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옛날에 별로 잘 웃는 편이 아니었다. 내가 웃음 짓게 하는 것이 얼마 없었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의 쇼프로그램도, 익살스러운 녀석들의 개그도 별로 웃기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나이가 들면서 웃음이란 도구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이 도구를 잘 사용해야만 인간관계가 유연해진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웃고 싶어도 나를 웃겨주는 것이 없으니 제대로 웃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 웃기지도 않을 때, 웃고 싶지 않을 때 웃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웃기지도 않는데 웃고 있다. 소리 없이. 입만을 움직인다.
“안녕. 좋은 아침이네.”
“그러네.”
“…….”
내 가식적인 인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넘기는 지은. 그것 때문인지 이다음에 해야 할 말을 잊어버렸다. 할 말이 떠오르지 않으니 입을 열지 못하고, 지은도 어쩐지 기분 나쁘게 웃으며 가만히 날 보고 있다.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머리 잘랐구나, 이미지 변신? 정말로 변신한 것처럼 느낌이 확 변했구나. 나도 변신이란 거 해보고 싶어. 이대로 새 같은 걸로 변해서 하늘로 날아가 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어. 아니면,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는 마법 같은 게 있으면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을래?
드디어 물을 만한 게 떠올랐다.
“머리 잘랐네. 잘 어울린다.”
“고마워.”
“…….”
다음에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왜 저 녀석과 계속 대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 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얼른 내 자리로 가서 앉았다. 생각해보니 자리에 앉지 않고 계속 서있었다. 자리에 앉은 다음 가방에서 필기도구와 오늘의 첫 번째 수업과목의 교과서를 꺼냈다. 그리고는 멍하니 교과서를 들여다보았다.
나랏말사미 듕귁에 달아……. 아니 첫교시는 수학이었지. 일단 로그함수부터 찬찬히 들여다보도록 할까.
자리에 앉아 공부삼매경(1분쯤)에 빠져있는 나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힐끔 내 책상 앞에 서있는 교복 치맛자락이 보인다. 하지만 모르는 척 교과서를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그 누군가가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나도 모르게 눈길을 주자 어제보다 머리가 많이 짧아지신 듯한 여학생의 얼굴이 보였다. 여학생이 인사한다.
“안녕.”
“그래, 안녕.”
과연 내가 가식적인 미소라도 짓고 있을지 잘 모르겠다. 지은은 나와 눈을 마주친 채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로,
“나한테 뭔가 물을 게 있지 않아?”
“그래, 딱 한 가지만 물을게.”
별로 묻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내 눈앞에 있는 무서운 미소를 보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말이야.”
“응.”
아, 정말로 묻고 싶지 않다. 혹시나가 역시나가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저기, 그 머리 말인데.”
“응, 너 때문이야.”
“아니, 질문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그래? 그럼 다시 질문해.”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이지.
“혹시 너 머리 자른 게 어제 내가 한 말 때문이야?”
“응. 잘 아네.”
“저기 혹시 내가 어제 뭐라고 말했지?”
“난 긴머리보다 짧은 머리가 더 좋아, 라고 했어.”
그랬군. 내가 그런 말을 했단 말이지. 하지만 보통 그런 말을 한다고 머리를 자르는 건가. 특히 여자는 남자보다 머리를 소중하게 다루지 않던가.
“그럼 다음 질문. 왜 머리를 잘랐어?”
“네가 짧은 머리가 좋다고 했으니까.”
“단지 그것 때문에?”
“응.”
“겨우 그 정도 이유로 머리를 잘랐어?”
“응.”
“이해가 안 돼.”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생각 없이 한 말을 그대로 실행하다니. 단번에 머리카락을 자르다니. 그 정도 길이라면 분명 몇 년을 정성들여 길렀을 것이다. 공든 탑을 무너뜨린 것이다. 몇 년 동안 쌓아왔을 탑을 단 하루만에.
“왜?”
“좋아하니까.”
“그걸론 이유가 안 돼.”
“아니, 돼.”
“안 돼.”
“충분히 돼.”
“너!”
