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천히 눈을 뜨던 유진이 천정 위의 형광등 불빛에 눈이 시린 듯 눈을 살짝 깜빡였다. 그리고 잠시 후 시선을 돌리던 유진이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시아버지를 발견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시선을 던지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앉아있는 시아버지를 보자 유진은 왈칵 눈물이 밀려나왔다.
“아버님.”
유진의 작은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시선을 돌리던 정우가 눈을 뜬 유진을 발견하며 황급히 다가왔다.
“그래, 나다. 정신이 들어, 나 알아보겠니?”
“······.”
유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유진을 보며 정우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한 얼굴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됐다, 됐어, 이렇게 정신을 차렸으니까 됐어.”
미소를 지으며 말을 하는 시아버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음을 느낀 순간 유진은 참았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죄송해요, 아버님.”
“무슨 소리야, 뭐가 죄송해, 네가 뭘 잘못했다고, 내가 미안하다. 널 혼자 지내게 아닌데 내가 실수 했어.”
“흑!”
시아버지의 말에 유진은 흐느꼈다.
모든 게 서러웠다. 왜 자신에게 이토록 가혹한 일이 벌어진 것인지 너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아버지의 얼굴에 담긴 근심과 초췌함이 유진을 더욱 서럽게 만들고 있었다.
정우는 흐느끼는 유진의 얼굴에 손을 가져가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내가 지켜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흐흑!”
사과하는 시아버지의 말에 유진은 더욱 서럽게 울기 시작했고, 퉁퉁 부어 멍들어 있는 눈과 얼굴로 울고 있는 유진을 보며 정우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철없는 아들로 인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유진이 이렇게 엄청난 일을 당한 것이 모두 자신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지난 날 거부하는 유진을 어떡하든 설득해서 원룸이 아닌 아파트로 보내야 했었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그렇게 유진과 정우는 조용한 병실에서 서로를 위로하며 설운 울음을 울고 있었다.
“한 번만 만나게 해주십시오.”
“아, 그게 말이죠.”
정우의 말에 형사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정우는 거듭 부탁을 하고 있었다.
“······.”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를 무섭게 바라보며 정우는 두 손에 힘을 주며 주먹을 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일어나 죽일 만큼 주먹질을 하고 싶었지만 형사가 바로 옆에 있는 만큼 그럴 수는 없었다.
정우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남자를 응시한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아이 불쌍한 아이였소, 내 못난 아들놈 때문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고 하나뿐인 오빠에게도 버림을 받은 가여운 아이였소, 그래서 무엇보다 내게는 안타깝고 소중한 아이가 그 아이요.”
말을 잠시 멈춘 정우가 숨을 들이 마시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만에 하나 그 아이가 당신 때문에 다른 마음을 먹거나, 영원히 그 상처로 괴로워하면 난 절대 당신을 용서하지 않아, 내 모든 걸 버려서라도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저기 그런 말씀은 하시면 안 됩니다.”
옆에 앉아있던 형사가 정우를 만류했다.
그러자 가볍게 목례를 한 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다시 남자를 응시했다.
“내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당신에게 법이 정한 가장 무거운 형벌을 받게 할 거요. 내 모든 걸 다 받쳐서 말이요.”
“······.”
정우의 말에 형사가 다시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해 한다는 듯 시선을 돌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형사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남긴 정우가 자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 2개월 후 -
“·····.”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던 정우가 어두컴컴한 거실의 불을 켜고는 주위를 둘러보다 긴 한숨과 함께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똑, 똑.“
방문 앞에 선 정우가 노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듯 안에서는 아무 인기척이 없었다.
“들어간다, 괜찮지?”
물음에 역시 아무 인기척이 없었지만 정우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은 어둠에 묻혀 있었고, 정우가 벽에 있는 스위치를 켜는 순간 형광등 불빛이 방안을 비췄고 한 쪽 구석에 누군가 웅크린 모습으로 팔에 얼굴을 묻고 앉아있었다.
유진이었다.
그런 유진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정우가 천천히 다가가 앉았다.
“밥은 먹었어?”
“·····.”
유진은 대답이 없었다.
“하루 종일 이러고 있었던 거니?”
“·····.”
유진이 다시 대답을 하지 않자 한 숨을 내쉰 정우가 유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병원에서 퇴원을 하고 집에 가기 무섭다는 유진을 데리고 왔지만 벌서 한 달 가까이 유진은 방에서 꼼짝도 않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런 유진을 힘으로라도 방에서 데려 나오고 싶었지만, 어쩌면 그게 더 역효과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알았다. 나 저녁 먹을 건데, 배고프면 나와라.”
역시 반응이 없는 유진을 바라보며 정우가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아버님.”
“어, 그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정우가 반가운 얼굴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유진은 다시 입을 다문 듯 했다.
“왜 할 말 있어?”
정우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버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뭘?”
“제가 더렵혀졌다고·····.”
정우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졌고, 당황한 표정으로 정우가 좀 더 다가앉았다.
“너, 그게 무슨 소리야, 더럽혀지다니, 네가 왜 더럽혀져, 네가 뭘 어쨌다고, 넌 잘못한 거 없어, 잘못 한 게 없다고····.”
정우의 말에 유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가에는 눈물이 젖어 있었다.
“그래도 세상은 저 보고 더렵혀진 여자라고 할 거에요.”
“아니라니까, 왜 그런 몹쓸 말을 하니, 더럽혀지다니, 넌 더럽혀진 게 아니라 잠시 아팠던 거뿐이야.”
“아팠다고요?”
“그래, 그랬던 거야. 그러니까 그런 말을 하지 마라, 너 같이 착하고 예쁜 아이에게 누구도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거야.”
“아뇨, 다들 그렇게 말할 거예요. 어쩔 수 없는 건 알지만 더럽혀진 건 맞는다고···,”
“아니라니까.”
정우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유진의 눈가에서는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자 정우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유진에게 다가가 두 손을 잡았다.
“세상 누구도 널 욕하지 않아, 내가 보증해, 세상도 안다, 더렵혀진다는 건 그런데 쓰는 말이 아니란 걸, 넌 상처 받았을 뿐이야, 그것도 충분히 이겨 낼 수 있는 그런 상처 말이다. 그런데 더럽다니, 절대 아니다, 알았니?”
“······.”
“대답해 알았어?”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유진에게 정우가 목소리를 살짝 높였다.
입술을 떨던 유진이 천천히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도 세상은 또 절 비웃으며 버릴 거예요. 그 사람이 그랬고, 오빠가 그랬듯이 세상은 절 버리며 그럴 거예요, 더럽혀진 여자라고···.”
“시끄러!”
정우가 고함을 쳤고, 유진이 흠칫 놀라자 정우가 마주 잡은 유진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넌 더럽혀지지 않았어, 지금도 깨끗하고, 충분히 아름다워, 그러니까 그런 말을 하지 마라, 그리고 그 놈이나 네 오빠는 널 버린 게 아니라, 널 피해 도망 간 거야, 너 보기가 창피해서 말이다. 그러니까 스스로 자학하지 마, 넌 지금으로도 충분히 좋은 사람이니까.”
“그런데 왜 그래요.”
“······.”
물음 같은 유진의 말에 정우의 얼굴이 굳어지고 있었다.
“제가 뭘 잘못했어요, 뭘 잘 못했는데 저에게 이래요, 저 그 사람에게도 잘못하지 않았어요. 좋은 여자 되려고 노력했고, 열심히 살았어요, 그리고 우리 오빠에게도 저 아무 잘못 안했어요. 그런데도 그 두 사람은 날 버렸어요. 전 아무 잘못도 안했는데····, 그리고 그 인간은···, 그 인간한테는 아무것도 안했어요. 그런데도 절 이렇게 만들었어요. 왜 그래야 하는데요. 아무 잘못도 안했는데, 전 왜 늘 이렇게 버림받아야 하는데요, 왜요··.”
울먹이며 말하는 유진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히던 정우가 유진을 당겨 가슴에 안았다.
“그래, 넌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모두 그 인간들이 못나고, 나빠서 그런 거야, 그러니까 아파하지 마라. 힘들어 하지도 말고····.”
“흐흑! 흑!”
유진이 설운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정우가 그런 유진을 더욱 힘주어 안았다.
“그래, 그렇게 울어, 그렇게 울어서 모든 걸 풀어,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넌 여전히 착하고, 충분히 깨끗해 알았지.”
“흑! 제가 정말 그런 거라면 아버님은 저 버리시지 않을 거죠.”
“걱정 말아라, 안 버려, 내가 널 왜 버려, 넌 이제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다.”
“흐흑! 흑! 아버님····, 저 버리지 마세요. 아버님마저 저 버리시면 저 더 살고 싶지 않아요.”
“그래, 약속하마, 내 곁에 있을게, 네가 필요 없다고 해도 네 옆이 있을 테니까, 이제 그만 아파해,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지도 말고 말이다.”
“흐흑! 흑! 아버님···.”
정우의 말에 더욱 품을 파고든 유진이 서러운 울음을 다시 울기 시작했고, 그런 유진의 등을 토닥이며 정우도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유진이 이 상처를 씻을 수만 있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겠다고 말이다.
모든 걸 말이다.
‘콰콰광, 콰앙···.’
번쩍이는 번개에 이어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자 자리에서 일어난 정우가 요란한 빗소리와 함께 다시 번쩍이는 번개 불빛을 보며 비가 점점 거세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콰콰광, 콰앙···.’
“아악!”
그리고 다시 한 번 요란한 천둥소리가 울리던 순간 날카로운 유진의 비명 소리가 들리자 놀란 정우가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방문이 벌컥 열리며 유진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에 맞춰 다시 번개가 번쩍이자 두 손으로 귀를 막은 유진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자 정우가 황급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유진아.”
“·······.”
유진에게 다가간 정우가 유진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순간 벌벌 떨고 있는 유진의 상체가 느껴졌다.
‘콰콰광, 콰앙···.’
“악!”
다시 천둥이 울렸고 비명을 지른 유진이 품에 안기자 정우는 엉겁결에 유진을 안았다.
유진의 몸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원래 천둥소리를 무서워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심하게 떠는 유진을 안은 채 정우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이런 유진의 행동이 남편과 오빠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상처와 몹쓸 짓을 당한 이후 생긴 두려움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
천둥소리가 잠잠해지고 한참이 지나자 몸을 웅크린 자세로 자신의 품에 안겨있던 유진의 입에서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리자 정우는 안도했다.
천둥 번개가 치는 내내 부들거리며 떠는 유진이 이대로 밤을 새면 어쩌나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 이렇게 잠이 들자 안도했다. 하지만 떠는 내내 스스로 인지 하지 못한 채 자신을 버리고 나가지 말라는 유진의 말을 듣던 순간, 자신의 염려대로 그 몹쓸 순간과 상처가 유진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생채기를 남겼음을 느꼈다.
그렇게 자신의 품에서 곤히 잠든 유진을 바라보던 정우가 얼굴을 가리고 있는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넘겨주고 몸을 뒤로 빼려했다. 그래도 한때는 유진의 시아버지였고, 이제는 아들과 이혼을 한 상태인 유진이었기에 아무리 자신이 아끼기는 하지만 이렇게 한 침대에서 잠들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음, 안 돼···.”
자신을 옷자락을 잡고 있는 유진의 손을 밀어내려던 순간 잠꼬대를 하던 유진이 가슴을 더욱 파고들자 난감한 표정을 짓던 정우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잠들어 있는 유진을 다시 응시했다.
“·····.”
유진을 위해 켜놓은 불빛으로 인해 잠든 모습을 가마니 응시하던 정우는 창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 때문이지 새근거리며 잠든 유진의 모습이 꽤나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아들이 유진을 데리고 인사를 시키던 날 유진을 보며 너무나 흡족했었다.
아들보다 비록 나이는 많았지만 조신한 모습이나, 얌전한 말투, 그리고 한 눈에 보기에도 꽤나 예뻐 보이는 모습은 아들이 한 눈에 반할만 하다는 생각을 했다. 혼자 외롭게 키워온 아들이 이제는 제대로 된 여자를 만났다는 기쁨에 결혼을 허락했고, 결혼을 하고 자신을 모시겠다는 유진을 기어이 분가시키며 자신의 삶에서 커다란 짐 하나를 덜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분가를 시키는 자신에게 나가서 살아 거듭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유진을 보며 아들이 정말 여자 하나는 잘 얻었다는 생각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그 아들놈이 자기 복을 스스로 차버렸다는 것이 너무도 속상했다.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아내가 있는 걸 알면서도 아들과 살겠다고 마음을 먹은 여자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들을 설득하려 했고, 어뜩하던 유진과의 이혼만은 막아보려 했지만 아들놈은 기어이 이혼을 하고 자신이 마련해준 아파트를 팔아 미국으로 들어가서는 몇 년째 연락조차 없는 것이 너무 가슴 아팠다.
“······.”
그런 생각을 하며 정우는 다시 잠들어 있는 유진을 응시했다.
그리고 안타까워했다.
어디에 내놔도 무엇 하나 모자람이 없는 유진이 왜 이리 굴곡진 삶을 사는지 말이다.
정우는 가만히 생각했다.
이런 유진에게 자신만이라도 상처를 주지 말아야겠다고 말이다.
언젠가 시간이 지나 유진이 마음을 열고 좋은 남자를 만나 자신의 곁을 떠날 순간까지는 자신이 유진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말이다.
그렇게 측은한 시선으로 잠든 유진을 바라보던 정우의 눈꺼풀도 서서히 감기고 있었다.
