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주가 알게 되었지만, 현주가 이해해주었다. 그리고 용서까지 해줬다. 다만 현주는 연주가 아직 어리니까 연주는 모르게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재석이가 상처받거나 잘못되지 않도록 어른인 엄마가 잘 해달라고 했다. 모두 맞는 말이었다.
집에 사람의 흔적이 없었을 때만 해도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짐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급격하게 흔들렸다. 아니 일시적으로 정지상태가 되었다. 결혼의 끝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이 생각했기 때문에 식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단지 옷가지며 몇 가지 짐이 없어졌을 뿐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알고 있다. 결정의 순간이 온 것이다. 최소한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고 옷들을 가져갔다. 바로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나에게 생각할 시간을 줘서 충격을 최소화시키려는 것이다.
밤새도록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아직도 남편을 사랑 하냐고? 그건 아니다. 남편을 사랑했다면 재석이에게 안기지 못한다. 미련이다. 결혼생활에 대한 미련, 여자란 미련 덩어리인 것이다. 또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걱정이었다. 여자는 현실적이다. 현실을 바라보는 감각은 대부분의 남자들은 따라오지 못한다. 대신 미래에 대한 안목과 실천의지는 약하다. 이제 혼자 서야만 하는 때가 왔는데, 미래가 너무 불안해 한걸음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잠들지 못했다. 재석이가 안아줬지만 15살이었다. 사랑하는 것과 의지가 되는 것은 또 달랐다. 아직은 내가 그와 딸애들에게 힘을 실어줘야 할 때였다.
오늘도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며칠 동안 계속 그랬다. 혼자 있는 방이 너무 크다. 무서웠다. 조용히 일어나 딸들의 방을 들여다본다. 모두 잠들어 있었다. 재석의 방에도 가봤다. 안자고 있었다. 재석이는 침대 옆으로 물러나며 자리를 만들어 줬다. 가끔씩 재석이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행동할 때가 있다. 지금도 그랬다.
“엄마..”
“응...”
“우리 떡볶이 장사 할까?”
“떡볶이?”
“응. 학교 앞에 떡볶이집이 있는데..진짜 맛없다..엄마가 하면 틀림없이 애들이 많이 올 거야. 엄마 음식 맛있으니까..”
“..........정말...맛있어?”
“그럼~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을 걸..”
“진짜 장사 잘 될까?”
“음...금방 부자 돼서 빌딩이라도 살걸?”
“.........”
“그리고 나랑 누나들이 도와주면 되잖아?”
“너희는 공부해야지..”
“자리 잡을 때까지만...그 후에 아줌마 구하면 되잖아..”
“..........”
“엄마..금방 돈 많이 벌어서 엄마 금으로 만든 방석 위에 앉혀 놓고 호강시켜 줄게..”
“정말?”
“그럼~ 나 엄마 사랑하잖아..알지?”
“으응..”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을 때는 불안만이 가득 찼다. 재석이가 떡볶이 장사를 이야기 했을 때는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작은 가게에 손님으로 학생들을 받고 떡볶이를 팔고 있는 자신이 그려졌다. 재석이가 양손에 그릇을 들고 좁은 가게를 누비고, 자신은 떡을 열심히 양념에 푼다.
돈은 많이 못 벌 것이다. 현주가 시집갈 때 혼수도 많이 못해줄 것이고, 연주 등록금 만들어 주는 것도 빠듯할 것이다. 학원이나 과외도 시키기 어려워 질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먹고 살수는 있을 것이다. 다행히 연주와 재석이는 3살 차이가 나서 1년만 등록금이 겹친다.
은행잔고를 생각해 봤다. 남편이 이 집은 줄 것이다. 가게가 얼마나 드는지 몰랐지만 힘들면 이 집을 처분하고 전세로 갈 수도 있다.
처음으로 돈을 모으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남편이 바람을 피면서 살림을 하는데 흥미를 잃었다. 애들만이 유일한 희망이었고, 그래서 대부분 학원비로 다 섰다. 큰집으로 이사 가는 것이나 노후를 대비하는 것에 미련이 없었다.
이상하게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거 같았다. 막상 일을 시작하면 뜻하지 않게 많은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런 점을 감안할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아직 이혼한 것도 아니었다.
“너는 틀림없이...최고의 바람둥이가 될 거야..”
“응? 어째서?”
“호호.”
“아이~ 왜? 말해봐..응?”
“너 하는 거 봐서..”
“으으으...”
더운 여름밤, 이불도 없는 침대에서 베개에 필사적으로 입을 막고 신음을 참는다. 재석에게 안기자마자 정신없이 타올랐다. 집이었다. 소리가 신경 쓰였다. 아니 딸들이 신경 쓰였다.
“으으으..”
재석이는 뒤에서 엉덩이에 코를 박고 양손으로 아래 입을 찢을 듯이 벌리고 그 빨갛고 기다란 혀로 온통 까발린다. 어서 해달라는 말을 수없이 되뇌었는데도, 들은 척도 안하고 어서 말해달라며 고문하고 벌주려고 한다.
“으으으으..”
분명 한계치에 도달했을 터인데, 결정적인 무언가가 부족해서 완전한 만족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식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 상태로 계속 갔다. 재석의 얼굴을 향해 미친년처럼 엉덩이를 흔들면서 실룩거리는 아래입을 들이대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로,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다.
“제발..내가..잘못했어..”
“쭙...쭙...”
