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 그 열기 속으로! 10부
거실로 나오자 미정이가 머리에 수건을 두른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건 사이로 보이는 젖은 머리는 물기에 젖은채 반짝거렸고, 하얀 얼굴과 목이 싱그러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뭐랄까.... 성숙한 여인의 향기와 함께 그 나이 또래의 풋풋함이 섞여서 조금 묘한느낌이었지만 어색하다는 생각보다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보고있다는 느낌이 들었던것일까...... 미정이의 눈길과 내 눈길이 마주쳤다. 조금전의 방에서의 대화가 미정이의 기억속에서 다시 떠올랐는지 약간은 얼굴을 붉혔지만 내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머뭇머뭇거리면서도 자신에게 쏟아지는 내 눈길을 온전히 받아내려는듯 했다.
"오빠, 샤워 안해?"
미정이의 눈 속을 들여다보던 난 옆에서 들려오는 미나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면서 현실로 되돌아왔다. 약간 가시돋힌듯이 들렸다면 그건 내 착각일까... ?
"응? 집에가서 하지, 뭐..."
"지금 가시게요? 그럼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머리만 말리면 되니까...."
미정이가 머리에 말았던 수건을 풀면서 같이 갈것마냥 말했다.
"응? 너도 가게? 야! 넌 그냥 집에 있어. 오빠랑 나만 가면 되니까."
"괜찮아. 가구도 온다는데 한 사람이라도 더 있으면 좋지, 뭐."
"네가 간다고해서 뭐 힘이나 쓰니? 걸리적거리기만 하지."
"뭐야, 뭐! 내가 언제 걸리적 거렸다고 그래?"
"야! 그럼 네가 가서 물건 옮기기라도 할꺼야?"
"왜 못해?"
미나와 미정이는 어느새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미나의 성격이야 어느정도는 파악했었지만, 얌전한 미정이가 언니에게 매몰차게 말대꾸하는 모습은 의외였다. 자매지간에 싸움을 안할수야 없을테지만, 싸움이 나더라도 얌전한 미정이가 물러날것이라 생각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주먹을 꽉 쥐고서 미나를 올려다보면서 말하고 있었고, 언니에게는 지지않겠다는 표정이 얼굴에 떠오르고 있었다.
더이상 놔두었다가는 별것도 아닌걸 가지고 자매지간에 싸움이 일어날것만 같았기에 끼어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만, 그만! 애들도 아니고 둘 다 왜 그러냐?"
내가 끼어들자 둘은 입을 다물었고, 말없이 상대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긴장이 둘 사이에 생겨나고 있었고, 그 사이에 끼인 나는 어색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어느 한 쪽을 편든다면 다른 한 쪽은 맘이 상할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마냥 이대로 있을수는 없었기에 적당히 둘을 타일러야만 했다.
"오늘 올라온다고 둘 다 피곤할테니 빨리 쉬어야지? 근데 나 혼자서는 집을 찾을 수가 없어. 둘 중에 누가 집을 가르쳐줘야겠는데.... 미정이 아니?"
"........"
미정이는 모르는듯했다.
"그래... 그럼 할 수 없네. 미나는 나랑 같이 가서 집 가르쳐주고, 가구 온다고 그랬으니까 좀 도와줘. 뭐 요즘은 가구점에서 배달해주면서 다 옮겨주니까 힘든 일은 없을테니까. 미정이는 다음에, 정리가 되면 오도록하고 오늘은 집에서 쉬렴. 알았지?"
내 말에 미정이는 뭔가를 대답을 하려고하다가 곧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하지만 아쉬운 마음은 어쩔수없는지 나를 처다보는 눈길에 원망이 묻어나왔다.
때때로 보이는 이런 꼬마같은 모습이 왠지 귀엽기만했다. 내가 웃어주자 미정이는 언제 아쉬웠느냐는듯이 방긋 웃어주었다. 역시... 아직은 어린 애야...
전화벨이 울린것은 그때였다.
"여보세요? 네... 예, 지금 갈께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네."
"오빠, 지금 가구 왔대. 가자."
"알았어."
