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황혼이 사라지고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감정을 들어내지 않는 찬규는 담담한 표정으로 운전을 하여 집 앞에 차를 세웠다. 찬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어둠속을 응시했다. 그리고 가만히 소희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시선이 마주친 그들의 눈동자는 사랑의 열기를 교감하는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포옹하고 키스를 했다.
그들은 서로의 가슴이 유난히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주버니의 집으로 올라간 소희가 저녁식사 준비를 했다. 찬규와 민지와 같이 식사를 하는 소희는 오늘 같은 날만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으로 그녀는 찬규의 열정을 느끼는 눈빛이 두려웠다. 그에게서 전해오는 체취가 뜨겁게 느껴병? 그녀는 설거지를 하면서 등 뒤로 스치고 지나는 그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했다.
아주버니가 원한다면 소희는 거부할 자신이 없었다. 욱체적인 사랑! 아니 그녀의 달아오른 감정은 그의 요구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감정을 모른 채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녀를 더욱 안타깝게 하는지 담담한 표정이었다. 설거지를 마친 소희는 공연히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리고 도망치듯이 자신의 집으로 내려 온 그녀는 가슴에 살아난 불씨를 감당 할 수 없었다.
어두운 거실을 한 동안 배회하던 소희는 새삼스럽게 남편의 아내라는 것을 망각하고 싶었다. 이제는 그녀 스스로 갇히고 있는 울타리를 벗어던지고 싶은 욕구였다. 다른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연기자의 길로 들어서면 그녀는 남편에 대한 저주도 벗어 던지고 싶었다. 홀로 서기가 된 후에 그녀는 아주버니라는 허물을 벗고 자유스러운 애정의 표현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현실은 아직도 소희가 박 상욱이라는 남자의 아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녀는 당장 허물을 벗어 던질 수는 없었다. 이제까지 빼앗긴 시간들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녀는 조금이라도 되찾고 싶어 경솔하게 주사위를 던질 수 없었다. 며칠 동안 혼란 속에 빠진 그녀는 어떤 결단도 내리지 못했다.
연기를 하고 싶은 욕망은 확연한 소희는 한 감독의 전화번호를 누르다가도 전화기를 내려놓기를 반복하였다. 항상 의지가 되는 찬규는 그녀 자신의 결단을 믿는지 조언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아주버니 주위를 맴돌며 뜨거워지는 자신의 감정이 도리어 그녀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소희가 한 감독에게 다녀오고 이틀이 지난 오후였다. 연기자에 대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그녀에게 한 감독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벨 소리에 무심코 휴대폰을 들었던 그녀는 한 감독의 목소리에 당황했다.
“민 소희 씨!? 저, 한 용우입니다.”
“아.........! 네 소희예요.”
“이렇게 전화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네, 그렇지 않아도.........”
한 감독이 전화를 한 까닭을 알 수 있는 소희는 당혹감에 젖었다. 그렇다고 당장 대답을 할 수 없어 그녀는 망설였다.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으니 한 감독이 먼저 물었다.
“어떻게, 마음에 결정은 내리셨는지.........?”
“글쎄요, 그게........”
“음.......!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지금 만나 뵐 수 있을 가요?”
소희가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생각할 틈도 없이 한 감독이 말했다. 그녀는 한 감독을 만나더라도 아주버니의 도움이 필요 할 것 같았다. 혼자서 한 감독을 만나면 그녀는 어떤 결단도 못 내릴 것만 같았다.
“제가.......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 드리면 안 되나요?”
“그러세요. 오늘은 시간 여유가 있으니 기다리겠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소희는 주춤거리다가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일단 아주버니와 상의하고 싶었다. 그런데 거실에서 보모와 같이 있던 민지가 그녀에게 반갑게 달려와 안겼다. 수시로 아주버니의 움직임에 민감하던 그녀는 그가 외출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잠시 재롱을 부리는 민지를 안고 있다가 아래층으로 내려온 그녀는 찬규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몇 번 다이얼을 눌러도 전화를 받을 수 없으니 다시 전화해달라는 멘트만 흘러 나왔다.
전화를 기다릴 한 용우 감독을 생각하니 소희는 어떻게 할지 정말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 어차피 만나야 할 사람이기에 그녀는 한 감독에게 전화를 해서 약속 시간을 잡았다. 그녀가 한 감독을 만나기 위해 남은 시간은 한 시간 가량이었다.
소희는 서둘러서 세면을 하고 화장대 앞에 앉으며 깔끔한 외모의 한 감독을 떠올렸다. 여자가 거울에 자기를 비춰보는 것은 단순히 자기의 자태를 보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그 목적은 타인에게 어떻게 보여질까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소희가 승용차를 몰고 약속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하니 약속시간 오 분전이었다. 레스토랑은 시내 전망이 내려다보이는 호텔 라운지에 있었다. 그녀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한 감독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창가의 테이블 앞에 앉아 있던 한 감독이 다가서는 그녀를 발견하고 벌떡 일어났다. 소희가 다소곳이 인사를 했다.
“안녕하셨어요!”
“아! 오셨군요. 힘들게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아뇨! 제가 미리 찾아봬야 하는데........”
“하하~! 괜찮습니다.”
한 감독과 단 둘이 만나는 것이 조금은 어색한 소희는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한 감독이 의자를 뒤로 당겨 소희가 앉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소희의 코트를 받아 옆에 있는 빈 의자위에 놓아 주었다. 마주보고 앉은 한 감독이 소희에게 메뉴판을 내밀었다.
“좋아 하시는 음식이 뭐지요?”
“그냥........전 아무 것이라도 잘 먹어요.”
어떤 결론을 내려야할지 걱정스러운 소희는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메뉴판을 들여다보던 한 감독이 웨이터를 불러 음식을 주문했다. 종업원이 애피타이저로 카나페와 와인을 가져다 놓았다. 와인 병을 집어든 한 감독이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괜찮다면 한 잔 따르겠습니다.”
“네.”
소희는 짤막한 대답과 함께 유리잔을 들었다. 그녀는 술을 따르는 그의 손이 여자처럼 곱고 피부가 희다고 느꼈다. 한 감독의 시선을 의식하는 소희는 앞가슴이 깊게 패인 블라우스 깃을 끌어 올렸다. 앞가슴에 손을 얹은 그녀도 한 감독이 내미는 유리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한 감독이 와인 잔을 내밀었다.
“소희 씨를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럼 한 잔 하실까요.”
“아뇨! 제가 도리어 영광인 걸요.”
소희는 유리잔을 가볍게 부딪고 한 모금 마셨다. 와인을 마시고 잔을 내려놓은 한 감독의 시선이 그녀에게 떠나지 않았다. 그녀를 만난 후 그는 그녀에게서 풍기는 이미지와 미모를 잊을 수 없어서 시간을 마련한 것이었다. 그만큼 그는 영화에 캐스팅하는 것보다도 개인적으로 그녀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 그는 그녀가 찬규의 동생인 상욱의 아내라는 것이 아쉬우면서도 그녀에게 눈길을 땔 수가 없었다.
