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지난일을 기억하면 후회도 있고 기쁨도 있습니다.
하지만 옛날보다 더 잘해 드리고 있고 지금은 어머니를 이해합니다.
세식구 살면서 같이 있던 시간보다 서로 떨어져 살아야했던 상황이 더 많았습니다.
엄마이기 이전에 여자로 이해를 구합니다.
아들이기 이전에 남자로 용서를 구합니다.
30년이 넘었던 일을 기억해 내려니 가물가물합니다.
애써 기억하는 일들을 글로 엮습니다.
읽으시다가 꼴리시면 딸딸이 한번 잡으시면 됩니다.
욕설보다는 위로가 났겠지만 이미 지난 일이고 지금은 제가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남들보다 더 많은 신경 쓰고있고 용돈도 많이 드리고 있습니다.
단지 이제는 더 건강하시고 오래 사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야설처럼 리얼하게 표현합니다.
세상 무엇과도 비유 할 수 없는 그런 어머니와 사랑 아니 관계라고 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초등학교때부터 결혼전까지 풋풋한 호기심으로 시작해 청년이 되어 결혼전까지의 모든것을 리얼하게 그리고 짧막하게 글을 올리려 합니다.
지금 이시대의 아픔을 같이 하는 동반자들에게서는 공감하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또 지금도 엄마와 아들 딸과 아버지 등등 관계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겨 냈노라고 당당히 말하고 싶습니다.
사회적으로 냉대 받을 수 밖에 없고 천하의 몹쓸놈이라고 말 할 수 도 있겠지만 저와의 어머니 관계만큼은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좋은일과 가족간에 분위기를 잘 넘기면서 지금까지 모자 관계를 돈돈히 하고 있습니다.
떳떳하지는 않지만 내게 있었던 사실을 가슴속엔 묻기에는 어머니에게 죄송하고 제 자신에게 너무 답답하기에 소라를 통해 가슴에 묻어 두웠던 지난 일들을 고해합니다.
나무라지 마시고 천륜을 어긴 더런놈이라 하지 마시고 그냥 덤덤하게 받아 주시고 꼴리시면 딸딸이 한번 잡으시면 됩니다.
소라이기에 가능한 고백이니 혐오스런 댓글 거절합니다.
단지 분명한 것은 후회스러움이 있고 지금은 어머니에게 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머니는 군산분이고 아버지는 대전분입니다.
어머니는 위로 이모 두분 남동생(외삼촌)이 한분 있었고 아버지는 집안의 장남으로 2남 3녀의 다섯 형제가 있습니다.
내가 태어나서 줄곧 대전에(대전고 부근에 살았슴) 살다가 국민학교 1학년즈음 아버지가 서울로 발령이 나서 서울로 이사를 왔는데 그곳이 신당동이었습니다.
지금의 신당동도 그렇겠지만 당시의 신당동은 그야말로 달동네중 담ㄴ연 돋보이는 달동네였습니다.
우리집은 약간 개조한 한옥집으로 목욕탕은 꿈도 못꾸고 대문 바로옆 재래식화장실(물론 대전에서도 화장실은 푸세식이었슴)과 넓은 뜰 그리고 안방과 건너방 그리고 그 사이 대청마루가 있고 안방은 부엌과 붙어 있는 한옥이었는데 중요한 것은 부억뒤로는 방 한칸이 있었고 대청마루를 마주하는 방도 두칸이 있는 디귿자형 한옥이었습니다.
마주보는 방 두칸에는 전세를 놓았는데 나보다 두살위의 형이 하나 있었고 그 가족도 우리 가족과 같은 달랑 세식구가 살았습니다.
지금도 그렇고 예전에도 그렇겠지만 전세를 들어 사는 사람들은 집주인의 눈치를 많이 보며 사는데 우리집은 한 가족 같았습니다.
당시에도 전세를 든 아줌마는 엄마와의 연배도 비슷하고 말도 잘 통하며(엄마 비위을 맞춰주는 것임) 지금까지도 서로 왕래를 하고 있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아주머니의 남편은 건설현장을 누비며 지방을 두루두루 돌아다니는 건설업계에 몸 담은 건설사 직원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건설회사까지는 아니고 아마도 조그만 건축사무소 인 것 같았습니다.
아저씨는 집을 짓고 팔고 하는 건축일을 하다가 사기를 당하고는 우리집으로 들어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창 집을 짓을때는 꽤나 많은 돈을 만지면서 살았는데 한 순간에 쫄딱 망하고나니 다시 일어서시가 쉽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아줌마는 엄마만 보면 옛날 이야기를 많이 하곤 하셨지요.
아저씨는 집을 지어서 팔때는 몫돈을 만졌고 아줌마는 행당동 부근에서 하숙을 하면서 돈을 많이 모았는데 사기를 맞고는 한방에 집안 자산을 다 날렸다고 합니다.
아저씨는 잘 나갈때 두집살림까지 했다고 하니 전세로 사는 것이 챙피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지금은 나보다 두살 많았던 형이 대기업에 들어가서 승승장구를 하더니 지금은 성북동 대저택에서 잘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어머니를 통해 들었습니다.
이렇게 두가구 여섯식구사 가족처럼 재미나게 살았던 기억이 있지요.
우리집의 구조는 대중 이렇듯 옛날식 집이었고 안방에는 다락으로 올라갈 수 있는 오묘한 구조였고 다락방 바닥의 구멍으로는 부엌이 보이고 나같은 초딩 체구는 다락방 구석진 곳을 자유스럽게 들어가 숨을 수 있는 공간이 많이 있었는데 그 곳은 바로 부엌 뒷켠의 작은방 천정까지 다다르면 작은 공간이 있어 나의 쉼터가 하나 있었습니다.
형제가 없는 관계로 혼자 있을때에는 이 다락방이 나의 놀이터였고 나의 비밀의 공간이기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집안 구조는 대충 이렇고 다락방에는 아버지의 소중한 물건이 가득 차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외국 사람들에게서 선물 받은 양주부터 필요할 때 쓰시려 했던 잡동산이가 모두 다락방에 있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처음 어머니의 빤쯔를 본 것도 이 다락방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건너방을 쓰고 넓은 안방은 내가 썼는데 내방에는 큰 장롱과 어머니 피아노, 내 책상 등등 많은 것이 있었지만 내가 뛰어 놀기에는 넓고 좋았던 기억이 많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능력이 있으셨던지 대전의 00고를 졸업하고 서울의 좋은대학을 나오셨습니다.
영어를 잘 하시고 전화 통화 할 때는 영어로 회화도 잘 하시곤 했지요.
어머님 말씀으로는 외국사람(바이어)들과 자주 회동을 한다고 들었는데 당시에는 그려려니 다른 친구들 아버지보다는 좀 더 나은 직업을 가지신 걸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대기업 해외 영업부로 근무를 하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직책이 대리였으니 얼마나 바쁘게 사셨는지 이해가 충분히 갑니다.
어머니는 세째딸로 제 어린 마음에도 젊은날에는 굉장히 예뻤습니다.
공부도 잘 해 서울에서 대학을 나오고 사촌 오빠의 소개로 아버지를 만났다고 합니다.
