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한 침대 조명 아래 열정으로 가득했던 침실 안에 고른 숨소리만 들렸다. 은영은 지금까지 몰랐던 자신을 알게 된 것이었다. 여자로서의 존재, 여자의 욕망이었다. 오직 지훈의 여자로서 존재하는 지금의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다시 돌아가야만 할 현실이 있었다. 현실과 그녀가 바라는 욕망사이는 전혀 융합할 수 없는 괴리가 존재했다.
지훈은 모든 것을 맡기고 있는 은영의 모습에 만족했다. 희열에 젖은 그녀의 모습은 드디어 여자로서 자신을 남자로 받아드린 표정이었다. 그러나 몽롱한 눈빛으로 꼼짝도 않는 그녀의 깊은 심정은 알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깊은 애정만큼 그녀의 미음도 같은지 궁금했다.
“마미! 무슨 생각......?”
“..........”
“무슨 생각하는 거지?”
“그냥.........”
“아무 생각도 하지 마. 고민도 하지 말고. 아버지도 생각하지 마.”
“..............”
“다만, 난 마미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
“죽을 때까지.......! 마미를 지켜주고 싶어.”
지훈은 자신의 진심을 전달하듯이 은영을 끌어안으며 허리에 힘을 주었다. 허공에 시선을 주고 있던 그녀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면서 그를 올려다봤다. 여전히 그녀의 몸속에서 꿈틀거리던 그의 남성이 다시 용솟음쳤다. 그녀는 갑자기 치골까지 잇닿는 것 같아서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의혹의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그녀에게 그가 다짐하듯이 뇌까렸다.
“정말이야! 마미는 내가 지켜줄게, 그냥......! 나를 믿을 거지?”
“..........!?”
은영은 지훈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그녀도 자신을 감당할 수 없는 현실과 욕망의 괴리 사이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영혼마저도 다시 몸속을 치밀고 들어오는 그의 여자가 되고 있었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 사랑하여 성욕에 이르게 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성적인 욕구를 느끼지 못하는 사랑은 사실이 아니라 공상일 것이다.
한해가 저물고 사람들은 제각기 지난해에 대한 미련과 후회하기 마련이다. 새해가 밝은지도 벌써 열흘이 지나고 있었다. 서울뿐만 아니라 부산에도 많은 눈이 내려 주택가 골목을 온통 하얀 눈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컴퓨터 앞에 앉은 그녀는 멍하니 유리창 너머 골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나는 민기 오빠를 만난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머릿속은 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자상하게 보살펴주는 그가 있기에 그녀는 자신감으로 요즘의 하루하루를 만족스럽게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신정 연휴를 거의 밖에서 친구들과 어울렸다. 예전과 달리 친구들이 그녀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친구들과 어울림도 권태스러워 집으로 들어왔다.
지나는 한동안 사귀고 싶었던 남자들은 거들떠보지 않게 되었다. 또래의 남자들은 애들 같이만 느껴졌다. 그녀는 오직 그녀를 여자로 탈바꿈시켜준 민기 오빠만이 떠올랐다. 잠을 자면서도 그의 가슴에 안기는 꿈을 꾸다가 깨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황홀한 쾌감에 젖었던 순간이 떠올라 허벅지 사이에 손을 넣고 뒤척였다.
창밖을 내다보던 지나는 컴퓨터 전원을 끄고 일어났다. 집안에만 있자니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민기 오빠가 사준 옷들을 들척이다가 헐렁한 셔츠에 기모펜츠를 입고 카키색 야상점퍼를 걸쳤다. 그리고 대학생처럼 영문서적을 집어 들었다. 방을 나오던 그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야! 너 또 어디 가는 거야?”
“웬, 걱정이야?”
희정이 지나의 옷소매를 붙잡은 것이다. 짜증스런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나 그녀가 다시 지나의 허리춤을 잡았다.
“나가지마! 시장 다녀 올 동안 집안 청소 좀 해.”
“내가 파출부야!”
“이 기집애가 말하는 것 좀 봐. 며칠 동안 코빼기도 안보이다가 집에 들어오더니.”
“나한테 간섭하지 마.”
“간섭하지 말라고......!? 여보! 얘 좀 봐~!”
“.........!”
“여보! 나와 보라니까!”
희정의 외침에 방에서 자고 있던 준섭이 부스스한 얼굴로 나왔다. 남편의 등장에 그녀는 더욱 노기충천하여 소리를 질렀다.
“이 년이 또 나가! 당신이 어떻게 좀 하라고.”
“너, 여기 좀 앉아봐!”
지나를 잔뜩 노려보던 준섭이 소파로 가서 앉았다. 미간을 찌푸린 그녀가 그와 희정을 번갈아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녀는 마지못해 그의 앞에 가서 섰다. 그는 그녀를 금방이라도 후려칠 것만 같은 험악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정말 엄마 말 안들을 거니?”
“엄마!? 누가 엄마야?”
“못된 년! 말하는 것 봐. 그러려면 따로 나가 살아. 보기도 싫으니.”
“그럴게. 방 얻어줘요. 나도 이 집이 지긋지긋해.”
“이년이!?”
준섭은 벼락같이 지나의 뺨을 후려쳤다. 머리가 돌아가도록 얻어맞은 그녀는 휘청거렸다. 그러나 화를 내지도 아픈 표정도 하지 않고 오히려 침착했다. 다만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
“실컷 때리세요! 어차피 엄마처럼 나도 내쫓으려는 거잖아.”
“이런 독한 년이 있나!”
“엄마와 날 이렇게 만든 게 누군데요?”
“니 애미는 제 발로 나갔어! 그래! 구정 지나서 방 구해줄게, 너도 나가. 그게 모두를 위해 좋을 테니.”
“알았어요. 그동안 더 이상, 저 괴롭히지 마세요.”
준섭에게 얻어맞은 지나는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입술을 깨문 그녀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돌아섰다. 그녀는 그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현관문을 나섰다. 밖으로 나온 그때서야 그녀의 눈동자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한동안 눈물을 흘리면서 걸어가던 그녀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은미야! 뭐하니?”
“어딘데?”
“알았어. 갈게.”
