬규는 의자에 비스듬히 몸을 묻었다. 찬규의 전화 받는 목소리를 듣고 거실에 있던 소희의 시선이 유리창 너머의 작업실로 향했다. 소희의 시선을 의식하며 찬규는 반갑게 응답했다.

“아! 한 감독 웬일이야?”
“넌 요즘 만나기 힘든 몸이잖아. 귀하신 작곡가니, 내가 전화를 해야지.”

“무슨 말!? 너야 말로 ‘폭풍 언덕’으로 대박 나더니 소식도 없고.”

한 용우, 그는 찬규와 대학동기이면서 찬규처럼 전공학과와 다른 길을 걷는 이단자였다. 찬규는 법대를 나와 음악계의 귀재 소리를 듣고 있고, 한 용우는 의대를 졸업하여 영화와 드라마 연출을 하다가 유명세를 타게 된 감독이었다. 찬규의 핀잔에 한 용우는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대박은 무슨!? 난 돈보다는 할리우드 못지않은 한국 영화를 만들고 싶을 뿐이야.”
“물론 나도 너를 잘 알지. 그런데 웬일이야? 뒤늦게 밥이라도 살래?”

“밥만 사나! 부탁만 들어 주면 술도 사야지.”
“무슨 부탁인지, 두려운걸.”

“하여튼 지금 만날 수 없어?”
“지금........!?”
“왜! 다른 약속 있나?”
“약속보다는, 방송드라마 테마를 마무리 중이라서........하지만 모처럼 만나자는 천하의 한 감독님을 무시하면 안 되지.”
“하하하.........!

망설이던 찬규는 한 용우와의 약속장소를 잡았다. 찬규는 악기와 기계들, 그리고 책과 노트, 서류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작업실을 둘러보며 두툼한 파카를 집어 들었다. 작업실을 나와 현관으로 향하는 그는 파카를 걸쳐 입으며 민지와 놀고 있는 소희를 향해 말했다.

“제수씨! 미안하지만 나갔다 올게.”
“네! 늦으세요?”

“아니. 오래 걸리지 않을 거 같은데.”
“다녀오세요.”

소희는 인형을 갖고 노는 민지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전화 받는 소리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기에 그녀는 아주버니가 외출할 것을 예상했었다. 민지를 내려놓은 소희가 현관 통로를 향하는 찬규에게 다가왔다. 구두를 신으려고 엎드린 찬규의 파카 목 부분이 접혀져 있었다.

현관 앞으로 다가서는 소희는 헐렁한 청바지에 파카를 걸친 찬규의 모습이 야성적이면서도 훨씬 젊은 혈기를 느꼈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주버니와 사이에 스스럼이 없어지는 그녀였다. 그의 등 뒤로 다가선 그녀가 손을 뻗쳐 그의 접혀진 옷깃을 펴 주었다. 엎드려있는 찬규의 시선에 그녀의 찰랑거리는 스커트자락이 보였다.

찬규의 눈앞에 그녀의 맑은 피부를 들어낸 그녀의 종아리가 멈추어 섰다. 구두를 신고 일어선 그의 턱밑에 그녀의 뽀얀 얼굴이 다가서 있었다. 그는 오늘따라 유난히 그녀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바짝 다가섰던 그녀는 그의 강렬한 눈빛에 반사적으로 한걸음 물러서려고 했다. 순간 그가 그녀의 팔을 낚아챘다. 그리고 그녀를 껴안아 입술을 찾았다.

“흡........”

당황스런 소희는 깊이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찬규의 가슴을 밀치려고 손을 뻗치려던 소희는 눈을 감고 있었다. 입술과 입술이 마주했다. 그의 넓은 가슴 속에 파묻힌 그녀는 바르르 떨었다. 이미 그의 키스를 받아 들였던 그녀의 팔이 자연스럽게 그의 목덜미에 얹혀 있었다.

입술과 입술이 부딪어 습한 열기로 적시고, 이내 소희의 혀가 그의 입속으로 강하게 빨려 들어갔다. 짜릿한 쾌감으로 다리에 힘이 풀린 그녀는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그에게 안긴 그녀의 발끝은 허공에서 발돋움을 하고 있는 상태였다. 둔부가 끌어 당겨진 그녀는 밀착된 하복부로 전달되는 남자의 열기를 느꼈다. 그의 가슴을 살그머니 밀어낸 그녀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민지가 봐요.”
“.........”