“사실 저는 소희 씨를 보고 감동했습니다.”
“왜요......!?”
“소희 씨처럼 제 감정을 사로잡았던 여자는 없었으니까요.”
“호호~! 그렇게 말씀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하하~! 농담으로 들어도 좋지만, 진심입니다.”
여자는 칭찬을 받는 남자에게 호기심을 갖으며 분위기에 약해지는 심리 탓인가. 소희는 뚫어지게 바라보는 한 감독의 눈빛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장을 한 단정한 스타일, 여성스럽게 매끈한 피부와 훤칠한 외모, 그리고 친근감을 느끼는 그의 눈빛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다.
실내에서는 삼인조 오케스트라의 경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문득 그녀는 같이 오지 못해 아쉬운 아주버니 찬규를 떠올렸다. 한 감독에 비해서 찬규는 정열적인 야성미와 카리스마가 넘쳤다. 마주치는 한 감독의 시선을 피한 소희는 얼떨결에 와인을 마시고 유리잔을 비웠다. 한 감독이 그녀의 유리잔에 와인을 따라 주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제 영화에 출연하시겠습니까? 각본은 보셨겠지요.”
“저는........”
마음의 결정을 못 내린 소희는 여전히 망설였다. 연기자 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희망이기도 하지만 두려움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몰론 무대 배우로 시작한 연기이지만 그녀의 현실은 예전과 달랐다. 남편과의 이별, 새로운 삶에 대한 준비를 각오가 필요했다. 웨이터가 주문한 음식을 가져왔다.
웨이터가 식탁위에 올려놓는 짧은 시간은 소희가 생각할 여유를 주었다. 랍스터와 스테이크 등이 식탁위에 올려졌다. 그리고 밸런타인 양주 한 병을 식탁위에 올려놓은 웨이터가 인사를 하고 갔다. 한 감독이 양주병을 집어 들고 마개를 열었다.
“이거 한 잔 하시겠습니까?”
“아뇨! 운전을 해야 되고, 저는 독한 거 못 마셔요. 제가 따라 드릴게요.”
한 감독은 소희가 따라 주는 양주를 단숨에 마셨다. 여자는 남자의 감정을 느낌만으로도 알 수 있다. 소희는 이따금 쳐다보는 한 감독의 눈빛에 호감이 깃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눈빛이 싫지는 않기에 그녀를 더욱 어색하게 만들었다.
어색함을 모면하기 위해 당당해지고 싶은 소희는 스테이크를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한 감독은 직접 양주를 따라 마셨다. 안주를 집어먹는 그와 시선이 마주친 소희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나이프를 내려놓은 그가 헛기침을 하고 하려던 말을 이어서 했다.
“‘그림자향기’는 오래전부터 기획했던 작품이고, 먼저 만든 영화보다 오랜 시간 기획했을 만큼 애착이 가는 작품입니다. 국제영화제에 출품할 계획입니다. 제 예감으로는 흥행도 성공하고 국제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기존의 배우들이 오랜 시간 연기를 갈고 닦아 유명 배우가 되기도 하지만 대형영화 한편으로 한 순간에 톱스타가 되는 것을 소희씨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저는 사실 외국 여배우들의 이미지를 좋아합니다. 모니카 벨루치는 청순함과 고급스러운 요염함이 좋고, 비비안 리는 가시 돋친 빨간 장미 같은 이미지라서 좋아요. 그런데 소희 씨는 두 여배우의 이미지를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만약 ’그림자향기‘가 성공하면 틀림없이 소희씨도 연기자로 대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아니 제가 반듯이 소희 씨를 톱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할 것입니다. 소희 씨도 마음에 결정을 한 것이지요?”
“.........네!”
얼떨결에 소희는 대답을 하고 말았다. 한 감독의 장황한 설명에 그녀는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아니 어차피 그녀가 과거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미래를 선택해야할 입장이었다. 그의 말을 듣는 동안 그녀는 국제 영화제에 오른 톱스타로서 무대에서 박수갈채를 받는 환상에 젖었다. 양주 몇 잔을 연거푸 마신 한 감독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그는 소희에 대한 관심을 전달하고 싶은 마음을 술의 힘을 빌려 말한 것이었다.
“다만 규모가 큰 작품이라 제작비도 문제이고, 소희 씨 남편 박 이사와 경합이 돼서.......”
“어떤 경합이요.......?”
“내가 제작하는 영화와 비슷한 맥락의 영화라서. 경쟁하려면 예기치 않은 예산을 조달해야 할 것만 같아서. 큰 문젯거리입니다.”
“아! 네.........”
소희는 고개를 끄덕거리지만 한 감독의 말을 의미 있게 받아 드리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벅찬 감정에 사로잡혀 눈빛을 반짝거렸다. 희망에 부푼 그녀의 심장은 불길처럼 타올랐다. 그녀의 짧은 대답이지만 한 감독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천천히 박수를 쳤다.
반사적으로 눈웃음을 지어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한 감독은 사춘기 시절로 돌아가 있는 감정이었다. 밝은 웃음이 깃든 그녀만의 독특한 미모가 더욱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반짝이는 까만 눈동자. 엷게 드리운 보조개, 미소가 깃든 도톰한 입술의 그녀를 바라보는 그는 마치 사춘기 시절로 되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독신으로 지내고 있는 한 감독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여자를 상대해 보았다. 그렇지만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버거운 자유 분망한 그의 성격 탓인지 한 여자에게 집착 할 수 없었다. 그는 사랑을 느끼기 전에 단지 순간적인 육체적인 쾌락 외에 여자에게서 더 깊은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런데 소희를 처음 본 순간 그의 단순한 감정이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다.
소희를 만나고 나서 한 용우의 가슴은 사춘기 소년처럼 들떠 있었다. 그녀가 비록 타인의 여자이지만 그는 자신의 감정만큼은 전달하고 싶었다. 그는 슬그머니 양복 상의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준비했던 은빛 상자를 꺼내서 뚜껑을 열고 그녀의 앞에 밀어 놓았다.
“내가 프랑스에 갔을 때 너무 아름다워 구입한 목걸이입니다. 언젠가는 이 목걸이에 어울리는 여자를 만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목걸이의 주인은 소희 씨입니다. 소희 씨를 만난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네.......!? 제가 어떻게........”
갑작스러운 선물에 소희는 어리둥절하였다. 사파이어와 다이아몬드로 제작한 그 목걸이에서는 청옥색의 광채가 흘러 나왔다. 톱스타로 키워 준다는 것만도 고마운 그녀에게 과분한 선물이었다. 감동스럽기는 하지만 그녀는 난색을 표명하며 한 감독 앞으로 조심스럽게 상자를 밀었다.
“아닙니다. 고맙기는 하지만, 제가 받을 수는 없어요. 도리어 제가 감독님께 보답해야 하는데........”
