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우는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는 미라를 보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지나다니고 있는 직원들이 그와 그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할 말이 있다는 표정이었다. 그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하고 말했다.
“뭐, 또 할 말이 있니?”
“나, 나쁜 애 아녜요. 먼저 번에 고마운 인사치례는 해야지요. 자판기 커피 살 돈은 있어요.”
“하하~! 자판기 커피라고?”
“네. 왜, 시간이 없어요? 아니면 자판기 커피라서 싫어요?”
준우는 빙그레 미소를 띠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명동까지 얼마 안 되는 거리라서 친구들을 만날 시간은 넉넉했다. 미라가 준우는 팔을 잡아끄는 미라를 마지못해 따라갔다. 그들은 지하철 입구로 들어가서 자판기로 향해 갔다. 준우가 대기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 그녀가 커피를 뽑아 들고 왔다.
“내 성의를 받아 줘서 고마워요. 아저씬 참 마음이 착하다.”
“자꾸 아저씨라고 불러야겠어?”
“그럼 오빠라고 해도 되죠?”
“편 한대로 해. 고등학교 졸업반이니?”
“어떻게 알았어요!”
“미라 얼굴에 써 있네. 학원에 갈 시간 인 것 같은데.”
“피 잇~! 내가 그렇게 어려 보이나. 다른 사람은 대학생으로도 보는데. 학원 같은 데는 구속받기 싫어서 안가요. 아저씨 그 건물에서 무슨 일해요?”
“그냥 사무원이지.”
“으 응! 그렇구나.”
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건물은 대진의 본사 사옥이었다. 그녀의 표정으로 보아 회사에 대해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당돌하게 준우의 팔에 팔짱을 끼며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준우가 들고 있던 커피를 마시다가 사래가 들렸다. 커피 물을 바닥에 흘리고 그녀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호호호.......! 그렇게 급하세요. 성격이 급하신가?”
“하하~! 글쎄.......! 회사 안에 아는 사람이 있니?”
“그런 거 묻지 말라니까요. 알면 다쳐요.”
“다친다고.......!? 하하~! 그러니 더 궁금해지네.”
준우가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미라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눈웃음을 쳤다. 그는 전혀 두려움 없이 다가서는 그녀의 의도가 의심스러우면서도 점점 관심이 깊어갔다. 그녀는 갈 곳이 없는 사람처럼 여유로워 보였다. 그를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그녀는 짧은 스커트 밑으로 들어낸 종아리를 흔들며 콧노래를 불렀다. 그녀가 엉뚱한 질문을 했다.
“오빠! 멋있는데, 애인 있어요?”
“애인!? 하하~! 사랑하는 세상 사람이 다 애인이지.”
“피 잇~! 무슨 박애주의자도 아니고.........”
“이만, 난 가봐야겠다.”
준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빈 종이컵을 휴지통에 넣었다. 지하철 탑승 승강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가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 뒤편에 다가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미라가 보조개를 드리운 미소를 띠고 손을 흔들었다.
“오빠, 꼭 다음에 봐요.”
“.........”
삼 십 여분 후, 준우는 명동의 음식점에서 고등학교 친구 두 명과 만나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학창시절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느라고 친구가 많지 않았다. 그의 앞자리에 앉은 이 정수는 학교에서 그와 성적이 일 이등을 다투던 친구로 대학 강사이고 옆에 있는 최 철민은 합기도를 같이 했던 친구인데 체육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준우와 그들은 술이 조금 취한 상태였다. 학창시절 추억을 얘기하던 철민이 준우의 옆구리를 툭 쳤다.
“철민아! 너, 황 은지라고 알지?”
“왜 너를 쫓아다니던 XX여고에 다니던 애 있잖아. 너의 집 옆에서 살았고.”
“아! 기억나지.”
“은지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결혼했어.”
“그래......!? 일찍 결혼했네.”
준우는 허공을 쳐다보면서 추억을 떠올렸다. 그에게는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의 여자가 은지였다. 그를 성적인 욕구에 빠져 들게 했던 어머니가 냉랭해지고, 그가 처음으로 관심을 가졌던 여자였다. 그는 극장과 공원 등을 데이트하며 풋풋한 체취를 느꼈던 그녀의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철민이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은지가 결혼한 남자가 스무 살이나 많단다. 그러니까 그 남자의 딸이 대학에 입학했다고 했으니 너무했지.”
“왜.......! 그런 결혼을 했지?”
“들리는 말에는 집안을 살리려고 그런 모양인데. 무슨 심청이도 아니고.”
“.........”
은지의 가정형편이 어려웠다는 것은 준우도 잘 알고 있었다. 식구들도 다섯 형제나 있었고 그녀의 아버지는 막노동을 해서 생활을 유지 했다는 것도 준우는 알고 있었다. 정수가 술잔을 기울여 마시며 한 숨을 쉬고 한마디 거들었다.
“음......! 돈이란 삶에 수단인데.......목적이 되 버렸으니, 인간 세상은 말세야.”
“그런데 말이야. 준우야. 이 말을 해야 하는지..........”
철민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준우를 빤히 쳐다보며 우물쭈물했다. 준우가 의아스런 눈빛으로 지그시 그를 마주 바라봤다. 철민은 정호를 한번 쳐다보면서 말을 해도 괜찮은지 생각을 했다. 준우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기대가 되고 정호는 궁금한 눈치였다. 철민이 술잔을 들어 마시고 빈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은지를 얼마 전에 만났었어. 그런데 은지가........”
“.........”
“준우, 너를 한 번 만나고 싶다는 구나.”
“나를........!? 왜?”
“그건 나도 몰라. 혹시 만나면 전해 주라고 하면서 전화번호를 적어 주더구나.”
철민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뒤적거렸다. 그리고 메모지 한 장을 꺼내 준우에게 전달했다. 메모지를 받아든 준우는 묘한 감정에 빠져 들었다. 은지가 왜 나를 만나려 할까. 무슨 할 말이 있는지. 그렇다고 잊을 수 없는 육체적인 사랑을 한 것도 아니고. 혹시 결혼생활이 복잡하여 도움을 청하려는지. 준우는 도저히 은지가 자신을 만나려는 목적을 알 수 없었다.
은지에 대한 철민의 말이 준우를 무척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업무에 바쁜 생활을 하다 보니 은지에 대한 관심은 준우의 기억 속에 사라져갔다. 그는 어떻게든지 장 인호 사장의 사생활 속으로 들어갈 기회만을 노렸다. 그는 차츰 장 사장의 사업에 대한 내막도 알게 되고 점점 그의 심복이 되어갔다.