소희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찬규의 눈빛이 무척 열정적이고 아늑하게 느꼈다. 두 방망이질 치듯이 가슴이 두근거리는 그녀는 시선을 외면했다. 힘을 주어 허리를 안았던 그가 팔을 풀고, 그때서야 쑥스러워진 그녀는 도망치듯이 돌아서서 거실로 향했다. 민지를 껴안은 그녀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현기증마저 느꼈다. 현관 문 닫히는 소리를 듣는 그녀는 무언가 아쉬움 같은 것을 느꼈다.

현관을 나온 찬규는 빠른 걸음으로 건물 앞의 주차장으로 향했다. 찌뿌듯한 날씨이지만,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었던 찬규의 가슴은 벅찼다. 그들의 마음은 제수와 아주버니라는 관계를 초월한 남녀 간의 애정이었다. 건물을 나와 승용차 운전석 문을 열어젖힌 찬규는 베란다 창문을 올려다보았다. 내려다보고 있던 소희의 모습이 커튼 뒤로 사라졌다.

커튼 뒤로 몸을 숨긴 소희는 찬규의 승용차가 사라지고 나서도 넋을 잃고 서서 있었다. 그에게 안겼던 순간의 열기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시간이 갈수록 찬규의 움직임에 민감해지는 자신을 의식할 수 있었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녀는 결혼 전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는 만약 찬규가 아주버니가 아닌 남편이었다면 지금의 고통이 아닌 행복한 현실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불공평한 신을 원망 할 수도 없는 그녀는 마음이 안정이 되지 않아 거실을 맴돌았다.

거실을 맴돌던 소희는 찬규의 작업실로 들어갔다. 그의 체취가 가득한 적업실 안을 서성거리던 그녀는 흩어져 있는 물건들을 주섬주섬 정리했다. 책상 위를 정리하던 그녀는 작은 액자를 집어 들었다. 액자 속에는 다소곳하게 미소 짓는 여인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소희는 여인이 민지처럼 귀염성 있는 미모를 지닌 것으로 보아 민지의 엄마라는 것을 직감했다.

소희는 찬규가 아직도 사망한 민지엄마의 사진을 갖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아내를 사랑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소희는 새삼스럽게 까칠한 남편과 다정다감한 아주버니의 성격이 비교되었다. 사랑! 소희에게 그토록 사랑한다고 했던 남편과의 지난 시간은 한낮 모래성에 불과했다.

현관의 차임벨소리가 울렸다. 아주버니가 벌써 돌아 올 리가 없을 것 같아 소희는 작업실에서 나오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현관으로 통하는 모니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모니터에 길게 생머리를 늘어트린 젊은 여자의 모습을 보고 그녀는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누구세요........!?”
“방송국에서 왔는데요. 박 찬규 선생님 계세요?”

“아! 조금 전에 나가셨는데요.”
“어떡하지.......!? 제가 온다고 미리 약속을 했었는데........”

“전화를 해보시던지. 아니면 누구신지, 전해드릴게요.”
“저, 정 혜영이라고 해요. 오면서 전화를 했는데 전화를 안 받아서........ 오늘 만나야 하는데, 어쩌지....... 늦게 오시나요?”
“아뇨! 오래 걸리지 않는다고 하셨어요.”

“어떡하지! 그럼, 기다려도 될까요?”
“네, 괜찮으시다면.........들어오세요.”

소희는 공연히 여자에게 거부감을 느꼈다. 아주버니를 찾아온 손님이 여자였기 때문인가, 소희는 경계심을 가졌다. 찬규가 여자와 같이 있는 모습을 본적이 없는 그녀의 질투심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현관문을 열고 보니 날씬한 몸매에 투피스를 걸친 캐리우먼 스타일의 여자가 서 있었다. 왠지 그 여자에 비해 자신이 초라해 보이는 소희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

“전화를 받고 나가셨는데, 아마 약속을 잊으셨나 봐요. 들어오세요.”
“그러시군요. 고맙습니다.”

정 혜영은 주춤거리며 소희의 뒤를 따라 거실로 들어왔다. 찬규의 집에 처음 방문한 혜영은 집안을 두리번거리고 살폈다. 그녀는 마치 찬규의 흔적이라도 찾으려는 눈빛이었다. 거실 바닥에서 인형을 안고 있는 민지에게 향한 그녀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어머! 네가 민지구나! 엄마 닮아서 예쁜데, 눈은 아빠 닮았네.”

민지를 들어 올려 안은 정 혜영이 소파에 가서 앉았다. 소희는 혜영이가 민지 엄마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소희는 혜영의 활달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업무상 찾아온 모습이 아니라 마치 연인을 만나기 위해 단장한 것 같은 그녀의 모습에 소희는 기분이 언짢았다.

