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향기 프롤로그
아련한 사랑의 날들 속절없이 지나
눈물로 지새는 아픔만 남았지만
사랑으로 가득했던 그 날 그 추억은
마음 속 비단 물결되어 아롱져 흐른다오.
군대를 재대하고 우연히 집에서 엄마의 일기장을 보았는데 위의 시 내용과 비슷한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살아오며 여러번 엄마를 실망시키기도 했지만 그래도 우리엄마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는데
엄마의 마음 속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아픔이 있었던거 같습니다.
옛날 생각을 하며 글을 써 봤는데 필력이 없어서인지 소설처럼 되더군요.
그 글은 근친카페에 올려져 있는데 조금 더 추가해서 계속 이어갈 생각입니다.
앞으로 써 내려갈 이야기는 사실을 바탕으로 하되 주변적인 것은 가공해서 써 보겠습니다.
나는 어릴 때 시골 촌놈으로 자랐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기억은 논과 밭에서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 일을 했던 모습이다.
요즘 아이들처럼 예쁘고 잘생간 모습이 아닌 얼굴이 새까만 남이 보기에는 볼품없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우리 집은 시골이라 부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동네에서는 재일 부자였다.
우리 가족이 먹을 수 있는 정도의 농사는 지었지만 주로 논과 밭을 임대해 주고 소작료를 받았다.
비닐하우스 농법이 보급되어 한동안 엄마와 아빠는 겨울농사에 재미를 들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하우스농사에 매달린것도 아니고 우리집에서 지어논 많은 비닐하우스를이
결국엔 동네 종묘 인큐베이터로 사용되었다.
아주 어릴때부터 나는 아빠랑 같이 밭을 일구고, 논에 물을 대고, 모를 심고, 추수를 같이 한것 같다.
그러다가 초등학교때 삼촌이 사고로 죽고나서 아빠가 운송회사를 운영하게 되었다.
주업이 벌목과 운반이었다.
아빠는 주로 수요일 집에 왔다가 금요일이나 토요일 아침에 부산으로 떠났다.
삼촌이 죽고나서 숙모는 아빠의 첩살이를 했다.
집은 따로 떨어져 살았고, 종종 숙모가 와서 엄마에게 인사를 했다.
동생은 숙모를 엄청 좋아해서 찾아오면 맨날 만나면서도 오랫만에 만난 모자처럼 껴안았다.
숙모는 그런 내 동생의 손을 꼭 잡고, 종종 숙모랑 같이 숙모집에서 자곤 했다.
엄마는 그런 동생을 보고서 속상한지 둘이 같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누가 낳은 자식인지 모르겠다며 섭섭해 하는 것 같았다.
삼촌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나보다 한살 아래의 동생이었다.
상현이는 삼촌이 죽고나서 내 아빠를 자기 아빠처럼 좋아했고, 아빠도 우리와 구분없이 엄청 사랑해 주었다.
내 동생 재우나 나도 상현이를 형처럼 동생처럼 그렇게 여기며 살았다.
삼촌이 죽고나서 1년 후에 희숙이 숙모에게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그애는 당연히 아빠의 아이였다.
엄마 말로는 아빠는 삼촌이 죽고나서 숙모를 건드린게 아니라 그 전부터 살을 비볐다고 한다.
재수씨를 성추행한 한나라당 무슨 의원처럼 아빠는 마음에 드는 여자를 건드리는 습성이 거침이 없었다.
그 전에는 다들 숙모를 무슨무슨댁 이라고 부르다가 희숙이가 태어나자 명칭이 희숙이엄마로 바뀌었다.
희숙이숙모의 진짜 이름을 나는 모르겠다.
아빠는 희숙이가 커서도 숙모를 희숙아 라고 부르는데
숙모나 희숙이나 아빠가 누구를 부르는지 용하게 아는 것 같았다.
숙모는 엄마보고 형님이라 불렀고, 엄마도 아빠처럼 숙모를 희숙이라고 불렀다.
겉으로 보기에 엄마가 더 젊어 보여도 난 엄마가 형님이라서 숙모보다 나이가 많은 줄 알았다.
근데 엄마 생일날 숙모가 더 나이가 많다는 걸 알았다.
아빠는 아들에게 공평하듯이 엄마와 숙모에게도 공평했다.