준우는 승용차를 운전하고 장 사장과 같이 대전 지점에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당일로 다녀오는 길이라서 고속도로는 어두워졌고 몹시 피곤하였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행렬을 이루는 밤길에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고 있어 그는 운전에 신경을 썼다. 승용차 뒷좌석에 앉은 장 사장이 불쑥 그에게 물었다.
“민비서!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다면서?”
“네.”
“그럼 어디서 숙식을 하고 있나?”
“큰 아버님 댁에 있습니다.”
“거기서 나올 생각은 없나?”
“네.........!?”
갑작스런 장 사장의 질문에 준우는 백미러를 들여다보았다. 그가 무슨 의미로 묻는 것인지 몰라서였다. 준우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짐작이라도 하듯이 장사장이 말했다.
“내 말은 말이야. 아예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있으면 서로 편할 거 같아서 그래.”
“.........!?”
“먼저 있던 김 기사도 우리 집에 같이 있었어. 먼저 김 기사가 사용하던 도 비어있거든. 어때 민비서 생각은?”
“글쎄요. 저는 괜찮습니다만, 회장님께 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요!?”
“난 좋지. 서로 편하잖아. 잘 생각해보라 구. 괜찮으면 내가 마누라한테 말해 놓을 테니.”
“...........”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 준우는 장 사장의 말이 반가웠다.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든지 장 사장의 사생활에 접근하려고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 준우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기회였다. 그러나 그는 장 사장의 말에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장 사장의 집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인식시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장 사장도 준우가 심사숙고하게 생각 하는 줄 알고 더 묻지 않고 잠이 들었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침묵과 자동차의 물결속애 준우는 승용차를 몰아 판교인터제인지를 통과하였다. 장 사장의 저택이 있는 약수동으로 가기위해 금호터널을 지나고 있을 때 장 사장이 침묵을 깨고 준우에게 물었다.
“어때, 생각해 봤나?”
“네.......!?”
“우리 집으로 들어오겠냐고?”
“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내일 당장 들어오도록 해.”
“내일 당장 요?”
“소뿔도 단김에 빼라고. 뭐 뜸 들릴 필요 있나.”
“네........? 네, 알았습니다.”
마지못해 대답하는 척 하는 준우의 머릿속에는 앞으로의 계획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장 사장은 그가 왜 대진 컨설팅에 들어왔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그는 어떻게 자신의 여자들을 살해한 장 사장에게 보복을 해야 할지 여러 가지 방안을 떠 올렸다. 그의 머릿속에 떠올리는 상대는 장 인호사장의 가족들이었다.
장 인호는 삼년 전에 경리과에 근무하던 여직원 고 진숙과과 재혼을 하였다. 이제 사십이라는 젊은 나이에도 그녀가 장 인호와 결혼한 것은 풍족한 경제력 때문이었다. 누구라도 그녀를 나이 많은 장 인호의 아내로 보지 않는다. 장 인호의 큰 딸인 장 수진은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생이다. 수진은 실력을 인정받아 서울 합창단원으로 있으며 오직 음악에만 열중하는 백치 같은 미인이다.
준우가 아직 만나보지 못한 인물은 장 사장의 작은 딸과 의문의 남자였다. 그의 어머니와 이모가 살해되고 여동생 정아를 강간하던 남자의 이름이다. 장 인호가 다리를 저는 사내를 불렀던 이름은 분명히 창식이었다. 그러나 아직 준우는 창식이 누구인지 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가 창식을 찾는 것도 장 사장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오후, 장 사장은 직접 자가운전을 해서 골프를 치러 간다고 했다. 그리고 준우에게 시간을 줄 테니 짐을 옮기라고 했다. 그는 간단한 소지품과 옷가지, 그리고 즐겨보는 책과 노트북 정도를 갖고 장 사장의 저택으로 갔다. 고 진숙이 남편에게 이미 들었다면서 먼저 근무하던 김 기사가 기거하던 이층 방을 사용하라고 했다.
고 진숙은 준우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여러 번 집으로 찾아왔던 준우에게 인사를 받았었고 남편에게서도 들어서 그가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막상 집안에 같이 기거하게 될 그를 마주하고 호기심이 일어났다. 훤칠한 미모와 균형 잡힌 체격의 젊은 사내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설레었다. 그녀는 금전적으로 풍요롭고 해야 할 일도 별로 없어서 부족할 것 없이 자유로웠다.
진숙이 인호의 후처로 들어오면서 바라던 욕망들이 모두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시간이 갈수록 성안에 갇힌 심정이고 생명력이 없는 조화로 가득한 정원에 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젊은 여자들이 있는 집안이지만 활기가 없었다. 꽃이 있다고 하지만 벌 나비가 날아들지 않아 향기를 느낄 수 없고, 늙은 나무가 버티고 있는 정원은 그림에 불과하였다.
간암으로 정기적인 치료와 약을 복용하고 있는 남편과 하루 종일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묵묵히 일만하는 나이든 집사가 진숙이 대면할 수 있는 남자의 전부였다. 먼저 있던 육십이 넘은 운전기사도 무뚝뚝한 남자로서 진숙과 대화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혈기 왕성한 준우의 모습에 그녀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하지만 그녀는 주인 사모님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여 그를 들어 내놓고 반길 수는 없었다.
준우는 나이 지긋한 가정부 진 씨의 안내를 받아 올라간 이층으로 올라갔다. 이층에는 서재로 가득한 거실과 방 두 개가 있었다. 준우가 있을 방에는 김 기사가 사용하던 침대와 책상, 작은 옷장이 남아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방 창문에는 담쟁이 넝쿨 사이로 넓은 정원이 내려다 보였다. 꽤나 큰 규모의 저택으로 일층에는 장 사장 부부와 딸들의 방이 있었고, 가정부와 집사로 일하고 있는 부부는 별채에 기거하고 있었다.
간단히 짐을 정리한 준우는 담쟁이넝쿨 잎이 너울거리는 창문으로 다가섰다. 창문 밖으로는 꽤 넓은 정원이 내려다보였다. 정원에는 허리구부정한 집사 박 씨의 모습이 보였다. 정원수 가지를 치던 박 씨가 하얗게 쉰 머리카락을 쓰러 올리며 허리를 폈다. 준우는 그와 이미 인사를 했던 관계로 고개를 꾸벅여 아는 채를 했다, 하지만 박 씨는 무표정하게 전지가위로 다시 나뭇가지를 자르기 시작한다.