대로로 나온 지나는 친구가 있다는 피시방으로 가려고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세웠다. 그녀는 더욱 민기 오빠가 떠올랐다. 택시에서 내린 그녀는 피시방 간판이 붙은 이층을 올려다보며 부지런히 걸어갔다. 이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려던 그녀는 주춤거렸다. 그녀의 순결을 강제로 빼앗았던 준철과 그의 친구 형권이 층계 위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마주보고 내려오는 그들을 본 순간 지나는 되돌아섰다. 그리고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뒤돌아보는 그녀의 시야에서 얼마 안 되는 간격을 두고 그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그녀가 죽을힘을 다해 달아나지만 남자들을 당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그들의 시선을 피해 골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런데 운이 없게 건축자재가 앞을 막고 있는 막다른 골목이었다. 그녀는 잔득 쌓인 건축자재더미를 기어 올라갔다.
“하하하~! 어디로 튀려고!”
“앗......! 나, 좀 놔둬.”
철준이 지나의 다리를 붙잡고 잡아당겼다. 자재더미를 오르던 그녀는 밑으로 끌려 미끄러져 내려갔다. 주저앉아 뒤를 돌아앉아 그들을 피하는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형권은 뒤에서 빙긋이 웃고 있고 철준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섰다.
“네가 이 바닥에서 어디로 도망가!”
“제발 그러지 마. 내가 저번에도 갖고 있는 돈도 다 줬잖아.”
“하하......! 너, 오늘 그 늙은 놈씨 만나러 가는 거지? 내가 심심하거든.”
“아냐! 친구 만나러 가는 거야.”
“오늘은 나하고 같이 가자!”
“어딜 가자는 거야? 안 돼.”
“안된다고!? 오늘은 너하고 하고 싶거든.”
“싫어. 이젠 그만 괴롭혀.”
“이게 까불고 있어. 늙은 놈씨한테 맛 들렸니?”
철준이 지나를 붙들어 일으켰다. 그리고 자재더미에 밀어 붙이고 우악스럽게 그녀의 점퍼 단추를 풀어헤치고 셔츠를 들어올렸다. 브래지어가 말려 올라가 젖가슴이 들어난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안간힘을 썼다. 비웃음이 가득한 그가 그녀의 하반신에 착 달라붙은 기모펜츠를 끌어내리려했다.
“아 악~! 사람 살려요.”
“이 게 소리를 질러! 죽고 싶어?”
바동거리던 지나는 간신히 철준에게서 벗어났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이 앞을 막고 있어서 골목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철제더미를 넘어가려고 기어 올라갔다. 하지만 철준의 손에 잡혀 다시 밑으로 떨어져 주저앉았다. 결국 그의 가슴 아래 깔린 그녀는 어떻게든지 벗어나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무척 쌔큰해졌는데, 그 놈씨가 잘 해주는 모양이네.”
“사, 살려 줘. 제발........”
“누가 널 죽인데! 어차피 내가 뚫어 놓은 길인데, 한번 한다고 달라지나.”
“시, 싫어, 제발 살려줘~!”
“가만히 안 있어~!”
철준의 손바닥이 지나의 뺨을 후려쳤다. 기모패츠가 무릎까지 끌어내려진 그녀의 하반신이 들어났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가 자신의 바지춤을 끌어내렸다. 그는 어느새 발기한 페니스를 강제로 그녀의 허벅지 사이에 밀어 넣으려고 했다. 순간 더듬거리던 그녀의 손이 무엇인가 움켜쥐었다. 이를 악물고 버둥거리던 그녀는 손에 움켜쥔 것을 있는 힘을 다해 휘둘렀다.
“허 걱~! 이, 이년이 미쳤나!?”
“죽여 버릴 거야.”
지나가 손에 움켜쥔 것은 난간이 부러진 철근이었다. 눈에 불을 켜고 일어선 그녀는 그때서야 자신의 행동을 의식했다. 그녀가 휘두른 철근에 맞은 철준이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비틀거렸다. 놀란 형권이 달려들어 그녀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찼다. 그녀는 힘없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분에 불을 켜고 쳐다보던 형권이 철준에게 다가섰다. 그 순간 부리나케 일어선 지나가 바닥에 떨어진 철근을 집어 들고 형권의 등을 후려쳤다.
“헛~! 이, 이년이.........”
“다, 죽여 버릴 거야.”
비틀거리는 그들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지나를 향해 다가왔다. 골목어귀에는 어느새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사람들을 헤치고 순찰 중이던 정복경찰 두 명이 다가왔다. 다가오는 경찰을 보고 지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지나는 경찰이 자신과 철준, 그리고 형권에게 상황에 대해서 물어보지만 정신이 없어 알아들을 수 없었다.
민기는 서재에서 그동안 작성한 논문을 정리하고 있었다. 초안을 정리하는 교정단계만 남겨 놓은 상태였다. 논문작성에 몰두하느라고 아내와 대화하는 시간도 많지 않았다. 부산에 다녀오고 나서 자격지심에 더욱 거리감을 갖게 된 아내가 타인 같이만 느꼈다. 다만 예전보다 아들을 살갑게 대하는 아내를 고맙게 생각했다. 어느 경우에는 아내에 대한 아들의 스킨십이 가족 간의 애정표현이라고 지나쳐 버리기는 민망하기도 했다.
민기는 아들의 거침없는 행동이 호주의 생활방식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는 이따금 아들의 과한 표현을 제지하고도 싶었다. 하지만 자식도 없는 적막한 가정에서 아내의 오직 한사람의 대화상대인 아들을 나무랄 수가 없었다. 또한 그때마다 그는 자신과 지나 사이를 떠올리며 오히려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
지나를 마주하면 민기는 기품 있는 중년 남자도 아니고, 사회로부터 존중받는 교수도 아니었다. 단지 어린 여자의 당돌한 눈빛에 열정을 불태우는 젊은 남자로 변모했다. 엄격한 생활 방식으로 살아오면서 그는 스스로 자신을 울타리에 가두어 놓았었다. 그리고 이따금 그 울타리에 갇혀있는 지루한 현실에 권태를 느꼈다.
요즘 민기가 권태롭고 지루함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지나를 떠올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대 차이, 사회적 관념이든지 모든 조건이 그녀를 자신의 울타리에 가두어 놀 수는 없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첫 순정을 받친 여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녀의 장래가 자신으로 인해서 상처받지나 않을는지 염려되었다.