가구가 도착했다는 전화였고, 전화를 받은 미나는 곧장 현관으로 나갔다. 미정이는 여전히 나를 쳐다보고있었고, 그래서 난 뭐라도 얘기를 해야만했다. 어떤 말로 미정이의 기분을 풀어줄까...
"미정이, 화 났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냥 내 눈만 들여다보고 있을뿐이었다.
"음... 좋아! 이번 주말에 나랑 데이트 할까?"
그냥 대충 던져본 말인데... 미정이의 눈이 반짝인다고 보였다.
"진짜죠, 선생님?"
"하하... 그래,그래. 그러니까 너무 섭섭해 하지마, 알았지?"
그제서야 미정이가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아! 뭐해? 빨리 와! 사람들이 기다린다잖아!"
"알았다. 갈께."
그렇게 현관을 향해 소리치고는 젖어있는 미정이의 머리를 부벼주고는 일어섰다.
원룸은 바로 길 건너였다. 신축건물인듯 깨끗했고, 빨간색 처마가 인상적인 건물이었다. 그 앞에 소형트럭이 서있었고, 가구가 실려있었다. 인부들이 차에서 내려서 기다리는걸 보더니 미나가 폴짝거리면서 뛰어갔다. 그 모습이 사내녀석 같아서 피식 웃음이 나오는건 어쩔수 없었다.
집안 사정은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미나의 부보님께서 잘 알고 계셨고, 그래서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걸 알았지만, 가구를 보니 마음이 울적해졌다. 마치... 돈에 휘둘려 내가 팔려가는것만 같은 느낌때문에...
하지만 저기서 인부들과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미나의 모습은 이런 내 기분을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인부들에게 이것저것을 지시하고 손짓하면서 목소리를 높이는 미나의 모습은 뜨거운 여름햇살 아래 한줄기 시원한 빗줄기같은 느낌을 갖게했다. 미나가 나를 처다보고는 손을 흔들었다.
"오빠! 빨리 와!"
우울한 기분을 털어버리고 미나에게 다가갔다.
4층 건물이었고, 방은 3층이었다. 4층은 제일 윗층이라 덥다고 옆에서 미나가 쫑알댄다. 그 소리를 귓가에 들으면서 계단을 올랐다.
현관문을 열자 방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입을 벌릴수밖에 없었다.
원룸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컸다. 대략 20여평정도 되지않을까 싶었다. 현관을 들어서자 왼쪽으로 욕실이 있었고, 그 욕실을 지나면 자그마한 주방이 보였다. 그리고 정면에 조금 돋아진 공간이 자리하고 있었고, 오른쪽으로 큰 창문을 통해 햇살이 쏟아져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창문 밖으로 배란다가 보였다.
뒤에 서있던 미나가 나를 툭 치고는 안으로 들어가 인부들에게 가구놓을 자리를 지시하고 있었다. 마치 소꿉장난하는 소녀가 쫑알대는것처럼... 그 모습을 보고서 조금 정신을 차릴수가 있었다.
그제서야 코로 냄새를 맡을 수가 있었다. 아무래도 도배를 새로 한 모양인지 종이냄새와 풀냄새가 났다. 파르스름한 벽지는 나름대로 잘 어울렸고, 바닥 또한 깨끗한것이 새로 깐것같았다.
침대가 들여지고, 책상과 의자, 옷장이 차례대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나는 정신없이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가구들을 배치했다. 그렇게 미나가 움직이는 동안 나는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배란다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여름의 뜨거운 공기가 확 밀려들었지만 그렇게 싫다는 생각은 들지않았다.
작은 의자와 테이블이 있었기에 거기에 앉아 담배를 빼 물었다. 그런 나를 향해서 미나가 웃어주었다. 아마도 내 기분을 알기에 조금이라도 풀어주려하는듯 했다. 그런 미나의 마음을 알고있었기에 불편한 표정을 지을 수는 없었고, 그래서 미나에게 억지로 웃어주었다.
그렇게 담배 두대를 피웠을 때였다. 옆 배란다의 창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고개를 빤히 내민채 나를 쳐다보고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로 시선을 돌리니 어떤 여자가 나를 보고있었다. 아마도 가구를 옮기느라 시끌벅적했기에 궁굼했나 보다.