“하하~! 이건 제 마음의 표시입니다. 소희 씨가 유용하게 사용하면 저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이건 정말 받을 수 없어요.”
“아뇨! 제 성의를 무시 하지 말아 줘요.”
“지금은 감독님의 성의를 무시해도 어쩔 수 없어요.”
“하하~! 괜찮다니까요. 소희 씨가 거절하면 실망할 겁니다.”
탁자위의 상자가 소희와 한 감독 앞으로 몇 번인가 옮겨졌다. 한 감독은 기어코 옆 의자에 놓인 소희의 코트 주머니 안에 상자를 넣으면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는 제작하려는 영화에 그녀가 적합한지를 강조하여 설명했다. 생각에 잠긴 그녀는 그의 말을 건성 듣고 있었다.
소희는 이토록 찬사를 하며 귀한 목걸이를 선물로 주려는 한 감독의 저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영화에 필요해서인지, 다른 여배우에게도 이런 선물 공세를 하는지, 소희는 아리송했다. 아니면 엄연한 유부녀인 것을 알면서도 좋아한단 말인가. 여자는 많은 남자의 사랑을 독점하는 것을 즐거워하지만, 남자는 여자를 소유하고 싶은 욕구에 여자를 즐겁게 해주는 것이다.
다소 흥분한 한 감독의 목소리를 소희는 담담하게 흘려듣고 있었다. 그녀는 어쩌면 한 감독의 눈빛이 아주버니 찬규와 같은 애정이 깃들어 있다고 느꼈다. 한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는 만족감에 그녀는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톱스타 반열에 오르도록 한다는 그의 열정에 그녀는 동요되고 있었다. 그러나 문득 찬규를 떠올린 그녀는 정색을 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수시로 양주를 마시는 한 감독의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탁자위에는 반 이상 줄어든 양주병이 놓여 있었다. 한 감독이 말을 끝내기를 기다린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술을 많이 드셨네요. 오늘은 정말 고마웠습니다.”
“왜........! 가시게요?”
“집에 들어가 봐야 되겠어서요.”
“아! 박 이사가 기다리겠군요. 시간을 많이 뺐었군요.”
“아녜요. 오늘 고마움을 어떻게 보답해야할지 모르겠군요.”
“하하~! 소희 씨를 만난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소희가 일어나서 코트를 집어 들었다. 벌떡 일어나던 한 감독은 술에 취했는지 비틀거리며 의자를 짚고 지탱하였다. 겸연쩍은 한 감독이 부지런히 카운터로 다가갔다. 소희는 입구에서 그가 계산을 끝내고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그의 뜨거워지는 눈빛을 의식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람은 그들뿐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열린 문으로 들어간 소희는 바닥에 쓰러지며 외마디를 질렀다.
“핫! 왜 그러세요?”
“헉~! 미, 미안해요.”
아무래도 한 감독은 취한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로 들어오던 그가 문턱에 걸려 균형을 잃고 소희를 밀친 것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그녀는 당혹했다. 다급해진 그가 바닥에 쓰러지려는 그녀의 허리를 부둥켜안은 것이다. 그는 얼떨결에 끌어안은 그녀를 놓고 싶지 않았다.
한 감독의 가슴에 안긴 상태에서 소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정지된 시간 속에서 그녀는 숨을 쉴 수도 없었다. 코앞에 다가와 있는 그의 이글거리는 눈빛과 입술이 두려운 그녀는 후다닥 그를 밀치고 뒤로 물러섰다. 잠시였지만 짜릿한 열기에 젖었던 그녀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의 나긋한 몸을 끌어안았던 한 감독의 심장은 덜컹거렸다. 무안한 한 감독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거 원, 내가 정말 취한 모양이네요. 미안해요.”
“그러신 모앙예요. 조심하세요.”
둘만이 있는 엘리베이터 안에 그들은 서로의 숨소리를 듣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로비가 있는 일층에 도착 할 무렵 소희가 걱정스러운 말을 했다.
“운전하실 수 있겠어요?”
“대리 운전 불러야지요. 저는 로비에서 내릴게요.”
일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한 감독이 주춤거리며 소희를 빤히 쳐다봤다. 문 밖으로 한 걸음 내디딘 그가 돌아서더니 그녀에게 말했다.
“그럼, 다음에 봐요. 그리고 .......”
“네..........!?”
“정말 사랑스럽습니다.”
“.........”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소희의 시야에서 쑥스러워하는 한 감독의 자잘한 눈빛이 사라졌다. 그의 말이 농담 같기도 하지만 그녀는 왠지 짜릿함을 느꼈다. 지하 주차장에서 승용차를 몰고 나온 그녀는 집에 도착하는 동안 내내 한 감독의 가슴에 안겼던 순간 그의 눈빛을 떠 올렸다. 그러나 집에 도착한 그녀는 고개를 저어 그의 모습을 떨쳐 버렸다.
소희는 어떤 방법으로 한 감독을 만났다는 말을 찬규에게 전달해야하는지 궁리를 하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막상 작업실에 일하고 있는 그를 보고나니 입이 열리지 않았다. 한 감독에게 귀중한 선물까지 받아서인지 그녀는 왠지 아주버니에게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거실 소파에 앉아 눈치를 살피며 신문을 펼쳐 들었다.
경제란 한 귀둥이에 대영그룹의 후계자 전망에 대해 실려 있는 논설이 소희의 눈길을 끌었다. 장남이 제외되고 차남이 후계자를 이어 받을 지도 모른다는 예측이었다. 작업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소희가 힐끔 쳐다보았다. 찬규가 주방으로 나와 냉장고를 열고 냉수를 마시고 있었다. 소희는 자신이 먼저 말을 하기 전에 외출을 하고 돌아온 자신에게 그가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찬규는 담담한 표정으로 베란다로 향해가서 창문을 열었다. 작곡에 열중이었던 그는 베란다 밖을 내다보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소희는 그의 무관심한 태도가 불만스러웠다. ‘내가 사랑스러운 여자라면서........’ 신문을 드려다 보고 있지만 그녀의 마음은 온통 그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결국은 참다못해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한 감독 만나고 왔어요.”
“아! 그래!”
소희는 보고 있던 신문을 옆으로 내려놓으며 찬규가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 주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소파로 와서 앉으며 소희가 내려놓은 신문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공연히 화가 치밀었다. 사랑을 받고 싶은 여자의 집착인가, 은연중에 소희는 한 감독을 만났다는 자신의 말에 아주버니가 질투를 느끼기를 바랐다. 어쩌면 자신에 대한 애정의 척도를 알고 싶은 그녀의 심정이었다.
“저 영화에 출연하기로 했어요.”
“그래! 잘했어.”
그러나 찬규는 신문을 들여다보면서 무표정하게 한마디 할 뿐이었다. 평상시는 속마음을 표현하지 않는 찬규의 성격을 알고 있으면서도 소희는 그를 미워할 수도 없었다. 그녀가 그에 대한 애정을 느끼는 것은 야성적인 이미지와 열정적인 카리스마였다. 그녀는 그가 평상시에도 적극적으로 애정 표현을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어쩌면 그녀를 조바심으로 안타깝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눈치를 살피던 그녀가 불쑥 물었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응.......!? 방송국에.”
