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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낭화(며느리 밥풀꽃 이야기) - 2부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4 14:48 1,406회 0건
‘저희 고객의 핸드폰이 꺼져 있습니다.’
변함없이 들려오는 기계음에 화가 난 정우가 핸드폰을 집어 던지려다 참고 있었다.
정우는 다시 시계를 응시했다.
시간은 벌써 아침 아홉시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유진이 돌아오지 않았다.
자신이 어제 돌아오는 것을 모를 리 없건만, 불이 꺼져 있는 집 어디에도 유진은 없었고, 밤새 초조한 마음으로 유진을 기다렸지만, 아침이 되도록 유진에게 연락은 물론이고 핸드폰마저 꺼져 있자 정우는 미칠 것만 같았다.
유진이 자신이 없는 사이 혹여 나쁜 마음을 먹은 것은 아니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혹여 지난번처럼 몹쓸 일이 유진에게 다시 벌어진 건 아닌지 궁금했다.
“·····.”
정우는 다시 핸드폰을 바라보았지만 답답한 표정만을 짓고 있었다.
어디에도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알고 지내는 친척이라도 있으면 연락을 해보겠지만 유진에겐 자취를 감춰버린 오빠가 전부였다. 알고 지내는 지인들이 있겠지만 그 연락처를 알지 못하는 정우는 유진의 방을 샅샅이 뒤졌지만 그 어디에도 연락할 흔적이 남아있지 않았다.
요즘 세상에 직접 손으로 지인의 연락처를 남기는 게 흔하지 않기에 말이다.
“·····.”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정우가 다시 핸드폰을 들고 번호를 찾기 시작했고, 번호가 나타나자 황급히 유진의 방을 나서고 있었다.
잠시 후 정우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며 황급히 집을 나서고 있었고, 정우의 비어버린 집에는 조용한 적막감만이 깃들고 있었다.
한참 뒤,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리기 전에는 말이다.




“일단 제가 접수는 해놓겠습니다. 24시간이 지나야 하지만 상황이 그런지라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일단 돌아가 계십시오. 언제 집으로 올지도 모르고, 혹시 수배가 되면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유진의 사건을 맡았던 형사의 말에 정우가 거듭 머리를 조아리고는 경찰서를 나왔다.
“······.”
밖으로 나오자마자 다시 유진에게 전화를 했지만 여전히 같은 기계음이 들려오자 한 숨을 내쉰 정우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차로 다가가 차에 오르고 있었다.
잠시 후 시동을 켠 정우의 차가 주차장을 빠져 나가고 있었다.




“·····.”
현관문을 여는 순간 낯익은 신발이 보이자 유진의 방문을 바라본 정우가 한 달음에 달려가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단정한 얼굴로 침대에 앉아있는 유진이 보였고, 정우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
“야, 정 유진!”
정우는 고함을 쳤고, 천천히 얼굴을 돌린 유진이 정우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죄송해요.”
“뭐, 죄송···, 너 내가 밤새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핸드폰은 왜 꺼놨어, 왜!”
“·····.”
고함을 쳤지만 유진이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아무 말이 없자 정우는 더 화가 났지만 애써 자신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너, 대답해봐, 밤새 어디 있었어?”
“그냥 여기저기,”
“뭐,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똑바로 대답하지 못해.”
정우의 윽박에 유진이 천천히 고개를 드는 순간 정우는 가슴이 철렁했다.
퉁퉁 부어있는 눈과 창백해진 얼굴, 순간 정우는 유진에게 무슨 일이 있었음을 감지했다.
“죄송해요, 하지만 사실이에요. 그냥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까,”
“······.”
정우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부어버린 눈 때문에 얇게 보이는 유진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고, 자신이 한 마디를 더하면 금방이라도 울음을 울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화를 삭이지 못하는 듯 정우가 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침대 한 쪽에 놓여진 짐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정우는 다시 유진을 바라보았고, 유진도 정우가 자신의 짐 가방을 본 것을 보고 있었다.
정우가 뭐냐는 듯 바라보자 머뭇거리던 유진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저 오늘 나갈 게요.”
“나가다니 어디를 나가?”
“아버님 집에서요.”
“뭐, 네가 갈 데가 어디 있다고 나간다는 건데?”
“친구 집에서 지내겠습니다.”
“친구 누구?”
되묻는 정우는 확실히 유진에게 무슨 일이 있음을 감지했다.
“아버님은 모르세요, 그냥 친구 있어요.”
“그럼, 앞장서,”
“네?”
유진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앞장서라고, 내가 그 친구 집까지 데려다 줄 테니까, 짐은 이게 다지?”
“아버님.”
가방을 집어 드는 정우를 불렀지만 정우가 가방을 들고 방을 나서자 유진이 다급하게 쫓아 나가서는 가방을 잡아 당겼다.
“혼자 갈게요, 가방 주세요.”
“왜 혼자가, 내가 있는데, 난 네가 지내는 친구 집이 어디인지 알아야겠다.”
“싫어요, 그냥 가방 주세요.”
“됐어.”
유진의 손을 뿌리친 정우가 거실 중앙으로 걸음을 옮기자 유진이 다급하게 다시 가방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주세요, 왜 이러세요.”
“뭐, 왜 이러세요?”
유진의 말을 곱씹은 정우가 유진의 손을 뿌리치고는 가방을 던져버리자 흠칫 놀란 유진이 당황한 얼굴로 정우를 응시했다. 그리고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무서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정우의 시선을 피해 옆으로 엉거주춤 돌아서고 있었다.
“뭐야, 말해.”
“······.”
유진은 말이 없었고, 정우의 얼굴엔 더욱 분노가 깃들고 있었다.
하지만 눈을 감은 채 분노를 삭인 정우가 긴 한숨과 더불어 눈을 뜨고는 겁을 먹고 서있는 유진을 응시했다. 그리고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시작했다.
“대답해,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야, 밤새 사람 피를 말려놓고 나없는 사이에 짐을 채이고 여기를 나가겠다는 이유가 뭐야?”
“이유 없어요, 그냥 나가고 싶어요.”
“정 유진.”
“·····.”
정우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하지만 정우는 이내 다시 스스로를 진정 시켰다.
“너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죄송해요.‘
“그 놈의 죄송하다는 소리 그만하고 이유를 말해, 여기를 나가겠다는 이유, 아니 이유를 말하기 싫으면 같이 산다고 했던 그 친구 입이라도 나하고 같이 가던지, 어쩔래, 말할래, 아니면 나랑 같이 그 친구 집에 갈래?”
정우가 애써 화를 참으며 말을 했고, 그 말을 들은 유진이 고개를 숙이며 손을 만지작거리자 정우는 최소한 친구 집으로 가겠다는 유진의 말이 거짓인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유진이 왜 갑자기 갈 곳도 정하지 않은 채 느닷없이 집을 나가겠다고 하는지 궁금했다.
정우는 계속 유진의 대답을 기다렸고, 그런 정우의 침묵이 부담스러운지 유진이 입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버님에게 부담 드리기 싫어요.”
“뭐?”
정우가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묻자 유진이 그제야 몸을 돌려 정우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은 아버님에게 폐 끼치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 그러니까 보내 주세요.”
