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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5 03:31 2,352회 0건
보이지 않아도 눈 앞에 있잖아요 -2부- by 킬리군

학생들은커녕, 소리의 그림자도 보이지 아니하는 신발장에서 나는 천천히 실내화로 갈아신었다. 이 정도면 달릴 필요도 없었나. 하긴, 일직이 아니라도 원래 나는 빨리 오는 편이니까. 어쨌든, 문이나 열어야.
직원실로 직행하여, 교실 열쇠를 들고 나온다. 찰칵, 하고 둔한 금속성의 소리가 나며 자물쇠가 떨어졌다.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지는 빈 책상, 의자.
아무도 없는 조용한 교실은 또 색다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이런 청아한 분위기가 좋다. 남이 보면 성격파탄자라고 불릴만하군.
나는 가방을 자리에 놓고 할 일없이 교실을 빙 돌았다.
…깨끗하다. 일부러 청소할 필요도 없고. 그렇다는 것은 이제 내 할 일은 끝났다는 거다. …라고 말해도, 아무도 없는데 딱히 혼자서 할 일도 없다.
"교내나 한바퀴 돌까…"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아무도 없는, 그렇기 때문에 이 조용하고도 신성한 배움의 전당은 가끔씩 재미있는 것들을 많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저번 주만 하더라도 이른 아침 체육창고 앞을 지나갈 때, 본의 아니게 진한 정사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얼굴이야 기억나지도 않는다. 보였던 것이라곤 남자의 벗은 하체 뒷모습(앞모습도 별로 보고싶지 않았겠지만) 그리고 개구리처럼 다리를 벌린 어느 여학생. 그걸 보고 나는 아침부터 참 힘 쓰는군, 이라고 조소했다.
…생각해 보니 아침에 힘 쓰는 건 남의 일이 아니지만.
또 하나는 직원 화장실에서의 신음소리다. 정체야 뻔했다. 선생을 상대로 즉석 원조교제를 하는 아이들일 것이다. 자기네들이 뭘 하나 상관은 없지만, 밖에까지 들린다구, 그때 그렇게 중얼거렸었지.
날씨도 많이 추워졌으니, 설마 썰렁한 체육창고 안에서 그딴 짓을 하는 놈들은 없겠지. 아무리 매트리스라 해도 인간 체온 유지시키기엔 힘드니까. 그렇다면 화장실 주위나 다녀 볼까나…
나는 결심하고 화장실 쪽으로 가 보았다. 물론, 안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녀석들을 위해(?) 최대한 발소리를 죽인 채로.(뭐 실내화니까 소리 내려고 해도 잘 안 나지만)
입구에 도달하자,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럭키- 이른 아침부터 화장실에서 밀담이라. 원조교제 제의? 아님 속옷 판매?"
호기심에 얼굴을 들이밀자, 희뿌연 연기가 내 얼굴을 덮쳤다.
"…제길, 건달들이군."
과연 춥다 보니 옥상이나, 교사 뒤편에서 흡연은 제아무리 양아치같은 놈들이라 해도 싫은 모양이었다.
나는 담배 연기를 퍽이나 싫어하기에, 게다가 어차피 저런 놈들 하는 얘기래 봤자 들을 가치도 없다. 재미없는데다가 상스럽다. 그대로 발길을 돌려 나오려고 했다.
…마는, 갑자기 한 녀석이 큰 소리를 내는 바람에 멈칫했다.
"뭐?! 정말로 할 생각이야!"
"바보자식, 목소리가 너무 커!"
"…아, 미안. 근데, 진짜로?"
…무슨 살인 계획이라도 짜나. 나는 또다시 호기심에 살짝 접근했다.
"…그 계집애는 당해봤자 모른다구."
"그, 그래도. 걔는 이사장이 아는 사람의 딸이라는데."
"멍청아. 이사장 딸도 아니고 아는 사람의 딸이잖아. 그게 뭐가 대단하냐. 그리 치면 우리 아버지도 이사장이랑 조금 알아."
"그, 그러네…"
"잘 들어봐. 완벽하다구. 일단 꼬여내기만 하면, 얼굴도 보이지 않는데 무슨 걱정이냐?"
…스타킹이라도 뒤집어 쓸 작정?
나는 이상한 것을 생각하면서 다음 얘기를 기다렸다.
"그럼 어떻게 꼬여내려고?"
"봐, 걔는 집도 가까워서, 하긴 가까워야겠지만, 지금쯤 벌써 교실에 와 있다구. 아무도 없을 테니까 목격자도 없을 거고, 그때 무슨 구실을 붙여서 불러낸 다음, 홈룸(우리나라에서의 조례)시간까지 가지고 노는 거지."