"아... 저.... 조금 시끄럽죠? 미안합니다."
"아... 네.... 오늘 이사오시나 보네요. 반가워요."
여자가 샐쭉 웃으면서 천천히 나를 아래위로 살펴보고있었다. 뭐하는 인간일까 하는 호기심이 얼굴 가득했기에 나는 소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 진수 입니다. 제대한지 얼마 안되서 머리가 짧아요. 학생이구요."
"아, 그렇구나. 전 운동선수나 뭐 그런 분인줄 알았어요. 반가워요. 채윤이에요, 이 채윤."
나이는 미나보다는 한 두살 위인듯이 보였고, 나보다는 아래로 보였다. 동그란 얼굴에 자그마한 키였기에 꽤나 귀여운 인상이었다.
"어느 학교 다니세요? 저는 이화여대에요."
"그러시군요. 저는 연세대입니다. 행정학과구요."
"와아~ 가깝네요. 저는 불문학과예요. 3학년이구요. 근데 예비역같이 보이지는 않는데요? 신입생 같아요."
그렇게 말하곤 까르르 웃는 그녀가 싫지많은 않았다. 평소에 어려보인다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나빠지곤 했지만, 그녀에게는 화가 나지않았다.
"음... 조금 젊어보인다는 소리를 듣긴하죠. 그래도 국방부에서 발행한 전역증은 있답니다."
그녀, 채윤의 웃음이 나에게도 전염된것일까... 나도 모르게 웃음을 띈 채 채윤에게 농담처럼 가볍게 얘기를 건넸다.
"몇학년에 복학하세요?"
"2학년입니다. 1학년 마치고 입대했었거든요."
"헤에~ 내가 3학년이니까, 내가 선배네요."
"하하하, 그런 말이 어딨어요? 어디까지나 학번이 우선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채윤과 나는 누가 먼저라고 할것없이 웃었다.
채윤은 미나보다 한 살이 많았고, 고향은 서울이었지만 집이 멀어서 방을 얻어 나왔다고 했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맑고 큰 눈이 시원스러운 인상이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재치있는 말솜씨때문에 활발하게 보였다. 첫인상이 나쁘지않았기에 안심했다.
"이전에 있던 사람이 아주 인상이 고약한 사람이어서 싫었는데 다행이네요."
"하하하, 제 인상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닌데 그 사람이 지독했나 봅니다. 인사치레라도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분이 좋군요."
"어머머... 인사치레가 아닌데... "
동그랗게 입을 오므리고는 나를 빤히 바라보는 채윤의 모습이 귀여웠다.
"귀여워 보인다는 소리 안 들어요? 아가씨가 많을것 같은데..."
"어이구... 무슨 그런 말씀을... 예비역이 인기있다는 소린 들은적 없는데요."
"에~ 얘기를 들었으니까 그런가보다 하지만, 얼핏보기에는 예비역으로 안 보여요."
"하하하"
"호호호"
그렇게 우리 둘이 웃으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있을 때 미나가 다가왔다.
"오빠, 여기서 뭐 해?"
다가온 미나를 보자 채윤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리고는 약간의 의아스러움이 묻어나왔다. 이대로 있었다간 오해를 살것만 같았기에 서둘러 미나를 소개했다.
"아, 이쪽은... 동생입니다. 미나야, 이 분은 이 채윤씨."
미나를 뭐라고 소개해야할지 몰라서 조금 망설였지만, 동생이라고 말하는 것이 틀린것은 아니었기에 그렇게 둘러댔다. 이런 내 소개에 채윤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지만 그런대로 수긍하는 눈치였다.
"안녕하세요, 박 미나예요."
"안녕하세요, 이 채윤이예요."
미나와 채윤의 눈길이 서로 부딛혔다가 엇갈렸다. 그리고는 한동안 둘다 말이없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뭐라고 딱히 꼬집어서 말할수없는 그런 어색함 속에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나였기에 뭐라고 말을 터야만 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채윤씨가 미나 선배되시네요. 미나도 같은 학교 다니거든요."
