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대전
Written by 검은나비
===2. 천신 샤이렌===
하아... 언제나 끝나려나. 얼굴에 경련 일겠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옆에서 열성을 다해 조약을 맺는 마리엘을 바라보았다.
리엘아, 적당히 좀 하렴. 응? 나 힘빠진다. 오오! 끝났나?
마리엘은 대화를 마친 듯 몸을 돌리더니 나를 향해 자세를 취한다. 그런 거 안해도 되니까 얼른얼른 하렴. 나 힘들다야.
"...어느 정도 조율이 끝난 듯합니다. 천신이시여."
"대화는 이걸로 끝입니다. 마신이시여."
탁자 건너편에서는 넨 언니에게 말하는 마왕의 목소리도 같이 들린다. 저 마왕 이름이... 크리시안 이랬던가.
뭐 그거야 중요한 게 아니고, 얼른 내보내야 언니랑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
나는 기쁜 마음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위엄 좀 깔고... 후후. 이 목소리 연습하느라 고생 좀 했다구. 맑고 고운 여신의 목소리~ 이거 은근히 힘들다. 신력을 실어야 이런 소리가 나온단 말이지.
"수고했다. 모두 나가 보도록."
"수고했군. 언제나처럼 모두 나가 있어라."
"예. 여신이시여."*12
"예. 마신이시여."*12
나간다, 나간다, 나간다... 나갔다!
...나갔지? 다 나갔지? 다 나갔구나!
저번에 한번 다 나간 줄 알았다가 갑자기 한명이 들어와서 혼비백산했던 적이 있다. 그래도 우리 둘다 말을 꺼내거나 자세가 흐트러지기 전이라 다행이었지,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죽여야 한단 말이야, 들키면.
근데 아무래도 내 손으로 우리 애들을 죽이긴 좀 뭐하니까 말이지... 쯧. 우리 애들이 얼마나 귀여운데. 전쟁하는 것도 미안한데 내 손에 죽일 수는 없잖아? 그러니 미리미리 조심하는 게 좋지.
잠시 침묵하다가 슬며시 손을 들어올린다. 흐음, 내가 침묵을 거는 쪽이지... 맡은 임무(?)를 생각하며 손에 막대한 양의 신력을 불어넣는다. 언니도 준비된 거 같고. 그럼 하나, 둘, 셋!
"절대 침묵의 봉인!"
"차원의 차단!"
구구구궁―
새하얀 빛과 칠흑의 마력이 장내를 거세게 휩쓴다. 크으, 이거 꽤 멋진데 말야. 우리 천계는 검은 빛 나는 마법은 거의 없는데 검은 빛과 순백색이 잘 섞이면 꽤 예쁘거든. 왜 회색이 아닌가 싶긴 하지만... 뭐 예쁘면 됐지.
잠시 완벽히 주문이 걸린 것을 확인하고는 언니를 쳐다본다.
.....자, 이제 쉬자!
풀석
"푸하~"
"후에에~"
후에에~ 편하다아~ 이 탁자, 애들이 수수해서 왜 이렇게 수수하냐고 물었지만, 사실 이게 나름 뛰어난 기능이 있으니 바꿀 수가 없지. 저번에 열심히 만든 건데 쓸 만해서 두고두고 우려먹는데, 앞으로도 쭉~ 써야겠다.
막 엎드려도 하나도 안 불편해! 애들은 안 만져봐서 모르지만 이거, 엄청 푹신해. 솜이불보다 더 푹신하다니까~ 내가 만들었지만 잘했다. 헤헤. 언니도 마음에 들어 하려나? 좋아하겠지?
오랜만에 언니랑 맘 놓고 수다 떨 수 있다니, 너무 좋다.
"후우~ 진짜 자세 잡고 있기도 힘들다. 걔들은 뭔 말이 그리 길다니?"
"그러게 말이야. 좀 적당히 하고 끝낼 것이지... 그깟 조약 뭐 중요하다고."
맞아 맞아. 조약 맺어 봤자 그거 몇 십 년이나 가나? 전쟁 다시 터지면 휴지조각이고, 또 조약 맺고, 또 휴지조각이고... 그게 몇 번짼데 그렇게 열성적으로 조약을 맺는 건지.
그 몇 십 년이라도 잘 챙기자는 의미인가? 흐응. 뭐 솔직히 정치니 뭐니는 밑에 애들 사정이고... 나는 언니랑 나눌 수다 시간이 줄어드는 것만으로도 진짜 짜증나는데. 우우, 걔들은 대강 하래도 눈치가 없어요, 눈치가. 칫.
이 공간 유지 가능 시간이 하도 짧으니 진짜 슬프네... 언니랑 있을 수 있는 시간도 한 시간 좀 넘을 뿐이고. 매일 전쟁을 일으킬 수도 없고...
아니, 아니지. 지금은 이 시간을 즐기는 거야.
"렌, 잘 지냈니? 벌써 이게 몇 십 년 만인지."
"그러게 말이야. 언니도 잘 지냈어? 하기사 넨 언니가 무슨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잘 지냈냐고? 잘 못 지냈어요. 언니. 언니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언니를 또 보고 싶어서 못 지냈어요.
아아, 대체 왜 언니는 마신이고 난 천신인 건지. 언니 옆에만 있을 수 있다면 이따위 천신의 직위 따위 버려버려도 좋으련만.... 언니는 내 생각이 나지도 않나요? 언제나 쳐들어가고 만나려 드는 건 나뿐인걸.
살며시 고개를 드는 슬픈 생각을 애써 누르며 밝게 웃어 본다.
그리고 힘든 일, 괴로운 일을 일일이 털어낸다. 언니. 내가 이렇게 편할 수 있는 건 언니의 앞에서 뿐이야. 나는 "신"인걸.
"후엥~ 진짜 신 노릇하기도 힘들어. 뭐 이거야 다 위엄, 점잔, 조심... 무슨 신이 이렇게 어려워? 조금만 흐트려져도 애들이 얼마나 뭐라고 하는지. 밑에 애들은 물론이고 특히 마계 쪽 앞에서는 조심하라고 아주 신신 당부를 하더만."
"신이니까 그렇지 뭐. 이렇게 된 거 열심히 해야지 뭐 있겠니."
"우이잉... 그래도 힘든걸. 나도 놀러가고 싶단 말이야. 밑에 애들은 인간계에도 막 놀러가고 그러던데."