민기는 부모로부터 유산이나 다를 바 없는 거액의 예금과 증권, 그리고 부동산을 받아 관리하고 있었다. 그는 고심 끝에 부산에서 올라오면서 억대의 현금을 입금시킨 통장을 지나에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통장을 은행 금고에 넣어두고 만약 만날 수 없는 경우가 생기면 시용하라고 그녀에게 당부했다.
원고를 정리하는 민기는 수시로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지나가 보내는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굳어진 표정에 미소를 떠올렸다. 비록 문자메시지이지만 그녀의 청순하고 풋풋한 모습이 함께 담겨 있었다. 또한 시간이 갈수록 그는 한결 여성으로 성숙해지는 그녀를 느낄 수 있었다.
[오빠~! 나, 큰일 났어.]
[오빠~~!]
[오빠! 빨리 전화 받아.]
[미치겠네........]
[오빠~! 어떡해. 나, 경찰서에 있어요.]
민기는 미간을 찌푸렸다. 지나로부터 여러 통의 문자메시지와 함께 전화 통화내역이 도착해 있었다. 아무래도 급한 상황인 것 같아서 그는 서재 입구로 가서 문을 열고 촉각을 곤두세웠다. 움직임도 없는 공간에 자신의 숨소리만 들렸다. 문을 잠그고 돌아선 그는 지나의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통화음이 들리자마자, 다급하게 지나의 울음이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나, 어떻게 해!? 왜 전화 안 받았어?”
“무슨 일이야. 경찰서에는 왜?”
“나, 쫓아다니던 준철이와 싸워서 경찰서에 왔단 말이야. 어떡해?”
“왜, 싸워?”
“계속 날 쫓아다니면서 괴롭혔단 말이야. 그런데 도망가다가 잡혔어, 그 새끼하고 친구들이 강제로 옷을 벗기면서 사정없이 때리잖아.”
“이런~! 다치진 않았어?”
“난, 다리가 아픈데, 저 새끼가 좀 다쳤어.”
“왜......!?”
“나도 모르게 손에 잡힌 철근을 휘둘렀어.”
“많이 다치진 않았어?”
“난, 괜찮은 거 같은데, 저 놈이 머리를 다쳐서 응급치료 받았어. 그런데 저 놈 엄마가 와서 형사에게 나를 구속시키래. 오빠! 나, 어떡하면 좋아.”
“음......!? 조금만 기다려. 내가 연락할게.”
통화를 끝낸 민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이라도 부산으로 내려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는 휴대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들을 검토했다. 그리고 통화를 시도했다. 그는 수제자로 부산 경찰서 수사과 계장으로 근무하는 박 승민 경감에게 도움을 요청하려는 것이었다. 통화 신호음이 길게 이어지고 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가 흘러 나왔다. 그는 방안을 배회하며 시간을 두고 다시 통화를 시도했다. 어수선한 분위기를 느끼는 잡음과 함께 박 경감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아! 교수님 죄송합니다. 직원들과 대화중이어서 전화를 받지 못했습니다. 요즘 건강하시지요?”
“그래요. 요즘 년 초라서 바쁘시겠구먼.”
“네. 항상 하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하신건지?”
“내가 급해서 부득이 전화를 했는데, 괜찮겠소?”
“하하하......! 말씀하시지요. 교수님에게 제가 도움이 된다면.”
“다른 일이 아니고, 조카뻘 되는 아이가 있는데,............”
다소 어줍은 표정으로 민기는 지나가 처해있는 상황을 말했다. 그는 제자들에게도 항상 존칭어를 잊지 않았다. 더욱이나 지나에 대해 도움을 청하려니 사생활을 박 경감에게 들어내 보이는 것만 같아서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박 경감은 그가 가족의 난처한 상황을 그대로 믿고 흔쾌히 대답했다.
“염려 마십시오. 조카님이 불량 학생들로 인해 곤경에 빠진 모양이군요. 바로 처리해 드릴게요. 그리고 부산에 내려오시면 연락하십시오. 제가 근사하게 식사 대접할 기회를 주십시오.”
“아~! 그럴게요. 이런 일로 연락해서 미안하오.”
“아닙니다. 제가 도리어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통화를 끝낸 민기는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그는 그렇지 않아도 구정이 지나서 부산에 내려갈 생각이었다. 지나가 준섭으로부터 집을 나가라는 말을 수시로 듣고 있다는 메시지를 여러 번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어느덧 창밖은 어두워지고 시장기를 느낀 그는 책상위에 늘어놓은 원고들을 정리하기 위해 집어 들었다.
아래층 주방에는 지훈이 싱크대 밑에 엎드려 있었다. 싱크대 하수구 물이 빠지지 않아서 은영이 도움을 청했던 것이었다. 그녀는 하수구 파이프를 수리하는 그의 주변을 오가면서 한창 식사준비를 하고 있었다. 수리를 마친 그가 일어나서 수돗물을 틀어 보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돌아선 지훈은 식탁을 정리하는 은영의 등 뒤로 다가섰다. 그리고 그녀의 체취를 들이마셨다. 언제나 그의 가슴이 설레는 체취는 그녀에게만 느낄 수 있는 향기였다. 그녀는 슬그머니 허리를 껴안는 그의 손길을 느끼면서 감정이 들어나지 않는 목소리를 흘렸다.
“아버지, 식사하시라고 하지.......”
“나. 손 씻어야 돼. 마미가 말해.”
지훈은 다른 사람과 다르게 아버지에게만큼은 자유스럽지 못했다. 그가 대화를 시도하면서도 눈치를 살피는 사람은 아버지였다. 그는 아버지 서재에 들어가는 것조차 어렵게 생각했다. 그러나 은영은 자신을 위해서라도 남편과 그의 관계가 부드러웠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그가 욕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녀가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향했다. 그때 마침 민기가 층계를 내려오고 있었다.
“식사 준비 다 됐어요.”
“응, 그래요.”
민기가 식탁 앞에 앉고, 욕실에서 나온 민기도 마주 앉았다. 은영도 평상시 말이 많은 편이 아니지만 남편과 같이 있으면 더욱 대화가 적었다. 지훈도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침묵 속에 식사를 하면서 수저 드는 소리만 이따금 딸그락하고 들렸다. 침묵을 깨고 민기가 아내에게 물었다.
“당신! 구정에 친정에 다녀와요.”
“저, 혼자서는........”
민기는 아내가 친정 가기를 꺼려하는 이유를 뻔히 알고 있었다. 그들의 결혼을 그녀의 친정에서는 아직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어느 부모인들 딸을 상처한 남자의 재혼 상대로 쉽게 허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처갓집에서 자신을 신임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그도 처갓집 가기를 꺼려했다.