나는 화가 났다. 왜냐하면, 지은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겨우 말 한마디로 정성들여 기른 머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잘라버렸다는 것이 무서웠다. 좋아한다, 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게 가능하다는 건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무서웠다. 무서웠기 때문에 화가 났다.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
미쳤어? 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누군가 교실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말을 삼켰다. 그리곤 얼른 자리에 앉았다. 지은도 얼른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여전히 무서운 미소를 지은 채로.
“어라, 내가 혹시 방해했나?”
“시끄럽다.”
누군가는 성진이 녀석이었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녀석.
이 교실에 아무도 없다면, 성진이 녀석에게 고맙다는 말을 세 번까지 해줄 자신이 있다. 하지만 교실에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그 말은 영원히 묻어두기로 했다.
성진이 녀석이 자신의 책상에 가방을 걸어두자마자 내 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성진이 녀석은 내 옆자리에 털푸덕 앉더니 나에게 말을 건다.
“너, 국어 수행평가 다 했어?”
“어떤 거?”
“오늘 교과서 검사 한다잖아. 교과서 다 채웠어?”
“아마도 다 했을 걸.”
“그래, 넌 역시 빈틈이 없구나.”
성진이 녀석이 말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멍하니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처음 알았는데, 성진이 녀석의 손은 여자 손가락처럼 가늘고 길다. 언젠가 피아노를 배웠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것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피아노를 배우면 손가락 모양이 이뻐진다는 것 같으니까.
피아노를 배웠건, 손가락이 가늘고 길건 간에, 그냥 말없이 손을 내려다보았다.
“운하야, 제발.”
“뭘?”
“국어 교과서 좀 빌려줘.”
“나는 국어 교과서 없어.”
“문학 교과서 좀 빌려줘.”
한참 녀석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책상서랍에 손을 넣었다.
“대여료 만 원.”
“이 은혜 있지 않을게.”
“그래. 잊지 마.”
성진이 녀석은 책을 받았으면서도 당장 돌아가지 않고 내 옆에서 주저리주저리 떠들다가 슬슬 수업이 시작될 시간이 되자 자리로 돌아갔다.
수업이 시작되었다.
“너희들, 요즘 정신이 풀어졌어. 너희들 다음주면 당장 시험이야! 이런 정신으로 시험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냐! 그리고 너희들은 지금 고3이야 고3. 고2고1 코찔찔이랑은 다르단 말이다!”
열을 내고 있는 선생님. 어제 오늘 일이 아니기 때문에 듣는둥마는둥하며 교과서를 들여다보았다. 저런 잔소리를 하더라도, 하는 놈은 하고 안하는 놈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가끔 예외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녀석은 굳이 잔소리가 아니라도 할 녀석이다.
선생님에게 나쁜 소리를 하고자하는 게 아니다. 열의를 가진 선생님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열의를 쏟는 대상이 틀렸다. 선생님이 열의를 쏟아야하는 건 불특정다수의 학생이 아니다. 선생님이 열의를 쏟아야하는 대상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이다. 하고자 하는 녀석을, 하고자 하는 선생이 가르쳐야하는 거다.
저런 식으로 그저 수업시간에 관례처럼 말을 내뱉어서는 단지 쓸모없는 잔소리가 될 뿐이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대충 선생님의 말씀을 받아적으며 시간을 떼우다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요즘 들어 시간이 흐름이 빨라진 듯한 느낌이 든다.
“운하야, 같이 점심 먹으러 갈래?”
“아니, 할 일이 있다.”
“그래? 그럼 잘해봐.”
뭘 잘해봐?
물어보기도 전에 성진이 녀석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급식실로 향했다. 그 미소를 보니 어쩐지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서 때려주고 싶었지만 빠른 속도로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게다가, 그것보다 바쁜 일도 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그 녀석이 있는 자리로 향했다. 그 녀석은 두 명의 여자애와 함께 웃고 떠드는 중이었다. 내가 그 녀석의 앞에 서자 그 녀석과 두 명의 여자애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차라리 녀석 혼자 있다면 괜찮은데 양옆에 있는 둘이 거슬린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말을 걸었다.
“지은아. 잠시 할 말이 있는데.”
“난 할 말 없는데.”
거절당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도전했다.
“난 할 말이 있으니까 따라와 줄래.”
“우와, 뭐야뭐야.”
“고백이야? 꺄?”