"말도 안 돼는 소리하지 마. 신이 강림하는 게 보통 일인 줄 아니?"
"우씨이~"
나도 알아. 하지만, 나는 마계로 갈수 없지만 내가 인간계로 간다면 언니는 그곳으로 올 수 있잖아.
내가 강림한다면 언니도 강림할 수 있고, 먼저 강림한 내가 안 좋은 소리는 듣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언니는 나를 따라오지 않겠지? 언니가 따라온다면 나는 어떤 위험이 있더라도 강림할 텐데.
언니, 나는 언니와 함께 있고 싶어. 사실 우리 둘 다 강림해 만날 수만 있다면, 인간계의 존재들 따위 무슨 생각을 하던 어떤 짓을 하던 관심도 없어. 언니...
살짝 서운함을 담아 볼을 부풀린다.
윽, 언니! 갑자기 왜 찔러! 스킨십은 좋지만, 손바닥이면 모를까 손가락은 싫다구.
"씨이! 하지 마!"
"쿡쿡. 이렇게 귀여운걸? 이렇게 콕 찔러주고 싶은 볼을 두고 어떻게 안 그러겠니."
뭐, 언니가 좋다면야 수백 번이라도 찔려도 기쁘기만 할 테지만... 그래도 조금 서운하긴 하다.
이왕이면 좀 넓게 만져주면 좋겠는데.
"칫칫. 언니 너무해."
"후훗."
헤에... 언니가 머리 쓰다듬어 준다.
이 손길도 너무 좋아. 이대로 잠들어 버릴 것만 같은 포근한 기분. 아아, 이런 손길을 언제나 누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마음껏 즐겨야지. 이런 행복, 쉽게 느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아, 그러고 보니 언니는 요즘 뭐하고 지내려나?
"아! 언니, 그러고 보니 요즘은 뭐하고 지내?"
"나? 글쎄... 저번이랑 그렇게 다른 건 없는데. 뭐 마왕 애들이랑 놀거나, 마계 여기저기 둘러보거나... 요리 연구하거나?"
"요리? 그거 아직도 해? 할 게 아직 남았어?"
"그럼. 요리의 세계는 끝이 없단다."
언니의 요리... 으응,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먹어본 적은 한 번도 없네.
...옛날에는 언니가 요리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마신이 되고 나서 시작한 거라지만, 이렇게 짧게 간간히 만나는 정도로는 도저히 먹을 기회가 생기지 않는다.
언니의 요리, 정말 먹고 싶은데... 마왕들은 자주 먹겠지? 진짜 부럽다. 나도 언니의 요리 먹고 싶어~
다음에 만날 때 가져와 달라고 부탁해 볼까. 바로 하진 못하겠지만 싸오는 정도는 가능할지도... 으음, 침나온다.
"흐응... 언제 나도 요리한번 해 주라. 다음에 만날 때는 좀 가지고 와. 아, 그러고 보면 마왕 애들 꽤 바뀌었던데."
"응. 저들끼리 싸우다가 좀 죽은 애들도 있고, 이번 전쟁에서도 넷 죽었거든."
"으응... 안 슬퍼?"
조심스럽게 물어보지만, 언니는 살짝 작은 미소를 띄우며 웃는다.
자신의 자식들이 죽는 게 좋은 기분은 아니겠지. 나도 마찬가지지만... 언니는 당하는 입장이니까 더하겠지.
"후후. 물론 기쁜 건 아니지만... 널 원망하거나 하진 않아. 이렇게 예쁜 동생을 어떻게 원망하겠니."
"우웅... 그래도 조금 미안한걸. 앞으로도 계속 할 테니까."
".....어떻게 이 방법밖에 없다는 게 조금 안타깝지만, 그러면 또 별수 없지. 마왕 애들이 아무리 아끼는 애들이라고 해도 너만 하겠니."
"헤헤..."
나를 생각해주는 언니가 기쁘기도 하지만, 또 언니에게 미안해진다.
자주 일어나는 천마대전, 언니를 보기 위해서 일으키는 거라고는 하지만 죽어나가는 천사들과 마족들에게 미안한 건 사실이다.
내 욕심을 위해서 죄 없는 애들을 희생시키는 거니까. 내 애들이 죽는 것도 슬프고, 마족들이 죽는 것도 언니에게 미안하지만... 어디까지나 미안한 것뿐이다.
안 할 수는 없어. 내가 마계에 가지 못하고, 언니가 천계에 오지 못하는 이상 언니를 만날 방법은 이거뿐인걸. 애들은 뭐 우리가 싸우는 줄 알지도 모르지만... 수십 년에 한번, 회담을 핑계로 만나는 한두 시간의 짧은 만남. 사실상 내 삶을 지탱하는 전부나 마찬가지다.
....대체 원거리도 정도껏이지, 천신과 마신이라니... 아버지도 정말 너무하시지.
......그때, 잘 말했어야 되는 건데...
아냐. 지금 후회해 봤자 돌이킬 건 없지. 이나마 작은 행복이라도 즐기는 거야.
애써 얼굴이 보이지 않게 언니의 품에 얼굴을 묻는다. 지금의 내 얼굴은 절대로 좋은 얼굴은 되지 못할 테니까. 언니가 걱정하는 모습 따위 보이고 싶지 않다. 언니는, 나를 아끼니까. 그래, 동생으로서...
...왠지 조금, 눈물이 날 것도 같다.
"그런데 네 대천사들은 전부 다 여자들이던데... 아직도 남자는 생각이 없니?"
"우우, 남자 따위 필요 없어. 여자가 더 좋다구. 그 부드럽고 따듯한 게 얼마나 좋은데."
"흐응... 너도 남자를 경험해 보면 생각이 바뀔 텐데. 한번 해보는 게 어때? 진짜 짜릿한데."
"싫어! 남자 품에서 허덕이는 건 싫어. 난 여자랑만 할 거야."
말도 안 돼는 소리하지 마, 언니. 내가 남자랑? 턱도 없는 소리.
나는 남자 따위 관심도 없어. 아니 싫어.
"에휴... 왜 이리 남자를 싫어하는지. 렌 너는 내가 남자가 얼마나 좋은지 벌써 그렇게 말했는데도 어째 변화가 없니."
