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음...!"
오후 두 시가 넘어서는 시간... 거의 수직으로 내리 비치는 한낮의 뙤약볕
에 부신 눈을 부비며 낮잠이 주는 나른함으로부터 몸을 일으킨다.
창 밖으로 보여지는 주위의 표정들은 온통 한여름의 무더위에 축 처져 흐
믈거리는 일상의 조용함 뿐이다. 갑자기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나와 분리
되어 있는 저 흐믈거리며 녹아 내리고 있는 세계를 느껴보고 싶어진다.
"드르르륵...."
방안 가득 들어찬 시원한 에어컨의 냉기를 비집고 훅...하고 폐부까지 밀려
드는 더운 바람... 더위로부터 안락하게 보호받아온 내 피부가 일순 긴장하
다 못해 까무라치며 저항하기 시작한다.
"펄럭...."
창문을 통해 들어온 더운 바람이 벽에 걸린 달력의 치마를 훌쩍 들추어보
고는 얄밉게 도망친다. 오늘이 몇 일이지...? 갑자기 지난 2 주 가까운 시간
을 이렇게 날짜와 요일조차 잊고 지내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 방학이 시작된지도 2 주 가까이 지나고 있었다.
고등학생이 되어 처음 맞이하는 방학... 누구에게나 처음엔 거창하고 원대
한 청사진으로 도배되어 다가오지만 그 막바지에는 결국 아무 것도 이룬
것 없이 그저 미루어 두었던 자잘한 일들의 뒷처리로 인해 더 힘겹고 고달
프기만 한... 방학...
그러나 나는 남들이 갖는 그 원대한 공부 계획이나 신나는 여행 계획조차
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그저 그렇고 그런 맥없는 방학의 초입을 거쳐 이제
는 근 2 주 째의 시간을 하루하루 그럭저럭 흘려보내고 있는 것이다.
"풀썩..."
땀을 흘리고 싶다. 이렇게 침대에 누워 내리 쬐는 태양 빛과 방안에 가득
차기 시작하는 열기를 받아들이며 실컷 땀을 흘리고 싶다.
방학이 시작되기 얼마 전에 겪어야 했던 한밤의 일... 그 일 이후에 내 생
활은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찾아들고 있었다. 비록 완전히 초연해질 수는 없
었지만... 그래도 그 동안 머리와 마음을 온통 차지한 채 나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던 그 혼란으로부터의 냉정한 거리감만큼은 유지할 수 있게 되
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나 스스로 억제하고 되새기고 포용하는... 열 일곱 살의
사춘기 소년에게는 불가능할 정도로 가혹한 인내의 시간도 아울러 필요했
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비록 어설프고 불완전한 안정감이지만 그나마
이 정도라도 회복하고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내면의 인내에 의해서
라기 보다는 모두 방학이라는 특별한 시기가 주는 독특한 효과였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것 같다.
그랬다...! 방학은 나에게 큰 선물을 주었다.
방학을 앞둔 그 시점에... 엄마와 경수형의 일로 나는 거의 몸과 마음이 탈
진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만일 그 상태가 조금만 더 이어졌더라
면... 우우...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방학은 그렇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그로
기 상태에 몰린 나에게 재충전의 휴식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방학은 나에게 그 재충전의 기회보다 더 큰 선물을 주었다. 재충전
의 기회보다 더 큰... 아예 재충전의 이유가 되는 원인을 잠시 제거해 주는
그런 선물... 그 것은 바로... 경수형의 귀향...이었다.
나보다 한달 정도 먼저 방학을 했던 경수형이 집에 내려가지 않고 있던 이
유는 나의 학기말 시험을 대비한 과외가 그 이유였다. 그런데 나의 학기말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방학에 들어간 상황에서 경수형은 우리 집에 더 머
물 이유가 공중에 붕 떠버린 셈이었다.
물론 경수형의 막바지 몇 주 동안은 나의 과외와는 별도로 이 집에 머물고
자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지만... 엄마의 몸이라는 아주 더러운 이유가...
아무튼 공식적으로 더 이상 우리 집에 머물 이유가 사라지게되자 경수형의
모습에선 초조함과 괜한 신경질 그리고 욕구불만성 스트레스에 의한 흡연
량의 증가가 눈에 띄었다.
마음 같아선 방학 내내 여기에 머물며 하숙집 여주인의 농익은 몸을 즐기
고 싶은데 그럴 수는 없고... 이제 집에는 내려가야 하고... 내 눈엔 그런 경
수형의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런 경수형의 모습과는 달리 엄마는 세상 모든 근심을 접은 듯이 초연하
기만 했다. 가끔씩 혼자서 내뿜는 한숨과 점점 희미해져만 가는 표정 그리
고 갈수록 줄어드는 말 수만 빼면 엄마는 예전의 모습을 대부분 되찾고 있
었다.
방학이 시작되고 이틀 후... 나는 이층 거실에서 시골집과 통화하는 경수형
의 모습을 보았다. 농사짓는 집안에서 방학 한때 내려와 도와줄 일손이 있
다는 것은 정말 가뭄중의 단비와 같을 것이다.
나는 전화기에 대고 "네..아버지..내일 내려갈께요..."라고 힘없이 말
하며 전화를 끊는 경수형의 축 쳐진 어깨를 뒤로하고 내방으로 들어왔다.
물론 내방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입가에 승리자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지난 2 주... 난 그 심하던 마음 고생과 죽음까지도 생각하던 혼란
으로부터 다소 떨어져... 언젠가는 다시 깨지고 말 운명의 안정이라는 유리
잔에 안락이라는 음료수를 잔뜩 부어 마시며 생활해 왔다.