나도 모르는 사이 손가락을 클리토리스에 대었다. 지금까지 자위한번 해본 적이 없었는데 본능적으로 몸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행한다. 그러나 내가 손을 대는 순간 재석의 혀가 멀어졌다.
‘보고 있다..’
움직일 수가 없다. 그러나 아래입은, 내 안의 또 다른 생물은 움직이라며 실룩거린다. 손가락이 떨렸다. 나는 손가락을 못 움직이게 하고 내 안의 생물은 움직이려고 한다. 그 균형에 의해 손가락이 떨렸다.
‘안 돼..움직이면 안 돼..’
말도 할 수 없었다. 말을 하려고 하다가 집중력이 떨어져 손이 나의 통제를 벗어날까봐 무서웠다. 머리가 돌아버린다. 누군가 속삭이는 듯, 이미 재석이 앞에서 못 보여줄 것이 뭐냐며 어서 움직이라고 한다. 또 다른 누구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혼자 자위하는 꼴을 보여 주냐며 수치스럽다고 말린다.
“흑흑흑...”
안에 아무것도 없는데, 내안의 생물이 혼자 조이기 시작했다. 마치 재석이의 똘똘이를 품고 있는 것처럼 수축하고 있었다. 눈에서 눈물이 난다. 고개를 돌려 재석을 바라봤다. 재석이가 어떤 표정으로 어디를 보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
내 몸의 움직임에 재석의 눈이 나를 바라본다. 비웃지도 경멸하지도 않았다. 재석의 눈이 나를 향하고 있는 사이 손가락이 움직여 클리토리스에 닿았다. 입술이 벌어지고, 입안에 고여 있던 침이 입가로 흘러내리는 것을 알았다. 침을 수습하는 것보다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이 더 급했다. 눈으로는 계속 재석의 눈을 감사한다.
‘제발..조금만 더..’
곧 정상인데, 재석이 언제 밑으로 시선을 내릴지 몰라 초조함이 극에 달하면서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아아..”
재석의 손이 허리와 엉덩이가 만나는 지점부터 꼬리뼈를 지나 엉덩이의 홈을 타고 밑으로 내려와 항문의 주름을 타고 한 바퀴 돈 다음 질척거리는 아랫입술에서 부끄러운 액체를 듬뿍 묻혀 클리토리스에 도달했다. 그렇게도 안 움직이던 손가락이 재석의 손에 가볍게 밀려나고 잔뜩 부풀어있는 콩알만 한 클리토리스가 재석의 손가락 안에 들어갔다.
“흑흑흑..”
부끄러운 것도 있어버리고 허리를 흔들어 그 손가락에 나를 문지른다. 그리고는 바로 그 손에 뜨거운 물을 잔뜩 뱉어냈다. 전과 마찬가지로 전신이 경련에 휩싸이고 황홀감에 빠져든다. 그런데도 부족했다. 뭔가 허전하다. 그것을 채우기 위해 계속 벌벌 떨면서 허리와 엉덩이를 흔들었다.
멍하니 재석을 보고 있었다. 재석이는 손에 가득 애액을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번들거리는 재석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 물이 어디서 나왔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손이 재석이 손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아직도 내 안에는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고, 그래서 그 손과 손가락을 핥았다.
“맛있어?”
재석이는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나는 그런 재석이 이상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재석이는 내 다리를 높이 들어 올리고 아랫입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나는 가랑이를 최대한 벌려 재석이가 그것을 먹기 쉽도록 도와줬다. 한참 뒤에 재석이 번들거리는 입으로 나를 보며 웃는다.
“정말이네..”
그리고 재석이 내 위로 올라탄다. 둥근 계란이 이미 수축해 쭈글쭈글해진 벽을 쫙 피면서 들어온다. 아프고 좋았다. 아픈데 좋았다. 역시 손보다 이것이 좋다.
“음...음...”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우리 둘 다 흠뻑 젖어 있었다. 살과 살이 끈적거렸다. 그래도 싫지는 않았다. 재석이는 내가 잠깐 정신을 놓고 있을 동안에도 가슴을 만지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짜릿한 전기가 아직도 일어나고 있다. 이러니 내가 오랫동안 정신을 수습하지 못한 것도 이해할만 했다.
“안자?‘
“응..엄마가 좋아서..오랜만이기도 하고..”
“그래도 좀 자야지..내일 피곤할거 아냐..”
“음..벌써 3시야..우리 이렇게 있다가 한 번 더 하고 오후에 같이 자자..”
“..........그럴까?”
“엄마.”
“응?”
“엄마는 나랑 평생 살 거지? 나 안 버릴 거지?”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해? 무슨 일 있었어?”
“으응...그냥..엄마. 나 앞으로도 계속 사랑하지?”
“...그럼..”
“정말 좋다..우리 엄마..”
“.....................”
“엄마..우리..한 오백년 이렇게 살자..”
“응..”
나는 차마 재석을 보지 못하고 엎드렸다. 재석이는 그런 나를 뒤에서 안는다. 똘똘이가 엉덩이 사이에서 기운을 차리고 있었다. 나는 재석이를 마주보고 할 수가 없다. 눈물이 나올 거 같아서였다. 그래서 엉덩이를 들었다.
“음...뒤로 하게?”
“응..”
“엄마 뒤로하는 거 싫어하잖아..”
“괜찮으니까...어서 해..”
“알았어..”
“아...”