아마도 내 생각에는 엄마의 사촌이 같은회사 그룹내에 근무를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관계로 아버지를 만난 것 같습니다.
엄마는 아버지한테는 지나칠 정도로 애교가 많습니다.
술도 많이 드시지만 항상 늦게 오는 아버지를 보고는 "수고했어요"라는 말을 매일 듣고 자랐으니 이것은 엄마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나에게 단호할 땐 정말 얄짤없었습니다.
용돈, 얄짤 없었습니다.
큰 집 사야한다고 살림을 아꼈던 구두쇠 엄마였고, 아버지에게 애교많은 사랑스런 그런 엄마였습니다.
제게는 천사였고, 여우같이 쪼아 대는 엄마였습니다.
나는 공부를 별 문제없이 원만히 잘 했고, 서울생활도 별 무리없이 잘 지냈습니다.
국민학교에 같이 다니는 동네 여러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고 방과 후에는 윗동네 친구들과 축구 시합을 하곤 했습니다.
물론 아랫동네 옆동네 때론 두어 정거장 지나서 시장통 아이들과도 축구 시합을 한 기억도 너무 많습니다.
그만큼 당시에는 놀이 문화가 축구밖에는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요즘은 노래방. 비디오방, 극장, 패스트푸드 등등 놀이 문화공간도 많았지만 당시에는 국민학교에서 불우한 가정의 아이들에게 옥수수빵을 배급한 기억도 있었지요.
물론 나는 해당 사항이 없어 맨날 친구들에게 조금 떼어 달라고 조른 기억이 생생합니다.
어느날인가 학교에서 가정통신문을 주는데 우리 학교에 수영장을 만든다고 합니다.
나는 너무 기뻤습니다.
당시에는 수영을 하려면 광나루나 한강 둔치에서 수영을 하는데 결국 수영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경우가 종종 있어서 물가에는 여우같은 엄마 때문에 물놀이는 못 갔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물에 빠져 죽을까봐 허락을 안 해 줬습니다.
그러던 차에 국민학교 운동장 구석에 수영장을 만든다고 하니 나에게는 또 다른 기쁨이 생긴거지요.
그러고 국민학교 5학년 초에 수영장이 완공됩니다.
드디어 여름의 시작입니다.
엄마를 쫄라 대기 시작하는데 절대 안된다고 합니다.
그날 늦게 오시는 아버지께 말씀 드려서 수영을 꼭 배우겠노라 다짐을 하는데 그날 12시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들어오신 아버지는 저녁상을 늦게 받으시며 허락을 해 주시는데 엄마랑 같이 수영을 해야 허락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수영을 누구나가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둘이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방과후에 어린이반이 있고 그 후에는 어머니반을 운영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유수영 이었습니다.
엄마는 나를 어린이반에 그리고 엄마는 어머니반에 등록을 하였습니다.
이틀후 비키니와 원피스 수영복을 사 가지고 온 엄마는 그걸 아빠 앞에서 입어 봅니다.
물론 하나는 반납한다는 조건으로 가지고 온 모양입니다.
요즘처럼 좋은 수영복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그래도 이름있는 수영복을 사 가지고 와서는 뭘 입을까 아버지 앞에서 갖은 포즈를 취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안방과 건너방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아 사람의 목소리 정도는 귀만 귀울이면 소근거리지 않는 한 대충 들을 수 있는 불량한 한옥집이었지요.
궁금도 하고 해서 건너방 문을 열어 보니 아니나 다를까 붉은색 원피스 수영복을 엄마가 입고 있었는데 그때 엄마의 몸을 처음 보았습니다.
순간 나는 입과 눈이 얼어 붙었습니다.
텔레비젼에서나 보는 그런 몸매는 아니었지만 엄마였기에 깜짝 놀랄수 밖에 없었습니다.
몸에 딱 달라 붙은 빨간색 수영복이 엄마의 몸매를 훤히 볼 수 있었고 약간 통통하니 보기에 넘 좋았습니다.
7월초 수영장 개장과 함께 수영반이 된 나는 수영을 즐겼습니다.
물을 그때부터 좋아한 것 입니다.
수영인원도 그다지 많치 않아서 수영강습이 끝나도 친구들과 물장난하고 잠수로 멀리가기 등등 넘 재미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반 수영강습을 시작하면 왠지 기분이 좋았습니다.
엄마들이 모두 수영복을 입고 준비 운동 할 때 어린 마음에도 좆에 흥분이 도달하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유독 엄마를 보면 더 그랬습니다.
엄마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서너명의 엄마들 몸매보면 나도 모르게 좆이 스르르 커져서 괜스레 너스레를 떨고 잠수로 흥분을 가라 앉쳤습니다.
젊은 수영선생이 늘 마음에 걸리지만 엄마와 몇몇 예쁜 아줌마한테만큼은 눈에 띄이게 차별 렛슨을 하는 것이 어린 내 눈에도 확연하게 보였습니다.
남자란 나이가 어리던 지금처럼 나이를 많이 먹어도 여체에 관한 호기심은 절대 변하질 않는가 봅니다.
당시에는 수영이 고급 운동이라 부잣집 아니면 수영을 못했지요.
문제는 단 하나.
수영선생의 눈초리가 왠지 엄마를 향해 있는 것이 늘 걱정이었습니다.
제일 처음 팔 동작. 그리고 킥.
일일이 손을 잡아 주는데 너무 부럽습니다.
그런데 가끔 엄마렛슨을 할 때 한손은 가슴부위 또 한손은 아랫배에 대고 엄마의 몸을 받쳐 주는데 그 모습을 보는 나도 기분이 묘하기도 하고 또 저 놈의 수영선생 새끼가 너무 얄밉기도 합니다.
어린이반 수영시간에 나의 엄마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 때부터 나를 아껴주는 척도 신경을 많이 써 줍니다.
그리고 킥하며 줄줄이 뒤를 따르는데 몽치 엄마들 너무 웃깁니다.
어린 마음에도 괜시리 가까이 가서 가슴도 쳐다보고 강습중에 쉰다는 핑계로 레인턱에 앉아서 어머니들 수영하는 것만 봐도 어린마음이지만 어설픈 성욕을 느낍니다.
아마도 숫놈의 본능일 겁니다.
강습 끝나고 어머니들이 일제히 물 밖으로 나오면 그림 좋습니다.
아직 젊은 삼십대 초반이라 지금 생각하면 더 그 시절이 그리워 지기도 합니다.
어머니반 강습이 끝나면 나는 엄마와 같이 집으로 걸어서 옵니다.
"엄마 나 배고파"
호떡 하나 사달고 조르고 호떡 하나 사주면 그 호떡을 먹으면서 집으로 오곤 했습니다.
얼마나 맛이 있었던지...... 요즘은 그런 호떡맛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수영도 배우고, 여체를 음미하는 즐거움도 있는 자유수영시간.
제게는 여름방학 내내이 즐거움이 한가득 있었습니다.
일주일 세번 수영하는 날.
아침부터 나는 부산을 떨고 준비합니다.