정원과 집 관리 등 허드렛일을 하고 있는 박 씨는 평소에도 과묵한 성격이었다. 가정부 진 씨와 부부사이인 박 씨에게는 단지 외동딸뿐인데 캐나다로 이민 가서 살고 있다고 했다. 식구들은 가정부 진 씨 고향이 강릉이라서 강릉댁이라고 불렀다. 준우는 집안 식구들의 성격과 생활 습관 등을 세심하게 살피는 중이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계획들을 실천하기위해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으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빼앗기고 비로소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알게 된다. 자신이 결정해야 할 일을 결정하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준우는 망령이 되어 떠돌고 있을 어머니와 이모, 그리고 지금도 정신병원에서 자신을 망각하고 고통조차 모르고 있는 여동생을 떠 올리며 분노가 이글거리면서도 한 숨을 내쉬었다. 그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다만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위해 오랜 시간을 투자한 것이다.
답답하고 암울한 생각에 잠겼던 준우는 문득 서재에 있던 피아노를 떠올렸다. 그는 간혹 내면의 세계에 빠져들며 울분을 느끼면 피아노를 치거나 운동을 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방을 나온 그는 서재로 가서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먼지가 없이 윤기가 흐르는 것으로 보아 관리가 잘 되고 있는 피아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건반을 두드려본 그가 의자에 앉았다.
건반위에 손을 얹어 놓은 준우는 천천히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오래간만에 치는 피아노이지만 그의 감정이 몰입되는 음률이 흘러 나왔다. 고요하게 흐르는 선율이 슬프면서도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때로는 강렬하게 터치를 하는 그의 손가락이 건반 위를 미끄러져 나갔다.
그때 거실에서 진숙이 피아노 소리가 나는 층계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던 그녀가 수진의 방문을 열었다. 수진은 책상 앞에 앉아 악보를 옮겨 적고 있었다. 누가 피아노를 치는 것일까? 그녀는 이층에 준우만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쉬지 않고 흐르는 심장의 맥박처럼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피아노 소리. 그녀는 새삼스럽게 음악에 도취되는 기분이었다.
물론 수시로 수진의 바이올린과 피아노 소리가 진숙의 귀에 익숙해 있었다. 계모로 들어온 진숙과 나이 차이가 많지 않은 수진은 서로 대화도 없고 소원한 관계였다. 그래서인지 진숙은 수진의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가 소음으로 들리고 별다른 감흥조차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처럼 그녀가 피아노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흔치 않는 일이었다.
가정부 강릉댁이 음료수를 쟁반에 받쳐 들고 주방에서 나왔다. 강릉댁은 손님들이 찾아오면 음료수를 가져다주는 것이 습관 되어 있었다. 진숙은 그녀가 준우에게 음료수를 가져다주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 챘다. 바라보고 있던 진숙이 불쑥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가져다줄테니, 아줌마는 일 보세요.”
강릉댁이 아무 말 없이 진숙에게 쟁반을 내주었다. 진숙은 잠시 주춤거리더니 이층에서 들리는 피아노 선율을 따라 한 발자국씩 층계를 밟고 올라섰다. 이층에서는 그녀의 예측대로 준우가 피아노 연주에 심취하고 있었다. 준우는 피아노에 집중하고 있느라고 층계를 올라오는 그녀의 발자국 소리를 듣지 못했다.
진숙이 쟁반을 든 채 그의 뒤에 다가섰다. 춤을 추듯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던 준우가 인기척을 느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피아노 앞에 앉았던 준우가 도둑질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일어서려고 했다. 진숙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괜찮아요. 그냥 앉아서 쳐. 듣기 좋은데!”
“피아노가 있기에.......”
“방이 마음에 들는지 모르겠어. 음료수 한잔해요.”
“네. 네!”
엉거주춤 다시 의자에 앉는 준우가 조금은 당황스러워했다. 진숙이 피아노 옆의 탁자에 쟁반을 내려놓으며 팔짱을 끼고 창문에 기대섰다. 그녀는 그에게 존칭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나이는 서른다섯. 나이도 차이 나지만 그녀는 사장의 사모님이고 주인마님이라는 우월감에서였다. 힐끔 쳐다보는 준우의 시선이 그녀의 앞가슴에 멈추었다.
진숙은 평상시 모습대로 민소매의 원피스를 걸치고 있었다. 앞가슴이 패인 원피스 사이로 볼륨감 있는 젖가슴의 굴곡이 선정적으로 들어나 보였다. 그녀는 앞가슴을 가리거나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젊은 남자의 시선을 받는다는 자체로 그녀는 생동감을 느꼈다. 하지만 준우가 그녀를 쳐다보는 것도 잠시이고, 어디로 시선을 둘지 몰라 조금은 당황했다. 그녀가 도리어 그를 안심시켰다.
“식구처럼 편하게 해. 피아노 실력이 수준급인데!”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부족하긴!? 회장님이 칭찬하던데. 인물도 그만하면 손색이 없고........”
“과찬이십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민비서는 어디서 만난 것처럼 낯설지가 않아.”
“글쎄요. 저는 사모님이 초면인데요.”
그렇게 말하지만 준우는 진숙을 이미 만난 적이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살해를 당하기전이었다. 고등학교 졸업반이던 준우가 용돈을 받으려고 어머니 회사에 들렸던 날이었다. 장사장과 다투던 어머니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던 여직원이 바로 진숙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단지 여직원에 불과했던 그녀가 장 사장의 후처가 된 것이다.
준우는 진숙을 처음 보았을 때 의아스럽고 놀라웠다. 그리고 그녀가 어머니를 곤경에 빠트렸던 여직원이라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랬다. 어쩌면 그녀가 직접적으로 그의 어머니를 괴롭히지 않았지만 어머니를 난처하게 만들었던 사람 중에 하나였다. 그를 관심있게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다.
“나한테 부탁할게 있을 가.......!? 내가 부탁해야지. 그런데 내가 괜히 올라와서 시간 뺏었나봐. 어서 계속 쳐. 난 볼일 있지만 내 차로 나갔다 올 테니. 오늘은 회사 안 나가지?”
“네. 다녀오십시오.”
진숙은 집안에서 여주인으로 군림하지만 자신을 알아주는 식구는 없었다. 그녀는 싹싹하고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준우만큼은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녀는 친근한 표정으로 눈 꼬리를 치켜 올리며 배시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층계를 향해 걸어가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와 준우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왠지 그의 시선이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 같아서 엉덩이 밑에 찰랑거리는 치맛자락을 거머쥐었다.
