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일 들어와 추천수를 보고 있습니다. 제가 적은 수에 미달하면 다음회는 안 올립니다.
* 이 작품도 어느새 5개월 만의 연재가 되었네요.
그동안 답답한 마음이 드셨겠지만, 성원하며 기다려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한가지 꼭 알려드릴 내용이 있습니다.
"형사취수"라는 제목은 다음 10회부터는......
[무지개빛 연인들]이라는 다른 제목으로 이어질 겁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여기 지면에서 다 풀어내기는 어려우니... 차차 설명드리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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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부
“시볼.. 성질은 뭐같아서.. 아침부터 난리야”
입이 튀어나온 얼굴에 불만 한가득.
종로에서 뺨맞은 민규, 중얼 중얼거리며 화를 삭히고 있다.
사아아.......
머리를 가벼이 스치며 떨어지는 나뭇잎.
벤치 옆자리의 동준은 또 무엇 때문에 심기가 불편한지 궁금해진다.
“박씨 또 왜그래~~ 이 좋은 날씨에~”
“.......”
“보나마나.. 구겨진 얼굴 보니까 하연이 때문인데? 또 싸웠나~?”
“아니.. 말하자면 길어..”
“하하, 그래도 말해봐, 나는 너네들 사정을 다 이해하자나..”
그 말을 듣고 잠시 고민에 빠진다.
녀석의 말 그대로 동준만큼 하연과 민규 각자의 입장을 잘 아는 사람은 없겠지만..
지난 번 있었던 일을 그대로 털어놓을 수도 없어서, 머리를 굴려본다.
“이.. 이것이... 아침부터 이상하게 지랄을 하잖아!”
“얌마, 지랄이 뭐여.. 사람들 다 듣는다.
흥분하지 말고, 차분하게 얘기해봐”
하연의 집에서 있었던 일을 적당히 살을 붙여 이야기해주었다.
물론, 마지막에 하연이 선사해주었던 파격적인 서비스 부분만.. 비밀로 한 채.
동준은 상당히 놀라는 얼굴이다.
하연, 민규 각자가 용기 있게 한걸음씩 다가갔다는 이야기에..
입을 다물고 듣는 내내, 정말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 그래.. 그랬구나..”
“어.. 말하다보니.. 흥분해서 이말 저말 다 나왔네..”
“아냐, 딱히 이상한 얘기는 없었고.. 재밌게 들었어”
“재미있게..?”
“어, 어어.. 예상치도 못한.. 비밀 이야기를 들어버린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하네.. 하하..”
“.......”
진지하게 얘기했더만, 그 멍청한 반응은 뭐야.
민규는 동준에게 향하던 얼굴을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금새 토라진 민규의 모습에 동준도 장난스런 미소를 띄운다.
아무 말 없이 벤치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산뜻한 옷차림의 여대생 여러명이서 헤어지는 인사소리에, 동시에 시선이 한곳을 향한다.
“....... 뭐라고 말 좀 해봐. 왜 가만히만 있냐”
“으응?...”
“니 생각이 어떠냐고, 임마”
“아.. 미안.. 나도 너무 놀라서.. 뭐라고 말하나 생각좀 하느라..”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연 민규의 재촉에 동준도 말을 더듬는다.
“민규야.. 음..
하연이가 말이다.. 너도 사귀어봤으니까 많이 들은 얘기가 있겠지..
그렇지만 또.. 의외로 몰랐던 부분도.. 아직은 많을 거라고 나는 생각해”
듣는 민규, 아무 반응 없이 눈만 꿈뻑인다.
“하나 하나 다 끄집어낼 순 없지만..
너하고 헤어지고 나서, 한 3년 됐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마음 고생도 많았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그러더라”
“나하고 헤어진 뒤부터?...”
“어어..”
아, 이상한 어감으로 들릴 수도 있겠구나.
고개를 돌려 동준의 눈과 눈을 마주치는 민규.
다시 정면을 보며 대화를 재촉한다.
“......조울증이라고??”
“그래. 우울증의 한 종류잖아.. 알지”
“알지.. 조증이랑 우울증이랑 반복되는 거.. 하연이가 그거야?”
“........
엉..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핫핫, 또~~ 그리 살벌하게 째리지말곰마. 나도 어쩌다 주워들은 거여”
“아니야.. 그 말 들으니까 나도 뭐 생각이 나서..
조울증이면..
그날 그날 기분이 몸 상태 컨디션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바뀌는걸 말하지?”
“얼추 그런거지. 계속 기분이 업되있다가 또 다운되는 상태의 반복 아닐까..”
그런가..
고 전날까지만 해도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모습이,
검은 뿔테 안경쓴 기숙사의 깐깐한 사감 선생을 떠올리게 했다면..
데이트를 했던 그 날의 사랑스러운 모습은 360도 전혀 달랐다.
앞뒤를 예측할 수 없었던 하연의 변화무쌍했던 차이라..
정신적으로 도대체 어떤 무섭고 힘든 사연이 그리 많았길래..
극심한 우울증 스트레스를 앓았을까.
몇마디 더 해주려고 민규를 측은하게 바라볼 뿐,
동준 역시도 하연에 대해 명확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뭐라 섣불리 단언해주지도, 제대로 안심시키지도 못한다.
동준의 이야기를 들은 후, 머리를 짜내 신입생 때부터의 기억을 되짚는 민규.
짧은 회상만으로 기억의 단편들을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사귀는 사이 종종 변덕스런 모습을 보이던 하연을 떠올려본다.
“... 아닌데.. 성격이 확실히 지랄 맞긴 했어도, 조울증일 정도로..
막, 헷까닥하고 이랬다가~ 저랬다가..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뭔 소리를 하는 거냐?”
“아, 아니야 암것도, 혼자 생각하느라..”
“하하~ 그럼 안돌아가는 머리 더 굴려. 더운데 가서 포카리나 빼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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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 마른 갈증이 나던 아침이었다.
겨우 겨우 잠에서 깨어, 잠기운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머리를 무겁게 흔든다.
.........
여기는?
짧은 머리카락이 돼지 꼬랑지처럼 부스스 흩날린다.
몽롱한 눈빛으로 잠에 취해 사방을 훑는 민규.
낯선 광경 같기도 하고, 어디서 한번은 봤던 집안 생김새 같기도..
아아!
순간적으로 퍼뜩 간밤의 일이 떠오르며, 목에서 뼛소리가 우두둑 날 정도로 고개를 흔든다.
맞아...
하연이 선사해주는 꿈같은 밤을 보낸 뒤-
무겁게 감기는 눈꺼풀의 무게에 못이겨.. 그대로 잠들어 버린 것 같다.
그렇구나. 아직 하연의 집이었구나.
하연이 덮어준 얇은 이불이 몸을 감싸고 있었다.
어저께, 하연이 입으로 뜻밖의 서비스를 해준뒤 엉겁결에 벗어 내동댕이쳐둔 바지는 어디에?
몸에 걸치고 있던 하얀 셔츠도 벗겨져 있다.
옷가지의 행방을 알수가 없다..
정수기의 냉수로 “쪼르륵-” 시원하게 목을 적신다.
꿀꺽...
혹시나 아직 방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을 졸이며 안방을 두드린다.
"하연아, 혹시 방에 있어..?"
아무 반응이 없다.
하연의 안방 문고리를 잡아 돌리려다, 실수하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먼저 현관으로 다가가 그녀와 자신의 신발을 살핀다.
민규의 운동화는 둘째치고, 하연이 어제 신은 신발도 나란히 정돈되어 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 아니지. 이 녀석은 구두도 매일 바꿔신을 테니까..
다시 방 앞으로 다가가, 가볍게 호흡을 거두며 문을 잡고 돌린다.
하연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작은 기대를 했던 모양.
아리송한 표정으로 집 내부를 둘러본다.
‘엇...’
어제 라면을 같이 먹었던 상아색 탁자.
하연이 자필로 적어둔 하얀 쪽지가 놓여있다.
두근거리는 마음보다, 약간의 두려운 기분으로 펼쳐든다.
[잘 잤니?
너 입고 왔던 바지랑 티셔츠는 바로 빨아서 발코니에 말려 놨어.
혹시 배고프면 가스렌지 위에 아욱국 끓여놨으니까, 데워서 먹어.
나는 아침부터 근무라 먼저 나간다. 안녕]
잠시 말없이 서서, 하연이 직접 쓴 필체를 감상하듯 들여다본다.
여전히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글씨구나.
쪽지 내용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할 말만 적어둔 것이라
약간의 섭섭함과 허전함이 몰려 왔다.
‘그렇게 어젯밤에 같이.. 뜨겁게 타올랐으면..
그리고 나서 뭐가 있었다든가, 잠들어버려서 아쉬웠다든지 이런 말도 할줄 알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하연이 간밤에 보여주었던 놀라운 모습의 환영에 나른하게 빠져들 때였다.
어디까지가 하연의 진정성이 담긴 본 모습이며
또 어디서부터가 그녀의 한꺼풀 가면을 벗긴 다른 얼굴인지..
에이, 학교에 가서 직접 물어보자.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핸드폰부터 집어든다.
“헉, 잠깐만! 오늘 화요일이야?!”
그제야 시간을 보니 벌써 오후 두시다.
어제 주량을 넘겨서 맥주를 마시고 술기운까지 더해져..
엑기스도 강제 추출(?)당한 뒤, 정신없이 잠에 취했나보다.
빌어먹을..
머릿속이 짜증으로 뒤죽박죽이 된 와중에도, 시간표는 번개같이 스쳐 지나간다.
오전에 전공 하나 교양 한 개 날려먹었다.
뭐 됐어, 이제 와서 죽어라 뛰쳐나가봤자..
포기하면 마음이 편하다.
풀썩~ 하연의 체취가 배어있을 부드러운 가죽 소파에 몸을 맡긴다.
짧은 순간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누빈다.
물론 대부분은 어제 있었던 하연과의 즐겁고 설레었던 데이트 과정들.
여전히 실감도 나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뜬구름들 같다.
폰 액정화면을 보니, 하연이 남긴 카톡 하나가 눈에 띄었다.
좀 늦게 들어올테니까 느긋하게 쉬다 돌아가도 좋다는 말...
작은 배려가 고맙기는 한데..
뭔가 아쉬운 기분에 액정을 어루만진다.
뭐라고 한마디라도 보내볼까.
하지만 그마저 쉽게 할 수 없었다.
늦게까지 잠에 취해 일어나놓고, 한창 일하고 있을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내라니..
어젯 밤의 일도 환상처럼 느껴지는 민규에게,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 아니겠는가.
그렇게 화요일 하루를 날려버리고
밍숭맹숭한 하루를 의미없이 소진한 뒤 맞이한 아침.
여느 수요일 오전과 같은 시간이지만
굉장히 떨리는 마음으로.. 조교실의 문고리만 붙들고 벌써 5분째 못들어가고 복도에 서있다.
민규 곁을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스쳐 지나가는 여학생.
그 시선을 황급히 피해 반대쪽 창문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달칵-
지가 얼떨결에 문을 돌려놓고도 그 소리에 놀라 흠칫-한다.
끼이이...
이 거지같은 문 그을음도 니스칠을 하든지.. 보수를 해야겠군.
들어갈 엄두를 못내고, 처음 방문하는 사람처럼 문간에서 안을 들여다본다.
“일찍 왔네? 뭐하고 서있냐”
“... 어! 어어! 아니, 아니..
문 열다가 잠깐 빼먹은 것 생각이.. 언제 왔어??”
“.....? 진작 왔지.. 왜 이렇게 경끼를 일으켜~ 후후훗”
“아하하.. 반가워서 그래.. 하연아”
짧지만 밝게 웃어주는 예쁜 얼굴.
역시, 아름다운 그 미소는 여전하구나..
사무실에 들어오기 전까지 바싹 얼어있던 심장이, 눈녹듯 녹아내리는 감흥..
가만히 가슴을 쓸어내리며, 조용하게 말을 건넨다.
“저기.. 어제는 별 연락도 못했고, 미안해”
“아냐. 나도 너 두고 그냥 나가는데 좀 미안한 마음 들더라.
잘 일어나서 집에 들어갔니?”
“어.. 그랬지, 니가 그.. 차려준 국도 맛있게 잘 먹었고”
“응~ 그거 입에 다행히 맞았어?”
“맛있던데.. 잘먹었어 헤헤”
“후읏~ 다행이다..”
아침부터 바쁜 일이 있어서일까.
상기된 붉은 얼굴로 하연의 옆 얼굴을 곁눈질하며 묻는 민규와 다르게
하연은 눈 앞의 모니터만 열중하여 바라보며 눈길을 주지 않는다.
아침에는 서로 일이 바빠서 그러려니.. 서운한 마음을 애써 숨겨본다.
그런데 오전 타임 내내-
하연이 민규를 대하는 모습은, 지난 월요일의 데이트하기 전과 다르지 않았다.
살갑게 팔짱을 끼며 애교섞인 콧소리를 내던 싱그러움은 어디로...
말투도 예전과 다름없이 단답형으로 사뭇 냉랭함이 흐른다.
이쯤 되니 실실 웃으며 눈치껏 기분을 맞추려던 민규도
11시를 조금 넘기자 슬슬 화가 치밀어올랐다.
이젠 예전처럼 가만히는 못있는다, 할말은 하고 살자..는 생각에
타다닥 타닥-
기계적으로 키보드만 두드리는 하연의 오른 손목을 탁~ 낚아챈다.
“...? 뭐하는 거얏, 팔목 아프게?...”
“여기좀 봐봐, 그렇게 할 일이 많냐?”
“...... 너 왜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어?”
“어...?.....”
그러고보니, 하연의 하얀 손목을 거칠게 붙잡은 것부터 대단한 객기였다.
내가 무슨 짓을 했지..?
스스로 놀라서, 손에 꽉 쥐고 있는 얇은 손목을 얼른 놔준다.
“아파.. 그렇게 안보이는데 힘은 세졌네..”
“미안해.
........ 전혀 눈길을 안주니까, 나도 모르게.. 확 잡아서 돌려놓은 거야”
“칫, 아무렴...
그래. 바빠서 못 쳐다본 건 미안하게 됐고, 무슨 말을 하고 싶어?”
“엇... 그게..”
이럴수가.
월요일에 앵앵거리는 높은 톤으로 품안에 안길 듯 말듯하던 그녀석이 맞나.
가까스로 시선을 붙잡긴 했지만, 감정이 섞이지 않은 하연의 얼굴이었다.
마치 데이트에 관한 일은 까맣게 잊고 있는 듯..
아름답긴 하지만, 무미건조한 검은 빛깔의 눈동자만 빛난다.
민규는 하연의 그 검은 눈을 마주 보며 천천히 하고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리고 난 후의 결과는-
동준의 앞에서 울분을 터뜨리던 그 장면의 처음으로 돌아간 것이다.
하루를 두리 뭉실하게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를 정도로 기운이 빠져있던 상태.
보다 못해 동준은 친구놈의 팔을 붙잡고, 4시 강의가 끝나자마자 학교 앞 술집으로 데려온다.
늘 이시간대면 알아서 문이 열려있는 학교 인근의 주점들.