엄마와 함께하는 그런 수영시간이어서 좋습니다.
약간에 간식을 준비한 뒤 수영하러 갑니다.
얼마 지난뒤 여름 햇빛에 그을린 나는 구리빛 피부가 되어 갑니다.
까무잡잡 건강하다고 엄마는 말합니다.
휴식시간에 집에서 준비한 간식을 먹으려고 하는데 수영강습을 하면서 친해진 엄마들끼리 잠시 쉬는 시간에 나와서 간식을 같이 먹으려 내 앞으로 옵니다.
그 순간 저는 좆이 또 서려고 합니다.
그것도 갑자기......
엄마가 물에서 나와 제가 있는 곳까지 걸어오는데 가까이 오니 엄마 가랑이 사이 시커먼 보지털이 비치는 것 입니다.
옛날 수영복은 물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거의 비춰졌던 것 같습니다.
요즘 수영복과는 재질의 차이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물론 스판과 나이론의 차이겠지요.
물에 젖어서 비친 것이었는데 수영장 안에서는 몰랐습니다.
엄마가 물밖으로 나오니 바로 역삼각형의 보지털 두덩이가 선명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속으로는 "와~ 엄마 보지털이 참 많타"하면서 고개를 돌리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엄마도 직감 했을것 같습니다.
그래도 여자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참외 수박등등 여러가지 과일을 풀어 놓고는 있는 수다 없는 수다를 떨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도 울 엄마는 "선생님 과일 좀 드셔요~~ 이리 오세요"하며 자리를 정돈합니다.
그때 누군가가 말합니다.
"수영선생님이 민재엄마 맘에 있나봐~"
그러고는 모두 깔깔 웃습니다.
더 이상 제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것 같아서 슬그머니 친구들이 있는 쪽으로 갔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모든 아줌마가 젊은 수영선생님을 못 따 먹어서 안절부절 시기하는 소리처럼 들리는 것을 당시 어린 마음은 거기까지 이해를 못하고 그져 과일을 선생님에게 드시라고 주는 엄마와 아줌마들의 모습뿐이었습니다.
나는 친구들이 모여 있는 자리를 벗어나 엄마가 물에 들어갈 때 정면으로 보려고 반대편으로 갔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잠시후 수영강사가 "모이세요" 하자 모두 일어나서 풀에 입수하려고 일어섭니다.
풀 가까이 오는 아줌마 몇몇은 아직도 보지 두덩이가 시커먼것이 나의 좆을 가만 두질 않았습니다.
엄마의 빨간색 수영복에 남아 있던 물이 다 빠졌던지 그냥 보지 두덩이만 도톰합니다.
노란색 원피스 아줌마 그냥 시커멓게 표시를 하고 내 눈앞으로 다가와 풍덩합니다.
어린 마음에도 조금만 날씬 했으면 좋겠다고 위안을 합니다.
노란색 아줌마는 너무 뚱뚱했던 것입니다.
아쉬웠지만 내일 또 쉬는 시간전에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어야겠습니다.
그래야 빨간색 수영복 위에 내비치는 엄마의 보지털을 음미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이렇게 매일매일의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여름방학이 끝나면서 즐거움은 마무리가 됩니다.
개학과 더불어 다시 평범하게 초딩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방과후 축구를 즐기면서 친구들과 장난도 하고 목욕탕 창문으로 여탕을 훔쳐 보기도 하고 가끔은 주인 아저씨한테 혼나기도 하고 그런저런 여느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지극한 일상생활을 합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의 초딩 6학년이 되니 왠지 어른스워짐은 물론 제 자신도 제가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낌니다.
처음 대전에서 초등 입학할 때는 학교가 뭔지도 모르면서 서울로 전학을 와서는 갑자기 6학년이 되어 버렸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초딩학교에서 최고 높은 고학년이라 형들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좀 의젓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이때 처음으로 발랑까진 친구가 여자이야기를 해 줍니다.
아이는 남자 좆이 보지에 들어가서 오줌 같은것을 싸면 임신이 된다는 것을 그때 이 친구를 통해 알게 되었고 여자는 한달에 한번 보지에서 피가 나온다고 하던 말을 그때 들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 성교육이란 것이 없었고 주워서 들은 이야기가 전부이니 더욱 더 호기심이 발동합니다.
이때부터 여자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육상부 여자아이들을 보면 유난히 허벅지가 눈에 띄이고 가슴이 부풀어 올라 장난으로 여자아이들 가슴을 만지고 도망다니는 장난을 많이 했습니다.
여체의 궁금증은 그냥 엄마라는 편안한 상대를 바라보면서 선망하는 상대이었고,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사춘기의 첫 출발점이었던 것이 바로 이 시기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여름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립니다.
엄마와 많은 아줌마들의 보지 두덩이가 보고 싶었습니다.
드디어 7월이 오고 수영강습 시작입니다.
나는 수영복을 가방에 넣고 학교로 달려갑니다.
분명 엄마도 방과후에 수영강습을 받으러 학교로 올 것 입니다.
헉~ 그런데 수영선생이 정말 잘 생기고 몸도 좋고 완전이 꽃미남 수영강사가 왔습니다.
울 엄마 괜시리 힐끗 수영선생을 쳐다 봅니다.
물론 다른 아줌마들도 수영강사가 젊으니깐 서로의 눈빛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역시나 어린이반 끝나고 엄마들이 하나 둘씩 수영복을 입고 탈의실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처음보는 아줌마도 있고 작년에 강습을 받았던 아줌마들도 많이 있습니다.
작년에 수영강습 소문을 들어서인지 엄마들이 많이 신청을 했나 봅니다.
아이들은 한쪽 구석에서(두개 라인) 물장난하고 나는 친구들과 잠수해서 아줌마들 가랭이 살펴보고 엄마보다는 다른 아줌마 가랭이만 찾아가 구경합니다.
일주일에 세번 수영시간이 어린 마음에는 너무 좋았습니다.
수영강습이 없던 어느날.
나는 친구들과 집에서 좀 멀리 떨어진(당시에는 돈이 없어서 걸어 다녔슴. 버스로 약 세 정거장이 넘었던 기억이 있슴) 중앙시장 근처 공터에서 친구들과 축구를 하고, 헤어지기전에 한 친구가 팥으로 만든 께끼(당시에 얼음과자)를 먹고 가자며 다섯개를 사 가지고 왔습니다.
10원에 다섯개.
그러니깐 1개에 2원이었지요.
불량식품인 줄 알면서도 그 아이스께끼가 왜이리 맛나던지 지금도 먹고 싶습니다.
다섯명이 골목 한쪽 계단에 앉아서 정말 맛나게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골목안쪽에 여관(신당동엔 시장통 골목 여기 저기 여관이 많이 있었슴)에서 낮이 많이 익은 아줌마가 나옴니다.
헉~ 우리 수영강습 시간에 수영을 배우는 아줌마?
여관을 나와서는 바로 대로를 향해 총총히 걸어 갑니다.
그러고는 바로 수영강사가 나오더니 반대쪽 골목으로 걸어갑니다.
