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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5 04:18 2,193회 0건
크로테스 9

이제는 잭 다니엘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폐부를 쿡쿡 쑤셔대는 통증과 머릿속을 헤 집고 돌아다니는 종기덩어리 같은 상념들 때문에 밤이 너무도 길게만 느껴진다.

어둠이 내려 앉기만 하면 달려드는 여름 모기떼 처럼 불면증과 이를 동반한 잡념들이 본색을 드러내었고 심각할때는 숨을 제대로 쉬기가 힘들어 졌다.

첨에는 독하다는 꼬냑을 병채로 나발을 불어보기도 했고 벽에 다리를 들어올리고 물구나무를 쓰면서 내 몸에 있는 모든 체력을 소모한 뒤에 잠을 청해 보기도 했지만 효과가 없는 거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잠들기는 더 어려워 졌고 희가 구해준 물뽕과 소다수는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물뽕만이 나를 저 아늑하고 편안한 잠의 휴식으로 이끌어 주었지만 그 휴유증 때문에 난 매일 매일 엄청난 휴지를 소모하면서 자위를 했다.

침대에 누웠다.

마지막 물뽕을 비우고 또 셀수없는 마스터베이션을 거친 내 눈에 여름장마가 끝나가는 회색빛 하늘이 창가에 어리는 것이 보였다.


(몇일만 더 이렇게 참는거야...)









날이 밝았고 때처럼 낀 먼지와 연기들을 장마가 씻어준 덕분에 서울의 하늘과 거리는 예전보다 확실히 맑아진 느낌이었다.

오늘도 성민지는 남편과 훈이를 자기의 공간으로 돌려 보낸 이후에 버스를 타고 카페 "크로테스"로 출근을 했다.

그녀는 모처럼 갠 날씨에 조금 도취되었는지 이전의 딱딱한 슈트차림을 벗어던지고 산뜻한 느낌이 감도는 청색 반팔 플란넬 셔츠와 무릎위가 찰랑거리는 흰색 면 스커트 차림으로 나섰다.

이것도 일터라면 일터였지만 일주일 정도 나가면서 자신이 너무 경직된 복장으로 다니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대부분 아르바이트 생들은 간편한 차림이었고 그녀는 오늘 부터 그들처럼 좀 더 젊어지기로 결심했다. 비가 씻겨 내려간 아스팔트 거리로 청량감이 배여 있는 바람이 버스에 내려서 카페로 걷는 그녀의 하늘하늘한 스커트 아래를 어루만지듯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오늘도 사장이란 작자는 나오지 않았고 언제 부터인가 그녀는 카운터에 앉기 전에 바텐더 청수에게 블루마운틴 커피를 주문하는 것을 일과의 시작으로 삼았다.

우락부락한 청수 녀석은 생김새와는 달리 항상 맛나는 블루마운틴을 만들어서 장난기 어린 미소를 머금은채 밑이 넓은 플라스틱 트래이(접시)에 잔을 올린채 대령해 올리며서 "공주님 드사와요"라고 토를 달면 그녀도 "오냐" 라면서 대꾸를 해준다.

청수를 비롯해서 다른 아르바이트 애들은 사장이 없는대도 별달리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고 가게를 늘 반짝반짝하게 유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따금씩 나타나는 사장은 금고에서 돈을 빼서 휭하니 사라지거나 입금할때나 공과금을 납부하는 일이 있으면 자신에게 부탁도 하곤 했었다.

그렇게 큰 돈은 아니었지만 성민지는 들어온지 겨우 일주일 밖에 안되는 자신에게 턱하니 맡기는 사장이 조금 의아하긴 했지만 솔직히 기분나쁘진 않았다.

원래 저렇게 돈 관념이 없거나 그렇지 않다면 자신을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성민지는 가능하면 후자쪽이길 바라면서 큰 길 건너편에 있는 "우리은행"에 일주일에 한번꼴로 은행을 갔다.

오늘도 성민지는 우리은행이 개점하는 시간대에 맞춰서 전기세를 포함한 각종 지로 영수증과 납부액을 자신의 핸드백에 넣고 은행을 가기 위해서 육교를 올라가고 있었다.

육교를 올라서서 발 밑으로 왔다갔다 하는 차들의 물결을 물끄러미 보면서 다시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의 눈앞에 젊은 여자 둘이서 헐떡대고 올라오는게 보였다.

그녀가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흐트러지는 머리결을 바로 잡기 위해서 손을 머리로 가져갔을때 갑자기 몸이 휘청거리더니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계단에서 넘어질 뻔 했다.

그녀가 간신히 육교계단 난간모서리를 두손으로 부여잡고 몸을 바로 세웠을때 그녀는 자신의 왼쪽 팔에 들고 있던 그녀의 핸드백이 없어진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을때 조금전에 자신을 지나친 여자둘 중 한명의 어깨에 자신의 것과 매우 닮은 것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가 당황해서 내려온 쪽을 올려다 보는데 여자둘은 빠른 걸음으로 다시 육교계단을 내려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성민지는 그 제서야 그녀들이 소매치기였고 자기가 그 피해자란 것을 깨닫고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로 "도둑이야...도둑" 이라고 외치고 계단을 뛰어올랐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마음만큼 기민하게 움직여 주지 못했고 육교위를 올라섰을때 여자둘은 증발해버린 후 였다.

당황함과 더불어 두려움이 왈칵 느껴졌다.

그 핸드백에는 자신의 신분증과 현금이 조금 섞인 지갑이 들어있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공과금이 들어 있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다시 불어오는 바람에 그녀의 몸이 휘청했다. 다리에 힘이 쭉쭉 빠져나가고 있었고 맥이 탁 풀리고 있었다.

너무도 방심한 자신이 원망스러웠고 이제 어떻게 해야할지 겁이 났다.

자기를 믿고 사장이 부탁한 일이었는데 ....

평소에 싫은 얼굴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은 사장이었지만 그가 이 사실을 알고도 그런 표정을 지을거 같지 않았다.

그대로 주저 앉은채 머리를 감싸버렸다.

그때 날카로운 여자의 소리와 영어가 들렸고 잠시후에 자기쪽으로 다가오는 그림자를 느꼈다. 그녀가 숙인 고개를 들어 올렸을때 햇볕을 등지고 자신을 내려다 보는 남자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손을 뻗어서 그녀에게 핸드백을 건네주었다.

그녀의 눈이 일순간 커지더니 그 핸드백을 덥썩 쥐고는 확인하는 절차를 시작했다. 오분전까지 틀림없이 자신의 어깨에 달려 있던 카키색 핸드백이었다.

그녀가 그제서야 일어서면서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햇빛을 등에지고 서 있어서 명암이 불분명했던 남자의 얼굴이 들어났고 그녀는 더 크게 눈을 떴다. 그 남자는 몇일전에 자신의 가게에 온 그 흑인이였다.

놀라움과 고마움이 사정없이 그녀의 머리속을 교차하는 가운데 흑인이 무어라고 영어로 말하는 것이 들렸다.

알아듣지 못한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네?"하고 묻자 흑인남자가 외국인 특유의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이번에는 그녀가 알아듣기 쉽게 천천히 말을 했다.

" Are u OK?"(당신 괜찮나요?)