그제서야 두 사람의 대화가 다시 이어졌지만, 그것도 그렇게 오래는 계속되지않았다. 뒤에서 계속 가구가 들어왔고, 인부들이 미나을 찾았기에 미나는 다시 방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배란다 문을 열고서 들어가던 미나는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지만, 채윤과 눈을 마주치고는 아무 말도 없이 들어갔다.
"애인인가 봐요?"
미나의 표정이 심상찮았기에 왜 그럴까하고 생각하던 참에 채윤의 말을 듣고서 화들짝 놀랐다.
"예? 아니에요, 애인은 무슨... 그냥 아는 동생이에요."
"그냥 동생이 이사오는데 와서 저렇게 가구배치하는 것도 도와주고 그래요?"
"쩝... 뭐..."
굳이 채윤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렇다고해서 이상한 오해는 받고싶지않았기에 대충대충 설명을 해 주었다. 하지만 내 설명에도 불구하고 채윤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나를 뻔히 쳐다보았다.
"뭐, 제가 상관할건 없지만... 아무튼 밤에는 좀 조용했으면 좋겠네요."
"예?... 무슨....?"
"그럼 다음에 식사라도 같이 해요, 이웃이 된 기념으로."
"아... 예..."
그렇게 말하고는 채윤은 들어가버렸다. 채윤이 내뱉은 말이 모호했지만 깊게 생각하지않았고, 그저 조용히했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다시 한 대의 담배를 피고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땐 이미 가구가 다 들어와 있었고, 인부들이 막 나가고 있었다. 미나가 인부들을 향해 수고했다고 말하는 소리가 현관에서 들려왔고, 곧이어 미나가 들어왔다.
"후아... 덥네. 오빠, 덥지? 에어콘 켜야지."
에어콘까지 있었다. 배란다 쪽에 서있던 에어콘으로 가서 미나가 스위치를 켜자 시원한 바람이 방의 열기를 식히기 시작했다.
거실로 나오자 미정이가 머리에 수건을 두른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건 사이로 보이는 젖은 머리는 물기에 젖은채 반짝거렸고, 하얀 얼굴과 목이 싱그러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뭐랄까.... 성숙한 여인의 향기와 함께 그 나이 또래의 풋풋함이 섞여서 조금 묘한느낌이었지만 어색하다는 생각보다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보고있다는 느낌이 들었던것일까...... 미정이의 눈길과 내 눈길이 마주쳤다. 조금전의 방에서의 대화가 미정이의 기억속에서 다시 떠올랐는지 약간은 얼굴을 붉혔지만 내 눈을 피하지는 않았다. 머뭇머뭇거리면서도 자신에게 쏟아지는 내 눈길을 온전히 받아내려는듯 했다.
"오빠, 샤워 안해?"
미정이의 눈 속을 들여다보던 난 옆에서 들려오는 미나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면서 현실로 되돌아왔다. 약간 가시돋힌듯이 들렸다면 그건 내 착각일까... ?
"응? 집에가서 하지, 뭐..."
"지금 가시게요? 그럼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머리만 말리면 되니까...."
미정이가 머리에 말았던 수건을 풀면서 같이 갈것마냥 말했다.
"응? 너도 가게? 야! 넌 그냥 집에 있어. 오빠랑 나만 가면 되니까."
"괜찮아. 가구도 온다는데 한 사람이라도 더 있으면 좋지, 뭐."
"네가 간다고해서 뭐 힘이나 쓰니? 걸리적거리기만 하지."
"뭐야, 뭐! 내가 언제 걸리적 거렸다고 그래?"
"야! 그럼 네가 가서 물건 옮기기라도 할꺼야?"
"왜 못해?"
미나와 미정이는 어느새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미나의 성격이야 어느정도는 파악했었지만, 얌전한 미정이가 언니에게 매몰차게 말대꾸하는 모습은 의외였다. 자매지간에 싸움을 안할수야 없을테지만, 싸움이 나더라도 얌전한 미정이가 물러날것이라 생각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주먹을 꽉 쥐고서 미나를 올려다보면서 말하고 있었고, 언니에게는 지지않겠다는 표정이 얼굴에 떠오르고 있었다.