"남자는 싫다니까? 난 여자가 좋아. ...언니처럼."
언니. 내가 여자를 좋아하는 건 다 언니 때문이야.
나는 천사들보다는 언니가 좋아. 언니랑 함께하고 싶어. 언니와 사랑을 나누고 싶어....
언니. 언니가 남자들 얘기할 때마다 내 가슴이 찢어져. 언니의 몸을 탐하는 마왕들을 생각하면 모조리 찢어 죽여 버리고 싶어.
내가 그렇게 원하는 걸, 내가 그렇게 소망하는 걸, 내가 그 무엇보다 바라는 걸 손에 넣은 것들을 생각하면 모조리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고 싶어.
내가 왜 남자를 싫어하냐고? 그건 다 언니 때문인걸. 언니를 탐하는 남자 따위, 필요 없어. ....난 언니가 좋은걸.
"이그... 널 모시는 신도들이 네 실체를 알면 얼마나 기겁할까? 설마 고결하고 순결한 천신 샤이렌이 레즈비언이라니."
"흥흥. 남말하긴. 마신의 사도들이 마신 카리넨이 사실은 남자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색녀라는 걸 알면 기겁할 텐데?"
"그래그래, 내가졌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언니의 품에서 언니의 심장소리를 듣는다.
....언니. 내가 레즈비언인 건 맞지만, 그건 전적으로 언니 때문이야... 언니, 제발 나와 함께해 줬으면 좋겠는데....
나오려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얼굴을 억지로 밝게 바꾼다. 언니에게 안 좋은 표정을 보일 수는 없지.
언니에게는 즐거운 모습만. 나는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그렇게 좋은 모습만...
"언니 언니. 우리 애들 있잖아, 진짜 귀여운 거 알아?"
"응? 귀엽다니?"
"천사는 말야, 엄청나게 감각이 예민하거든. 그리고 대천사는 더하다? 그래서 침대에서 보면 살짝 살짝만 건드려도 눈물을 막 글썽거리면서 샤, 샤이렌님... 그러는데 그게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
"흐응~"
"살짝 살짝 쓰다듬기만 해도 높은 소릴 내고, 몸을 막 휘면서 빨갛게 달아오르는 거 있지. 날개를 활짝 펴고 부끄러워하는 걸 보면 진짜 귀여워."
귀여운 건 사실. 천사애들, 특히 대천사 애들이 침대에서 교성을 지르거나 몸을 비트는 건 확실히 귀엽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장난. 연습. 언니를 위한 것들 뿐.
....내가 언니와 함께하게 될 날은, 과연 올까?
잠깐, 잠깐 혹시라도....
"...그러니까 언니, 언니도 여자 쪽으로 돌아서면 안 될까?"
"글쎄... 우리 쪽 애들은 그렇게 민감하진 않아서 말이야."
언니는 난처하다는 듯이 웃는다.
...역시, 거절인가? 민감한 여자 따위 마계에도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한다는 건...
"우리 쪽 애들은 어떤 쪽인가 하면 둔감한 편이지. 그리고 나는 말이야, 들어오는 쪽이 더 좋거든... 나는 남자가 아무래도 좋아. 남자랑 하는 쪽이 얼마나 기분 좋은데. 마왕 애들은 다 정력도 강하고 해서 말이야."
"......."
....역시.
언니는 여자들끼리의 관계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옛날에도 언니는 남자에 관심이 많았지. 그때는 그래도 처녀였던 걸로 기억하지만...
....그때도, 언니는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지. 아니 내가 안 보인 건가? 하지만 언니는 눈치를 챘던 걸로 기억한다.
.......언니는, 과연 지금도 내 마음을 알고 있을까...?
....아니, 아니야. 알든 모르든, 지금 중요한 건 아니지. 지금은 지금의 할 수 있는 일을, 잠깐의 행복을 만끽하는 일을.
아, 그러고 보니 언니한테 보여줄 게...
"이거 봐봐, 언니."
"뭐니? ...딜도?"
"언닛!"
딜도라, 그거 언니랑 같이 쓸 수 있다면 천만 개라도 가져올 수 있는데 말이지.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이야. 농담임에도 농담으로 들을 수 없는 내가 조금 슬프다.
"아하하, 농담이야. 어떻게 쓰는 거니?"
"거기 밑에 눌러봐. 아, 이쪽으로 겨누진 말고?"
"겨눠? 뭔가 나가는 거니? 어디..."
언니가 버튼을 누르자 광검이 작동한다. 막대가 뻗어 나와 휘고, 신력을 담은 구슬에서 빛의 검 날이 뻗어 나온다.
언니는 광검이 신기한 모양이네. 확실히 이런 종류는 이 세상에 없지. 생각해 내고 만드는 것도 얼마나 고생이었는데.
"오오? 뭐니, 이거?"
"히힛. 요즘 내가 만든 거야. 어때, 멋지지?"
"헤에... 뭐니 이건? 신성법도 아니고, 마법도 아니고..."
"내 권능을 담은 거야. 빛 그 자체를 집약시켜 만든 거지. 이름은 일단 간단하게 광검."
"오오..."
후훗, 정말 열심히 만든 거라구. 언니한테 자랑하고 싶어서 가져왔지. 나 이제 서툴지 않아. 이런 신기도 만들 수 있구, 완전한 한 사람, 아니 한 신 몫을 한다구.
이런 날, 똑바로 봐줘.
"마법이 아니라서 마법 무효화나 그런 것도 전혀 타격 없고, 그 어떤 것에도 베이지 않지만 그 어떤 것도 벨 수 있지. 사용자의 의지에 전적으로 반응하는 검이야. 검 날 길이도 맘대로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고. 조금만 다듬으면 신기로도 쓸 수 있을 거 같애. 아, 근데 아직 미완성이라 약하니까 조심..."
쾅!
"...어머나."
"......."
....어?
잠깐, 지금 뭐가....
소리의 진원지로 눈이 향한다. 그곳에 있는 것은 부서져버린 광검의 파편과, 맞닿아 있는 검은 마력이 일렁이는 언니의 손.
설마... 광검을, 부숴버린 거야? 마력으로? 안 그래도 약한 내구도인데, 신기가 마력에 견딜 리가 없잖아!
"그, 그거..."
"미, 미안. 내구도 좀 실험하려다가..."
순간 두 눈에 뿌연 습막이 어린다.