그래도 대학까지 나온 그녀인데 초등생도 알법한 이 말뜻을 모를리가 없었다.

그녀가 핸드백을 품에 품으며서 황급히 대답을 했다.

이번에는 영어로....

"Yes...thank you..thank you"

흑인 남자가 다시 영어로 물어왔다.

"Is this yours?...I heard your scream..I think u got dipping...I saw them...two girls...but I missed them ..they dropped your bag. so I got it..(이거 당신겁니까?..아까 당신의 비명소리를 들었어요 난 마
침 그들을 봤는데 두명의 여자들이었어요 하지만 난 그들을 놓쳤고 그들이 떨어뜨린 이걸 주웠습니다)


처음말은 알아들을 듯 했는데 갈수록 뭔 소리인지... 그녀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흑인남자가 마침 지나는 길에 그 소매치기들로 부터 자신의 백을 되찾았단 그런 내용일꺼라고 대충 겐또를 때렸다.

그녀는 다시 머리를 수없이 조아리면서 땡큐 땡큐를 연발했고 흑인은 그제서야 물건의 주인이 그녀란 것을 알고 미소를 지었다.

햇빛에 비치는 그 남자의 이빨이 참으로 맑게 보인다고 그녀가 잠시 생각했다.
그녀가 그제서야 제 정신으로 돌아와서 백을 열고 안에 든 내용물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모든게 그대로 있었다. 아마 소매치기들은 육교를 내려가다가 마침 지나가던 흑인남자에게 뺏기고 줄행랑을 쳤던거 같았다.

모든 것이 원상태인것을 확인한 그녀가 더 큰 액션으로 흑인남자에게 고개를 숙이자 남자는 노우 노우 하면서 손사래를 쳤다.

잠시 지옥을 갔다온 그녀는 긴장이 풀리자 한숨부터 길게 나왔고 그런 그녀를 보면서 흑인이 어디 가냐고 물었고 그녀는 떠듬거리는 영어로 이 앞에 있는 은행에 가는 길이라 했고 그러자 흑인이 은행앞은 원래 위험하니까 자신이 그곳까지 바래다 주겠다고 하였다.

그녀는 괜찮다고 다시 웃으면서 손을 내 저었지만 사람좋게 생긴 흑인남자는 자신도 마침 그 은행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잠시 주저하던 성미진은 고개를 끄덕였고 흑인남자가 웃으면서 마치 자기가 기사라도 되는냥 손을 뻗어서 그녀에게 "그럼 가시죠" 하는 포즈를 취했다.


오늘 그녀는 청수에 이어 이 외국인에게 까지 두번이나 공주대접을 받고 있었다.


흑인나라의 공주가 된 성미진은 그녀의 시종장인 흑인남자를 대동하고 당당히 은행안으로 들어갔다.


월말이라 그런지 아침부터 은행안은 세금을 납부하려고 온 아조씨 아줌마들이 즐비했고 그녀는 대기표를 뽑은 후에 대기의자에 앉았다.

흑인남자는 송금때문에 은행에 왔다고 말을 했고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면서 이것저것 이야기 하던 성민지는 잠시 갈등하다가 당신을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흑인이 꽤 놀란 눈을 하면서 어떻게 자신을 아냐고 물었고 성민지는 카페 크로테스의 이름과 사장의 이름을 대자 흑인이 반색을 하면서 리얼리 리얼리? 하면서 뜻밖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연극이라고 하지만 깜둥이 녀석의 연기는 거의 헐리우드급이었다.

그녀가 조금씩 그에 대한 불신...불신이래 봤자 피부색에 얽힌 그녀의 기억에 관한 것이었지만....을 걷어내면서 머리를 쥐어짜낸 영어로 그와 이야기를 했다.

그는 이름이 빌리캠프라고 소개했고 자신이 미육군 8사단 루테넌트라고 했는데 아마 장교를 말하는 거 같았다. 그가 그녀에 대해서 묻자 그녀는 자신이 올해 30세이고 5년전에 결혼한 주부라고 하자 또 한번 미스터 캠프는 놀라운 표정을 드러내며 자기가 볼때는 20대 밖에 보이지 않으며 전혀 미세스 같지 않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나 지금 매우 놀라고 있어"라는 뜻을 담은 과장된 몸짓과 녀석의 제스추어는 정말이지 헐리우드 액션..그 자체였다.

공주에서 이제는 젊은누나로 까지 신분이 격상되자 그녀는 겉으로는 농담마세요 라고 손사래를 쳤지만 마음은 참으로 흐뭇했다.

지금까지 외국인과 대화는 커녕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던 성민지는 외국인 남자 특유의 솔직함과 풍부한 자기 표현에 맘이 편해졌고 흑인들이라고 그 놈처럼 다 짐승은 아니구나 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짐승?....


그녀는 다시 그 극장의 흑인을 떠올렸다.

그 흑인이 짐승이 아니라 자신이 짐승취급을 받았던 거라고 그녀는 짐짓 생각했다.

그런데 난 왜 그 인간이하의 취급을 당하면서도 쾌감을 느꼈을까?...

내가 알고있고 내가 경험한 섹스는 항상 부드러움이 가미된 사랑의 행위였는데...

그녀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흑인의 몸을 힐긋 훔쳐보았다.


역시....


그들은 정말로 다른 종족임에 틀림없었다.

옆에 앉아 있는 미군장교는 어깨까지 드러낸 흰색 면 티셔츠에
곤색 반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노출된 그의 몸은 근육이 빈틈없이 달려 있었고 특유의 검은 색 피부는 올리브 기름이라도 발랐는지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

(저 흑인은 사람이 좋은거 같은데...이 남자도 그때 흑인남자처럼 침실에선 여자를 거칠게 다룰까?)

그녀의 잠재된 상상력이 다시 고개를 바짝 쳐들고 있었다.

자신의 차례가 된 흑인이 그녀에게 고개를 까닥하고는 창구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이제 그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향하고 있었다.

거짓말 쫌 보태서 자신의 허리만한 허벅지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듯한 장딴지와 논에 심어진 모처럼 거웃거웃 나 있는 그의 다리체모가 하나하나 보였다.

어느새 그녀가 그의 몸과 남편 임성택의 그다지 봐줄 거 없는 몸매를 비교하고 있단 사실을 깨달은 성민지는 속으로 흠칫했다.


(아아..내가 요즘 왜 이럴까?...왜 안하던 생각과 행동을 자꾸만 하는거야)


남편에게 그런 미안함과 스스로의 죄책감을 느끼는 그였지만 흑인남자의 뒷모습에서 아직까지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거리에는 많은 남자들이 있는데...그냥 보는거 뿐이잖아?... 본다고 해서 무슨 잘못이 있는건 아닐거야)

그녀는 자신의 차례가 다가오자 손에 쥐고 있는 대기표를 다시 한번 꺼내서 확인하고 핸드백에서 지로영수증들과 납부금액을 꺼냈다.

그녀가 대기표를 쥐고 창구쪽으로 다가가자 막 일을 끝낸 흑인이 돌아서서 자기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순간 그녀는 흑인의 반바지 쪽으로 시선이 고정되어 버렸다.

큰 보폭으로 걸어오는 흑인의 아랫도리가 출렁출렁 대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순간 확 얼굴이 달아올라서 고개를 돌렸다.