“방송국에 왜요?”
“혜영 이에게 교정한 드라마 테마음악 CD를 전해 주느라고.”
“혜영 씨요........!?”
꼬치꼬치 캐묻던 소희는 정 혜영을 만났다는 말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녀는 차라리 아주버니가 혜영을 만났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 솔직한 찬규의 말에 소희는 은근히 질투를 느꼈다. 그녀는 자신을 무시하는 말 같기도 했다. 아니면 질투를 유발하는 것인가, 새침해진 그녀는 거실을 나가려고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때 불쑥 찬규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는 그녀의 심정을 알고 있다는 듯이 빙긋이 미소를 흘렸다. 그는 그녀가 새침해진 이유를 이해 할 수 있었다.
“나에게 소희만큼 사랑스러운 여자는 없어.”
찬구는 잡고 있는 소희의 손목을 당겼다. 무관심했던 그의 속마음을 대변하는 눈빛을 의식하는 소희는 무한한 감격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사탕발림처럼 사랑한다던 남편의 말과 대조가 되었다. 그가 그녀를 가슴으로 당겨 끌어안았다 울음이라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는 그에게 끌려가 안겼다.
“아주버니........”
찬규는 소희를 당겨 무릎위에 앉히고 빤히 쳐다봤다. 그의 가슴에 안긴 소희는 하얗게 눈을 흘겼다. 그리고 그녀는 익숙하게 다가오는 그의 입술을 받아 드렸다. 애정을 표현하는 그의 키스에도 그녀는 만족할 수 없었다. 가벼운 키스를 하고나서도 그녀는 하얗게 눈을 흘겼다. 그가 차라리 질투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다. 그녀는 그의 감정에 충격을 주고 싶은 심정으로 말했다.
“정말 어떤 때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감정도 없어요?”
“무슨 말!? 난 이 순간들이 소중해.”
찬규는 전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표정이었다. 소희는 그렇다고 한 감독을 만나고 왔는데 질투를 느끼지 않느냐고 물어 볼 수는 없었다. 그만큼 그녀는 그의 적극적인 사랑 표현을 기대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문득 대영그룹 후계자 구도에 대한 신문기사를 떠올렸다.
“아주버니는 그룹의 후계자이면서도 위협 받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아요?”
“하하하.........!”
호탕하게 웃는 찬규의 표정은 전혀 구김이 없었다. 그는 정말 야망이 없는 것인가. 소희는 웃고 있는 그가 바보 같기도 하고 도리어 스며 있는 야망이 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안고 있는 그녀를 옆으로 아네 하였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무엇을 생각하는지 잠시 심사숙고하였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난,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는 것을 바랄 뿐이야. 누구나 자신이 속한 울타리를 아름답게 만들고 싶은 욕심은 있겠지. 하지만 난 순리를 따르고 싶어."
"..............!?"
"나 술 한잔 마시고 싶은데?”
“갑자기 술을........!?”
대답대신 찬규의 눈빛은 간절했다. 소희는 찬규의 돌변하는 표정을 이해 할 수 없었다. 그의 애정 표현을 원하던 그녀는 그의 강렬한 눈빛을 거부할 수 없었다. 아리송한 표정으로 일어난 그녀는 간단한 안주와 위스키를 준비해서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그녀에게 숨겨졌던 비밀을 말할 용기를 얻고 싶었다. 그는 위스키 두 잔을 연거푸 마시고 천천히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아버님을 인정도 없는 기업인이라고 비웃지만, 난 아버님의 자식이고 아버님을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아. 우리 아버님에게 결혼 전에 여자가 있었어.”
“아! 아버님도 청춘시절이 있었으니까 그럴 수도.......”
“아니, 그냥, 사랑을 했던 여자가 아니고, 아기까지 임신했던 여자지.”
“그런 일이.........!?”
“그녀는 아버님의 고향 여자였고, 아버님에게 강제로 당했던 것이었지.”
“음........”
소희는 찬규의 말에 신음을 흘렸다. 친정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았던 시아주버니가 더욱 짐승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그녀가 놀란 것은 그의 다음 말이었다.
“내가 그 여자의 뱃속에서 태어난 아이야.”
“뭐라고요........!? 그럴 수가.........”
소희는 시댁에 숨겨져 있던 비화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찬규의 말은 지금의 시어머니가 친모가 아니고, 남편과 이복형제라는 고백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니 그녀는 어쩐지 형제의 외모나 성격이 전혀 달랐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찬규는 자신의 말하는 의미를 믿을 수 없다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아버님은 그녀를 받아 주지 않았고, 그녀는 비관 자살을 하고 말았지. 나는 돌아가신 유모를 통해 그 말을 듣고 한때 방황하기도 했지. 친척들이나 주위사람들은 지금 어머님이 결혼 전에 나를 임신했다고 알고 있어.”
“...........”
소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찬규가 깊이 간직한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어째서 그런 얘기를 나한테 하는 것이지?’ 의아심을 갖는 그녀는 다만 그가 마음속의 비밀까지 털어 놓을 정도로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그런 고통을 간직하면서도 전혀 내색을 하지 않는 그의 심중의 깊이가 넓고 깊다는 것을 헤아릴 수 있었다.
찬규의 고백을 들은 후 소희는 더욱 그에게 애틋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감성적이면서도 카리스마가 넘치는 그는 소희를 감동시키기도 하고, 질투를 느끼게도 하며, 때로는 조바심을 갖게도 했다. 남편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그녀의 시선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흔적을 따라 다니고 있었다. 비록 은밀한 관계이지만 그녀는 그의 눈빛만 봐도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려졌다.
그런데 사랑과 희망으로 부풀어가는 소희를 처참하게 만드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찬규가 외출을 하고 민지를 보살피던 보모가 잠간 외출을 한다기에 그녀가 민지를 돌보던 날이었다. 보모가 돌아오고 집에 내려와 거실로 들어가던 그녀는 현관문이 덜컹 열리는 소리에 뒤돌아보았다. 가물에 콩 나듯이 들어오는 남편이기에 그녀는 긴장하였다. 초저녁인데도 술에 취했는지 얼굴이 벌겋게 된 남편을 무시하고 그녀는 주방으로 향했다.
냉랭한 분위기 속에 소희는 공연히 싱크대에서 그릇을 꺼내 세척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거실에서 자신의 뒷모습을 노려보고 있는 남편의 시선을 의식했다. 잠시 침묵 속에 그녀의 그릇 세척하는 소리만이 달그락 거리며 들렸다. 소파에 앉아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상욱이 주방으로 걸어갔다. 등 뒤로 다가오는 남편의 발자국 소리에 그녀는 소름이 돋았다. ----------
그들은 서로의 가슴이 유난히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아주버니의 집으로 올라간 소희가 저녁식사 준비를 했다. 찬규와 민지와 같이 식사를 하는 소희는 오늘 같은 날만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편으로 그녀는 찬규의 열정을 느끼는 눈빛이 두려웠다. 그에게서 전해오는 체취가 뜨겁게 느껴병? 그녀는 설거지를 하면서 등 뒤로 스치고 지나는 그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했다.