“······.”
천천히 눈을 뜨던 유진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 숨소리가 시아버지인 정우의 숨소리임을 느꼈고, 자신이 지금 시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음도 느꼈다.
유진은 망설였다.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다시 잠을 청해야 하는지 말이다.
그러던 유진의 눈에 자신의 손이 정우의 옷자락을 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여전히 창밖에선 굵은 빗줄기 소리가 들려오자 언제 또다시 천둥 번개가 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유진이 다시 눈을 내려 감고 있었다.
“·····.”
그렇게 눈을 감고 잠을 청하며 유진은 느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남자의 품이 너무 따듯하다고 말이다.
비록 자신을 안고 있지는 않지만 팔에 밀착된 가슴에서 느껴지는 체온의 따뜻함만으로도 자신의 몸도 따듯해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귀에 들려오는 숨소리가 무엇보다 자신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유진은 그 숨소리에 맞춰 자신도 숨을 골라보고 있었다.
그런 유진의 입가에 문득 엷은 미소가 머금어지고 있었다.
유진은 그렇게 다시 잠에 빠져들고 있었고, 잠시 후 빗소리가 들려오는 방안에 밝은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두 사람의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마치 한 사람이 숨을 쉬는 듯 박자를 맞춰 말이다.
‘똑, 똑.’
노크 소리에 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대답 소리에 이어 방문을 열고 유진이 들어서자 정우가 긴장한 표정으로 쭈뼛거리는 유진을 응시했다.
“왜 잠이 안 오니?”
“·····.”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번 천둥이 치던 날 자신의 품에서 잠이 든 후 유진은 가끔 새벽에 이렇게 자신을 찾아오곤 했다. 처음에는 그런 유진을 달래 방으로 돌려보냈지만 악몽을 꾼 후 비명을 지르는 유진을 보는 순간 자신의 방으로 데려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방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꼬박 밤을 지새우는 유진을 모른 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우는 아마도 두려움에 휩싸이던 순간 자신의 품에 잠이 들며 유진이 자신의 품을 어떤 안식처로 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
유진의 목소리에 눈을 뜬 정우가 눈이 부신 눈을 비비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자신의 옆구리에 웅크린 자세로 바짝 밀착한 유진이 몸을 살짝 떨고 있는 것이 보이자 몸을 일으키려 했다.
“버리지 마세요. 잘못했어요, 제발 버리지 마세요.”
“······.”
누구에게 외치는 잠꼬대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옆구리를 더욱 파고드는 유진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정우가 다시 몸을 눕히고는 몸을 돌려 유진을 가만히 가슴에 안았다.
“잘못했어요, 잘못····.”
다시 중얼거리는 유진의 등을 토닥이자 중얼거림이 점점 사그라지고 있었다.
정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상처에 아파하는 유진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이제는 빈번하게 자신의 침대로 찾아와 잠이 드는 유진이었다.
불을 끄면 무서워하는 유진으로 인해 불을 밝히고 잠이 들고 있었다. 폭행을 당하는 당시 불을 꺼버렸던 남자의 행동으로 어둠에 대한 트라우마가 유진에게 깃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정신적인 치료를 받게 하고 싶었지만 유진이 극구 사양을 했다. 자신 말고는 그 어느 누구도 스스로가 당했던 일을 알게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자신은 자살을 하겠다는 말도 함께하며 말이다.
“········.”
유진이 좀 더 자신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정우는 난감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때는 며느리였던 유진과 이렇게 한 침대에 누워 잠든다는 것을 다른 누군가가 알면 충분히 오해할 만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유진이 자신의 품을 파고들 때면 더욱 그랬다.
그렇다고 이런 유진을 모른 척 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만에 하나 유진이 다른 마음이라도 먹는다면 그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정우가 피곤한 듯 천천히 눈을 감고 있었다.
잠시 후 정우가 깊은 잠에 빠져들던 순간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몸을 떨던 유진이 웅크리고 있던 몸을 바로 펴며 정우를 안은 자세로 몸을 밀착하고 있었다.
‘·····.’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정한 연인이 잠들어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특히 정우의 품에 몸을 밀착하고 잠든 유진의 모습은 어린 연인이 자신의 남자 품에서 포근함을 느끼는 모습과도 너무 흡사했다.
유진이 받은 상처가 없었다면 말이다.
“······.”
천천히 눈을 뜨던 정우가 형광등 불빛을 바라보다 인상을 찌푸렸다.
시리운 눈을 가늘게 뜨며 창밖을 바라보던 정우가 날이 밝았음을 확인하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무언가 이상한 느낌에 시선을 밑으로 향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발견한 순간 정우가 너무도 놀라고 있었다.
정우는 황급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어떻게 된 영문이지 자신의 팔을 베고 자신의 옆구리에 안겨 유진이 잠들어 있었다.
정우의 시선이 다시 밑으로 향한 순간 유진의 손이 정우의 바지 중심부에 올려진 채 살며시 그걸 거머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더군다나 자신의 자지는 커진 채 부풀어 있었다.
정우는 당황했고, 난감해 했다.
편안 옷차림이었기에 자신의 자지를 쥐고 있는 유진의 손길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건 달리 말해 유진의 손에도 자신의 자지 감촉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을게 분명했다.
“······.”
정우는 긴장한 채 마른 침을 삼켰고, 다시 한 번 잠든 유진을 바라보다 천천히 손을 밑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자신의 자지를 잡고 있는 유진의 손을 조심스레 당겼다.
“음!”
바로 그 순간 유진이 몸을 뒤척였고, 정우가 놀라 손을 놓는 순간 다행스럽게도 유진의 손이 가슴으로 옮겨와 올려졌다.
정우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안긴 채로 잠든 유진의 모습에서 여전히 난감함을 느꼈다. 이렇게 같이 잠이 들면 다행히도 먼저 잠을 깬 유진이 방으로 돌아갔었기에 그동안은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생각지도 못한 모습을 접하자 정우는 곤혹스러웠다.
정우는 조심스레 유진에게서 팔을 빼내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아직도 곤히 잠들어 있는 유진을 잠시 바라보던 정우가 유진이 깨지 않게 침대에서 내려와 방을 나서고 있었다.
“······.”
세수를 한 정우가 거울속의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일곱 시가 넘어가고 있었지만 아직도 잠들어 있는 유진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조금 전의 일을 가만히 떠올렸다.
정우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진 것에 난감해 하며 거울속의 자신을 바라보다 길게 한 숨을 내쉬고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는 욕실을 나와 다시 방으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연 정우의 눈에 아까와 달리 몸을 잔뜩 웅크린 자세로 잠들어 있는 유진이 보이자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유진에게 다가간 정우가 애잔한 시선으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잠든 유진을 바라보았다. 기분 탓인지 웅크리고 잠든 유진의 얼굴에 긴장감과 슬픔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런 유진을 보자 정우는 다시 안타까웠다.
세수를 하면서 이제는 자신의 방에 유진이 찾아오게 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이 흔들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이런 유진의 곁에 이제는 자신 말고 아무도 없음이 다시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음도 느꼈다.
하지만 정우는 모르고 있었다.
유진이 자신의 방을 다시 찾아오기 이틀 동안 유진이 밤새 악몽에 시달렸고, 결국 이틀 동안 단 몇 시간만을 자고 다시 악몽에 시달리는 무서움 때문에 자신을 찾아왔음을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품에 안겨 잠드는 순간만큼은 유진이 악몽에 시달리지 않고 편히 잠들고 있음을 말이다.
그건 유진에게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리고 그 안식처에서 만큼은 유진이 스스로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정우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입니다.”
“스트레스 증후군이요?”
의사의 말을 정우가 되물었다.
지난 번 일 이후 다시 한 번 같은 일이 벌어졌고, 며칠 전에는 완전히는 아니지만 바지 안으로 손을 넣고 잠들어 있는 유진을 발견하는 순간 기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가끔은 밤을 새워 유진을 살폈지만, 자신의 곁을 찾아오는 횟수가 점점 많아지는 지금 그 모든 날을 뜬 눈으로 새울 수는 없었다.
정우는 고민을 했고, 유진을 데려 올 수 없었기에 먼저 자신이 병원을 찾은 것이다.
“네, 극심한 공포를 겪은 환자가 자신이 유일하게 믿고 기댈 수 있는 곳을 찾아 그곳에 자신의 모든 걸 맡기는 겁니다.”
“믿고 기댈 수 있는 곳이라고요?”
“네, 대부분 환자 같은 경우를 대하면 그 증상이 자신에 대한 증오나 좌절감, 아니면 특정한 상대를 향한 분노와 시기로 나타납니다. 많은 경우는 스스로 자책하거나 자신의 존재를 강하게 부정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러다가 무기력증에 빠지기도 하고 며칠을 잠도 못자기도 하고 말입니다.”
“네.”
“아마 환자도 비슷할 겁니다. 환자가 보호자 분의 방을 찾아오는 건 며칠 동안 괴로워하고 스스로 싸워보다 그런 자신이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보호자분을 찾아 온 걸 겁니다.”
“그럼, 의식적인 행동이 아니라는 겁니까?”
“아뇨, 의식적인 행동이죠, 하지만 그 의식이 일반적인 의식과는 많이 다르죠, 환자에게 그 의식이 어떤 목적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저 이 악몽 같은 현실에서 유일하게 자신이 기대고 쉴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거죠. 일종의 맹목적인 믿음이라고 할까요, 이 사람이라면 날 아프게 하지 않을 거고, 이 사람이라면 상처받은 자신을 더 힘들게 하지 않을 거라는 맹목적인 믿음 말입니다.”
“하지만 평소나 낮에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절 편안하게 대하지도 않고 말입니다.”
“당연하죠. 환자가 어둠속에서 그런 일을 당했으니까요. 다시 말해서 어둠이 밀려오면 그 상처가 환자를 괴롭히는 것이고, 혼자 싸워보려 하지만 자신의 무기력함만을 절감한 환자가 결국 자신의 선택한 유일한 안식처를 찾는 거죠.”
의사의 말에 정우는 자신의 짐작이 크게 틀리지 않았음을 느꼈다.
“그렇다면 그걸 고칠 방법은 없습니까?”
“일단의 환자를 만나봐야겠죠. 보호자분의 말만으로는 모든 걸 짐작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허나 환자가 그걸 강하게 거부합니다. 저 말고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상태를 알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겠다고 할 만큼 말입니다.”
“흐음, 그런 가요.”
“·····.”
의사의 난감한 말투에 정우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은 당분간은 환자를 자극하지 마십시오. 자신이 유일한 안식처로 여겼던 보호자가 자신을 거부한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환자는 절망에 빠질 겁니다. 자칫하면 그걸 스스로에게 돌리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어쩔 수 없습니다. 대신 환자에게 천천히 다가가십시오. 보호자분은 절대로 환자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믿음을 주며 말입니다. 그러면서 환자를 설득하세요. 보호자분을 믿고 치료를 받자고 말입니다.”
“가능 할까요?”
“제가 보기에는 가능합니다. 다행히 환자가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지 않고, 스스로를 자해하거나 특정인에게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보호자 분이 믿음을 주며 다가가면 설득할 수 있을 겁니다.”
“네···,”
정우가 힘없이 대답을 했다.
“그리고 한 가지는 명심하십시오.”
“어떤?”
“절대 환자를 자극하지 마시고, 되도록 많은 대화를 하시면서 환자를 독려하십시오. 차분하게 말입니다. 환자에게 용기를 주는 말을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되도록 환자분을 빨리 병원으로 오게 하십시오. 특히 강한 반발이나 폭력적 성향이 나타나면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억지로라도 환자를 데리고 와야 합니다. 자칫하면 해리성 장애로 발전할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해리성 장애요?”
“네, 일종의 자기 방어인데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어느 순간 스스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상처를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거죠.”
“그렇다면 오히려 좋을지도 모르는 것 아닙니까, 환자를 힘들게 하지 않고···.”
“폭행에 국한된다면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환자의 경우는 다른 기억도 그렇게 지워버릴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혼한 남편이나 오빠의 기억도 말입니다. 그게 환자에게는 편하니까요. 하지만 지워버렸던 기억과 충돌하는 무언가나, 인물이 나타나면 환자는 극심한 혼란이 나타나고 자칫 정신적 공황 상태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 전에 치료를 해야 합니다. 요행을 기대하기에는 위험 요소가 너무 크니 말입니다.”
“······.”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유진을 떠올리며 어떻게 유진을 설득해 병원으로 데려올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디리리···, 디리리링링···.’
운전을 하던 정우가 핸드폰 소리에 블루투스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저에요, 형부.”
“어, 처제 웬일이야.”
죽은 아내의 둘째 동생, 작은 처제 진아였다.
오래 전 아내가 세상을 떠났지만 아직도 연락을 하고 지내고 있었다. 특히 이혼을 하고 장모와 함께 살고 있는 작은 처제는 아내의 기일이면 장모를 모시고와 화장한 아내의 재를 뿌렸던 곳을 찾아가곤 했다.
“바쁘세요?”
“아니, 안 바빠.”
“그럼, 저녁 같이 하실래요.”
“왜, 장모님이 입맛 없으시데?”
“아뇨, 엄마는 여행 가셨어요. 친목회에서, 그래서 혼자 밥 먹기 그래서 형부한테 밥 사달라고 하려고요. 싫으세요.”
“싫기는, 그럼 처제가 우리 회사 근처로 올래?”
“네, 그럴게요. 나가면서 다시 전화 드릴게요.”