밀려들어온다. 뿌듯하다. 흔들리는 허리, 벌렁거리는 항문이 고스란히 드러나지만 더 이상 수치스럽지도 부끄럽지도 않았다. 재석이 주는 사랑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내가 느끼는 사랑을 온전히 전할 수만 있다면 그런 것들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죽을 때, 혹은 재석이가 먼 훗날 오늘 우리를 기억할 때 한 점의 아쉬움이나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나에겐 비록 두 번째 찾아온 사랑이었지만, 마지막 사랑일지 모르니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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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만나고 온 이야기를 엄마에게는 하지 않았다. 대신 큰누나와 이야기했다. 우리는 아버지의 부재를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작은누나 역시 이제는 알고 있었다. 엄마와 큰누나는 한참 예민할 나이에 있는 작은 누나가 충격을 받았을까봐 걱정했다. 작은 누나는 겉으로는 별로 내색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들로 아버지가 나간 우리 집은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그 일이 우리 가족에게 위기감을 조성한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가능한 저녁은 집에서 먹었고, 저녁 후에는 잠깐이라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했다. 말이라는 것은 참 이상하다. 처음 대화를 시작했을 때 우리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말들이 말아졌다. 말이 말을 모으는 것처럼 점점 불어났다.
“그래서? 그 형이랑 어떻게 됐어?”
“뭘 어떻게 돼..그걸로 끝이지..”
“뭐야..시시하게..”
그것은 우리가 서로의 삶에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할 말이 없다. 그러던 것이 친구 중 한 사람을 알게 되면, 그 사람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온다.
“언니야 말로 어쩔 거야? 언니 나이면 이제 선을 봐야겠다.”
“어머~ 내 나이가 어때서?”
삶이라는 것이 사람과의 관계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한사람, 한사람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듣고 묻다보면 누나들의 인생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작은누나가 이렇게 수다스러운 줄 지금에서야 알았다. 우리들 이야기 중 절반은 그녀 혼자서 떠들었다.
엄마는 어느 순간부터 내방에서 잔다. 아마도 아버지 나가시고 처음 이방에서 그 일을 한 뒤부터로 기억된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원래부터 엄마의 자리가 여기였던 것 같아서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었다.
“재석아. 일어나야지?”
“으응..엄마..”
너무 좋다. 좋아서 일어나기 힘들어졌다. 그러면 엄마는 침대 옆에 앉아 내가 일어날 때가지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그래도 안 일어나면 달콤한 키스를 해준다. 혀가 들어와 간질이면 엄마를 좀 더 느끼기 위해 일어나게 된다. 그러면 변덕스러운 엄마는 도망간다.
사람들은 엄마와 나에게 돌을 던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자신에게 불리했던 기억은 쉽게 잊는다. 아니 잊으려고 한다. 그걸 잊어먹지 않으면 견디고 살수 없다.
“엄마. 갔다 올게요..”
“응. 조심해서 갔다 와..”
엄마랑 같이 잔다고 그것을 하는 것은 아니다. 엄마도 나도 잠자는 시간은 4시간 정도였다. 엄마는 12시가 넘어야 내방으로 들어온다. 가끔 누나들이 더 일찍 잠들면 일찍 오기도 하지만 대체로 그 정도였다. 아침이면 4시 반에 나와 같이 일어났다. 정확히는 엄마가 일어나 가볍게 세수와 양치를 하고 나를 깨워주셨다. 아침 키스 속에 민트향을 가득 받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확실했다.
엄마는 아버지 자리에 내 밥을 주셨다. 그 자리에 앉는 것은 불편했다. 그러나 아무 말 하지 않고 앉았다. 나 편하자고 그 자리를 비워두면 엄마가 상처받는다. 누나들 역시 그것에 대해 아무런 표시도 내지 않았다. 원래 내 자리였다는 듯 행동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한사람이 받을 상처를 나눠서 받았다.
누나들을 직장과 학원으로 보내고 엄마랑 설거지랑 청소도 같이 하고, 같이 차도 마시며 음악도 듣고 아침방송도 본다. 아침방송에는 별별 이야기가 다 나온다. 아버지의 불륜으로 힘들어하는 엄마부터 가난, 질병, 시어머니 때문에 겪는 고통까지 아줌마와 관련된 이야기는 거의 나오는 것 같았다.
“엄마는 저런 이야기 보면 재밌어?”
“음..재미라고 해야 하나..그냥 보는 것도 있고, 어떤 때는 보면서 위안이 되기도 하고..”
“어떨 때 위안이 되는데?”
“음..어렵던 사람이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면 나에게도 그런 일이 생길 것 같기도 하고..다른 사람들이 힘들어하면서 울면 같이 울게 되고, 또 울고 나면 시원해지기도 하고..그래..엄마는..”
“응..”
나는 원래 저런 것을 싫어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자신의 행복의 원천으로 삼다니, 이기적이다. 내가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지금은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뭐든 붙잡고 살아갈 힘을, 의지를 얻어야 했다. 엄마와 나, 우리는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면서 필사적으로 아버지를 잊고, 사랑하며 살려고 한다.
“과외가야지? 열심히 하고 있는 거지?”
“그럼~ 나도 훌륭한 사람이 돼서 엄마 기쁘게 해 줄게..”
“그래..엄마 기다릴게..”
방학동안 과외를 하면서 누나들과도 친해졌지만 혁재형과도 친해졌다. 혁재형은 지수와 지선이 둘 모두에게 관심이 있으면서도 누나들에게도 관심이 많았다.
