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나이 50중반에
처음으로 숨겨두었던 지난 어린시절에
잊고 싶고 지우고 싶었던 기억을 글을 적어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지도 어언 15년이 지났고,
이제는 하늘에서 편히 쉬고 계시리라 믿는다.
보고싶고 다시 뵌다면 용서를 구하고 싶다.
1970년대 중반 우리는 서울변두리에서 어머나와 아버지 그리고 나
세식구가 서울로 상경해서 단칸방에 부족하지만 행복하게 살았다.
원래는 내 위로 여럿 형제가 있었지만 6,25와 어려운 시절을 보내며
어려서 다 잃고 시집간 큰 누나와 막내인 나만 남았다.
어머니가 설흔여덟에 나를 낳으셨다.
나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잔병치레 없이 잘자라 어머니의 기쁨이 되었다.
아버지는 정도 많고 자상하시고 일도 열심히 하셨다,
우리 어머니는 그 당시에는 보기 드물게 키도 크고 늘씬하셨지만,
자식을 많이 잃은 후유증으로 얼굴에 수심이 늘 가득하셨고
더욱이 간질이라는 병까지 생기셨다.
지금은 약도 좋아지고 완치는 않되어도 발작을 안 일으키는 약도 있지만.
그때는 정말...
시도 때도 없이 발작이 어머니를 괴롭히고 더욱이
그걸 지켜보고 수습을 해야 하는 아버지와 나는 더 힘들고 괴로웠다,
하지만 직장가신 아버지 대신 나는 학교가 끝나면 늘 어머니곁에서
그런 어머니를 지켜야 했다,
어머니가 시장 가시다가 쓰러지시면 난 어머니가 쓰러질때
최대한 어머니를 받쳐주어야했다,
잘못 넘어지면 돌이나 벽에 부딛쳐 상쳐가 상쳐나 부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어머니 특유의 비명과 함께 침거품을 흘리며 쓰러져 경련을 하면
어린 나는 그 옆에 쭈그려 앉아 어머니를 보살핀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놀라며 피해가고 나를 안되었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지나간다.
난 이미 자라면서 많이 겪은 일이기에 무심히 엄마가 제정신이 돌아오시길 기다린다.
그런데 발작후 10여분뒤에는 일어 나시는데 보통 30여분간은 나도 몰라 보시고
헛소리를 하시다가 스르르 제 정신이 돌아오신다.
국민학교 6학년 여름 이었을것이다.
그때 나는 한참 성에 눈을 떠가고 있었다.
나와 절친의 누나가 당시 열일곱에 나이는 곱은 더 먹었을 직업군인과
동거를 했었는데, 이 군인이 집에 오면 낮이건 밤이건
누이를 타고 눌러 그일을 치루는데 친구와 나는 벽창을 뚫어
그 구멍을 통해 리얼한 성교육(?)을 배웠다.
그 배중사(우린 그렇게 알았다)가 옷도 제대로 안벗고 그 가냘픈 누이위에
올라가 말좆같은 자지를 누이의 가랑이 사이에 마구 밀어 넣으면 누이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소용없이 배중사의말좆은
누이의 가랑이 사이로 쑥들어가고 좀 있으면 배중사의 커다란 종부랄 같은
부랄이 빠른 반복으로 누이의 엉덩이에 부딪는다,
그날밤 집에 돌아와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낮에 본 배중사와 누이의
그 일을 떠올리며 고추를 마지작 거리는데...
고추에서 오줌과 달리 고름같은 누런 액체가 흘러 나와 내 삼각 빤쓰에
잔뜩 묻혔다. 상화은 난감했지만 난 그 순간 영혼이 춤을 추며 들락거리는
쾌감에 정신을 잃을것 같은 느낌에 빠져들었다.
그날밤 어머니 몰래 우물가에서 팬티를 물에 헹궈 책상밑에 몰래 말리고
잠이 들었다.
한참 잠을 자는데 옆에서 주무시던 어머니가 발작이 오셨다.
다행이다. 주무시다가 발작을 하셨으니 밖이 아니라 다행이다.
아버지는 지방으로 일을 떠나셔서 집에는 어머니와 나 뿐이었다.
나는 발작후 경직된 팔다리를 주물러 주고 가재수건으로 입거품도 닦아드렸다.
어머니는 허름한 런닝과 속바지를 입으셨는데...
나는 그날 낮의 성교육 탓인지 정신을 잃으신 어머니의 가랑이가 눈에 어른거렸다.
짐승의 마음이 생겼나보다.
나는 침을 꼴깍 생키고 어머니의 짧은 속바지를 내리켰다.
어머니의 삼각팬티가 눈에 드러왔다.
당시 40후반의 어머니의 팬티는 중심에 커다란 장미꽃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그마져도 어머니의 무릎까지 벋겼다.