여전히 언짢은 기색의 민규를 보며, 좌불안석의 동준도 주문부터 시켰다.
“정신좀 차리라고 제발... 마 무슨 사정이 있겠지 하연이도~
오늘 컨디션이 아주 제로였다든가, 아~! 그날이었을 수도 있자나”
“그날..?”
“생리..일지도 모른다고 이 닭대가리 싯끼야.. 확 기냥~ 으으~”
“아!... 맞다... 그럴수도.. 있었겠네..”
“알아들어?
그 자식이 원래 맨날 저기압 모드인건 맞는데, 그래서 더 까칠했을 수도 있다고, 등신아, 그니까 술이나 받아 쳐묵어”
“알았어. 이 개새야..
들어오자마자 욕만 퍼붓고 지랄이야..”
“크키키~ 욕을 안주삼아 마셔야 기운이 쌩쌩도는게 너 아녀~”
민규는 애써 연락하고 싶은 걸 꾹 참으며
수요일 저녁부터 근무가 있는 금요일까지 일부러 연락하지 않는다.
내심 생각한다.
저도 감정이 담긴 살아있는 생물체면, 먼저 연락이 올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연은 아무 연락이 없었다.
금요일은 서로의 근무시간이 좀체 맞지 않아,
하연의 얼굴을 볼 겨를도 넉넉지 않기까지...
이쯤 되면 잊고 묵혀 두었던 소심증이 다시 번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너덜너덜해진 감정을 추스르기도 버겁다.
조울증을 한때 앓았던 아이이고 아직 완치되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힘들고 갑갑하겠지만, 며칠간 좀 지켜보자던 동준의 권유도..
속이 쓰리고 괴로운 민규를 달래주진 못한다.
금요일 저녁, 홀로 그렇게 하연 생각에 그리워하다가
시름 시름 침대에 널부러져, 여느때와 다름없는 몰골로 잠깐 잠든 민규.
그 타이밍에 예상치 못한 소식이 날아든다.
그래, 잊고 있었구나.
하연 이 썩을년에게만 정신이 팔려서... 형수랑 쇼핑가기로 했던 것을 까맣게..
자다 일어나서 미친 사람마냥 자취방 안을 뛰어다닌다.
토요일 오전.
지난밤을 기쁜 환희로 젖어.. 들뜬 마음으로 보낸 민규.
충분히 잠을 못 자고 나왔는데도-
정아의 눈에 비치기에는 멀쩡한 혈색과 건강해보이는 얼굴이었다.
오늘 아침에 둘이 만나기로 한 장소는
민규가 사는 곳에서 가까운 강변역 CGV 였다.
차를 세워두고 큰 빌딩 앞 넓은 광장에서 반갑게 만난다.
함박웃음을 어렵사리 티나지 않게 지우는 민규.
스리슬쩍, 사랑스러운 형수님의 가녀린 어깨를 끌어 안으려 팔을 뻗는다.
..... 아차? 이게 무슨 짓이지...
무의식적으로 정아의 탐스러운 어깨를 더듬으려다
화들짝! 놀라는 민규.
“......?
왜 그러세요, 도련님? 호호, 놀라신 것 같은데”
“어, 아니에요?.. 헤헤.. 아무 것도.. 아닙니다..”
품에 착 들어와 감기는 하연의 늘씬하고 선이 가는 허리를 상상했다.
하연이 알아서 팔장을 껴주고 애교를 부리던 그 월요일 오후가 문득 생각난다.
누구 앞에서, 이 순간에 이런 망측한 실례를..
도리도리~
미친 사람처럼 눈을 꾹 감고 머리를 힘껏 흔든다.
형수 정아는 토끼같은 눈망울로, 걱정스럽게 민규를 바라보았다.
“호호, 어떠세요 도련님, 오늘 이른 시간인데.. 컨디션이라든가, 기분은?”
“네. 아무 이상없이 쌩쌩합니다~~ 보시는 대로~ 헤헤”
“정말이에요? 호호..”
경쾌함이 화사하게 빛을 발하는 여인의 미소.
살구꽃이 은은하게 눈 앞을 감도는 듯한 감동.
자애로운 그 따스함에 맥이 스르르 풀리는 민규.
며칠간 하연의 일로 속을 끓였기 때문일까.
형수와 만나 잠깐의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고 긴장이 풀리자마자
무기력하게.. 몸의 기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잠시 정신 놓는 사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깜짝 놀라- 얼른 도련님의 힘 빠진 어깨를 잡아 끌어올리는 형수.
술 한잔 걸친 사람처럼 몸을 못가누는 모습에-
정아의 가녀린 눈매가 살짝 떨린다.
“도련님.. 아무.. 이상 없는거죠? 아픈 곳 없는거죠, 그렇죠?”
“..... 하하 형수님, 저 멀쩡해요..”
“에에, 멀쩡하지 않아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린데..
혹시 감기 기운 있으신 거 아니에요?”
잠깐 이래도 될까, 행동을 망설이던 그녀.
하얀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짚는다.
사소한 행동에도 몸을 ‘흠칫’ 떠는 민규.
이윽고 자신의 이마에도 손바닥을 대보고,
‘음 음, 이상 없는거 맞지?’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정아.
살짝 불그스레해진 얼굴로 웃으며 손을 내린다.
“다행이에요.. 열은 없는 것 같아.. 히힛”
“형수님, 저.. 정말 괜찮다고 그랬잖아요”
“흥~ 괜찮다고 말로만 안심시키면 어떻게 믿어요.
금방 제 앞에서 쓰러질뻔 하셨잖아요..
도련님 말씀은 이제 반 정도만 믿어야지 안되겠어요. 호호”
“하하.. 그러세요..”
역시 바라만 보아도 그립다.
언제나와 같이 설레임으로 뛰는 가슴.
저번보다는 한결 포근해진, 작은 여유라는 이름의 두근거림.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만남.
기꺼이 먼저 일찍 만날 것을 청해준 쪽은 형수였다.
한참 동안 사두고 쓰지 않던 겐조 향수를 뿌린 민규.
킁킁~
거의 뿌려본 적이 없어, 너무 진하지 않나.. 팔을 들고 코를 묻는다.
언제 써먹어 볼 일이 있어야 뿌리는 법도 알지.
아침에 가볍게 김밥과 떡볶이 등으로 식사를 해결하고
잠깐 둘러보다가 영화를 보기로 한 두 사람.
내심 최근 개봉한 SF 블록버스터로 발길이 끌렸지만
사람 좋은 눈웃음의 형수가 제안하는 멜로 영화를
감히..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래~ 마음 따듯해지는 로맨틱 코미디 나도 좋아하니까.
아마도 여자랑 함께일때는 분위기에 맞게 잘 따라주는게 좋지 않겠어.
캬~ 이런 이런~
스스로 생각해도 ‘어른이 되었어 어른이, 박민규’라는 자각에 기특하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배가 고팠다.
금방 꼬르륵 신호를 보내는 소리에 둘은 서로를 마주보며 웃고.
형수의 안내로 파스타를 잘하는 집을 향해 들어간다.
“저.. 형수님.. 만나자고 어제.. 연락해주셔서 저, 너무 감사했어요, 진짜”
“예..? 호호.
저는 미리 지난주에 정해둔 약속을 지킬 마음이었는데요..”
“아, 그건.. 그건 저도 기억은 하고 있었지만요..
생각지 못한 호출이라서 더 감동을 받았다는 이야기예요”
“네.. 호호”
젠장.
왜 또 이렇게 긴장해서
생각한대로 말도 제대로 못 뱉고 병신처럼 덜덜 떨리는 거지...
안되겠다. 일단 먹자.
자꾸 빨개지는 얼굴을 정상적으로 가라앉히기 위해서라도,
얼른 배를 채워 몸을 되돌려 놓아야 말도 잘 나오겠지 하는 생각이다.
“편하게 얘기하세요.
제가 보기엔 우리 작은 도련님, 오늘 얼굴색이 피곤해보이시네요.
후훗.. 저 어디 도망가지 않을 거니까, 천천히 이야기하셔도.. 다 들어드릴게요”
나긋나긋-
따스함이 한가득 느껴지는 정아의 달콤한 목소리.
성대에 꿀이라도 발랐나..
앞에 마주 앉은 여인으로부터 느껴지는 담백한 체취.
향수를 썼는지, 단순히 샴푸 향기가 묻어나올 뿐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아무려면 어때, 굉장히 향긋하고 은은하다는게 중요하지.
배가 고파서 후루룹~ 빠르게 식사를 마친다.
천천히 음미하며 식사중인 형수를 살짝 곁눈질해보았다.
생각에 잠기는 민규.
이렇게 이쁘게 잘 웃어주는 착한 마음씨의 형수가 있는데
아까부터 잠깐씩이지만... 짜증을 유발하는 옛 여친의 얼굴이 떠오른다.
으으~
맛있게 먹고난 면발이 위 안에서 역류하는 기분이다.
형수와 나란히 서서 식당가 라운지를 거닐다가
눈 앞에 보이는 조용한 카페로 빨려들 듯이 들어간다.
사근사근, 귓가에 작게 귀기울이며 말해주는 것 같다.
형수님의 정감 있는 목소리는..
들으면 들을수록 사람을 치유하는 힘이 실려있는 것 같아.
형수와 담소를 나누는 사이에도, 아까 영화 보는 내내 가졌던 생각을 떠올려본다.
하연과 정아 두 여인의 보이스를 견주어보면
들리는 목소리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다.
얼굴 생김새는 사뭇 다른 느낌의 두 사람이지만
기본적인 목소리의 높낮이는 상당히 비슷한 톤을 가지고 있다.
앗! 이건 몰랐던 부분인데..
그 생각에 미치자, ‘이런 우연한 일치가?’라는 아이디어에 혼자 감탄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눈 앞에 두고 있는 이상형의 여인에 대해서 깊이 침잠한다.
몹쓸 옛 여친과 비교하는 자체가, 형수에게는 큰 실례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알지만 견주면 견주어볼수록, 소소한 즐거움이 있는 걸..
정아에게 의식을 집중한다.
타고난 상냥한 목소리에, 상대방의 감정을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온화한 감정을 실어 기분 좋게 전달하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는 여자다.
직업적으로 훈련된 소양을 몸에 지니고 있기 때문일까.
그렇지만 민규는, 그 잘 짜여진 듯한 ‘다정스러움’조차
형수 본연의 태도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단 한순간도 목소리의 단아함과 몸가짐을 가식이라 느껴본 적은 없었다.
형수 정아 입장에서도 작은 도련님에게
작은 애정을 담아 속삭이듯 말하는 목소리에는 거짓이 묻어있지 않았다.
제 멋대로의 상상이지만
민규는 형수의 마음가짐도 자신과 비슷하리라 짐작한다.
“호릅~ 음... 향 좋다..
아, 카톡 왔다.
움~? 도련님.. 도련님 여기 좀 봐요”
“네? 듣고 있습니다..”
“도련님도, 저랑 거의 동시에 톡 왔다구요.. 훗”
“아아, 죄송해요..”
살짝 의아한 눈으로 민규를 쳐다보았지만
곧 쿡쿡- 웃으며 시선을 핸드폰으로 가져가는 정아.
민규는 이어서 마음 놓고 상상을 이어간다.
그래... 희안~하게~~
둘이 목소리가 닮긴 했어...
“여기서 가볍게~ 에스프레소만 마시고요. 우힛~
그리고 이제 본 쇼핑을 하러 가는거예요~”
“하하. 형수님 근데 아까부터 좀 궁금했는데..”
“응? 뭐예요”
“백화점에서 잘 사신다고 하셨는데..
오늘 굳이 여기서 사기로 정하신 이유가 뭐예요?”
“에~? 아하~
아침에 여기서 도련님을 뵙자고 한거는..
보고 싶던 영화를 일찍 보려는 마음이 사실 있었기 때문이고요”
으잉.
벙찐 얼굴의 민규.
정아는 ‘너무 솔직하게 말했나’하는 눈치로 겸연쩍게 웃는다.
“호호.. 고백아닌 고백을 해버렸네요.. 죄송해요”
“아니에요 하하, 괜찮은데..”
“후후, 오늘 오전 스케줄은 오전반이고~
이제 점심도 먹었으니까.. 잠깐 쉬다.. 잠실로 도련님 선물 사러 갈 예정이었어요”
그렇게 아침부터 반나절 동안 이어진 형수와의 즐거운 데이트.
사심이 담긴 연애니 당연하겠지만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저녁이 되버렸다.
형수는 다가올 여름을 대비하여 민규의 상, 하의 옷을 여러벌 사주었다.
극구 괜찮다고 민망해서 사양하려 했지만.. 고집불통인 여자다.
은근하게 살살 웃으면서 나중에 맘에 안들면 환불하라고 압력을 넣는다.
자취집에 도착해, 힘든 몸을 침대에 먼저 누이는 민규.
풀썩~
후... 힘든 하루였다 정말.
어찌나 긴장을 많이 하고 목이 탔는지.
형수께서 시간 시간 마다 짧은 데이트인데도
민규의 컨디션이 썩 좋지 않을까봐 배려해주는 바람에, 미안할 정도로 신세를 졌다.
진짜 천사야 우리 형수는.
아름다운 미모에 마음을 다스려주는 편안한 목소리.
게다가 황홀한 볼륨감이 멋스러운 S 라인의 명품 몸매까지.
가만히 누워 오늘의 형수를 떠올리자
두근 ~ 두근 ~
가슴이 행복하게 부풀어오른다.
“여보세요. 어어, 전화를 이제야 해주네.
아니 그런게 아니고.. 오늘은 예전에.. 동아리에서 알게 된 애랑 오랜만에 만났어”
“동아리라니, 여자?”
“응..?”
“설마 여자를 만났을 리는 없는데.. 동아리?
너 따로 활동했던 서클이라도 있었냐?”
“있어... 우리 과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하고 나 혼자 다녔던...”
오늘 낮에 두 번 걸려온 동준의 전화를 못받았더니
하는 일도 없으면서, 영화나 보여줄랬더니 뭘 했느냐는 추궁이다.
녀석에게 대답하면서 자연스럽게 거짓말이 늘었다고..
혼자 생각하며 웃는 민규였다.
시원한 찬물로 샤워물을 끼얹는다.
냉장고를 뒤져보니, 전에 안주로 사다논 육포가 보였다.
뭐 이거라도 어디야..
생각해보니, 저녁을 함께 먹기 애매한 타이밍이라
헤어질 무렵.. 형수는 민규의 눈치를 살피며 조금 난처한 얼굴이었다.
출출해서 육포를 질겅 질겅~ 뜯는다.
으으, 이렇게 질긴 걸 누가 좋다고 사다놓은 거지?
보나마나 참견하기 좋아하는 동준, 영섭 둘중 한놈이 집들이할 때 사놓았을 것이다.
술도 잘 못마시는 사람한테 억지로..
그래도 염치는 있는 녀석들이라,
가난한 자취생의 집에서 같이 뭉칠 때는 n분의 1 이상의 돈은 둘이 알아서 민규보다 더 계산하곤 한다.
아아. 편하구나.
좁고 몸을 옴짝달싹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내 작은 침대가 최고야.
헤헤, 실실 해맑게 웃으며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몸을 굴린다.