“다음 구정에는 내가 당신 부모님, 꼭 찾아뵙도록 할게요.”
“논문 작성은 끝내셨어요?”
“음. 이제 교정을 할 거요.”
“.......수고하셨네요.”
“그리고.........”
은영이 수저를 든 채 민기를 쳐다봤다. 그는 구정 지나서 지나를 만나기 위해 미리 아내에게 말하려는 것이었다. 막상 아내가 바라보는 시선과 마주하니 그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내의 시선을 피하면서 푸념하듯이 말했다.
“초빙교수로 다니기가 힘들어요. 그러나 거절할 수도 없고, 구정 지나서 부산에 내려갔다 와야 할 거 같아요.”
“.........네.”
은영은 남편의 말을 듣는 순간 매스꺼움을 느꼈다. 남편이 숨겨놓은 여자를 만나는 모습을 상상했기 때문이었다. 찌개 국물을 떠서 마시던 지훈이 그의 말을 듣고 사래가 들려 큭큭거렸다. 지훈은 아버지의 말을 듣는 순간 믿기 어렵던 사실이 현실이기에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은영이 주는 물을 받아 마신 지훈은 아버지를 힐끔 쳐다보면서 말했다.
“역시, 아버지 강의가 인기 있네.”
“.........!”
“.........!”
지훈의 말에는 의문과 칭송이 함께 곁들여 있었다. 그의 말을 받아서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식사를 마친 식구들은 모두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다. 지훈은 자신의 방으로 민기는 다시 서재로. 혼자 남은 은영은 설거지를 하다가 싱크대를 붙잡고 멍하니 서있었다. 그녀는 남편의 사생활을 방관하려하지만 무언가 뒤틀려 엉키는 것만 같았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했던 구정이 지나고, 은영은 더욱 스산하고 쓸쓸했다. 남편은 미리 예고한데로 부산으로 출 장가서 집을 비우고, 지훈은 친구들과 어울리느라고 조금 귀가가 늦을지 모른다는 전화를 했다. 모두가 외출한 도시처럼 적막한 집안에는 어둠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따뜻함이 그리워져 주방으로 가서 커피포트에 물을 끓였다. 커피 잔을 들고 유령처럼 베란다 창가로 다가섰다. 하나 둘씩 도시를 밝히는 불빛이 늘어가고 있었다.
은영의 마음이 더욱 스산해지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요즘 며칠 동안 또 다른 혼란스러운 고민을 하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아무래도 몸 상태가 이상했다. 생리가 없었고 시장기를 느끼면서도 식욕도 없었다. 조그마한 소리에도 놀라고 예민해졌다. 그래서 병원을 찾았더니 임신이라면서 축하한다고 했다.
은영은 느닷없이 축하를 한다는 말을 하는 의사를 한동안 넋을 잃고 쳐다봤다. 병원을 나온 그녀는 자꾸만 발걸음이 헛디뎌지고, 허공을 걸어가는 것만 같았다. 남편의 아기라면 좋아하고 축하 받을 일이지만, 남편과 부부관계를 한동안 하지 않았던 그녀는 어찌해야할지 모르고 머릿속이 하얗기 만했다.
지훈의 아기가 분명하지만 은영은 그에게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자신의 아기를 갖고 싶다는 그녀의 욕망은 분명했다. 어쩌면 몸속에 잉태된 생명을 남편의 아기로 키우면서 무덤까지 그녀 혼자 간직해야할 비밀이었다. 그녀는 더욱 지훈의 여자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아니 이제는 남편보다는 정열로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이 그리워지는 시간이었다.
어둠이 내려앉는 밖을 내다보고 있던 은영의 시선이 한곳을 주시했다. 서치라이트를 밝힌 승용차 한 대가 도로 입구에 들어서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달려온 승용차가 집 앞에 멈추어 섰다. 그늘졌던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지훈의 잿빛 승용차였다. 생각보다 빨리 귀가하는 그가 왠지 반가웠다.
은영은 스스로 겸연쩍은 생각이 들어 돌아섰다. 은연중에 지훈의 귀가를 기다렸던 그녀는 소파로 가서 앉아 귀를 기울였다. 철문 여닫는 소리, 그리고 정원을 지나쳐 오는 그의 발자국 소리, 그리고 현관의 벨 소리가 울렸다. 소파에서 일어나는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들어내지 않기 위해 내심 침착해야한다고 생각하며 현관으로 다가섰다.
“문 열고 들어오지.......!”
“잠겨 있는 줄 알고.......!”
“일찍 들어왔네.”
“식사만 하고 들어왔어.”
지훈은 혼자 있을 은영이 걱정되었고 그녀는 따뜻함이 그리웠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마음만큼 그들은 서로의 뜨거운 감정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소파로 가서 앉아 TV 화면을 주시했다.
“마미는 식사했어?”
“점심을 늦게 먹어서........”
흘리는 말처럼 대답하는 은영은 리모컨을 집어 들고 TV 볼륨을 높였다. 그러나 그녀는 옆에 와서 앉는 지훈을 의식하고 있었다. 지훈은 곁눈으로 그녀를 힐끔힐끔 살폈다. 플레어스커트 위에 블라우스를 걸친 그녀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여성스러워 보였다. 그는 양팔을 뻗어 올리며 크게 하품을 했다.
“마미! 커피 마시고 싶다.”
“잘 시간인데, 커피를.......”
지훈을 흘깃 쳐다본 은영은 커피를 타오려고 일어섰다. 순간, 지훈이 덥석 그녀의 허리를 잡고 당겼다. 걸음을 옮기려던 그녀는 뒤로 주저앉았다. 그런데 그의 무릎위에 걸터앉게 되었고, 그가 그녀의 상체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등을 안고 있는 그의 가슴에서 따뜻한 체온이 전달됨을 느꼈다. 그녀는 혼잣말처럼 작은 목소리를 물었다.
“커피 마신다면서?”
“나중에.........”