(세상에...꼭 소세지를 달고 다니는 거 같구나)

그녀가 그렇게 중얼거린 그녀는 창구에 있는 여행원에게 지로용지와 돈을 건네 주었다.

그녀가 영수증을 다시 받아쥐고 돌아섰을때 은행 입구에는 먼저 갔을거라고 생각했던 흑인이 멀뚱히 서 있는게 보였다.

그녀는 차마 시선을 아래로 향하지 못하고 고개를 살짝 돌린채 입구쪽으로 갔고 흑인남자는 그녀가 다가오자 웃으면서 그녀의 어깨를 쥐었다.

흑인남자가 갑자기 다가와 마치 다정한 연인처럼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입구쪽으로 걸어가자 그녀의 몸이 그대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너무도 놀래서 숨을 제대로 쉴수 없었고 그로부터 남자특유의 강한 체취와 함께 강하며서도 부드러운 그의 손길이 느껴지자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어머 어머...언제 봤다고 이러는 걸까?...원래 서양에서는 이런식으로 친근감을 표현하는 걸까?)


어깨에 자기 손을 올린채 바짝 붙은채 걸어가자 그녀의 작은몸이 남자의 넓은 가슴에 반쯤 파 묻혀 버렸고 그녀의 엉덩이마저 그의 다리사이에 포개져 버렸다.

(이러면 안된다고 말을 해야 하는거 아닐까?...)

흑인남자가 손을 뻗어 은행의 문을 열고 그녀를 데리고 걷기 시작하자 그녀의 몸이 덩달아 출렁댔고 그의 굵은 다리가 느껴질때는 너무도 민망해서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의 작은 몸이 그의 가슴에 닿았다가 떨어지고 그녀의 엉덩이에는 몇번이고 그 남자의 그것으로 추정되는 딱딱한 것이 닿아오자 그녀는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몇번이고 자신의 어깨위에 놓인 흑인의 솥두껑 같은 손을 뿌리치고 싶었지만 그의 웃는 얼굴을 보자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은행밖으로까지 나와서야 남자는 그녀를 놓아주었고 웃으면서 또 보자면서 길을 큰길로 걸어가 버렸다.


잠시 멍하게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린 성민지는 육교를 건너서 카페 크로테스로 돌아갔다


점심시간이 될때까지 "크로테스"에는 손님이 별로 들어오지 않았다. 오늘 점심은 뭘로 먹을 것인가를 놓고 아르바이트 생들끼리의 대화가 벌어졌고 결국 사다리를 탄 끝에 근처 중국집에서 음식을 시켜 먹기로 결정했다.

그녀가 시킨 음식은 간짜장이었다.


머리에 "번개보다 더 빠른 핵폭탄"이란 다소 살벌한 문구가 적힌 빨간 띠를 두른 젊은 철가방 녀석이 두개의 반짝이는 철가방을 들고 나타났고 청수가 대신 카운터를 봐주는 틈을 이용해서 내실로 들어가서 남은 아르바이트 몇명과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기름에 한번 더 볶은 간짜장을 새하얀 면이 담긴 사발에 붓고 젓가락으로 천천히 젓기 시작하던 성민지는 짜장의 색깔이 왜 하필 검은 것일까 속으로 푸념을 했다.

요즘 그녀의 눈에 보이고 뜨이는 것은 포르노 아니면 검은색 투성이었다. 검으색 면발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그녀는 또 아까 흑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사람좋아 보이는 웃음과 단단한 다리 그리고 그녀로서는 도저히 크기를 확인할 수 없는 출렁대던 소세지도.....

이런 따위 상상을 하니 면발이 목구멍으로 넘어갈리 없는 그녀였다.

반쯤 먹다가 젓가락을 놓자 같이 먹던 아르바이트 여자애중 한명이 물었다.

"언니...그만 드시게요?"

"으응...입맛이 없네.."

아르바이트 여자애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어떡해요?...중국음식이 안 맞나 봐요...청수오빤?..그러게 그냥 분식집에서 시켜 먹자니까..."

"아니야...속이 안좋아서 그래...그럼 많이 먹어라"

그녀가 그렇게 말하고 내실을 빠져 나왔다.

카운터로 가서 청수에게 너도 먹고와 하고 그와 자리를 교대했다. 자신을 제외하고 모두들 내실로 들어가서 점심을 먹고 있었고 그녀는 커피를 스스로 타서 자리로 가져왔다.

커피잔으로 부터 은은한 김이 피어오르고 카페에는 아르바이트 생중 누군가 틀어놓았을 차분한 클래식이 잔잔히 깔리고 있었다.

커피를 마셔도 음악을 들어도 그녀는 조금전의 그 이상야릇한 느낌을 지우기 쉽지 않았다.

그녀도 이제는 느낄수 있었고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팬티가 젖어 있다는 것을...

남자가 어깨에 손을 올렸을때 가슴이 덜컥하면서 반응을 하던 자신의 질은 그의 어깨와 자신의 엉덩이에 남자의 신체가 닿자 그대로 분비를 했다는 것을 그 순간에도 그녀는 알수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몸은 계속 정직하게 반응을 하고 있었고 그녀는 저번 주 일요일 낮에 흑인과의 정사를 꿈꾸면서 그녀의 몸과 정신은 일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이후 남편과의 섹스를 할때면 그녀는 어느새 다른 남자와의 섹스를 떠올리면서 남편몰래 더 흥분을 하기 시작했고 색다른 섹스를 경험한 그녀는 이미 더 거부할 수 없이 같은 류의 강하고 자극적인 무엇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럴리가 없어라고 부정하던 그녀였는데 이제는 그때의 오르가즘을 다시 원하고 있었다.

천상에서 날개가꺽여서 한없이 추락하는 새의 기분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고 머리속이 새 하얗게 탈색되버린 그 빛깔을 보고 싶었고 극장의 앞시트를 움켜쥐고 다시 한번 부들부들 떨리고 싶었다.

그렇게 되면 그녀의 예쁜 질은 수줍게 다시 한번 그 우유빛 점액을 만들어 줄 것이다.

그녀는 드디어 대담하게 손을 카운터 아래로 내려서 치마 위를 더듬기 시작했다.


(아..누가 보면 어떻게? 하지만..내 손은 책상에 가려있어...나말고는 아무도 몰라..내 손이 이곳에 있는지를...)

그런 생각을 하자 그녀는 더욱 대담해졌고 위쪽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느낌이 살짝 전해져 왔다.

마치 맞은 편에 있는 산으로 부터 들려오는 은은한 메아리처럼...처음은 그렇게 미미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그녀의 이런 소극적인 자세에 불만을 내고 있었고 이미 몸과 마음이 일체가 된 그녀는 매만지는 수준을 넘어서 손바닥을 덮은채 압박하는 자세로 바꾸기 시작했다.

(흐.....흠)

그녀는 속으로 신음을 낮게 내었다.

아직은 들려서는 곤란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밤을 새우는 것처럼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자위가 혐오스럽지도 불만이지도 않았다.

그녀로서 이것만이 유일하게 도덕을 지키며 자신을 달랠수 있는 유일무이의 수단이었다.