그리고 최소한... 오늘 아침까지는 그랬다.
"여보... 오늘 경수 올라온다며...?"
"네...? 아...네...!"
"무슨 일이지...? 학교에 일이라도 있는건가...?"
"잘은..모르겠어요... 제가 듣기로는... 군대간 친구가 휴가를 나와서... 무슨
동아리 모임이 있다는 것 같아요..."
"으응...! 그래 언제 온데...? 이따가 저녁에 술 한잔 같이 할 수 있을려나...?
거 기대되네... 그 친구 그거 어리지만 술이 보통이 아닌데 말야... 하하.. 아
참... 여보...! 오늘 동창회라고...?"
"네...."
"많이 늦나...? 될 수 있으면 일찍 와서 술상 좀 준비해 두구려... 모처럼 집
에서 술 마실 상대가 생겼는데.. 한 잔 해야지... 하하... 안그래...?"
평소에도 아빠는 간혹 저녁 식사 후에 경수형과 마주앉아 술을 드시던 일
이 있었다. 아빠 연배의 주위 친구 분들에겐 대부분 경수형 또래의 아들이
있기 마련이었고 아빠는 아직은 나이 어린 내가 못 채워주는 아들로서의
일정 부분을 경수형을 통해서 은근히 대리 만족하시는 경향이 계셨다.
어쨌든 그 아침 식탁에서의 두 분의 대화가 오늘 하루 나의 심기를 이토록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중이다.
불청객으로부터 애써 되찾은 나의 영역을 예전처럼 깨끗이 정리하고 손보
아 이제는 어느 정도 원래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는데... 다시금 저 멀리서
다가오는 침입자의 모습을 발견한 듯한... 본능적인 긴장감...!
비록 오늘 하루나 길어야 이틀 정도 머물 뿐이겠지만 그 짧은 시간으로도
나의 정리되어진 이 생활의 안정이 다시 송두리째 뒤엎어질 수 있음을 알
기에... 나는 아연 긴장하며 마음속의 적의를 새롭게 가다듬게 되는 것이다.
제기랄... 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어...! 얼마나 내 자신이 어리석단 말
인가... 기껏 이렇게 길어야 방학기간 한달 정도의 불완전한 안락을 위해
현실을 외면하고 타협해버린 셈이되고 만 것이다. 제기랄...
"때르릉..."
"네..! 여보세요..."
"지훈이니... 아빠다..."
"아빠... 왠일이세요... 엄마는 동창회 모임 때문에 아까 점심때 숙희 아줌마
랑 같이 나가셨는데..."
"응... 아빠가 오늘 일이 있어서 못들어갈 것 같다... 엄마오면... 아니지 좀
늦는다고 그랬지... 아무튼 엄마오면 아빠네 회사 직원이 모친상을 당해서
오늘밤 거기에서 밤을 새워야 할 것 같다고 말해주렴...알겠니... ?"
"네...? 네..."
아침부터 가슴속에 어둡게 드리우던 일말의 불안감이 이 순간 거의 절망에
가까울 정도로 커지고 있었다. 아빠가... 아빠가 오늘 집을 비우신단다. 하
필이면 다른 날도 아니고 오늘... 바로 경수형이 올라온다고 하는 오늘... 이
제 또 다시 이 집안에서 일어날지도 모를 음탕한 일들의 고통은 고스란히
나 혼자만의 몫으로 남겨지게 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지금까지 나는 아빠 몫의 마음고생마저 떠안아온 셈이 되는
것이다. 정작 이 세상에서 엄마가 저지른 저 부정의 대가로 가장 상처받고
가장 고심하고 가장 마음 아파 해야하는 것은 아빠다. 아울러 궁극적으로
그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것도 바로 아빠의 몫이고... 그러나 지금까지 그
아빠의 역할과 몫은 모두 내가 대신해온 것이 된다.
그리고 또 다시 오늘 밤... 게다가 아빠마저 안계신 오늘 밤.... 아아... 생각
하지 말자... 오늘 하루의 모든 것은 마치 두 사람의 2 주만의 오랜 이별
뒤에 이어진 해후를 축하해 주려는 얄밉고 음탕한 색정의 여신이 계획하
고 만들어내는 작품 같기만 하다.
제기랄... 그렇다고 내가 이대로 있을 것 같으냐...? 으으... 뭔가 나름의 대
책이라도 세워야 할 것 같다. 이대로 순순히 경수형과 엄마의 그 추하고
구역질나는 만남을 순조롭게 놔두고 싶지는 않다. 으으... 뭔가 좋은 수가
있어야 하는데... 아...!!!! 그래...!!! 그 방법이 있었지...!!!
"때르릉..."
"여보세요...?"
"기철이니...? 나야 지훈이...!"
"어...? 지훈이 너가 왠일이야...? 농구하자고 부르는거야..? 그런거라면 싫
어... 날이 너무 더워.... 이런 날에 농구는 무슨 농구냐...."
"아냐... 임마...! 너 오늘 우리 집에 안올래...?"
"응...? 너네 집에...? 왜...?"
"그냥... 오늘 우리 집에 와서 나랑 놀다가 자고 가라구...."
"글쎄... 누구누구 오는데....?"
"민구랑 수만이도 부를려고...."
"민구랑 수만이는 해양소년단 수련회에 갔잖아..."
"그..그래...?"
"뭐야...? 갑자기... 왜 모여서 놀자는거야...?"
"음.. 아니야.... 오기 싫으면 됐어...."
"짜식... 뭐얌마... 혹시 너.. 뭐 진한거라도 구해서 보려는거 아니야...?"
".....!!!"