“그래.”
통화를 끝낸 정우가 핸드폰을 내리고 다시 운전에 열중했다.
그리고 다시금 조금 전 의사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가만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장모님은 별일 없으시지?”
“네, 근데 우식이는 아직 연락 없어요?”
“음,”
진아의 물음에 정우가 무겁게 대답을 했고, 진아도 괜히 물었다는 생각을 했다.
“근데 형부.”
“응.”
“혹시 여자 안 만나 보실래요. 좋은 여자 있는데.”
“또 그 소리야, 됐어. 여자는 무슨···.”
“형부 혹시 만나는 여자 있어요.”
“없어.”
“정말 이해가 안 되네.”
갸웃거리는 진아의 말에 정우가 입을 열었다.
“뭐가?”
“그렇잖아요. 만나는 여자도 없고, 여자를 소개 시켜주겠다고 해도 싫다고 하고, 이거 이상하잖아요.”
“그러니까 뭐가 이상하냐고?”
“형부는 여자 생각 안나요?”
“여자 생각이라니?”
“섹스 말이에요, 형부는 섹스하고 싶지 않아요.”
“또, 장난친다.”
늘 거침없이 말하는 처제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오면 정우는 조금 난감했다.
“장난은 무슨, 자도 마흔이에요 형부, 마흔 넘어서 이런 이야기도 못해요?”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혼자 사는 형부한테 장난이나 치면서.”
“장난 아니라니까요, 형부는 정말 섹스 생각 없어요?”
“없어.”
“피, 거짓말.”
“시끄럽고, 내 걱정 하지 말고 처제나 좋은 사람만나서 다시 재혼 해, 언제까지 혼자 살 거야.”
“마흔이나 된 여자를 누가 데려가요.”
“마흔이 뭐 어때서, 처제 정도면 얼마든지 새 출발 할 수 있잖아. 서른 중반이라고 해도 믿을 걸.”
“피, 거짓말이라도 기분은 좋네.”
“거짓말 아니야, 처제는 아직 충분히 매력 있어.”
“그럼, 형부가 데려가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왜요, 저 매력 있다면서요?”
“시끄러.”
“아니면 섹스하고 싶으면 부르던가,”
“야, 서 진아.‘
“·····.”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진아가 어깨를 들썩하며 시선을 피했다. 형부인 정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화내기 일보 직전임을 알고 있었다.
“한 번만 더 그런 소리하면 다시는 처제 안 본다.”
“피, 맨 날 겁주기는···, 내가 만나자고 조르면 거절도 못할 거면서,”
“·····.”
정우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자 진아가 샐쭉 거리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우는 살짝 화가 난 표정으로 밥을 우겨넣고 있었고 진아는 그런 정우를 가만히 응시했다.
‘바보 진심인데···.’
정우를 응시하며 처제인 진아가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정우는 계속 밥을 먹기만 했다.
‘디리리···, 디리리링링···.’
“·····.”
운전을 하던 정우가 블루투스를 귀에 걸었다.
“여보세요.”
“저에요. 아버님.”
“어, 그래.”
“연락도 없이 늦으셔서 전화했어요, 식사는 하셨어요?”
“어, 먹었다. 넌?”
“아직 안 먹었어요. 아버님 언제 오실지 몰라서.”
“지금이 몇 신데 아직 밥을 안 먹어, 어서 밥 먹어.”
“네.”
힘없이 대답하는 유진의 목소리에 정우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앞으로는 내가 들어오는 시간 넘으면 기다리지 말고 식사해, 나도 늦으면 연락 할 테니까.”
“네.”
“전화 끊고 어서 식사해.”
“네.”
유진의 힘없는 목소리를 끝으로 통화를 끝낸 정우가 블루투스를 빼는 순간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진아가 입을 열었다.
“뭐야, 형부 여자 있어요?”
“여자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여자 같은데, 어머 형부 웃긴다. 여자 없다고 그렇게 펄쩍 뛰더니.”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럼 누구에요?“
“유진이야.”
‘유진이요?“
“그래.”
“근데 유진이한테 왜 늦으면 기다리지 말고 밥 먹으라고 해요, 같이 사는 사람처럼?”
“······.”
“형부.”
정우가 말이 없자 진아가 정우를 불렀다.
“유진이 지금 우리 집에 있어.”
“왜요?”
“그럴 일이 있어서 내가 짐시 데리고 있어.”
정우의 말에 살짝 긴장한 얼굴을 한 진아가 몸을 돌리며 정우를 응시했다.
조카 우식과 이혼을 하고도 정우가 유진을 돌보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우식과 헤어진 유진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고 있다는 것이 진아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일이기에 며느리였던 애를 집에 들여요, 그것도 형부 혼자 사는 집에를.”
“유진이 개인적인 일이라 말을 해 줄 수 없고, 유진이가 집에서 지내는 게 왜?”
정우의 물음에 진아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라니요. 그게 할 말이에요?”
“뭐가?”
“유진이 우식이하고 이혼한 애예요. 그런데 며느리도 아니고 아들과 헤어진 전 며느리와 집에서 함께 산다고요. 그게 말이 되는 소리에요?”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사정이 있다잖아.”
“그러니까 무슨 사정이요. 무슨 사정이 있기에 젊은 여자애를 집에 들여요. 그것도 며느리였던 애를요.”
“왜 그렇게 흥분해, 뭐가 어떻다고.”
“형부, 지금 제 정신이에요? 그러다가 무슨 일이 벌어지면 어쩌려고 그래요?”
“무슨 생각하는 거야, 지금?”
“무슨 생각은요. 혹시 형부 이상한 생각하는 거예요?”
“야, 서 진아.”
다시 한 번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진아가 흠칫했다.
정우가 화나기 일보 직전임을 알고 있기에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진아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차라리 그냥 모르는 젊은 여자라면 모를까, 아들과 헤어진 며느리와 시아버지가 한 집에 살고 있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형부 제 말은,”
“그만해, 더 하면 나 정말 화낸다. 내가 말했지.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고.”
“형부.”
“차 세운다, 여기서 내릴래?”
“·····.”
정우의 말에 진아가 입을 다물었다.
누구보다 순한 사람이지만, 정말로 화가 나면 자신을 길거리에 버리고도 남을 사람임을 진아도 알고 있었다.
진아는 입을 다문 채 몸을 돌려 정면을 응시했고, 정우는 처갓집을 향해 차를 몰아갔다. 그렇게 말없이 정면을 응시하던 진아는 곰곰이 다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고, 정우도 조금 전 했던 처제 진아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런 정우의 머릿속에 오늘 병원을 찾았던 일과 유진에게 놀랐던 순간을 함께 떠올리고 있었다.
“언제 오세요?”
“모레 올 거야. 혼자 있다고 끼니 거르지 말고 꼭 챙겨 먹어라, 알았지?”
“네.”
“혹시 밤에 무섭거든 문 잠그고 자고.”
“걱정 마세요.”
대답은 하고 있었지만 유진의 얼굴에 깃들어 있는 불안감을 정우는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업 때문에 떠나야 하는 일을 미룰 수도 없었다. 부하 직원에게 맡기기에는 너무 중요한 출장이었고 회사 대표인 자신이 가야만 했다.
“정 힘들면 전화하던가.”
“네, 염려마시고 다녀오세요.”
“그래, 알았다.”
가방을 들고 나서려던 정우가 다시 고개를 돌렸고, 유진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고 있었지만 얼굴에 깃든 불안감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정우는 다시 한 번 근심어린 시선으로 그런 유진을 바라보다 무거운 마음으로 집을 나서고 있었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좀처럼 울리지 않던 집 전화의 벨이 울리자 유진이 다가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거기 이 정우씨 댁 아닌가요?”
“맞는데 누구시죠?”
왠지 목소리가 귀에 익다는 생각을 하며 유진은 집으로 전화를 건 여자의 정체가 궁금했다.
“전 이 정우씨 작은 처제인데, 그 쪽은 누구시죠?”
유진은 살짝 당황했다.
남편의 작은 이모 진아였던 것이다.
“어머, 이모님 전 유진이에요.”
“유진이? 네가 왜 형부 집에 있니?”
“네, 일이 좀 생겨서····.”
유진이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어쨌거나 남편과 헤어진 지금 시아버지에게 얹혀사는 자신의 입장을 진아에게 솔직히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 형부는?”
“나가셨는데요, 출장 가신다고.”
“출장?”
“네.”
“출장 간다고 하셨니?”
“네, 왜요?”
“형부도 참, 뭐가 부끄럽다고,”
“네?”
진아의 이상한 말에 유진은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야, 그렇게 말했다니 됐다. 근데 넌 언제부터 거기서 지낸 거니?”
“한 달 안 됐어요.”
“그래, 근데 형부는 왜 아무 말도 안 했지?”
“그건 저도 잘····.”
“이상하네, 나에게 왜 말을 안했지, 그리고 너에게 왜 출장을 간다고 했지.”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님 출장 가신 거 아니세요?”
“아니다 됐다. 만나서 물어보면 되지.”
“네?”
“끊는다.”
“이모님.”
유진이 황급히 진아를 불렀지만 전화는 이미 끊겼고, 수화기를 내려놓은 유진이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조금 전 진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 너에게 왜 출장을 간다고 했지.’
유진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정우가 출장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집을 비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작은 이모 진아와 말이다.
유진은 불안한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고, 거실을 서성였다.
마음 같아서는 시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이상했기 때문이다.
‘안 돼요, 아버님, 정말 그런 거라면 전 어떡해요, 전 이미, 전 이미 아버님을·····.’
가슴으로 무언가를 이야기하며 유진은 계속 거실을 서성이고 있었다.
너무도 불안해하는 얼굴로 말이다.
“······.”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진아는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유진이 전화를 받자 화가 났다. 며칠 전 통화를 통해 오늘 형부 정우가 출장을 떠난 것을 알고 일부러 전화를 했었다. 그리고 유진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진아는 어떤 생각 하나를 빠르게 떠올렸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어떻게든 떨어 드려놔야 돼, 그게 형부를 위하는 거야, 그리고 날 위해서도 이건 아니야.”
혼자 무언가를 중얼거린 진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무슨 일을 진아가 벌이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한 건 정우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
맞은편에서 차분하게 앉아있는 진아를 바라보며 유진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그에 비해 진아는 너무도 차분한 모습이었다.
“유진아.”
“네.”
“내가 뭐하나만 묻자.”
“네, 하세요.”
“너 혹시 우식이하고 다시 합치기로 했니?”
생각하지 못한 느닷없는 질문에 유진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근데 왜 형부랑 함께 지내니?”
“그건····.”
“왜 말하기 싫니?”
“죄송합니다. 싫은 게 아니라 말씀 드릴수가 없어요.”
“그래.”
“·····.”
의외로 진아가 덤덤하게 대답을 하자 유진이 더욱 불안한 시선으로 진아를 응시했다.
“그럼 언제까지 형부 집에서 지낼 건데?”
“그것도 잘···.”
“그게 무슨 소리니, 너 혹시 돈 때문에 형부한테 얹혀살려고 그런 거니?”
“아니에요, 그런 거.”
“그럼 뭔데?”
“아버님이 그러라고 하셔서.”
“형부가?”
“네, 아버님이 집에서 지내라고 하셔서.”
“언제까지 그러라고 하셨는데?”
“그런 말씀은 없으셨어요.”
“그럼, 형부가 아무 말이 없으면 평생 거기서 살 거야?
“그건 아니지만, 당분간은····.”
처음으로 진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유진아.”
“네.”
“넌 형부 며느리였어, 그건 알지?”
“네.”
“그런데 우식이하고 헤어진 지금 네가 형부랑 같이 살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니, 두 사람을 편하게 볼 것 같아?”
“무슨 말씀이세요?”
“너도 어린애가 아니니까 돌려 말하지 않을게. 생각해 봐, 중년의 남자가 예전 며느리였던 젊은 여자와 산다는 게 무슨 의미겠어. 더군다나 너처럼 참하고 예쁜 여자가 말이야. 두 사람이 아무 일도 없다고 해도 그걸 누가 믿어, 안 그래?”
“이모님 아버님과 전··.”
“알아, 하지만 누가 믿어 나부터 의심이 가는데.”
“아니에요, 이모님도 아시잖아요. 아버님이 그러실 분이 아니란 거.”
“그래 알아, 그런데 넌?”
“네?”
“너도 형부처럼 아무 감정 없이 형부랑 지내는 거야?”
“그, 그건···, 네, 그렇습니다.”
유진이 머뭇거리며 대답을 헸지만, 그 대답을 듣는 진아의 얼굴에 매서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이 염려하던 부분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형부 좋아하니?”
“네?”
유진이 놀라며 되묻는 순간 진아의 눈썹이 다시 일그러졌다.
“형부 좋아하냐고?”
“그게, 전 아버님이····, 잘해주시고·····, 그래서 그냥 편안 마음으로···.”
더듬거리는 유진을 바라보던 진아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나와라 형부 집에서···.”
“네?”
다시 짧게 되묻는 유진에게 진아가 시선을 가져갔다.
“형부 집에서 그만 나오라고.”
“이모님.”
“네가 정말 형부를 생각한다면 그래야 하는 거야.”
진아의 말에 난감해 하던 유진이 처음으로 눈빛에 반감을 싣고 있었다. 희미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버님은 그래도 된다고, 그리고 이모님이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뭐?”
유진의 말에 진아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죄송하지만 아버님이 나가시라면 모르겠지만 이모님 말씀만으로는 나 올 수 없습니다.”