미미한 떨림이 더 뚜렷해져 오면서 그녀는 치마 안으로 손가락을 넣어서 그녀가 오늘 입고 나온 망사팬티쪽으로 가져갔다.

팬티안에 감춰진 까칠까칠한 자신의 음모가 느껴졌고 그녀는 모든 음모들이 새벽이슬에 젖은 풀잎마냥 모두 물기를 머금고 있단 것을 알았다.

손가락을 팬티상의 질입구위에 대고 문지르자 아까와는 다른 강한 쾌감이 몸을 훑고 지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핥으면서 그러나 소리는 억제하면서 손가락을 팬티안으로 넣어보았다. 역시 음모는 젖어있었고 질입구는 샘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손가락이 미끄러워서 몇번이고 질쪽으로 다가가다가 실패를 했다. 아무래도 치마의 호크가 방해가 되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가 엉덩이를 살짝 든채 치마의 호크를 끌었고 치마를 엉덩이까지 조금 내린 후에 "크로테스"라고 수가 놓인 네이프런을 집어서 하체를 충분히 가렸다. 그녀는 자신이 이렇게 까지 대담할줄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누가 보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과 눈치가 오히려 그녀의 몸을 더 달아오르게 하고 있었다.

그녀는 카페안을 둘러보고 눈을 감고 상상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아까 흑인의 굵은 다리가 단박에 영상처럼 떠올랐고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흐응 하고 짧은 신음을 내었다.


(괜찮아..아직 점심을 먹고 있을거야...걱정하지마)

그렇게 자기를 격려하면서 다시 그 흑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의 손이 미끄러지듯이 질안쪽 계곡을 파고들자 몸이 가볍게 떨려왔고 그녀의 손가락은 어느새 클리토리스를 찾아서 매만지고 있었다.

그녀는 벌써 전에 올랐던 봉우리를 향해서 천천히 그러나 힘겹게 올라가고 있었다. 그녀의 몸이 뜨거워지면서 발아래가 더 멀어졌다.

하지만 봉우리는 아직도 높았고 그녀의 의자와 힘만으로는 저 험한 곳을 오를수가 없었다.

그녀를 단박에 저 봉우리로 오르기 위해서는 그때처럼의 강한 자극만이 필요했다.

그것은 FM적인 남편의 섹스가 아니라 지극히 자극적이면서도 파격적인 상황의 연출이었고 그것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다른사람의 몸을 통해서만 가능할거 같았다.


질안으로 손가락을 넣고 어루만지고 자극을 주었지만 그녀의 몸은 계속해서 7부능선에서만 머무를 뿐이었고 진전이 없었다.

저 봉우리에만 올라가야만 그녀가 애타게 갈망하는 새하얀 세상을 볼수 있었고 추락의 절망감도 맛볼수 있었다.

그녀는 안타까웠다. 몸은 헐떡대면서 재촉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손길만으로는 너무도 역부족이었다.

그녀가 속으로 부르짖기 시작했다.


(느끼고 싶어...다시 한번,,때의 그 기분을 가져보고 싶어...떨어져서 몸이 산산이 조각나는 그 기분을 ...)

핸드백을 찾아주고 은행에 가주었던 흑인이 그녀 옆에 나타났다.

그가 말없이 미소지으면서 그녀 옆에 서 있었다.

그녀가 부르짖었다.

(당신이군요...)

흑인남자는 무언의 표정이었지만 그녀의 의식에는 그가 텔레파시를 던져주고 있었다.

(뭘 원하나요...사랑스런 공주님?)


그녀가 주저하지 않고 다시 부르짖었다.

(당신을...당신을 원해요...당신이 필요해요 지금,,,)

흑인남자가 다시 무언의 텔레파시를 보내주었다.

(사랑스런 공주님....내가 당신을 어떻게 해주길 원하나요?)

그녀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목구멍까지 가득 올라온 말들을 부르짖었다.

(날...날 다뤄줘요...날 거칠게....)


흑인의 텔레파시가 다시 박혔다.

(당신은 나의 공주님....그렇게 거칠게 할순 없어요)

그녀가 조바심이 나서 부르짖었다.

(난....난 당신의 공주가 아니에요...난...당신의 여자...아니 당신의 종이라고 생각해도 좋아요...아아
제발...그렇게 보지만 말고...날...날 좀 어떻게..)

남자의 텔레파시가 천천히 날아들었다.

(가여운 여인.....당신을 위해서라면.......)

흑인이 승락을 하고 자기에게 다가오자 성민지는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사람들이 모두다 자기를 보는거만 같았다.

순간 흑인의 텔레파시도 사라졌고 그의 몸도 보이지 않았다.

덜컹하고 내실 문이 열리고 식사를 다 마친 아르바이트 생들이 나오고 있었다.

성민지는 휴 하고 한숨을 내쉬고 네이프런이 자신의 하체에 잘 덮여있는지 확인하고는 태연히 고개를 숙여서 장부를 보는 척 했다.

그녀의 눈빛은 충혈되어 있었고 그녀의 아랫도리는 물론 가려주고 있던 네이프런도 젖어 있었지만 아무도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안타까움과 한편으로는 알수없는 미소를 번득였다.

그녀는 흑인의 도움으로 거의 정상까지 갔었던 것이었다. 안타까움은 눈앞에 두고 내려와야 했음이고 미소는 그 방법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오후 3시가 되어 퇴근하기 전에 그녀는 잠시 카페 여자 화장실에 다녀왔다.

사람들은 집에 들어가기 전에 화장을 한 것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녀는 뽀얗게 변해 있었지만 카페 있는 아르바이트 생들 중에 누구도 그녀가 화장실에서 메이컵 말고도 그녀가 젖은 망사팬티를 벗어서 핸드백에 넣었단 사실을 몰랐다.


카페 "크로테스"를 나온 성미진은 육교를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오전부터 불어오던 미풍이 그녀의 치마아래를 스치고 지나가자 그녀는 치마안의 노팬티로 노출된 그녀의 은밀한 부분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로서는 처음으로 시도하는 노팬티로의 외출이었다. 첨에는 점심시간이후의 자위로 너무 젖어버린 망사팬티를 어떻게 입고 가나하는 걱정으로 시작했는데 불연듯 노팬티로 나가볼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조금 주저하기도 했지만 누가 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은 알수 없는 자극의 유혹으로 다가왔고 그녀는 퇴근할때까지 가슴을 두근거리면서 오늘 한번 해보자란 결심을 했었다.

육교로 천천히 올라가다가 몇번이고 뒤를 흘깃 바라보았다.

혹시 아래에서 올라오는 남자라도 있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과 설마 보일까 하는 또 다른 생각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면 그 남자는 날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남자들이 원래 응큼한 엿보기 근성이 있단 것을 그녀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런 남자들을 예전에는 치한쯤으로 치부해 버렸는데 지금은...지금은...그 응큼한 근성의 실체를 엿보고 싶었고 또한 궁금했으며...그 반응들이 묘한 호기심과 자극으로 다가 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과는달리 자기 아래에서 올라오는 남자는 없었고 그녀는 조금 싱겁단 생각을 하면서 다시 육교로 내려갔다.

버스에 올라탄 성미진은 빈 자리 중에서 어디에 앉을까 고민을 잠시 했다. 그녀의 마음속에 다시 악마와 같은 유혹이 다가왔고 성미진은 오늘 이대로 한번 나가볼까 생각하고 맨 뒷자리의 가운데에 앉았다.