유진의 말에 무언가를 말하려던 정우가 말을 뱉지 못한 채 답답한 듯 눈을 감고는 허공에 빈 손짓을 하고 있었다.
“너, 너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
“이제껏 말없이 잘 지내다 폐 끼치기 싫어서 여기를 나간다고, 내가 지금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더군다나 갈 곳도 없는 걸 뻔히 아는 지금?”
“······.”
살짝 더듬거리는 정우의 말에 유진이 다시 시선을 떨어뜨리며 입을 닫았다.
“유진아, 그러지 말고 솔직히 이야기 해, 여기를 나가겠다는 이유가 뭐야, 너 나 출장 갈 때만 해도 불안해하며 언제 돌아 오냐며 묻던 애야, 그런데 네가 여기를 나가겠다고, 뭐니 갑자기 네가 이러는 이유가.”
“아버님을 위해서예요.”
“뭐?”
잠시의 틈을 두고 던진 유진의 말에 정우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 때문에 아버님이 힘드신 거 같아서 그래요.”
“힘들다니 내가 뭐가 힘든데?”
“전부 다요. 저 때문에 하시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하시고, 저 때문에 아버님 생활을 감추시는 것도 싫어요.”
진아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유진은 비껴 말했지만 그걸 알 리 없는 정우는 유진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힘든 거 뭐고, 뭘 감추는데?”
“그렇게 말하지 않으셔도 되요. 저 충분히 이해해요. 저 같은 여자가 애당초 아버님 곁에 머물면 안 되는 거였어요.”
유진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는 정우는 답답한 듯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는 숨을 들이 마시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너 못 나가, 기어이 나가려면 어디서 지낼 건지 나에게 확인을 받거나 그게 어려우면 내가 지낼 곳을 얻어 줄 테니까, 거기로 나가, 알았지?”
“싫어요, 저 어린애 아니에요, 제 앞가림 정도는 알아서 해요.”
“알아서 한다는 놈이 밤새 악몽에 시달리고, 그게 무서워서 날 찾아와 내 품에 안겨야 잠이 들어. 그게 앞가림을 하겠다는 놈이 하는 짓이야.”
“······.”
정우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고, 밤마다 정우의 품에서 그나만 포근히 잠들었던 순간을 떠올리던 유진이 고개를 돌려서는 밀려 나오려는 눈물을 애써 참아내고 있었다.
진아와 정우가 몸을 섞고 지내는 걸 안 지금, 더 이상은 그런 행위를 해서는 안 되다는 걸 유지는 스스로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우의 말이 더 아팠다. 아무것도 모르고 투정을 부리던 자신을 안아주던 정우였기에 말이다.
“그리고 넌 나하고 약속했어. 무슨 일이 있어도 널 버리지 않겠다고, 그러니까 넌 그냥 못 나가, 알았어.”
“싫어요.”
유진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떠나려는 자신을 자꾸만 붙드는 정우가 미웠다.
자꾸만 이러면 자신이 주저앉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뭐, 싫어?”
“네, 싫어요, 나 갈 거예요.”
“안 된다고 했다.”
“아뇨, 나갈 거예요.”
“안 돼.”
정우의 고함에 유진이 입을 다물고 정우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 순간 유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고, 유진이 황급히 그 눈물을 훔쳐냈다.
“나 갈 거예요. 그래서 아버님 모르게 숨어 버릴 거예요.”
자신이 모르게 숨을 거라는 유진의 말에 정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자신이 없으면 한 순간도 살 수 없을 것처럼 굴던 유진이 하는 말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너 지금 그 말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니?”
“네, 맞아요.”
“왜, 왜 내가 모르는 곳으로 숨는다는 건데?”
정우의 물음에 유진이 잠시 정우를 응시하다 손을 들어 다시 눈물을 훔쳐냈다.
“아버님을 바라보는 게 너무 힘드니까요.”
“뭐?”
“힘들다고요, 잘 보고 늘 웃어주는 아버님 얼굴을 계속 보는 것도 힘들고, 악몽에 시달리는 밤이면 절 안고 잠들어 주시는 아버님 품도 이제는 너무 힘들어요.”
“내가 뭘 어쨌다고 힘이 드는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건데, 왜?”
“그러니까요, 그러니까 힘이 들어요. 아버님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그런 아버님 곁에 있는 게 전 너무 힘들어요.”
“알아듣게 이야기 해. 내가 알아듣게 이야기 하라고, 내가 뭘 잘못했고, 내가 어떻게 하면 네가 마음을 돌릴 건데.”
“·····.”
유진을 차마 이대로 내보낼 수 없었던 정우가 애원하듯 말을 했다.
하지만 유진은 말이 없었다. 자꾸만 자신을 붙드는 정우를 느끼며 확고했던 결심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만에 하나 어쩌면 정우가 진아가 아닌 자신을 선택할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품었다.
그것이 너무 작은 희망임을 알면서 말이다.
“말해봐, 네가 어떻게 하면 내 말을 들을래, 어떻게 하면 여기 그냥 남을 거냐고.”
“그렇다면 절 안아주세요.”
잠시의 시간이 지난 후 유진이 천천히 말을 내뱉었다.
“안아주는 건 어렵지 않아. 그게 뭐가 어렵다고···.”
“그냥 안는 거 말고, 여자로 안아 달라는 말이에요. 아버님 여자로 만들어 달라고요.”
“유진아···.”
정우는 그제야 유진의 말을 이해했고, 너무도 놀란 표정으로 유진을 바라보았다.
유진도 그런 정우를 바라보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켰다.
설사 정우가 자신을 두고 진아를 선택해도 상관없었다. 한 순간만이라도 정우의 여자가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오랜 시간 마음에 담았던 정우의 그림자만이라도 간직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해주세요. 그럼 아버님 말 듣고 남을게요.”
“너, 지금 무슨 말을···, 잊은 거니, 넌 내 며느리야.”
“아니에요. 아버님 며느리···.”
“······.”
유진의 외침에 정우가 다시 놀라고 있었다.
“저 이제 아버님 며느리 아니에요. 그냥 여자에요, 며느리가 아닌 그냥 여자, 그러니까 아버님 여자 만들어 주세요.”
“유진아····.‘
“싫으시죠, 그렇죠?”
자신의 고함에 눈시울을 붉힌 유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을,”
“제가 더러운 거죠?”
“······.”
유진이 정우의 말을 막으며 외쳤고 순간 정우는 할 말을 잊은 채 유진을 바라보았다.
“그렇죠, 아니라고는 하시면서 제가 더러우니까 그러시는 거죠.”
“유진아.”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정우가 다가가려 하자 유진이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저었다.
“아버님은 거짓말쟁이세요. 절대 제가 더럽지 않다고 했지만 막상 자기 여자로 하려니까 제가 더러운 거예요. 그렇죠?”
“아니야, 아니라고, 왜 자꾸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넌 더럽지 않아.”
“아뇨, 거짓말이에요, 제가 더러우니까, 더러운 절 떼어버리기 위해 이모님과 섹스를 한 거잖아요.”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모님이라니?”