“어째서?”
“그건, 아버님도 원하시지 않으실 테고, 그리고···, 또····.”
“네가 싫은 거겠지, 그렇지?”
“····.”
진아의 물음에 유진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솔직하게 말해, 너 형부 옆에 있고 싶은 거지, 형부를 남자로 느끼고 있고, 그렇지?”
“······.”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진아는 대답을 종용하듯 유진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유진이 먼저 시선을 피하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진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래도 설마 하던 생각이 조금 전 대답 없는 유진의 행동에 의해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진아는 순간 형부 정우가 정말 미련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유진의 마음도 모르고 오히려 염려하던 자신을 질책하던 정우가 말이다.
진아는 생각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진을 정우에게서 떨어 뜨려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형부 정우가 아들의 아내였던 여자를 가슴에 품은 못된 남자가 되기에 말이다.
“·····.”
진아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는 유진을 가만히 응시하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있었다.
“형부랑 여행 다녀오는 길이야.”
“······.”
순간 유진의 고개가 번쩍 들렸고, 진아가 그런 유진을 차분한 얼굴로 응시했다.
“같이 여행가서 같이 지내다 형부는 오늘 아침에 바이어 만나러 갔어, 이따 저녁이면 돌아 올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다시 말해줘, 형부랑 여행 갔다가 나 먼저 왔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지금 아버님이 출장을 가신게 아니라 이모님하고 여행을 갔다는 말씀이세요.”
“응, 그제 오후에 만나서 같이 떠났어, 오늘은 바이어 만난다고 해서 나 먼저 온 거고, 왜?”
“지금 그 말씀 아버님하고 함께 계셨다는 게····.”
유진이 말끝을 흐렸다.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거야? 지금 형부랑 여행가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 거야?”
“·····.”
유진은 대답 없이 진아를 응시했다.
진아는 그런 유진을 바라보며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중년 남녀가 여행을 가서 뭐하겠어, 구경하고 밤에는 같이 자는 거 아니야?”
“설마, 지금 그 말씀은···.”
“뭐, 무슨 의민지 모르겠다는 말이야, 말 그대로야. 같이 여행을 갔고, 여행가서 형부랑 잤다는 말이야.”
“·······.”
유진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고, 진아는 그런 유진을 계속 응시했다.
“나도 어린애가 아니니까, 형부랑 잤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그럴 리가 없어요, 그럴 리가, 아버님은 분명히 출장 가신다고····.”
“알아, 형부도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 처제인 나랑 여행 간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고 말이야.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스러워서.”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아버님은 저에게 거짓말을 하는 분이 아니에요.”
유진이 고개를 저으며 울먹이듯 말을 하고 있었다.
“거짓말이 아니면 형부랑 섹스 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줘야 믿을래?”
“·····.”
너무나 직접적이고 단호하게 말하는 진아의 모습에 유진은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진아의 태도로 보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유진은 어제 진아와 했던 통화를 떠올렸다.
‘너에게 왜 출장을 간다고 했지?’
진아가 했던 그 이상한 말을 떠올린 유진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은 그렇게라도 믿게 해달라는 것으로 보이네. 훗! 그래 그걸 원하면 그렇게 해 줄게. 물론 형부 모르게 해야겠지만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하루 이틀 가지는 섹스도 아니고 말이야.”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아버님이 이모님과 그러시면서 저 보고 함께 지내자고 할 리가 없어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유진이 다시 고개를 저으며 말을 하자 진아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넌, 너희 시아버지를 그렇게 모르니?”
“······.”
진아는 형부라는 말 대신 굳이 시아버지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너희 시아버지, 그래 형부가 어떤 사람이니? 네가 우식이하고 헤어지고 나서도 널 보듬은 사람이야. 생각해봐, 어떤 시아버지가 아들과 헤어진 며느리를 그렇게 돌보니, 더군다나 너 때문에 아들하고 의절까지 한 사람이 말이야.”
“······.”
“너희 시아버지 그런 사람이야, 너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내가 수없이 물어도 끝까지 말은 하지 않아서 그 사정은 내가 모르겠다만 너희 시아버지 그런 너에게 집에서 나가달라고 할 것 같니? 몸을 섞은 나에게도 널 위해서 너의 사정에 대해서 입을 다무는 그런 사람이 말이야.”
“·····.”
진아의 말이 끝나는 순간 유진의 눈빛에 처음으로 절망감이 깃들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 부인 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음을 정확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시아버지의 시상에 관해 진아가 빠짐없이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시아버지와 이모인 진아가 친밀한 사이임을 부인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도 조금 신경이 쓰여. 형부는 걱정 말라고 했고 시간이 지나면 너에게 말하겠다고 하지만 기분이 나쁜 건 사실이야, 나도 입장 바꿔 생각해 봐, 너와 몸을 섞은 사랑하는 남자의 집에 너 같이 아름답고 젊은 여자가 함께 살고 있다면 어떨지 말이야?”
“·····.”
유진은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진아의 말 어느 하나도 강하게 부인 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난 진아는 시아버지인 정우와 몸을 섞고 지내고 있다는 것이 점점 확연해지고 있는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건 형부가 바라는 걸지도 몰라, 자기 입으로 말하기 힘드니까 날 통해서 자기 마음을 전하려고 말이야, 난 그렇게 느꼈고, 그래서 내가 널 만난거야.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날 만나 건 비밀로 해줘. 내가 잘못 느꼈을 수도 있고, 예전 며느리에게 먼저 떠난 아내의 동생과 육체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지는 않을 테니 말이야.”
“·····.”
유진이 고개를 돌렸고 애서 울음을 참아내자 역시 시선을 돌린 진아가 숨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잠시의 치묵이 흐르던 순간 진아가 다시 입을 열고 있었다.
“모쪼록 네가 현명한 판단을 하기 바란다. 널 위해서도, 그리고 형부를 위해서도 말이야. 그리고 나도 내 남자를 의심하기 싫어. 형부는 이제 내 남자니까.”
“······.”
자신의 남자라는 말에 유진이 고개를 돌려 진아를 바라보았다.
그런 유진을 응시하던 진아가 자신의 가방을 집어 들고 있었다.
“나 먼저 일어날게. 차 값은 내가 계산한다.”
“·······.”
진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유진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고, 고개를 살짝 돌리는 순간 애서 참아왔던 눈물 줄기 하나가 유진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유진은 울음을 울지 않기 위해 입술을 굳게 물었다. 그리고 작은 절망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런 유진을 저 멀리서 진아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해, 유진아.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내가 먼저였다. 그 사람을 가슴에 담은 건, 너도 알잖아, 형부가 네 마음을 받아 줄 사람이 아니란 걸, 처제인 나도 허락하지 않던 사람이, 넌 더 허락하지 않을 거야. 더군다나 너 같이 젊고 아름다운 아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그리고 넌 그런 형부의 며느리였으니 말이다. 이건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야, 나도, 형부도, 그리고 무엇보다 상처 받을 널 위해서 말이야.’
애잔한 시선으로 유진을 바라보던 진아가 천천히 몸을 돌려 문을 열고나서는 순간 울음을 참은 채 창밖을 바라보는 유진의 얼굴에선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넌 더러운 여자가 아니야, 아플 뿐이야. 그러니까 더럽다고 하지 마.’
‘절대 널 버리지 않아, 그러니까 날 믿어.’
시아버지인 정우가 했던 말을 떠올리던 유진이 손을 들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냈지만 멈추지 않고 흘러내리는 눈물은 금세 또다시 유진의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
비록 소리 내어 울지는 않고 있었지만 파르르 떨리는 입술과 더불어 절망감에 휩싸여 초점을 잃고 허공을 바라보는 눈빛을 통해 유진이 얼마나 아파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믿었어요. 아버님만큼은 저를 속이지 않을 거라고, 그런데 어떻게 아버님 저한테 이러세요, 차라리 받아주시지나 말지, 그랬으면 이런 절망감은 없었을 텐데요. 이런 절망감은····.’
유진은 모든 것이 자신의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상처 받은 자신을 위로하던 정우의 모습도,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는 자신을 안고 잠들게 했던 정우의 모습 모두가 자신이 품었던 그런 특별함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불쌍해서 가졌던 연민의 동정이었다고 말이다.
유진은 처음으로 정우가 미웠다.
오빠에게 버림을 받고, 자신을 돌봐주는 정우를 바라보며 자기도 몰래 키워왔던 감정이었다. 그리고 정우가 지금은 헤어진 여자를 만나는 순간 자신의 가슴에 깃들었던 그 질투감이 그저 그런 투정이 아님을 느끼던 순간 처음으로 정우를 예전의 시아버지가 아닌 남자로 담았었다.
그랬기에 끔찍한 그 일을 당하는 순간 죽고 싶었다.
더럽혀진 몸으로 이제 더 이상은 정우에게 자신은 여자가 될 수 없을 거라는 절망감에 정말이지 죽고 싶었다. 그런 자신을 더럽지 않다고 했다. 그냥 아픈 거라고, 그냥 잊으면 된다고 말이다. 그래서 다시 희망을 가졌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정우가 안아주는 순간 결심했다.
다시 가슴에 품고 싶다고 말이다.
정우는 더럽혀진 자신을 탓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말이다.
그래서 자신을 밤마다 안아주는 정우의 품에서 편안하게 잠들었었다. 언젠가는 이 따스한 품에서 정우의 여자가 되어 지금처럼 행복한 마음으로 잠들 날을 꿈꾸며 말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자신이 그렇게 정우의 품에서 행복한 꿈을 꾸는 순간 시아버지였던 정우는 처제인 진아와 자신이 꿈꿔왔던 그 일을 벌인 것이다.
유진은 생각했다.
자신은 그저 정우에게 칭얼거리고 돌봐야 하는 어린아이 같은 존재였다고 말이다.
여자가 아니라, 그저 의무감으로 돌 본 어린 소녀 말이다.
“흐흑! 흑!”
처음으로 유진이 소리 내어 울었다.
서러웠다. 가슴이 아팠다.
도대체 자신이 무얼 어쨌기에 자신이 선택한 남자들은 이렇게 자신을 아프게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른 여자에게 떠나버린 전 남편도,
돈 때문에 동생인 자신을 버린 오빠도,
그리고 회사 동료이기에 그저 친절하게 대했던 짐승 같은 그 인간도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절망스러운 건 정우였다.
삶의 마지막 안식처였다.
삶의 마지막 희망이자. 염원이었고 말이다.
자신도 망설였었다.
어쨌거나 한때는 자신의 시아버지였기에 몇 번이고 스스로를 질책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점점 커지는 마음은 스스로 제어하기에 너무 커져버렸고 자신을 위해 늘 미소를 짓는 정우였기에 결심했다.
세상이 뭐라고 해도 정우만 자신을 받아준다면 정우의 여자로 살고 싶다고 말이다.
그러나 헛된 꿈이 되어버린 지금 그게 더 슬펐다.
차라리 사랑이라도 해봤다면, 정우의 여자가 되어 하루만이라고 그의 품에 안겨 그의 여자가 되어봤다면 이렇게 절망스럽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랬다면 최소한 그의 여자가 되어보았다는 추억의 편린만이라도 간직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
다시 밀려 나오는 울음을 애써 참아낸 유진이 밤하늘을 올려보며 입술을 떨고 있었다.
‘아버님 저 이제 어떡해요. 아버님 없으면 살아갈 자신이 없는데 이제 어떡해요. 이럴 거면 잘해주시지 말지 그러셨어요. 아니 최소한 이모님이 아닌 아버님 입으로 말해주시지 그러셨어요, 전 아니라고, 전 아버님의 여자가 될 수 없다고 말이에요.’
유진이 눈물을 훔쳐냈다.
금세 눈물이 뺨을 적시리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미워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그래도 아파요, 애초부터 마음을 접었어야 했었나 봐요. 더럽혀진 이 몸으로 아버님 같은 분을 다시 마음에 담아서 벌을 받나 봐요, 그냥 멈췄어야 했나 봐요, 더럽혀진 그 순간부터 말이에요.’
입술을 다문 채 가슴으로 이야기 하던 유진이 두 손으로 가슴을 가린 채 상체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소리 없는 울음을 울어갔다.
울음을 터뜨리면 부여잡고 있는 자신의 가슴이 정말로 찢어질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유진은 소리도 내지 못하는 울음을 울었다.
세상이 미웠다.
아니 운명이 미웠다.
이렇게 자신을 아프게 하는 운명이 너무 미웠다.
자신의 가슴에 누군가를 담고 싶은 작은 소망마저 갈가리 찢어버린 운명이 너무 미웠다.
“윽! 우읍!”
악다문 입술 사이로 울음이 터지려 하자 황급히 손을 들어 입을 가린 유진이 남은 한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듯이 움켜 잡아가고 있었다.
참으려 애를 썼다.
이 잔인한 운명 앞에서 그것만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천천히 눈을 뜨던 유진이 천정 위의 형광등 불빛에 눈이 시린 듯 눈을 살짝 깜빡였다. 그리고 잠시 후 시선을 돌리던 유진이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시아버지를 발견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멍하니 시선을 던지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앉아있는 시아버지를 보자 유진은 왈칵 눈물이 밀려나왔다.
“아버님.”
유진의 작은 목소리에 흠칫 놀라며 시선을 돌리던 정우가 눈을 뜬 유진을 발견하며 황급히 다가왔다.
“그래, 나다. 정신이 들어, 나 알아보겠니?”
“······.”