"그런거냐...? 짜샤... 그런거면 진작 그렇게 말하지.... 뭐냐...? 동영상이냐...?
아님... 으으.. 설마 너 진짜 여자애들과.. 흐흐.. 그러자느건 아니지...? 끼야
오..."
"으으... 좃까.... 아무튼 올래 안올래...?"
"뭐야...? 아무 것도 아니야...?"
"으... 알았어... 너 지난번에 나한테 보여달라던 그 일본 포르노책... 그거
보여줄게... 아니... 아예 너 줄게... 게다가 다른 야한 것도 보여줄께....이제
됐냐...?"
"끼야오... 저..정말....? 정말... 마리 미사또의 그 귀한 사진첩을 나한테 준다
고...? 정말이지...? 너 딴말하기 없기다...."
"알았어... 언제 올거냐...?"
"히히... 엄마 들어오시는 데로 갈게... 히히..."
"짜식 완전히 맛 갔군... 칫솔이나 가져왐마... 지난 번 처럼 내 칫솔 쓰지
말고..."
"알았엄마.... 우와.. 오늘 밤새도록..히히....."
"으이구... 이따보자..."
편안한 상대 앞에서의 기철이의 붙임성 있고 활달한 성격... 그거라면 아마
오늘밤 나의 걱정은 한층 가벼워 질 것이다. 비록 민구와 수만이가 빠져나
가서 황금의 멤버들이 다 모이는 것은 아니지만... 기철이 만으로도 대충은
내 계획이 먹혀들거야.
그래... 기철이가 있으면 집안은 다소 시끌벅적 거릴거야. 엄마에게도 붙임
성 있게 구는 기철이... 더구나 경수형과도 다소 안면을 트고 뒤엉키기까지
하는 기철이라면... 오늘밤 우리집안의 분위기를 밤새도록 호들갑스럽고 다
소 어수선하게 만들고도 남을 테니까...
그리고... 그런 어수선함과 호들갑스러운 기철이의 역할은 궁극적으로 엄마
와 경수형이 나눌지도 모르는 둘만의 은밀한 밀회에 어느 정도 저지선이
되어줄 테니까... 이제 기철이만 오면 어느 정도 나의 마음의 준비는 끝나
게되는 셈이다.
"때르릉..."
"여보세요..."
"지훈이니...! 엄마야..."
"어..엄마...? 어디예요...?"
"응.. 지금 엄마 친구들하고 시내에 나와있어... 저녁때가 되가는데 뭐하고
먹을래...?"
"응.. 그냥.. 아무거나.."
"아까 엄마가 뭐 시켜서 먹으라고 준 돈으로 너 먹고 싶은거 사먹어.... 피
자든 짜장면이든...."
"응.. 알았어..."
"아참... 그리고 오늘 아빠네 회사 직원이 모친상을 당해서..."
"응...? 엄마가 그거 어떻게 알아...?"
"너도 알고 있구나...? 난 좀 전에 아빠네 회사에 전화했었지... 아무튼 그러
니까 이따가 경수 오면은 너가 뭐 먹을 거라도 챙겨다 줘...."
"......"
"여보세요...?"
"알았어...!"
"깜짝이야...! 얘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래... 아무튼 엄마는 친구들하
고 저녁 먹으러 가야되니까 이만 끊을게... 굶지 말고.. 저녁 잘 차려먹어...
그리고 엄마 좀 늦을거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나는 대답도 제대로 안하고 전화를 끊었다. 기철이의 일로 풀렸던 마음이
다시금 일그러지는 것이 느껴진다. 애써 찾은 차분함이 엄마의 전화 한 통
으로 산산이 부서진 셈이다.
엄마가 아빠의 일을 안다는 것... 난 일부러 엄마에게 말 안할려고 그랬는
데... 그래야 엄마는 그나마 다소 경수형에 대한 욕정을 자제하며 집에 돌
아올 것 같아서... 그런데 이제 엄마도 오늘밤 이 집에 아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젠장... 엄마의 지금 심정은 신나라 일지도 모른다.
으으... 더군다나... 나를 걱정해서 전화를 한 건지 아니면 경수형을 걱정해
서 전화를 한 건지... 아무튼 엄마와의 전화통화가 내게 준 것은 그저 앞을
가로막고있는 또 하나의 벽일 뿐이다. 엄마라는 벽... 어쩌면 내가 경수형보
다도 더 경계하고 조심스럽게 대처해야할 상대로서의 엄마의 모습이 차츰
다가든다.
"때르르릉..."
이런 제기랄... 이번엔 또 누구야...? 차분하고 조용하게 머리를 싸매고 앉아
서 오늘밤에 대한 대책을 심사숙고해도 모자랄 판인데... 이렇게 틈나는 대
로 전화벨이 울려대고 그때마다 내 심장을 더 아리게 만드는 일들만 벌어
진다면.. 도대체 나보고 뭘 어쩌란 말인가... 젠장...
"여보세욧...!!!"
"어.... 저... 지훈이니...?"
"어..! 겨..경수형....!"
"지훈이 맞구나...? 깜짝 놀랐네... 너 무슨 화나는 일이라도 있냐...? 목소리
가 장난이 아니네..."
"별거 아녜요..."
"어...으응... 저.. 다름이 아니라.... 음.... 아주머니 계시니...?"
"...엄마... 지금 안계세요...!!!"
"응..그래...? 음... 다름이 아니라.... 형이 오늘 친구들 모임 때문에 서울에
올라왔거든..."
"알아요..."
"그런데... 휴가 나온 친구 따라서 철원으로 같이들 가게되서... 오늘 너네
집에는 못갈 것 같다..."
"네에...??"