“제가 모를 줄 알았어요. 절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더러운 절 떼어버리기 위해 이모님하고 몸을 섞은 걸 제가 모를 줄 아셨어요.”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왜요, 아니라고 하시게요. 제가 바보인줄 아세요, 이모님을 바라보는 아버님의 눈빛이 그랬어요. 저에게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이모님을 바라보셨잖아요. 이모님도 아버님을 그렇게 바라봤고요.”
“유진아.”
“제가 그 눈빛을 얼마나 원했는지 아세요. 아버님을 마음에 두면서도 그걸 감추고 매일매일 원했어요, 아버님이 절 그렇게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봐 주시기를 말이에요.”
“·····.”
유진 스스로가 만들어 낸 억지였다.
유진이 정우의 처제이자 유진에게 이모인 진아와 함께 한 적은 그다지 많지 않았고 그것도 오랜 전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유진은 진아와 정우가 오랜 전부터 연인사이였을 거라고 스스로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그런 유진의 억지스러운 고함에 정우가 그대로 얼어붙고 있었다.
정우는 유진이 하는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우는 그저 정신적으로 상처를 받은 유진이 스스로 지어내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도 그랬어요. 그 인간이 절 덮칠 때도 빌고 또 빌었어요. 지금 날 범하는 사람이 그 인간이 아니라 아버님이게 해달라고요, 그렇다면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말이에요. 그랬는데, 그랬는데····, 결국 아버님은 그런 제가 더러워서 피하고 싶으신 거잖아요. 더러워서····.”
“·····.”
울먹이며 말하던 유진이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버리자 그 모습을 보던 정우가 눈을 감고 있었다. 범하는 남자가 자신이었다면 기쁘게 받아 들였을 거라는 유진의 말이 도무지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죽어 버릴 거예요.”
“······.”
유진의 한 마디에 정우가 눈을 번쩍 떴다.
“아버님이 절 버리고 이모님한테 가시면 죽어 버릴 거예요.”
“유진아.”
“·····.”
정우가 고함을 질렀고, 순간 유진이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또 한 번 그런 소리하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다. 절대로····.”
정우의 말에 유진이 멈칫했지만 이내 날카로운 시선을 정우에게 던졌다.
“그렇게 겁주실 필요 없어요, 어차피 버리실 거잖아요.”
“왜 자꾸 널 버린다고 그래, 내가 널 왜 버려.”
“이모님한테 시켰잖아요, 저 보고 아버님 곁에서 떨어져 달라고···.”
“뭐?”
“왜요 아니라고 하시게요?”
“무슨 소리야, 처제가 널 만나서 그런 소리를 했다는 게?”
정우의 물음에 유진이 멈칫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모님이 그랬어요, 아버님 곁에 제가 함께 사는 게 말이 되냐고, 제가 아버님 발목을 잡고 있으니까, 아버님 곁을 떠나라고 대신 이모님이 아버님을 여자로 돌보겠다고···.”
“그게 사실이야?”
정우의 물음에 유진이 다시 매섭게 정우를 응시했다.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아버님이 시킨 거 다 알아요.”
“내가 뭘 시켜?”
“이모님 말대로 아버님이 이모님을 여자로 받아 들이셨잖아요.”
“내가 언제?”
“출장 간다고 하시고 이모님하고 여행가셨잖아요.”
“내가 말했잖아, 계약 건으로 출장 가는 거라고,”
“거짓말 마세요, 이모님이 그랬어요, 아버님이 여행가서 자신을 여자로 받아 들였다고··.”
“·····.”
정우는 어이가 없었다.
지금 유진이 하는 말이 유진이 지어낸 이야기인지 아니면 사실인지 혼란스러웠다.
만에 하나 사실이라면 처제인 진아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우는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다시 울음을 울고 있는 유진을 응시했다.
“유진아 다시 말하지만 난 널 버리지 않아. 내가 약속했잖아. 그리고 난 널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아, 단 한 번도, 맹세하마.”
정우의 말에 유진이 천천히 정우를 응시했다.
한참을 정우를 바라보던 유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안아주세요, 아버님 여자 만들어주세요.”
“유진아.”
유진의 말에 정우가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더럽지 않다면서요, 저 버리지 않겠다면서요, 그럼 안아주세요, 제가 믿을 수 있게요. 네, 아버님····.”
“유진아, 아직도 모르겠니, 넌 내 며느리야, 내가 어떻게 널 안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저 아버님 며느리 아니에요. 아버님 며느리 하기 싫다고요.”
“유진아, 너 왜 이러니, 이러면 안 된다는 거 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잖아.”
“아뇨, 전 몰라요. 아버님을 마음에 품으면서 그런 거 잊기로 했어요, 그리고 기다렸어요, 아버님이 먼저 제게 다가와 주기를···, 그런데 아버님은 제 마음 아무것도 모르셨잖아요. 아버님이 제 마음을 알아주셨다면, 그랬다면 그런 일도 없었을 거예요, 더럽혀지지 않았을 거라고요.”
“······.”
정우가 답답한 마음에 눈을 내려 감았다.
“저 이제 아버님 며느리 안 해요, 하기 싫어요, 아버님 여자 되고 싶어요. 더럽혀졌지만 그래도 하고 싶어요. 아버님 여자····.”
“·····.”
정우가 미간을 찡그리며 뒷걸음을 치고 물러나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런 정우를 바라보며 울음을 울던 유진은 이제 바닥에 주저앉아 설운 울음을 울고 있었다.




“네, 제가 했어요.”
진아의 말에 정우가 놀란 표정으로 진아를 응시했다.
“처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그럼, 유진이랑 함께 사시게요?”
“그건 말 못할 사정이 있다잖아, 유진이가 형편이 나아지면 그때는 내 보낼 거야.”
“형부 바보에요?”
“뭐?”
“유진이가 어떤 마음인지 아직 모르시겠어요.”
“무슨 소리야 그게?”
정우의 물음에 진아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정우를 응시했다.
“유진이는 형부를 아버지 같은 존재로 여기는 게 아니에요.”
“아니라고?”
“네, 유진이는 지금 형부를 남자로 여기는 거예요.”
“아냐, 그건 처제의 오판이야.”
“오판이요? 그건 형부가 착각하는 거예요, 분명 유진이는 형부를 남자로 생각해요. 그것도 오래전부터 말이에요.”
“처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
정우의 말에 진아가 미소를 머금었다.
“유진이가 저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
“형부가 허락한다면 형부 옆에서 평생 있고 싶다고 했어요. 그게 무슨 의미겠어요.”
“그건, 그냥 유진이가 날 아껴서 하는 소리일 거야.”
“그래서 형부가 바보라는 거예요. 유진이는 형부 며느리였어요. 그리고 우식이와는 이혼을 했고요. 그런데 그런 유진이가 형부 옆에 평생 있고 싶다는 말이 그냥 형부를 아끼는 말이라고요. 아뇨, 그건 형부의 착각이에요, 유진이는 여자로 형부 옆에 있고 싶은 거예요.”
“처제”
“그래서 그랬어요. 그런 유진이를 포기하게 하려고 형부하고 잤다고 했어요. 함께 여행을 가서요.”