진숙이 내려가고 준우는 골똘히 생각했다. 장 인호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방법이 과연 무엇일까. 처참하게 죽은 어머니나 이모처럼 그들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준우는 죽음은 죽음 자체로 끝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오히려 살인자로 준우 자신이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가 장 인호를 고통스럽게 하는 방법은 그 가족들이 파멸의 구덩이로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게 하는 것이었다.
준우는 다시 피아노 건반위에 손을 얹었다. 답답한 마음을 대뱐하듯이 단조의 화음을 열손가락으로 눌렀다. 그리고 빠른 템포로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율동하는 리듬이 흐르고 때로는 열정적이고 강렬한 선율을 일으켜낸다. 그의 손끝을 따라 일어나는 소리는 광란하기도 하고 웅장한 화음 속에 질주한다.
거실로 내려간 진숙은 한동안 이층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외출 준비를 했다. 그녀가 세면을 하고 욕실에서 나오다가 수진과 마주쳤다. 그녀들은 서로의 시선을 피하며 외면하였다. 돌아 서서 있던 수진은 진숙이 안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욕실로 들어갔다.
수진은 거울 앞에 서서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묶었다. 그녀의 얼굴은 계란형의 단정한 외모이고 몸매가 날씬한 편이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아버지 장 사장을 닮아 키가 크지만, 막내딸은 어머니를 닮아서 크지 않은 키에 귀엽게 생겼다고 했다. 스커트를 올려 엉덩이를 들어내고 양변기에 걸터앉은 수진은 이층에서 들리는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집안에서 피아노를 칠 사람은 그녀 자신뿐이었다.
욕실을 나온 수진이 천천히 이층으로 오르는 층계 앞에 다가섰다. 의아스런 표정을 지은 그녀가 천천히 층계를 오르기 시작했다. 이층으로 오르니 단정한 머리를 하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다가서던 그녀는 그때서야 얼마 전에 몇 번인가 보았던 민 비서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진은 아버지가 하던 말을 흘려들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김 기사 대신에 민 준우 비서가 운전을 하며 집에서 함께 지내게 됐다는 말이었다. 어느새 리드미컬하던 리듬이 바뀌고 슬프면서도 고요한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준우는 음절의 마지막 부분의 화음을 두드리고 잠시 건반위의 손을 멈추었다. 그의 뒤편에서 서있던 수진이 조용히 박수를 쳤다.
“대단하시네. 비창 3악장과 월광 소나타 1악장.”
“아! 보고 있었군요.”
“피아노를 전공하셨어요?”
“전공이라기보다는, 어린 시절부터 취미로.......”
“취미치고는 괜찮은 실력이네. 우리 집에 같이 있게 되었다고요........!?”
“네. 잘 부탁합니다.”
“부탁하긴요!? 할 일만 하면 되요.”
수진의 말투는 부드럽지 못하고 퉁명스러웠다. 어쩌면 거만하면서도 우월감에 젖은 그녀의 태도가 들어나 보인 것이다. 사실 그녀는 준우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호기심을 느낀 상태였다. 집안 식구들은 그녀가 음악공부에만 몰두하고 연애도 모르는 여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는 연애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었다. 그만큼 그녀가 남자들을 하찮게 여기고 있는 것이었다.
준우는 장 사장에 대한 보복을 위해 수진의 마음을 사로잡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투를 듣기에 쉽지 않겠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자아의식이 높고 도도한 여자일수록 단순할 수도 있었다. 수진과 같은 성격의 여자는 의외로 소침하거나 약하게 보이는 남자를 경멸할 수도 있다. 어쩌면 그녀가 카리스마 있고 적극적인 남자에게 약할 수도 있다는 것을 준우는 직감하였다.
“바이올린을 전공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네. 그래요. 그건 왜 물어봐요?”
“관심이 있어서요.”
“무슨 관심이요?”
“하하~! 그렇게 예민하지 말고. 저는 수진 씨 같은 여자 분이 이상형이기에.”
“네........!? 뭐라고요?”
수진은 준우의 당돌한 말에 당황하였다. 대부분 그녀가 만나 본 남자들은 비굴하거나 아첨하기도 하고 주눅이 들어 말을 하지 못했다. 유혹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심인가! 그녀는 아리송하였다. 의아스러워하는 그녀와는 다르게 준우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제 결혼 상대 말입니다! 수진 씨 같은 분!”
“농담하세요? 어떤 여자에게나 그런 상습적인 매너를 보이는군요.”
“아닌데. 하하~! 진심입니다. 그리고 수진 씨, 성격이 간결해서 더욱 좋아 보이네요.”
“민 비서님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은데요!”
“남자가 여자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나쁜 가요! 다만 수진 씨, 마음이 닫혀 있으니 받아 드리지 못하는 것이지.”
“뭐라고요.......!?”
수진은 식구들조차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왠지 준우의 말에 호감을 느꼈다. 그녀는 다만 자존심 때문에 친근하게 다가설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준우는 대답이 없는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도 과히 싫지 않지만 조금은 예민해지는 표정이었다.
준우는 처음부터 너무 저돌적이면 오히려 역효과를 볼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수진의 시선이 피아노 건반을 향했다. 그리고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준우는 그녀의 눈빛이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피아노를 치느냐고 의아스럽게 쳐다보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에게 깍듯이 말했다.
“미안합니다. 주인 허락도 받지 않고 피아노를 쳐서.”
“괜찮아요. 하지만 남의 물건을 함부로 다루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요.”
다소 눈빛을 누그러트렸지만 수진의 말투는 여전히 무뚝뚝하게 들렸다. 준우는 문득 무거워지는 분위기를 느꼈다. 그녀를 향해 빙긋이 웃음을 흘린 그는 코미디언처럼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양 손을 벌렸다.
“후후~! 난, 이따금 예의를 주머니에 넣고, 찾지 못하는 건망증이 있어서.”
“뭐라고요.......!? 지금 농담예요?”
“편한 데로 들어요. 자유니까.”
“기가 막혀..........”
준우는 유머로 친근한 분위기를 만들어 그녀의 도도함을 꺾고 싶었다. 수진은 세 살이나 위인 그에게 조금은 쌀쌀맞게 했다는 생각을 했다. 말없이 뽀로통한 표정으로 돌아섰지만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통통거리는 소리를 내며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부드러운 실크 스커트가 찰랑거리며 휘감기는 그녀의 크지 않은 엉덩이가 좌우로 흔들렸다. 그녀의 가녀린 허리와 군살이 없이 날씬한 각선미의 몸매는 매력적이었다.--------------
“뭐, 또 할 말이 있니?”
“나, 나쁜 애 아녜요. 먼저 번에 고마운 인사치례는 해야지요. 자판기 커피 살 돈은 있어요.”