하루를 숙모와 자면 다음은 반드시 엄마와 잤다.
가끔 아빠가 엄마랑 몇일동안 연속해서 박는 날은 숙모의 생리일이었다.
아빠는 난봉꾼인지 아닌진 모르겠지만 오래전부터 여러 아줌마를 건드렸다고 한다.
그런 일이 생기면 당연히 엄마는 노발대발하고 아빠는 엄마에게 싹싹 빌었다.
다시는 안그러겠다고 하면서도 다음에 또 일이 터지고 엄마는 아줌마를 찾아가서 돈을 쥐어주고 마무리한다.
동네의 많은 과부들이 아빠를 유혹했지만 아빠는 절대로 과부는 안건드렸다고 한다.
아빠친구가 과부때문에 칼부림을 당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처녀도 안건드린걸 보면 그냥 아빠의 취향이 유부녀인지도 모르겠다.
한번은 엄마가 동생 찾아보라고 해서 희숙이숙모집에 가 보았다.
여름이라 대문이 다 열려 있는데 집이 너무 조용하였다.
사람이 없나보다 생각하며 들어갔는데 상현이와 내 동생이 대청마루에서 모로누워 자고 있는 숙모의 치마를
올려서는 둘이서 팬티를 입지않은 숙모의 맨 엉덩이와 보지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엉덩이를 벌려 항문을 찔러보고 보지에 손까락을 넣고 있는데
내가 다가가자 둘이 날 보더니 당황했는지 급하게 치마를 내렸다.
난 입에다 손까락을 대고 조용하라며 둘을 소리내지 못하게 하고는
두녀석이 보고 있었던 숙모의 보지를 보기위해 치마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갑자기 숙모의 손이 치마를 덮고는 일어나는 것이었다.
"왔니?"
"예 엄마가 동생 찾아보래요.."
숙모의 눈은 전혀 자다가 일어나 눈이 아니었다.
난 뻘쭘해져서 인사하고 그냥 나와버렸다.
숙모가 일부러 둘에게만 보지를 보였을까?
그냥 자다가 일어났을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그 일은 잊어버렸다.
아련한 사랑의 날들 속절없이 지나
눈물로 지새는 아픔만 남았지만
사랑으로 가득했던 그 날 그 추억은
마음 속 비단 물결되어 아롱져 흐른다오.
군대를 재대하고 우연히 집에서 엄마의 일기장을 보았는데 위의 시 내용과 비슷한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살아오며 여러번 엄마를 실망시키기도 했지만 그래도 우리엄마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는데
엄마의 마음 속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아픔이 있었던거 같습니다.
옛날 생각을 하며 글을 써 봤는데 필력이 없어서인지 소설처럼 되더군요.
그 글은 근친카페에 올려져 있는데 조금 더 추가해서 계속 이어갈 생각입니다.
앞으로 써 내려갈 이야기는 사실을 바탕으로 하되 주변적인 것은 가공해서 써 보겠습니다.
나는 어릴 때 시골 촌놈으로 자랐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기억은 논과 밭에서 뜨거운 뙤약볕 아래에서 일을 했던 모습이다.
요즘 아이들처럼 예쁘고 잘생간 모습이 아닌 얼굴이 새까만 남이 보기에는 볼품없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우리 집은 시골이라 부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동네에서는 재일 부자였다.
우리 가족이 먹을 수 있는 정도의 농사는 지었지만 주로 논과 밭을 임대해 주고 소작료를 받았다.
비닐하우스 농법이 보급되어 한동안 엄마와 아빠는 겨울농사에 재미를 들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하우스농사에 매달린것도 아니고 우리집에서 지어논 많은 비닐하우스를이
결국엔 동네 종묘 인큐베이터로 사용되었다.
아주 어릴때부터 나는 아빠랑 같이 밭을 일구고, 논에 물을 대고, 모를 심고, 추수를 같이 한것 같다.
그러다가 초등학교때 삼촌이 사고로 죽고나서 아빠가 운송회사를 운영하게 되었다.
주업이 벌목과 운반이었다.
아빠는 주로 수요일 집에 왔다가 금요일이나 토요일 아침에 부산으로 떠났다.
삼촌이 죽고나서 숙모는 아빠의 첩살이를 했다.
집은 따로 떨어져 살았고, 종종 숙모가 와서 엄마에게 인사를 했다.