“그러니까 뭐 하러 그런 말을 하냐고, 유진이가 처제를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려고.”
“상관없어요, 오히려 그게 좋으니까.”
“그게 좋다니?”
“형부를 유진이에게 줄 수는 없잖아요. 형부는 내가 가지고 싶은 남자니까.”
“·····.”
정우가 놀란 눈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바라보지 마세요. 형부도 알잖아요. 내가 왜 형부를 찾아왔는지,”
“처제.”
정우가 부르자 진아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나도 많은 용기가 필요했어요. 언니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하지만 그동안 형부를 지켜보면서 나 혼자 많이 아팠어요. 형부 모르죠, 내가 이혼한 그이와 왜 결혼을 했는지?”
“······.”
다시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는 진아를 바라보며 정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놀라웠던 정우는 할 말을 잃고 있었다. 유진의 일만으로도 복잡한 지금 느닷없는 처제 진아의 말에 머리가 더욱 혼란스러웠다.
“혹시 기억하세요, 제가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언니 기일 날 형부에게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고 물었던 거?”
정우는 그때를 기억해 냈다.
아들 우식이 중학교에 들어갈 즘이었다.
“그때 내 나이 스물아홉이었어요. 형부와 스무 살 어린 나이에 일찍 결혼을 한 언니가 우식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세상을 떠나고 그런 어린 우식이를 홀로 키우는 형부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어요, 언니 대신 내가 형부를 돌보며 어떨까, 언니대신 우식이 엄마가 되어서 우식이를 키우면 어떨까하고 말이에요.”
“·····.”
“그래서 형부에게 물었어요. 이제 언니를 잃고 새 출발 해도 되지 않냐고 말이에요. 그때 형부가 그랬죠, 아직 언니를 잊지 못했다고 말이에요. 그 말을 듣고 돌아와 꼬박 밤새워 울었었어요. 형부 마음에 내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그래도 한 가닥 미련을 가지고 형부를 기다리려고 했는데, 엄마가 헤어진 남편과 선을 보게 하려고 형부와 의논을 하는 순간 제 마음을 접었어요. 난 그렇게 오랜 시간 마음을 졸이며 형부를 그리워했는데 내 마음도 모르고 선을 보라고 절 설득하는 형부가 미웠거든요. 그래서 결혼했어요. 그런 형부가 미워서···.”
“처제.”
정우가 조심스레 진아를 불렀지만 진아는 다시 고개를 돌려 정우를 외면했다.
“결혼하고 나서야 알았어요. 내가 얼마나 큰 실수를 했는지. 그 사람과 살면서 형부를 떠올리는 날 보며 그 사람에게 미안했어요. 죄를 짓는 것 같았고, 하지만 그 사람이 날 버려두고 다른 여자를 만나는 걸 알면서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형부를 떠올리며 사는데 그 사람이라고 다른 여자를 만나지 말 이유가 없다고 말이에요. 그래서 이혼했어요. 그 사람에게도, 나에게도 미안해서···.”
“·····.”
“그렇게 혼자되어서 다시 형부를 기다리고 싶었지만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었던 몸으로 다시 형부에게 다가갈 수 없었어요. 그래서 기다렸어요. 내 마음이 모든 걸 감내할 때까지, 형부가 언니를 잊기를 말이에요. 그런데 형부 옆에 유진이가 있는 거예요. 나보다 젊고 아름다운 유진이가 말이에요. 그런데 형부는 그런 유진이가 그냥 자신의 며느리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요.”
“그건 사실이야.”
정우의 말에 다시 고개를 돌린 진아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형부는 그랬겠죠. 유진이는 아니었지만, 그래서 결심했어요, 한때 며느리였던 유진이가 형부 곁에 남을 수 있다면 처제였던 난 더 자격이 있다고 말이에요. 그래서 유진이를 형부 곁에서 떼놓고 싶었어요. 난 유진이보다 오랜 시간 형부를 가슴에 품었으니까요.”
말이 잠시 멈춰졌고, 두 사람 사이에 짙은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처제, 난 말이야.”
“아직 제 이야기 안 끝났어요, 마저 들어주세요.”
진아의 말에 정우가 다시 입을 닫았다.
“형부, 유진이는 안돼요. 우식이가 비록 형부를 버리고 여자를 따라갔지만 그래도 우식이는 형부 아들이에요. 그리고 유진이 우식이 아내였고, 세상 사람들이 용납하지 않을 거예요.”
“처제는?”
“네?”
“내가 처제를 받아들이면 그건 괜찮은 거야?”
“형부.”
“장모님은? 첫째 처제는 뭐라고 할까? 처제보고 그러라고 할까? 아니면 나보고 처제 마음을 받아 주라고 할까?”
“······.”
진아가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고 있었다.
“난 그럴 자신 없어, 장모님도, 큰 처제도 설득할 자신 없어.”
“그건 제가 해요, 형부가 걱정할 필요 없어.”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무엇보다 내가 싫어.”
“·····.”
정우의 말에 진아가 무릎 위에 놓여있던 손에 힘을 주며 주먹을 쥐고 있었다.
“처제에게 미안하지만, 난 처제를 여자라고 생각한 적 없어. 그럴 마음도 없고 말이야.”
“형부.”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정우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자 주먹을 쥔 진아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정우에게서 직접 거부의 말을 듣자 아팠다,
진아는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으려 애를 썼다.
이런 것은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말이다.
“좋아요, 할 수 없죠. 하지만 유진이만큼은 내 보내요. 그건 그렇게 해야 해요.”
“·····.”
진아의 말에 정우가 당혹스러워 했다.
하지만 진아는 강한 눈빛을 보냈다. 유진이만 없다면 정우의 마음은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젊고 아름다운 유진은 너무 벅차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그럴 수 없어.”
“형부!”
정우의 말에 놀란 진아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유진이와 약속했어, 절대 유진이를 버리지 않겠다고···.”
“형부, 지금 무슨 말을··, 혹시 형부 유진이를····.”
진아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아니야, 그런 거.”
“그런데 유진이를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미안해, 자세히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내가 유진이를 버리면 유진이는 무너져, 그럴 수는 없어.”
“유진이가 무너지는 게 형부하고 무슨 상관인데요?”
“그렇게 말하지 마, 유진이는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야.”
“·····.”
정우의 말에 놀란 표정을 짓고 있던 진아의 얼굴이 갑자기 펴지고 있었다.
그리고 주먹을 쥐고 있던 진아의 손에서도 힘을 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갑자기 미소가 진아의 입가에 퍼졌다. 정우는 그런 진아를 보며 당황했다.
“훗, 내가 뭘 잘못 생각했네요.”
“무슨 소리야, 그게?”
정우의 물음에 살짝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은 진아가 정우를 응시했다.
“유진이가 아니었네요. 형부였어요. 형부···.”
“처제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유진이가 그런 마음을 가지게 한 게 형부였다고요.”
“처제···.”
“훗, 후훗···.”
진아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자 정우가 더욱 의아하게 진아를 응시했다.
“왜 웃는 거야?”
“형부가 가진 큰 단점이 뭔지 아세요?”
“갑자기 무슨 말이야?”