대답과 동시에 지훈은 일어서려는 은영을 옆으로 눕히고 껴안았다. 그리고 상체를 굽혀 그녀를 빤히 내려다봤다. 당황하는 그녀의 표정! 그녀의 마음속에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에게 벗어나야한다는 이성적인 판단과 여자로서의 본능적인 감정이었다.------------------------------------
지훈은 모든 것을 맡기고 있는 은영의 모습에 만족했다. 희열에 젖은 그녀의 모습은 드디어 여자로서 자신을 남자로 받아드린 표정이었다. 그러나 몽롱한 눈빛으로 꼼짝도 않는 그녀의 깊은 심정은 알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깊은 애정만큼 그녀의 미음도 같은지 궁금했다.
“마미! 무슨 생각......?”
“..........”
“무슨 생각하는 거지?”
“그냥.........”
“아무 생각도 하지 마. 고민도 하지 말고. 아버지도 생각하지 마.”
“..............”
“다만, 난 마미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
“죽을 때까지.......! 마미를 지켜주고 싶어.”
지훈은 자신의 진심을 전달하듯이 은영을 끌어안으며 허리에 힘을 주었다. 허공에 시선을 주고 있던 그녀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면서 그를 올려다봤다. 여전히 그녀의 몸속에서 꿈틀거리던 그의 남성이 다시 용솟음쳤다. 그녀는 갑자기 치골까지 잇닿는 것 같아서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의혹의 눈빛으로 올려다보는 그녀에게 그가 다짐하듯이 뇌까렸다.
“정말이야! 마미는 내가 지켜줄게, 그냥......! 나를 믿을 거지?”
“..........!?”
은영은 지훈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그녀도 자신을 감당할 수 없는 현실과 욕망의 괴리 사이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영혼마저도 다시 몸속을 치밀고 들어오는 그의 여자가 되고 있었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 사랑하여 성욕에 이르게 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성적인 욕구를 느끼지 못하는 사랑은 사실이 아니라 공상일 것이다.
한해가 저물고 사람들은 제각기 지난해에 대한 미련과 후회하기 마련이다. 새해가 밝은지도 벌써 열흘이 지나고 있었다. 서울뿐만 아니라 부산에도 많은 눈이 내려 주택가 골목을 온통 하얀 눈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컴퓨터 앞에 앉은 그녀는 멍하니 유리창 너머 골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나는 민기 오빠를 만난 지 오래되지 않았지만, 머릿속은 그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자상하게 보살펴주는 그가 있기에 그녀는 자신감으로 요즘의 하루하루를 만족스럽게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신정 연휴를 거의 밖에서 친구들과 어울렸다. 예전과 달리 친구들이 그녀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친구들과 어울림도 권태스러워 집으로 들어왔다.
지나는 한동안 사귀고 싶었던 남자들은 거들떠보지 않게 되었다. 또래의 남자들은 애들 같이만 느껴졌다. 그녀는 오직 그녀를 여자로 탈바꿈시켜준 민기 오빠만이 떠올랐다. 잠을 자면서도 그의 가슴에 안기는 꿈을 꾸다가 깨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황홀한 쾌감에 젖었던 순간이 떠올라 허벅지 사이에 손을 넣고 뒤척였다.
창밖을 내다보던 지나는 컴퓨터 전원을 끄고 일어났다. 집안에만 있자니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민기 오빠가 사준 옷들을 들척이다가 헐렁한 셔츠에 기모펜츠를 입고 카키색 야상점퍼를 걸쳤다. 그리고 대학생처럼 영문서적을 집어 들었다. 방을 나오던 그녀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야! 너 또 어디 가는 거야?”
“웬, 걱정이야?”
희정이 지나의 옷소매를 붙잡은 것이다. 짜증스런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나 그녀가 다시 지나의 허리춤을 잡았다.
“나가지마! 시장 다녀 올 동안 집안 청소 좀 해.”
“내가 파출부야!”
“이 기집애가 말하는 것 좀 봐. 며칠 동안 코빼기도 안보이다가 집에 들어오더니.”
“나한테 간섭하지 마.”
“간섭하지 말라고......!? 여보! 얘 좀 봐~!”
“.........!”
“여보! 나와 보라니까!”
희정의 외침에 방에서 자고 있던 준섭이 부스스한 얼굴로 나왔다. 남편의 등장에 그녀는 더욱 노기충천하여 소리를 질렀다.
“이 년이 또 나가! 당신이 어떻게 좀 하라고.”
“너, 여기 좀 앉아봐!”
지나를 잔뜩 노려보던 준섭이 소파로 가서 앉았다. 미간을 찌푸린 그녀가 그와 희정을 번갈아 쳐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녀는 마지못해 그의 앞에 가서 섰다. 그는 그녀를 금방이라도 후려칠 것만 같은 험악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정말 엄마 말 안들을 거니?”
“엄마!? 누가 엄마야?”
“못된 년! 말하는 것 봐. 그러려면 따로 나가 살아. 보기도 싫으니.”
“그럴게. 방 얻어줘요. 나도 이 집이 지긋지긋해.”
“이년이!?”
준섭은 벼락같이 지나의 뺨을 후려쳤다. 머리가 돌아가도록 얻어맞은 그녀는 휘청거렸다. 그러나 화를 내지도 아픈 표정도 하지 않고 오히려 침착했다. 다만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를 노려봤다.
“실컷 때리세요! 어차피 엄마처럼 나도 내쫓으려는 거잖아.”
“이런 독한 년이 있나!”
“엄마와 날 이렇게 만든 게 누군데요?”
“니 애미는 제 발로 나갔어! 그래! 구정 지나서 방 구해줄게, 너도 나가. 그게 모두를 위해 좋을 테니.”
“알았어요. 그동안 더 이상, 저 괴롭히지 마세요.”
준섭에게 얻어맞은 지나는 입술이 터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입술을 깨문 그녀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돌아섰다. 그녀는 그들의 시선을 뒤로하고 현관문을 나섰다. 밖으로 나온 그때서야 그녀의 눈동자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한동안 눈물을 흘리면서 걸어가던 그녀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은미야! 뭐하니?”
“어딘데?”
“알았어. 갈게.”
대로로 나온 지나는 친구가 있다는 피시방으로 가려고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세웠다. 그녀는 더욱 민기 오빠가 떠올랐다. 택시에서 내린 그녀는 피시방 간판이 붙은 이층을 올려다보며 부지런히 걸어갔다. 이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려던 그녀는 주춤거렸다. 그녀의 순결을 강제로 빼앗았던 준철과 그의 친구 형권이 층계 위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마주보고 내려오는 그들을 본 순간 지나는 되돌아섰다. 그리고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뒤돌아보는 그녀의 시야에서 얼마 안 되는 간격을 두고 그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그녀가 죽을힘을 다해 달아나지만 남자들을 당하기는 어려웠다. 그녀는 그들의 시선을 피해 골목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런데 운이 없게 건축자재가 앞을 막고 있는 막다른 골목이었다. 그녀는 잔득 쌓인 건축자재더미를 기어 올라갔다.