아주버니가 원한다면 소희는 거부할 자신이 없었다. 욱체적인 사랑! 아니 그녀의 달아오른 감정은 그의 요구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녀의 감정을 모른 채 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녀를 더욱 안타깝게 하는지 담담한 표정이었다. 설거지를 마친 소희는 공연히 다리가 휘청거렸다. 그리고 도망치듯이 자신의 집으로 내려 온 그녀는 가슴에 살아난 불씨를 감당 할 수 없었다.
어두운 거실을 한 동안 배회하던 소희는 새삼스럽게 남편의 아내라는 것을 망각하고 싶었다. 이제는 그녀 스스로 갇히고 있는 울타리를 벗어던지고 싶은 욕구였다. 다른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연기자의 길로 들어서면 그녀는 남편에 대한 저주도 벗어 던지고 싶었다. 홀로 서기가 된 후에 그녀는 아주버니라는 허물을 벗고 자유스러운 애정의 표현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현실은 아직도 소희가 박 상욱이라는 남자의 아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녀는 당장 허물을 벗어 던질 수는 없었다. 이제까지 빼앗긴 시간들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그녀는 조금이라도 되찾고 싶어 경솔하게 주사위를 던질 수 없었다. 며칠 동안 혼란 속에 빠진 그녀는 어떤 결단도 내리지 못했다.
연기를 하고 싶은 욕망은 확연한 소희는 한 감독의 전화번호를 누르다가도 전화기를 내려놓기를 반복하였다. 항상 의지가 되는 찬규는 그녀 자신의 결단을 믿는지 조언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아주버니 주위를 맴돌며 뜨거워지는 자신의 감정이 도리어 그녀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소희가 한 감독에게 다녀오고 이틀이 지난 오후였다. 연기자에 대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그녀에게 한 감독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벨 소리에 무심코 휴대폰을 들었던 그녀는 한 감독의 목소리에 당황했다.
“민 소희 씨!? 저, 한 용우입니다.”
“아.........! 네 소희예요.”
“이렇게 전화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네, 그렇지 않아도.........”
한 감독이 전화를 한 까닭을 알 수 있는 소희는 당혹감에 젖었다. 그렇다고 당장 대답을 할 수 없어 그녀는 망설였다. 그녀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으니 한 감독이 먼저 물었다.
“어떻게, 마음에 결정은 내리셨는지.........?”
“글쎄요, 그게........”
“음.......!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지금 만나 뵐 수 있을 가요?”
소희가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생각할 틈도 없이 한 감독이 말했다. 그녀는 한 감독을 만나더라도 아주버니의 도움이 필요 할 것 같았다. 혼자서 한 감독을 만나면 그녀는 어떤 결단도 못 내릴 것만 같았다.
“제가....... 조금 있다가 다시 전화 드리면 안 되나요?”
“그러세요. 오늘은 시간 여유가 있으니 기다리겠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소희는 주춤거리다가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녀는 일단 아주버니와 상의하고 싶었다. 그런데 거실에서 보모와 같이 있던 민지가 그녀에게 반갑게 달려와 안겼다. 수시로 아주버니의 움직임에 민감하던 그녀는 그가 외출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 잠시 재롱을 부리는 민지를 안고 있다가 아래층으로 내려온 그녀는 찬규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몇 번 다이얼을 눌러도 전화를 받을 수 없으니 다시 전화해달라는 멘트만 흘러 나왔다.
전화를 기다릴 한 용우 감독을 생각하니 소희는 어떻게 할지 정말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 어차피 만나야 할 사람이기에 그녀는 한 감독에게 전화를 해서 약속 시간을 잡았다. 그녀가 한 감독을 만나기 위해 남은 시간은 한 시간 가량이었다.
소희는 서둘러서 세면을 하고 화장대 앞에 앉으며 깔끔한 외모의 한 감독을 떠올렸다. 여자가 거울에 자기를 비춰보는 것은 단순히 자기의 자태를 보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그 목적은 타인에게 어떻게 보여질까하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소희가 승용차를 몰고 약속장소인 레스토랑에 도착하니 약속시간 오 분전이었다. 레스토랑은 시내 전망이 내려다보이는 호텔 라운지에 있었다. 그녀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한 감독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창가의 테이블 앞에 앉아 있던 한 감독이 다가서는 그녀를 발견하고 벌떡 일어났다. 소희가 다소곳이 인사를 했다.
“안녕하셨어요!”
“아! 오셨군요. 힘들게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네요.”
“아뇨! 제가 미리 찾아봬야 하는데........”
“하하~! 괜찮습니다.”
한 감독과 단 둘이 만나는 것이 조금은 어색한 소희는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한 감독이 의자를 뒤로 당겨 소희가 앉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소희의 코트를 받아 옆에 있는 빈 의자위에 놓아 주었다. 마주보고 앉은 한 감독이 소희에게 메뉴판을 내밀었다.
“좋아 하시는 음식이 뭐지요?”
“그냥........전 아무 것이라도 잘 먹어요.”
어떤 결론을 내려야할지 걱정스러운 소희는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메뉴판을 들여다보던 한 감독이 웨이터를 불러 음식을 주문했다. 종업원이 애피타이저로 카나페와 와인을 가져다 놓았다. 와인 병을 집어든 한 감독이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괜찮다면 한 잔 따르겠습니다.”
“네.”
소희는 짤막한 대답과 함께 유리잔을 들었다. 그녀는 술을 따르는 그의 손이 여자처럼 곱고 피부가 희다고 느꼈다. 한 감독의 시선을 의식하는 소희는 앞가슴이 깊게 패인 블라우스 깃을 끌어 올렸다. 앞가슴에 손을 얹은 그녀도 한 감독이 내미는 유리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한 감독이 와인 잔을 내밀었다.
“소희 씨를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럼 한 잔 하실까요.”
“아뇨! 제가 도리어 영광인 걸요.”
소희는 유리잔을 가볍게 부딪고 한 모금 마셨다. 와인을 마시고 잔을 내려놓은 한 감독의 시선이 그녀에게 떠나지 않았다. 그녀를 만난 후 그는 그녀에게서 풍기는 이미지와 미모를 잊을 수 없어서 시간을 마련한 것이었다. 그만큼 그는 영화에 캐스팅하는 것보다도 개인적으로 그녀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 그는 그녀가 찬규의 동생인 상욱의 아내라는 것이 아쉬우면서도 그녀에게 눈길을 땔 수가 없었다.
“사실 저는 소희 씨를 보고 감동했습니다.”
“왜요......!?”
“소희 씨처럼 제 감정을 사로잡았던 여자는 없었으니까요.”