동생은 숙모를 엄청 좋아해서 찾아오면 맨날 만나면서도 오랫만에 만난 모자처럼 껴안았다.
숙모는 그런 내 동생의 손을 꼭 잡고, 종종 숙모랑 같이 숙모집에서 자곤 했다.
엄마는 그런 동생을 보고서 속상한지 둘이 같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며
누가 낳은 자식인지 모르겠다며 섭섭해 하는 것 같았다.
삼촌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나보다 한살 아래의 동생이었다.
상현이는 삼촌이 죽고나서 내 아빠를 자기 아빠처럼 좋아했고, 아빠도 우리와 구분없이 엄청 사랑해 주었다.
내 동생 재우나 나도 상현이를 형처럼 동생처럼 그렇게 여기며 살았다.
삼촌이 죽고나서 1년 후에 희숙이 숙모에게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그애는 당연히 아빠의 아이였다.
엄마 말로는 아빠는 삼촌이 죽고나서 숙모를 건드린게 아니라 그 전부터 살을 비볐다고 한다.
재수씨를 성추행한 한나라당 무슨 의원처럼 아빠는 마음에 드는 여자를 건드리는 습성이 거침이 없었다.
그 전에는 다들 숙모를 무슨무슨댁 이라고 부르다가 희숙이가 태어나자 명칭이 희숙이엄마로 바뀌었다.
희숙이숙모의 진짜 이름을 나는 모르겠다.
아빠는 희숙이가 커서도 숙모를 희숙아 라고 부르는데
숙모나 희숙이나 아빠가 누구를 부르는지 용하게 아는 것 같았다.
숙모는 엄마보고 형님이라 불렀고, 엄마도 아빠처럼 숙모를 희숙이라고 불렀다.
겉으로 보기에 엄마가 더 젊어 보여도 난 엄마가 형님이라서 숙모보다 나이가 많은 줄 알았다.
근데 엄마 생일날 숙모가 더 나이가 많다는 걸 알았다.
아빠는 아들에게 공평하듯이 엄마와 숙모에게도 공평했다.
하루를 숙모와 자면 다음은 반드시 엄마와 잤다.
가끔 아빠가 엄마랑 몇일동안 연속해서 박는 날은 숙모의 생리일이었다.
아빠는 난봉꾼인지 아닌진 모르겠지만 오래전부터 여러 아줌마를 건드렸다고 한다.
그런 일이 생기면 당연히 엄마는 노발대발하고 아빠는 엄마에게 싹싹 빌었다.
다시는 안그러겠다고 하면서도 다음에 또 일이 터지고 엄마는 아줌마를 찾아가서 돈을 쥐어주고 마무리한다.
동네의 많은 과부들이 아빠를 유혹했지만 아빠는 절대로 과부는 안건드렸다고 한다.
아빠친구가 과부때문에 칼부림을 당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처녀도 안건드린걸 보면 그냥 아빠의 취향이 유부녀인지도 모르겠다.
한번은 엄마가 동생 찾아보라고 해서 희숙이숙모집에 가 보았다.
여름이라 대문이 다 열려 있는데 집이 너무 조용하였다.
사람이 없나보다 생각하며 들어갔는데 상현이와 내 동생이 대청마루에서 모로누워 자고 있는 숙모의 치마를
올려서는 둘이서 팬티를 입지않은 숙모의 맨 엉덩이와 보지를 들여다 보고 있었다.
엉덩이를 벌려 항문을 찔러보고 보지에 손까락을 넣고 있는데
내가 다가가자 둘이 날 보더니 당황했는지 급하게 치마를 내렸다.
난 입에다 손까락을 대고 조용하라며 둘을 소리내지 못하게 하고는
두녀석이 보고 있었던 숙모의 보지를 보기위해 치마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갑자기 숙모의 손이 치마를 덮고는 일어나는 것이었다.
"왔니?"
"예 엄마가 동생 찾아보래요.."
숙모의 눈은 전혀 자다가 일어나 눈이 아니었다.
난 뻘쭘해져서 인사하고 그냥 나와버렸다.
숙모가 일부러 둘에게만 보지를 보였을까?
그냥 자다가 일어났을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그 일은 잊어버렸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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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접속일 | 2024-11-03 | ||
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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