“하하하~! 어디로 튀려고!”
“앗......! 나, 좀 놔둬.”
철준이 지나의 다리를 붙잡고 잡아당겼다. 자재더미를 오르던 그녀는 밑으로 끌려 미끄러져 내려갔다. 주저앉아 뒤를 돌아앉아 그들을 피하는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형권은 뒤에서 빙긋이 웃고 있고 철준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섰다.
“네가 이 바닥에서 어디로 도망가!”
“제발 그러지 마. 내가 저번에도 갖고 있는 돈도 다 줬잖아.”
“하하......! 너, 오늘 그 늙은 놈씨 만나러 가는 거지? 내가 심심하거든.”
“아냐! 친구 만나러 가는 거야.”
“오늘은 나하고 같이 가자!”
“어딜 가자는 거야? 안 돼.”
“안된다고!? 오늘은 너하고 하고 싶거든.”
“싫어. 이젠 그만 괴롭혀.”
“이게 까불고 있어. 늙은 놈씨한테 맛 들렸니?”
철준이 지나를 붙들어 일으켰다. 그리고 자재더미에 밀어 붙이고 우악스럽게 그녀의 점퍼 단추를 풀어헤치고 셔츠를 들어올렸다. 브래지어가 말려 올라가 젖가슴이 들어난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려고 안간힘을 썼다. 비웃음이 가득한 그가 그녀의 하반신에 착 달라붙은 기모펜츠를 끌어내리려했다.
“아 악~! 사람 살려요.”
“이 게 소리를 질러! 죽고 싶어?”
바동거리던 지나는 간신히 철준에게서 벗어났다. 그러나 그녀는 그들이 앞을 막고 있어서 골목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철제더미를 넘어가려고 기어 올라갔다. 하지만 철준의 손에 잡혀 다시 밑으로 떨어져 주저앉았다. 결국 그의 가슴 아래 깔린 그녀는 어떻게든지 벗어나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무척 쌔큰해졌는데, 그 놈씨가 잘 해주는 모양이네.”
“사, 살려 줘. 제발........”
“누가 널 죽인데! 어차피 내가 뚫어 놓은 길인데, 한번 한다고 달라지나.”
“시, 싫어, 제발 살려줘~!”
“가만히 안 있어~!”
철준의 손바닥이 지나의 뺨을 후려쳤다. 기모패츠가 무릎까지 끌어내려진 그녀의 하반신이 들어났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가 자신의 바지춤을 끌어내렸다. 그는 어느새 발기한 페니스를 강제로 그녀의 허벅지 사이에 밀어 넣으려고 했다. 순간 더듬거리던 그녀의 손이 무엇인가 움켜쥐었다. 이를 악물고 버둥거리던 그녀는 손에 움켜쥔 것을 있는 힘을 다해 휘둘렀다.
“허 걱~! 이, 이년이 미쳤나!?”
“죽여 버릴 거야.”
지나가 손에 움켜쥔 것은 난간이 부러진 철근이었다. 눈에 불을 켜고 일어선 그녀는 그때서야 자신의 행동을 의식했다. 그녀가 휘두른 철근에 맞은 철준이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비틀거렸다. 놀란 형권이 달려들어 그녀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찼다. 그녀는 힘없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분에 불을 켜고 쳐다보던 형권이 철준에게 다가섰다. 그 순간 부리나케 일어선 지나가 바닥에 떨어진 철근을 집어 들고 형권의 등을 후려쳤다.
“헛~! 이, 이년이.........”
“다, 죽여 버릴 거야.”
비틀거리는 그들이 험상궂은 표정으로 지나를 향해 다가왔다. 골목어귀에는 어느새 사람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사람들을 헤치고 순찰 중이던 정복경찰 두 명이 다가왔다. 다가오는 경찰을 보고 지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지나는 경찰이 자신과 철준, 그리고 형권에게 상황에 대해서 물어보지만 정신이 없어 알아들을 수 없었다.
민기는 서재에서 그동안 작성한 논문을 정리하고 있었다. 초안을 정리하는 교정단계만 남겨 놓은 상태였다. 논문작성에 몰두하느라고 아내와 대화하는 시간도 많지 않았다. 부산에 다녀오고 나서 자격지심에 더욱 거리감을 갖게 된 아내가 타인 같이만 느꼈다. 다만 예전보다 아들을 살갑게 대하는 아내를 고맙게 생각했다. 어느 경우에는 아내에 대한 아들의 스킨십이 가족 간의 애정표현이라고 지나쳐 버리기는 민망하기도 했다.
민기는 아들의 거침없는 행동이 호주의 생활방식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는 이따금 아들의 과한 표현을 제지하고도 싶었다. 하지만 자식도 없는 적막한 가정에서 아내의 오직 한사람의 대화상대인 아들을 나무랄 수가 없었다. 또한 그때마다 그는 자신과 지나 사이를 떠올리며 오히려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
지나를 마주하면 민기는 기품 있는 중년 남자도 아니고, 사회로부터 존중받는 교수도 아니었다. 단지 어린 여자의 당돌한 눈빛에 열정을 불태우는 젊은 남자로 변모했다. 엄격한 생활 방식으로 살아오면서 그는 스스로 자신을 울타리에 가두어 놓았었다. 그리고 이따금 그 울타리에 갇혀있는 지루한 현실에 권태를 느꼈다.
요즘 민기가 권태롭고 지루함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지나를 떠올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대 차이, 사회적 관념이든지 모든 조건이 그녀를 자신의 울타리에 가두어 놀 수는 없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첫 순정을 받친 여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그녀의 장래가 자신으로 인해서 상처받지나 않을는지 염려되었다.
민기는 부모로부터 유산이나 다를 바 없는 거액의 예금과 증권, 그리고 부동산을 받아 관리하고 있었다. 그는 고심 끝에 부산에서 올라오면서 억대의 현금을 입금시킨 통장을 지나에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통장을 은행 금고에 넣어두고 만약 만날 수 없는 경우가 생기면 시용하라고 그녀에게 당부했다.