순간 어린마음에도 이건 분명이 불륜이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나는 얼른 께끼를 먹어 치우고는 살살 쫓아가다가 그 옆을 뛰어서 지나갑니다.
물론 얼굴은 안 보고 그냥 급한 사람마냥 앞을 향해 뛰어가다가 길가에 문방구로 들어 갔습니다.
안쪽으로 들어가 책을 보는척 하며 바로 창가에 서서 아줌마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잠시후 예쁜 아줌마가 지나갑니다.
그제서야 얼굴을 똑똑히 보니 바로 6학년 8반 부반장 엄마.
최 수호의 엄마다!!!
내 친한 친구의 어머니입니다.
우리 엄마하고도 매우 친한사이입니다.
그냥 어린 마음에도 남의 가족의 분란을 일으킬 수 없어 그냥 나만이 알고 있고 그냥 넘기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호기심이 발동하는지?
별의별 상상을 다 합니다.
당시에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라 해서 외국으로 파견근무를 나가는 남자들이 많았고, 우리 학교에서도 그런 집안의 친구들이 더러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는 베트남 전쟁과 해외건설붐으로 많은 남자들이 집을 1년 혹은 2년 집을 비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엄마에게 얼핏 들은 이야기로는 그 집은 남편이 돈도 잘 벌고 외국으로도 가끔 출장을 다녀 온다는 이야기를 언듯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 아버지도 외국을 나갔다 오시면 반드시 내 선물로 쵸코렛과 과자를 많이 사 가지고 오시곤 합니다.
그날 저녁 나는 내 친구의 엄마를 생각하면서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그때는 제비족이 신문 사회면을 종종 장식하고 불륜을 신문지면에 가감없이 게재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혹시나 신문에 나면 어떡하지?"하며 혼자 걱정을 해 주기도 했던 어린이 일 뿐이었는데 갑자기 그 불륜이란 것이 묘한 성적 호기심과 지나친 관심으로 발전을 하게 됩니다.
어느 누구 엄마가 또 타락을 하는가?
그 감쪽같은 사실을 나만이 알고 있다는 현실이 큰 재산처럼 느껴졌기 때문인지도 모름니다.
바로 이틀후.......
나는 또 중앙시장 아이들과 축구 시합하고는 친구 한명과 골목길 계단에 앉아 여관문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몇학년인 엄마인지 모르지만 엇그제 6학년 8반 엄마보다 더 젊은 여자랑 팔짱을 하며 나오는 것입니다.
애인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애인이 아니라 분명 수영강습 어머니반의 예쁜 아줌마였습니다.
나는 "바람둥이~~개새끼" 속으로 욕을 하면서 이상한 쾌감을 느낌니다.
내일은 수영하면서 누구엄마인지 찾아야겠다고 마음 먹습니다.
어린이반 수영강습 끝나고 자유수영 시간에 나는 레인 턱에 앉아 어머니반 수영강습을 구경합니다.
앗~ 어제 그엄마가 보입니다.
6학년 8반 엄마랑 앞뒤로 렛슨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수영선생을 바라보는 눈이 앞에 아줌마와 뒤에 아줌마가 경쟁을 하며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 이후로는 축구와는 상관없이 수영강습이 없는 날에는 일주일에 두어 서너번(일요일 포함)을 그 여관이 바라다 보이는 계단의 앉아 여관의 동정을 살피는 것이 즐거움이 되어 버렸습니다.
모든것이 쉽게 목격 될 것만 같았던 나의 상상은 금방 깨지고 말았습니다.
한주 동안 수영강사를 본적이 없고 기다림이란 것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습니다.
한주일 이렇게 보내고 나니 보초를 서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그냥 축구와 수영만 하기로 마음 먹고 관심에서 멀어집니다.
8월은 찌든 듯한 더위와 함께 축구 시합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오래 간만에 중앙시장 근처에 사는 아이들과 축구를 했는데 당시에는 시장통 아이들이 공부는 못해도 축구는 정말 잘했습니다.
우리가 원정을 가면 항상 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축구가 끝나고 나는 왠지 그 여관이 보이는 곳을 가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아마도 또 다른 누군가를 보고 싶었고 그 불륜의 여자가 누구인지 또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집에는 6시 까지 들어가면 아무탈 없이 씻고 저녁먹고 숙제하고 그리고 예습하고 취침하면 끝나는 하루일과이니 시간이 좀 남는 관계로 나는 친구들에게 먼저 집에 간다고 하고 다른반 친구 한명과 함께 자리를 일어났습니다.
혼자가면 심심하고 또 골목계단에 혼자 앉아 있기도 그렇고 하여 아이스께끼 하나 사 줄께 같이 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관이 보이는 골목계단에 앉아 2원짜리 께끼는 먹으면서 옆눈으로 여관문이 열리기 만을 기다립니다.
잠시후~~
역시나 수영선생이 여관문을 열고 흐믓한 표정으로 여유있게 걸어 나옵니다.
약간의 장발같은 머리를 휘날리며 고개를 까딱하고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들어 올리고 즐거운 표정으로 걸어갑니다.
그리고 1분도 안되어 또 다시 여관문이 열립니다.
저 옷차림.......
어디서 많이 보아 왔던 옷차림이 눈에 들어옵니다.
너무나 익숙한 예쁜 원피스 치마가 엄마옷과 똑 같습니다.
헉~~ 엄마다~~
저번에 보았던 6학년 8반 부반장의 엄마가 아닌 바로 나의 엄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도 연애를 할 때는 항상 들리던 모텔을 가는 습관처럼 그놈의 바람둥이 수영강사도 이 여관이 단골이었던 같습니다.
나는 순간 살쩜이 떨어져 나가는 느낌을 받고는 그냥 계단 뒷편으로 숨었습니다.
친구는 영문도 모르고 따라 올라 옵니다.
그 순간 나는 재치를 발휘해 차분하게 엄마가 어디로 가는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엄마는 큰길이 있는 도로로 나가는 방향이 아닌 골목으로 저만큼 돌아 나가는 겁니다.
엄마도 남의 눈이 조심스러웠던지 큰 길가 버스 정류장이 있는 큰도로로 안 나가고 골목을 돌아 가는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친구에게 말합니다.
"친구야 다 먹었으니 이제 헤어지자..가자"
그리고는 훌쩍 일어서 엄마의 뒤를 따라갑니다.
다음 골목 나오는 맞은편에서 엄마가 어디로 가는지 살펴 봅니다.
길 옆 중앙시장으로 들어갑니다.
아마도 장을 보고 집으로 들어 올 모양입니다.
나는 얼른 뛰어서 집으로 갑니다.
흥분을 가라 앉히려 했지만 왠지 엄마가 불결해 보였습니다.
엄마는 과연 제 정신인가?
콩닥 콩닥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이런 울 엄마도 당했구나~"
혹시나 수영강사에게 약점이라도 잡혀서 몸을 허락하고 있는지 걱정도 됩니다.
엄마가 수영강사한테 무슨 약점이라고 잡혀서 억지로 당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걱정도 잠시 나는 엄마의 편이 되어 주기로 합니다.
지난일을 기억하면 후회도 있고 기쁨도 있습니다.