-
그로부터 벌써 2주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하연과 함께 얼떨결에 어울려, 데이트까지 보냈던 행복한 밤.
그리고 이후로 또다시 식어버린 두 사람 사이의 허전한 거리.
좋을 때는 좋았는데, 순식간에 없던 일로 되어 버리는 기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하연과 오랜만에 만난 그 처음으로 돌아가버린 일상이
민규는 너무나도 분하고 서러웠다.
‘기껏 사이 좋았고 분위기 끝내줬는데...
뭐가 뭔지도 모르는 사이에 어째서 또 이렇게 되버린거야...’
집구석 방안에 드러누워서,
이따금 애꿎은 이불과 베개를 향해 분노의 주먹을 날린다.
민규가 이토록 하연에게 분노 아닌 짙은 아쉬움을 느끼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앞서 2주 전의, ‘반짝 데이트’가 이뤄진 뒤로 하연은 여전히 민규에게 있어 공포의 대상이었고,
정말 같은 동일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를 계속해서 멀리 대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자신이 좀 둔감한 체질이라는 걸 알고 있는 민규도,
하연의 사소한 변화를 생생히 느낀다.
그 따스한 봄날의 데이트를 기점으로...
오히려 두 사람 사이에는 더욱 차가운 냉기만 감돌고 있다는 것을.
서로 서로가 개인적으로 연락을 하지도 않고
극히 사무적으로, 조교 사무실에서 주 3회로 근근히 만남을 유지하는 것이 전부다.
이것은 도리어 남보다도 못한 사이라 할 수 있을 정도.
4월의 셋째주에 접어들던 어느날.
오랜만에 의기투합한 세 친구.
즐겨 찾는 학교 근처 민속주점에 자리를 잡고 신나게 술을 마신다.
별다른 화제가 없는 이상,
오늘도 메인 테마는 ‘x가지 없는 마성의 여자 정하연’에 대한...
적지 않은 서러움을 토로하는 민규의 이야기를, 친구 두명이 들어주는 것이었다.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다.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을 쌩까고 또 어색해한다니, 참~ 니들은 답이 없다”
“뭐.. 임마!”
“정말이야. 내 성격 알잖아 너네들. 나 같으면 절대 답답해서 못 견딘다”
“.........”
“하하, 괜히 민규 자극하지 마라..”
안쓰럽다는 얼굴로 민규의 노란색 둥근 잔에 막걸리를 부어주는 영섭.
늘 서로 불만어린 자세로 다투는 것은 민규와 동준 사이다.
간간이 상황이 심각할 때 조언을 더해줄 뿐이지,
기본적으로 두 사람에 비해 침착한 성격인 영섭은 말수를 아낀다.
“사실은 말야.. 지난주에 이런 일이 있었어”
“응..? 끄윽~”
“아, 씨발 트름 냄새.. 개객끼.. 아후 토할 것 같네.. 창문, 여기 창문 없어?”
“ㅎㅎㅎ 좀 구리긴 하다.. 창문 열었어~”
벌개진 얼굴의 민규에게서 터져나온 역한 냄새에
동준과 영섭은 코를 감싸고 죽겠다는 너스레다.
동준의 비밀스런 이야기가 이어진다.
“알아둬도 괜찮을 거 같아서 말하는 거야.
특히 너한테는 말해야겠지.. 여기 영섭이는 워낙 입이 무거우니까 흘리지 않을 거고”
“아이고 그래. 무슨 이야긴지 몰라도 날 믿어주니 고맙다 하하하-”
“........ 뭔 소리하려고.. 끄윽, 얼른 말해봐”
“oo 학부랑 인문관 건물 사이에 있는 골짜기 있잖아”
“벤치들 길게 있는 그 자리?”
“어~ 내려오면서 경치 좋게 보이는 거기..
우리 가끔 뭉치는 거기서 말야”
“응 응”
“......... 이건 참고로 3월 중순땐가. 그때부터 있던 일이야”
“알았어, 알았어 빨리 말해”
그럴듯하게 지나간 일을 재구성해서 생생하게 말하길 좋아하는 동준.
때로는 실감나고 재밌게 표현하는 그의 화술에-
점점 이야기에 몰입하는 두 친구의 눈빛도 술렁인다.
이야기는 하연에 관한 어떤 사건이었다.
9부 (하)
하연이 조교로 정식 임명되기 전부터,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은 학과내에서 요주의 대상이었다.
학과 일을 돕는 조교 치고는.. 보기 드문 비주얼과 당찬 성격의 그녀.
모델 같은 멋진 체형과, 도도하고 매혹적인 눈빛의 미모에
일찍부터 수많은 과내의 남학생들은 군침을 흘리며, 새 조교에 대한 썰을 풀었다.
화제의 주인공인 정하연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이 세 친구가 주워들은 이야기만 해도 꽤 되니..
신비로운 미색의 하연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얼마나 뜨거울지 짐작이 된다.
그런데..
여자의 미모를 가지고 품평하는 이야기들이라, 당연히 좋은 이야기만 오갈 수 없었다.
동준 왈, 가끔 긴 벤치에 몸을 편하게 기대고 있으면..
하루에도 여러번씩, 어려보이는 신입생들이 하연을 가지고 노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고 했다.
비단 1학년 뿐이 아니며 선후배에 관계없이-
학과 사무실을 자주 드나드는 남학생들이라면 곧잘 하연의 외모를 이야기한다고.
순수하게 예쁘다, 서늘하게 생긴 미모가 매력있다~는 투의~
좋은 쪽으로 칭찬하고 호감 갖는 사람들이 물론 대다수지만
욕정에 젖은 이들의, 하연을 범하고 싶어하는 썰들 또한... 동준은 여러번 들었던 것이다.
‘대가리에 피도 안마른 새끼들이.... 기도 안차네 나원..’
과감한 음담패설을 얼마나 해대는지,
애써서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려고 마인드 컨트롤을 수차례 해봤지만.
절친인 이상, 남자들의 짜증나는 야한 농담을 듣는 것도 상당한 스트레스였다.
같은 남자로서 부분 부분 이해는 가지만,
이제 막 부임하게 된 새내기 조교를...
괘씸한 일부 녀석들은.. 어떻게 성적인 대상 이하로 밖에 여기지를 않는지.
하연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장점들과
당돌해 보이는 마스크 이면에 숨겨져 있는 여린 감수성을 알고 있는 동준..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그런 소릴 떠드는 녀석들에게, 무서울 정도로 분노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잠자코 듣는 민규의 얼굴은, 의외로 태연하다.
동준은 둘의 얼굴을 번갈아 살피는데
오히려 영섭 쪽이 감정이입되어 동준처럼 더 화를 내고 있었다.
“그중에 좀.. 유독 심한 미친 놈들이 한~ 대여섯명 있었어.
같이 띄엄 띄엄 몰려다니는 양아치들 같은데.. 수업 내용 말하는거 보니까 1학년들 같고..”
“응...”
“섹드립 지껄이는 놈들이야 한둘이 아니니까. 다 잡아 족치려면 힘들어서 안되고..
내가 눈여겨 보고 있는 개같은 것들이, 대 여섯명 정도가.. 젤 심하더라고.
한 묶음은 아니고, 그게 두 그룹을 합친 숫자야. 그래서..”
그때부터 동준은 그 신입생 두 팀의 주위를 맴돌며
가급적 시간이 남을 때마다, 녀석들이 떠드는 하연 관련 이야기를 친히 ‘녹음’했다고 한다.
일부러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보이스 레코더까지 사는 열정을..
그렇게 집요할 정도로, 2주 가까운 시간 동안
동준은 발품을 팔며 괘씸한 녀석들을 따라 여기저기 쫓아 다녔다.
때로는 버스 안에서 신나게 이빨 연주하는 녀석들의 이야기를 청취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학교 근처 주점과 카페 같은 공공연한 장소에서도
겁 없는 녀석들의 하연에 대한 과도한 성희롱을 숨어 들은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알았으니까 결론만 어서 말해봐!”
“...... 뀨~ 여지껏 티 안내다가 갑자기 이러냐~~ 하하..”
“참다 참다 터지나보지... 나도 궁금하다. 그래서 결론이 뭐, 어떻게 됐어?”
“아~나 이것들... 몸이 아주 달아올랐구만 그냥? ㅎㅎ”
본때를 보여주자고 결심한 동준.
나름의 확실한 증거 수집을 마치자, 그 다음에는 처절한 응징에 들어갔다.
동준은 172cm의 비교적 단신이지만, 운동신경이 대단히 뛰어나다.
몸을 재빨리 쓰는 것에 어릴적부터 능해 싸움을 잘 했다.
게다가 특공여단 출신이기까지 하니..
인적이 없는 공터 등지에서-
뭣 모르는 어린 양들을 몰아 넣고 강냉이를 터는 동준은 그야말로 신출귀몰이었다.
분노의 주먹 세례와 교육을 마친다.
본보기 삼아.. 엄중 경고차원에서
1학년 어린 후배들에게 (나머지 한 그룹은 잡고 보니 2학년) 긴 설교와 응징을 끝내고,
놈들의 학번과 핸드폰 번호부터, 반성문을 제출하겠다는 약속까지 카메라로 찍어서 남겨 놓았다.
가만히 듣고 있던 영섭,
잘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으로 희미하게 웃으며 묻는다.
“잘했어, 아주 잘했는데.. 푸하하~
굳이 꼭 그렇게, 그 녀석들 인적사항 같은걸 수집해놓는 이유는 뭐야?”
“뭐겠어.. 나중에라도 행여나 지들은 그런적 없는데..
멀쩡한 사람 두드려 패서, 전치 몇주가 나왔는데 보상하라.. 이 지랄할까봐.
나중에 허튼 소릴 못하도록, 자기들이 지껄인 이야기들을 미리 녹음해 놓은 거지.
그리고 젤 중요한 이유가 또 있어..”
꿀꺽, 마른 침을 삼킨다.
뭔가 말을 할 듯 말 듯 하면서 빨리 입을 열지 않는 동준에게,
호기심, 반 분노 반으로 눈을 빛내는 둘이 재촉한다.
“..........
2학년 애들은 더러운 말들은 많아도, 그냥 그정도 수준에서 실행까진 안할 것들이야.
그런데... 아.. 말하려니 화나네.. 흐으~
신입생 개새끼들이, 하연이를..
다 같이 덮쳐서 강간...할 생각을 하고 있었잖아..”
웅성 웅성 시끄러운 주점이었지만
혹시라도 들릴까봐, 강간이라는 부분에서 동준은 주위를 살피며 톤을 낮췄다.
꽈악 쥐고 있는 주먹과
그의 힘껏 다물고 있는 입술 주변 근육이 가벼이 떨린다.
놀라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영섭과 민규.
민규 역시 동준 못지 않게 매우 상기된 표정으로, 가볍게 몸을 떨고 있었다.
동준은 틈을 주지 않고 말한다.
“그 뒤로는 아는대로야.
1학년 그 자식들은 정말 인정사정없이 팼지. 진짜 존나게 팼어 그중에 두놈은.
뼈는 안 부러지도록 신경 써서 했지만...
뭐 그렇게 된거야..”
“하아...”
“......... 그런 일이 있었군..”
“..... 상상하기도 힘든 일인데, 햐.. 뭐 그런...”
그정도로 하연을 진심어린 친구로 여기는 세 사람.
비록 나머지 둘에 비해서 민규의 감정은 좀 더 남다르겠지만..
의리있게 똘똘 뭉친 세 친구는, 동준의 깔끔한 뒤처리에 감탄하면서도 씁쓸한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저녁을 넘어, 이런 저런 기타 자잘한 학교 얘기들이 오가고
어쩌다보니 민규-하연간의 러브 라인 이외에,
각자의 연애 사업에 대해 근황을 묻는 이야기가 나온다.
“섭이 이거는~ 요새 영계 사귀느라 졸라 바빠.
흐흐~ 몇 살이랬더라. 스무살 신입생이라 그랬었니?”
“아~~ 적어도 내 입으로 직접 공개하게 해주라.. 좀 기둘리! 크...
맞아. 민규한테는 첨 얘기하네.. 나 요즘 연애한다~”
듣는 민규는 이게 왠...
벙찐 얼굴로 영섭의 쑥스러하는 얼굴을 응시한다.
“...... 스, 스무살이면.. 완전 애기잖아!...”
“애기는 무슨 애기야,
요즘 스무살 애들 뒤로 호박씨도 엄청 까고 장난 아닌데~~”
“아니.. 내 말은..”
“하핫, 뭐 부러워서 그러는거지..”
자칭 ‘이론’ 연애박사라는 동준에게, 영섭도 그간 어지간히 시달렸던 모양이다.
처음 들을 민규를 위해, 영섭은 새내기 여친과의 이야기를 어색해하며 공개했다.
그리고..
영섭의 이야기를 듣던 민규, 동준을 향해 느닷없는 질문을 던진다.
“그래 너 임마. 섭이는 그 정도로 됐고.
새꺄, 얼굴이 요즘 아주 반들반들한데..
썸타고 있는 여자 진짜, 좀 말좀 해라~”
“우오~~ 그래, 이제는 말할 수 있.. 아니, 이제는 말해야 한다, 허동준!”
“이것들이...
그렇게 아까 내가 훌륭한 성공담 얘기를 들려줬더니, 물어보고들 지럴이네..”
“아니.. 어저께도 보니까 또 어떤 여자애가 고백하던데..”
“이 새끼는 고잔가.. 끄윽~ 너 좋다는 여자들이 한둘이 아닌데.. 임마?”
“아~ 시발, 박민규 트름 썩는내..
새끼야 얼굴 돌리고 입벌려, 아흐..”
자신에 대한 다른 질문에는, 침까지 튀겨가며 솔직하고 거침없이 답하는 동준.
입담이 워낙 좋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도 상당한 타입이라
물어보는 것에 특별히 꺼려하는 질문 따위는 없었다.
그런데 그런 동준이-
이상할 정도로 연애 관계의 진전에 대해서는, 솔직한 대답을 피한다.
가끔 경끼를 일으킨다 싶을 정도로..
각자 집에서 중간 정도에 위치하고 있는 주점인지라, 적당한 거리에서 버스를 타고 뿔뿔이 헤어진다.
피곤하다며 집으로 직행한다는 민규와, 술은 마셨지만 주량이 좋아 알바하러 가도 문제없다는 영섭.
두 사람을 뒤로 하고, 동준도 버스에 올랐다.
불빛에 스쳐 지나가는 차창 밖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뭔가, 골똘이 생각에 잠긴 얼굴이다.
“휴......”
자기도 모르게 진한 한숨을 내쉬는 동준.
말못할 사연이 있는지 얼굴 표정이 무겁다.
삐빅~
버스에서 내려 집을 향해 터덜- 터덜- 걸어가면서 생각에 잠긴다.
“아무리 궁금해도 그런 얘기는 못하지...
자꾸 물어보고, 나 좀 난처하게 하지 마.. 개새끼들아..”
누가 듣던 말던 하소연하는 말투로, 서글프게 얼굴을 구겨가며..
동준은 눈가에 작은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전등 스위치를 켠다.
딸깍-
..........