어머니의 허벅지를 타고 올라가 두다리가 맞나는 그 사이에
검은 털과 도톰한 언덕과 역삼각형으로 가운데 갈라진 금이 드러났다.
숨이 멎을겄같았다. 나는 용기를 내어 어머니의 비경을 살살 쓸어 만졌다.
그때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 무릎에 걸린 빤스를 거리낌없이 벋어 제낀다.
그리고는 나를 끌어 안으시며 웃으시면 "여보 왔어요~"하신다.
나는 기겁을 하며 놀랐지만,
지금의 엄마는 제정신이 아니라는것과 30분은 흘러야 본정신으로
돌아 오는걸 알고 있다.
지금 내가 해야 할일은 제정신이 돌아오시기전에 빤스와 속바지를 입혀
어머니를 원위치로 돌려 뇌야된다는것이다.
끌어 앉는 어머니를 달래서 눕혔다.
그런데 누운 어머니가 괘슴치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벌떡 일어나 내 빤스를 아래로 확벗기고 다시 벌렁 누우셔서
아들이 보는 앞에서 가랑이 M자로 확 벌리고 팔을 뻗어 나보고
올라오라는 제스쳐를 쓰셨다,
벌어진 어머니의 가랑이 사이에서는 이슬같은 방울이 빨간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내 고추는 작대기처럼 발기했고 이내 어머니의 거센 팔의 이끌림에 끌려
어머니에 배위에 엎어졌다.
난 한번도 해본적이 없는 남녀의 일이었기에 잠시 당황하는 사이
어머니의 따듯한 손이 내고추를 이끌어 어머니의 다리사이에 ?上沮낡?
이어 어머니가 다리로 나를 감싸고 이어 양팔로 내 궁둥이를 잡아 쓸어 드렸다.
미끄덩~ 하며 내고추는 끝을 알수없는 따듯한 구멍속으로 빠져들었고
밑의 어머니는 나를 요람태우듯 엉덩이 흔들어서 위의 나를 흥분시켰다.
잠시뒤 나는 아까처럼 고추에서 꾸역꾸역 빠져나가는 느낌과
내 첫 사정의 느낌을 알아챈 엄머니의 속살들이 꼬물락거리며
내고추를 빨아 들였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50중반의 아내가 자꾸 뭐라고 재촉하네요...
다음에 이어 보겠습니다.
처음으로 숨겨두었던 지난 어린시절에
잊고 싶고 지우고 싶었던 기억을 글을 적어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지도 어언 15년이 지났고,
이제는 하늘에서 편히 쉬고 계시리라 믿는다.
보고싶고 다시 뵌다면 용서를 구하고 싶다.
1970년대 중반 우리는 서울변두리에서 어머나와 아버지 그리고 나
세식구가 서울로 상경해서 단칸방에 부족하지만 행복하게 살았다.
원래는 내 위로 여럿 형제가 있었지만 6,25와 어려운 시절을 보내며
어려서 다 잃고 시집간 큰 누나와 막내인 나만 남았다.
어머니가 설흔여덟에 나를 낳으셨다.
나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잔병치레 없이 잘자라 어머니의 기쁨이 되었다.
아버지는 정도 많고 자상하시고 일도 열심히 하셨다,
우리 어머니는 그 당시에는 보기 드물게 키도 크고 늘씬하셨지만,
자식을 많이 잃은 후유증으로 얼굴에 수심이 늘 가득하셨고
더욱이 간질이라는 병까지 생기셨다.
지금은 약도 좋아지고 완치는 않되어도 발작을 안 일으키는 약도 있지만.
그때는 정말...
시도 때도 없이 발작이 어머니를 괴롭히고 더욱이
그걸 지켜보고 수습을 해야 하는 아버지와 나는 더 힘들고 괴로웠다,
하지만 직장가신 아버지 대신 나는 학교가 끝나면 늘 어머니곁에서
그런 어머니를 지켜야 했다,
어머니가 시장 가시다가 쓰러지시면 난 어머니가 쓰러질때
최대한 어머니를 받쳐주어야했다,
잘못 넘어지면 돌이나 벽에 부딛쳐 상쳐가 상쳐나 부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어머니 특유의 비명과 함께 침거품을 흘리며 쓰러져 경련을 하면
어린 나는 그 옆에 쭈그려 앉아 어머니를 보살핀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놀라며 피해가고 나를 안되었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지나간다.
난 이미 자라면서 많이 겪은 일이기에 무심히 엄마가 제정신이 돌아오시길 기다린다.
그런데 발작후 10여분뒤에는 일어 나시는데 보통 30여분간은 나도 몰라 보시고
헛소리를 하시다가 스르르 제 정신이 돌아오신다.