하지만 옛날보다 더 잘해 드리고 있고 지금은 어머니를 이해합니다.
세식구 살면서 같이 있던 시간보다 서로 떨어져 살아야했던 상황이 더 많았습니다.
엄마이기 이전에 여자로 이해를 구합니다.
아들이기 이전에 남자로 용서를 구합니다.
30년이 넘었던 일을 기억해 내려니 가물가물합니다.
애써 기억하는 일들을 글로 엮습니다.
읽으시다가 꼴리시면 딸딸이 한번 잡으시면 됩니다.
욕설보다는 위로가 났겠지만 이미 지난 일이고 지금은 제가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남들보다 더 많은 신경 쓰고있고 용돈도 많이 드리고 있습니다.
단지 이제는 더 건강하시고 오래 사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야설처럼 리얼하게 표현합니다.
세상 무엇과도 비유 할 수 없는 그런 어머니와 사랑 아니 관계라고 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초등학교때부터 결혼전까지 풋풋한 호기심으로 시작해 청년이 되어 결혼전까지의 모든것을 리얼하게 그리고 짧막하게 글을 올리려 합니다.
지금 이시대의 아픔을 같이 하는 동반자들에게서는 공감하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또 지금도 엄마와 아들 딸과 아버지 등등 관계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겨 냈노라고 당당히 말하고 싶습니다.
사회적으로 냉대 받을 수 밖에 없고 천하의 몹쓸놈이라고 말 할 수 도 있겠지만 저와의 어머니 관계만큼은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좋은일과 가족간에 분위기를 잘 넘기면서 지금까지 모자 관계를 돈돈히 하고 있습니다.
떳떳하지는 않지만 내게 있었던 사실을 가슴속엔 묻기에는 어머니에게 죄송하고 제 자신에게 너무 답답하기에 소라를 통해 가슴에 묻어 두웠던 지난 일들을 고해합니다.
나무라지 마시고 천륜을 어긴 더런놈이라 하지 마시고 그냥 덤덤하게 받아 주시고 꼴리시면 딸딸이 한번 잡으시면 됩니다.
소라이기에 가능한 고백이니 혐오스런 댓글 거절합니다.
단지 분명한 것은 후회스러움이 있고 지금은 어머니에게 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머니는 군산분이고 아버지는 대전분입니다.
어머니는 위로 이모 두분 남동생(외삼촌)이 한분 있었고 아버지는 집안의 장남으로 2남 3녀의 다섯 형제가 있습니다.
내가 태어나서 줄곧 대전에(대전고 부근에 살았슴) 살다가 국민학교 1학년즈음 아버지가 서울로 발령이 나서 서울로 이사를 왔는데 그곳이 신당동이었습니다.
지금의 신당동도 그렇겠지만 당시의 신당동은 그야말로 달동네중 담ㄴ연 돋보이는 달동네였습니다.
우리집은 약간 개조한 한옥집으로 목욕탕은 꿈도 못꾸고 대문 바로옆 재래식화장실(물론 대전에서도 화장실은 푸세식이었슴)과 넓은 뜰 그리고 안방과 건너방 그리고 그 사이 대청마루가 있고 안방은 부엌과 붙어 있는 한옥이었는데 중요한 것은 부억뒤로는 방 한칸이 있었고 대청마루를 마주하는 방도 두칸이 있는 디귿자형 한옥이었습니다.
마주보는 방 두칸에는 전세를 놓았는데 나보다 두살위의 형이 하나 있었고 그 가족도 우리 가족과 같은 달랑 세식구가 살았습니다.
지금도 그렇고 예전에도 그렇겠지만 전세를 들어 사는 사람들은 집주인의 눈치를 많이 보며 사는데 우리집은 한 가족 같았습니다.
당시에도 전세를 든 아줌마는 엄마와의 연배도 비슷하고 말도 잘 통하며(엄마 비위을 맞춰주는 것임) 지금까지도 서로 왕래를 하고 있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아주머니의 남편은 건설현장을 누비며 지방을 두루두루 돌아다니는 건설업계에 몸 담은 건설사 직원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건설회사까지는 아니고 아마도 조그만 건축사무소 인 것 같았습니다.
아저씨는 집을 짓고 팔고 하는 건축일을 하다가 사기를 당하고는 우리집으로 들어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한창 집을 짓을때는 꽤나 많은 돈을 만지면서 살았는데 한 순간에 쫄딱 망하고나니 다시 일어서시가 쉽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아줌마는 엄마만 보면 옛날 이야기를 많이 하곤 하셨지요.
아저씨는 집을 지어서 팔때는 몫돈을 만졌고 아줌마는 행당동 부근에서 하숙을 하면서 돈을 많이 모았는데 사기를 맞고는 한방에 집안 자산을 다 날렸다고 합니다.
아저씨는 잘 나갈때 두집살림까지 했다고 하니 전세로 사는 것이 챙피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지금은 나보다 두살 많았던 형이 대기업에 들어가서 승승장구를 하더니 지금은 성북동 대저택에서 잘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어머니를 통해 들었습니다.
이렇게 두가구 여섯식구사 가족처럼 재미나게 살았던 기억이 있지요.
우리집의 구조는 대중 이렇듯 옛날식 집이었고 안방에는 다락으로 올라갈 수 있는 오묘한 구조였고 다락방 바닥의 구멍으로는 부엌이 보이고 나같은 초딩 체구는 다락방 구석진 곳을 자유스럽게 들어가 숨을 수 있는 공간이 많이 있었는데 그 곳은 바로 부엌 뒷켠의 작은방 천정까지 다다르면 작은 공간이 있어 나의 쉼터가 하나 있었습니다.
형제가 없는 관계로 혼자 있을때에는 이 다락방이 나의 놀이터였고 나의 비밀의 공간이기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집안 구조는 대충 이렇고 다락방에는 아버지의 소중한 물건이 가득 차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외국 사람들에게서 선물 받은 양주부터 필요할 때 쓰시려 했던 잡동산이가 모두 다락방에 있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처음 어머니의 빤쯔를 본 것도 이 다락방이기도 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건너방을 쓰고 넓은 안방은 내가 썼는데 내방에는 큰 장롱과 어머니 피아노, 내 책상 등등 많은 것이 있었지만 내가 뛰어 놀기에는 넓고 좋았던 기억이 많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능력이 있으셨던지 대전의 00고를 졸업하고 서울의 좋은대학을 나오셨습니다.
영어를 잘 하시고 전화 통화 할 때는 영어로 회화도 잘 하시곤 했지요.
어머님 말씀으로는 외국사람(바이어)들과 자주 회동을 한다고 들었는데 당시에는 그려려니 다른 친구들 아버지보다는 좀 더 나은 직업을 가지신 걸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대기업 해외 영업부로 근무를 하신걸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직책이 대리였으니 얼마나 바쁘게 사셨는지 이해가 충분히 갑니다.
어머니는 세째딸로 제 어린 마음에도 젊은날에는 굉장히 예뻤습니다.
공부도 잘 해 서울에서 대학을 나오고 사촌 오빠의 소개로 아버지를 만났다고 합니다.