"응.. 사정이 그렇게 됐어... 부모님들께는 잘 말씀드려 줘.. 행여 기다리시
지 않도록... 알겠니...?"
"네...? 아..네에...!"
"집에는... 아마... 내일이나 모레쯤 들를 것 같다고... 들르기 전에 다시 전
화 드린다고 말씀드려 줄래...?"
"네에....."
"그래... 그럼 그때 보자..."
세상에.... 이런.. 세상에나... 나는 전화기를 내려놓고도 한동안 그렇게 멍하
니 서서 좀 전의 통화가 가져다 준 믿기지 않는 사실에 얼떨떨해했다. 이
럴 수가... 살다가 가끔은 신이 미친게 아닐까 할 정도로 아침과 저녁의 신
수가 바뀌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정말 그런 일이 있구
나....!
못 온다고...? 철원에 간다고...? 친구 따라서...? 정말이지... 좀 전에 수화기
를 통해서 들려오던 그 말들의 울림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어감으로 내
귓가에 울려대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밤의 나를 긴장시키던 그 불길한 일
에 대한 걱정은 일단은 물 건너간 셈이 되는 것인데...
물론 아직 고비를 완전히 넘긴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내일까지는 시간을
번 셈이다. 더구나 내일은 아빠도 다시 집에 계실 것이고... 그래... 좀더 주
의를 기울인다면 엄마와 경수형이 행여나 벌일지도 모르는 그 추악한 짓을
내가 막을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끼야호......"
거의 한달 만에 나는 이렇게 가슴이 터져라 후련한 환호성을 질러본다. 물
론 그 환호성 뒤에 다시 찾아오는 저 밑바닥에 아직도 짙게 깔려있는 근본
적인 어두움만은 여전히 감수해야만 하지만.....
음... 이거 괜히 기철이를 불렀다는 생각이 든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
올 때가 다르다고 했던가...! 막상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 호들갑스럽고
정신 사납게 덤벙대는 기철이의 방문이 여간 찜찜한게 아니다. 음... 늦기
전에 기철이에게 전화해서 오지 말라고 대충 둘러대야겠는데...
"띵동...띵동...."
"얌마...! 차 지훈.... 짜샤...!!! 나 왔다....! 문 열엄마....!!!"
으으.. 정말이지 양반은 못될 놈이다. 아무래도 아까 전화로 괜히 마리 미
사토의 사진첩 얘기를 꺼낸 것만 같다. 제기랄... 마리 미사토에 푸욱 빠져
있는 녀석에게 그 사진첩을 준다는 얘기는 곧 세상을 얻는다는 얘기나 마
찬가지니까...쩝.. 그러니 저렇게 한달음에 달려오지... 나 원 참.....
"동네 시끄럽게 하지 말고 들어와 짜샤.....! 새끼... 존나 빨리 왔네..."
"핵...핵...핵... 야...빠..빨리...보..보 여..줘....그...그거.... 핵핵...."
"얼래.... 이 자식 숨 넘어 가겠네....."
"야... 짜샤... 그걸 말이라고 하냐.... 빠..빨리... 마리..미사토나 보여줘...."
후우... 어쩔 수 없는 놈이다. 나는 헐떡이며 숨을 고르면서도 두 눈만은 이
미 기대감에 벌겋게 충혈된 기철이 녀석을 이끌고 내방으로 향했다. 그리
고 기철이가 그렇게 원하는 마리 미사토의 사진첩을 꺼내 보여주었다.
"흐학.... 저..정말.. 끝내준다... 흐하학...이..이렇게 천사같이 예쁜 여자도...보..
보지가...있네...흐학.... 얼굴만..이쁜게 아니라...후루룩 쩝....보지털도 앙증맞
게..이쁘다....흐아아..."
기철이 녀석은 아예 며칠 살 듯한 기세로 이것저것 자질구래한 것들까지
싸들고 왔다. 내가 말한 칫솔뿐만이 아니라 지 자명종이며 잠옷까지... 정말
못 말릴 놈이다. 게다가 그 잠옷에는 앙증맞은 피카츄가 그려져 있었다...
으이구...
"저녁때 뭐 먹을래...?"
"응...? 난 생각 없어.. 흐아.. 죽인다..... 난 그저 이 사진들만 보고 있어도
배불러...흐아...딸치고 싶다...."
"좃까.... 너 내방에서 그 짓 하면 가만 안둔다..."
"알았어...짜샤... 화장실 가서 하면 되잖아... 치사한 놈...그나저나 너 다른
것도 보여준다고 그랬던거 명심해...."
"으이구... 알았엄마.... 그 침 아무대나 흘리지 맘마....."
"흐히히...좋다....히히... "
정말 못말리는 놈이다. 어떻게 저렇게 단순하고 명료(?)할 수가 있을까...
아무튼 저 녀석만 보고 있어도 오늘 저녁은 그나마 덜 심심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더구나 몇 개 더 있는 비장의 포르노 책과 테이프들이라면 이 녀석을 내일
이나 모레까지도 붙잡아둘 수 있을 것 같고... 후후... 저 녀석도 가끔은 이
렇게 쓸모가 있군... 으음... 배가 고픈데 뭐라도 식혀 먹어야겠다.
-------------------------- -
한동안 제 글을 "야설같지 않은 야설"이라며 구박하시던 님들...
이제부터 긴장하시지요. 솜을 준비하시고... 왠 솜이냐구요...?
쌍코피 터질테니까....^^
(음.. 이렇게 큰 소리 쳐놓고 별로면 어쩐다냐...음...스트레스..- -;)
그럼... (11)편으로 이어집니다.