유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유진을 보며 정우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한 얼굴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됐다, 됐어, 이렇게 정신을 차렸으니까 됐어.”
미소를 지으며 말을 하는 시아버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음을 느낀 순간 유진은 참았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죄송해요, 아버님.”
“무슨 소리야, 뭐가 죄송해, 네가 뭘 잘못했다고, 내가 미안하다. 널 혼자 지내게 아닌데 내가 실수 했어.”
“흑!”
시아버지의 말에 유진은 흐느꼈다.
모든 게 서러웠다. 왜 자신에게 이토록 가혹한 일이 벌어진 것인지 너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시아버지의 얼굴에 담긴 근심과 초췌함이 유진을 더욱 서럽게 만들고 있었다.
정우는 흐느끼는 유진의 얼굴에 손을 가져가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내가 지켜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
“흐흑!”
사과하는 시아버지의 말에 유진은 더욱 서럽게 울기 시작했고, 퉁퉁 부어 멍들어 있는 눈과 얼굴로 울고 있는 유진을 보며 정우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철없는 아들로 인해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유진이 이렇게 엄청난 일을 당한 것이 모두 자신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지난 날 거부하는 유진을 어떡하든 설득해서 원룸이 아닌 아파트로 보내야 했었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그렇게 유진과 정우는 조용한 병실에서 서로를 위로하며 설운 울음을 울고 있었다.
“한 번만 만나게 해주십시오.”
“아, 그게 말이죠.”
정우의 말에 형사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정우는 거듭 부탁을 하고 있었다.
“······.”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를 무섭게 바라보며 정우는 두 손에 힘을 주며 주먹을 쥐었다. 마음 같아서는 일어나 죽일 만큼 주먹질을 하고 싶었지만 형사가 바로 옆에 있는 만큼 그럴 수는 없었다.
정우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남자를 응시한 채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아이 불쌍한 아이였소, 내 못난 아들놈 때문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고 하나뿐인 오빠에게도 버림을 받은 가여운 아이였소, 그래서 무엇보다 내게는 안타깝고 소중한 아이가 그 아이요.”
말을 잠시 멈춘 정우가 숨을 들이 마시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만에 하나 그 아이가 당신 때문에 다른 마음을 먹거나, 영원히 그 상처로 괴로워하면 난 절대 당신을 용서하지 않아, 내 모든 걸 버려서라도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저기 그런 말씀은 하시면 안 됩니다.”
옆에 앉아있던 형사가 정우를 만류했다.
그러자 가볍게 목례를 한 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다시 남자를 응시했다.
“내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당신에게 법이 정한 가장 무거운 형벌을 받게 할 거요. 내 모든 걸 다 받쳐서 말이요.”
“······.”
정우의 말에 형사가 다시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해 한다는 듯 시선을 돌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형사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남긴 정우가 자리를 벗어나고 있었다.
- 2개월 후 -
“·····.”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던 정우가 어두컴컴한 거실의 불을 켜고는 주위를 둘러보다 긴 한숨과 함께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똑, 똑.“
방문 앞에 선 정우가 노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듯 안에서는 아무 인기척이 없었다.
“들어간다, 괜찮지?”
물음에 역시 아무 인기척이 없었지만 정우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은 어둠에 묻혀 있었고, 정우가 벽에 있는 스위치를 켜는 순간 형광등 불빛이 방안을 비췄고 한 쪽 구석에 누군가 웅크린 모습으로 팔에 얼굴을 묻고 앉아있었다.
유진이었다.
그런 유진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정우가 천천히 다가가 앉았다.
“밥은 먹었어?”
“·····.”
유진은 대답이 없었다.
“하루 종일 이러고 있었던 거니?”
“·····.”
유진이 다시 대답을 하지 않자 한 숨을 내쉰 정우가 유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병원에서 퇴원을 하고 집에 가기 무섭다는 유진을 데리고 왔지만 벌서 한 달 가까이 유진은 방에서 꼼짝도 않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런 유진을 힘으로라도 방에서 데려 나오고 싶었지만, 어쩌면 그게 더 역효과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알았다. 나 저녁 먹을 건데, 배고프면 나와라.”
역시 반응이 없는 유진을 바라보며 정우가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아버님.”
“어, 그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정우가 반가운 얼굴로 다시 자리에 앉았다.
유진은 다시 입을 다문 듯 했다.
“왜 할 말 있어?”
정우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버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뭘?”
“제가 더렵혀졌다고·····.”
정우의 얼굴이 그대로 굳어졌고, 당황한 표정으로 정우가 좀 더 다가앉았다.
“너, 그게 무슨 소리야, 더럽혀지다니, 네가 왜 더럽혀져, 네가 뭘 어쨌다고, 넌 잘못한 거 없어, 잘못 한 게 없다고····.”
정우의 말에 유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가에는 눈물이 젖어 있었다.
“그래도 세상은 저 보고 더렵혀진 여자라고 할 거에요.”
“아니라니까, 왜 그런 몹쓸 말을 하니, 더럽혀지다니, 넌 더럽혀진 게 아니라 잠시 아팠던 거뿐이야.”
“아팠다고요?”
“그래, 그랬던 거야. 그러니까 그런 말을 하지 마라, 너 같이 착하고 예쁜 아이에게 누구도 그런 말을 하지 않을 거야.”
“아뇨, 다들 그렇게 말할 거예요. 어쩔 수 없는 건 알지만 더럽혀진 건 맞는다고···,”
“아니라니까.”
정우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유진의 눈가에서는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자 정우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유진에게 다가가 두 손을 잡았다.
“세상 누구도 널 욕하지 않아, 내가 보증해, 세상도 안다, 더렵혀진다는 건 그런데 쓰는 말이 아니란 걸, 넌 상처 받았을 뿐이야, 그것도 충분히 이겨 낼 수 있는 그런 상처 말이다. 그런데 더럽다니, 절대 아니다, 알았니?”
“······.”
“대답해 알았어?”
대답을 하지 않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유진에게 정우가 목소리를 살짝 높였다.
입술을 떨던 유진이 천천히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도 세상은 또 절 비웃으며 버릴 거예요. 그 사람이 그랬고, 오빠가 그랬듯이 세상은 절 버리며 그럴 거예요, 더럽혀진 여자라고···.”
“시끄러!”
정우가 고함을 쳤고, 유진이 흠칫 놀라자 정우가 마주 잡은 유진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넌 더럽혀지지 않았어, 지금도 깨끗하고, 충분히 아름다워, 그러니까 그런 말을 하지 마라, 그리고 그 놈이나 네 오빠는 널 버린 게 아니라, 널 피해 도망 간 거야, 너 보기가 창피해서 말이다. 그러니까 스스로 자학하지 마, 넌 지금으로도 충분히 좋은 사람이니까.”
“그런데 왜 그래요.”
“······.”
물음 같은 유진의 말에 정우의 얼굴이 굳어지고 있었다.
“제가 뭘 잘못했어요, 뭘 잘 못했는데 저에게 이래요, 저 그 사람에게도 잘못하지 않았어요. 좋은 여자 되려고 노력했고, 열심히 살았어요, 그리고 우리 오빠에게도 저 아무 잘못 안했어요. 그런데도 그 두 사람은 날 버렸어요. 전 아무 잘못도 안했는데····, 그리고 그 인간은···, 그 인간한테는 아무것도 안했어요. 그런데도 절 이렇게 만들었어요. 왜 그래야 하는데요. 아무 잘못도 안했는데, 전 왜 늘 이렇게 버림받아야 하는데요, 왜요··.”
울먹이며 말하는 유진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히던 정우가 유진을 당겨 가슴에 안았다.
“그래, 넌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모두 그 인간들이 못나고, 나빠서 그런 거야, 그러니까 아파하지 마라. 힘들어 하지도 말고····.”
“흐흑! 흑!”
유진이 설운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정우가 그런 유진을 더욱 힘주어 안았다.
“그래, 그렇게 울어, 그렇게 울어서 모든 걸 풀어,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넌 여전히 착하고, 충분히 깨끗해 알았지.”
“흑! 제가 정말 그런 거라면 아버님은 저 버리시지 않을 거죠.”
“걱정 말아라, 안 버려, 내가 널 왜 버려, 넌 이제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다.”
“흐흑! 흑! 아버님····, 저 버리지 마세요. 아버님마저 저 버리시면 저 더 살고 싶지 않아요.”
“그래, 약속하마, 내 곁에 있을게, 네가 필요 없다고 해도 네 옆이 있을 테니까, 이제 그만 아파해,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지도 말고 말이다.”
“흐흑! 흑! 아버님···.”
정우의 말에 더욱 품을 파고든 유진이 서러운 울음을 다시 울기 시작했고, 그런 유진의 등을 토닥이며 정우도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유진이 이 상처를 씻을 수만 있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겠다고 말이다.
모든 걸 말이다.
‘콰콰광, 콰앙···.’
번쩍이는 번개에 이어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자 자리에서 일어난 정우가 요란한 빗소리와 함께 다시 번쩍이는 번개 불빛을 보며 비가 점점 거세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콰콰광, 콰앙···.’
“아악!”
그리고 다시 한 번 요란한 천둥소리가 울리던 순간 날카로운 유진의 비명 소리가 들리자 놀란 정우가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방문이 벌컥 열리며 유진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에 맞춰 다시 번개가 번쩍이자 두 손으로 귀를 막은 유진이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자 정우가 황급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유진아.”
“·······.”
유진에게 다가간 정우가 유진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순간 벌벌 떨고 있는 유진의 상체가 느껴졌다.
‘콰콰광, 콰앙···.’
“악!”
다시 천둥이 울렸고 비명을 지른 유진이 품에 안기자 정우는 엉겁결에 유진을 안았다.
유진의 몸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원래 천둥소리를 무서워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심하게 떠는 유진을 안은 채 정우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이런 유진의 행동이 남편과 오빠에게 버림을 받았다는 상처와 몹쓸 짓을 당한 이후 생긴 두려움 때문에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
천둥소리가 잠잠해지고 한참이 지나자 몸을 웅크린 자세로 자신의 품에 안겨있던 유진의 입에서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리자 정우는 안도했다.
천둥 번개가 치는 내내 부들거리며 떠는 유진이 이대로 밤을 새면 어쩌나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 이렇게 잠이 들자 안도했다. 하지만 떠는 내내 스스로 인지 하지 못한 채 자신을 버리고 나가지 말라는 유진의 말을 듣던 순간, 자신의 염려대로 그 몹쓸 순간과 상처가 유진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생채기를 남겼음을 느꼈다.
그렇게 자신의 품에서 곤히 잠든 유진을 바라보던 정우가 얼굴을 가리고 있는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넘겨주고 몸을 뒤로 빼려했다. 그래도 한때는 유진의 시아버지였고, 이제는 아들과 이혼을 한 상태인 유진이었기에 아무리 자신이 아끼기는 하지만 이렇게 한 침대에서 잠들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음, 안 돼···.”
자신을 옷자락을 잡고 있는 유진의 손을 밀어내려던 순간 잠꼬대를 하던 유진이 가슴을 더욱 파고들자 난감한 표정을 짓던 정우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잠들어 있는 유진을 다시 응시했다.
“·····.”
유진을 위해 켜놓은 불빛으로 인해 잠든 모습을 가마니 응시하던 정우는 창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 때문이지 새근거리며 잠든 유진의 모습이 꽤나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아들이 유진을 데리고 인사를 시키던 날 유진을 보며 너무나 흡족했었다.
아들보다 비록 나이는 많았지만 조신한 모습이나, 얌전한 말투, 그리고 한 눈에 보기에도 꽤나 예뻐 보이는 모습은 아들이 한 눈에 반할만 하다는 생각을 했다. 혼자 외롭게 키워온 아들이 이제는 제대로 된 여자를 만났다는 기쁨에 결혼을 허락했고, 결혼을 하고 자신을 모시겠다는 유진을 기어이 분가시키며 자신의 삶에서 커다란 짐 하나를 덜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분가를 시키는 자신에게 나가서 살아 거듭 죄송하다는 말을 하는 유진을 보며 아들이 정말 여자 하나는 잘 얻었다는 생각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그 아들놈이 자기 복을 스스로 차버렸다는 것이 너무도 속상했다.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아내가 있는 걸 알면서도 아들과 살겠다고 마음을 먹은 여자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들을 설득하려 했고, 어뜩하던 유진과의 이혼만은 막아보려 했지만 아들놈은 기어이 이혼을 하고 자신이 마련해준 아파트를 팔아 미국으로 들어가서는 몇 년째 연락조차 없는 것이 너무 가슴 아팠다.
“······.”
그런 생각을 하며 정우는 다시 잠들어 있는 유진을 응시했다.
그리고 안타까워했다.
어디에 내놔도 무엇 하나 모자람이 없는 유진이 왜 이리 굴곡진 삶을 사는지 말이다.
정우는 가만히 생각했다.
이런 유진에게 자신만이라도 상처를 주지 말아야겠다고 말이다.
언젠가 시간이 지나 유진이 마음을 열고 좋은 남자를 만나 자신의 곁을 떠날 순간까지는 자신이 유진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말이다.
그렇게 측은한 시선으로 잠든 유진을 바라보던 정우의 눈꺼풀도 서서히 감기고 있었다.
“······.”
천천히 눈을 뜨던 유진이 어디선가 들려오는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그 숨소리가 시아버지인 정우의 숨소리임을 느꼈고, 자신이 지금 시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음도 느꼈다.