마치 내가 언니에게 보인 성과를, 언니가 무시해 버린 것만 같다.
언니가 고의가 아니란 것은 알지만, 언니가 나를 무시해 버린 것만 같다.
언니, 어떻게, 어떻게....!
"이, 이 망할 언니야!"
퍽!
"꺅! 너 지금 언니한테 무슨...! ...우, 우니?"
"흑, 훌쩍..."
"레, 렌 울지..."
"우에에엥~"
으흐흑, 그거 정말 열심히 만들었는데. 언니한테 자랑하고 싶었는데. 나 이렇게 잘 하고 있다, 난 이제 걱정할 대상이 아니다 보여주고 싶었는데.
언니, 어떻게, 어떻게.... 흐흑.
"우에엥~ 그게 얼마나 어렵게 만든 건데... 언니 미워~ 우에엥~"
"이, 이게... 어우, 진짜 미안해. 그러니까 울지 마라, 응? 렌 착하지?"
"우엥~ 세상에 빛의 신기에 마력을 가져다 대면 어떻게 해! 언니 미워~ 우에엥~"
"그, 그게... 렌아, 제발 울지 마라. 응?"
나도 모르게 어린아이처럼 울음이 터진 것을 그칠 수가 없다.
격렬하게 몰아치는 감정이, 너무나 슬프고 서운해서 도저히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눈앞은 뿌옇게 흐리고, 온 세상이 우울하게만 느껴진다.
언니가 나를 안고 토닥거리지만, 언니에 대한 서운함과 슬픔이 쉽사리 가실 생각을 않는다.
언니, 정말 너무해...
"자, 코 풀어. 흥!"
"흥!"
"...좀 진정됐니?"
"응... 훌쩍."
"휴우."
조금 감정이 가라앉자 어린아이처럼 언니에게 매달려 운 것이 견딜 수 없이 부끄럽다.
으으, 내가 무슨 짓을...! 언니가 날 어떻게 보겠어?
그리고 흥이라니, 진짜 내가 애기도 아니고... 너무햇, 언니.
....난 언니에게 한 사람의 여자로 보이고 싶은데.
"어휴, 다 큰 여자가 막 울기나 하고... 우리 렌은 언제나 크려나."
"우우! 나 다 컸다구! 내가 천신인데 뭘 더 커!"
"그래도 렌은 아직 어린애 같은걸. 세상에 샤이렌이 이렇게 울보에 응석받이라니, 누가 알까."
".....뿐인걸."
"응?"
"아, 아니야."
내가 우는 건, 응석을 부리는 건 언니 앞에서 뿐이야.
내가 아무리 우리 애들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도, 위엄 없는 모습을 보여도 울지는 않아. 응석을 부리지도 않아.
내가 마음을 놓고 대할 수 있는 건, 내 모든 것을 하나도 숨김없이 보여줄 수 있는 건 언니뿐인걸.
....언니는, 넨 언니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자니까.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 언니.
"...언니."
"왜 그러니?"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같다."
"....그러네. 아버지는 어디서 뭘 하고 계실까?"
옛날, 우리가 신이 아니던 때. 아버지와 언니, 엄마 넷이서 지상에서 살던 때가 떠오른다. 그 때는 언니가 너무나 당연하게 언제나 옆에 있었는데. 그때는 정말 하루하루가 행복한 나날이었는데... 그게 대체 얼마나 전 얘긴지.
아버지라... 지금쯤 아버지는 정말 어디서 뭘 하고 계시려나. 우리를 두고 훌렁 떠나가 버린 아버지. 우리의 남동생을 찾으러 간다던가... 그게 벌써 천년이 훌쩍 넘었다.
...조금, 보고 싶네.
"......언니. 언니는 지금이랑 그때랑 뭐가 더 좋아?"
"글쎄...."
언니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언니, 나는 옛날이 좋아.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천신의 자리? 나를 따르는 수많은 천사들과 신도들? 부귀영화와 절대권력?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언니를 보기 힘든걸.
"...사랑해, 언니."
"...나도 널 사랑한단다. 내 동생 렌아."
"......."
"......."
언니는, 역시 나를 동생으로밖에 보지 않는구나.
나는, 언니를 사랑해. 그건 가족인 언니를 사랑하는 게 아냐. 언니를, 언니라는 여자를, 언니라는 존재를― 카리넨을 사랑하는 거야.
....사랑해, 언니. 내 마음은 전해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사랑해.
눈가에 서린 눈물을 닦으며 애써 힘차게 일어난다.
언니와 함께하고 싶지만, 더 있다가는 내가 무너져 버릴 것 같다. 다음에, 또 다음에 언니를 보러 와야지.
"자! 슬슬 나가봐야겠네. 우리 애들이 걱정할 거야. 언니도 얼른 돌아가 봐야지?"
"그래, 그렇지..."
"자! 얼른 나가 보자구! 언니, 다음에 또 봐~ 보고 싶으면 또 마계로 쳐들어갈 테니까. 다음엔 우리가 이길 꺼라구! 마계를 점령해 보여주겠어!"
정말로 마계를 아예 밀어 버리고 언니가 있는 곳까지 천계의 영토를 넓힌다면, 언니를 항상 볼 수 있을까?
....그건 모르는 일. 그래도 일단 거기에 가능성을 두고, 열심히 노력해야지. 언니를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야...
"그래그래. 나도 우리 애들을 열심히 키워야겠구나. 그럼 다음에 또 보자꾸나."
"다음에는 요리도 꼭 챙겨 와! 그럼 안녕!"
후다닥 문을 향해 뛰어간다.
조금만 더 있다가는 다시 눈물을 흘려 버릴 것 같아.
언니와 함께하던 공간에서 벗어나, 천계로 돌아간다는 것에 온 몸이, 영혼이 거부한다. 언니와 단 일초라도 더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언니를 보고 싶다.
...하지만, 가야겠지. 지금 가지 않으면 정말로 무너져 버려...
나는 문을 열었다.
자, 돌아갈 시간이다. 이제 언니를 사랑하는 렌은 다시 언니를 만날 때까지 잊자.
나는 천계를 지배하는 자. 천신 샤이렌이다.
성큼, 떨어지지 않는 한 걸음을 내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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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3편인 관계로 나머지 3편은 2시간 후에. 소라넷은 일일 2편이니까요.