아주버니 찬규에 대한 애정은 소희 자신만이 간직하고 싶은 은밀함이었다. 그래서인지 소희는 아주버니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태도를 보이는 그녀가 더욱 불쾌했다. 하지만 소희는 속내를 들어 내보이지 않으려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커피 한 잔 드릴까요? 아니면 음료수라도......”
“네. 고맙습니다. 커피로 할게요.”

주방으로 들어선 소희는 커피포트 스위치를 눌러놓고 싱크대에서 커피 잔을 꺼내면서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커피를 타면서도 그녀는 혜정의 움직임에 민감해져 있었다. 혜정의 표정은 마치 자주 왕래했던 사람 같았다. 그녀에게 안긴 민지는 처음 본 사람인데도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소희는 민지가 자신이 아닌 여자에게는 낯가림하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커피를 타서 쟁반에 받쳐 든 소희가 소파로 다가가서 탁자 위에 커피 잔을 내려놓았다.

“드세요. 취향을 모르는데 괜찮을는지 모르겠네요.”
“..........!”

소희는 혜정의 품에 있는 민지를 빼앗듯이 끌어안았다. 그리고 커피 잔을 들어 마시는 혜정과 탁자를 마주하고 앉았다. 소희는 공연히 긴장을 하고 그녀를 바라봤다. 이지적인 눈빛, 잘 가꿔서 윤기 흐르는 피부, 스커트 자락 사이로 들어난 탄력 있는 허벅지가 들어나 보이는 혜정의 모습에 소희는 공연히 시샘이 났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혜정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맛있네요. 혹시 가정부이세요?”
“네.......!?”

혜영의 묻는 말에 소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가정부로 보일만큼 초라해 보였나! 울화가 치밀었으나 소희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혜정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다시 말했다.

“찬규 씨, 집안일 도와주시는 분이신가 해서요.”
“아닌데요. 민지 작은 엄마예요!”

소희는 혜영의 질문이 불쾌하여 정색을 했다. 혜영은 작은엄마라는 말에 힘을 주어 강조하는 소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가 눈여겨 살펴보지 않은 소희의 미모는 의외로 개성미가 넘치는 미모였다. 조각 같이 귀염성 있는 얼굴, 보조개를 드리운 미소. 짙은 속눈썹의 이지적인 눈동자, 나이보다 앳되어 보이는 소희의 상큼함을 느낀 혜정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 그럼, 상규 씨의 부인되시는군요.”
“.........네!”

“죄송해요. 내가 실수를 했어요.”
“아뇨. 괜찮습니다.”

말은 너그럽게 했지만 소희는 무척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의 이름이 나오자, 왠지 주눅이 들었다. 그리고 가정부라니! 내가 가정부로 보였단 말인가? 소희는 아무리 가정부 같이 보였어도 조심스럽게 말하지 않는 정혜와 아주버니의 관계가 의문스러웠다. 더욱이나 남편의 이름도 알고 있지 않는가. 소리 없이 마른침을 삼킨 소희가 정혜에게 물었다.

“아주버니와는 잘 아는 사이신가요?”
“네. 찬규 씨가 같은 캠퍼스의 선배였고, 저희 아버님도 기업을 하고 있어서 집안 간에도 잘 알고 있어요. 찬규 씨의 습관과 성격도 잘 알고 있어요. 깔끔하고 사교성 있는 상욱 씨에 비해 찬규 씨는 말 수가 적고 수더분하지요.”

정혜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듣는 소희는 더욱 의아스럽기만 했다. 남편도 알고 있는 그녀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어째서 자신이 한 번도 만나지 않았던 그녀가 나타난 것인지. 소희는 아주버니의 여자관계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녀의 궁금증을 덜어주듯이 혜영이 이어서 말했다.

“찬규 씨가 조금 고지식한 면이 있어요. 이번 방송 테마음악 작곡도 거부하는 것을 내가 부탁해서 성사된 거예요. 쉽게 여자들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지만, 민지엄마하고 찬규 씨는 잉꼬부부라고 소문이 났었지요.”
“...........”

“상욱 씨가 까칠 해도, 사교성이 있어서 집에서도 잘 하지요?”
“네......? 네!”

혜영은 상욱과 찬규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녀의 말을 되새기고 있는 소희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식적이라고 해도 소희는 남편에 대해 할 말이 없었다. 남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여자에게 구차한 얘기를 하고 싶지 않은 소희의 자존심이었다.