오후 두 시가 넘어서는 시간... 거의 수직으로 내리 비치는 한낮의 뙤약볕
에 부신 눈을 부비며 낮잠이 주는 나른함으로부터 몸을 일으킨다.
창 밖으로 보여지는 주위의 표정들은 온통 한여름의 무더위에 축 처져 흐
믈거리는 일상의 조용함 뿐이다. 갑자기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나와 분리
되어 있는 저 흐믈거리며 녹아 내리고 있는 세계를 느껴보고 싶어진다.
"드르르륵...."
방안 가득 들어찬 시원한 에어컨의 냉기를 비집고 훅...하고 폐부까지 밀려
드는 더운 바람... 더위로부터 안락하게 보호받아온 내 피부가 일순 긴장하
다 못해 까무라치며 저항하기 시작한다.
"펄럭...."
창문을 통해 들어온 더운 바람이 벽에 걸린 달력의 치마를 훌쩍 들추어보
고는 얄밉게 도망친다. 오늘이 몇 일이지...? 갑자기 지난 2 주 가까운 시간
을 이렇게 날짜와 요일조차 잊고 지내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 방학이 시작된지도 2 주 가까이 지나고 있었다.
고등학생이 되어 처음 맞이하는 방학... 누구에게나 처음엔 거창하고 원대
한 청사진으로 도배되어 다가오지만 그 막바지에는 결국 아무 것도 이룬
것 없이 그저 미루어 두었던 자잘한 일들의 뒷처리로 인해 더 힘겹고 고달
프기만 한... 방학...
그러나 나는 남들이 갖는 그 원대한 공부 계획이나 신나는 여행 계획조차
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그저 그렇고 그런 맥없는 방학의 초입을 거쳐 이제
는 근 2 주 째의 시간을 하루하루 그럭저럭 흘려보내고 있는 것이다.
"풀썩..."
땀을 흘리고 싶다. 이렇게 침대에 누워 내리 쬐는 태양 빛과 방안에 가득
차기 시작하는 열기를 받아들이며 실컷 땀을 흘리고 싶다.
방학이 시작되기 얼마 전에 겪어야 했던 한밤의 일... 그 일 이후에 내 생
활은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찾아들고 있었다. 비록 완전히 초연해질 수는 없
었지만... 그래도 그 동안 머리와 마음을 온통 차지한 채 나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던 그 혼란으로부터의 냉정한 거리감만큼은 유지할 수 있게 되
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나 스스로 억제하고 되새기고 포용하는... 열 일곱 살의
사춘기 소년에게는 불가능할 정도로 가혹한 인내의 시간도 아울러 필요했
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비록 어설프고 불완전한 안정감이지만 그나마
이 정도라도 회복하고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내면의 인내에 의해서
라기 보다는 모두 방학이라는 특별한 시기가 주는 독특한 효과였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것 같다.
그랬다...! 방학은 나에게 큰 선물을 주었다.
방학을 앞둔 그 시점에... 엄마와 경수형의 일로 나는 거의 몸과 마음이 탈
진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만일 그 상태가 조금만 더 이어졌더라
면... 우우...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방학은 그렇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그로
기 상태에 몰린 나에게 재충전의 휴식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방학은 나에게 그 재충전의 기회보다 더 큰 선물을 주었다. 재충전
의 기회보다 더 큰... 아예 재충전의 이유가 되는 원인을 잠시 제거해 주는
그런 선물... 그 것은 바로... 경수형의 귀향...이었다.
나보다 한달 정도 먼저 방학을 했던 경수형이 집에 내려가지 않고 있던 이
유는 나의 학기말 시험을 대비한 과외가 그 이유였다. 그런데 나의 학기말
시험이 끝남과 동시에 방학에 들어간 상황에서 경수형은 우리 집에 더 머
물 이유가 공중에 붕 떠버린 셈이었다.
물론 경수형의 막바지 몇 주 동안은 나의 과외와는 별도로 이 집에 머물고
자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지만... 엄마의 몸이라는 아주 더러운 이유가...
아무튼 공식적으로 더 이상 우리 집에 머물 이유가 사라지게되자 경수형의
모습에선 초조함과 괜한 신경질 그리고 욕구불만성 스트레스에 의한 흡연
량의 증가가 눈에 띄었다.
마음 같아선 방학 내내 여기에 머물며 하숙집 여주인의 농익은 몸을 즐기
고 싶은데 그럴 수는 없고... 이제 집에는 내려가야 하고... 내 눈엔 그런 경
수형의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런 경수형의 모습과는 달리 엄마는 세상 모든 근심을 접은 듯이 초연하
기만 했다. 가끔씩 혼자서 내뿜는 한숨과 점점 희미해져만 가는 표정 그리
고 갈수록 줄어드는 말 수만 빼면 엄마는 예전의 모습을 대부분 되찾고 있
었다.
방학이 시작되고 이틀 후... 나는 이층 거실에서 시골집과 통화하는 경수형
의 모습을 보았다. 농사짓는 집안에서 방학 한때 내려와 도와줄 일손이 있
다는 것은 정말 가뭄중의 단비와 같을 것이다.
나는 전화기에 대고 "네..아버지..내일 내려갈께요..."라고 힘없이 말
하며 전화를 끊는 경수형의 축 쳐진 어깨를 뒤로하고 내방으로 들어왔다.
물론 내방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입가에 승리자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지난 2 주... 난 그 심하던 마음 고생과 죽음까지도 생각하던 혼란
으로부터 다소 떨어져... 언젠가는 다시 깨지고 말 운명의 안정이라는 유리
잔에 안락이라는 음료수를 잔뜩 부어 마시며 생활해 왔다.