“하하~! 자판기 커피라고?”
“네. 왜, 시간이 없어요? 아니면 자판기 커피라서 싫어요?”
준우는 빙그레 미소를 띠며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명동까지 얼마 안 되는 거리라서 친구들을 만날 시간은 넉넉했다. 미라가 준우는 팔을 잡아끄는 미라를 마지못해 따라갔다. 그들은 지하철 입구로 들어가서 자판기로 향해 갔다. 준우가 대기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 그녀가 커피를 뽑아 들고 왔다.
“내 성의를 받아 줘서 고마워요. 아저씬 참 마음이 착하다.”
“자꾸 아저씨라고 불러야겠어?”
“그럼 오빠라고 해도 되죠?”
“편 한대로 해. 고등학교 졸업반이니?”
“어떻게 알았어요!”
“미라 얼굴에 써 있네. 학원에 갈 시간 인 것 같은데.”
“피 잇~! 내가 그렇게 어려 보이나. 다른 사람은 대학생으로도 보는데. 학원 같은 데는 구속받기 싫어서 안가요. 아저씨 그 건물에서 무슨 일해요?”
“그냥 사무원이지.”
“으 응! 그렇구나.”
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건물은 대진의 본사 사옥이었다. 그녀의 표정으로 보아 회사에 대해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녀가 당돌하게 준우의 팔에 팔짱을 끼며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준우가 들고 있던 커피를 마시다가 사래가 들렸다. 커피 물을 바닥에 흘리고 그녀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호호호.......! 그렇게 급하세요. 성격이 급하신가?”
“하하~! 글쎄.......! 회사 안에 아는 사람이 있니?”
“그런 거 묻지 말라니까요. 알면 다쳐요.”
“다친다고.......!? 하하~! 그러니 더 궁금해지네.”
준우가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미라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눈웃음을 쳤다. 그는 전혀 두려움 없이 다가서는 그녀의 의도가 의심스러우면서도 점점 관심이 깊어갔다. 그녀는 갈 곳이 없는 사람처럼 여유로워 보였다. 그를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그녀는 짧은 스커트 밑으로 들어낸 종아리를 흔들며 콧노래를 불렀다. 그녀가 엉뚱한 질문을 했다.
“오빠! 멋있는데, 애인 있어요?”
“애인!? 하하~! 사랑하는 세상 사람이 다 애인이지.”
“피 잇~! 무슨 박애주의자도 아니고.........”
“이만, 난 가봐야겠다.”
준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빈 종이컵을 휴지통에 넣었다. 지하철 탑승 승강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가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 뒤편에 다가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미라가 보조개를 드리운 미소를 띠고 손을 흔들었다.
“오빠, 꼭 다음에 봐요.”
“.........”
삼 십 여분 후, 준우는 명동의 음식점에서 고등학교 친구 두 명과 만나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학창시절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있느라고 친구가 많지 않았다. 그의 앞자리에 앉은 이 정수는 학교에서 그와 성적이 일 이등을 다투던 친구로 대학 강사이고 옆에 있는 최 철민은 합기도를 같이 했던 친구인데 체육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준우와 그들은 술이 조금 취한 상태였다. 학창시절 추억을 얘기하던 철민이 준우의 옆구리를 툭 쳤다.
“철민아! 너, 황 은지라고 알지?”
“왜 너를 쫓아다니던 XX여고에 다니던 애 있잖아. 너의 집 옆에서 살았고.”
“아! 기억나지.”
“은지는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결혼했어.”
“그래......!? 일찍 결혼했네.”
준우는 허공을 쳐다보면서 추억을 떠올렸다. 그에게는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의 여자가 은지였다. 그를 성적인 욕구에 빠져 들게 했던 어머니가 냉랭해지고, 그가 처음으로 관심을 가졌던 여자였다. 그는 극장과 공원 등을 데이트하며 풋풋한 체취를 느꼈던 그녀의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철민이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말이야. 은지가 결혼한 남자가 스무 살이나 많단다. 그러니까 그 남자의 딸이 대학에 입학했다고 했으니 너무했지.”
“왜.......! 그런 결혼을 했지?”
“들리는 말에는 집안을 살리려고 그런 모양인데. 무슨 심청이도 아니고.”
“.........”
은지의 가정형편이 어려웠다는 것은 준우도 잘 알고 있었다. 식구들도 다섯 형제나 있었고 그녀의 아버지는 막노동을 해서 생활을 유지 했다는 것도 준우는 알고 있었다. 정수가 술잔을 기울여 마시며 한 숨을 쉬고 한마디 거들었다.
“음......! 돈이란 삶에 수단인데.......목적이 되 버렸으니, 인간 세상은 말세야.”
“그런데 말이야. 준우야. 이 말을 해야 하는지..........”
철민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준우를 빤히 쳐다보며 우물쭈물했다. 준우가 의아스런 눈빛으로 지그시 그를 마주 바라봤다. 철민은 정호를 한번 쳐다보면서 말을 해도 괜찮은지 생각을 했다. 준우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기대가 되고 정호는 궁금한 눈치였다. 철민이 술잔을 들어 마시고 빈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은지를 얼마 전에 만났었어. 그런데 은지가........”
“.........”
“준우, 너를 한 번 만나고 싶다는 구나.”
“나를........!? 왜?”
“그건 나도 몰라. 혹시 만나면 전해 주라고 하면서 전화번호를 적어 주더구나.”
철민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뒤적거렸다. 그리고 메모지 한 장을 꺼내 준우에게 전달했다. 메모지를 받아든 준우는 묘한 감정에 빠져 들었다. 은지가 왜 나를 만나려 할까. 무슨 할 말이 있는지. 그렇다고 잊을 수 없는 육체적인 사랑을 한 것도 아니고. 혹시 결혼생활이 복잡하여 도움을 청하려는지. 준우는 도저히 은지가 자신을 만나려는 목적을 알 수 없었다.
은지에 대한 철민의 말이 준우를 무척 궁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업무에 바쁜 생활을 하다 보니 은지에 대한 관심은 준우의 기억 속에 사라져갔다. 그는 어떻게든지 장 인호 사장의 사생활 속으로 들어갈 기회만을 노렸다. 그는 차츰 장 사장의 사업에 대한 내막도 알게 되고 점점 그의 심복이 되어갔다.
준우는 승용차를 운전하고 장 사장과 같이 대전 지점에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당일로 다녀오는 길이라서 고속도로는 어두워졌고 몹시 피곤하였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행렬을 이루는 밤길에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고 있어 그는 운전에 신경을 썼다. 승용차 뒷좌석에 앉은 장 사장이 불쑥 그에게 물었다.