Written by 검은나비
===2. 천신 샤이렌===
하아... 언제나 끝나려나. 얼굴에 경련 일겠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며 옆에서 열성을 다해 조약을 맺는 마리엘을 바라보았다.
리엘아, 적당히 좀 하렴. 응? 나 힘빠진다. 오오! 끝났나?
마리엘은 대화를 마친 듯 몸을 돌리더니 나를 향해 자세를 취한다. 그런 거 안해도 되니까 얼른얼른 하렴. 나 힘들다야.
"...어느 정도 조율이 끝난 듯합니다. 천신이시여."
"대화는 이걸로 끝입니다. 마신이시여."
탁자 건너편에서는 넨 언니에게 말하는 마왕의 목소리도 같이 들린다. 저 마왕 이름이... 크리시안 이랬던가.
뭐 그거야 중요한 게 아니고, 얼른 내보내야 언니랑 즐거운 시간을 보내지.
나는 기쁜 마음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위엄 좀 깔고... 후후. 이 목소리 연습하느라 고생 좀 했다구. 맑고 고운 여신의 목소리~ 이거 은근히 힘들다. 신력을 실어야 이런 소리가 나온단 말이지.
"수고했다. 모두 나가 보도록."
"수고했군. 언제나처럼 모두 나가 있어라."
"예. 여신이시여."*12
"예. 마신이시여."*12
나간다, 나간다, 나간다... 나갔다!
...나갔지? 다 나갔지? 다 나갔구나!
저번에 한번 다 나간 줄 알았다가 갑자기 한명이 들어와서 혼비백산했던 적이 있다. 그래도 우리 둘다 말을 꺼내거나 자세가 흐트러지기 전이라 다행이었지,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죽여야 한단 말이야, 들키면.
근데 아무래도 내 손으로 우리 애들을 죽이긴 좀 뭐하니까 말이지... 쯧. 우리 애들이 얼마나 귀여운데. 전쟁하는 것도 미안한데 내 손에 죽일 수는 없잖아? 그러니 미리미리 조심하는 게 좋지.
잠시 침묵하다가 슬며시 손을 들어올린다. 흐음, 내가 침묵을 거는 쪽이지... 맡은 임무(?)를 생각하며 손에 막대한 양의 신력을 불어넣는다. 언니도 준비된 거 같고. 그럼 하나, 둘, 셋!
"절대 침묵의 봉인!"
"차원의 차단!"
구구구궁―
새하얀 빛과 칠흑의 마력이 장내를 거세게 휩쓴다. 크으, 이거 꽤 멋진데 말야. 우리 천계는 검은 빛 나는 마법은 거의 없는데 검은 빛과 순백색이 잘 섞이면 꽤 예쁘거든. 왜 회색이 아닌가 싶긴 하지만... 뭐 예쁘면 됐지.
잠시 완벽히 주문이 걸린 것을 확인하고는 언니를 쳐다본다.
.....자, 이제 쉬자!
풀석
"푸하~"
"후에에~"
후에에~ 편하다아~ 이 탁자, 애들이 수수해서 왜 이렇게 수수하냐고 물었지만, 사실 이게 나름 뛰어난 기능이 있으니 바꿀 수가 없지. 저번에 열심히 만든 건데 쓸 만해서 두고두고 우려먹는데, 앞으로도 쭉~ 써야겠다.
막 엎드려도 하나도 안 불편해! 애들은 안 만져봐서 모르지만 이거, 엄청 푹신해. 솜이불보다 더 푹신하다니까~ 내가 만들었지만 잘했다. 헤헤. 언니도 마음에 들어 하려나? 좋아하겠지?
오랜만에 언니랑 맘 놓고 수다 떨 수 있다니, 너무 좋다.
"후우~ 진짜 자세 잡고 있기도 힘들다. 걔들은 뭔 말이 그리 길다니?"
"그러게 말이야. 좀 적당히 하고 끝낼 것이지... 그깟 조약 뭐 중요하다고."
맞아 맞아. 조약 맺어 봤자 그거 몇 십 년이나 가나? 전쟁 다시 터지면 휴지조각이고, 또 조약 맺고, 또 휴지조각이고... 그게 몇 번짼데 그렇게 열성적으로 조약을 맺는 건지.
그 몇 십 년이라도 잘 챙기자는 의미인가? 흐응. 뭐 솔직히 정치니 뭐니는 밑에 애들 사정이고... 나는 언니랑 나눌 수다 시간이 줄어드는 것만으로도 진짜 짜증나는데. 우우, 걔들은 대강 하래도 눈치가 없어요, 눈치가. 칫.
이 공간 유지 가능 시간이 하도 짧으니 진짜 슬프네... 언니랑 있을 수 있는 시간도 한 시간 좀 넘을 뿐이고. 매일 전쟁을 일으킬 수도 없고...
아니, 아니지. 지금은 이 시간을 즐기는 거야.
"렌, 잘 지냈니? 벌써 이게 몇 십 년 만인지."
"그러게 말이야. 언니도 잘 지냈어? 하기사 넨 언니가 무슨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잘 지냈냐고? 잘 못 지냈어요. 언니. 언니가 너무너무 보고 싶어서, 언니를 또 보고 싶어서 못 지냈어요.
아아, 대체 왜 언니는 마신이고 난 천신인 건지. 언니 옆에만 있을 수 있다면 이따위 천신의 직위 따위 버려버려도 좋으련만.... 언니는 내 생각이 나지도 않나요? 언제나 쳐들어가고 만나려 드는 건 나뿐인걸.
살며시 고개를 드는 슬픈 생각을 애써 누르며 밝게 웃어 본다.
그리고 힘든 일, 괴로운 일을 일일이 털어낸다. 언니. 내가 이렇게 편할 수 있는 건 언니의 앞에서 뿐이야. 나는 "신"인걸.
"후엥~ 진짜 신 노릇하기도 힘들어. 뭐 이거야 다 위엄, 점잔, 조심... 무슨 신이 이렇게 어려워? 조금만 흐트려져도 애들이 얼마나 뭐라고 하는지. 밑에 애들은 물론이고 특히 마계 쪽 앞에서는 조심하라고 아주 신신 당부를 하더만."
"신이니까 그렇지 뭐. 이렇게 된 거 열심히 해야지 뭐 있겠니."