더이상 놔두었다가는 별것도 아닌걸 가지고 자매지간에 싸움이 일어날것만 같았기에 끼어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만, 그만! 애들도 아니고 둘 다 왜 그러냐?"
내가 끼어들자 둘은 입을 다물었고, 말없이 상대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긴장이 둘 사이에 생겨나고 있었고, 그 사이에 끼인 나는 어색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어느 한 쪽을 편든다면 다른 한 쪽은 맘이 상할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마냥 이대로 있을수는 없었기에 적당히 둘을 타일러야만 했다.
"오늘 올라온다고 둘 다 피곤할테니 빨리 쉬어야지? 근데 나 혼자서는 집을 찾을 수가 없어. 둘 중에 누가 집을 가르쳐줘야겠는데.... 미정이 아니?"
"........"
미정이는 모르는듯했다.
"그래... 그럼 할 수 없네. 미나는 나랑 같이 가서 집 가르쳐주고, 가구 온다고 그랬으니까 좀 도와줘. 뭐 요즘은 가구점에서 배달해주면서 다 옮겨주니까 힘든 일은 없을테니까. 미정이는 다음에, 정리가 되면 오도록하고 오늘은 집에서 쉬렴. 알았지?"
내 말에 미정이는 뭔가를 대답을 하려고하다가 곧 입을 다물고 말았다. 하지만 아쉬운 마음은 어쩔수없는지 나를 처다보는 눈길에 원망이 묻어나왔다.
때때로 보이는 이런 꼬마같은 모습이 왠지 귀엽기만했다. 내가 웃어주자 미정이는 언제 아쉬웠느냐는듯이 방긋 웃어주었다. 역시... 아직은 어린 애야...
전화벨이 울린것은 그때였다.
"여보세요? 네... 예, 지금 갈께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네."
"오빠, 지금 가구 왔대. 가자."
"알았어."
가구가 도착했다는 전화였고, 전화를 받은 미나는 곧장 현관으로 나갔다. 미정이는 여전히 나를 쳐다보고있었고, 그래서 난 뭐라도 얘기를 해야만했다. 어떤 말로 미정이의 기분을 풀어줄까...
"미정이, 화 났니?"
아무 말이 없었다. 그냥 내 눈만 들여다보고 있을뿐이었다.
"음... 좋아! 이번 주말에 나랑 데이트 할까?"
그냥 대충 던져본 말인데... 미정이의 눈이 반짝인다고 보였다.
"진짜죠, 선생님?"
"하하... 그래,그래. 그러니까 너무 섭섭해 하지마, 알았지?"
그제서야 미정이가 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아! 뭐해? 빨리 와! 사람들이 기다린다잖아!"
"알았다. 갈께."
그렇게 현관을 향해 소리치고는 젖어있는 미정이의 머리를 부벼주고는 일어섰다.
원룸은 바로 길 건너였다. 신축건물인듯 깨끗했고, 빨간색 처마가 인상적인 건물이었다. 그 앞에 소형트럭이 서있었고, 가구가 실려있었다. 인부들이 차에서 내려서 기다리는걸 보더니 미나가 폴짝거리면서 뛰어갔다. 그 모습이 사내녀석 같아서 피식 웃음이 나오는건 어쩔수 없었다.
집안 사정은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미나의 부보님께서 잘 알고 계셨고, 그래서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걸 알았지만, 가구를 보니 마음이 울적해졌다. 마치... 돈에 휘둘려 내가 팔려가는것만 같은 느낌때문에...
하지만 저기서 인부들과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미나의 모습은 이런 내 기분을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인부들에게 이것저것을 지시하고 손짓하면서 목소리를 높이는 미나의 모습은 뜨거운 여름햇살 아래 한줄기 시원한 빗줄기같은 느낌을 갖게했다. 미나가 나를 처다보고는 손을 흔들었다.
"오빠! 빨리 와!"
우울한 기분을 털어버리고 미나에게 다가갔다.