그리고 최소한... 오늘 아침까지는 그랬다.
"여보... 오늘 경수 올라온다며...?"
"네...? 아...네...!"
"무슨 일이지...? 학교에 일이라도 있는건가...?"
"잘은..모르겠어요... 제가 듣기로는... 군대간 친구가 휴가를 나와서... 무슨
동아리 모임이 있다는 것 같아요..."
"으응...! 그래 언제 온데...? 이따가 저녁에 술 한잔 같이 할 수 있을려나...?
거 기대되네... 그 친구 그거 어리지만 술이 보통이 아닌데 말야... 하하.. 아
참... 여보...! 오늘 동창회라고...?"
"네...."
"많이 늦나...? 될 수 있으면 일찍 와서 술상 좀 준비해 두구려... 모처럼 집
에서 술 마실 상대가 생겼는데.. 한 잔 해야지... 하하... 안그래...?"
평소에도 아빠는 간혹 저녁 식사 후에 경수형과 마주앉아 술을 드시던 일
이 있었다. 아빠 연배의 주위 친구 분들에겐 대부분 경수형 또래의 아들이
있기 마련이었고 아빠는 아직은 나이 어린 내가 못 채워주는 아들로서의
일정 부분을 경수형을 통해서 은근히 대리 만족하시는 경향이 계셨다.
어쨌든 그 아침 식탁에서의 두 분의 대화가 오늘 하루 나의 심기를 이토록
불편하게 만들고 있는 중이다.
불청객으로부터 애써 되찾은 나의 영역을 예전처럼 깨끗이 정리하고 손보
아 이제는 어느 정도 원래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는데... 다시금 저 멀리서
다가오는 침입자의 모습을 발견한 듯한... 본능적인 긴장감...!
비록 오늘 하루나 길어야 이틀 정도 머물 뿐이겠지만 그 짧은 시간으로도
나의 정리되어진 이 생활의 안정이 다시 송두리째 뒤엎어질 수 있음을 알
기에... 나는 아연 긴장하며 마음속의 적의를 새롭게 가다듬게 되는 것이다.
제기랄... 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어...! 얼마나 내 자신이 어리석단 말
인가... 기껏 이렇게 길어야 방학기간 한달 정도의 불완전한 안락을 위해
현실을 외면하고 타협해버린 셈이되고 만 것이다. 제기랄...
"때르릉..."
"네..! 여보세요..."
"지훈이니... 아빠다..."
"아빠... 왠일이세요... 엄마는 동창회 모임 때문에 아까 점심때 숙희 아줌마
랑 같이 나가셨는데..."
"응... 아빠가 오늘 일이 있어서 못들어갈 것 같다... 엄마오면... 아니지 좀
늦는다고 그랬지... 아무튼 엄마오면 아빠네 회사 직원이 모친상을 당해서
오늘밤 거기에서 밤을 새워야 할 것 같다고 말해주렴...알겠니... ?"
"네...? 네..."
아침부터 가슴속에 어둡게 드리우던 일말의 불안감이 이 순간 거의 절망에
가까울 정도로 커지고 있었다. 아빠가... 아빠가 오늘 집을 비우신단다. 하
필이면 다른 날도 아니고 오늘... 바로 경수형이 올라온다고 하는 오늘... 이
제 또 다시 이 집안에서 일어날지도 모를 음탕한 일들의 고통은 고스란히
나 혼자만의 몫으로 남겨지게 된 것이다.
따지고 보면 지금까지 나는 아빠 몫의 마음고생마저 떠안아온 셈이 되는
것이다. 정작 이 세상에서 엄마가 저지른 저 부정의 대가로 가장 상처받고
가장 고심하고 가장 마음 아파 해야하는 것은 아빠다. 아울러 궁극적으로
그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것도 바로 아빠의 몫이고... 그러나 지금까지 그
아빠의 역할과 몫은 모두 내가 대신해온 것이 된다.
그리고 또 다시 오늘 밤... 게다가 아빠마저 안계신 오늘 밤.... 아아... 생각
하지 말자... 오늘 하루의 모든 것은 마치 두 사람의 2 주만의 오랜 이별
뒤에 이어진 해후를 축하해 주려는 얄밉고 음탕한 색정의 여신이 계획하
고 만들어내는 작품 같기만 하다.
제기랄... 그렇다고 내가 이대로 있을 것 같으냐...? 으으... 뭔가 나름의 대
책이라도 세워야 할 것 같다. 이대로 순순히 경수형과 엄마의 그 추하고
구역질나는 만남을 순조롭게 놔두고 싶지는 않다. 으으... 뭔가 좋은 수가
있어야 하는데... 아...!!!! 그래...!!! 그 방법이 있었지...!!!
"때르릉..."
"여보세요...?"
"기철이니...? 나야 지훈이...!"
"어...? 지훈이 너가 왠일이야...? 농구하자고 부르는거야..? 그런거라면 싫
어... 날이 너무 더워.... 이런 날에 농구는 무슨 농구냐...."
"아냐... 임마...! 너 오늘 우리 집에 안올래...?"
"응...? 너네 집에...? 왜...?"
"그냥... 오늘 우리 집에 와서 나랑 놀다가 자고 가라구...."
"글쎄... 누구누구 오는데....?"
"민구랑 수만이도 부를려고...."
"민구랑 수만이는 해양소년단 수련회에 갔잖아..."
"그..그래...?"
"뭐야...? 갑자기... 왜 모여서 놀자는거야...?"
"음.. 아니야.... 오기 싫으면 됐어...."
"짜식... 뭐얌마... 혹시 너.. 뭐 진한거라도 구해서 보려는거 아니야...?"
