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
"용현군, 식사에요."
"응…"
콕콕 찌르는 느낌에 눈을 떠 보니, 선배가 식판을 무릎에 놓고 앉아 있었다.
"…벌써?"
"정말, 용현군 자는 걸 보면 놀랍긴 해요. 이렇게 안정을 잘 취하면, 빨리 나을 거랬어요."
자아, 하고 선배가 밥을 한 젓가락 떠서, 내 얼굴 부근에 갔다댄다. 얼른 받아먹으면서(자는 것도 참 배고픈 일이었다.) 나는 선배에게 물었다.
"선배, 언제 왔어?"
"병원 사람들이 식사할 때쯤이었어요."
시계가 보이지 않는 그녀로서는 최선의 대답이겠지만.
"나는 자고 있었다 쳐도, 그동안 선배는 뭐 했어?"
"잤어요."
"선배 역시, 만만찮은걸."
하지만 나와 비교할 것이 아니다. 내가 자는 동안 선배가 계속 잔 것도 아니고, 쿄코씨 말마따나, 한숨도 안 자고 나를 지키고 있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피곤이 쌓인 것이겠지.
"자, 국도 한입."
"아…"
넙죽넙죽.
"…선배는 왜 아무것도 안 먹지?"
"배 안 고파요."
"바보같은 소릴, 빼빼 말라서 꼬챙이 같은 게."
나는 그녀의 손에서 젓가락을 뺏어, 밥을 떴다.(과연 많이 자서 그런 것인가, 의사놈의 검진이 효력이 있어서인가, 몸을 일으키는 것은 별로 아프지 않았다.)
"자, 선배도 아."
"…"
"아아∼"
"아…"
조그맣게 벌린 입에다 쏘옥 하고 넣어줄 심산이었건만, 왼쪽 눈이 부은 관계로 거리 측정이 잘 되지 않아 한번 그녀의 입가에 젓가락을 쑤시고서야 들어갔다.
"착해라."
"용현군… 나 용현군보다 한 살 많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오물거리면서 밥을 삼키는 그녀.
"부부… 같아요."
"…이렇게 징그러운 부부커플이 있다면 말이지."
"하하하."
그녀가 웃었다.
지금의 나에게 그 이상 바라는 건 없었다.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늦게나마 쌓여가고 있습니다만, 내일까지 계속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화이트 크리스마스군요. 모두들 즐거운 이브를 보내십시오."
더 이상 잠도 오지 않아 텔레비젼을 켜서 선배와 보고(선배야 듣고, 지만)있던 중, 막간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방송에 나는 놀랐다.
"눈이 온다고?"
언제나처럼 비가 올 줄 알았더니.
"어디…"
이제 일어설 정도는 되었겠지, 싶어서 몸을 일으켰다. 약간의 아리아리한 통증이 있었지만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선배가, 제가 물어보고 올게요, 라고 말렸지만, 나는 상관없이 일어나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드르륵.
찬 바람이 싸아 하고 몰려들었다. 환자복밖에 걸치지 않은 터라,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렸고, 그 동작에 옆구리가 뜨끔했다.
"아얏…"
"용현군!"
선배가 비틀비틀 짚어가면서 창가로 왔다.
"아갸갸… 괜찮아."
나는 몸을 움츠린 채로 열려진 창 밖을 보았다.
"…"
약간 불그스름한 빛이 도는 하늘에서 천천히, 그리고 고요하게 차가운 빛을 발하며 떨어져 내리는 정갈한 얼음의 조각들. 불빛이 들어찬 복잡하고 휘황찬란한 도심에서, 오히려 그 단아한 빛은 자신의 생명을 뽐내듯이, 사방의 모든 곳에서 순수한 빛의 융단을 짜가고 있었다.
고개를 더 내려보니, 많은 사람들이 우산을 쓰지 않고 맞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눈이 오나요…?"
"응…."
"그렇군요… 조용하네요…."
"눈에는 방음 효과가 있다고 하더군."
"그래요…"
선배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나와 같이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움츠린 몸이 계속 떨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녀의 어깨를 한 팔에 끌어안았다. 그야말로 아무 생각도 없이, 단지 선배가 그곳에 있어서.