4층 건물이었고, 방은 3층이었다. 4층은 제일 윗층이라 덥다고 옆에서 미나가 쫑알댄다. 그 소리를 귓가에 들으면서 계단을 올랐다.
현관문을 열자 방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입을 벌릴수밖에 없었다.
원룸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컸다. 대략 20여평정도 되지않을까 싶었다. 현관을 들어서자 왼쪽으로 욕실이 있었고, 그 욕실을 지나면 자그마한 주방이 보였다. 그리고 정면에 조금 돋아진 공간이 자리하고 있었고, 오른쪽으로 큰 창문을 통해 햇살이 쏟아져들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창문 밖으로 배란다가 보였다.
뒤에 서있던 미나가 나를 툭 치고는 안으로 들어가 인부들에게 가구놓을 자리를 지시하고 있었다. 마치 소꿉장난하는 소녀가 쫑알대는것처럼... 그 모습을 보고서 조금 정신을 차릴수가 있었다.
그제서야 코로 냄새를 맡을 수가 있었다. 아무래도 도배를 새로 한 모양인지 종이냄새와 풀냄새가 났다. 파르스름한 벽지는 나름대로 잘 어울렸고, 바닥 또한 깨끗한것이 새로 깐것같았다.
침대가 들여지고, 책상과 의자, 옷장이 차례대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나는 정신없이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가구들을 배치했다. 그렇게 미나가 움직이는 동안 나는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배란다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여름의 뜨거운 공기가 확 밀려들었지만 그렇게 싫다는 생각은 들지않았다.
작은 의자와 테이블이 있었기에 거기에 앉아 담배를 빼 물었다. 그런 나를 향해서 미나가 웃어주었다. 아마도 내 기분을 알기에 조금이라도 풀어주려하는듯 했다. 그런 미나의 마음을 알고있었기에 불편한 표정을 지을 수는 없었고, 그래서 미나에게 억지로 웃어주었다.
그렇게 담배 두대를 피웠을 때였다. 옆 배란다의 창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고개를 빤히 내민채 나를 쳐다보고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로 시선을 돌리니 어떤 여자가 나를 보고있었다. 아마도 가구를 옮기느라 시끌벅적했기에 궁굼했나 보다.
"아... 저.... 조금 시끄럽죠? 미안합니다."
"아... 네.... 오늘 이사오시나 보네요. 반가워요."
여자가 샐쭉 웃으면서 천천히 나를 아래위로 살펴보고있었다. 뭐하는 인간일까 하는 호기심이 얼굴 가득했기에 나는 소개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 진수 입니다. 제대한지 얼마 안되서 머리가 짧아요. 학생이구요."
"아, 그렇구나. 전 운동선수나 뭐 그런 분인줄 알았어요. 반가워요. 채윤이에요, 이 채윤."
나이는 미나보다는 한 두살 위인듯이 보였고, 나보다는 아래로 보였다. 동그란 얼굴에 자그마한 키였기에 꽤나 귀여운 인상이었다.
"어느 학교 다니세요? 저는 이화여대에요."
"그러시군요. 저는 연세대입니다. 행정학과구요."
"와아~ 가깝네요. 저는 불문학과예요. 3학년이구요. 근데 예비역같이 보이지는 않는데요? 신입생 같아요."
그렇게 말하곤 까르르 웃는 그녀가 싫지많은 않았다. 평소에 어려보인다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나빠지곤 했지만, 그녀에게는 화가 나지않았다.
"음... 조금 젊어보인다는 소리를 듣긴하죠. 그래도 국방부에서 발행한 전역증은 있답니다."
그녀, 채윤의 웃음이 나에게도 전염된것일까... 나도 모르게 웃음을 띈 채 채윤에게 농담처럼 가볍게 얘기를 건넸다.
"몇학년에 복학하세요?"
"2학년입니다. 1학년 마치고 입대했었거든요."
"헤에~ 내가 3학년이니까, 내가 선배네요."
"하하하, 그런 말이 어딨어요? 어디까지나 학번이 우선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채윤과 나는 누가 먼저라고 할것없이 웃었다.