".....!!!"
"그런거냐...? 짜샤... 그런거면 진작 그렇게 말하지.... 뭐냐...? 동영상이냐...?
아님... 으으.. 설마 너 진짜 여자애들과.. 흐흐.. 그러자느건 아니지...? 끼야
오..."
"으으... 좃까.... 아무튼 올래 안올래...?"
"뭐야...? 아무 것도 아니야...?"
"으... 알았어... 너 지난번에 나한테 보여달라던 그 일본 포르노책... 그거
보여줄게... 아니... 아예 너 줄게... 게다가 다른 야한 것도 보여줄께....이제
됐냐...?"
"끼야오... 저..정말....? 정말... 마리 미사또의 그 귀한 사진첩을 나한테 준다
고...? 정말이지...? 너 딴말하기 없기다...."
"알았어... 언제 올거냐...?"
"히히... 엄마 들어오시는 데로 갈게... 히히..."
"짜식 완전히 맛 갔군... 칫솔이나 가져왐마... 지난 번 처럼 내 칫솔 쓰지
말고..."
"알았엄마.... 우와.. 오늘 밤새도록..히히....."
"으이구... 이따보자..."
편안한 상대 앞에서의 기철이의 붙임성 있고 활달한 성격... 그거라면 아마
오늘밤 나의 걱정은 한층 가벼워 질 것이다. 비록 민구와 수만이가 빠져나
가서 황금의 멤버들이 다 모이는 것은 아니지만... 기철이 만으로도 대충은
내 계획이 먹혀들거야.
그래... 기철이가 있으면 집안은 다소 시끌벅적 거릴거야. 엄마에게도 붙임
성 있게 구는 기철이... 더구나 경수형과도 다소 안면을 트고 뒤엉키기까지
하는 기철이라면... 오늘밤 우리집안의 분위기를 밤새도록 호들갑스럽고 다
소 어수선하게 만들고도 남을 테니까...
그리고... 그런 어수선함과 호들갑스러운 기철이의 역할은 궁극적으로 엄마
와 경수형이 나눌지도 모르는 둘만의 은밀한 밀회에 어느 정도 저지선이
되어줄 테니까... 이제 기철이만 오면 어느 정도 나의 마음의 준비는 끝나
게되는 셈이다.
"때르릉..."
"여보세요..."
"지훈이니...! 엄마야..."
"어..엄마...? 어디예요...?"
"응.. 지금 엄마 친구들하고 시내에 나와있어... 저녁때가 되가는데 뭐하고
먹을래...?"
"응.. 그냥.. 아무거나.."
"아까 엄마가 뭐 시켜서 먹으라고 준 돈으로 너 먹고 싶은거 사먹어.... 피
자든 짜장면이든...."
"응.. 알았어..."
"아참... 그리고 오늘 아빠네 회사 직원이 모친상을 당해서..."
"응...? 엄마가 그거 어떻게 알아...?"
"너도 알고 있구나...? 난 좀 전에 아빠네 회사에 전화했었지... 아무튼 그러
니까 이따가 경수 오면은 너가 뭐 먹을 거라도 챙겨다 줘...."
"......"
"여보세요...?"
"알았어...!"
"깜짝이야...! 얘가...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래... 아무튼 엄마는 친구들하
고 저녁 먹으러 가야되니까 이만 끊을게... 굶지 말고.. 저녁 잘 차려먹어...
그리고 엄마 좀 늦을거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나는 대답도 제대로 안하고 전화를 끊었다. 기철이의 일로 풀렸던 마음이
다시금 일그러지는 것이 느껴진다. 애써 찾은 차분함이 엄마의 전화 한 통
으로 산산이 부서진 셈이다.
엄마가 아빠의 일을 안다는 것... 난 일부러 엄마에게 말 안할려고 그랬는
데... 그래야 엄마는 그나마 다소 경수형에 대한 욕정을 자제하며 집에 돌
아올 것 같아서... 그런데 이제 엄마도 오늘밤 이 집에 아빠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젠장... 엄마의 지금 심정은 신나라 일지도 모른다.
으으... 더군다나... 나를 걱정해서 전화를 한 건지 아니면 경수형을 걱정해
서 전화를 한 건지... 아무튼 엄마와의 전화통화가 내게 준 것은 그저 앞을
가로막고있는 또 하나의 벽일 뿐이다. 엄마라는 벽... 어쩌면 내가 경수형보
다도 더 경계하고 조심스럽게 대처해야할 상대로서의 엄마의 모습이 차츰
다가든다.
"때르르릉..."
이런 제기랄... 이번엔 또 누구야...? 차분하고 조용하게 머리를 싸매고 앉아
서 오늘밤에 대한 대책을 심사숙고해도 모자랄 판인데... 이렇게 틈나는 대
로 전화벨이 울려대고 그때마다 내 심장을 더 아리게 만드는 일들만 벌어
진다면.. 도대체 나보고 뭘 어쩌란 말인가... 젠장...
"여보세욧...!!!"
"어.... 저... 지훈이니...?"
"어..! 겨..경수형....!"
"지훈이 맞구나...? 깜짝 놀랐네... 너 무슨 화나는 일이라도 있냐...? 목소리
가 장난이 아니네..."
"별거 아녜요..."
"어...으응... 저.. 다름이 아니라.... 음.... 아주머니 계시니...?"
"...엄마... 지금 안계세요...!!!"
"응..그래...? 음... 다름이 아니라.... 형이 오늘 친구들 모임 때문에 서울에
올라왔거든..."
"알아요..."
"그런데... 휴가 나온 친구 따라서 철원으로 같이들 가게되서... 오늘 너네
집에는 못갈 것 같다..."