처음에는 무릎팍에 핸드백을 얌전히 올려놓았으나 다음 정류장에도 사람들이 별로 타지 않았고 그나마 탄 사람들도 늙은 아줌마나 할머니들 그리고 수업을 마친 초등학생들 뿐이었다.

그녀는 몇번이고 용기를 내서 다리를 꼬고 넓게 앉았으나 아무도 자기를 봐주는 사람이 없었다.

뒷통수를 긁적긁적 긁고 버스에 내린 성미진은 집으로 가는 길에 상가의 한 슈퍼에 들렀다.

그녀는 아파트에 있는 몇개의 수퍼중에서 무의식중에 이곳을 골랐고 이곳에는 젊은 남자 직원이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어떻게 표나지 않게 자연스럽게 행동을 할까?...

물건을 사는 척하면서 성민지는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야채 코너에서 물건을 고르는 척하면서 남자직원을 부르고 그의 앞에서 몸을 수그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어쩌면 그 젊은 남자는 자신의 허벅지를 잘하면 노팬티인 자신의 몸을 볼수 있을지도몰랐다.

그럼..

(아아..그럼...그는 어떤 표정을...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런 생각을 하자 다시 그녀의 질이 반응을 하기 시작했다.

(너무 많이 나오면 안되....난...난 노 팬티란 말이야)

그녀가 찍은 젊은 직원은 막 라면 박스를 꺼내서 뜯고 있었다.

그녀가 야채코너 앞에 서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면서 직원을 불렀다.

"저기요...여기 좀 찾아주실래요?"

쭈그리고 앉아서 라면을 코너에 쌓고 있던 남자직원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녀에게 다가온것은 그 젊은 남자가 아니라 머리의 중앙이 시원하게 벗겨진 주인 아저씨였다.

젊은 남자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자신 옆으로 아조씨 냄새를 풀풀 풍기는 주인이 다가오자 성민지는 계속 꼬이는 일에 자신도 모르게 짜증이 났다.

"네네...뭐 찾으세요?"

굽신굽신 고개를 숙이면서 자신에게 다가온 대머리 남자에게 성민지가 내 뱉듯이 말했다.


"싱싱한 야채는 전부 어디갔어요?...왜 이렇게 다들 누르죽죽한거에욧!"



황당한 표정을 짓는 대머리 주인을 뒤로하고 터벅터벅 발소리를 내면서 성민지가 슈퍼를 빠져나갔다.

성민지는 자신의 몸에 무언가 붙어 있단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엄격한 가정에서 자랐고 항상 엘리트의 길을 밟아왔고 상식에서 벗어나는 그 어떤것도 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본 자신은 성민지가 아는 그녀가 아니였다.

침실에 주저 앉은 그녀는 알수없이 슬퍼졌다. 뭐가 씌인거만 같았다.

카페라는 열린공간에서 대담하게 자위를 해대고...

노팬티로 밖을 나가서 자신의 노출을 남자들이 보도록 유도한 자신을 알수가 없었다.

이러면 안된다고 뒤늦게 후회를 하고 자신을 책망해보았다. 자신은 한 남자의 아내이고 엄마였다.

비록 남들에게 말은 안했지만 스스로 자기는 현모양처라고 스스럼 없이 자부해 왔었다. 그런데 요 몇일동안 자기가 한 행동은 요부의 그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난 색에 미친 색녀야....화냥년이고 저주 받을 년이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신에게 그렇게 저주를 퍼부었고 그렇게 하면 마음이 가라앉을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미 마음속에 둥지를 오랫동안 틀어버린 또 하나의 자기가 대꾸를 하고 있었다.

(색녀...색녀가 무어란 말인가...남자는 섹스를 즐겨도 되고...여잔 느끼면 안되는 법이라도 있는것인가?)


색녀...색녀...


한참동안 그말을 되뇌었다. 한때까지는 저속한 여자들에게나 쓰는 욕과 다름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 천박한 그 말들을 자신에게 대입하자 알수없는 떨림이 느껴졌다.

자신을 천박하게 욕을 할수록 마음속에 있는 또 다른 성민지는 더 기쁘게 받아들이고 더 즐기고 있는거 같았다.


성민지는 그날 남편이 들어올때까지 그렇게 또 다른 자신과 끊임없이 싸우고 또 싸웠다.



다음날..


그날도 변함없이 남편과 훈이와 같이 아파트를 나선 성민지는 어제와 비슷한 간단한 차림으로 카페 "크로테스"로 출근했다.

그날도 바텐더 청수가 그녀가 좋아하는 블루마운틴을 끓여서 두손으로 갖다 바쳤고 그녀는 여느때와 변함없이 카운터에 앉아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여전히 오전시간대에는 손님들이 뜸했고 평소와 다름없는 한가한 아침이었다.

한가지..사장이 오랜만에 출근한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오랜만에 콧배기를 드러낸 사장의 얼굴은 전보다 창백하고 안 좋아 보였다.

눈에는 벌건 실핏줄이 섰고 꼭 잠을 못잔 사람처럼 피푸도 푸석해 보이는게 성민지가 보기에도 어디 아파보였다. 그녀가 조금 걱정되어서 물어보았다.

"사장님..얼굴이 많이 안좋으시네요..어디 아프세요?"

사장이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어제 술을 늦게 마셔서 그래요...아픈건 아닙니다."

성민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이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다가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돌리고 그녀에게 말했다.

"참...어제 미스터 캠프랑 술을 마셨는데 그 친구가 자기가 민지씨를 만났다고 그러던데..."

그녀의 얼굴이 조금 붉어지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히 은행 앞에서 만났고 이야기 까지 했다고 캠프가 어제 막 자랑을 하더군요..."

"아 그랬군요...네 맞아요"

그녀가 맞장구를 치면서 소매치기 이야기를 그 흑인이 하지 않았구나 라고 생각했다.

사장이 갑자기 장난스런 웃음을 흘리면서 말했다.

"민지씨..큰 일 났어요...그 캠프라는 친구가 성민지씨 한테 꽤 호감이 있던 눈치던데..."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네?..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하하...너무 놀라지 마세요...제가 그래서 그 녀석을 혼내줬어요...성민지씨는 결혼한 분인데 그런 말하면 안된다구...그냥 술자리에서 나온 말이니까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사장이 그렇게 말하고 웃었다. 그녀가 알수없이 두근거리는 가슴을 느끼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사장님...그 캠프라는 분과는 많이 친하신가 봐요?"

"아...네...뭐 많이 친한건 아니고...어떻게 알게된겁니다. 제가 옛날에 카튜사에 있을 그때 파견나왔던 장교후보생이었어요...나중에 캠프가 미국에 돌아가고 연락이 끊어졌는데 최근에 그 친구가 다시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어서 만나게 된겁니다."

"아...그러시구나...장교라면...군인인가요 그 캠프라는 분은?"

"음...그렇죠...참 그 친구도 장난이 너무 심해요...그 녀석은 작년에 여기서 결혼을 했거든요...그 녀석은 한국여자가 좋대요..그 녀석 와이프도 한국여자죠...그런데도 자식이 분수를 모르고 민지씨 애기를 하니까 내가 혼을 내주었죠"

(결혼을 한 남자구나...한국여자랑....그렇구나....하긴 ...)