“형부는 자기 자신을 너무 모른다는 거예요, 아니 자기 자신을 너무 잘 감춰요, 그것도 완벽하게 말이에요.”
“알아듣기 쉽게 말해.”
“모르겠어요? 형부도 유진이를 마음에 두고 있잖아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그것도 솔직하게 말이에요. 형부는 이미 유진이에게 마음을 열었어요.”
“처제!”
“아니라고 하지 마세요. 솔직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정말 아닌지.”
“아니라니까.”
“지금 말고 돌아가서 곰곰이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정말 아닌지, 유진이가 정말 한때 며느리였던 존재뿐인지요. 그럼 알 거에요. 제가 지금 하는 말이 무슨 말이지.”
“······.”
정우가 말없이 자신을 응시하자 진아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프네요. 그렇게 조심스럽게 형부를 기다렸는데 형부의 마음에 이미 다른 사람이 들어있다니, 훗!”
“·····.”
“갈게요.”
“처제.”
정우가 불렀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진아가 황급히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그런 진아를 바라보며 서있던 정우는 볼 수 없었다. 황급히 걸음을 옮기는 진아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고 있음을 말이다.
‘잊을 거예요, 형부 같은 사람, 자기 마음도 모르는 바보 같은 사람은····.’
그렇게 멍하니 서있는 정우를 남겨둔 채 진아가 멀어지고 있었다.
정우는 여전히 미련스럽게 그런 진아만을 바라보고 있었고 말이다.




‘돌아가서 곰곰이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유진이가 정말 한때 며느리였던 존재뿐인지. 그럼 알 거에요. 제가 지금 하는 말이 무슨 말이지.’
“·····.”
처제인 진아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정우가 허공을 응시하다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유진의 방문을 가만히 응시했다.
‘유진이가 정말 한때 며느리였던 존재뿐인지····.’
다시 한 번 진아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정우는 유진과의 시간을 떠올렸다.
며느리가 되었던 순간부터 아들에게 버림을 받고 힘들어 하던 모습, 그리고 자신의 오빠에게 배신을 당하고 힘들어 하던 순간까지, 그리고 몹쓸 일을 당하고 아직도 괴로워하는 모습까지 말이다.
그러다 문득 유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전, 아버님이 좋아요. 그이랑 헤어져도 아버님하고는 계속 가까이 지내고 싶어요.’
‘싫습니다. 아버님에게 매번 이렇게 도움 받는 거, 저도 아버님에게 당당하고 싶어요.’
‘저 버리지 마세요, 저에게는 이제 아버님 말고는 아무도 없어요.’
‘아버님이기를 빌고 빌었어요. 아버님이라면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으니까요.’
유진과의 시간을 떠올렸지만 정우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유진이 언제부터 자신을 마음에 담았다는 건지, 그리고 자신은 그런 유진을 언제부터 여자로 느꼈는지 말이다. 정우는 처제인 진아가 아무래도 뭘 잘못 생각했다고 느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유진과 했던 어떤 말이 떠올랐다.
‘솔직히 아버님 뺏기는 것 같아, 기분 별로에요.’
‘무슨 소리야?’
‘아버님 그 여자 분하고 결혼하실 거 아니에요.’
‘결혼은 무슨 우린 친구였어, 그리고 지금은 친구도 아니지만,’
‘왜요?’
‘말했잖아, 난 결혼 생각 없다고 그래서 친구도 그만뒀다. 그 여자는 다른 걸 원하는 것 같아서.’
‘그럼, 다시 혼자가 되시잖아요. 그건 싫은데.’
‘네가 있잖아, 난 유진이만 있으면 되는데, 넌 아닌가 보네.’
‘정말요, 정말 저만 있으면 돼요?’
‘왜 싫으니?’
‘아뇨, 전 좋아요. 저도 아버님만 있으면 돼요.’
‘거짓말 그만해라.’
‘정말이에요. 전 아버님만 좋으시면 평생 아버님 곁에 있고 싶어요. 아버님은 싫으세요?’
‘훗, 내가 왜 싫어, 난 좋은데.’
‘정말이죠, 그럼 저 평생 아버님 곁에 있을 거예요.’
‘마음대로 해라. 난 좋으니까.’
‘나중에 딴소리 하지 마세요.’
‘그건 내가 할 말인데.’
‘훗, 저 이제부터 평생 아버님한테 붙어 살 거예요.’
‘그러던가.’
생각에 잠겨있던 정우가 다시 유진이 들어가 있는 방문을 응시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유진과 자신의 관계를 되짚었다.
자신과 함께 살면서 자신을 의지하는 유진의 모습, 그리고 그런 유진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대로 받아주던 자신의 모습,
정우는 그런 자신의 모습 속에 혹시 진아의 말대로 유진을 가슴에 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다시 생각했다. 그런 정우의 머리에 다시 기억하나가 스쳐지나갔다.
자신의 품에 안겨 잠들었던 유진을 안아주던 순간 자신의 코끝을 살짝 흔들던 유진의 체취, 그리고 자신에게 안긴 탓에 눌려진 젖가슴의 물컹한 감촉이 가슴에 전해지던 그 순간까지 말이다.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 걸 느끼는 자신이 짐승 같다며 자신을 질책한 채 그냥 아무렇지 않게 넘겨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런 것이 너무 자연스러워졌다.
처음 유진이 자신의 잠결에 자신의 중요 부분을 잡은 것에 놀라 병원까지 찾았던 자신이 의사의 말 때문이라는 핑계로 이제는 덤덤하게 그걸 넘기고 있었다. 물론 그 일은 그 이후 한 번 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정우가 소파에 등을 묻고 허공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리고 진아가 했던 그 말을 다시 떠올렸다.
‘돌아가서 곰곰이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유진이가 정말 한때 며느리였던 존재뿐인지.’




‘똑, 똑···.’
노크 소리에 아무 대답이 없자 정우가 문을 열었다.
다행이 문은 잠겨있지 않았고 문을 열고 들어간 정우가 구석에 웅크리고 얼굴을 묻고 있는 유진에게 다가 갔다.
방에서 얼마동안 이렇게 앉아만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한 건 지난 일 주일 동안 자신이 집으로 돌아온 순간부터 유진은 방에서 한 발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간혹 악몽을 꾸는지 비명이 들려왔지만 정우는 눈앞에서 차마 방문을 열고 들어가지 못했다.
“유진아.”
“·····.”
정우가 조심스레 불렀지만 유진은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얼굴을 묻고만 있었다. 그런 유진을 보며 정우가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 좀 볼래, 우리 이야기 좀 하자.”
“······.”
“유진아, 제발···.”
정우의 애원에 유진이 천천히 얼굴을 들었고, 유진의 얼굴을 보는 순간 정우는 낙담했다.
수척해진 얼굴, 핏기 하나 없는 유진의 얼굴을 그동안 유진이 끼니조차 제대로 챙기지 않았음을 느끼게 했다.
그런 유진을 보며 정우는 안쓰러운 표정을 짓다가 무릎을 감싸고 있는 유진의 손을 당겨 손에 쥐었다.
“하나만 약속해라.”
“······.”