“원래 그런 게 남자야..솔직히 이야기 해봐. 너도 관심 있지?”
“으응...”
여러 여자들에게 관심을 주고 있는 모습이 귀여웠다. 나보다 2살이나 많은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몇 달 전에는 여자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하루가 힘들었고, 누군가의 애정이, 특히 엄마의 애정이 절실했다.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아버지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터지려고 했다. 어쩌면 뻔 한 결과인데도 이런 결말을 예상하지 못했다.
“크크. 형이 좋은 거 보여 줄게..”
“응.”
혁재형이 책상 마지막 서랍을 완전히 꺼내고 그 밑에서 종이뭉치를 꺼냈다. 책상 안에 그런 곳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고, 그런 곳을 발견해 낸 혁재형이 머리가 좋아 보였다.
“자..봐..빌리고 싶으면 빌려줄 수도 있어..”
“응..”
사진집 같은 것인데, 서양여자들이 홀딱 벗고 나온다. 가끔은 여자경찰이나 간호사들도 나오는데 팬티를 입지 않고 치마를 허리 위로 올린 상태로 엉덩이를 보이거나 아래입을 활짝 열어 보여주고 있었다.
“와..”
“어때? 죽이지? 이런 거 처음 보니?”
“으응..”
처음 봤다. 머리가 노란 여자는 아랫입의 머리카락도 노랗다. 나는 머리가 노랗던 갈색이던 그곳은 검은 줄 알았다. 엄마가 머리는 약간 갈색인데 그곳은 두꺼운 검은색이었다. 그리고 아예 머리카락이 없는 여자들도 많았다. 머리카락이 없는 여자의 그 곳은 너무 이상해 보였다. 30장 정도의 사진을 어느새 다 봤다.
“빌려줄까?”
“응? 다 봤어.”
“...........”
혁재형은 이미 다 본 것을 빌려가라고 선심 쓰듯 이야기 한다. 나로서는 왜 본걸 빌려가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혁재형은 빌려가지 않는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너..딸딸이 알아?”
“알아.”
나도 중2다.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것도 마음이 어느 정도 편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엄마가 있는데 손이랑 한다는 것도 이상했다. 엄마가 알면 싫어할 것이다. 모욕으로 받아들이실 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빌려준다니까..”
“알았어..”
설명하기도 귀찮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해서 그냥 받았다. 형은 내가 좀 더 기뻐하고 감동하기를 원했는지 표정이 못마땅해 했다.
“너무 시시해? 알았어. 다음에는 시디로 구해줄게..”
“으응..고마워...잘 볼게..”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나도 모르게 혁재형에게 맞춰주고 있었다. 마침 누나들이 들어와서 우리들의 사적인 대화는 그걸로 끝났다. 상미누나는 국어와 영어를 가르쳐 주는데 혁재형에게는 영어를, 나에게는 국어를 중점적으로 가르쳤다. 상미누나 말로는 나는 이미 귀가 뜨였고 문법적으로 왜 그런지 모를 뿐 언제 어떻게 쓰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천천히 알아가도 상관없다며 잊어먹지 않게 CNN이나 독해를 많이 하라고 했다.
“누나. 방학도 끝나 가는데..좀 아쉽지 않아요?”
“그래서? 또 놀자고?”
“에이. 어디 뭐 그렇게 많이 다니기나 했나요..방학동안 열심히 했잖아요..”
“........좋아..혁재도, 재석이도 열심히 했으니까..이따가 애들이랑 상의해 보자. 지금은 공부나 열심히 해..”
“네..”
우리 누나는 고1 여름 방학 때부터 지수도 요즘 들어 점점 히스테릭해져갔는데, 혁재형은 남자라 그런지 여유만만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거실에 모여 앉았다. 혁재형 말처럼 다들 끝나가는 방학, 점점 시드는 청춘이 아쉬운지 다들 적극적이다.
“설악산 갔다가 경포대 해수욕 하고 오고 싶어요.”
“당일로 갔다 올수 있는 곳으로 정해”
혁재형은 3박4일, 못해도 1박 2일을 이야기 했고, 상미누나는 당일 영화나 공원 같은 곳을 이야기 했다. 누나 둘은 영화 쪽으로 의견을 모았고, 혁재형과 지선이는 여행 쪽으로 의견이 일치했다. 지수는 심정적으로는 혁재형 쪽인 듯 하면서도 뜻을 정하지 못했다. 혁재형은 나에게 무언을 압력을 넣는다. 그러고 보니 아까 그 사진은 청탁성 뇌물이었던 모양이다.
“재석이 생각은 어때?”
“음...”
지수가 나에게 의견을 묻는다. 내가 혁재형 쪽으로 기울면 자신은 어쩔 수 없이 따라간다는 방향이었다. 웬만하면 혁재형 의견에 맞춰주고 싶지만, 나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영화를 보고 싶은 생각도 없었지만 그건 몇 시간이니까 양보한다.
“영화..보고..싶어요..”
“그럼. 마지막으로 지수는?”
“저도..영화..”
그래서 영화를 보기로 했다. 혁재형이 갑자기 내 가방을 열더니 사진집을 꺼낸다.
“야~ 이게 뭐야? 와~”
“........”
“어머..”
다들 시선이 모였다. 지선이는 물론이고 누나들까지 얼굴이 빨개졌다. 혁재형이 실실 비웃으며 나를 쳐다보는 것이 유치했지만 귀엽다. 나도 참 이상해졌다. 별로 부끄러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 봤으면 주세요..”