그녀는 잠시 캠프의 얼굴을 떠올렸다. 흑인치고는 준수한 편이었고 매너도 좋았다. 그리고 군인이라는 꽤 안정된 직장....

(정된 직장?...그럴까?...듣기에 직업군인들은 파견을 많이 다닌다던데,,,그럼 떨어져 있는 시간도 많지 않을까?....그럼 같이 있을 시간도 별로 없을거야....그럼 부부생활..아니 섹스는 어떻게 하지?)

그녀는 왜 자신이 남의 결혼생활까지 걱정을 하고 있는지 알수 없었다.

그것은 사실 걱정이 아니었다.
자신에 대해 관심이 있단 말을 들었을때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고 오히려 조금 흥분도 되었었다.


그런데 그가 아직까지 결혼을 했을거라고는 생각은 안해보았다. 그녀의 자위행위동안 두번이나 주인공으로 등장한 그엿는데도 그가 결혼을 한 유부남이란 생각을 해보지 않았고 그래서 그녀는 같이 살고 있을 그 한국인 여자가 조금 궁금해졌고 살짝 샘이 났었던 것이다.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사장이 웃으면서 말했다.

"캠프 녀석은 어제 그런 이야기를 꺼내더군요...어제 민지씨 보구 너무 맘에 들어서 오늘 연극을 보러가고 싶은데 나보고 말을 좀 해달라나요? 그런데 너무 걱정마세요...제가 중간에서 그 표를 가로챘으니까요"


(연극이라구?....내가 유부녀인줄 알면서도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혹시 바람둥이가 아닐까?)

성민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사장이 다시 말을 꺼냈다.

"오늘은 아마 제가 자리를 비울거 같네요...캠프 녀석이 내일자로 하와이 기지로 돌아가게 되었거든요..그래서 어제 환송회를 내가 해주었고 녀석이 답례라면서 연극표를 구했다고 하더군요...쩝 근데 그건 나랑 볼려고 한게 아니라 아마 민지씨를 염두에 두고 한거 같아요 "

"어머..사장님두..."

성민지는 그렇게 얼굴을 붉힌채 말을 얼버무렸다.

(정말로 그 흑인남자가 나를 좋아하는 것일까?....그런데 내일로 돌아간다구?...그렇게 되는거구..군인들의 생활은 ...)

성민지는 조금 우울해졌다. 꼬집어 말하긴 어려웠지만 어제 이후로 캠프를 카페에서 자주 볼수 있을거란 막연한 기대를 가졌었던 그녀였다.

(내가 그 흑인을 좋아하는걸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분명히 아니었다....

그 흑인의 존재는 자신의 상상속에서만 존재하는 인물로 자리잡았을 뿐이었다.

한시간쯤 지나자 카페 문이 열리고 캠프가 들어왔다.

지금까지 사우나에 몸이라도 담그고 왔는지 그렇지 않아도 번쩍거리는 그의 몸이 유난히 환해 보였다.

그가 들어오자 성민지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숙였다.

캠프가 입구에 있는 카운터에서 성민지를 보고는 환하게 하이하고 인사를 했고 그녀도 떠듬거리는 목소리로 하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캠프는 한참 성민지 앞에 서서 환하게 웃어주고는 사장이 앉는 자리로 가버렸다. 그녀의 가슴이 알수없이 두근두근했다.

사장과 캠프가 앉아서 한참동안 이야기를 하더니 사장이 얼굴이 난처하게 변했다. 캠프는 계속 무언가 설득하는 눈치였고 사장은 난감한 표정을 짓고는 자신이 앉은 카운터쪽을 몇번이고 쳐다보기 시작했다.


캠프가 무어라고 몇번이나 이야기를 하자 사장이 두손을 머리위로 올리더니 한숨을 휴하고 쉬고는 카운터로 다가왔다.

사장은 곤란한 이야기라도 꺼내려는지 한참 주저하고 있었다. 그런 사장의 태도가 의아해서 성민지가 먼저 물었다.

"사장님?...저에게 무슨 하실 말씀이라두?"

"허어...이거 참...어떻게 이야기 해야 하나 "

사장이 어려워하는 얼굴로 망설이고 있었다.

성민지가 웃으면서 사장에게 말을 했다.

"무슨 이야기신데 그러세요?,...말씀 해보세요"

사장이 쩝쩝 대더니 한숨을 다시 내쉬고 입을 열었다.

"저기...그러니까...어휴...이거 참 민지씨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다니 ..."

성민지가 눈을 깜박거리며서 사장의 눈치를 살폈다.

눈을 들어서 캠프가 앉은 쪽을 보니 캠프가 이쪽을 보면서 웃고 있는게 보였다. 성민지는 대충 어떤 이야기가 나올것인지 짐작하고 짐짓 물어보았다.

"저기 혹시 캠프씨 때문인가요?"

"음...네.."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말씀해보세요...전 뭐 괜찮은데요"

"네..너무 화내지는 마세요....아까 제가 연극 이야기 했잖아요?"

"네 그런데요?"


"원래 오늘 나랑 보러 가기로 했는데....저 친구가 표를 한장 기어이 더 구해와서 민지씨도 꼭 같이 갔으면 좋겠다는군요...내가 그건 곤란하다고 말했는데 한국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소원이라나요?"

성민지는 잠시 그말을 듣고 생각해 보았다.
사장의 말소리가 들렸다.

"부담가지지 마세요..사실 저놈 엄청 응큼한 놈이랍니다....아마 민지씨에게 흑심이 있어서 그럴거에요 "

성민지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전 그렇게 매력적인 여자가 아닌걸요?...캠프씨의 마음은 고맙지만 전 지금 근무시간인걸요?"

"저도 그렇게 이야기 했는데 캠프녀석 고집이 장난아니에요...내가 사장이니까 하루 정도는 일찍 퇴근시킬수도 있지 않냐면서..."

"그래도 어떻게 그렇게 해요?,...제가 없으면 카운터는 누가보구요"

"사실 저녀석이나 민지씨가 결혼만 안했다면 셋이서 같이 연극보러 가는건 문제가 안되요...카운터야 뭐 청수녀석이 잠시 봐주면 되는 일이고 하지만 민지씨가 ..."

성민지가 미소를 지었다.

"사장님만 좋으시다면 그렇게 해도 될까요?..."

사장이 눈을 뜨고 물었다.

"같이 연극을 보러 가자구요?...저 녀석은 응큼한 놈이라니까요?"

"호호...원래 응큼하다고 하는 사람치고 그런 사람 없대요..그리구 그게 사실이더래도 단둘이 가는것도 아니구 사장님도 같이 계신데 뭐가 걱정이겠어요?...사실 전 카운터를 비우고 가는게 맘에 걸렸어요 하지만 사장님만 좋으시다면 같이 보러가도록 할께요...그리구 전 어제 캠프씨에게 신세 진게 있기도 하거든요"

"신세라구요? 저깟 녀석한테 무슨 신세?"

"호호...그건 그냥 비밀이에요...아무튼 저분은 내일이면 한국을 떠나실 분이신데 어려운 것도 아니고 연극한 프로 같이 보자는 건데요 뭐..그건 어려운 부탁도 아니잖아요?"