“나랑 병원에 가자, 병원에 가서 같이 치료받자.”
“······.”
유진이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가자, 유진아, 부탁이다.”
“싫어요, 안 가요.”
“그럼 나도 네 부탁 들어주지 않을 거야.”
“·····.”
유진이 말없이 정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네가 치료를 받지 않겠다면 나도 절대 네 말 안 들어 줄 거야.”
“······.”
“그러니까 대답해, 이렇게 평생 나하고 살 건지. 아니면 치료를 받고 새로운 마음으로 나와 지내던지.”
“안 돼요.”
말없이 말을 듣고 있던 유진이 고개를 저으며 울먹이듯 말을 했다.
“뭐가 안 돼?”
“다른 사람이 알면 안 돼요.”
“괜찮아. 다른 사람이 알아도 널 욕하지는 않아, 그리고 의사 선생님은 누구보다 널 이해 할 거야.”
“아뇨, 그런 거 상관없어요.”
“그럼 뭐가 안 되는데?”
“아버님이요.”
“나?”
“·····.”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소리야, 나 때문이라니?”
“세상 사람들이 아버님한테 욕하는 게 싫어요, 나한테는 아무리 욕을 해도 괜찮지만, 저 같은 여자 때문에 사람들이 아버님을 욕하는 게 싫어요. 그래서 안 돼요. 아버님 말고는 아무도 알아서 안 돼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아버렸어요. 그 인간도, 형사님도, 그리고 제가 입원했던 병원에서도요, 그 사람들이 그럴 거예요. 더럽혀진 여자랑 사는 아버님이 불쌍하다고요. 그래서 싫어요. 나 때문에 아버님이 상처 받는 게 싫어요.”
“·····.”
울먹이며 하는 유진의 말에 정우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스스로는 어떤 욕을 먹어도 괜찮지만 자신이 욕을 먹게 하고 싶지 않다는 유진의 말이 너무 가슴 아팠다.
정우는 그런 유진을 당겨 가슴에 안았다.
“나도 상관없어, 그러니까 치료 받자.”
“안 돼요, 아버님만 상처 받아요.”
“아니, 네가 이러는 게 나에게는 더 큰 상처다. 넌 내게 소중한 사람이니까.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던 상관없다. 너만 괜찮아진다면 말이다.”
“흑!”
유진이 울음을 터뜨렸다.
“치료받자, 치료 받고 나아지면 네 소원대로 하자. 응, 유진아···.”
정우의 말에 유진이 천천히 몸을 세우고는 정우를 응시했다.
“진심이세요?”
“그래, 진심이다.”
“제가 더럽지 않으세요?”
“아니라고 했잖아, 넌 더럽지 않아, 누구보다 귀하고, 누구보다 소중하다, 특히 나에게는 말이다.”
“그럼··, 저···, 아버님 여자해도 되는 건가요····.”
유진이 울먹이며 물었고, 그런 유진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히던 정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자, 그러니까 내 말대로 치료받자. 치료 안 받으면 넌 내 여자 못하게 할 거니까, 알았니?”
“······.”
눈물을 머금은 채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고, 정우가 그런 유진을 다시 가슴에 안고 온 힘을 다해 안아갔다.
“사랑해요. 아버님····.”
“그래, 그래···.”
유진의 고백에 고개를 끄덕인 정우가 유진을 더욱 힘주어 안았다.
정우는 다짐했다.
지난 일 주일 동안 고민하고 고민했던 자신이 내린 결론이 틀리지 않았기를 말이다. 진아의 말대로 자신도 언제부터인가 유진에게서 죽은 아내에게서 느꼈던 다정함과 포근함, 그리고 여자로써의 체취를 자신도 모르게 느끼고 있었음이 틀리지 않았기를 바라며 말이다.
‘미안하다. 유진아, 하지만 나도 내 자신을 믿고 싶다. 너에 대한 내 마음이 틀리지 않았기를 바라며 말이다.’
정우는 모르고 있었다.
그런 자신의 마음이 공허한 외침을 말이다.
이마 자신의 마음에 유진이 깊게 각인되고 있었음을 아직도 확실히 모르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던 유진의 모습도,
힘들어 하는 모습을 자신에게 보여주지 않으려 애서 태연해 하던 모습도.
그리고 무엇보다 몹쓸 일을 당하고 자신을 안식처 삼아 스스로의 상처를 잊으려 하던 유진의 아픈 상처들이 자신의 가슴에 깊게 새겨져 있음을 말이다.




“제가 뭐하나 물어도 될까요?”
“네.”
의사의 말에 유진이 차분하게 대답을 했다.
“보호자분이 환자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
의사의 물음에 유진이 살짝 당황한 얼굴로 바라보자 의사가 미소를 지었다.
“대답하기 싫으면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이걸 묻는 건 현재 환자분에게 누구보다 의지할 사람이 보호자분이라 묻는 겁니다.”
의사의 말에 유진이 긴장감을 살짝 풀었다.
“믿는 사람이에요.”
“믿는 사람이요?”
“네, 누구보다 더, 그리고 존경하고, 아끼고,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유진의 말에 의사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 그러셨군요. 어쩐지 그 분이 환자분을 바라보시는 시선이 따듯하더라고요.”
“네?”
의사의 갑작스런 말에 유진이 놀라며 물었다.
“모르셨어요, 처음 이곳에 같이 오셨을 때 제가 환자분과 이야기하는 내내 그 분이 환자분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어요.”
“정말이요?”
“그럼요, 의사인 제가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
의사의 말에 유진이 미소를 머금자 그런 유진을 보며 의사도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그 분을 위해서도 노력하세요. 보호자분이 걱정하지 않게, 환자분이 노력하시면 이런 상태 금방 벗어나실 거예요.”
“네.”
유진이 대답을 했고, 의사가 다시 무언가를 유진과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럼, 얼마나 병원을 다녀야 할까요?”
“글쎄요, 그거야 환자분의 상태에 따라 다르겠지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환자분이 생각보다 굳은 결심을 하신 것 같아서요.”
“그렇습니까?”
“네. 하루라도 빨리 치료를 받고 나아서 보호자분을 기쁘게 하고 싶다는 군요.”
“그런가요.”
정우가 미소를 짓자 의사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한 가지 명심하세요.”
“네.”
“아마 보호자분이 환자분에게 어떤 약속 하나를 하신 것 같은데, 치료가 끝나면 그 약속은 되도록 지키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환자분이 더 큰 상처를 받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상담을 해보니 환자분은 자신보다 보호자분의 상태를 더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혹시 그 일로 보호자분이 자신을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쌓여있고 말입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의사에게 그 말을 들으니 정우는 다시 마음이 무거웠다.
“저기 그런데 선생님,”
“네.”
“제가 말씀은 자세히 못 드리지만 저와 환자 사이가 아무래도 신경이 쓰입니다. 오히려 환자에게 상처가 되지는 않을지 걱정스럽고요.”
“보호자 분.”
“네.”