양 옆의 여자애들이 난리가 났다. 정말 얼굴 팔리는 일이 아닐 수 없지만, 꾹 참고 뒤돌아 교실 밖으로 나갔다. 얼굴이 화끈하다. 혹시 눈에 띄게 붉어져 있을까.
지은이 교실 밖으로 나오는 걸 확인하자 앞서 걷기 시작했다. 계단을 올랐다. 지은도 따라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계속 걸어 올라가 도착한 곳은 지난번에 그곳이다. 지은에게 고백을 받은 곳.
“할 말이란 게 뭐야?”
지은이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 말에 침묵했다. 사실은 할 말이 없었다. 그저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는 생각에 쪽팔림을 무릅쓰고 지은을 여기로 데려오긴 했지만, 막상 할 말이 없다. 진땀이 난다.
그래도 계속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말을 떠올렸다.
“너, 어째서 날 좋아하는 거야?”
입을 벌릴 때부터 얼굴이 뜨거워졌지만, 참고 말했다.
“3년 전에 처음 봤어.”
지은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3년 전? 3년 전이라면 분명…….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를 말하는 건가.
“그래. 그 때 병원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관심을 가졌어. 그래서 어떻게 해서 이름도 알아내고 학교도 알아내고, 고등학교도 따라왔어.”
“거짓말 치지 마.”
“진짜야.”
“거짓말이야.”
말도 안 된다. 3년 동안 짝사랑을 한다는 게. 절대로 말이 안 된다. 전부다, 거짓말이다.
“진짜라니까!”
여자애는 화를 냈다.
“여기 네 눈앞에 증거가 있잖아. 그래도 못 믿어? 네 눈앞에 있는데!”
화를 내고 있는 내 눈앞에 있는 여자애는, 어쩐지 울고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일까.
“어째서, 어째서 믿어주지 않는 거야…….”
믿어주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울 수 있는 걸까. 절대로 믿을 없다. 하지만, 눈앞에 울고 있는 사람은,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
“좋아, 일단은 믿어줄 테니까. 울지 마.”
“흑, 흑.”
처음에는 눈물만 흐르고 있었는데 이제는 우는 소리까지 낸다. 이 광경을 누군가 보면, 이라는 생각에 얼른 지은을 달래기 시작했다.
“어이, 제발 울지 마. 믿어준다니까.”
“흑흑, 흑!”
더욱 거세게 울기 시작하는 지은. 그리고 더욱 당황하기 시작하는 나. 등을 토닥여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여진다. 제발 울지 말아주라. 내가 어떻게 해야 안 울겠니. 그 때,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나에게 내미는 지은. 내민 손을 보니 체크무늬의 손수건이다.
“흑, 이걸로, 흑! 눈물 닦아줘.”
“정말로?”
“흑!”
“알았어알았어. 울지 마.”
나는 어쩔 수 없이 손수건을 들고 지은의 얼굴을 닦아주어야 했다. 하지만 고개를 숙인 채라 닦기가 곤란하다.
“고개 좀 들어줄래.”
“응.”
고개를 든 지은의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주기 시작했다. 일단 눈가를 먼저. 눈물 때문에 얼굴에 붙어버린 머리카락을 옆으로 치우면서 얼굴을 닦았다.
“후, 이제 됐어?”
“응, 고마워.”
손수건을 받아 챙겨 넣는 지은. 어느새 울음을 그쳤다.
지은이 울음을 그치자,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럼, 잘 가.”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일부러 불러내놓고 그런 말하기는 뭐하고. 그렇다고 다른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다.
“운하야.”
“응?”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지은이 선수를 쳤다. 나는 멍하게 있다가 순간적으로 대답해버렸다.
“네가 좋아한다는 사람, 누구야?”
“뭐?”
바보처럼 되물었다.
“지난번에 말했잖아.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그랬나?”
“그랬어.”
“글쎄. 누굴까?”
애초에 잊어버리고 있었다. 정말로 내가 그런 말을 한 건가? 그 때 일을 돌이켜보면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말하기 전까진 계속 따라다닐 거야.”
“뭐?”
“나를 납득시킬 만큼 매력적인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포기 못해.”
라고, 지은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때 들었던 생각은, 정말로 한심천만하지만 지은이라는 여자애가 참으로 무섭다는 거였다.