“호호~! 그렇게 말씀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하하~! 농담으로 들어도 좋지만, 진심입니다.”
여자는 칭찬을 받는 남자에게 호기심을 갖으며 분위기에 약해지는 심리 탓인가. 소희는 뚫어지게 바라보는 한 감독의 눈빛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정장을 한 단정한 스타일, 여성스럽게 매끈한 피부와 훤칠한 외모, 그리고 친근감을 느끼는 그의 눈빛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다.
실내에서는 삼인조 오케스트라의 경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문득 그녀는 같이 오지 못해 아쉬운 아주버니 찬규를 떠올렸다. 한 감독에 비해서 찬규는 정열적인 야성미와 카리스마가 넘쳤다. 마주치는 한 감독의 시선을 피한 소희는 얼떨결에 와인을 마시고 유리잔을 비웠다. 한 감독이 그녀의 유리잔에 와인을 따라 주며 물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제 영화에 출연하시겠습니까? 각본은 보셨겠지요.”
“저는........”
마음의 결정을 못 내린 소희는 여전히 망설였다. 연기자 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은 그녀에게 희망이기도 하지만 두려움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몰론 무대 배우로 시작한 연기이지만 그녀의 현실은 예전과 달랐다. 남편과의 이별, 새로운 삶에 대한 준비를 각오가 필요했다. 웨이터가 주문한 음식을 가져왔다.
웨이터가 식탁위에 올려놓는 짧은 시간은 소희가 생각할 여유를 주었다. 랍스터와 스테이크 등이 식탁위에 올려졌다. 그리고 밸런타인 양주 한 병을 식탁위에 올려놓은 웨이터가 인사를 하고 갔다. 한 감독이 양주병을 집어 들고 마개를 열었다.
“이거 한 잔 하시겠습니까?”
“아뇨! 운전을 해야 되고, 저는 독한 거 못 마셔요. 제가 따라 드릴게요.”
한 감독은 소희가 따라 주는 양주를 단숨에 마셨다. 여자는 남자의 감정을 느낌만으로도 알 수 있다. 소희는 이따금 쳐다보는 한 감독의 눈빛에 호감이 깃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눈빛이 싫지는 않기에 그녀를 더욱 어색하게 만들었다.
어색함을 모면하기 위해 당당해지고 싶은 소희는 스테이크를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한 감독은 직접 양주를 따라 마셨다. 안주를 집어먹는 그와 시선이 마주친 소희가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나이프를 내려놓은 그가 헛기침을 하고 하려던 말을 이어서 했다.
“‘그림자향기’는 오래전부터 기획했던 작품이고, 먼저 만든 영화보다 오랜 시간 기획했을 만큼 애착이 가는 작품입니다. 국제영화제에 출품할 계획입니다. 제 예감으로는 흥행도 성공하고 국제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기존의 배우들이 오랜 시간 연기를 갈고 닦아 유명 배우가 되기도 하지만 대형영화 한편으로 한 순간에 톱스타가 되는 것을 소희씨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저는 사실 외국 여배우들의 이미지를 좋아합니다. 모니카 벨루치는 청순함과 고급스러운 요염함이 좋고, 비비안 리는 가시 돋친 빨간 장미 같은 이미지라서 좋아요. 그런데 소희 씨는 두 여배우의 이미지를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만약 ’그림자향기‘가 성공하면 틀림없이 소희씨도 연기자로 대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아니 제가 반듯이 소희 씨를 톱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할 것입니다. 소희 씨도 마음에 결정을 한 것이지요?”
“.........네!”
얼떨결에 소희는 대답을 하고 말았다. 한 감독의 장황한 설명에 그녀는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아니 어차피 그녀가 과거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미래를 선택해야할 입장이었다. 그의 말을 듣는 동안 그녀는 국제 영화제에 오른 톱스타로서 무대에서 박수갈채를 받는 환상에 젖었다. 양주 몇 잔을 연거푸 마신 한 감독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그는 소희에 대한 관심을 전달하고 싶은 마음을 술의 힘을 빌려 말한 것이었다.
“다만 규모가 큰 작품이라 제작비도 문제이고, 소희 씨 남편 박 이사와 경합이 돼서.......”
“어떤 경합이요.......?”
“내가 제작하는 영화와 비슷한 맥락의 영화라서. 경쟁하려면 예기치 않은 예산을 조달해야 할 것만 같아서. 큰 문젯거리입니다.”
“아! 네.........”
소희는 고개를 끄덕거리지만 한 감독의 말을 의미 있게 받아 드리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벅찬 감정에 사로잡혀 눈빛을 반짝거렸다. 희망에 부푼 그녀의 심장은 불길처럼 타올랐다. 그녀의 짧은 대답이지만 한 감독은 흐뭇한 미소를 짓고 천천히 박수를 쳤다.
반사적으로 눈웃음을 지어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한 감독은 사춘기 시절로 돌아가 있는 감정이었다. 밝은 웃음이 깃든 그녀만의 독특한 미모가 더욱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반짝이는 까만 눈동자. 엷게 드리운 보조개, 미소가 깃든 도톰한 입술의 그녀를 바라보는 그는 마치 사춘기 시절로 되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독신으로 지내고 있는 한 감독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많은 여자를 상대해 보았다. 그렇지만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버거운 자유 분망한 그의 성격 탓인지 한 여자에게 집착 할 수 없었다. 그는 사랑을 느끼기 전에 단지 순간적인 육체적인 쾌락 외에 여자에게서 더 깊은 관심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런데 소희를 처음 본 순간 그의 단순한 감정이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다.
소희를 만나고 나서 한 용우의 가슴은 사춘기 소년처럼 들떠 있었다. 그녀가 비록 타인의 여자이지만 그는 자신의 감정만큼은 전달하고 싶었다. 그는 슬그머니 양복 상의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준비했던 은빛 상자를 꺼내서 뚜껑을 열고 그녀의 앞에 밀어 놓았다.
“내가 프랑스에 갔을 때 너무 아름다워 구입한 목걸이입니다. 언젠가는 이 목걸이에 어울리는 여자를 만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목걸이의 주인은 소희 씨입니다. 소희 씨를 만난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네.......!? 제가 어떻게........”
갑작스러운 선물에 소희는 어리둥절하였다. 사파이어와 다이아몬드로 제작한 그 목걸이에서는 청옥색의 광채가 흘러 나왔다. 톱스타로 키워 준다는 것만도 고마운 그녀에게 과분한 선물이었다. 감동스럽기는 하지만 그녀는 난색을 표명하며 한 감독 앞으로 조심스럽게 상자를 밀었다.
“아닙니다. 고맙기는 하지만, 제가 받을 수는 없어요. 도리어 제가 감독님께 보답해야 하는데........”
“하하~! 이건 제 마음의 표시입니다. 소희 씨가 유용하게 사용하면 저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이건 정말 받을 수 없어요.”
“아뇨! 제 성의를 무시 하지 말아 줘요.”
“지금은 감독님의 성의를 무시해도 어쩔 수 없어요.”