“민비서!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다면서?”
“네.”
“그럼 어디서 숙식을 하고 있나?”
“큰 아버님 댁에 있습니다.”
“거기서 나올 생각은 없나?”
“네.........!?”
갑작스런 장 사장의 질문에 준우는 백미러를 들여다보았다. 그가 무슨 의미로 묻는 것인지 몰라서였다. 준우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짐작이라도 하듯이 장사장이 말했다.
“내 말은 말이야. 아예 우리 집에 와서 같이 있으면 서로 편할 거 같아서 그래.”
“.........!?”
“먼저 있던 김 기사도 우리 집에 같이 있었어. 먼저 김 기사가 사용하던 도 비어있거든. 어때 민비서 생각은?”
“글쎄요. 저는 괜찮습니다만, 회장님께 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요!?”
“난 좋지. 서로 편하잖아. 잘 생각해보라 구. 괜찮으면 내가 마누라한테 말해 놓을 테니.”
“...........”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 사실 준우는 장 사장의 말이 반가웠다.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든지 장 사장의 사생활에 접근하려고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 준우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기회였다. 그러나 그는 장 사장의 말에 쉽게 대답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장 사장의 집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인식시켜야 하기 때문이었다.
장 사장도 준우가 심사숙고하게 생각 하는 줄 알고 더 묻지 않고 잠이 들었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침묵과 자동차의 물결속애 준우는 승용차를 몰아 판교인터제인지를 통과하였다. 장 사장의 저택이 있는 약수동으로 가기위해 금호터널을 지나고 있을 때 장 사장이 침묵을 깨고 준우에게 물었다.
“어때, 생각해 봤나?”
“네.......!?”
“우리 집으로 들어오겠냐고?”
“네.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잘 생각했어. 내일 당장 들어오도록 해.”
“내일 당장 요?”
“소뿔도 단김에 빼라고. 뭐 뜸 들릴 필요 있나.”
“네........? 네, 알았습니다.”
마지못해 대답하는 척 하는 준우의 머릿속에는 앞으로의 계획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장 사장은 그가 왜 대진 컨설팅에 들어왔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그는 어떻게 자신의 여자들을 살해한 장 사장에게 보복을 해야 할지 여러 가지 방안을 떠 올렸다. 그의 머릿속에 떠올리는 상대는 장 인호사장의 가족들이었다.
장 인호는 삼년 전에 경리과에 근무하던 여직원 고 진숙과과 재혼을 하였다. 이제 사십이라는 젊은 나이에도 그녀가 장 인호와 결혼한 것은 풍족한 경제력 때문이었다. 누구라도 그녀를 나이 많은 장 인호의 아내로 보지 않는다. 장 인호의 큰 딸인 장 수진은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생이다. 수진은 실력을 인정받아 서울 합창단원으로 있으며 오직 음악에만 열중하는 백치 같은 미인이다.
준우가 아직 만나보지 못한 인물은 장 사장의 작은 딸과 의문의 남자였다. 그의 어머니와 이모가 살해되고 여동생 정아를 강간하던 남자의 이름이다. 장 인호가 다리를 저는 사내를 불렀던 이름은 분명히 창식이었다. 그러나 아직 준우는 창식이 누구인지 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가 창식을 찾는 것도 장 사장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오후, 장 사장은 직접 자가운전을 해서 골프를 치러 간다고 했다. 그리고 준우에게 시간을 줄 테니 짐을 옮기라고 했다. 그는 간단한 소지품과 옷가지, 그리고 즐겨보는 책과 노트북 정도를 갖고 장 사장의 저택으로 갔다. 고 진숙이 남편에게 이미 들었다면서 먼저 근무하던 김 기사가 기거하던 이층 방을 사용하라고 했다.
고 진숙은 준우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여러 번 집으로 찾아왔던 준우에게 인사를 받았었고 남편에게서도 들어서 그가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막상 집안에 같이 기거하게 될 그를 마주하고 호기심이 일어났다. 훤칠한 미모와 균형 잡힌 체격의 젊은 사내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설레었다. 그녀는 금전적으로 풍요롭고 해야 할 일도 별로 없어서 부족할 것 없이 자유로웠다.
진숙이 인호의 후처로 들어오면서 바라던 욕망들이 모두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시간이 갈수록 성안에 갇힌 심정이고 생명력이 없는 조화로 가득한 정원에 살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젊은 여자들이 있는 집안이지만 활기가 없었다. 꽃이 있다고 하지만 벌 나비가 날아들지 않아 향기를 느낄 수 없고, 늙은 나무가 버티고 있는 정원은 그림에 불과하였다.
간암으로 정기적인 치료와 약을 복용하고 있는 남편과 하루 종일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묵묵히 일만하는 나이든 집사가 진숙이 대면할 수 있는 남자의 전부였다. 먼저 있던 육십이 넘은 운전기사도 무뚝뚝한 남자로서 진숙과 대화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혈기 왕성한 준우의 모습에 그녀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하지만 그녀는 주인 사모님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여 그를 들어 내놓고 반길 수는 없었다.
준우는 나이 지긋한 가정부 진 씨의 안내를 받아 올라간 이층으로 올라갔다. 이층에는 서재로 가득한 거실과 방 두 개가 있었다. 준우가 있을 방에는 김 기사가 사용하던 침대와 책상, 작은 옷장이 남아 있었다. 그가 바라보는 방 창문에는 담쟁이 넝쿨 사이로 넓은 정원이 내려다 보였다. 꽤나 큰 규모의 저택으로 일층에는 장 사장 부부와 딸들의 방이 있었고, 가정부와 집사로 일하고 있는 부부는 별채에 기거하고 있었다.
간단히 짐을 정리한 준우는 담쟁이넝쿨 잎이 너울거리는 창문으로 다가섰다. 창문 밖으로는 꽤 넓은 정원이 내려다보였다. 정원에는 허리구부정한 집사 박 씨의 모습이 보였다. 정원수 가지를 치던 박 씨가 하얗게 쉰 머리카락을 쓰러 올리며 허리를 폈다. 준우는 그와 이미 인사를 했던 관계로 고개를 꾸벅여 아는 채를 했다, 하지만 박 씨는 무표정하게 전지가위로 다시 나뭇가지를 자르기 시작한다.