"…"
선배는 언제나처럼 "아"같은 감탄사도 뱉지 않고, 고양이처럼 나의 품 속에 뺨을 갖다대었다. 따뜻했다. 얇은 환자복 한 장 사이로 전해져 오는 선배의 감촉은.
"눈 오는 성야에 시간을 보낸 커플은 영원히 맺어진대요…"
영원히…라. 영원의 사랑, 허무없이 영원한 감정이라. 두근거림의 지속이라.
하지만, 지금은 거기에 대한 거센 반발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나는…
"선배는…."
"…"
"영원히 남을 좋아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왜 그런 말이 나왔을까.
하지만 듣고 싶었다. 선배에게서 직접.
소설과도 같은 로맨스를 동경하는 선배에게서.
나에게서 상처를 입고도, 나의 이름을 불러준 선배에게서.
보이지 않는 눈으로, 대신 그런 아름다운 것을 꿈꾸는 선배에게서.
상처입는 것이 두려워 혼자서만 도망치려고 했던 나를 붙들어준 선배에게서.
언제나 현실적인 논리로 점철되어있는. "또 하나의 나"에 대항하는 동기를 가진,
히메카와 키즈나에게서.
"소설같은, 그런 사랑이 있다고 믿어?"
재차 물었다. 하지만, 선배가 고개를 들기도 전에,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말이야…. 그런 건 없다고 생각해 왔어. 소설이니까 가능한 것이다, 라는 정도로밖에 받아들이지 않았어. 선배도 들은 적이 있지? 사랑이란 건, 두근거리는 좋아한다는 감정은, 전부 다 뇌 속의 화학물질로 일어난다는 거. 그래서 길어봤자 2년을 못 넘긴다고 하잖아.
나는 그런 허무로 향하는 길을 일부러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해 가면서 걷는 것을, 바보같은 짓이라 생각해온 거야. 단지, 발정이라고 생각했어."
"발정…?"
선배가 묻는다.
"그래, 발정. 동물들의 발정.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어. 다만 동물은 본능적으로 하는 거지만, 우리들은 그걸 언제나 충동적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게 달라."
나는 어느 새, 자신이 생각해왔던 것을 좌르륵 쏟아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선배의 대답을 듣기보다는 이 말을 이끌어내고 싶어서 선배에게 물은 것인지도 모른다.
"충동적…"
"그래, 내가 그날 선배를 아프게 한 것도… 충동적인 발정이랑 다를 게 없어. 성폭행 같은 거 있잖아, 강간 말이야, 그거야. 그건 좋아하지 않는 사람한테도 일어나잖아."
"…그래서…"
"그렇게 선배를 상처입히고, 나는 혼자 괜찮다, 그렇게 생각했던 거야…."
"…"
"선배를 좋아하지 않아, 따위 지껄이고서."
그리고 그녀에 대한 마음은, 여전히 "오리무중"인 것이다.
"…"
"All is calm, all is bright…"
고요한 하늘 속에, 번화가 속의, 성야를 축하하는 노랫소리가 희미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눈은 여전히, 사락사락. 하고 묘한 여운을 남기며 거대한 백색의 카펫에 흡수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거… 몰라요. 발정이니, 화학물질이니 하는 건…"
들었던 고개를 다시금 나의 가슴 속으로 묻고서,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쉽게 이루어진 사랑은, 쉽게 꺼진다"라는 건 알고 있어요."
"…."
"용현군, 나는 단지, 사람들의 쉽게 식어버리는 애정은 그들 자신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들…자신?"
"서로가 상대방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또 그것을 자각하고 있는 지, 확실히 알지 못하면서 사랑이다, 좋아한다, 이런 말을 해 대기 때문이에요."
"…"
나의 생각과 약간 닮은 구석이 있다.
"용현군의 말처럼 단순히 식어버리는 좋아한다는 감정에서, 제가 믿는 사랑으로 탈바꿈 하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헌신적이고 정열적인 행동을 할 때 그 "경험치" 가 쌓여 빛을 발한다고 생각해요."
슈우우웅…
바람이 불었다.
"좀, 춥네."
나는 열려진 창문을 닫았다. 이중창이라, 밖을 계속 보기 위해 투명창만을 닫았다.
"…로미오와, 줄리엣 얘기는 잘 알죠? 그 연인들만큼…"
"선배, 그건 소설이잖아. 그런 걸로는 도저히 난 납득할 수 없어."