“응?”
“제거잖아요? 그렇죠?”
“으응..니꺼지..”
특별히 갖고 싶지는 않았지만 놀려주고는 싶다. 누나들과 지수, 지선이가 나를 피하고, 그런 그들의 모습에 혁재형은 의기양양해졌다. 음료수도 남았고, 이야기도 끝나지 않아 다들 앉아 있지만 어색한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얼굴을 잔뜩 붉히며 어쩔 줄 말라하는 누나들을 보면서 나는 그녀들이 내 생각보다 그렇게 나이가 많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나보다 절대적인 어른은 아니었다.
“그럼..이야기 마저 할까요? 언제, 무슨 영화를 볼래요?”
“아..음..다들 뭐 보고 싶은데?”
“재석이는 에로영화 보고 싶지 않겠어?”
“..............”
“에로도 좋지만 다 같이 보는 거라면 액션 쪽이 좋겠어요.. 에로영화는 혼자 볼 테니까. 그런 거는 신경 쓰지 말고, 같이 보고 싶은 영화나 이야기해요.”
“...........”
“그래..재석이 나이 때는 호기심에 볼 수도 있는 거니까..그 이야기는 그만하자..”
어색함 속에서 영화는 토요일. 한창 인기 있는 맬로영화로 선택했다. 여자가 4명이라 다수결의 결과였다. 표는 누나들이 예매를 하고, 시간과 장소는 내일 알려주기로 했다. 집에 왔을 때, 엄마에게 혁재형과 사진 이야기를 하며 둘이서 같이 웃었다. 사진도 같이 보며 아까 궁금했던 것들을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이 여자는 여기 털이 없다. 왜 그래? 병이야?”
“음. 병은 아니고..원래 없는 여자도 있어. 그리고 그곳을 면도했을 수도 있고..”
“왜 면도하는데?”
“음..아마 더 잘 보이려고 그러지 않을까? 이렇게 털이 없으니까 그곳이 더 잘 보이는 것 같지 않아?”
“엄마 말 들으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네..”
엄마의 그곳을 보며 둘이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엄마에게 하지는 않았다. 엄마는 그런 여자들과 비교할 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 여자들과 엄마를 비교하면 엄마가 아깝다.
“그만 보고 밥 먹을까?”
“응..”
“그리고 말이야...엄마도 가끔은 재석이랑 영화도 보러가고 싶어..”
“정말? 히히. 그럼 우리 액션가면 보러갈까?”
“그런 건 일방적으로 정하면 안 되는 거야..너 누나들이랑은 다수결로 했으면서 엄마에게는 왜 그래?”
“음..하지만 엄마랑은 다수결이 안 되잖아? 엄마는 뭐 보고 싶은데?”
“멜로영화나 코믹영화..”
“좋아 그럼 다수결로 정해..”
“응..근데..”
“왜?”
“너 그거 알까 모르겠네..”
“뭘?”
“남자랑 여자랑 단 둘이 다수결 할 때는 남자가 져 줘야 하는 거야..그러지 않으면 아직도 애라고 여자가 생각해..”
“으음.....”
영화는 코믹영화를 보기로 했다. 나도 양보를 했지만 연속해서 멜로 영화를 봐야 하는 나를 엄마가 구해주었다. 점심을 먹고 둘이 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 3개월 과정의 초급도 중간은 지났다. 제법 스텝이 자연스러웠다.
“엄마. 이제 너무 잘 춘다.”
“으응..정말? 재석이가 너무 잘 리드해 주니까..”
“아줌마들은 이거 배우고 나면 나이트 간다던데..우리도 갈까?”
“누가 그래?”
“음..왜 있잖아..그 약간 뚱뚱하고 안경낀..캐슬 산다는 아줌마..”
“아..그 여자..왜 너도 나이트 가고 싶어?”
“응. 호기심은 있어. 그리고 우리 둘이 가면 분명 제일 잘 출거야..”
“호호호. 알았어. 그럼 더 열심히 연습해야겠네..”
토요일, 영화를 보기 위해서 시내로 나갔다. 상영시간은 4시였다. 영화보고 밥 먹고 집에 오는 가장 간단한 코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진집 사건 이후, 지수와 지선이가 좀 멀어졌다. 오늘만 해도 전에 같으면 같이 나가자고 했을 텐데, 아무 말 없었다. 대신에 작은 누나랑 같이 나왔다. 누나는 친구와 함께 서점에 가기로 했다고 한다.
“얘~”
“어. 일찍 왔어?”
“아니..좀 전에..얘가 니 동생?”
“응..인사해. 누나 친구. 태희..”
“안녕~”
“네..안녕하세요.”
우리는 지하철 입구에서 만나 그대로 지하철을 탔다. 토요일인데도 사람이 엄청 많았다. 누나와 누나친구가 마주보고 섰고, 나는 누나의 뒤에 대각선으로 섰다. 매일 만나는 학교친구는 아닌지 둘은 끝도 없이 수다를 떤다. 누나만큼 수다 떠는 사람이 또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시내로 들어갈수록 사람들이 늘어나고, 에어컨 냉기보다 사람들이 내뿜는 열기가 더 많아 이마에서 땀이 삐질 삐질 흘러내렸다. 완전히 꽉 낄 정도는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거의 근접해 있었기 때문에 괜히 움직이기 불편하다. 그래서 천천히 허리를 중심으로 상체만 가끔 틀었다. 시내까지 오래 걸렸다.