“전 의사라 인간관계의 복잡한 조언을 해드리기가 조심스럽습니다. 하지만 정신과적인 의사의 입장에서 조언을 드리자면 환자분에게는 보호자 분은 단순한 존재가 아닙니다. 삶의 목적 전부이고, 위태로운 상황에서 자신을 지탱해주는 유일한 버팀목입니다. 그게 무너지면 그게 더 큰 상처 일겁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 드렸듯이 환자와의 관계가 아무래도····.”
정우가 말끝을 흐렸다.
“환자분은 이제 엄밀히 말하면 보호자 분의 며느리가 아닙니다.”
“·····.”
정우가 의사를 응시했다. 의사는 그런 정우를 바라보며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환자분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도 했죠, 자신이 보호자분의 며느리였는데 자신이 보호자분을 사랑하면 보호자가 받을 상처가 있는지 저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에게요?”
“네, 자신의 상태보다 환자는 그걸 더 염려했습니다. 그리고 환자와의 면담에서 느꼈습니다. 환자는 자신의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보다 그 사건으로 인해 보호자분이 자신을 이전과 다르게 대할까 그걸 더 염려했습니다. 그 염려 때문에 자신을 괴롭힌 것이고요. 그래서 환자는 끝없이 확인하고 싶었던 겁니다. 보호자분이 자신을 예전처럼 대하는지, 아니면 다르게 대하는지를 말입니다. 그래서 밤마다 보호자분을 찾아 온 겁니다.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그것을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에 말입니다.”
“·····.”
“보호자분의 성기를 만진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품었던 보호자 분에게 그 일을 당하고 자신이 여자로 다시 설 수 있을지 무의식적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겁니다. 다만 두려움에 수면 상태에서 그것이 나타났지만 말입니다.”
의사의 말에 정우가 살짝 고개를 떨궜다.
“그리고 의사로서 한 마디 더 드리자면 보호자분도 함께 심리 치료를 받으시기를 추천 드립니다.”
“저도요? 제가 왜····.”
“환자를 위해서 이기도 하지만 보호자 분의 심리도 불안해 보입니다. 자신이 내린 결정에 혼란스러워 하고 말입니다.”
“······.”
정우가 입을 다물고 있자 의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인간적인 관계는 전 모릅니다. 다만 환자나 보호자 분이 스스로 내린 결정을 전 어떤 사견도 없이 존중하고, 두 분이 상처나 갈등 없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의사의 말에 정우가 조금은 씁쓸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의사의 말을 곱씹으며 유진이 자신을 얼마나 염려하고 아끼는지 다시 느낄 수 있었다.



“주무세요.”
“그래.”
병원을 다녀온 후 조금은 평안한 모습을 찾았지만 여전히 수척해진 얼굴로 인사를 하는 유진에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을 한 정우가 쓸쓸한 모습으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고 있는 유진을 가만히 응시했다.
사실 유진이 자신과 함께 자고 싶다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유진이 순순히 혼자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자 그 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
하지만 잠시 후 방으로 들어가려던 정우가 유진의 방문을 가만히 바라보다 걸음을 옮겨 유진의 방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노크를 하려던 정우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손을 내리고 그대로 방문을 열었다.
“·····.”
그러자 방 한쪽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유진이 보였고, 자신을 발견하며 화들짝 놀라며 일어서는 유진을 가만히 응시했다.
“아버님.”
놀라며 자신을 부르는 유진을 바라보던 정우가 유진에게 다가갔다.
자신의 짐작대로 유진은 오늘도 방구석 한쪽에 웅크리고 밤을 지새우려고 했던 것이다.
유진에게 다가간 정우가 손을 내밀었다.
“가자.”
“아버님.”
“가자니까.”
머뭇거리는 유진의 손을 덥석 잡은 정우가 걸음을 옮겼고, 유진은 엉겁결에 정우를 따라 방을 나서고 있었다. 그렇게 정우는 유진을 데리고 자신의 방으로 갔다.
“여기서 함께 자자.”
“하지만 치료가 끝나야 하신다고.”
“그럼, 치료가 끝날 때까지 그렇게 구석에서 혼자 무서워하며 잘 거니?”
“·····.”
유진은 말이 없었다.
“걱정하지 마라, 전처럼 잠만 자는 거니까, 네 몸엔 손대지 않으마.”
“·····.”
유진은 정우의 말이 바보 같았다.
자신에게 손을 댄다 한들 그걸 걱정할 자신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정우가 먼저 자신의 몸에 손을 대기를 바라고 있었다.




“아버님.”
“음.”
자신을 안고 옆으로 누워있는 정우의 품에 안긴 채 유진이 정우를 불렀다.
“죄송해요.”
“뭐가?”
“전부 다····.”
유진의 풀죽은 목소리에 정우가 유진을 더욱 바짝 안자 유진이 살짝 놀라고 있었다.
“자자, 피곤하다.”
“네.”
대답을 한 유진이 천천히 눈을 내려 감았다.
하지만 잠시 후 다시 눈을 뜬 유진이 눈앞에 바짝 밀착 된 정우의 가슴을 바라보았다.
악몽에 시달리면 찾아와 안긴 채 편히 잠들던 가슴이었지만 웬일인지 오늘은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치료를 받으면 자신을 여자로 받아주겠다고 약속한 정우가 먼저 손을 내밀고는 자신을 품에 안고 함께 잠들려는 지금 이 순간 가슴이 계속 두근거렸다.
유진은 솔직히 기뻤다.
이렇게 먼저 자신을 포근히 안아주는 정우의 행동이 고마웠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이 오기는커녕 눈이 점점 초롱초롱해지고 있었다.
유진은 눈을 감은 채 자신을 안고 있는 정우의 체취를 가만히 느껴보았다. 그리고 그 체취가 점점 확연하게 느껴지자 조심스레 얼굴을 살짝 들어 정우의 숨소리를 확인하던 유진이 손끝을 펴서 정우의 가슴을 살며시 눌렀다.
“·····.”
잠이 들었는지 정우가 아무 반응이 없자 유진은 이제 손끝으로 정우의 가슴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마음 같아서는 손을 펴서 정우의 넓은 가슴을 더듬어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채 계속 손끝으로 가슴을 어루만졌다.
“안 잘 거면 방으로 돌려보낸다.”
“네, 죄송해요.”
잠든 줄 알았던 정우의 말에 화들짝 놀란 유진이 황급히 말을 하고는 손을 거둔 채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러자 유진을 안고 있던 정우가 유진이 반응이 우스운 듯 빙그레 미소를 머금었다.
정우는 그런 유진이 귀엽다는 생각을 하며 유진을 더욱 바짝 당겨 안았고, 눈을 감고 있던 유진이 얼마 후 눈을 다시 떴다. 그리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눈을 깜빡이던 유진이 미소를 지었고 이내 다시 눈을 내려 감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말없이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잠을 청하고 있었다.




“아버님.”
“음.”
변함없이 유진을 가슴에 안은 채 잠이 들려던 정우가 유진의 부름에 대답을 했다.
“정말, 이모님하고는 아무 사이 아니시죠?”
“그렇다니까.”
“그럼 이모님하고 같이 주무셨다는 말도 거짓말인 거죠?”