“하하~! 괜찮다니까요. 소희 씨가 거절하면 실망할 겁니다.”
탁자위의 상자가 소희와 한 감독 앞으로 몇 번인가 옮겨졌다. 한 감독은 기어코 옆 의자에 놓인 소희의 코트 주머니 안에 상자를 넣으면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는 제작하려는 영화에 그녀가 적합한지를 강조하여 설명했다. 생각에 잠긴 그녀는 그의 말을 건성 듣고 있었다.
소희는 이토록 찬사를 하며 귀한 목걸이를 선물로 주려는 한 감독의 저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영화에 필요해서인지, 다른 여배우에게도 이런 선물 공세를 하는지, 소희는 아리송했다. 아니면 엄연한 유부녀인 것을 알면서도 좋아한단 말인가. 여자는 많은 남자의 사랑을 독점하는 것을 즐거워하지만, 남자는 여자를 소유하고 싶은 욕구에 여자를 즐겁게 해주는 것이다.
다소 흥분한 한 감독의 목소리를 소희는 담담하게 흘려듣고 있었다. 그녀는 어쩌면 한 감독의 눈빛이 아주버니 찬규와 같은 애정이 깃들어 있다고 느꼈다. 한 남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는 만족감에 그녀는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톱스타 반열에 오르도록 한다는 그의 열정에 그녀는 동요되고 있었다. 그러나 문득 찬규를 떠올린 그녀는 정색을 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수시로 양주를 마시는 한 감독의 말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탁자위에는 반 이상 줄어든 양주병이 놓여 있었다. 한 감독이 말을 끝내기를 기다린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술을 많이 드셨네요. 오늘은 정말 고마웠습니다.”
“왜........! 가시게요?”
“집에 들어가 봐야 되겠어서요.”
“아! 박 이사가 기다리겠군요. 시간을 많이 뺐었군요.”
“아녜요. 오늘 고마움을 어떻게 보답해야할지 모르겠군요.”
“하하~! 소희 씨를 만난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소희가 일어나서 코트를 집어 들었다. 벌떡 일어나던 한 감독은 술에 취했는지 비틀거리며 의자를 짚고 지탱하였다. 겸연쩍은 한 감독이 부지런히 카운터로 다가갔다. 소희는 입구에서 그가 계산을 끝내고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는 그의 뜨거워지는 눈빛을 의식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사람은 그들뿐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열린 문으로 들어간 소희는 바닥에 쓰러지며 외마디를 질렀다.
“핫! 왜 그러세요?”
“헉~! 미, 미안해요.”
아무래도 한 감독은 취한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로 들어오던 그가 문턱에 걸려 균형을 잃고 소희를 밀친 것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그녀는 당혹했다. 다급해진 그가 바닥에 쓰러지려는 그녀의 허리를 부둥켜안은 것이다. 그는 얼떨결에 끌어안은 그녀를 놓고 싶지 않았다.
한 감독의 가슴에 안긴 상태에서 소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정지된 시간 속에서 그녀는 숨을 쉴 수도 없었다. 코앞에 다가와 있는 그의 이글거리는 눈빛과 입술이 두려운 그녀는 후다닥 그를 밀치고 뒤로 물러섰다. 잠시였지만 짜릿한 열기에 젖었던 그녀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녀의 나긋한 몸을 끌어안았던 한 감독의 심장은 덜컹거렸다. 무안한 한 감독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이거 원, 내가 정말 취한 모양이네요. 미안해요.”
“그러신 모앙예요. 조심하세요.”
둘만이 있는 엘리베이터 안에 그들은 서로의 숨소리를 듣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로비가 있는 일층에 도착 할 무렵 소희가 걱정스러운 말을 했다.
“운전하실 수 있겠어요?”
“대리 운전 불러야지요. 저는 로비에서 내릴게요.”
일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한 감독이 주춤거리며 소희를 빤히 쳐다봤다. 문 밖으로 한 걸음 내디딘 그가 돌아서더니 그녀에게 말했다.
“그럼, 다음에 봐요. 그리고 .......”
“네..........!?”
“정말 사랑스럽습니다.”
“.........”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소희의 시야에서 쑥스러워하는 한 감독의 자잘한 눈빛이 사라졌다. 그의 말이 농담 같기도 하지만 그녀는 왠지 짜릿함을 느꼈다. 지하 주차장에서 승용차를 몰고 나온 그녀는 집에 도착하는 동안 내내 한 감독의 가슴에 안겼던 순간 그의 눈빛을 떠 올렸다. 그러나 집에 도착한 그녀는 고개를 저어 그의 모습을 떨쳐 버렸다.
소희는 어떤 방법으로 한 감독을 만났다는 말을 찬규에게 전달해야하는지 궁리를 하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막상 작업실에 일하고 있는 그를 보고나니 입이 열리지 않았다. 한 감독에게 귀중한 선물까지 받아서인지 그녀는 왠지 아주버니에게 죄를 짓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거실 소파에 앉아 눈치를 살피며 신문을 펼쳐 들었다.
경제란 한 귀둥이에 대영그룹의 후계자 전망에 대해 실려 있는 논설이 소희의 눈길을 끌었다. 장남이 제외되고 차남이 후계자를 이어 받을 지도 모른다는 예측이었다. 작업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소희가 힐끔 쳐다보았다. 찬규가 주방으로 나와 냉장고를 열고 냉수를 마시고 있었다. 소희는 자신이 먼저 말을 하기 전에 외출을 하고 돌아온 자신에게 그가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찬규는 담담한 표정으로 베란다로 향해가서 창문을 열었다. 작곡에 열중이었던 그는 베란다 밖을 내다보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소희는 그의 무관심한 태도가 불만스러웠다. ‘내가 사랑스러운 여자라면서........’ 신문을 드려다 보고 있지만 그녀의 마음은 온통 그의 움직임을 살피고 있었다. 결국은 참다못해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 한 감독 만나고 왔어요.”
“아! 그래!”
소희는 보고 있던 신문을 옆으로 내려놓으며 찬규가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 주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소파로 와서 앉으며 소희가 내려놓은 신문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공연히 화가 치밀었다. 사랑을 받고 싶은 여자의 집착인가, 은연중에 소희는 한 감독을 만났다는 자신의 말에 아주버니가 질투를 느끼기를 바랐다. 어쩌면 자신에 대한 애정의 척도를 알고 싶은 그녀의 심정이었다.
“저 영화에 출연하기로 했어요.”
“그래! 잘했어.”
그러나 찬규는 신문을 들여다보면서 무표정하게 한마디 할 뿐이었다. 평상시는 속마음을 표현하지 않는 찬규의 성격을 알고 있으면서도 소희는 그를 미워할 수도 없었다. 그녀가 그에 대한 애정을 느끼는 것은 야성적인 이미지와 열정적인 카리스마였다. 그녀는 그가 평상시에도 적극적으로 애정 표현을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어쩌면 그녀를 조바심으로 안타깝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눈치를 살피던 그녀가 불쑥 물었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응.......!? 방송국에.”