"네에...??"
"응.. 사정이 그렇게 됐어... 부모님들께는 잘 말씀드려 줘.. 행여 기다리시
지 않도록... 알겠니...?"
"네...? 아..네에...!"
"집에는... 아마... 내일이나 모레쯤 들를 것 같다고... 들르기 전에 다시 전
화 드린다고 말씀드려 줄래...?"
"네에....."
"그래... 그럼 그때 보자..."
세상에.... 이런.. 세상에나... 나는 전화기를 내려놓고도 한동안 그렇게 멍하
니 서서 좀 전의 통화가 가져다 준 믿기지 않는 사실에 얼떨떨해했다. 이
럴 수가... 살다가 가끔은 신이 미친게 아닐까 할 정도로 아침과 저녁의 신
수가 바뀌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정말 그런 일이 있구
나....!
못 온다고...? 철원에 간다고...? 친구 따라서...? 정말이지... 좀 전에 수화기
를 통해서 들려오던 그 말들의 울림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 어감으로 내
귓가에 울려대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밤의 나를 긴장시키던 그 불길한 일
에 대한 걱정은 일단은 물 건너간 셈이 되는 것인데...
물론 아직 고비를 완전히 넘긴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내일까지는 시간을
번 셈이다. 더구나 내일은 아빠도 다시 집에 계실 것이고... 그래... 좀더 주
의를 기울인다면 엄마와 경수형이 행여나 벌일지도 모르는 그 추악한 짓을
내가 막을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끼야호......"
거의 한달 만에 나는 이렇게 가슴이 터져라 후련한 환호성을 질러본다. 물
론 그 환호성 뒤에 다시 찾아오는 저 밑바닥에 아직도 짙게 깔려있는 근본
적인 어두움만은 여전히 감수해야만 하지만.....
음... 이거 괜히 기철이를 불렀다는 생각이 든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와 나
올 때가 다르다고 했던가...! 막상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 호들갑스럽고
정신 사납게 덤벙대는 기철이의 방문이 여간 찜찜한게 아니다. 음... 늦기
전에 기철이에게 전화해서 오지 말라고 대충 둘러대야겠는데...
"띵동...띵동...."
"얌마...! 차 지훈.... 짜샤...!!! 나 왔다....! 문 열엄마....!!!"
으으.. 정말이지 양반은 못될 놈이다. 아무래도 아까 전화로 괜히 마리 미
사토의 사진첩 얘기를 꺼낸 것만 같다. 제기랄... 마리 미사토에 푸욱 빠져
있는 녀석에게 그 사진첩을 준다는 얘기는 곧 세상을 얻는다는 얘기나 마
찬가지니까...쩝.. 그러니 저렇게 한달음에 달려오지... 나 원 참.....
"동네 시끄럽게 하지 말고 들어와 짜샤.....! 새끼... 존나 빨리 왔네..."
"핵...핵...핵... 야...빠..빨리...보..보 여..줘....그...그거.... 핵핵...."
"얼래.... 이 자식 숨 넘어 가겠네....."
"야... 짜샤... 그걸 말이라고 하냐.... 빠..빨리... 마리..미사토나 보여줘...."
후우... 어쩔 수 없는 놈이다. 나는 헐떡이며 숨을 고르면서도 두 눈만은 이
미 기대감에 벌겋게 충혈된 기철이 녀석을 이끌고 내방으로 향했다. 그리
고 기철이가 그렇게 원하는 마리 미사토의 사진첩을 꺼내 보여주었다.
"흐학.... 저..정말.. 끝내준다... 흐하학...이..이렇게 천사같이 예쁜 여자도...보..
보지가...있네...흐학.... 얼굴만..이쁜게 아니라...후루룩 쩝....보지털도 앙증맞
게..이쁘다....흐아아..."
기철이 녀석은 아예 며칠 살 듯한 기세로 이것저것 자질구래한 것들까지
싸들고 왔다. 내가 말한 칫솔뿐만이 아니라 지 자명종이며 잠옷까지... 정말
못 말릴 놈이다. 게다가 그 잠옷에는 앙증맞은 피카츄가 그려져 있었다...
으이구...
"저녁때 뭐 먹을래...?"
"응...? 난 생각 없어.. 흐아.. 죽인다..... 난 그저 이 사진들만 보고 있어도
배불러...흐아...딸치고 싶다...."
"좃까.... 너 내방에서 그 짓 하면 가만 안둔다..."
"알았어...짜샤... 화장실 가서 하면 되잖아... 치사한 놈...그나저나 너 다른
것도 보여준다고 그랬던거 명심해...."
"으이구... 알았엄마.... 그 침 아무대나 흘리지 맘마....."
"흐히히...좋다....히히... "
정말 못말리는 놈이다. 어떻게 저렇게 단순하고 명료(?)할 수가 있을까...
아무튼 저 녀석만 보고 있어도 오늘 저녁은 그나마 덜 심심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더구나 몇 개 더 있는 비장의 포르노 책과 테이프들이라면 이 녀석을 내일
이나 모레까지도 붙잡아둘 수 있을 것 같고... 후후... 저 녀석도 가끔은 이
렇게 쓸모가 있군... 으음... 배가 고픈데 뭐라도 식혀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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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제 글을 "야설같지 않은 야설"이라며 구박하시던 님들...
이제부터 긴장하시지요. 솜을 준비하시고... 왠 솜이냐구요...?
쌍코피 터질테니까....^^
(음.. 이렇게 큰 소리 쳐놓고 별로면 어쩐다냐...음...스트레스..- -;)
그럼... (11)편으로 이어집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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