하지만, 나는 나이가 들면서 웃음이란 도구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이 도구를 잘 사용해야만 인간관계가 유연해진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웃고 싶어도 나를 웃겨주는 것이 없으니 제대로 웃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있었다. 웃기지도 않을 때, 웃고 싶지 않을 때 웃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웃기지도 않는데 웃고 있다. 소리 없이. 입만을 움직인다.
“안녕. 좋은 아침이네.”
“그러네.”
“…….”
내 가식적인 인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넘기는 지은. 그것 때문인지 이다음에 해야 할 말을 잊어버렸다. 할 말이 떠오르지 않으니 입을 열지 못하고, 지은도 어쩐지 기분 나쁘게 웃으며 가만히 날 보고 있다.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머리 잘랐구나, 이미지 변신? 정말로 변신한 것처럼 느낌이 확 변했구나. 나도 변신이란 거 해보고 싶어. 이대로 새 같은 걸로 변해서 하늘로 날아가 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어. 아니면,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는 마법 같은 게 있으면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을래?
드디어 물을 만한 게 떠올랐다.
“머리 잘랐네. 잘 어울린다.”
“고마워.”
“…….”
다음에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왜 저 녀석과 계속 대화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 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얼른 내 자리로 가서 앉았다. 생각해보니 자리에 앉지 않고 계속 서있었다. 자리에 앉은 다음 가방에서 필기도구와 오늘의 첫 번째 수업과목의 교과서를 꺼냈다. 그리고는 멍하니 교과서를 들여다보았다.
나랏말사미 듕귁에 달아……. 아니 첫교시는 수학이었지. 일단 로그함수부터 찬찬히 들여다보도록 할까.
자리에 앉아 공부삼매경(1분쯤)에 빠져있는 나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힐끔 내 책상 앞에 서있는 교복 치맛자락이 보인다. 하지만 모르는 척 교과서를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그 누군가가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나도 모르게 눈길을 주자 어제보다 머리가 많이 짧아지신 듯한 여학생의 얼굴이 보였다. 여학생이 인사한다.
“안녕.”
“그래, 안녕.”
과연 내가 가식적인 미소라도 짓고 있을지 잘 모르겠다. 지은은 나와 눈을 마주친 채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로,
“나한테 뭔가 물을 게 있지 않아?”
“그래, 딱 한 가지만 물을게.”
별로 묻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내 눈앞에 있는 무서운 미소를 보니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말이야.”
“응.”
아, 정말로 묻고 싶지 않다. 혹시나가 역시나가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저기, 그 머리 말인데.”
“응, 너 때문이야.”
“아니, 질문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그래? 그럼 다시 질문해.”
그러니까, 그러니까 말이지.
“혹시 너 머리 자른 게 어제 내가 한 말 때문이야?”
“응. 잘 아네.”
“저기 혹시 내가 어제 뭐라고 말했지?”
“난 긴머리보다 짧은 머리가 더 좋아, 라고 했어.”
그랬군. 내가 그런 말을 했단 말이지. 하지만 보통 그런 말을 한다고 머리를 자르는 건가. 특히 여자는 남자보다 머리를 소중하게 다루지 않던가.
“그럼 다음 질문. 왜 머리를 잘랐어?”
“네가 짧은 머리가 좋다고 했으니까.”
“단지 그것 때문에?”
“응.”
“겨우 그 정도 이유로 머리를 잘랐어?”
“응.”
“이해가 안 돼.”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생각 없이 한 말을 그대로 실행하다니. 단번에 머리카락을 자르다니. 그 정도 길이라면 분명 몇 년을 정성들여 길렀을 것이다. 공든 탑을 무너뜨린 것이다. 몇 년 동안 쌓아왔을 탑을 단 하루만에.
“왜?”
“좋아하니까.”
“그걸론 이유가 안 돼.”
“아니, 돼.”
“안 돼.”
“충분히 돼.”
“너!”
나는 화가 났다. 왜냐하면, 지은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겨우 말 한마디로 정성들여 기른 머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잘라버렸다는 것이 무서웠다. 좋아한다, 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게 가능하다는 건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무서웠다. 무서웠기 때문에 화가 났다.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
미쳤어? 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누군가 교실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말을 삼켰다. 그리곤 얼른 자리에 앉았다. 지은도 얼른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여전히 무서운 미소를 지은 채로.