나는 선배의 말을 잘랐다. 소설은 허구다. 로미오와 줄리엣…? 그들은 늙기 전에 서로를 잃었다. 짧은 기간동안의 사랑이었다. 히스클리프, 캐서린…?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에게 사랑만 잔뜩 심어놓고는 멋대로 죽어버렸다. 그들은 공통점이 있다. 여인쪽은 늙고 추해지기도 전에, 남자는 발정이란 감정이 식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아무리 소설이라도, 그 자연스러운, 사그라드는 인간의 감정은 부인할 수 없었기에 그렇게 조작해놓았다.
그런 절묘한 조작의 허구이기에, 인정할 수 없다.
하지만, 선배는 조금 흠칫했을 뿐, 말을 계속했다.
"…그런 커플이 있었다면, 영원히 사랑했을지도 몰라요. 이제까지 용현군이 아는 범위 내에서, 그 사람들처럼 드라마틱하고 로맨틱한 커플이 있던가요?"
…확실히, 없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납득할 수 없다.
"그럼 선배, 그 "드라마틱하고, 로맨틱한" 게 도대체 뭐야? 서로에게 헌신적이고 정열적인게 뭐란 말이지? 결국 소설속에서밖에 없는 거 아니야."
"…."
선배는 다시금 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뭐 서로의 사랑을 위한답시고 칼부림하고 동반자살하는 그런 거야?"
"…아니에요."
선배는 고개를 크게, 천천히 가로저었다.
"다만…"
다만…?
"그것이, 단지, 단지 "상대를 위해"란 일념으로 한 행동일 때… 힘겹게 그 또는 그녀와의 유대를 쌓아가는 것…."
힘겹게, 유대를 쌓아간다…?
"그것이 고통스러운 것이라 해도, 상대를 위해 받아들인 것…."
그녀는 잠시 말을 끊고,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용현군이…"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를 위해, 다치고, 싸우고, 피를 흘리면서도 나를 업고, 쓰러지면서도… 가려고 했던 것 같은…."
더 이상 "또 하나의 나"가 튀어 나올 자리는 없었다.
선배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
그리고, 선배의 말을 납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선배가 말한 것, 그것이 바로, 내가 몇 시간 전 귀에 담았던 말.
"…키즈나…?"
"…네?"
불시에, 이름이 불려진 선배가 고개를 든다.
하지만, 나는 선배를 부른 것이 아니다. 단지의 되풀이.
기억이 나지 않던 빈 자리의 그 단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시련으로 엮어진, 키즈나…라는 거지?"
나는 선배를 보고, 말했다. 선배는 순간, "핫" 하는 표정이었으나, 곧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대답한다.
"그래요… 키즈나. 그리고, 용현군이 말한 것 처럼, 언젠가 그 사랑도 식으려는 때가 있겠죠, 그 때, 돌아보는 거에요. 자신들의 사랑을 위해 그들이 얼마나의 시련이라는 것을 겪었는지."
"…응."
""우리가 겪은 것은, 고작 이 정도로 끝날 사랑을 위해 있었던 것인가"라고요."
"…맞아."
"그리고, 다시금 소중히 하게 되는 거죠. 서로를."
"…그렇겠지."
"두 사람의 시련이라는 두께를 가진 키즈나는, 세월이라는 시간의 칼에 잘려지지 않으니까요."
선배답지 않게, 빠르고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몇 시간 전, 내 뺨에 키스했던 그 선배와 같이, 평소의 선배 같지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것이 선배의 진짜 모습일 지도 모른다. 눈이 보이지 않음에 의해, 빛을 잃어버림으로써 자연히 잃어버린 그녀의 성격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쪽이라도 좋다.
지금 내 앞의 그녀가, 나의 "소중한 사람" 인 것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확인했어."
숨소리도 내지 않는 또 하나의 나에게, 나는 소리쳤다.
"나와 선배와의 키즈나는, 바야흐로 엮어지고 있는 거야."
라고.
"그럼, 나 다시 말할 수 있겠어."
나는 그녀의 어깨에다 손을 올리고 말했다.
"좋아해, 선배. 아직까지, 선배가 말하는 "사랑"이라고는 말 못하겠지만…"
선배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선배와의 키즈나, 계속 쌓아가면 되는 거니까."