원고를 정리하는 민기는 수시로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지나가 보내는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굳어진 표정에 미소를 떠올렸다. 비록 문자메시지이지만 그녀의 청순하고 풋풋한 모습이 함께 담겨 있었다. 또한 시간이 갈수록 그는 한결 여성으로 성숙해지는 그녀를 느낄 수 있었다.
[오빠~! 나, 큰일 났어.]
[오빠~~!]
[오빠! 빨리 전화 받아.]
[미치겠네........]
[오빠~! 어떡해. 나, 경찰서에 있어요.]
민기는 미간을 찌푸렸다. 지나로부터 여러 통의 문자메시지와 함께 전화 통화내역이 도착해 있었다. 아무래도 급한 상황인 것 같아서 그는 서재 입구로 가서 문을 열고 촉각을 곤두세웠다. 움직임도 없는 공간에 자신의 숨소리만 들렸다. 문을 잠그고 돌아선 그는 지나의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통화음이 들리자마자, 다급하게 지나의 울음이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나, 어떻게 해!? 왜 전화 안 받았어?”
“무슨 일이야. 경찰서에는 왜?”
“나, 쫓아다니던 준철이와 싸워서 경찰서에 왔단 말이야. 어떡해?”
“왜, 싸워?”
“계속 날 쫓아다니면서 괴롭혔단 말이야. 그런데 도망가다가 잡혔어, 그 새끼하고 친구들이 강제로 옷을 벗기면서 사정없이 때리잖아.”
“이런~! 다치진 않았어?”
“난, 다리가 아픈데, 저 새끼가 좀 다쳤어.”
“왜......!?”
“나도 모르게 손에 잡힌 철근을 휘둘렀어.”
“많이 다치진 않았어?”
“난, 괜찮은 거 같은데, 저 놈이 머리를 다쳐서 응급치료 받았어. 그런데 저 놈 엄마가 와서 형사에게 나를 구속시키래. 오빠! 나, 어떡하면 좋아.”
“음......!? 조금만 기다려. 내가 연락할게.”
통화를 끝낸 민기는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이라도 부산으로 내려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는 휴대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들을 검토했다. 그리고 통화를 시도했다. 그는 수제자로 부산 경찰서 수사과 계장으로 근무하는 박 승민 경감에게 도움을 요청하려는 것이었다. 통화 신호음이 길게 이어지고 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가 흘러 나왔다. 그는 방안을 배회하며 시간을 두고 다시 통화를 시도했다. 어수선한 분위기를 느끼는 잡음과 함께 박 경감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아! 교수님 죄송합니다. 직원들과 대화중이어서 전화를 받지 못했습니다. 요즘 건강하시지요?”
“그래요. 요즘 년 초라서 바쁘시겠구먼.”
“네. 항상 하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하신건지?”
“내가 급해서 부득이 전화를 했는데, 괜찮겠소?”
“하하하......! 말씀하시지요. 교수님에게 제가 도움이 된다면.”
“다른 일이 아니고, 조카뻘 되는 아이가 있는데,............”
다소 어줍은 표정으로 민기는 지나가 처해있는 상황을 말했다. 그는 제자들에게도 항상 존칭어를 잊지 않았다. 더욱이나 지나에 대해 도움을 청하려니 사생활을 박 경감에게 들어내 보이는 것만 같아서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박 경감은 그가 가족의 난처한 상황을 그대로 믿고 흔쾌히 대답했다.
“염려 마십시오. 조카님이 불량 학생들로 인해 곤경에 빠진 모양이군요. 바로 처리해 드릴게요. 그리고 부산에 내려오시면 연락하십시오. 제가 근사하게 식사 대접할 기회를 주십시오.”
“아~! 그럴게요. 이런 일로 연락해서 미안하오.”
“아닙니다. 제가 도리어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통화를 끝낸 민기는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그는 그렇지 않아도 구정이 지나서 부산에 내려갈 생각이었다. 지나가 준섭으로부터 집을 나가라는 말을 수시로 듣고 있다는 메시지를 여러 번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어느덧 창밖은 어두워지고 시장기를 느낀 그는 책상위에 늘어놓은 원고들을 정리하기 위해 집어 들었다.
아래층 주방에는 지훈이 싱크대 밑에 엎드려 있었다. 싱크대 하수구 물이 빠지지 않아서 은영이 도움을 청했던 것이었다. 그녀는 하수구 파이프를 수리하는 그의 주변을 오가면서 한창 식사준비를 하고 있었다. 수리를 마친 그가 일어나서 수돗물을 틀어 보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돌아선 지훈은 식탁을 정리하는 은영의 등 뒤로 다가섰다. 그리고 그녀의 체취를 들이마셨다. 언제나 그의 가슴이 설레는 체취는 그녀에게만 느낄 수 있는 향기였다. 그녀는 슬그머니 허리를 껴안는 그의 손길을 느끼면서 감정이 들어나지 않는 목소리를 흘렸다.
“아버지, 식사하시라고 하지.......”
“나. 손 씻어야 돼. 마미가 말해.”
지훈은 다른 사람과 다르게 아버지에게만큼은 자유스럽지 못했다. 그가 대화를 시도하면서도 눈치를 살피는 사람은 아버지였다. 그는 아버지 서재에 들어가는 것조차 어렵게 생각했다. 그러나 은영은 자신을 위해서라도 남편과 그의 관계가 부드러웠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그가 욕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그녀가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을 향했다. 그때 마침 민기가 층계를 내려오고 있었다.
“식사 준비 다 됐어요.”
“응, 그래요.”
민기가 식탁 앞에 앉고, 욕실에서 나온 민기도 마주 앉았다. 은영도 평상시 말이 많은 편이 아니지만 남편과 같이 있으면 더욱 대화가 적었다. 지훈도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침묵 속에 식사를 하면서 수저 드는 소리만 이따금 딸그락하고 들렸다. 침묵을 깨고 민기가 아내에게 물었다.
“당신! 구정에 친정에 다녀와요.”
“저, 혼자서는........”
민기는 아내가 친정 가기를 꺼려하는 이유를 뻔히 알고 있었다. 그들의 결혼을 그녀의 친정에서는 아직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어느 부모인들 딸을 상처한 남자의 재혼 상대로 쉽게 허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처갓집에서 자신을 신임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그도 처갓집 가기를 꺼려했다.