“그래서 말이야...”
“............”
누나가 이상했다. 말수도 줄어들고 내 팔을 잡아당겼다. 나는 고개를 돌려서 누나를 봤다. 뭔가 호소하고 있다. 그래서 누나를 살폈다. 누나 치마 밑으로 손이 들어가 있었다. 말로만 듣던 치한이었다.
“..............”
나는 일단 알았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동생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창피했던 모양이다. 그런 누나를 보며 당장 그 손을 잡고 죽도록 때리려던 마음을 접었다. 여러 사람들 앞에 노출되면 누나가 더 창피할 거 같았다. 그래서 그냥 치마 안으로 들어가 있는 손목을 잡아서 올렸다.
“.................”
아저씨였다. 금색 안경을 쓰고 머리에 새치가 드문드문 보였다. 얼굴이 단정하고 안경과 곤색 양복이 점잖아 보였다. 그런 아저씨가 딸보다 어릴 것이 분명한 누나에게 그랬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 손과 얼굴을 다시 연결해서 바라봤다. 아저씨는 내 시선을 피하며 뒤쪽으로 물러나려고 한다.
“아저씨..그냥 가시게요?”
“................”
“신분증 보여주세요.”
“내가..잘못했어..한번..봐 주게..집에 처자식이 있어..”
“알았으니까 줘 보세요..”
내가 아저씨와 이야기를 하자 누나와 누나 친구가 돌아본다. 누나는 아저씨를 힐끗 쳐다보고는 내 옆으로 바짝 붙어 섰다. 아저씨는 우리들의 시선에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나는 그 지갑을 통째로 잡아챘다.
“.................”
명함에 국내 유명기업 이사라고 나온다. 신분증과 이름을 비교해 보니 본인이 맞았다. 그 명함을 누나에게 보여주자 누나도 의외라는 듯 아저씨를 바라봤다. 아저씨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누나..어쩔까?”
“음...”
“왜? 무슨 일 있어?”
“한번만 봐 줘요..”
아저씨가 옆 사람을 의식해서 들릴 듯 말듯 할 정도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주의를 기우리고 있기 때문에 알아 는 들었다. 그리고 궁금해 하는 누나친구에게 누나가 귓말로 이야기 해준다. 누나친구는 눈이 동그래지며 아저씨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것은 저렇게 생긴 얼굴이 치한이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지갑에...돈...가져도 좋으니까..”
“........”
두툼한 장지갑 안에는 대충 수표 5~10장에 만원자리 20장 정도는 들어있었다. 나는 누나에게 의견을 물었고, 누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대로 지갑안의 돈을 가져가도 별 탈 없을지 걱정이 되었다. 아저씨가 우리에게 줬다는 표시를 남겨 놔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전에 놀이공원에서 다친 후 썼던 합의서가 생각났다.
“...........”
아저씨 명함 뒤에다가 대강 합의내용을 적고 아저씨에게 내밀었다. 아저씨는 그것을 보자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며 사정한다. 그러나 나는 완강하게 팔목을 잡아끌었다. 그제서야 아저씨는 사인을 했다. 우리는 지갑만을 돌려주고 안의 돈뭉치는 전부 꺼냈다. 아저씨는 뒤도 안돌아보고 사람들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다음 역에서 내렸다. 계속 타고 가기가 찝찝했다.
“재석아..이거 봐..”
“응? 왜?”
누나가 내민 수표들, 천만 원짜리가 두 장. 백만 원짜리가 12장이었다. 십만원권은 없었다. 이런 아저씨가 왜 지하철을 탔을지 궁금했다.
“아마도 상습적인 아저씨인가 봐..”
“그러게..”
틀림없이 자가용에 기사까지 있을 것 같은 아저씨가 지하철을 굳이 타는 이유가 서민적인 취향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수표들은 어쩌지?”
“음..현금은 얼마야?”
“20만원..”
“그건 누나가 써..그리고 수표는 쓰지 마..”
“음..알았어..저기..네가 가지고 있을래..나..좀 떨려..”
누나와 누나 친구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다. 누나랑 같이 치한 같은 것으로 경찰서에 가기 싫어서 아저씨를 그대로 보냈다. 그냥 보내기 싫어서 돈을 빼앗았다. 그런데 기분이 찜찜했다. 죄는 아저씨가 지었는데, 나나 누나까지 죄인 같았다. 나는 이 수표들에 대해서 아버지에게 상의 하려 한다. 엄마는 분명 누나를 야단치고, 우리와 같이 생각하며 마음고생 할 것이 분명했다. 반면 아버지는 해결책이나 대비책을 주실 것이다. 그 후에 야단을 치시더라도 말이다.
다음차를 다른 입구까지 한참을 걸어가서 탔다. 누나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다. 혼자가 되고 나니까 손과 다리가 떨렸다. 무서웠다. 누나가 나를 의지했던 것처럼 나 역시 누나를 의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내 신경은 주머니 안쪽에 있는 3200만원에 쏠려 있었다. 그 아저씨는 이런 큰돈을 가지고 잘도 지하철 같은 것을 타고 있었다. 사람마다 돈의 가치는 다른 모양이다. 아버지가 집에 주는 생활비는 아버지 월급이 이체되는 것인데, 세금 띄고 대략 600만 원 정도다. 그렇다면 이 액수는 아버지 5개월 월급임과 동시에 우리 식구들 5달 생활비였다. 큰누나로 생각하면 일 년치 월급에 해당한다. 그 아저씨는 그런 돈을 두고 뒤도 안보고 사라졌었다. 치한은 부자인 걸까?