거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동준은 못볼걸 봤다는 얼굴로 멈춰섰다.
누나가 추한 몰골로 술에 쩔은 채 고주망태가 되어
넓은 바닥에.. 개구리처럼 뻗어 있었다.
“으~~ 술냄새..
나도 마시고 왔지만 참.. 문제다..
술꼬랑내만 잔뜩 풍기는 이런 여잘, 누가 좋다고 데려갈지 참..”
늘씬한 팔다리의 누나를 어렵게 부축해서, 한켠에 고이 눕힌다.
대충 바닥에 흘려놓은 맥주캔들과 지저분한 것을 정리한다.
어린애처럼 침까지 질질 흘리고...
짧은 한숨과 함께 미소를 짓는 동준.
누나가 배려놓은 갈색 동그란 쿠션을 스슥- 벗긴다.
그래도 알아서 스타킹은 세탁물 통에 넣어놨군.
가볍게 노래를 부르며 세탁 버튼을 ‘띠링~’누르고
테라스와 붙어 있는- 다용도실에 널어 놓은 세탁물도 살핀다.
타캉-
투명 유리가 달린 나무 문을 닫고 돌아나오면서
하얀 선반 위에 누나가 올려놓은 가그린을 보았다.
그르르르...
본김에 개운하게 입안을 헹구고
시원한 냉수를 받아 벌컥~~~ 마신다.
후아..........
술김에 아직 기분이 알딸딸했는데,
취기가 한꺼번에 싹 가시는 짜릿함이었다.
거실로 다시 와보니 여전히 누나는 취침중이다.
칠칠 맞은 자세로, 구겨진 종잇조각처럼 뻗어 있어서 그렇지,
팔과 다리가 그대로 드러나는 누나의 여름 패션은
눈요기하기에 아주 적절한 대상이었다.
워낙 많이 못볼꼴도 봤는지라, 웃으며 자고 있는 다리를 어루만져준다.
길고 늘씬한 몸의 밸런스가 역시 근사하다.
새하얗고 군살 없이 잘빠진 허리 라인.
그와 동시에 근육으로 다져져 있는 허벅지의 탐스러움.
미끈한 하반신의 곡선을 따라..
동준의 말없는 시선이 누나의 다리를 훑어내린다.
“후.....”
잠시 뭔가 생각에 잠기는 얼굴.
발그레해지는 얼굴로, 자고 있는 누나에게 다가간다.
“씻긴 씻었나보지, 훗.. 발에서 좋은 냄새나네 누나..
간만에 뽀뽀해줄까”
조용하게 발을 향해 속삭여주면서
뽀송뽀송하게 빛나고 있는 이쁜 발을 만지작거린다.
피부에 흐르는 윤기가 참 곱다.
스슥- 스슥-
언제 손바닥으로 가볍게 스치고 비벼봐도 기분 좋은 감촉이다.
입가에 고인 침을 살짝 모으더니
하얀 우윳빛의 오른 발을 가만히 들고, 자기 입으로 가져간다.
쪽...
발등에 가볍게 키스를 몇차례 해주고
이내 오른발의 엄지와 검지 발가락 사이에,
갑자기 넘실거리는 혀를 집어 넣는 것이다.
“우응....”
“?... 츠르릅... 쭙”
자고 있는 누나의 발은 무척 귀엽다.
키도 크고 몸매도 뛰어난 스타일이 발군인 그녀.
손과 발도 꽤 이쁜 것이 잘 다듬어진 조각처럼 매력적이다.
장신의 체형에 비하면 발이 그리 크지 않은 편.
이렇게 발까지 이쁘고 섹시하면.. 못 참지..
동준은 흐뭇한 눈으로 누나의 각선미를 즐기며
두 손 위에 그녀의 싱싱한 맨발을 올려놓고..
“쪼옥, 쪼옥...”
소리내어 맛있게 발가락 사이 사이를 빨았다.
“응.... 흣... 간지러워..”
“..... 쪼옵.. 엇, 깼어?”
“.......응? 뭐야.
너 언제 들어왔니?”
“온지 좀 됐지.. 누나가 개판으로 널부러져 자고 있길래”
“하핫~ 얼마 어질지도 않았는걸 모..
어 근데? 너 지금 내 발가락 빠는거얏..??”
“흐흐, 왜 안돼, 싫어?”
“싫은건.. 아니지만..
간지럽고 바보야.. 자고 있는 사람을 그렇게..”
“뭐 어때. 이렇게 발가락 틈새를 혀로 빨아주면 좋아하면서~?”
“야앗.... 누가 들으면 큰일날 소리하지마..”
“히히, 발가락 많이 미끄러?”
“응... 너무 차가워, 축축해 바보야”
“이리와 그럼~ 타월로 좀 닦아줄게”
“칫~~
그리고 나서, 또 좋아서 빨아줄거지?”
“으흠~~ 글쎄? 원한다면 얼마든지~
약간의 구린내가 나기는 나지만 말야 하하핫”
“구, 구린내라닛...
오자마자 깔끔하게 씻었는데 무슨 냄새가 나... 죽을래”
짖궂은 동생의 말에, 슬쩍 화내는 척하며 베개를 던지는 누나.
그러나 입과 눈은 즐거운 듯 웃고 있다.
잠시 어수선한 거실을 말끔하게 정돈해두고,
간식 몇가지를 그릇에 담아 차와 함께 가지고 온다.
사이 좋은 오누이가 나란히 소파에 앉아
“사각 사각..”
“오물 오물.. 쩝..” 소리를 내며 다과를 즐긴다.
“요즘 학교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거야”
“우리 학교?”
“그래, 너네 학교. 아니~ 정확하게 너 학교 생활 말야~”
“평화롭지. 수업 안 거르고~ 잘 챙기고 있어..”
“그런거 말고”
“응?”
“수업이나 다른 생활은 알아서 잘 할테니까 안 궁금해.
그런거 말고, 요즘에 만나는 여자애는 생겼어?”
자스민 차를 음미하며 후룹- 들이키는 동준.
누나의 말에 뭐라고 대답할까 고민하는 표정이더니,
타각-
잔을 내려놓고 슥~ 누나의 하체에 다가앉는다.
“왜, 왜 이렇게 밀착해..
조금 떨어져서 얘기해도 되잖아..”
“만지면 어때서, 내 여잔데~? 흐흐”
“뭐.. 어..디가 네 여자니.. 호호, 참나..”
“와아~ 다리가 엄청~
부드럽고 피부도 미끄러워 누나”
“......... 고마워..”
“여전히 최상급이야. 음~.. 냄새도 좋고..”
“..............”
일부러 짖궂게 행동하는 동준.
누나가 당황스러움에 얼굴이 빨갛게 물드는 것을 곁눈질한다.
하얗고 촉촉하게 손 끝에 닿는 그녀의 살결.
매끄러운 허벅지와 무릎을 사르르..
재미삼아 손가락으로 간지럽힌다.
그러자 누나는 억지로 참는 척, 몇초동안 버티더니
곧 “푸하~~! 얏!
하지마 멍청한 놈앗~” 하며 동준을 밀쳐냈다.
힘도 좋아서,
터프한 누나의 발길질에 그만 소파 한쪽 끝까지 밀려난 동준.
“아야.. 냅다 발로 가슴팍을 차다니..”
“읏, 미안해.. 너무 간지러워서 혼났단 말야.
만지는 건 좋은데 왜 간지럽히냐고~? 꼬마 변태”
“재밌자나~ 이리와. 다시 만져줄까?”
“꺅~ 저리 가.. 어후 얏...
만, 만지지도 말아. 너는..
왜 자꾸.. 하응? 꼬집기까지 하니..”
여느 남매의 일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그림의 두 사람.
동준은 친구들 앞에서 보여주는 어떤 미소보다
누나와 함께 장난치고 웃는 이 시간이 가장 소중했다.
오늘 민규, 영섭과 신세를 한탄하기도 하고
묶혀둔 얘기들을 정리하며 감정도 솔직히 털어놓았지만
자꾸만 최근의 청춘사업에 대해 캐묻는 녀석들 때문에 짜증이 나던 참.
이렇게 사랑하는 친누나와 함께
오붓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또다른 축복이 아닐까..
생각한다.
-
동준은 이름만 대면 아는, 고급스런 강남의 대형 아파트에 살고 있다.
양친은 유명 시중은행의 지점장인 아버지의 경력차,
어머니와 같이 해외에 파견 근무로 나가 있는 것이다.
듣기로는 독일과 폴란드 사이를 오가는 국경지역의 지점 관할이라 했다.
앞서 말한 누나는, 동준보다 한 살 연상이다.
올해 스물 다섯 살인 동준과
단둘이 함께 살고 있는 "허수빈"이라는 이름의 26살 여성.
누나 수빈과 동준은 성만 같을 뿐이지, 서로 피가 섞여 있지 않았다.
동준은 아주 어릴 때 어머니를 사고로 잃었고
수빈의 생부는 살아 있지만, 어머니와 이혼한 상태였다.
즉 동준의 부친과 수빈의 모친이 재결합하면서
얼떨결에, 한집에 같이 살게 되고부터 둘은 친 남매처럼 지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앞서 진술했듯이
동준이 두 살바기 어린 아이일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오랜 시간이 지날 때까지, 동준은 이 사실을 아예 모르고 있었다.
누나 수빈만 진작에 사실을 알고 있었고...
열 한 살의 나이에, 수빈은 우연히 집안에서 속삭이는 부모의 이야기를 엿듣게 된다.
당시 수빈은 어린 마음에 상당한 쇼크를 받았지만
이것이 트라우마로 이어진다든가.. 마음의 상처로 남지는 않았다.
단지 우리집은 남들과 약간 다른 배경의 가정이구나-라는 생각 정도.
티가 나지 않도록 딸과 아들을 공평하게 대우해주고
진심으로 사랑하며 아껴주었던 부모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사실을 알게 된 어릴 때에도, 장성한 지금도..
수빈은 부모님 두분에 대해서 조금도 서운한 감정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문제는 동준인데.
동준이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4년전의 21살 때다.
172cm, 67kg의 탐스러운 핫 글래머.
허수빈은 현재 최고로 잘나가는 연예인급 레이싱 모델 중에서도, 탑 클래스에 속한다.
피팅 모델로 스무살 때 데뷔해서 차근 차근 성장해온 그녀.
이듬해 선배의 소개로 레이싱걸 업계에 데뷔한 후,
빠른 속도로 폭넓은 인지도를 얻으며 인기를 끌었다.
스물 여섯 살인 현재는 최상급 모델에 속할 만큼 페이와 대우가 우수하다.
운동으로 다져진 탄력적인 S 라인의 몸매에
소위 말하는 ‘베이글’이라는 표현에 딱 들어맞을 정도로,
글래머러스한 몸매와는 안 어울리게.. 어린 아기같은 베이비 페이스를 지녔다.
단순히 어려보이는 동안 외모 뿐 아니라..
고등학교 시절 대쉬해오는 남학생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을 정도로,
수빈의 서글 서글하게 생긴 매력적인 미모 또한 일품이었다.
가슴과 물오른 엉덩이의 볼륨감이 상당히 발군이다.
꾸준한 하체 트레이닝으로 꿀벅지를 갖게 된 수빈.
아울러 유행하는 애플 힙을 얻기 위해, 남들은 모르는 피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결과 지금은 여자들이 선망하는 워너비 라인의 소유자가 되었고.
자칫하면 어깨가 너무 넓어질 지도 모른다는 지인의 조언에 겁을 먹고..
어릴 적 즐겨하던 수영은 일찌감치 그만두었다.
그래서 다행히 어깨는 너무 좁지도 넓지도 않고 보기 좋은 편.
물질적으로 많이 여유가 없었을 데뷔 초부터 (그래봤자 부모의 지원이 있었지만..)
반짝 반짝 빛나는 이쁜 피부가 매력포인트였다.
그리고 6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와 동일하게 촉촉한 살결을 유지하기 위해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출중한 탤런트 급의 미모를 지닌 이런 누나 덕분에
동준은 어디서든 괜히 누나를 생각하며 자랑스러워했다.
딱히 누나에 비해 내세울 것 없는 자신이지만,
이쁘고 잘빠졌을 뿐 아니라..
성격까지 싹싹하고 멋진 누나는 자랑하지 않을 수 없는 대상이었다.
“누나가 좀.. 잘 놀게 생겼던데요”
..........
이런 류의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놀게 생기다니, 어딜 봐서!
본인이 볼때는 톡톡 튀는 상큼함이 볼때마다 기분 좋아지는 누나인데..
동준의 눈에 비친 수빈의 얼굴은
연예인에 비교하면 약간 미스에이의 수지와 비슷한 이미지다.
이런 이야기를 했다가 뭇 지인에게 질타를 받기도 했지만..
적어도 ‘어쩐지 첫사랑의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는’ 느낌 만큼은 사람들도 인정해주곤 했다.
또한 수빈은 끼 좀 잘 부릴 것 같은 세련된 외모와 달리..
스물 두 살때까지는 순결을 유지하고 있었다.
결혼하기 전에는 여간해서 꼭, 처녀를 지키겠다는 다짐.
그런 자신의 신념을 믿고 있었고 지킬 자신도 있었다.
정말 죽을 만큼 사랑하는 남자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혹은 나타나더라도)
생긴 것 답지 않게, 결혼 후 남편에게 주어야겠다는 생각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런데 이 기특했던 마음가짐이...
가장 가까운 존재에 의해 하루 아침에 무너지게 된다.
-
스물 한 살의 겨울.
동준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서클 합숙을 마친 뒤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덧 11월말의 추운 계절..
집에 들어서니 사람의 온기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고리타분한 누님 같으니.
생활비 빵빵하게 지원받으면서, 기름값 아낀다고.. 참.
겨울에는 적당하게 아끼고 살자고 누나한테 또 잔소리를 할 참이다.
3박 4일간의 축구 클럽 훈련으로 몸이 녹초가 되었다.
속리산까지 다녀오느라 몸 이곳저곳이 쑤시고 죽을 맛.
어린 나이인데 뭐 그리 힘든지,
나지막한 비명을 지르며 후다닥 옷을 벗고 욕조 안으로 뛰어든다.
“으드드드.. 엥간히 잠궈놔야지 좀!
사람이 살만한 온도는 유지하고 살아야 될 것 아냐, 아줌마.. 아읏~
아... 좋다.. 졸 따듯해~~”
뜨거운 목욕물을 듬뿍 받으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푹 담그고~ 시원한 행복감에 몸이 노곤해진다.
손과 발, 그리고 각종 관절의 마디 마디마다
그동안 쌓여 있던 피로감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기쁨을 지르는 듯 하다.
“흐아아... 너무 좋다... 역시 목욕은 영혼의 세탁이야, 낄낄낄”
좋다고 혼자 떠들며, 부엌으로 나오자마자 벌컥 냉장고부터 연다.
음......
매의 눈으로 먹을 것을 점검하며 집에 없는 동안,
칠칠맞은 누나가 먹을걸 잘 사다놨는지 확인한다.
“안되겠네..
* 이 작품도 어느새 5개월 만의 연재가 되었네요.
그동안 답답한 마음이 드셨겠지만, 성원하며 기다려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한가지 꼭 알려드릴 내용이 있습니다.