정원과 집 관리 등 허드렛일을 하고 있는 박 씨는 평소에도 과묵한 성격이었다. 가정부 진 씨와 부부사이인 박 씨에게는 단지 외동딸뿐인데 캐나다로 이민 가서 살고 있다고 했다. 식구들은 가정부 진 씨 고향이 강릉이라서 강릉댁이라고 불렀다. 준우는 집안 식구들의 성격과 생활 습관 등을 세심하게 살피는 중이었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계획들을 실천하기위해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으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빼앗기고 비로소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을 알게 된다. 자신이 결정해야 할 일을 결정하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준우는 망령이 되어 떠돌고 있을 어머니와 이모, 그리고 지금도 정신병원에서 자신을 망각하고 고통조차 모르고 있는 여동생을 떠 올리며 분노가 이글거리면서도 한 숨을 내쉬었다. 그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다만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위해 오랜 시간을 투자한 것이다.
답답하고 암울한 생각에 잠겼던 준우는 문득 서재에 있던 피아노를 떠올렸다. 그는 간혹 내면의 세계에 빠져들며 울분을 느끼면 피아노를 치거나 운동을 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방을 나온 그는 서재로 가서 피아노 뚜껑을 열었다. 먼지가 없이 윤기가 흐르는 것으로 보아 관리가 잘 되고 있는 피아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건반을 두드려본 그가 의자에 앉았다.
건반위에 손을 얹어 놓은 준우는 천천히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오래간만에 치는 피아노이지만 그의 감정이 몰입되는 음률이 흘러 나왔다. 고요하게 흐르는 선율이 슬프면서도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때로는 강렬하게 터치를 하는 그의 손가락이 건반 위를 미끄러져 나갔다.
그때 거실에서 진숙이 피아노 소리가 나는 층계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던 그녀가 수진의 방문을 열었다. 수진은 책상 앞에 앉아 악보를 옮겨 적고 있었다. 누가 피아노를 치는 것일까? 그녀는 이층에 준우만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쉬지 않고 흐르는 심장의 맥박처럼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피아노 소리. 그녀는 새삼스럽게 음악에 도취되는 기분이었다.
물론 수시로 수진의 바이올린과 피아노 소리가 진숙의 귀에 익숙해 있었다. 계모로 들어온 진숙과 나이 차이가 많지 않은 수진은 서로 대화도 없고 소원한 관계였다. 그래서인지 진숙은 수진의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가 소음으로 들리고 별다른 감흥조차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처럼 그녀가 피아노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흔치 않는 일이었다.
가정부 강릉댁이 음료수를 쟁반에 받쳐 들고 주방에서 나왔다. 강릉댁은 손님들이 찾아오면 음료수를 가져다주는 것이 습관 되어 있었다. 진숙은 그녀가 준우에게 음료수를 가져다주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 챘다. 바라보고 있던 진숙이 불쑥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가져다줄테니, 아줌마는 일 보세요.”
강릉댁이 아무 말 없이 진숙에게 쟁반을 내주었다. 진숙은 잠시 주춤거리더니 이층에서 들리는 피아노 선율을 따라 한 발자국씩 층계를 밟고 올라섰다. 이층에서는 그녀의 예측대로 준우가 피아노 연주에 심취하고 있었다. 준우는 피아노에 집중하고 있느라고 층계를 올라오는 그녀의 발자국 소리를 듣지 못했다.
진숙이 쟁반을 든 채 그의 뒤에 다가섰다. 춤을 추듯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던 준우가 인기척을 느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피아노 앞에 앉았던 준우가 도둑질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일어서려고 했다. 진숙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괜찮아요. 그냥 앉아서 쳐. 듣기 좋은데!”
“피아노가 있기에.......”
“방이 마음에 들는지 모르겠어. 음료수 한잔해요.”
“네. 네!”
엉거주춤 다시 의자에 앉는 준우가 조금은 당황스러워했다. 진숙이 피아노 옆의 탁자에 쟁반을 내려놓으며 팔짱을 끼고 창문에 기대섰다. 그녀는 그에게 존칭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나이는 서른다섯. 나이도 차이 나지만 그녀는 사장의 사모님이고 주인마님이라는 우월감에서였다. 힐끔 쳐다보는 준우의 시선이 그녀의 앞가슴에 멈추었다.
진숙은 평상시 모습대로 민소매의 원피스를 걸치고 있었다. 앞가슴이 패인 원피스 사이로 볼륨감 있는 젖가슴의 굴곡이 선정적으로 들어나 보였다. 그녀는 앞가슴을 가리거나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젊은 남자의 시선을 받는다는 자체로 그녀는 생동감을 느꼈다. 하지만 준우가 그녀를 쳐다보는 것도 잠시이고, 어디로 시선을 둘지 몰라 조금은 당황했다. 그녀가 도리어 그를 안심시켰다.
“식구처럼 편하게 해. 피아노 실력이 수준급인데!”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부족하긴!? 회장님이 칭찬하던데. 인물도 그만하면 손색이 없고........”
“과찬이십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민비서는 어디서 만난 것처럼 낯설지가 않아.”
“글쎄요. 저는 사모님이 초면인데요.”
그렇게 말하지만 준우는 진숙을 이미 만난 적이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살해를 당하기전이었다. 고등학교 졸업반이던 준우가 용돈을 받으려고 어머니 회사에 들렸던 날이었다. 장사장과 다투던 어머니의 머리채를 휘어잡았던 여직원이 바로 진숙이었다. 그 당시만 해도 단지 여직원에 불과했던 그녀가 장 사장의 후처가 된 것이다.
준우는 진숙을 처음 보았을 때 의아스럽고 놀라웠다. 그리고 그녀가 어머니를 곤경에 빠트렸던 여직원이라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랬다. 어쩌면 그녀가 직접적으로 그의 어머니를 괴롭히지 않았지만 어머니를 난처하게 만들었던 사람 중에 하나였다. 그를 관심있게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이 반짝였다.
“나한테 부탁할게 있을 가.......!? 내가 부탁해야지. 그런데 내가 괜히 올라와서 시간 뺏었나봐. 어서 계속 쳐. 난 볼일 있지만 내 차로 나갔다 올 테니. 오늘은 회사 안 나가지?”
“네. 다녀오십시오.”
진숙은 집안에서 여주인으로 군림하지만 자신을 알아주는 식구는 없었다. 그녀는 싹싹하고 친근감을 느끼게 하는 준우만큼은 자신의 편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녀는 친근한 표정으로 눈 꼬리를 치켜 올리며 배시시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층계를 향해 걸어가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와 준우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녀는 왠지 그의 시선이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 같아서 엉덩이 밑에 찰랑거리는 치맛자락을 거머쥐었다.