오늘은 액이 낀 날이 분명하다. 영화를 보고 나와 예상대로 저녁을 먹으로 돌아다니는데, 딱 보기에도 불량해 보이는 청년들이 우리에게 시비를 건다. 우리가 숫자는 많아도 만만해 보이는 구성인 것이다. 더욱이 어린 남자 둘이 여자를 4명이나 거느리고 있으니 그것도 눈꼴 시린지 아주 대놓고 희롱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 특히 어른들이 멀찍이 돌아서 간다.
“이거 왜 이래요..경찰을 부르겠어요..”
“이 누나 되게 까칠하네..누나 뭐 잡아먹나..우리도 4명, 그쪽도 4명이니, 같이 놀자는 거지..야! 거기 꼬마들..좋은 말로 할 때 집에 가라..응?”
“...........”
혁재형의 한발 물러났다. 나는 그들 4명이 아까 그 아저씨가 보낸 폭력배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빠져있었다. 내가 물러난다고 해도 순순히 보내주지도 않을 것이고, 누나들과 지수, 지선이를 두고 갈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싸움이 처음은 아니다. 초등 학교 때 지수 때문에 매년 한두 번은 싸웠다. 도장에서 대련도 가끔 한다. 하지만 지금은 초등학생들의 싸움도 아니고, 대련은 더욱 아니다. 내가 여기서 쓰러지면 누나들과 애들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도망가기 싫었다. 더 이상 비겁하고 이기적이기 싫었다.
여러 가지 감정이 마구 섞였다. 아버지에게 느꼈던 죄의식, 고백하지 못했던 비겁함, 이제 내가 엄마와 누나들을 지켜줘야 한다던 아버지의 말들, 그리고 8년간 배운 태권도. 여기서 지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최대한 냉정해지고자 했다. 그들과의 거리를 재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런 마음과는 다르게 점점 호흡이 거칠어졌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었다. 제어가 되지 않았다. 몸이 떨렸다. 더 이상 생각하고 있으면 싸우기도 전에 쓰러질 것 같았다. 건달들은 혁재형이 한발, 두발 물러나고 내가 벌벌 떨고 있자 본격적으로 누나들을 만지며 희롱했다. 누나들과 지수, 지선이가 간절히 우리를 쳐다본다.
“꺽..”
팟~ 퍽..꽈당..
“으악~”
이를 악물고, 우선 가장 가까운 남자의 사타구니 안의 물건을 발로 찼다. 처절한 비명과 함께 그 사람이 그대로 쓰러졌다. 그대로 돌려차기로 다음 타자의 관자놀이를 때렸다. 옆으로 쓰러지면서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져 있는 쓰레기통에 머리를 박았다. 바로 정권 찌르기로 인중을 노리고 쳤다. 코와 입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마지막 한명, 그는 그대로 서 있었고, 나는 그와 거리도 멀었고, 지금까지 움직인 것만으로 숨이 턱까지 차올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처음 이를 악물고 움직이기 전부터 빠르게 뛰던 심장이 지금은 터질 것 같았다. 심장이 몸 밖에서 뛰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크고, 빨랐다. 빠른 심장 때문인지 몸이 너무 떨렸다.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 아래에서도 눈에 보일정도로 떨렸다. 그리고 급격히 체온이 떨어지는 느낌과 함께 추웠다. 등과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거 같다. 나는 전혀 움직일 수 없었다. 지금 저 사람이 달려든다면 나는 그대로 맞을 것이 분명했다. 한걸음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몸이 굳었다. 그런데 그는 그대로 가만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났는데도 계속 그 상태였다. 흥분됐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고, 주위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그도 나처럼 떨고 있었다. 나만큼 떨고 있었지만, 나보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유리하다. 그 생각만으로 급격히 안정을 찾았고, 숨도 쉴 수 있었다. 숨이 돌아오자 몸이 움직였다.
우선 쓰러져 있는 사람들부터 훑어 봤다. 두 명은 아직 엎어져 있고, 한명은 얼굴을 부여잡고 쭈그리고 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난 건 아니었다. 누나들과 지수, 지선이, 혁재형, 그리고 거리의 사람들까지 정지해 있다. 그들은 나와 그들을 보고 있었다.
이제 완전히 정신이 돌아왔다. 떨고 있는 저 사람을 마저 처리하고 자리를 떠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누나들을 바라봤다.
“상미누나..슬기누나..”
“...........”
“어떡할까요? 경찰을 부를까요?”
“....그럴까.......?”
경찰이라는 소리에 아직 서있는 사람과 바닥에서 이제 일어나고 있는 사람이 엎어져 있는 두 사람을 데리고 떠나갔다. 어두운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 골목이 아주 오랫동안 머리에 남을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제..집에...가요..”
“응...”
우리는 밥 생각이 없어졌다. 밥 생각은 없었는데, 손이 아팠다. 내 손에는 피가 잔뜩 묻어 있었다. 나는 인중을 때린 상대의 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피는 상대의 피와 내 피였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이빨이 2개 박혀 있었다. 그 이빨들을 빼서 버리자 피가 더 많이 나왔다. 상미누나가 손수건을 꺼내서 묶어 주었지만 피가 금방 손수건을 채우고는 다시 흘렀다.