“방송국에 왜요?”
“혜영 이에게 교정한 드라마 테마음악 CD를 전해 주느라고.”
“혜영 씨요........!?”
꼬치꼬치 캐묻던 소희는 정 혜영을 만났다는 말에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녀는 차라리 아주버니가 혜영을 만났다는 말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너무 솔직한 찬규의 말에 소희는 은근히 질투를 느꼈다. 그녀는 자신을 무시하는 말 같기도 했다. 아니면 질투를 유발하는 것인가, 새침해진 그녀는 거실을 나가려고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때 불쑥 찬규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는 그녀의 심정을 알고 있다는 듯이 빙긋이 미소를 흘렸다. 그는 그녀가 새침해진 이유를 이해 할 수 있었다.
“나에게 소희만큼 사랑스러운 여자는 없어.”
찬구는 잡고 있는 소희의 손목을 당겼다. 무관심했던 그의 속마음을 대변하는 눈빛을 의식하는 소희는 무한한 감격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사탕발림처럼 사랑한다던 남편의 말과 대조가 되었다. 그가 그녀를 가슴으로 당겨 끌어안았다 울음이라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는 그에게 끌려가 안겼다.
“아주버니........”
찬규는 소희를 당겨 무릎위에 앉히고 빤히 쳐다봤다. 그의 가슴에 안긴 소희는 하얗게 눈을 흘겼다. 그리고 그녀는 익숙하게 다가오는 그의 입술을 받아 드렸다. 애정을 표현하는 그의 키스에도 그녀는 만족할 수 없었다. 가벼운 키스를 하고나서도 그녀는 하얗게 눈을 흘겼다. 그가 차라리 질투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다. 그녀는 그의 감정에 충격을 주고 싶은 심정으로 말했다.
“정말 어떤 때는 이해할 수가 없어요. 감정도 없어요?”
“무슨 말!? 난 이 순간들이 소중해.”
찬규는 전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표정이었다. 소희는 그렇다고 한 감독을 만나고 왔는데 질투를 느끼지 않느냐고 물어 볼 수는 없었다. 그만큼 그녀는 그의 적극적인 사랑 표현을 기대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문득 대영그룹 후계자 구도에 대한 신문기사를 떠올렸다.
“아주버니는 그룹의 후계자이면서도 위협 받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아요?”
“하하하.........!”
호탕하게 웃는 찬규의 표정은 전혀 구김이 없었다. 그는 정말 야망이 없는 것인가. 소희는 웃고 있는 그가 바보 같기도 하고 도리어 스며 있는 야망이 있는 것만 같았다. 그는 안고 있는 그녀를 옆으로 아네 하였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무엇을 생각하는지 잠시 심사숙고하였다. 고개를 끄덕인 그가 그녀의 등을 토닥거렸다.
“난,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는 것을 바랄 뿐이야. 누구나 자신이 속한 울타리를 아름답게 만들고 싶은 욕심은 있겠지. 하지만 난 순리를 따르고 싶어."
"..............!?"
"나 술 한잔 마시고 싶은데?”
“갑자기 술을........!?”
대답대신 찬규의 눈빛은 간절했다. 소희는 찬규의 돌변하는 표정을 이해 할 수 없었다. 그의 애정 표현을 원하던 그녀는 그의 강렬한 눈빛을 거부할 수 없었다. 아리송한 표정으로 일어난 그녀는 간단한 안주와 위스키를 준비해서 탁자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그녀에게 숨겨졌던 비밀을 말할 용기를 얻고 싶었다. 그는 위스키 두 잔을 연거푸 마시고 천천히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아버님을 인정도 없는 기업인이라고 비웃지만, 난 아버님의 자식이고 아버님을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아. 우리 아버님에게 결혼 전에 여자가 있었어.”
“아! 아버님도 청춘시절이 있었으니까 그럴 수도.......”
“아니, 그냥, 사랑을 했던 여자가 아니고, 아기까지 임신했던 여자지.”
“그런 일이.........!?”
“그녀는 아버님의 고향 여자였고, 아버님에게 강제로 당했던 것이었지.”
“음........”
소희는 찬규의 말에 신음을 흘렸다. 친정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았던 시아주버니가 더욱 짐승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그녀가 놀란 것은 그의 다음 말이었다.
“내가 그 여자의 뱃속에서 태어난 아이야.”
“뭐라고요........!? 그럴 수가.........”
소희는 시댁에 숨겨져 있던 비화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찬규의 말은 지금의 시어머니가 친모가 아니고, 남편과 이복형제라는 고백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나니 그녀는 어쩐지 형제의 외모나 성격이 전혀 달랐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찬규는 자신의 말하는 의미를 믿을 수 없다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아버님은 그녀를 받아 주지 않았고, 그녀는 비관 자살을 하고 말았지. 나는 돌아가신 유모를 통해 그 말을 듣고 한때 방황하기도 했지. 친척들이나 주위사람들은 지금 어머님이 결혼 전에 나를 임신했다고 알고 있어.”
“...........”
소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찬규가 깊이 간직한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어째서 그런 얘기를 나한테 하는 것이지?’ 의아심을 갖는 그녀는 다만 그가 마음속의 비밀까지 털어 놓을 정도로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그런 고통을 간직하면서도 전혀 내색을 하지 않는 그의 심중의 깊이가 넓고 깊다는 것을 헤아릴 수 있었다.
찬규의 고백을 들은 후 소희는 더욱 그에게 애틋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감성적이면서도 카리스마가 넘치는 그는 소희를 감동시키기도 하고, 질투를 느끼게도 하며, 때로는 조바심을 갖게도 했다. 남편의 울타리에서 벗어난 그녀의 시선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흔적을 따라 다니고 있었다. 비록 은밀한 관계이지만 그녀는 그의 눈빛만 봐도 행복이라는 단어를 떠올려졌다.
그런데 사랑과 희망으로 부풀어가는 소희를 처참하게 만드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찬규가 외출을 하고 민지를 보살피던 보모가 잠간 외출을 한다기에 그녀가 민지를 돌보던 날이었다. 보모가 돌아오고 집에 내려와 거실로 들어가던 그녀는 현관문이 덜컹 열리는 소리에 뒤돌아보았다. 가물에 콩 나듯이 들어오는 남편이기에 그녀는 긴장하였다. 초저녁인데도 술에 취했는지 얼굴이 벌겋게 된 남편을 무시하고 그녀는 주방으로 향했다.
냉랭한 분위기 속에 소희는 공연히 싱크대에서 그릇을 꺼내 세척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거실에서 자신의 뒷모습을 노려보고 있는 남편의 시선을 의식했다. 잠시 침묵 속에 그녀의 그릇 세척하는 소리만이 달그락 거리며 들렸다. 소파에 앉아 아내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상욱이 주방으로 걸어갔다. 등 뒤로 다가오는 남편의 발자국 소리에 그녀는 소름이 돋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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