"용현군…"
"선배가 언젠가 말했잖아? "서로 쌓아가면 된다"고…"
"그렇지만… 고맙지만… 용현군, 난 앞이 보이지 않는 애에요…. 용현군에게 폐를 끼치게 될 거에요, 앞으로."
"거야 쉬운 일이 아니겠지."
나는 그녀의 말을 일단 긍정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으니까 더욱 튼튼한 "키즈나"가 엮어지지 않을까?"
"…."
그녀가 눈도 깜짝이지 않고, 눈물을 떨어뜨렸다. 양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나는 환자복 소매로 닦아주었다.
"…"
직후, 우리의 시선이, 맞았다.
물론 선배가 나와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 리가 없다. 무엇보다도 선배에게 "시선"이라는 것이 있을 턱이 없지만.
손이 무의식적으로 선배의 얼굴로 올라갔다.
"…"
별안간 뺨에 손이 닿았음에도, 선배는 조금도 움칫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나는 몰라도 선배는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뭘 하려는 건지.
그것은 나 역시 작정하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선배가 옆에 있기 때문에.
"…"
나는 그녀에게, 키스했다.
입술이 닿는 순간, 짜르르르 하고 전율이 왔다. 눈 앞이 하얗게 될 정도로. 잠시동안 서로 입술만을 맞닿은 채, 그 기분을 즐겼다.
"…응…."
키스가 처음인 듯한 선배에게, 나는 살짝 그녀의 아랫입술을 물어 자극을 주었다. 직후, 그녀의 입술이 열린다. 천천히, 혀를 움직였다. 그녀의 입술에서부터, 안쪽으로 쓸어가면서.
"…하아…."
키즈나가 가벼운 숨 소리를 토해냈다.
나는 안쪽에서 방황하고 있는 그녀의 혀를, 내 것으로 살짝 건드렸다. 처음엔 불에 데인 듯, 뒤로 도망쳐 버린 그 혀는 나의 끈질긴 추격에 못 이겨 결국은 서로의 첨단을 맞대게 되었다.
"아…"
우리는 그렇게, 넘나드는 혀로써 서로를 음미했다.
"용현군, 식사에요."
"응…"
콕콕 찌르는 느낌에 눈을 떠 보니, 선배가 식판을 무릎에 놓고 앉아 있었다.
"…벌써?"
"정말, 용현군 자는 걸 보면 놀랍긴 해요. 이렇게 안정을 잘 취하면, 빨리 나을 거랬어요."
자아, 하고 선배가 밥을 한 젓가락 떠서, 내 얼굴 부근에 갔다댄다. 얼른 받아먹으면서(자는 것도 참 배고픈 일이었다.) 나는 선배에게 물었다.
"선배, 언제 왔어?"
"병원 사람들이 식사할 때쯤이었어요."
시계가 보이지 않는 그녀로서는 최선의 대답이겠지만.
"나는 자고 있었다 쳐도, 그동안 선배는 뭐 했어?"
"잤어요."
"선배 역시, 만만찮은걸."
하지만 나와 비교할 것이 아니다. 내가 자는 동안 선배가 계속 잔 것도 아니고, 쿄코씨 말마따나, 한숨도 안 자고 나를 지키고 있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피곤이 쌓인 것이겠지.
"자, 국도 한입."
"아…"
넙죽넙죽.
"…선배는 왜 아무것도 안 먹지?"
"배 안 고파요."
"바보같은 소릴, 빼빼 말라서 꼬챙이 같은 게."
나는 그녀의 손에서 젓가락을 뺏어, 밥을 떴다.(과연 많이 자서 그런 것인가, 의사놈의 검진이 효력이 있어서인가, 몸을 일으키는 것은 별로 아프지 않았다.)
"자, 선배도 아."
"…"
"아아∼"
"아…"
조그맣게 벌린 입에다 쏘옥 하고 넣어줄 심산이었건만, 왼쪽 눈이 부은 관계로 거리 측정이 잘 되지 않아 한번 그녀의 입가에 젓가락을 쑤시고서야 들어갔다.
"착해라."
"용현군… 나 용현군보다 한 살 많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오물거리면서 밥을 삼키는 그녀.
"부부… 같아요."
"…이렇게 징그러운 부부커플이 있다면 말이지."
"하하하."
그녀가 웃었다.