유진은 망설였다.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대로 다시 잠을 청해야 하는지 말이다.
그러던 유진의 눈에 자신의 손이 정우의 옷자락을 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여전히 창밖에선 굵은 빗줄기 소리가 들려오자 언제 또다시 천둥 번개가 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유진이 다시 눈을 내려 감고 있었다.
“·····.”
그렇게 눈을 감고 잠을 청하며 유진은 느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남자의 품이 너무 따듯하다고 말이다.
비록 자신을 안고 있지는 않지만 팔에 밀착된 가슴에서 느껴지는 체온의 따뜻함만으로도 자신의 몸도 따듯해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귀에 들려오는 숨소리가 무엇보다 자신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유진은 그 숨소리에 맞춰 자신도 숨을 골라보고 있었다.
그런 유진의 입가에 문득 엷은 미소가 머금어지고 있었다.
유진은 그렇게 다시 잠에 빠져들고 있었고, 잠시 후 빗소리가 들려오는 방안에 밝은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두 사람의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마치 한 사람이 숨을 쉬는 듯 박자를 맞춰 말이다.
‘똑, 똑.’
노크 소리에 정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대답 소리에 이어 방문을 열고 유진이 들어서자 정우가 긴장한 표정으로 쭈뼛거리는 유진을 응시했다.
“왜 잠이 안 오니?”
“·····.”
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번 천둥이 치던 날 자신의 품에서 잠이 든 후 유진은 가끔 새벽에 이렇게 자신을 찾아오곤 했다. 처음에는 그런 유진을 달래 방으로 돌려보냈지만 악몽을 꾼 후 비명을 지르는 유진을 보는 순간 자신의 방으로 데려 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방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꼬박 밤을 지새우는 유진을 모른 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정우는 아마도 두려움에 휩싸이던 순간 자신의 품에 잠이 들며 유진이 자신의 품을 어떤 안식처로 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
유진의 목소리에 눈을 뜬 정우가 눈이 부신 눈을 비비며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자신의 옆구리에 웅크린 자세로 바짝 밀착한 유진이 몸을 살짝 떨고 있는 것이 보이자 몸을 일으키려 했다.
“버리지 마세요. 잘못했어요, 제발 버리지 마세요.”
“······.”
누구에게 외치는 잠꼬대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옆구리를 더욱 파고드는 유진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정우가 다시 몸을 눕히고는 몸을 돌려 유진을 가만히 가슴에 안았다.
“잘못했어요, 잘못····.”
다시 중얼거리는 유진의 등을 토닥이자 중얼거림이 점점 사그라지고 있었다.
정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상처에 아파하는 유진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이제는 빈번하게 자신의 침대로 찾아와 잠이 드는 유진이었다.
불을 끄면 무서워하는 유진으로 인해 불을 밝히고 잠이 들고 있었다. 폭행을 당하는 당시 불을 꺼버렸던 남자의 행동으로 어둠에 대한 트라우마가 유진에게 깃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정신적인 치료를 받게 하고 싶었지만 유진이 극구 사양을 했다. 자신 말고는 그 어느 누구도 스스로가 당했던 일을 알게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자신은 자살을 하겠다는 말도 함께하며 말이다.
“········.”
유진이 좀 더 자신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정우는 난감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때는 며느리였던 유진과 이렇게 한 침대에 누워 잠든다는 것을 다른 누군가가 알면 충분히 오해할 만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지금처럼 유진이 자신의 품을 파고들 때면 더욱 그랬다.
그렇다고 이런 유진을 모른 척 할 수는 더더욱 없었다. 만에 하나 유진이 다른 마음이라도 먹는다면 그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정우가 피곤한 듯 천천히 눈을 감고 있었다.
잠시 후 정우가 깊은 잠에 빠져들던 순간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몸을 떨던 유진이 웅크리고 있던 몸을 바로 펴며 정우를 안은 자세로 몸을 밀착하고 있었다.
‘·····.’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으로는 다정한 연인이 잠들어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특히 정우의 품에 몸을 밀착하고 잠든 유진의 모습은 어린 연인이 자신의 남자 품에서 포근함을 느끼는 모습과도 너무 흡사했다.
유진이 받은 상처가 없었다면 말이다.
“······.”
천천히 눈을 뜨던 정우가 형광등 불빛을 바라보다 인상을 찌푸렸다.
시리운 눈을 가늘게 뜨며 창밖을 바라보던 정우가 날이 밝았음을 확인하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무언가 이상한 느낌에 시선을 밑으로 향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발견한 순간 정우가 너무도 놀라고 있었다.
정우는 황급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어떻게 된 영문이지 자신의 팔을 베고 자신의 옆구리에 안겨 유진이 잠들어 있었다.
정우의 시선이 다시 밑으로 향한 순간 유진의 손이 정우의 바지 중심부에 올려진 채 살며시 그걸 거머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더군다나 자신의 자지는 커진 채 부풀어 있었다.
정우는 당황했고, 난감해 했다.
편안 옷차림이었기에 자신의 자지를 쥐고 있는 유진의 손길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건 달리 말해 유진의 손에도 자신의 자지 감촉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을게 분명했다.
“······.”
정우는 긴장한 채 마른 침을 삼켰고, 다시 한 번 잠든 유진을 바라보다 천천히 손을 밑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자신의 자지를 잡고 있는 유진의 손을 조심스레 당겼다.
“음!”
바로 그 순간 유진이 몸을 뒤척였고, 정우가 놀라 손을 놓는 순간 다행스럽게도 유진의 손이 가슴으로 옮겨와 올려졌다.
정우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안긴 채로 잠든 유진의 모습에서 여전히 난감함을 느꼈다. 이렇게 같이 잠이 들면 다행히도 먼저 잠을 깬 유진이 방으로 돌아갔었기에 그동안은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생각지도 못한 모습을 접하자 정우는 곤혹스러웠다.
정우는 조심스레 유진에게서 팔을 빼내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아직도 곤히 잠들어 있는 유진을 잠시 바라보던 정우가 유진이 깨지 않게 침대에서 내려와 방을 나서고 있었다.
“······.”
세수를 한 정우가 거울속의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일곱 시가 넘어가고 있었지만 아직도 잠들어 있는 유진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조금 전의 일을 가만히 떠올렸다.
정우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진 것에 난감해 하며 거울속의 자신을 바라보다 길게 한 숨을 내쉬고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는 욕실을 나와 다시 방으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연 정우의 눈에 아까와 달리 몸을 잔뜩 웅크린 자세로 잠들어 있는 유진이 보이자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유진에게 다가간 정우가 애잔한 시선으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잠든 유진을 바라보았다. 기분 탓인지 웅크리고 잠든 유진의 얼굴에 긴장감과 슬픔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런 유진을 보자 정우는 다시 안타까웠다.
세수를 하면서 이제는 자신의 방에 유진이 찾아오게 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이 흔들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이런 유진의 곁에 이제는 자신 말고 아무도 없음이 다시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음도 느꼈다.
하지만 정우는 모르고 있었다.
유진이 자신의 방을 다시 찾아오기 이틀 동안 유진이 밤새 악몽에 시달렸고, 결국 이틀 동안 단 몇 시간만을 자고 다시 악몽에 시달리는 무서움 때문에 자신을 찾아왔음을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품에 안겨 잠드는 순간만큼은 유진이 악몽에 시달리지 않고 편히 잠들고 있음을 말이다.
그건 유진에게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리고 그 안식처에서 만큼은 유진이 스스로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정우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입니다.”
“스트레스 증후군이요?”
의사의 말을 정우가 되물었다.
지난 번 일 이후 다시 한 번 같은 일이 벌어졌고, 며칠 전에는 완전히는 아니지만 바지 안으로 손을 넣고 잠들어 있는 유진을 발견하는 순간 기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가끔은 밤을 새워 유진을 살폈지만, 자신의 곁을 찾아오는 횟수가 점점 많아지는 지금 그 모든 날을 뜬 눈으로 새울 수는 없었다.
정우는 고민을 했고, 유진을 데려 올 수 없었기에 먼저 자신이 병원을 찾은 것이다.
“네, 극심한 공포를 겪은 환자가 자신이 유일하게 믿고 기댈 수 있는 곳을 찾아 그곳에 자신의 모든 걸 맡기는 겁니다.”
“믿고 기댈 수 있는 곳이라고요?”
“네, 대부분 환자 같은 경우를 대하면 그 증상이 자신에 대한 증오나 좌절감, 아니면 특정한 상대를 향한 분노와 시기로 나타납니다. 많은 경우는 스스로 자책하거나 자신의 존재를 강하게 부정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러다가 무기력증에 빠지기도 하고 며칠을 잠도 못자기도 하고 말입니다.”
“네.”
“아마 환자도 비슷할 겁니다. 환자가 보호자 분의 방을 찾아오는 건 며칠 동안 괴로워하고 스스로 싸워보다 그런 자신이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곳이 있다는 생각에 어쩔 수 없이 보호자분을 찾아 온 걸 겁니다.”
“그럼, 의식적인 행동이 아니라는 겁니까?”
“아뇨, 의식적인 행동이죠, 하지만 그 의식이 일반적인 의식과는 많이 다르죠, 환자에게 그 의식이 어떤 목적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저 이 악몽 같은 현실에서 유일하게 자신이 기대고 쉴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거죠. 일종의 맹목적인 믿음이라고 할까요, 이 사람이라면 날 아프게 하지 않을 거고, 이 사람이라면 상처받은 자신을 더 힘들게 하지 않을 거라는 맹목적인 믿음 말입니다.”
“하지만 평소나 낮에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절 편안하게 대하지도 않고 말입니다.”
“당연하죠. 환자가 어둠속에서 그런 일을 당했으니까요. 다시 말해서 어둠이 밀려오면 그 상처가 환자를 괴롭히는 것이고, 혼자 싸워보려 하지만 자신의 무기력함만을 절감한 환자가 결국 자신의 선택한 유일한 안식처를 찾는 거죠.”
의사의 말에 정우는 자신의 짐작이 크게 틀리지 않았음을 느꼈다.
“그렇다면 그걸 고칠 방법은 없습니까?”
“일단의 환자를 만나봐야겠죠. 보호자분의 말만으로는 모든 걸 짐작할 수 없으니 말입니다.”
“허나 환자가 그걸 강하게 거부합니다. 저 말고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상태를 알면 극단적인 선택을 하겠다고 할 만큼 말입니다.”
“흐음, 그런 가요.”
“·····.”
의사의 난감한 말투에 정우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일단은 당분간은 환자를 자극하지 마십시오. 자신이 유일한 안식처로 여겼던 보호자가 자신을 거부한다는 느낌을 받는다면 환자는 절망에 빠질 겁니다. 자칫하면 그걸 스스로에게 돌리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어쩔 수 없습니다. 대신 환자에게 천천히 다가가십시오. 보호자분은 절대로 환자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는 믿음을 주며 말입니다. 그러면서 환자를 설득하세요. 보호자분을 믿고 치료를 받자고 말입니다.”
“가능 할까요?”
“제가 보기에는 가능합니다. 다행히 환자가 폭력적인 성향을 보이지 않고, 스스로를 자해하거나 특정인에게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보호자 분이 믿음을 주며 다가가면 설득할 수 있을 겁니다.”
“네···,”
정우가 힘없이 대답을 했다.
“그리고 한 가지는 명심하십시오.”
“어떤?”
“절대 환자를 자극하지 마시고, 되도록 많은 대화를 하시면서 환자를 독려하십시오. 차분하게 말입니다. 환자에게 용기를 주는 말을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되도록 환자분을 빨리 병원으로 오게 하십시오. 특히 강한 반발이나 폭력적 성향이 나타나면 그때는 어쩔 수 없이 억지로라도 환자를 데리고 와야 합니다. 자칫하면 해리성 장애로 발전할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해리성 장애요?”
“네, 일종의 자기 방어인데 스트레스가 심해지면 어느 순간 스스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상처를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거죠.”
“그렇다면 오히려 좋을지도 모르는 것 아닙니까, 환자를 힘들게 하지 않고···.”
“폭행에 국한된다면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환자의 경우는 다른 기억도 그렇게 지워버릴 수도 있다는 겁니다. 이혼한 남편이나 오빠의 기억도 말입니다. 그게 환자에게는 편하니까요. 하지만 지워버렸던 기억과 충돌하는 무언가나, 인물이 나타나면 환자는 극심한 혼란이 나타나고 자칫 정신적 공황 상태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그 전에 치료를 해야 합니다. 요행을 기대하기에는 위험 요소가 너무 크니 말입니다.”
“······.”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정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유진을 떠올리며 어떻게 유진을 설득해 병원으로 데려올지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디리리···, 디리리링링···.’
운전을 하던 정우가 핸드폰 소리에 블루투스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저에요, 형부.”
“어, 처제 웬일이야.”
죽은 아내의 둘째 동생, 작은 처제 진아였다.
오래 전 아내가 세상을 떠났지만 아직도 연락을 하고 지내고 있었다. 특히 이혼을 하고 장모와 함께 살고 있는 작은 처제는 아내의 기일이면 장모를 모시고와 화장한 아내의 재를 뿌렸던 곳을 찾아가곤 했다.
“바쁘세요?”
“아니, 안 바빠.”
“그럼, 저녁 같이 하실래요.”
“왜, 장모님이 입맛 없으시데?”
“아뇨, 엄마는 여행 가셨어요. 친목회에서, 그래서 혼자 밥 먹기 그래서 형부한테 밥 사달라고 하려고요. 싫으세요.”