"형사취수"라는 제목은 다음 10회부터는......
[무지개빛 연인들]이라는 다른 제목으로 이어질 겁니다.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여기 지면에서 다 풀어내기는 어려우니... 차차 설명드리고요.
-
9부
“시볼.. 성질은 뭐같아서.. 아침부터 난리야”
입이 튀어나온 얼굴에 불만 한가득.
종로에서 뺨맞은 민규, 중얼 중얼거리며 화를 삭히고 있다.
사아아.......
머리를 가벼이 스치며 떨어지는 나뭇잎.
벤치 옆자리의 동준은 또 무엇 때문에 심기가 불편한지 궁금해진다.
“박씨 또 왜그래~~ 이 좋은 날씨에~”
“.......”
“보나마나.. 구겨진 얼굴 보니까 하연이 때문인데? 또 싸웠나~?”
“아니.. 말하자면 길어..”
“하하, 그래도 말해봐, 나는 너네들 사정을 다 이해하자나..”
그 말을 듣고 잠시 고민에 빠진다.
녀석의 말 그대로 동준만큼 하연과 민규 각자의 입장을 잘 아는 사람은 없겠지만..
지난 번 있었던 일을 그대로 털어놓을 수도 없어서, 머리를 굴려본다.
“이.. 이것이... 아침부터 이상하게 지랄을 하잖아!”
“얌마, 지랄이 뭐여.. 사람들 다 듣는다.
흥분하지 말고, 차분하게 얘기해봐”
하연의 집에서 있었던 일을 적당히 살을 붙여 이야기해주었다.
물론, 마지막에 하연이 선사해주었던 파격적인 서비스 부분만.. 비밀로 한 채.
동준은 상당히 놀라는 얼굴이다.
하연, 민규 각자가 용기 있게 한걸음씩 다가갔다는 이야기에..
입을 다물고 듣는 내내, 정말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 그래.. 그랬구나..”
“어.. 말하다보니.. 흥분해서 이말 저말 다 나왔네..”
“아냐, 딱히 이상한 얘기는 없었고.. 재밌게 들었어”
“재미있게..?”
“어, 어어.. 예상치도 못한.. 비밀 이야기를 들어버린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하네.. 하하..”
“.......”
진지하게 얘기했더만, 그 멍청한 반응은 뭐야.
민규는 동준에게 향하던 얼굴을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금새 토라진 민규의 모습에 동준도 장난스런 미소를 띄운다.
아무 말 없이 벤치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산뜻한 옷차림의 여대생 여러명이서 헤어지는 인사소리에, 동시에 시선이 한곳을 향한다.
“....... 뭐라고 말 좀 해봐. 왜 가만히만 있냐”
“으응?...”
“니 생각이 어떠냐고, 임마”
“아.. 미안.. 나도 너무 놀라서.. 뭐라고 말하나 생각좀 하느라..”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연 민규의 재촉에 동준도 말을 더듬는다.
“민규야.. 음..
하연이가 말이다.. 너도 사귀어봤으니까 많이 들은 얘기가 있겠지..
그렇지만 또.. 의외로 몰랐던 부분도.. 아직은 많을 거라고 나는 생각해”
듣는 민규, 아무 반응 없이 눈만 꿈뻑인다.
“하나 하나 다 끄집어낼 순 없지만..
너하고 헤어지고 나서, 한 3년 됐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마음 고생도 많았고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그러더라”
“나하고 헤어진 뒤부터?...”
“어어..”
아, 이상한 어감으로 들릴 수도 있겠구나.
고개를 돌려 동준의 눈과 눈을 마주치는 민규.
다시 정면을 보며 대화를 재촉한다.
“......조울증이라고??”
“그래. 우울증의 한 종류잖아.. 알지”
“알지.. 조증이랑 우울증이랑 반복되는 거.. 하연이가 그거야?”
“........
엉..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핫핫, 또~~ 그리 살벌하게 째리지말곰마. 나도 어쩌다 주워들은 거여”
“아니야.. 그 말 들으니까 나도 뭐 생각이 나서..
조울증이면..
그날 그날 기분이 몸 상태 컨디션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바뀌는걸 말하지?”
“얼추 그런거지. 계속 기분이 업되있다가 또 다운되는 상태의 반복 아닐까..”
그런가..
고 전날까지만 해도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모습이,
검은 뿔테 안경쓴 기숙사의 깐깐한 사감 선생을 떠올리게 했다면..
데이트를 했던 그 날의 사랑스러운 모습은 360도 전혀 달랐다.
앞뒤를 예측할 수 없었던 하연의 변화무쌍했던 차이라..
정신적으로 도대체 어떤 무섭고 힘든 사연이 그리 많았길래..
극심한 우울증 스트레스를 앓았을까.
몇마디 더 해주려고 민규를 측은하게 바라볼 뿐,
동준 역시도 하연에 대해 명확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에
뭐라 섣불리 단언해주지도, 제대로 안심시키지도 못한다.
동준의 이야기를 들은 후, 머리를 짜내 신입생 때부터의 기억을 되짚는 민규.
짧은 회상만으로 기억의 단편들을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사귀는 사이 종종 변덕스런 모습을 보이던 하연을 떠올려본다.
“... 아닌데.. 성격이 확실히 지랄 맞긴 했어도, 조울증일 정도로..
막, 헷까닥하고 이랬다가~ 저랬다가..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뭔 소리를 하는 거냐?”
“아, 아니야 암것도, 혼자 생각하느라..”
“하하~ 그럼 안돌아가는 머리 더 굴려. 더운데 가서 포카리나 빼올게”
-
몹시 마른 갈증이 나던 아침이었다.
겨우 겨우 잠에서 깨어, 잠기운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머리를 무겁게 흔든다.
.........
여기는?
짧은 머리카락이 돼지 꼬랑지처럼 부스스 흩날린다.
몽롱한 눈빛으로 잠에 취해 사방을 훑는 민규.
낯선 광경 같기도 하고, 어디서 한번은 봤던 집안 생김새 같기도..
아아!
순간적으로 퍼뜩 간밤의 일이 떠오르며, 목에서 뼛소리가 우두둑 날 정도로 고개를 흔든다.
맞아...
하연이 선사해주는 꿈같은 밤을 보낸 뒤-
무겁게 감기는 눈꺼풀의 무게에 못이겨.. 그대로 잠들어 버린 것 같다.
그렇구나. 아직 하연의 집이었구나.
하연이 덮어준 얇은 이불이 몸을 감싸고 있었다.
어저께, 하연이 입으로 뜻밖의 서비스를 해준뒤 엉겁결에 벗어 내동댕이쳐둔 바지는 어디에?
몸에 걸치고 있던 하얀 셔츠도 벗겨져 있다.
옷가지의 행방을 알수가 없다..
정수기의 냉수로 “쪼르륵-” 시원하게 목을 적신다.
꿀꺽...
혹시나 아직 방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을 졸이며 안방을 두드린다.
"하연아, 혹시 방에 있어..?"
아무 반응이 없다.
하연의 안방 문고리를 잡아 돌리려다, 실수하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먼저 현관으로 다가가 그녀와 자신의 신발을 살핀다.
민규의 운동화는 둘째치고, 하연이 어제 신은 신발도 나란히 정돈되어 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 아니지. 이 녀석은 구두도 매일 바꿔신을 테니까..
다시 방 앞으로 다가가, 가볍게 호흡을 거두며 문을 잡고 돌린다.
하연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작은 기대를 했던 모양.
아리송한 표정으로 집 내부를 둘러본다.
‘엇...’
어제 라면을 같이 먹었던 상아색 탁자.
하연이 자필로 적어둔 하얀 쪽지가 놓여있다.
두근거리는 마음보다, 약간의 두려운 기분으로 펼쳐든다.
[잘 잤니?
너 입고 왔던 바지랑 티셔츠는 바로 빨아서 발코니에 말려 놨어.
혹시 배고프면 가스렌지 위에 아욱국 끓여놨으니까, 데워서 먹어.
나는 아침부터 근무라 먼저 나간다. 안녕]
잠시 말없이 서서, 하연이 직접 쓴 필체를 감상하듯 들여다본다.
여전히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글씨구나.
쪽지 내용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할 말만 적어둔 것이라
약간의 섭섭함과 허전함이 몰려 왔다.
‘그렇게 어젯밤에 같이.. 뜨겁게 타올랐으면..
그리고 나서 뭐가 있었다든가, 잠들어버려서 아쉬웠다든지 이런 말도 할줄 알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하연이 간밤에 보여주었던 놀라운 모습의 환영에 나른하게 빠져들 때였다.
어디까지가 하연의 진정성이 담긴 본 모습이며
또 어디서부터가 그녀의 한꺼풀 가면을 벗긴 다른 얼굴인지..
에이, 학교에 가서 직접 물어보자.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핸드폰부터 집어든다.
“헉, 잠깐만! 오늘 화요일이야?!”
그제야 시간을 보니 벌써 오후 두시다.
어제 주량을 넘겨서 맥주를 마시고 술기운까지 더해져..
엑기스도 강제 추출(?)당한 뒤, 정신없이 잠에 취했나보다.
빌어먹을..
머릿속이 짜증으로 뒤죽박죽이 된 와중에도, 시간표는 번개같이 스쳐 지나간다.
오전에 전공 하나 교양 한 개 날려먹었다.
뭐 됐어, 이제 와서 죽어라 뛰쳐나가봤자..
포기하면 마음이 편하다.
풀썩~ 하연의 체취가 배어있을 부드러운 가죽 소파에 몸을 맡긴다.
짧은 순간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누빈다.
물론 대부분은 어제 있었던 하연과의 즐겁고 설레었던 데이트 과정들.
여전히 실감도 나지 않고 손에 잡히지 않는 뜬구름들 같다.
폰 액정화면을 보니, 하연이 남긴 카톡 하나가 눈에 띄었다.
좀 늦게 들어올테니까 느긋하게 쉬다 돌아가도 좋다는 말...
작은 배려가 고맙기는 한데..
뭔가 아쉬운 기분에 액정을 어루만진다.
뭐라고 한마디라도 보내볼까.
하지만 그마저 쉽게 할 수 없었다.
늦게까지 잠에 취해 일어나놓고, 한창 일하고 있을 그녀에게 메시지를 보내라니..
어젯 밤의 일도 환상처럼 느껴지는 민규에게,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 아니겠는가.
그렇게 화요일 하루를 날려버리고
밍숭맹숭한 하루를 의미없이 소진한 뒤 맞이한 아침.
여느 수요일 오전과 같은 시간이지만
굉장히 떨리는 마음으로.. 조교실의 문고리만 붙들고 벌써 5분째 못들어가고 복도에 서있다.
민규 곁을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스쳐 지나가는 여학생.
그 시선을 황급히 피해 반대쪽 창문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달칵-
지가 얼떨결에 문을 돌려놓고도 그 소리에 놀라 흠칫-한다.
끼이이...
이 거지같은 문 그을음도 니스칠을 하든지.. 보수를 해야겠군.
들어갈 엄두를 못내고, 처음 방문하는 사람처럼 문간에서 안을 들여다본다.
“일찍 왔네? 뭐하고 서있냐”
“... 어! 어어! 아니, 아니..
문 열다가 잠깐 빼먹은 것 생각이.. 언제 왔어??”
“.....? 진작 왔지.. 왜 이렇게 경끼를 일으켜~ 후후훗”
“아하하.. 반가워서 그래.. 하연아”
짧지만 밝게 웃어주는 예쁜 얼굴.
역시, 아름다운 그 미소는 여전하구나..
사무실에 들어오기 전까지 바싹 얼어있던 심장이, 눈녹듯 녹아내리는 감흥..
가만히 가슴을 쓸어내리며, 조용하게 말을 건넨다.
“저기.. 어제는 별 연락도 못했고, 미안해”
“아냐. 나도 너 두고 그냥 나가는데 좀 미안한 마음 들더라.
잘 일어나서 집에 들어갔니?”
“어.. 그랬지, 니가 그.. 차려준 국도 맛있게 잘 먹었고”
“응~ 그거 입에 다행히 맞았어?”
“맛있던데.. 잘먹었어 헤헤”
“후읏~ 다행이다..”
아침부터 바쁜 일이 있어서일까.
상기된 붉은 얼굴로 하연의 옆 얼굴을 곁눈질하며 묻는 민규와 다르게
하연은 눈 앞의 모니터만 열중하여 바라보며 눈길을 주지 않는다.
아침에는 서로 일이 바빠서 그러려니.. 서운한 마음을 애써 숨겨본다.
그런데 오전 타임 내내-
하연이 민규를 대하는 모습은, 지난 월요일의 데이트하기 전과 다르지 않았다.
살갑게 팔짱을 끼며 애교섞인 콧소리를 내던 싱그러움은 어디로...
말투도 예전과 다름없이 단답형으로 사뭇 냉랭함이 흐른다.
이쯤 되니 실실 웃으며 눈치껏 기분을 맞추려던 민규도
11시를 조금 넘기자 슬슬 화가 치밀어올랐다.
이젠 예전처럼 가만히는 못있는다, 할말은 하고 살자..는 생각에
타다닥 타닥-
기계적으로 키보드만 두드리는 하연의 오른 손목을 탁~ 낚아챈다.
“...? 뭐하는 거얏, 팔목 아프게?...”
“여기좀 봐봐, 그렇게 할 일이 많냐?”
“...... 너 왜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어?”
“어...?.....”
그러고보니, 하연의 하얀 손목을 거칠게 붙잡은 것부터 대단한 객기였다.
내가 무슨 짓을 했지..?
스스로 놀라서, 손에 꽉 쥐고 있는 얇은 손목을 얼른 놔준다.
“아파.. 그렇게 안보이는데 힘은 세졌네..”
“미안해.
........ 전혀 눈길을 안주니까, 나도 모르게.. 확 잡아서 돌려놓은 거야”
“칫, 아무렴...
그래. 바빠서 못 쳐다본 건 미안하게 됐고, 무슨 말을 하고 싶어?”
“엇... 그게..”
이럴수가.
월요일에 앵앵거리는 높은 톤으로 품안에 안길 듯 말듯하던 그녀석이 맞나.
가까스로 시선을 붙잡긴 했지만, 감정이 섞이지 않은 하연의 얼굴이었다.
마치 데이트에 관한 일은 까맣게 잊고 있는 듯..
아름답긴 하지만, 무미건조한 검은 빛깔의 눈동자만 빛난다.
민규는 하연의 그 검은 눈을 마주 보며 천천히 하고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리고 난 후의 결과는-
동준의 앞에서 울분을 터뜨리던 그 장면의 처음으로 돌아간 것이다.
하루를 두리 뭉실하게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를 정도로 기운이 빠져있던 상태.
보다 못해 동준은 친구놈의 팔을 붙잡고, 4시 강의가 끝나자마자 학교 앞 술집으로 데려온다.
늘 이시간대면 알아서 문이 열려있는 학교 인근의 주점들.
여전히 언짢은 기색의 민규를 보며, 좌불안석의 동준도 주문부터 시켰다.