아마도 내 생각에는 엄마의 사촌이 같은회사 그룹내에 근무를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관계로 아버지를 만난 것 같습니다.
엄마는 아버지한테는 지나칠 정도로 애교가 많습니다.
술도 많이 드시지만 항상 늦게 오는 아버지를 보고는 "수고했어요"라는 말을 매일 듣고 자랐으니 이것은 엄마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나에게 단호할 땐 정말 얄짤없었습니다.
용돈, 얄짤 없었습니다.
큰 집 사야한다고 살림을 아꼈던 구두쇠 엄마였고, 아버지에게 애교많은 사랑스런 그런 엄마였습니다.
제게는 천사였고, 여우같이 쪼아 대는 엄마였습니다.
나는 공부를 별 문제없이 원만히 잘 했고, 서울생활도 별 무리없이 잘 지냈습니다.
국민학교에 같이 다니는 동네 여러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고 방과 후에는 윗동네 친구들과 축구 시합을 하곤 했습니다.
물론 아랫동네 옆동네 때론 두어 정거장 지나서 시장통 아이들과도 축구 시합을 한 기억도 너무 많습니다.
그만큼 당시에는 놀이 문화가 축구밖에는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요즘은 노래방. 비디오방, 극장, 패스트푸드 등등 놀이 문화공간도 많았지만 당시에는 국민학교에서 불우한 가정의 아이들에게 옥수수빵을 배급한 기억도 있었지요.
물론 나는 해당 사항이 없어 맨날 친구들에게 조금 떼어 달라고 조른 기억이 생생합니다.
어느날인가 학교에서 가정통신문을 주는데 우리 학교에 수영장을 만든다고 합니다.
나는 너무 기뻤습니다.
당시에는 수영을 하려면 광나루나 한강 둔치에서 수영을 하는데 결국 수영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경우가 종종 있어서 물가에는 여우같은 엄마 때문에 물놀이는 못 갔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물에 빠져 죽을까봐 허락을 안 해 줬습니다.
그러던 차에 국민학교 운동장 구석에 수영장을 만든다고 하니 나에게는 또 다른 기쁨이 생긴거지요.
그러고 국민학교 5학년 초에 수영장이 완공됩니다.
드디어 여름의 시작입니다.
엄마를 쫄라 대기 시작하는데 절대 안된다고 합니다.
그날 늦게 오시는 아버지께 말씀 드려서 수영을 꼭 배우겠노라 다짐을 하는데 그날 12시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간에 들어오신 아버지는 저녁상을 늦게 받으시며 허락을 해 주시는데 엄마랑 같이 수영을 해야 허락을 한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수영을 누구나가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둘이 같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방과후에 어린이반이 있고 그 후에는 어머니반을 운영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유수영 이었습니다.
엄마는 나를 어린이반에 그리고 엄마는 어머니반에 등록을 하였습니다.
이틀후 비키니와 원피스 수영복을 사 가지고 온 엄마는 그걸 아빠 앞에서 입어 봅니다.
물론 하나는 반납한다는 조건으로 가지고 온 모양입니다.
요즘처럼 좋은 수영복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그래도 이름있는 수영복을 사 가지고 와서는 뭘 입을까 아버지 앞에서 갖은 포즈를 취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안방과 건너방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아 사람의 목소리 정도는 귀만 귀울이면 소근거리지 않는 한 대충 들을 수 있는 불량한 한옥집이었지요.
궁금도 하고 해서 건너방 문을 열어 보니 아니나 다를까 붉은색 원피스 수영복을 엄마가 입고 있었는데 그때 엄마의 몸을 처음 보았습니다.
순간 나는 입과 눈이 얼어 붙었습니다.
텔레비젼에서나 보는 그런 몸매는 아니었지만 엄마였기에 깜짝 놀랄수 밖에 없었습니다.
몸에 딱 달라 붙은 빨간색 수영복이 엄마의 몸매를 훤히 볼 수 있었고 약간 통통하니 보기에 넘 좋았습니다.
7월초 수영장 개장과 함께 수영반이 된 나는 수영을 즐겼습니다.
물을 그때부터 좋아한 것 입니다.
수영인원도 그다지 많치 않아서 수영강습이 끝나도 친구들과 물장난하고 잠수로 멀리가기 등등 넘 재미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반 수영강습을 시작하면 왠지 기분이 좋았습니다.
엄마들이 모두 수영복을 입고 준비 운동 할 때 어린 마음에도 좆에 흥분이 도달하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유독 엄마를 보면 더 그랬습니다.
엄마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서너명의 엄마들 몸매보면 나도 모르게 좆이 스르르 커져서 괜스레 너스레를 떨고 잠수로 흥분을 가라 앉쳤습니다.
젊은 수영선생이 늘 마음에 걸리지만 엄마와 몇몇 예쁜 아줌마한테만큼은 눈에 띄이게 차별 렛슨을 하는 것이 어린 내 눈에도 확연하게 보였습니다.
남자란 나이가 어리던 지금처럼 나이를 많이 먹어도 여체에 관한 호기심은 절대 변하질 않는가 봅니다.
당시에는 수영이 고급 운동이라 부잣집 아니면 수영을 못했지요.
문제는 단 하나.
수영선생의 눈초리가 왠지 엄마를 향해 있는 것이 늘 걱정이었습니다.
제일 처음 팔 동작. 그리고 킥.
일일이 손을 잡아 주는데 너무 부럽습니다.
그런데 가끔 엄마렛슨을 할 때 한손은 가슴부위 또 한손은 아랫배에 대고 엄마의 몸을 받쳐 주는데 그 모습을 보는 나도 기분이 묘하기도 하고 또 저 놈의 수영선생 새끼가 너무 얄밉기도 합니다.
어린이반 수영시간에 나의 엄마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 때부터 나를 아껴주는 척도 신경을 많이 써 줍니다.
그리고 킥하며 줄줄이 뒤를 따르는데 몽치 엄마들 너무 웃깁니다.
어린 마음에도 괜시리 가까이 가서 가슴도 쳐다보고 강습중에 쉰다는 핑계로 레인턱에 앉아서 어머니들 수영하는 것만 봐도 어린마음이지만 어설픈 성욕을 느낍니다.
아마도 숫놈의 본능일 겁니다.
강습 끝나고 어머니들이 일제히 물 밖으로 나오면 그림 좋습니다.
아직 젊은 삼십대 초반이라 지금 생각하면 더 그 시절이 그리워 지기도 합니다.
어머니반 강습이 끝나면 나는 엄마와 같이 집으로 걸어서 옵니다.
"엄마 나 배고파"
호떡 하나 사달고 조르고 호떡 하나 사주면 그 호떡을 먹으면서 집으로 오곤 했습니다.
얼마나 맛이 있었던지...... 요즘은 그런 호떡맛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수영도 배우고, 여체를 음미하는 즐거움도 있는 자유수영시간.
제게는 여름방학 내내이 즐거움이 한가득 있었습니다.
일주일 세번 수영하는 날.
아침부터 나는 부산을 떨고 준비합니다.