“어라, 내가 혹시 방해했나?”
“시끄럽다.”
누군가는 성진이 녀석이었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녀석.
이 교실에 아무도 없다면, 성진이 녀석에게 고맙다는 말을 세 번까지 해줄 자신이 있다. 하지만 교실에 누군가가 있기 때문에 그 말은 영원히 묻어두기로 했다.
성진이 녀석이 자신의 책상에 가방을 걸어두자마자 내 쪽으로 오기 시작했다. 성진이 녀석은 내 옆자리에 털푸덕 앉더니 나에게 말을 건다.
“너, 국어 수행평가 다 했어?”
“어떤 거?”
“오늘 교과서 검사 한다잖아. 교과서 다 채웠어?”
“아마도 다 했을 걸.”
“그래, 넌 역시 빈틈이 없구나.”
성진이 녀석이 말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나는 멍하니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처음 알았는데, 성진이 녀석의 손은 여자 손가락처럼 가늘고 길다. 언젠가 피아노를 배웠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것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피아노를 배우면 손가락 모양이 이뻐진다는 것 같으니까.
피아노를 배웠건, 손가락이 가늘고 길건 간에, 그냥 말없이 손을 내려다보았다.
“운하야, 제발.”
“뭘?”
“국어 교과서 좀 빌려줘.”
“나는 국어 교과서 없어.”
“문학 교과서 좀 빌려줘.”
한참 녀석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책상서랍에 손을 넣었다.
“대여료 만 원.”
“이 은혜 있지 않을게.”
“그래. 잊지 마.”
성진이 녀석은 책을 받았으면서도 당장 돌아가지 않고 내 옆에서 주저리주저리 떠들다가 슬슬 수업이 시작될 시간이 되자 자리로 돌아갔다.
수업이 시작되었다.
“너희들, 요즘 정신이 풀어졌어. 너희들 다음주면 당장 시험이야! 이런 정신으로 시험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냐! 그리고 너희들은 지금 고3이야 고3. 고2고1 코찔찔이랑은 다르단 말이다!”
열을 내고 있는 선생님. 어제 오늘 일이 아니기 때문에 듣는둥마는둥하며 교과서를 들여다보았다. 저런 잔소리를 하더라도, 하는 놈은 하고 안하는 놈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가끔 예외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녀석은 굳이 잔소리가 아니라도 할 녀석이다.
선생님에게 나쁜 소리를 하고자하는 게 아니다. 열의를 가진 선생님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열의를 쏟는 대상이 틀렸다. 선생님이 열의를 쏟아야하는 건 불특정다수의 학생이 아니다. 선생님이 열의를 쏟아야하는 대상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이다. 하고자 하는 녀석을, 하고자 하는 선생이 가르쳐야하는 거다.
저런 식으로 그저 수업시간에 관례처럼 말을 내뱉어서는 단지 쓸모없는 잔소리가 될 뿐이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대충 선생님의 말씀을 받아적으며 시간을 떼우다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요즘 들어 시간이 흐름이 빨라진 듯한 느낌이 든다.
“운하야, 같이 점심 먹으러 갈래?”
“아니, 할 일이 있다.”
“그래? 그럼 잘해봐.”
뭘 잘해봐?
물어보기도 전에 성진이 녀석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급식실로 향했다. 그 미소를 보니 어쩐지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서 때려주고 싶었지만 빠른 속도로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게다가, 그것보다 바쁜 일도 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그 녀석이 있는 자리로 향했다. 그 녀석은 두 명의 여자애와 함께 웃고 떠드는 중이었다. 내가 그 녀석의 앞에 서자 그 녀석과 두 명의 여자애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차라리 녀석 혼자 있다면 괜찮은데 양옆에 있는 둘이 거슬린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말을 걸었다.
“지은아. 잠시 할 말이 있는데.”
“난 할 말 없는데.”
거절당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도전했다.
“난 할 말이 있으니까 따라와 줄래.”
“우와, 뭐야뭐야.”
“고백이야? 꺄?”