"선생한테 신고하면 어쩔려고"
"걱정마, 일단 신고해봤자 우리 얼굴도 모르는 데다가, 내가 만일을 위해 사진까지 찍어놓을 테니까."
…저 정도면 가히 악질이다.
"그럼 오늘은 안 되겠군,"
"내일이라도 당장 할 수 있지만… 좀 기다리자. 그 계집애랑 하고싶어 하는 애들 많거든. 그놈들한테서 돈 받고 시켜줘야지."
"그렇게 계속 하면 진짜 들통…"
"하루만에 끝낼 거니까, 걱정 마."
"킬킬, 그럼 걸레 되는걸."
…저 자식들 아예 여자 일생 하나 망치려고 하는군.
놈들은 거기서 대화를 중단하고 다시 담배를 빠는 모양이었다. 나도 왠지 기분이 나빠져서, 그대로 교실로 돌아갔다.
"그 여자, 누군진 몰라도 참 불쌍하게 됐네."
놈들 말에 의하면, 타겟이 되는 그 여자애는 이미 학교에 와 있는 것 같았다. 말하는 걸로 보니까, 같은 반은 아닌 모양이고.
"찾아서 조심하라고 해줄까…"
다시 생각해 보니 불가능에 가깝다. 이 정도 시간대에, 전 학년 전 클래스에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고, 아무리 그 놈들이 2학년 화장실에 있었다 하더라도 녀석들을 2학년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담배에는 연하가 없다고 그랬었지.
"놔 두자. 안됐지만…"
나는 그렇게 무정한 생각을 하고, 엎드린 채로 자 버렸다.

"일어나세요-"
"…응?"
"아침 일찍 오는 건 좋지만 오자마자 자 버리면 무슨 소용이지?"
나는 부시시 눈을 떴다. 주위를 둘러보니 태반이 와 있었고, 바야흐로 홈룸 전이다. 시선을 정면으로 돌리니, 야마시타 히로세, 나의 앞자리 클래스메이트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상관 마."
히로세, 애칭 히나라고도 불리는 이 색기가 풀풀 넘치는 여자애는 누구에게나 저렇게 끈적하게 군다. 이 클래스 내에서도 저 여자랑 자 본 사람은 제법 있을 것이다. 자유분방. 자기가 맘에 든 상대하고는 무조건 잔다. 그리고 바로 헤어져 버린다. 나야 쿄코씨가 있으니 별로 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 입장에서, 저렇게 섹스를 밥먹듯 하는 애는 왠지 싫다. 얼굴이야 귀엽긴 하지만, 행실이 못돼 처먹었으니―
"깨워줬음 좀 더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야? 유우쨩."
내 이름을 멋대로, 유우쨩이라 부르는 애도 이녀석 뿐이다. "강용현(姜勇賢)"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으니, 부르고 싶다면 "강군" 또는 "용현군" 정도로 불러야 할 텐데, 용(勇)을 일본식 독음으로 읽어, "유우"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것도, "쨩"(일본에서 친밀한 사이끼리 이름 뒤에 붙이는 호칭) 이라니. 기가 막힌다.
"시끄러."
"흐―응"
돌연, 내 앞으로 가슴을 불쑥 들이댄다. 정확히 말하면 얼굴을 내민 거지만, 약간 숙인 내가 보기엔 그렇게 보였다.
"…!"
나는 화들짝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카디건 너머로 보이는 제복의 안에, 브라도 하지 않은 가슴이 그대로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덧붙여, 앙증맞은…이라고 해야 하나, 불그스름한 유두도 보였음은 물론이다.(제복이 도대체 얼마나 큰 거야, 이거.) 거의 매일 쿄코씨 것을 보긴 하지만 이렇게 야릇하게 갑자기 보이니 놀라는 것이 당연했다.
그것도 이렇게 학생들이 많은 속에서.
"아, 일어났네."
"…적당히 해."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학기 초부터 이랬었다. 내가 한국인이니까 외국인 섹스 파트너로 삼아보고 싶은 건가, 이런 도발적인 짓거리를 잘도 한다. 물론 나는 싫다. 그럴 때마다 그 뻔뻔한 면상에 대고, "너 나랑 자고 싶냐?" 라고 쏘아주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그건 실례 같아서 참고 지내왔다. 괜한 걱정인가 싶지만…
어쨌든 본인은 내가 자길 좋아해준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생각은 마음대로 하라지.
그렇게 히로세에 의해 깬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담임이 들어와 곧 홈룸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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