사장이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민지씨만 좋으시다면 저도 좋습니다....그럼 지금 출발하도록 하죠..카운터는 청수에게 맡기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백을 집어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여성용 화장실 세면대 위에 있는 거울앞에서 메이컵을 하면서 그녀는 이것저것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캠프의 부탁을 선뜻 들어준 명확한 이유가 뭔지는 자신도 알수없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녀는 오늘을 마지막으로 다시 보지 못하는 남자란 생각이 들자 용기가 생겼다는 것이다.

연극을 한프로 보는것은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 캠프란 남자는 분명히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은 그녀도 피부로 느낄수 있었다. 자신도 싫어하지 않는 그 남자...

자위에서 상상속에만 등장하는 그 남자와 연극한프로 같이 보는것도 묘한 느낌이 될거 같았다. 혹시 자신이 그와의 은밀한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는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을때 그녀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를 떠올리면서 미친듯이 자위를 하고 있는 요즘이었지만 현실은 현실이고 상상은 역시 상상일 뿐이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그녀가 화장실 문을 나섰다.

카페 문을 나섰을때 벌써 캠프를 뒷자리에 태운 사장의 애마 렉스턴이 부릉부릉 시동을 걸고 있었고 그녀는 사장의 권유대로 조수석에 올라탔다.

사장은 청담동에서 역삼동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 그녀는 사장의 차를 처음 타보았고 유심히 차 내부를 살폈다.

뒷자석에 앉은 흑인 캠프는 뭐가 좋은지 싱글싱글 거리고 있었다.

백미러로 그의 싱글대는 모습을 훔쳐본 성민지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자신이랑 같이 가는것이 저리도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자 상상하긴 힘들지만 조금은...조금은 그가 귀엽기도 했다.

역삼동 사거리를 빠져나왔을때 성민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연극은 어디서 해요?"

사장이 좌회전 깜박이를 넣으면서 말했다.

"잠실입니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물었다.

"잠실에도 소극장이 있나 보네요? 전 우리가 대학로에 가는줄 알았거든요"

"그렇게 유명한 곳은 아닙니다. 지은지는 얼마 되지 않았고 시설도 그렇게 좋은 곳은 아니에요"

"그래요?...연극이야 내용만 좋으면 되는거죠...그런데 오늘 우리가 볼 연극 제목은 뭐에요?"

사장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크로테스"

"크로테스? 어머?...그거 우리 가게 이름이잖아요? 전 그런 연극은 들어본적 없는거 같아요? 무슨 내용이에요?"

사장이 피식 웃더니 백미러를 가리켰다.

"내용은 저도 잘 몰라요..저 캠프 녀석에게 물어보세요 저 녀석이 오늘 연극의 남자 주인공이거든요"

성민지가 놀란 눈으로 캠프를 힐긋 돌아보고는 다시 사장에게 말했다.

"세상에...정말이에요?...그럼 캠프씨가 출연하는 연극에 우릴 초대하는거네요?"

그녀가 흥분된 얼굴로 좀 큰소리로 말했다.

사장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


사장은 잠실호수공원 옆에 있는 5층짜리 건물앞에 렉스턴을 주차시켰다.

사장이 사이드 브레이크를 올리면서 성민지에게 말을 건넸다.

"캠프녀석은 먼저 들어가고 우린 나중에 들어가죠 아직 연극시작하려면 좀 멀었거든요"

성민지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했다.

"그렇군요...주연 배우니까 준비도 할게 많을거에요 그쵸?"

사장은 그녀의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캠프를 내려준 뒤에 그녀를 데리고 호수공원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장마비가 걷힌 하늘에는 푸른빛이 맺혀 있었고 호수는 그 아름다운 빛을 고스란히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장을 따라 걷던 성민지가 신기한 듯이 말을 했다.

"캠프씨는 참 대단한 사람이네요?...군인이면서도 어떻게 연극활동까지 할 생각을 했을까요?"

사장은 말없이 웃기만 하고는 호수가 잘 보이는 벤치에 앉았다. 성민지도 그의 옆에 조금 떨어져 앉았다.

사장이 담배를 주머니에서 꺼내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 호수가 아름답게 보이세요?"

느닷없는 사장의 질문에 잠시 고개를 갸우뚱 하던 성민지가 대답을 했다.

"음...그런거 같아요...꼭 바다 색깔 같지 않나요?"

때가 잔뜩 묻은 흰 오리가 새끼 오리들을 뒤에 데리고 물위에 둥둥 떠 있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게 어떤 마음일까요?"

"글쎄요...좀 어려운 질문이네요....그러건 사람마다 다 다른게 아닐까요?"

"하지만 사람들에게 공통으로 느끼는 아름다움 같은거도 있겠죠?"

그녀가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했다.

"음 ...그런거도 있을거에요...가령 저 호수의 물빛이라거나....예쁘게 핀 꽃송이들...그리고 후후 왜 있잖아요 남자들이 좋아하는 미스코리아들...그런거도 공통적으로 느끼는 아름다움이겠죠"

"그런데 전 그런것도 없답니다....저 호수를 보면 말이죠...전 아름답단 생각을 하지 않고 흐르지도 않고 가만히 고여있는 저 물결들이 내 마음과 닮았단 생각을 할 뿐입니다."

"무슨 뜻인가요?"

"저 호수물빛은 여기서 보면 아름답다고 느껴질지 모르지만 저 호수처럼 흐르지 않고 고여 있는 물은 금새 썩어 버리죠...그러면서도 햇빛과 하늘색만 카피해서 아름다움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녀가 잠시 의아한 표정으로 알쏭달쏭한 말을 늘어놓는 사장을 바라보았다.

사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저 물도 흘러가고 싶을 겁니다. 지금 자신을 가둬둔 저 둑을 물은 싫어할거에요....저 안에 갇혀 있으면 더 이상 물이 아닌겁니다. 물은 아름답게 보이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겁니다. 쉬지않고 계속 흘러가는 그래서 지나온 물결을 잊어 버릴 정도로 쉴새없이 흐르길 원할거에요...."

사장이 담배를 비벼 끄면서 아직도 멍청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성민지를 향해 말을 했다.

"이제 그만 들어가죠...연극이 시작될겁니다."


사장과 성민지는 건물 입구를 지나서 엘레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갔다. 5층에서 내린 두사람은 컴컴한 복도를 지나서 한참을 걸었다. 그의 옆을 따라가던 성민지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물었다.

"그런데 좀 이상하네요?...건물도 소극장 같지 않고....연극 포스터도 없구요"
"5층만 극장으로 빌어쓰는 곳입니다. 그리고 포스터는 필요 없어요...보러 올 사람도 없는데요 뭐"

사장이 무뚝뚝하게 내뱉었지만 성민지는 마지막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긴 복도를 지나자 다시 복도가 밝아졌고 큰 문 앞에 책상이 있고 그 앞에 여직원이 앉아있었다.
여직원은 사장의 얼굴을 잘 알고 있는지 인사를 꾸벅했고 문을 열어주었다.
사장이 성민지에게 말을 했다.

"자 들어갑시다....별로 늦지는 않았겠지만요..."