“싫기는, 그럼 처제가 우리 회사 근처로 올래?”
“네, 그럴게요. 나가면서 다시 전화 드릴게요.”
“그래.”
통화를 끝낸 정우가 핸드폰을 내리고 다시 운전에 열중했다.
그리고 다시금 조금 전 의사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가만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장모님은 별일 없으시지?”
“네, 근데 우식이는 아직 연락 없어요?”
“음,”
진아의 물음에 정우가 무겁게 대답을 했고, 진아도 괜히 물었다는 생각을 했다.
“근데 형부.”
“응.”
“혹시 여자 안 만나 보실래요. 좋은 여자 있는데.”
“또 그 소리야, 됐어. 여자는 무슨···.”
“형부 혹시 만나는 여자 있어요.”
“없어.”
“정말 이해가 안 되네.”
갸웃거리는 진아의 말에 정우가 입을 열었다.
“뭐가?”
“그렇잖아요. 만나는 여자도 없고, 여자를 소개 시켜주겠다고 해도 싫다고 하고, 이거 이상하잖아요.”
“그러니까 뭐가 이상하냐고?”
“형부는 여자 생각 안나요?”
“여자 생각이라니?”
“섹스 말이에요, 형부는 섹스하고 싶지 않아요.”
“또, 장난친다.”
늘 거침없이 말하는 처제이기는 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오면 정우는 조금 난감했다.
“장난은 무슨, 자도 마흔이에요 형부, 마흔 넘어서 이런 이야기도 못해요?”
“나이가 무슨 상관이야 혼자 사는 형부한테 장난이나 치면서.”
“장난 아니라니까요, 형부는 정말 섹스 생각 없어요?”
“없어.”
“피, 거짓말.”
“시끄럽고, 내 걱정 하지 말고 처제나 좋은 사람만나서 다시 재혼 해, 언제까지 혼자 살 거야.”
“마흔이나 된 여자를 누가 데려가요.”
“마흔이 뭐 어때서, 처제 정도면 얼마든지 새 출발 할 수 있잖아. 서른 중반이라고 해도 믿을 걸.”
“피, 거짓말이라도 기분은 좋네.”
“거짓말 아니야, 처제는 아직 충분히 매력 있어.”
“그럼, 형부가 데려가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왜요, 저 매력 있다면서요?”
“시끄러.”
“아니면 섹스하고 싶으면 부르던가,”
“야, 서 진아.‘
“·····.”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진아가 어깨를 들썩하며 시선을 피했다. 형부인 정우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 화내기 일보 직전임을 알고 있었다.
“한 번만 더 그런 소리하면 다시는 처제 안 본다.”
“피, 맨 날 겁주기는···, 내가 만나자고 조르면 거절도 못할 거면서,”
“·····.”
정우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자 진아가 샐쭉 거리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우는 살짝 화가 난 표정으로 밥을 우겨넣고 있었고 진아는 그런 정우를 가만히 응시했다.
‘바보 진심인데···.’
정우를 응시하며 처제인 진아가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정우는 계속 밥을 먹기만 했다.
‘디리리···, 디리리링링···.’
“·····.”
운전을 하던 정우가 블루투스를 귀에 걸었다.
“여보세요.”
“저에요. 아버님.”
“어, 그래.”
“연락도 없이 늦으셔서 전화했어요, 식사는 하셨어요?”
“어, 먹었다. 넌?”
“아직 안 먹었어요. 아버님 언제 오실지 몰라서.”
“지금이 몇 신데 아직 밥을 안 먹어, 어서 밥 먹어.”
“네.”
힘없이 대답하는 유진의 목소리에 정우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앞으로는 내가 들어오는 시간 넘으면 기다리지 말고 식사해, 나도 늦으면 연락 할 테니까.”
“네.”
“전화 끊고 어서 식사해.”
“네.”
유진의 힘없는 목소리를 끝으로 통화를 끝낸 정우가 블루투스를 빼는 순간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진아가 입을 열었다.
“뭐야, 형부 여자 있어요?”
“여자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여자 같은데, 어머 형부 웃긴다. 여자 없다고 그렇게 펄쩍 뛰더니.”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럼 누구에요?“
“유진이야.”
‘유진이요?“
“그래.”
“근데 유진이한테 왜 늦으면 기다리지 말고 밥 먹으라고 해요, 같이 사는 사람처럼?”
“······.”
“형부.”
정우가 말이 없자 진아가 정우를 불렀다.
“유진이 지금 우리 집에 있어.”
“왜요?”
“그럴 일이 있어서 내가 짐시 데리고 있어.”
정우의 말에 살짝 긴장한 얼굴을 한 진아가 몸을 돌리며 정우를 응시했다.
조카 우식과 이혼을 하고도 정우가 유진을 돌보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우식과 헤어진 유진을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고 있다는 것이 진아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무슨 일이기에 며느리였던 애를 집에 들여요, 그것도 형부 혼자 사는 집에를.”
“유진이 개인적인 일이라 말을 해 줄 수 없고, 유진이가 집에서 지내는 게 왜?”
정우의 물음에 진아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라니요. 그게 할 말이에요?”
“뭐가?”
“유진이 우식이하고 이혼한 애예요. 그런데 며느리도 아니고 아들과 헤어진 전 며느리와 집에서 함께 산다고요. 그게 말이 되는 소리에요?”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사정이 있다잖아.”
“그러니까 무슨 사정이요. 무슨 사정이 있기에 젊은 여자애를 집에 들여요. 그것도 며느리였던 애를요.”
“왜 그렇게 흥분해, 뭐가 어떻다고.”
“형부, 지금 제 정신이에요? 그러다가 무슨 일이 벌어지면 어쩌려고 그래요?”
“무슨 생각하는 거야, 지금?”
“무슨 생각은요. 혹시 형부 이상한 생각하는 거예요?”
“야, 서 진아.”
다시 한 번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진아가 흠칫했다.
정우가 화나기 일보 직전임을 알고 있기에 말이다. 하지만 그래도 진아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차라리 그냥 모르는 젊은 여자라면 모를까, 아들과 헤어진 며느리와 시아버지가 한 집에 살고 있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형부 제 말은,”
“그만해, 더 하면 나 정말 화낸다. 내가 말했지.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고.”
“형부.”
“차 세운다, 여기서 내릴래?”
“·····.”
정우의 말에 진아가 입을 다물었다.
누구보다 순한 사람이지만, 정말로 화가 나면 자신을 길거리에 버리고도 남을 사람임을 진아도 알고 있었다.
진아는 입을 다문 채 몸을 돌려 정면을 응시했고, 정우는 처갓집을 향해 차를 몰아갔다. 그렇게 말없이 정면을 응시하던 진아는 곰곰이 다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고, 정우도 조금 전 했던 처제 진아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런 정우의 머릿속에 오늘 병원을 찾았던 일과 유진에게 놀랐던 순간을 함께 떠올리고 있었다.
“언제 오세요?”
“모레 올 거야. 혼자 있다고 끼니 거르지 말고 꼭 챙겨 먹어라, 알았지?”
“네.”
“혹시 밤에 무섭거든 문 잠그고 자고.”
“걱정 마세요.”
대답은 하고 있었지만 유진의 얼굴에 깃들어 있는 불안감을 정우는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업 때문에 떠나야 하는 일을 미룰 수도 없었다. 부하 직원에게 맡기기에는 너무 중요한 출장이었고 회사 대표인 자신이 가야만 했다.
“정 힘들면 전화하던가.”
“네, 염려마시고 다녀오세요.”
“그래, 알았다.”
가방을 들고 나서려던 정우가 다시 고개를 돌렸고, 유진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하고 있었지만 얼굴에 깃든 불안감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정우는 다시 한 번 근심어린 시선으로 그런 유진을 바라보다 무거운 마음으로 집을 나서고 있었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좀처럼 울리지 않던 집 전화의 벨이 울리자 유진이 다가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거기 이 정우씨 댁 아닌가요?”
“맞는데 누구시죠?”
왠지 목소리가 귀에 익다는 생각을 하며 유진은 집으로 전화를 건 여자의 정체가 궁금했다.
“전 이 정우씨 작은 처제인데, 그 쪽은 누구시죠?”
유진은 살짝 당황했다.
남편의 작은 이모 진아였던 것이다.
“어머, 이모님 전 유진이에요.”
“유진이? 네가 왜 형부 집에 있니?”
“네, 일이 좀 생겨서····.”
유진이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어쨌거나 남편과 헤어진 지금 시아버지에게 얹혀사는 자신의 입장을 진아에게 솔직히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래, 형부는?”
“나가셨는데요, 출장 가신다고.”
“출장?”
“네.”
“출장 간다고 하셨니?”
“네, 왜요?”
“형부도 참, 뭐가 부끄럽다고,”
“네?”
진아의 이상한 말에 유진은 가슴이 철렁하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야, 그렇게 말했다니 됐다. 근데 넌 언제부터 거기서 지낸 거니?”
“한 달 안 됐어요.”
“그래, 근데 형부는 왜 아무 말도 안 했지?”
“그건 저도 잘····.”
“이상하네, 나에게 왜 말을 안했지, 그리고 너에게 왜 출장을 간다고 했지.”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님 출장 가신 거 아니세요?”
“아니다 됐다. 만나서 물어보면 되지.”
“네?”
“끊는다.”
“이모님.”
유진이 황급히 진아를 불렀지만 전화는 이미 끊겼고, 수화기를 내려놓은 유진이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조금 전 진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 너에게 왜 출장을 간다고 했지.’
유진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정우가 출장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집을 비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작은 이모 진아와 말이다.
유진은 불안한 시선으로 허공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고, 거실을 서성였다.
마음 같아서는 시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너무 이상했기 때문이다.
‘안 돼요, 아버님, 정말 그런 거라면 전 어떡해요, 전 이미, 전 이미 아버님을·····.’
가슴으로 무언가를 이야기하며 유진은 계속 거실을 서성이고 있었다.
너무도 불안해하는 얼굴로 말이다.
“······.”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진아는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유진이 전화를 받자 화가 났다. 며칠 전 통화를 통해 오늘 형부 정우가 출장을 떠난 것을 알고 일부러 전화를 했었다. 그리고 유진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진아는 어떤 생각 하나를 빠르게 떠올렸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어떻게든 떨어 드려놔야 돼, 그게 형부를 위하는 거야, 그리고 날 위해서도 이건 아니야.”
혼자 무언가를 중얼거린 진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무슨 일을 진아가 벌이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한 건 정우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
맞은편에서 차분하게 앉아있는 진아를 바라보며 유진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그에 비해 진아는 너무도 차분한 모습이었다.
“유진아.”
“네.”
“내가 뭐하나만 묻자.”
“네, 하세요.”
“너 혹시 우식이하고 다시 합치기로 했니?”
생각하지 못한 느닷없는 질문에 유진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아닙니다.”
“근데 왜 형부랑 함께 지내니?”
“그건····.”
“왜 말하기 싫니?”
“죄송합니다. 싫은 게 아니라 말씀 드릴수가 없어요.”
“그래.”
“·····.”
의외로 진아가 덤덤하게 대답을 하자 유진이 더욱 불안한 시선으로 진아를 응시했다.
“그럼 언제까지 형부 집에서 지낼 건데?”
“그것도 잘···.”
“그게 무슨 소리니, 너 혹시 돈 때문에 형부한테 얹혀살려고 그런 거니?”
“아니에요, 그런 거.”
“그럼 뭔데?”
“아버님이 그러라고 하셔서.”
“형부가?”
“네, 아버님이 집에서 지내라고 하셔서.”
“언제까지 그러라고 하셨는데?”
“그런 말씀은 없으셨어요.”
“그럼, 형부가 아무 말이 없으면 평생 거기서 살 거야?
“그건 아니지만, 당분간은····.”
처음으로 진아의 얼굴이 굳어졌다.
“유진아.”
“네.”
“넌 형부 며느리였어, 그건 알지?”
“네.”
“그런데 우식이하고 헤어진 지금 네가 형부랑 같이 살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니, 두 사람을 편하게 볼 것 같아?”
“무슨 말씀이세요?”
“너도 어린애가 아니니까 돌려 말하지 않을게. 생각해 봐, 중년의 남자가 예전 며느리였던 젊은 여자와 산다는 게 무슨 의미겠어. 더군다나 너처럼 참하고 예쁜 여자가 말이야. 두 사람이 아무 일도 없다고 해도 그걸 누가 믿어, 안 그래?”
“이모님 아버님과 전··.”
“알아, 하지만 누가 믿어 나부터 의심이 가는데.”
“아니에요, 이모님도 아시잖아요. 아버님이 그러실 분이 아니란 거.”
“그래 알아, 그런데 넌?”
“네?”
“너도 형부처럼 아무 감정 없이 형부랑 지내는 거야?”
“그, 그건···, 네, 그렇습니다.”
유진이 머뭇거리며 대답을 헸지만, 그 대답을 듣는 진아의 얼굴에 매서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이 염려하던 부분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형부 좋아하니?”
“네?”
유진이 놀라며 되묻는 순간 진아의 눈썹이 다시 일그러졌다.
“형부 좋아하냐고?”
“그게, 전 아버님이····, 잘해주시고·····, 그래서 그냥 편안 마음으로···.”
더듬거리는 유진을 바라보던 진아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는 작은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나와라 형부 집에서···.”
“네?”
다시 짧게 되묻는 유진에게 진아가 시선을 가져갔다.
“형부 집에서 그만 나오라고.”