"우이잉... 그래도 힘든걸. 나도 놀러가고 싶단 말이야. 밑에 애들은 인간계에도 막 놀러가고 그러던데."
"말도 안 돼는 소리하지 마. 신이 강림하는 게 보통 일인 줄 아니?"
"우씨이~"
나도 알아. 하지만, 나는 마계로 갈수 없지만 내가 인간계로 간다면 언니는 그곳으로 올 수 있잖아.
내가 강림한다면 언니도 강림할 수 있고, 먼저 강림한 내가 안 좋은 소리는 듣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언니는 나를 따라오지 않겠지? 언니가 따라온다면 나는 어떤 위험이 있더라도 강림할 텐데.
언니, 나는 언니와 함께 있고 싶어. 사실 우리 둘 다 강림해 만날 수만 있다면, 인간계의 존재들 따위 무슨 생각을 하던 어떤 짓을 하던 관심도 없어. 언니...
살짝 서운함을 담아 볼을 부풀린다.
윽, 언니! 갑자기 왜 찔러! 스킨십은 좋지만, 손바닥이면 모를까 손가락은 싫다구.
"씨이! 하지 마!"
"쿡쿡. 이렇게 귀여운걸? 이렇게 콕 찔러주고 싶은 볼을 두고 어떻게 안 그러겠니."
뭐, 언니가 좋다면야 수백 번이라도 찔려도 기쁘기만 할 테지만... 그래도 조금 서운하긴 하다.
이왕이면 좀 넓게 만져주면 좋겠는데.
"칫칫. 언니 너무해."
"후훗."
헤에... 언니가 머리 쓰다듬어 준다.
이 손길도 너무 좋아. 이대로 잠들어 버릴 것만 같은 포근한 기분. 아아, 이런 손길을 언제나 누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마음껏 즐겨야지. 이런 행복, 쉽게 느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아, 그러고 보니 언니는 요즘 뭐하고 지내려나?
"아! 언니, 그러고 보니 요즘은 뭐하고 지내?"
"나? 글쎄... 저번이랑 그렇게 다른 건 없는데. 뭐 마왕 애들이랑 놀거나, 마계 여기저기 둘러보거나... 요리 연구하거나?"
"요리? 그거 아직도 해? 할 게 아직 남았어?"
"그럼. 요리의 세계는 끝이 없단다."
언니의 요리... 으응,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먹어본 적은 한 번도 없네.
...옛날에는 언니가 요리에 별로 관심이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마신이 되고 나서 시작한 거라지만, 이렇게 짧게 간간히 만나는 정도로는 도저히 먹을 기회가 생기지 않는다.
언니의 요리, 정말 먹고 싶은데... 마왕들은 자주 먹겠지? 진짜 부럽다. 나도 언니의 요리 먹고 싶어~
다음에 만날 때 가져와 달라고 부탁해 볼까. 바로 하진 못하겠지만 싸오는 정도는 가능할지도... 으음, 침나온다.
"흐응... 언제 나도 요리한번 해 주라. 다음에 만날 때는 좀 가지고 와. 아, 그러고 보면 마왕 애들 꽤 바뀌었던데."
"응. 저들끼리 싸우다가 좀 죽은 애들도 있고, 이번 전쟁에서도 넷 죽었거든."
"으응... 안 슬퍼?"
조심스럽게 물어보지만, 언니는 살짝 작은 미소를 띄우며 웃는다.
자신의 자식들이 죽는 게 좋은 기분은 아니겠지. 나도 마찬가지지만... 언니는 당하는 입장이니까 더하겠지.
"후후. 물론 기쁜 건 아니지만... 널 원망하거나 하진 않아. 이렇게 예쁜 동생을 어떻게 원망하겠니."
"우웅... 그래도 조금 미안한걸. 앞으로도 계속 할 테니까."
".....어떻게 이 방법밖에 없다는 게 조금 안타깝지만, 그러면 또 별수 없지. 마왕 애들이 아무리 아끼는 애들이라고 해도 너만 하겠니."
"헤헤..."
나를 생각해주는 언니가 기쁘기도 하지만, 또 언니에게 미안해진다.
자주 일어나는 천마대전, 언니를 보기 위해서 일으키는 거라고는 하지만 죽어나가는 천사들과 마족들에게 미안한 건 사실이다.
내 욕심을 위해서 죄 없는 애들을 희생시키는 거니까. 내 애들이 죽는 것도 슬프고, 마족들이 죽는 것도 언니에게 미안하지만... 어디까지나 미안한 것뿐이다.
안 할 수는 없어. 내가 마계에 가지 못하고, 언니가 천계에 오지 못하는 이상 언니를 만날 방법은 이거뿐인걸. 애들은 뭐 우리가 싸우는 줄 알지도 모르지만... 수십 년에 한번, 회담을 핑계로 만나는 한두 시간의 짧은 만남. 사실상 내 삶을 지탱하는 전부나 마찬가지다.
....대체 원거리도 정도껏이지, 천신과 마신이라니... 아버지도 정말 너무하시지.
......그때, 잘 말했어야 되는 건데...
아냐. 지금 후회해 봤자 돌이킬 건 없지. 이나마 작은 행복이라도 즐기는 거야.
애써 얼굴이 보이지 않게 언니의 품에 얼굴을 묻는다. 지금의 내 얼굴은 절대로 좋은 얼굴은 되지 못할 테니까. 언니가 걱정하는 모습 따위 보이고 싶지 않다. 언니는, 나를 아끼니까. 그래, 동생으로서...
...왠지 조금, 눈물이 날 것도 같다.
"그런데 네 대천사들은 전부 다 여자들이던데... 아직도 남자는 생각이 없니?"
"우우, 남자 따위 필요 없어. 여자가 더 좋다구. 그 부드럽고 따듯한 게 얼마나 좋은데."
"흐응... 너도 남자를 경험해 보면 생각이 바뀔 텐데. 한번 해보는 게 어때? 진짜 짜릿한데."
"싫어! 남자 품에서 허덕이는 건 싫어. 난 여자랑만 할 거야."
말도 안 돼는 소리하지 마, 언니. 내가 남자랑? 턱도 없는 소리.
나는 남자 따위 관심도 없어. 아니 싫어.
"에휴... 왜 이리 남자를 싫어하는지. 렌 너는 내가 남자가 얼마나 좋은지 벌써 그렇게 말했는데도 어째 변화가 없니."