공간은 컴컴했다. 성민지는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지자 눈을 찡그렸고 뒤로 문이 철컹하고 닫혔다.

조금 더 가자 희미한 조명이 공간 중앙으로부터 새어나오고 있었고 무대 같아 보이는 곳을 비추고 있었다.
사람들의 두런두런 거리는 말소리가 들렸고 사장은 그 사람들 가까이로 가서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성민지는 겨우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두리번 거렸다. 극장 치고는 좀 이상했다. 관객석으로 갈줄 알았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의자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머리에 야구모자를 쓴 40대 중년 남자가 나타나서 사장과 반갑게 인사를 했다.

"아이구 오셨군요...시간에 맞춰 오셨어요"

사장이 같이 인사를 하고 말했다.

"아직 시작 안했나 보죠?...캠프는 어디갔나요?"

"준비가 이제 끝났으니 이제 나올겁니다."

사장이 고개를 돌려서 사장 옆에 서 있는 성민지를 힐끗 바라보았다.

성민지가 사장 옆으로 가서 속삭였다.

"저기...우리 어디에 앉아서 봐요?"

"여기는 좌석같은 것은 없어요...그냥 서서 보는 곳입니다."

성민지는 고개를 갸웃했다.

(스탠딩 공연이라도 된단 말인가? 이런 연극은 들어본 적도 없어)

성민지가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야구모자를 쓴 남자가 옆에 서 있는 다른 남자에게로 다가가서 말했다.

"자 그럼 이제 들어가자구...조명? 오케이?...좋아 오케이....카메라는 어때? 준비獰?....좋아 모두 오우케이군...그럼 레디이이 고우우!"

성민지는 당황했다.

(연극이라더니...이건 무슨 영화촬영장 같잖아?)

천정에 숨겨진 삼색 조명이 들어오더니 공간 가운데가 조금 더 밝아졌다.

무대 중앙에는 침대가 하나 놓여져 있었고 그 위에는 여배우로 보이는 여자가 가운을 입고 걸터 앉아 있었다.

촤르를 카메라에 필름이 빨려들어가는 소리가 났고 군데 군데 사람들의 얼굴이 드러났다.

성민지는 이 희한한 영화같은 연극의 시작을 숨을 죽이고 보고 있었다.

잠옷같은 것을 걸치고 침대에 걸터 앉은 여자의 표정은 굳어 있었고 몇초 지나자 공간 어둠 왼편으로 부터 사람이 나타나서 침대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캠프였다.

와이셔츠에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덩치좋은 캠프가 서서히 침대로 다가오더니 그 여자 옆에 걸터 앉았다.

성민지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저 둘이 주인공이구나...무슨 내용의 연극일까?)

감독이 들고 있던 플라스틱을 아래로 내리자 캠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여자쪽으로 다가가서 어깨를 잡고 자기 쪽으로 몸을 돌리게 했다.

여자의 몸이 순식간에 팩돌아가자 캠프는 여자의 뺨을 어루만지더니 키스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키스는 연극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리얼한...깊은 키스였다.

여자가 웁웁하면서 남자의 입술을 받아들이더니 급기야 입을 벌려서 혀를 꺼내서 남자의 얼굴에 부비기 시작했다.

성민지의 눈이 보름달 처럼 커지기 시작했다.

캠프는 한동안 여자와 깊은 키스를 나누더니 손을 아래로 뻗어서 여자의 가운을 젖혔고 노브래지어 차림의 여자 가슴이 그대로 조명아래 드러났다. 성민지는 자신도 모르게 두손을 입으로 가져갔고 사장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보고만 있었다.

캠프는 주저함 없이 여자의 가슴을 움켜쥐더니 입을 벌려서 빨기 시작했고 여자는 아아 으으음 하면서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사장쪽으로 다가간 성민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저게...저게...지금 뭐에요?...우리가 지금 무슨 연극을 보고 있는거에요"

사장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을 했다.

"연극이 아닙니다. 지금 캠프는 영화를 찍고 있고 우린 그 촬영장에 와 있는거에요"

"무..무슨 말이에요?..아까 분명히 연극을 보러 간다고 그랬잖아요?"

"지금 찍는 영화는 연극과 별로 다를거 없어요...재미없나요?"

"재미라뇨?...이건 무슨 영화입니까?....도대체 여기가 어딘가요?"

"촬영장입니다. 그리고 조용히 해 주세요 지금은 정숙을 해야 됩니다."

성민지는 입을 다물었고 의혹에 가득찬 눈으로 사장과 이 공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갑자기 여자의 신음이 크게 터지자 성민지가 황급히 무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성민지는 하마터면 소릴 지를 뻔 했다.

캠프가 여자를 완전히 알몸으로 만든 후에 여자의 드러난 아래도리에 입을 대고 핥기 시작했다.

성민지는 그제서야 여기가 말로만 듣던 포르노를 찍는 곳임을 깨달았고 시동생이 말했던 그 포르노를 찍겠다는 남자나 나타날거란 말이 번개같이 떠올랐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몸에 힘이 쫘악 빠져버렸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사장에게 말을 했다.

"여긴...여긴 연극하는 곳이 아니죠? 그렇죠?...여긴 바로..."

사장이 그제서야 고개를 돌리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성민지를 바라보고 입을 뗐다.

"조용히 하세요....민지씨가 짐작하고 있는 곳이 맞습니다....우린 그 현장에 와 있는 거구요"

성민지가 그제서야 목소리를 높여서 외쳤다.

"절...절 속이셨군요....전 가겠어요"

성민지가 몸을 돌렸다. 사장이 따라오지도 않고 뒤에서 중얼거렸다.

"속인것은 없습니다....성민지씨가 뭘 생각하고 두려워 하는지도 난 잘 압니다."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화가 난 표정으로돌아 보았다.

"속인게 없다구요?...연극보러 가자고 한 사람은 사장님이 아니었나요?..."

"난 여기 있는건 죄다 연극이라고 생각합니다. "

"그렇게 말을 돌리지 마세요...이제보니 바로 당신이었군요...포르노를 나에게 찍겠다고 나타날거란 그사
람이"

사장은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틀렸습니다. ...난 성민지씨를 포르노에 출연시킬 맘은 전혀 없습니다. 우린 영화촬영장에 구경온거에 불과합니다."

성민지가 외쳤다.

"거짓말 마세요....첨부터 날 속인거군요,...그렇죠? 여기에 날 유인한 후에 날 저 흑인이랑 같은 무대에 올려서 그런 난잡한 영화를 찍게 할 속셈이었잖아요?"

사장이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유인한 적은 없습니다. 성민지씨가 캠프의 요구에 응한것 뿐입니다. 난 성민지씨를 이 촬영장을 구경시키러 온것 뿐이고 당신을 출연시킬 맘은 전혀 없습니다. 내가 이 영화의 감독인가요? 나도 성민지씨처럼 구경꾼일 뿐입니다."

"거짓말...전부 거짓말..."

사장이 한숨을 쉬더니 품속에서 작은 봉투를 하나 꺼냈다. 성민지에게 다가가서 그걸 건네주면서 말을 했다.

"열어보세요...그건 카페 "크로테스"의 소유이전 문서입니다. "

그녀가 눈을 치켜뜨고 말했다.

"그런데요? 이딴걸 왜 내게 주는거죠?"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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