“정신좀 차리라고 제발... 마 무슨 사정이 있겠지 하연이도~
오늘 컨디션이 아주 제로였다든가, 아~! 그날이었을 수도 있자나”
“그날..?”
“생리..일지도 모른다고 이 닭대가리 싯끼야.. 확 기냥~ 으으~”
“아!... 맞다... 그럴수도.. 있었겠네..”
“알아들어?
그 자식이 원래 맨날 저기압 모드인건 맞는데, 그래서 더 까칠했을 수도 있다고, 등신아, 그니까 술이나 받아 쳐묵어”
“알았어. 이 개새야..
들어오자마자 욕만 퍼붓고 지랄이야..”
“크키키~ 욕을 안주삼아 마셔야 기운이 쌩쌩도는게 너 아녀~”
민규는 애써 연락하고 싶은 걸 꾹 참으며
수요일 저녁부터 근무가 있는 금요일까지 일부러 연락하지 않는다.
내심 생각한다.
저도 감정이 담긴 살아있는 생물체면, 먼저 연락이 올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연은 아무 연락이 없었다.
금요일은 서로의 근무시간이 좀체 맞지 않아,
하연의 얼굴을 볼 겨를도 넉넉지 않기까지...
이쯤 되면 잊고 묵혀 두었던 소심증이 다시 번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너덜너덜해진 감정을 추스르기도 버겁다.
조울증을 한때 앓았던 아이이고 아직 완치되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니
힘들고 갑갑하겠지만, 며칠간 좀 지켜보자던 동준의 권유도..
속이 쓰리고 괴로운 민규를 달래주진 못한다.
금요일 저녁, 홀로 그렇게 하연 생각에 그리워하다가
시름 시름 침대에 널부러져, 여느때와 다름없는 몰골로 잠깐 잠든 민규.
그 타이밍에 예상치 못한 소식이 날아든다.
그래, 잊고 있었구나.
하연 이 썩을년에게만 정신이 팔려서... 형수랑 쇼핑가기로 했던 것을 까맣게..
자다 일어나서 미친 사람마냥 자취방 안을 뛰어다닌다.
토요일 오전.
지난밤을 기쁜 환희로 젖어.. 들뜬 마음으로 보낸 민규.
충분히 잠을 못 자고 나왔는데도-
정아의 눈에 비치기에는 멀쩡한 혈색과 건강해보이는 얼굴이었다.
오늘 아침에 둘이 만나기로 한 장소는
민규가 사는 곳에서 가까운 강변역 CGV 였다.
차를 세워두고 큰 빌딩 앞 넓은 광장에서 반갑게 만난다.
함박웃음을 어렵사리 티나지 않게 지우는 민규.
스리슬쩍, 사랑스러운 형수님의 가녀린 어깨를 끌어 안으려 팔을 뻗는다.
..... 아차? 이게 무슨 짓이지...
무의식적으로 정아의 탐스러운 어깨를 더듬으려다
화들짝! 놀라는 민규.
“......?
왜 그러세요, 도련님? 호호, 놀라신 것 같은데”
“어, 아니에요?.. 헤헤.. 아무 것도.. 아닙니다..”
품에 착 들어와 감기는 하연의 늘씬하고 선이 가는 허리를 상상했다.
하연이 알아서 팔장을 껴주고 애교를 부리던 그 월요일 오후가 문득 생각난다.
누구 앞에서, 이 순간에 이런 망측한 실례를..
도리도리~
미친 사람처럼 눈을 꾹 감고 머리를 힘껏 흔든다.
형수 정아는 토끼같은 눈망울로, 걱정스럽게 민규를 바라보았다.
“호호, 어떠세요 도련님, 오늘 이른 시간인데.. 컨디션이라든가, 기분은?”
“네. 아무 이상없이 쌩쌩합니다~~ 보시는 대로~ 헤헤”
“정말이에요? 호호..”
경쾌함이 화사하게 빛을 발하는 여인의 미소.
살구꽃이 은은하게 눈 앞을 감도는 듯한 감동.
자애로운 그 따스함에 맥이 스르르 풀리는 민규.
며칠간 하연의 일로 속을 끓였기 때문일까.
형수와 만나 잠깐의 정다운 이야기를 나누고 긴장이 풀리자마자
무기력하게.. 몸의 기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잠시 정신 놓는 사이,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깜짝 놀라- 얼른 도련님의 힘 빠진 어깨를 잡아 끌어올리는 형수.
술 한잔 걸친 사람처럼 몸을 못가누는 모습에-
정아의 가녀린 눈매가 살짝 떨린다.
“도련님.. 아무.. 이상 없는거죠? 아픈 곳 없는거죠, 그렇죠?”
“..... 하하 형수님, 저 멀쩡해요..”
“에에, 멀쩡하지 않아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린데..
혹시 감기 기운 있으신 거 아니에요?”
잠깐 이래도 될까, 행동을 망설이던 그녀.
하얀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짚는다.
사소한 행동에도 몸을 ‘흠칫’ 떠는 민규.
이윽고 자신의 이마에도 손바닥을 대보고,
‘음 음, 이상 없는거 맞지?’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정아.
살짝 불그스레해진 얼굴로 웃으며 손을 내린다.
“다행이에요.. 열은 없는 것 같아.. 히힛”
“형수님, 저.. 정말 괜찮다고 그랬잖아요”
“흥~ 괜찮다고 말로만 안심시키면 어떻게 믿어요.
금방 제 앞에서 쓰러질뻔 하셨잖아요..
도련님 말씀은 이제 반 정도만 믿어야지 안되겠어요. 호호”
“하하.. 그러세요..”
역시 바라만 보아도 그립다.
언제나와 같이 설레임으로 뛰는 가슴.
저번보다는 한결 포근해진, 작은 여유라는 이름의 두근거림.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만남.
기꺼이 먼저 일찍 만날 것을 청해준 쪽은 형수였다.
한참 동안 사두고 쓰지 않던 겐조 향수를 뿌린 민규.
킁킁~
거의 뿌려본 적이 없어, 너무 진하지 않나.. 팔을 들고 코를 묻는다.
언제 써먹어 볼 일이 있어야 뿌리는 법도 알지.
아침에 가볍게 김밥과 떡볶이 등으로 식사를 해결하고
잠깐 둘러보다가 영화를 보기로 한 두 사람.
내심 최근 개봉한 SF 블록버스터로 발길이 끌렸지만
사람 좋은 눈웃음의 형수가 제안하는 멜로 영화를
감히..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래~ 마음 따듯해지는 로맨틱 코미디 나도 좋아하니까.
아마도 여자랑 함께일때는 분위기에 맞게 잘 따라주는게 좋지 않겠어.
캬~ 이런 이런~
스스로 생각해도 ‘어른이 되었어 어른이, 박민규’라는 자각에 기특하다.
영화를 보고 나오니 배가 고팠다.
금방 꼬르륵 신호를 보내는 소리에 둘은 서로를 마주보며 웃고.
형수의 안내로 파스타를 잘하는 집을 향해 들어간다.
“저.. 형수님.. 만나자고 어제.. 연락해주셔서 저, 너무 감사했어요, 진짜”
“예..? 호호.
저는 미리 지난주에 정해둔 약속을 지킬 마음이었는데요..”
“아, 그건.. 그건 저도 기억은 하고 있었지만요..
생각지 못한 호출이라서 더 감동을 받았다는 이야기예요”
“네.. 호호”
젠장.
왜 또 이렇게 긴장해서
생각한대로 말도 제대로 못 뱉고 병신처럼 덜덜 떨리는 거지...
안되겠다. 일단 먹자.
자꾸 빨개지는 얼굴을 정상적으로 가라앉히기 위해서라도,
얼른 배를 채워 몸을 되돌려 놓아야 말도 잘 나오겠지 하는 생각이다.
“편하게 얘기하세요.
제가 보기엔 우리 작은 도련님, 오늘 얼굴색이 피곤해보이시네요.
후훗.. 저 어디 도망가지 않을 거니까, 천천히 이야기하셔도.. 다 들어드릴게요”
나긋나긋-
따스함이 한가득 느껴지는 정아의 달콤한 목소리.
성대에 꿀이라도 발랐나..
앞에 마주 앉은 여인으로부터 느껴지는 담백한 체취.
향수를 썼는지, 단순히 샴푸 향기가 묻어나올 뿐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아무려면 어때, 굉장히 향긋하고 은은하다는게 중요하지.
배가 고파서 후루룹~ 빠르게 식사를 마친다.
천천히 음미하며 식사중인 형수를 살짝 곁눈질해보았다.
생각에 잠기는 민규.
이렇게 이쁘게 잘 웃어주는 착한 마음씨의 형수가 있는데
아까부터 잠깐씩이지만... 짜증을 유발하는 옛 여친의 얼굴이 떠오른다.
으으~
맛있게 먹고난 면발이 위 안에서 역류하는 기분이다.
형수와 나란히 서서 식당가 라운지를 거닐다가
눈 앞에 보이는 조용한 카페로 빨려들 듯이 들어간다.
사근사근, 귓가에 작게 귀기울이며 말해주는 것 같다.
형수님의 정감 있는 목소리는..
들으면 들을수록 사람을 치유하는 힘이 실려있는 것 같아.
형수와 담소를 나누는 사이에도, 아까 영화 보는 내내 가졌던 생각을 떠올려본다.
하연과 정아 두 여인의 보이스를 견주어보면
들리는 목소리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다.
얼굴 생김새는 사뭇 다른 느낌의 두 사람이지만
기본적인 목소리의 높낮이는 상당히 비슷한 톤을 가지고 있다.
앗! 이건 몰랐던 부분인데..
그 생각에 미치자, ‘이런 우연한 일치가?’라는 아이디어에 혼자 감탄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눈 앞에 두고 있는 이상형의 여인에 대해서 깊이 침잠한다.
몹쓸 옛 여친과 비교하는 자체가, 형수에게는 큰 실례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알지만 견주면 견주어볼수록, 소소한 즐거움이 있는 걸..
정아에게 의식을 집중한다.
타고난 상냥한 목소리에, 상대방의 감정을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온화한 감정을 실어 기분 좋게 전달하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는 여자다.
직업적으로 훈련된 소양을 몸에 지니고 있기 때문일까.
그렇지만 민규는, 그 잘 짜여진 듯한 ‘다정스러움’조차
형수 본연의 태도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단 한순간도 목소리의 단아함과 몸가짐을 가식이라 느껴본 적은 없었다.
형수 정아 입장에서도 작은 도련님에게
작은 애정을 담아 속삭이듯 말하는 목소리에는 거짓이 묻어있지 않았다.
제 멋대로의 상상이지만
민규는 형수의 마음가짐도 자신과 비슷하리라 짐작한다.
“호릅~ 음... 향 좋다..
아, 카톡 왔다.
움~? 도련님.. 도련님 여기 좀 봐요”
“네? 듣고 있습니다..”
“도련님도, 저랑 거의 동시에 톡 왔다구요.. 훗”
“아아, 죄송해요..”
살짝 의아한 눈으로 민규를 쳐다보았지만
곧 쿡쿡- 웃으며 시선을 핸드폰으로 가져가는 정아.
민규는 이어서 마음 놓고 상상을 이어간다.
그래... 희안~하게~~
둘이 목소리가 닮긴 했어...
“여기서 가볍게~ 에스프레소만 마시고요. 우힛~
그리고 이제 본 쇼핑을 하러 가는거예요~”
“하하. 형수님 근데 아까부터 좀 궁금했는데..”
“응? 뭐예요”
“백화점에서 잘 사신다고 하셨는데..
오늘 굳이 여기서 사기로 정하신 이유가 뭐예요?”
“에~? 아하~
아침에 여기서 도련님을 뵙자고 한거는..
보고 싶던 영화를 일찍 보려는 마음이 사실 있었기 때문이고요”
으잉.
벙찐 얼굴의 민규.
정아는 ‘너무 솔직하게 말했나’하는 눈치로 겸연쩍게 웃는다.
“호호.. 고백아닌 고백을 해버렸네요.. 죄송해요”
“아니에요 하하, 괜찮은데..”
“후후, 오늘 오전 스케줄은 오전반이고~
이제 점심도 먹었으니까.. 잠깐 쉬다.. 잠실로 도련님 선물 사러 갈 예정이었어요”
그렇게 아침부터 반나절 동안 이어진 형수와의 즐거운 데이트.
사심이 담긴 연애니 당연하겠지만
어떻게 시간이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저녁이 되버렸다.
형수는 다가올 여름을 대비하여 민규의 상, 하의 옷을 여러벌 사주었다.
극구 괜찮다고 민망해서 사양하려 했지만.. 고집불통인 여자다.
은근하게 살살 웃으면서 나중에 맘에 안들면 환불하라고 압력을 넣는다.
자취집에 도착해, 힘든 몸을 침대에 먼저 누이는 민규.
풀썩~
후... 힘든 하루였다 정말.
어찌나 긴장을 많이 하고 목이 탔는지.
형수께서 시간 시간 마다 짧은 데이트인데도
민규의 컨디션이 썩 좋지 않을까봐 배려해주는 바람에, 미안할 정도로 신세를 졌다.
진짜 천사야 우리 형수는.
아름다운 미모에 마음을 다스려주는 편안한 목소리.
게다가 황홀한 볼륨감이 멋스러운 S 라인의 명품 몸매까지.
가만히 누워 오늘의 형수를 떠올리자
두근 ~ 두근 ~
가슴이 행복하게 부풀어오른다.
“여보세요. 어어, 전화를 이제야 해주네.
아니 그런게 아니고.. 오늘은 예전에.. 동아리에서 알게 된 애랑 오랜만에 만났어”
“동아리라니, 여자?”
“응..?”
“설마 여자를 만났을 리는 없는데.. 동아리?
너 따로 활동했던 서클이라도 있었냐?”
“있어... 우리 과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하고 나 혼자 다녔던...”
오늘 낮에 두 번 걸려온 동준의 전화를 못받았더니
하는 일도 없으면서, 영화나 보여줄랬더니 뭘 했느냐는 추궁이다.
녀석에게 대답하면서 자연스럽게 거짓말이 늘었다고..
혼자 생각하며 웃는 민규였다.
시원한 찬물로 샤워물을 끼얹는다.
냉장고를 뒤져보니, 전에 안주로 사다논 육포가 보였다.
뭐 이거라도 어디야..
생각해보니, 저녁을 함께 먹기 애매한 타이밍이라
헤어질 무렵.. 형수는 민규의 눈치를 살피며 조금 난처한 얼굴이었다.
출출해서 육포를 질겅 질겅~ 뜯는다.
으으, 이렇게 질긴 걸 누가 좋다고 사다놓은 거지?
보나마나 참견하기 좋아하는 동준, 영섭 둘중 한놈이 집들이할 때 사놓았을 것이다.
술도 잘 못마시는 사람한테 억지로..
그래도 염치는 있는 녀석들이라,
가난한 자취생의 집에서 같이 뭉칠 때는 n분의 1 이상의 돈은 둘이 알아서 민규보다 더 계산하곤 한다.
아아. 편하구나.
좁고 몸을 옴짝달싹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내 작은 침대가 최고야.
헤헤, 실실 해맑게 웃으며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몸을 굴린다.