"남자는 싫다니까? 난 여자가 좋아. ...언니처럼."
언니. 내가 여자를 좋아하는 건 다 언니 때문이야.
나는 천사들보다는 언니가 좋아. 언니랑 함께하고 싶어. 언니와 사랑을 나누고 싶어....
언니. 언니가 남자들 얘기할 때마다 내 가슴이 찢어져. 언니의 몸을 탐하는 마왕들을 생각하면 모조리 찢어 죽여 버리고 싶어.
내가 그렇게 원하는 걸, 내가 그렇게 소망하는 걸, 내가 그 무엇보다 바라는 걸 손에 넣은 것들을 생각하면 모조리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고 싶어.
내가 왜 남자를 싫어하냐고? 그건 다 언니 때문인걸. 언니를 탐하는 남자 따위, 필요 없어. ....난 언니가 좋은걸.
"이그... 널 모시는 신도들이 네 실체를 알면 얼마나 기겁할까? 설마 고결하고 순결한 천신 샤이렌이 레즈비언이라니."
"흥흥. 남말하긴. 마신의 사도들이 마신 카리넨이 사실은 남자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색녀라는 걸 알면 기겁할 텐데?"
"그래그래, 내가졌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언니의 품에서 언니의 심장소리를 듣는다.
....언니. 내가 레즈비언인 건 맞지만, 그건 전적으로 언니 때문이야... 언니, 제발 나와 함께해 줬으면 좋겠는데....
나오려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얼굴을 억지로 밝게 바꾼다. 언니에게 안 좋은 표정을 보일 수는 없지.
언니에게는 즐거운 모습만. 나는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그렇게 좋은 모습만...
"언니 언니. 우리 애들 있잖아, 진짜 귀여운 거 알아?"
"응? 귀엽다니?"
"천사는 말야, 엄청나게 감각이 예민하거든. 그리고 대천사는 더하다? 그래서 침대에서 보면 살짝 살짝만 건드려도 눈물을 막 글썽거리면서 샤, 샤이렌님... 그러는데 그게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
"흐응~"
"살짝 살짝 쓰다듬기만 해도 높은 소릴 내고, 몸을 막 휘면서 빨갛게 달아오르는 거 있지. 날개를 활짝 펴고 부끄러워하는 걸 보면 진짜 귀여워."
귀여운 건 사실. 천사애들, 특히 대천사 애들이 침대에서 교성을 지르거나 몸을 비트는 건 확실히 귀엽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장난. 연습. 언니를 위한 것들 뿐.
....내가 언니와 함께하게 될 날은, 과연 올까?
잠깐, 잠깐 혹시라도....
"...그러니까 언니, 언니도 여자 쪽으로 돌아서면 안 될까?"
"글쎄... 우리 쪽 애들은 그렇게 민감하진 않아서 말이야."
언니는 난처하다는 듯이 웃는다.
...역시, 거절인가? 민감한 여자 따위 마계에도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한다는 건...
"우리 쪽 애들은 어떤 쪽인가 하면 둔감한 편이지. 그리고 나는 말이야, 들어오는 쪽이 더 좋거든... 나는 남자가 아무래도 좋아. 남자랑 하는 쪽이 얼마나 기분 좋은데. 마왕 애들은 다 정력도 강하고 해서 말이야."
"......."
....역시.
언니는 여자들끼리의 관계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옛날에도 언니는 남자에 관심이 많았지. 그때는 그래도 처녀였던 걸로 기억하지만...
....그때도, 언니는 내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지. 아니 내가 안 보인 건가? 하지만 언니는 눈치를 챘던 걸로 기억한다.
.......언니는, 과연 지금도 내 마음을 알고 있을까...?
....아니, 아니야. 알든 모르든, 지금 중요한 건 아니지. 지금은 지금의 할 수 있는 일을, 잠깐의 행복을 만끽하는 일을.
아, 그러고 보니 언니한테 보여줄 게...
"이거 봐봐, 언니."
"뭐니? ...딜도?"
"언닛!"
딜도라, 그거 언니랑 같이 쓸 수 있다면 천만 개라도 가져올 수 있는데 말이지.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말이야. 농담임에도 농담으로 들을 수 없는 내가 조금 슬프다.
"아하하, 농담이야. 어떻게 쓰는 거니?"
"거기 밑에 눌러봐. 아, 이쪽으로 겨누진 말고?"
"겨눠? 뭔가 나가는 거니? 어디..."
언니가 버튼을 누르자 광검이 작동한다. 막대가 뻗어 나와 휘고, 신력을 담은 구슬에서 빛의 검 날이 뻗어 나온다.
언니는 광검이 신기한 모양이네. 확실히 이런 종류는 이 세상에 없지. 생각해 내고 만드는 것도 얼마나 고생이었는데.
"오오? 뭐니, 이거?"
"히힛. 요즘 내가 만든 거야. 어때, 멋지지?"
"헤에... 뭐니 이건? 신성법도 아니고, 마법도 아니고..."
"내 권능을 담은 거야. 빛 그 자체를 집약시켜 만든 거지. 이름은 일단 간단하게 광검."
"오오..."
후훗, 정말 열심히 만든 거라구. 언니한테 자랑하고 싶어서 가져왔지. 나 이제 서툴지 않아. 이런 신기도 만들 수 있구, 완전한 한 사람, 아니 한 신 몫을 한다구.
이런 날, 똑바로 봐줘.
"마법이 아니라서 마법 무효화나 그런 것도 전혀 타격 없고, 그 어떤 것에도 베이지 않지만 그 어떤 것도 벨 수 있지. 사용자의 의지에 전적으로 반응하는 검이야. 검 날 길이도 맘대로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고. 조금만 다듬으면 신기로도 쓸 수 있을 거 같애. 아, 근데 아직 미완성이라 약하니까 조심..."
쾅!
"...어머나."
"......."
....어?
잠깐, 지금 뭐가....
소리의 진원지로 눈이 향한다. 그곳에 있는 것은 부서져버린 광검의 파편과, 맞닿아 있는 검은 마력이 일렁이는 언니의 손.
설마... 광검을, 부숴버린 거야? 마력으로? 안 그래도 약한 내구도인데, 신기가 마력에 견딜 리가 없잖아!
"그, 그거..."