“다음 구정에는 내가 당신 부모님, 꼭 찾아뵙도록 할게요.”
“논문 작성은 끝내셨어요?”
“음. 이제 교정을 할 거요.”
“.......수고하셨네요.”
“그리고.........”
은영이 수저를 든 채 민기를 쳐다봤다. 그는 구정 지나서 지나를 만나기 위해 미리 아내에게 말하려는 것이었다. 막상 아내가 바라보는 시선과 마주하니 그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내의 시선을 피하면서 푸념하듯이 말했다.
“초빙교수로 다니기가 힘들어요. 그러나 거절할 수도 없고, 구정 지나서 부산에 내려갔다 와야 할 거 같아요.”
“.........네.”
은영은 남편의 말을 듣는 순간 매스꺼움을 느꼈다. 남편이 숨겨놓은 여자를 만나는 모습을 상상했기 때문이었다. 찌개 국물을 떠서 마시던 지훈이 그의 말을 듣고 사래가 들려 큭큭거렸다. 지훈은 아버지의 말을 듣는 순간 믿기 어렵던 사실이 현실이기에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은영이 주는 물을 받아 마신 지훈은 아버지를 힐끔 쳐다보면서 말했다.
“역시, 아버지 강의가 인기 있네.”
“.........!”
“.........!”
지훈의 말에는 의문과 칭송이 함께 곁들여 있었다. 그의 말을 받아서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식사를 마친 식구들은 모두 자신의 위치로 돌아갔다. 지훈은 자신의 방으로 민기는 다시 서재로. 혼자 남은 은영은 설거지를 하다가 싱크대를 붙잡고 멍하니 서있었다. 그녀는 남편의 사생활을 방관하려하지만 무언가 뒤틀려 엉키는 것만 같았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했던 구정이 지나고, 은영은 더욱 스산하고 쓸쓸했다. 남편은 미리 예고한데로 부산으로 출 장가서 집을 비우고, 지훈은 친구들과 어울리느라고 조금 귀가가 늦을지 모른다는 전화를 했다. 모두가 외출한 도시처럼 적막한 집안에는 어둠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따뜻함이 그리워져 주방으로 가서 커피포트에 물을 끓였다. 커피 잔을 들고 유령처럼 베란다 창가로 다가섰다. 하나 둘씩 도시를 밝히는 불빛이 늘어가고 있었다.
은영의 마음이 더욱 스산해지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요즘 며칠 동안 또 다른 혼란스러운 고민을 하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 아무래도 몸 상태가 이상했다. 생리가 없었고 시장기를 느끼면서도 식욕도 없었다. 조그마한 소리에도 놀라고 예민해졌다. 그래서 병원을 찾았더니 임신이라면서 축하한다고 했다.
은영은 느닷없이 축하를 한다는 말을 하는 의사를 한동안 넋을 잃고 쳐다봤다. 병원을 나온 그녀는 자꾸만 발걸음이 헛디뎌지고, 허공을 걸어가는 것만 같았다. 남편의 아기라면 좋아하고 축하 받을 일이지만, 남편과 부부관계를 한동안 하지 않았던 그녀는 어찌해야할지 모르고 머릿속이 하얗기 만했다.
지훈의 아기가 분명하지만 은영은 그에게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자신의 아기를 갖고 싶다는 그녀의 욕망은 분명했다. 어쩌면 몸속에 잉태된 생명을 남편의 아기로 키우면서 무덤까지 그녀 혼자 간직해야할 비밀이었다. 그녀는 더욱 지훈의 여자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아니 이제는 남편보다는 정열로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이 그리워지는 시간이었다.
어둠이 내려앉는 밖을 내다보고 있던 은영의 시선이 한곳을 주시했다. 서치라이트를 밝힌 승용차 한 대가 도로 입구에 들어서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달려온 승용차가 집 앞에 멈추어 섰다. 그늘졌던 그녀의 표정이 밝아졌다. 지훈의 잿빛 승용차였다. 생각보다 빨리 귀가하는 그가 왠지 반가웠다.
은영은 스스로 겸연쩍은 생각이 들어 돌아섰다. 은연중에 지훈의 귀가를 기다렸던 그녀는 소파로 가서 앉아 귀를 기울였다. 철문 여닫는 소리, 그리고 정원을 지나쳐 오는 그의 발자국 소리, 그리고 현관의 벨 소리가 울렸다. 소파에서 일어나는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들어내지 않기 위해 내심 침착해야한다고 생각하며 현관으로 다가섰다.
“문 열고 들어오지.......!”
“잠겨 있는 줄 알고.......!”
“일찍 들어왔네.”
“식사만 하고 들어왔어.”
지훈은 혼자 있을 은영이 걱정되었고 그녀는 따뜻함이 그리웠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마음만큼 그들은 서로의 뜨거운 감정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소파로 가서 앉아 TV 화면을 주시했다.
“마미는 식사했어?”
“점심을 늦게 먹어서........”
흘리는 말처럼 대답하는 은영은 리모컨을 집어 들고 TV 볼륨을 높였다. 그러나 그녀는 옆에 와서 앉는 지훈을 의식하고 있었다. 지훈은 곁눈으로 그녀를 힐끔힐끔 살폈다. 플레어스커트 위에 블라우스를 걸친 그녀의 모습이 오늘따라 더욱 여성스러워 보였다. 그는 양팔을 뻗어 올리며 크게 하품을 했다.
“마미! 커피 마시고 싶다.”
“잘 시간인데, 커피를.......”
지훈을 흘깃 쳐다본 은영은 커피를 타오려고 일어섰다. 순간, 지훈이 덥석 그녀의 허리를 잡고 당겼다. 걸음을 옮기려던 그녀는 뒤로 주저앉았다. 그런데 그의 무릎위에 걸터앉게 되었고, 그가 그녀의 상체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등을 안고 있는 그의 가슴에서 따뜻한 체온이 전달됨을 느꼈다. 그녀는 혼잣말처럼 작은 목소리를 물었다.
“커피 마신다면서?”
“나중에.........”
대답과 동시에 지훈은 일어서려는 은영을 옆으로 눕히고 껴안았다. 그리고 상체를 굽혀 그녀를 빤히 내려다봤다. 당황하는 그녀의 표정! 그녀의 마음속에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에게 벗어나야한다는 이성적인 판단과 여자로서의 본능적인 감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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