엄마와 함께하는 그런 수영시간이어서 좋습니다.
약간에 간식을 준비한 뒤 수영하러 갑니다.
얼마 지난뒤 여름 햇빛에 그을린 나는 구리빛 피부가 되어 갑니다.
까무잡잡 건강하다고 엄마는 말합니다.
휴식시간에 집에서 준비한 간식을 먹으려고 하는데 수영강습을 하면서 친해진 엄마들끼리 잠시 쉬는 시간에 나와서 간식을 같이 먹으려 내 앞으로 옵니다.
그 순간 저는 좆이 또 서려고 합니다.
그것도 갑자기......
엄마가 물에서 나와 제가 있는 곳까지 걸어오는데 가까이 오니 엄마 가랑이 사이 시커먼 보지털이 비치는 것 입니다.
옛날 수영복은 물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거의 비춰졌던 것 같습니다.
요즘 수영복과는 재질의 차이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물론 스판과 나이론의 차이겠지요.
물에 젖어서 비친 것이었는데 수영장 안에서는 몰랐습니다.
엄마가 물밖으로 나오니 바로 역삼각형의 보지털 두덩이가 선명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속으로는 "와~ 엄마 보지털이 참 많타"하면서 고개를 돌리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엄마도 직감 했을것 같습니다.
그래도 여자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참외 수박등등 여러가지 과일을 풀어 놓고는 있는 수다 없는 수다를 떨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도 울 엄마는 "선생님 과일 좀 드셔요~~ 이리 오세요"하며 자리를 정돈합니다.
그때 누군가가 말합니다.
"수영선생님이 민재엄마 맘에 있나봐~"
그러고는 모두 깔깔 웃습니다.
더 이상 제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것 같아서 슬그머니 친구들이 있는 쪽으로 갔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모든 아줌마가 젊은 수영선생님을 못 따 먹어서 안절부절 시기하는 소리처럼 들리는 것을 당시 어린 마음은 거기까지 이해를 못하고 그져 과일을 선생님에게 드시라고 주는 엄마와 아줌마들의 모습뿐이었습니다.
나는 친구들이 모여 있는 자리를 벗어나 엄마가 물에 들어갈 때 정면으로 보려고 반대편으로 갔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잠시후 수영강사가 "모이세요" 하자 모두 일어나서 풀에 입수하려고 일어섭니다.
풀 가까이 오는 아줌마 몇몇은 아직도 보지 두덩이가 시커먼것이 나의 좆을 가만 두질 않았습니다.
엄마의 빨간색 수영복에 남아 있던 물이 다 빠졌던지 그냥 보지 두덩이만 도톰합니다.
노란색 원피스 아줌마 그냥 시커멓게 표시를 하고 내 눈앞으로 다가와 풍덩합니다.
어린 마음에도 조금만 날씬 했으면 좋겠다고 위안을 합니다.
노란색 아줌마는 너무 뚱뚱했던 것입니다.
아쉬웠지만 내일 또 쉬는 시간전에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아 있어야겠습니다.
그래야 빨간색 수영복 위에 내비치는 엄마의 보지털을 음미 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이렇게 매일매일의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여름방학이 끝나면서 즐거움은 마무리가 됩니다.
개학과 더불어 다시 평범하게 초딩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방과후 축구를 즐기면서 친구들과 장난도 하고 목욕탕 창문으로 여탕을 훔쳐 보기도 하고 가끔은 주인 아저씨한테 혼나기도 하고 그런저런 여느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지극한 일상생활을 합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의 초딩 6학년이 되니 왠지 어른스워짐은 물론 제 자신도 제가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낌니다.
처음 대전에서 초등 입학할 때는 학교가 뭔지도 모르면서 서울로 전학을 와서는 갑자기 6학년이 되어 버렸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초딩학교에서 최고 높은 고학년이라 형들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좀 의젓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이때 처음으로 발랑까진 친구가 여자이야기를 해 줍니다.
아이는 남자 좆이 보지에 들어가서 오줌 같은것을 싸면 임신이 된다는 것을 그때 이 친구를 통해 알게 되었고 여자는 한달에 한번 보지에서 피가 나온다고 하던 말을 그때 들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에 성교육이란 것이 없었고 주워서 들은 이야기가 전부이니 더욱 더 호기심이 발동합니다.
이때부터 여자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육상부 여자아이들을 보면 유난히 허벅지가 눈에 띄이고 가슴이 부풀어 올라 장난으로 여자아이들 가슴을 만지고 도망다니는 장난을 많이 했습니다.
여체의 궁금증은 그냥 엄마라는 편안한 상대를 바라보면서 선망하는 상대이었고,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사춘기의 첫 출발점이었던 것이 바로 이 시기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여름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립니다.
엄마와 많은 아줌마들의 보지 두덩이가 보고 싶었습니다.
드디어 7월이 오고 수영강습 시작입니다.
나는 수영복을 가방에 넣고 학교로 달려갑니다.
분명 엄마도 방과후에 수영강습을 받으러 학교로 올 것 입니다.
헉~ 그런데 수영선생이 정말 잘 생기고 몸도 좋고 완전이 꽃미남 수영강사가 왔습니다.
울 엄마 괜시리 힐끗 수영선생을 쳐다 봅니다.
물론 다른 아줌마들도 수영강사가 젊으니깐 서로의 눈빛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역시나 어린이반 끝나고 엄마들이 하나 둘씩 수영복을 입고 탈의실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처음보는 아줌마도 있고 작년에 강습을 받았던 아줌마들도 많이 있습니다.
작년에 수영강습 소문을 들어서인지 엄마들이 많이 신청을 했나 봅니다.
아이들은 한쪽 구석에서(두개 라인) 물장난하고 나는 친구들과 잠수해서 아줌마들 가랭이 살펴보고 엄마보다는 다른 아줌마 가랭이만 찾아가 구경합니다.
일주일에 세번 수영시간이 어린 마음에는 너무 좋았습니다.
수영강습이 없던 어느날.
나는 친구들과 집에서 좀 멀리 떨어진(당시에는 돈이 없어서 걸어 다녔슴. 버스로 약 세 정거장이 넘었던 기억이 있슴) 중앙시장 근처 공터에서 친구들과 축구를 하고, 헤어지기전에 한 친구가 팥으로 만든 께끼(당시에 얼음과자)를 먹고 가자며 다섯개를 사 가지고 왔습니다.
10원에 다섯개.
그러니깐 1개에 2원이었지요.
불량식품인 줄 알면서도 그 아이스께끼가 왜이리 맛나던지 지금도 먹고 싶습니다.
다섯명이 골목 한쪽 계단에 앉아서 정말 맛나게 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골목안쪽에 여관(신당동엔 시장통 골목 여기 저기 여관이 많이 있었슴)에서 낮이 많이 익은 아줌마가 나옴니다.
헉~ 우리 수영강습 시간에 수영을 배우는 아줌마?
여관을 나와서는 바로 대로를 향해 총총히 걸어 갑니다.
그러고는 바로 수영강사가 나오더니 반대쪽 골목으로 걸어갑니다.