"미, 미안. 내구도 좀 실험하려다가..."
순간 두 눈에 뿌연 습막이 어린다.
마치 내가 언니에게 보인 성과를, 언니가 무시해 버린 것만 같다.
언니가 고의가 아니란 것은 알지만, 언니가 나를 무시해 버린 것만 같다.
언니, 어떻게, 어떻게....!
"이, 이 망할 언니야!"
퍽!
"꺅! 너 지금 언니한테 무슨...! ...우, 우니?"
"흑, 훌쩍..."
"레, 렌 울지..."
"우에에엥~"
으흐흑, 그거 정말 열심히 만들었는데. 언니한테 자랑하고 싶었는데. 나 이렇게 잘 하고 있다, 난 이제 걱정할 대상이 아니다 보여주고 싶었는데.
언니, 어떻게, 어떻게.... 흐흑.
"우에엥~ 그게 얼마나 어렵게 만든 건데... 언니 미워~ 우에엥~"
"이, 이게... 어우, 진짜 미안해. 그러니까 울지 마라, 응? 렌 착하지?"
"우엥~ 세상에 빛의 신기에 마력을 가져다 대면 어떻게 해! 언니 미워~ 우에엥~"
"그, 그게... 렌아, 제발 울지 마라. 응?"
나도 모르게 어린아이처럼 울음이 터진 것을 그칠 수가 없다.
격렬하게 몰아치는 감정이, 너무나 슬프고 서운해서 도저히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눈앞은 뿌옇게 흐리고, 온 세상이 우울하게만 느껴진다.
언니가 나를 안고 토닥거리지만, 언니에 대한 서운함과 슬픔이 쉽사리 가실 생각을 않는다.
언니, 정말 너무해...
"자, 코 풀어. 흥!"
"흥!"
"...좀 진정됐니?"
"응... 훌쩍."
"휴우."
조금 감정이 가라앉자 어린아이처럼 언니에게 매달려 운 것이 견딜 수 없이 부끄럽다.
으으, 내가 무슨 짓을...! 언니가 날 어떻게 보겠어?
그리고 흥이라니, 진짜 내가 애기도 아니고... 너무햇, 언니.
....난 언니에게 한 사람의 여자로 보이고 싶은데.
"어휴, 다 큰 여자가 막 울기나 하고... 우리 렌은 언제나 크려나."
"우우! 나 다 컸다구! 내가 천신인데 뭘 더 커!"
"그래도 렌은 아직 어린애 같은걸. 세상에 샤이렌이 이렇게 울보에 응석받이라니, 누가 알까."
".....뿐인걸."
"응?"
"아, 아니야."
내가 우는 건, 응석을 부리는 건 언니 앞에서 뿐이야.
내가 아무리 우리 애들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도, 위엄 없는 모습을 보여도 울지는 않아. 응석을 부리지도 않아.
내가 마음을 놓고 대할 수 있는 건, 내 모든 것을 하나도 숨김없이 보여줄 수 있는 건 언니뿐인걸.
....언니는, 넨 언니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자니까.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 언니.
"...언니."
"왜 그러니?"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같다."
"....그러네. 아버지는 어디서 뭘 하고 계실까?"
옛날, 우리가 신이 아니던 때. 아버지와 언니, 엄마 넷이서 지상에서 살던 때가 떠오른다. 그 때는 언니가 너무나 당연하게 언제나 옆에 있었는데. 그때는 정말 하루하루가 행복한 나날이었는데... 그게 대체 얼마나 전 얘긴지.
아버지라... 지금쯤 아버지는 정말 어디서 뭘 하고 계시려나. 우리를 두고 훌렁 떠나가 버린 아버지. 우리의 남동생을 찾으러 간다던가... 그게 벌써 천년이 훌쩍 넘었다.
...조금, 보고 싶네.
"......언니. 언니는 지금이랑 그때랑 뭐가 더 좋아?"
"글쎄...."
언니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언니, 나는 옛날이 좋아.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천신의 자리? 나를 따르는 수많은 천사들과 신도들? 부귀영화와 절대권력?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언니를 보기 힘든걸.
"...사랑해, 언니."
"...나도 널 사랑한단다. 내 동생 렌아."
"......."
"......."
언니는, 역시 나를 동생으로밖에 보지 않는구나.
나는, 언니를 사랑해. 그건 가족인 언니를 사랑하는 게 아냐. 언니를, 언니라는 여자를, 언니라는 존재를― 카리넨을 사랑하는 거야.
....사랑해, 언니. 내 마음은 전해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사랑해.
눈가에 서린 눈물을 닦으며 애써 힘차게 일어난다.
언니와 함께하고 싶지만, 더 있다가는 내가 무너져 버릴 것 같다. 다음에, 또 다음에 언니를 보러 와야지.
"자! 슬슬 나가봐야겠네. 우리 애들이 걱정할 거야. 언니도 얼른 돌아가 봐야지?"
"그래, 그렇지..."
"자! 얼른 나가 보자구! 언니, 다음에 또 봐~ 보고 싶으면 또 마계로 쳐들어갈 테니까. 다음엔 우리가 이길 꺼라구! 마계를 점령해 보여주겠어!"
정말로 마계를 아예 밀어 버리고 언니가 있는 곳까지 천계의 영토를 넓힌다면, 언니를 항상 볼 수 있을까?
....그건 모르는 일. 그래도 일단 거기에 가능성을 두고, 열심히 노력해야지. 언니를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야...
"그래그래. 나도 우리 애들을 열심히 키워야겠구나. 그럼 다음에 또 보자꾸나."
"다음에는 요리도 꼭 챙겨 와! 그럼 안녕!"
후다닥 문을 향해 뛰어간다.
조금만 더 있다가는 다시 눈물을 흘려 버릴 것 같아.
언니와 함께하던 공간에서 벗어나, 천계로 돌아간다는 것에 온 몸이, 영혼이 거부한다. 언니와 단 일초라도 더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언니를 보고 싶다.
...하지만, 가야겠지. 지금 가지 않으면 정말로 무너져 버려...
나는 문을 열었다.
자, 돌아갈 시간이다. 이제 언니를 사랑하는 렌은 다시 언니를 만날 때까지 잊자.
나는 천계를 지배하는 자. 천신 샤이렌이다.
성큼, 떨어지지 않는 한 걸음을 내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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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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