진숙이 내려가고 준우는 골똘히 생각했다. 장 인호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방법이 과연 무엇일까. 처참하게 죽은 어머니나 이모처럼 그들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준우는 죽음은 죽음 자체로 끝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오히려 살인자로 준우 자신이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가 장 인호를 고통스럽게 하는 방법은 그 가족들이 파멸의 구덩이로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게 하는 것이었다.
준우는 다시 피아노 건반위에 손을 얹었다. 답답한 마음을 대뱐하듯이 단조의 화음을 열손가락으로 눌렀다. 그리고 빠른 템포로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율동하는 리듬이 흐르고 때로는 열정적이고 강렬한 선율을 일으켜낸다. 그의 손끝을 따라 일어나는 소리는 광란하기도 하고 웅장한 화음 속에 질주한다.
거실로 내려간 진숙은 한동안 이층에서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외출 준비를 했다. 그녀가 세면을 하고 욕실에서 나오다가 수진과 마주쳤다. 그녀들은 서로의 시선을 피하며 외면하였다. 돌아 서서 있던 수진은 진숙이 안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욕실로 들어갔다.
수진은 거울 앞에 서서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을 뒤로 질끈 묶었다. 그녀의 얼굴은 계란형의 단정한 외모이고 몸매가 날씬한 편이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아버지 장 사장을 닮아 키가 크지만, 막내딸은 어머니를 닮아서 크지 않은 키에 귀엽게 생겼다고 했다. 스커트를 올려 엉덩이를 들어내고 양변기에 걸터앉은 수진은 이층에서 들리는 피아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집안에서 피아노를 칠 사람은 그녀 자신뿐이었다.
욕실을 나온 수진이 천천히 이층으로 오르는 층계 앞에 다가섰다. 의아스런 표정을 지은 그녀가 천천히 층계를 오르기 시작했다. 이층으로 오르니 단정한 머리를 하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다가서던 그녀는 그때서야 얼마 전에 몇 번인가 보았던 민 비서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진은 아버지가 하던 말을 흘려들었던 것을 기억해냈다. 김 기사 대신에 민 준우 비서가 운전을 하며 집에서 함께 지내게 됐다는 말이었다. 어느새 리드미컬하던 리듬이 바뀌고 슬프면서도 고요한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준우는 음절의 마지막 부분의 화음을 두드리고 잠시 건반위의 손을 멈추었다. 그의 뒤편에서 서있던 수진이 조용히 박수를 쳤다.
“대단하시네. 비창 3악장과 월광 소나타 1악장.”
“아! 보고 있었군요.”
“피아노를 전공하셨어요?”
“전공이라기보다는, 어린 시절부터 취미로.......”
“취미치고는 괜찮은 실력이네. 우리 집에 같이 있게 되었다고요........!?”
“네. 잘 부탁합니다.”
“부탁하긴요!? 할 일만 하면 되요.”
수진의 말투는 부드럽지 못하고 퉁명스러웠다. 어쩌면 거만하면서도 우월감에 젖은 그녀의 태도가 들어나 보인 것이다. 사실 그녀는 준우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호기심을 느낀 상태였다. 집안 식구들은 그녀가 음악공부에만 몰두하고 연애도 모르는 여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는 연애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에 드는 남자가 없었다. 그만큼 그녀가 남자들을 하찮게 여기고 있는 것이었다.
준우는 장 사장에 대한 보복을 위해 수진의 마음을 사로잡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투를 듣기에 쉽지 않겠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자아의식이 높고 도도한 여자일수록 단순할 수도 있었다. 수진과 같은 성격의 여자는 의외로 소침하거나 약하게 보이는 남자를 경멸할 수도 있다. 어쩌면 그녀가 카리스마 있고 적극적인 남자에게 약할 수도 있다는 것을 준우는 직감하였다.
“바이올린을 전공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요?”
“네. 그래요. 그건 왜 물어봐요?”
“관심이 있어서요.”
“무슨 관심이요?”
“하하~! 그렇게 예민하지 말고. 저는 수진 씨 같은 여자 분이 이상형이기에.”
“네........!? 뭐라고요?”
수진은 준우의 당돌한 말에 당황하였다. 대부분 그녀가 만나 본 남자들은 비굴하거나 아첨하기도 하고 주눅이 들어 말을 하지 못했다. 유혹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심인가! 그녀는 아리송하였다. 의아스러워하는 그녀와는 다르게 준우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제 결혼 상대 말입니다! 수진 씨 같은 분!”
“농담하세요? 어떤 여자에게나 그런 상습적인 매너를 보이는군요.”
“아닌데. 하하~! 진심입니다. 그리고 수진 씨, 성격이 간결해서 더욱 좋아 보이네요.”
“민 비서님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은데요!”
“남자가 여자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나쁜 가요! 다만 수진 씨, 마음이 닫혀 있으니 받아 드리지 못하는 것이지.”
“뭐라고요.......!?”
수진은 식구들조차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왠지 준우의 말에 호감을 느꼈다. 그녀는 다만 자존심 때문에 친근하게 다가설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준우는 대답이 없는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도 과히 싫지 않지만 조금은 예민해지는 표정이었다.
준우는 처음부터 너무 저돌적이면 오히려 역효과를 볼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수진의 시선이 피아노 건반을 향했다. 그리고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준우는 그녀의 눈빛이 주인의 허락도 받지 않고 피아노를 치느냐고 의아스럽게 쳐다보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에게 깍듯이 말했다.
“미안합니다. 주인 허락도 받지 않고 피아노를 쳐서.”
“괜찮아요. 하지만 남의 물건을 함부로 다루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요.”
다소 눈빛을 누그러트렸지만 수진의 말투는 여전히 무뚝뚝하게 들렸다. 준우는 문득 무거워지는 분위기를 느꼈다. 그녀를 향해 빙긋이 웃음을 흘린 그는 코미디언처럼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양 손을 벌렸다.
“후후~! 난, 이따금 예의를 주머니에 넣고, 찾지 못하는 건망증이 있어서.”
“뭐라고요.......!? 지금 농담예요?”
“편한 데로 들어요. 자유니까.”
“기가 막혀..........”
준우는 유머로 친근한 분위기를 만들어 그녀의 도도함을 꺾고 싶었다. 수진은 세 살이나 위인 그에게 조금은 쌀쌀맞게 했다는 생각을 했다. 말없이 뽀로통한 표정으로 돌아섰지만 그녀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통통거리는 소리를 내며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부드러운 실크 스커트가 찰랑거리며 휘감기는 그녀의 크지 않은 엉덩이가 좌우로 흔들렸다. 그녀의 가녀린 허리와 군살이 없이 날씬한 각선미의 몸매는 매력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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