지금의 나에게 그 이상 바라는 건 없었다.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늦게나마 쌓여가고 있습니다만, 내일까지 계속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화이트 크리스마스군요. 모두들 즐거운 이브를 보내십시오."
더 이상 잠도 오지 않아 텔레비젼을 켜서 선배와 보고(선배야 듣고, 지만)있던 중, 막간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방송에 나는 놀랐다.
"눈이 온다고?"
언제나처럼 비가 올 줄 알았더니.
"어디…"
이제 일어설 정도는 되었겠지, 싶어서 몸을 일으켰다. 약간의 아리아리한 통증이 있었지만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선배가, 제가 물어보고 올게요, 라고 말렸지만, 나는 상관없이 일어나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드르륵.
찬 바람이 싸아 하고 몰려들었다. 환자복밖에 걸치지 않은 터라,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렸고, 그 동작에 옆구리가 뜨끔했다.
"아얏…"
"용현군!"
선배가 비틀비틀 짚어가면서 창가로 왔다.
"아갸갸… 괜찮아."
나는 몸을 움츠린 채로 열려진 창 밖을 보았다.
"…"
약간 불그스름한 빛이 도는 하늘에서 천천히, 그리고 고요하게 차가운 빛을 발하며 떨어져 내리는 정갈한 얼음의 조각들. 불빛이 들어찬 복잡하고 휘황찬란한 도심에서, 오히려 그 단아한 빛은 자신의 생명을 뽐내듯이, 사방의 모든 곳에서 순수한 빛의 융단을 짜가고 있었다.
고개를 더 내려보니, 많은 사람들이 우산을 쓰지 않고 맞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눈이 오나요…?"
"응…."
"그렇군요… 조용하네요…."
"눈에는 방음 효과가 있다고 하더군."
"그래요…"
선배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나와 같이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움츠린 몸이 계속 떨고 있었다. 아무 생각도 없이, 그녀의 어깨를 한 팔에 끌어안았다. 그야말로 아무 생각도 없이, 단지 선배가 그곳에 있어서.
"…"
선배는 언제나처럼 "아"같은 감탄사도 뱉지 않고, 고양이처럼 나의 품 속에 뺨을 갖다대었다. 따뜻했다. 얇은 환자복 한 장 사이로 전해져 오는 선배의 감촉은.
"눈 오는 성야에 시간을 보낸 커플은 영원히 맺어진대요…"
영원히…라. 영원의 사랑, 허무없이 영원한 감정이라. 두근거림의 지속이라.
하지만, 지금은 거기에 대한 거센 반발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나는…
"선배는…."
"…"
"영원히 남을 좋아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왜 그런 말이 나왔을까.
하지만 듣고 싶었다. 선배에게서 직접.
소설과도 같은 로맨스를 동경하는 선배에게서.
나에게서 상처를 입고도, 나의 이름을 불러준 선배에게서.
보이지 않는 눈으로, 대신 그런 아름다운 것을 꿈꾸는 선배에게서.
상처입는 것이 두려워 혼자서만 도망치려고 했던 나를 붙들어준 선배에게서.
언제나 현실적인 논리로 점철되어있는. "또 하나의 나"에 대항하는 동기를 가진,
히메카와 키즈나에게서.
"소설같은, 그런 사랑이 있다고 믿어?"
재차 물었다. 하지만, 선배가 고개를 들기도 전에,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나는 말이야…. 그런 건 없다고 생각해 왔어. 소설이니까 가능한 것이다, 라는 정도로밖에 받아들이지 않았어. 선배도 들은 적이 있지? 사랑이란 건, 두근거리는 좋아한다는 감정은, 전부 다 뇌 속의 화학물질로 일어난다는 거. 그래서 길어봤자 2년을 못 넘긴다고 하잖아.
나는 그런 허무로 향하는 길을 일부러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해 가면서 걷는 것을, 바보같은 짓이라 생각해온 거야. 단지, 발정이라고 생각했어."
"발정…?"
선배가 묻는다.
"그래, 발정. 동물들의 발정.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어. 다만 동물은 본능적으로 하는 거지만, 우리들은 그걸 언제나 충동적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게 달라."
나는 어느 새, 자신이 생각해왔던 것을 좌르륵 쏟아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선배의 대답을 듣기보다는 이 말을 이끌어내고 싶어서 선배에게 물은 것인지도 모른다.