이어서 무슨 말인가 하려던 혜영은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사실 그녀는 캠퍼스 시절에 찬규를 사랑했던 여자였다. 바이올린을 다루던 그녀는 찬규와 같은 음악동아리 활동을 했었다. 그러나 찬규는 그녀의 친구인 민지엄마를 사랑하여 결혼한 것이었다. 찬규의 사랑을 받지 못한 그녀는 아직도 독신으로 지내고 있었다.

찬규는 아내를 이별한 후에도 혜정의 사랑을 받아 드리지 않고 있었다. 혜정은 새삼스럽게 찬규에 대한 사랑을 소희에게 들어낼 수는 없었다. 민지가 노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한동안 침묵하던 혜정이 벽시계를 올려다보며 혼잣말을 했다.

“어떡하지!? 시간이 없어 가야하는데.........”
“.........”

소희는 민지 엄마가 어떤 여자였기에 아주버니의 사랑을 받았었는지, 혜정은 아주버니에게 어떤 여자인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질투인가! 넋을 놓고 있던 소희는 휴대폰의 다이얼을 누르는 혜정을 의식하며 새삼스럽게 자신에 대한 아주버니의 감정을 저울질했다. 거북한 분위기가 싫은 소희는 혜정이 가기를 바라는 심정이었다. 민지를 소파에 앉히고 일어선 소희는 탁자위의 찻잔을 집어 들었다.

휴대폰을 들고 찬규와의 통회를 기다리는 혜정의 시선이 싱크대로 돌아서있는 소희에게 향했다. 혜정은 같은 여자 입장에서 보아도 소희의 뒷모습이 사랑스럽다고 느꼈다. 통화가 되지 않고 신호음이 끊어졌기에 초조해진 혜정은 다시 재 발신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끝나갈 무렵에 들려오는 찬규의 목소리에 혜정은 어린애처럼 투정을 했다.

“찬규 씨! 약속해 놓고 뭐예요?”
“아! 내가 깜박했어. 미안해.”

혜정의 전화를 받고 있는 찬규는 한 용우의 사무실에 있었다. 용우의 만나자는 약속 때문에 그는 혜정을 기다려야하는 것을 잊어버렸던 것이었다. 자신의 실수에 겸연쩍은 찬규는 대화를 하고 있던 용우를 바라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다시 톡톡 튀기는 혜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떡해요!? 부장님은 테마음악 CD를 받아 오라는데.”
“그렇지 않아도 연락하려고 했지. 바쁜 일이 있어서 전체 조율을 못했는데, 내가 직접 간다고 그래.”
“알았어요. 그렇지만 헛걸음시켰으니 맛있는 거 사줘야 돼요?”

“하하~! 알았어. 미안해.”
“그럼 연락 기다릴게요.”

통화를 끝낸 찬규는 탁자 가까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마주하고 있는 한 용우는 새로 제작할 영화 각본을 들추고 있었다. 말끔하게 머리를 빗어 넘긴 용우는 여자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호남이었다. 전화통화를 끝내는 찬규를 바라보며 용우가 히쭉 웃었다.

“드디어 요즘, 여자 사귀는 모양이지?”
“여자는 무슨.........!? 혜정 이를 용우도 잘 알잖아?”

“아! 혜정 씨! 아직도 결혼하지 않은 모양인데, 지금도 널 좋아하나보군.”
“좋아하긴.......방송 드라마 테마 음악 때문이지.”

“언제까지 혼자 지낼 거야? 민지 키우기도 힘들 텐데.”
“하하~! 나보다 네 걱정해. 총각 귀신 될래?”
“나야 뭐 이대로가 좋아. 하하하........!”

겸연쩍은 용우는 큰 웃음으로 대신했다. 찬규와 동갑이면서도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는 용우이지만 불편을 느끼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는 안락한 가정보다 세계적인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했다. 사람들에게 호감을 느끼게 하는 훤칠한 외모는 오히려 음험함과 야비한 성격으로 들어나 보이기도 했다. 그는 찬규를 빤히 쳐다보며 다짐을 받으려 했다.

“내 요구를 들어 주는 거지?”
“글쎄.......내가 지금 맡은 일도 벅차서. 내가 상업적으로 끌려 다니기 싫어하는 것 알잖아.”

“물론, 내가 흥행을 노리는 건 사실이야. 아무리 좋은 작품도 관객이 없으면 실패작이니까. 그래서 너한테 부탁하는 거야. 종합 기획사를 차린 네 동생 상욱이도 영화제작을 한다고 하던데.........”
“한집에 살면서도 요즘 동생을 만날 수 없으니 알 수 없지만, 그렇다는 소식은 들었어.”