양 옆의 여자애들이 난리가 났다. 정말 얼굴 팔리는 일이 아닐 수 없지만, 꾹 참고 뒤돌아 교실 밖으로 나갔다. 얼굴이 화끈하다. 혹시 눈에 띄게 붉어져 있을까.
지은이 교실 밖으로 나오는 걸 확인하자 앞서 걷기 시작했다. 계단을 올랐다. 지은도 따라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계속 걸어 올라가 도착한 곳은 지난번에 그곳이다. 지은에게 고백을 받은 곳.
“할 말이란 게 뭐야?”
지은이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 말에 침묵했다. 사실은 할 말이 없었다. 그저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는 생각에 쪽팔림을 무릅쓰고 지은을 여기로 데려오긴 했지만, 막상 할 말이 없다. 진땀이 난다.
그래도 계속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말을 떠올렸다.
“너, 어째서 날 좋아하는 거야?”
입을 벌릴 때부터 얼굴이 뜨거워졌지만, 참고 말했다.
“3년 전에 처음 봤어.”
지은이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3년 전? 3년 전이라면 분명…….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를 말하는 건가.
“그래. 그 때 병원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관심을 가졌어. 그래서 어떻게 해서 이름도 알아내고 학교도 알아내고, 고등학교도 따라왔어.”
“거짓말 치지 마.”
“진짜야.”
“거짓말이야.”
말도 안 된다. 3년 동안 짝사랑을 한다는 게. 절대로 말이 안 된다. 전부다, 거짓말이다.
“진짜라니까!”
여자애는 화를 냈다.
“여기 네 눈앞에 증거가 있잖아. 그래도 못 믿어? 네 눈앞에 있는데!”
화를 내고 있는 내 눈앞에 있는 여자애는, 어쩐지 울고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일까.
“어째서, 어째서 믿어주지 않는 거야…….”
믿어주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울 수 있는 걸까. 절대로 믿을 없다. 하지만, 눈앞에 울고 있는 사람은,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
“좋아, 일단은 믿어줄 테니까. 울지 마.”
“흑, 흑.”
처음에는 눈물만 흐르고 있었는데 이제는 우는 소리까지 낸다. 이 광경을 누군가 보면, 이라는 생각에 얼른 지은을 달래기 시작했다.
“어이, 제발 울지 마. 믿어준다니까.”
“흑흑, 흑!”
더욱 거세게 울기 시작하는 지은. 그리고 더욱 당황하기 시작하는 나. 등을 토닥여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여진다. 제발 울지 말아주라. 내가 어떻게 해야 안 울겠니. 그 때,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나에게 내미는 지은. 내민 손을 보니 체크무늬의 손수건이다.
“흑, 이걸로, 흑! 눈물 닦아줘.”
“정말로?”
“흑!”
“알았어알았어. 울지 마.”
나는 어쩔 수 없이 손수건을 들고 지은의 얼굴을 닦아주어야 했다. 하지만 고개를 숙인 채라 닦기가 곤란하다.
“고개 좀 들어줄래.”
“응.”
고개를 든 지은의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주기 시작했다. 일단 눈가를 먼저. 눈물 때문에 얼굴에 붙어버린 머리카락을 옆으로 치우면서 얼굴을 닦았다.
“후, 이제 됐어?”
“응, 고마워.”
손수건을 받아 챙겨 넣는 지은. 어느새 울음을 그쳤다.
지은이 울음을 그치자,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럼, 잘 가.”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일부러 불러내놓고 그런 말하기는 뭐하고. 그렇다고 다른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다.
“운하야.”
“응?”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지은이 선수를 쳤다. 나는 멍하게 있다가 순간적으로 대답해버렸다.
“네가 좋아한다는 사람, 누구야?”
“뭐?”
바보처럼 되물었다.
“지난번에 말했잖아.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그랬나?”
“그랬어.”
“글쎄. 누굴까?”
애초에 잊어버리고 있었다. 정말로 내가 그런 말을 한 건가? 그 때 일을 돌이켜보면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지 말하기 전까진 계속 따라다닐 거야.”
“뭐?”
“나를 납득시킬 만큼 매력적인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포기 못해.”
라고, 지은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때 들었던 생각은, 정말로 한심천만하지만 지은이라는 여자애가 참으로 무섭다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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