-
그로부터 벌써 2주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하연과 함께 얼떨결에 어울려, 데이트까지 보냈던 행복한 밤.
그리고 이후로 또다시 식어버린 두 사람 사이의 허전한 거리.
좋을 때는 좋았는데, 순식간에 없던 일로 되어 버리는 기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하연과 오랜만에 만난 그 처음으로 돌아가버린 일상이
민규는 너무나도 분하고 서러웠다.
‘기껏 사이 좋았고 분위기 끝내줬는데...
뭐가 뭔지도 모르는 사이에 어째서 또 이렇게 되버린거야...’
집구석 방안에 드러누워서,
이따금 애꿎은 이불과 베개를 향해 분노의 주먹을 날린다.
민규가 이토록 하연에게 분노 아닌 짙은 아쉬움을 느끼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앞서 2주 전의, ‘반짝 데이트’가 이뤄진 뒤로 하연은 여전히 민규에게 있어 공포의 대상이었고,
정말 같은 동일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그를 계속해서 멀리 대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자신이 좀 둔감한 체질이라는 걸 알고 있는 민규도,
하연의 사소한 변화를 생생히 느낀다.
그 따스한 봄날의 데이트를 기점으로...
오히려 두 사람 사이에는 더욱 차가운 냉기만 감돌고 있다는 것을.
서로 서로가 개인적으로 연락을 하지도 않고
극히 사무적으로, 조교 사무실에서 주 3회로 근근히 만남을 유지하는 것이 전부다.
이것은 도리어 남보다도 못한 사이라 할 수 있을 정도.
4월의 셋째주에 접어들던 어느날.
오랜만에 의기투합한 세 친구.
즐겨 찾는 학교 근처 민속주점에 자리를 잡고 신나게 술을 마신다.
별다른 화제가 없는 이상,
오늘도 메인 테마는 ‘x가지 없는 마성의 여자 정하연’에 대한...
적지 않은 서러움을 토로하는 민규의 이야기를, 친구 두명이 들어주는 것이었다.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다.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을 쌩까고 또 어색해한다니, 참~ 니들은 답이 없다”
“뭐.. 임마!”
“정말이야. 내 성격 알잖아 너네들. 나 같으면 절대 답답해서 못 견딘다”
“.........”
“하하, 괜히 민규 자극하지 마라..”
안쓰럽다는 얼굴로 민규의 노란색 둥근 잔에 막걸리를 부어주는 영섭.
늘 서로 불만어린 자세로 다투는 것은 민규와 동준 사이다.
간간이 상황이 심각할 때 조언을 더해줄 뿐이지,
기본적으로 두 사람에 비해 침착한 성격인 영섭은 말수를 아낀다.
“사실은 말야.. 지난주에 이런 일이 있었어”
“응..? 끄윽~”
“아, 씨발 트름 냄새.. 개객끼.. 아후 토할 것 같네.. 창문, 여기 창문 없어?”
“ㅎㅎㅎ 좀 구리긴 하다.. 창문 열었어~”
벌개진 얼굴의 민규에게서 터져나온 역한 냄새에
동준과 영섭은 코를 감싸고 죽겠다는 너스레다.
동준의 비밀스런 이야기가 이어진다.
“알아둬도 괜찮을 거 같아서 말하는 거야.
특히 너한테는 말해야겠지.. 여기 영섭이는 워낙 입이 무거우니까 흘리지 않을 거고”
“아이고 그래. 무슨 이야긴지 몰라도 날 믿어주니 고맙다 하하하-”
“........ 뭔 소리하려고.. 끄윽, 얼른 말해봐”
“oo 학부랑 인문관 건물 사이에 있는 골짜기 있잖아”
“벤치들 길게 있는 그 자리?”
“어~ 내려오면서 경치 좋게 보이는 거기..
우리 가끔 뭉치는 거기서 말야”
“응 응”
“......... 이건 참고로 3월 중순땐가. 그때부터 있던 일이야”
“알았어, 알았어 빨리 말해”
그럴듯하게 지나간 일을 재구성해서 생생하게 말하길 좋아하는 동준.
때로는 실감나고 재밌게 표현하는 그의 화술에-
점점 이야기에 몰입하는 두 친구의 눈빛도 술렁인다.
이야기는 하연에 관한 어떤 사건이었다.
9부 (하)
하연이 조교로 정식 임명되기 전부터,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은 학과내에서 요주의 대상이었다.
학과 일을 돕는 조교 치고는.. 보기 드문 비주얼과 당찬 성격의 그녀.
모델 같은 멋진 체형과, 도도하고 매혹적인 눈빛의 미모에
일찍부터 수많은 과내의 남학생들은 군침을 흘리며, 새 조교에 대한 썰을 풀었다.
화제의 주인공인 정하연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이 세 친구가 주워들은 이야기만 해도 꽤 되니..
신비로운 미색의 하연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얼마나 뜨거울지 짐작이 된다.
그런데..
여자의 미모를 가지고 품평하는 이야기들이라, 당연히 좋은 이야기만 오갈 수 없었다.
동준 왈, 가끔 긴 벤치에 몸을 편하게 기대고 있으면..
하루에도 여러번씩, 어려보이는 신입생들이 하연을 가지고 노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고 했다.
비단 1학년 뿐이 아니며 선후배에 관계없이-
학과 사무실을 자주 드나드는 남학생들이라면 곧잘 하연의 외모를 이야기한다고.
순수하게 예쁘다, 서늘하게 생긴 미모가 매력있다~는 투의~
좋은 쪽으로 칭찬하고 호감 갖는 사람들이 물론 대다수지만
욕정에 젖은 이들의, 하연을 범하고 싶어하는 썰들 또한... 동준은 여러번 들었던 것이다.
‘대가리에 피도 안마른 새끼들이.... 기도 안차네 나원..’
과감한 음담패설을 얼마나 해대는지,
애써서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리려고 마인드 컨트롤을 수차례 해봤지만.
절친인 이상, 남자들의 짜증나는 야한 농담을 듣는 것도 상당한 스트레스였다.
같은 남자로서 부분 부분 이해는 가지만,
이제 막 부임하게 된 새내기 조교를...
괘씸한 일부 녀석들은.. 어떻게 성적인 대상 이하로 밖에 여기지를 않는지.
하연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장점들과
당돌해 보이는 마스크 이면에 숨겨져 있는 여린 감수성을 알고 있는 동준..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그런 소릴 떠드는 녀석들에게, 무서울 정도로 분노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잠자코 듣는 민규의 얼굴은, 의외로 태연하다.
동준은 둘의 얼굴을 번갈아 살피는데
오히려 영섭 쪽이 감정이입되어 동준처럼 더 화를 내고 있었다.
“그중에 좀.. 유독 심한 미친 놈들이 한~ 대여섯명 있었어.
같이 띄엄 띄엄 몰려다니는 양아치들 같은데.. 수업 내용 말하는거 보니까 1학년들 같고..”
“응...”
“섹드립 지껄이는 놈들이야 한둘이 아니니까. 다 잡아 족치려면 힘들어서 안되고..
내가 눈여겨 보고 있는 개같은 것들이, 대 여섯명 정도가.. 젤 심하더라고.
한 묶음은 아니고, 그게 두 그룹을 합친 숫자야. 그래서..”
그때부터 동준은 그 신입생 두 팀의 주위를 맴돌며
가급적 시간이 남을 때마다, 녀석들이 떠드는 하연 관련 이야기를 친히 ‘녹음’했다고 한다.
일부러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보이스 레코더까지 사는 열정을..
그렇게 집요할 정도로, 2주 가까운 시간 동안
동준은 발품을 팔며 괘씸한 녀석들을 따라 여기저기 쫓아 다녔다.
때로는 버스 안에서 신나게 이빨 연주하는 녀석들의 이야기를 청취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학교 근처 주점과 카페 같은 공공연한 장소에서도
겁 없는 녀석들의 하연에 대한 과도한 성희롱을 숨어 들은 것이다.
“그래서,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알았으니까 결론만 어서 말해봐!”
“...... 뀨~ 여지껏 티 안내다가 갑자기 이러냐~~ 하하..”
“참다 참다 터지나보지... 나도 궁금하다. 그래서 결론이 뭐, 어떻게 됐어?”
“아~나 이것들... 몸이 아주 달아올랐구만 그냥? ㅎㅎ”
본때를 보여주자고 결심한 동준.
나름의 확실한 증거 수집을 마치자, 그 다음에는 처절한 응징에 들어갔다.
동준은 172cm의 비교적 단신이지만, 운동신경이 대단히 뛰어나다.
몸을 재빨리 쓰는 것에 어릴적부터 능해 싸움을 잘 했다.
게다가 특공여단 출신이기까지 하니..
인적이 없는 공터 등지에서-
뭣 모르는 어린 양들을 몰아 넣고 강냉이를 터는 동준은 그야말로 신출귀몰이었다.
분노의 주먹 세례와 교육을 마친다.
본보기 삼아.. 엄중 경고차원에서
1학년 어린 후배들에게 (나머지 한 그룹은 잡고 보니 2학년) 긴 설교와 응징을 끝내고,
놈들의 학번과 핸드폰 번호부터, 반성문을 제출하겠다는 약속까지 카메라로 찍어서 남겨 놓았다.
가만히 듣고 있던 영섭,
잘 이해가 안간다는 표정으로 희미하게 웃으며 묻는다.
“잘했어, 아주 잘했는데.. 푸하하~
굳이 꼭 그렇게, 그 녀석들 인적사항 같은걸 수집해놓는 이유는 뭐야?”
“뭐겠어.. 나중에라도 행여나 지들은 그런적 없는데..
멀쩡한 사람 두드려 패서, 전치 몇주가 나왔는데 보상하라.. 이 지랄할까봐.
나중에 허튼 소릴 못하도록, 자기들이 지껄인 이야기들을 미리 녹음해 놓은 거지.
그리고 젤 중요한 이유가 또 있어..”
꿀꺽, 마른 침을 삼킨다.
뭔가 말을 할 듯 말 듯 하면서 빨리 입을 열지 않는 동준에게,
호기심, 반 분노 반으로 눈을 빛내는 둘이 재촉한다.
“..........
2학년 애들은 더러운 말들은 많아도, 그냥 그정도 수준에서 실행까진 안할 것들이야.
그런데... 아.. 말하려니 화나네.. 흐으~
신입생 개새끼들이, 하연이를..
다 같이 덮쳐서 강간...할 생각을 하고 있었잖아..”
웅성 웅성 시끄러운 주점이었지만
혹시라도 들릴까봐, 강간이라는 부분에서 동준은 주위를 살피며 톤을 낮췄다.
꽈악 쥐고 있는 주먹과
그의 힘껏 다물고 있는 입술 주변 근육이 가벼이 떨린다.
놀라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영섭과 민규.
민규 역시 동준 못지 않게 매우 상기된 표정으로, 가볍게 몸을 떨고 있었다.
동준은 틈을 주지 않고 말한다.
“그 뒤로는 아는대로야.
1학년 그 자식들은 정말 인정사정없이 팼지. 진짜 존나게 팼어 그중에 두놈은.
뼈는 안 부러지도록 신경 써서 했지만...
뭐 그렇게 된거야..”
“하아...”
“......... 그런 일이 있었군..”
“..... 상상하기도 힘든 일인데, 햐.. 뭐 그런...”
그정도로 하연을 진심어린 친구로 여기는 세 사람.
비록 나머지 둘에 비해서 민규의 감정은 좀 더 남다르겠지만..
의리있게 똘똘 뭉친 세 친구는, 동준의 깔끔한 뒤처리에 감탄하면서도 씁쓸한 여운을 남기고 있었다.
저녁을 넘어, 이런 저런 기타 자잘한 학교 얘기들이 오가고
어쩌다보니 민규-하연간의 러브 라인 이외에,
각자의 연애 사업에 대해 근황을 묻는 이야기가 나온다.
“섭이 이거는~ 요새 영계 사귀느라 졸라 바빠.
흐흐~ 몇 살이랬더라. 스무살 신입생이라 그랬었니?”
“아~~ 적어도 내 입으로 직접 공개하게 해주라.. 좀 기둘리! 크...
맞아. 민규한테는 첨 얘기하네.. 나 요즘 연애한다~”
듣는 민규는 이게 왠...
벙찐 얼굴로 영섭의 쑥스러하는 얼굴을 응시한다.
“...... 스, 스무살이면.. 완전 애기잖아!...”
“애기는 무슨 애기야,
요즘 스무살 애들 뒤로 호박씨도 엄청 까고 장난 아닌데~~”
“아니.. 내 말은..”
“하핫, 뭐 부러워서 그러는거지..”
자칭 ‘이론’ 연애박사라는 동준에게, 영섭도 그간 어지간히 시달렸던 모양이다.
처음 들을 민규를 위해, 영섭은 새내기 여친과의 이야기를 어색해하며 공개했다.
그리고..
영섭의 이야기를 듣던 민규, 동준을 향해 느닷없는 질문을 던진다.
“그래 너 임마. 섭이는 그 정도로 됐고.
새꺄, 얼굴이 요즘 아주 반들반들한데..
썸타고 있는 여자 진짜, 좀 말좀 해라~”
“우오~~ 그래, 이제는 말할 수 있.. 아니, 이제는 말해야 한다, 허동준!”
“이것들이...
그렇게 아까 내가 훌륭한 성공담 얘기를 들려줬더니, 물어보고들 지럴이네..”
“아니.. 어저께도 보니까 또 어떤 여자애가 고백하던데..”
“이 새끼는 고잔가.. 끄윽~ 너 좋다는 여자들이 한둘이 아닌데.. 임마?”
“아~ 시발, 박민규 트름 썩는내..
새끼야 얼굴 돌리고 입벌려, 아흐..”
자신에 대한 다른 질문에는, 침까지 튀겨가며 솔직하고 거침없이 답하는 동준.
입담이 워낙 좋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도 상당한 타입이라
물어보는 것에 특별히 꺼려하는 질문 따위는 없었다.
그런데 그런 동준이-
이상할 정도로 연애 관계의 진전에 대해서는, 솔직한 대답을 피한다.
가끔 경끼를 일으킨다 싶을 정도로..
각자 집에서 중간 정도에 위치하고 있는 주점인지라, 적당한 거리에서 버스를 타고 뿔뿔이 헤어진다.
피곤하다며 집으로 직행한다는 민규와, 술은 마셨지만 주량이 좋아 알바하러 가도 문제없다는 영섭.
두 사람을 뒤로 하고, 동준도 버스에 올랐다.
불빛에 스쳐 지나가는 차창 밖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뭔가, 골똘이 생각에 잠긴 얼굴이다.
“휴......”
자기도 모르게 진한 한숨을 내쉬는 동준.
말못할 사연이 있는지 얼굴 표정이 무겁다.
삐빅~
버스에서 내려 집을 향해 터덜- 터덜- 걸어가면서 생각에 잠긴다.
“아무리 궁금해도 그런 얘기는 못하지...
자꾸 물어보고, 나 좀 난처하게 하지 마.. 개새끼들아..”
누가 듣던 말던 하소연하는 말투로, 서글프게 얼굴을 구겨가며..
동준은 눈가에 작은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전등 스위치를 켠다.
딸깍-
..........