"충동적…"
"그래, 내가 그날 선배를 아프게 한 것도… 충동적인 발정이랑 다를 게 없어. 성폭행 같은 거 있잖아, 강간 말이야, 그거야. 그건 좋아하지 않는 사람한테도 일어나잖아."
"…그래서…"
"그렇게 선배를 상처입히고, 나는 혼자 괜찮다, 그렇게 생각했던 거야…."
"…"
"선배를 좋아하지 않아, 따위 지껄이고서."
그리고 그녀에 대한 마음은, 여전히 "오리무중"인 것이다.
"…"
"All is calm, all is bright…"
고요한 하늘 속에, 번화가 속의, 성야를 축하하는 노랫소리가 희미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눈은 여전히, 사락사락. 하고 묘한 여운을 남기며 거대한 백색의 카펫에 흡수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거… 몰라요. 발정이니, 화학물질이니 하는 건…"
들었던 고개를 다시금 나의 가슴 속으로 묻고서,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쉽게 이루어진 사랑은, 쉽게 꺼진다"라는 건 알고 있어요."
"…."
"용현군, 나는 단지, 사람들의 쉽게 식어버리는 애정은 그들 자신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들…자신?"
"서로가 상대방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또 그것을 자각하고 있는 지, 확실히 알지 못하면서 사랑이다, 좋아한다, 이런 말을 해 대기 때문이에요."
"…"
나의 생각과 약간 닮은 구석이 있다.
"용현군의 말처럼 단순히 식어버리는 좋아한다는 감정에서, 제가 믿는 사랑으로 탈바꿈 하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헌신적이고 정열적인 행동을 할 때 그 "경험치" 가 쌓여 빛을 발한다고 생각해요."
슈우우웅…
바람이 불었다.
"좀, 춥네."
나는 열려진 창문을 닫았다. 이중창이라, 밖을 계속 보기 위해 투명창만을 닫았다.
"…로미오와, 줄리엣 얘기는 잘 알죠? 그 연인들만큼…"
"선배, 그건 소설이잖아. 그런 걸로는 도저히 난 납득할 수 없어."
나는 선배의 말을 잘랐다. 소설은 허구다. 로미오와 줄리엣…? 그들은 늙기 전에 서로를 잃었다. 짧은 기간동안의 사랑이었다. 히스클리프, 캐서린…?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에게 사랑만 잔뜩 심어놓고는 멋대로 죽어버렸다. 그들은 공통점이 있다. 여인쪽은 늙고 추해지기도 전에, 남자는 발정이란 감정이 식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아무리 소설이라도, 그 자연스러운, 사그라드는 인간의 감정은 부인할 수 없었기에 그렇게 조작해놓았다.
그런 절묘한 조작의 허구이기에, 인정할 수 없다.
하지만, 선배는 조금 흠칫했을 뿐, 말을 계속했다.
"…그런 커플이 있었다면, 영원히 사랑했을지도 몰라요. 이제까지 용현군이 아는 범위 내에서, 그 사람들처럼 드라마틱하고 로맨틱한 커플이 있던가요?"
…확실히, 없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납득할 수 없다.
"그럼 선배, 그 "드라마틱하고, 로맨틱한" 게 도대체 뭐야? 서로에게 헌신적이고 정열적인게 뭐란 말이지? 결국 소설속에서밖에 없는 거 아니야."
"…."
선배는 다시금 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뭐 서로의 사랑을 위한답시고 칼부림하고 동반자살하는 그런 거야?"
"…아니에요."
선배는 고개를 크게, 천천히 가로저었다.
"다만…"
다만…?
"그것이, 단지, 단지 "상대를 위해"란 일념으로 한 행동일 때… 힘겹게 그 또는 그녀와의 유대를 쌓아가는 것…."
힘겹게, 유대를 쌓아간다…?
"그것이 고통스러운 것이라 해도, 상대를 위해 받아들인 것…."
그녀는 잠시 말을 끊고,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용현군이…"
그녀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를 위해, 다치고, 싸우고, 피를 흘리면서도 나를 업고, 쓰러지면서도… 가려고 했던 것 같은…."
더 이상 "또 하나의 나"가 튀어 나올 자리는 없었다.