“병원에 가야겠어..”
“음..그럼 누나가 쟤네들 집에 데려다 주세요..쟤들 집에도 못갈 거 같아요..”
“응..”
지수와 지선이는 그때까지도 벌벌 떨고 있었다. 혁재형은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혁재형 모습이 전에 봤던 큰누나 애인 준영이형과 겹쳐보였다. 상미누나는 슬기누나와 상의해서 상미누나가 지수, 지선이를 데리고 가고, 슬기누나가 나를 병원에 데려가기로 했다. 그렇게 역 앞에서 헤어졌다. 혁재형은 슬금슬금 상미누나쪽을 따라갔다.
“좀 어때?”
“괜찮아요..”
병원 응급실로 갔다. 문을 연 병원이 없었다. 상처에 몇 바늘을 꿰매고 그 위에 붕대와 압박붕대를 감았다. 권투선수처럼 주먹이 부풀어 보였다. 그러나 쥘 수 없는 것이 권투선수의 그것과 달랐다. 좀 전의 싸움을 생각했다. 너무 긴장해서 과도하게 힘이 들어갔었다. 두 번의 발차기와 한 번의 찌르기만으로 움직이기 못할 정도로 숨이 차고 몸이 굳었다. 나는 분명 겁먹고 있었다.
“꽤 멋지게 보이지 않아요?”
“피~ 남자들은 상처를 자랑스러워하더라..”
병원을 나오면서 손을 흔들어 보이며 자랑을 하자 슬기누나가 비웃는다. 이제는 언제 떨었나 싶을 정도로 괜찮아졌다.
“그래도..아까는 멋있었어..고마워..”
“뭘요..사실..저 떨고 있었어요..무서웠어요..”
“그래..나도 그랬어..”
나는 내가 겁을 먹었다는 것을 쉽게 인정했다. 아마도 이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나니까 가슴이 자신감으로 부풀어 올랐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고 싶어졌다. 굳이 아버지에게 사실을 이야기해도, 하지 않아도 상관없어졌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입이 아니라 행동이다. 나는 가족을 지킬 것이다.
우리는 지하철을 향해 걸었다. 시간이 상당히 지났다. 긴장이 풀리자 상처도 아팠고, 상처의 아픔을 느낄 정도가 되자 배가 고팠다. 극장 앞 많은 식당들이 은근히 유혹해온다.
“누나..괜찮으면 저녁 먹고 가실래요?”
“응. 나도 배고파..”
지금 집에 가봐야 밥이 있을지 없을지 몰랐다. 엄마는 인스턴트식품을 아주 경멸하기 때문에 라면 같은 것은 당연히 없다. 그래서 우리는 분식집에 들어갔다.
“아줌마 떡볶이, 오뎅. 순대 주세요..”
오뎅은 왼손으로 먹을 만했지만 떡볶이와 순대는 어렵다. 멋져 보이던 손이 갑자기 애물단지로 추락했다. 얼마나 동여 맺는지 포크를 잡기도 힘겨웠다.
“자..”
누나가 떡볶이를 찍어서 입에 대주었다. 맛있다. 누나의 손이 나 한번 자기 한번 먹느라고 쉬지를 못한다. 나는 입만 가지고 열심히 먹었다.
“순대..”
“떡볶이..”
그때마다 누나가 집어 준다. 제법 기분이 괜찮았다.
“누나는 집이 어디에요?”
“응..AA역. 근처야..”
같이 가다가 나보다 몇 정거장 전에서 내리면 된다. 그래서 같이 지하철에 올랐다. 아까 시내로 쏟아져 나왔던 사람들이 다시 집으로 가는지 지하철은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사람들 사이에서 자꾸 치이는 손이 아팠다. 입학식 마다 있는 선서 모양으로 들고 있는데 점점 손이 무겁다. 누나가 그 손을 어깨에 올려준다. 좀 편해졌다.
“아직도 가지고 있어?”
“뭐요?”
“그 사진..”
“아..예..”
“그런 거 많이 보면..공부에 방해야..”
원래는 혁재형꺼라고 말해줄까 하다가 말았다. 오늘 일로 혁재형이 불쌍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딴에는 농담을 했다.
“히히. 이제는 못 보겠네요. 손이 이러니..”
“..............”
웃자고 한 말인데 웃지를 않으니까 더 이상해졌다. 상미누나는 나보다 한참 큰데, 슬기누나는 비슷해서 불과 몇 십 센티 앞에 눈이 보인다. 어깨에 오른 손 때문에 우리는 정면이었고, 그래서 누나의 수줍음이 보였다. 누나의 나이가 모호해지면서 내 또래처럼 느껴졌다.
“어쩌니? 앞으로 한참 못해서? 히히”
“..............”
엇박자. 내가 농담을 할 때 누나가 받아주지 못했고, 누나가 겨우 농담을 하는데 이번에는 내가 받아내지 못했다.
“할 수 없죠..뭐..누나가 대신 해주실래요?”
“.................”
또다. 이번에는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 얼굴이 완전히 홍당무가 돼서는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이번 역은 환승역이라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치며 들어왔다. 우리는 구석으로 몰렸다. 손이 아파서 내 몸을 지탱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누나에게 붙었다. 누나의 숨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천장에 붙은 노선도를 바라봤다. 누나의 숨만 반복적으로 울렸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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