채윤은 미나보다 한 살이 많았고, 고향은 서울이었지만 집이 멀어서 방을 얻어 나왔다고 했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맑고 큰 눈이 시원스러운 인상이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재치있는 말솜씨때문에 활발하게 보였다. 첫인상이 나쁘지않았기에 안심했다.
"이전에 있던 사람이 아주 인상이 고약한 사람이어서 싫었는데 다행이네요."
"하하하, 제 인상도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닌데 그 사람이 지독했나 봅니다. 인사치레라도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분이 좋군요."
"어머머... 인사치레가 아닌데... "
동그랗게 입을 오므리고는 나를 빤히 바라보는 채윤의 모습이 귀여웠다.
"귀여워 보인다는 소리 안 들어요? 아가씨가 많을것 같은데..."
"어이구... 무슨 그런 말씀을... 예비역이 인기있다는 소린 들은적 없는데요."
"에~ 얘기를 들었으니까 그런가보다 하지만, 얼핏보기에는 예비역으로 안 보여요."
"하하하"
"호호호"
그렇게 우리 둘이 웃으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있을 때 미나가 다가왔다.
"오빠, 여기서 뭐 해?"
다가온 미나를 보자 채윤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리고는 약간의 의아스러움이 묻어나왔다. 이대로 있었다간 오해를 살것만 같았기에 서둘러 미나를 소개했다.
"아, 이쪽은... 동생입니다. 미나야, 이 분은 이 채윤씨."
미나를 뭐라고 소개해야할지 몰라서 조금 망설였지만, 동생이라고 말하는 것이 틀린것은 아니었기에 그렇게 둘러댔다. 이런 내 소개에 채윤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지만 그런대로 수긍하는 눈치였다.
"안녕하세요, 박 미나예요."
"안녕하세요, 이 채윤이예요."
미나와 채윤의 눈길이 서로 부딛혔다가 엇갈렸다. 그리고는 한동안 둘다 말이없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뭐라고 딱히 꼬집어서 말할수없는 그런 어색함 속에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나였기에 뭐라고 말을 터야만 했다.
"아! 그러고 보니까 채윤씨가 미나 선배되시네요. 미나도 같은 학교 다니거든요."
그제서야 두 사람의 대화가 다시 이어졌지만, 그것도 그렇게 오래는 계속되지않았다. 뒤에서 계속 가구가 들어왔고, 인부들이 미나을 찾았기에 미나는 다시 방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배란다 문을 열고서 들어가던 미나는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지만, 채윤과 눈을 마주치고는 아무 말도 없이 들어갔다.
"애인인가 봐요?"
미나의 표정이 심상찮았기에 왜 그럴까하고 생각하던 참에 채윤의 말을 듣고서 화들짝 놀랐다.
"예? 아니에요, 애인은 무슨... 그냥 아는 동생이에요."
"그냥 동생이 이사오는데 와서 저렇게 가구배치하는 것도 도와주고 그래요?"
"쩝... 뭐..."
굳이 채윤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렇다고해서 이상한 오해는 받고싶지않았기에 대충대충 설명을 해 주었다. 하지만 내 설명에도 불구하고 채윤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는 나를 뻔히 쳐다보았다.
"뭐, 제가 상관할건 없지만... 아무튼 밤에는 좀 조용했으면 좋겠네요."
"예?... 무슨....?"
"그럼 다음에 식사라도 같이 해요, 이웃이 된 기념으로."
"아... 예..."
그렇게 말하고는 채윤은 들어가버렸다. 채윤이 내뱉은 말이 모호했지만 깊게 생각하지않았고, 그저 조용히했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다시 한 대의 담배를 피고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땐 이미 가구가 다 들어와 있었고, 인부들이 막 나가고 있었다. 미나가 인부들을 향해 수고했다고 말하는 소리가 현관에서 들려왔고, 곧이어 미나가 들어왔다.
"후아... 덥네. 오빠, 덥지? 에어콘 켜야지."
에어콘까지 있었다. 배란다 쪽에 서있던 에어콘으로 가서 미나가 스위치를 켜자 시원한 바람이 방의 열기를 식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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