거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동준은 못볼걸 봤다는 얼굴로 멈춰섰다.
누나가 추한 몰골로 술에 쩔은 채 고주망태가 되어
넓은 바닥에.. 개구리처럼 뻗어 있었다.
“으~~ 술냄새..
나도 마시고 왔지만 참.. 문제다..
술꼬랑내만 잔뜩 풍기는 이런 여잘, 누가 좋다고 데려갈지 참..”
늘씬한 팔다리의 누나를 어렵게 부축해서, 한켠에 고이 눕힌다.
대충 바닥에 흘려놓은 맥주캔들과 지저분한 것을 정리한다.
어린애처럼 침까지 질질 흘리고...
짧은 한숨과 함께 미소를 짓는 동준.
누나가 배려놓은 갈색 동그란 쿠션을 스슥- 벗긴다.
그래도 알아서 스타킹은 세탁물 통에 넣어놨군.
가볍게 노래를 부르며 세탁 버튼을 ‘띠링~’누르고
테라스와 붙어 있는- 다용도실에 널어 놓은 세탁물도 살핀다.
타캉-
투명 유리가 달린 나무 문을 닫고 돌아나오면서
하얀 선반 위에 누나가 올려놓은 가그린을 보았다.
그르르르...
본김에 개운하게 입안을 헹구고
시원한 냉수를 받아 벌컥~~~ 마신다.
후아..........
술김에 아직 기분이 알딸딸했는데,
취기가 한꺼번에 싹 가시는 짜릿함이었다.
거실로 다시 와보니 여전히 누나는 취침중이다.
칠칠 맞은 자세로, 구겨진 종잇조각처럼 뻗어 있어서 그렇지,
팔과 다리가 그대로 드러나는 누나의 여름 패션은
눈요기하기에 아주 적절한 대상이었다.
워낙 많이 못볼꼴도 봤는지라, 웃으며 자고 있는 다리를 어루만져준다.
길고 늘씬한 몸의 밸런스가 역시 근사하다.
새하얗고 군살 없이 잘빠진 허리 라인.
그와 동시에 근육으로 다져져 있는 허벅지의 탐스러움.
미끈한 하반신의 곡선을 따라..
동준의 말없는 시선이 누나의 다리를 훑어내린다.
“후.....”
잠시 뭔가 생각에 잠기는 얼굴.
발그레해지는 얼굴로, 자고 있는 누나에게 다가간다.
“씻긴 씻었나보지, 훗.. 발에서 좋은 냄새나네 누나..
간만에 뽀뽀해줄까”
조용하게 발을 향해 속삭여주면서
뽀송뽀송하게 빛나고 있는 이쁜 발을 만지작거린다.
피부에 흐르는 윤기가 참 곱다.
스슥- 스슥-
언제 손바닥으로 가볍게 스치고 비벼봐도 기분 좋은 감촉이다.
입가에 고인 침을 살짝 모으더니
하얀 우윳빛의 오른 발을 가만히 들고, 자기 입으로 가져간다.
쪽...
발등에 가볍게 키스를 몇차례 해주고
이내 오른발의 엄지와 검지 발가락 사이에,
갑자기 넘실거리는 혀를 집어 넣는 것이다.
“우응....”
“?... 츠르릅... 쭙”
자고 있는 누나의 발은 무척 귀엽다.
키도 크고 몸매도 뛰어난 스타일이 발군인 그녀.
손과 발도 꽤 이쁜 것이 잘 다듬어진 조각처럼 매력적이다.
장신의 체형에 비하면 발이 그리 크지 않은 편.
이렇게 발까지 이쁘고 섹시하면.. 못 참지..
동준은 흐뭇한 눈으로 누나의 각선미를 즐기며
두 손 위에 그녀의 싱싱한 맨발을 올려놓고..
“쪼옥, 쪼옥...”
소리내어 맛있게 발가락 사이 사이를 빨았다.
“응.... 흣... 간지러워..”
“..... 쪼옵.. 엇, 깼어?”
“.......응? 뭐야.
너 언제 들어왔니?”
“온지 좀 됐지.. 누나가 개판으로 널부러져 자고 있길래”
“하핫~ 얼마 어질지도 않았는걸 모..
어 근데? 너 지금 내 발가락 빠는거얏..??”
“흐흐, 왜 안돼, 싫어?”
“싫은건.. 아니지만..
간지럽고 바보야.. 자고 있는 사람을 그렇게..”
“뭐 어때. 이렇게 발가락 틈새를 혀로 빨아주면 좋아하면서~?”
“야앗.... 누가 들으면 큰일날 소리하지마..”
“히히, 발가락 많이 미끄러?”
“응... 너무 차가워, 축축해 바보야”
“이리와 그럼~ 타월로 좀 닦아줄게”
“칫~~
그리고 나서, 또 좋아서 빨아줄거지?”
“으흠~~ 글쎄? 원한다면 얼마든지~
약간의 구린내가 나기는 나지만 말야 하하핫”
“구, 구린내라닛...
오자마자 깔끔하게 씻었는데 무슨 냄새가 나... 죽을래”
짖궂은 동생의 말에, 슬쩍 화내는 척하며 베개를 던지는 누나.
그러나 입과 눈은 즐거운 듯 웃고 있다.
잠시 어수선한 거실을 말끔하게 정돈해두고,
간식 몇가지를 그릇에 담아 차와 함께 가지고 온다.
사이 좋은 오누이가 나란히 소파에 앉아
“사각 사각..”
“오물 오물.. 쩝..” 소리를 내며 다과를 즐긴다.
“요즘 학교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거야”
“우리 학교?”
“그래, 너네 학교. 아니~ 정확하게 너 학교 생활 말야~”
“평화롭지. 수업 안 거르고~ 잘 챙기고 있어..”
“그런거 말고”
“응?”
“수업이나 다른 생활은 알아서 잘 할테니까 안 궁금해.
그런거 말고, 요즘에 만나는 여자애는 생겼어?”
자스민 차를 음미하며 후룹- 들이키는 동준.
누나의 말에 뭐라고 대답할까 고민하는 표정이더니,
타각-
잔을 내려놓고 슥~ 누나의 하체에 다가앉는다.
“왜, 왜 이렇게 밀착해..
조금 떨어져서 얘기해도 되잖아..”
“만지면 어때서, 내 여잔데~? 흐흐”
“뭐.. 어..디가 네 여자니.. 호호, 참나..”
“와아~ 다리가 엄청~
부드럽고 피부도 미끄러워 누나”
“......... 고마워..”
“여전히 최상급이야. 음~.. 냄새도 좋고..”
“..............”
일부러 짖궂게 행동하는 동준.
누나가 당황스러움에 얼굴이 빨갛게 물드는 것을 곁눈질한다.
하얗고 촉촉하게 손 끝에 닿는 그녀의 살결.
매끄러운 허벅지와 무릎을 사르르..
재미삼아 손가락으로 간지럽힌다.
그러자 누나는 억지로 참는 척, 몇초동안 버티더니
곧 “푸하~~! 얏!
하지마 멍청한 놈앗~” 하며 동준을 밀쳐냈다.
힘도 좋아서,
터프한 누나의 발길질에 그만 소파 한쪽 끝까지 밀려난 동준.
“아야.. 냅다 발로 가슴팍을 차다니..”
“읏, 미안해.. 너무 간지러워서 혼났단 말야.
만지는 건 좋은데 왜 간지럽히냐고~? 꼬마 변태”
“재밌자나~ 이리와. 다시 만져줄까?”
“꺅~ 저리 가.. 어후 얏...
만, 만지지도 말아. 너는..
왜 자꾸.. 하응? 꼬집기까지 하니..”
여느 남매의 일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그림의 두 사람.
동준은 친구들 앞에서 보여주는 어떤 미소보다
누나와 함께 장난치고 웃는 이 시간이 가장 소중했다.
오늘 민규, 영섭과 신세를 한탄하기도 하고
묶혀둔 얘기들을 정리하며 감정도 솔직히 털어놓았지만
자꾸만 최근의 청춘사업에 대해 캐묻는 녀석들 때문에 짜증이 나던 참.
이렇게 사랑하는 친누나와 함께
오붓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또다른 축복이 아닐까..
생각한다.
-
동준은 이름만 대면 아는, 고급스런 강남의 대형 아파트에 살고 있다.
양친은 유명 시중은행의 지점장인 아버지의 경력차,
어머니와 같이 해외에 파견 근무로 나가 있는 것이다.
듣기로는 독일과 폴란드 사이를 오가는 국경지역의 지점 관할이라 했다.
앞서 말한 누나는, 동준보다 한 살 연상이다.
올해 스물 다섯 살인 동준과
단둘이 함께 살고 있는 "허수빈"이라는 이름의 26살 여성.
누나 수빈과 동준은 성만 같을 뿐이지, 서로 피가 섞여 있지 않았다.
동준은 아주 어릴 때 어머니를 사고로 잃었고
수빈의 생부는 살아 있지만, 어머니와 이혼한 상태였다.
즉 동준의 부친과 수빈의 모친이 재결합하면서
얼떨결에, 한집에 같이 살게 되고부터 둘은 친 남매처럼 지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앞서 진술했듯이
동준이 두 살바기 어린 아이일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오랜 시간이 지날 때까지, 동준은 이 사실을 아예 모르고 있었다.
누나 수빈만 진작에 사실을 알고 있었고...
열 한 살의 나이에, 수빈은 우연히 집안에서 속삭이는 부모의 이야기를 엿듣게 된다.
당시 수빈은 어린 마음에 상당한 쇼크를 받았지만
이것이 트라우마로 이어진다든가.. 마음의 상처로 남지는 않았다.
단지 우리집은 남들과 약간 다른 배경의 가정이구나-라는 생각 정도.
티가 나지 않도록 딸과 아들을 공평하게 대우해주고
진심으로 사랑하며 아껴주었던 부모의 헌신적인 노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사실을 알게 된 어릴 때에도, 장성한 지금도..
수빈은 부모님 두분에 대해서 조금도 서운한 감정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문제는 동준인데.
동준이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4년전의 21살 때다.
172cm, 67kg의 탐스러운 핫 글래머.
허수빈은 현재 최고로 잘나가는 연예인급 레이싱 모델 중에서도, 탑 클래스에 속한다.
피팅 모델로 스무살 때 데뷔해서 차근 차근 성장해온 그녀.
이듬해 선배의 소개로 레이싱걸 업계에 데뷔한 후,
빠른 속도로 폭넓은 인지도를 얻으며 인기를 끌었다.
스물 여섯 살인 현재는 최상급 모델에 속할 만큼 페이와 대우가 우수하다.
운동으로 다져진 탄력적인 S 라인의 몸매에
소위 말하는 ‘베이글’이라는 표현에 딱 들어맞을 정도로,
글래머러스한 몸매와는 안 어울리게.. 어린 아기같은 베이비 페이스를 지녔다.
단순히 어려보이는 동안 외모 뿐 아니라..
고등학교 시절 대쉬해오는 남학생들 때문에 골머리를 앓을 정도로,
수빈의 서글 서글하게 생긴 매력적인 미모 또한 일품이었다.
가슴과 물오른 엉덩이의 볼륨감이 상당히 발군이다.
꾸준한 하체 트레이닝으로 꿀벅지를 갖게 된 수빈.
아울러 유행하는 애플 힙을 얻기 위해, 남들은 모르는 피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결과 지금은 여자들이 선망하는 워너비 라인의 소유자가 되었고.
자칫하면 어깨가 너무 넓어질 지도 모른다는 지인의 조언에 겁을 먹고..
어릴 적 즐겨하던 수영은 일찌감치 그만두었다.
그래서 다행히 어깨는 너무 좁지도 넓지도 않고 보기 좋은 편.
물질적으로 많이 여유가 없었을 데뷔 초부터 (그래봤자 부모의 지원이 있었지만..)
반짝 반짝 빛나는 이쁜 피부가 매력포인트였다.
그리고 6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와 동일하게 촉촉한 살결을 유지하기 위해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출중한 탤런트 급의 미모를 지닌 이런 누나 덕분에
동준은 어디서든 괜히 누나를 생각하며 자랑스러워했다.
딱히 누나에 비해 내세울 것 없는 자신이지만,
이쁘고 잘빠졌을 뿐 아니라..
성격까지 싹싹하고 멋진 누나는 자랑하지 않을 수 없는 대상이었다.
“누나가 좀.. 잘 놀게 생겼던데요”
..........
이런 류의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놀게 생기다니, 어딜 봐서!
본인이 볼때는 톡톡 튀는 상큼함이 볼때마다 기분 좋아지는 누나인데..
동준의 눈에 비친 수빈의 얼굴은
연예인에 비교하면 약간 미스에이의 수지와 비슷한 이미지다.
이런 이야기를 했다가 뭇 지인에게 질타를 받기도 했지만..
적어도 ‘어쩐지 첫사랑의 이미지를 간직하고 있는’ 느낌 만큼은 사람들도 인정해주곤 했다.
또한 수빈은 끼 좀 잘 부릴 것 같은 세련된 외모와 달리..
스물 두 살때까지는 순결을 유지하고 있었다.
결혼하기 전에는 여간해서 꼭, 처녀를 지키겠다는 다짐.
그런 자신의 신념을 믿고 있었고 지킬 자신도 있었다.
정말 죽을 만큼 사랑하는 남자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혹은 나타나더라도)
생긴 것 답지 않게, 결혼 후 남편에게 주어야겠다는 생각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런데 이 기특했던 마음가짐이...
가장 가까운 존재에 의해 하루 아침에 무너지게 된다.
-
스물 한 살의 겨울.
동준은 피곤한 몸을 이끌고, 서클 합숙을 마친 뒤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덧 11월말의 추운 계절..
집에 들어서니 사람의 온기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고리타분한 누님 같으니.
생활비 빵빵하게 지원받으면서, 기름값 아낀다고.. 참.
겨울에는 적당하게 아끼고 살자고 누나한테 또 잔소리를 할 참이다.
3박 4일간의 축구 클럽 훈련으로 몸이 녹초가 되었다.
속리산까지 다녀오느라 몸 이곳저곳이 쑤시고 죽을 맛.
어린 나이인데 뭐 그리 힘든지,
나지막한 비명을 지르며 후다닥 옷을 벗고 욕조 안으로 뛰어든다.
“으드드드.. 엥간히 잠궈놔야지 좀!
사람이 살만한 온도는 유지하고 살아야 될 것 아냐, 아줌마.. 아읏~
아... 좋다.. 졸 따듯해~~”
뜨거운 목욕물을 듬뿍 받으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푹 담그고~ 시원한 행복감에 몸이 노곤해진다.
손과 발, 그리고 각종 관절의 마디 마디마다
그동안 쌓여 있던 피로감이 스르르... 녹아내리는 기쁨을 지르는 듯 하다.
“흐아아... 너무 좋다... 역시 목욕은 영혼의 세탁이야, 낄낄낄”
좋다고 혼자 떠들며, 부엌으로 나오자마자 벌컥 냉장고부터 연다.
음......
매의 눈으로 먹을 것을 점검하며 집에 없는 동안,
칠칠맞은 누나가 먹을걸 잘 사다놨는지 확인한다.
“안되겠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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