“공교롭게도 같은 판타지 멜로물이야. 그래서 너의 마인드가 실린 음악이 꼭 필요해.”
“하하~! 이거 완전히 코너에 몰려 협박당하는 기분이네.”

난처해진 찬규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바짝 다가앉아 찬규의 대답을 기다리는 용우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동안 용우는 자신이 제작하려는 영화에 적합한 음악을 작곡할 마땅한 작곡자를 선택하려고 고민을 했다. 더욱이나 같은 분위기의 영화를 비슷한 시기에 개봉을 하려는 GS 기획사의 경쟁에서 뒤진다면 경제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그동안 쌓아온 명예가 실추 되는 것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찬규가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까지 진전 되었는데?”
“각본은 마무리 되었고, 보안을 유지하고 있지만, 워낙 큰 프로젝트라서 제작비가 좀 문제이긴해도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기업은 많아. 캐스팅할 배우들은 물밑 작업을 하고 있는데, 조연급은 어느 정도 확보된 셈이야. 네가 들으면 곤란하게 생각하겠지만........ GS가 오디션에서 선발된 강 준식도 내 사람이 될 거야. 그런데 주연을 맡을 여배우가.......!?”

“나한테 곤란할 건 없어. 난 대영이 콘텐츠 사업까지 확장하는 것이 탐탁지 않아. 그런데 여배우가 왜.......!?”
“응! 주연 여배우는 관객에게 고정된 이미지를 주는 기성 배우로는 곤란해서........”

한 감독의 말에 찬규는 문득 결혼 전에 연극을 했던 제수 소희가 신인 유망주로 극찬을 받았던 것을 떠 올렸다. 그는 연기자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는 그녀를 예전처럼 밝은 모습으로 되돌려 주고 싶었다. 그러나 쉽게 말할 수가 없는 찬규는 용우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우선 용우의 음악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승낙해야하는지 조차도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만약 소희를 추천하려면 거절할 수도 없기에 그는 더욱 조심스러웠다.

“하여튼 며칠 안에 대답을 해줄게.”
“그림자향기는 장기 프로젝트이니, 완벽하게 준비하고 크랭크인 할 계획이야.”

“제목이 그림자향기야........!?”“
“응. 아직 시간은 많아. 네가 해주리라 믿을게. 이건 시나리오니까 검토해봐.”

찬규는 용우가 건네주는 시나리오를 받아서 펼쳤다. ‘그림자향기!’ 그는 한 감독이 기성배우들을 피해서 배우를 캐스팅하고 하고 싶다는 여자 주연 배역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대충 시나리오를 훑어보는 그는 불꽃같은 정열을 가진 여주인공과 소희를 연상시켰다. 어쩌면 소희의 꿈을 이루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소희를 추천했다가 실망하거나 낙심을 하는 것이 두려운 찬규는 넌지시 물었다.

“그래서 남자 주역도 연극계의 강 준식을 캐스팅하려는 것인가?”
“그렇기도 하지만, 강 준식은 원래 내가 키운 배우야.”
“아......! 연극계에 연기를 인정받은 배우들이 많지. 우리 제수씨도 결혼 전에는 연극계의 떠오르는 유망주로 시선을 받았지.”

찬규는 무심코 하는 말투처럼 흘려놓고 슬며시 용우의 표정을 살폈다. 찬규의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용우는 눈빛을 반짝였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인 용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음.........! 너의 제수라면 민 소희!? 풍기는 이미지가 강렬했던 것으로 기억하지.”
“기억하는 모양이지......?”

“그 당시 나는 처음 작품을 맡아 정신없었지만, 연극 영화계의 소식에 예민했으니까. 제수씨는 요즘 뭐하고 있지?”
“별로 하는 일은 없고. 그냥 살림하고 있어.”

“결혼식장에서 본 것이 마지막인 것 같은데, 언제 한번 식사 자리를 마련해줘.”
“그러지 뭐. 시간을 내 볼게.”

담담하게 말하고 있는 찬규지만 내심 소희에게 희망을 줄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소희가 연기자 생활을 시작하려면 많은 난관을 거쳐야 하겠기에 찬규는 선뜻 용우에게 추천할 수도 없었다. 물론 용우가 캐스팅하려고 소희와 식사를 하자고 명확히 말한 것도 아니었다.

한 용우는 벽을 응시하며 기억 속에 남아있는 민 소희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는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시나리오를 대충 검토하던 찬규는 연락을 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용우의 사무실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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