국민학교 6학년 여름 이었을것이다.
그때 나는 한참 성에 눈을 떠가고 있었다.
나와 절친의 누나가 당시 열일곱에 나이는 곱은 더 먹었을 직업군인과
동거를 했었는데, 이 군인이 집에 오면 낮이건 밤이건
누이를 타고 눌러 그일을 치루는데 친구와 나는 벽창을 뚫어
그 구멍을 통해 리얼한 성교육(?)을 배웠다.
그 배중사(우린 그렇게 알았다)가 옷도 제대로 안벗고 그 가냘픈 누이위에
올라가 말좆같은 자지를 누이의 가랑이 사이에 마구 밀어 넣으면 누이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소용없이 배중사의말좆은
누이의 가랑이 사이로 쑥들어가고 좀 있으면 배중사의 커다란 종부랄 같은
부랄이 빠른 반복으로 누이의 엉덩이에 부딪는다,
그날밤 집에 돌아와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낮에 본 배중사와 누이의
그 일을 떠올리며 고추를 마지작 거리는데...
고추에서 오줌과 달리 고름같은 누런 액체가 흘러 나와 내 삼각 빤쓰에
잔뜩 묻혔다. 상화은 난감했지만 난 그 순간 영혼이 춤을 추며 들락거리는
쾌감에 정신을 잃을것 같은 느낌에 빠져들었다.
그날밤 어머니 몰래 우물가에서 팬티를 물에 헹궈 책상밑에 몰래 말리고
잠이 들었다.
한참 잠을 자는데 옆에서 주무시던 어머니가 발작이 오셨다.
다행이다. 주무시다가 발작을 하셨으니 밖이 아니라 다행이다.
아버지는 지방으로 일을 떠나셔서 집에는 어머니와 나 뿐이었다.
나는 발작후 경직된 팔다리를 주물러 주고 가재수건으로 입거품도 닦아드렸다.
어머니는 허름한 런닝과 속바지를 입으셨는데...
나는 그날 낮의 성교육 탓인지 정신을 잃으신 어머니의 가랑이가 눈에 어른거렸다.
짐승의 마음이 생겼나보다.
나는 침을 꼴깍 생키고 어머니의 짧은 속바지를 내리켰다.
어머니의 삼각팬티가 눈에 드러왔다.
당시 40후반의 어머니의 팬티는 중심에 커다란 장미꽃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그마져도 어머니의 무릎까지 벋겼다.
어머니의 허벅지를 타고 올라가 두다리가 맞나는 그 사이에
검은 털과 도톰한 언덕과 역삼각형으로 가운데 갈라진 금이 드러났다.
숨이 멎을겄같았다. 나는 용기를 내어 어머니의 비경을 살살 쓸어 만졌다.
그때 어머니가 벌떡 일어나 무릎에 걸린 빤스를 거리낌없이 벋어 제낀다.
그리고는 나를 끌어 안으시며 웃으시면 "여보 왔어요~"하신다.
나는 기겁을 하며 놀랐지만,
지금의 엄마는 제정신이 아니라는것과 30분은 흘러야 본정신으로
돌아 오는걸 알고 있다.
지금 내가 해야 할일은 제정신이 돌아오시기전에 빤스와 속바지를 입혀
어머니를 원위치로 돌려 뇌야된다는것이다.
끌어 앉는 어머니를 달래서 눕혔다.
그런데 누운 어머니가 괘슴치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벌떡 일어나 내 빤스를 아래로 확벗기고 다시 벌렁 누우셔서
아들이 보는 앞에서 가랑이 M자로 확 벌리고 팔을 뻗어 나보고
올라오라는 제스쳐를 쓰셨다,
벌어진 어머니의 가랑이 사이에서는 이슬같은 방울이 빨간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내 고추는 작대기처럼 발기했고 이내 어머니의 거센 팔의 이끌림에 끌려
어머니에 배위에 엎어졌다.
난 한번도 해본적이 없는 남녀의 일이었기에 잠시 당황하는 사이
어머니의 따듯한 손이 내고추를 이끌어 어머니의 다리사이에 ?上沮낡?
이어 어머니가 다리로 나를 감싸고 이어 양팔로 내 궁둥이를 잡아 쓸어 드렸다.
미끄덩~ 하며 내고추는 끝을 알수없는 따듯한 구멍속으로 빠져들었고
밑의 어머니는 나를 요람태우듯 엉덩이 흔들어서 위의 나를 흥분시켰다.
잠시뒤 나는 아까처럼 고추에서 꾸역꾸역 빠져나가는 느낌과
내 첫 사정의 느낌을 알아챈 엄머니의 속살들이 꼬물락거리며
내고추를 빨아 들였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50중반의 아내가 자꾸 뭐라고 재촉하네요...
다음에 이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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