유진에게 모든 사실을 말했지만, 유진이 다시 진아와의 관계를 물어오자 정우가 대답 대신 몸을 움직여 밑으로 살짝 움직였고 유진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자 유진이 조금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우도 그런 유진에게 미소를 지었다.
“왜, 믿어지지 않아?”
“아뇨, 그게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그러다가 내가 진아랑 정말 잤다고 하면 어쩌려고 그래?”
“······.”
자신의 말에 유진이 화들짝 놀라가 정우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정색을 할 거면서 왜 자꾸 물어?”
“죄송해요.”
사과를 한 유진이 다가와 품에 안기자 정우가 그런 유진을 가만히 안았다.
“아버님.”
“음.”
“정말 저 안 버리시는 거죠?”
“그렇다니까.”
“그리고 그 약속도 지키시는 거죠?”
“약속?”
정우의 되물음에 유진이 다시 물러나며 정우를 바라보았다.
“잊으셨어요, 저 완치되면 아버님 여자하게 해주신다고 하셨잖아요.”
“·······.”
자신의 말에 정우가 대답을 하지 않자 유진의 얼굴에 금방 불안감이 깃들었다. 정우는 그런 유진을 바라보다 손을 들어 유진의 뺨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유진아.”
“네.”
“약속은 지킬 수 있어. 하지만 조금 걱정이 된다.”
“무슨 걱정이요.”
“네가 나중에라도 상처 받으면 어쩌나 하고 말이다.”
“무슨 상처요, 저 안 버린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안 버려, 내가 하는 걱정은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요?”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 내가 좀 더 나이를 먹으면 지금보다 훨씬 늙어 보일 텐데, 그때 네가 후회하면 어떡하지, 왜 내가 이런 늙은이를 좋아했냐고 하면서 말이다.”
“훗!”
“왜 웃어.”
“아버님이 귀여워서요.”
“귀여워?”
“네.”
“난 진심으로 걱정하는 건데?”
정우의 말에 유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레 손은 들어 정우가 그랬듯 정우의 뺨을 어루만졌다.
“아버님은 나이 드셔도 멋있을 거예요.”
“그럴까?”
“그럼요, 제 눈에는 지금도 이렇게 멋있는 걸요.”
“에이, 네 눈에만 근사하면 뭐해, 다른 사람 눈에도 그렇게 보여야지.”
“다른 사람이 무슨 상관이에요, 제 눈에만 멋있으면 그만이죠, 아니 오히려 그게 전 좋아요. 제 눈에만 멋있는 게.”
“왜?”
“그래야 다른 여자들이 아버님한테 욕심 안 부리죠.”
“훗, 거짓말이래도 듣기 좋네.”
“거짓말 아니에요.”
유진이 정색을 하며 말하자 정우가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도 난 다른 사람들도 멋있게 봐줬으면 좋겠는데.”
“왜요, 저남 그렇게 보는 게 싫으세요?”
“아니, 그게 아니라. 너처럼 젊고 아름다운 여자랑 함께 다니는데 나마 늙고 볼품 없어봐. 사람들이 그럴 걸, 저 영감탱이 돈 많아서 어디서 젊은 여자 꽤서 옆에 꿰차고 있다고 말이야.”
“훗!”
“웃지 마, 나도 진심이니까.”
“죄송해요. 근데 제가 아버님 눈에 예뻐 보여요?”
“그럼, 얼마나 아름다운데.”
“피, 저도 거짓말인건 알겠지만 기분은 좋네요.”
유진의 말에 미소를 지은 정우가 유진의 뺨을 대고는 엄지로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넌 왜 자신에게 그렇게 자신이 없는지 모르겠다. 네가 얼마나 예쁘고 아름다운데, 아마 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웬만한 남자들은 얼마든지 휘어잡을 수 있을 걸.”
“싫어요. 그런 거,”
“왜?”
“전 그냥 아버님만 휘어잡고 싶어요. 다른 사람은 필요 없어요. 꼭 아버님이여만 해요.”
“흠! 가만 보면 우리 유진이도 바보 같아. 나 같은 늙은이가 뭐가 좋다고.”
“그런 말 싫어요, 자꾸 그러지 마세요, 저 기분 나빠요.”
“······.”
가슴을 파고들며 유진이 새침하게 말하자 정우가 그런 유진을 다시 포근하게 안았고, 정우에게 안긴 유진이 조심스레 손을 펴서 정우의 넓은 가슴을 어루만졌다.
“자기 자신을 모르는 건 제가 아니라 아버님이세요. 아버님이야 말로 모르세요. 아버님이 얼마나 근사하고 좋은 남자인지.”
“그런 가?”
“네. 아버님 가슴은 너무 따뜻해요. 그리고 그 따뜻함이 느껴지면 너무 행복해요. 세상 그 어느 무엇보다 말이에요.”
“글쎄, 난 그렇게 따듯한 적 없었는데.”
“아뇨. 늘 그러셨어요, 아버님을 처음 뵙고 난 후부터 아버님은 늘 따듯하셨어요. 특히 제가 힘들 때면 늘 제 옆에서 그 따뜻함을 전해 주셨어요. 전 그 따듯함이 너무 좋았고요. 그래서 욕심이 났어요. 그런 아버님 곁에서 사랑받는 여자가 되고 싶다고 말이에요.”
“·····.”
유진의 말에 정우가 유진을 더욱 힘주어 안았고, 유진도 손으로 더듬던 정우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데 조금 죄송해요.”
“뭐가?”
“제 마음 때문에 아버님이 힘드시면 어쩌나 해서요.”
“걱정 하지 마, 힘 하나도 안 드니까.”
“그래도 전····.”
유진이 말을 이으려던 순간 정우가 유진의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그러자 살짝 놀란 유진이 얼굴을 들어 발그레한 얼굴로 정우를 응시했다.
처음이었다. 정우가 자신에게 애정 표현을 한 것이 말이다. 비록 입술은 아니었지만 그것만으로 유진은 너무 기뻤다.
“왜 내가 실수했어?”
정우의 물음에 유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기뻐서요. 너무 기뻐서요.”
“······.”
자신의 말에 미소를 짓는 정우를 바라보던 유진이 부끄러운 듯 가슴에 얼굴을 다시 묻자 정우는 그런 유진을 다시 힘주어 안았다.
정우는 다시 한 번 유진의 이마에 입맞춤을 하며 처음으로 느꼈다.
유진에게 허락했던 그 순간을 자신도 어쩌면 설레며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전하는 유진의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을 울리는 것을 느끼며 어쩌면 자신의 생각보다 더 깊게 유진을 마음에 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정우는 조금씩 변해가는 자신을 바라보며 엷은 미소를 머금었고, 그런 정우의 품에 안긴 유진은 처음으로 전해준 정우의 사랑 표현이 아직도 부끄러운 듯 가슴에 묻은 얼굴을 좀처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 오셔도 됩니다.”
“····.”
의사의 말에 환한 표정을 짓던 유진이 정우를 바라보았고, 그런 유진을 바라보던 정우가 의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정말 완치가 된 겁니까?”
“정신 치료에 완치라는 말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상태라면 굳이 병원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환자의 상태가 평안하니 말입니다.”
의사의 말에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마주했다.
특히 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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