선배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
그리고, 선배의 말을 납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선배가 말한 것, 그것이 바로, 내가 몇 시간 전 귀에 담았던 말.
"…키즈나…?"
"…네?"
불시에, 이름이 불려진 선배가 고개를 든다.
하지만, 나는 선배를 부른 것이 아니다. 단지의 되풀이.
기억이 나지 않던 빈 자리의 그 단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시련으로 엮어진, 키즈나…라는 거지?"
나는 선배를 보고, 말했다. 선배는 순간, "핫" 하는 표정이었으나, 곧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대답한다.
"그래요… 키즈나. 그리고, 용현군이 말한 것 처럼, 언젠가 그 사랑도 식으려는 때가 있겠죠, 그 때, 돌아보는 거에요. 자신들의 사랑을 위해 그들이 얼마나의 시련이라는 것을 겪었는지."
"…응."
""우리가 겪은 것은, 고작 이 정도로 끝날 사랑을 위해 있었던 것인가"라고요."
"…맞아."
"그리고, 다시금 소중히 하게 되는 거죠. 서로를."
"…그렇겠지."
"두 사람의 시련이라는 두께를 가진 키즈나는, 세월이라는 시간의 칼에 잘려지지 않으니까요."
선배답지 않게, 빠르고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몇 시간 전, 내 뺨에 키스했던 그 선배와 같이, 평소의 선배 같지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것이 선배의 진짜 모습일 지도 모른다. 눈이 보이지 않음에 의해, 빛을 잃어버림으로써 자연히 잃어버린 그녀의 성격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쪽이라도 좋다.
지금 내 앞의 그녀가, 나의 "소중한 사람" 인 것에는 변함이 없다.
"나는 확인했어."
숨소리도 내지 않는 또 하나의 나에게, 나는 소리쳤다.
"나와 선배와의 키즈나는, 바야흐로 엮어지고 있는 거야."
라고.
"그럼, 나 다시 말할 수 있겠어."
나는 그녀의 어깨에다 손을 올리고 말했다.
"좋아해, 선배. 아직까지, 선배가 말하는 "사랑"이라고는 말 못하겠지만…"
선배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선배와의 키즈나, 계속 쌓아가면 되는 거니까."
"용현군…"
"선배가 언젠가 말했잖아? "서로 쌓아가면 된다"고…"
"그렇지만… 고맙지만… 용현군, 난 앞이 보이지 않는 애에요…. 용현군에게 폐를 끼치게 될 거에요, 앞으로."
"거야 쉬운 일이 아니겠지."
나는 그녀의 말을 일단 긍정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으니까 더욱 튼튼한 "키즈나"가 엮어지지 않을까?"
"…."
그녀가 눈도 깜짝이지 않고, 눈물을 떨어뜨렸다. 양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나는 환자복 소매로 닦아주었다.
"…"
직후, 우리의 시선이, 맞았다.
물론 선배가 나와 눈을 똑바로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알 리가 없다. 무엇보다도 선배에게 "시선"이라는 것이 있을 턱이 없지만.
손이 무의식적으로 선배의 얼굴로 올라갔다.
"…"
별안간 뺨에 손이 닿았음에도, 선배는 조금도 움칫하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나는 몰라도 선배는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 뭘 하려는 건지.
그것은 나 역시 작정하고 하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선배가 옆에 있기 때문에.
"…"
나는 그녀에게, 키스했다.
입술이 닿는 순간, 짜르르르 하고 전율이 왔다. 눈 앞이 하얗게 될 정도로. 잠시동안 서로 입술만을 맞닿은 채, 그 기분을 즐겼다.
"…응…."
키스가 처음인 듯한 선배에게, 나는 살짝 그녀의 아랫입술을 물어 자극을 주었다. 직후, 그녀의 입술이 열린다. 천천히, 혀를 움직였다. 그녀의 입술에서부터, 안쪽으로 쓸어가면서.
"…하아…."
키즈나가 가벼운 숨 소리를 토해냈다.
나는 안쪽에서 방황하고 있는 그녀의 혀를, 내 것으로 살짝 건드렸다. 처음엔 불에 데인 듯, 뒤로 도망쳐 버린 그 혀는 나의 끈질긴 추격에 못 이겨 결국은 서로의 첨단을 맞대게 되었다.
"아…"
우리는 그렇게, 넘나드는 혀로써 서로를 음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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