순간 어린마음에도 이건 분명이 불륜이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나는 얼른 께끼를 먹어 치우고는 살살 쫓아가다가 그 옆을 뛰어서 지나갑니다.
물론 얼굴은 안 보고 그냥 급한 사람마냥 앞을 향해 뛰어가다가 길가에 문방구로 들어 갔습니다.
안쪽으로 들어가 책을 보는척 하며 바로 창가에 서서 아줌마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잠시후 예쁜 아줌마가 지나갑니다.
그제서야 얼굴을 똑똑히 보니 바로 6학년 8반 부반장 엄마.
최 수호의 엄마다!!!
내 친한 친구의 어머니입니다.
우리 엄마하고도 매우 친한사이입니다.
그냥 어린 마음에도 남의 가족의 분란을 일으킬 수 없어 그냥 나만이 알고 있고 그냥 넘기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호기심이 발동하는지?
별의별 상상을 다 합니다.
당시에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라 해서 외국으로 파견근무를 나가는 남자들이 많았고, 우리 학교에서도 그런 집안의 친구들이 더러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사회적인 분위기는 베트남 전쟁과 해외건설붐으로 많은 남자들이 집을 1년 혹은 2년 집을 비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엄마에게 얼핏 들은 이야기로는 그 집은 남편이 돈도 잘 벌고 외국으로도 가끔 출장을 다녀 온다는 이야기를 언듯 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 아버지도 외국을 나갔다 오시면 반드시 내 선물로 쵸코렛과 과자를 많이 사 가지고 오시곤 합니다.
그날 저녁 나는 내 친구의 엄마를 생각하면서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그때는 제비족이 신문 사회면을 종종 장식하고 불륜을 신문지면에 가감없이 게재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혹시나 신문에 나면 어떡하지?"하며 혼자 걱정을 해 주기도 했던 어린이 일 뿐이었는데 갑자기 그 불륜이란 것이 묘한 성적 호기심과 지나친 관심으로 발전을 하게 됩니다.
어느 누구 엄마가 또 타락을 하는가?
그 감쪽같은 사실을 나만이 알고 있다는 현실이 큰 재산처럼 느껴졌기 때문인지도 모름니다.
바로 이틀후.......
나는 또 중앙시장 아이들과 축구 시합하고는 친구 한명과 골목길 계단에 앉아 여관문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몇학년인 엄마인지 모르지만 엇그제 6학년 8반 엄마보다 더 젊은 여자랑 팔짱을 하며 나오는 것입니다.
애인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애인이 아니라 분명 수영강습 어머니반의 예쁜 아줌마였습니다.
나는 "바람둥이~~개새끼" 속으로 욕을 하면서 이상한 쾌감을 느낌니다.
내일은 수영하면서 누구엄마인지 찾아야겠다고 마음 먹습니다.
어린이반 수영강습 끝나고 자유수영 시간에 나는 레인 턱에 앉아 어머니반 수영강습을 구경합니다.
앗~ 어제 그엄마가 보입니다.
6학년 8반 엄마랑 앞뒤로 렛슨 차례를 기다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수영선생을 바라보는 눈이 앞에 아줌마와 뒤에 아줌마가 경쟁을 하며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 이후로는 축구와는 상관없이 수영강습이 없는 날에는 일주일에 두어 서너번(일요일 포함)을 그 여관이 바라다 보이는 계단의 앉아 여관의 동정을 살피는 것이 즐거움이 되어 버렸습니다.
모든것이 쉽게 목격 될 것만 같았던 나의 상상은 금방 깨지고 말았습니다.
한주 동안 수영강사를 본적이 없고 기다림이란 것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습니다.
한주일 이렇게 보내고 나니 보초를 서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그냥 축구와 수영만 하기로 마음 먹고 관심에서 멀어집니다.
8월은 찌든 듯한 더위와 함께 축구 시합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오래 간만에 중앙시장 근처에 사는 아이들과 축구를 했는데 당시에는 시장통 아이들이 공부는 못해도 축구는 정말 잘했습니다.
우리가 원정을 가면 항상 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축구가 끝나고 나는 왠지 그 여관이 보이는 곳을 가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아마도 또 다른 누군가를 보고 싶었고 그 불륜의 여자가 누구인지 또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집에는 6시 까지 들어가면 아무탈 없이 씻고 저녁먹고 숙제하고 그리고 예습하고 취침하면 끝나는 하루일과이니 시간이 좀 남는 관계로 나는 친구들에게 먼저 집에 간다고 하고 다른반 친구 한명과 함께 자리를 일어났습니다.
혼자가면 심심하고 또 골목계단에 혼자 앉아 있기도 그렇고 하여 아이스께끼 하나 사 줄께 같이 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관이 보이는 골목계단에 앉아 2원짜리 께끼는 먹으면서 옆눈으로 여관문이 열리기 만을 기다립니다.
잠시후~~
역시나 수영선생이 여관문을 열고 흐믓한 표정으로 여유있게 걸어 나옵니다.
약간의 장발같은 머리를 휘날리며 고개를 까딱하고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들어 올리고 즐거운 표정으로 걸어갑니다.
그리고 1분도 안되어 또 다시 여관문이 열립니다.
저 옷차림.......
어디서 많이 보아 왔던 옷차림이 눈에 들어옵니다.
너무나 익숙한 예쁜 원피스 치마가 엄마옷과 똑 같습니다.
헉~~ 엄마다~~
저번에 보았던 6학년 8반 부반장의 엄마가 아닌 바로 나의 엄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도 연애를 할 때는 항상 들리던 모텔을 가는 습관처럼 그놈의 바람둥이 수영강사도 이 여관이 단골이었던 같습니다.
나는 순간 살쩜이 떨어져 나가는 느낌을 받고는 그냥 계단 뒷편으로 숨었습니다.
친구는 영문도 모르고 따라 올라 옵니다.
그 순간 나는 재치를 발휘해 차분하게 엄마가 어디로 가는지를 살펴 보았습니다.
엄마는 큰길이 있는 도로로 나가는 방향이 아닌 골목으로 저만큼 돌아 나가는 겁니다.
엄마도 남의 눈이 조심스러웠던지 큰 길가 버스 정류장이 있는 큰도로로 안 나가고 골목을 돌아 가는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친구에게 말합니다.
"친구야 다 먹었으니 이제 헤어지자..가자"
그리고는 훌쩍 일어서 엄마의 뒤를 따라갑니다.
다음 골목 나오는 맞은편에서 엄마가 어디로 가는지 살펴 봅니다.
길 옆 중앙시장으로 들어갑니다.
아마도 장을 보고 집으로 들어 올 모양입니다.
나는 얼른 뛰어서 집으로 갑니다.
흥분을 가라 앉히려 했지만 왠지 엄마가 불결해 보였습니다.
엄마는 과연 제 정신인가?
콩닥 콩닥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이런 울 엄마도 당했구나~"
혹시나 수영강사에게 약점이라도 잡혀서 몸을 허락하고 있는지 걱정도 됩니다.
엄마가 수영강사한테 무슨 약점이라고 잡혀서 억지로 당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걱정도 잠시 나는 엄마의 편이 되어 주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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