“이모님.”
“네가 정말 형부를 생각한다면 그래야 하는 거야.”
진아의 말에 난감해 하던 유진이 처음으로 눈빛에 반감을 싣고 있었다. 희미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버님은 그래도 된다고, 그리고 이모님이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뭐?”
유진의 말에 진아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죄송하지만 아버님이 나가시라면 모르겠지만 이모님 말씀만으로는 나 올 수 없습니다.”
“어째서?”
“그건, 아버님도 원하시지 않으실 테고, 그리고···, 또····.”
“네가 싫은 거겠지, 그렇지?”
“····.”
진아의 물음에 유진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솔직하게 말해, 너 형부 옆에 있고 싶은 거지, 형부를 남자로 느끼고 있고, 그렇지?”
“······.”
유진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진아는 대답을 종용하듯 유진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유진이 먼저 시선을 피하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진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래도 설마 하던 생각이 조금 전 대답 없는 유진의 행동에 의해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진아는 순간 형부 정우가 정말 미련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유진의 마음도 모르고 오히려 염려하던 자신을 질책하던 정우가 말이다.
진아는 생각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진을 정우에게서 떨어 뜨려야 한다고 말이다.
그러지 않는다면 형부 정우가 아들의 아내였던 여자를 가슴에 품은 못된 남자가 되기에 말이다.
“·····.”
진아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는 유진을 가만히 응시하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있었다.
“형부랑 여행 다녀오는 길이야.”
“······.”
순간 유진의 고개가 번쩍 들렸고, 진아가 그런 유진을 차분한 얼굴로 응시했다.
“같이 여행가서 같이 지내다 형부는 오늘 아침에 바이어 만나러 갔어, 이따 저녁이면 돌아 올 거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다시 말해줘, 형부랑 여행 갔다가 나 먼저 왔다는 말이야.”
“그러니까 지금 아버님이 출장을 가신게 아니라 이모님하고 여행을 갔다는 말씀이세요.”
“응, 그제 오후에 만나서 같이 떠났어, 오늘은 바이어 만난다고 해서 나 먼저 온 거고, 왜?”
“지금 그 말씀 아버님하고 함께 계셨다는 게····.”
유진이 말끝을 흐렸다.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거야? 지금 형부랑 여행가서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 거야?”
“·····.”
유진은 대답 없이 진아를 응시했다.
진아는 그런 유진을 바라보며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중년 남녀가 여행을 가서 뭐하겠어, 구경하고 밤에는 같이 자는 거 아니야?”
“설마, 지금 그 말씀은···.”
“뭐, 무슨 의민지 모르겠다는 말이야, 말 그대로야. 같이 여행을 갔고, 여행가서 형부랑 잤다는 말이야.”
“·······.”
유진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고, 진아는 그런 유진을 계속 응시했다.
“나도 어린애가 아니니까, 형부랑 잤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지?”
“그럴 리가 없어요, 그럴 리가, 아버님은 분명히 출장 가신다고····.”
“알아, 형부도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 처제인 나랑 여행 간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고 말이야.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걱정스러워서.”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아버님은 저에게 거짓말을 하는 분이 아니에요.”
유진이 고개를 저으며 울먹이듯 말을 하고 있었다.
“거짓말이 아니면 형부랑 섹스 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줘야 믿을래?”
“·····.”
너무나 직접적이고 단호하게 말하는 진아의 모습에 유진은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진아의 태도로 보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유진은 어제 진아와 했던 통화를 떠올렸다.
‘너에게 왜 출장을 간다고 했지?’
진아가 했던 그 이상한 말을 떠올린 유진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그 표정은 그렇게라도 믿게 해달라는 것으로 보이네. 훗! 그래 그걸 원하면 그렇게 해 줄게. 물론 형부 모르게 해야겠지만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하루 이틀 가지는 섹스도 아니고 말이야.”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아버님이 이모님과 그러시면서 저 보고 함께 지내자고 할 리가 없어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유진이 다시 고개를 저으며 말을 하자 진아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넌, 너희 시아버지를 그렇게 모르니?”
“······.”
진아는 형부라는 말 대신 굳이 시아버지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너희 시아버지, 그래 형부가 어떤 사람이니? 네가 우식이하고 헤어지고 나서도 널 보듬은 사람이야. 생각해봐, 어떤 시아버지가 아들과 헤어진 며느리를 그렇게 돌보니, 더군다나 너 때문에 아들하고 의절까지 한 사람이 말이야.”
“······.”
“너희 시아버지 그런 사람이야, 너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내가 수없이 물어도 끝까지 말은 하지 않아서 그 사정은 내가 모르겠다만 너희 시아버지 그런 너에게 집에서 나가달라고 할 것 같니? 몸을 섞은 나에게도 널 위해서 너의 사정에 대해서 입을 다무는 그런 사람이 말이야.”
“·····.”
진아의 말이 끝나는 순간 유진의 눈빛에 처음으로 절망감이 깃들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 부인 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음을 정확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시아버지의 시상에 관해 진아가 빠짐없이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시아버지와 이모인 진아가 친밀한 사이임을 부인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도 조금 신경이 쓰여. 형부는 걱정 말라고 했고 시간이 지나면 너에게 말하겠다고 하지만 기분이 나쁜 건 사실이야, 나도 입장 바꿔 생각해 봐, 너와 몸을 섞은 사랑하는 남자의 집에 너 같이 아름답고 젊은 여자가 함께 살고 있다면 어떨지 말이야?”
“·····.”
유진은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대꾸를 할 수 없었다. 진아의 말 어느 하나도 강하게 부인 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난 진아는 시아버지인 정우와 몸을 섞고 지내고 있다는 것이 점점 확연해지고 있는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건 형부가 바라는 걸지도 몰라, 자기 입으로 말하기 힘드니까 날 통해서 자기 마음을 전하려고 말이야, 난 그렇게 느꼈고, 그래서 내가 널 만난거야.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 날 만나 건 비밀로 해줘. 내가 잘못 느꼈을 수도 있고, 예전 며느리에게 먼저 떠난 아내의 동생과 육체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리고 싶지는 않을 테니 말이야.”
“·····.”
유진이 고개를 돌렸고 애서 울음을 참아내자 역시 시선을 돌린 진아가 숨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잠시의 치묵이 흐르던 순간 진아가 다시 입을 열고 있었다.
“모쪼록 네가 현명한 판단을 하기 바란다. 널 위해서도, 그리고 형부를 위해서도 말이야. 그리고 나도 내 남자를 의심하기 싫어. 형부는 이제 내 남자니까.”
“······.”
자신의 남자라는 말에 유진이 고개를 돌려 진아를 바라보았다.
그런 유진을 응시하던 진아가 자신의 가방을 집어 들고 있었다.
“나 먼저 일어날게. 차 값은 내가 계산한다.”
“·······.”
진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유진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고, 고개를 살짝 돌리는 순간 애서 참아왔던 눈물 줄기 하나가 유진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유진은 울음을 울지 않기 위해 입술을 굳게 물었다. 그리고 작은 절망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런 유진을 저 멀리서 진아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해, 유진아.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내가 먼저였다. 그 사람을 가슴에 담은 건, 너도 알잖아, 형부가 네 마음을 받아 줄 사람이 아니란 걸, 처제인 나도 허락하지 않던 사람이, 넌 더 허락하지 않을 거야. 더군다나 너 같이 젊고 아름다운 아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그리고 넌 그런 형부의 며느리였으니 말이다. 이건 우리 모두를 위한 일이야, 나도, 형부도, 그리고 무엇보다 상처 받을 널 위해서 말이야.’
애잔한 시선으로 유진을 바라보던 진아가 천천히 몸을 돌려 문을 열고나서는 순간 울음을 참은 채 창밖을 바라보는 유진의 얼굴에선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넌 더러운 여자가 아니야, 아플 뿐이야. 그러니까 더럽다고 하지 마.’
‘절대 널 버리지 않아, 그러니까 날 믿어.’
시아버지인 정우가 했던 말을 떠올리던 유진이 손을 들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냈지만 멈추지 않고 흘러내리는 눈물은 금세 또다시 유진의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
비록 소리 내어 울지는 않고 있었지만 파르르 떨리는 입술과 더불어 절망감에 휩싸여 초점을 잃고 허공을 바라보는 눈빛을 통해 유진이 얼마나 아파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믿었어요. 아버님만큼은 저를 속이지 않을 거라고, 그런데 어떻게 아버님 저한테 이러세요, 차라리 받아주시지나 말지, 그랬으면 이런 절망감은 없었을 텐데요. 이런 절망감은····.’
유진은 모든 것이 자신의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상처 받은 자신을 위로하던 정우의 모습도,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는 자신을 안고 잠들게 했던 정우의 모습 모두가 자신이 품었던 그런 특별함이 아니라 그저 자신이 불쌍해서 가졌던 연민의 동정이었다고 말이다.
유진은 처음으로 정우가 미웠다.
오빠에게 버림을 받고, 자신을 돌봐주는 정우를 바라보며 자기도 몰래 키워왔던 감정이었다. 그리고 정우가 지금은 헤어진 여자를 만나는 순간 자신의 가슴에 깃들었던 그 질투감이 그저 그런 투정이 아님을 느끼던 순간 처음으로 정우를 예전의 시아버지가 아닌 남자로 담았었다.
그랬기에 끔찍한 그 일을 당하는 순간 죽고 싶었다.
더럽혀진 몸으로 이제 더 이상은 정우에게 자신은 여자가 될 수 없을 거라는 절망감에 정말이지 죽고 싶었다. 그런 자신을 더럽지 않다고 했다. 그냥 아픈 거라고, 그냥 잊으면 된다고 말이다. 그래서 다시 희망을 가졌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정우가 안아주는 순간 결심했다.
다시 가슴에 품고 싶다고 말이다.
정우는 더럽혀진 자신을 탓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말이다.
그래서 자신을 밤마다 안아주는 정우의 품에서 편안하게 잠들었었다. 언젠가는 이 따스한 품에서 정우의 여자가 되어 지금처럼 행복한 마음으로 잠들 날을 꿈꾸며 말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자신이 그렇게 정우의 품에서 행복한 꿈을 꾸는 순간 시아버지였던 정우는 처제인 진아와 자신이 꿈꿔왔던 그 일을 벌인 것이다.
유진은 생각했다.
자신은 그저 정우에게 칭얼거리고 돌봐야 하는 어린아이 같은 존재였다고 말이다.
여자가 아니라, 그저 의무감으로 돌 본 어린 소녀 말이다.
“흐흑! 흑!”
처음으로 유진이 소리 내어 울었다.
서러웠다. 가슴이 아팠다.
도대체 자신이 무얼 어쨌기에 자신이 선택한 남자들은 이렇게 자신을 아프게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른 여자에게 떠나버린 전 남편도,
돈 때문에 동생인 자신을 버린 오빠도,
그리고 회사 동료이기에 그저 친절하게 대했던 짐승 같은 그 인간도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절망스러운 건 정우였다.
삶의 마지막 안식처였다.
삶의 마지막 희망이자. 염원이었고 말이다.
자신도 망설였었다.
어쨌거나 한때는 자신의 시아버지였기에 몇 번이고 스스로를 질책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점점 커지는 마음은 스스로 제어하기에 너무 커져버렸고 자신을 위해 늘 미소를 짓는 정우였기에 결심했다.
세상이 뭐라고 해도 정우만 자신을 받아준다면 정우의 여자로 살고 싶다고 말이다.
그러나 헛된 꿈이 되어버린 지금 그게 더 슬펐다.
차라리 사랑이라도 해봤다면, 정우의 여자가 되어 하루만이라고 그의 품에 안겨 그의 여자가 되어봤다면 이렇게 절망스럽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랬다면 최소한 그의 여자가 되어보았다는 추억의 편린만이라도 간직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
다시 밀려 나오는 울음을 애써 참아낸 유진이 밤하늘을 올려보며 입술을 떨고 있었다.
‘아버님 저 이제 어떡해요. 아버님 없으면 살아갈 자신이 없는데 이제 어떡해요. 이럴 거면 잘해주시지 말지 그러셨어요. 아니 최소한 이모님이 아닌 아버님 입으로 말해주시지 그러셨어요, 전 아니라고, 전 아버님의 여자가 될 수 없다고 말이에요.’
유진이 눈물을 훔쳐냈다.
금세 눈물이 뺨을 적시리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미워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그래도 아파요, 애초부터 마음을 접었어야 했었나 봐요. 더럽혀진 이 몸으로 아버님 같은 분을 다시 마음에 담아서 벌을 받나 봐요, 그냥 멈췄어야 했나 봐요, 더럽혀진 그 순간부터 말이에요.’
입술을 다문 채 가슴으로 이야기 하던 유진이 두 손으로 가슴을 가린 채 상체를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소리 없는 울음을 울어갔다.
울음을 터뜨리면 부여잡고 있는 자신의 가슴이 정말로 찢어질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유진은 소리도 내지 못하는 울음을 울었다.
세상이 미웠다.
아니 운명이 미웠다.
이렇게 자신을 아프게 하는 운명이 너무 미웠다.
자신의 가슴에 누군가를 담고 싶은 작은 소망마저 갈가리 찢어버린 운명이 너무 미웠다.
“윽! 우읍!”
악다문 입술 사이로 울음이 터지려 하자 황급히 손을 들어 입을 가린 유진이 남은 한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듯이 움켜 잡아가고 있었다.
참으려 애를 썼다.
이 잔인한 운명 앞에서 그것만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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